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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20:19:04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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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배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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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의 실제 내부 모습

1. 개요2. 상세3. 부장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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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이집트 파라오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 수많은 파라오의 무덤들 중 유일하게 도굴당하지 않은 무덤이다. 그 투탕카멘의 무덤마저도 고대에 이미 소규모로 몇 차례 털린 적이 있지만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은 한 번도 도굴당한 적이 없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일강 하류 침수가 잘되는 삼각주에 지어진 탓에 수 천년 동안 물이 차고 빠지는 것을 반복하다보니 목재 부장품들은 모두 썩어서 소실되었고, 벽화의 색도 빠져버렸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환경 덕분에 도굴되지 않았다.

부장품도 무덤도 투탕카멘에 비해 상대적으로 빈약하고, 발견된 시기가 제2차 세계 대전 직전이었기 때문에 대중적인 인지도는 투탕카멘에 비하면 지극히 초라한 수준이다.

고고학계에서는 NRT III 무덤이라고 부른다.

2. 상세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은 1939년 프랑스의 고고학자 피에르 몽테(Pierre Montet)가 발견했다. 원래는 10야드 정도 떨어진 다른 무덤을 발굴하다가 정말 우연히 무덤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단 한번도 도굴당하지 않은 무덤이었기에 상당한 주목을 받을 수 있었으나, 그 무렵 제2차 세계 대전의 전운이 고조되고 있었다. 때문에 전쟁에 대한 우려가 전 세계에 퍼졌고, 이런 고고학적 발견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거의 드물었다. 피에르 몽테는 이 무덤에서 으로 만든 파라오의 관과 그의 미라를 발굴했다. 하지만 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몽테는 가족들을 돕기 위해 1940년 급하게 프랑스로 돌아갔고, 그가 발굴한 유물들은 모두 카이로 박물관으로 옮겨졌다.[1] 그 이래로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현재까지 카이로 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다.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에는 프수센네스 1세 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명의 파라오들이 함께 안장되어 있었다. 원래 다른 파라오들은 각자 별개의 무덤이 있었지만 이 묘들이 전부 침수해버리자 신관들은 어쩔 수 없이 그나마 온전했던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에 합장하도록 했다. 이 무덤을 처음 발굴할 당시 프수센네스 1세, 아메네모페, 셰숑크 2세의 미라가 함께 발견되었다. 그 외에도 시아문, 프수센네스 2세의 이름이 적힌 샤브티가 출토되었지만 미라와 관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무덤의 환경이 매우 좋지 못했던 데다가 목재관을 썼기 때문에 오랜 세월이 흐르며 다 썩어서 없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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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내 배치도를 보면 당시 어떻게 파라오들의 미라가 안치되었는지 알 수 있다. 붉은색으로 표시된 묘실에 프수센네스 1세의 미라가 안치되어 있고, 그 바로 옆에 프수센네스 1세의 아들이자 후계 파라오였던 아메네모페의 미라가 있다. 그리고 묘실 앞의 전실에는 원래 셰숑크 2세, 프수센네스 2세, 시아문 이렇게 총 3명이나 되는 파라오들의 미라가 있었다. 허나 이 셋들 중에 셰숑크 2세의 것만 현대까지 남았고, 시아문과 프수센네스 2세의 미라와 관은 흔적도 없다. 옆에 묻힌 시신들은 프수센네스 1세 휘하의 장군들인데, 그중 안케펜무트는 프수센네스 1세가 가장 총애하던 장군들 중 하나였다.

프수센네스 1세의 관은 맨 바깥쪽의 화강암 관, 그 안의 사람 모양의 회색 화강암 관, 그 안의 은제 관 순으로 안치되어 있었다. 가장 바깥쪽의 거대한 석관은 화강암을 깎아만들었고 뚜껑에 파라오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새겨놓았다. 사실 이 관은 선대 파라오들 중 하나인 메르넵타[2]의 관인데, 제21왕조 시기에는 이집트의 국력이 쇠퇴해가는 시대라 국가 주도로 옛 파라오들의 무덤을 털어서 부장품이나 관을 재활용하던 경우가 흔했기 때문이다. 그외에 독특한 점이라면 파라오의 머리 부분에 여신 누트가 손을 뻗어 축복을 내리는 듯한 자세로 새겨놓았다는 것이며, 그리고 파라오의 형상 옆에는 히에로글리프가 줄을 맞추어 새겨졌다.
파일:99a0bb2a4ea14d389e38a09a52f6a46e.jpg 파일:tumblr_7d5e9fb2f151cae7063d24433730a175_aaf97021_500.jpg
두 번째 화강암 석관 마지막 은제 관

맨 바깥 관을 열면 그 안에 검은색 화강암을 깎아 만든 두 번째 석관이 있었다. 첫 번째 석관과는 달리 인물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 석관을 열면 가장 안쪽 으로 만든 관이 나왔다. 투탕카멘의 관에 비하면 훨씬 초라한 모습이지만 혼란기 시절의 파라오 중에서는 융숭한 대접을 받은 편이며, 이보다 더 안좋은 석관에 묻히는 경우가 많았다. 오히려 고대 이집트에서는 은이 금보다 더 귀하게 여겨진 경우도 있었기에[3] 비싼 은으로 관을 만들었다는 건 프수센네스 1세의 왕권이 다른 파라오들에 비해 강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4]

은관 안에는 원래 프수센네스 1세의 미라가 안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보존 환경이 좋지 않았던 탓에 피에르 몽테가 관뚜껑을 열었을 때에는 이미 미라가 삭아 없어져 뼈무더기와 회색 먼지가루만 가득했다고 전해진다. 미라 외에도 유기물인 나무로 만들어진 유물도 전부 소실되었지만 금속으로 만들어진 프수센네스 1세의 황금 마스크와 금 목걸이, 그리고 몇몇 장신구들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파라오의 관 옆에는 도자기와 청동, 청금석으로 만든 샤브티 무더기와 각종 화려한 보석, 금제 보물이 널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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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네모페의 안쪽관 아메네모페의 데스마스크 아메네모페의 황금마스크[5]

프수센네스 1세의 관 옆에는 아들이자 후대 파라오 아메네모페와 셰숑크 2세의 관이 안치되어 있었다. 아메네모페의 경우 원래는 아버지의 무덤 바로 옆에 별도의 무덤에 묻혔지만 무덤이 침수되면서 아버지의 묘에 합장되었다. 그의 미라는 금박을 입힌 2겹의 목재 관에 금박을 씌운 마스크 2개를 쓴 채로 안치되어 있었다. 파라오의 관임에도 대귀족의 관에 더 가까울 정도로 격이 낮아진 모습이다. 금박 입힌 목재 데스마스크 역시 아버지 프수센네스 1세의 것보다 하락한 세공도를 하고 있다. 참고로 마스크는 원래 저정도로 비대칭은 아니었는데, 시간이 몇천년이나 흐르면서 나무가 뒤틀려 변형이 생겼다.

부왕 프수센네스 1세가 은을 녹여 만든 관에 황금 마스크를 쓴 채로 안치된 것을 생각하면 아버지보다 장례용품의 질이 확연하게 열악했다. 아메네모페가 재위 기간 10년 남짓의 권력도 없던 파라오라는 점이 컸다. 그의 관 속에는 그의 미라와 함께 목걸이, 팔찌, 반지와 칠보 칼라 등의 유물이 부장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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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숑크 2세의 은제 관 셰숑크 2세의 황금마스크[6]

발견당시 셰숑크 2세[7]의 은제 관은 묘실 앞 전실에 놓여있었다. 독특하게도 인간의 형상이 아니라 왕권의 신 호루스의 머리를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셰숑크 2세의 관도 마찬가지로 원래 안치되었던 무덤이 침수되자 신관들이 옮긴 것으로 관의 열악한 보존상태나 곳곳에 간 실금으로 봐서 신관들이 무성의하게 옮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관 아래에는 식물이 자라났던 흔적이 있는데, 직전까지 식물이 무성하게 관을 뒤덮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여담으로 이 셰숑크 2세의 관을 여는 개봉식에는 당시 이집트의 국왕이었던 파루크 1세가 친견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관속에는 미라가 아닌 셰숑크 2세의 유골과 황금 마스크 등만 남아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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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수센네스 1세의 유골 프수센네스 1세의 관을 들여다보는 피에르 몽테

가장 중요한 미라의 경우 단 한 구도 원형을 보존하고 있지 않다. 프수센네스 2세, 시아문의 미라는 아예 떠내려가 소실되었으며, 관에 안치된 프수센네스 1세, 아메네모페, 셰숑크 2세의 미라는 뼈만 남았다. 프수센네스 1세의 미라를 조사해본 결과 사망 당시 그가 이미 상당한 고령이었으며, 극심한 충치에 시달렸다고 한다. 게다가 입천장에는 심한 농양이 있어 구멍이 뚫렸고, 몸 전체에 관절염이 퍼져 있는 것으로 보아 꽤나 말년에 고통스럽게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위생 상태나 의료 기술이 지금처럼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파라오조차 말년에는 온갖 잔병치레를 앓았다.[8] 아메네모페의 유골도 조사하여 그 역시 아버지를 닮아 장수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살아있을 당시에는 상당히 건장한 남성이었고, 두개골에 생긴 감염으로 인한 뇌수막염으로 사망한 걸로 추정된다. 셰숑크 2세의 경우 머리 부상으로 인한 폐혈증 감염이 사인일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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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케펜무트의 관 웬제바우엔제드의 마스크

그 외에 프수센네스 1세가 거느렸던 신하들의 미라도 출토되었지만 파라오가 아닌 만큼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안케펜무트는 생전에 이집트의 장군이었으며 그의 미라의 경우 내장을 카노푸스 단지에 따로 보관하지 않고, 그대로 제자리에 놔둔 채로 아마포 붕대를 감아 미라를 제작했다.[9] 오른쪽 발가락이 미라 제작 과정에서 사라져 황금으로 만든 발가락 모형을 붙였고, 왼쪽보다 오른쪽 팔과 어깨가 훨씬 발달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오른손잡이라 오른손으로 무기를 휘두르다보니 오른팔이 훨씬 발달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향년 약 50세 정도로 자연사한 것으로 추측된다.

안케펜무트 옆에 묻힌 사람은 '웬제바우엔제드'라는 고위 관리이다. 왕자(Iry-pat), 하티아(Haty-a)[10], 하이집트 왕의 인장 보관자, 신의 아버지, 장군이자 군지도자, 콘수의 고위 집사(후에 고위 사제로 바뀌었다) '멘데스의 군주 오시리스신'의 사제, 모든 신들의 예언자 감독관, 유일한 친구의 감독관이라는 여러 중요한 직함을 가졌다. 이렇게 중요한 직책을 여러 개 맡고 있었기 때문에 왕실 출신이 아님에도 왕실 무덤에 같이 안장되는 대단한 영예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미라를 분석한 결과 웬제바우엔제드의 항년도 50세 언저리로 추정되며, 누비아 혈통을 이어받았다고 한다. 참고로 그가 안치된 화강암제 석관은 원래 제19왕조 시기 아문의 3급 신관인 아멘호테프의 것이었으나 재활용한 것이다. 외부는 얇게 편 금제 나뭇잎으로 장식되었으며, 그 안에는 금도금한 목재 석관이, 다시 그 안에도 은제 관이 있는 삼중관인데 보존상태는 좋지 않다. 은제 관 안의 미라는 황금 마스크를 씌웠고 펜던트, 반지, 팔찌, 황금으로 만든 작은 석상 같은 부장품도 함께 발견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섬세하게 만든 금은제 컵 3개, 라피스 라줄리로 만든 양의 형상을 취한 아문 신상이 유명하다.

3. 부장품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에서는 수 백점에 달하는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목제 부장품들의 경우 모두 썩어서 사라졌지만 썩지 않는 금속제 유물들과 보석류들은 모두 보존되어 있어서 그 양이 상당히 많다. 본 항목에서는 대표적인 부장품들만 설명한다.
사진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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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수센네스 1세의 가면
프수센네스 1세의 얼굴을 덮고 있던 데스마스크다. 통째로 순금을 녹여서 만들었다. 다만 유명한 투탕카멘의 가면과 비교하면 그 질과 정교함이 확연히 떨어지는 걸 볼 수 있다. 프수센네스 1세가 최고 전성기인 신왕국 시대가 끝나고 들어선 혼란기의 이집트를 통치했던 파라오였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국력과 함께 공예 기술도 함께 쇠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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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목걸이
프수센네스 1세의 부장품들 중 가장 대표적인 것들 중 하나다. 황금으로 만든 정교한 목걸이인데, 아마 남쪽의 누비아 문화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는 목걸이 끝의 술에 황금으로 만든 꽃 장식이 달려있었지만 현재는 사라졌다. 현재는 카이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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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손발가락 보호대
미라의 손발가락에 끼워져 있던 보호대다. 미라는 제작 과정에서 손상되기 쉬운 끝부분이 뭉그러지는 경우가 있어서 보호를 위해 사진처럼 금으로 만든 보호대를 끼웠다. 그 유명한 투탕카멘의 미라 역시 이 보호대를 착용하고 있었다. 다만 프수센네스 1세의 손발가락 보호대가 투탕카멘의 보호대보다 훨씬 보존 상태가 뛰어나다. 잘 보면 손톱발톱의 모습까지 그대로 옮겨놓아 정교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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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브티
내세에서 프수센네스 1세를 보좌할 샤브티들이다. 청동과 도자기, 청금석 등으로 만들어졌고 발견 당시에는 묘실 한구석에 어질러진 채로 무더기로 쌓여있었다. 수는 몇 십여개에 달한다. 도자기로 만들어진 샤브티들은 보존 상태가 양호하지만 청동으로 만든 것들은 물과 닿아서 보존 상태가 썩 좋지 않다. 옆의 샤브티는 푸른 안료를 칠한 도자기 샤브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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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리 목걸이
프수센네스 1세의 미라가 착용하고 있던 금제 목걸이다. 다만 미라가 가루가 되어 바스러진 탓에 발견 당시에는 가루들 사이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원래는 저 칸마다 금조각을 하나하나 박아넣어 만들어진 굉장히 정교한 목걸이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박혀있던 금조각들이 다수 빠졌다. 다만 그 아름다움은 여전해서 프수센네스 1세의 대표적인 부장품들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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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금석 목걸이
프수센네스 1세가 사용하던 청금석 목걸이다. 두 줄로 꿰인 청금석 구슬들로 만들었고 중간의 구슬 2개는 순금으로 만들었다. 맨 끝의 황금 걸쇠 부분에는 프수센네스 1세의 왕명이 새겨져 있고 구슬들 중 하나에는 설형문자로 세 줄의 텍스트가 새겨졌는데 그 의미는 아직까지 해독된 바가 없다. 당시 고대 이집트인들이 청금석을 굉장히 귀중한 광물로 취급했던 걸 생각하면 그 역사적 가치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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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팔찌
황금으로 만든 팔찌. 고대 이집트에서 스카라베를 부활의 상징으로 여겼다. 그 투탕카멘의 무덤에서도 가벼운 보석류의 경우 이미 도굴꾼들이 훔쳐간 경우가 많아 팔찌가 많이 출토되지 않았는데,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에서는 황금으로 제작한 팔찌가 발견되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손이 닿던 부분이 닳아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프수센네스 1세가 생전에 착용하던 팔찌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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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펜던트
황금으로 만든 펜던트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펜던트를 만들어 허리띠나 목에 걸고 다니는 경우가 흔했다. 해당 펜던트는 하늘의 여신 누트를 새겨놓은 펜던트인데, 누트의 파란 피부색을 아름다운 옅은 하늘색 청금석으로 표현해서 예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프수센네스 1세의 부장품들 가운데 가장 상징적인 유물들 중 하나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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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팔찌
위의 것과 마찬가지로 황금으로 만든 팔찌다. 차이점이라면 이 팔찌는 상감해서 만든 상대적으로 단순한 모습의 팔찌라는 것.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에서 출토된 다른 유물들에 비해서 딱히 유명한 편은 아니지만 예술적, 고고학적 가치는 높은 유물들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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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컵
황금으로 만들어 정교하게 상감 장식을 넣은 이다. 사진을 보면 의아하겠지만 오목한 컵을 바로 위에서 내려다보며 찍은 사진이다. 사실 프수센네스 1세의 부장품은 아니고 그와 함께 묻힌 장군 웬제바우엔제드의 부장품이다. 프수센네스 1세를 제외한 다른 미라들의 소유인 부장품들 가운데에서 독보적으로 예술성이 뛰어나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을 소개할 때 항상 등장하는 아이템이기도 하다.


[1] 몽테는 전쟁에서 살아남아 1946년에 이집트로 돌아왔다. 이후 프수센네스 1세 휘하 장군의 묘도 발굴했고, 유명한 이집트학자이자 교수로 살다가 1966년 6월 파리에서 사망했다. [2] 람세스 2세의 아들이자 후계자다. [3] 이집트에서는 금이 엄청나게 생산되었지만, 반대로 은 나지 않아서 수입해야했다. 그러니 당연히 비쌀 수 밖에 없었다. [4] 하지만 이 은제 관도 공예의 수준이나 화려함, 정교함을 전체적으로 따져봤을때 투탕카멘의 황금관에는 훨씬 못미친다. 투탕카멘의 황금관은 110.4kg의 순금을 통째로 녹여만든 3겹의 화려한 관으로 색유리와 준보석들을 촘촘히 박아넣었다. 허나 프수센네스 1세의 은관은 특출난 상감 장식도 없고 그 정교성도 확연히 떨어진다. [5] 아메네모페의 관에서는 황금마스크가 2개 출토되었다. [6] 원래 머리 장식도 있었으나 썩어서 없어졌다. [7] 관련 기록이 적어 셰숑크 2세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많지 않다. [8] 이집트 파라오의 대명사 람세스 2세 역시 90세 넘게 장수했지만 말년에는 충치, 관절염 등 온갖 질병으로 고생했다. [9] 제3중간기 들어 미라 제작 기술이 발달해서 생긴 변화다. 그래서 카노푸스 단지의 원래 용도는 없어졌지만 관습적으로 남아 빈 단지를 시신과 같이 매장하게 바뀌었다. [10] 한 지역의 지배자나 시장, 주지사등에게 수여된 직함으로 통일된 번역이 없어 로마자로 표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