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 제4왕조 제4대 파라오
카프레 Khaf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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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레의 조각상[1] | ||
<colbgcolor=#decd87><colcolor=#A0522D> 이름 | 카프레(Khafre) | |
출생 | 미상 | |
사망 | 미상 | |
재위 기간 | 이집트 파라오 | |
기원전 2570년 경 (약 26년[2]) | ||
전임자 | 제데프레 | |
후임자 | 비케리스 | |
부모 | 아버지 : 쿠푸 | |
배우자 | 메레산크 3세, 카메레넵티 1세, 페르세네트, 헤케누헤제트 | |
무덤 | 카프레의 피라미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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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집트 고왕국 제4왕조의 4대 파라오. 기자에 소재한 3개의 피라미드 중 가장 눈에 띄는 ' 카프레의 피라미드'와 기자의 대스핑크스의 주인공이다.2. 통치
카프레는 고왕국 시대의 제4왕조의 4대 파라오로, 쿠푸의 아들이자 제데프레의 후임 파라오이다. 그의 재위기간은 66년설[3]도 있고 여러가지 설들이 있다. 24년에서 26년이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24년이나 26년 정도 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더 학계의 주류인 상황. 카프레의 정확한 재위 연도에 대해서는 아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카프레가 워낙 옛날 사람이어서 해당 기록이나 재위 기간을 추측키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다만 일부 학자들이 네쿠레 왕자의 마스타바 무덤에 새겨진 기록들을 근거로 기원전 2558년과 기원전 2532년 사이가 카프레의 재위기간이라고 추정하고는 있다.고대 이집트의 역사학자이자 신관인 마네토는 카프레를 '수피스 2세'라고 칭하면서 그가 약 66년 동안 재위했다고 적었다. 다만 66년동안 이집트를 다스렸다는 기록 외에는 그 어떠한 내용도 남기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의 헤로도토스나 디오도로스 시켈로스는 카프레를 잔악한 폭군으로 묘사했다. 그들의 기록에 따르면 카프레 바로 전에 50년 동안 쿠푸가 재위했고, 그를 이은 카프레가 56년을 통치했다고 한다. 쿠푸나 카프레나 똑같은 무자비한 폭군이었고, 이집트 백성들은 그들의 폭정 하에 신음하며 106년 동안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냈다고 적었다. 하지만 기자의 세 피라미드들 중 가장 작은 피라미드의 주인공인 멘카우레에 대해서는 평이 확실히 다르다. 헤로도토스는 쿠푸와 카프레의 폭정에 지친 백성들에 안타까워한 멘카우레는 반대로 선정을 펼쳤고, 덕분에 이집트인들은 멘카우레의 시대에 풍요로운 생활을 영위했다고 썼다.[4]
현대 이집트학 학자들은 헤로도토스의 기록들이 지나치게 과장된 것이라고 본다. 당시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의 정치 체제인 민주정에 대해 큰 자부심을 품고 있었다. 민주정치에 대한 뽕이 가득차있었던 그리스인들이 보았을 때, 전제군주인 파라오가 기자에 그 거대한 피라미드들을 세우기 위해서는 강제적인 징용과 수탈이 필수불가결해보였던 것이다. 파라오가 월급을 주거나 노동에 정당한 대가를 지급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아예 하지 못했거나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고의적으로 기록에서 누락시킨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당시 이집트의 신관들이 자신들의 옛 역사에 대해 거의 잊어버린 상태였기에 헤로도토스를 포함한 그리스인들에게 제대로 된 정보를 전달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헤로도토스는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기록을 적었으니 당연히 쿠푸나 카프레에 대해 좋은 기록을 남길 리가 없었다.
3. 카프레의 피라미드
자세한 내용은 카프레의 피라미드 문서 참고하십시오.
[1]
현재
카이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엄청나게 단단한 흑색 섬록암으로 깎았으며, 워낙에 경도가 강해서 오랫동안 보존될 수 있었다. 기자의 대스핑크스 주위의 장제전에서 발견되었다.
[2]
카프레의 재위 연도는 확실하지 않다. 워낙에 옛날 사람인지라 제대로 된 자료가 남아있지 않은 탓.
아비도스의 왕명록에도 그의 재위기간은 불명으로 남아있다. 일부 고고학자들은 기원전 2532년 즈음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3]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의 신관이자 역사학자인
마네토의 추정이다. 과장되었다는 의견이 크다.
[4]
물론 쿠푸와 카프레, 멘카우레의 시대보다 2,000년이 지난 이후에 쓰인 기록이기에 신뢰성은 확 떨어진다. 카프레나 쿠푸의 재위기간이나 승계구도 등을 보면 역사와 확실히 다르다. 게다가 실제 조사결과 쿠푸나 카프레가 백성들을 노예처럼 부린 폭군은 아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