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 제25왕조 제4대 파라오
타하르카 𓇿𓉔𓃭𓈎 | Taharq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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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ecd87><colcolor=#A0522D> 이름 |
타하르카 𓇿𓉔𓃭𓈎[이집트어] 𒁹𒋻𒄣𒌑[아카드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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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미상 | |
사망 | 기원전 664년 | |
재위 기간 | 이집트 파라오 | |
기원전 690년 ~ 기원전 664년 (약 2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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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자 | 샤바카 | |
후임자 | 타누타멘 | |
부모 |
아버지 :
피이 어머니 : 아바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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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타카하텐나문 | |
무덤 | 누리-1 피라미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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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쿠시 왕국 나파타 시대 6대 왕이자 고대 이집트 제25대 왕조 4대 파라오.그의 치세에 이집트는 신왕국 시절과 비견될만한 영화를 누렸으나 세력을 확장해오는 아시리아에겐 당해내지 못해 하이집트를 상실했다.
2. 행적
피이의 아들로, 남자 형제로 셰비쿠가 있었고, 여자 형제로 셰펜웨페트 2세, 칼하타, 타베케나문, 나파라예, 다하히테마문, 아티가 있었다. 그는 이중 타베케나문과 결혼하여 세 딸 아메니르디스 2세, 우샨쿠루, 네시슈테프네트를 낳았다. 기원전 690년 삼촌 샤바카가 사망한 뒤 새 파라오로 등극했다. 타하르카 치세에 세워진 테베 비문에 따르면, 그의 통치 6년째 되는 해에 나일강의 수위가 21큐빗(10.5m)을 약간 넘었다고 한다. 이는 기원전 950년부터 기원전 650년까지 측정된 것 중 가장 높은 수위였다.또한 이 비문에는 어머니가 그를 임신한 채 멤피스를 방문했을 때 신탁을 받았다는 내용, 셰비쿠가 자신을 "가장 총명한 이"로 지칭하며 총애했다는 내용, '전임 파라오' 사망 후 아문으로부터 "모든 국가를 정복하라"는 뜻을 받들어 파라오가 되었다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한편, 1977년에 발견된 비문에는 군인들이 멤피스에서 파이윰으로 이동했다가 귀환한 뒤 타하르카의 검열을 받았다고 기술되었다.
타하르카 치세에 이집트는 신왕국 시절과 맞먹는 수준으로 부흥했다. 나일강의 범람이 딱 알맞은 수위로 범람하여 수확량이 풍족해졌고, 풍부해진 물적, 인적 자원을 중앙 정부에서 효율적으로 배분하여 중흥을 이루었다. 특히 고, 중, 신왕국 시절의 문화를 재건하였으며 이집트와 쿠시 문화의 융합은 훗날 아시리아의 침입으로도 되돌리지 못했다. 타하르카는 과거에 세워진 많은 건축물을 복구하고 새로운 기념물을 건립했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 게벨 바르칼: 기원전 1450년경 투트모세 3세가 이집트 제국의 남쪽 경계로서 건설한 요새화된 정착지. 이집트 제3중간기에 버려졌다가 쿠시 왕국 나파타 왕조 시대에 재건 및 확장되었다. 타하르카는 이 곳에 아문 대신전과 무트 신전을 건설했다.
- 사남: 쿠시 왕국 나파타 시대에 번성했던 고대 도시. 타하르카는 이 도시에 아문-라 신전을 건설했다.
- 카와: 아멘호테프 3세 이래 이집트와 쿠시 왕들이 개발한 나일 강 동쪽 기슭의 도시. 타하르카는 이 도시에 큰 규모의 아문 신전을 지었고, 도시 북동쪽에 하이포스타일 홀을 건설했다.
- 타보: 쿠시 왕국 나파타 시대에 번성했던 고대 유적지. 기원전 18세기 초기에 지어졌다가 폐허가 되었던 아문 신전을 완전하게 재건했다. 아문을 모사한 7m 높이의 거상 2개를 건설했는데, 1970년 하르툼으로 옮겨져 국립 박물관에 보관되었다. 지역 주민들이 이 사원을 채석장으로 활용했기 때문에, 현재는 신전 전체가 많이 파괴되었다.
- 세마-오스트: 중왕국 제12 왕조의 파라오 카우레 세누스레트 3세를 숭배하기 위한 사원 건설.
- 헤파트: 매의 신 헤멘 상 앞에서 꽃병을 바치는 타하르카 상 제작.
- 아스완: 필라에 신전을 최초로 건설.
한편 카르나크 신전에 자신의 모습을 담은 조각상을 세웠으며 카르나크 신전의 개축을 시도한 마지막 파라오였다. 이 외에도 수많은 기념물이 이집트와 쿠시 왕국 전역에 세워졌다. 이렇듯 타하르카가 토목 공사를 한창 벌이며 이집트를 다스리고 있을 때, 이집트와 인접한 시리아에서는 아시리아의 공세가 갈수록 거세지고 있었다. 그는 아시리아가 시리아를 완전히 평정하고 나면 이집트를 노릴 거라 여기고, 그 전에 시리아 내 반 아시리아 세력과 손잡고 아시리아에 맞섰다. 성경 이사야 37장 9절에는 다음 구절이 기술되어 있다.
그 때에 앗수르 왕이 구스 왕 티르하카의 일에 관해 들은즉, 사람들이 이르기를 그가 나와서 왕과 싸우려 한다 하는지라.
성경 주류 학자들은 앗수르와 맞서 싸우기 위해 출진한 '구스 왕 티르하카'가 쿠시 왕이자 이집트 파라오인 타하르카였다고 추정한다. 당시 유대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하고 있던 아시리아 왕 센나케립은 그가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유다 왕 히즈키야에게 "네가 섬기는 하느님이 예루살렘이 함락되지 않으리라고 한 말에 속지 마라. 그동안 우리에게 정복당한 땅의 신들이 우리를 막아주었느냐?"라고 협박했다. 그러나 나중에 전군이 궤멸되는 손실을 입고 니네베로 철수했다가 그곳의 신전에서 경배할 때 두 아들 아르다무리수와 나부샤르우수르에게 살해되었다. 성경에서는 "여호와의 사자가 심판했다"라고 기술되었지만, 일부 학자들은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아시리아군이 지리멸렬해졌을 때 타하르카의 구원군이 당도하여 큰 타격을 입혔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러나 아시리아의 팽창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센나케립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에사르하돈은 히즈키야의 뒤를 이어 유대 왕이 된 므나쎄의 복종을 받아내고 본토를 위협하던 킴메르족를 격퇴했다. 이후 시리아의 반란 세력을 부추기는 타하르카를 응징하고자 673년 2월에 이집트를 침공했다. 하지만 타하르카는 아시리아군을 격파했고, 에사르하돈은 일단 철수해야 했다. 에사르하돈은 건강이 악화된 데다 뜻하지 않은 패전으로 우울증에 시달렸지만, 신하들이 질병을 신이 내리는 형벌로 생각하여 자신을 왕으로 받들지 않을까 두려워 해 이를 숨기고 2차 원정을 준비했다.
671년, 에사르하돈은 티레를 포위 공격해 그곳의 왕이 이집트로 도망가게 만들었다. 이후 그해 6월에 이집트로 진입하여 이집트군과 3차례 전투를 벌여 모두 승리했다. 멤피스가 7월 5일에 함락되어 철저하게 약탈된 후, 타하르카는 테베로 도주했지만 그의 아들과 아내 등 일가족과 많은 신하 및 백성들이 체포되어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로 끌려갔다. 하지만 에사르하돈이 돌아간 뒤, 그는 병력을 재건한 후 반격에 나서 에사르하돈이 남겨둔 아시리아군을 격멸하고 빼앗겼던 영토를 전부 탈환했다. 에사르하돈은 기원전 669년 3차 원정을 개시했지만 이집트로 진군하던 도중에 병사했다.
에사르하돈 사후 왕위에 오른 아슈르바니팔은 기원전 667/666년 대군을 일으켜 이집트로 진격해 타하르카의 저항을 물리치고 하이집트에 이어 상이집트의 중심지인 테베까지 공략했다. 아슈르바니팔은 사이스의 지역 통치자였던 네코 1세를 새 파라오로 세운 뒤 귀환했고, 네코 1세의 아들 프삼티크 1세는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에 인질로 가서 고급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멘데스, 펠루시움 등 몇몇 지역 통치자들은 타하르카에게 충성했고, 이집트를 수탈하는 아시리아를 타도하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 이 음모는 기원전 665년 발각되었고, 이에 가담했던 이들이 모조리 처형되었다.
타하르카는 기원전 664년에 테베에서 사망했다. 타하르카는 이전부터 쿠시 왕실 묘지로 쓰던 엘-쿠루가 가득차자 생전에 대체장소로 누리 산을 새로운 왕실 묘지로 선정하고 무덤 건설을 시작했었다. 후계자인 타누타멘은 엘-쿠루에 묻혔지만 그 뒤를 이은 아틀라네사를 필두로 한 쿠시 왕과 왕비들은 과거의 영화를 그리워하며 누리에 피라미드를 지어 무덤으로 삼았고 이는 기원전 4세기의 나스타센까지 이어졌다. 고고학자들은 누리 산에 세워진 피라미드뿐만 아니라 누비아 피라미드들 중에서 가장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는 누리-1번 피라미드가 타하르카의 것이라고 본다. 사후 샤바카의 아들 타누타멘이 새 파라오로 즉위하니 제25왕조의 마지막 파라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