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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케메네스 제국 제12대 샤한샤 Darius II 다리우스 2세 |
|
이집트 아케메네스조 제7대 파라오 | |
제호 | 다리우스 2세(Darius II) |
휘 | 오쿠스(Ochus) |
부황 |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
모후 | 불명 |
황후 | 파리사티스 |
생몰 | 미상 ~ 기원전 404년 |
재위 | 기원전 423년 ~ 기원전 40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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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케메네스 왕조의 제12대 샤한샤.2. 생애
크테시아스에 따르면,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의 서자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의 딸이자 이복 여동생인 파리사티스와 결혼했다고 한다. 기원전 424년 부황이 사망한 뒤, 이복형이자 적자인 크세르크세스 2세가 즉위했다. 그러나 재위 45일만에 이복동생 소그디아누스가 암살하고 황위에 올랐다. 당시 히르카니아의 사트라프였던 그는 정식 왕비의 자식이었던 크세르크세스 2세라면 몰라도 같은 첩실의 자식이며 신분은 자기보다 못하다고 여겼던 소그디아누스를 섬길 이유는 없다고 여겼다. 그는 곧 군대를 일으켰고, 6개월 15일만에 소그디아누스를 체포했다. 이후 칼, 독, 굶주림으로 죽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대신 재에 질식하여 죽게 하였다. 본래 이름은 오쿠스(Ochus)였는데, 즉위 시 다리우스 2세를 칭했다. 그의 치세에 해당하는 최초의 쐐기문자는 기원전 423년 1월 10일에 출현했다.그의 전반적인 통치는 기록이 미비해서 파악이 쉽지 않다. 다만 수사에 여러 건축물을 세워서 비문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는 사실이 발굴 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 크테시아스에 따르면, 그는 아내 파리사티스를 무척 사랑해 13명을 낳았으며, 아내의 말이라면 뭐든지 따랐다고 한다. 그러나 파리사티스는 교활한 성격의 소유자로, 남편의 총애를 이용하여 궁중 음모를 자주 꾸며 정적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다고 한다. 또한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크테시아스에 따르면, 다리우스의 친형제 아르시테스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의 재위 기간 때 반란을 일으켰다가 다시 충성을 바친 메가비조스 장군의 아들 아르티피오스의 도움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지만 진압되었다고 한다. 또한 기원전 422년 사르디스 사트라프 피소드네가 반란을 일으켰지만, 티사페르네스에 의해 진압되었다. 다리우스가 왕이 되는 것을 도왔던 환관 아르톡사레스 역시 불확실한 시기에 쿠데타를 시도했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메디아인들이 메소포타미아에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었고, 카두시족도 반란을 일으켜 제국의 질서를 흔들었다.
기원전 413년 아테네가 카리아에서 반란을 일으킨 아모르게스를 도와주자, 그는 소아시아의 사트라프 티사페르네스와 파르나바주스에게 그리스 도시국가들로부터 지금까지 연체된 공물을 받아내고 아테네를 응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페르시아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한창 벌이고 있던 스파르타를 도와 아테네를 괴롭히게 했다. 하지만 티사페르네스는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오래도록 싸우게 하고자 스파르타를 일방적으로 돕지 않았고, 지원도 시원하게 해주지 않았다. 기원전 408년, 다리우스 2세는 아들 키루스를 소아시아로 파견해, 스파르타를 좀더 적극적으로 돕도록 하였다. 스파르타는 키루스 왕자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아테네를 꺾었고, 페르시아는 스파르타가 아테네에 집중하느라 이오니아에 신경쓰지 않는 틈을 타 이오니아 대부분을 장악했다.
기원전 404년에 병으로 사망했다. 이때 아내 파리사티스는 즉위 후 처음으로 낳은 자식인 둘째 아들 키루스에게 왕위를 물려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다리우스 2세는 즉위하기 전에 낳은 첫째 아들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에게 왕위를 물려줬다. 키루스는 형의 대관식에 참가했다가 왕중왕을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을 뻔 했지만, 어머니 파리사티스가 중재한 덕분에 사형을 모면했다. 그 후 키루스 왕자는 형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지만, 쿠낙사 전투에서 전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