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타고의 세라피스 신전 유적지에서 발견된 사제의 흉상. 이 흉상의 주인공이 세라피스 신앙 확산에 지대한 기여를 한 마네토였을 것이라는 추정이 있지만 진위 여부는 알 수 없다. 이 흉상은 현재 베를린의 알테스 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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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마네토 (고대 그리스어: Μανέθων, 영어: Manetho) |
출생 | 기원전 3세기 초반 |
사망 | 미상 |
직위 | 세라피스 대사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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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케도니아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인 기원전 3세기 초반에 활동한 세라피스 대사제이자 이집트 역사가로,《이집트 역사》의 저자로 유명하다.2. 행적
'마네토'(Μανέθων)는 그리스식 이름으로, 이집트 토착민 출신으로 전해지지만 본명은 전해지지 않는다. 마네토는 일반적으로 " 토트의 진실", "토트의 선물", "토트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의미로 여겨진다. 이집트 역사가 야로슬라프 체르니(1898~1970)는 마네토의 이집트식 이름이 Myinyu-heter("말의 사육사" 또는 "마부") 또는 Ma'ani-Djehuti("나는 토트를 보았다")라고 주장했다.마네토의 전반적인 생애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후대의 역사가들이 그에 대해 남긴 파편적인 기록을 통해 추론할 수 있다. 서기 8세기경 동로마 제국의 성직자이자 연대기 작가였던 게오르기오스 싱켈로스는 마네토가 안티오코스 1세에게《바빌로니아의 역사》를 바친 베로소스와 동시대의 인물이라고 묘사했다. 안티오코스 1세는 기원전 285년부터 기원전 261년까지 통치했으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제2대 파라오인 프톨레마이오스 2세와 동시대의 인물이었다. 마네토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에게 보냈다는 편지[1]에는 왕의 의뢰를 받들어《이집트 역사》를 집필했다고 적혀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안티오코스 1세가《바빌로니아의 역사》를 통해 셀레우코스 제국의 역사성을 홍보하는 것에 자극받은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이에 맞대응하고자 의뢰했을 것이다.
10세기경 동로마 제국의 백과사전인《 수다》(Suda)는 두 명의 마네토를 명시했다. 한 사람은 멘데스에서 수석 사제로 활동하며《키피[2] 제작법》을 집필했고, 다른 인물은 디오스폴리스 또는 세베니투스에서 활동하며《육체적 교리의 개요》및 점성술에 관한 책을 집필했다. 이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마네토가 실제로 두 사람이었다고 주장하지만, 학계에서는 대체로 두 사람이 동일인물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집트 역사가 뮬러는《수다》가 명시한 "멘데스에서 수석 사제로 활동한 마네토"는 마네토처럼 이집트 연대기에 관한 3권의 책을 집필한 멘데스의 대사제 프톨레마이오스와 혼동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마네토가 프톨레마이오스 2세에게 보냈다는 편지에서, 그는 자신을
"세베니투스에서 태어나 헬리오폴리스에 거주하는 이집트의 신성한 성지의 고위 사제이자 서기"
라고 밝혔다. 이 편지의 진위 여부는 불확실하지만, 후대의 창작이라고 해도 마네토의 신상에 관한 주요 출처에서 차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플루타르코스는 그를 세라피스 숭배의 권위자라고 묘사했다. 세라피스는
알렉산드로스 3세 메가스('대왕')가 이집트를 정복하고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한 후 이집트 종교와 그리스 종교가 결합하면서 형성된 저승의 신이었다.
히에로니무스는 세라피스 여신의 조각상이
기원전 286년에 알렉산드리아로 들어왔다고 기술한 반면,
에우세비우스는
기원전 278년에 알렉산드리아에 입성했다고 밝혔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이 조각상은 마네토와
데메테르 여신전의 대사제인 테모테오스에 의해 이집트로 옮겨졌고, 마네토의 주도하에 이집트 전역에 세라피스 신앙이 확산되었다고 했다.3. 《이집트 역사》
《아이깁티아카》(Αἰγυπτιακά) 또는《이집트 역사》는 마네토의 저서들 중 가장 중요한 책으로 평가받는다. 원본은 현존하지 않지만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아피온 반박문>에 인용된 구절들과 섹스투스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 및 에우세비우스가 각자의 연대기에서 마네토의《이집트 역사》를 요약한 글이 전해진다. 여기에 8세기의 동로마 제국 성직자이자 연대기 작가였던 게오르기오스 싱겔로스도 아담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까지의 세계사인《고대 연대기》(Ἐκλογὴ Χρονογραφίας)에서 마네토의 저서를 상당수 인용했다.마네토는 이집트 토착인 출신이었지만 마케도니아계 군주의 의뢰를 받았기 때문인지 그리스어로 저술했으며, 그리스 신화에서 등장하는 대장장이의 신인 헤파이스토스가 이집트에 나타난 때부터 이집트의 장대한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서술했다. 그러면서 헤파이스토스 신의 후손인 헬리오스( 라), 크론( 게브), 오시리스, 그리고 티폰( 세트)이 이집트를 통치했고, 호루스가 그들을 계승했으며, 이후 신과 인간의 혈통을 물려받은 반신들이 군림하다가 인간들이 상•하이집트에 여러 국가를 세웠다고 밝혔다. 그러다가 메네스가 이집트를 통합하면서 이집트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마네토는 이집트 역사를 연대순으로 정리해 고왕국, 중왕국, 신왕국 시대로 나눠서 3권의 책을 편찬했으며, 수많은 파라오를 동일한 기원을 가진 통치자 그룹인 왕조순으로 분류해 총 30개 왕조로 나누었다. 마네토는 이 왕조 분류를 혈족 관계로 따지면서, 각 왕조에 일종의 연속성을 부여했다. 그는 연속성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전임자의 후계자를 "아들"이라고 지칭했다. 이러한 왕조 구분법은 특정한 역사적 경향과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자의적으로 분류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가령, 신왕국 시기인 제18왕조는 제17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인 카모세의 형제 또는 아들이었던 아흐모세 1세의 통치로 시작되며, 제18왕조의 제3대 파라오였던 투트모세 1세는 그의 전임자들과 별다른 관련이 없었지만 같은 왕조에 속한 것으로 서술되었다. 아흐모세 1세가 힉소스족의 제15왕조를 몰아내고 신왕국 시대를 개시했기에 새 왕조의 창건자로 간주되었다는 설이 제기되지만, 혼란스러웠던 제1중간기를 극복하고 이집트를 재통합한 멘투호테프 2세가 여전히 제11왕조의 일원으로 간주된 까닭이 설명되지 않는다. 또한 초기 왕조 시대인 제1왕조와 제2왕조의 분리는 순전히 인위적인 것으로 보인다. 두 왕조 모두 9명의 파라오가 나열되었는데, 9를 거룩한 숫자로 간주하는 전통에 따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듯 지극히 자의적인 분류법이지만, 이집트의 기나긴 역사를 정리하는 데 편리하기 때문에 현대 학자들이 다소 수정된 형태로 사용하고 있다.
세라피스 신의 대제사장으로서 마케도니아계 파라오의 무궁한 지원을 받았던 마네토는 무수한 종류의 기록을 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신전 기록 보관소에 들어있는 파피루스 문서들을 마음껏 볼 수 있었을 것이고, 이집트 상형문자로 제작된 서판과 벽 조각, 그리고 무수한 비문들을 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 헬레니즘을 수용했기에 그리스식의 합리적인 사고와 탐구 정신에도 숙달했을 테니, 풍부한 자료를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다만 이러한 공식적인 자료 외에도 일정한 비율의 비역사적인 기록과 민간 전승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네토가 인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료는 다음과 같다.
* 팔레르모 석: 기원전 2600년경 고왕국 시기인 제5왕조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판으로, 본래 높이 2.2 m, 폭 61 cm, 두께 6.5 cm에 달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현재는 일부만 전해진다. 아비도스, 카르나크, 사카라, 토리노 문서에서 확인되지 않은 파라오들이 이 석판에서 등장하는데, 마네토도 이 기록을 참고했을 가능성이 있다.
* 카르나크 왕가의 목록: 제1왕조의 초대 파라오인 메네스[3]에서 제18왕조의 위대한 정복군주인 투트모세 3세까지, 61명의 파라오 목록이 나열되었다. 제2중간기(제13왕조 ~ 제17왕조)에 속하는 많은 파라오들을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 아비도스의 세티 1세 신전의 회랑 벽에 새겨진 파라오 목록: 제1왕조의 초대 파라오인 메네스부터 쇠락한 이집트를 중흥시킨 제19왕조의 제2대 파라오 세티 1세까지 76명의 파라오들이 연대순으로 나열되었다. 단, 제2중간기 시기인 제13왕조부터 제17왕조까지의 파라오들은 생략되었다. 이 목록에서 훼손된 파라오 일부는 세티 1세의 후계자인 람세스 2세의 신전에서 확인되었다.
* 사카라의 파라오 목록: 사카라의 무덤에서 발견된 파라오 목록으로, 제1왕조의 제6대 파라오인 메르네이트부터 제19왕조의 제3대 파라오인 대왕 람세스 2세까지 47명[4]이 전해진다. 이 목록에서는 아비도스 왕실 목록처럼 제13왕조와 제17왕조를 생략했다.
*《토리노 파피루스》: 300명이 넘는 파라오의 이름을 순서대로 담았으며, 각자의 재위기간은 년, 월, 일 단위로 표기되었다. 파피루스는 마네토와 마찬가지로 신들의 왕조에서 시작되며, 각 왕조의 통치기간의 합을 제시한다. 이 파피루스에서 전하는 파라오들의 배열은 마네토가 전하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
여기에 더해 마네토의 저술이 후대 작가들의 의도에 따라 왜곡되기도 했다. 서기 1세기경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인 학자였던 아피온은 < 유대인 반박문>을 발표했다. 그는 이 글에서 마네토의《이집트 역사》를 인용하면서, 과거 이집트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이 나병 환자들이었기 때문에 추방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는 < 출애굽기>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드러낸 것이었다.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의 사서이자 스토아파 철학자였던 카이레몬도 아피온과 비슷한 견해를 밝혔다. 즉 그들은 이시스 여신이 꿈 속에서 당시 파라오였던 아메노피스에게 나타나 전쟁 중에 자신의 신전이 파괴된 것에 대해 꾸짖었고, 이에 거룩한 서기관이었던 프리토바우테스가 파라오에게 권하기를 이집트에서 오염된 사람들을 쫓아낸다면 더 이상 경고를 받지 않게 될 것이라 했다고 서술했다. 이에 파라오는 250,000명의 병자를 모아서 추방시켰는데, 그들의 지도자 중에 오사르세프(Osarseph, 모세)가 있었다고 했다.
이에 격분한 유대인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아피온 반박문>에서 한때 유대인들이 이집트인을 통치했으며, 나병 때문에 쫓겨난 건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야곱- 요셉을 기점으로 시작된 이스라엘 민족의 이집트 체류와 모세의 출애굽이 힉소스족의 이집트 침공 및 추방 사건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전제하에 힉소스의 어원을 포로와 연관시켰다. 요세푸스는 마네토의 글을 인용해 힉소스가 포로 생활을 하다가 나중에 이집트를 정복했지만, 상이집트의 테베에서 일어난 제17왕조의 이집트인 왕들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뒤 이집트에서 축출되었고, 이후 광야를 지나 시리아에 들어가서 모두를 수용할 수 있는 도시인 예루살렘을 건설했다고 덧붙였다. 이때 요세푸스는 아피온이 인용한 마네토의 글은 위조되었다고 비난했지만, 정작 본인도 간혹 원본과 상관없는 글을 인용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현대 학자들은 요세푸스와 후대 기독교 학자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써먹기 위해 마네토의 글을 변개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렇듯 여러 문제가 있기 때문에 마네토가 남긴 저서의 신빙성을 의심하는 이들이 많지만, 고고학자들이 밝혀낸 파라오 목록과 마네토의 왕실 연대표가 일치하는 부분이 많은 것을 볼 때, 마네토가 실제로 존재했던 사료들을 다뤘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때문에 이집트 역사가들은 현재도 그의 저서를 주요한 참고 문헌으로 다루고 있다. 마네토는 이 외에도《소디스의 책》, 《신성한 책》, 《육체적 교리의 개요》, 《고대의 의식과 종교》, 《키피 제작법》, 《 헤로도토스의《역사》에 대한 비판》등 여러 저서를 집필했다고 전해지지만 모두 현존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