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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중왕국 Middle Kingdom of Egyp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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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중왕국의 영토[1] | |||||
기원전 2055년 ~ 기원전 1650년 | |||||
위치 | 이집트 | ||||
수도 | 테베, 잇타위[2] | ||||
정치 체제 | 전제군주제, 제정일치 | ||||
국가 원수 | 파라오 | ||||
주요 파라오 |
멘투호테프 2세 아메넴헤트 1세 세누스레트 3세 아메넴헤트 3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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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 고대 이집트어 | ||||
종교 | 고대 이집트 종교 | ||||
주요 사건 |
기원전 2055년
이집트 제11왕조, 이집트 재통일 기원전 1991년 이집트 제12왕조 시작 기원전 1878년 세누스레트 3세 즉위 기원전 1860년 아메넴헤트 3세 즉위 기원전 1650년 힉소스, 이집트 제14왕조 멸망시킴. 중왕국 종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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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립 이전 | 제1중간기 | ||||
멸망 이후 | 제2중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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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2055년부터 기원전 1650년까지 지속된 고대 이집트의 시대 구분. 제11왕조와 제12왕조가 중왕국을 대표했다.[3]끝없는 내전과 남북간 전쟁이 무려 130여 년 동안 지속된 제1중간기는 제11왕조의 파라오 멘투호테프 2세가 다시 이집트 전체를 통일하면서 끝이 났다. 멘투호테프 2세는 제1중간기를 거치면서 지나치게 강화된 지방 귀족들과 신전들의 힘을 빼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들을 동원했다. 방방곳곳에 지방관들을 파견하여 토후들의 세력을 견제했으며, 귀족들 간의 알력 다툼에 불을 붙이는 등 여러 가지 수단으로 제1중간기 시절 땅에 떨어졌던 파라오의 권위를 다시 끌어올렸다.
멘투호테프 2세의 이같은 노력 덕분에 제11왕조의 파라오들과 후대의 제12왕조의 파라오들은 훨씬 안정적인 치세를 펼칠 수 있었다. 특히 제12왕조의 세누스레트 3세는 수많은 정복 활동으로 나중에는 ' 유럽으로 친정을 떠났다.'는 전설이 남을 정도로 중왕국의 영토를 넓혔다, 그의 뒤를 이은 아메넴헤트 3세는 거대한 기념비적 건축물들을 짓고, 중왕국의 문화예술 발전에 심혈을 기울이며 중왕국의 최전성기를 찍었다. 그러나 아메넴헤트 3세 사후 점차 몰락하기 시작하다가 결국 기원전 1650년 무렵 힉소스인들이 침입하자 멸망했다. 400여 년에 걸친 중왕국이 무너지자 제2중간기가 시작되었다.
중왕국 시기 이집트는 다시 한번 빠른 속도로 문화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 전란으로 피폐했던 제1중간기가 끝나자 남는 에너지를 문화 발전에 쏟아부었던 것이다. 중왕국의 파라오들은 강력한 왕권을 구사했던 고왕국 시절의 파라오들을 동경했고, 고왕국 시절 제5왕조나 제6왕조 시대의 건축과 예술풍을 모방해 여러 작품들을 남겼다. 제12왕조의 파라오들은 고왕국의 전통이었던 피라미드에 안치되었고,[4] 관과 장례 의식 역시 고왕국 시대의 것을 많이 따라했다.
그 외에도 석상을 조각하는 법 역시 고왕국 시절로 다시 회귀했다. 제1중간기 시절 인물을 더 호리호리하게 만들었던 것과 대비하여 중왕국의 석공들은 옛 고왕국의 것같이 남성의 모습을 우락부락하고 근육질의 모습으로 묘사했다. 다만 중왕국 시절의 모든 것들이 단순한 고왕국 시대의 모방은 아니었다. 중왕국 시대의 조각상들은 고왕국의 것들보다 훨씬 그 질이 뛰어났다. 고왕국 시대에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것을 문서에 기록해 남기는 등 여러 작품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2. 역사
이집트를 재통일한 제11왕조의 멘투호테프 2세 | 제12왕조의 명군 세누스레트 3세[5] | 중왕국의 최전성기를 구가한 제12왕조의 아메넴헤트 3세 |
또한 제1중간기 시절 지나치게 강해졌던 지방 토후와 귀족들의 힘을 빼놓기 위하여 파라오의 입김이 강한 대도시들을 위주로 행정구역을 개편하고, 왕권을 강화시키는 등 정치적인 구도에도 변화가 생겼다. 문화적으로는 고왕국 시대의 제5왕조와 제6왕조의 예술 풍조를 물려받되 이를 더욱 진흥시켰는데, 가장 대표적으로 고대 이집트의 석상 조각기술은 중왕국 시기에 정점을 찍었다. 조각상에 비문을 새겨넣는 등 여러 혁신적인 아이디어들이 튀어나왔고, 인물들의 모습이 더 우아하고 머리 크기가 작아지는 등 더 자연스럽게 변했다. 문학적으로도 《 어떤 남자와 그의 영혼의 대화》, 《아메넴헤트의 대화》 등 여러 작품들이 등장했다.[7]
이집트를 통일한 멘투호테프 2세는 제1중간기 시절 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강력해진 지방 귀족들을 약화시키기 위해 다양한 방법들을 동원했다. 대표적으로 상이집트와 하이집트 지역에 왕이 직속으로 임명하는 총독들과 지방관들을 두어 지방 귀족들을 견제했고, 전란으로 파괴된 신전들을 왕의 내탕금으로 복원함으로써 신관들의 지지를 얻었으며 곳곳에 요새들을 지어 군대를 주둔시켰다. 멘투호테프 2세의 대처 덕분에 제11왕조 중왕국은 빠른 속도로 안정을 되찾았고,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파라오들은 훨씬 편하게 국정을 운영할 수 있었다.
멘투호테프 2세가 무려 51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이집트를 다스렸기에, 그가 죽고 멘투호테프 3세가 왕위에 올랐을 무렵엔 이미 너무 늙은 뒤였다. 멘투호테프 3세는 처음으로 푼트 지방에 원정대를 파견했으며, 약 12년 동안 재위하다가 그대로 세상을 떴다.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멘투호테프 4세는 약 7년 남짓 재위는데, 그에 대해 알려진 바는 많지 않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당시 멘투호테프 4세의 재상이자 군사령관이었던 아메넴헤트 1세가 쿠데타를 일으켜 멘투호테프 4세를 쫓아내고[8] 새로운 파라오로 즉위했다는 사실이다. 이로써 상•하 이집트를 재통일했던 제11왕조가 멸망했다.
아메넴헤트 1세로부터 시작된 제12왕조는 이집트 중왕국의 전성기였다. 약 30여 년 동안 재위한 아메넴헤트 1세는 신하에게 암살당했고, 이후 아들 세누스레트 1세가 즉위했다.[9] 세누스레트 1세는 아버지의 팽창적인 대외 정책을 그대로 물려받아 수많은 정복 활동을 펼쳤다. 재위 10년과 18년째 되는 해에 각각 누비아 지방으로 대군을 파견하여 누비아를 완전히 이집트에 편입했고, 현재의 아부심벨 대신전 인근까지 국경을 확장함과 동시에 사하라 사막으로 향할 탐험단을 꾸리기도 했다. 그 외에도 헬리오폴리스의 태양 신전을 복원하고 시나이 및 시리아의 군주들과도 외교 관계를 텄으며,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하여 중왕국의 성세를 이어갔다.[10]
세누스레트 1세의 후계자 아메넴헤트 2세는 약 35년을 재위했으나 그의 업적에 대해서는 특기할 만한 바가 없다. 아메넴헤트 2세의 아들 세누스레트 2세는 19년 동안 재위하며 파이윰의 고대 오아시스를 잇는 거대한 수로를 파 농경지의 면적을 급격히 늘렸고, 전대 파라오들과는 달리 지방의 귀족들과도 친화적이었다고 한다.[11]
세누스레트 2세가 죽자 제12왕조 최고의 전성기를 연 세누스레트 3세가 파라오가 되었다. 세누스레트 3세는 강력한 왕권을 지녔던 제12왕조에서도 유난히 강대한 왕권과 권위를 바탕으로 후술할 아메넴헤트 3세와 함께 이집트 중왕국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인물로, 나중에는 ' 유럽 일대로 원정을 갔다.'는 등 전설이 남아 신격화될 정도로 위대한 파라오가 되었다.세누스레트 3세는 몇십여 년 가까이 이집트를 다스리는 동안 레반트 일대로 군대를 파견하여 아시아 지방에 손길을 뻗치는가 하면, 나일강의 수로를 정비하여 해군을 이용해 누비아 쪽으로 끝없이 확장 전쟁을 벌이며 승승장구했다.
세누스레트 3세를 이은 아메넴헤트 3세 역시 아버지의 뒤를 이어 45년 넘게 이집트를 평화로이 통치했다. 다만 다른 부분이 있었다면 확장적인 정책을 추구했던 아버지와 달리 아메넴헤트 3세는 상대적으로 온건적인 외교를 했다는 것이다. 아메넴헤트 3세는 전쟁보다는 거대한 기념비적 건축물들을 짓거나 운하 건설, 피라미드 건설 등에 더 관심이 많았다. 아메넴헤트 3세는 파이윰에 거대한 신전들을 짓거나 강의 신 세베크에게 바치는 거대한 거상들을 건설하는 등 중왕국 시대를 대표하는 여러 건축물들을 짓는 업적을 남겼다. 아메넴헤트 3세가 경제 진흥, 평화기 구가 등 워낙 많은 업적들을 남겼기에, 학계에서는 아메넴헤트 3세가 이집트 중왕국 국력의 정점을 찍었다고 평가한다.
강대했던 중왕국 역시 아메넴헤트 3세 사후 서서히 기울어져갔다. 아메넴헤트 4세는 9년 동안 재위하면서 터키석이나 광물들을 찾으러 원정대를 파견한 것을 제외하면 남긴 업적이 별로 없었다. 아메넴헤트 4세를 이은 소베크네페루가 즉위할 무렵 이집트 중왕국은 이미 국력이 전대에 비해 확연히 약화된 시점이었다. 게다가 소베크네페루는 특이하게도 여자 파라오였는데,[12] 안타깝게도 여자이라는 점은 왕권이 약해진 상황에서 소베크네페루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소베크네페루는 약 4년 정도 밖에 재위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소베크네페루가 후계를 남기지 못하고 그대로 사망하자 기원전 1803년 즈음에 소베크호테프 1세가 즉위하여, 중왕국의 황금기를 이끈 제12왕조가 종결되고 제13왕조가 들어섰다. 제13왕조는 제12왕조에 비해 확연하게 국력이 약세에 접어든 이집트를 물려받았다. 국가의 방어력이 쇠락해지자 시나이 반도의 셈족들이 쳐들어와 제13왕조를 남쪽으로 쫒아내고 제14왕조를 세웠다.
그러나 이민족인 셈족과 이집트 원주민들이 잡다하게 섞인 제14왕조가 제대로 굴러갈 리가 없었고, 결국 제14왕조는 건국된 지 75년쯤 되었을 때, '전차'라는 신무기로 무장한 셈계 힉소스인들이 침략해 들어오면서 멸망했다. 이때부터 힉소스인의 제15왕조가 이집트인들을 압박하는 암흑기가 도래하면서 토착 이집트인들이 외래민족에 대항했던 제2중간기가 시작되었다.
[1]
녹색 부분은 고왕국 시대부터 이미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던 나일 강 일대의 비옥한 핵심 영토이고. 연한 연두색 부분은 고왕국 시기의 영토다. 그리고 다소 진한 연두색 부분은 중왕국 시기에 확장된 영토다. 또한
시나이 반도쪽에 있는 화살표 경로를 따라 셈계 힉소스인들이 이집트로 침입했다.
[2]
아메넴헤트 1세가 테베에서 천도한 새로운 수도였다. 다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테베로 돌아갔다.
[3]
제13왕조는 중왕국 시대와 제2중간기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다. 다만 제13왕조 시대까지는 어느 정도 통일 이집트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일부 학계에서는 제13왕조와 더 나아가 제14왕조까지 중왕국 시대로 분류하기도 한다.
[4]
다만 석재로 만들던 고왕국의 피라미드들과는 달리 중왕국의 피라미드들은 진흙 벽돌로 이루어져 있었다.
[5]
현재 이 흉상은
대영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6]
그 외에
아몬라(아몬 + 라) 신앙을 바탕으로
사제 계급의 힘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7]
고왕국 시절에는 왕실 의식이나 제례용 절차 따위를 위해서만 책을 쓰고 기록을 남겼다면, 중왕국 시기에 들어서는 본격적으로 유흥과 오락을 위한 문학 작품들이 대거 나오기 시작했다.
[8]
이 시대의 기록이 확실치 않기에 쫒아낸 것이 아니라 멘투호테프 4세가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자 아메넴헤트 1세가 왕위를 물려받았다는 말도 있다.
[9]
소수의 현존하는 고대 이집트의 문학 작품들 중 《아메넴헤트의 대화》라는 작품이 있다. 아메넴헤트 1세가 죽은 후 아들 세누스레트 1세[13] 앞에 영혼으로 나와 인간에 대한 불신과 신하들을 절대 믿지 말고 견제할 것 등에 대해 이야기한 내용이다.
[10]
그 외에 파라오 직속의 신전들을 세워 이전까지 따로 행세하던 지방의 신관들에게 견제구를 날렸다.
[11]
중왕국 시기 파라오들의 대표적인 특징이 후계자를 미리 파라오로 승격시켜 공동 통치를 했다는 것이다. 고왕국 시절 후계 갈등으로 내란이 일어났음을 반면교사 삼아 미리 후계구도를 안정시키려는 의도였다.
[12]
또한
소베크의 이름을 파라오의 칭호에 넣은 최초의 군주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