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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9:12:23

칭기즈 칸/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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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업적
2.1. 인재 중용2.2. 정복
3. 성격4. 세계 각국의 평가

1. 개요

TED에서 칭기즈 칸에 대한 평가를 다룬 강의.
후술하지만 보는 관점에 따라 평이 많이 엇갈린다.

몽골족 유목민족이라 이슬람, 중국, 유럽 문명 등과 달리 자신들의 기록을 남기는 데 큰 관심이 없었다 보니, 주로 남들 입장으로만 역사가 기록되어 칭기즈 칸 역시 나쁜 놈이 될 여지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 당한 입장에선 나쁜 놈이 맞다. 당시 몽골족은 심리전의 일환으로 자신들을 인정사정없는 무자비한 악당으로 표현하는 데 능숙했다고 하며 이것이 그대로 반영되었을 수도 있다.

2. 업적

칭기즈 칸은 지금 관점에서 봐도 상당히 훌륭한 정책을 펴기도 했다.
다만 위에 언급된 제도상 개선점들이 다른 민족, 다른 지역에는 기존 지배층을 다 잡아 죽이고, 종교 질서도 다 뭉개놓고, 우리 모두 평등이란 식이어서 토착민들이 몽골인 정복자들에 대해 증오심과 혐오감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유목민족인 그들은 기록을 거의 하지 않았고, 아무래도 학살당한 피해자들의 입장에 근거한 기록들로만 추정하였으므로 좋은 소리가 남았을 리 없다. 애당초 몽골 제국 또한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자신들을 악랄하게 포장하여 적들에게 선전하기도 했고. 하여튼 이 통에 네스토리우스교가 덕을 많이 보아 이는 사제왕 요한의 전설이 퍼져나가는 데도 영향을 주었다.

2.1. 인재 중용

칭기즈 칸의 인재 중용은 매우 높게 평가할 수 있다. 그는 이상하게도 사준사구처럼, 가족보다 자기와 가까운 관계에 있는 친구들을 더 중시하거나, 적이었다 아군이 된 사람들에게 중요한 역할을 맡기는 편이었다. 물론 칭기즈 칸의 혈통이나 아군이 낮은 대우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통일 전쟁 과정에서 자무카와 다른 적들이 칭기즈 칸 가문을 얼마나 조롱했던지 칭기즈 칸은 적인 귀족에게 혹독한 편이었다. 처음부터 격이 낮았다면 실력을 입증한 것이니 조롱은커녕 칭송을 받았겠지만, 잘 나가던 명가에서 몰락했다 고생 끝에 겨우 숨 좀 돌린 처지가 된 주제에 의도했든 아니든 자신들보다 윗줄이라 나대는 모양새였으니 다른 명문 귀족들이 조롱할만도 했다.

칭기즈 칸은 일생에 걸쳐 가문이나 부족보다는 스스로 얻은 '인재'를 믿은 편이었다. 실제로 친척이라는 사람들은 그를 자주 배신하였고, 자무카와 벌인 13익의 전투 당시 본인 직계가 아닌 친족으로 이루어진 익들은 대다수가 항복하였다. 또한 함께 고생했던 친동생 카사르조차 반란에 가까운 움직임을 보여서 견제했던 적이 있을 정도다. 반면 테무진에게 친형 벨테르가 살해되었던 이복동생 벨구테이는 어찌보면 친형의 원수인데도 단 한 번도 불온하게 움직인 적이 없었기에 테무진에게 신뢰받았다. 이 밖에도 이미 아버지인 예수게이 대부터 이미 친척들은 그리 사이가 좋지 않은 이들이었다.

반면, 혈연 없이 맺어진 관계는 끈끈했다. 밑바닥까지 떨어져 고생했던 경험에서 나온 것인지는 몰라도 칭기즈 칸은 Give & Take 이상의 충성을 부하들에게 요구한 적이 없었다. "전황이 불리하면 도망쳐라"가 몽골 제국의 정식 군율 중 하나였을 정도. 그러나 오히려 그 때문에 부하들로부터 절대적인 충성을 받았다. 오늘날에는 별 것 아닌 것 같아 보여도 그 당시까지 초원은 우두머리가 모든 걸 가지는 독식 체제로, 그런 와중에 군주들 중 칭기즈 칸처럼 Give & Take의 원칙을 따른 사람은 없었다. 그랬기에 그의 부하들 가운데 배신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칭기즈 칸의 부하 중 한 사람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그가 물을 가리키면 물에 뛰어들고 불을 가리키면 불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보면 배신에 대한 뼈아픈 경험 때문에 나온 Give & Take 정책이 부하들에게는 '자신의 안위를 걱정해주는 주군' 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해 절대적인 충성심을 이끌어냈다는 얘기다. 또한 이런 Give & Take 정신은 칭기즈 칸 자신도 철저히 지켜서, 먼저 요구하지 않은 신하의 단독행동이더라도 자신에게 충성을 보였다면 반드시 그에 걸맞은 보상을 수여했다. 신하들의 의욕이 높았던 것은 당연지사. 이 때문에 앞서 말했듯이 가족보다 다른 사람을 더 믿는 때도 있었다. 타타르족 학살 후 테무르의 휘하에 있던 남은 타타르 부족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2.2. 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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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 칸 사망 당시 몽골 제국의 영토

칭기즈 칸이 살아 생전에 정복한 영토는 20세기 이전까지 등장했던 모든 정복자들보다 넓다는 것은 이미 검증된 내용이다. 그러나 이에 따른 세세한 오해들도 존재하긴 하다.

칭기즈 칸 시대에 중국 끝까지 다 밀어버린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도 의외로 있긴 있다. 칭기즈 칸은 금세종의 절정기 이후로 쇠퇴기에 접어들던 금나라에 치명타를 가한데 그쳤다. 엄밀히 말하자면 몽골이 통합될 수 있었던 것도 금나라의 쇠퇴기가 영향이 있을 것이다. 금나라의 영향력이 몽골에 닿는 시대라면 통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다만 금나라의 경우는 호라즘 제국과는 달리 자리를 잡은 지 오래되고 생산력 역시 강대한 나라라 꽤나 여러 번 공격을 해야 했고 결국 칭기즈 칸 시대에는 완전히 멸망을 시키지 못했다. 칭기즈 칸은 금나라 장군 흘석렬구근(紇石烈九斤) / 완안구근(完顔九斤)의 부대를 격퇴했는데 다퉁에서는 빗나간 화살을 맞아서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완전하게 멸망시키지 못한 것은 칭기즈 칸이 금나라를 공격하다가 어느 시점부터 서쪽으로의 진군에 집중한 탓도 크지만. 다른 전선에 신경을 쏟았기 때문에 의외로 칭기즈 칸은 생전에 중국 땅에 그리 오래 있지 않았다. 칭기즈 칸 생전에 대 중국 전선을 주로 담당한 사람은 무칼리였다.

그리고 정복 영토의 경우 과거 카라한 왕조 등이 있던 서요 등의 지역은 실질적으로 의미가 있는 영역에 비해 영토가 워낙 큰 편이라 지도를 그리면 엄청나게 커진다. 칭기즈 칸이 직접 친정하여 물리친 호라즘의 경우는 확실히 그 위세는 절정기였지만 워낙 빠르게 복속이 된 탓에 '제국' 이라고 부를 만한 기반은 전무한 상태였다. 이를 테면 아프가니스탄이 호라즘에 속한 건 몽골군이 쳐들어오기 4년 전이었고 서부 페르시아가 호라즘의 영역이 된 것 역시 칭기즈 칸이 진군하기 불과 3년 전이었다. 부하라 사마르칸트는 호라즘에 속한 지 10년도 아직 되지 않았으며 사마르칸트는 수많은 기습과 학살이 벌어졌던 곳이었다. 호라즘의 영역이 확정된 것은 가장 빠르게 봐도 1217년의 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내부 기반을 다져야 할 상황에서 어그로를 끌어 몽골군이 쳐들어오게 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상대인 무함마드 2세도 제법 정복군주였다. 내실을 다지지 못했을 뿐이지 그의 재위 전만 해도 서 이란, 호라산, 호라즘 일대를 제패하던 강국이긴 했지만 여전히 주변국인 고르 왕조에게 시달리고 서요에게 복속된 상태이던 호라즘 왕조였지만 무함마드 2세는 (약해져가고 있었지만) 서요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고르 왕조 역시도 멸망한 후 그 영역을 장악하고 카라한 왕조를 멸망시키는 등 나름 정복군주였다. 물론 그 기반이 어머니인 테르켄 하툰에게 있었기에 그의 능력만으로 이룬건 아니긴 하다. 그렇지만 그 기반을 활용하여 활발한 정복활동을 펼쳤기 때문에 무시할건 못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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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 칸의 진격로[3]

칭기즈 칸 본인은 유럽 땅을 직접 쳐들어간 적이 없지만 그의 명령하에 호라즘의 칸을 추격하던 수부타이 제베 캅카스로 빠졌다가 칼가강 전투(1223년)에서 키예프 공국을 중심으로 뭉친 연합군을 발라버린 적은 있다. 이 전투로 러시아 공국들의 야전 역량이 뿌리채 뽑혀 이후 몽골의 서방 진군 때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각개격파당한다. 당시 러시아는 흔히 알려진 제국이 아니라 공국들의 연합체였다. 게다가 내부의 도시들은 몇몇 대도시를 제외하면 목책에 둘러싸인 마을이었고 나무를 많이 쓰다보니 몽골군의 화공에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이후 바투 수부타이가 이끄는 황금 부대에게 현 우크라이나 지역은 완전히 초토화되었으며 북쪽 도시 몇 개만이 살아남았는데 대표적인 곳이 몽골군이 발길을 돌렸던 노브고로드 공화국과 세금을 징수하던 모스크바였다.

3. 성격

인간적으로는 털털하고 소박하며 사치를 싫어했고, 때로는 소심하기까지 한 인물이었다.

저항하는 적에겐 매우 무자비했으나 자기 사람에겐 베풀 줄 아는 사람이었다. 때문에 과거 몽골 부족과 달리 습격 과정에서 전사한 모든 병사의 과부와 고아에게도 일반 병사와 똑같은 몫을 주기로 하거나 후방에서 전쟁 물자 등 보급을 담당하는 사람들에게도 전리품 배분을 신경써 주었다. 조직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어떤 배려를 해줘야 하는지를 제대로 꿰뚫고 있었던 것. 현대사회의 조직 운영에서 상식이 된 "기여한 만큼 대가를 줘라"를 이미 몇백 년 전 과거 사람인 데도 제대로 알고 있었던 셈이다. 물론 이건 다른 나라에서도 이전부터 보이던 모습이긴 하다만.

한 번 결심하면 끝없는 끈기와 추진력으로 한 번에 밀고 나가는 인물이었다. 이는 그가 12세 때 이복형 벡테르를 죽이는 데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그가 두 번 이상 직접 침공한 나라는 금나라 정도였다. 반란이 있을 것 같으면 아예 도시를 갈아버렸기 때문에 반란 가능성도 최대한 줄였다. 이게 악명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도 볼 수 있다. 몽골족은 유목 민족이라 도시의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에 거리낌 없이 갈아버렸지만 정복당한 사람들은 도시민들(고려부터 유럽에 이르기까지)이니 당연히 악마처럼 보일 수밖에. 항복해서 한 번 용서해주었더라도 반란을 일으키면 다 갈아버렸다.

그의 후손을 자처한 티무르가 같은 땅을 몇 번이고 침략해야 했던 데 비하면 칭기즈 칸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참고로 저런 말살 명령을 보면 은근히 비유적인 문구가 많다. 수레 바퀴보다 큰 남성은 다 죽이라거나 두 발로 걷는 것들은 다 죽이라거나... 이는 《원조비사》 자체가 문자가 없던 시절 구전에 의존해 역사를 전한 유목민의 전통에 따라 운문으로 쓰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의 경우 이 원어를 그대로 작중 말풍선에 복붙하여 읽다보면 몽골 사람들이 래퍼로 느껴질 정도다.

지휘관으로서의 재능은 뛰어난 편으로 13익 전투, 카라칼지드 사막 전투 외에는 패배를 당한 적이 없었다. 패배는 패배지만 그 카라 칼지드 사막 전투에서도 케레이트의 군기를 빼앗고 주요 지휘관 중 한 명인 옹 칸의 아들 셍굼을 부상 입히는 전과를 올린다. 물론 이건 칭기즈 칸의 종친인 주르체데이와 쿠일다르의 활약이 컸지만 케레이트의 기습에서 벗어나서 얼마 안 되는 생존 병력을 모아서 케레이트와 혈전을 벌일 정도의 능력을 보여주기는 했다.

기후 변화가 승리의 주요 요인으로 꼽히는 쿠이텐 전투에서조차 신속한 기동력을 이용해 유리한 지형을 점거하는 노련함을 보이고 차키르 마우트 전투에서는 횃불을 이용해 나이만을 속이는 등 군사적 재능도 뛰어났다. 특히 몽골 통일 이후에 그의 군사적 능력은 빛을 발휘하면서 금나라 정벌, 호라즘 정벌, 서하 정벌 등 자기가 지휘한 전투에서는 모두 승리를 거둔다. 대표적인 사례로 몽골 제국에게 첫 패배를 안겨준 잘랄 웃 딘도 칭기즈 칸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지휘해서 격파했다. 문맹인데도 불구하고 슬로-슬로-퀵-퀵 같은 몽골의 전략 전술을 짜낼 정도다. 성격도 잔혹해서 권력에 도전한 자는 벡테르든 아니면 자신의 성공을 예언했던 집단이든 가차없이 죽였다. 몽골의 전통적인 교육마저 제대로 받지 못해서 은근히 무시를 당하기는 했지만 자무카 같은 경우는 그를 진짜 괴물처럼 묘사했다.

이러한 군사적 재능과 괴로운 경험이나 고난을 겪으며 이를 이기는 인내, 긍정적인 성향, 이로 인해 당시 초원의 여타 지도자들이 제시한 바 없던 '공평한 사회'의 비전을 지녔고 그것이 그를 승리하게 했다. 이 공동체는 사실 현대인의 입장에서도 단순히 공평할 뿐 아니라 전쟁 시스템적인 측면에서 매우 효율적이다. 타타르 학살을 위시한 몽골의 세계정복 과정에서의 학살 과정은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공장 작업 공정과도 유사하게 진행되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테무진 자신은 인간적으로는 강인한 전사 내지는 마초로만은 해석될 수 없는 부분이 주를 차지하는 사람이었다. 인간적으로도 상당히 털털하고 소박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세계 정복 프로젝트가 이뤄지던 말년의 죽기 며칠 전에 한 말이 "다시 태어난다면 평범한 사람으로 평범한 게르에서 살다 평범하게 늙어 죽고 싶다" 라는 부분은 그의 전반기 인생 여정을 보여주는 것은 물론 자신이 걸어온 길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는 유언도 있다. 한 이맘과의 대담에서 이맘이 칭기즈 칸이 지나치게 학살을 하여 역사에 기록되지 않을 것이라 하자 이 세상엔 수많은 왕들이 있고 그들이 모두 자신의 이야기를 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몽골민족 전통 풍습을 죽을 때까지 따랐고 사치를 싫어했다. 자신을 높이는 형용사마저도 싫어하여 황족은 그를 테무진이라 불렀으며 공문서에도 그의 이름 앞에 다른 명칭이 붙는 것을 싫어했다. 각종 종교들에게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이 때문에 몽골의 풍습이 침식되는 것은 절대 바라지 않았다. 대표적인 예로 몽골은 씻을 때 그 기운이 빠진다고 여겨 세정 의식을 거부했지만 이슬람교는 세정 의식을 중시한다. 또한 이슬람에서 가축을 도축하는 풍습은 피를 신성시한 탓에 가축을 잡을 때도 가슴 부위만 약간 절개한 뒤 손을 집어넣어 심장 동맥을 따서 즉사시키는 도축 방법을 쓰던 몽골인들과 큰 차이를 보였다. 이 때문에 이슬람교와 몽골 정복자들의 갈등은 컸다.

이러한 태도는 현대 몽골인들이 그를 존경하는 이유 중 하나이며 그의 후손으로 몽골 제국의 중국화를 몇 단계나 가속시켰다고 평가되는 대원제국 황제 쿠빌라이 칸과 자주 비교되는 모습이기도 하다.

그가 죽을 무렵 도교의 사제 장춘 진인( 구처기)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이때 그 자신에 대한 상세한 얘기를 했다. 칭기즈 칸 본인은 자신의 능력이 뛰어나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적들이 사치스럽고 불경하여 승리한 것이라고 얘기했다. 그의 후예를 자처한 티무르도 비슷한(?) 말을 한 바 있는데, 대충 "걔네들이 개기지만 않았어도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을..." 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칭기즈 칸 본인은 사치를 싫어한다고 얘기했다. 그의 백성은 자식처럼, 능력 있는 자는 출신을 불문하고 형제처럼 대했다고 얘기했으며 그의 장군들과는 끈끈한 우애로 이어져 있다고 얘기했다. 일례로 몽골 통일 전쟁 때 오로오드 족의 수장으로 자무카의 부하였다가 13익 전투에서 패배한 자신을 따라온 주르체데이(Jurchedei)를 신뢰의 의미로 천호장으로 만들고 자신의 아내 중 한 명을 주기까지 했다.

장춘 진인은 처음 칭기즈 칸을 만났을 때 칭기즈 칸이 살육을 멈추도록 설득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칭기즈 칸은 그와 긴 시간 얘기한 뒤 그를 마음에 들어해서 그가 중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편안히 가도록 조치를 취해주었으며 그로 하여금 중국의 도사들을 통제하도록 해주었다. 장춘진인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자신을 잊지 말아달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알렉산드로스 3세가 자신을 따라온 아리스토텔레스의 조카 칼리스테네스가 아시아식으로 자신을 숭상하는 것을 거부하자 나중에 죽인 데 비해 칭기즈 칸은 장춘 진인이 칭기즈 칸의 저녁 초대를 거부하고 도사로서 술을 거부해도 그를 공경하며 대했다.

칭기즈 칸의 주 전술은 심리전이었다. 대표적으로 일부러 마을들을 공격한 뒤 마을 사람들을 성 안에 몰아넣어 성 안의 식량이 떨어지게 만들어 스스로 공격하게 하는 것. 또한 몽골군에 대한 악명을 부풀려서 적들이 스스로 기게 만들었다. 이런 소문이 과장되어 중동 역사서에서는 나쁜 부분만 적히게 되었고 칭기즈 칸을 사이코패스로 보는 서양인도 존재.

그런데 그냥 과장된 소문이라고 하고 넘어가기엔 어려운 충격적인 만행을 자주 저질렀던 것도 사실이다. 뒤통수 때린 도시는 여자와 노인, 아기들까지 싸그리 죽인다던가, 공성전 시 포로를 앞세워 돌격시켜서 수성측의 화살을 소모시키고 포로의 시체로 해자를 메운다던가. 타임지에서는 13세기의 인물로, 워싱턴포스트도 칭기즈 칸을 지난 1,000년간 가장 중요한 사람 중 한 명으로 꼽았지만 깡패라고 썼다.

반대로 19세기 유럽이 아시아를 야금야금 정복하는 일에 반발한 아시아인들 사이에선 칭기즈 칸을 영웅으로 보기도 했다(예로 인도 자와할랄 네루). 물론 같은 아시아지만 서아시아는 직접 갈렸기 때문에 유럽 이상으로, 아니 끔찍하게 싫어한다. 처음에야 살육만 했지만 원정을 하면서 도시의 가치를 인정하게 되었다.

칭기즈 칸 본인은 고문을 법적으로 금지했다. 물론 형식적 금지였는지, 몽골 기록에도 자기가 하고 싶으면 했다고 한다.(...) 죽일 거면 그냥 죽이고 살릴 거라면 그냥 살렸다. 후일 구육 칸 때 구육 칸이 정치에 간섭한 여인 파티마를 죽이며 이 법을 깼다. 또한 살육으로 유명하지만 《 원조비사》에서 호라즘 왕국 정벌시의 이야기에선 자신의 허락 없이 근접 국가를 공격한 부하에 분노하는 모습을 보였다. 죽일 땐 엄청 죽이지만 이유 없이 죽이지는 않은 것. 자무카를 잡았을 때도 자무카가 자신을 죽여달라고 하자 이유 없이 그를 죽일 수 없다고 해서 먼 과거에 있었던 일을 죄명으로 하고 죽였다.

참고로 선전포고 없이 쳐들어간 적은 없다. 선전포고는 언제나 "내가 참작할 기간 줄 테니까 그때까지 항복해. 항복 안 하면 어느 한쪽이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이니 기대해라" 라고 했고 이 말을 어긴 적이 없다. 물론 당연하게도 자신이 죽은 적도 없다. 물론 처리도 엄격해서 항복한 지역에서는 약탈을 금지했고, 맞서 싸웠던 곳은 철저히 파괴했다.

그러나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항복한 도시에 대한 학살 기록도 다수 남아 있으므로, 칭기즈칸이 항복=관용이라는 원칙을 지켰다고 알려져 있는 것은 당대 몽골군의 프로파간다에 불과할 가능성도 있다.

몽골 통일 과정에서 점령한 부족과의 사이를 호전시키기 위해 그들의 여자들과 결혼하고 각 부족에서 찾은 아이들을 자신의 어머니로 하여금 입양하게 하여 자신의 형제의 위치를 주었다. 초창기(보르테를 되찾은 첫 전투부터 자무카와 결별하기 이전까지쯤)엔 아버지가 죽은 후 고생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일종의 보상 심리에 따른 행동이었지만 나중엔 몽골 통합에 큰 도움이 되는 정치적 행동이 되었다. 또한 '우리는 모두 (의)형제' 라는 의식에서 반란을 방지하기 위함이기도 했고. 야율초재를 처음 만났을 때도 야율초재가 금나라에 멸망당한 요나라의 황족 출신임을 감안해 그를 대신해 원수를 갚아주겠다고 얘기했다. (야율초재가 거부하긴 했지만). 야율초재는 칭기즈 칸의 말에 "저도 그렇고 제 조상들도 금나라에서 벼슬 했는데 원수고 뭐고 있나요?" 라는 식으로 말했다.

야만스럽고 잔인하면서도 자신의 사람, 믿는 사람에겐 관대하며 친절한 사람이었다. 일단 장수를 채용할 때 제1조건이 바로 능력과 충성이었다. 자신에게 반항했던 첫 아들 주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며칠 동안 자신의 게르에 틀어박혀서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자신의 친아들이 아닐지도 모르는 주치를 큰아들로서 사랑한 것만 봐도 인간적인 부분이 있는 사람인데 동양권에선 이 부분에 신경 쓰지만 서양권에서는 크게 신경 안 쓰는 모양.

적을 용서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유일한 예외가 의형제였던 자무카. 자무카와 몇 번이고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자무카가 자신에게 잡혀오자 그를 자신의 2인자로 회유하려고 했다. 하지만 자무카가 죽여달라고 간청해서 결국 피를 보지 않는 방식으로 자루에 넣은 뒤 말발굽에 밟히게 해 죽이게 된다. 당시 몽골인들은 피를 영혼과 연결된 것으로 생각해 피를 흘리지 않는 죽음을 명예로운 것으로 여겼다. 자무카의 죽음에 대해서는 말발굷에 발히게 해 죽인다는 것 외에도 여러 전승이 있다. 자무카 문서 참고.

반면 자신의 명령을 어기는 자는 그 누구도 용서치 않았다. 아들들이 자신의 말을 안 듣고 싸웠을 땐 엄청 화가 나있다가 볼츠의 중재로 설교로 끝났지만 항복한 도시는 약탈하지 말라는 그의 명령을 어긴 칭기즈 칸의 사위는 즉시 일반병으로 강등되어 싸우다 죽었다. 이 덕분인지 페르시아의 역사서에서도 '칭기즈 칸 그 자식 재수 없긴 한데 나름대로 공평한 면은 있었다' 라고 기록한다.

하지만 칭기즈칸에게 "저항 없이 항복하면 살려준다는 원칙이 있었고, 이를 어긴 자는 가족이라도 징계했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는 것은, 후대의 역사가들이 정복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당대 몽골군의 선전을 특별한 의심 없이 마치 진실이었던 것으로 착각하여 그대로 기록하였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예컨대 대도시였던 발흐는 저항 없이 항복하였으나 모든 주민이 살해되었다. 메르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몽골군의 학살과 침공을 두려워 한 호라즘의 난민들이 몰려들어 메르프는 수십만 이상의 인구를 지니고 있었고, 그에 비해 군사력은 1만여 명에 불과했으므로 메르프의 총독은 모든 시민을 살려주겠다는 몽골의 약속을 믿고 항복했는데, 몽골군은 항복 직후 약속을 어기고 400여 명의 장인과 예술가를 제외하고 나머지 수십만을 전부 학살했다. 또한 두 도시 모두 혹시 적이 들어와도 제대로 사용할 수 없도록 초토화시켜 파괴해 버렸다.

별 위협이 될 정도가 아닌 규모라면 관대함을 가장하여 항복하면 살려준다고 선전했지만, 몽골군의 자유로운 이동에 조금이라도 위협이 될 것 같으면 그냥 절멸시켜 버린 것. 게다가 항복 후 약속을 지켜 살려준 경우에도, 저항하였음을 이유로 죽이지 않겠다는 것일 뿐, 예전처럼 살아갈 수 있다거나 향후의 생존을 완벽하게 보장해 주겠다는 뜻은 아니었으므로, 청년들을 징발해서 다음 도시 공격에 화살받이로 써먹은 경우가 많았다. 감독관만 몽골군으로 임명하고, 해자를 메우거나 참호를 파는 등 공성에 필요한 가장 위험한 역할은 모두 이들에게 시켰다. 주전력인 몽골군이 가장 위험한 역할을 회피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피정복민을 공격 맨 앞에 세워 동족 손에 죽게 함으로써, 혹시라도 전투에 패배할 경우 상대편으로 돌아설 수 있는 잠재적 적군까지 제거해 버리는 일석이조의 효과도 있었다.

이 견해에 의하면, 사위 토쿠차르의 경우 항복한 도시인 헤라트를 약탈하지 말라는 "구체적 명령"을 어겼기 때문에 강등당한 것일 뿐, 원칙에 어긋난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처벌한 것은 아니라고 보게 된다. 물론 "구체적 명령"을 어겼더라도 자기 사람이라고 감싼 사례가 많단걸 감안하면 그 시대 기준으로는 '공평한 면은 있다'는 말이 아주 거짓은 아닐지도 모른다.

어릴 적 아버지 예수게이가 죽자마자 아버지 부하들에게 배신받아 일가족 전체가 고생한 덕분에 배신자들을 매우 싫어했다. 물론 전쟁 전에 자신에게 항복한 자들은 환대하였지만 자신들 주군이 강성할 때는 온갖 꿀을 빨다가 자신들 주군이 전쟁에 져서 불리할 때 자신들 주군을 배신하거나 죽여서 항복한 자들은 신뢰가 없는 자라 하여 모두 사형에 처했다. 그중에 자무카를 배신하여 자무카를 포박하여 투항한 자무카의 옛 부하 다섯 명을 사형시켰다. 자무카도 이들이 어찌 될 지 알고 있었는지[4] 부하들이 자신을 포박해 끌고 왔을 때 칭기즈 칸과 대면했는데 칭기즈 칸 앞에서 "친구여 이놈들은 주인인 나를 배신하고 이렇게 붙잡아 왔다. 이런 배신자들을 넌 용납하지 않을 테지?" 라고 말했다. 이에 칭기즈 칸의 대답이 걸작이다. "물론, 주인을 배신해서 적에게 팔아먹는 악인들을 받아줄 리 없지." 칭키즈 칸은 어린 시절의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버린 것도 모자라 죽이고자 했던 키릴투크의 목을 잘라서 온 키릴투크의 옛 부하들도 모두 처형하였다.

또한 몽골 제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친족이든 공신이든 자신의 권위에 도전했던 자들은 철저히 누르면서 중앙집권화를 이루는데 성공하고 미리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오고타이 칸을 선정하였는데 이는 기존 흉노, 돌궐 같은 유목 제국들의 고질병이었던 중앙집권화 실패와 제위 계승 문제를 예방해 몽골 제국이 다른 유목 제국과 달리 급속하게 무너지지 않고 계속해서 확장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실제로 많은 유목 제국은 위의 문제들로 인해 전성기 이후 바로 분열되거나 멸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후계자를 미리 선정하는 것은 스스로 생각한 것은 아니고 뒤에 서술되었듯 황후 타타르 예수이의 충고에 따른 것이다.

4. 세계 각국의 평가

칭기즈 칸은 특히 서양에서는 공포의 상징이었다. 서양에서 칭기즈 칸과 비슷한 평가를 받는 인물은 몽골로이드 계열과 유럽계 인종이 혼재된 것으로 추정되는 훈족의 왕으로, 공포의 대왕이자 현세에 도래한 악마들의 군주 수준으로 묘사되는 아틸라 외에는 없다시피 하다. 특히 직접 피해를 받은 서아시아, 러시아 등의 지역에서는 전쟁광, 학살자 취급을 받기도 한다.

반면 칭기즈 칸이 같은 동양인으로서 역사상 가장 큰 제국 중 하나인 몽골 제국을 세운 창업 군주이기 때문인지, 동양에서는 몽골에게 호되게 당한 국가라도 유난히 이미지가 좋은 편이다. 튀르키예나 중국같은 곳의 유사 환빠들 사이에서는 자기 나라의 위인으로 추앙하기도 할 정도다.

4.1. 몽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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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에 있는 40m 기마 동상.[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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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화폐인 몽골 투그릭 지폐 도안도 칭키즈 칸이다.

개인적 고난을 무릅쓰고 오합지졸이나 다름없던 몽골 부족들을 통일해 오늘날의 몽골족을 확립하고, 이를 넘어 인류 역사상 최대 제국까지 건국한 몽골사의 비조이니 몽골인들에게 사실상 역사적으로 몽골 국가 몽골 민족 시조+ 국부와 같은 존재로서, 한국으로 치면 단군왕검+ 광개토대왕+ 문무대왕+ 세종대왕+ 이순신급 대위인으로 숭상받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칭기즈 칸이 몽골 부족들을 하나로 모아 통일하지 못했더라면 몽골족 또한 한때 초원을 호령하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여러 부족들처럼 멸족되거나, 나라 없는 소수민족으로 전락했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몽골의 문자와 법전도 만들었으며 칭기즈 칸 본인도 자신의 고향을 매우 사랑했으니 몽골에서 시조로 모시기엔 이만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대한민국 단군, 고대 로마 로물루스와 비견되며 앞선 두 인물이 신화 속 인물인데 반해 칭기즈 칸은 역사의 인물이니 몽골사에서 신화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겠다.

유목민족들 가운데 오늘날 자신들의 나라를 가진 민족은 몽골족 튀르크족 뿐이다. 동아시아만 해도 역사에 이름을 떨쳤던 유목민족인 흉노· 선비· 돌궐· 거란도 그때 잠깐 흥했을 뿐 모두 사라졌던 것을 볼 때, 청나라까지 이어진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 여진과 함께 연약했던 부족들을 끌어모아 유목제국을 일으켜 하나의 민족으로 단단히 뭉친 칭기즈 칸의 업적은 확고하다. 게다가 여진족의 후예인 만주족이 오늘날 나라 없는 민족이 되어 언어, 문화적으로도 한족에 거의 동화되어 사라질 위기에 처했음을 감안하면 칭기즈 칸의 몽골 통일은 대단한 업적이다. 단 몽골족은 만주족과 달리 운도 작용했는데, 만주족은 약 300년에 가까운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중원을 지배하였으며 상당히 한족의 문화를 받아들였다. 그렇기에 한족에 동화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반면 몽골족은 100여 년 정도의 짧은 시간에 그나마도 국가 주도의 한화를 실행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한족이 주로 살던 강남까지 제대로 된 행정력을 발휘하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민족적 독자성을 유지했고 청나라가 붕괴하면서 청나라 치하 몽골도 독립할 수 있었다.

현재의 위상과 달리 20세기 냉전 시절에는 칭기즈 칸에 대한 찬사가 금지되었던 역사도 있었다. 키예프 공국 시절 몽골-타타르의 멍에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진 소련 위성국인 몽골에게 압력을 넣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공산주의 시절 몽골에서는 칭기즈 칸에 대해 역사 시간에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고, 공식적으로 언급도 거의 하지 못했다고 한다. 지금처럼 칭기즈 칸을 민족의 위인으로 공식적으로 대우하기 시작한 것은 소련의 영향력이 사라지고, 몽골이 민주화된 1990년대의 일이다.

지금도 몽골은 칭기즈 칸 국제공항 등처럼 그를 기리는 명칭이 많은 편이다. 상표에도 그의 이름을 따오는 경우가 많다. 2013년에는 수도 울란바토르 시내에 있는 수흐바타르 광장을 칭기즈 칸 광장으로 바꿔서 정치권의 옛 공산주의 세력과 민주화 세력 간의 갈등이 있기도 했다. 지금도 몽골에선 칭기즈 칸과 담딘 수흐바타르가 모두 국가적 차원에서 영웅시되고 있다. 결국 명칭 변경이 위법이라는 사법부의 판결에 따라 다시 수흐바타르 광장으로 돌아갔다.

4.2. 동아시아

4.2.1. 한국

결론부터 말하면 고려 시절 몽골 제국 피터지게 싸운 역사가 있음에도 칭기즈 칸 자체에 대해선 꽤 호평하는 분위기가 있다. 특히 20세기엔 과거 서양까지 동양의 힘을 떨쳤다는, 현재 서양에 대한 열등감을 해소하는 옥시덴탈리즘 대리만족적 성향 역시 어느 정도는 겹쳐져 긍정적인 내용만 부각되던 시절도 있었으나, 21세기 들어선 칭기즈 칸에 대한 여러 얘기가 대중들에게도 알려지며 엄연히 학살자임도 인식하는 추세다.[6] 그래도 뛰어난 군사 능력이나 리더십 및 역사적 영향력 등은 그것대로 평가하는 편.

이는 여몽전쟁이 칭기즈 칸 사후, 그의 유언과도 무관하게 일어난 전쟁이기에 칭기즈 칸과 고려는 일단 직접적인 악연이 없다는 것도 고려된 부분일 것이다. 몽골이 고려와 수교(형제국)를 맺으면서 서서히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게 칭기즈 칸 말기부터였지만, 정확히는 몽골과 고려가 수교를 개시한 이후 칭기즈 칸은 서방원정을 갔고, 이 당시 고려와의 관계는 그의 동생인 테무게 옷치긴이 맡고 있었다. 양국 관계가 어긋나기 시작하는 저고여 피살 사건은 1225년에 일어났지만 이 당시 칭기즈 칸은 서하 원정 중이라 당시 몽골의 대 고려 정책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고, 여몽전쟁이 시작되기 4년 전인 1227년에 사망한다.

그리고 고려가 몽골에 굴복할 때도 나름 외교를 잘한 덕에 주변의 금나라, 남송, 서하 등처럼 나라가 완전히 갈려나가진 않고 오히려 고려 왕실은 몽골 공주와의 정략결혼을 통해 황금씨족과 접점이 생겼다는 점도 약간의 몽골뽕을 주입받는 근거가 된다. 물론 황금씨족은 정확히 따지면 부계만 이어지긴 했다. 그래도 엄연히 부마라 덕분에 원 제국의 제1번국으로 취급받았다. 사실 직위 자체만 보면 동방 삼왕가에 버금가는 위치까지 올라가 차기 칸을 뽑는데도 일정 영향력을 행사하는 수준이었으니[7] 나라 자체가 멸망한 곳보단 훨씬 나은 신세긴 했다. 물론 이건 왕실 한정이고, 일반 고려 백성들은 구 금나라 고토의 북방 한족인 한인과 비슷한 대접을 받았다.

그래도 원나라 멸망 이후 현재의 몽골은 한국과 직접적으로 국경이 맞닿지도 않고 약소국으로 전락하여 주변 강국에 비해 영향력도 적어 분쟁의 소지가 없기에 굳이 몽골 위인으로 평가받는 칭기즈 칸을 과하게 폄하할 이유가 없다.

4.2.2. 중국

"20살이 되자 ‘우리의’ 칭기즈칸이 유럽을 정복했으며 그때가 우리나라의’ 최전성기였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25살이 되었을 때 소위 ‘우리나라(중국)의’ 최전성기는 사실은 몽골인 중국을 정복해서 우리를 노예로 만들었을 때였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
루쉰
위의 루쉰의 글은 몽골족까지 품은 만주족이 다스리는 다민족 국가 청나라 사람으로 자라났다가, 20세기 초 젊은 시절 멸만흥한의 기치를 띄고 한족이 청나라를 몰아내자고 외치던 당시의 중화권 분위기를 느낀 루쉰 자신의 심정을 대변하는 말이라 할 수 있겠다. 정작 오늘날 다민족국가 중국을 보면 묘하다.

중국에서는 한족을 중시하는 대한족주의자 위주로 칭기즈 칸을 싫어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오늘날 중국은 명목상 다민족국가지만, 실질적으로는 한족이 주류민족으로 소수민족을 지배하기 때문에 참 여러 논쟁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전반적으론 어느 정도나마 좋아하는 편이다.

칭기즈 칸을 중국의 위인으로 떠받드는 중국인들의 논리에 따르면 일단 칭기즈 칸 자체가 몽골족이고 몽골족은 중국의 소수민족, 즉 몽골인⊂중국인이며 북방 한족들은 혈통상으로 몽골족과 매우 가깝다. 몽골족의 중국 지배 이전에도 같은 몽골 제민족인 선비족 거란족이 중국 북부를 다스리며 북방 한족들과 혼혈된 바 있다. 그러므로 그들에겐 단순 역사적 논란이 있는 쿠빌라이 칸이나 원나라뿐만 아니라 " 칭기즈 칸 중화영웅이고 몽골 제국 중화제국이다." 몽골 제국, 몽골사 중국사라는 식으로 주장한다.

심지어 시진핑 찬양가에서도 이 논리를 써먹고 있다. 이 노래에 따르면 칭기즈 칸은 삼황오제, 진시황, 한무제, 마오쩌둥, 시진핑 급 중화 영웅이다(...).[8]

실제로 칭기즈 칸과 몽골의 원정 관련 동영상들을 보면 "중화민족이 세계를 재패했다.", "이것이 중화의 힘이다!"라며 흡족(...)해하는 중국인들의 댓글[9]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중화사상에 써먹는 모델로서 내몽골 자치구에 가짜 무덤까지 만들고 몽골이 지배한 곳은 죄다 중국 땅이라는 식의 주장을 하는 네티즌도 있다.

중국 정권 차원에서 칭기즈 칸을 품으려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크게 보면 상당수 내몽골인들 사이에 잠재되어 있는 독립 욕구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정치적 필요에 더해 이른바 칭기즈 칸이 돈이 되는 관광자원이기 때문일 것이다. 中 “칭기즈칸은 위대한 중국인” 억지.

대체로 내몽골족 출신 중국인들과 북방 지역 한족들이 칭기즈 칸을 중국인이라 주장하는 편이다.

반면, 남중국 출신 중국인들은 원나라 황제뿐 아니라 칭기즈 칸에 대해서도 그렇까지 각별하게 생각은 안하는 경우가 많다지만 후술된 사례를 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닌 모양. 북방 지역 한족들 뿐만 아니라 홍콩인, 대만인, 화교 등 중국 외 중화권에서도 칭기즈 칸이 중국인이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 나오고,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기 이전 시대 사람인 루쉰도 칭기즈 칸이 중국인이라는 말을 들었던 걸 보면[10] 중국인들의 칭기즈 칸 사랑이 꼭 단순 중국의 막북공정식 팽창주의적 역사 공정의 결과물인 것도 아니다.

이런 공정 자체가 이전 세대의 일부 사상을 답습한 결과기도 하다. 칭기즈 칸+몽골제국사를 중국사로 끌어들이려는 해석은 중공뿐 아니라 이미 청나라 시기나 그 이전 어디쯤부터 중국의 중화사상 지지자들 사이에서 지지를 받은 본질 자체는 상당히 오래된 이론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다만 이전에는 소수민족이 지배층이다 보니 생존의 문제까지 겹쳐 소수민족끼리 혹은 한족까지 단결용으로 써먹는 소재였다면(민족 상관없이 중국인으로써 천명을 받들어 중국을 통치하고 유학(성리학) 잘하면 그게 중화인이다라는 식으로 주장한 청나라가 대표적), 한족이 주류가 된 지금의 중국은 사실상 그 시절에는 피지배민족으로 핍박받던 한족이 중국 내셔널리즘에 도취되어 나머지 소수민족 역사까지 차지하려는 형태가 된다는 게 내로남불일 뿐이다.

심지어 20세기 초중반 중화민국 시대에는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아 그냥 몽골 땅도 중국 땅이라고 주장했으며, 중국국민당 타이완으로 쫓겨난 이후에도 장기간 타이완에서 판매되는 중국 지도엔 몽골이 중국 영토로 되어 있었다.

2020년 10월, 프랑스 낭트 박물관에서 칭기즈 칸 몽골 전시회를 하자 중국에서 칭기즈 칸은 중국인이라고 난리를 치면서 무산시켜 버렸다. #[11]

몽골 대통령궁에 왜 칭기즈 칸 초상화가 걸려있냐고 의문을 제기하는 중국인 #의 사례.

이러나저러나 팩트는 칭기즈 칸 본인은 당시 정체성이 몽골인이었지 중국인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훗날 쿠빌라이 칸이 칭기즈 칸을 원나라 태조로 추존했다지만 정작 쿠빌라이나 원나라도 중국인을 통치하기 위해 중화 문화 중 일부를 취사선택한 거지 여전히 몽골의 대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장 중요시했고 끝까지 중화에 동화되지 않은 이질적인 존재로 남았다.[12] 평생 몽골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한 칭기즈 칸 본인이 만약 이런 중국인들의 반응을 봤다면 매우 황당해하고 분개해했을 것이다. 스스로 문화유산을 파괴한 문화대혁명 당시의 홍위병 세대만큼은 아니지만, 시진핑 집권 전후로 상술한 지속적인 역사왜곡 작업+과도한 중화주의, 애국주의, 국수주의 세뇌 등이 겹쳐 중화주의에 매몰돼 자란 중국 20대 청년층들의 무지함, 무관심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다. 특히 중국과 연관이 없는 동양권 위인들의 출신을 죄다 중국으로 알거나 중국인 취급하는 젊은 층들이 부지기수이다.

4.2.3. 일본

일본에서도 한국과 비슷하게 정복군주+학살자 정도 시각을 유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는데다, 훗날 후손 일본을 침공하긴 했지만, 어찌됐든 원나라의 침공을 저지했기 때문에 굳이 악의적인 수준까지 폄하할 이유가 없기도 하다. 코에이의 게임 푸른 늑대와 흰 사슴 시리즈에서도 제목부터가 몽골이 주인공에, 몽골계 세력도 매우 강력하며 부정적인 묘사는 거의 없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4.3. 서아시아, 남아시아, 중앙아시아

페르시아의 역사서에서 칭기즈 칸은 아예 악마와 손을 잡았다고 기록되기도 하고, 이들에게 칭기즈 칸은 히틀러와 비슷한 사악한 침략자이자 학살자, 전범으로 취급되었으며, 실제로 이들은 그렇게 느낄 만한 피해를 입었었다. 거기다가 살아 생전에 초상화도 못 그리게 하고 그에 대한 역사도 못 쓰게 했던지라 그에게 당했던 국가들은 온갖 나쁜 이미지를 그에게 덮어씌웠고, 나중엔 '자신들의 나라가 못 사는 건 몽골족이 다 수탈해가서' 란 식으로 얘기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란, 이라크, 시리아, 팔레스타인, 요르단 같은 중동권 나라들에선 알렉산더 대왕과, 티무르와 함께 가장 최악의 침략자 중 하나로 꼽히는 인물이다. 《 론리플래닛》 지은이인 토니 휠러가 이 나라들에 가서 칭기즈 칸 이야기를 했다가 아프가니스탄에서 멱살까지 잡히고 "그 XX 이야기는 왜 하는데? 이름만으로도 기분 더러워. 또 그 말 하면 당신 가만 안 둬" 이런 소리까지 들을 정도였다. 몽골인의 후손으로 여겨지는 하자라족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란에서 흔한 화풀이 대상이기도 하다. 오죽하면 대놓고 괴롭혔다는 목격담이 많을 정도다. 하자라족이 받는 차별에 관해서는 아프가니스탄 출신 베스트셀러 작가 할레드 호세이니의 《 연을 쫓는 아이》에 잘 묘사되어 있다. 다른 나라에서도 이야기하니까 정말이지 기분 좋게, 긍정적으로 대꾸하는 사람을 도통 볼 수 없었다고 한다. 하긴 국토가 뿌리째 갈려나갔으니 그 나라 사람들이 학을 뗄 만도 하다. 이쯤 되면 오히려 동유럽과 한국이 온건해 보일 정도이다.

다만 몽골 제국의 침공을 당하지 않았던 리비아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같은 북아프리카 국가들과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오만, 아랍에미리트, 예멘 아라비아 반도의 아랍권 국가들에서는 이란이나 이라크 등에 비해 크게 악평을 받지는 않는 편이다. 다만 이 국가들에서도 문헌에 칭기즈 칸과 오고타이 칸 등 몽골 제국의 역대 칸들과 몽골 제국을 경계하는 기록을 현지 역사가와 이슬람 율법학자들이 서술하기도 했다.

튀르키예 카자흐스탄에선 조금 다르다. 치욕이라고 부르며 싫어하는 이도 있지만 튀르크인과 같은 유목민으로서 그 위치와 여러 가지 원인으로 싸우긴 했어도 이슬람이라고 탄압한 게 아니고 종교적으로 관용을 베푼 점이라든지 다른 유럽 기독교 나라보단 낫다는 평을 내리곤 한다. 일부 범투란주의자들은 칭기즈 칸을 튀르크족의 영웅이라고 보기도 한다. 애초에 튀르키예인 남성 이름 중에서 상당히 많이 찾아볼 수 있는 이름 중 하나가 바로 '젱기즈(Cengiz)' 혹은 '티무친(Timuçin)'이다. 카자흐스탄에서도 '싱그스(Шыңғыс)'라는 이름이 흔하며 여기에서 파생된 '싱그소프(Шыңғысов, 남성형)·싱그소바(Шыңғысова, 여성형)'라는 성씨도 있다. 양쪽 모두 당연히 칭기즈 칸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실 튀르크인과 몽골인은 원래 같은 생활 공간을 공유했고 오랜 유목 생활로 제법 많이 섞이기도 했다. 그리고 튀르크계인 러시아의 투바 공화국은 몽골의 영향을 받았다.

반면 원나라 때 색목인 계급으로 우대받았던 위구르인들의 경우 칭기즈 칸과 원나라를 대단히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반면 위구르인의 가까운 친척뻘 민족인 우즈베크인들은 자신들의 선조격인 호라즘 왕조가 칭기즈 칸 치세의 몽골 제국에 의해 무너진 것 때문에 위구르인들에 비하면 칭기즈 칸에 대한 평가가 영 부정적인 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과 별개로 칭기즈 칸의 후손격 티무르를 국부로 추앙하고 있지만.

파키스탄 인도, 방글라데시의 경우에도 자신들이 몽골 제국 티무르 제국의 후신인 것과 몽골 제국의 부마국임을 주창한 무굴 제국의 후예라는 식의 정체성을 가져서인지 몽골 세력에게 점령당한 다른 국가들에 비해 칭기즈 칸에 대해 긍정적이다. 파키스탄/인도/방글라데시계 무슬림 이름 중 제일 흔한 이름 중 하나가 바로 'Khan'으로, 무슬림 국가나 지역 중 이름으로 'Khan'을 많이 쓰는 나라는 위 세 나라밖에 없다.

물론 주변의 네팔, 스리랑카, 미얀마, 부탄도 소수의 무슬림들이 'Khan'이라는 이름을 쓰는 경우가 있다. 다만 몰디브의 경우 무슬림이 대다수인 것과 별개로 몽골 및 튀르크 문화권의 영향을 받지는 않아서 몰디브 내에서 'Khan'이라는 이름을 쓰는 이들은 절대다수가 조상이 남아시아의 다른 나라에서 이주해온 케이스다.

4.4. 서양

중세 시기 몽골군 유라시아 아랍 지역에서 이슬람 교도들을 박살낼 때, 유럽 기독교 나라들은 전설 속의 기독교 왕인 사제왕 요한이 자신들을 구원하러 왔다고 멋대로 착각을 하기도 했다. 유럽 기독교 국가에 구원을 요청하기 위해 온 이슬람 측(아사신 교단) 사신이 "아니다... 저들은 기독교도가 아니다. 지금까지의 적이던 우리가 갑자기 구원을 요청하다니 이가 갈리겠지만 저들은 우리보다 더하다. 우리가 당한다고 기뻐하지 마라. 곧 당신들 차례가 올 것이다."라고 급하게 말할 때, 유럽 기독교인들은 사신을 비웃으며 내쫓았다. 이때 이들 아사신 교단의 사신들은 멀리 잉글랜드에까지 가서 도움을 요청했는데, 잉글랜드의 대주교가 "어차피 너희 아사신이나 몽골군이나 우리 기독교인 입장에서는 모두 불신자요 개들이다. 그러니 너희들끼리 서로 물어뜯게 내버려 두는 편이 낫다."라고 말하면서 아사신 교단 측의 도움 요청을 거부했다.

근데 정작 동유럽이 점령당하고 중부, 남부 유럽이 잠깐 초토화된 것 빼곤 딱히 접촉이 없었고[13] 오히려 십자군 왕국들은 일 칸국의 유력한 동맹 후보국으로 몇 차례씩 동맹 요청 사신이 오갔다는 걸 감안하면 사제왕 요한의 전설이 딱히 틀린 것만도 아니었을 듯. 캅카스에 있던 기독교 국가인 조지아 왕국 같은 경우에는 몽골과 많이 엮여서 고생하긴 했다. 조지아는 몽골군과의 치열한 싸움 끝에 존중을 얻고 몽골의 속국으로 편입되었으나 당시까지만 해도 낙후된 공국 수준이던 러시아는 노브고로드 공화국을 제외하면 말할 것도 없이 갈렸다.

후손인 몽케 칸이 본격적인 유럽 정벌(로마까지)을 준비하다가 병들어 죽는 통에 몽골의 전통에 따라 이미 떠난 원정군들도 쿠릴타이에 참석하기 위해 반쯤 갈아놨던 중부 유럽을 그냥 포기하고 돌아오다보니 때를 놓치고 무산되어버렸다. 만일 몽케 칸이 이때 안 죽고 좀 더 살았더라면 정말로 이슬람 사신이 말한대로 유럽 여러 나라가 몽골 말발굽에 밟혔으리라는 주장을 펼치는 이들도 있지만 지금 와선 대체역사의 영역일 뿐이다. 최근 몽골의 유럽침공 연구결과가 인터넷상에도 소개되어 지나친 몽골군 고평가보다는 팩트위주 자료가 많이 논의되고 있다.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도 에드워드 기번은 칭기즈 칸과 그의 후손들 때문에 전 세계가 떨었다고 쓸 정도로 그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거기다가 기독교 연대기 중에도(《Chronicle of Novgorod》) 몽골군은 신이 내린 징벌이라 불릴 정도의 포스[14]를 보여주었으니 서구 쪽에서 영 좋게 보긴 힘들다.

서양에서 가장 잘 알려진 동양인 중 하나다. 지옥에서 만나게 될 사람 목록에 올라가 있다거나( 히틀러, 스탈린, 마오쩌둥과 함께), 훈족의 수령 아틸라와 더불어 무식한 야만인으로 묘사되는 경우도 있다. 닥터후에서만 봐도 닥터가 "칭기즈 칸의 군대가 다 몰려와도 타디스는 안전했다" 라고 말하면서 야만인 취급. 칭기즈 칸의 몽골 통일을 다룬 영화 몽골의 리뷰 중엔 칭기즈 칸의 인간적인 모습이 나오자 헛소리하지 말라고 야유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안 좋거나 희화화된 이미지와는 반대로 몽골과 칭기즈 칸을 이국적으로 신기하게 바라보는 서유럽인도 많다. 괜히 칭기즈 칸 노래가 독일에서 나온게 아니다. 아무래도 몽골에게 직접 피해를 입지 않은 지역이라 더 그런 듯도 하다.

해롤드 램은 몽골인을 이란 튀르크계의 혼혈로 보았다만 이 사람은 몽골인의 이야기 몇 개를 듣고 그걸 야사의 법문이라고 써놨다고 하니 믿음이 갈 리가 없다. 원래 유목 민족들이야 서로 같은 유목 생활권을 공유했고 거기다 동돌궐이나 위구르는 원래부터 내•외몽골에 있었으며 더 나아가 위구르 수도 카라발가순은 현재 울란바토르 인근이다. 몽골-투르크 두 민족이 얽히는 거 자체는 당연하다. 그리고 이곳에 잔류하던 튀르크인들은 서아시아의 연계성은 거의 없었고 중국과의 접촉이 가장 많고 돌궐이야 당나라와 시시때때로 괴롭히고 정복하고 정복당할 정도로 밀접한 관계였다.

오래 전부터 평이 엇갈려서 중동 쪽에선 아예 갈아먹을 악당으로 묘사되지만, 제프리 초서의 《 캔터베리 이야기》에서도 이름이 언급되는데 여기선 킹왕짱이란 식으로 묘사된다. 이름이 라틴어식인 Camius Khan의 변형이라 설명이 없으면 이게 누군지 알기 힘들지만. 연회를 여니까 아랍의 왕들이 알아서 선물을 보내올 정도로 묘사되지만 《켄터베리 이야기》가 원래 역사적 고증 같은 건 잘 안 따지는지라 칭기즈 칸이 우크라이나 남쪽에 살고 러시아와 싸운 걸로 유명한 걸로 나온다. 칭기즈 칸 본인은 러시아로 간 적이 없다. 거기다가 태어날 때부터 이슬람 교도였다고 나온다..

참고로 이 이야기가 나오는 건 수습 기사(Squire)의 이야기인데 아쉽게도 미완이다. 여하간 칭기즈 칸이 좋은 이미지로 나오는 드문 중세 유럽의 이야기일 것 같지만. 위에 나온 대로 중세 유럽에서 몽골을 기독교 나라로 멋대로 좋게 쓴 편이였다는 걸 생각하면 외외로 더 많을지도 모른다. 마르코 폴로의 《 동방견문록》을 봐도 원나라에서 기독교에 흥미가 있다고 쓴 걸 봐도.

러시아에서는 중근동에서 생각하는 이상으로 씹어먹을 철천지 원수로 여긴다. 러시아 지방은 작은 소공국으로 나뉘어 있던 지역이긴 했지만 이런 러시아를 무너뜨리고 240년이나 지배한 몽골-타타르의 멍에를 치욕으로 여기며 몽골 타타르의 대칸들 중 가장 유명한 칭기즈 칸도 당연히 증오의 대상이다. 그리고 타타르계 칸국은 러시아가 독립한 뒤에도 수백년간 러시아인들에게 살인, 강간, 약탈, 납치, 인신매매를 저질렀다. 납치와 인신매매가 얼마나 심한지 ' 슬라브 금발벽안 미녀 노예'가 이슬람 제국으로의 정기 수출품이었을 지경.

러시아에서는 한국과 중국에서 생각하는 북방민족, 왜구 이상으로 어그로가 쏠려있는데 그 최고 원조인 칭기즈 칸을 싫어하지 않으면 이상할 노릇. 러시아의 유명한 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은 "타타르의 지배는 파괴말고는 남긴게 없다"는 글을 남길 정도였다. 정확하는 몽골인들을 “ 대수학을 갖추지 못한 아랍인”이라고 표현했다. 몽골 지배 이후 러시아는 다른 유럽 지역에 비해서 굉장히 낙후된 상태로 사실상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다.

실제로 러시아/역사 문서나 모스크바 대공국 문서에 일괄적으로 이런 식으로 '몽골 덕분에 러시아가 통일되어 대제국이 될 수 있었던 것' 이라는 서술이 현재 전부 수정되었다. 방금 언급된 항목들에서 반박된 바와 같이 몽골의 러시아 지배 중 부작용으로 발생한 일부 긍정적 측면에만 집중하고, 몽골로 인해 러시아가 입은 막대한 피해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편파적이고 왜곡된 주장도 섞여있다고 봐야 한다. 몇줄 위의 서술처럼 '러시아 지방은 춥기만 하고 아무 쓰잘데기 없는 땅' 이라는 인식 자체에 문제가 있다. 키예프 공국의 중심지인 키예프 일대는 유럽 전체에서도 가장 손꼽히는 곡창 지대 중 하나인 초르노젬(흑토) 지대로, 농업 생산력이 곧 인구 부양력과 국력의 척도이던 당시 기준으로는 꿀땅도 이만한 꿀땅이 드물었다.

그리고 몽골의 침략 이전까지 동로마 제국의 문화적 영향력을 직접 받았던 러시아의 문화적 수준 역시 당시의 서유럽보다 높으면 높았지 절대로 낮지는 않았다. 오히려, 러시아라고 하면 춥고 척박한 땅이라는 이미지야말로 몽골 제국의 정복 이후 형성된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몽골의 침략 이후 현재의 우크라이나 흑토 지대에 해당하는 키예프 - 루스의 중심 지역이 약탈과 학살로 철저하게 파괴된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이 지역을 접수하는 바람에 러시아의 중심지가 춥고 척박한 동북쪽으로 이동한 것.

결국 키예프 루시의 공국 중에서는 후발주자로서 세력이 작은 편이었던 모스크바 공국 킵차크 칸국의 세금 수취를 대리하는 과정에서 세력을 축적하여 러시아를 통합하게 되지만. 이 과정에서 러시아는 키예프와 그 일대에 대한 영향력을 상당히 상실하였으며, 이는 현대의 우크라이나 러시아와 별개의 정체성을 주장하며 친서방 행보를 보이는 경우가 많은 데까지 이르고 있다. 즉, 러시아의 입장에서 보면 키예프 공국 성립 이후 350년간 개발이 진행되었던 알토란 같은 영토를 몽골의 침입으로 인하여 상실하고, 춥고 척박한 동북쪽에서 새로운 영토를 개척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250년 가까이 몽골의 지배를 받는 과정에서 러시아는 심각한 문화적 정체와 사회적 퇴보를 겪고 농노제가 더욱 각박하고 잔인해졌다.

그 사이 과거 대등한 상대였던 서유럽 국가들은 러시아를 아득히 추월하며 발전하였으며, 러시아는 18세기 ~ 19세기가 되어서야 이를 다시 어느 정도 따라잡을 수 있었다. 애초에 러시아가 열강으로서 유럽사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 18세기 초중반, 표트르 1세 개혁 이후임을 생각해 보면...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난 이후 피폐해진 국력을 수습하는 데 200년 이상의 세월이 걸렸음을 알 수 있다. 허나 국력만 그렇지 의식은 여전히 못 따라가서 가령 표트르 대제 사후에도 한동안 러시아는 지명상속제를 유지한 바람에 서구 국가들의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여기서 몽골의 침략과 정복, 지배가 열강 러시아의 탄생에 미친 긍정적인 영향을 찾아보자면 기존의 루스 공국들을 철저하게 파괴하여 모스크바 공국에 의한 재통합을 용이하게 만들었다는 정도인데, 그 철저한 파괴를 수습하고 회복하는 데 걸린 시간이 수백년에 이르는 상황에서 이것을 몽골의 을 본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사실 몽골의 침략 이전 교통과 통신, 통치 기술의 미비로 인하여 루스 공국들은 도시 국가 연합체 비슷한 형태로 분열되어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종주국격인 키예프 공국에 의한 재통합이 몇 차례 이루어졌음을 생각한다면 몽골의 파괴가 없었다고 한들 루스 공국들의 통합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의견 자체가 섣부른 면이 있다.

이를 두고 몽골 제국 덕분에 러시아가 통일되어 대제국이 될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은 일제 김일성 덕분에 한국이 신분제의 잔재를 털어내고 현대 국가로 거듭났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일제와 6.25 전쟁으로 인하여 기존의 사회 구조가 완전히 파괴되면서 한국에서 신분제적 잔재 역시 사라진 것을 사실이라 해도 이로 인하여 우리가 김일성의 을 보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소련은 몽골에서 칭기즈 칸에 대한 흔적을 없애고자 갖은 노력을 다 했으나 몽골의 친소파 정치인 같은 허수아비들조차도 칭기즈 칸만은 위대하다고 여겨 목숨 바쳐가며 칭기즈 칸의 흔적을 보존하고 연구하는 데 앞장섰다. 실제로 1960년대에 교육부 장관이 칭기즈 칸 관련 유적을 발굴하다가 (소련의 외압으로) 해임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얼마 후 살해되었다. 그리고 소련이 무너지는 시기에 몽골은 아주 열심히 찬양하며 기리며 소련의 이런 뻘짓을 소심하게 복수했다고 비난한다.

다만 이런 소련의 행태를 꼭 몽골 제국의 지배에 대한 복수라고 봐야 할지는 의심스럽다. 꼭 몽골이 아니더라도 원래 소련은 특유의 세계 인민주의(?)로 자국이나 위성국에서 내셔널리즘이 발호하는 것을 싫어했다. 몽골 이외의 위성 국가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였던 것. 그 예로 스탈린만 해도 고향인 조지아에서 내셔널리즘을 똑같이 처절하게 박살냈고 이전이나 이후에도 소련은 각 위성 국가들의 내셔널리스트 및 독립주의자는 학살로 싸그리 대했다. 이런 성향은 예전의 중국도 마찬가지로 문화대혁명을 일으키며 옛것들은 다 봉건잔재이므로 없애야 한다고 그런 점에서 공산권의 성향 때문에 그런 것이라 볼 수도 있다.

미국에서는 몽골 제국의 치세를 좋게 얘기해서 팍스 몽골리카를 팍스 아메리카나와 비교해서 자신들을 띄운다고 한다. 여하간 죽은 뒤에 이곳 저곳에서 정치적이나 자존심 싸움에 쓰이는 신세가 되었다.

기독교를 특별히 싫어하지 않은 데다가 중립적으로 대하고 손자인 쿠빌라이 칸 바티칸에 요청하여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한 사례 등 때문에 의외로 정교회를 제외한 기독교에서는 큰 감정은 없는 편이다. 훈족 아틸라 마냥 유럽에 '하느님의 징벌' 급의 포스를 뽐내었지만, 정작 탈탈 털린 동방 교회 쪽과 달리 서유럽은 점령 당하지 않은 것도 한 이유일 것이다.

4.5. 총평

칭기즈 칸이 고결한 지도자이자 훌륭한 통치자인지, 반대로 피에 굶주린 살인자인지는 당신이 누구에게 묻느냐에 달려 있다. 오늘날 몽골에서, 그는 그들이 좋아하는 나라의 아버지이고, 그의 많은 정치 개혁은 선구적이었다고 지지받고 있다. 그러나 이전에 점령지였던 이라크나 이란에서는 그를 학살적이고, 견디기 힘든 파괴와 피해를 일으킨 광적인 폭군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의 스토리가 위대함인지 잔인함인지에 대한 논쟁과 온갖 과장과 관계없이, 그는 의심할 여지 없이 고대 세계에 가장 중요하고 영향을 많이 끼친 지도자이며, 그의 유산은 오늘날까지 강하고 뚜렷하게 남아 있다.
- 문명 5 백과사전
칭기즈 칸의 등장과 몽골의 발흥은 세계사의 시각에서도 그야말로 혜성과 같았는데, 이를 좋게 말하자면 그만큼 칭기즈 칸의 몽골이 역사적으로 큰 족적(팍스 몽골리카)를 남겼다는 것을 뜻하며, 부정적으로 생각하자면 서양에서 재앙의 징조로 여겨졌던 혜성에 빗댈 수도 있다.

누군가는 동양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중세 히틀러라고 할 만큼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칭기즈 칸이지만, 적어도 세계 역사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거인 중 한 명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흔히 비교되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수식하는 설령 위대한 군주가 아니었다고 해도, 거대했던 군주라는 칭호는 오히려 더 넓은 영토를 차지한 칭기즈 칸에게 좀 더 맞다는 말도 많을 정도이다.

한편, 칭기즈 칸의 군대에 의해 죽은 사람의 수는 1900만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며[15], 당시 세계 인구가 4억이 안됐기 때문에 무려 4.75% 가량이 사망한 것이며, 이는 2022년 현재 기준으로 3억7천만명의 사람이 죽은 것과 같다. 칭기즈 칸은 아마도 거의 인류 최초로 '민족 몰살'[16]을 자행한 군주라는 주장도 있으며, 이는 역사적으로도 보기 드문 끔찍한 일이다.[17]

칭기즈 칸에 대해 평가할 때는 이 인물이 몽골 내부적으로는 씨족과 부족의 틀을 넘어 사회를 개편하고 국가의 기반을 건설한 개혁자이자 입법자이고, 몽골 외부적, 즉 세계적으로는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정복한 정복자라는 점을 분리하여 생각할 필요가 있다. 전자의 업적은 물론 후자의 업적의 기반이 되었지만 이 둘은 엄연히 다른 업적이다. 즉, 칭기즈 칸은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정복한 정복자이고, 이 정복으로 탄생한 몽골 제국의 영역 내에서 일어난 방대한 교류가 세계사적 전환의 계기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칭기즈 칸이 그의 제국 전체에서 입법자이자 개혁자였다고 볼 수는 없다.

흔히 자연공동체에 가까운 부족, 씨족과 그 관습적 체제를 탈피하여 보다 광범위하고 공적인 사회의 기반을 만들고, 그 기반에서 통용될 성문화된 법을 만들었다는 것이 칭기즈 칸의 대표적 업적으로 꼽힌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몽골 초원 안에서'나 선구적이고 혁신적인 개혁이었지, 초원 바깥의 세계에서는 빠르면 수천년, 늦어도 수백년 전에 이미 진행되고 있던 현상이다. <테무진 to the 칸> 같은 매체에서는 이 두 영역을 제대로 구별하지 않다보니 마치 칭기즈 칸이 그가 정복한 제국의 영역 전체에 대해 위대한 입법자이자 정치개혁자였다고 잘못 묘사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몽골 제국이 '세계 최초의 근대국가' 라는 황당한 서술까지 나왔다.

그래도 어찌됐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비슷한 평가를 받듯 칭기즈 칸도 이후 '동서 문명의 교류'를 결과적으로 촉진시킨 인물이라는 것을 분명하다. 물론 역사 관련 팟캐스트 진행자인 댄 카린(Dan Carlin)은 몽골 제국 관련 에피소드에서 칭기즈 칸을 평가하면서도, "몽골이 동서의 교류를 활성화시켜서 중국에겐 더 큰 도움이 되었다"는 한 학자의 말에 "당신이 당시 중국인이면 가족들의 목숨이랑 경제적인 부랑 비교를 할 수 있겠냐"라는 식으로 반박하기도 했다.

그러나 칭기즈 칸은 본인이 살기 위해 벌인 숱한 전쟁에서 살아남다 보니 거물이 되어버린 뭔가 웃프기도 한 인물이다. 특히 대항해시대를 열어서 서유럽이 현대 세계를 만들었다고 보는 학자들은 "칭기즈 칸과 몽골의 등장은 세계사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이라고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몽골의 진격으로 서유럽이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 그래도 동쪽으론 감히 못가겠으니 혹은 바다를 통해 좀 더 빨리 부유하다고 알려진 아시아로 가기 위해 서쪽 바다로 나가는 계기가 되었다는 식이다. 또 이들 중 일부는 칭기즈 칸이 학살자긴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정복 군주 대비 특별히 더 악한 놈은 아니었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실제 칭기즈 칸은 항우처럼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학살한 적은 없고, 빠르게 항복하거나 친선을 맺으면 그 어느 제국보다도 관대했다는 자기 나름의 기준은 있었다. 다만 칭기즈 칸은 학살과 파괴를 너무 잘해서(...) 여러 지역에서 악명이 더 높아졌을 뿐이라는 것이다. 실제 인재 활용 등에선 일반적인 막장 군주와는 차이가 있다.

물론 칭기즈 칸에 부정적인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갈아 죽여버려도 시원치 않은 악당 취급을 받고 있다. 특히 중동이나 러시아처럼 철저히 유린당했던 나라는 당연히 싫어한다. 러시아가 몽골의 지배하에 있던 시기를 일명 타타르의 멍에라고 칭하면서 유목민족들을 매우 증오했다. 그러나 현재 러시아에는 부랴트인, 칼미크인 등 몽골계 소수민족이 많기 때문인지 서아시아처럼 무작정 부정되지는 않는 분위기가 있다. 바이칼 호의 알혼 섬처럼 칭기즈 칸의 이름 값을 이용하기도 하고 차 브랜드로 칭기즈 칸이 있기도 하다.

조지아, 헝가리, 불가리아, 베트남 등 칸국들이나 원나라와 엎치락뒤치락 싸웠던 나라들은 내심 몽골을 막아낸 업적에 자긍심을 느끼며, 서유럽 같은 곳은 몽골인을 직접 대면하진 않았기 때문에 싫어한다기보단 군사에나 통달한 유목민 이미지가 강하다. 의외로 동유럽에서도 이미지가 그렇게까지 부정적이진 않다. 침략을 당하긴 했지만 러시아와 달리 몽골의 지배를 받지 않았고 오히려 막아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가장 싫어하는 곳은 역시 직접 제대로 털린 서아시아다. 이쪽에서는 이름도 함부로 못 꺼낸다는 말이 있다.

튀르키예는 본래 아랍 계통이 아니라 유목민족인 튀르크이기 때문에 같은 유목민족인 몽골족과 통혼한 역사도 있고 해서 테무진 같은 몽골식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 외에 튀르키예에는 텡기즈(칭기즈), 아틸라 등의 이름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아무튼 칭기즈 칸의 평가는 지금까지도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그의 생애나 정복업적을 좋아하는 시선 외에도 동과 서를 연결하여 동서양 문화의 교류를 마련해 주었다는 긍정적인 시선이 있는 반면, 그가 이끄는 몽골군이 행한 파괴와 약탈을 비판하며 그가 없었다면 인류 문화 유산은 훨씬 더 많았을 것이라면서 인류 문화의 파괴자로 바라보는 시선 역시 있으며, 두 의견 또한 모두 타당하다고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논쟁이 영원히 계속되고 있듯이 칭기즈칸이 정치, 경제, 문화 등에서 세계사를 뒤흔드는 큰 충격을 주었다는 점에서 칭기즈 칸의 업적은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1] 예를 들어 법규 적용에서 몽골인에게는 자삭을, 중국인에게는 중국 법규를, 색목인들에게는 각자 귀속된 집단의 법규를 적용. [2] 출처: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김호동 [3] 참고로 여기서 한반도 방향으로의 진격로는 고려를 침공한 것이 아니라 강동성 전투를 의미한다. [4] 자무카는 칭기즈 칸의 오랜 친구였다. 그런 그가 칭기즈 칸의 성격을 몰랐을 리는 없다. [5] 2010년에 세웠으며, 현존하는 기마 동상 중 가장 높다. 참고로 저 동상의 말 머리에 올라갈 수 있다. 사진. [6] 애초에 칭기즈 칸 뿐만이 아니라 정복군주 중에서 학살자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 자체가 없다. [7] 원무종 충선왕의 지지를 받아 즉위했는데 충선왕은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로서 차기 대칸을 뽑는 쿠릴타이에 참석해 목소리 낼 자격이 있었기 때문이다. [8] 이들 전부 시진핑만 빼면 다들 정복 군주에다가 태평성세와는 거리가 먼 인물들이라는 게 포인트다. 진짜로 명군이라 대접받을 만한 소양왕, 한고제, 한문제, 홍치제, 강희제 등이 왜 언급이 안 될까? [9] 더 웃긴건 이런 중국인들이 '중화의 힘'이라고 치켜세우는 몽골이 남송을 멸망시키는 부분에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비통한 분위기로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모습으로 바뀌곤 한다. [10] 다만 당시 청나라는 지금의 내/외몽골을 모두 흡수한 상태긴 했다. [11] 비슷하게 대영박물관에서 한국 설날 기념공연을 기획했다가 중국의 전통문화를 한국의 문화로 둔갑시켰다면서 중국인들의 집단 테러를 받고 취소된 바가 있다. [12] 쿠빌라이 칸이 중화 문명에 심취했다지만 그 이후의 원나라 황제들은 중화문명이나 중국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심드렁한 모습을 보였다. 로마 문명에 열광하고 로마의 황제를 자칭한 메흐메트 2세와 그 이후부터는 로마 황제직을 자신의 수많은 작위들 중 하나로밖에 생각하지 않은 후대의 오스만 제국의 황제들을 생각하면 비슷하다. 다만 원나라보다 더 후대의 청나라는 원나라와 달리 중화 문명에 많이 동화, 특히 강희제가 수십 년간 장기 재위하면서 (물론 만주족의 정체성도 동시에 지키고자 노력했지만) 중화 문명을 많이 수용하여 청나라의 한화가 진행되기 시작했고, 청말 선통제 대에 이르면 황제인 선통제 본인도 만주어를 거의 할 줄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는 원나라와 청나라의 국가 형성 방식의 차이에도 원인이 있는데, 통째로 새 나라를 세워 송나라를 복속시켜 흡수한 원나라와 달리 청나라는 나라 자체는 '후금'이라는 이름으로 통째로 새롭게 세웠어도 명나라를 직접 복속시켜 흡수한 게 아니라 이미 이자성의 난으로 명나라는 멸망한 상태에서 이자성이 참칭한 순나라 잔당을 마저 제거하고 비어 있는 중원에 입성하여 명나라를 국가승계로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옛 명나라의 기반을 무시할 수는 없었기에 한족에게 당근과 채찍을 병행하며 만주족과 한족이 상호 영향을 받아갔고, 무엇보다도 청나라 황실은 이민족 국가치고는 드물게 유교를 적극 수용하여 엄격한 유교적 질서를 강조했다. [13] 그리고 원정이 대체로 순탄하게 진행된 러시아와는 달리 몽골군이 남송에서처럼 고전한 일도 많다. [14] 이건 아틸라 훈족 동유럽에서 깽판치던 시절 로마인들 사이에서도 나왔던 소리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훈족의 재림. [15] 흔히 몇몇 인터넷이나 언론들, 몽골제국 관련 전공이 아닌 학자들이 몽골제국에게 죽은 사람의 사망자 수가 4000만명에 달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는데, 이는 당시 이슬람측 기록의 터무니 없는 사망자 부풀리기를 포함한 수치이다. [16] 말 그대로 정복을 위해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닌, 오직 살인 그 자체만을 위해 민족 전체를 지구상에서 없애겠다는 목적으로 체계적인 학살을 하는 것을 말한다. 다만 칭기즈 칸은 협력하면 자비를 배풀되, 반발하면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몰살한다는 전략으로 유명하듯 단순히 항복한 적을 몰살한 적은 없긴 하다. 저항하는, 심지어 저항하다 항복한 적들을 상대로 한 학살을 언급할 것 같으면 항우 등 원조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또한 민족의 단위가 당시보다 더 작았던 부족사회 시절에는 한 부족을 멸절시키는 것이 잔인하기는 해도 희귀한 일 까지는 아니었다. 제국 단위 규모에서 그걸 실행하고도 무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자가 없었을 뿐이다. [17] 다른 역사적 사례를 예시로 들자면 히틀러가 홀로코스트를 일으켜 인종청소를 하려 한 것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며, 청나라의 건륭제 준가르가 복속하지 않자 사실상 멸족을 시켰다. 다만 히틀러는 우생학 인종차별을 동원한 정치적 목적을 띄는 학살이였고, 저항자들이 아닌 진짜 말 그대로 가만히 있는 민족을 편견으로 혐오해서 공장 형태의 체계화된 살인 시스템을 만들었기에 살인행위가 더 악독하다고 평가받으며, 현재도 네오나치들 같은 신봉세력이 남아있다는 점에서 현대 기준으로 더 비판받아 마땅한 인물은 히틀러라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중세와 근현대를 가르는 현대적 인권 개념이 왕정 시절엔 미비했기에 근현대의 독재자, 학살자들이 더 욕을 먹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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