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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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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실현 사례
2.1. 동아시아
2.1.1. 한국
2.1.1.1. 고조선2.1.1.2. 고구려2.1.1.3. 백제2.1.1.4. 신라2.1.1.5. 발해2.1.1.6. 태봉2.1.1.7. 고려2.1.1.8. 조선
2.1.2. 중국2.1.3. 일본
2.1.3.1. 막부 기준
2.2. 동남아시아
2.2.1. 인도네시아2.2.2. 미얀마
2.3. 중앙아시아
2.3.1. 몽골2.3.2. 카자흐스탄2.3.3. 우즈베키스탄
2.4. 서남아시아
2.4.1. 사산왕조 페르시아
2.5. 유럽
2.5.1. 로마 제국
2.5.1.1. 서로마 제국2.5.1.2. 동로마 제국
2.5.2. 서고트 왕국2.5.3.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2.5.4. 사보이아 공국 → 사르데냐 왕국 → 이탈리아 왕국2.5.5. 스페인2.5.6. 포르투갈2.5.7. 독일2.5.8. 영국2.5.9. 덴마크2.5.10. 러시아2.5.11. 우크라이나2.5.12. 그리스2.5.13. 튀르키예
2.6. 아메리카
2.6.1. 미국2.6.2. 벨리즈2.6.3. 영국령 몬트세랫2.6.4. 브라질
2.7. 아프리카
2.7.1. 이집트2.7.2. 나이지리아2.7.3. 부룬디2.7.4. 적도 기니
2.8. 오세아니아
2.8.1. 뉴질랜드2.8.2. 팔라우
3. 취소, 실패, 논의 등의 사례
3.1. 동아시아
3.1.1. 한국
3.1.1.1. 백제3.1.1.2. 신라3.1.1.3. 고려3.1.1.4. 조선3.1.1.5. 대한제국3.1.1.6. 대한민국
3.1.2. 일본
3.2. 유럽
3.2.1. 로마 제국
3.2.1.1. 동로마 제국
3.3. 아메리카
3.3.1. 미국3.3.2. 아르헨티나

1. 개요

천도한 사례에 대해 정리한 문서.

2. 실현 사례

2.1. 동아시아

2.1.1. 한국

2.1.1.1. 고조선
본래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하 혹은 요동에 있다가 연나라의 침공으로 요동을 상실하면서 대동강 유역의 왕검성으로 옮기게 되었다는 게 통설이다. 하지만 기록이 많지 않고 이때 정말 수도를 옮겼는지에 대해서도 명문화된 기록이 없으며[1] 그저 추측이나 고고학적인 발굴에 의존하는 수준.
2.1.1.2. 고구려
졸본성[2] 국내성( 유리왕) → 평양[3]( 장수왕)

사실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를 읽다 보면 고구려의 도읍이 중간에 여러 번 옮겨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현대적 의미의 천도는 장수왕 대의 평양 천도이며, 이를 제외한 다른 천도는 대략 '천도 미만, 이궁(移宮) 이상' 정도의 뉘앙스라고 볼 수 있다. 왜냐, 고구려는 평지성 - 산성을 동시에 쓰는 이중수도 체제였기 때문. 삼국사기에 의하면 198년(산상왕 2년)에 환도성을 축조한 뒤 209년에 이곳으로 천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246년 고구려의 서안평 공격에 대한 응징으로 위나라 관구검이 대대적으로 고구려의 영토를 침공하면서 함락되어 파괴되었는데, 동천왕은 환도성의 백성들을 보기 부끄럽다고 하여 평양성으로 옮겼다고 전한다. 다만 대체로 환도성은 평지의 국내성 인근에 있는 산성자산성으로 보는 게 정설이며, 여기에서 언급된 평양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환도성 인근의 성으로 보는데, 삼국유사에서 안시성을 평양성으로 비정하고 있지만, 정확치는 않다. 어쨌든 이후 국내성으로 다시 돌아왔다가 고국원왕 전연의 침략에 대비해 환도성을 다시 수축하고 도읍을 옮겼지만, 342년 전연의 침공으로 함락당하고 만다. 보면 외적의 침략으로 국내성과 환도성을 수시로 오간 것으로 보이는데, 국내성은 평지성이고 환도성은 인근의 산성이기 때문에 크게 보아 국내에서 수백년간 도읍했다는 말은 틀린 말은 아니다.

이후 국내성으로 옮겼다가 장수왕대에 평양성으로 완전 천도하게 된다. 장수왕은 평지성인 청암리토성, 산성인 대성산성, 왕궁인 안학궁을 지었는데, 이후 평원왕이 안학궁 서쪽에 나성을 두른 장안성을 건설하고 그 곳으로 천도하여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장안성을 도읍으로 삼게 된다.

즉 졸본성 - 국내성 - 평양성이란 고구려 역대 수도의 변천은 큰 줄거리를 말한 것이고, 국내성 기간 중에 국내성, 환도성, 평양성을 자주 오갔으며, 평양성으로 천도한 이후에도 안학궁+대성산성, 청암리토성 체제였다가 평원왕이 안학궁 서쪽에 나성을 두른 장안성을 축조하고 수도를 옮겼다고 볼수 있다. 장안성 이전까지는 고구려 특유의 평상시에는 평지성, 전시에는 산성으로 옮기는 체제에 따른 것이며, 장안성을 축조한 이후부터는 우리에게 익숙한 일원화된 도성 체제가 구축된 것.
2.1.1.3. 백제
위례성 웅진성[4]( 문주왕)[5] 사비성[6][7]( 성왕)

건국 당시 극초기 수도는 하북위례성이라고 불리며 그나마 서울특별시 풍납토성으로 추정되는 하남위례성과 달리 이건 그 어떤 흔적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대략 서울 강북 혹은 임진강 유역 어딘가 쯤으로 추정되며, 아예 백제가 지배하던 구역이 아닌 고구려에서 내려올 때의 임시 거처를 말한다는 설도 있다. 온조왕 때 이 하북위례성에서 지금의 풍납토성인 하남위례성으로 천도했다고 한다.

온조왕 근초고왕 때 '도읍을 한산으로 옮기다.'란 기사가 있는데 이 기사로 말미암아 한성( 위례성), 한산( 북한산성)으로 천도를 한 것으로 보인다.

무왕 전라북도 익산시로 천도하려 했다는 설이 존재한다. 그러나 실패했거나, 일시적으로 천도했다 해도 곧 사비로 환도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혹은 천도가 아닌 이중수도 육성이 목적이었다는 설도 있다. 관련 유적으로 왕궁리 유적, 미륵사지, 쌍릉이 있다.

삼국통일전쟁의 시기 백제멸망전의 최후반부에 의자왕은 수도 사비성에서 방어에 유리한 웅진성으로 파천하였고 그곳에서 항복한다.
2.1.1.4. 신라
지금의 경주시 서라벌에서 건국해 1천여년간 수도를 옮기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으나, 세부적으로 보면 초기에 정확한 위치 불명의 금성에서 경주 월성으로 옮겼고, 자비 마립간 때인 475년부터 12년 간 명활성으로 옮긴 적이 있다. 기간도 짧고 금성이나 명활성도 모두 지금의 경주시 영역 안쪽에 있는 곳이고 해서 신라의 수도 변천사에서는 보통 언급을 생략하는 편이다.

신라에서도 천도 시도는 있었다. 이제 막 성립한 통일신라의 기틀을 다지던 신문왕 달구벌로 천도를 추진했으나 서라벌의 기득권 세력의 반대에 부딪힌데다가 천도를 시도한 신문왕 본인도 오래 살지 못해 동력이 끊겨 좌절되었다.
2.1.1.5. 발해
오동성→중경→상경→동경(3차례 모두 문왕)→상경( 성왕)

큰 줄기로 보면 중경-상경-동경-상경이나 세부적으로 볼 시 위와 같이 동모산 오동성(698~741) -> 중경(742~755) -> 상경(755~785?) -> 동경(785?~794) -> 상경(794~926) 순이 된다.

고왕 대조영이 동모산(오동성)에 698년 12월 발해를 건국한 후 문왕 5년(741)까지 44년간 수도역할을 한 후 문왕 6년(742)에 중경현덕부로 천도, 중경현덕부가 안사의 난이 발발한 755년까지 발해의 수도로서 자리잡았다. 안사의 난이 발발하자 요동 정세가 불안해진 것을 감지한 문왕은 중경에서 동쪽에 위치한 상경용천부로 천도하였다. 그리고 785년 무렵, 문왕은 다시 동경용원부로 천도하는데 동경용원부로의 천도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대원의 혹은 흑수말갈 복속, 일본과의 무역과 관련된 일로 추정된다.

문왕의 족제이자 발해의 4대왕인 대원의가 살해당한 후, 문왕의 손자인 대화여가 즉위하였고 수도를 상경용천부로 재천도하여 발해 멸망때까지 지속된다.
2.1.1.6. 태봉
송악 철원(905년)[8]

궁예가 태봉의 수도를 송악에서 철원으로 천도했으나 이는 엄청난 실책이었고 철원의 물가는 심각한 수준으로 높아지게 된다.
2.1.1.7. 고려
철원[9] 개경(919년)[10] 강화도(1차 여몽전쟁이 끝나고 최우의 주도 하에 천도)[11]→개경( 원종)[12]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은 이듬해 철원에서 왕씨의 본거지인 송악으로 천도하고 개경으로 칭했다. 대몽항쟁 당시 무신정권이 강화도로 수도를 옮긴 바 있으며 몽골과의 강화가 체결되자 개경으로 환도했다. 또한 비록 짧지만 우왕 공양왕 시기 남경으로 잠시 천도한 적도 있으나 반년이 안 되어 다시 개경으로 환도했다.
2.1.1.8. 조선


한양 개경( 정종)[13]→한양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한다. 그리고 정종이 즉위한 후에 개경으로 환도했고, 나중에 한양 환도는 태종이 점을 쳐서 했다는데, 점괘는 천도 반대파를 누르기 위한 단순 빌미에 불과했다. 개경은 이전 왕조의 수도인데다 고려 말 고려 왕조조차 한때 남경(사실상 한양)으로의 천도를 끊임없이 검토했고 실제로 우왕과 공양왕 대에 각각 5개월 정도 남경으로 천도한 바 있을 정도로 개성의 지리적 조건이 한양보다 나은 점이 없었다.[14]

2.1.2. 중국

2.1.3. 일본


이외에도 나니와쿄(현 오사카부 오사카시), 후지와라쿄(현 나라현 가시하라시), 나가오카쿄(현 교토부 나가오카쿄시), 후쿠하라쿄(현 효고현 고베시) 등으로의 긴키 지역 내 일시적인 천도가 있었고 특히 나라 시대 이전에는 굉장히 빈번했으나 큰 흐름에서는 위와 같다.
2.1.3.1. 막부 기준
일본사의 명목상 지도자는 천황이지만 중세부터 근대 직전까지 실질적 통치자는 쇼군이었다. 그래서 794년부터 1869년까지 일본 조정의 공식 수도는 내내 교토였지만,[23] 실질적인 수도는 막부의 본거지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후술하는 내용은 사전상의 천도가 아닌 실질적인 천도를 의미한다. 단, 여전히 천황이 머무르는 교토의 중요성이 막부 소재지 못지 않았기 때문에 막부 말기 정국의 중심은 교토이기도 하였다.

2.2. 동남아시아

2.2.1. 인도네시아

2024년 8월 17일 자바 섬 자카르타에서 보르네오섬 누산타라로 천도할 예정이었으나 인프라가 미비해서 수도 이전이 연기되었다.

2.2.2. 미얀마

2005년 양곤에서 핀마나(지금의 네피도)로 천도.[25]

2.3. 중앙아시아

2.3.1. 몽골

몽골 제국 시절 쿠빌라이 칸의 치세에 남송을 멸망시킨 후, 카라코룸에서 대도로 천도하고 원나라의 건국을 선포한다. 그러나 명나라의 흥성으로 인해 중국 대륙을 잃고 카라코룸으로 환도했다가 나중에는 우르거로 또 천도했다.

2.3.2. 카자흐스탄

1997년, 알마티에서 아스타나로 천도.

2.3.3. 우즈베키스탄

우즈베크 SSR 시절 초기 수도인 사마르칸트에서 1930년에 타슈켄트로 천도.

2.4. 서남아시아

2.4.1. 사산왕조 페르시아

아르다시르 1세 파르티아를 멸망시키고 에스타흐르에서 크테시폰으로 천도하였다.

2.5. 유럽

2.5.1. 로마 제국

콘스탄티누스 대제 로마(또는 행정 중심지였던 메디올라눔 니코메디아)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천도하였다.[26]
2.5.1.1. 서로마 제국
한창 게르만이 날뛰던 시기, 로마에서 메디올라눔과 라벤나로 천도와 환도를 반복하다가 라벤나로 최종 천도되었다.
2.5.1.2. 동로마 제국
1204년 4차 십자군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자 테오도로스 1세 니케아로 천도했고, 요안니스 3세 시대에는 님페온으로 옮겼다가, 1261년 미하일 8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한 후 로마 제국이 부활하고 환도했다.

2.5.2. 서고트 왕국

507년 프랑크 왕국과의 부이예 전투에서 국왕이 전사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어 아키텐(남프랑스)에 있던 툴루즈를 포기하고 히스파니아의 톨레도로 옮겨갔다.

2.5.3.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1596년, 지그문트 3세 바사 크라쿠프에서 바르샤바로 천도하였다.

2.5.4. 사보이아 공국 → 사르데냐 왕국 → 이탈리아 왕국

본래 사부아 샹베리(Chambéry)[27]에 수도를 두었으나 1536년 프랑스의 대대적인 침공을 받아 영토 대부분이 프랑스의 간접통치를 받다가 1559년 카토캉브레지 조약으로 겨우 되찾은 이후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공작이 프랑스 침공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알프스산맥 뒤편에 있어 상대적으로 안전한 토리노로 천도하였다.[28] 이후 사보이아 공국 사르데냐 왕국으로 개칭했을때도 사르데냐 칼리아리[29]가 아닌 토리노가 수도가 되었고 이후 사르데냐 왕국이 리소르지멘토를 주도해서 이탈리아 왕국을 수립한 이래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첫 수도를 1865년 피렌체를 거쳐 1871년 로마로 이전했다.

2.5.5. 스페인

톨레도, 바야돌리드, 마드리드 순으로 천도하였다.

2.5.6. 포르투갈

포르투갈의 기원으로 삼는 포르투갈 백국은 처음 나라 이름의 유래가 된 포르투스 칼레(Portus Cale)를 수도로 삼고, 1096년경 기마랑이스로 천도한다.

이후 헤콩키스타로 남쪽으로 영토를 늘려가며 1139년 포르투갈 왕국 성립과 함께 남쪽의 코임브라로 다시 한 번 천도하고, 1255년 다시 한 번 오늘날 수도인 리스본으로 천도한다.

이후 19세기에 들어서는 영국과 친밀한 관계인 포르투갈이 나폴레옹 대륙봉쇄령에 불참하자, 1807년 프랑스군이 침공해 반도전쟁이 발발하며 리스본으로 빠르게 진격하였고, 왕실이 도피한 식민지 브라질을 본토로 격상시켜 포르투갈- 알가르브[30]-브라질 왕국을 선포해 브라질의 수도인 리우데자네이루가 왕실이 리스본으로 복귀하는 1821년까지 실질적인 수도로 기능한다. 이는 본토 밖 식민지로 천도한 몇 안되는 사례다.

또한 포르투갈 내전 기간인 1830~1834년 사이에는 대서양 한가운데 아소르스 제도에 위치한 앙그라두에루이스무(Angra do Heroísmo)가 임시수도 역할을 하기도 했다.

2.5.7. 독일

1990년 독일 통일 이후 통일 독일 정부는 수도 이전(정확히는 부분 이전)을 결정하여 구 서독 시절 임시수도였던 에는 환경 등 6개 부처만 남기고 외무 등 핵심 10개 부처를 현재의 수도인 베를린으로 이전했다. # 하지만 베를린은 과거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프로이센 왕국의 수도였으며 1871년의 독일 통일 이후에는 국민국가로 자리잡은 독일 제국의 원 수도였기 때문에, 이 경우에는 '천도'보다 ' 환도'에 가깝다.

2.5.8. 영국

잉글랜드 왕국 시절인 1066년 윈체스터에서 현재의 수도 런던으로 천도했다.

2.5.9. 덴마크

원래는 로스킬레가 수도였으나 1443년 크리스토페르 3세 코펜하겐을 수도로 명시하였다.

2.5.10. 러시아

러시아 제국 시절 대북방전쟁에서 승전한 후 표트르 1세의 계획에 따라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고 천도하였다. 그리고 10월 혁명 이후 페트로그라드[31]에서 모스크바로 천도.

2.5.11.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 SSR 시절 초기 수도인 하르키우에서 1934년 키이우로 천도.

2.5.12. 그리스

그리스 독립 전쟁 중에는 나플리오가 수도 역할을 하다가, 열강들로부터 그리스의 독립을 공인받은 후에 아테네로 공식 천도하였다.

2.5.13. 튀르키예

2.6. 아메리카

2.6.1. 미국

미국은 천도를 2번 했다. 독립 직후 수도는 뉴욕시였으나 1790년 필라델피아로 천도했고, 1800년에 현 워싱턴 D.C.로 천도했다.

2.6.2. 벨리즈

본래의 수도이던 벨리즈 시티가 허리케인으로 개박살나는 바람에(...) 독립 직전인 1961년에 벨모판으로 천도한다.

2.6.3. 영국령 몬트세랫

위의 벨리즈와 유사한 사례로 이쪽은 화산폭발이 원인이었다. 섬의 화산인 수프리에르 힐즈의 분화로 인해, 몬트세랫 자치정부는 수도인 플리머스를 포기하고 임시 수도인 브레이즈로 천도한다.

2.6.4. 브라질

헌법을 통해 언젠가 내륙으로 수도를 이전하기로 하다가 결국 1960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브라질리아로 천도.

2.7. 아프리카

2.7.1. 이집트

원래 수도는 카이로이나 카이로의 과밀화 문제가 심각해서 2015년부터 카이로에서 동쪽으로 약 50km 떨어진 사막 한가운데에 신행정수도(العاصمة الإدارية الجديدة)를 건설하고 있다. 건설이 어느 정도 완료된 2021년 12월부터 카이로에 위치한 정부기관들을 단계적으로 신행정수도로 이전할 계획이다.

2.7.2. 나이지리아

본래의 수도는 라고스였으나, 갑작스러운 인구 폭증으로 인해 인구 격감을 위해 1991년 아부자로 천도하였다.[32]

2.7.3. 부룬디

2019년 부줌부라에서 1966년까지의 구 왕도(王都) 기테가로 재천도.

2.7.4. 적도 기니

본토 바타에서 비오코 섬 말라보로 천도. 말라보에서 다시 본토 시우다드데라파스(육지)의 신도시로 천도 중.

2.8. 오세아니아

2.8.1. 뉴질랜드

1865년 오클랜드에서 웰링턴으로 천도했다.

2.8.2. 팔라우

2006년 코로르에서 응게룰무드로 천도했다.

3. 취소, 실패, 논의 등의 사례

3.1. 동아시아

3.1.1. 한국

3.1.1.1. 백제
무왕이 익산 지역에 천도를 시도했지만 귀족들의 반발로 실패한다. 다만 무왕이 익산을 정식 수도로 삼으려 한 것인지 수도에 버금가는 수도에 버금가는 별도(別都)로 삼으려 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학설에 따라서는 실제로 천도를 실행에 옮겨 수도로 삼았으나 다시 사비성으로 환도했다고 주장하는 것도 있다. 이 시기의 왕궁을 왕궁리 유적으로 비정한다. 실제로 왕궁리 유적 발굴 조사결과 수도를 뜻하는 '首府'(수부)라는 글자가 적힌 명문기와도 출토되었다.

다만 수도 여부와는 별개로 무왕 치세에는 사비에 버금가는 중요한 도시로 격상된 것은 확실하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에 등재된 왕궁리 유적 미륵사지를 비롯해 제석사지, 익산토성, 미륵산성[33], 오금산성, 쌍릉[34] 등 그 당시 조성된 여러 백제 관련 유적들이 현재까지 남아있다.
3.1.1.2. 신라
신문왕 때에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및 인근 지역인 달구벌로 천도하려 시도한 바 있었으나 실패하였다.
3.1.1.3. 고려
정종 서경으로 천도를 시도한 적이 있으며 인종 묘청을 중심으로 서경으로 수도를 옮기자는 서경 천도 운동을 시도했다. 그러나 인종이 시도했던 서경 천도 운동은 김부식을 위시한 개경파의 반대로 실패하고 급기야 묘청의 난이 일어났지만 이마저도 주동자였던 묘청이 불과 17일 만에 조광에게 살해되고 서경군 또한 관군에게 진압당하며 막을 내렸다.

숙종 재위기에는 지금의 서울인 남경(南京)[35]으로 수도를 이전하려는 구체적인 움직임이 있기도 했다. 풍수가인 김위제가 비기(秘記)인 도선기(道詵記), 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 삼각산명당기(三角山明堂記), 신지비사(神誌秘詞)를 인용하여 국토를 저울로, 남경을 저울추에 비유하며 천도를 주장하였고, 1104년에 남경 별궁이 준공되어 숙종이 직접 남경에 행차하기도 하였으나, 이 때 남경은 서경처럼 지역 세력이라든지 지역 중심지로서의 중요성이 크지 않아 정치적 논의만 거친 채 흐지부지 끝났다. 다만 당시 남경개창도감을 설치하여 정식 궁궐은 조성을 했는데, 그 터가 현재의 청와대 자리다(!). 300 여년 뒤 이성계가 이 부지를 둘러보고 그 남쪽에 을 지었으니, 그 당시 사람들은 설마 이 때 점찍은 땅이 고려 멸망 이후 한반도의 중심지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그의 풍수지리학적 분석처럼 조선시대부터 남경이 수도가 되고 해방 이후에는 남경 별궁의 자리가 청와대가 되었으니 결과적으로는 그의 분석이 옳았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무신정권기의 끝무렵이었던 김준 집권기인 1260년에는 여몽전쟁 항전의 한 방법으로 강화도에서 제주도로 천도하기 위해 나득황을 파견해 조사하기도 하였다. 이는 삼별초의 난보다 11년 앞선 일이었다.

공민왕은 수원(水原), 평양(平壤), 남경(南京)으로 천도를 시도한 적이 있다. 수원같은 경우는 왜구의 침략이 심한 시기라 신하들이 반대하였으며[36] 차라리 훨씬 더 내륙에 위치한 청주가 낫다고 주장하였다.

우왕 대에는 남경으로 천도를 시도했으며 왜구를 피해 철원으로 수도를 옮기는 것도 고려하였으나 최영이 반대하였고 실행되지 않았다.

공양왕 대에는 연주(漣州)와 한양 천도가 검토되었으나 모두 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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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4. 조선
광해군 때 풍수관 이의신, 시문용의 말에 따라 교하(구 교하군, 현재의 경기도 파주시 금촌동, 운정동, 교하동과 탄현면 일대 지역) 천도설이 불거진 바 있다. 그러나 대신들의 적극적인 반대와 결국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실각하면서 실패하였다.

반란 세력이긴 하나 인조대인 1630년경 발생한 '정한(鄭澣) 추대사건'의 경우, 거사가 성공하면 도읍을 충청도 진잠(鎭岑)으로 옮길 계획까지 했다고 한다.
3.1.1.5. 대한제국
고종은 수도를 한양에서 평양으로 천도하는 구상이 있었던듯 보인다. 실제로 이를 위해 어진을 평양으로 옮기고 수도이전을 위한 자금을 위해 세액을 증대하며 평양에 어느정도 공사도 이루어졌다고 한다. 풍경궁이 이 계획의 흔적이다. 고려 왕조에 이은 제2의 서경 천도 운동이라 할 수 있다. 고종, 왜 평양을 새 수도로 정했을까? 뉴스파워 "고종, 평양 천도 고려했을 수도" 연합뉴스
3.1.1.6. 대한민국
6.25 전쟁 초반 대한민국 정부 부산으로 피난 온 시절에 낙동강 방어선이 무너지고 부산마저 점령당할 경우 미국은 대한민국 정부를 남태평양 사모아로 이동시켜 망명정부를 꾸릴 계획을 세우기도 했으나[37] 낙동강 방어선은 무너지지 않았고 인천 상륙 작전으로 전세역전에 성공하면서 계획으로만 남았다.

전쟁이 휴전으로 끝난 이후에도 정부는 휴전선과 인접해 북한군에 점령당할 위험이 높은 한강 이북의 서울에서 한강 이남, 지금의 부평, 부천, 영등포 일대로 수도 이전을 검토하기도 했으나 막 전쟁을 끝낸 열악한 상황에서 수도 이전을 위한 막대한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던 당시 경제 상황상 폐기되었다.[38]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 당시 대선 후보였던 김대중 대전으로 행정수도를 옮기겠다고 공약하기도 했으며, 당시 대통령 박정희도 1977년부터 백지계획이란 이름으로 공주시~ 연기군 일대로의 행정수도 이전을 추진하다가 1979년 10.26 사건으로 김재규에게 암살당하면서 무산되었다.

이 시기 정부가 수도 이전을 추진한 가장 큰 이유는 국토의 균형발전과 함께 국가 안보 문제였다. 서울은 장사정포 문제에 더해서 그게 아니라도 북한과 너무 가까워 전시 수도로는 문제가 많았다. 애초 대한민국은 건국한 지 2년만에 북한의 기습공격을 받아 단 사흘만에 수도를 내주고, 반격에 성공하는 듯 하다가 한번 더 수도를 잃은 적이 있었으니 이런 우려는 현실적인 문제였다. 이 시기는 북한과 전쟁이 벌어지면 서울은 일단 포기하고 후방에 지휘 본부가 형성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의 한남대교가 건설된 계기도 강남 개발 촉진보다는 강북 주민들의 전시 피난용이었다. 이렇게 남북 분단 상황과 전쟁 위협 속에서 서울이 행정수도로서 적합하지 못하다는 인식은 모두가 가지고 있었고, 이 때 논의된 수도 이전은 어디까지나 분단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통일이 되면 다시 서울로 환도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노무현 대한민국 대통령 행정수도 충청남도 연기(현 세종특별자치시 공주 일대로 옮기려는 시도를 했다가 여러 이유에 부딪혀 실패했다. 헌법재판소에서 서울은 관습헌법적으로 수도라는 위헌 판결을 내려 폐기되었으며,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안으로 재구성되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정권이 바뀌면서 성격이 바뀌어 세종특별자치시가 된다.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한 정의당 권수정 후보는 서울 공화국 현상을 해소하겠다는 이유로 용산에서 세종으로 수도이전을 주장하며, 또다시 세종시 수도 떡밥을 들고 나오기도 했다.

앞에 언급한 관습헌법론에 대해서는 논란이 컸다. 관습헌법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1. 국가의 수도의 위치는 헌법 사항이어야 한다. 아니면 관습법이니까 신법이나 특별법 우선 원칙으로 자동 폐기된다.
2. 수도는 서울이어야만 한다. '지금 현재 수도는 서울이다'로는 안 된다. 이는 '사실인 관습'으로 법적인 의미가 전혀 다르다.

위와 같은 국민들의 법적 합의가 필요하다.

일단 현재 대한민국의 수도 이전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적어도 남북통일 통일 한국의 수도는 서울시가 아닌 다른 도시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여전히 간헐적으로 제기되고 있는데 이명박 대한민국 대통령 서울특별시장 시절에 개성 통일수도론을 주장한 적이 있으며 고양시, 파주시, 철원군 등 여러 지자체가 통일 수도로는 자기 지역이 적합하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이에 대한 논란에 대해서는 남북통일/수도 문제 문서로.

3.1.2. 일본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도쿄 수도권이 쑥대밭이 되자 일본 정부는 후쿠오카, 오카야마, 경성[A][B] 등 비교적 지진에서 안전한 도시들 가운데 하나로 수도를 이전하는 것을 잠시 검토했으나 11일 후 다이쇼 덴노가 도쿄를 수도로 계속 둔다는 조서를 발표하며 논의가 흐지부지 되었다.

시간이 흘러 1990년 일본 정부는 다시 한번 수도 이전 결정을 내리고 1999년에 후보지 3곳(기후·아이치, 미에, 도치기[41], 후쿠시마)을 정했으나 아키히토 덴노 등을 비롯한 도쿄 시민들의 강한 반대로 무산된 적이 있다. 만약 그때 후쿠시마로 천도했더라면 일본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42] 다만 2023년 현재 한국 만큼은 아니지만 일본도 도쿄나 인근 지역에[43] 인구가 과잉되었고 이러한 수도 집중화는 수도직하지진과 같은 천재지변시 국가적 마비 사태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타 지역으로 천도하여 인구를 분산하자는 의견이 있다. 단, 수도 이전의 어려움 때문에 요즘은 도쿄를 그대로 수도로 삼는 대신 부수도를 따로 지정해 정부 기능을 분산하자는 주장이 있다. 대표적으로 오사카도 구상.

3.2. 유럽

3.2.1. 로마 제국

콘스탄티누스 1세는 처음 로마를 대체할 새로운 수도로 트라키아 세르디카를 고려했다.

그러나 같은 트라키아에 위치한 비잔티움 새로운 수도로 선정되면서 세르디카 천도는 백지화되었다.
3.2.1.1. 동로마 제국
사산 페르시아 호스로 2세의 공격으로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인근인 칼케돈까지 점령되자 이라클리오스 황제가 자신의 근거지였던 카르타고로 천도하려 했으나 총대주교의 만류로 포기한다.

이라클리오스의 손자 콘스탄스 2세 이슬람 제국의 침공으로 인해 안보 위기가 심화되자, 시칠리아 시라쿠사로 천도하려 했고 현지에 궁전까지 짓고 머물렀으나, 그가 암살당하고 시칠리아 총독 미지지오스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해서 반역향(?)이 되는 바람에 시라쿠사 천도는 무산되었다.

3.3. 아메리카

3.3.1. 미국

1962년에 워싱턴 D.C.에서 시애틀로 천도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미 동부가 적국인 쿠바에서 너무 가까웠기 때문이다.

3.3.2. 아르헨티나

라울 알폰신 대통령 시절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로의 집중을 막고 파타고니아 지역 개발을 위해 수도를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리오네그로주 비에드마(Viedma)로 천도를 추진하여, 수도 이전에 관한 법안이 국회 통과까지 되었으나 1980년대 남미 전역을 휩쓴 경제 위기로 무산된 바 있다.


[1] 정사 삼국지 같은 중국의 문헌을 봐도 "연나라가 조선을 침공해서 영토 2000리를 확보했다" 정도로 추상적이다. [2] 공식적으론 동명성왕이 최초로 고구려의 터전을 잡은 성. 다만 수도로써의 역사가 짧았고 나라의 기틀도 덜 잡힌 상태에서 수도였던 탓에 존재감 병풍 그 자체이며, 또한 고구려 관련 역사책들이나 학교에서 고구려 관련 역사를 배울 때도 졸본성은 언급도 아예 안 하거나 설사 하더라도 대충 쪼금만 얘기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상당하다. [3] 남진정책의 일환으로 천도했다. [4] 오늘날 충청남도 공주시. [5] 5세기 장수왕의 남하정책때 고구려의 침입을 받아 개로왕이 전사하고 영토를 빼앗긴 것이 원인. [6] 오늘날 충청남도 부여군. [7] 여담이지만 백제 성왕이 왕권을 강화한 이유가 사비(개인돈)로 천도했기 때문이라는 개드립도 있다. [8] 궁궐은 태봉국 철원성. [9] 태봉국 철원성. [10] 만월대. [11] 고려궁지. [12] 만월대( 연경궁). [13] 1차 왕자의 난이 원인. [14] 한양은 삼남과 경기도, 강원도 세곡을 거둬들일 한강을 끼고 있어서 평안도와 황해도 세곡만 걷기 유리한 개경의 예성강보다 입지가 훨씬 좋았다. 또한 개경에 비해 평야가 그나마 넓다는 점도 있었다. [15] 자기(동탁) 때문에 생긴 반란군들 피하는 것과 물론 권력을 지키기위해 12대 정도나 이어져있던 전통이 담긴 낙양을 싸그리 불바타로 만들어 버리면서 천도했다. 이 과정에서 부자들 재산 전부 몰수, 심지어는 황제 무덤의 보물까지 다 파내면서 가져갔다. [16] 오(삼국시대)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 일은 손권뿐만 아니라, 중국사 전체로 보아도 신의 한 수에 해당되는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건업은 당시 중국 최고의 꿀땅이던 형주에서 멀 리 떨어져 있어서 발전이 더딘 곳이긴 했으나, 그래도 미개발지가 대부분이던 양쯔강 이남에서는 그나마 가장 큰 대도시였던 곳이라서, 이후의 중국 남부의 개발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애초의 손오가 중국 경제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조위와 동급이거나 그 이상이다. [17] 정벌과 천도 중 어떤 것을 택할지를 물었고, 정벌보다 천도의 비용이 덜 먹힐 것 같았던 신하들은 천도를 지지했다. [18] 단, 남송은 존속 기간 내내 임안(항저우)을 '행재', 즉 임시수도 취급했으며 법적 공식 수도를 금나라 치하에 들어간 개봉(카이펑)으로 고집했다. [19] 덤으로, 중국사에서 유일하게 명나라만이 강남에서 일어나 화북까지 통일한 유일한 왕조였지만 결국 반 세기만에 수도를 화북으로 옮겼다. [20] 사실 국민당의 수도였던 난징보다는 베이징이 중국의 수도로서의 역사적 정통성이 강하다. 베이징에 견줄 만한 곳은 남북조시대까지 수도 역할을 했던 뤄양시나 중국사 최대 전성기를 자랑하였던 국가들인 전한 당나라의 수도인 시안시 정도밖에 없다. [21] 단, 나라 시대의 마지막 10년간 천황의 거처는 나라의 헤이조쿄가 아닌 현 교토부의 나가오카쿄였다. [22] 다만 이후 막부가 들어서면서 일본의 실질적인 수도는 막부가 있는 곳들이 되었다. 교토가 실질적으로 수도 역할을 했던 시대는 헤이안 시대 무로마치 시대, 그리고 센고쿠 시대 정도이다. [23] 1180년 후쿠하라쿄(현 고베)로 잠시 천도한 바 있었으나 반년 정도 밖에 머물지 못하고 헤이안쿄(교토)로 귀환했다. 아스카 시대 나라 시대에 조정이 굉장히 빈번하게 옮겨다닌 것과 달리 헤이안 시대 이후에는 이 한번을 제외하고는 계속 교토에 머물렀다. [24] 단, 가마쿠라 시대는 후대의 에도 시대에 비해 막부의 중앙집권력이 약했으며 조정의 위세 역시 무시하지 못할 정도였다. 오히려 가마쿠라 막부는 천황을 대신해 쇼군이 대신 일본을 통치한다기 보다는 천황에게 권력을 일정부분 일임받은 쇼군이 천황을 대신하여 동국(현 간토와 도호쿠 지역)을 통치하는 형태였다. 서국(현 주부 이서 지역)에서는 여전히 가마쿠라 막부보다 교토 조정의 권력이 강했다. 이러한 연유로 일부 일본사학자들은 가마쿠라 시대라는 명칭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25] 핀마나, 네피도가 영국의 지배 이전에 수도였던 만달레이가 있는 만달레이 관구에 속해 있어서 네피도 천도가 간접 환도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270km나 떨어진 도시다. [26] 다만 이후에도 제국에서는 동방, 서방 공통으로는 로마가 관념적으로는 수도였다. [27] 이탈리아어로는 참베리(Ciamberì). 이탈리아 통일 직전 프랑스 제2제국에 할양되었다. [28]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공작은 이와 동시에 공국의 행정 언어를 라틴어에서 이탈리아어로 바꾸었는데 이때부터 사보이아 공국이 프랑스와 이탈리아 사이의 애매한 정체성을 버리고 완전한 이탈리아계 국가로 나아갔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큰 업적을 남겼다. 그 때문인지 토리노 산 카를로 광장에는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공작의 기마상이 서있다. [29] 단, 나폴레옹 전쟁 당시 피에몬테를 포함한 본토를 혁명 프랑스에게 빼앗겨 1802~1814년에는 칼리아리로 임시 천도하기는 했다. [30] 웨일즈 스코틀랜드처럼 명목상 별개 왕위로 취급했다. [31]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풍이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러시아어로 바꾼 이름. [32] 참고로, 라고스는 나이지리아 경제의 발전과 더불어 매우 빠르게 산업화와 근대화를 이루었지만, 그 속도가 너무 빨라서 빈부격차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으며, 행정력에도 공백이 생겨 쓰레기를 관청의 청소행정 관련 부서에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인근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소각처리를 해서 해결하는 상황이다. 게다가 비아프라 전쟁의 중심지였으며 부족간 갈등도 끊이지 않았다. [33] 기준성(箕準城) 또는 용화산성(龍華山城)이라고도 부른다. [34] 무왕의 묘로 추정된다. [35] 한양부에서 남경 승격은 선왕인 문종(고려) 때이다. [36] 당시 수원은 화성까지 포함하였으며 중심부가 해안에 가까웠다. [37] 한반도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제주도의 경우 제주도 땅이 농사짓기에 부적합하고 물도 부족하기 때문에 정부 이전 예정지역에서 제외되었다. [38] 현 시점에서는 북한 개풍군과의 직선거리가 약 30~32km밖에 안 되고 개활지라 장사정포/방사포 공격에 취약한 부평/부천 지역보다는 약 37~38km 떨어졌고 북한산 등에 의해 보호되어 장사정포/방사포 공격에 비교적 유리한 강북 지역이 그나마 더 낫다는 점이 아이러니. [A] 다만 일제의 한반도 수도 이전 계획에 문제가 하나 있다. 서울 인근에 천도하게 된다면 지진에는 안전하겠지만, 대신에 군사적인 위험이 증가하게 된다. 일본은 섬나라 해양국가이므로, 적국 군대가 상륙하기 전에 바다에서 격침 하기만 하면 쉽게 적의 침공을 막을 수 있으며, 이에 따라 해군력이 강한 편이다. 이걸 너무 믿고 넘사벽인 상대 건든게 탈이지만... 그런데 일본 열도에 비해 육로로 침입하기 쉬운 한반도, 그것도 남쪽 지방도 아니고 더 위쪽에 있는 중부지방에 국가의 중추부를 옮기게 된다면, 자기 약점을 대륙 국가에 '찔러 주십시오' 하면서 보란 듯이 들이미는 꼴이 된다. [B] '지진 대책 + 한반도와 일본 열도의 연결 + 바다를 통해 상륙해 오는 적성 해양세력 군대 + 북쪽 대륙에서 들이닥치는 소련군' 이걸 다 고려해서 수도 옮길거면, 차라리 큐슈 북부에 천도 하는게 나을 것이다. 구태여 한반도 안에 천도할 거면, 그나마 일본 열도와 가깝고 해군력의 지원을 받기 쉬운 경남 동남부 지역이 더 좋을 것이다. [41] 나스시오바라역 인근이 이전지로 논의되었으며 지금도 지역에선 국회 기능 이전 주장 등의 목소리가 존재한다. [42] 원전이 위치한 하마도리에서 산맥으로 분절된 토치기 인근 내륙 나카도리 지방이 물색되었던 거라 사실 그렇게까지 큰 문제는 없다. [43] 사아타마, 치바, 카나가와 등 미나미칸토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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