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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07 20:20:48

부이예 전투

1. 개요2. 배경3. 전투 경과4. 결과

1. 개요

서기 507년 프랑크 왕국의 국왕 클로도베쿠스 1세의 군대와 서고트 왕국의 국왕 알라리크 2세 아키텐의 푸아티에에서 북서쪽으로 15km 떨어진 부이예에서 맞붙은 전투. 프랑크 왕국이 프랑스에서의 패권을 확립하게 만든 결정적인 전투이다.

2. 배경

서기 486년, 프랑크 왕국의 군주 클로도베쿠스 1세는 수아송 전투에서 시아그리우스를 격파하고 수아송 왕국을 공략했다. 이로서 프랑크 왕국의 영역은 2배로 늘어났고, 시아그리우스가 보유하고 있던 강력한 로마 잔여병이 그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이후 갈리아 북동부에 있는 튀링겐족에게 관심을 돌린 그는 491년 승리를 거둬서 그들마저 복종시켰다.

클로도베쿠스 1세는 뒤이어 라인강 상부와 중부에 거주하고 있던 부르군트족 알레만니 족을 공격했고, 496년 톨비악 전투에서 알레만니 족을 상대로 격전을 벌였다. 투르의 그레고리에 따르면, 클로도베쿠스의 아내는 열렬한 가톨릭 신자로, 남편에게 예전부터 개종을 권했지만 클로도베쿠스는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다 알레만니족과 전투를 벌이던 중 전멸의 위기에 놓였다가 기적적으로 승리를 거뒀다고 한다. 그는 이것이 아내가 믿는 신의 가호라고 믿고, 랭스에서 부하 3,000명과 함께 가톨릭 세례를 받고 개종했다. 그 결과, 클로도베쿠스는 로마 교회와 갈리아 현지민들의 지지를 받았고, 일부 가톨릭 주교들로부터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받았다.

이후 클로도베쿠스는 꾸준히 원정에 착수하여 알레만니 족을 제압하고 부르군트 왕국 일부를 공략했다. 그 결과 프랑크 왕국의 영향력은 아키텐과 히스파니아에 걸쳐 있는 서고트 왕국의 경계를 살 정도로 강력해졌다. 이리하여 양국 간 마찰이 표면 위에 떠올랐다. 클로도베쿠스 1세는 서고트 왕국을 상대하기 전에, 이탈리아에서 강력한 세력을 갖추고 있는 동고트 왕국의 군주 테오도리쿠스 대왕과 화친을 맺기로 하고, 자신의 누이인 아우도프레다를 테오도리쿠스 대왕과 결혼시켰다.

서기 506년, 클로도베쿠스는 루아르강 중류의 한 섬에서 서고트 국왕 알라리크 2세와 만나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알라리크는 이때 클로도베쿠스에게 낭트, 앙제, 투르, 오를레앙을 넘겨준 것으로 보인다. 이 도시들은 루아르 강 하류에 위치한 주요 도시였는데, 주민들은 가톨릭 신자들로 아리우스파 기독교를 신봉하는 서고트 족에게 지극히 적대적이었다. 알라리크 2세는 아마도 통제가 안 되는 이 땅을 프랑크 왕국에게 넘겨주면서 전쟁을 모면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클로도베쿠스는 불가침 조약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그는 부르고뉴 왕 군도바트와 군사 동맹을 주선했다. 이는 테오도리쿠스 대왕이 사위인 알라리크 2세를 지원하기 위해 달려오는 걸 사전에 차단하는 역할을 부르고뉴 왕국에게 맡기려는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507년 2월이나 3월 초에 프랑크 왕국 전역에 군대 동원 명령을 내렸고, 이른 봄에 루아르 강을 건너 아키텐으로 진격했다. 그는 가능한 한 빨리 아키텐으로 남하하여 요새화된 도시들로부터 민병대를 지원받기를 희망했다.

한편, 알라리크 2세는 프랑크군이 조약을 깨고 남하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푸아티에에 군대를 집결했다. 클로도베쿠스 1세는 비엔느 강을 건넌 뒤 푸아티에 시에서 9마일 정도 떨어진 부이예에 이르렀다. 그러던 중 정찰병으로부터 서고트 왕국군이 근방에 있다는 정보가 들어오자, 그는 즉시 부이예 평원에 전투 대형을 형성하고 적을 기다리게 했다. 이리하여 갈리아 서남부 아키텐 일대의 패권을 둘러싼 양측의 대결이 임박했다.

3. 전투 경과

양측의 병력 규모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지만, 알라리크의 군대는 고트족과 로마 징집병으로 구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클로도베쿠스의 군대는 프랑크 족과 로마계 갈리아 엘리트 전사들, 그리고 이웃 나라들에서 온 외국인 용병들로 구성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투르의 그레고리에 따르면, 양측이 서로를 향해 화살을 쏘고 창을 던진 뒤 돌격하였다고 한다. 또한 그레고리는 서고트 기병대가 프랑크 족의 보병 대열을 향해 돌격했으나 실패했다면서, "클로도베쿠스 왕은 신의 도움으로 승리를 거두었다"고 언급했다.

전설에 따르면, 클로도베쿠스 1세는 전투 도중 알라리크 2세에게 직접 돌격하여 수급을 베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알라리크 2세가 전투 도중에 전사한 건 확실하다. 서고트 군이 왕의 전사를 확인하자마자 패주하면서, 부이예 전투는 프랑크군의 완승으로 끝났다.

4. 결과

프랑크군은 부이예 전투에서 완승을 거둔 뒤 여세를 몰아 보르도를 포함한 아키텐 전역을 휩쓸었고, 서고트 왕국의 수도인 툴루즈도 함락하여 왕실의 숱한 보물을 노획했다. 한편, 클로비스와 연합한 부르군트 왕국군도 나르본느를 공략했다. 클로도베쿠스 1세는 내친 김에 서고트 왕국 전체를 정복하려 했지만, 테오도리쿠스 대왕이 사절을 보내 그러지 말라고 권하자, 아키텐만 얻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다. 이후 테오도리쿠스 대왕은 서고트의 섭정을 맡았고, 511년 클로도베쿠스가 죽자 아예 섭정왕이 되었다. 한편 서고트 왕국은 툴루즈를 비롯해 피레네 산맥 이북의 아키텐을 잃고 수도를 이베리아 반도의 톨레도로 옮긴 후 완전히 이베리아 국가화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