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num Francorum 프랑크인의 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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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리 프랑크인의 왕 프랑크인의 초대 왕 Clovis I | 클로비스 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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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한국어 | 클로비스 1세 |
고대 프랑크어 | ᚺᛚᛟᛞᛟᚹᛁᚷ / Hlōdowig (흘로도위그) | |
라틴어 | Chlodovechus I (클로도베쿠스 1세) | |
프랑스어 | Clovis Ier (클로비스 1세)[1] | |
독일어 | Chlodwig I. (클로트비히 1세) | |
영어 | Clovis I (클로비스 1세) | |
출생 | 466년 | |
사망 | 511년 11월 27일 (향년 45세) | |
재위 기간 | 살리 프랑크인의 왕 | |
481년 ~ 509년 | ||
프랑크인의 왕 | ||
509년 ~ 511년 11월 2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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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는 프랑스라는 이름의 기원이 되는 프랑크 민족에 의해 프랑스의 왕으로 선택된 클로비스야말로 프랑스 역사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샤를 드골, 클로비스의 세례 1500주년 기념식에서
프랑크 왕국의 초대 왕이자
메로베우스 왕조의 실질적인 창시자로 잘리어(Salian)[2][3]
프랑크족[4]의 부족장. 전형적인
정복 군주이자 군인형 군주였다.
서로마 제국 멸망 직후의 혼란기를 잘 활용하여 여러 프랑크 부족들을 통합하고
서고트 왕국과 알레만족,
부르군트 왕국 등을 공격하여 영토를 확장했다. 또 다른 게르만 군주들과 달리
아리우스파 그리스도교가 아닌 칼케돈파 산하 가톨릭 교회로 개종하여 로마 교황에게 교회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얻기도 했다.샤를 드골, 클로비스의 세례 1500주년 기념식에서
서로마 제국 멸망 직후 권력 공백기를 잘 이용하여 여러 군소 프랑크족들을 통합하여 안정된 왕국을 세운 것은 업적이나, 권력을 획득하고 다른 부족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잔혹하고 비열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고, 그 때문인지 동시대에 활약했던 고트족 지도자 테오도리크 대왕과 달리 대왕(Magnus)으로 불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훗날 테오도리크의 동고트 왕국과는 달리 프랑크[5]가 현대까지 존속하면서 유럽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중이기에 오늘날 대중에게는 클로비스가 테오도리크보다 훨씬 더 많이 알려져 있다.
2. 생애
클로비스 1세가 즉위하기 직전 프랑크족의 위치와 범위. |
490년대 초반, 동고트 왕국의 테오도리크 대왕에게 자신의 여동생을 시집보내 결혼동맹을 맺는 한편, 부르군트족의 왕의 조카딸 클로틸데를 왕비로 맞이한다. 이때 먼저 맞이했던 라인 프랑크족 출신 왕비는 이혼당했다. 후에 클로비스가 지고베르트를 살해할 수 있었던건 이미 이때 이혼을 했었기 때문이었다. 이 동맹 직후 동쪽의 튀링겐족을 공격해 복속시켰다. 튀링겐족은 점차 시간이 지남에 따라 프랑크 왕국에 강하게 복속된다. 496년과 498년에는 서고트 왕국으로 두차례 원정을 떠나, 아키텐 지역의 중심도시인 현재의 보르도 시를 점령한다.
500년, 클로비스는 당시 분할상속된 상태였던 부르고뉴 왕국에서 벌어진 내전에 자신이 결혼동맹을 맺은 고데기실레의 편으로 참전했다. 디종 전투에서 승리한 덕분에 곤도발드 왕을 패배시키고 그에게 왕위를 포기하길 강요하면서 승리하나 했지만, 서고트 왕국이 개입해 곤도발드와 동맹을 맺고 클로비스에게 고데기실레와의 동맹을 끊을 것을 강요하는 바람에, 결국 그 제안을 받아들여 곤도발드로 동맹을 갈아탄 후 아들을 곤도발드의 손녀와 결혼시킨다. 결국 고데기실레는 전투에서 패배해 살해당하고 곤도발드가 부르고뉴의 유일한 왕이 되었다.
클로비스의 아내 클로틸데는 열렬한 로마 교회 신자로 클로비스에게 예전부터 개종을 권했지만 거절하고 있었는데, 496년 알레만족과 전쟁을 하는 도중 전멸의 위기에 놓였다가 기적적으로 승리를 거두게 되는 일이 생긴다. 이것이 아내가 믿는 신의 가호라 믿은 클로비스는 508년 랭스에서 레미기우스 주교에게 부하 3000명과 함께 세례를 받아 개종하게 되었다.[6] 이로 인해 클로비스는 로마 교회와 갈리아 현지인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고 일부 로마 교회 소속 주교들로부터 아우구스투스[7]의 칭호를 받게되는 일도 생기게 됐다. 다만 형식적으로는 동로마 제국에 복종하면서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집정관과 로마 특별 시민의 지위를 얻게 된다.
한편 클로비스는 수아송 왕국 정복 직후에는 갈로-로마인들에 대한 통치에 애를 꽤 먹었다. 처음에는 클로비스 또한 다른 게르만 왕들처럼 정통파에 우호적이지 못했기 때문인데, 이에 베르둔같은 로마 도시들은 클로비스 1세에게 세금 내는 것을 거부하기도 했다. 그러다 랭스 대주교로부터 '당신과 당신 부하들이 교회로부터 약탈해간 것들을 교회에 돌려주고 정통파를 공인하라'라는 편지를 받고 비로소 칼게돈파 교회와 친하게 지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노선을 전환했고, 수아송 전투 이후 그에게 불만을 품은 시아그리우스의 잔존 군대도 그의 프랑크족 군대에 통합함으로써 그들을 회유했다. 위에 나온 이야기는 초기 그리스도교 개종 서사에 자주 나타나는 내러티브라[8] 믿거나 말거나 식일 가능성이 높다.
한편, 세례를 받는 건에 대해 클로비스에게 보낸 서신에서[9] 비엔의 아비투스(Avitus of Vienne) 주교는 ' 그리스가 정통파(orthodox) 군주[10]를 갖게 된 것을 기뻐하십시오. 하지만 더 이상 그리스만이 유일하게 그런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지는 않습니다.' 라고 썼다고 한다.[11]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때는 서로마가 멸망한 지 30년 정도밖에 안 된 508년 전후였는데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동로마가 로마도 아닌 그리스로 지칭되고 있다는 점, 나아가 동방의 그리스에 대응되는 서방의 프랑크라는 구도의 초보적인 형태가 벌써부터 그려지고 있다는 점[12], 로마 황제 다음 두 번째로 클로비스 당신이 정통파 그리스도인도 군주가 될 수 있다며 개종을 촉구했던 것으로 보아 게르만인들 사이에서는 아리우스파가 대세였다는 점[13], 아나스타시우스 1세 황제는 사실 본심은 단성론이었지만 통치를 위해 내키지 않는 정통파 코스프레를 해야 했는데, 편지에는 마치 정통파 군주의 모범처럼 묘사되어 있다는 점 등이다.
507년, 서고트 왕국의 군대를 푸아티에 부근의 부이예(Vouillé)에서 크게 격파하고 알라리크 2세를 살해하였다. 그 결과 랑그도크를 제외한 프랑스 남부 전역을 점령한다. 내친 김에 서고트 왕국 전체를 정복하려고 하였으나 동고트 왕국의 테오도리크 대왕의 제지로 인해 아키텐만 얻는 선에서 마무리짓게 된다. 하지만 대신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명예 집정관직을 수여받음으로서 사실상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된다.
이후 클로비스는 꾸준히 프랑크족 통합에 나서는데 그 과정에서 클로비스는 자신의 정치력을 여과없이 보여주게 된다. 508년 인척이자 라인 프랑크족의 지도자 지고베르트 부자를 살해했고[14][15] 또, 510년에는[16] 친족으로서 동맹 관계였던 통게렌[17] 지역 살리 프랑크족의 왕 카라리크가 수아송 전투 때 배신을 때리고 이기는 편 우리편(...)을 시전했던 것에 대한 보복으로 카라리크의 영토로 쳐들어가 카라리크와 그의 가족들을 멸족시켰다. 또 클로비스의 또다른 친척으로 추정되는 캉브레 지역 살리 프랑크족의 군주 라그나카르의 전사들을 금팔찌로 매수한 뒤 앞서와 비슷한 방식으로 라그나카르를 제거했다.[18] 그러나 이 금팔찌는 사실 청동을 도금한 가짜였고 배반자들이 이에 대해 항의하자 주군을 배신한 자는 금팔찌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뻔뻔함을 보여준다.
그 외에도, 이전부터 클로비스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 차후 경쟁자가 될지 모를 친척들을 전부 제거해 놓고서는 갑자기 "아, 슬프다. 나는 도와줄 친척들 하나 없이 낯선 사람들 사이에 홀로 남았구나."라고 한탄하며 남은 친척들이 있다면 만나고 싶다며 큰 잔치를 열었는데, 사실 그의 본심은 혹시라도 못 죽인 친척이 남아 있는지 떠보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또한 수틀리는 사람이 있으면 도끼로 박살낸 것으로도 유명한데, 한번은 부하가 그의 약탈물 배분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며 공평하게 다시 분배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그 자리에선 알겠다고 해놓고, 다 잊은 척 행동하다 몇 달이 지난 뒤 그 부하의 칼을 점검하다가 더럽다며 땅에 떨어뜨리는데 부하가 주우려 고개를 숙이자 도끼를 꺼내 그 자리에서 참수한 적도 있다. 클로비스의 이런 행동은 당시가 서로마 제국 직후의 혼란기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만약 중세 이후 이런 행동을 했다면 교황에게 파문당하거나 연합한 적대 세력들에게 두들겨 맞았을 것이다.
클로비스는 511년 11월 27일 파리에서 죽었으며 프랑크 왕국은 살리카 법에 따라 아들들에게 분할되었다. 수아송은 클로타르 1세에게, 파리는 킬데베르 1세에게, 오를레앙은 클로도미르에게, 랭스는 테우데리크 1세에게 맡겨졌다. 이들은 각자 나라를 이끌면서 전시에는 힘을 합쳐 외적에 대항하기로 했지만, 나중에는 프랑크 왕국 최고의 권위자가 되려고 치열한 정쟁을 벌였다.
500년경의 유럽. 클로비스가 한참 영토확장을 하던 시기였다.
3. 내치
클로비스는 군사적 업적뿐만 아니라 내치에서도 훌륭한 성과를 보였다. 프랑크 왕국의 파리를 왕실의 수도로 정했고[19], 파리는 오늘날까지도 유럽의 중심지 역할을 이어가게 된다. 종교면에서는 죽기 직전 제1차 오를레앙 공의회를 개최해 교회법 등 여러 법률들을 제정하거나 교회와 주교의 권리를 명시했으며, 교회와 왕실은 서로 종속관계가 아닌 협력 관계임을 분명히 했다. 이는 차후 메로빙거 왕조의 전통이 될 공의회 정치[20]의 첫 선례가 되었다. 국내에 로마 교회의 선교를 장려하고 주교들로부터 충성서약을 받아내는 업적을 쌓았다.그 외에 성직자를 위시한 현지의 갈리아-로마계(Gallo-Roman) 엘리트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해 프랑크 왕국 내에 로마의 행정조직을 도입하여 프랑크 왕국의 기초를 마련하였으며 향후 근대까지 영향을 미쳤던 서유럽 왕위 계승의 법칙의 대표격인 살리카법도 이 시기에 편찬되었다. 이 살리카법은 기본적으로 살리 프랑크족의 전통적인 관습법에 기초하지만, 갈로로만계 관료들을 중심으로 로마법이나 교회법에 의한 보완도 이루어졌다. 대표적으로, 분쟁이 났을 때 페데(fede)의 관습에 따라 사적인 전쟁이나 결투로 이를 해결하는 관습을 폐기하고 로마법의 조항을 도입해 폭력 없이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조항을 도입했으며, 한편 로마법의 무거운 형량은 깎아 사형 집행은 최소화하고 범죄에 대한 처벌 역시 관대하게 만들었다. 덕분에, 중세 시대가 폭력과 야만의 시대라는 대중적 편견과는 달리 법과 절차에 의한 사법 집행은 꽤 잘 지켜진 편이었다.
하지만 이 살리카법은 왕국 전체에 적용되는 법이 아닌 살리 프랑크족 한정으로 적용되는 법으로서, 갈로-로만인들에게는 테오도시우스 법전을 서고트의 왕 알라리크 2세가 개조해 반포한 알리리크 법, 정식 명칭으로 lex romana visigotorum이라 불리는 법전이 적용되었다. 한편 라인 프랑크족에게는 리푸아리법이라 불리는 고유 법이 적용되었는데 이 법은 문서화는 약 100년 이후에나 이루어진다.
클로비스가 행한 정치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보다도 '전리품의 분배'와 이로 인해 실현되는 봉건제의 맹아적 요소이다. 클로비스는 평생의 전쟁을 통해 지역들을 새로 정복할 때마다 교회나 자신의 가신들에게 이를 분배함으로서 은상을 주고, 통치에 밀접한 도움이 되는 교회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는 게르만 전통적인 주인-가신 관계에 근거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수여받은 그 가신이 해당 지역에 정착해 행정관으로서 장원을 형성하거나 세금을 걷는다는 점에서 로마의 은대지 제도와도 유사점이 있었다. 이는 향후 봉건제가 탄생하는 데에 밑거름이 되었다.
[1]
루이(Louis)와 달리 클로비스(Clovis [klɔ.vis\])는 어말 자음을 생략하지 않는다.
참고.
[2]
여기서 Salic이라는 표현, 즉
살리카법이 유래되었다.
[3]
살리어 프랑크족 이외의 프랑크족으로는 라인 프랑크족이 있는데, 말그대로 라인강 유역에 사는 프랑크족이었으며 프랑크 왕국이 최종적으로 삼분할된 이후 독일인에 가까운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독일 5대 부족 공국 중 프랑켄 공국이 라인 프랑크족의 후손이다. 신성로마제국의 왕조 중 동명의 이름을 가진
잘리어 왕조가 있다. 이쪽도 프랑켄계이다.
[4]
살리족, 살리어 프랑크 등으로도 불린다.
[5]
비록 라틴화되고 언어도 바뀌고 왕정도 아니게 되었지만, (마치 동로마가 로마이듯이) 프랑스는 프랑크와 연속되고 동일한 Francia이다.
[6]
참고로 이게 전통으로 굳어져 후대 프랑스 왕들은(프랑크 왕국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독일, 이탈리아, 기타 서유럽 국가의 공통의 역사가 아니냐 할 수 있지만 그것은
카롤루스 왕조이고, 프랑스에 대한 역사적 귀속권에 있어서 메로비우스 왕조는 카롤루스 왕조보다 그 정도가 훨씬 높다.) 대관식을 랭스에서 해야만 했고
백년전쟁에서는 이게 첨예한 화두가 되었다.
[7]
로마 황제
[8]
콘스탄티누스 1세부터 그 변방 앵글로색슨족에게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흔한 이야기이다.
[9]
개종 및 세례라는 것은 매우 중대한 정치행위이기에 당연히 함부로 할 수 없고 신중하게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실익에 대해서 주변 인사들과 직접 만나서, 혹은 서신을 통해서 교류하며 의견을 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10]
시점이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불과 60년도 안 된 시점이고, 가톨릭-정교회가 소위
동서 대분열이 되는 1054년에서 550년이나 이전이기 때문에, 'orthodox'를 '정교회'로 번역하면 안 되고 가톨릭-정교회 공통의 소위 칼케돈 정통파 그리스도교라고 번역하는 것이 맞다.
[11]
'Transformations of Romanness' 25p, 원문: 'Bishop Avitus of Vienne wrote to Clovis on the occasion of his baptism: 'Let Greece, to be sure, rejoice in having an orthodox ruler, but she is no longer the only one to deserve such great a gift.''
[12]
이는
9세기에 현실화되었다.
[13]
게르만인들이 아리우스파에 대단한 신심이 있다기보다는, 로마의 국교인 니케아-칼케돈 정통파를 믿으면 그 세계관에서는 무조건 로마 황제를 상급자로 인정하고 시작해야 했기 때문에 일부러 정통파를 피한 것이다. 그런데 클로비스는 발상의 전환을 이루어 각 게르만 왕국들의 게르만인 사이에서는 아리우스파가 여전히 대세일 때 남들보다 먼저 정통파에 몸담았던 것이다. 이후 프랑스가 '
가톨릭교회의 맏딸(fille aînée de l'Église)'로 불리게 된 것은 여기서 기인한다.
[14]
정확히는 지고베르트의 아들을 부추겨 아버지를 살해하게 한 뒤(...) 지고베르트의 아들을 부친 살해죄로 몰아 죽여버리고는 그의 부족을 흡수해버렸다. 지고베르트는 클로비스와 함께 알레만니족(후의 슈바벤족)을 상대로 승리를 거둬 그들을 지배 하에 놓는 등 상당히 강력한 정적이었다.
[15]
참고로, 이후 살아남은 지고베르트의 자손들은 아우스트라시아에서 살아가다가 7세기 초의 메츠의 성 아르눌(Arnoul de Metz)을 통해 부계로 메로빙거 왕조를 무너뜨리는
카롤루스 왕조에게로 이어진다. 상당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16]
491년이라는 설도 있다.
[17]
당시 클로비스가 통제하는 영역이 아니었다
[18]
수아송 전투때 라그나카르가 간을 보면서 지원 요청을 거부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19]
다만, 후대의 신성로마제국이 고정된 수도가 없던 것처럼 클로비스 본인은 딱히 파리에만 머물지 않고 여러 곳들 돌아다니며 지냈으므로 그의 치세까지는 파리는 사실상 명목상의 수도에 가까웠다.
[20]
공의회에서 교회법 및 여러 왕국 법률들을 반포함으로서 교회와 왕실을 결속시키면서 법률의 권위를 부여하는 방식의 정치행위가 메로빙거 왕조에서는 자주 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