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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페리크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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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우스트리아의 왕
Chilperic I | 킬페리크 1세
파일:킬페리크 1세.jpg
제호 한국어 킬페리크 1세
프랑스어 Chilperic I
생몰 년도 539년 ~ 584년 9월
재위 기간 네우스트리아의 왕
561년 ~ 584년

1. 개요2.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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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네우스트리아 프랑크 왕국의 왕.

2. 행적

프랑크 왕 클로타르 1세와 아레군트의 아들이다. 이복형제로 콘티에르, 카리베르 1세, 군트람, 시게베르 1세, 킬데리크, 클로신드, 크람이 있었다. 561년 11월 29일 아버지가 콩피에뉴 사유지의 별궁에서 사망한 뒤, 그는 장례식에 치른 후 국고를 서둘러 확보한 뒤 병사들에게 금을 나눠줘서 자신에게 충성 맹세를 하도록 했다. 이후 파리에 무혈 입성한 뒤 프랑크 왕을 자처하려 했지만, 나머지 세 형제 카리베르 1세, 군트람, 시게베르 1세가 연합하여 파리에 진군하자 그들과 협상한 끝에 수아송에서 조용히 왕국을 운영하기로 했다. 역사가들은 그가 세운 수아송 왕국을 메로베우스 왕조 프랑크 왕국의 한 부분이었던 '네우스트리아 왕국'의 전신으로 간주한다.

그 후 상황을 주시하던 그는 시게베르가 아바르족과 전쟁을 벌이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 조용히 지내겠다는 맹세를 파기하고 랭스를 공격해 자기 영지로 삼았다. 그러나 시게베르는 아바르족을 물리친 뒤 돌아와서 수아송을 공략하고, 그곳에서 킬페리크의 아들인 테우데베르를 체포했다. 이후 킬페리크는 시게베르와의 전투에서 패배해 도주했고, 그의 지배를 받던 도시들은 시게베르의 수중에 들어갔다. 데우데베르는 1년 내내 폰티오에서 포로로 남아있다가 다시는 시게베르에게 어떠한 대항도 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한 뒤 아버지에게 돌아갔다. 그 후 킬페리크와 시게베르 형제는 화해했고, 킬페리크는 시게베르가 작센과 전쟁을 벌일 때 함께하기도 했다.

킬페리크는 아우도베라를 첫 아내로 삼아 데우데베르, 메로베, 클로비스, 바시네를 두었다. 그러다가 킬페리크가 아우도베라의 시녀 프레데군트의 아름다운 용모에 반해 그녀를 정부로 삼았다. 그러던 565년경, 킬페리크가 시게베르의 작센 원정에 참여하러 간 사이에 아우도베르는 딸 킬데신다를 낳았다. 당시엔 세례식 때 아기의 대모를 정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원래는 킬페리크의 누이가 대모를 맡기로 했지만 그녀가 병에 걸리는 바람에 대모를 맡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프레데군트가 왕비에게 권유했다.
"왕비께서 궁중 여인 중 최고이시니 대모를 맡으십시오."

아우도베라는 그 말이 일리있다고 판단하고 아기의 대모가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함정이었다. 아이의 대부모가 된 사람은 아이의 부모와 형제가 되기 때문에 아이의 부모와는 결혼할 수 없었다. 그런데 아우도베라가 대모가 되었으니, 킬페리크와의 결혼은 무효 처리되고 킬데신다는 졸지에 사생아 취급받는 격이 되어버렸다. 프레데군트는 원정에서 돌아온 킬페리크에게 이 사실을 고스란히 알렸고, 킬페리크는 분노하여 아우도베라와 킬데신다를 망스의 수도원으로 보내버렸다.

이 무렵, 시게베르 1세가 서고트 왕국 국왕 아타나길드의 장녀 브룬힐트와 결혼했다. 형이 이 결혼을 통해 막대한 지참금을 받아냈다는 이야기를 접한 그는 아타나길드에게 브룬힐트의 여동생 갈스빈트를 자신에게 시집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아타나길드는 그가 음탕하다는 소문을 전해듣고 딸을 선뜻 내주지 않았다. 그러던 567년, 파리 일대를 다스리던 카리베르 1세가 사망했다. 이에 킬페리크, 군트람, 시게베르가 카리베르의 영지를 분할했는데, 킬페리크는 레몽, 퀘라르, 닥스, 보르도, 비고르, 베어른 등 피네스 상부 일대를 접수했다. 이리하여 서고트 왕국과 경계가 맞닿게 되자, 아타나길드는 그와 갈등을 벌이는 건 좋지 않다고 판단하고 프레데쿤트와 깨끗히 헤어지는 조건하에 딸을 시집보내겠다고 제안했고, 그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러나 567년 3월 갈스빈트를 맞이한 그는 아내의 용모가 생각했던 것보다 별로라는 생각이 들자 아내를 별궁에 방치한 채 프레데군트와 대놓고 불륜을 맺었다. 이에 길스빈트가 결혼을 무효로 해달라고 요구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갈스빈트는 계속되는 남편의 냉대에 질린 나머지 지참금을 포기할 테니 조국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간청했지만, 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던 568년경, 갈스빈트는 잠자던 중에 목졸려 살해되었다. 킬페리크가 죽이라고 명령했다는 설과 프레데군트가 사주했다는 설이 양립하는데, 정황상 프레데군트가 주도했고 그는 이를 방조 또는 방관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후 킬페리크는 프레데군트를 정식으로 왕비로 삼았다.

여동생이 피살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브룬힐트는 극도로 분노했고, 남편에게 복수해달라고 간청했다. 시게베르 1세는 아내의 간절한 설득을 받아들여 군대를 이끌고 킬페리크의 영지로 쳐들어갔다. 그러자 군트람이 두 형제에게 자제할 것을 촉구했고, 그들은 569년 전국에서 소집한 대표들이 집결한 궁정 회의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기로 했다. 궁정 회의 결과, 킬페리크는 살인에 관여한 책임을 지고 브룬힐트에게 아키텐의 5개 도시(보르도, 리모주, 카오르, 베른, 비고르)를 넘겨야 했다.

이리하여 평화가 이뤄지는 듯했지만, 그는 영토 손실을 만회하고자 시게베르로부터 투르와 푸아티에를 탈취했다. 이에 시게베르는 이참에 킬페리크를 처치하고 그의 영지를 자신의 영역으로 귀속시키기로 마음먹었다. 575년, 시게베르는 라인강 너머 게르만인들을 대거 고용해 강대한 군사력을 갖춘 뒤 수아송으로 쳐들어갔다. 킬페리크의 장남 테우데베르가 군대를 이끌고 맞서 싸웠으나 킬페리크 편을 들던 군트람 보손이 돌연 편을 바꿔버리는 바람에 참패해 목숨을 잃었다. 킬페리크는 공포에 사로잡힌 채 투르로 도망친 뒤 그곳에서 농성했다. 이후 투르를 포위한 적과 공방전을 벌이고 있을 때, 그와 함께 있던 프레데군트가 아들을 낳았다. 신생아는 투르 주교에 의해 세례를 받았는데, 프랑크 전통과는 달리 삼손(Samson)이라는 게르만식 이름을 받으며, 빈민들이 아이의 탄생을 지켜보게 했다.

킬페리크는 투르 공방전이 갈수록 불리하게 돌아가자 절망에 빠진 나머지 성당에 들어가 기도를 드릴 뿐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이에 프레데군트가 그를 대신해 행동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그녀는 경비병 2명을 불러낸 뒤 마약 성분이 든 술을 마시게 한 후 독이 든 단검을 쥐어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시게베르 왕을 먼저 죽이는 자는 나와 하룻밤을 보낼 수 있게 해주겠다."

두 사람은 즉각 투르에서 빠져나와 비트리 앙 아르투아에서 킬페리크의 옛 신하들로부터 왕으로 칭송받던 시게베르를 단검으로 찔러 죽였지만, 시게베르를 호위하던 병사들에게 곧바로 처단되었다. 지도자를 잃은 군대는 해산되었고, 킬페리크는 잃어버렸던 영토와 재산을 쉽게 되찾았다. 그 후 파리를 공략해 브룬힐트를 생포한 후 루앙 시로 유배보냈고, 그녀가 파리로 가져온 보물을 탈취했다. 576년, 킬페리크는 아들 메로베에게 군대를 이끌고 푸아티에를 공격하게 했다. 하지만 메로베는 명령을 무시하고 투르에 진군해 그 일대를 심하게 황폐화시켰다. 이후 어머니 아우도베라에게 가고 싶은 척하면서 루앙으로 갔고, 그곳에서 브룬힐트를 만난 뒤 그녀와 결혼했다.

이 소식을 접한 그는 분노해 아들을 만나기 위해 직접 떠났다. 오랜 협상 끝에, 킬페리크는 브룬힐트와 결혼하겠으니 간섭하지 말라는 아들의 요구에 굴복하는 듯했지만 여전히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한편, 샹파뉴에서 온 이들이 수아송을 습격해 순식간에 장악한 후 프레데쿤트와 킬페리크의 아들 클로비스를 수아송에서 몰아냈다. 이에 킬페리크와 메로베는 잠정적으로 화해한 뒤 수아송으로 진군해 적을 몰아내고 수아송을 회복했다. 그러나 그는 이 사건이 메로베의 사주로 일어났다고 여겨 아들을 긴급 체포한 뒤 감옥에 가두었다.

그 후 측근 한명을 군트람 보손이 숨은 성 마르틴 대성당이 있는 투르에 보내 자신의 장남 테우데베르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자를 넘기지 않는다면 투르를 파괴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투르 주교 그레고리우스가 이끄는 투르 주민들은 "성스러운 성당이 스스로 찾아온 죄인을 보호하는 것은 정당한 일인데 이를 위반할 수는 없다"라고 답했다. 이에 킬데리크는 아들 클로비스에게 투르를 응징하게 했다. 클로비스가 명령을 받들어 데시데리우스 공작과 함께 투르와 앙제 일대를 약탈하고 있을 때, 부르군트 왕 군트람이 리모주에 도착하여 이들과 응전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이후에 벌어진 전투에서 군트람은 5,000명의 전사를 잃었고 데시데리우스는 24,000명의 전사를 잃고 가까스로 탈출했다고 한다. 그 후 군트람은 오베르뉴를 통과하면서 약탈과 파괴를 자행한 뒤 부르군트로 돌아갔다.

한편, 감옥에 갇혀 있던 메로베는 상속권을 박탈당한 뒤 수도승에 의해 삭발된 후 아니솔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그러다 도중에 군트람 보손의 부하들에 의해 풀려난 뒤 투르로 도주했다. 킬데리크는 메로베를 넘겨줄 것을 요구하며 투르로 군대를 재차 보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메로베와 브룬힐트의 결혼을 주선한 루아나 주교는 체포된 후 브룬힐트로부터 뇌물을 받고 사람들을 선동하고 왕에 대한 불복종을 부추긴 혐의가 적용되어 교회 법원에 회부되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를 포함한 여러 주교들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왕의 압력으로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루아나는 주교직을 박탈당한 뒤 감옥에 갇혔다가 밤에 탈출하려 했으나 발각되어 심하게 구타당한 뒤 저지 섬으로 보내졌다.

577년, 메로베는 아버지의 공세를 피해 아우스트라시아로 도주하여 브룬힐트와 합류했다. 당시 아우스트라시아는 시게베르 1세의 어린 아들 킬데베르 2세가 군림했지만 실권은 왕을 보좌하는 신하들에게 주어졌다. 그들은 브룬힐트의 권력이 강화되는 걸 꺼렸기에 메로베의 망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메로베는 정체를 숨긴 채 랭스에 숨어있다가 테루안 사람들에게 발각되었다. 그들은 메로베에게 킬페리크에게 반란을 일으키려 하니 자신들을 이끌어달라고 청했다. 그는 이에 기뻐해 가장 용감한 추종자들만 데리고 테루안으로 갔다가 도중에 붙들려 별장에 갇혔다. 주민들은 별장 주위에 무장한 남자들을 배치한 뒤 킬페리크 1세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 킬페리크는 메로베가 구금되어 있는 곳으로 급히 갔지만, 메로베는 이미 살해된 뒤였다. 세간에서는 프레데군트가 아우도베라의 모든 아이들을 멸하려고 살인을 사주했을 거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킬페리크는 아들이 살해된 것을 알게되자 살인자를 처형했다.

577년, 킬페리크와 프레데군트의 아들 삼손이 이질에 걸려 2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프레데군트 역시 병에 걸렸지만 곧 회복되었다. 578년, 킬페리크는 브르타뉴 원정을 계획하고 투르, 푸아티에, 베른, 르망, 그리고 앙주의 전사들을 소집했다. 브르타뉴 반(Vannes)의 군주 와로흐 2세는 야밤에 원정군을 습격해 대부분의 적병을 격파했지만, 나중에 킬페리크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아들을 인질로 보냈다. 그러면서 매년 공물을 바치는 조건하에 빼앗겼던 도시들을 돌려받았다. 이에 킬페리크의 군대가 철수했지만, 579년 와로흐 2세는 맹세를 어기고 렌을 공격해 약탈을 자했고, 뒤이어 낭트를 습격해 수많은 전리품을 확보하고 포도밭에서 포도를 모조리 거둬들였으며, 여러 주민을 포로로 끌고 갔다.

579년, 킬페리크는 프레데쿤트의 조언에 따라 세금 징수량을 늘리기 위해 인구 조사를 실시하기로 했다. 여기에 밭, 숲, 집, 가축, 포도원에 대한 새로운 세금이 도입되었다. 580년 2월 갈리아-로마 출신인 마르크가 리모주에 도착하여 인구 조사를 실시했다. 이에 분노한 주민들은 3월 1일 반란을 일으켰고, 마르크는 간신히 도시를 탈출한 뒤 킬페리크에게 폭동이 일어났다고 보고했다. 킬페리크는 즉시 군대를 보내 리모주의 폭도들을 학살하고 리모주 대표 및 모든 저명한 시민들을 추방했다. 여기에 사람들을 선동한 혐의로 기소된 성직자들을 잡아들인 뒤 도시 광장에서 다양한 고문을 가했다. 이때 처형되거나 추방된 이들의 모든 재산은 국고로 귀속되었고, 리모주 시는 이전에 지불하기를 거부했던 세금보다 훨씬 더 무거운 과세를 내야 했다. 당시 킬페리크가 이끄는 네우스트리아의 세금이 너무 무거워서, 많은 이들은 네우스트리아를 떠나 킬데리크 2세가 다스리는 아우스트라시아나 군트람이 지배하는 부르군트로 도주했다.

580년 봄, 론, 소나, 그리고 루아르 일대가 홍수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오베르니 계곡 전체가 물에 잠겼고, 리옹의 많은 집이 파괴되었으며, 도시 성벽의 일부가 무너졌다. 그해 여름 동안 우박이 쏟아지면서 오베르뉴 일대가 파괴되었으며, 오를레앙 시는 화재로 절반이 파괴되었고, 강한 지진이 보르도를 강타했다. 8월에는 천연두가 갈리아 전역을 휩쓸면서 수많은 이들이 죽어갔다. 이때 킬페리크와 두 아들 클로도베르와 다고베르트도 병에 걸렸다. 킬페리크는 병에서 회복되었지만, 두 아들은 모두 죽었다. 이 일련의 자연재해에 동요한 킬페리크는 추가 세금을 폐지하고 인명부를 불태웠으며, 교회, 바실리카, 그리고 빈민들에게 많은 선물을 나눠줬다.

프레데군트 사이에서 낳은 클로도베르와 다고베르트가 모두 죽자, 킬페리크는 아우도베라와의 사이에서 낳았고 현재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 클로비스를 후계자로 삼았다. 그러나 프레데군트는 클로비스마저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클로비스가 클로도베르와 다고베르트를 마법으로 죽게 만들었다고 비난했고, 마법사로 간주된 한 여인을 체포해 화형에 처했다. 클로비스는 조사를 위해 한 별장으로 보내졌다가 프레데군트의 명령으로 살해되었다. 이후 프레데군트는 수도원에 사람을 보내 아우도베라를 살해하고, 아우도베라의 딸 바시나를 강간한 뒤 푸아티에 수도원으로 보냈다. 이때 아우도베라의 모든 소유권과 여동생 바시네는 프레데군트의 소유로 넘어갔다.

581년, 군트람과 킬데베르 2세가 마르세유 일부의 소유권을 놓고 분쟁을 벌였다. 킬페리크는 이를 보고 데시데리우스 공작을 불러서 군트람을 괴롭히라고 명령했다. 데시데리우스는 군트람을 따르는 라그노발트 공작을 몰아내고 페리 시를 공략한 뒤 아제네로 진군해 군트람의 통치하에 있는 모든 도시를 점령했으며, 투르 지역 역시 약탈되었다. 또한 킬페리크의 부하인 블라다스트 공작이 바스크 왕국까지 공격했지만 대부분의 병력을 잃고 패퇴했다. 582년, 킬페리크는 앙소알드 공작, 도미기실 공작 등을 서고트 왕국으로 보내 리우비길드의 아들 레카레드 1세와 약혼한 딸 리군타를 위한 지참금 문제를 논의했다. 당시 리우비길드는 군트람의 지원을 받는 장남 헤르메네길드와 내전을 치르고 있었기에 킬페리크와 화목하게 지내려 노력했다. 그 덕분에 협상은 순조롭게 끝났고, 사절단은 본국으로 돌아갔다. 같은 해, 킬페리크는 프레데군트와의 사이에서 아들 테우데리크를 낳았다. 그는 이를 기념하고자 모든 감옥을 열어 죄수들을 석방하고 어떤 형벌도 당분간 시행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583년, 킬페리크의 부하 베룰프, 데시데리우스, 그리고 블라다스트 공작은 킬데베르 2세를 지지하는 오베르뉴 지역을 침공했다. 오브레뉴 측은 1만 5천 병력을 소집하여 대응했고, 양자는 사토메안 요새에서 격돌했다. 데시데리우스는 이 전투에서 7천 명 이상의 병력을 잃고 패퇴했다. 하지만 베롤프와 블라다사스트는 별다른 저항없이 순조롭게 진군하면서 주변의 모든 것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살육했다. 이에 오베르뉴 주민들이 군트람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군트람은 즉시 진군하여 베롤프와 블라다스트의 군대를 거의 섬멸했다. 킬페리크는 이 상황에 동요해 평화 협상을 요청했다.

584년, 테우데리크가 이질에 걸려 사망했다. 그는 어린 아들이 또다시 죽은 것에 극도로 분노해 몸몰 지사가 아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며 비난을 퍼부었다. 그는 곧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았지만 아무것도 자백하지 않아 풀려난 뒤 곧 사망했다. 이후 킬데베르 2세와 군트람이 연합하여 킬페리크를 공격했고, 킬페리크는 이에 대응해 캉브레로 피신한 뒤 그곳에서 아들 클로타르 2세를 낳았다.

파일:킬페리크 1세의 암살.jpg

584년 9월 1일, 킬페리크는 딸 리군타를 서고트 왕국으로 보낼 호화로운 호송단을 파견했다. 이후 사냥에 참여하기 위해 파리 근교의 사냥터로 향했다. 9월 27일, 킬페리크가 사냥에서 돌아와 말에서 내렸을 때 한 사내가 갑자기 달려들어 단검으로 두 번 찔러 죽인 뒤 도망쳐 종적을 감췄다. 살인범의 정체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지만, 많은 이들은 당시 그와 사이가 소원해졌던 프레데군트가 사주했을 것이라고 의심했다. 일설에 따르면, 사냥을 준비하던 왕이 마구간을 들렀다가 프레데군트의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가 물에 머리를 담그고 있을 때, 왕이 뒤에서 그녀를 껴안았다. 그러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뭐하는 거예요, 랑데리크?"

킬페리크는 그 말을 듣고 자신의 종자인 랑데리크가 아내와 불륜 관계라는 걸 눈치채고 매우 슬퍼하며 사냥을 떠났다. 뒤늦게 남편이 알아챘다는 걸 깨달은 프레데군트는 처벌받을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살인자를 고용해 남편을 죽이게 했다. 이후 살인을 사주한 책임을 킬데베르 2세에게 떠넘겼다고 한다. 하지만 학자들은 이 이야기의 신빙성은 거의 없다고 본다. 프레데군트가 살인을 사주해서 얻을 이득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녀는 남편이 살해당하자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갓난아기 클로타르 2세와 함께 당분간 숨어 지내야 했고, 나중에는 부르군트 왕 군트람의 보호를 받았다. 훗날 클로타르 2세가 장성하면서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은 후 프랑크 왕국을 통합하는 사업을 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