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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3-14 10:22:40

헤르메네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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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고트 왕국 가톨릭 군주
Hermenegild | 헤르메네길드
파일:헤르메네길드.jpg
제호 한국어 헤르메네길드
라틴어 Hermenegild
스페인어 Hermenegildo
생몰 년도 미상 ~ 585년 4월 13일
재위 기간 579년 또는 580년 ~ 584년

1. 개요2. 행적3.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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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고트 왕국 가톨릭 초대 국왕. 아내 인군타의 설득을 받아들여 아리우스파로부터 가톨릭을 수호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아버지 리우비길드에게 패배한 뒤 목숨을 잃었다. 사후 교황 그레고리오 1세의 주도로 순교자로 인정되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2. 행적

서고트 왕국의 이베리아 반도 통합을 이뤄낸 정복군주 리우비길드와 알려지지 않은 여인 사이의 장남이다. 남동생으로 레카레드 1세가 있었다. 리우비길드는 아내가 사망한 후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전 왕 아타나길드의 미망인인 고이빈타 왕비와 재혼했다. 579년, 프랑크 왕국과 친선 관계를 맺기를 희망한 아버지의 의향에 따라 프랑크 왕국의 군주 시게베르 1세의 딸 인군타와 결혼했다.

인군타는 15세의 어린 나이에도 아리우스파로 개종하라는 시아버지와 귀족들의 권고를 단호히 뿌리치고 가톨릭 신앙을 고수했다. 게다가 남편에게 가톨릭을 받아들이라고 종용했다. 고이빈타 왕비는 이에 분개해 며느리와 심각한 갈등을 벌였다. 리우비길드 왕은 이 문제를 어찌 해결해야 할지 고심했다. 아리우스파를 확고히 믿는 고이빈타 왕비와 고트 귀족들의 분노를 사서는 안 됐고, 그렇다고 며느리를 해꼬지했다가는 강력한 국력을 갖춘 프랑크 왕국의 분노를 살 수 있었다. 결국 그는 차선책을 택하기로 했다. 베티카 속주 일부와 세비야 시를 장남에게 떼주고 그곳에서 통치를 행사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조치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야기했다.

헤르메네길드는 세비야에 도착한 뒤 그곳의 가톨릭 주교 레안데르 주교와 접촉했다. 레안데르는 인군타와 우호관계를 맺고 헤르메네길드에게 가톨릭 개종을 촉구했다. 여기에 세비야를 비롯한 남부 이베리아 주민 대다수가 가톨릭 신자들이었기에, 그가 가톨릭으로 개종한다면 그들의 지지를 받을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그는 두 사람의 연이은 설득에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579년 또는 580년, 그는 레안데르 주교로부터 가톨릭 세례를 받은 뒤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받고 'REX'를 칭했다.

그는 일찍부터 공통 통치자로 인정받았지만 'REX'라는 호칭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이를 공공연히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동전에 자신의 초상을 새기고 'A DEO VITA(신의 구원)'이란 문구를 덧붙이며, 이단인 아리우스파에 대항하여 가톨릭을 관철시키겠다고 선포했다. 세비야의 이시도르는 이 행위는 명백한 반역이자 배신이라며 규탄했으며, 가톨릭 사제인 비클라르의 요한 역시 "헤르메네길드의 행위는 고트인과 로마인에게 큰 해악을 끼쳤다"라며 비판했다.

헤르메네길드는 동로마 제국, 수에비 왕국과 손을 잡았고, 프랑크 왕국 내 인군타의 친척들과도 연계했다. 리우비길드는 이런 상황에서도 아들과의 정면 대결을 회피했다. 그 대신 581년 아들과 동맹을 맺었을 지도 모르는 바스크인들을 상대로 원정을 개시해 일부 영역을 공략하고 빅토리아쿰(현재 빅토리아)를 건설했다. 이후 피레네 산맥에 강력한 분견대를 배치해 프랑크 왕국이 헤르메네길드를 지원하려고 달려드는 걸 사전에 차단한 뒤, 582년 아들을 향해 진군하여 메리다를 공략하고 수에비 왕국과 세비야 사이의 연락로를 차단했다. 헤르메네길드는 레안데르 주교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파견해 구원을 간청했지만, 외세의 침략에 시달렸던 동로마 제국은 원군을 보내주지 못했다.

그 후 리우비길드의 토벌군은 세비야를 포위해 1년 이상 공성전을 벌였다. 583년, 수에비 왕 미로가 병력을 동원하여 세비야 구원에 나섰으나 도중에 패배하고 목숨을 잃었다. 이제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헤르메네길드는 아내와 어린 아들과 함께 코르도바로 도망쳤다. 그 후 세비야를 함락시킨 리우비길드는 584년 코르도바를 노렸다. 그는 코르도바의 동로마 총독에게 뇌물을 줬고, 총독은 헤르메네길드에게 더 이상 보호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인군타와 어린 아들 아타나길드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피신했고, 헤르메네길드는 교회로 숨었다가 584년 초 누더기가 된 옷을 입고 한 명의 하인과 함께 아버지 앞에 찾아갔다.

리우비길드는 아들을 처음에 발렌시아로 유배했다가 다시 타라고나로 이송했다. 이후 아리우스파 주교를 보내 이전 신앙으로 돌아온다면 석방하겠다고 제안했지만, 그는 끝까지 거부했다. 결국 585년 3월 24일, 시세베르트라는 인물이 헤르메네길드를 살해했다. 리우비길드의 지시가 있었다는 설과 왕의 총애를 얻고 싶었던 시세베르트의 단독 행위라는 설이 제기되나 어느 쪽이 진실에 근접한 지는 알 수 없다. 한편 인군타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던 중 아프리카에서 사망했고, 아타나길드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한 뒤 그곳에서 평생 지내다 사망했다.

3. 사후

586년 4월 21일 리우비길드 왕이 사망한 후 새 왕으로 등극한 레카레드 1세는 587년 가톨릭으로 개종한 뒤 아버지의 죄에 상응하는 보속을 행한 후 형의 명예를 신원했다. 또한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헤르메네길드가 아리우스파 아버지의 폭정에 맞서 싸운 가톨릭 순교자였다고 주장했다. 이후 그는 프랑크 왕국과 스페인에서 순교자 왕으로서 숭배되었으며, 12세기 카스티야의 알폰소 2세 산초는 헤르멘길드의 해골로 추정되는 유골을 시겐 수도원에 안장했고, 16세기 스페인의 왕 펠리페 2세는 엘 에스코알 수도원으로 이관했다. 1551년부터 헤르메네길드의 이름은 툴레도 미사 경본에 포함되었다.

1586년, 교황 식스토 5세는 펠리페 2세의 요청에 따라 헤르메네길드를 성인으로 시성하고 스페인의 모든 교회에서 그를 기념할 수 있도록 했다. 1636년 교황 우르바노 8세는 그를 다시 시성하고 로마 가톨릭 교회 전체가 그를 성인으로 추모하도록 했다. 기념일은 4월 13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