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로베우스 왕조 계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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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스트라시아의 왕 Sigebert III | 시게베르 3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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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한국어 | 시게베르 3세 |
프랑스어 | Sigebert III | |
생몰 년도 | 630/631년 ~ 656년 | |
재위 기간 | 아우스트라시아의 왕 | |
633년 ~ 65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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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로베우스 왕조 프랑크 왕국의 아우스트라시아 분국의 왕.2. 행적
630년 10월 9일에서 631년 1월 19일 사이에 다고베르 1세와 라그네트루트 왕비 사이에서 출생했다. 그는 출생 후 9일만에 오를레앙 대성당에서 다고베르, 난탈다와 라그네트루트 왕비, 부르군트 대표 하도인 등이 참석한 가운데 유아세례를 받았고, 카리베르 2세가 그의 대부가 되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아기 시게베르는 세례식을 주관한 아망 주교가 주님의 기도를 암송했을 때 응답했다고 한다.그 후 어머니와 함께 몽티니 왕실 별장에 지내던 그는 632년 아버지에 의해 아우스트라시아 왕으로 선임되었다. 물론 겨우 2살 내지 3살이었던 그가 왕권을 행사할 수는 없었기에 아우스트라시아의 유력 귀족인 란덴의 피핀 1세와 쾰른 대주교 쿠니베르트가 보좌했다. 633년 난틸다로부터 클로비스 2세를 본 다고베르 1세는 네우스트리아, 부르군트, 그리고 아우스트라시아 귀족들을 불러모은 후,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군트인들에게 클로비스 2세를 왕으로 받들고 아우스트라시아인들은 시게베르 3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했다.
639년 1월 19일, 다고베르 1세가 생드니 수도원에서 병사했다. 이후 난틸다 왕비가 클로비스 2세의 섭정을 맡았고, 피핀 1세와 쿠니베르트가 시게베르 3세를 계속 보좌하기로 했다. 피핀 1세와 쿠니베르트는 절친한 사이였으며, 항상 서로를 돕고 지지하기로 맹세했다. 클로비스 2세의 어머니 난틸다 왕비는 다고베르가 축적한 국고의 3분의 1을 얻었고, 클로비스 2세도 3 분의 1을 받았으며, 나머지 3분의 1은 피핀 1세에 의해 메츠로 이송되어 쿠네베르트에게 전달되었다.
640년, 란덴의 피핀 1세가 사망했다. 아우스트라시아 왕실은 피핀 가문의 강력한 위세를 경계했고, 그들을 견제하고자 피핀 1세의 아들 그리모알트의 승계를 받아들이지 않고 평소 피핀 가문에 적대적이었던 바이셈부르크 가문의 일원인 오토를 란덴 공작으로 선임했다. 얼마 후, 튀링겐 공작 라둘프가 아우스트라시아 분국에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이에 시게베르 3세는 11~12살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친히 원정군을 이끌고 출진했다. 우선 라둘프의 동맹자였던 크로도알트의 아들 파라를 사로잡아 처단했고, 뒤이어 라인 강을 건너 튀링겐으로 진격했다.
라둘프는 언스트루트의 높은 둑에 울타리를 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전 병력과 가족들을 울타리 너머 진영에 세우고 장차 있을 전투를 준비했다. 시게베르 3세는 그의 군대와 함께 그곳에 도착한 뒤 평원에 숙영지를 세웠다. 그러나 이후에 이어진 전투에서 프랑크군이 대패해 수천 명의 전사가 전사했고, 살아남은 프랑크인들은 전부 달아났다. 프레데가르 연대기에 따르면, 시게베르 3세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안장에 앉은 채 울음을 터트렸다. 이때 그리모알드가 달려와서 왕이 타고 있는 말 고리를 잡고 이끌어서 적에게 죽거나 사로잡힐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줬다고 한다.
전투에서 패한 뒤, 시게베르 3세는 라둘프가 제시한 조건에 승복하고 평화 협약을 맺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라둘프는 자신을 튀링겐의 왕으로 자처하며 주변 종족들과 외교 관계를 맺었다. 특히 그의 부추김을 받은 알레만니 공작 로타리가 642년 란덴으로 쳐들어가 오토를 죽였다. 이에 시게베르 3세는 일전에 자신을 구해줬던 그리모알트를 란덴 공작으로 세우고 왕국의 통치를 일임했다. 이 무렵 알지셀 왕이 이끄는 프리슬란트인이 다고베르 1세가 공략했던 도레슈타트와 위트레흐트를 도로 빼앗았다.
시게베르 3세는 침네차일드와 결혼했으나 아들을 좀처럼 얻지 못했다. 이에 그리모알트는 자기 아들을 양자로 삼을 것을 권고했고, 그는 이를 받아들이고 아이에게 '킬데베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얼마 후 침네차일드 왕비가 다고베르 왕자를 낳았다. 이로 인해 킬데베르가 왕이 될 가망이 사라지는 듯했지만, 그리모알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656년 시게베르 3세가 사망하자, 그리모알트는 사병들을 이끌고 궁궐을 장악한 뒤 어린 다고베르를 삭발하고 푸아티에의 주교 디도에게 보내 수도자로 삼게 했다. 디도는 이 소년을 아일랜드의 수도원들 중 한 곳으로 데려갔고, 그리모알트의 친자이자 시게베르 3세의 양자인 킬데베르가 킬데베르 3세로서 왕위에 올랐다.
시게베르 3세는 통치자로서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 못했지만, 쿠니베르트 주교의 지도 아래 신실한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스타벨롯-말메디 수도원을 포함한 수많은 수도원과 병원, 교회를 설립하는 데 사용했으며, 빈민들에게 자선을 아낌없이 베풀었다. 또한 교황 마르티노 1세가 콘스탄스 2세의 그리스도의 의지에 관한 논쟁 자체를 금한 티포스(Typos) 칙령을 거부하고 단의론과 단성론을 강하게 비판하는 행보를 보이는 것에 지지를 표했다. 이에 가톨릭 교회는 그를 성인으로 시성했으며, 낭시 시는 그를 수호 성인으로 삼았다. 축일은 2월 1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