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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4 21:10:56

대륙 봉쇄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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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1. 개요2. 배경3. 계획과 실행4. 결과5. 평가6. 기타

1. 개요

영어: Continental System
The idle merchant on the useless quay
할 일이 없어진 상인은 무용지물이 된 부두에 서서
Droops o'er the bales no bark may bear away;
실어 내지 못한 짐짝을 침울하게 바라보고 있구나
Or, back returning, sees rejected stores
돌아와 보니, 보이는 것들은 금수당한 짐 더미들이
Rot piecemeal on his own encumbered shores:
봉쇄당한 조국의 해안에서 조금씩 썩어 가는 모습이로다
The starved mechanic breaks his rusting loom,
굶주린 정비공은 부스럭거리는 베틀을 부수고
And desperate mans him 'gainst the coming doom.
절망은 그를 다가오는 파멸에 배치하였다
Then in the Senates of your sinking state
그런데도 침몰해 가는 그대 조국 원로원에는
Show me the man whose counsels may have weight.
쓸 만한 분별력을 지닌 자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구나
- 조지 고든 바이런, 미네르바의 저주(Curse of Minerva, 1811)[2] 267-274행[3]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1806년 11월 21일 베를린 칙령으로 내린 ' 대 영국 무역금지법'. 오늘날의 경제제재의 효시격인 정책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실패작이다. 나폴레옹의 몰락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된 사건이다. 1811년 4월 11일 해제되었다.

2. 배경

유럽 대륙의 정리를 끝낸 나폴레옹 1세는 계속해서 자신에게 저항하는 영국을 처리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으며 프랑스 군사력 뿐 아니라 경제력으로도 유럽에서의 독점적 우위를 갖고 있어야 한다고 강하게 믿었다. 그러던 중 1806년 5월 16일 영국은 프랑스와 나폴레옹 연합국 해안을 해군력으로 봉쇄했다.

당시 산업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끈 영국은 재력이나 산업기초가 튼튼했고 이것을 바탕으로 유럽의 강국으로 떠오르고 있었는데 이에 위기감을 느낀 나폴레옹 1세는 영국 해군의 눈을 프랑스-에스파냐 연합함대를 동원하여 유인한 뒤 육군을 상륙시켜 영국을 정복하려고 했으나 해군 전력이 너무 차이 나기 때문에 포기해야 했으며 1년 전 트라팔가르 해전으로 인해 프랑스 해군 함대도 전멸당한 상태였다.

이에 나폴레옹 1세는 해군력을 복구하려고 노력함과 동시에 영국을 흔들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영국의 경제력에 타격을 주는 것이라는 점을 파악하고 영국과 유럽과의 무역을 중지시켜 영국의 경제를 인플레 부채로 몰락시키는 계획을 세웠다.

3. 계획과 실행

1806년 11월 21일 유럽 대륙의 패권을 장악한 나폴레옹 1세는 베를린 칙령을 내려 유럽 대륙 전 국가들로 하여금 영국과의 무역을 전면 금지했다. 이에 영국은 긴급 명령 1807년 1807년 11월 11일에 발표해 프랑스와 연합국의 무역을 전면금지시킴과 동시에 자국의 해군으로 하여금 프랑스와 연합국의 해안을 역봉쇄시키는 것으로 응수했다. 그러자 나폴레옹 1세는 밀라노 칙령을 발표해 영국의 항구를 이용하거나 영국에 관세를 내는 중립국 상선은 영국 국적 상선으로 간주해 나포할 것이라고 맞받아쳤다.

나폴레옹의 관점에서 볼 때 섬나라인 영국을 유지하는 것은 교역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영국을 경제적으로 고립시킬 경우 경제파탄이 일어나 쉽게 정복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폴레옹은 이에 모든 유럽 상선들은 프랑스 항에 1차적으로 정박해 영국과의 교역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받은 뒤 출항하게 했으며 전 유럽 국가들 및 프랑스 연합국에 대해 대 영국 교역을 전면 금지시켰고 특히 영국과의 교역이 대부분을 차지하던 러시아도 금지를 강요당했고 어길 경우 침공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문제는 나폴레옹의 관점에서 본 것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게 있었다는 것이다.

첫째로 섬나라인 영국을 유지하는 것은 교역이고 영국을 경제적으로 고립시키면 경제파탄이 일어나리라는 것까진 분명 정답이었으나 자국의 해군력이 영국 반토막 이하라는 점을 간과해 버린 것이었다. 이 결과는 후술한다.

두번째로 영국이 이루고 있던 해상제국과 식민지들의 단결력보다 나폴레옹과 프랑스가 다른 유럽 국가들을 통제하는 힘이 더 약했다는 것이다. 서로 고통을 받게 되면 영국 식민제국과 대륙의 유럽 국가들 모두 흔들리겠지만 영국 식민제국은 바이런 등 화평파가 세력을 불리기도 했지만 반역까지 이르진 않았고 주류세력은 나폴레옹에 대한 증오심으로 이를 갈면서 버티고 있었다. 반면 나폴레옹에 의한 강압으로 경제적 고통을 받던 유럽 국가들은 프랑스의 통제에 저항하기 시작했고 이는 프랑스의 완전한 외교적 고립을 초래하였다.

4. 결과

사실 프랑스는 나폴레옹의 집권기 이전부터 영국에게 해상 봉쇄를 당하고 있었다. 영국은 프랑스 혁명이 본국으로 전파될 것을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 국적선과 항구를 혁명 공화정 시절부터 혁명 제정에 이르기까지 내내 봉쇄하고 있었다. 중간에 간헐적으로 휴전협정을 통해 약간의 외교적 이익을 보고 봉쇄를 풀 때도 있었지만 해상봉쇄라는게 항만에서 약간 떨어진 공해 상에 소형 분함대들을 순찰시키는 행위라 함대의 정비와 인원교체의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에 봉쇄하는 영국 입장에서도 일정 기간의 휴식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이 휴식기를 지나고 나서는 언제라도 해상봉쇄를 재개할 수 있고 또 실제로 그러했기 때문에 프랑스 상선 입장에서는 몇 달에 걸친 항해 기간 동안 언제 봉쇄가 재개되어 나포될지 모른다는 위협을 늘 겪고 있는 셈이 된다. 배라는 것의 건조기간, 선원의 육성 시간을 생각하면 한두번의 무사항해로 그 손실을 감당할 수 없으니 사실상 영구적인 해상봉쇄를 당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이걸 프랑스만 당하기는 억울하니 전유럽이 스스로 항구를 닫으라고 강요해 버리면서 전유럽이 프랑스 육군에 의한 해상봉쇄를 당하는 셈이 되어 버린 것이며 프랑스 스스로도 엄청난 손실을 받으면서 제정 지지율도 급락하게 되어 나폴레옹이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어차피 해상봉쇄를 당했는데 왜 또 궁지에 몰렸냐하면 프랑스 상인들이 네덜란드 이탈리아 제국가를 통한 우회교역으로 영국과 그 식민지들과 교역함으로서 약간의 수수료를 지불하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교역은 활발하게 진행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륙 전체를 봉쇄한다는 정신나간 정책으로 이들 국가를 통한 무역로까지 막히면서 완전히 물류가 마비되었다. 심지어 대륙 봉쇄령 이전에는 프랑스 항만으로 들어오는 중립국 함선은 영국이 외교적 고립을 피하기 위해 건드리지 않았는데 대륙 봉쇄령에 분노한 영국이 프랑스 항만에 대한 전면적인 폐쇄를 선언해 그나마 중립국 함선에 의한 프랑스 항구의 가동도 정지되어 버리고 말았으며 이 수수료 때문에 프랑스에 호의적이었던 네덜란드 등 국가들이 일거에 반 프랑스 세력으로 돌변하는 효과까지 나폴레옹의 돌이킬 수 없는 자충수가 되어 버린 것이다.

당연히 해상봉쇄의 결과에 따른 수많은 실업과 물자 부족에 대한 원성이 프랑스로 치닫게 되었다. 그 결과 수많은 전투로 친족과 프랑스 장군을 타국의 으로 임명하는 식으로 프랑스로 돌려 놓았던 유럽 외교 지형에서 또 다시 왕따가 되어 버렸고 경제적 고통은 대륙 봉쇄령이 해제되지 않는 이상 영원한 것이기에 이들 친족과 장군들이 그들의 손으로 프랑스를 배신하게끔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에 시달리던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이라는 도박수를 통해 군사적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한 시도를 했지만 실패했다. 이에 프랑스가 약점을 보이자 대륙 봉쇄령에 고통받던 전 유럽이 프랑스에 등을 돌리게 되어 순식간에 몰락해 버렸다. 만약 대륙 봉쇄령을 프랑스가 아닌 우수한 해상 세력을 가진 영국이 시도했다면 영국이 오히려 외교적으로 고립되었을 것이고 혁명 제국의 운명도 역사와는 달랐겠지만 나폴레옹은 대륙 봉쇄령이 가진 외교적 / 경제적 문제를 과소평가했고 이를 군사적 도박으로 극복하려는 행태도 바꾸지 않았다.

당장 반나폴레옹 정책을 유지한 스웨덴은 거부했으나 나폴레옹은 러시아 제국을 이용해 스웨덴을 굴복시켜 강제로 참여시켰다. 그럼에도 반대론은 끊이지 않았으며 아울러 포르투갈이 참여를 거부했다. 이에 나폴레옹은 이베리아 반도에 파병을 결정해 스페인을 점령했지만 그 결과로 에스파냐 전쟁[4]에 개입하게 되어 이베리아 반도 전쟁에 휘말려드는 생고생을 하는 비극을 겪었다.

특히 러시아는 영국과의 교역이 국가 경제의 상당수를 차지해 피해가 심해지자 1810년 봉쇄령 협력을 파기하고 영국과의 무역을 재개하였다. 이 대륙봉쇄령으로 가장 큰 손해를 본 나라는 러시아와 러시아의 지주계급이었다. 영국은 러시아의 밀, 목재, 대마, 수지의 가장 큰 시장이었기 때문이며 나폴레옹 대륙 봉쇄령으로 러시아는 산업뿐만 아니라 재정적으로도 여간 어려움을 겪었다. 즉, 이런 상황에서 나폴레옹은 러시아에게 대륙 봉쇄를 더 철저히 실행했고 이런 상황에서 여기에 불만이 많았던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 황제는 1810년 12월 31일 칙령을 발포하여 포도주 및 브랜디의 수입관세를 높여 프랑스의 주요한 수출입품을 배척했다. 이에 분노한 나폴레옹은 1812년 러시아 원정을 강행했지만 러시아의 청야전술과 혹독한 기후를 견디지 못하고 대패를 당해 나폴레옹의 몰락을 초래했다.

물론 효과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었다. 당장 영국의 물가가 폭등하면서[5] 영국의 실질임금이 3분의 1로 감소했고 이로 인해 러다이트 운동이 활발해져 전시가 아니었음에도 런던에 5만 명의 병력을 배치해야 했다. 이는 워털루 전투에서의 웰링턴의 병력과 맞먹으며 잘 싸우던 이베리아 전선에서 웰링턴의 병력에서 4개 연대 병력을 급히 차출해서 국내에 배치해야 할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 덤으로 미국이 프랑스에 붙어서 대미 수출이 10분의 1로 감소한 것도 치명타였다.

그러나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해안 항구도시들의 막심한 피해까지 불러왔다는 게 문제였으며 이는 나폴레옹의 몰락의 시작인 러시아 원정을 초래했다.

독일의 산업화를 더욱 촉진시켜 나중에 유럽 대륙에서 두 번이나 재앙적인 대전쟁을 일으키는 밑바탕을 마련해 준 셈이 되었다.

5. 평가

당장 나폴레옹은 유럽에서의 완벽한 패권을 이루기를 갈망했고 그 장애물이 바로 바다 건너에 있어 해군이 부실한 프랑스가 직접 박살낼 수 없었던 영국이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영국은 이미 이때 산업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뤄내어 산업의 급속한 발전을 이뤘고 이를 바탕으로 유럽 대륙과 상당한 교역을 하고 있었는데 나폴레옹에 의해 경제가 피폐해지고 아울러 주요 식품 가격의 상승 같은 부작용을 낳게 되었다. 문제는 영국과 그 식민지의 산업 생산 규모가 석탄 소비량의 50%, 유럽 철강 생산량의 60%를 차지하기 때문에 그 고통의 수준이 영국뿐 아니라 유럽 스스로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유럽 전역을 쥐락펴락하려는 나폴레옹의 야욕은 하루이틀 된 문제는 아니었다. 이에 수없이 많은 대불동맹으로 대항하던 유럽 국가들도 서서히 혁명과 프랑스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시점이었으나 먹고사는 문제를 건드리는 바람에 더 이상 혁명 프랑스를 우리가 문화적으로 받아들이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프랑스 혁명 제국이 있는 한 우리는 영원한 기아에 시달리게 된다는 새로운 차원의 문제를 생성해냈다. 이는 결국 프랑스를 영구적인 외교적 고립 상태에 처하게 하였다.

대륙 봉쇄령으로 프랑스와 유럽 국가들 스스로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을 나폴레옹은 분명 알았겠으나 이를 군사적 모험주의로 극복해 가면서 영국의 굴복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국과 그 식민지들보다 대륙의 국가들의 단결력은 미약한 편이었고 러시아 원정은 그 나폴레옹으로서도 해낼 수 있는 업적이 아니었다. 설령 원정에 성공했다고 치더라도 영국이 굴복하지 않는 이상 또 다른 원정은 끊임없이 필요했을 것이다. 프랑스의 외교 지형을 유럽의 영원한 적으로 만들어 버린 치명적인 실책이었고 나폴레옹이 몰락하는 출발점이 된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6. 기타


[사진설명] 연한 파랑색과 진한 파랑색은 당시 프랑스와 그 위성국(진한 파랑색), 동맹국(연한 파랑색)이다. 회색은 영국과 그 연합국 혹은 중립국. 다만 그 중에서 오스만 제국은 실질적으로 참여했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2] 이 시는 파르테논 신전 조각들을 영국으로 가져온 엘긴 경을 로마 약탈을 벌인 고트족의 왕 알라리크와 비교해 비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3] 2019학년도 수능특강에 '대륙 봉쇄령' 관련 자료로 실린 것을 발췌했다. [4] 당시 스페인 왕가는 아버지 카를로스 4세 와 아들 페르난도 7세 간의 권력 다툼이 한창이었는데 나폴레옹은 이 둘을 각각 다른 성에 감금시킨 뒤 친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에스파냐의 새 왕으로 세웠다. [5] 참고로 대륙 봉쇄령 시기의 영국은 영국 역사상 물가가 가장 빠른 속도로 폭등했다. 2위는 제2차 세계 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