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2. 동프랑크와 독일 왕국령
2.1.
알레만니, 라이티아 ⇒ 동프랑크 및 독일 왕국의 슈바벤2.2. 프랑켄(현 바이에른 북부)2.3. 튀링켄2.4. 작센2.5. 바이에른 공국(현 바이에른 남부와 현 오스트리아령 오버외스터라이히 대부분 지역)2.6. 오스트리아(오버외스터라이히의 서부 일부+니더외스터라이히)2.7. 케른텐 또는 카란티아(현 오스트리아령 케르텐+아드리아해 방면 해안 지대를 제외한 슬로베니아 전역)2.8. 엘베강 동부(현 작센 일대 및 브란덴부르크, 포메라니아의 슈트랄준트와 앙클람 일대)
3. 폴란드4. 현 체코·슬로바키아 일대5. 판노니아 분지1. 개요
2. 동프랑크와 독일 왕국령
2.1. 알레만니, 라이티아 ⇒ 동프랑크 및 독일 왕국의 슈바벤
알레만니인들은 현재의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로 대표되는 알자스 지방과 독일의 아우크스부르크로 대표되는 현재의 바이에른에 이르는 지역에 거쳐 살고 있었다. 서로마 제국이 붕괴된 당시 기볼드(Gibuld)라는 왕이 통치하고 있었다. 496년 프랑크 국왕인 클로비스 1세의 공격을 받고 톨비아크 전투에서 기볼드가 전사한 후 얼마간 테오도리쿠스 대왕의 통치를 받고 있던 동고트 왕국의 보호를 받게 되지만 테오도리쿠스 대왕의 죽음 후 536년 랭스 프랑크의 왕이었던 테우데베르 1세의 침공을 받고 알레마니아 공작령으로 복속되었다. 3년 뒤 테우데베르 1세는 친프랑크 성향의 알레마니아인이었던 부탈린과 그의 형제인 레우타리 1세, 그리고 이들과 어떠한 관계인지 불명인 해밍을 알레마니아의 공동 공작으로 임명했다.부탈린 때까지 알레마니아의 정체성은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었는지 동로마 제국이 이탈리아 지방을 재수복하던 553년에 동고트 왕국은 테우데베르에게 사절을 파견했는데, 테우데베르는 이를 거절했지만 알레마니아 공작인 부탈린과 레우테르, 해밍은 동고트 왕국의 요청을 받고 알레마니아 내의 프랑크족을 포함한 군대를 파견해 파르마에 거점을 두고 남하하여 동고트족의 지원을 받지만 여름 때 전염병으로 군세가 약화된 상태에서 동로마 제국의 환관 장군 나르세스를 공격했지만 볼투르누스 전투에서 격퇴되었다.[1] 부탈린과 레우테르와 해밍은 이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후 이들의 후임인 란타카리우스, 마그나챠, 바에파르, 테우데프리드, 로이트프레드까지는 이름만 전해질 뿐 알레마니아의 공작으로서 행한 치적에 대해서 기록상 남아 있는 공백기가 587년까지 이어졌고, 이후 아우스트라시아의 왕 킬데베르 2세가 587년 로이트프레드를 해임시키고 운실렌을 새로운 알레마니아 공작으로 임명했다.
595년 킬데베르 2세가 사망하자 투르가우, 켐부스가우, 알자스는 부르고뉴로 옮겼고, 운실렌은 테우데리크 2세의 부르군트의 종주권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605년, 테우데리크 2세는 할머니의 요청에 따라 프로타디우스를 재무관으로 삼았다. 프로타디우스는 재무 능력은 뛰어났지만 잔인한 인물이었다. 그는 온갖 기발한 방식으로 세금을 매겨 백성들을 착취해 재고를 풍족하게 했으며, 정적들을 잡아들여 온갖 잔혹한 고문을 가했다. 그의 전횡에 반감을 품은 병사들이 왕의 천막을 에워싸고 프로타디우스를 처형하라고 요구하자, 테우데리크 2세는 그들을 달래기 위해 운실렌을 보냈다.
그러나 운실렌은 군인들에게 "왕께서 프로타디우스의 처형을 명령했다"라고 거짓말했고, 병사들은 이에 고무되어 프로타디우스를 죽였다. 이후 새 재무관에 선임된 클라우디우스는 폭식을 일삼아 무척 뚱뚱했지만 좋은 교육을 받아 지성이 뛰어났고 모두에게 친절하고 온화하게 대해 두터운 인망을 샀다. 그러나 총신 프로타디우스를 죽인 것에 분노한 브룬힐트는 607년 운실렌을 체포해 유죄를 선고하고 발을 자르고 알레마니아 공작직에서 해임과 함께 재산을 몰수하는 조시를 내렸으며, 프로타디우스의 죽음에 연루된 또다른 귀족 울프는 파베른에 있는 자신의 별장에서 살해되었다.
이후 635년까지 누가 운실렌의 후임이 되었는지 불명이었다. 그러는 동안 알레만니족들은 서기 6세기까지도 토속 신앙을 유지하였으나 서기 8세기 기록에 의하면 알레만니족들이 기독교로 개종한 상태였다고 한다. 서기 7세기 무렵에 알레만니족들의 점진적인 개종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나 사료의 부족으로 정확한 개종 정황은 알기 힘든 상황이다. 다만 7세기경 군조가 알레마니아의 새로운 공작이 되었는데, 635년 알레마니아 내의 성직자와 주교를 콘스탄츠의 교회 회의에 초대해 고 가우덴티우스 주교의 후계자로서 집사 요한을 콘스탄츠 주교로 선출하는 선거를 주재했다는 연대기 내용을 볼 때 이땨 상당한 수의 알레마니아인들이 서방 정교로 개종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또한 이시기에 매장된 알레만니족 8명의 유골을 조사한 결과 5명은 아이슬란드인이나 리투아니아인과 유전적 연관이 있는 것으로, 2명은 스페인 북부 지방 사람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나왔고 나머지 1명은 북아프리카인과 연관성이 강한 것으로 나왔다. 해당인의 경우는 아마도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게르만족에게 정복당한 지역의 일부 현지인들 중 무용이 뛰어난 사람들이 게르만족 정복자 집단에 편입된 경우로 추정된다.
그리고 시기 미상이나 알레마니아는 서북부와 남동부로 나눠져 서부는 콘스탄스를 중심으로 콘스탄스 주교가 통치하게 되었다. 앞서 언급한 군조의 경우 동부 지역을 통치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후 동시기의 남동부의 알레마니아를 통치한 크로도베르는 다고베르트 1세의 사모 왕국 침공에 참여했지만 631~2년에 벌어진 보가스티르부르크 공성전에서 패전하고 만다.
이후 638년 다고베르트 1세가 죽자 알레마니아의 공작들은 서서히 프랑크 왕국의 질서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650년에 알레마니아 공작이 된 고트프리트는 아우스트라시아 궁재 헤르스탈의 피핀이 아우스트라시아 분국을 자신의 통제하에 놓게 되면서 사시상 왕권을 무력화시키자 독립할 야심을 품게 되지만 피핀이 그의 야심을 눈칫채고 견재하면서 양자간 대립이 심화되었지만 709년 고트프리트가가 죽자 빌레하리가 새로운 공작이 되었고, 고트프리트의 두 아들인 란트프리트와 테우데발트는 헤르스탈의 피핀에게 복종하여 아버지의 자리를 되찾으려고 했고, 피핀 또한 이 두 형제를 이용해 알레마니아를 더욱 구속시킬 계획을 세우게 된다.
헤르스탈의 피핀은 709년과 712년 두 차례에 걸쳐 알레마니아를 공격했다.이후 빌레하리가 축출되자 란트프리트와 테우테발트는 피핀의 도움으로 알레마니아의 공동 공작이 되어 린트프리트가 북부를 테오데발트가 남부를 통치하게 되었다. 하지만 두 형제는 궁재직을 전부 독점한 피피누스 가문을 두려워 했고, 특히 피핀 2세의 서자인 카를 마르텔을 두려워했다. 결국 714년 피핀 2세가 죽고 피피누스 가문에 궁재직들을 두고 내분과 함께 메로베우스 왕가와 그 지지자들이 왕권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으로 인해 혼란이 발생하자 란트프리트와 테오데발트는 자신들이 다스리고 있는 남동부의 알레마니아 지역을 독립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카를 마르텔은 와전히 정권에 잡는데 성공했고, 722년부터 723년에는 알레만니아를 공략했는데, 아날레스 연대기와 아날레스 연대기가 인용한 807년경 제작된 문서에는 카를이 알레만니아를 공략한 것만 나타났고, 그 과정에 대한 기록은 없다. 722년부터 723년의 원정에서 카를은 주로 테오데발트가 다스리던 알레만니의 남쪽 지방을 공략했고, 723년 승리한 후 테오데발트를 알레만에서 몰아냈다. 란트프리드는 당분간 북부 알레만니아의 영토를 유지할 수 있었다.
란트프리드는 카를에게 항복, 종주권을 약속했다. 최종적으로 알레만니를 복속시킨 뒤 카를은 724년 란트프리드(Lantfrid)의 도움을 얻어 공동으로 프륌에 라이케나우 수도원(Reichenau Monastery)을 건립했다. 727년 카를 마르텔을 증오하던 테오데발트는 라이케나우 수도원과 프륌 대수도원의 재산을 몰수하고, 선교사, 수도사들을 추방시켰다. 카를은 선교사 프리미누스(Pirminius)와 헤도(Heddo)를 지원하여 알레만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하게 했다. 프리미누스와 헤도는 알사스 일대에 그리스도교를 포교하였고, 이후 나중에 점진적으로 알레만이 프랑크 왕국에 흡수되는데 기여하였다.
730년 란트프리트가 죽자 테오데발트가 알레마니아의 단독 공작이 되었다. 741년 카를 마르텔이 죽고 그의 아들들인 카를로만과 피피누스 3세가 궁재직을 승계하자 테오데발트는 다시 피피누스 가문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했다. 742년 바스크족들이 프랑크 왕국의 바스코니아 지역을 침공하자 테오데발트는 바이에른 공작 오딜로와 함께 섹슨족과 동맹을 맺고 프랑크 왕국의 동부 지역들을 공격했다.
하지만 746년 테오데발트의 계획은 실패되었고, 테오데바트를 비롯한 알레마니아의 토착 귀족들과 바이에른 공작 오딜로를 비롯한 바이에른의 토착 귀족들은 생포되었고, 카를로만의 주체로 현재 슈트가르트에 편입된 칸슈타트에서 귀족 평의회 형식의 재판에서 반란에 참여한 모든 귀족들을 처형하면서 이 사건을 칸슈타트의 피의 재판라고 불리며 알레마니아 공국의 종말을 고했고, 카를로만은 동남부의 알레마니아를 두 개의 가우로 분할해 두 명의 프랑크 귀족인 와린과 루타드를 콘스탄스 호수를 중심으로 남쪽은 와린이 북쪽은 루타드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이후 메로베우스 왕조가 전복되고 카롤링거 왕조때까지 한동안 프랑크 왕국으로 복속되었다. 이기간 동안 살아남은 알레마니아 귀족들은 프랑크 귀족들에게 동화되었다. 다만 와린과 루타드는 토지 분쟁으로 생갈랭 수도원장 오트마르와 분쟁을 벌어야 했는데, 이는 747년 알레마니아를 와전히 편입시킨 카를로만과 피피누스가 알레마니아의 교회와 수도원에 베네딕토 규칙을 도입하여 교회와 국가를 통합하려고 하였는데 오토마르 또한 이에 동조하는 댓가로 생갈랭 수도원 명의로 여러 토지들을 기부 받았는데, 수도원을 중심으로 하는 자선 활동 등으로 인해 상당수의 알레마니아인들이 연대 의식을 갖게 되자 이를 두려워한 와린과 루타드는 오토마르에게 불만을 갖게 되었고, 이는 백작과 수도원 사이의 토지 소유권 싸움으로 나타났다. 게다가 생갈렌을 자신의 주교구 아래에 독립적인 수도원으로 두고 싶었던 콘스탄츠의 주교 시드니우스가 권력을 주장했기 때문에 긴장이 생겼다. 이 갈등은 결국 759년에 오토마르가 체포되어 벨도 섬에 구류되다가 같은 해 11월 16일에 그곳에서 사망하고 만다.
이후 768년 피피누스 3세의 뒤를 이어 새로운 왕으로 즉위한 카롤루스는 이들의 영향력을 감소시키기 위해 알레마니아를 더욱 분할시켜 와린은 투르가우, 루타드는 아르젱가우만 통치하게 되었다.
이후 카롤루스가 죽고 새롭게 즉위한 루도비쿠스 1세 말기인 830년 루도비쿠스의 실정으로 프랑크 왕실의 권위가 약해져 가자 다시 독립할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때 루도비쿠스는 재혼으로 얻은 막내 아들인 샤를 2세를 알레마니아를 줄려고 노력했지만 실패되었다. 더구나 알라만니와 라에티아 귀족들 사이의 유혈 분쟁으로 그 지역을 지배하려고 경쟁하는 것으로 특징지어졌다. 843년 베르뒹 조약에 따라 프랑크 왕국이 서프랑크 왕국과 중프랑크 왕국, 동프랑크 왕국으로 분열되면서 서부는 중프랑크, 동부는 루트비히 2세가 통치하는 동프랑크 왕국에 속하게 되었다.
855년 프륌 조약으로 중프랑크 왕국이 다시 이탈리아 왕국, 로타링기아 왕국, 부르군트 왕국으로 분열되었고, 이후 알레마니아는 다시 하나의 지역으로 통합하기 위한 움직임이 몇번 있었으나 알레마니아 귀족들 내분으로 쉽게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864년 상속 문제로 형제들과 함께 아버지 루트비리 2세와의 다툼끝에 루트비히는 생전에 아들들에게 영토들을 분할 뚱보왕 카를 3세가 알레마니아의 분봉왕이 되었지만 이때 슈바벤은 프랑켄 지역과 함께 루투비히 2세의 직활지로 남게 되었다. 867년 알자스 공작 후고가 알레마니아를 노리지만 870년 메르센 조약으로 이탈리아 왕국을 제외한 로타링기아와 부르군트 왕국의 대부분의 강역이 동프랑크 왕국으로 넘어오게 되면서 알레마니아는 거의 동프랑크 왕국에 속하게 된다.
875년 중프랑크의 황제 이탈리아인 루도비쿠스 2세가 죽으면서 사촌 동생이자 처남인 카를만을 후계자로 지명하고 죽었다. 카를은 곧 아버지 독일인 루트비히의 지시로 이탈리아로 파견되어, 이탈리아 프리울리 후작 베렝가르와 연대하여 카를만 추대 운동을 추진했으나 서프랑크의 왕 대머리 샤를 2세가 재빨리 알프스 산맥을 넘어와 이탈리아 왕관과 황제관을 가져가는 바람에 실패했다.
그는 샤를마뉴의 제국을 복구하기 위해서 형 카를만의 이탈리아 군주직 획득을 지원하였다. 대머리 카를이 황제관을 차지하자 뚱보 카를은 이탈리아에 머무르며 로마 교황에게 서프랑크의 대머리 카를을 적임자가 아니라며 폐위시킬 것을 요구하였으나, 번번히 거절당했다.
한편 뚱보 카를은 자신의 영지인 슈바벤과 알레만니아의 군대를 일부 이탈리아로 들여와 교황 요한 8세에게 봉헌, 사라센의 침략에 대비해 교황의 직속 해군을 창설하게 했다. 876년 8월 28일 아버지 독일인 루트비히가 카를 2세를 치기 위해 준비하다가 갑자기 죽자, 슈바벤을 상속받아 슈바벤의 왕이 되었다. 이때 알자스 지역도 추가로 상속하였다.
그러는 와중에 후고는 877년 이후 여러 번 반란을 일으켜 자신의 왕위를 되찾으려 했다. 877년 10월 대머리왕 샤를 2세가 죽자 로트링겐의 귀족들이 그를 지원했고 이를 기회로 로트링겐 왕이 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으나 뚱보 카를은 형 루트비히 3세, 카를로만에게 로트링겐 공격을 제의하였고, 878년 뚱보 카를과 소 루트비히, 카를만은 로타링기아를 쳐서 병합하였다. 이때 카를과 카를로만은 자신이 점령한 일부 지역을 모두 형 소 루트비히 3세에게 넘겨주었다. 그 뒤로도 후고는 878년, 880년 여러번 부왕의 영지를 되찾으려 기도했으나, 그때마다 번번히 실패하였다.
877년 10월 대머리왕 카를이 죽은 뒤 그는 자신이 로타르 1세의 직계후손임을 내세워 이탈리아의 왕위를 요구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이탈리아의 귀족들과 제후들은 그를 지지하지 않았고, 교황은 이탈리아의 왕관을 동프랑크의 카를만에게 넘겨주었다.
878년초 교황 요한네스 8세는 위그가 사생아라는 것과 위그의 파문을 선언하고 추방했다. 879년 서프랑크의 루이 2세가 사망하자 그의 죽음을 계기로 이번에는 로트링겐의 서부 지역을 차지하고 이어 서프랑크의 왕위를 차지하려 하였으나, 청년 루트비히 3세가 보낸 군사들이 루이 3세와 샤를로망을 보호하였으므로 실패했다. 동시에 그의 군대는 알레만니의 왕이자 그무렵 이탈리아의 군주에 즉위한 뚱보왕 카를의 군사에 의해 격파되었다. 청년 루트비히는 수도원에 있던 그를 호출하였으나, 그는 소 루트비히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880년 그는 다시 로타링기아를 회복하려 군사를 일으켰지만 실패하였다. 880년 소 루트비히가 베르덩에 있는 위그의 성을 침략하여 파괴하고 돌아갔다. 그뒤 비만왕 카를 3세는 그를 메츠 주교직에 임명하고 주교 교구를 그에게 주었다.
882년 초 부활절에 청년 루트비히가 그를 소환했지만 거부하였고 소 루트비히는 알사스를 공격, 부르고뉴까지 그를 추격했다. 882년 청년 루트비히의 죽음을 계기로 882년 4월 23일 위그는 다시 군사를 일으켰지만 뚱보왕 카를이 보낸 군대에 의해 진압되고, 위그는 부르고뉴로 피신했다. 883년에는 대머리 카를의 시종인 엔겔람(Engilram)을 살해하고 그해에 그의 과부 프리데라다(Friderada)와 결혼했다. 이후 프리데라다는 재혼했지만 두번째 남편과 세번째 남편 역시 곧 사망하고, 네번째 남편인 힉베르트(Wicbert)도 재혼한지 얼마 안되어 사망했다.
883년 위그의 누이인 기셀라가 프리슬란트의 후작 고드프리와 결혼, 이를 이용하여 다시 아버지의 영지를 탈환하려 하였으나 실패했다. 884년 위그는 아버지의 영토 로트링겐과 자신의 영지였던 알자스를 회복하기 위해 노르만 바이킹과도 제휴하였다. 885년 뚱보왕 카를과의 전투 중 프리슬란트의 후작 고드프리의 배신으로 885년 6월 바벤부르크에서 프랑켄의 하인리히에게 체포되었다. 고드프리는 프랑켄의 하인리히 간과 밀약을 체결, 885년 6월에 협상이 성사되었다. 그는 곧 뚱보왕 카를에게 넘겨져 뚱보왕 카를의 지시로 장님, 벙어리가 되는 형벌을 받고 풀다 수도원에 감금되었다. 이후 세인트 갈 수도원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포에른 수도원으로 옮겨졌다.
한편 라이티아의 경우 본래 현재의 스위스 동부 및 중부, 독일 바이에른주의 남부와 도나우강 상류부 오스트리아 포어아를베르크주,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에 걸친 티롤 지방의 대부분 및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주의 일부로 이루어진 로마 제국의 속주였으나 4세기경부터 분할이 되면서 스위스쪽 지역만을 가리키는 지명이 된 상태였고, 476년 서로마 제국이 붕괴된 이후 라이티아 쿠리엔시스라하여 오도아케르 왕국와 동고트 왕국의 통치를 받아 군사권만 가진 총독이 파견되었고, 실질적인 민정 통치는 아리우스파가 아닌 보편 교회 소속인 쿠르의 교구를 맡고 있던 쿠르 주교들이 행사했다. 536년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으로 밀리고 있던 동고트 비티게스는 랭스 프랑크 왕국에 지원을 댓가로 보덴 호수까지 북부의 땅을 랭스 프랭크 왕국의 왕 테우데베르 1세에 할양해야 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548년 테우데베르는 라에티아 전역에 지배를 확대했다.
메로베우스 왕조기 동안의 라이티아의 기록은 전해지지 않지만 알프스 남쪽의 이탈리아의 랑고바르드 왕국과의 상업적 관계는 여전히 중요했다. 또한 쿠르의 주교들은 740년대에 사실상의 독립된 상태의 알레마니아 공국이 카롤링거 왕조의 원정으로 다시 프랑크 왕국에 편입시킬 때까지 프랑크 왕국의 외곽 변두리에 있는 외딴 지방의 사실상의 통치자로서 여전히 책임을 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있으며, 라이티아의 여러 교회 및 세속 직책은 빅토리드 가문의 구성원에 의해 유지되었다.
765년 쿠르의 빅토리드 가문의 마지막 주교 텔로가 사망한 후, 카롤루스는 이 기회를 빌어 텔로의 후계자들을 자신의 봉신으로 선언하는 보호 문서를 발표했다. 770년대부터 샤를마뉴 대제는 쿠어의 주교를 직접 임명하여 영토에 대한 프랑크족의 지배력을 높였다. 806년 또는 807년에 레메디우스 주교가 사망하자, 그는 주교 재산과 공동 재산 사이의 분할(divisio inter episcopatum et comitatum)을 법제화하여 쿠르 주교의 사실상의 세속 통치를 종식시켰다. 그는 훈프리트 1세를 쿠리엔시스로 임명하여 광대한 제국 영토를 다스리게 했다.
라에티아를 권력 기반으로 삼은 훈프리트는 830년 사망한 후 아들인 아달베르트 1세에게 투르가우와 함께 라에티아를 물려주었고, 아달베르트 1세는 자신의 삼남인 아달베르트 2세에게 투르가우, 알브가우, 헤가우, 운터제, 베르톨츠바르의 백작령들을 물려 주게 된다.아달베르트 2세는 쿠르와 콘스탄츠의 주교들과 대립하면 가문의 영향력을 확대해 갔고, 이로 인해 알레마니아의 귀족들과도 적대적 관계가 되어 이후 아들대에 이르기까지 알레마니아의 귀족들과 대립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확장 정책은 그와 그의 가문을 라에티아와 알레마니아에 걸쳐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는데 성공한다.
905년 아달베르트 2세가 죽자 아들인 부르카르트 1세가 라에티아 백작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부르카르트는 아버지가 구축한 세력을 온전히 몰려받은 것을 넘어 보다 더 정략적을 활용하는데 능한 인물로 904 년의 교환 계약에서 부르카르트는 로르쉬 수도원의 장원 집행관(vogt)으로 지명되었고, 이후 909년 알레마니아 전역을 완전히 장악한 후 자신의 영지인 라에티아와 통합해 현재의 슈바벤 지역을 구성한 후 루트비히 4세로부터 슈바벤 공작직을 인정받게 되었다.
하지만 부르카르트의 야심은 멈추지 않고, 911년 슈바벤의 궁정백 에르찬가르 2세와 곤스탄스 주교 솔로몬 3세와 갈등을 빚었는데, 문제는 그를 슈바벤 공작으로 만든 루트비히 4세가 죽고 동프랑크계 카롤링거 왕가가 단절되면서 프랑켄 공작인 콘라트 1세가 동프랑크의 새로운 왕을 선출되었는데, 문제는 에르찬가르와 솔로몬 3세가 콘라트의 충성스러운 지지자였다는 점이었고, 얼마 안가 부르카르트는 반역죄로 체포되어 제국 회의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형제인 투르가우의 백작 아달베르트 3세와 함께 처형되었고, 그의 처자식들은 이탈리아 왕국으로 망명했고, 슈바벤 공작직은 에르찬가르가 맡게 되었다.
913년 에른찬가르는 콘라트와 사이가 틀어질뻔 하다가 바이에른 공작 루이트폴트의 미망인었던 자신의 누이인 쿠니군데를 콘라트 1세의 왕비로 보내 관계를 개선한다. 이 외교적 결혼으로 에르찬가르는 슈바벤에서 왕의 대리인이 되었다. 이로 인해 솔로몬 주교와의 동맹이 깨졌고 주교는 그의 세력 확장을 경계하게 되었다. 주교에 의해 그의 수입이 줄어드는 것을 본 에른찬가르는 914년에 솔로몬을 투옥시켰지만 콘라드는 이에 반대하여 주교를 석방하고 에르찬가르를 추방했다.
915년에 돌아온 에른찬가르는 그의 조카인 바이에른의 아르눌프와 그의 오랜 숙적인 부르카르트 2세와 함께 마자르족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그러자 에른찬가르와 부르카르트는 콘라드에게 등을 돌렸고, 두 사람은 동맹을 맺고 콘라트 1세에 맞서 바르비스 임헤가우 전투에서 그를 꺾었지만 917년 1월 23일 콘라트는 호엔알테임에서 소집한 주교회의에서 자신의 정적인 슈바벤 공작 에르찬가르와 베르톨드, 그리고 그들의 조카 리우트프리드(Liutfrid)를 수도원에 감금하기로 했다가, 곧 참수형에 처했다. 이들의 재산을 몰수한 콘라트는 곧 909년부터 911년 잠시 선출에 의한 슈바벤 공작이었던 부르하르트 1세의 아들로 일찍이 유배되었던 부르카르트를 슈바벤 공작에 임명하면서 부르카르트 2세는 슈바벤 공작령을 되찾는데 성공한다.
919년, 부르고뉴의 왕 루돌프 2세는 취리히 백작령을 점령하고 슈바벤 공국의 수도이자 사실상의 수도인 콘스탄스를 침공했다. 그러나 빈터투어 전투에서 부르카르트 2세는 루돌프 2세를 격파했고, 부르카르트 2세는 공국을 통합하고 루돌프 2세에게 자신의 영토를 인정하도록 강요했다. 같은 해에 부르카르트 2세는 작센 공작 하인리히 1세를 새로운 독일 왕으로 인정했다. 그 대가로 하인리히 1세는 부르카하르트 2세에게 세금을 부과하고 공국의 주교와 수도원장을 임명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
922년, 부르카르트 2세는 그의 딸 베르타를 부르고뉴의 왕 루돌프 2세와 결혼시켜 양측의 평화를 확인했다. 루돌프 2세가 이탈리아 왕 베렝가리오 1세의 라이벌로 선택되었을 때, 부르카르트 2세는 루돌프 2세를 따라 이탈리아로 갔다. 924년, 베렝가리오 1세가 죽자, 위그 다를은 그의 지지자들에 의해 루돌프 2세의 대항마로 선택되었다. 브루카르트 2세는 노바라를 공격했으나 밀라노 대주교 랑베르트가 방어했다. 아마도 4월 29일, 부르카르트 2세는 전투에서 전사했다. 하인리히 1세는 부르카르트 3세가 어렸기에 헤르만 로트링겐 게브하르트의 아들이자 전대 국왕 콘라트 1세의 사촌인 헤르만을 슈바벤 공작으로 임명했고, 헤르만은 슈바벤 내의 친부르카르트 귀족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부르카르트 2세의 미망인인 레겔린다와 결혼했지만 장크트 갈렌은 마침내 왕의 보호 아래 놓이게 되었고, 쿠르 교구는 왕실 직활지로 편입되었다.
오토니아 왕조의 정치적 이해관계로 인해, 슈바벤은 유럽 권력 정치의 핵심이 되었다: 알프스 고개에 대한 지배는 이탈리아의 이익을 지지했고, 부르고뉴 문에 대한 지배는 부르고뉴에 대한 이익을 지지했다.
938년 프랑코니아 공작 사촌 에버하르트가 반란을 일으키자 헤르만은 하인리히 1세를 지지하면서 에버하르트와 라이벌 관계를 맺었고, 939년에는 오토 1세가 새로운 독일왕으로 즉위하게 되지만 반란은 점차 오토 1세의 승기로 기울어지기 시작했고, 에버하르트는 안데르나흐 전투에서 전사했다.
헤르만 1세의 유일한 아들은 그의 딸 이다였으나, 그녀는 오토 1세 황제의 장남인 리우돌프와 결혼했고, 949년 헤르만 1세가 사망하자 리우돌프는 아버지 오토 1세로에 의해 슈바벤 공작이 되었다.951년 베렝가리오 2세가 이탈리아의 왕위에 올랐을 때, 리우돌프는 아버지인 오토 1세의 의도에 따라 롬바르디아를 침공하였다. 이때 그는 막대한 보물을 포기하고 롬바르디아 공격에만 전념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 오토 1세는 로타리오 3세의 미망인 아델라이드와 재혼하였다. 왕위 계승자라고 생각하던 그의 계획에는 차질이 우려되었다.
리우돌프는 자신의 위치에 위협을 느끼고 귀족들을 설득, 슈바벤의 귀족들 및 자신의 매부 로렌 공작 콘라트 적왕, 마인츠 대주교 프리드리히 등의 지원을 받아 952년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에는 리우돌프의 삼촌인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1세도 지원했지만, 하인리히는 오토 1세의 편으로 돌아선다. 953년의 부활절에 리우돌프는 오토와 협상을 시도하지만 실패했고, 오토 1세는 말머리를 돌려 마인츠를 포위, 두 달간 감금되었다. 953년 말 리우돌프는 레겐스부르크 총독에 의해 체포되어 오토 1세에게 넘겨졌다. 곧 반란은 진압되고 954년 6월 리우돌프는 아버지 오토 1세와 평화 조약을 체결했지만, 자신의 영토를 박탈당하였다. 그는 아버지와 곧 화해했으나 영지를 회복하지는 못했고, 슈바벤은 아른슈타트의 제국회의를 통해 부르카르트 2세의 아들 부르라르트 3세에게로 넘어 가게 된다.
부르크하르트는 황제 오토 1세의 최측근 중 한 명으로 955년 8월 10일 레흐펠트 전투에서 오토 1세와 함께 싸웠고 오토 1세의 이탈리아 원정에 참여했다. 965년, 부르카르트 3세는 이탈리아의 왕 베렝가리오 2세에 대항하는 제3차 이탈리아 원정에서 군대를 이끌도록 임명되었다. 부르카르트 3세는 965년 6월 25일 포 강 전투에서 승리했고, 오토 1세는 이탈리아 남부의 롬바르디아 공국을 확보하여 972년 신성 로마 제국에 합병했다.
954년 부르카하르트 3세는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1세의 딸 하트비히와 결혼했다. 970 년 부르카르트 3세와 하드비히는 호헨트뷀에 성 게오르크의 베네딕토 회 수도원을 설립했다.
브루카르트 3세는 973년 11월에 사망하였고, 로마에 있던 오토 2세는 슈바벤 공국을 그의 이복형제 류돌프의 아들인 오토 1세에게 주었다.이후 오토는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가 반역죄로 모든 영지가 물수된 가운데 바이에른 공작령과 케른텐 공작령과 노드가우 후작령을 잇달아 하사하였다. 980년 황제 오토 2세의 이탈리아 원정에 동행하여 남부 이탈리아까지 내려가, 비잔틴 제국과 시칠리아에 올라온 아랍인들을 상대로 교전하였다.
982년 이탈리아에 사라센 족이 침입하자 황제 오토 2세와 함께 이를 격퇴하러 갔다. 콜로네와 크로토네에서 아랍군을 격퇴했지만 7월 13일 스틸리오 전투에서 사라센 군대의 기습공격을 받고 부상당했다. 퇴각한 후, 다시 이탈리아 원정을 준비하던 중, 그해 10월 31일 혹은 11월 1일 전투 중에 받은 상처가 잘못되어 후유증으로 죽었다. [2] 그는 슈바벤의 역사에 이렇다할 공적을 남기지 못했다.
그의 뒤를 이어 헤르만 1세의 먼 조카뻘인 콘라트가 슈바벤 공작으로 임명되었다. 997년 콘라트 1세가 죽자 헤르만 2세가 슈바벤 공작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2.2. 프랑켄(현 바이에른 북부)
프랑켄 지방으로 간주되는 지역(하늘색은 모두가 프랑켄 지역에 해당되는 경우, 연두색은 부분적으로 프랑켄 지역에 해당되는 경우이다),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오늘날 바이에른 주의 북부 지역이 프랑켄 지방이었다.
서로마 제국이 쇠퇴되기 전까지 프랑켄 지방은 남북으로 분단되어 북쪽으로 게르만 여러 부족들의 영역이지만 남부 만큼은 로마 제국의 영토였으나 서로만 제국이 붕괴되기 시작한 이후 이 지역은 거의 무정부 상태가 되면서 알레마니, 튀링겐, 프랑크 족들이 이주해 왔다. 서로마 제국 붕괴 직전 훈족의 침략을 받아 황폐화되기까지 했다.
6세기 초까지 동쪽 프랭크 지역은 취링겐인과 알레만인 사이의 긴장 지역에 휘말렸다. 예를 들어, 7세기 작성된 지도인 라벤나 코스모그래피는 오늘 상류 팔츠의 나브 강과 레겐 강이 툴링겐 땅에서 다뉴브 강에 합류했다고 썼다. 지도는 분명히 오래된 출처에서 이 정보를 얻었기 때문에 5세기에서 6세기 초에 걸쳐 튀링겐족의 영향력이 적어도 상류 프랑켄 지방으로 정기적으로 확대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최근 조사에 따르면, 튜링겐의 세력이 마인 강 유역으로 확대되었다는 확증은 없다. 상류 프랑켄 지방은 프랑크인에 의한 정복까지 보헤미아 문화 그룹과의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엘베 지방의 게르만 민족 그룹이 프랑켄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보이며 현재의 프랑켄 지방의 중심지는 529~534년 알레만인과 튀링겐인에 대한 전쟁 이후 후 프랑크인의 손에 떨어졌다.
처음에는 그들은 프랑크 왕국과 완만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6세기까지 이 지역은 주로 니더마인 강 출신의 프랑크인에 의해 식민지화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7세기, 프랑크인 정착민이 어퍼 마인 강과 레그니츠 강의 대호 지역으로 진출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적어도 7 세기 중반까지 동부의 슬라브 사람들이 지역의 북동부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프랑크 국왕 다고베르 1세는 뷔르츠부르크의 통신의 중심지에 있는 플루오디라는 남자를 본토 공작으로 임명했다. 이것은 튀링겐 공 라두르프가 아닐까 가끔 추측된다. 그러나 가능성이 높은 것은 당시에도 프랑켄 지역이 강력한 튀링겐 공작에 대항하기 위해 독자적인 공국을 설립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의 인구의 대다수는 아마도 중세 초기까지 이교의 관습을 따르는 것으로 간주된다. 완전히 기독교인이었던 것은 공작과 아래에 복속된 백작들로 보인다. 처음에 기독교 신앙을 강하게 퍼뜨리려고 한 것은 순회하는 아일랜드의 앵글로 색슨 수도사였다. 첫 번째는 프랑크인의 사도가 된 킬리안이었습니다. 685년경, 아일랜드의 설교자와 그의 동료인 코르만과 토트난은 뷔르츠부르크에 가서 거기서 주교가 되었다가 살해당했고, 그와 그의 동료는 순교자가 되었다. 741~742년경, 성 보니파티우스 하에 최초의 프랑켄 지방 주교구, 뷔르츠부르크 주교구가 설립되었습니다. 742년 또는 그보다 조금 후, 성 윌리발트는 아이히슈테트 주교구를 설립했습니다. 이 주교구에는 프랑켄 지방의 남동부뿐만 아니라 바이에른 주와 알레만 지방의 일부도 포함되어 있었다.
8세기경까지 제국에 있어서 점점 더 중요성이 커지고 있던 이 지역에는 아직 독립된 이름이 없었다. 9세기 이후, 메인 지역은 동 프랑크(Francia Orientalis)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이름은 카롤루스 대제의 후계자에 의해 동 프랭크 제국 전체에 주어졌다. 카롤루스 대제의 통치하에, 알토뮐 강과 슈바벤 지역 사이, 그리고 라인 강과 다뉴브 강 사이, 현재 트로이슈트링겐의 그라벤 위치 근처에 항행 가능한 수로를 건설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지만 실제로 완성되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아직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9세기 중반, 동프랑크 왕국의 5대 부족 공국 중 하나인 프랑켄 공국이 탄생했다. 그러나 현재의 프랑켄 지방은 이 공국의 동부만을 뜻하고 있으며 이때는 작센을 침략해오던 바이킹들을 막기 위한 변경주로서 초대 변경백은 프랑크 왕국의 귀족으로 포포니드 가문으로 불리는 프랑켄 바벤베르크가의 일원이다. 사아를가우(Saalgau), 프리슬란트의 변경백 포포(Poppo)의 아들로 파리 출신이기도 했던 하인리히로 884년 그는 군사를 이끌고, 아르노 주교, 작센의 귀족들과 함께 바이킹의 침공에 맞서 작센을 방어하였다. 같은 해 작센에 대규모로 나타나 함락되었지만, 곧 점령지를 탈환시켰다. 바이킹 족이 뒤스부르크와 하부 라인란트 공략을 막아냈다. 이듬해에 그는 프리슬란트를 장악한 노르만인 지도자 고트프리드와 시그프리드를 암살하고, 바이킹을 몰아냈다.
같은 해에 그는 일시적으로 바이킹과의 교전을 중단, 튀링겐 공작령을 둘러싼 분쟁에 개입, 그의 형제 포포 2세(Poppo II)를 지원했다. 883년 프륌을 침공한 바이킹과 싸워 승전하였다. 885년 초에 하인리히는 로타링기아의 후고를 매복해 있다가 사로잡았고, 황제 비만왕 카를 3세의 명령을 받고 후고를 눈이 멀게 만든 뒤 프륌 수도원에 감금하였다.
885년 여름 로우엔에서 라그논도가 사망하자 그를 대신하여 군사를 이끌고 바이킹과 싸우고, 그해 북부 해안가로 오는 바이킹을 막기 위해 네우스트리아 변경백에 임명, 파견되었다.886년 다시 노르만족의 침략 시, 네우스트리아에서 카를 3세의 서프랑크군 사령관으로 활동하였다. 하인리히는 노르만족 이 파리를 포위하자, 군사를이끌고 네우스트리아에서 파리로 가다가 매복, 기습공격을 당했다. 그는 왕궁 근처 쿠아즈 오이세(Quierzy Oise)로 돌아서 가려다가 바이킹이 파놓은 함정에 빠졌으며, 근처에 숨어있는 바이킹에 의해 구덩이에서 살해되었다.
이후 프랑켄의 통치자에 대한 기록이 공란이지만 바벤베르크 가문이 마인 지방에서 중요한 권력을 쥐고있었다. 그러다가 886년 콘라딘 가문 출신의 튀링겐 공작 콘라트가 프랑켄 지역에 속한 오버라한가우를 시작으로 헤센가우(897년), 괴츠펠트가우(903년), 베터가우(905년), 보름스가우(906년) 등의 백작령들을 차지하면서 현재의 헤센 지역들을 정치적으로 통합시켰다. 이는 바벤베르크 가문이 동프랑크를 지배하고 있던 동프랑크계 카롤링거 왕조가 대립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지막 카롤링거 왕조의 루트비히 4세는 바벤베르크 가문의 많은 영토를 몰수하고 라인 프랑켄 지방의 부유한 전 튀링겐 공작 콘라트에게 넘겨 주었다.
그러나 이일로 인해 바벤베르크가는 콘타트를 증오해 902년 콘라트의 동생 에베르하르트가 바벤베르크와 싸우다가 전사했고, 906년 콘라드 본인 또한 프리츨라르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하지만 프랑켄은 콘라트의 장남인 콘라트 2세가 완전히 장악해 프랑켄 공작으로 인정받기에 이른다.
10세기까지 프랑켄 지방에는 라인 지방 또는 서쪽 프랑켄 지방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부분에는 현재의 헤센 주, 라인 지방의 헤센 주, 팔츠 지방, 바덴 북부가 포함되어 있으며, 렌슈타이크의 도로 이남의 현재 튀링겐의 일부도 포함되어 있다.
908~910년 동안 마자르족의 침입 당시 마자르족의 침공에 맞서 싸웠으나, 로타링기아에 있던 그의 친삼촌 루돌프(908년)와 게브하르트는 마자르와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
911년에 루트비히 4세가 죽자 그때까지 프랑켄 공이었던 콘라트 2세가 동프랑크 왕 콘라트 1세로서 포르히하임에서 동 프랭크 왕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는 프랑켄 공국의 지방 권한을 동생 프랑켄 공 에버하르트에게 주었다. 913년 에베르하르트는 프랑코니안 헤센가우(Hessengau) 백작과 파르스가우(Persgau) 백작이 되고, 913년부터 928년까지는 상부 랑가우(Upper Lahngau) 백작으로 나타났다.
그는 콘라트의 이붓아들이기도 한 바이에른의 아르눌프 공작, 처남이기도 한 작센의 하인리히(새사냥꾼 하인리히)에 맞서 형제를 지원하였다. 914년 그는 하인리히가 부르크하르트(Burchard) 공작의 튀링겐 땅을 정복하는 것을 목격해야 했다.
그에게 힘이 없다고 본 젊은 콘라두스 왕은자신의 임종을 예상, 귀족들을 소집하였다. 이때 작센의 하인리히는 오지 않았다. 918년 12월 콘라두스 1세는 포르크하임(Forchheim)에서 부상 후유증으로 사망하면서 에베르하르트에게 왕위계승은 단념하고 작센의 하인리히에게 넘기라고 하였다.
콘라트는 후임자를 선출하기 위해 독일의 귀족들을 소집했다. 코르베이의 비두킨드에 의하면 콘라트는 그에게 독일의 왕관에 대한 야망을 포기하라고 설득했다 한다. 귀족들은 선거에서 그의 전 라이벌을 선택, 작센 공작 하인리히 1세를 선출했다.
에베르하르트는 콘라트의 유언에 의해 919년 5월 프리츨라르에서 개최된 제국 의회(Imperial Diet)에서 하인리히에게 왕실 휘장을 직접 넘겨 주도록 지명되었다. 콘라트는 이것이 작센과 프랑크인 사이의 오랜 불화를 끝내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독일의 부족공국에 근거하여 제국이 더 작은 주들로 해체되는 것을 막기 위한 방법으로 생각했다.
에베르하르트는 그의 형제를 프랑코 니아 공작으로 계승했으며 새로운 왕 하인리히 1세의 충성스러운 지지자로 남았다. 헨리가 문제가 많고 불안한 로타 링기아 공국을 다시 정복한 후 926년에는 그에게 섭 정직을 수여 하였다. 928년 하인리히 왕은 로타르 1세와 대머리 카를의 외손이자, 그의 딸 게르베르가의 남편인 자신의 사위 기셀베르트를 임명했다.
그러나 하인리히의 죽음 이후, 에버하르트는 왕권 강화를 목표로 한 하인리히의 아들이자 후계자 오토 1세와 곧 갈등하였다. 937년 프랑코니아 공작은 프랑코니아와 작센 국경 근처에 있는 페케르스하임 근처 에 있는 헤르메른(Helmern) 성을 점령했으며 작센 족이 아닌 사람에게 충성을 맹세하기를 거부한 작센인 귀족의 성이었다. 그는 헬머른을 빼앗아 다른 작센 족 출신 부르그레베(burgrave)에게 맡겼다.
오토 왕은 그를 반대파로 규정, 관련자들을 마그데부르크 에 있는 왕실 법원에 불렀는데, 그곳에서 에버하르트는 벌금을 내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그의 가신들은 특히 불명예스러운 형벌로 죽은 개를 공개적으로 운반하라는 선고를 받았다. 격분한 에베르하르트는 오토 1세의 반대편에 합류하여 938년 오토 1세의 이복형 탕크마르와. 아르눌프 공작의 아들인 새로운 바이에른 공작 에베르하르트 바바리아이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반란은 곧 진압되었다. 탕크마르는 에레스부르크 성에서 암살되었고, 바이에른의 에베르하르트는 그의 삼촌 베르크톨드(Berthold)가 공작 (938-945 통치)으로 대체되었다.
938년 팔라틴 백작에 임명되었다. 938년 가을 에버하르트는 다시 로타링기아 공작 기셀베르트, 마인츠 대주교 프레드리히, 그리고 오토의 동생 하인리히와 새로운 봉기에 가담하였다. 오토의 동생. 그들의 연합군은 오토의 통치에 심각한 위협을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39년 10월 2일, 반군은 마침내 안데르나흐 전투에서 패배했다. 프랑코니아의 에베르하르트는 그의 콘라디안 가문 친척인 베테르 백작 오토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 후 프랑켄 공국은 압수되어 독일 국왕에 의해 직접 종속되었다. 다른 부족 공국과는 달리, 프랑켄은 당시부터 동프랑크 왕과 독일 왕의 조국이며 권력 기반이었습니다. 그 결과 작센 공국, 바이에른 공국, 슈바벤 공국 등 중세 지역 강국이 되지 않았다.
오토 1세는 이후 로타링기아에서 그랬던 것처럼 프랑켄 공국을 동서로 분할시켰다. 서부 프랭켄을 자신의 사위이자 콘라트 1세의 외손자인 로타링기아 공작이자 이미 보름스 지역 등의 백작을 맡고 있던 콘라트 적공에게 프랑켄 백작 칭호를 수여하였다. 950년 콘라트 적공은 오토 1세의 장남 리우돌프의 반란에 동참하면서 대부분의 봉지가 물수되었지만 외손자인 오토를 걱정했던 오토 1세의 선처로 보름스가우만은 보존하게 되었다.
동부 프랑켄의 지역들은 바벤베르크 가문의 후손인 슈바인푸르트 백작에게 뷔르츠부르크 주교좌와 같은 수많은 영지를 주어 그들을 동부 프랭켄의 가장 대귀족으로 만들었다. 그 결과, 프랭켄 지방은 오토와 그의 직접적인 후계자 아래 왕실에 충실하게 남아 있었다. 서부 프랑켄은 오토 왕조에 귀속되었은데 오토 대왕은 957년에 뉘른베르크 인근 프팔츠 주 젠나[3]에서 반항적이었던 아들 슈바벤의 리우돌프를 만났을 때를 포함하여 종종 동부 프랑켄 지방에 머물렀다.
973년, 오토 2세는 중요한 요새인 바벤베르크를 강력한 정적인 바이에른 공인 하인리히 2세에게 양도해 그를 회우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2.3. 튀링켄
튀링겐은 3세기 경에 투링기족이 차지하면서 시작되었다. 튀링겐이라는 지명의 어원은 투링기족에서 유래되었다. 476년 서로마 제국이 붕괴된 이후 튀링겐족들은 알레마니족들과 손을 잡고 무정부 상태가 되어 버린 파사우와 다뉴브 강변의 로마의 옛 도시들을 습격했다.500년경 랑고바르드족 연대기들의 기록 등을 통해서 기록상 최초의 왕인 비시누스가 등장하지만 치적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비시누스가 죽자 그의 세아들들인 바데리히, 베르타차르, 헤르미나프리드가 공동으로 튀링겐을 통치하게 되었다. 하지만 얼마 안가 세 형제는 단일 왕권을 두고 서로를 적대시하게 되었다.
529년, 헤르만프리드는 랭스 프랑크의 왕인 테우데리크 1세의 사위가 되었고, 바데리히와 베르타차르와 내전을 벌였다. 테우데리크는 헤르만프리드를 지원하여 내전에서 승리하게 했다. 그러나 헤르만프리드는 권력을 잡은 뒤 땅을 넘겨주겠다던 약속을 무시했다. 이에 그는 클로타르 1세와 손을 잡고 튀링겐을 공격하기로 했다. 531년 또는 532년, 그와 아들 테우데베르 1세, 그리고 클로타르 1세와 함께 튀링겐을 공격했다.
이들은 운스트루트 강 전투에서 튀링겐군을 격파하고 스키팅기 왕궁을 공략했다. 헤르만프리드는 가까스로 도망쳤지만, 조카 라데군트 등 여러 왕실 인사는 붙잡혔다. 이후 테우데리크는 헤르만프리드에게 신변의 안전을 보장할 테니 투항하라고 요구하며 선물을 보냈다. 헤르만프리드는 이에 응해 줄피히(Zülpich) 성에서 그와 만나 이야기를 나눴으나, 도중에 누군가가 그를 성벽에서 밀어 떨어뜨려 죽였다. 그리하여 튀링겐 왕국은 멸망했고, 그는 클로타르 1세와 함께 튀링겐 왕국의 옛 영토를 분할했다.
하지만 하르츠 산맥 북쪽에 작센족들이 넘어와 정착했고, 랑크족은 마인 강의 남쪽으로 이동했다. 잘레 강 동쪽의 영지는 프랑크족의 통제를 벗어났고 폴라비아 슬라브족이 점령했다.
634년 다고베르 1세는 벤드족을 막기 위해 튀링겐에 변경주를 설치해 변경백으로 라돌프를 임명했다. 초창기 라돌프는 보헤미아 지방에 정착한 벤드인들의 왕 사모와 동맹을 맺고 그의 지배하에 있지 않은 다른 벤드족의 침입을 막는데 성공했으나 다고베르가 사모를 상대로 630년경, 전쟁을 선포한 것으로 둘 사이의 동맹이 위기가 찾아왔다.
다고베르 1세는 프랑스 왕국의 동쪽 분국인 아우스트라시아 전역에서 군대를 소집했다. 그는 군대를 3개 부대로 나누었다. 한 부대는 자신이 이끌었고, 알레만니인으로 구성된 2번째 부대는 흐로도베르크 공작이 이끌었으며, 랑고바르드족 출신 용병들이 세 번째 부대를 결성해 슬라브의 영역을 공격했다. 알레만니족과 랑고바르드족은 국경지대에서 벌어진 몇 차례의 소규모 접전에서 승리해 포로와 전리품을 확보했다. 다고베르가 이끄는 아우스트라시아군은 사모와 수행원들이 자리잡은 보가티스부르크 요새를 포위했다. 그러던 중 사모가 성문을 열고 병사들을 출격시켜 프랑크인에게 싸움을 걸었다. 3일간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한 프랑크인들은 숙영지, 보급품, 전리품을 남겨두고 도주했다. 프레데가르 연대기에 따르면, 이 패배는 슬라브인들이 특별히 용맹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고베르 왕의 왕권 강화 정책에 반감을 품은 프랑크 귀족들의 배신 때문이었다고 한다.
사모는 다고베르 1세를 물리친 뒤 프랑크 왕국으로 서진하여 튀링겐 일대까지 밀어붙이며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그동안 프랑크 왕국의 봉신으로 지냈던 소르브 공작 데르반은 다고베르를 떠나 사모에게 복종했다. 다고베르 1세는 다고베르는 보복 원정을 벌이려 했지만 귀족들을 통제하는 데 애를 먹었기 때문에 쉽사리 병력을 확보할 수 없었다. 631년, 슬라브인들의 서진으로 곤경에 처했던 색슨족이 다고베르에게 사절을 보내 슬라브인을 포함한 외적의 습격으로부터 아우스트라시아의 국경을 지켜줄 테니 공물을 줄여달라고 요청했다. 다고베르는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클로타르 1세 시기부터 매년 500마리의 소를 바치는 관례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켰다. 그러나 슬라브인들이 왕국의 영역을 침략해 약탈을 자행하는 상황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결국 튀링겐 공작 라둘프는 프랑크 왕국이 슬라브인의 습격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주지 못하는 것에 반감을 품고 튀링겐 왕을 자칭,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독립한 뒤 사모와 동맹을 맺었다.
이후 라돌프는 프랑크 왕국과 전쟁을 벌었는데, 640년 이후 아우스트라시에서 튀링겐을 재복속시키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지만 패배하고 만다. 이후 라돌프의 행적은 알 수 없으며 642년 즉위한 헤덴 1세까지 튀링겐의 통치자들과 그 주민들은 게르만 이교 신앙을 고수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헤덴 1세는 프랑크족 연대기로 통해 이름만 전해져 내려오지만 그의 아내인 빌리힐디스는 기독교인으로 687년 남편이 사망한 후 마인츠 근교에서 알트뮌스터 수도원을 개설했다. 이후 헤덴 1세의 동생인인 고즈베르트가 튀링겐의 통치자 자리를 물려받게 되었다.
고즈베르트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그의 가문은 이교 신앙을 유지했다. 그러다가 아일랜드 출신의 선교사 킬리안에 튀링겐으로 와서 선교하게 되었다
이에 고즈베르트는 킬리안을 불려 그의 설교를 듣고 킬리안은 그를 설득하여 기독교인이 되게 하고 부하들과 함께 세례를 주었다. 그러나 당시 고즈버트는 형의 아내 중 한 명인 가일라나를 아내로 맞이한 상태로 외아들로 추정된 헤덴 2세도 있었는데, 문제는 당시의 기독교적 관습에 따라 죽은 형제의 아내와 결혼하는 것을 금하고 있었기에 고즈버트는 중혼 계획을 철회하고, 가일라나와 해어지겠다는 결심을 했다.
이에 가일라나는 킬리안을 비롯한 기독교 선교사들을 증오하게 되었다. 고스베르트가 군사 작전으로 자리를 비웠을 때, 가일라나는 686년에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람들을 시켜 밤에 킬리안을 비롯한 선교사 전체를 비밀리에 참수하여 주교의 십자가, 복음서, 전례 물건과 함께 그들의 예복에 급히 묻게 했다.
이후 가일리나에 처후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로 나눠졌지만 고즈베르트 또한 687년 작센족 호위병에 의해 살해되었고, 헤덴 2세는 어린 나이에 뷔르츠부르크 밖으로 떠나야 했는데, 가일라나가 일련 사태의 뒤에 있었는지 섭정으로서 튀링겐을 통치했다.그러다가 704년 이전 성인이 된 헤덴 2세는 튀링겐으로 돌아와 정식으로 공작이 되었다.
헤단과 그의 조상이 통치한 튀링겐 왕국은 마인강 주변 지역이었다. 헤단 2세가 정식으로 통치하게 되자 처음으로 동쪽 토지, 오늘 취링겐이라고 불리는 지역에 광범위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헤단의 튀링겐 통치의 주장은 아내의 테오드라다를 통해 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킬리안의 실패로 끝난 튀링기이의 기독교로의 개종이 보니파티우스 하에서 열매를 맺기 시작한 것은 헤단의 통치 중에 있었다. 헤덴 2세와 테오드라다는 딸인 임미나를 위해 700년경에 뷔르츠부르크의 마리엔베르크 수녀원을 지었고, 임미나는 그곳의 수녀원장이 되었다. 하지만 헤단 2세의 통치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717년 궁재로서 프랑크 왕국의 모든 실권을 장악한 피피니드 가문의 샤를 마르텔이 튀링겐 왕국을 치자 헤덴 2세는 군대를 모아 프랑크 군대를 막으려 했지만 전사하면서 튀링겐은 프랑크에 재병합되었다. 마리엔베르크는 프랑크 왕실 재산으로 귀속되었고, 742년 뷔르츠부르크 주교단이 설립되었을 때, 샤를 마르텔의 아들 궁재 카를만은 마리엔베르크에 있는 수도원과 교회를 뷔르츠부르크 교구에 기증했다. 742년 주교단이 설립 된 후 그 때까지 생존했던 임미나는 카를부르크 수녀원의 대수녀원이었다. 카를부르크 수녀원은 카를로만에 의해 742년 뷔르츠부르크 교구에 기증되었습니다.
튀링겐은 카롤링거 왕조가 들어선 이후에도 한동안 통치자를 따로 세우지 않다가 788년 엘베강 동쪽에 자리한 서슬라브계족인 소브르족의 침입을 막기 위한 변경주가 설치되었지만 변경주의 통치자들에 대해선 아무런 기록도 남아 있지 않았다가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동프랑크 왕국에 귀속되어 루트비히 2세에 의해 849년 튀링겐의 동부 지역은 소라비쿠스(Sorabicus) 또는 소르비아 변경주(Sorbian Mark)로 조직되었고,타슐프라는 인물이 소르브 변경백에 임명되었다.
타슐프와 그의 후임 소르브 변경백들은 폴다 연대기에 소르브 변경백잊자 튀링겐 공작으로 기록되었다. 소르비아 변경주에 튀링겐 동부 또한 포함되어 있지만 타슐프와 그의 후임 변경백들이 튀링켄 전역에 통치력을 확립했는지는 미지수다. 다만 타슐프는 폴다 수도원에 자신의 명의와 작위명으로 보헤미아 근처에 위치한 사로웨 지방[4]을 기부했다고 한다. 이후 855년에 달레민트족을 복속시키려고 시도했고, 858년 그는 소르브족에 대한 원정을 이끌었다.
864년 동프랑크 왕 루트비히 2세의 아들인 소 루트비히 3세가 튀링겐 공작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865년 루트비히는 동생 카를 3세와 함께 아버지 독일인 루트비히에 대한 반란에 합류하였다. 그러나 루트비히 2세는 아들의 사생활에 지나치게 간섭하였고, 이에 루트비히는 동생 카를 3세와 함께 아버지 독일인 루트비히에 대한 반란에 합류하였다.
865년 프랑크푸르트와 프랑코니아를 차지했고 작센과 튀링겐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증가시켰다. 865년 아버지 독일인 루트비히는 세 아들에게 각각 자신이 차지할 땅을 지목하도록 강요했는데, 카를만은 바이에른을, 청년 루트비히는 작센과 프랑켄, 튀링겐을, 뚱보 카를은 알레만니아와 슈바벤, 라이티아(Raetia, 독일 바이에른주의 남부와 오스트리아 포어아를베르크주 전역,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에 거쳐 있는 티롤 지방의 전역 및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주의 북동부)를 지목했다. 그리고 프랑크푸르트 지역은 삼형제가 공유하기로 했다. 몇달 후 청년 루트비히는 아버지 독일인 루트비히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 865년 10월 서프랑크 왕국의 카를 2세는 쾰른에서 소 루트비히와 독일인 루트비히 부자의 화해를 주선하였다. 870년 로타르 2세의 영지의 일부로 서프랑크 왕국에 넘어갔던 마스트리흐트 일대를 빼앗아 점령하였다. 871년과 873년 청년 루트비히는 반란을 일으켜 부왕과의 사이에 불화가 증가하지만, 그 때마다 그는 기적적으로 부왕과 화해하였다. 872년 루트비히는 자신의 다른 두 형제와 함께 유산으로 정해진 지역의 상속을 재확인받았다.
873년에 타슐프가 죽자 소르브인이 반란을 일으켰고 그의 아들 라둘프가 변경백을 이었다. 하지만 소르브인들과 시우실리인들의 노략이 계속되자 라둘프와 마인츠의 대주교 류트베르트는 874년 1월 잘레 강을 건넜고, 약탈과 불의 전쟁을 통해 슬라브족을 전투 없이 굴복시켰다. 그러나 880년, 루트비히 3세는 라둘프의 소르비아 변경백 직위를 해임하고 프랑켄 공작 하인리히의 동생인 포포와 그의 동생인 에가노로 대체했다.
그 해에 달레민지, 보헤미아, 소르브는 튀링겐을 침공하고 독일과 동맹을 맺은 슬라브 지역을 불태우겠다고 위협했습니다. 그들에 대해 포포는 보복 원정을 단행하여 이들 셋 집단에 대해 승리하였다. 이후 882년에 작센과의 전쟁을 선동하고, 883년에 동생 에기노와 함께 튀링겐의 지배를 둘러싸고 내전을 싸웠으나, 에가노가 승리했습니다.
에기노는 886년에 해임되고, 포포는 소르비아 변경백으로 재임명되었다. 892년, 아르눌프는 포포를 콘래드로 대체했다. 그러나 콘라트의 가문인 콘라딘 가문과 포포의 가문 바벤베르크가는 오래전 갈등이 있었고, 또한 콘라트는 튀리겐 사람들의 지지도 받지 못해 그곳으로도 갈 수 없었고, 콘라트의 통치는 짧았다.
결국 1년 만에 아르눌프는 후임으로 브루카르트를 새로운 변경백으로 세웠다. 903년 브루카르트는 자신의 칭호를 '투링겐 변경백'으로 변경했다. 이후 브루카르트는 마자르인의 침공으로부터 취링겐을 지켜야 했고, 908년 8월 3일에 전임 변경백인 에기노와 함께 싸움에 패해 전사했다. 기록에 남는 마지막 튜링겐 공이 되었다.
브루카르트의 사후 913년 브루카르트의 아들이들인 부르카르트와 바르도는 파울러 공 하인리히에 의해 최종적으로 추방된 뒤 작센에 흡수되었다. 이후 튀링겐 지역은 949년 바이마르의 빌헬름이 동부에 위치한 초대 바이마르 백작으로 임명되었고, 그는 953년부터 955년까지 베틴 가문의 백작들과 함께 오토 1세의 장남인 슈바벤 공작 리우돌프의 반란에 참여하다가 반란이 진압된 후 처가인 바벤베르크 가문이 통치하던 바이에른으로 추방되다가 956년 다시 바이마르의 백작이 되었다.
963년 빌레흠 1세가 사망하고 그의 빌헬름 2세가 바이마르 백작직을 승계했다. 983년 오토 2세 사망 후 어린 오토 3세대신 다른 이를 독일 왕으로 선출하려고 했을 때 외가쪽 친척인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를 추천하다가 친 오토 왕가 성향의 귀족들의 공격을 받고 바이마르가 포위된 적도 있었다.
한편 965년 튀링겐 서부인 엘베강 동부의 거대한 게로 변경주에서 분할된 마이센 변경주의 통치자인 비그베르트를 비롯한 티에르마르 1세와 군터 폰 메르셰부르크, 릭다그에 이르기까지 동쪽의 슬라브족들로 부터 독일의 경계를 지키는 것에만 여념이 없었다. 특히 릭다그가 마이센 변경백이 된지 5년만에 엘베강 동부의 슬라브족들이 대대적으로 봉기를 일으켜 독일왕국으로 부터 벗어나려고 했고, 릭다그를 비롯한 엘베강 서부의 변경백들이 슬라브족들의 봉기를 잔혹하게 진압했다.
이후 릭다그는 오토 3세의 왕위 계승을 지지하였으나 984년 6월 보헤미아 공작 볼레슬라프 2세에게 마이센 성을 빼앗겼다. 985년, 그는 여동생 엘슈트와 함께 게르브슈테트에 수녀원을 설립했고, 얼마 안가 사망하고, 전임자였던 군터의 아들인 에케하르트 1세 그 뒤를 잇는다 987년 불레스라프 2세가 마이센을 돌려주자 오토 3세의 어머니인 테오파누에 의해 마이센 변경백으로 임명되었다.
990년 그는 폴란드와 보헤미아 사이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한 협상을 위해 보헤미아로 가던 도중에 루티시아인들에게 포로로 잡혔지만, 볼레스와프의 중재로 곧 풀려났다. 그 후 몇 년 동안 에케하르트는 폴란드 공작 볼레스와프 1세와 긴밀한 동맹을 맺었고 튀링겐 공작으로 임명되었다.
2.4. 작센
서로마 제국이 476년 붕괴되기 이전 작센족은 로마 제국 영역 밖에 위치하고 있었다. 당시의 작센족은 동프리지아 지방을 제외한 현재의 니더작센을 중심으로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의 뮌스터와 파더보른과 그리고 홀슈타인에 걸쳐 있었고, 현재의 작센주와 구별하기 위해 옛 작센으로 부르고 있다.옛 작센은 현작센과 달리 가장 북쪽에 위치했으며 바다와 접했기 때문에 해상으로의 진출과 무역도 활발했다. 5세기경 작센족(영어명 색슨족)의 일파가 브리튼 섬을 정복한 것도 바로 북해 연안을 근거지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이 잉글랜드를 정복하여 앵글로색슨족이 되었다. 앵글족과 색슨(작센)족이라지만 앵글족은 거의 사멸했고, 색슨족이 대부분이었다.[5]
476년 서로마 제국 붕괴 후 여러 게르만 왕국들이 건설될 때, 작센은 비교적 늦게 6세기에 부족 왕국을 건국했다. 작센 건국자는 하두가토로 9세기 프랑크족 가톨릭 성직자이자 연대기 작가인 폴다의 리우돌프의 'Translatio sancti Alexandri Wildeshusam anno 851'에 따르면 하두가토는 언스트럿 강가의 부르크샤이둥겐 에서 프랑크족들과 함께 튀링겐족들과 싸우게 되었다.
하지만 튀링겐족들은 프랑크족들과 손을 잡아 작센족들을 몰아내려고 했으나 작센족의 하두가토는 미리 알고 먼제 선제 공격해 튀링겐족들을 학살한다. 하지만 이로 인해 작센 왕국은 이웃에 있는 메로빙거 왕조의 프랑크 왕국과는 불편한 관계가 되었고, 무엇보다 불분명확한 영토가 양측의 분란을 야기했다.
작센족들의 영토는 대부분은 구릉과 하르츠와 헤센의 저산지대에 떠오르는 남부를 제외하고는 넓은 평원으로 태고의 옛날부터, 이 경계를 따라 명확한 물리적 정의의 부족은 부족 사이의 끊임없는 부족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현재의 북독일 주민으로서의 작센족은 랭스-프랑크의 왕 테우데발트가 사망하고 작센족은 이 기회를 이용해 555년에 랭스 프랑크를 침공하나 테우데발트의 숙부로서 그의 영토를 통합한 수아송-프랑크의 왕 클로타르 1세에게 패했다. 하지만 작센과 프랑크간의 전쟁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7세기 중엽에 작센족의 왕인 베르토알드에 이르려서 프랑크 왕국과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622년, 클로타르 2세는 아들인 다고베르 1세를 작센과 국경을 접하는 프랑크 분국인 아스트라시아의 통치자로 임명한 직후, 배르토알드는 아우스트라시아 동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다고베르는 이를 방어하기 위해 라인 강을 건너 작센의 영토에 침입했다. 그 후의 싸움에서 프랑크군은 패배하고, 다고베르는 투구에 강한 타격을 받았고, 그 때에 메로빙거 왕조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머리카락의 일부가 잘라졌다.
그는 그것을 회수하고 군인과 함께 아버지에게 보냈고 도움을 요청했다. 당시 아르덴에 있던 클로타르는 그 소식을 듣고 군대를 모아 그날 밤에 출발했다. 그 후, 다고베르 지휘하의 프랑크군은 베르토알트군과 베저강에서 마주한 채로 야영했다. 클로타르가 도착하자, 다고베르의 프랑크인들은 강 건너의 작센족에게 들릴 정도로 큰 소리로 환호를 했다.
그러나 베르토알드는 클로타르가 도착했다는 보고를 믿는 것을 거부하고 부하를 겁쟁이라고 비난했다. 클로타르는 말을 탄 채로 강으로 걸어갔고, 거기서 작센인의 지도자가 맞이했다. 국왕이 투구를 벗고 긴 백발을 드러내자 벨트알토는 클로타르를 비웃었다. 하지만 그것이 베르토알드의 마지막으로 클로타르는 도끼로 베르토알드의 목을 배었고, 그 후의 싸움에서 작센인들은 패주했다. 그들의 땅은 약탈되었고 많은 성인 남성이 죽였다.
한편 일찌감치 기독교화된 브리튼 섬의 앵글로색슨족이나 다른 게르만족들과는 다르게 여전히 전통적인 이교를 믿고 있었으며, 이르민술이라는 거대한 기둥 혹은 나무를 신성시했다고 한다. 680년 아일랜드 출신의 사제들인 흑인 에드왈드와 백인 에드왈드라는 이름의 두 선교사들이 작센 땅에 기독교로 전파하기 위해 들어왔다. 이 둘의 선교 활동은 뮌스터, 오스나브뤼크, 파더보른에 교구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695년에 이르러 이교도인 작센족들은 그들 가운데 있는 기독교 사제와 선교사들에게 극도로 적대적이 되었고, 그들의 목표가 자신들의 군주를 개종시키고 자신들의 사원과 종교를 파괴하는 것임을 깨닫기 시작했다. 695년 10월 3일 작센족들은 도르트문트 근처 아플라벡이라는 장소에서 두 선교사들을 습격했고, 백인 에드왈드는 즉사했고, 흑인 에드왈드는 고문을 당했고, 그는 사지가 찢어졌다. 그 후 두 시체는 라인 강에 던져졌다.
743년 테오데릭이 작센족의 통치자로 있을 때 프랑크 왕국은 궁재인 피피누스 3세와 그의 형제인 카를로만은 명목상 프랑크에 복속되었던 바이에른의 오딜로(Odilo of Bavaria)을 굴복시키기 위해 군대를 몰고 갔다.
그 후 카를로만은 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작센을 향해 북쪽으로 향했고, 호서부르크의 카스트룸을 정복하면서 작센 공작 테오데릭에게 항복하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테오데릭은 끝까지 항전을 택했고, 형제는 이듬해 744년 다시 작센을 침공했고 테오데릭은 포로가 되었다.
751년 메로비우스 왕조를 뒤엎고 새로운 왕조의 왕으로 즉위한 피피누스 3세는 작센 원정을 다시 기획하게 되나 768년 생드니에서 건강이 악화되어 사망하게 되었다. 769년 피피누스의 장남으로 동생 카를로만과 왕국을 분할한 카롤루스가 동생 카를로만이 죽자 조카들을 제치고 동생의 영토들을 전부 통합해 프랑크 왕국을 다시 하나로 결속시켰다.
카로루스는 아버지 피피누스 3세가 죽기 전 계획했던 작센 원정을 재기하기 시작했다. 작센족과의 전쟁은 카롤루스 치세의 거의 2/3을 차지할 정도로 길었고, 매우 잔인한 전쟁이었다. 명분은 이단 척결과 기독교의 전파였다. 카롤루스는 정복과 지역 흡수에 공격적인 기독교 선교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최초의 왕 중 한 명이다.
카롤루스는 개종을 명분으로 무력토벌을 지속적으로 밀어붙였고 굴복(개종)하지 않을 경우 초토화와 대량 학살 등의 잔혹한 수단을 동원했다. 무력 선교를 조장했던 교황청에서조차 지나치게 잔혹하다면서 말릴 정도였다. 카롤루스의 이런 잔혹한 만행에 대한 작센족의 저항 또한 맹렬하여 라인 강 이동 프랑크 왕국 본토까지 유린하는 등 혈전이 벌어졌다. 작센족이 완전히 무릎을 꿇기 전까지 카롤루스는 몇 번이나 다른 곳에서 전쟁을 벌이다가도 작센족과 싸우기 위해 돌아와야만 했고, 이는 카롤루스를 매우 분노하게 했다.
이들의 대족장은 데인족 왕의 동서인 비두킨트였다. 그는 매우 용맹스런 전사였다고 한다.[6] 주요 교전 지역은 베스트팔렌으로, 이 지역에서 카롤루스는 몇 번이나 반복된 전쟁을 벌였다.
프랑크인 열왕편년사 아날 연대기(Royal Frankish Annals)에 의하면 최초의 전쟁은 772년 여름이었다. 카롤루스는 프랑크 왕국을 통합한 직후 최초의 원정 대상으로 작센족을 짚었는데 이는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던 작센족과의 분쟁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이 해에 그의 군대는 엠스 강을 건너 베스트팔렌에서 승리를 거두고 비두킨트를 추격했지만 덴마크 지역으로 달아나는 그를 잡지 못하고 놓쳤다. 그래도 작센족의 성지이자 토템인 이르민술을 베어버리고 그 근방에서 적지 않은 전리품을 얻었으며, 이는 다음 해의 랑고바르드 왕국 원정의 주요 군자금이 되었다. 무엇보다 작센족은 카롤루스의 요구대로, 부족 토속신앙을 버리고 로마 가톨릭 교회로 개종하겠다고 약속했다.
프랑크 군대가 본국으로 구환하자 덴마크로 도망친 비두킨드는 다시 작센으로 돌아왔고, 작센족은 다시 자신들의 전래 토속신앙을 유지했다. 이후 작센족은 774년 프랑크 왕국을 상대로 선공을 걸었다. 이들은 두 해 전의 카롤루스의 원정으로 주요 성지였던 이르민술이 파괴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라인 강 동쪽 데벤테르를 비롯한 마을들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프리츨라르 수도원을 폐허로 만들었다.
이에 775년 파비아가 함락된 후 카롤루스는 작센족들이 개종 약속을 이행하기는 커녕 보복 공격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정예군을 이끌고 북상, 키에르지에서 대의회를 소집하고 "신앙 없는 이교도 작센 사람들을 압도적으로 패배시켜 기독교에 굴복시키든지 아니면 전멸시킬 것"을 선언했다. 카롤루스는 잉글랜드 지역 노섬브리아 왕국에까지 소문이 퍼질 정도로 야만적이고 잔혹한 보복공격을 가하여 작센 전쟁 기간 중 베스트팔렌 일대는 황폐화되었다. 카롤루스는 변경주를 신설하고 법을 제정, 작센 부족 정벌을 전담하게 했다. 비두킨트는 작센 출신 장수 아비 또는 아비오와 함께 카롤루스가 이끄는 프랑크족 군대와 맞서 저항하였지만 결국 굴복하고만다. 그러나 776년 랑고바르드족 공작들이 봉기하면서 이는 일시적으로 중단된다.
777년 가을, 작센 정복은 재개되었는데, 아날 연대기의 777년 기사에 비두킨트는 작센족 귀족들 중 카롤루스에 의해 파데보른(Paderborn)의 종교법정에 연행될 때 끌려가지 않은 유일한 작센 부족 귀족으로 나타난다. 어째든 파더보른 개간지를 거점으로 한 프랑크 왕국 군대는 작센족에 대한 무력을 동반한 공격적인 강제개종, 강제이주, 그리고 프랑크 귀족들에 대한 토지 하사와 정착을 실행하였다.[7] 이에 그는 덴마크족 지도자 지그프리드 혹은 시구르드 흐링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778년, 베스트팔렌의 작센족을 이끌고 프랑크 왕국의 라인란트를 공격하자 카롤루스는 작센족의 재봉기로 인해 이베리아 원정에서 귀환해야만 했다. 프랑크 군대의 잔혹한 공격에 복수의 칼을 갈던 작센족의 봉기는 매우 격렬하여 프랑크 왕국의 중심부인 라인 강 서안의 상당수 지역까지 작센족의 약탈이 계속되었다. 거의 왕국의 존망까지 위협받은 카롤루스의 반격 또한 격렬했다.
779년 6월부터 782년까지 실시된 카롤루스의 반격은 대량학살이 동반된 것이었다. 베네딕토회 수도원장 스투르미가 전사하자 카롤루스는 수도원 세력도 통제하여 작센 지역을 지역별로 나눈 후 주교를 파견하였다. 강제이주와 대규모 강제개종이 이루어졌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강압에 의한 것이었고 일시적인 일이었다. 다만 작센 또한 전쟁에서 큰 손실로 봤고 비두킨트는 다시 덴마크로 가서 지원군을 요청했고,
782년 여름 카롤루스는 작센 지역에서 회의를 소집했고 작센 지역의 평정을 과시했다. 하지만 바로 그해 가을, 작센족 대족장 비두킨트는 덴마크 지원군을 이끌고 돌아와 최대의 작센족 반란을 일으켰다.[8] 작센 지역에 주둔하던 프랑크군은 쥔텔에서 괴멸당했고, 카롤루스의 시종장, 근위대장마저 전사했다. 신뢰받던 작센족 용병대까지 이탈했으며 프리지아족, 벤드족까지 작센족 군대와 합류했다.
그러나 카롤루스는 이 또한 결국 진압한다. 그가 직접 지휘하는 군대가 작센족의 숲속 정착지인 베르덴 부근으로 작센족 주력군을 몰아넣어 4,500여 명에 달하는 포로를 생포했는데, 카롤루스는 4,000여 명의 포로 전원을 모두 학살했다. 이를 베르덴 학살이라 부른다. 이 충격적인 학살로 작센의 저항의지가 한풀 꺾이며 반전의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 학살은 상당히 충격적이어서 하드리아누스 교황마저 이를 '잘못된 열광의 결과'로 칭할 정도였다.[9] 어찌되었든 베르덴 학살로 작센족의 핵심 전사계급이 대거 제거당하자 작센족의 기세는 꺾였고, 비두킨트는 다시 프리기아인들과 동맹을 맺고 이들의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카롤루스의 784년 혹은 785년의 겨울철 공격은 성공적이었고, 프리기아인 부족공작과 그의 동맹들은 다시 고국으로 퇴각했다. 785년 바르덴가우에서 최종 패배한 뒤, 비두킨트는 자신과 작센족에 대한 더 이상의 신체적 상해가 없음을 보장하는 대가로, 프랑크 왕국에 항복하기로 정했다. 그와 작센족 귀족들은 아마도 아팅기에(Attigny)에서 카롤루스를 그의 대부로 하고 세례를 받았다. 이로써 비두킨트는 카롤루스와 평화 협정을 체결했고, 이후 프랑크족 군주들에 의해 귀족 계급으로 인정받았다.[10]
비두킨트가 항복하자 카롤루스는 작센 법령집을 만들어 반포하는데, 이에 따르면 34가지 비기독교적 관행은 사형, 11가지는 무거운 벌금형을 언급하고 있다. 이때 사형으로 언급된 죄로는 왕에 대한 불경한 행동, 성직자 살해, 명문가 처녀에 대한 강간, 교회 모독, 교회재산에 대한 독단적인 절도와 파괴, 반발하는 이교도인과 음모 꾸미기, 우상숭배, 마녀의 희생,[11] 인육 먹기 등이 있었다. 또한 이후에도 작센 지역에 지속적인 강제이주와 종교적 제제, 제약을 부과했다.
이후 비두킨트는 785년 이후 사망했는지 이후로는 에크베르트(Egbert), 아보(Abo) 등이 작센족의 부족 지도자로 활동했는데, 작센족의 저항은 20여년간 지속되었다. 카롤루스가 아바르 정벌을 떠난 사이 792년 작센족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은 규모가 커서 아바르에게 향했던 원정군이 귀환해야만 했다.
카롤루스의 장남 곱추 피핀의 반란이 실패한 후 795년 다시 작센족의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으나 카롤루스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되었다. 796년 다시 작센의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으나 카롤루스는 작센족을 진압하는 동안 주력군을 크로아티아로 원정보내는 여유를 보이기까지 했다.
비록 작센족의 반란은 진압되었으나, 크로아티아로 원정간 주력부대는 참패를 겪었다. 804년 작센족의 반란이 진압되고 작센 공국이 설치되면서 작센족은 프랑크 왕국에 완전히 복속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810년대를 끝으로 카롤루스에 대한 작센족의 40년에 가까운 항쟁사는 막을 내린다. <카롤루스 대제의 생애>에 따르면 작센족의 반항은 33년에 걸친 장기간이었다고 하며, 기타 서적에서도 작센족의 저항은 810년대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 후, 작센은 카를링거 왕조의 관리들에 의해 통치되었는데, 예를 들어 샤를 마르텔의 손자이자 황제의 사촌인 코르비의 왈라[12]는 811년에 덴마크의 헤밍 왕과 하일리겐 조약을 체결하여 아이더 강을 따라 제국의 북쪽 국경을 정의했다. 즉위한 공작들 중에는 왈라의 후계자이자 카롤루스 대제의 가까운 친척인 헤르츠펠트의 성 이다의 남편인 에크베르트 백작과 같은 색슨족 혈통의 귀족들이 이미 있었다. 이때 현재 홀스타인 지역이 될 지역을 데인족의 침략을 막기 위한 방어 지역으로서 데인 변경주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후 820년 코보 장로공이 작센 공작이 되었다. 작센 공작으로서 코보 장로공은 작센 내에서 강력한 권력을 향유하고 있었다. 오스나브뤼크의 주교를 임명하는 것 또한 그의 결정에 달려있었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840년 루도비쿠스 1세의 사망 후 장남인 로타리우스 1세는 서로마 제국 황제 타이틀을 앞세워 동생들을 봉신으로 삼으려고 하자 각기 야심이 있던 루트비히 2세, 샤를 2세는 로타리우스에게 반기를 들었다. 이때 작센의 귀족들은 로타리우스를 지지했지만 코보 장로공과 그의 가족들은 루트비히 2세를 지지했다.[13]
840년 12월에 그는 코비 수도원에 대해 세 개의 문서를 발행했습니다. 이 수도원은 코보의 동생 바린이 수도원장으로 주재했다. 그 안에서 그는 수도원장으로서 자유선거, 면제, 왕실의 보호, 그리고 그 광범위한 소유물을 확인했다. 코보, 바린, 둘의 처남인 바르도는 841년 4월 볼름스 근처 라인 강에서 루트비히 2세와 합류한 후, 함께 싸웠다.
거기서 그들은 로타리우스와 그의 가장 중요한 동맹자인 메스의 아달베르트가 이끄는 군대에 대해 대패를 당했다. 거의 동시에, 다시 작센의 독립을 목표로 하는 반란이 발발했다. 841년 5월 13일, 코보는 리스 전투에서 루드비히 2세 측으로 다시 싸웠습니다. 승리 후 그는 군대와 함께 라인 강을 건너 프랑스 서부로 이동했고, 841년 6월 25일 폰트노와의 전투에서 로타리우스 1세의 군대를 격파했다. 이에 로타리우스는 작센의 독립 세력인 스텔링가에게 원조를 댓가로 옛 관습으로 회귀하는 것을 용인한다.
스텔링가의 반란이 작센 전역을 점령한 뒤 로타리우스 1세는 협상을 제기했다. 842년 여름 코보는 황후 주디스의 동생 콘라트와 네스트리아의 노중 아달하르트와 함께 프랭크 제국의 분할에 대해 로타리우스 1세와 협상하게 되었다.
로타리우스는 코보를 정중하게 맞이했지만 분할안은 거부했다. 그 후 사절들은 출발하는 대신 샤를의 부할분을 부담하고 로타리우스 1세에 양보한다는 독자적인 제안을 했다. 협상인들은 로타리우스 1세에 대해 새롭게 협상된 분할안을 루트비히와 샤를 2세에 구속력을 갖게 함으로써 형제들이 안심하고 자신의 제안을 승인할 것을 보증하기까지 이르렀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는지, 기존의 권한을 넘어 행동했는지, 아니면 독자적인 권한에 근거해 행동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사절의 귀환 후 루트비히와 샤를 두 형제들은 코보와 그 동료들이 협상한 분할계획을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이며, 842년 6월 16일, 반목하고 있던 형제가 소느강의 섬에서 일시적인 평화를 맺었다.
843년 프랑스 북부의 베르됭에서 채결된 베르됭 조약으로 프랑크 제국을 셋 으 로 분할했고, 이중 동프랑크 왕국은 루트비히 2세가 통치하기로 결정, 작센 또한 동프랑크 왕국으로 귀속되었다.
이후 845년 코보 장로공은 루트비히의 명령으로 덴마크의 왕 호리크 1세에게 바이킹의 습격을 중단시킬 것을 요구하기 위해 그의 궁정으로 갔다. 하지만 베르티니아니 연대기(Annales Bertiniani)에 따르면 코보 1세는 외교가 아닌 무력 시위로 600척의 함대를 앞세워 호리크 1세를 압박한 것으로 나오고 있다.
그러나 851년경에 작성된 Translatio sancti Germani Parisiensis anno 846의 보고서에는 코보가 루트비히 2세의 특사로서 호리크 1세의 궁정에 있었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협상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알려진 바는 없으나 성공적인 것으로 보인다.
845년 가을 호리크1세의 사절들이 파더보른에 위치한 루트비히의 궁정으로 와서 평화 조약 체결을 제안하고 포로들을 석방하고 포획한 보물을 가능한 한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루트비히 2세가 죽을 때까지, 동부 프랑크 왕국에 대한 노르만인의 공격은 더 이상 없었다.
이후 코보 장로공이 어느 시점에서 사망했는지에 대한 것은 더 이상 기록된 것이 없으나 850년대 동부 작센 지방에 거주하던 작센 족을 지휘하고 있던 리우돌프가 작센 공작으로 임명되었다. 프랑크 왕국과 독일의 사가들은 그를 동부 작센의 공작(dux Orientalis Saxonum)이라 칭했다. 850년 무렵 그는 동부 작센의 공작 외에도 이스트팔리아(Eastphalia)의 백작 직에 임명되었다. 그는 오스트팔렌(Ostfalen)에서 슬라브족과의 국경지대 일대에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하르츠(Harz) 서쪽의 산기슭과 라이네 강(Leine River) 일대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845년 혹은 846년의 어느 시점에 리우돌프와 그의 아내는 이탈리아의 로마로 성지 순례 여행을 다녀왔으며, 이때 교황 세르지오 2세의 승인을 얻어 자신의 영지에 성당을 짓기 시작, 852년]경 교황 성 아나스타시우스와 성자들에게 헌정된 성당을 건립하였다. 자신의 영지인 간더스하임 내 브룬스하우엔(Brunshausen)의 자신의 영지에 수도원을 설립하고 힐데스하임의 주교 알트프리드에게 봉헌하였다. 후일 리우돌프의 딸 중 한 명인 하트문모다(Hathumoda)는 877년 브룬스하우엔 수녀원의 수녀원장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브룬스하우엔 수도원은 919년 그의 손자 하인리히 1세가 제국의 공식 수도원(Imperial monastery)으로 격상시켰다.
그는 동프랑크 왕국의 군사 사령관이자 공작(dux)으로도 활동했고, 독일인 루트비히를 따라 동프랑크 왕국 동부에 출몰하는 노르만 바이킹의 침략, 슬라브계 민족 폴라비안의 침략과 대 모라비아인들과 교전, 격퇴하였다. 그밖에도 동부 프랑크를 침략한 슬라브 족을 여러 번 격퇴하였다.
그는 독일인 루트비히의 통치기간 중 동프랑크 왕국의 유력 귀족으로 올라섰다. 또한, 독일인 루트비히는 제국의 정권을 잡는데 치중하는 동안, 리우돌프는 자신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지위 외에도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작센의 귀족들 사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여, 나중에는 작센 귀족들 사이에서 주도권을 획득하였다. 또한 튀링겐 공작이기도 한 독일인 루트비히의 아들 청년왕 루트비히와 자신의 딸 리우트가르드의 결혼으로 작센 부족 귀족 내에 그의 영향력은 확실해졌다. 그는 간혹 작센의 부족공작들 중의 한명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리우돌프는 864년 혹은 866년 3월 12일에 사망하였고, 이후 작센 공작위는 그의 장남인 브룬이 승계받는다.
그러나 작센 공작으로서의 브룬의 치적은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865년 루트비히 2세는 권력 문제로 세 아들들과 대립하게 되었고, 곧 4부자간의 내전이 발생했다.결국 루트비히 2세는 아들과 협상을 통해 내전을 끝내려고 했다. 루트비히 2세는 세 아들에게 각각 자신이 차지할 땅을 지목하도록 강요했는데, 카를만은 바이에른을, 청년 루트비히는 작센과 프랑켄, 튀링겐을, 뚱보 카를은 알레만니아와 슈바벤, 라이티아(Raetia)[14]를 지목했다. 그리고 프랑크푸르트 지역은 삼형제가 공유하기로 했다. 몇달 후 청년 루트비히는 아버지 독일인 루트비히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는데, 반란을 부추긴 것은 소 루트비히의 아내 리우트가르드였다.
865년 10월 서프랑크 왕국의 카를 2세는 쾰른에서 소 루트비히와 독일인 루트비히 부자의 화해를 주선하였다. 870년 로타르 2세의 영지의 일부로 서프랑크 왕국에 넘어갔던 마스트리흐트 일대를 빼앗아 점령하였다. 871년과 873년 청년 루트비히는 반란을 일으켜 부왕과의 사이에 불화가 증가하지만, 그 때마다 그는 기적적으로 부왕과 화해하였다. 872년 루트비히는 자신의 다른 두 형제와 함께 유산으로 정해진 지역의 상속을 재확인받았다. 때문에 브룬은 매부인 소 루트비히의 권력을 앞지를 수 없었고, 그가 죽기 전까지 작센 내에서 2인자로 있어야 했다.
876년 8월 28일 독일인 루트비히의 사후, 청년 루트비히는 그해 11월의 영토 분할에서 그는 작센과 튀링겐, 동 로트링겐을 상속받았고, 메르센 조약으로 추가된 영토도 추가적으로 상속받았으며, 동프랑크의 전체의 국왕(Rex Francorum) 칭호도 물려받았다. 그밖에 독일인 루트비히가 870년 메르센 조약으로 획득한 동부 로트링겐은 이때 처음으로 넘겨받았다. 또한 청년 루트비히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유능한 참모인 마인츠 대주교 리우트베르트(889년 사망)를 물려받았다. 즉위 초반부터 루트비히는 바이킹의 잦은 침입에 적극적으로 맞섰으며 자국 내 귀족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비록 그가 형식적으로 동프랑크 전체의 국왕 칭호를 물려받았지만 형제들은 각자 동프랑크 왕국 내 개인 영지를 독립적으로 통치하였고, 전쟁에서도 서로 협력하지는 않았다. 그는 주로 라인란트에 머물렀으며 자신의 영지 작센이나 동부 변경으로 가는 것은 가급적이면 피했다.
청년 루트비히는 왕이 되자마자 곧 삼촌 샤를 2세의 위협을 받았다. 대머리 카를은 동부 로타링기아를 합병하려 했고, 독일인 루트비히 2세의 사후 876년 가을, 서프랑크의 대머리 카를 2세가 동프랑크로 쳐들어왔다. 동 로트링겐에서 대머리 카를의 군대와 교전하여 물리친 뒤 청년 루트비히와 대머리 카를은 876년 10월 안더나흐에서 맞붙었다. 877년 10월 8일 안더나흐에서 서프랑크 군을 최종적으로 격퇴하였다. 전략과 수적으로 모두 우월했던 동프랑크의 군이었으나 루트비히는 군사들에게 모두 흰 옷을 입혀 망령 군대처럼 보이게 했고, 밤에 이들을 본 서프랑크의 군사들은 귀신으로 보고 놀라서 달아났다. 병사들은 우왕좌왕 도주하거나 실신해서 쓰러졌고 카를 2세는 당황해하며 되돌아갔다. 루트비히의 기지로 훨씬 많은 수의 서프랑크군을 작은 부대 몇 개만 움직여서 물리칠 수 있었다.
대머리 카를은 자신의 형 루트비히가 살아 있을 때에도 황제 직위를 욕심내어 세력을 이탈리아까지 확대했고, 형 독일인 루트비히가 프랑크푸르트에서 죽자 라인강까지 진출하려 했다. 독일인 루트비히의 둘째 아들인 청년 루트비히가 작은 아버지인 카를과 담판하여 프랑켄과 작센에서 군대 소집권을 주기로 하고 전쟁을 종결했다. 카를은 전쟁 노획물과 많은 선물을 받아 서프랑크로 귀환했다.
877년 청년 루트비히는 교회에 일정 부분 재산을 기증했는데, 이는 왕비인 리우트가르트의 명의로 기부되었다. 877년 말 루트비히는 형 카를로만 3세, 동생 카를 3세와 함께 동부 로타링기아를 어떻게 분할하는가를 논의하기 위해 모였다. 그러나 뇌졸중 등으로 병세가 위중했던 카를로만이 로타링기아를 포기하자 로타링기아는 루트비히와 카를이 분할하기로 했으며, 878년 10월 알자스에서 루트비히는 카를과 로타링기아를 분할했다.
877년 10월 삼촌 대머리왕 카를이 죽자, 그를 계승한 사촌 루이 2세와 로타링기아(로렌)에서 만나, 로트링겐의 분할을 유지하는 데 동의했는데 이것은 그들의 아버지인 카를 2세 대머리왕과 루트비히 게르만인이 870년 메르센에서 로렌을 분할한 조약을 재확인하는 것이었다. 바로 리에 주의 푀렌에서 포에렌 조약을 맺어 메르센 조약으로 분할된 로타링기아의 영토를 서로 유지하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푀렌 조약이 발효되려는 참에 루이 2세가 사망했다. 요슬랭(Joscelin) 대주교가 이끄는 서프랑크의 일부 귀족이 그를 서프랑크 왕으로 추대했고, 바로 초청하였다. 또 아내 리우트가르트의 부추김까지 더해져 루트비히는 서프랑크를 침공했다. 로타링기아를 손에 넣은 루트비히 3세는 베르덩 전투에서 승리하여 메츠와 베르덩, Scheldt을 수중에 넣었지만, 나중에 내부 반란을 수습하고 출정한 새로운 서프랑크의 왕 루이 3세와 샤를로망 형제에게 로타링기아에서 격퇴당했다.
879년 서프랑크의 루트비히가 죽고 그의 아들 루트비히 3세와 카를로만이 서프랑크의 공동 국왕이 되자, 청년 루트비히는 870년의 메르센 조약은 불법이라며 계속 로트링겐의 영유권을 주장하였다. 노르망디와 브르타뉴 해안가로 쳐들어오는 바이킹 해적을 상대하던 서프랑크인 루이 3세는 자신의 동생 샤를로망 3세와 함께 로트링겐의 영유권을 주장하던 위그를 추방했지만 계속 바이킹을 상대해야 했고, 청년 루트비히와의 전쟁을 피하려 했다. 결국 루이3세와 샤를로망 형제는 청년 루트비히와의 리베몽에서 영토 조약을 체결하기로 합의하고, 로트링겐을 사실상 동프랑크에 복속시켰다. 879년 겨울, 형 바이에른의 카를로만이 뇌졸중으로 쓰러지자 그는 형에게서 슈바벤과 바이에른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루트비히는 879년부터 이미 바이에른의 실질적 통치자 노릇을 하고 있던, 형 카를로만 3세의 서자 아르눌프에게 바이에른 공작 자격으로 바이에른을 직접 통치하게 했다.
879년부터 다시 바이킹의 침략이 프랑크 왕국 내 각국에서 계속됐고 일부는 내륙 깊숙히 쳐들어와 공격, 약탈을 감행하였다. 이때 브룬은 다시 역사의 기록에 등장하게 되었다. 880년 2월 2일, 브리튼 섬을 침공하다가 알프레드 대왕에게 패배한 노르웨이 바이킹들이 본국으로 돌아가기 커녕 전열을 정비해 작센으로 침공하자 브룬은 작센 공작령의 백작들과 주교들과 함께 뤼네부르크 히스 전투에서 이들과 싸웠으나 패배했고, 후퇴 도중에 강에 빠져 익사하고 만다. 이후 바이킹들은 얼마 안가 티에몬 전투에서 루트비히 3세에 의해 격퇴되었지만 이 전쟁에서 서자 위그가 스켈트강변(river Scheldt)에서 전사했다.
브룬에게 처자식에 대한 언급이 없었기에 그의 아래로 동생 리우돌프 2세가 있었으나 그 역시 다른 전투에서 전사했기에 다시 그 아래에 있던 동생인 오토가 작센 공작위를 승계받는다. 작센 공작이 되기 전 오토는 독일인 루트비히의 명으로 877년 1월 26일 남부 튀링겐의 그라프로 발령받았고, 왕의 명으로 간데르스하임 수도원을 건립하였다. 그가 간데르스하임 수도원을 설립한 지역은 그의 이름을 따서 Otto county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그는 헤르스펠트 수도원의 평신도 원장으로도 재직하였다.
880년 2월 루트비히 3세는 서프랑크 루이 3세, 샤를로망 2세 형제와 함께 영토 문제를 협상, 리베몽 조약을 체결했다. 청년 루트비히는 자신의 동생 뚱보 카를 3세 등과 함께 참석했다. 이때 청년 루트비히가 점령한 곳을 국경지대로 하기로 결정, 그가 점령한 지역을 서프랑크와 동프랑크간의 국경으로 확정하여 동프랑크는 로타링기아를 흡수했다.
한편 동생 뚱보 카를이 로타링기아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함으로써 그는 로타링기아 전역을 차지할 수 있었다. 리베몽 조약으로 결정된 독일-프랑스간 영토, 국경은 14세기까지 유지되었다. 자신의 영지 내에서 청년 루트비히는 아버지와 반대로, 왕실의 이익을 위해 귀족들의 권한을 감소시켰다. 그는 처가인 작센의 리우돌핑 가문을 포함해 왕가의 힘을 왕을 중심으로 강하게 결속시켰다. 형으로부터 물려받은 바이에른에도 2번밖에 방문하지 않았다. 한편 형 카를만이 사망하자, 청년 루트비히는 880년 내내 형 카를만의 서자이자 자신의 조카인 아르눌프를 제거하려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문제는 그의 자식들은 어려서 사고로 죽거나 바이킹과의 전쟁에서.전사하면서 사실상 없던 상태였다. 후계자가 없던 청년 루트비히는 실의에 빠졌다. 880년 뇌졸중과 중풍 등으로 고생하던 친형 바이에른의 국왕 카를만이 사망하자, 청년 루트비히는 카를만의 영지 중 바이에른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881년 겨울, 청년 루트비히는 갑자기 열병으로 쓰러져 882년 1월 20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사망했다.
루트비히 3세의 사망으로 동프랑크 왕국은 카를 3세의 아래에 통합되었고, 오토는 명실상부한 작센 공작령의 일인자가 되었다. 이후 오토는 897년 1월 28일에는 아이헤스펠텐(Eichesfelden)에서 수도원에 일부 기증하기도 했다. 888년 아이헤스펠텐 수도원의 원장, 908년 쇠팅가우의 평신도 수도원 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의 여동생 리트가르트는 독일인 루트비히의 아들 소루트비히와 결혼하면서 그는 대공으로 승진하였다. 876년 루트비히 2세가 죽고 동프랑크 왕국이 삼분되면서 왕국의 중북부 지방에 해당되는 영지가 소루트비히에게 상속되었다. 그러나 소 루트비히는 6년만에 죽고 그의 누이 리트가르트는 재혼하였다.
그는 독일인 루트비히와 그의 아들 청년왕 루트비히, 케른텐의 아르눌프 등 세 임금을 섬겼다. 주요 임무는 작센 지역을 다스리는 동시에 동부 지역의 슬라브족을 방어하는 것이었다. 독일인 루트비히의 사후 동프랑크 왕국은 사실상의 혼란에 빠졌고, 그는 바이킹 족과 헝가리인, 밴드 족의 잇단 침입에 지원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자체적으로 격퇴해야 했다. 884년에는 비만왕 카를 3세를 따라 밀라노를 다녀왔다.
작센 지역의 실력자였던 그는 일부 자치권을 허락받았다. 그는 형식상으로 루트비히 2세나 그의 손자 아르눌프의 대리인이었지만 작센 지역에서 그는 실질적인 왕이었다. 또한 작센 영토 근처 달레민츠까지 이주한 슬라브족은 그에게 복속하였다. 황제 아르눌프는 동부 지역의 유력한 귀족이었던 그와 제휴를 원했고, 그의 딸 오다는 황제 아르눌프의 서자 로타링기아의 왕 츠벤티볼트와 결혼하였다.
894년 황제 아르눌프의 이탈리아 밀라노 원정에 동행하였고, 현지에서 밀라노의 마트로그라프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황제 아르눌프가 퇴각할 때 함께 동프랑크로 돌아왔다. 899년 아르눌프는 죽으면서 그를 유아왕 루트비히의 후견자, 보호인으로 지명했다. 그러나 오토는 유아왕 루트비히와는 자주 접촉하지 않았다.
900년 초 그는 동프랑크 왕국의 패권을 놓고 프랑켄 공작 콘라트 2세와 경쟁하였다. 911년 유아왕 루트비히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그는 일부 귀족들에 의해 동프랑크 왕국의 국왕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그는 고령을 이유로 사양하고 대신 프랑켄 공작 콘라트 2세를 대신 천거하였다. 콘라트가 즉위한 이듬해인 912년 11월 30일 오토가 죽자 아들인 하인리히 1세가 영지인 작센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주변의 프랑켄 공작령과 수시로 충돌하였다. 그는 자신의 영지인 작센의 도시 정비와 영향력을 강화하는데 치중하였다. 아버지 오토가 소유하던 클로스터 평신도 수도원의 원장직을 이으려 했지만 클로스터 수도원장 직은 913년 2월 8일에 콘라트 1세가 가져갔다.
그러나 콘라트 1세는 재위기간 내내 귀족들의 반란에 시달려야 했다. 콘라트는 결국 917년 베르크톨드 등을 처형했고, 슈바벤의 부르크하르트는 형식적으로 복종하는 척 했다. 916년부터는 바이에른의 아르눌프와 자주 충돌했는데 918년 바이에른과의 전투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고 콘라트는 죽게 된다. 죽기 직전에야 콘라트는 자신에게 아들이 없다는 점 등 취약점을 근거로 하인리히와 화해하고 그를 후계자로 지명한다.
918년 12월 23일 프랑켄 공작이자 동프랑크의 왕 콘라트 1세가 사망하였다. 하인리히는 912년~915년 콘라트 1세와 튀링겐 땅을 차지하는 일을 놓고 경쟁하다가 두 번 전쟁을 하였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는 콘라트 1세와 화해하게 된다. 한편 아들이 없던 콘라트 1세는 자신의 동생 대신 하인리히를 차기 국왕으로 내정하고 사망했다. 작센 족 역사가 비두킨트에 의하면 콘라트는 죽음을 앞두고 왕의 상징인 휘장을 포기했다고 한다. 그리고 동생 에버하르트에게 하인리히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이행할 것을 다짐받았다고 한다.
그는 프랑크 족 출신이 아닌 첫번째 군주였다. 그가 즉위함으로써 동프랑크의 군주는 프랑크족에서 작센 족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에 따라 후대의 학자들은 프랑크 왕국이 아닌 독일 왕국의 출발점을 하인리히 1세로부터 찾게 된다.
어째든 작센은 오토 왕가의 발흥지인 만큼 960년 하인리히-오토에 걸쳐 오토 왕가가 직접 통치했다. 936년 하인리히 1세가 죽자 그는 독일왕 자리를 물려받은 것과 함께 작센 공작위 또한 오토 2세로서 물려받는다. 오토 1세는 하지만 오토 1세는 독일 왕이 되기 전부터 독일 왕국의 영토를 크게 확장했기에 작센을 신경쓰기에도 여력이 없던 상태였다.
때문에 오토 1세는 오늘날의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지역에 정착한 서슬라브족인 레다리안의 원정에 참여한 적이 있던 빌롱가의 헤르만을 작센의 군 사령관(princeps militiae)으로 임명함과 동시에 엘베 강 북쪽으로 작센족의 변경주을 설치를 허락했다. 그의 빌룽 가문의 변경주는 발트해 연안을 따라 서쪽의 라임 작센 (Limes Saxoniae)에서 동쪽의 페네 강 (Peene River)까지 뻗어 있으며, 이는 나중에 메클렌부르크 (Mecklenburg) 지역과 대략 일치했다. 문제는 헤르만의 형인 비어만 1세를 비롯한 작센의 귀족들이 동의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이로 인해 오토 1세의 친족들을 비롯한 작센의 귀족들은 오토 1세의 인선에 불만을 품은 끝에 결국 937년 메르세부르크 백작령의 소유권을 주장한 오토 1세의 이복형 탕그마르의 반란에 동참했다. 하지만 반란은 1년만에 진압되었고, 결국 반란에 가담하다가 살아남은 작센의 귀족들은 오토 1세의 인선을 인정해야 했다.
944년 형인 비어만 1세가 사망하자 그는 뤼네부르크 (Lüneburg) 마을 주변의 작센바르덴가우 (Saxon Bardengau)의 백작이 되어 그 도시에 성 미카엘 수도원을 설립했다. 그는 조카인 비어만 2세와 에그베르트가 제기한 상속 주장을 무시했습니다.
953년 두 사람 모두 오토 왕의 장남인 슈바벤 공작 리우돌프가 일으킨 전국적인 반란에 가담했으나 헝가리군의 대규모 침공으로 무너졌다. 이 심각한 위기 동안, 작센 공작이기도 한 왕은 그가 없는 동안 작센 땅에서 그의 권위를 점점 더 많이 헤르만에게 맡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헤르만은 왕실 문서에서 공작(dux)로 지명된 적이 없었다. 대신 그는 군사 지도자, 백작 및 후작으로 지칭되었다.
그의 지위는 962년 2월 2일 오토 왕이 교황 요한 12세에 의해 로마에서 신성 로마 황제로 즉위하면서 확고해졌다. 헤르만은 972년 마그데부르크의 아달베르트 대주교로부터 왕처럼 대접을 받았는데, 이는 오토 대제가 경계하기도 했지만 973년 헤르만은 퀘들린 부르크에서 사망했고, 아들인 베른하르트 1세가 작센의 통치권을 물려받게 되었다.
973년에 아버지 헤르만이 사망한 당시 베른하르트는 쿠베트린부르크의 오토 대제의 궁정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듬해 가을, 베른하르트 1세는 하인리히 폰 슈타데와 나란히 오토 2세의 지휘 아래 덴마크의 통치자 하랄 브라우잔에 대한 원정으로 북진한 제국군의 작센군 분단의 선두에 서 있었다.
986년의 부활제에서는, 오토 3세의 시대에 쿠베트린부르크의 법정에서 원수의 직을 맡았다. 991년 여름, 그는 오토 3세의 폴란드군의 파견으로 폴란드 공 미에슈코 1세와 협동해 루티첸에게 빼앗긴 브란덴부르크를 되찾는 승리를 거두었다. 태후 테오파누가 죽은 후 992년 제국 회의에서 오토 3세의 새로운 후견을 정할 자리에서 참석하는 등 독일 왕국 내에서 가장 강력한 제후로 부상했고, 이시기서부터 공작을 침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2.5. 바이에른 공국(현 바이에른 남부와 현 오스트리아령 오버외스터라이히 대부분 지역)
바이에른은 본래 고대 로마의 라이타이 속주의 일부였다. 사실상 버려진 지역으로 이후 이 지역에 고트족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고, 476년 서로마 제국이 붕괴된 이후 게르만족의 대이동의 물결 속에 488~520년 동쪽과 북쪽으로부터 게르만족의 일파인 바이에른족(바바리아족)이 들어와 원거주민인 켈트족, 로마인들과 뒤섞여 정착했다. 이후 바이에른족은 지명의 어원이 되었다.바이에른 공국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548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최초의 공작은 가리발드 1세 혹은 발데르아다로 랭스 프랑크의 왕 테우데발트에 의해 바이에른 공작으로 임명했다.[15]
동쪽 국경에서는 568년 서게르만 랑고바르드족이 판노니아 분지에서 이탈리아 북부로 이주하고 아바르족이 차지하면서 변화가 일어났고, 거의 같은 시기에 보헤미아 숲 너머의 인접 영토에 서슬라브계 체코인이 정착했다. 이때 프랑크 왕국의 왕권은 561년 2차 분할로 인해 왕국이 분열되면서 각 왕국의 왕들이 자신들이 프랑크의 단독왕이 되기 위해 분쟁을 벌이고 있던 상태였다.
이때 바이에른은 아우스트라시아의 테우데발트의 봉신국으로 보여지고 있다. 가리발드는 이탈리아를 침공중이었던 랑고바르트와 동맹을 맺는 기회가 생겼는데, 가리발드는 트렌트의 랑고바르드 왕국의 공작 에오인과 딸을 결혼시켰는데, 이때 프랑크족으로부터 독립할 생각인지 프랑크 왕국으로 부터 독립을 시도하려고 하다가 575년에 아우스트라시아 프랑크 왕국의 공격을 받았는데, 랑고바르트계 트렌트 공국과의 동맹은 프랑크족의 공격으로부터 자신과 바이에른을 독립을 유지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584년 프랑크족이 다시 랑고바르드족을 위협하자 새로운 랑고바르드족 왕 아우타리는 프랑크족과 합의에 이르지 못하자 바이에른과 동맹을 맺는다. 분명히, 가리발트와 랑고바르드족의 동맹은 프랑크족이 589년에 그에 대한 군사 행동을 취하도록 이끌었고, 적어도 그 해에 아이들 테오델린데와 군도알드는 이탈리아로 도망쳐 랑고바르드족으로 갔다. 가리발드의 딸 테오델린데는 랑고바르드족 왕 아우타리와 결혼했다. 가리발트의 아들 군도알드는 아스티 공작이 되었고, 아리페르트 1세의 아버지가 되었다. 이로 인해 롬바르드 왕과 바이에른 공작, 아스티와 트렌토 공작 사이에 반 프랑크 동맹이 형성되었다. 이듬해인 590년, 랑고바르드 왕국에 대한 프랑크족의 공격은 프랑크족의 대패로 끝났다.
그러나 그 후 591년에 가리발드의 사위인 아우타리가 누군가에 의해 암살되고, 랑고바르드 왕국에 망명 중인 튀링겐인들의 지도자 아길루프 테오도린다 왕비와 재혼해 랑고바르드 국왕이 되면서 프랑크족과 랑고바르드족 사이에 화의가 이루어졌는데, 이와중에 가리발드는 아우스트라시아-부르군트 프랑크 왕국의 왕 킬데베르 2세에 의해 폐위되었는지 아니면 죽었는지 몰라도 593년에 아들인 타실로 1세가 바이에른의 통치자가 되었는데, 591년 킬데베르 2세에 의해 바이에른의 왕으로 임명되었다는 파울 디아코누스(Paul Diaconus)의 기록을 볼 때 킬데베르 2세에 의해 폐위된 것이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취임 직후인 590년대 중반에 타실로 1세는 알스 산맥 일대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슬라브족에 대항하는 원정을 이끌었고, 파울 디아코누스의 기록에서 슬라브족들에게서 승리해 막대한 전리품을 획득해 바이에른으로 귀환했다. 이후 595년경에 슬라브족의 땅을 다시 침공했지만 이 원정은 아바르족이 슬라브족을 도우러 왔기 때문에 패배로 끝났고, 타실로 1세는 약 2000명의 전사를 잃었다.
다만 패배 이후에도 타실로 1세는 610년 동안 바이에른을 통치했고, 그자 죽자 아들인 가리발드 2세가 바이에른 공작위를 승계했는데, 별다른 기록은 없으나 630년까지 바이에른을 통치하며 아버지처럼 바이에른으로 침공하는 슬라브족과 대립했다는 기록만 남아 있다.
이후 625년 사망하자 아들인 테오도 1세가 바이에른 공작위를 승계했다. 테오도 1세의 기록 또한 별다른 치적이 없으나 테오도는 프리울리 공작 기술프 2세의 딸 글라스노와 결혼한 것을 볼 때 랑고바르드족과 우호적인 관계로 보여지고 있다. 649년 성 에메람이 바이에른으로 와 쇠락한 기독교 교세를 다시 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652년 에메람은 테오도 1세의 아들인 랑드프리트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되었는데, 어느 연대기의 내용에 따르면 그가 레겐스부르크에 도착한 지 약 3년 후, 공작의 딸인 우타가 어느 남자의 사생아를 잉태했음을 고백하자 에메람은 공작의 처벌로부터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공작의 딸에게 자신을 아버지로 지명하라고 조언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실수에 대해 교황에게 답변하고 돌아온 후 공작에게 진정한 사실을 위해 로마로 순례를 떠났다. 공작의 딸은 에메람이 떠난 직후 아버지에게 합의한 이야기를 공개했을 때 그 자리에 란드프리트가 있었던 것이 화근으로 란트프리트는 누이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에메람을 추적해 652년 9월 22일, 란트페르트와 그의 군대는 뮌헨 남동쪽의 클라인헬퍼도르프(Kleinhelferdorf) 마을에서 에메람을 붙잡은 후 그를 사다리에 묶고 그의 신체 부위를 조금씩 잘라내어 결국 참수시켰습니다. 테오도 공작은 진실을 알게 된 후 에메람의 시신을 레겐스부르크로 이장했다.
680년 테오도 1세가 죽고, 아들인 란드프리트가 바이에른 공작위를 승계했지만 그가 보였던 잔혹성 때문인지 결국 1년도 안되어 공작위에서 물려나고 테오도 2세가 바이에른 공작이 되었다. 테오도 2세는 현재의 레게슨부르크인 라티스보나를 공식 수도로 삼은 후 아우스트라시아의 프랑크 귀족인 폴차이드와 결혼하여 아우스트라시아의 귀족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다.
이후 랑고바르드 왕국의 왕위 분쟁에 개입해 아리페르트 2세에 의해 처형된 랑고바르드 국왕 리우페르트의 후견인이었던 안스프란트 안스프란트의 막내아들 리우프란트가 바이에른으로 망명하자 이들을 받아들였고, 712년 안스프란트를 지원해 군대를 빌려주어 아리페르트 2세를 몰아내게끔 도와줬다. 그밖에도 아바르족으로부터 자신의 공국을 훌륭하게 방어했다.
테오도는 성 보니파시오, 성 코르비니아누스, 성 루퍼트 등과 같은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수도자들을 후원해 바이에른 공작령을 기독교화 시켰다. 이는 교황과의 긴밀한 협력으로 프랑크 왕국에 대한 독립성 향상을 목적이 강했다. 716년 테오도는 바이에른 공작으로 처음으로 로마를 방문하여 교황 그레고리오 2세와 회담했고, 레겐스부르크를 비롯해 잘츠부르크, 프라이징, 파사우 등에 주교구를 설치하기로 합의를 본다.
그러나 바이에른으로 돌아온 후 테오도는 얼마 안가 사망했다. 테오도 2세에게 테오드베르트, 테오발드, 타실로 2세, 그리모알드 등 네 명의 아들들이 있었다. 테오도 2세는 죽기 1년 전 네 아들들에게 바이에른을 분할했다.
테오드베르트는 찰츠부르크 일대를 물려받았는데, 702년부터 잘츠부르크 일대를 통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있으며, 잘츠부르크 주교 루퍼트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테오발트의 경우 기록상 분배된 지역에 대해 불명이나 튀링겐과의 전쟁의 기록을 볼 때 레겐스부르크로 추정된다. 타실로의 경우 파사우 일대를 통치했으며, 그리모알드의 경우 프라이징 일대를 통치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네 형제는 바이에른의 단독 공작위를 두고 서로 대립하게 되었고, 과정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719년 그리모알드가 승자로서 바이에른의 공작이 되었다. 테우데발트의 아들인 위그베르트는 프랑크 왕국으로 망명했고, 이때 그리모알드는 죽은 테오발트의 미망인인 필리트루드를 자신의 아내로 삼았다.
724년 성 코르비니아누스는 그리모알드의 행위에 대해 비판했다. 그리모알드는 코르비니아누스와 척을 지지 않기 위해 노력했으나 필리트루드는 사람을 시켜 그리모알드 모르게 코르비니아누스를 암살을 시도하나다. 암살 실패와 함께 필리트루드가 암살 지시를 내렸다는 것이 발각되었고, 그리모알드와 필리트루드를 파문 당하고 만다. 725년, 프랑크 왕국의 궁재 샤를 마르텔은 프랑크 왕국으로 망명 중인 위그베르트를 앞세워 바이에른으로 진군하였고, 프랑크 군대와의 전투에서 그리모알드는 전사한다.
위그베르트는 아버지의 복수를 했지만 대신 프랑크 왕국의 테우데리크 4세[16]의 봉신이 되어야 했다. 위그베르트는 바이에른을 기독교화하기 위해 보니파시오를 임명하고 선교사 코르비니안을 프라이징으로 다시 데려옴으로써 독립적인 바이에른 교회를 창설하려는 전임자의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위그베르트는 로타치가우 지역의 기부를 통해 잘츠부르크의 성 베드로 수도원에 경제 및 장원 업무를 맡겼고, 로탈뮌스터에 귀족 수도원을 설립하는 것을 지원했다.
736년 위그베르트가 후사도 없이 죽자 알레마니 공작 고트프리드의 아들로 테오도 1세의 외손자인 오딜로가 바이에른 공작위를 계승했다. 오딜로는 739년에 테오도 2세가 죽으면서 무산된 바이에른 내의 교구 분할을 시행했다. 레겐스부르크, 프라이징, 파사우, 잘츠부르크 교구는 교회법에 따라 설립되었으며 그 경계가 결정되었다.
프랑크 왕국의 궁재 샤를 마르텔의 궁정에 동안 오딜로는 샤를 마르텔의 딸인 힐트루드와 관계를 가졌다. 샤를 마르텔이 741년에 죽자 힐트루드는 연인인 오딜로가 있는 바이에른으로 도주해 정식으로 오딜로와 혼한다. 그러나 그녀의 남자 형제들인 카를로만과 피피누스 3세는 이를 신부 약탈로 보고 743년 군대를 끌고와 바이에른을 압박했다.
오딜로는 에파흐 암 레흐 전투에서 패하고 도망친 후 744년 평화 조약을 통해 바이에른에 대한 프랑크족의 종주권을 확인해야 했고, 공국을 유지했다. 오딜로는 748년에 사망했다. 그의 죽음 이후, 처남 중 한명이자 샤를 마르텔의 두 번째 처에서 난 자식이지만 이복형제들에게 친자로 인정받지 못했던 그리포는 자신의 자립을 위해 그는 스위저 백작과 함께 이복누이와 그의 어린 아들을 유폐시키고 바이에른 공작을 자처했다.
하지만 749년 힐트루드가 유폐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피피누스 3세는 군대를 몰고와 바이에른을 공격했고, 그리포는 바이에른 공작위를 버리고 남쪽의 랑고바르드 왕국으로 도망쳤고, 타실로 3세는 무사히 공작위를 되찾았고, 어머니의 힐트루드의 섭정을 받게 되었다.
757년, 프랑크 왕실 연대기에 따르면, 타실로는 콩피에뉴에서 열린 집회에서 피피누스 3세의 봉신이자 바이에른의 영주가 되었다. 거기서 그는 피피누스에게 수많은 맹세를 한 것으로 전해지며, 훨씬 후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보고에 따르면 그와 그의 아들 카롤루스와 카를로만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760년경, 타실로는 랑고바르드 왕 데시데리우스의 딸 류트페르가와 결혼하여 랑고바르드-바이에른 연고의 전통을 이어갔다. 그는 장인을 방문하고 교황과 정치적 관계를 맺기 위해 이탈리아로 여러 차례 여행했다. 타실로는 768년 외사촌인 카를루스과 카를로만이 프랑크 왕국에서 권력을 잡았을 때 왕의 대리자로 여겨질 정도로 명성을 얻었다고 한다.
같은해 그는 바이에른 남부의 인 강에 가스 수도원을 설립했다. 이듬해인 769년에 타실로는 볼차노에서 이니첸 수도원의 창립 헌장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는 랑고바르드족의 확장으로부터 교황을 보호할 수 없었으며, 이는 나중에 카롤루스와의 갈등 동안 로마가 그를 지원하지 않은 이유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타실로가 왕의 주권자로서 행동하기는 했지만 스스로 왕이 될 의도는 없었다는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실로는 크렘스뮌스터 수도원을 설립하는 것과 같은 왕의 의무를 수행했다. 772년 타실로는 아들 테오도를 이탈리아로 보내 외할아버지 데시데리우스의 궁정을 방문하고 5월 19일 로마에서 교황 하드리아노 1세에게 세례를 받았다. 773년, 타실로는 교황에게 사절을 보냈지만, 공작이 색슨족, 웬드족, 아바르족과 동맹을 맺은 것을 의심한 카롤루스에 의해 막혔다.
788년 타실로는 봉신으로서 군사적 의무를 불이행한 혐의로 프랑크 왕실에 의해 고발되고 만다. 763년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프랑크 왕실의 아키텐 원정에 불참했다. 로퍼 피어슨은 743년 피피누스 3세와의 갈등 동안 타실로의 아버지와 아키타니아 공작 후날드 1세 사이에 맺어진 초기 동맹에 비추어 아키텐인들에 대한 동맹의 의무감을 느꼈기 때문에 떠났다고 제안한다.
타실로가 원정을 포기한 동기가 무엇이든 간에, 그 해의 프랑크 왕립 연대기는 특히 그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데, 그는 "맹세와 모든 약속을 무시하고 사악한 구실로 몰래 도망쳤다"고 말한다. 로퍼 피어슨은 타실로를 봉신으로 강조하기 위해 연대기를 수정했을 수 있다는 전제하에 타실로를 맹세를 어기고 그의 직무의 주요 기능을 수행할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으로 묘사하는 원정의 시작이 될 것이라고 제안합니다. 스튜어트 에얼리(Stuart Airlie)는 카롤루스가 타실로를 권좌에서 몰아낸 이유는 그가 바이에른 공국에서 가졌던 더 큰 권력과 그가 보여준 더 큰 독립성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 사건은 샤를마뉴 대제와 교황 하드리아노 1세가 타실로를 독립된 군주가 아니라 반역적인 봉신이며 처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주장했고, 788년 잉겔하임 궁전에서 열린 제국회의에서 많은 정치적 책략 끝에 타실로의 폐위가 결정되었고, 794년 타실로는 공동 통치자였던 아들 테오도 3세와 함께 프랑크푸르트 총회에서 바이에른에 대한 자신과 가족의 주장을 포기하도록 다시 강요받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권리를 카롤루스에게 정식으로 넘겨주고, 수도원에 유폐되었다.
카롤루스는 바이에른의 공작을 겸하면서 바이에른의 대관으로 바이에른 지사(Prefect of Bavaria)를 설치, 알레마니아 출신의 프랑크 귀족으로 처남이기도 한데다가 아길로핑 가문의 방계 혈통이기도 한 게롤드를 그 자리에 앉힌다.
아길로핑의 혈통이 있는 게롤드를 바이에른 지사로 내세운 것은 바이에른이 반독립적 공국에서 프랑크 지방으로 순조롭게 전환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였기 때문으로 여겨지고 있다. 바이에른은 오랫동안 독립 국가로 여겨졌지만, 메로빙거 왕조와 카롤링거 왕조의 통치 기간 내내 바이에른을 멀리 떨어져 있고 제멋대로이지만 여전히 프랑크 공국으로 간주했습니다.
게롤트가 바이에른의 권력을 잡으면서 바이에른 귀족들은 카롤루스를 위시한 카롤링거 왕조와 유대를 맺으면서 프랑크 왕국에 동화될 것이었다. 게롤트는 로르흐에서 권력을 잡았다. 여기에서 그는 프랑크 왕국 전역의 다른 백작과 비교하여 상당한 권한을 부여받았고, 교회 유산과 같은 문제에 대한 최종 판결을 내렸을 뿐만 아니라 전시에 바이에른 군대를 지휘했다. 게롤드는 카롤루스가 그의 군사적 기량을 잘 알고 있는 바이에른 지사로 임명함에 따라 남서쪽의 아바르족과 전투를 계속할 것이며, 지사로서의 통치 기간 동안 그의 주요 초점은 시민 행정관이 아닌 군사 사령관의 지사였다.
중앙아시아 출신의 유목민인 아바르족은 바이에른의 동부 변경주의 동부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게롤트의 군사 지휘는 바이에른 지사로서의 그의 경력 내내 집중되었다. 아바르족은 프랑크족을 상대로 두 차례 원정을 이끌고 바이에른을 침공했으나 두 번 모두 바이에른 동부 원정에서 새로 군대를 지휘한 게롤트와 그의 바이에른 분견대에 패배했다. 전쟁이 길어지자 프랑크족은 791년 아바르족을 습격하는 데 성공했고, 전투에서 계속 이겼지만 결정적이지는 않았다.
결국 아바르족이 건설한 것으로 유명한 웅장한 요새인 '아바르족의 반지'는 게롤드와 그의 바이에른인, 프리울리의 에릭, 이탈리아의 페핀 왕의 공동 노력으로 뚫렸습니다. 프랑크족은 요새를 파괴하고 약탈하여 많은 막대한 부를 샤를마뉴의 수도인 아헨으로 돌려보냈고, 아바르족을 몰아내기 시작했고, 아바르족의 군사력을 완전히 무너뜨리지는 못했지만 아바르족의 군대와 서부 판노니아에서의 지배력을 상당히 약화시켰다.
게롤트가 이끄는 바이에른 군대는 카롤루스 대제의 아들인 이탈리아 왕 피핀 카를로만과 연합하여 아바르족을 타이스 강을 건너 판노니아 깊숙한 곳까지 밀어내는 데 성공했는데, 이는 아바르족이 샤를마뉴가 레겐스부르크에서 모은 지원, 인력, 무기로 아바르족에게 치명타를 가할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프랑크족과 대규모로 전투를 벌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797년과 799년에 카롤루스는 프랑크인, 알레만인, 바이에른인, 그리고 이탈리아의 피핀 휘하에서 싸우는 병사들로 구성된 대규모 군대를 소집하여 바이에른으로 왔는데, 게롤트가 총독으로 궁정을 지키고 있던 로르흐에서 싸웠다. 이 두 원정은 아바르족을 다뉴브 강을 향해 동쪽으로 계속 밀어내는 데 매우 성공적이었다.
799년, 아바르족은 평화의 표시로 카롤루스에게 공물을 받쳤으나 이는 위장이었고, 아바르족은 프리울리를 공격하여 이 평화를 깨뜨렸고, 프리울리 백작 에리크가 살해당했다. 이에 게롤트는 아바르족을 상대하기 위해 바이에른 분견대를 판노니아로 진군시켰다. 이 마지막 작전에서 게롤드가 전사한다.
게롤드가 아바르족과의 전투에서 사망한 후에도 그의 이름은 계속 이어졌다. 카롤루스 대제의 통치 아래 프랑크 왕국에 새로 편입된 바이에른은 프랑크족의 동쪽 보루 역할을 계속했다. 이러한 역할은 프랑크 왕국 내에서 중요성이 증가하여 카롤루스 대제가 그의 후계자들에게 분할 한 후 왕국의 일부로 경건한 루도비쿠스 1세에게 넘겨졌다. 게롤트는 권력을 잡고 있는 동안 전통적인 바이에른 법과 함께 새로운 프랑크 관습법을 바이에른으로 들여왔고, 그가 다스리는 땅이 제멋대로이고 반항적인 공국에서 프랑크 왕국이라는 기계의 통합되고 기능하는 톱니바퀴와 같은 지방으로 통합될 수 있었다.
817년 바이에른은 루도비쿠스 1세의 아들인 루트비히 2세가 분봉왕으로서 통치하게 되었다. 다만 아직 성인이 아니었기에 실질적인 통치는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지사들이 전담했다. 823년 6월 루도비쿠스 1세의 계비 유디트에게서 아들 대머리왕 샤를 2세가 태어나고, 825년 동부 국경에서 웬드족과 소브르족들 바이에른을 침략하다가 물려났다. 826년 성년이 되어 직접 바이에른을 통치하였고, 다음해인 827년 계모 유디트의 여동생인 헤마와 결혼했는데, 그녀의 아버지인 벨프는 후대에 벨프 가문의 중시조이기도 했을 정도로 바이에른 내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으로 바이에른에서 아자스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역을 통치했었다.
828년과 829년에 그는 판노니아로 침투하려는 불가리아인들을 상대로 두 차례 원정을 벌였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분봉왕(Unterkönig)로 재직하는 동안 그는 라인-마인(Rhine-Main) 지역으로 통치를 확장하려고 노력했다.
한편 829년 루도비쿠스 1세는 보름스에서 제국 의회를 소집, 상속령이 개정해 후처 유디트에게서 얻은 아들 대머리 카를에게 알레만니아를 주었다. 또한 기존의 세 아들에게 나누어준 영토 중 라이티아, 알자스, 부르고뉴의 일부도 같이 주었다. 독일인 루트비히는 이에 반발했다. 830년에 로타리우스 1세와 피핀이 반란을 일으킬 때 독일인 루트비히는 관망하고 있었고, 유디트는 자기 아들 대머리 카를의 영토를 지키려고 로타르, 피핀과 맞서 싸웠다. 코르비의 왈라(Wala de Corbie)와 생 드니의 힐두인(Hilduin de Saint-Denis) 등은 보름스 제국의회의 결정을 무효라고 선언하고, 830년 5월 로타리우스를 제국 전체의 섭정으로 임명하기로 하고 내전은 종식되었다. 831년 루트비히는 로타르, 피핀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한때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는 양위했고 유디트는 수도원에 감금되었다.
832년 로타르 1세, 피핀과 함께 대머리 카를의 영지인 알레만니아를 다시 침공하기도 했다. 로타르, 피핀, 루트비히는 교황 그레고리오 4세의 지원을 얻어 거병, 반란을 일으켰고 알자스의 지골스하임 부근에서 회의를 열어 다시 아버지인 그를 폐위했다. 832년 그는 슬라브인 군대를 데리고 알레만니아로 이끌었지만 그의 아버지 루트비히에게 패하고 퇴각했다.
833년 독일인 루트비히는 로타르, 피핀과 함께 등은 반란을 일으켰다.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는 이들을 비난했으나 그해 6월 독일인 루트비히, 로타르 1세, 피핀 형제는 콜마르에서 경건왕 루트비히 1세의 장군 뤼겐펠트를 격파하고,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를 사로잡았다. 한때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를 폐위하는데 성공, 계모 유디트를 다시 수도원에 감금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루트비히는 기적적으로 풀려나 복직하였다. 834년 봄 루트비히 2세는 형 로타르 1세, 아키텐의 피핀 1세등과 함께 다시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기도했다. 이때 형 로타르는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를 사로잡는데 성공, 롤페르트로 끌고갔다가 말렘으로, 말렘에서 메츠로, 메츠에서 다시 수아송까지 끌고 갔다가 수아송의 생메다드 수도원에 감금하였다. 동시에 이복동생 대머리 카를은 부모에게서 떼어내 아르덴 근처 프륌 수도원에 보냈다. 831년 초 로타르 1세는 제국을 3분할하였으나 아키텐의 피핀과 독일인 루트비히는 자신들의 몫이 적다고 보고 반발했다. 독일인 루트비히와 아키텐의 피핀은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의 탈출을 도와주었다. 이번에는 교황의 지지로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는 기적적으로 복위했다.
836년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는 독일인 루트비히의 바이에른 영지를 되돌려주었다. 837년 아버지 루트비히 경건왕은 아헨 제국 의회, 838년 네이메겐 제국 의회에서 더 많은 영토를 아들 대머리왕 카를에게 넘겨주었다. 일단 로타르 1세, 아키텐의 피핀 1세, 독일인 루트비히 등은 이 조치를 받아들였으나 감정이 좋지 않았다.
838년 루트비히 2세와 로타르 1세는 각자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트렌트 근처에서 다시 만났다. 그해 6월 루트비히 2 세는 네이메헌에서 소집된 제국 의회에서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와 다투었다.
838년 9월 경건왕 루트비히는 독일인 루트비히의 몫을 대머리 카를에게 넘긴다고 선언했고, 독일인 루트비히는 반발했다. 838년 12월 형 피핀이 갑자기 죽자, 루트비히는 대머리 카를 대신 조카인 아키텐인 피핀 2세의 아키텐 상속을 지지하였다. 그 뒤 부왕과 화해, 바이에른을 다시 통치하였다. 그러나 839년 봄 둘째 아들 독일인 루트비히가 다시 게르만 귀족들을 선동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패퇴하고 바이에른으로 물러갔다. 루트비히는 다시 형 로타르 1세를 부추겨 다시 대머리 카를의 영지인 알레만니아를 침공했다. 이로써 판노니아 백작령을 얻고, 루트비히는 이때 획득한 영토인 판노니아를 자신의 영지에 포함하고 자신의 아들인 청년 루트비히를 백작으로 임명하였다.
839년 독일인 루트비히는 자신의 상속권을 박탈한데 대해,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독일인 루트비히는 군사를 이끌고 이복 동생 대머리 카를의 알레만니아 영지에 침입했다.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는 신속하게 반응했고, 독일인 루트비히는 판노니아로 퇴각하였다. 839년 5월 30일 보름스에서 개최된 제국 의회에서 제4차 배분이 이루어져 제국은 로타르 1세와 대머리 카를 사이에 양분되었고 독일인 루트비히는 바이에른만을 차지했다. 당시 아버지 루트비히 경건왕은 바이킹 족의 프리슬란트, 프리시아 반환 요구를 거절하고 전쟁 중이었는데, 루트비히 2세는 보름스 의회의 결정에 반발, 조카 피핀 2세와 함께 다시 군사를 이끌고 아헨으로 쳐들어왔다. 그러나 839년 말 보름스 전투에서 아버지 루트비히에게 격퇴당했다. 한편 대머리 카를이 아키텐을 공략하려 하자, 독일인 루트비히는 조카 아키텐의 피핀 2세를 지원하였다.
839년말경 독일인 루트비히는, 5월 30일의 보름스 의회의 결정에 반발, 군대를 이끌고 아버지에게 마지막으로 반기를 들었다가 또다시 보름스에서 격퇴당했다. 840년 초 독일인 루드비히는 알레만니아에서 다시 군사를 일으켜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경건왕 루트비히가 진압군을 보내자 싸움없이 신속하게 후퇴했다. 그러나 840년 3월 경건왕 루트비히는 다시 셋째 아들 독일인 루트비히를 치려고 특별 군대를 조직했다가, 3월 말 프랑크푸르트에서 군대를 해산시켜 돌려보냈다.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는 840년 7월 1일 의회를 소집했으나, 의회가 열리기 전인 6월 20일 인겔하임에서 사망하였다.
이후 장남인 로타리우스 1세가 정식으로 서로마 황제로 즉위하게 되었다. 그는 분할 상속을 무시하고 제국 전체를 다스리는 것을 택했고, 이에 대해 루트비히는 이복 동생 카를과 손잡고 로타르에 대항하였다. 이때 아키텐의 분국왕이자 조카인 아키텐의 피핀 2세의 지원군이 로타르 1세에게 합류, 로타르를 도와주었다. 로타르 1세는 817년의 제국 칙령에서 부여된 자신의 권리를 다시 주장, 협상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841년 7월 25일의 퐁트느와 전투에서 로타르를 깨뜨렸다. 842년에는 작센에서 봉기를 일으켰고 튀링겐의 공작 등이 이에 협조하여 로타르를 조여왔다. 패한 로타르는 결국 아헨으로 피신했으나 결국 협상을 하게 된다.
842년 2월 12일 독일인 루트히비는 대머리 카를과 슈트라스부르크에서 맹약을 체결한다. 이때 독일인 루트비히는 게르만어로, 대머리 카를은 갈로-로망어로 서약문을 낭독한다. 이들은 하느님과 형제애에 의거하여 로타르를 공격한다고 맹세하였다.
이 서약은 그때까지의 프랑크 왕국의 국왕, 황제들이 명령과 선언으로 전쟁, 정책을 집행하던 것과는 다른 신과 백성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한 서약이었다. 또한 프랑크 왕국의 표준어인 고지독일어로 쓰여졌지만, 게르만어와 라틴어로 각각 낭독되었다.
842년부터 844년까지 루트비히는 작센 족의 스텔링가(Stellinga) 운동을 저지시켰다.
842년 6월 로타르, 루트비히, 카를 3형제는 협상을 체결하기 위해 각 40명의 대표자들을 대동하고 손강(Saône) 인근의 한 섬에서 만나고, 각자의 왕국의 경계를 정했으나 결렬되었다. 842년 6월 루트비히는 로타르 1세, 대머리 카를을 작센에서 만나 협상을 시도하였으나 결렬되었다. 협상은 여러 번 결렬되었으나 843년 8월 제국을 3분하기로 하고 종결된다.
843년 8월 11일 베르덩 조약에 따라 카를과 로타르는 제국의 서부와 중부를 각각 차지했고, 루트비히는 동부와 함께 프랑켄, 슈바벤, 케른텐, 바이에른, 작센 지방의 영토를 차지했다. 즉위 직후 루트비히는 정부와 행정 문서 형식을 간소화시켰다. 동시대의 동프랑크의 백성들은 그의 별명을 피피(piious) 또는 피피오스무스(piiousmus)라 불렀다. 서프랑크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렉스 게르마니아(Rex Germaniae) 또는 렉스 게르마노룸(Rex Germanorum) 또는 렉스 테우톤(Rex Teutons)으로 불렸다. 독일인 루트비히라는 별명은 18세기 이후에 붙여졌다 한다.
한편 이시기 바이에른 귀족들 중 빌헬마이너 가문이 가중 강력했다. 빌헬마이너 가문의 빌헬름 1세는 그의 친척 그라만의 뒤를 이어 트라웅가우 백작이 되었다. 그라만은 788년 입스펠트에서 오타차르 백작과 함께 왕의 전령으로 아바르족을 격파했다.
844년 왕국을 침략한 슬라브 족과 교전, 서슬라브족 연합군을 격퇴했다. 그러나 함부르크까지 침략한 데인 족의 왕 호릭1 세의 군사를 막지 못했다. 함부르크의 주교 안스가르는 주민들을 이끌고 브레멘으로 피신하였다. 845년 보헤미아 공작은 그의 종주권을 인정, 침례를 받고 루트비히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동프랑크의 국왕에 올랐지만, 왕국은 바로 프랑켄, 작센, 알레만니아, 바이에른 등의 여러 부족 출신 제후들의 세력이 강했고, 루트비히는 순찰사(Missi dominici)와 변경백을 파견하여 이들을 관리 감독하였다. 알레만니아와 작센 지역에서는 통치력이 미치지 못하는 점을, 성 갈렌 수도원의 그리모알드(Grimoald), 슈바벤의 백작 처남 콘라트 1세 등 해당 지역의 유력자 및 해당 지역과 인근 지역 교회의 주교, 수도원의 원장, 평신도 수도원의 간부, 유력 평신도, 봉신 등의 지원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성 갈렌의 그리모알드는 그의 자문관으로도 활동했다. 또한 독일인 루트비히는 자신의 아들 중 카를로만 3세와 소 루트비히를 각각 바이에른과 작센으로 보내 분봉왕으로 봉하여 이 지역을 다스리게 했다. 그러나 지역 제후들의 세력이 강했고, 판노니아와 모라비아인들은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또한 노르만 족과 마자르 족의 잇단 침입으로 국왕의 통치력은 점점 약화되었다.
856년 장남인 카를로만을 바이에른 공작으로 임명해 법적으로 공동으로 통치하지만 군사권만 행사하게끔 조처 했다. 카를로만은 바이에른을 중심으로 케르텐과 판노니아 변경주의 군대들을 통솔했다. 858년 라스티슬라프는 카를로만에게 많은 양의 금과 보물을 뇌물로 바쳐왔고, 그는 이를 받았다. 860년 무렵 독일인 루트비히는 이복 동생 대머리 카를의 서프랑크 영토를 공격했다가 실패하고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였다. 동프랑크 왕국의 동부 국경지대를 관리하던 카를로만은 모라비아의 라스티슬라프 대공 및 일부 콘라디안 가문 귀족들과 협력하여, 아버지 독일인 루트비히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포로로 잡혔지만 다시 동부지역의 이민족 군사들이 그를 탈옥시켜 바로 도망 칠 수 있었다.
861년 케른텐 백작 파보(Pabo) 등 케른텐의 군사를 이끌고 아버지 독일인 루트비히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카를로만은 판노니아 후작 리하르트(Richart), 케른텐 백작 파보, 케른텐 후작 군다카르(Gundacart) 등을 부관으로 삼아 베를린을 침공했다. 아버지 독일인 루트비히는 세 아들에게 나눠줄 영토를 바이에른, 작센, 알레만니아로 삼분하고, 아들들을 각자 현지의 유력인사의 딸들과 결혼시켰다. 그러나 카를로만의 본부인의 이름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862년 카를로만은 아버지의 승인 없이 독자적으로 바이에른 밖의 부족들을 정벌하여 영토를 확장하려 했으나, 게르만 전사들에게 패배하고 돌아왔다.
861년과 863년, 864년 아버지에 독일왕 루트비히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곧 그의 동생들 소 루트비히와 뚱보 카를도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한편 아버지 독일왕 루트비히는 863년 아들의 반란을 두려워하여 케른텐의 그의 영지를 침공했다. 독일인 왕 루트비히는 비밀리에 군다카르에게 사자를 보내 협상, 군다카르는 자신의 군사를 이끌고 독일인 루트비히에게 갔고 카를로만은 군다카르를 해임하고 케른텐을 직접 차지하였다.
863년 판노니아 변경백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를 판노니아 변경백에서 해임한 아버지 독일인 루트비히는 빌헬름 등의 관료를 파견하는 한편 모라비아 부족장 엔겔샬크 등을 판노니아 변경백에 임명하여 그를 견제했다. 864년 독일왕 루트비히는 아들들과의 반란에 시달리면서 세 아들에게 영토를 나누어 주었는데 카를만에게는 바이에른, 케른텐, 판노니아, 보헤미아와 모라비아를, 소 루트비히에게는 작센과, 뚱보 카를에게는 슈바벤을 주었다. 865년 그는 프랑크푸르트에서 바이에른의 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카를만과 삼형제를 지원한 많은 동프랑크의 귀족들은 처벌받았다.
866년 카를로만은 영토 분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케른텐 후작 군다카르 등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었다. 869년 동프랑크 왕국의 종주권을 거부하는 모라비아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5년간의 교전 끝에 874년 모라비아의 부족장들은 동프랑크 왕국의 종주권을 인정하였다.
한편 865년 무렵부터 그는 이탈리아의 귀족들로부터 이탈리아의 정국에 대한 모종의 정보를 접했고, 신성로마제국의 루도비쿠스 2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소 루트비히와 뚱보 카를 등과 함께 이탈리아로 갔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루도비쿠스가 죽었다는 소문은 거짓 헛소문으로 드러났다.
카를만은 이탈리아 입구에서 말머리를 돌려 모라비아를 원정했다. 모라비아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했지만 결국 라스티슬라프에게 프랑크 왕국의 종주권 인정을 얻어냈고, 그 무렵부터 그는 사촌 형 이탈리아인 루도비쿠스에게 후계자가 없는 것을 주목, 카를만과 그의 아버지 독일인 루트비히는 이탈리아와 황제관을 원하게 된다. 871년 자신과 함께 모라비아 원정에 종군한 빌헬마이너 가문의 빌헬름과 엔켈샬크에게 판노니아 변경백직을 양도하였다. 874년 아버지 독일인 루트비히는 외교를 통해 신성로마제국의 루도비쿠스 2세를 설득, 그로부터 카를만을 후계자로 지명받게 되었다.
875년 8월 이탈리아인 루도비쿠스가 죽고, 그해 12월 이탈리아의 루도비쿠스가 죽었다는 소식이 동프랑크로 전달되자, 아버지와 세 아들의 전쟁은 끝났다. 독일왕 루트비히는 큰 아들 카를만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자리에 앉히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아버지 독일인 루트비히와 카를로만, 뚱보 카를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제관을 로마 교황청에 요구하였다. 당시 로마는 시칠리아섬에 상주해 있던 무슬림 군대에게 시달림당하고 있었다.
875년 8월 황제 이탈리아인 루트비히 2세는 죽을 때 유언으로 카를만을 후계자로 지명하였지만, 대머리왕 카를이 군사를 이끌고 재빨리 알프스산맥을 넘어가 그가 받을 자리를 교황 요한 8세의 지지를 받아 제위에 올랐다. 876년 독일왕 루트비히는 다시 대머리 카를과의 전쟁을 준비하던 중에 죽었다. 카를만은 이탈리아인 루트비히 2세 사후 바로 이탈리아로 군대를 이끌고 카사우리아의 산 클레멘테로 진격해 갔다. 그러나 카를 2세는 이탈리아에 금과 은과 보석에, 큰 금액의 돈으로 교황을 매수했다고 한다. 바로 대머리 카를은 군사를 이끌고 알프스산맥을 넘어 제관을 차지했다. 카를만은 카사우리아의 성 클레멘테 수도원에서 자신이 이탈리아인 루트비히의 합법적 후계자이며 정당한 이탈리아의 왕임을 선언하고, 대머리 카를이 이탈리아 왕위와 황제위를 약탈했다고 선언했다. 이후 카를만은 로트링겐, 서프랑크와 이탈리아를 공격하였다. 카를만은 교황청의 호의를 얻기 위해, 각 지역별 주교구 주교들의 관할과 권한을 확장해주기도 했다.
아날 연대기에 의하면 이때 대머리 카를은 카를로만을 이탈리아에서 퇴각시키는 조건으로 막대한 양의 금과 은과 보석을 제공했다 한다.
즉위 초 그는 왕국의 동부를 침략한 마자르 족을 격퇴하여 국경 밖으로 몰아내고, 그들의 근거지를 소탕하였다. 876년 8월 이탈리아를 다스리던 황제 루트비히 2세가 죽자 베렌가리오 1세를 비롯한 이탈리아 북부의 귀족들은 카를로만을 왕으로 받들었다. 그러나 교황 요한 8세는 그에게 황제관 수여를 거부했다.
876년부터 878년까지 카를로만은 공공연히 이탈리아의 왕위를 주장하며 이탈리아의 북부와 서프랑크의 로렌을 침공하였다. 한편 대머리 카를은 876년 이탈리아의 스폴레토와 카메리노 공작령을 차지한다. 카를만은 카를의 스폴레토, 카메리노에 교황 요한네스 8세의 관할 권한을 부여해주기도 했다. 877년 10월 대머리 카를이 죽은 뒤 카를로만은 낭트의 람베르트와 구이도 3세를 상대로 스폴레토 등의 권리를 주장했다. 동시에 카를만은 바이에른의 외팅(Ötting)에서 궁궐과 수도원을 새로이 건립하였으며, 성모상 및 초기 게르만 포교 선교사들의 유물을 기증하였다. 그는 또 자신의 부왕 루트비히 독일인이 총애했던 언어학자 겸 철학자 발도(Baldo)를 초빙하여 수도원장에 임명하였다.
카를로만은 밀라노와 파비아에서 자신의 명의로 된 데나리온 동전을 발행하도록 지시했다. 밀라노에서 주조 된 것들은 일반적으로 CARLOMAN REX 라는 문장이 새겨진졌고, 파비아의 것들은 HCARLEMANNVS RE로 새겨졌다.
877년 10월 카를 대머리 황제가 브리데레벵 근처에서 갑자기 죽자, 그는 바로 군사를 이끌고 알프스산맥을 넘어 파비아에서 이탈리아의 왕이 되었고, 로마로 와 다시한번 신성 로마 황제의 자리를 노렸으나 교황 요한네스 8세는 카를로만에게 황제의 제관을 씌우는 것을 주저했다. 베로나에 체류 중 그는 갑작스러운 병을 얻어, 일시적으로 쓰러졌다. 쓰러진 그는 다시 베로나에서 퇴각, 알프스산맥을 넘어 오툉으로 회군하였다.
그해 그는 갑작스럽게 뇌졸중으로 불구가 되었고, 877년 11월 몸에 마비되기도 하였다. 879년까지 그는 뇌졸중으로 무기력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카를만은 결국 동생들에게 영토를 나누어 주었다. 이때 작센을 다스리던 소 루트비히에게는 바이에른과 튀링겐을, 알레만과 독일 남부를 다스리던 비만왕 카를에게는 이탈리아의 왕위를 물려주었다. 878년 백작 이르멘페르트(Ermenpert)와 일부 병사들이 카를만을 암살하려 했다가 발각, 체포되었다. 이르멘페르트는 바로 서프랑크의 말더듬이 루이에게로 도피했다.
879년 카를로만은 파비아의 코르테올로나의 궁전에서 성 크리스티나 수도원에 자신이 소유한 코르테올로나 일대의 땅을 기부하였다. 한편 이시기 판노니아 변경주를 공동으로 통치하던 빌헬름 2세와 엥겔스샬크가 모라비아와의 전쟁 중 전사하면서 아리보가 판노니아 변경백으로 임명되었다. 엥겔스샬크의 자식들은 아르눌프에게 의탁했다.
879년 무렵 그는 건강상의 이유로 더이상 통치가 불가능했다. 아날레스 연대기에 의하면 이때 카를만은 목소리를 잃었다 하며, 다만 여전히 글로 의사 소통을 할 수 있었다 한다. 879년 6월 7일의 편지에서 교황 요한네스 8세는 말더듬이 루이가 이탈리아로 오도록 설득하지 못하자 이전에 거부했던 카를로만에게 이탈리아로 오도록 호소했다. 그러나 카를로만의 병은 심해져서 바로 답을 주지 못했다.
879년 7월 카를만은 이탈리아로 편지를 보내 말더듬이 루이에게 황제관을 준 교황 요한네스 8세를 설득했지만, 설득에 실패했고 교황은 제관 수여를 거부했다. 879년 말 그는 뇌졸중이 심해져 반신불수가 되었지만, 프룸의 레기노 주교에 의하면 여전히 대화는 가능했고, 글씨는 직접 쓸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증세가 심해지자 그는 가족들 중 누군가에게 통치권을 이양해야 했다.
당시 카를만에게 왕비로 백부 로타리우스 1세의 딸로 사촌동생이기도한 이르멘가르트가 있었으나 둘 사이에 자식이 없었고, 정부인 리트빈데에게 아르눌프라는 사생아만 있었고, 때문에 동생인 작센 분봉왕 루트비히 3세가 바이에른의 통치권을 대리하게 되었다.
하지만 루트비히 3세는 뚱보 카를 3세와 함께 사촌인 서프랑크왕 샤를로망과 국경문제로 바이에른을 신경쓸 여력이 없었고, 결국 아르눌프에게 바이에른의 통치권을 위탁해야 했고, 아르눌프는 카를로만의 서자임에도 불구하고 현지에서 어느 정도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해 그는 직접 판노니아를 공략하기도 했다. 879년 그는 바이에른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한편 879년부터 그는 케른텐 공작과 판노니아 변경백의 지위를 유지했다.
이후 880년 카를로만이 완전히 사망하게 되면서 루트비히는 카를만의 영지 중 바이에른을 물려받았다. 이미 성인이었던 아르눌프는 이에 반발했지만 그는 사생아였고, 그의 권리는 묵살되었다. 이후 아르눌프는 계속 바이에른과 이탈리아의 권리를 주장했지만 카를 3세와 루트비히 청년왕의 방해로 실패했다. 그는 케른텐으로 돌아가 계속 장정들을 모아 사병을 양성하였다. 그러다가 881년 겨울, 루트비히 3세가 갑자기 열병으로 쓰러져 882년 1월 20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사망했고, 뚱보 카를이 바이에른을 차지하면서 동프랑크을 통합시켰다.
882년 삼촌 카를 3세는 그를 바이에른 공작에 임명하였다. 이때 빌헬마이너 가문은 판노니아를 통치하던 아리보의 지위를 빼앗기 위해 소규모 내전을 일으켰다. 그러나 내전은 곧 모라비아까지 개입할 정도로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빌헬마이너 가문을 봉신으로 두던 아르눌프 또한 빌헬마이너 가문의 전쟁에 개입해 모라비아와 전쟁을 벌였다. 이때 카를 3세는 모라비아 공작 스바토풀루크와 함께 아리보를 지지하는 반면 아르눌프는 자신의 봉신인 빌헬마이너 가문의 엥겔스샬크 2세를 지지했다.
이 때문에 삼촌인 신성로마제국 황제 뚱보왕 카를 3세와 반목하게 되었다. 판노니아 후작 엔겔샬크 2세는 아르눌프의 측근이 되었고, 아르눌프가 황제 카를 3세를 대상으로 한 빌헬마이너 전쟁에서 아르눌프를 적극 후원하였다. 아르눌프는 885년 무렵까지 모라바의 공작 스바토풀루크와도 갈등관계에 있었다. 스바토풀루크는 황제 카를 3세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시간은 아르눌프의 편이었다. 885년 카를 3세는 샤를 3세를 제치고 서프랑크 왕위까지 겸했지만 비만으로 인한 합병증과 바이킹에 대한 무능한 대처 등으로 인망을 잃어가고 있자 권력에 대한 야심으로 가득 차 있던 그는 아버지의 영지를 주장하는 선에서 떠나 카를의 폐위를 기도한다. 바이에른, 프랑코니아, 작센, 튀링기아, 알레만니 귀족들의 도움으로 카를 비만왕의 정권 전복을 기도한다. 판노니아의 후작 엔켈샬크 2세가 죽자 아르눌프는 엔켈샬크의 손자인 윌리엄 2세와 손잡고 정변을 준비한다. 카를은 당시 간질과 풍질환을 앓고 있었고 그는 이를 틈타 동프랑크 왕국은 물론이고 서프랑크 왕국 귀족들의 지지를 얻어낸다.
887년 11월 라인란트-팔츠의 트레부르(Trebur)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카를이 바이킹의 침입에 적절한 조치를 못하고 887년 11월 11일 귀족들의 반발을 받고 쫓겨날 때 아르눌프는 군사를 이끌고 아헨으로 쳐들어가 카를의 폐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는데, 비록 영토의 대부분을 카를이 지배하는 상태였지만 그는 프랑크푸르트에서 동쪽 영토의 왕으로 추대되었다.
아르눌프가 동프랑크 왕이 되자 엥겔스샬크 2세는 자신이 아르눌프의 봉신인 만큼 아르눌프가 자신을 판노니아 변경백으로 임명해줄 것이라 기대했으나 이미 아리보는 판노니아에 강력한 기반을 구축했기에 아르눌프로서는 아리보를 해임할 수 없는 상태였다. 결국 엥겔스샬크는 아르눌프의 사생아 딸 엘린라트를 붙잡았고, 아마도 그녀와 결혼하여 아르눌프가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도록 강요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는 모라비아로 도망쳐야 했다. 890년 아르눌프는 엥데게오 백작을 바이에른 변경백으로 임명했다. 893년, 아르눌프는 엥겔스샬크에게 판노니아의 변경주를 공통으로 통치하게끔 해주었지만, 그는 바이에른의 다른 귀족들의 눈 밖에 나버린 상태였고, 그들은 빌헬마이너 가문을 제거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그해 레겐스부르크에서 아르눌프 모르게 엥겔스샬크를 체포해 실명시켰고, 빌헬미네르의 가문을 숙청시켰다. 이에 아르눌프는 바이에른의 리우트폴트에게 카란티아 공국과 엥겔스샬크가 가지고 있던 상부 판노니아의 통치권을 줬다.
895년 아르눌프는 엔데게오를 해임시키고 바이에른의 리우트폴트를 바이에른 변경백으로 임명하여 자신의 영지를 대신 통치하게 했다. 898년에 그는 황제를 대신하여 모라비아의 침공을 잘 막았으며 900년에 마자르족의 침입을 격퇴했으먀, 903년에는 보헤미아 공작(dux Boemanorum)으로 기록에 등장했다. 아르눌프 사후 그는 유아왕 루트비히 4세의 섭정으로 강력한 지위를 차지했다. 907년 7월 4일, 루이트폴트(Luitpold)는 마자르족의 침공 당시 프레스부르크 전투(Battle of Pressburg)에서 바이에른 군대의 선두에 섰으나 그의 군대는 가장 큰 패배를 입고 말았고, 루이트폴트는 전사하고 만다. 이때 오스트리아 변경주가 마자르족의 여토로 편입되었다.
루이트폴트의 사망으로 인해 루트비히 4세는 안그래도 모후마저 3년 전에 사망한 상태인데다가 건강마저 좋지 않았기에 새로운 섭정단을 세워야 했다. 이에 콘스탄스 주교이자 성 갈레 수도원장 살로몬 3세(Salomo III)와 아우구스부르크 주교 아달베르트, 마인츠 대주교 하토 1세를 섭정으로 삼았다. 결국 마인츠 대주교 하토 1세와 프랑켄 공작 콘라트가 동프랑크 왕국의 사실상의 실권자로 군림했다.
이때 루트비히는 아버지 아르눌프로부터 물려받은 바이에른의 통치권마저 다른 이에게 이양했는데, 전사한 바이에른 변경백 루이트폴트의 아들인 아르눌프를 바이에른 공작으로 임명할 수밖에 없었다.공작이 된 아르눌프는 아버지의 전사와 함께 무너진 바이에른의 군대를 다시 재편성해야 했고,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그는 교회 토지를 몰수하고 수많은 수도원 영지를 세속화하여 자신의 가신들에게 나눠주는 식으로 자신의 권력을 강화했다. 이 때문에 그는 후대에 악인공(der Schlimme)으로 불리게 되었다.
몇 차례의 접전에서 그는 헝가리 침략자들을 격퇴할 수 있었고 913년에는 슈바벤의 외가쪽 친척들의 지원을 받아 소규모 군대를 물리쳤다. 바이에른 공국을 재건한 그는 결국 헝가리 부족장들과 휴전 협상을 벌였고, 그 후 헝가리 부족장들은 바이에른을 거쳐 다른 독일 공국을 습격했다.
아르눌프 공작은 동프랑크 왕국의 왕들로부터 독립하는 정책을 추구했다. 911년에 루트비히 4세가 후사도 없이 죽으면서 동프랑크계 카롤링거 왕실의 혈통이 단절되자 그는 독일의 왕 콘라트 1세의 선거에 참여했다. 콘라드와 외숙부인 슈바벤의 에르찬가르와의 갈등에서 그는 에르찬가르 지지했다. 이로 인해 아르눌프는 콘라트를 지짛하던 로트링겐 공작 게르하르트의 공격을 받게 되지만 전투에서 전사시켰다. 이후 분쟁은 913년 아르눌프의 어머니인 쿠니군데가 콘라드 왕과 결혼하면서 일시적으로 해결되었다.
916년 아르눌프는 콘라트에게 반역을 저지르자 콘라트의 군대는 바이에른을 침공하여 레겐스부르크를 공격하고 약탈했다. 이 공격으로 아르눌프는 헝가리로 망명하게 되었고, 콘라트는 자신의 동생 에버하르트를 바이에른 공작으로 임명했다.
같은 해 9월, 왕은 호헤날트하임에서 바이에른 주교단이 참석한 교회 평의회를 소집했고, 11월 1일 레겐스부르크에서 파문을 이유로 아르눌프와 그의 남동생 베르톨트를 소환했다. 이때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아르눌프와 그의 가족은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거나, 평의회 회의가 열리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917년 1월, 아르눌프는 헝가리에서 몰래 돌아와 그동안 비축한 재물을 에버하르트에게 주고 다시 바이에른의 통치권을 되찾는데 성공한다. 콘라트 왕은 이 상황에 화가 나서 반란을 일으킨 슈바벤의 처남 에르체인저와 그의 형제 베르톨트의 처형을 요구했지만 이 요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919년, 콘라트 1세의 죽음으로 아르눌프는 다시 동프랑크의 왕좌를 노릴 수 있게 되었다. 콘라트 1세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왕좌는 다시 아르눌프에게 열렸다. 유바네스 연대기(Annales iuvavenses)에 따르면, 920년에 "바이에른인들은 아르눌프 공작에게 자유롭게 복종하고 그에게 게르만족의 영토 내에서 통치할 것을 요청했다" (Baiuarii sponte se reddiderunt Arnolfo duci et regnare ei fecerunt in regno teutoniconum). 그러나 하인리히 1세의 즉위는 왕좌를 위한 전투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바이에른이 다른 동프랑크인들과 함께 실제로 하인리히에 반대하여 아르눌프를 반왕으로 선출했는지는 결정적으로 확립되지 않았다.
어쨌든 아르눌프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하인리히 1세는 강력한 적수로 판명되어 921년 두 번의 원정에서 그를 패배시켰다. 아르눌프가 레겐스부르크에서 헨리에게 포위되었을 때, 아르눌프 공작은 평화 협상에 들어가 독일 왕의 주권을 인정했다. 하인리히 왕은 아르눌프가 자신의 왕권을 포기하는 대가로 사법권과 몇 가지 중요한 예복을 포함하여 바이에른에 대한 아르눌프의 자치권을 인정했다.
아르눌프는 하인리히 1세와 함께 보헤미아의 바출라프 1세를 상대로 한 928년 원정에 동행했다. 935년 그는 프로방스의 위그 왕을 공격하였지만 패배로 끝났다. 936년 하인리히 왕이 사망한 후, 아르눌프는 오토 1세의 대관식에 참석했다. 아르눌프 공작은 937년 7월 14일 레겐스부르크 저택에서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에버하르트가 즉위했지만, 그는 바이에른 공작이 된 이후 오토 1세와 갈등을 벌었는데, 오토 1세는 아버지 하인리히 1세가 아르눌프에게 준 특권들을 회수하려고 했고, 에버하르트는 그것을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에버하르트는 프랑켄 공작 에버하르트와 함께 오토 1세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에버하르트의 반란은 바이에른 내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지는 못했으며, 938년 봄과 가을의 두 번의 원정에서 오토는 에버하르트를 물리치고 그를 추방시키고 카란티아 변경백인 그의 숙부 베르톨트를 바이에른 공작으로 임명했다.
바이에른 내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렸던 형 아르눌프와 달리 베르톨트는 바이에른의 서품권을 포기했고, 오토 1세의 제국교회 정책을 지지했다. 939년 베르톨트는 로트링겐 공작을 겸하면서 로트링겐의 귀족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 오토 1세의 여동생으로 로트링겐 공작 길베르트의 미망인인 게르베르가와 결혼할 계획이었으나 그녀가 루이 4세와 재혼하면서 무산되었다, 이후 바이에른 귀족의 딸인 빌드루트와 결혼해 다음해 유일한 아들인 하인리히를 보게 되었다.
947년 베르톨트가 사망했다. 외아들인 하인리히는 아직 미성년자였기에 948년 오토 1세는 한 때 자신에게 반항적이었던 동생 하인리히를 바이에른의 공작으로 임명했다. 937년 악인공 아르눌프가 죽기전 아르눌프는 자신의 외동딸인 유디트를 하인리히 1세와 혼인시켰기에 하인리히 1세가 바이에른의 공작으로 임명될 수 있었다. 바이에른 공작이 된 하인리히는 바이에른 귀족들의 반발을 직면했지만 마자르족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바이에른의 영토를 확장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로트링켄 공작으로 재임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오토 1세에게 반항적이었던 때와 달리 951년 베렝가리오 2세에 대한 이탈리아 원정에 오토 1세와 동행했고, 부르고뉴의 왕녀인 아델라이드를 파비아로 데려왔을 때 형의 중매인 역할을 했다. 이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열린 952년 제국 의회에서 프리울리, 아퀼레이아, 이스트리아와 함께 새로 설립된 베로나 변경주를 받았다.
하지만 이과정에서 조카이기도 한 슈바벤 공작 리우돌프와 관계가 틀어지고 말았으며, 이후 953년에서 954년 사이 리우돌프의 반란에 호응한 바이에른 신민들 및 조카와 조카 사위가 일으킨 반란을 잔인하게 진압했으나 955년 오토 1세가 레히펠트 전투에서 마자르족들을 상태로 승리를 거둔 이후 빼앗겼던 오스트리아 변경주가 다시 바이에른 산하로 재편입되었으나 하인ㄴ리히 1세는 11월 1일 푈데 수도원에서 사망한다.
이후 베로나 변경백과 함께 바이에른 공작위는 아들인 하인리히 2세가 승계받게 되었다. 문제는 하인리히 2세가 다섯살도 채되지 않은 아이였기에 어머니인 유디트가 섭정으로서 바이에른 공작령을 통치하게 되었다. 그녀는 딸 하드비히를 슈바벤 공작 부르크하르트 3세와 결혼시키고 972년 아들인 하인리히 2세를 부르고뉴의 기젤라 공주의 결혼을 주선하여 남부 독일 공국과 부르고뉴 왕국 사이에 안정적인 동맹을 구축해 광대한 바이에른 영토의 유능한 통치자로 판명되었고, 유디트는 또한 아델라이드 황후와 좋은 관계를 맺었다.
아들을 기젤라와 혼인시킨 것을 마지막으로 유디트는 섭정에서 물려나 예루살렘으로 성짓ㄴ례를 떠났고, 하인리히가 바이에른을 직접 통치하게 되었다. 하지만 하인리히는 한순간의 정치적 실책 어머니가 구축한 바이에른-류돌핑거 가문을 1년만에 나락으로 떨어트리고 만다.
973년 오토 황제가 죽자 하인리히는 남독일의 슈바벤 공작령과 바이에른 공작령, 그리고 인접한 부르고뉴 왕국과의 관계에 의존할 수 있었다. 그는 그의 사촌 하인리히를 아우크스부르크의 주교로 임명하여 오토 황제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오토 2세의 서품권을 거부했다. 자신의 영지가 아니고 제국의 지시 없이 주교를 지명한 헨리의 행동은 그를 오토 2세(Otto II)와 부르크하르트 3세(Burchard III)와 충돌하게 만들었다. 내전을 원하지 않았던 오토 2세는 973년 9월 22일 하인리히가 지명한 사람을 주교로 임명했다. 그의 처남인 슈바벤 공작 부르크하르트 3세가 상속인 없이 사망하자 하인리히 2세는 슈바벤 공국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오토 2세는 부르크하르트의 미망인 하드비히의 끈질긴 반대에 맞서 자신의 조카이자 이복형인 리우돌프의 아들 오토를 슈바벤 공작으로 선포했다.
974년 하인리히 2세는 오토 2세를 왕좌에서 축출하기로 결심하였고, 누이 하드비히(Hadwig)의 지원으로 그는 바이에른과 작센 귀족들, 그리고 보헤미아 공작 볼레슬라프 2세, 폴란드 공작 미에슈코 1세와 동맹을 맺었으나 결국 잉겔하임에서 패배해 수감되어 있다가 오토 2세가 에노 백국과 캄브레이 주교령의 반란 및 덴마크 왕 하랄 1세 블로탄의 지원을 받는 홀슈타인 귀족들의 반란을 정리하는 사이인 976년 탈출에 성공하여 바이에른에서 반란을 일으켰지만, 오토 2세가 레겐스부르크를 점령하면서 반란을 진압되었고, 하인리히 2세는 바이에른 공작위를 빼앗고, 위트레흐트의 주교 폴크마르의 감시를 받게 되었고, 바이에른 공국 또한 더 이상 왕실을 위협할 공작이 나올 수 없도록 산하의 변경주인 오스트리아와 카란티아를 분리시키고 바벤베르크 가문의 레오폴트와 베르톨트의 아들 하인리히를 각각 오스트리아 변경백과 카란티아 공작으로 임명했고, 바이에른의 새로운 공작으로 슈바밴 공작인 오토가 겸임하도록 했다. 또한 이때 오스트리아 변경백이 된 레오폴트 1세는 현재의 오버외스터라이히의 동부 뮐비에르텔(Mühlviertel)을 획득하게 되었다.
977년 황제가 다른 곳에서 원정을 벌이는 동안 오토는 파사우의에서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을 성공적으로 포위함으로써 폐위된 전 바이에른 공작의 추종자, 아우크스부르크 주교 하인리히 1세, 카린티아 공작 하인리히 1세인 세 헨리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 반란으로 인해 베르톨트의 아들 하인리히를 카란티아 공작에서 해임시키고, 오토에게 카란티아를 넘겨주지만 불과 1년만에 보름스의 오토에게 준다. 980년 황제 오토 2세의 이탈리아 원정에 동행하여 남부 이탈리아까지 내려가, 비잔틴 제국과 시칠리아에 올라온 아랍인들을 상대로 교전하였다.
982년 이탈리아에 사라센 족이 침입하자 황제 오토 2세와 함께 이를 격퇴하러 갔다. 콜로네와 크로토네에서 아랍군을 격퇴했지만 7월 13일 스틸리오 전투에서 사라센 군대의 기습공격을 받고 부상당했다. 퇴각한 후, 다시 이탈리아 원정을 준비하던 중, 그해 10월 31일 혹은 11월 1일 전투 중에 받은 상처가 잘못되어 후유증으로 죽었다.
이에 오토 2세는 오토의 후임으로 새로운 바이에른 공작으로 한때 반란을 일으켰던 베르톨트의 아들 하인리히를 바이에른 공작으로 임명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베로나의 제국회의를 통해 하인리히를 사면해 바이에른 공작으로 임명한다. 하지만 이로 인해 하인리히 3세는 바이에른을 되찾으려는 하인리히 2세와 분쟁을 겪어야 했고, 얼마 안가 984년 오토 2세가 죽고 어린 오토 3세가 즉위하자 폴크마르의 감시하에 강금된 하인리히 2세는 즉시 위트레흐트에서 탈출한 후 다시 세력을 규합했다. 오토 3세의 가장 가까운 오토 왕조 출신 남자 친척이었던, 하인리히 2세는 유가기에 불과했던 친척에 대한 섭정권을 주장하였다. 쾰른 대주교 바린은 별다른 반대 없이 하인리히 2세에게 섭정권을 부여하였다. 오토 3세의 어머니 테오파노가 오토의 조모인 황태후 이탈리아의 아델라이드 그리고 이모인 크베들린부르크의 수녀원장 마틸다 등과 더불어 이에 반대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아델라이드와 마틸다 모두 이탈리아에 있었기에 자신들의 반대 의견을 개진할 수 없었다.
섭정으로서, 하인리히 2세는 어린 주군의 후견자로서는 덜 집중하고 왕위에 오르는 행동을 취했다. 오리악의 게르베르에 따르면, 하인리히 2세는 비잔티움 제국 방식의 공동 왕권 통치를 채택하였다. 984년 끝을 앞두고, 하인리히 2세는 제국 내 주요 인사들과 동맹을 형성하려 했는데, 그 중에 주요 인물로는 친척인 프랑스의 로테르가 있었다. 하인리히 2세가 독일왕이 되는 것을 로테르가 동의하는 대가로, 하인리히 2세는 로타르에게 로타링기아를 내주기로 합의하였다. 이 둘은 브라이자흐를 장악하기 위해 985년 2월 1일에 군대를 합류시키기로 동의했으나, 막판에 하인리히의 의지가 변심하였다. 그럼에도 로타르는 독일땅으로 공세를 이어나갔고 985년 3월경에는 베르됭을 돌파하는 데 성공하였다.
하인리히 2세는 어린 오토 3세를 데리고 작센으로 향하였다. 그곳에서, 하인리히 2세는 마그데부르크에서 985년 종려주일을 기념하기 위해 독일 왕국의 모든 대귀족들을 초청하였다. 이때 그는 독일 왕위에 대한 그의 왕위 주장을 대대적으로 벌였으나, 제한된 성공만을 거뒀다. 그의 주장에 호응한 이들로는 폴란드 공작 미에슈코 1세와 보헤미아 공작 볼레슬라프 2세가 있었다. 하인리히 2세는 또한 트리어 대주교 에그베르트, 마그데부르크 대주교 기질러, 메츠 주교 디트리히 등의 지지도 받았다.
하인리히의 주장을 반대한 이들은 그에 대한 모의를 꾸미기 위하여 작센의 크베들린부르크로 달아났다. 하인리히가 이 공모 사실을 알게 되자, 그는 이 반대를 꺾기 위하여 군대를 크베들린부르크로 이동시켰다. 하인리히 2세는 공모 모의자들과 강화 협상을 맺어보기 위해 자신보다 앞서 위트레흐트 주교 폴크마르를 보냈다. 이 협상은 공모자들이 오토 3세 외에 그 누구한테 충성의 맹세를 하기를 거부하면서 실패하였고, 작센 공작 베른하르트 1세는 어린 왕에 대한 충성심을 지켰다. 작센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는 데 실패함에 따라, 하인리히 2세는 장래에 평화 협상을 하기로 결정하고 바이에른 공국으로 향했다. 바이에른 지역과 그의 가문이 오랜 관계를 이어나가고 있었기에, 많은 주교들과 백작들은 그를 왕위에 대한 정당한 후계자로 받아들였다. 오토 3세한테 작위를 받았던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3세는 하인리히 2세를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고 오토 3세에 대한 충성심을 유지하였다.
작센 및 바이에른 지역에서 성공과 실패로, 하인리히의 왕위 주장은 독일 왕들의 직할지였던 프랑켄 공국의 지지를 얻는 데 의지하였다. 마인츠 대주교 빌리기스 (독일 수석 대주교)와 슈바벤 공작 콘라트 1세 등이 이끌었던 프랑켄 귀족들은 오토 3세를 저버리는 것을 거부하였다. 전면적인 내전 발발을 우려한, 하인리히 2세는 985년 6월 29일 오토 3세에게 오토의 어머니와 조모 등과 공동 섭정권을 내주었다. 항복에 대한 대가로, 하인리히 2세는 신임 케른텐 공작이 된 하인리히 3세를 대신하여 바이에른 공작으로 복위되었다.
989년 오스트리아 변경백령을 제외한 카란티아와 이탈리아의 베로나 변경주마저 되찾는데 성공한 하인리히 2세는 바이에른의 내치에 주력했고,(란쇼펜법, 995년) 교회 개혁의 시작을 추진했다. 하인리히 2세는 995년 8월 28일, 건더스하임의 여동생인 게르베르가 2세 수도원장을 방문하는 중 사망했고, 바이에른의 공작위는 아들인 하인리히 4세가 승계받게 되었다.
2.6. 오스트리아(오버외스터라이히의 서부 일부+니더외스터라이히)
현재의 바이에른 남부와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 역시 로마 제국 당시 노리콤, 판노니아 수페리오르, 판노니아 인페리오르 등의 속주에 속해 있었다. 하지만 5세기 훈족의 침입으로 인해 사실상 버려진 지역으로 이후 이 지역에 고트족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고, 476년 서로마 제국이 붕괴될 당시 노리콤과 판노니 양쪽 지역은 동고트 왕국의 영토가 된 상태였고, 오스트리아 북부 지역인 오버 외스터라이히와 니더 외스터라이히는 루기족의 영토로 펠레테우스였다.당시 그는 동고트족 여성과 결혼해 동고트 왕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고, 오도아케르가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를 퇴우시키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동로마 제국의 제노의 이간책으로 적대적 관계가 되었고, 페레테우스는 오도아케르를 지지한 조카 프레데릭스를 처형했다. 그 후, 오도아켈은 루기 왕국을 침공하여 현재 비엔나 부근의 전투에서 루기 왕국을 멸망시켰다. 펠레테우스와 그의 아내는 붙잡혀 487년에 라벤나에서 처형되었고, 루기족의 영토는 헤롤리족이 차지했다. 2년 후 펠레테우스의 아들 프리드리히의 통치하에 살아남은 루기족은 동고트족의 왕 테오도리크 대왕의 신하가 되면서 루기족은 동고트 왕국에 흡수되었지만 영토는 여전히 헤롤리족의 영역에 있었다.
그러다가 490년 랑고바르드족은 490년경에 루기족의 옛 영토에 정착했는데, 당시 왕은 고데호크로 그의 조부인 레토를 시조로 하는 레팅스 왕조의 세번째 왕이었다. 당시 현재의 슬로바키아를 기반으로 다른 게르만족인 헤롤리족이 현재의 슬로바키아를 기점으로 랑고바르드족이 지배하고 있던 루기족의 영토까지 그들의 영토였다. 이에 고데호크나 아니면 그의 아들인 클라포가 헤롤리족에게 복속되는 것을 택했다. 또한 이시기에 게르만 전통 신앙에서 기독교의 이단 종파인 아리우스파로 개종했다.
그러나 5대 왕인 타토 때에 이르려 랑고바르드족은 헤롤리족과 전쟁을 하게 되었다. 랑고바르드의 연대기 작가 파울 부제의 언급에 따르면 당시 랑고바르드족의 왕 타토의 딸인 로메트루드가 사절로 온 루돌프의 동생을 죽였다고 하고 동로마 제국의 연대기 작가 프로코피우스의 언급에 따르면 헤롤리족에 기본의 납부액을 세배로 올리면서 양자간 전쟁이 발발했다고 한다. 결국 508년 타토가 이끄는 랑고바르드족은 헤롤리족을 격파에 그들의 왕인 루돌프를 죽이면서 헤롤리 왕국은 붕괴되었고, 살아남은 헤롤리족들은 제각기 동고트 왕국이나 동로마 제국으로 도망친 후 현지에 동화되어 사라지게 되었다.
이후 동고트 왕국은 랑고바르드족과 불안한 공존을 하게 되나 526년 테오도리쿠스 대왕이 사망한 후 9년간 왕위 계승 분쟁으로 동고트 왕국이 약해지자 535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때 랑고바르드족은 동고트 왕국과 동맹인 게피드 왕국의 위협을 받게 되었는데, 랑고바르드족은 동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고 대규모 보조군을 보내 나르세스 장군이 이끄는 동로마군이 동고트 왕국을 무너뜨리고 이탈리아를 석권하는 데 크게 기여했고, 552년 다뉴브강과 사바강 사이로 추정되는 아스펠드에서 아우도인의 아들인 알보인이 게피드 족의 군주 투리신드의 아들 투리스모드를 처단하면서 동로마 제국에게 보상으로 사실상 버려진 판노니아와 함께 노리콤을 영토로 공인받으면서 완전히 정착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568년 랑고바르드족이 동쪽에 이웃한 아바르 칸국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남쪽의 이탈리아 방면으로 이주했고, 아바르족들이 랑고바르드족의 모든 땅들을 차지하게 되었고, 이후 그자리에 게르만족에 속하는 혼성부족집단인 바이에른인들이 지속적으로 정착했으며. 6세기 말에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잔재는 해체되었으며, 아바르족에게 포위된 슬라브족은 옛 노리콤 일대에 정착했고 나머지 켈트-로마닉 인구가 그들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에 610년경까지 그들은 이미 북쪽에서 온 바이에른족을 만났을 때까지 드라우,드라바[17]를 따라 더 서쪽으로 밀렸다,
이후 오스트리아 지역은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었는데, 6세기 중반인 550년경부터 프랑크 왕국에 형식적으로 복속된 채로 북부 알파인 지역에 바이에른 부족공국이 형성되었으며, 그 통치자는 아길로핑(Agilolfinger)가문 출신이며 프랑크왕국(Frankish)의 종주권 아래 있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바이에른 사람들의 정착 지역은 남쪽으로는 오늘날의 사우스 티롤 까지, 동쪽으로는 현재의 오스트리아 북부 지역들인 니더외스터라이히와 오버외스터라이히를 가로 지르는 엔스까지 확장되었으며, 아바르인(Avars)과 슬라브족(Slavs)은 동쪽과 오늘날의 보헤미아 지역(체코)에 정착했으며, 오늘날의 오스트리아 남부에서 드라우(Drau,크로아티아), 무라(Mura,슬로베니아), 사베(Save) 계곡에 정착한 슬라브 부족은슬라브인들은 6세기경에 모라비아, 북부 로어외스터라이히, 북서부 보헤미아, 카린티아, 티롤,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북부, 헝가리 등지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다 6세기 말에 판노니아 평원에서 출발한 아바르 칸국에 정복된 뒤 아바르 칸에게 공물을 바치고 아바르족이 치르는 전쟁에 동원되었다. 그러다가 아바르 칸국이 동로마 제국과 기나긴 전쟁을 치르면서 쇠락해지자, 슬라브 부족들은 이 때를 틈타 독립을 꾀했다. 프레데가르 연대기에 따르면, 아바르족[18]은 슬라브인[19]들의 아내와 딸과 함께 잠을 자며 겨울을 보냈으며, 슬라브인들은 매년 칸에게 경의를 표하고 공물을 바쳤다. 아바르족 아버지와 슬라브족 아내와 딸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은 이 수치스러운 억압을 참을 수 없어 칸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사모를 왕으로 추대해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프레데가르 연대기에 따르면, 사모는 본래 슬라브 부족의 영역에서 상품을 판매하는 상인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슬라브족이 아바르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참여해 뛰어난 군사적 역량을 발휘해 그들이 승리를 거두는 데 일조했고, 이에 깊은 감명을 받은 슬라브인들에 의해 렉스로 추대되었다고 한다. 프레데가르 연대기는 이때가 프랑크 국왕 클로타르 2세 재위 40년이었다고 기술했는데, 현대 학자들은 이를 토대로 서기 623년 또는 624년에 사모가 지도자로 추대되었을 거라고 본다.
이후 사모는 재위 후반에 들어서 프랑크 왕국과 전쟁을 벌이는 등 세력을 크게 성장했으나 658년 또는 659년에 사모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들 중 누구도 아버지의 직위를 계승했다는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 것을 볼 때, 그가 사망한 직후 슬라브 부족들은 도로 뿔뿔이 흩어졌던 것으로 보이며, 아바르 칸국은 사모가 사망한 후 신속하게 슬라브인들의 영역에 진입해 다시 슬라브족들 지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때 현재의 케른텐에 살고 있는 슬라브족들은 아바르의 지배를 피하는 데 성공, 공국을 형성했다.
카란타니아 공국이 역사상 처음 언급된 시기는 658년으로 인전까지 사모 제국이나 아니면 랑고바르드 왕국에 속해있는지에 대해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 랑고바르드 왕국의 연대기 작가인 부제 바울은 664년의 기록을 통해 지리적 용어인 카란타눔(Carantanum)이란 라틴어와 이와 관련하여 그곳에 살고 있는 특정 슬라브 민족(gens Sclavorum)을 언급했으나 740년 프랑크과 바이에른의 연대기 작가들이 기록하기 전까지 미상으로 남아 있었다.
다만 카란타니아의 공작으로 선거군주제 방식으로 선출되었으며, 군주의 돌이라 하여 로마시대의 기둥 머릿돌과 그것을 받쳐주는 공작의 의자라는 석조의자에 앉아 정통성을 인정받았다.
한편 아바르족은 567년에 게피드제국을 멸망시킨 후, 판노니아를 장악했고 그곳에서 약 250년 동안 비엔나, 로여 오스트리아, 부르겐란트, 니더외스터라이히와 스티리아의 일부를 포함하는 제국을 통치했다.
바이에른, 아바르, 카란타니아에 의한 오늘날 오스트리아의 삼자 분할은 8세기에 끝났다. 8세기경인 743년 이전, 카란타니아 공작 보루스는, 아바르인의 침략에 대해 바이에른 공작 오딜로에 의지하면서 바이에른에 복속되었다. 이후 바이에른에 복속되면서 당시 바이에른에 속해 있던 잘츠부르크 주교 베르길리우스의 주도하에 기독교 신앙이 전파되면서 보루스의 아들인 카키티우스와 조카 체이투마르가 잘츠부르크에 온 후 기도교로 개종했고, 이후 보루스가 죽자 카키티우스가 752년 체이투마르가 카란타니아를 통치했다. 그러다가 763년 기독교의 전파에 대해 반발한 이교도 슬로베니아인의 반란으로 기독교인인 공작 발훈이 추방되었지만 772년에 바이에른 공작 타실로 3세에 의해 진압되었고, 발훈은 다시 복위하였다.
이후 788년 카롤루스에 의해 아길롤핑 가문의 공작 타실로 3세를 폐위시키고 바이에른을 프랑크 왕국의 일부로 편입시킨다. 한편 아바르의 동치되고 있던 지역 또한 강력한 리더십과 카리스마가 결여된 칸들이 연이어 자리에 오르면서 아바르 칸국이 정치적 혼란으로 쇠퇴해져 가자 788년부터 프랑크 왕국 카롤링거 왕조의 카롤루스 대제가 대규모 공격을 가해오자 약해질 대로 약해진 아바르 칸국은 제대로 된 저항도 못하고 패배를 거듭했다.이후 790년 화평을 제안했으나 결국 성사되지 못했고 791년부터 다시 프랑크 왕국이 처들어와왔다. 프랑크인들은 점령한 영토에서 잔혹한 폭정과 수탈을 반복했고 이것을 참지 못한 아바르인들과 토착민들의 대규모 반란이 795년에 일어났으나 진압되었고 결국 796년에 아바르 칸국은 항복했고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 프랑크 왕국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면서 아바르의 지바하에 있던 현재의 오스트리아에 있던 지역들이 프랑크 왕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다만 린츠를 중심으로 한 오버외스터라이히 지역의 대부분은 여전히 바이에른에 속해이었으며, 오버외스터라이히의 일부와 함께 니더외스터라이히에 속하게될 지역들이 아바르 변경주로 재편되었다.아바르 변경백은 초대 바이에른 지사인 게롤드가 겸하고 있었다가 799년 끝까지 복속하지 않은 아바르족들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날아온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고, 아바르 변경주의 통치는 르드흐에 주둔 중이었던 게롤드의 부관들인 베르너 1세와 고테람이 각기 분담하게 되었다.
이시에 아바르 변경주의 지방 행정이 재조직되었는데, "구 바이에른" 트라우가우는 "신 바이에른" 카란타니아, 카를의 아바리아, 그리고 잃어버린 프리울리 공국의 북동부 지역과 합병되었다. 아바르 변경주의 주도는 당초 로마의 옛 마을인 로르히 앤 데어 엔스였으나 바이에른 지사가 변경백을 겸하고 있었기에사실상 바이에른의 레겐스부르크가 주도 역할을 했다.
803년, 805년, 811년에도 추가 원정이 이어졌다. 이 전쟁 과정에서 프랑크족의 영향력 아래 있던 국경 지역은 판노니아 깊숙한 곳까지 확장되었다. 카를루스 대제의 아바르 원정은 아바르 칸들과[20] 다른 아바르 고위 인사들의 복속으로 끝났다. 그들이 최종적으로 복속되기 전에도 카룰루스는 아바르 공국을 세웠다.
그러나 799년과 803년 사이에 아바르족의 반란이 다시 일어났다. 802년 고테람이 아바르족의 세번째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잔사한다. 베르너 또한 805년에 사망하였고, 이때 아바르족 내에서 카르눈툼과 사바리아 사이에 종속 공국이 만들어졌다. 이후 베르너의 후임인 알브리은 이름외엔 치적에 대해선 알려진 것이 없으며, 이사이에 817년, 경건한 왕 루도비쿠스 1세는 그의 아들 독일인 루트비히 2세에게 바이에른과 아바르 변경주를 분할 상속분으로 넘겨주었다. 이때를 기점으로 아바르 변경주는 동쪽 국경(ost reich)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후 언제 승계했는지에 대해서 미상이나 루도비쿠스 1세 시기의 변경백에 임명된 고타프리드와 게롤드 2세가 있었다. 이중 고타프리드는 820년경 파사우 주교 레지나르와 806년 카롤루스 대제가 파사우 주교령의 토지로 사여한 바하우와 생푈텐 근처의 토지 소유권을 놓고 갈등을 빚었으나 823년 루도비쿠스가 파사우 주교의 손을 들어준다. 한 편 이시기는 819년부터 822년까지 남부는 시삭의 군주인 포사비엔의 류데비트의 위협을 받았다. 왕자는 프리울리 변경백인 차달로와의 얄력 끝에 생긴 분쟁에 대해 루도비쿠스 황제에게 항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카란탄족과 티모칸족과 함께 프랑크 제국에 등을 돌렸다. 819년 차달로는 류데비트를 상대로 전장을 나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반란은 6년간 이어졌다가 823년 차달로의 후계자인 발데리히 변경백이 이끄는 프랑크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고, 류데비트는 남쪽으로 도주히였다.
이후에도 825년 불가리아의 칸 오무르타그가 슬라브계 티모차니 부족이 프랑크 왕국에 합류하려는 것에 대해 프랑크 왕국에게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위협했지만, 프리울리 변경백 발데리크와 국경의 방어를 맡은 게롤트는 불가리아의 군사력을 위험을 과소평가했다. 827년 불가리아는 판노니아 변경주와 그 북쪽 영토 일부를 침략하여 정복했고, 829년에는 라티미르를 판노니아 남부 공작으로 임명했다.
이 패배로 인해 828년 프리울리의 발데리크는 패전의 책임으로 경건한 루도비쿠스에에 의해 해임되었고, 게롤트는 황제와의 친족 관계 덕분에 그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833년 초에 라트보드로 교체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니트라 공작 프리비나가 모라비아 공 모이미르 1세와의 경쟁에서 패배한 후 가족들과 일부 추종자들과 함께 동부 변경주의 라트보드에게로 도망쳐야 했다. 라트보드는 그를 루트비히 2세에게 보냈고. 루트비히는 프리비나에게 트라이스마우어에서 세례를 받았한 후 다시 라트보드에게로 보낸 후 그의 군대에서 복무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라트보드와 프리비나는 분쟁이 발생하게 되었고, 프리비나는 생명의 위협까지 받게 되자 결국 다시 망명길에 올라 아들 코제치와 함께 1차 불가리아 제국령인 로어 판노니아를 통치하고 있던 라티미르에게로 도망쳤다.
그러나 로어 판노니아는 동부 변경주에 이중으로 복속되어 있었기에 라티미르가 프리비나의 망명을 받아들이는 것은 라트보드에 대한 반란과 같기 때문에 838년 루트비히는 라티미르를 진압하기 위해 라드보트를 선봉으로하는 바이에른의 군대를 파견했지만 카르니올라 변경백아 라드보드와 프리비나 사이의 화해를 중재했고, 루이는 프리비나를 자라 강 주변의 땅을 영지로 하는 로어 판노니아 발레톤 공(Lower Pannonia Balaton Fürst)으로 임명함으로써 반란을 무마시키는데 성공한다.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프랑크 왕국이 셋 으 로 분할되면서 동부 변경주 또한 동프랑크 왕국에 편입되었다. 라트보드는 오랫동안 바이에른에게 위험을 가져온 모라비아 공작 모이미르의 후계자인 라스티슬라프와 접촉을 가졌다. 생 베르탄의 연대기에 따르면 853년 서 프랑크 왕 샤를 2세는 불가리아인에게 뇌물을 주고 슬라브인[21]과 동맹을 맺고 함께 동프랑크 왕국을 공격했다. 불가리아와 모라비아의 공격 과정에서 반란까지 일어나게 되자 루트비히는 라트보드를 추방했다.
이에 라트보드는 라스티슬라프와 동맹을 맺었다. 855년에 라스티슬라프가 반란을 일으켰고, 856년 카를로만이 라드보드를 대신하여 변경백이 되었는데, 동부 지역뿐만 아니라 카란타니아와 함께 명목상의 판노니아 변경백의 지위를 주었다. 그러나 아버지 독일인 루트비히는 그에게 군사권 이외의 권리는 일부만을 넘겨주어, 자신의 재가를 받게 하였다.
858년 라체슬라프는 카를로만에게 많은 양의 금과 보물을 뇌물로 바쳐왔고, 그는 이를 받았다. 860년 무렵 독일인 루트비히는 이복 동생 대머리 카를의 서프랑크 영토를 공격했다가 실패하고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였다. 한편 카를만은 여러 사령관들과 갈등을 벌인 끝에 그들을 해임하고 추종자들로 교체했다. 루트비히 2세는 자기 허락을 받지 않고 임의로 인사권을 행사한 아들을 질책했다.
이로 인해 부자간의 사이가 나빠졌고, 동프랑크 왕국의 동부 국경지대를 관리하던 카를로만은 모라비아의 라디슬라프 대공 및 일부 콘라디안 가문 귀족들과 협력하여, 아버지 독일인 루트비히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포로로 잡혔지만 다시 동부지역의 이민족 군사들이 그를 탈옥시켜 바로 도망 칠 수 있었다.
이후 3년간 부자간의 내전과 함께 자간의 화해와 휴전 시도가 있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카를로만은 판노니아 후작 리하르트(Richart), 케른텐 백작 파보, 케른텐 후작 군다카르(Gundacart) 등을 부관으로 삼아 864년 베를린을 침공했고, 결국 아버지 독일인 루트비히는 세 아들에게 나눠줄 영토를 바이에른, 작센, 알레만니아로 삼분하고, 아들들을 각자 현지의 유력인사의 딸들과 결혼시켰다. 그러나 카를로만의 본부인의 이름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862년 카를로만은 아버지의 승인 없이 독자적으로 바이에른 밖의 부족들을 정벌하여 영토를 확장하려 했으나, 게르만 전사들에게 패배하고 돌아왔다. 865년 그는 프랑크푸르트에서 바이에른의 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카를만과 삼형제를 지원한 많은 동프랑크의 귀족들은 처벌받았다.
866년 카를로만은 영토 분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케른텐 후작 군다카르 등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었다. 870년 라스티슬라프의 친척인 스바토플루크 1세가 라스티슬라프를 체포한 뒤 동프랑크 왕국에 넘길 때 직접 가서 라스티슬라프의 신변을 확보했다. 라스티슬라프는 프랑크푸르트로 끌려간 뒤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루트비히 2세는 평결을 실명형으로 완화했다. 그러나 스바토플루크 1세도 얼마 지나지 않아 루트비히 2세를 상대로 반기를 들었다. 871년 프랑크군이 모라비아로 출격했으나 스바토플루크의 매복에 걸려 몰살당했다. 또한 이시기에 동부 변경주를 오버 판노니아와 니더 판노니아로 분할해 오버 판노니아 변경백에 빌헬름과 엔켈샬크을 임명했거, 니더 판노니아 변경백직은 본인이 겸직하다가 876년 서자인 아르눌프에게 양도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빌헬름과 엔켈샬크는 모라비아 공국과의 전쟁에서 전사하면서 트라우가우 백작 아리보가 동부 변경주의 통치자로 임명되었다. 아리보는 모라비아의 스바토플루크 공작과 평화를 유지했으나 882년 전임자들인 아들들이 카란시아 공작이자 카를로만의 서자 아르눌프의 지원을 등에 업고 무력으로 동부 변경백의 자리를 뺏았기 위해 내전을 일으켰다. 이에 아리보는 동맹인 스바토플루크는 물론이고, 뚱보왕 카를 3세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다.
스바토플루크는 판노니아를 침공하면서 엔켈샬크 2세의 형제 중 한 명을 죽였고, 살아 남은 빌헬미너 가문의 귀족들은 아르눌프의 비호하에 무사할 수 있었다. 이후 내전은 884년을 이어지다가 카를 3세가 카움베르그까지 와 스바토플루크를 봉신으로 삼으면서 종결되었으나 이로 인해 숙질간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888년 카를 3세가 실정 등으로 인해 인망을 잃다가 아르눌프의 압력으로 퇴위했다.
하지만 아르눌프가 아리보를 해임시키기에 동부 변경주에 아리보의 영향력이 너무나도 강했고, 결국 893년 아르눌프는 판노니아 일부 지역을 때어내 엔겔샬크 2세를 그곳의 백작으로 임명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시기에 아르눌프는 자신이 갖고 있던 카란시아 공작위 및 니더 판노니아 변경백위를 바이에른 귀족인 루이트폴드에게 내주었다.
904년에서 905년 사이 아리보는 다뉴브 무역을 위한 새로운 관세 제도를 마련하기 위해 린츠 남동쪽에 위치한 라펠슈테트너(Raffelstettener)[22]]에서 관세법 제정을 위한 지역 회의를 주최했고, 라펠슈테트너 관세법(Raffelstettener Zollordnung)을 제정해 다뉴브 강과 동부 지역 의 광범위하고 규제된 무역 거래를 구축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907년 아르파드의 지도하에 마자르족들이 동쪽으로 부터 쳐들왔다. 아리보는 마자르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분투했으나 906년 모라비아 왕국을 멸망시킨 마자르족들은 여세를 몰아 동부 변경주를 공격했고, 결국 프레스부르크 전투(Battle of Pressburg)에서 패배와 함께 동부 변경의 대부분을 빼앗기고 말았고, 바이에른과 니더 판노니아 변경백인 루이트폴드는 전사했다. 909년에 아리보는 잘츠부르크 대주교 필그림 1세와 함께 소년왕 루트비히 4세로보부터 현재의 오버외스터라이히의 구 뮌스터 수도원의 소유권을 인정받았지만 얼마 안가 들소 사냥 중 사망하고 만다. 이후 동부 변경주의 남은 지역은 바이에른에 병합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편 마저르족의 지배하의 옛 동부 변경주는 바이에른계 세속 및 교회 귀족의 대다수가 전멸되었고, 현지의 대부분 정치권을 장악한 마자르족들은 그리고 동프랑크의 교회 조직을 해체하고 새로운 구조를 구축했는데, 마자르족은 현재의 오스트리아 지역에 대규모로 정착하지 않았으나 그들의 영향력은 주로 군대 주둔으로 제한되었다.
바이에른 동부 지역을 통치한 약 60년 동안 그들은 바이에른의 이전 영주들의 기반 시설이나 소유물을 파괴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었지만 적어도 교회 영주들에게는 동방에서의 물품 사용이 엄격하게 제한되었으로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시기까지 동부 변경주 내의 백작들은 특별한 군사적 임무와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위해 세금을 부과할 수 있었다. 아바르 시대의 "옛 정착지"에 더하여, 옛 아바르 주인에 의해 추방된 바이에른인과 자유 슬라브인들의 새로운 정착지가 아바르 변경주에 세워졌다. 그러나 바이에른인과 슬라브인의 공동 정착촌도 있었다.
그러다가 955년 오토 1세가 레히펠트 전투에서 마자르족들을 패배시키면서 동부 변경지대는 당시 동프랑크에 의해 탈환되었다. 이후 오토 1세는 마저르족 점검 이전 둘로 분할시켰던 동부변경지대를 오스트리아 변경백국으로 개편시켜 부르카르트를 초대 변경백으로 임명했다.
이때 오스트리아 변경주는 여전히 바이에른 공국에 종속되었으나 부르카르트는 마자르의 점거 동안 황폐화된 오스트리아를 재건시켜 나갔다. 하지만 오스트리아가 바이에른에 종속된 만큼 그 역시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에게 종속되었기에 976년 하인리히 2세가 오토 2세에 대한 반역에 가담한 것인지 하인리히 2세가 바이에른 공작위를 상실했을 때 그 역시 오스트리아 변경백위를 상실했고, 오토 2세는 바이에른의 세력을 약화시킬 겸 오스트리아를 바이에른으로 완전히 분류시킨 후 바벤베르크 가문의 레오폴트를 오스트리아 변경백으로 임명시킨다.
레오폴트 1세는 976년 7월 21일 레겐스부르크에서 바이에른 수도원의 미사를 위해 작성된 황제의 문서를 통해 청원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스트리아 변경백이 되었다. 이로써 오스트리아에 270년간 지속된 바벤베르크 왕가의 제후가문 통치 시대가 막을 열었다.
동방에서의 재정착은 다뉴브 강 하류의 푀클라른(Pöchlarn) 요새를 중심으로 하는 느린 과정이었다. 레오폴트의 변경백 직위는 원래 현재의 바하우(Wachau)계곡과 일치했으며 동쪽 경계는 크렘스(Kream) 동쪽의 장크트푈텐(Sankt Pölten) 근처의 트라이젠(Traisen) 강이었다. 955년에 패배한 후 마자르족의 위협이 크게 줄어들자 레오폴트는 내부 위협과 불화로부터 자신의 영토를 보호하는 데 집중했다. 984년에 그는, 여전히 이전 변경백의 지지자들에 의해 통제되고 있던 멜크 요새를 축소하는데 참여했다. 멜크 요새가 확보된 후 레오폴트는 거기에 12명의 세속 사제를 위한 수도원을 설립하여 그곳을 자신의 거주지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987년에 이르자 레오폴트는 자신의 변경백 경계를 비너발트 산맥까지 확장하였고, 991년에 바이에른 공작으로 하인리히 2세와 공동으로 자신의 변경백 경계를 더 멀리 피샤(Fischa) 강까지 확장했다.
994년 레오폴드는 뷔르츠부르크로 가서 그의 사촌 슈바인푸르트의 하인리히 변경백과 뷔르츠부르크 주교 베른바르트 폰 로텐부르크 사이의 분쟁을 중재했다. 7월 8일에 열린 토너먼트에서 레오폴트는 그의 사촌을 겨냥한 화살에 눈을 맞았다. 이틀 후인 994년 7월 10일 그는 부상으로 사망했고, 아들인 하인리히 1세가 변경백위를 승계한다.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오토 3세는 주교 세력의 강화를 꾀하고 있었는데, 이런 사실은 오토 3세의 여러 봉토 증여 문서에 드러나 있다. 996년 11월 1일 오토 3세가 프라이징 주교 고트샬크에게 하인리히 1세 변경주의 왕실 토지 30후페(후페는 중세의 농지단위)를 노이호펜의 일부 시설과 함께 수여했다. 이 지역을 봉토로 수여하면서 발행한 증여 문서에 '오스타리히(동쪽 땅)'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했다. 이 문서가 바로 그 유명한 오스타리히 증서이다.
이 증서는 프라이징의 한 공증인이 973년 11월 작성된 황제 오토 2세의 문서를 표본으로 삼아, 1~9번째 줄까지 작성한 문서를 황제에게 제출했다. 왕궁 소속 공증인에 의해 10~12번째 줄이 추가 작성된 후, 황제 오토 3세가 서명했다. '오스타리히'는 오스트리아 국가명이 최초로 기록된 문서로 오스트리아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오스타리히'는 바이에른의 동쪽 지역을 일컬으며, 엔스 동쪽 작은 지역부터 비너발트까지 아우르는 지역이다.
2.7. 케른텐 또는 카란티아(현 오스트리아령 케르텐+아드리아해 방면 해안 지대를 제외한 슬로베니아 전역)
현재의 바이에른 남부, 오스트리아와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의 케르텐과 슬로베니아 역시 로마 제국 당시 노리콤, 판노니아 수페리오르 등의 속주에 속해 있었다. 하지만 5세기 훈족의 침입으로 인해 사실상 버려진 지역으로 이후 이 지역에 고트족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고, 476년 서로마 제국이 붕괴될 당시 노리콤과 판노니 양쪽 지역은 동고트 왕국의 영토가 된 상태였으나 526년 테오도리쿠스 대왕 535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때 일시적으로 일시적으로 탈환되었을 뿐 이후 랑고바르드, 아바르족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568년 랑고바르드족이 동쪽에 이웃한 아바르 칸국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남쪽의 이탈리아 방면으로 이주했고, 이후 그자리에 게르만족에 속하는 혼성부족집단인 바이에른인들이 지속적으로 정착했으며. 6세기 말에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잔재는 해체되었으며, 아바르족에게 포위된 슬라브족은 옛 노리콤 일대에 정착했고 나머지 켈트-로마닉 인구가 그들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에 610년경까지 그들은 이미 북쪽에서 온 바이에른족을 만났을 때까지 드라우,드라바[23]를 따라 더 서쪽으로 밀렸다,
이후 오스트리아 지역은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었는데, 6세기 중반인 550년경부터 프랑크 왕국에 형식적으로 복속된 채로 북부 알파인 지역에 바이에른 부족공국이 형성되었으며, 그 통치자는 아길로핑(Agilolfinger)가문 출신이며 프랑크왕국(Frankish)의 종주권 아래 있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바이에른 사람들의 정착 지역은 남쪽으로는 오늘날의 사우스 티롤 까지, 동쪽으로는 현재의 오스트리아 북부 지역들인 니더외스터라이히와 오버외스터라이히를 가로 지르는 엔스까지 확장되었으며, 아바르인(Avars)과 슬라브족(Slavs)은 동쪽과 오늘날의 보헤미아 지역(체코)에 정착했으며, 오늘날의 오스트리아 남부에서 드라우(Drau,크로아티아), 무라(Mura,슬로베니아), 사베(Save) 계곡에 정착한 슬라브 부족은슬라브인들은 6세기경에 모라비아, 북부 로어외스터라이히, 북서부 보헤미아, 카린티아, 티롤,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북부, 헝가리 등지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다 6세기 말에 판노니아 평원에서 출발한 아바르 칸국에 정복된 뒤 아바르 칸에게 공물을 바치고 아바르족이 치르는 전쟁에 동원되었다. 그러다가 아바르 칸국이 동로마 제국과 기나긴 전쟁을 치르면서 쇠락해지자, 슬라브 부족들은 이 때를 틈타 독립을 꾀했다. 프레데가르 연대기에 따르면, 아바르족[24]은 슬라브인[25]들의 아내와 딸과 함께 잠을 자며 겨울을 보냈으며, 슬라브인들은 매년 칸에게 경의를 표하고 공물을 바쳤다. 아바르족 아버지와 슬라브족 아내와 딸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은 이 수치스러운 억압을 참을 수 없어 칸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사모를 왕으로 추대해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프레데가르 연대기에 따르면, 사모는 본래 슬라브 부족의 영역에서 상품을 판매하는 상인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슬라브족이 아바르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참여해 뛰어난 군사적 역량을 발휘해 그들이 승리를 거두는 데 일조했고, 이에 깊은 감명을 받은 슬라브인들에 의해 렉스로 추대되었다고 한다. 프레데가르 연대기는 이때가 프랑크 국왕 클로타르 2세 재위 40년이었다고 기술했는데, 현대 학자들은 이를 토대로 서기 623년 또는 624년에 사모가 지도자로 추대되었을 거라고 본다.
이후 사모는 재위 후반에 들어서 프랑크 왕국과 전쟁을 벌이는 등 세력을 크게 성장했으나 658년 또는 659년에 사모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들 중 누구도 아버지의 직위를 계승했다는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 것을 볼 때, 그가 사망한 직후 슬라브 부족들은 도로 뿔뿔이 흩어졌던 것으로 보이며, 아바르 칸국은 사모가 사망한 후 신속하게 슬라브인들의 영역에 진입해 다시 슬라브족들 지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때 현재의 케른텐에 살고 있는 슬라브족들은 아바르의 지배를 피하는 데 성공, 공국을 형성했다.
카란타니아 공국이 역사상 처음 언급된 시기는 658년으로 인전까지 사모 제국이나 아니면 랑고바르드 왕국에 속해있는지에 대해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 랑고바르드 왕국의 연대기 작가인 부제 바울은 664년의 기록을 통해 지리적 용어인 카란타눔(Carantanum)이란 라틴어와 이와 관련하여 그곳에 살고 있는 특정 슬라브 민족(gens Sclavorum)을 언급했으나 740년 프랑크과 바이에른의 연대기 작가들이 기록하기 전까지 미상으로 남아 있었다.
다만 카란타니아의 공작으로 선거군주제 방식으로 선출되었으며, 군주의 돌이라 하여 로마시대의 기둥 머릿돌과 그것을 받쳐주는 공작의 의자라는 석조의자에 앉아 정통성을 인정받았다.
한편 아바르족은 567년에 게피드제국을 멸망시킨 후, 판노니아를 장악했고 그곳에서 약 250년 동안 비엔나, 로여 오스트리아, 부르겐란트, 니더외스터라이히와 스티리아의 일부를 포함하는 제국을 통치했다.
바이에른, 아바르, 카란타니아에 의한 오늘날 오스트리아의 삼자 분할은 8세기에 끝났다. 8세기경인 743년 이전, 카란타니아 공작 보루스는, 아바르인의 침략에 대해 바이에른 공작 오딜로에 의지하면서 바이에른에 복속되었다. 이후 바이에른에 복속되면서 당시 바이에른에 속해 있던 잘츠부르크 주교 베르길리우스의 주도하에 기독교 신앙이 전파되면서 보루스의 아들인 카키티우스와 조카 체이투마르가 잘츠부르크에 온 후 기도교로 개종했고, 이후 보루스가 죽자 카키티우스가 752년 체이투마르가 카란타니아를 통치했다. 그러다가 763년 기독교의 전파에 대해 반발한 이교도 슬로베니아인의 반란으로 기독교인인 공작 발훈이 추방되었지만 772년에 바이에른 공작 타실로 3세에 의해 진압되었고, 발훈은 다시 복위하였다.
이후 788년 카롤루스에 의해 아길롤핑 가문의 공작 타실로 3세를 폐위시키고 바이에른을 프랑크 왕국의 일부로 편입시키면서 보루스, 그 아들 카카티우스, 조카 케이투말은 프랭크의 가신으로 통치했지만 이때 카란타니아는 프랑크 분국의 랑고바르드 왕국에 속하는 프리올리와 이스트리아 반도의 이스트리엔 변경주의 일부로 편입되어 아바르 칸국의 침략 방비 및 아바르 칸국 정복을 위한 전진기지화되었다.
이후 아바르 칸국이 통치되고 있던 지역 또한 강력한 리더십과 카리스마가 결여된 칸들이 연이어 자리에 오르면서 아바르 칸국이 정치적 혼란으로 쇠퇴해져 가자 788년부터 프랑크 왕국 카롤링거 왕조의 카롤루스 대제가 대규모 공격을 가해오자 약해질 대로 약해진 아바르 칸국은 제대로 된 저항도 못하고 패배를 거듭했다.이후 790년 화평을 제안했으나 결국 성사되지 못했고 791년부터 다시 프랑크 왕국이 처들어와왔다.
프랑크인들은 점령한 영토에서 잔혹한 폭정과 수탈을 반복했고 이것을 참지 못한 아바르인들과 토착민들의 대규모 반란이 795년에 일어났으나 진압되었고 결국 796년에 아바르 칸국은 항복했고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 프랑크 왕국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면서 아바르의 지바하에 있던 현재의 오스트리아에 있던 지역들이 프랑크 왕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810년경까지 카란타니아와 아바르·판노니아 변경주들은 프랑크의 주권을 인정하는 댓가로 자치권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816년 프리올리 변경백 카돌라가 등장한 이후 세 지역들은 카돌라에 포정에 정차 자치권마저 위협을 받게 되었다. 818년 하 판노니아 공작으로 임명된 슬라브족 출신의 류데비테 포사브스키(Ljudevit Posavski)는 루도비쿠스 1세에게 청원해 카돌라의 폭정을 저지하려고 했으나 그의 처원을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에 좌절한 류데비테는 결국 819년 반란을 일으켰고, 카란타니아를 비롯한 아바르와 판노니아의 슬라브족들이 이에 호응했고, 이에 루도비쿠스는 카돌라에게 반란 진압을 명했으나 카돌라의 진압군은 패배했고, 카돌라는 프리올리로 돌아왔으나 전쟁에서 얻은 질병으로 인해 사망했다.
그러나 새로운 프리올리 변경백으로 임명된 발드릭은 4년에 거쳐 류데비테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성공했으나 827년 벌가르인들이 카란타니아를 침공했다. 828년 루도비쿠스는 프리올리의 4개의 지역을 개편한 후 최북단의 두개의 지역들인 카탄시아와 니더판노니아를 각각 바이에른과 이탈리아 왕국으로 분할 귀속시켰고, 뒤이어 바이에른 왕이 된 루트비히 2세는 카란시아의 슬라브족 귀족들을 숙청시킨 후 바이에른계 귀족들을 카탄시아에 분봉시킨다. 또한 현재의 케른텐주를 비롯한 오스트리아 남부 지방에 살던 슬라브족들이 게르만족들과 동화되면서 현재의 오스트리아인을 형성해 갔다. 843년 프랑크 왕국이 분열되면서 카란티아는 바이에른 동부 변경 지대와 함께 동프랑크 왕국에 편입되었다.
이후 카란시아는 855년 바이에른에 귀속되었다가 오스트마르크 변경백 라트보드가 불가리아와 모라비아의 침략을 제대로 대처하기는 커녕 반란까지 발생한 것에 대해서 그의 무능을 이유로 파면되고 대신 장남인 카를로만을 오스트마르크의 지사로 임명했고, 카를로만은 오스트마르크뿐만 아니라 판노니아와 함께 카란티아까지 지배권을 확장했다. 858년 카를로만은 모라비아 공작 라스티슬라프를 굴복시키는데 성공한다.
861년 케른텐 백작 파보(Pabo) 등 케른텐의 군사를 이끌고 아버지 독일인 루트비히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카를로만은 판노니아 후작 리하르트(Richart), 케른텐 백작 파보, 케른텐 후작 군다카르(Gundacart) 등을 부관으로 삼아 베를린을 침공했다. 아버지 독일인 루트비히는 세 아들에게 나눠줄 영토를 바이에른, 작센, 알레만니아로 삼분하고, 아들들을 각자 현지의 유력인사의 딸들과 결혼시켰다. 그러나 카를로만의 본부인의 이름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862년 카를로만은 아버지의 승인 없이 독자적으로 바이에른 밖의 부족들을 정벌하여 영토를 확장하려 했으나, 게르만 전사들에게 패배하고 돌아왔다.
861년과 863년, 864년 아버지에 독일왕 루트비히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곧 그의 동생들 소 루트비히와 뚱보 카를도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한편 아버지 독일왕 루트비히는 863년 아들의 반란을 두려워하여 케른텐의 그의 영지를 침공했다. 독일인 왕 루트비히는 비밀리에 군다카르에게 사자를 보내 협상, 군다카르는 자신의 군사를 이끌고 독일인 루트비히에게 갔고 카를로만은 군다카르를 해임하고 케른텐을 직접 차지하였지만 루트비히 2세는 다시 군다카르를 다시 복직시켰다.
866년 카를로만은 영토 분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케른텐 후작 군다카르 등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었다. 876년 루트비히 2세가 죽자 카를로만은 장자로서 동프랑크 왕위를 잇는다. 이때 카를로만에게 적자가 없는 대신 서자로 카란티아 출신의 귀족 여성인 리우츠빈드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 아르눌프가 있었는데 카를로만은 아르눌프를 카란티아 변경백으로 임명했고, 얼마안가 870년 카란티아 공작으로 승격시켰고, 876년의 어느 시점에 판노니아 공국의 슬라브족 출신 공작 코셀(Kocel)이 사망하자 그는 판노니아 공작직을 부여받았다. 이때를 기점으로 점차 카란티아라는 이름이 점차 보편화되기 시작했고, 무엇보다 봉건 영주 계층이 여전히 너무 약하고 통치자는 슬라브 부족 전통에 의존해야 했기 때문에 카란티아에 서슬라브 문화가 어느 정도 존치했다.
880년 초 아르눌프는 대모라바 왕국에 프랑크족 가톨릭 선교사 니트라(Nitra)를 파견하였다. 880년 봄 중순에 아버지 카를로만은 바이에른과 이탈리아의 통치권을 동생 알레마니아 분국왕 카를 3세에게 넘겼다. 이미 성인이었던 아르눌프는 이에 반발했지만 그는 사생아였고, 그의 권리는 묵살되었다. 이후 그는 계속 바이에른과 이탈리아의 권리를 주장했지만 카를 3세와 루트비히 청년왕의 방해로 실패했다. 그는 케른텐으로 돌아가 계속 장정들을 모아 사병을 양성하였다. 882년 삼촌 카를 3세는 그를 바이에른 공작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882년에 일어난 반란에서 그는 판노니아 후작 엔겔샬크 2세와 판노니아, 모라비아인 등의 반란을 도왔는데, 이 때문에 삼촌인 신성로마제국 황제 뚱보왕 카를 3세와 반목하게 되었다. 판노니아 후작 엔겔샬크 2세와 그의 동생 아리보는 아르눌프의 측근이 되었고, 아르눌프가 황제 카를 3세를 대상으로 한 빌헬마이너 전쟁에서 아르눌프를 적극 후원하였다. 아르눌프는 885년 무렵까지 모라바의 공작 스바토플루크 1세와도 갈등관계에 있었는데 스바토플루크는 황제 카를 3세의 사람이었다.
권력에 대한 야심으로 가득 차 있던 그는 아버지의 영지를 주장하는 선에서 떠나 카를의 폐위를 기도한다. 바이에른, 프랑코니아, 작센, 튀링기아, 알레만니 귀족들의 도움으로 카를 비만왕의 정권 전복을 기도한다. 판노니아의 후작 엔켈샬크 2세가 죽자 아르눌프는 엔켈샬크의 손자인 윌리엄 2세와 손잡고 정변을 준비한다. 카를은 당시 간질과 풍질환을 앓고 있었고 그는 이를 틈타 동프랑크 왕국은 물론이고 서프랑크 왕국 귀족들의 지지를 얻어낸다.
887년 11월 라인란트-팔츠의 트레부르(Trebur)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카를이 바이킹의 침입에 적절한 조치를 못하고 887년 11월 11일 귀족들의 반발을 받고 쫓겨날 때 아르눌프는 군사를 이끌고 아헨으로 쳐들어가 카를의 폐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는데, 비록 영토의 대부분을 카를이 지배하는 상태였지만 그는 프랑크푸르트에서 동쪽 영토의 왕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아르눌프의 통치 기간 동안 니더 판노니아 지역을 비롯해 카란티아 지역은 모라비아 왕국의 공격에 노출되었다. 모라비아 왕 스베토플루크는 군대를 모아 882-884년에 아르눌프와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뒀고, 그 후 판노니아는 황폐화되었고 많은 신민들이 죽었으며 지도자들은 포로로 잡히거나 신체가 훼손된 채로 돌려보내졌다. 888년 아르눌프는 자신의 서자인 츠벤티볼트를 카란팅아 공작으로 임명했다.
모라비아와의 전쟁으로 인해 치명적으로 약화된 카란타니아(Karantania)는 곧 마자르족들의 침공을 받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계기를 제공한 것이 바로 아르눌프로 892년에 모라비아의 스바토플루크에게 복수를 원했던 아르눌프는 당시 아르파드가 이끌고 있던 마자르족들과 동맹을 맺고 모라비아를 공격했다. 그러나 894년 스베토플루크가 죽자 마자르족들은 아르눌프에게 등을 돌리고 판노니아를 침공했다.
이에 아르눌프는 동부 변경의 변경주들들 지키기 위해 니더 판노니아의 슬라브족 제후인 블라슬라프와 함께 어떻게든 마자르족들의 침략에 맞서려고 했으나 897년 마자르족들이 판노니아 전역을 완전히 차지하였고, 899년 아르눌프가 사망하면서 동부 변경 지역의 안전은 아무도 보장할 수 없게 되었다. 츠벤티볼트마저 900년 사망하면서 유아왕 루트비히 4세가 카란티아의 변경백 겸하면서 실질적인 통치는 루트비히 4세의 섭정이자 바이에른 변경백 루이트폴트가 수행했다.
결국 903년 카란티아는 마자르족들에 의해 황폐화되었고, 907년 프레스부르크 전투 에서 마자르족과 싸우는 와중에 루이트폴트마저 전사하면서 아들인 악인공 아르눌프가 그의 타이틀을 전부 상속하면서 황폐화된 카란티아의 변경백위 또한 계승받게 되었다.
아르눌프는 빈번한 마자르족 군대의 습격에 시달리고 방어 재편성을 위한 자금을 얻기 위해, 교회령의 몰수와 많은 수도원령을 교회에서 분리함으로써 권력을 강화시켜 후대에 연대기로 「악인공」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아르눌프는 몇 번의 싸움으로 마자르의 침략을 격퇴했고, 913년에는 친척인 슈바벤 공작의 도움으로 결정적으로 마자르족 군대를 무너뜨렸다. 아르눌프는 바이에른 부족 공국을 재건하고 결국 마자르 대공과의 정전을 협상했다. 마자르족은 그 이후 다른 독일의 공국령에 침공할 때 바이에른을 통과해야 했다.
926년 아르눌프는 동생인 베르톨트에게 카란티아 변경백을 양도했다. 938년 조카 에버하르트가 프랑켄 공작 에버하르트와 함께 독일왕 오토 1세에게 반기를 들다가 추방되면서 베르톨트가 바이에른 공작이 되었고, 이때 아들인 하인리히에게 카란티아 변경백위를 양도하였다. 이후 948년 베르톨트가 사망하였고, 952년 바이에른에 편입되었다. 이후 카란티아는 976년까지 바이에른 공국의 영토로 있다가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가 오토 2세의 반역으로 인해 지위가 박탈되어 위트레흐트에 강금되면서 오토 2세에 의해 바이에른 공국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오스트리아 변경백국과 함께 바이에른에서 분리되었고, 이때 베르톨트의 아들인 하인리히를 카란티아의 공작으로 임명했다.
여기에는 스티리아, 카르니올라, 이스트리아의 변경주들과 이탈리아 베로나 변경주의 통치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978년에 하인리히 2세와 아우크스부르크 주교 하인리히 1세와 함께 오토 2세에 대한 반란에 참여해 보헤미아 공작 볼레슬라프 2세의 군대와 함께 바이에른의 파사우 마을을 점령했지만, 오토의 군대에 의해 패배했다. 이후 마크데부르크의 부활제 제국 의회에서 황제는 하인리히 소2세를 추방하고 보름스의 오토를 카란티아 공작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보름스의 오토 또한 그 자리를 오래 유지할 수 없었다. 983년 오토 2세가 죽고 어린 외아들인 오토 3세가 독일 왕이 되자 위트레흐트에 강금되었던 전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는 풀려나면서 자신의 지지 세력을 재규합 그리스 출신의 태후인 테오파노를 압박해 오토 3세의 섭정권을 얻은 다음 다시 공동왕이 되어 종국이 단독으로 독일왕이 되려고 했었으나 결국 국내외의 정세로 인해 포기, 섭정권을 반납하는 대신 박탈된 바이에른 공작위를 다시 받는 것으로 타협해 985년 다시 바이에른 공작으로 복위했고, 그전까지 바이에른 공작이었던 하인리히 3세는 카란티아 공국으로 전봉되었고, 해임된 오토 1세는 라우테른의 카이저팔츠와 바이센부르크의 수도원이 보상으로 주어졌다,
카란티아로 전봉된 하인리히 3세는 989년까지 카란티아를 통치하다가 후사도 없이 사망하였고, 루이트폴트의 혈통이 단절되자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가 카란티아 공국과 베로나 공국을 되찾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995년 하인리히 2세가 죽자 카란티아와 베로나는 바이에른과 같이 하인리히 2세의 아들 하인리히 4세에게 상속이 되는 것이 아닌 전임 공작이었던 오토 1세게로 다시 넘어가게 된다.
2.8. 엘베강 동부(현 작센 일대 및 브란덴부르크, 포메라니아의 슈트랄준트와 앙클람 일대)
엘베강 동부는 본래 게르만족들의 영토였다. 하지만 4세기 중반 훈족의 침입으로 인해 게르만족 집단들은 5세기 중후반까지 엘베강 너머의 서로마 제국으로 도주할 수밖에 없었고, 이후 무주공산지가 된 엘베강 동부 지역은 한동안 방치되어 있다가 6세기경 서슬라브족들이 이주해와 살기 시작했다.엘베장 동부에 정착한 슬라브족들은 벤트인이라 불리는 현재의 독일 슐레스비히 홀슈타인 주 일대에 사는 플라비아족, 현재의 독일 루사티아 지방에 사는 소르브인, 남부 메클렌부르크와 북서부 브란덴부르크에 사는 베덴셀족, 엘베강의 지류인 하펠강 유역에 사는 헤벨리족, 메클렌부르크 동부에 사는 케시니아족, 브란덴부르크 주 북서쪽에 있는 오늘날의 베스트프리니츠 지역에 사는 리노넨족, 메클렌부르크-서부 포메라니아 지역에 사는 레다리안족, 메클렌부르크 남서부의 파르킴(Parchim) 주변 지역에 사는 스멜딩거족, 메클렌부르크-서부 포메라니아 지역인 톨렌세 호수와 톨렌세 강의 북서쪽에 사는 톨렌시안족, 엘베강의 북쪽 지류인 트레베와 뤼백 분지에 사는 트라브냐넨족, 오스톨슈타인과 플뢴 사이에 사는 바그리아족, 메클렌부르크의 바나우강 지역에 있는 바나비 가우에 사는 바나비아족, 메클렌부르크-서부 포메라니아인 테테로우 호수 주변에 사는 지르지판족, 현재 작센주 바이센 지역의 되베른, 뮤겔른 사이에 살던 달민지어족, 메클렌부르크-서부 포메라니아 남동쪽과 오늘날의 브란덴부르크 북쪽에 사는 루티젠족, 뤼겐 섬 일대에 사는 라넨족, 브란덴부르크 오버하펠 지역에 살던 레체네족, 메클렌부르크 동부, 포메라니아 서부, 브란덴부르크 북부에 사는 빌츠족(witess)으로 나눠져 있었다.
이들은 8세기 후반까지 국가와 같은 거대한 단위의 정치적 결성체를 만드는 데는 실패한 채로 부족 단위의 생활을 영위했다. 그나마 740년 드로고비트가 포메나리아 서부에 자리잡은 슬라브족들을 통합해 벨레티 부족 연맹을 만들었다. 그러다가 772년 프랑크 왕국의 국왕 카롤루스가 작센 부족 공국을 공격하면서 이들은 프랑크 왕국과 국경을 접하될 상황에 처해지게 되었다. 785년 자센 부족 공국을 이끌고 끊임없이 프랑크에 저항한 비두킨트가 카롤루스에게 굴복하면서 프랑크 왕국은 엘베강 동부와 접하게 되었다.
788년 아바르족의 내륙 습격이 있었으나 카롤루스의 군대에 의해 저지되었다. 이후 곧바로 바이에른을 무릎꿇린 카롤루스는 우선 아바르족의 영향력 하에 있던 슬라브족들을 자신의 영향력 하에 넣고자 하는 원정을 수행하였다. 이들은 카롤루스의 오랜 적이었던 작센족과 연합해 카롤루스에게 대항한 적도 있기 때문에 카롤루스는 이 지역에 대한 자신의 우위를 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789년, 카롤루스는 아우스트리아와 작센 지역에서 징집된 군대를 이끌고 북부 슬라브족 중 가장 강성한 빌츠족(Witzes)을 목표로 엘베 강을 넘어 원정을 수행하였다. 이에 빌츠족은 바그리아족, 트랴브냐넨족, 플라비아족, 케시니아족, 바나비아족, 지르지판족, 스멜딩거족, 베텐첸족, 리노넨족들과 연합해 오보트리테스 연맹을 구성, 카롤루스의 원정군과 싸웠으나 795년 빌츠족의 지도자인 비친(Witzin)이 포로로 잡혔다. 비첸은 기독교로 개종과 함께 카롤루스의 봉신이 되었고, 그와 동맹을 맺은 다른 슬라브 부족들 또한 같은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다. <카롤루스 대제의 생애>에 따르면 이 원정에서 큰 교전은 없었던 걸로 보이는데 이는 당시 북부 슬라브족들이 데인족( 바이킹)의 위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카롤루스와 싸우기보단 그의 우위를 인정하고 대신 데인족을 상대하는 데 도움을 얻고자 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카를루스는 비친이 생포된 슬라브족들 지도자들 중 주도적 인물임을 알고 엘베 슬라브의 지도자임을 공인한다.
드라고비트가 이끌던 벨레티 부족 연맹 또한 카롤루스에게 대항했으나 결국 오보트리테스 연맹보다 앞선 789년 칼로루스에게 굴복해 프랑크 왕국에 인질을 보내주는 것과 함께 선교사들을 받아 들여야 했다.
카롤루스는 이후 793년, 노달빙기아(Nordalbingia)와 베스트팔렌을 점령하여 이 지역의 거점으로 삼고 수도자들을 파견해 개종작업에 들어갔다. 이후 이들 슬라브족은 최소한 카롤루스 생전에는 충실한 동맹세력으로 남았다. 795년의 작센족 반란 당시 이 지역의 슬라브족들은 카롤루스에게 전사들을 지원해 주었고, 비친 또한 엘베 슬라브족들의 대표자로서 슬라브 전사들을 이끌고 작센족 반란 진압에 동행했다.
하지만 엘베강 서쪽으로 도하 직전 작센족 전사들의 공격을 받게 되었고, 그곳에서 전사하고 만다. 이후 엘베 스라브족의 지도자로 아들인 드라스코가 승계하게 되었다. 드라스코는 곧바로 카를루스를 도와 3년의 종군 끝에 작센 원정을 마무리했다.
이에 카롤루스는 오보트리테스 연맹 내의 그의 가문을 위치를 재차 공인했으며, 또한 홀스타인 지방을 오보트리테스 연맹에게 내어준다. 806년 카롤루스는 아직까지 복종하지 않은 소르브인을 비롯한 다른 서슬라브족들을 정복하기 위한 정복에 착수하였고, 그의 아들인 카롤루스 이오니오르는 누시토(Nussito 또는 네시타(Nessyta), 현재의, 작센안할트주 남부 바이센펠스)를 점령하고 소르브인 공작 밀리더흐(Miliduch)와 슬라브인 지도자 켄즈(Knez), 누시토(Nussito) 등을 사살하였다.
드라스코 또한 해당 원정에 참여했고, 전공을 세운다. 하지만 808년 작센 부족 공국이 프랑크 왕국에 점령된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던 데인족이 결국 프랑크 왕국과 대적하기로 결정했다. 데인족의 왕 구드프레드(Gudfred)는 다네베르케 지협에서 슐레스비히에 달하는 장벽을 쌓았다. 이는 카롤루스의 공격에 대비한 것이다. 그리고 그 직후 데인족들은 현재의 비스마르로 불리는 레릭의 해안선 일대를 습격, 프리슬란트와 플랑드르를 약탈하였고, 프랑크 왕국과 잉글랜드 사이를 오가는 것은 더이상 안전하지 않았고, 라인 강을 중심으로 하는 프랑크 왕국의 상업은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
오보트리테스 연맹 또한 데인족과 손을 잡은 적대적인 윌젠인, 스멜딩거인, 리노네스인에 의해 공격받았다. 패배의 규모는 거대했고, 오토트리테스 연맹의 3분의 2가 드라스코를 베반하고 고드프레드를 섬기기로 했다. 결국 드라스코는 809년에 아들 세드라구스(Ceadragus)를 데인족 왕 고드프레드에게 인질로 넘겨야 했는데, 이것은 패배를 인정하는 동시에 복종의 표식이었고, 카롤루스 이오니오스가 군대를 이끌고 왔을 때 모든 것이 끝난 상태였다.
다만 드라스코는 순순히 데인족에게 굴복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데인족의 군대가 자신의 영토 밖으로 떠나다 데인족과 손을 잡은 다른 슬라브족들을 제압하기 시작해 윌젠족의 영토를 침공하여 불과 칼로 그들의 영토를 황폐화시킨 후 승리하고 풍부한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러한 성공을 통해 그는 더 많은 작센족을 끌어들일 수 있었고 프리드리히스루에 근처에서 가장 큰 스멜딩거족의 성을 정복했으며 이러한 성공을 통해 자신에게서 이탈한 부족들이 다시 합류하도록 강요했다.
하지만 810년 고드프레드의 가신이 된 슬라브족 귀족의 유인으로 레릭의 해안선으로 유인된 후 그곳에서 암살되고 만다. 이에 카롤루스는 드라스코의 동생 스콜라오미르를 오토트리테스 연맹의 수장으로 내세운다. 한편 이시기의 벨레티 연맹 또한 드라고비트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인 리옵이 승계했다.
스콜라오미르는 초기까지는 프랑크 왕국에 봉신으로 협조적인 인물로 811년 카롤루스의 도움을 받고 드라스코의 암살 이후 오보트리테스 연맹에 이탈한 리노네스인과 베덴셀족을 재복속시키며 연맹의 권위를 다시 세우려고 했다. 또한 리웁이 이끌고 있던 벨레티 연맹과도 지역의 패권을 두고 대립했다. 리옵 또한 오보트리테스 연맹과 충돌하면서 데인족과 손을 잡고 프랑크 제국에 대항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작센 부족 공국을 공격해 이름 불명의 요새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811년에서 812년 동안 프랑크 군대는 두차레에 걸쳐 벨레티 연맹을 공격해. 첫 번째 원정에서 벨레티를 격퇴하고 빼앗긴 작센의 요새를 탈환했다. 두 번째 원정에서 리옵의 군대는 대패하였고, 전쟁 포로 석방에 동의하고 프랑크 제국에 복종을 표해야했다
그러나 814년 카롤루스 대제가 죽고, 그의 아들인 경건제 루도비쿠스 1세가 프랑크 제국의 황제로 즉위하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카롤루스의 죽음으로 3대에 걸쳐 카롤루스의 공인하에 오보트리테스 연맹의 장을 세습 유지하던 빌츠족의 지도적 위치에 대해 연맹 내의 슬라브 부족들 사이에서 점차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다.
815년에 스콜라오미르는 프랑크 왕국의 덴마크의 내정 개입을 계획하는 루도비쿠스를 지원했다. 프리올리의 공작이자 왕국 순찰사(Missus dominicus) 발드릭의 지휘하에 있는 작센 오보트리테스군은 하랄드 크랙을 복위시킬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이 원정은 성공하지 못하고 덴마크 중부를 초토화한 것으로 만족한 채 전군, 작센주로 철수했다.
817년 데마크에 인질로 보내졌던 드라스코의 아들인 세드라구스가 돌아오자 루도비쿠스는 스콜라오미르에게 세드라구스와 공동으로 통치할 것을 명령하게 된다. 이에 스콜라오미르는 루도비쿠스의 명령을 굴욕적으로 여겨 결국 프랑크 제국을 등지기로 결정하게 되었다.
그는 다시 엘베 강을 건너 궁정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과 황제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을 거부할 것을 선언했고, 뒤이어 소르브인들의 반란에 편승한 것과 함께 데인족 왕 호리크 1세에게 사절을 보내 그들과 동맹을 맺고 노르달빙기아로 군대를 보내도록 설득했다.
동시에 덴마크 함대는 엘베 강을 거슬러 올라가 에세스펠트 요새로 향하여 슈톨 강에 이르는 프랑크 왕국의 해안가 지대를 황폐화시켰다. 한편 데인 변경주의 변경백 글루미(Gluomi)는 보병과 친프랑크 오보트리테스족과 함께 육로에서 요새로 이동했다. 에세스펠트는 포위를 견딜 수 있었지만 곧 포기되면서 데인족들에 의해 노르달빙기아는 초토화되었다..
그 후 루이 경건왕은 819년 제국의 특사가 이끄는 군대를 작센과 동 프랑크에서 엘베 강을 넘어 파견했다. 스쿨라오미르는 싸우지 않고 항복했으며, 데인 변경주의 지휘관과 제국의 사절에 의해 포로로서 아헨에게 연행되었다.
아헨에서, 스쿨라오미르는 황제 앞에 연행되었고, 황제는 그에게 공식적인 법적 절차를 시작했다. 세드라구스의 지지자인 오보트리테스 귀족들이 검찰관으로 출석해 그를 반역죄로 고발했다. 그 후 루도비쿠스는 스쿨라오미르에게 추방형을 선고했고, 세드라구스를 단독 통치자로 공인한다,
세드라구스는 오보트리테스 연맹의 단독 통치자가 되었다. 스쿨라오미르가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초기엔 친프랑크적 통치자로 데인 변경백과 함께 하랄드의 데인족 왕위 복위를 기도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결국 821년 전후로 세드라구스는 호리크 1세와 손을 잡게 되었다.
경건왕 루도비쿠스 1세는 세드라구스를 오보트리테스의 단독 군주로 승격시켰을 때 그는 세드라쿠스가 자신의 은혜로 군주가 된 만큼 오보트리테스가 프랑크에 예속될 것으로 예상했다. 이 계산이 실패했기 때문에 그는 억류시킨 스쿨라오미르를 복위시키기로 결정했지만, 스쿨라오미르는 귀국 도중에 사망했다.
그러나 연대기에는 822년에 세드라구스가 상황을 완화하고 독일의 작센족에 의한 오보트리테스 연맹 내의 다른 슬라브 부족들의 토지 침탈에 대한 동의를 철회하기 위해 황제에게 예물을 가진 사절을 파견했으며, 823년 벨레티 동맹의 리옵과도 연토 분쟁 등으로 인해 분쟁이 발생해 5월에 벨레티와 오보트리테스 사이의 전쟁이 발발했다. 오보트리테스는 프랑크 제국의 지원을 받았고, 전쟁은 오보트리테스의 승리로 끝나고 리옵은 전사했다. 리옵이 전사하자 그의 장남인 마일가스트가 벨레티 연맹의 수장이 되었으나 얼마 안가 부족의 전통과 반대되는 통치를 했다는 이유로 반대파에 의해 반란에 의해 퇴출되었으며, 동생인 시알드라구스가 벨레티 연맹의 수장이 되었다.
세드라구스의 경우 824년의 겨울, 콩피에뉴의 궁정에 출두했는데, 루도비쿠스 앞에서 부정의 죄로 고발되었다. 세드라구스는 반역 혐의와 함께 수년간 황제 앞에 나오지 못했던 것에 대해 합리적으로 스스로 변호해야 했다. 연대기에 따라 유죄인 것으로 밝혀졌지만 처벌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의 조상의 업적[26]을 통해 그는 처벌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선물을 주어 왕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826년 오보트리테스의 귀족들이 궁정에 도착해 황제 앞에서 세드라구스를 고발했다. 10월 중순 회의에 참석하지 않으면 부정행위로 처벌될 것으로 통보됐다. 라인 강을 따라 잉겔하임에 도착한 후, 세드라구스는 황제의 심판을 받았다. 루도비쿠스는 오보트리테스 연맹의 귀족들이 파견한 사절들에게 세드라구스가 계속 통치자가 되기를 원하는지 묻는 의견에 따라 그를 권력의 자리에 남기는 결정을 내렸다. 대신 세드라구스는 루도비쿠스의 궁전에 억류되어야만 했고, 이는 오보트리테스 연맹이 프랑크 제국과의 동맹이 끝났음을 의미했다.
세드라구스가 어느 시점에서 사망했는지는 불명이나 838년 전후로 새로이 오보트리테스 연맹의 수장이 된 고즈토무즐리는 최초로 프랑크 왕국이 세우지 않은 연맹의 지도자였고, 세드라구스까지 이어지던 빌츠족 출신이 아닌 것으로 보이며, 이는 로타리우스 1세와 그의 아들들 간의 왕위 계승 분쟁으로 인해 프랑크 제국의 국력이 약해져 가던 상태였고, 데인족의 호리크 1세가 점차 힘이 커져가는 가운데 세드라구스의 가문이 연맹의 지도자 자리를 유지할 힘을 상실한 상태였다.
벨레티 연맹 또한 같은 시기 통치자들에 대한 기록이 더 이상 전해지지 않았고, 오보트리테스 연맹보다 더 지독할 정도로 리더십의 부족으로 인해 무정부 상태에 빠져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프랑크 제국은 셋 으 로 분할되었고, 오보트리테스 연맹은 루트비히 2세가 통치하는 동프랑크 왕국의 관활로 넘어갔다. 844년 고즈토무즐리는 오보트리테스를 동프랑크 왕국으로 부터 독립하려고 했다.
고즈토무즐리는 데인족의 왕 호리크 1세와 838년 전후로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오보트리테스 연맹이 이탈하려는 움직임을 감지한 루트비히 2세는 844년 8월에 동프랑크군을 이끌고 엘베 강을 건너 오보트리테스 연맹을 공격했다. 당시 오보트리테스의 전략은 요새화된 마을의 방어력에 의지해 야전보다 수성전 위주로 장기전으로 프랑크군과 싸우다가 프랑크군이 지칠때 요새에서 나와 공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루트비히는 단번에 고즈토무즐리의 본성으로 직접 진군하고 성을 제압하고 그 과정에서 고즈토무즐리는 전사하였다.
루트비히는 오보트리테스 연맹에 속한 바그리아족, 케시니아족 등의 부족장들 오보트리테스 연맹을 사실상 해체하고 연맹에 속해 있던 슬라브족들의 복종을 받아내고 연례 조공을 받아냈다. 849년 소르비아 변경주를 설치해 튀링겐 통치자들이 소르비아 변경백을 겸임케 해 엘베 강 동부를 감시토록 했고, 최초의 변경백은 타쿨프로 855년 달민지어인 정복에 나섰고, 이후 루트비히 2세를 비롯해 엘베 강과 접하고 있던 지역의 영주 및 제후들은 물론이고, 친 동프랑크 성향의 소르브인 부족들까지 달민지어 정복에 가세했고, 결국 1년 뒤 달민지어인들은 정복전에 패배해 보헤미아 분지로 도주하다가 결국 동프랑크에 공물을 받치게 되었다.
862년 전후로 고즈토무즐리의 친족으로 추정되는 타보이무즐리가 오보트리테스 연맹을 재건하고 데인족과 연합하여 함부르크를 공격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이로 인해 본래 함부르크 대주교였던 아스카르는 브레멘으로 옮겨야 했다. 루트비히 2세는 데인족, 오보트리테스 연맹과 무력 대결과 협상을 병행한 끝에 파더보른에서 평화 협약을 맺고 서로 인질을 교환했다.
873년 타쿨프가 사망하자 소르브인들과 시우슬리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잘레 강을 넘어 튀링겐을 공격했다. 이에 새로운 변경백이자 튀링겐 공작인 라툴프는 874년 루트비히 2세의 명으로 마인츠 주교 리우트베르트와 함께 소르브인들을 공격해 소르브 반군을 다시 동프랑크 왕국에 굴복하였다.
880년 라툴프가 어떠한 이유로 해임되었고, 프랑켄 변경백 하인리히의 동생 포포가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취임 직후 작센 부족 공국이 노르만인들에게 패전하자 달민지어인들은 보헤미안인 및 소르브인들과 동맹을 맺고, 튀링겐 공국에 충성을 맹세했던 자레 강의 슬라브족 집단들을 공격했고, 뒤이어 튀링겐까지 공격하다가 포포에 의해 격퇴되었다.
892년 포포는 뷔르츠부르크의 주교 아른의 슬라브 원정에 동참했지만 원정군과 함께 귀환길에 동행하지 않았고, 결국 아른이 매복하고 있던 슬라브 부족들에게 살해되자 독일왕 아르눌프에 의해 변경백에서 경질되었다. 이후 동프랑크 왕국은 오랫 동안 마자르족의 침입으로 인해 엘베 강 동부를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그러다가 카롤링거 왕조의 직계인 유아왕 루트비히 4세가 911년 18세의 나이에 요절한 이후 프랑켄 공작 콘라트 1세가 동프랑크 귀족들에 의해 선출되어 7년간 동프랑크를 통치하다가 결국 작센 공작인 매사냥꾼 하인리히 1세가 919년 5월 24일 독일왕으로 선출되었다. 920년 마저르와 협상으로 이들의 침략을 잠시 유보시키는데 성공한 하인리히 1세는 다시 엘베강 동부로 눈을 돌렸다.
하인리히는 슬라브의 침입을 명목으로 928년 엘베강 동부를 공격해 슬라브 족의 하나인 폴라비안 슬라브 족(Polabian Slavs)의 영토를 점령하였다. 928년 겨울 슬라브계의 다른 부족인 헤벨리(Hevelli) 족이 차지하고 있던 브란덴부르크를 탈환하였다. 이후 골로마츠(Glomacze) 땅과 엘베강변까지 점령하고 슬라브 부족을 몰아냈고, 알브레히츠부르크와 마이센 성을 점령하였다.
928년 그는 폴란드 브란덴부르크에 있던 슬라브계 부족인 헤벨리족과 마이센의 달레민치족을 정복하고 독일에 복속시켰다. 928년 겨울, 슬라브 족이 다시 브란덴부르크를 약탈하였다. 이들은 엘베강 중류에 있는 글로마츠까지 침공하여 성인들을 모조리 죽이고 아이들을 노예로 잡아갔다. 작센 족 역사학자 비두킨트에 의하면 이때 하인리히는 위기에 직면했다 한다. 동시에 보헤미아에서도 독립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일단 하인리히는 바이에른의 아르눌프 등의 지원으로 퇴각하였다.
929년 슬라브계 부족인 레다리 족은 자신들의 지도자를 살해하고 새 지도자를 선출한 뒤, 작센 안할트의 발스리빈을 공격하고 주민들을 학살했다. 백작 베른하르트와 하인리히 1세의 군사 교육자였던 테이마르(Thietmar)와 군사를 보내 레다리 족과 싸워 929년 9월 4일 렌젠 요새에서 고전 끝에 슬라브 족을 최종 격파했다. 슬라브 족을 최종적으로 격퇴한 뒤 하인리히는 슬라브 족에게 그리스도교로의 개종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슬라브 족은 이교도 신앙을 포기하는 것을 거절한다.
한편 슬라브족의 침공에 대해 그는 932년과 934년 친히 군사를 이끌고 엘베강을 건너 슬라브 족의 본거지인 동부지역 영토 밖을 진격하여 슬라브족들을 격파하고 영토에 보루를 설치하였다. 그는 영토 밖 동부지역의 이민족인 슬라브인, 마자르인의 침략과 북방의 데인족의 침입을 모두 성공적으로 격퇴하여 다른 제후들로부터 인망을 얻었다. 슬라브계 부족과 전쟁 중이던 928년부터 하인리히는 사자를 보내 마이센에 요새를 건설하게 했다.
한편 이때를 기점으로 일명 게로 변경주라 불리는 작센 동부 변경주 혹은 메르제부르크 변경주가 현재의 브란데부르크와 작센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나 그동안 이름만 남아 있던 소르비아 변경주는 메르제부르크 변경주에 흡수되었고, 테이마르가 변경백이 되었다. 테이마르는 932년 사망하였고, 장남으로 추정되는 지그프리트가 메르제부르크 변경백을 승계받는다.
메르제부르크의 변경백으로서의 치적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없으나 지크프리트는 936년 작센 부족 공국의 감찰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오토 1세의 대관식 당시 오토 1세의 대관식에 위험인물로 지정된 오토 1세의 동생 하인리히를 억류시켰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오토 1세는 지크프리트에게 여러 토지를 증여했다. 그러나 1년도 못되어 지크프리트는 사망하였다. 후사가 없었기에 이복 동생 오토 1세에게 계승권을 빼앗겼던 탕크마르는 자신이 지크프리트의 외사촌으로 메르제부르크의 계승권을 주장했으나 오토 지크프리트의 동생 게로를 메르제부르크 변경백으로 임명한다.
이에 분노한 탕그마르는 오토 1세의 인사 정책에 불만을 품은 콘라트 1세의 동생 에버하르트와 빌룽거 가문의 비흐만 1세를 비롯한 불만 세력들을 규합해 반란을 일으켰지만 1년 안에 진압되었고, 게로는 메르제부르크의 변경백 자리를 유지했지만 반란 시기동안 변경주는 슬라브족들에게 패배했다.
939년 반란이 진압된 후 게로는 슬라브족들에 대한 대대적인 원정을 기획했다. 우선 화해를 가장해 약 30여명의 슬라브 족장들을 연회에 초대해 그들을 모두 죽였다. 게로가 30여명의 슬라브 족장들을 대상으로 접대의 관습을 어겼다는 사실이 슬라브족들에게 알려지가 슬라브족들은 복수를 천명했다.
결국 작센 변경백 헤르만 빌롱과 국왕인 오토 1세마저 작금의 상황에 대해 개입해야 했다. 이로 인해 자레강, 푸네강, 무르데강, 엘베강에 끼워진 세리문트 지구와 티티지 지구로 이루어진 지역들은 정복 후 오토 1세의 직접적인 권한 하에 놓이게 되었고, 940년대 중반 이후, 오토 1세는 토지를 가족에게 양도하거나 게로나 다른 귀족들에게 영지를 주었습니다.
대조적으로, 무르데 강까지의 더 남쪽 지역은 작센인의 조공 통치하에 있었지만, 분명히 현지 슬라브 부족장의 지배 체제가 계속되었지만 게로에 의한 슬라브 족장들의 집단 학살은 슬라브 족장들의 권력 구조를 영구적으로 불안정화시킨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한편 장기간의 슬라브 원정로 인한 엄청난 손실로 오토 1세는 새로운 위기에 빠졌다. 작센 귀족들은 손실을 보충하기 위해 전리품의 몫이 너무 적자 왕에게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이에 오토의 동생 하인리히는 이 상황을 이용해 선물과 약속으로 불만을 품는 귀족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941년 쿠베트린부르크의 부활제에 오토를 살해할 계획은 실패하고 반란은 붕괴했다. 공모자들 중 슬라브 원정에 관여한 자도 다수 포함되어 대부분이 처형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토 1세와 게로의 관계 또한 점차 어긋나고 있었다. 이탈리아 원정 이후 오토 1세는 로타리오 3세의 미망인인 아델라이드와 재혼하였다. 왕위 계승자라고 생각하던 리우돌프는 자신의 위치에 대해 불안하게 생각했다.
이때 게로는 리우돌프가 아버지 오토 1세에게 반역을 저지르기 전까지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953년 마자르족의 침입으로 지지 세력의 분산으로 리우돌프의 반역은 진압되었고, 오토 1세는 리우돌프의 반역에 가담은 하지마 않았지만 그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온 게로를 위험 인물로 간주해 견제하기 시작했다.
북동부에서 게로는 954년에 우크란족을 정복했다. 이러한 독일 왕국의 행보에 오토트리테스 연맹에 속해 있던 지르지판족의 족장 스토이뉴는 자신의 부족은 물론이고 빌젠과 톨렌시안족, 부족들을 모아 반 작센 연합을 구성 955년 10월 16일, 현재의 레그니츠 강으로 추정되는 락샤강이란 곳에서 오토와 그의 아들 리우돌프, 게로와 보헤미아의 지원군과 격돌하나 결국 락샤 강 한복판에 포위된 채 굶주림과 질병으로 궤멸되는 것이 시간 문제였다.
이때 오토는 게로에게 스토이뉴와의 우호동맹의 협상을 의뢰했으나 게로는 왕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스토뉴를 조롱하거나 작센군의 힘을 자랑하며 도발했고, 강 너머의 대화는 상호 모욕으로 끝나고 다음날 전투로 이어졌다. 게로의 책략 덕분에 작센인들은 다음날 한적한 곳에서 누구에게도 눈치 채지 않고 강을 건널 수 있었다.
놀란 슬라브족들은 도망쳤다. 패전으로 도주하던 스토이뉴는 호세드라는 이름의 기사에 의해 참수되었고, 생포된 오보트리테스 부족 연맹의 700명의 전사들 또한 참수하였다. 오토 1세는 자신의 명령마저 항거한 게로를 견제하기 위해 작센 변경백인 헤르만 빌룽에게 오보트리테스 부족 연맹으이 땅을 전부 넘겨 주었다.[27]
빌룽 변경주는 엘베강 동부의 독일의 식민지로서 작센속을 포함한 독일인의 영역을 확장했고, 현재의 메클렌부르크 내의 폴라비안족 , 바르나비족 및 바그리족을 포함한 오보트리테스 연맹에 속한 부족들과 반복적으로 영토 확장전을 벌였고, 이들을 굴복시켰다.스토이뉴와 공동 통치자로 여겨지던 나콘 또한 빌룽 변경주에 예속되었다.
963년 오토와 게로의 슬라브 원정은 어느새 루사티아 부족과 슬루피아 부족을 정복했고, 이로 인해 당시 국가 단계로 발돋움하고 있던 미에슈코 1세의 폴란드 영지와 맞닿게 되었다. 당시 미에슈코 1세는 포메라니아 서부 일대에 거주하는 울린인과 벨레티인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으나 고전을 면치 못했다. 게다가 숙부 헤르만 빌룽과의 상속 투쟁에서 패한 작센 빌룽 가문의 비흐만 2세와 그의 형제 에크베르트가 포메라니아 서부로 망명한 뒤 그곳에 사는 슬라브인들을 이끌고 963년 미에슈코 1세를 상대로 2차례 승리를 거두고 미에슈코의 이름없는 형제를 살해했다고 한다.[28]
이시기 독일 왕국은 새로이 영토로 편입한 엘베강 동부 전역에 기독교 선교 및 봉건제와 농노제 등을 이식해 완전히 독일 왕국의 영역으로 동화하려고 했다. 965년 게로가 사망하였다. 959년 장남인 지그프리드가 로마로 성지 순례 도중 사망하였고, 차남인 게로 2세 또한 사망한지 오래였다.
이에 따라 현재의 메르제부르크, 혹은 게로 변경주는 여러개의 변경주로 분할, 현재의 메클렌부르크에 자리한 빌룽 변경주 외에도 현재의 브란덴부르크에 자리한 북방변경주와 작센을 구성하는 마이센 변경주, 차이즈 변경주, 루사티아 변경주 등으로 분할되었다.
- 슬라브 대봉기 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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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속된 슬라브족들의 상황게로 변경주가 해체된 잔후로 오토 1세는 복속한 엘베강 동부의 슬라브족들 독일인으로 동화시키기 위해 기독교 선교 및 봉건제와 농노제 등을 이식하려고 했다. 948년 하벨베르크와 브란덴부르크에 주교구를 설치하였고, 968년에 마그데부르크 대주교구를 설치하여 특히 활발한 선교 활동을 수행했다. 983년 전후로 홀슈타인에서는 오토 1세의 계획하에 올덴부르크 교구가 설립되었다.
수많은 슬라브 부족들이 게로 변경주에서 분할된 수많은 변경주에서 살았으며, 독일은 점령지마다 성을 축조하고 공물을 걷기 위해 군대를 증강했다. 오보트리테스 연맹은 빌룽 변경주에 예속되었고, 966년 나콘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들로 추정되는 미스티보이와 미스티드라그가 오보트리테스 연맹의 공동수장이 되었다.
이미 오보트리테스 부족 연맹은 이름만 남은 상태로 사실상 하나의 작은 부족 수준으로 전락된 상태였다. 하지만 미스티보이와 그의 형제인 미스티드라그는 기독교가 자리를 잡아가는 시대적 흐름을 이용해 독일왕의 권위를 빌어 장거리 교역을 유치해 이를 통해 얻은 이익을 군사력에 투자하였고, 또한 기독교로 개종한 후 기독교를 통해 부족장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부락지 안밖에 매장지로서, 가문과 씨족의 정체성을 기념하고 귀족 통치를 대표하는 기도를 통해 권력 형성을 집중화하고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하기 위한 사도 베드로를 수호성인으로 모시는 교회 옆에 수녀원이 있었고, 사제들은 행정 업무를 보조했다.
그 밖에도 작센 구족들 중 가장 강한 가문이자 오보트리테스가 속한 빌롱 변경주를 다스리는 빌롱거 가문의 헤르만 빌룽과 그의 아들 베른하르트 1세는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러한 관계는 후술한 세번의 원정에서 미스티보이가 오보트테스 연맹의 군대를 이끌고 종군하게 되었다.
967년에 미스티보이는 헤르만 빌롱과 함께 스타리가드에 위치한 바그리아족의 요새를 공격했다. 요새 안에 있던 바그리아족의 부족장 셀리부르(Selibur)는 오보트리테스 연맹에서 권력을 강화하려는 미스티보이의 반대파였기에 미스티보이는 본보기로서 셀리부르를 공격했다. 또한 셀리부르는 헤르만의 조카이지만 정적이기도 한 비흐만 2세와도 동맹 관계였기에 미스티보이와 헤르만 빌롱의 이해관계는 일치했기에 셀리부르를 협공했다. 공성전 동안 비흐만 2세는 부하들을 버리고 도주했고, 셀리부르는 항복하면서 미스티보이는 오스톨슈타인에 정착한 바그리아인(Wagrians)의 느슨한 종주권을 얻었고, 이로써 오보트리테스 부족 연맹에 대한 완전한 통치를 얻었다.[29] 바그리아인에 대한 주권은 11세기에 라체부르크 호수 양쪽의 하위 부족으로만 나타났으며 그 당시에는 여전히 자신의 영토가 없는 바그리아인의 일부로 간주되었던 폴라비아인에 대한 주권과도 관련이 있다.
또한 남쪽에서는 연맹장 통치가 엘베 강을 따라 리노네 부족까지 확장되었다. 내용면에서 미스티보이의 연맹 통치는 하위 부족으로부터 공물을 모으고 전쟁에서 협회 파견대를 이끄는 것으로 제한되었고, 그의 통치 주장은 명확하게 정의된 영토가 아니라 사람들의 연합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러 하위 부족들로 구성된 오보트리테스 연맹은 이미 총 18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오보트리테스 연맹의 하위 부족 지역 밖에서 성 구역은 미스티보이로부터 간섭을 받지 않고 오히려 부족 상속법에 의존하는 지역 귀족 가족이 이끌었고, 기껏해야 그들은 각각의 하위 부족장들을 섬겼다.
974년 가을, 오토 2세 황제는 여름에 알빙기아 북부를 침공해 덴마크 통치자 하랄 1세 블로탄과 전쟁을 벌였다. 황제는 작센 공작 베른하르트 1세(Bernhard I)와 하인리히 폰 스타데(Heinrich von Stade)와 함께 제국군을 이끌고 프로세에서 북쪽으로 출발했습니다. 색슨족, 프랑크족, 프리지아족의 파견대 외에도 제국군에는 슬라브 부대도 포함되었다. 색슨족이나 덴마크 소식통 모두 그들의 출신과 지도자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지만 현대 역사가들의 연구에서는 슬라브인들이 미스티보이(Mistiwoj)가 이끄는 오보트리테스 연맹군들이었다고 가정하고 있다.
바그리아(Wagria)에 있는 그들의 정착 지역은 데인족과 북부 알빙기족의 정착지와 접해 있었고, 무엇보다 미스티보이와 빌롱거 가문 간의 예속적인 관계 또한 간과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제국은 전쟁에서 선박을 결정적으로 활용했다. 제국군이 노르웨이의 야를인 호콘이 방어하고 있던 덴마크 방어벽인 다뉴어크(Danewerk_를 처음 공격하는 데 실패한 후, 독일 군대는 베르하르트 1세의 계획에 은 따라 선박을 타고 슐라이(Schlei)를 건너 덴마크 방어선을 우회했다. 제국군은 육로로 배를 운반하지 않았고 해전 경험이 풍부한 프리지아인은 북해 해안에 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오보트리테스 연맹의 함대임이 분명했다.
981년, 독일 왕 오토 2세(Otto II)는 에미르 아부 알 카심(Abu al-Qasim)이 시칠리아 아미르국을 공격하기 위해 이탈리아 원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 원정을 위해 그는 제국 북부 알파인 지역에서 자신을 지원할 추가 2,090명의 기병을 요청했다. 서면 징병 명령서에는 작센 귀족이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베른하르트 1세도 파견대를 파견하기로 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는 부과금 기간 동안 미스티보이를 선택한 것으로 보였다. 베른하트르 1세의 요구는 규모나 이탈리아 남부 배치로 인해 군대의 요구 사항을 넘어섰을 가능성이 있다. 그의 전사들의 참여에 대한 대가로 미스티보이는 그의 아들 미스티슬라프를 베른하르트 1세의 조카와 결혼하여 두 가문 사이의 결합을 요구했다. 베른하르트 I세는 이탈리아에서 돌아오자마자 결혼을 약속했고, 그 결과 미스티보이는 그의 아들 미스티슬라프의 지휘하의 천 명의 기병을 제공했다.
그 비율이 지나치게 과장되더라도 베른하르트 1세 편에 서서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북부로 진군했지만 도중에 베른하르트 1세는 덴마크의 침략으로 인해 일찍 북쪽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로 인해 거의 모든 오보트리테스의 기병대가 이탈리아에서 전사했다. 이들이 투입된 전투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지만, 제국군이 대패한 콜로나 곶 전투에 참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미스티슬라프는 소수의 생존자들과 함께 메클렌부르크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가 결혼 약속을 이행하라고 요구하자 북부 변경백 디트리히 폰 할덴슬레벤은 베른하르트 공작의 혈족을 개에게 주어서는 안 된다며 신부를 거부하게끔 부추겼다. 다만 헬무드(Helmold)에 따르면 베른하르트 2세는 나중에 미스티보이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이 한 약속을 지키겠다는 소식을 알렸다고 한다. 그러나 모욕을 받은 미스티보이(Mistiwoj)는 이를 거부하고 개가 자라면 세게 물 것이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이는 2년 뒤 발생한 슬라브 봉기에서 연맹장인 미스티보이의 의지와 달리 오보트리테스 연맹에 속한 대부분의 슬라브족들이 루티첸 연맹과 함께 한 것으로 이어지게 된다.
벨레티 연맹은 결국 무정부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점차 해체의 수준에 들어선 것으로 보이지만 967년까지 올란인들과 함께 폴란드를 두차레나 공격했으나 결국 패배했다.
한편 루티젠족을 중심으로 케시니아족, 지르지판족, 톨렌시안족, 레다리안족들이 새로운 슬라브 부족 연맹을 형성했다. 루티젠 부족 연맹은 루티젠이 중심이기는 하나 한 부족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 아닌 여러 부족 연합체로서 각 부족을 대표하는 이들이 모여 연맹의 의사 결정을 회의를 통해 정했다.
- 독일 왕국의 변경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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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롱 변경주
빌롱 변경주의 영역
현재의 메클렌부르크에 위치한 빌롱 변경주는 오토 1세가 게로를 견제하기 위해 작센 변경백 헤르만 빌롱에게 오보트리테스와 벨레티 연맹의 영토들 바탕으로 성립되었다. 헤르만 빌롱은 973년에 사망했고, 아들인 베른하르트 1세가 작센 부족 공작이 되었는데, 빌롱 변경주 또한 그에게 상속된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다만 그는 변경백의 직위만 갖고 있었을 뿐 실제로는 작센 부족 공국에 머물며 잇따금 쳐들어오는 덴마크인과 싸워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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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 변경주
북부 변경주의 영역
현재의 브란데부르크의 저신인 북부 변경주는 965년 게로가 사망하자 디트리히 폰 할덴슬레벤을 초대 변경백으로 임명하면서 성립되었다. 디트리히는 979년에 마그데부르크의 아달베르트 대주교와 함께 경쟁자인 알슬레벤의 게로 백작을 살해했다. 메르제부르크의 티에트마르와 이후 작센 역사가들의 판단에 따르면, 디트리히는 오토 1세 치하에서 획득한 슬라브족 루티젠과 헤벨리 영토를 가혹하게 수탈했다고 하면 이는 983년 슬라브 봉기를 야기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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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사티아 변경주
루사티아 변경주의 영역
현재의 브란덴부르트 남동부와 작센의 동부, 폴란드의 돌니실롱스크에 걸쳐 있는 루사티아 변경주는 빌룽 변경주와 북부 변경주와 함께 거대한 변경주로 현재의 작센주의 북부 지역의 일부와 브란덴부르크 남부 지역의 대부분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초대 루사티아 변경백은 오도 1세로 게로의 외손자로 오토 1세와 오토 2세의 측근이었다. 슬라브 봉기 전까지 동부 프랑코니아 제국의 동쪽 국경에서 엘베 슬라브족을 정복하고 방어 전투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군사 작전 동안 오도는 폴란드인들이 제국에 계속 의존하도록 하기 위해 바르타(Warta)까지 진격했다.
오도 1세는 972년 6월 24일 오늘날의 세디니아(Cedynia) 근처의 제덴(Zehden) 전투에서 폴란드 공작 미에슈코 1세(Mieszko I)의 형제인 치디부르(Cidibur)에게 패배했다. 오토 2세(Otto II) 황제의 명령에 따라 미에슈코는 973년 크베들린부르크(Quedlinburg)의 제국의회(Reichstag)에 나타나야 했고, 그곳에서 황제는 전쟁 당사자들 사이에 평화를 이루어졌다. 그러나 미에슈코는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 그의 아들 볼레스와프를 인질로 보내야 했다.
979년 형제인 마이센 후작 티에트마르가 사망하자 마이센 변경주를 병합하려 했으나 오토 2세가 릭크다드를 임명하면서 실패로 끝났다.
* 마이센과 자이츠, 메르제부르크의 변경주들(현 작센주와 작센 안할트주 동부)
마이센 변경주의 영역
자이츠 변경주의 영역
메르제부르크 변경주의 영역
현재의 작센주 남부와 작센 안할트의 동부 지역들로 구성된 3개의 변경주들은 상술한 세 개의 변경주들에 비해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았다.
마이센 변경주의 경우 초대 변경백은 위그베르트로 마크데부르크 대교구 설립 문서에 서명한 것 외엔 알려진 바가 없으며, 976년 루사티아 변경백 오도 1세의 형제인 티에트마르 1세가 마이센 변경백이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메르제부르크 변경백 군터가 오토 2세의 동생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의 반역 가담하자 메르제부르크를 공격해 차지하였다. 979년 티에트마르 1세가 사망하자 티에트마르의 형제인 오도가 마이센 변경주를 병합하려 했으나 리크다그가 다음 변경백이 되었고, 메르제부르크는 오토 2세의 용서를 받은 군터에게 반환되었다. 981년 자이츠 변경주의 절반을 병합했다.
자이츠 변경주의 경우 초대 변경백은 위거 1세로 변경백이 되기 전부터 자이츠 교구 대관(vogt)이자 이후 오토 2세 사후 태후로서 오토 3세의 섭정이기도 한 테오파누의 독일 영지들인 에슈베게, 프리다, 뮐하우젠, 슐로트하임 등의 튀링겐 영지들도 관리했다. 980년 알센 안할트 서부의 베르니게로데에 수녀원을 설립한 것 외엔 변경백으로서의 치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981년 위거는 어떠한 이유로 변경백에서 해임되었고, 자이츠는 분할되어 각각 마이센과 메르제부르크에 병합되었다.
메르제부르크 변경주의 경우 초대 변경백으로 군터가 임명되었다. 그러나 976년 군터는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의 반란에 동참하다가 인근의 마이센 변경잭 티에트마르에 의해 영지를 잃게 되었지만 979년 티에트마르의 사망과 함께 오토 2세에게 사면을 받아 변경주를 회복하게 되었다. 981년 자이츠 변경주의 절반을 병합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변경백인 군터는 오토 2세의 이탈리아 남부 원정에 참전하다가 그곳에서 사라센과의 스틸로 전투에서 전사했다,
* 마이센과 자이츠, 메르제부르크의 변경주들(현 작센주와 작센 안할트주 동부)
마이센 변경주의 영역
자이츠 변경주의 영역
메르제부르크 변경주의 영역
현재의 작센주 남부와 작센 안할트의 동부 지역들로 구성된 3개의 변경주들은 상술한 세 개의 변경주들에 비해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았다.
마이센 변경주의 경우 초대 변경백은 위그베르트로 마크데부르크 대교구 설립 문서에 서명한 것 외엔 알려진 바가 없으며, 976년 루사티아 변경백 오도 1세의 형제인 티에트마르 1세가 마이센 변경백이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메르제부르크 변경백 군터가 오토 2세의 동생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의 반역 가담하자 메르제부르크를 공격해 차지하였다. 979년 티에트마르 1세가 사망하자 티에트마르의 형제인 오도가 마이센 변경주를 병합하려 했으나 리크다그가 다음 변경백이 되었고, 메르제부르크는 오토 2세의 용서를 받은 군터에게 반환되었다. 981년 자이츠 변경주의 절반을 병합했다.
자이츠 변경주의 경우 초대 변경백은 위거 1세로 변경백이 되기 전부터 자이츠 교구 대관(vogt)이자 이후 오토 2세 사후 태후로서 오토 3세의 섭정이기도 한 테오파누의 독일 영지들인 에슈베게, 프리다, 뮐하우젠, 슐로트하임 등의 튀링겐 영지들도 관리했다. 980년 알센 안할트 서부의 베르니게로데에 수녀원을 설립한 것 외엔 변경백으로서의 치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981년 위거는 어떠한 이유로 변경백에서 해임되었고, 자이츠는 분할되어 각각 마이센과 메르제부르크에 병합되었다.
메르제부르크 변경주의 경우 초대 변경백으로 군터가 임명되었다. 그러나 976년 군터는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의 반란에 동참하다가 인근의 마이센 변경잭 티에트마르에 의해 영지를 잃게 되었지만 979년 티에트마르의 사망과 함께 오토 2세에게 사면을 받아 변경주를 회복하게 되었다. 981년 자이츠 변경주의 절반을 병합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변경백인 군터는 오토 2세의 이탈리아 남부 원정에 참전하다가 그곳에서 사라센과의 스틸로 전투에서 전사했다,
983년 엘베 강 동부에 정착한 작센족들이 점차 지배층으로 군림하며 온갖 착취를 자행하는 것과 기독교화 정책에 대해 반발하는 오보트리테스와 루티첸 북족 연맹을 중심으로 한 엘베 슬라브족 전원이 마그데부르크의 아달베르트 대주교와 오토 2세 황제의 후계자를 두고 제국 내에서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류티젠이 이끄는 슬라브 연합이 983년 여름에 봉기하여 독일 왕국이 임명한 귀족들과 기독교 성직자들을 몰아냈다.
반란은 레트라(Rethra)의 리우텐의 본당에서 계획되고 준비되었다. 6월 29일, 루티첸 연맹의 군대는 하벨베르크를 기습 공격하고 그곳의 주교좌를 파괴했다. 3일 후 그들은 북부변경백 디트리히 폰 할덴슬레벤(Dietrich von Haldensleben)과 주교좌의 거주지인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를 점령했습니다. 디트리히는 관리들 및 브란덴부르크 주교 폴크마르와 함께 도망치기 전에 처음에 성을 방어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루티첸 연맹은 탈출에 실패한 성직자들은 생포했고 교회 금고는 약탈당했다.
오보트리테스 연맹 또한 슬라브족들의 대대적인 봉기에 합류했고, 50년 가까이 정착해오던 기독교 신앙을 박해하며 옛 이교 신앙으로 돌아갔다. 북부 변경백 디트리히에게 모욕을 받은 미스티보이는 본인의 권력의 기반이 기독교와 독일왕가의 지지에 있던 만큼 봉기에 대해서 우호적이지 않았지만 동쪽에서는 지르지판족과 케시니아족 등의 하위 부족들이 차례로 그에게서 떨어져 나가고 슬라브 반란에서 승리 한 루티젠 부족 연맹에 합류했으며 서쪽에서는 바그리아인들이 이교도 부족 신앙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교도와 동맹을 맺은 루티젠의 기독교-군주 통치에 대한 위협에 대응하여 미스티보이는 로마-독일 황제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 결과 슬라브족들은 탕헤르까지 모든 마을을 황폐화시켰다. 심지어 마그데부르크도 즉각적인 위협을 받아 마그데부르크의 대주교 기젤허(Giselher), 할버슈타트(Halberstadt)의 힐데워드(Hildeward) 주교, 디트리히 폰 할덴슬레벤, 마이센 변경백 릭다그(Rikdag) 및 루사티아 변경백 오도(Hodo), 비니조(Binizo), 프리드리히(Friedrich), 두도(Dudo) 및 월백의 백작 지크프리트 등으로 구성된 백작들이 급히 징집병들을 모아 형성된 작센 군대를 이끌고 가까스로 루티첸 연맹의 진군을 막는데는 성공한다.
하지만 슬라브 봉기로 인해 빌롱 변경주는 폐지되었고, 북부 변경주 또한 서쪽의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사실상 지배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 북부 변경주의 디트리히는 명목상의 북부 변경백직을 유지한 체로 오토 3세의 섭정권 경쟁에 개입해 전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의 반대파로 있다가 985년 사망하였고, 명목상의 북부 변경백직은 루사티아 백작 오도가 겸하게 되었지만 993년 오도가 사망한 후 로타르가 변경백으로 임명되었고, 로타르는 에르카트의 루티젠 원정에 동참했지만 패전했다. 이후 그의 아들 베르너(Werner)와 에르카트의 딸 리우트가드의 결혼에 대한 입장을 놓고 에르카트와 갈등을 겪게 되면서 정적 관계가 되었다.
슬라브 봉기에서 자이츠 지역이 빼앗긴 점을 제외하면 봉기를 피한 현재의 작센주의 남부는 이 때를 기점으로 하나의 지역으로 통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봉기가 발생하기 전 메르베부르크 변경백인 군터가 칼라브리아에서 전사하면서 변경백직이 공석이 되었는데, 이때 마이센 변경백 리크다그가 메르제부르크 변경백까지 겸하게 되었다.
이후 985년 루티젠과의 전쟁 도중 사망하면 후임으로 에케하디너 가문의 시조인 에카르트 1세가 임명되었다. 참고로 이때 보헤이마 공작 볼레슬라프 2세는 리크다그의 사위였는데, 장인이 죽자 공백이 생긴 틈을 타 마이센 성을 공략하고 마이센 주교 볼콜트를 추방했다. 에카르트는 어린 왕과 그의 어머니 테오파누 태후에게 중요한 지원을 제공했다. 그의 군사적 책임은 주로 밀체니(Milceni) 땅을 확보하고 인근 폴란드 및 보헤미아 공작령을 봉쇄하는 것으로 구성되었다.
보헤미아의 볼레슬라프 2세 공작은 하인리히 공작과 동맹을 맺고 알브레히츠부르크 거주지를 점거할 기회를 잡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카르트의 군대가 승리한 후 987년에 철수해야 했다. 메르제부르크의 티에트마르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후에 지역의 거물들에 의해 튀링겐 공작으로 선출되었는데, 이는 부족 공작 선거 원칙의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이후 볼레슬라프 2세가 루티젠와 동맹을 맺고 990년 폴란드의 미에슈코 1세와 전쟁을 시작했을 때 에르카트는 보헤미아에 맞서 독일-폴란드 연합군을 이끌었다. 에르카트는 보헤미아의 볼레슬라프 2세에 의해 추방된 프라하의 주교인 티아드릭(Thiadric)을 그의 교구로 귀환시켰다 . 996년에 그는 오토 3세와 함께 로마로 원정을 떠났고, 그곳에서 왕은 교황 그레고리오 5세에 의해 신성 로마 황제로 즉위했다 . 2년 후, 에카르트의 군대는 998년에 산탄젤로 성을 습격한 크레센치오 2세 (Crescentius) 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 에르카트는 오토 3세의 호의를 얻었고 오토 3세는 그에게 후한 보상을 줬다.
한편 루사티아 변경주 또한 슬라브족의 봉기를 피했으나 오도의 후계자 문제로 인해 내부적으로 시끄러웠다. 990년경 오도는 수도사로 있던 아들 지기스문트를 환속시켜 변경백직을 승계시키려 했으나 티에트마르의 아들이자 조카인 게로가 독일 왕실을 등에 얻으면서 자신의 계승권을 주장하였고, 결국 993년 오도가 사망한 후 독일 왕실의 지원을 받은 게로가 루사티아 변경백이 되었고, 게로는 오토 왕가의 지원으로 변경백이 되었던 만큼 오토 3세의 측근으로서 997년 친정을 시작한 오토 3세의 측근으로서 오토 3세의 로마 제국의 부활(Renovatio imperii Romanorum)을 지지하게 되었다.
한편 오보트리테스 연맹의 상황은 그다지 낙관적이지는 않았다. 983년 슬라브 대봉기로 지르지판족이 루티젠 연맹으로 갈아타면서 간신히 얻은 케시니아 지역의 패권을 상실하였고, 바그리아 또한 다시 이교 신앙으로 돌아서면서 루티젠으로 갈아타는 등 그다지 좋지 않았고, 이때 미스티보이는 자신의 딸을 덴마크왕 하랄 1세 블로탄에게 시집을 보내 결혼 동맹을 맺는 등 쇠락해진 오토트리테스 연맹을 유지하려고 안간 힘을 써야 했다.
급기야 984년 폴란드, 보헤미아의 공작들인 미에슈코 1세와 볼레슬라프 2세와 함께 작센 부족공국의 쿠에들린부르크의 제국회의에 참석했다. 당시 전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가 오토 3세의 섭정권을 테오파누 태후로부터 탈취한 후 독일 왕위를 찬탈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미스티보이는 미에슈코와 볼레슬라프와 함께 하인리히 2세를 지지하는 것으로 표명했는데, 미스티보이는 어린 오토 3세보다는 성인인 하인리히가 차라리 독일왕이 되는 것이 작금의 엘베강 동부를 안정시킬 것이 낳은 자로 여겼던 것으로 봤다.
하지만 1년만에 하인리히는 반대파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바이에른 공국을 다시 반환받는 조건으로 섭정직으로 내려놔야 했다. 이후 미스티보이가 어떠한 정치적 활동을 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985년 테오파노는 하인리히 2세의 반란이 진압되자, 봉기로 상실한 북부변경주 자이츠 등의 동방 영토를 되찾기 위한 다수의 군사 활동을 계시하였다. 오토는 겨우 6살에 불과했을 당시 몸소 이 군사 활동에 참전했었다. 986년 원정 시기 때, 오토 3세는 폴란드 공작 미에슈코 1세의 충성의 맹세를 받았는데, 그는 제국군에게 군사적 도움을 주었고 오토 3세에게는 낙타 한 마리를 선물로 주었다. 루티치 연맹이 987년에 항복은 하였으나, 이들은 어린 왕의 이목을 계속해서 끌었다.
오토 3세가 11살이던 991년 9월에, 슬라브족 약탈자들이 브란덴부르크를 점령하였다. 992년에 바이킹 약탈자들의 발발과 더불어 이 침공은 오토 3세로 하여금 침입자들에 맞서 군대를 이끌게 하였으나, 이 군사 활동 중에 대패를 당하고 말았다. 다음 해에, 독일은 기근과 역병의 시기를 마주하였다. 994년과 995년에, 오토 3세는 북방의 슬라브족과 바이킹을 별 소득 없는 군사 원정을 벌였지만, 993년에는 브란덴부르크를 탈환하는 데는 성공했다.
독일 왕국의 루티젠 연맹에 대한 원정에 미스티보이가 참여했다는 기록이 없었다. 992년 오보트리테스 주교좌가 올덴부르크에서 메클렌부르크로 이전된 것에 대한 다른 설명은 없다. 올덴부르크 주교구는 990년에 종교적 동기를 지닌 봉기의 일환으로 바그리아인들이 성 요한 교회를 파괴하고 잔인한 고문으로 수많은 성직자들을 살해했으며 현직 주교 포크워드를 몰아내는 것으로 파괴되었다.
함부르크 대교구 - 브레멘은 참정권을 유지하고 올덴부르크 교구의 명목 주교인 라인베르트(Reinbert)를 서품했습니다. 이는 교회법에 따른 임시 조치의 일환으로 월백 백작이자 이름뿐인 북부 변경백 로타르 3세의 중재를 통해 이루어졌다. 로타르는 적어도 일시적으로 메클렌부르크에 교구 의석을 마련했으며, 교구 이전은 제국 교회로부터 더욱 독립적인 자신만의 신성한 공간을 만들기를 바랐던 미스티보이의 특별히 지원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995년 늦여름에 로마-독일 왕 오토 3세는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오보트리테스를 거쳐 메클렌부르크를 거쳐 루티젠 연맹을 공격했다. 이때 오토 3세의 메클렌부르크 체류는 내부 및 외부의 저항에 맞서 기독교인 오보트리테스 연맹주인 나코니드 통치자들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며 왕이 슬라브 군주의 거주지를 처음으로 방문한 것이었다.
이때 연맹주는 여전히 미스티보이였는지, 아니면 미스티스와프가 그의 아버지 미스티보이의 후계자로 임명되었을 때 왕의 우호적인 방문이 이루어졌는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았다. 미스티보이가 사망한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30] 그래도 이원정에서 독일 왕국은 브란데부르크 일대를 탈환하는데는 성공했다.
3. 폴란드
3.1. 피아스트 왕조 이전(건국 신화)
슬라브족이 폴란드 땅에 살게 된 것은 게르만족의 대이동 시절에 슬라브족들이 게르만족들의 뒤를 따라왔기 때문이다. 그 이전의 폴란드 땅에는 켈트족, 게르만족, 발트족이 살고 있었다. 원래 슬라브족 자체가 폴란드보다는 벨라루스의 남동부와 우크라이나와 드니프로 강 부근에 살았던 민족이다.켈트족은 현 폴란드의 남쪽 끄트머리 산악지대[31]에, 발트어족은 현 폴란드의 북부를 중심으로 거주하였고 이 중 동프로이센[32]에 거주하는 발트어족 외에는 상당수가 슬라브족의 이주 과정에서 흡수되었다. 게르만족은 폴란드 서부를 중심으로 거주하였다. 이들은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서쪽으로 이동하거나 슬라브족에 동화되었다.[33]
현재의 폴란드인들의 선조가 폴란드 지방에 정착한 것은 서기 9세기 전후로 현재의 폴란드 영토 내에는 폴란드인의 직접적인 시족 종족들인 폴란인과 레히치인, 마조비아인, 비스툴란스인 고플란스인, 레디안인 등 열 개의 부족들이 살고 있었다. 북해 연안 지역인 포메라니아에는 5세기 게르만족의 대이동 때 게르만족이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빈 땅이 되었고, 5~6세기경 마찬가지로 슬라브 계통 부족들이 동쪽에서 이동해 포메른에 정착했다. 이 슬라브족들을 포모제인이라고 부르며, 폴란드인과 마찬가지로 서슬라브 계통에 속한다. 지금도 폴란드에는 카슈브인 등 언어적으로 포모제인의 후계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뚜렷한 정치적 집단을 형성하지 못하고, 마자르족과 키예프 루스에 복속되었다.
폴란드인들은 서 · 남부 슬라브 인 가운데서 비교적 뒤늦게 출발하였다. 그 이유는 지리적 위치 때문이었다. 이로써 이교도적(異敎徒的) 문화는 꽤 오래 지속되었고, 독일인과 아시아 인의 침략 위협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이것이 폴란드 역사에 불리하게 작용하기도 하였다. 즉, 보헤미아와 대모라비아 공국이 점차 독일의 영향권 속으로 들어가고 있을 동안에도 폴란드는 문화 세계로부터 고립되어 있었던 것이다.
폴란드의 고대 국가로서의 시작은 9세기 초까지 거슬러갈 수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초기의 역사에 관해서는 극히 모호한 사료밖에 남아 있지 않다. 다만, 폴란드 인의 원시 생활은 그 무렵의 다른 슬라브 인이 그것과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폴란드의 고대 국가의 최초 시작이 폴란드 인의 정복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스칸디나비아 기마 민족의 정복의 결과인지는(러시아의 경우에서처럼) 아무런 결론을 보지 못하고 있다.
다만, 단일한 정치 체제로서의 통일은 무수한 부족 간의 내부적 정치 투쟁을 겪은 후에 이루어진 듯하며, 이 부족 가운데 폴리아(Polians) 족의 피아스트(Piast) 왕조가 최후 패권을 장악함으로써 일단락 지은 것으로 보인다. 폴리안은 '들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폴리아 족의 영토는 최초의 수도인 그니에즈노〔Gniezno, 즉 오늘날 포즈난(Poznan)〕를 중심으로 하여 폴란드 국가의 핵심적 부분이었다. 또 '폴리아 인이 사는 땅'을 의미한 폴란드라는 이름은 그대로 존속하여 지금껏 국가 이름에 남아 있다.
주위의 무수한 부족 가운데 실레지아(Silesia) 인들과 마조프셰 인들이 폴리아 인에게 복속되었다. 또, 비슬라 강 상류 지역도 폴리아 인에게 병합되었는데, 크라코프(Cracow)와 더불어 이 지역은 소폴란드의 중심부에 해당된다. 이 소폴란드는 후일 지역 분권주의 경향이 짙은 공동체 국가에서 최선두권을 장악하기도 하였다.
크라코프에는 폴란드가 통일될 때까지의 구전(口傳)이 가장 분명하게 남아 있다. 이 구전들 가운데 폴란드의 초기 왕, 제후들의 직계 선조와 기원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폴란드의 건국 신화는 본래 슬라브에는 레흐(Lech)와 체흐(Czech),그리고 루스(Rus)라는 이름의 3형제가 자신들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세상을 떠돌아다녔다고 한다. 어느 날, 삼형제와 그들이 이끄는 무리가 광야 사이에 있는 넓은 들판에 도착했는데, 그 들판에는 커다란 참나무가 서 있었으며, 흰 독수리들이 큰 나뭇가지에 둥지를 틀고 있었다.
이에 레흐는 이곳이 마음에 들어 이곳에 정착하고자 했고, 그곳의 흰 독수리 둥지(gniezdo)에서 이름을 따와 수도 그니에즈노(Gniezno)를 건설했다. 반면, 체흐와 루스는 각자의 땅을 찾기 위해 떠났고, 각자 체코(Cech)와 러시아( 루스, Рус)를 건국하게 되었다고 한다.
레흐(Lech)라는 이름 덕분에 폴란드인을 가리키는 고유어 레히치아(Lechicia)와 폴란드인의 땅을 의미하는 레히아(Lechia)가 탄생했다.[34] 체코 쪽 건국신화에서는 러시아 없이 폴란드와 체코만 등장한다. 체코인들 입장에서는 루스인들을 볼 일이 없으니..
이후 바벨의 용 전설의 주인공들이자 폴란드의 두번째 수도인 크라쿠프를 세운 크라쿠스 1세와 그리고 그의 자식들인 레흐 1세, 크라쿠스 2세, 그리고 반다 여왕이 차례대로 통치했다고 기술되었다. 바벨의 용 전설에서 레흐와 크라쿠스는 바벨의 용 스모크를 꾀로 죽이는데 성공하는 크라쿠스 2세가 명성에 눈이 멀어 형제인 레흐 1세를 죽이고, 폴란드의 왕이 되나 나중에 크라쿠스 2세의 진실을 알게 된 백성들이 크라쿠스를 죽이고 반다를 왕으로 웅립했다고 한다.
반다의 경우 바벨의 용 전설 말고도 알레마니와 관련된 서로 상반되는 연대기 기록들이 있다.
- 알레만니의 지도자가 반다의 땅을 침공했는데, 군대를 이끄는 반다의 미모에 홀린 적군들이 싸움을 거부하여 알레만니의 지도자는 자살했고, 반다는 미혼으로 오래오래 살았다.
- 알레만니의 지도자가 반다에게 구혼했다가 거절당하여 반다의 땅을 침공했다. 반다는 그를 전사시켰으나 자신의 존재가 앞으로도 침공의 구실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해 강에 투신자살했다.
다음으로 레슈코 1세가 통치했다고 하는데, 연대기 작가마다 레슈코 1세에 대한 서술을 달리하였는데, 빈센티 카드우벡(Wincenty Kadłubek)라는 크라쿠프의 주교이자 연대기 작가는 그다 반다 여왕의 후임은 맞지만 고대 그리스의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3세와 싸웠다는 다소 허황된 기록을 남겼고, 15세기 연대기 작가인 얀 드우고시(Jan Dlugosz)는 카드우베크가 주장한 것과 달리 현실적으로 모라비아 공국과 마자르족이 싸웠다고 보고 있다.
이후 레슈코 1세의 아들로 추정되는 레슈코 2세가 폴란드의 통치자를 계승해 포피엘 왕조를 개창한다. 이후 그의 자리를 승계한 레슈코 3세에 대해 카드우베크는 레슈코 1세의 기록처럼 그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파르티아 제국과 싸웠다는 허황된 기록을 남겼고, 작가 미상의 연대기인 대폴란드 연대기에서는 그의 국가는 서쪽에서 " 베스트팔렌 , 작센 , 바이에른 및 튀링겐 "까지 확장되었다. 패배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그의 여동생 율리아와 결혼하여 그녀에게 바이에른을 지참금으로 받았고, 율리아는 남편으로부터 "세르비아 지방"을 받았다고 하는데, 당연하게 시대적 모순이 있는 카드우베크의 기록에 대해 얀 드우고시와 16세기 연대기 작가인 마르신 비엘스키는 카이사르에 대한 내용을 수정하고 카롤루스 대제 시기로 잡아야 했다. 또한 죽기전 폴란드를 자신들에게 분할해줬다고 한다.
레슈코 3세의 뒤를 이은 포피엘 1세의 경우에도 연대기 작가들마다 기록이 달라 카드우베크는 그가 20명의 의붓 형제들과 공동으로 통치한 명군, 얀 드우고시는 명장이지만 나태한 통치자로 봤고, 본래는 크라쿠프가 수도였는데, 그니에즈노로 천도하려고 했으나 쿠야비(Kujawy)의 고프워(Gopło) 호숫가에 크루슈비차(Kruszwica)로 옮기게 되었다고 한다.
포피엘 1세의 아들로 포피엘 왕조의 마지막 군주인 포피엘 2세의 경우 연대기 작가들마다 공통적으로 술과 여자, 노래에만 관심을 두는 잔인하고 부패한 통치자였다고 기술했으며, 그는 아름답지만 권력에 굶주린 독일 공주인 그의 아내로부터 큰 영향을 받아 민중을 못 살게 굴었다. 가난한 백성에게 공물상납을 지시했고, 재산을 빼앗거나 죄 없는 자들을 감옥에 보내기 부지기수였다. 또한 그의 통치기는 9세기경으로 비정된 만큼 북쪽의 바이킹들의 약탈이 만성적이었는데, 이에 대해 무능한 대처를 보이고 있었다고 한다.
이를 보다못한 선친 형제의 세 명의 삼촌들이 타일렀으나 도리어 이들을 추방시켰다. 훗날 포피엘 부부는 삼촌들을 꾀내어 독살했는데, 이들의 시체에서 수 많은 쥐떼가 나와 포피엘 부부를 덮쳐 죽여버렸고, 이로써 크루쉬비차의 통치자는 사라졌다.
3.2. 피아스트 왕조
이때를 기점으로 피아스트 왕조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게 되었다. 12세기에 알려지지 않은 작가가 집필한 <대 폴란드 연대기>에 따르면, 폴란의 대공 포피엘 2세가 두 아들이 머리를 깎는 성인식이 열리는 것을 기리기 위해 잔치를 열었다. 이때 두 명의 낯선 사람이 초대도 없이 잔치에 오자, 포피엘 2세는 이를 불쾌하게 여겨 테이블에 앉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크루쉬비치에서 쫓아냈다. 그 후 두 사람은 교외지를 떠돌다 피아스트(Piast Kołodziej)[35]라는 농부 혹은 수레바퀴 장인을 만났다. 피아스트는 두 사람을 자기 집으로 데려와서 환대했고, 두 사람은 이에 감사를 표하며 이렇게 말했다.“우리의 도착이 당신에게 기쁨이 되기를 바라며, 당신은 우리에게서 풍성한 번영과 후손의 영예와 영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후 피아스트는 고명아들의 머리를 깎는 의식을 거행하려고, 했다. 아이는 태어나서 장님이이지만 총명했다고 하며, 이후 성인이 되자 당시 풍습대로 어머니 줴피하(Rzepicha)의 슬하에서 아버지 밑으로 들어가 머리를 자르는 성인식이 치러질 예정이었고, 잔치를 벌이고자 했다. 그런데 잔치에 초대받은 손님들의 숫자가 부부의 예상보다 많은 탓에 이들은 음식이 부족할 것을 걱정했는데, 남편인 피아스트가 데려온 두 사람과 함께 식사했다.
가난한 형편이었던 터라 음식이 변변치 않았는데, 이때 기적이 일어났다. 술통에 맥주가 떨어지지 않았고, 도살한 돼지가 열 그릇을 채울 만큼 많았던 것이다. 피아스트와 아내 줴피하는 두 손님과 상의한 뒤 마을 주민들을 모두 초대해 함께 즐기기로 했다. 이후 두 손님은 당시 7살이었던 피아스트의 아들에게 몸소 세례를 주고 시에모비트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몇년 뒤, 크루쉬비차 공작 포피엘이 일가족과 함께 처참하게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모든 사람들이 피아스트를 통치자로 추대했고, 그리하여 피아스트가 새로운 공작이 되면서 피아스트 가문이 통치가문으로서 등장하게 된다.[36]
폴란드 성직자, 연대기 작가인 얀 드우고시(Jan Dlugosz, 1415 ~ 1480)에 따르면, 피아스트의 선출은 포피엘 2세 사후 이웃 부족의 침략을 막기 위해 이뤄졌다고 한다. 또한 그는 피아스트가 폴란인들의 수도를 크루슈비차에서 그니에즈노로 이전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피아스트는 120세까지 살았지만 레슈코 3세가 자녀들에게 분할하기 전에 존재했던 통합된 폴란인들의 나라를 복원하는 데 실패했다고 한다.
16세기 폴란드 역사가 마르친 비엘스키(Marcin Bielski, 1495 ~ 1575)에 따르면, 피아스트는 양봉가 또는 수레공이었으며, 포피엘 2세가 죽은 후 사람들이 호수 반대편에서 가장 먼저 올 사람을 대공으로 선출하기로 했을 때 호수 반대편에 위치한 양봉장에서 돌아오면서 대공으로 선출되었다고 한다. 또한 비엘스키는 그의 통치가 50년간 지속되었으며, 선출은 842년에 이뤄졌다고 덧붙였다.
현대의 역사학자들은 위의 이야기들을 후대에 지어진 전설로 취급하며, '피아스트'라는 명칭의 기원은 piasta (폴란드어로 "허브")와 piastun(폴란드어로 "관리인" 또는 "수호자") 중 하나일 거라 추정한다. 이중 두번째 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그가 다른 통치자의 궁정에서 메이저도모(majordomo) 또는 "집의 청지기"를 맡았다가 점차 권력을 장악하여 원래 통치자를 몰아내고 폴란인의 지도자가 되었을 거라 추정한다. 프랑크 왕국의 궁재 가문이었던 카롤링거 가문이 원래 통치 왕조였던 메로빙거 왕조를 몰아내고 프랑크 왕국을 지배하게 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피아스트가 사망하고 시에모비트가 폴란드 공작이 되나 생애 치적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되지 않고, 사후 레스테크가 공작이 되었고, 대 폴란드 연대기에서는 레스테크의 기사도는 고귀함과 용기 면에서 아버지와 동등했다고 한다.. 그의 이름의 유래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교활한"을 의미하는 옛 폴란드어 lście 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 폴란드 역사가 스타니스와프 자크르제프스키(Stanisław Zakrzewski, 1873 ~ 1936)는 그가 모라비아 공주와 결혼했을 거라고 추정하며, 일부 학자들은 14세기의 성명 미상의 벨기에 연대기 작가의 설명에서 추론하여 작센 공주와 결혼해 리에주의 주교가 되는 아들 에라키우스를 낳았을 거라고 추정한다. 사후에 아들인 시에모미수가 계승했다고 한다.
그는 아들 미에슈코 1세를 낳았으나,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었기에 근심했고, 7년 동안 다른 아들을 낳지 못하자, 외아들이 나라를 혼란스럽게 만들 거라며 '혼란'이라는 의미인 미에슈코라는 이름을 지어줬다고 한다. 폴란드 크라쿠프의 주교로서 교회 개혁가이자 역사가인 윈센티 카우베크(Wincenty Kadłubek, 1150 ~ 1223)에 따르면, 그는 갓 태어난 아들을 보고 혼란스러워 했고 '혼란'이라는 의미인 미에슈코로 이름을 지어줬다고 한다.
미에슈코는 7살 때까지 시각 장애인이었다가 어느 날 기적적으로 시력을 회복했다. 이에 시에모미수는 나이가 많고 신중한 사람들을 불러모아서 소년의 실명과 회복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긴급하게 물었다. 그들은 미에슈코의 눈이 먼 것은 폴란드가 이전에는 눈이 멀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미에슈코가 시력을 되찾은 것은 이제부터 폴란드가 그에 의해 계몽되고 이웃 국가들보다 높아지게 될 것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현대 폴란드의 여러 학자들은 시에모미수가 실존 인물이 분명하다고 믿으며, 930년경부터 통치하면서 서부 폴란족, 고플란족, 마조브인들의 영역을 통합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기록이 미비하기 때문에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950년에서 960년 사이에 사망하고 아들 미에슈코 1세가 뒤를 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미에슈코가 초년기에 눈이 멀었다가 회복되었다는 일화는 대부분의 연대기에 그대로 반영되었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신약성경의 인물인 바울로가 기독교인을 박해하러 가던 중 눈이 멀었다가 나중에 회복된 후 기독교로 개종한 것을 본떠서 만든 전형적인 중세 우화일 뿐 사실일 가능성은 없다고 간주한다. 이외에 그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950~960년 사이에 시에모미수의 뒤를 이어 폴란인의 지도자가 된 그는 마조프셰와 포메라니아 중부 및 동부 일대, 그리고 오드라 강변 지역에 거주하는 폴리비안 슬라브 부족들을 빠르게 복속시켰다고 전해진다. 당대 미에슈코 1세에 대해 최초로 언급된 기록을 남긴 이로는 코르도바 칼리프국 출신의 유대인 여행자인 아브라함 이븐 아큐브로, 아브라함은 미에슈코를 가리켜 네 개의 슬라브족 왕들 중 한명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독일측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리시카비키(Licikaviki)라는 종족의 왕이었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리시카비키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해 포메라니아에 거주하다가 미에슈코에게 복속된 루부시(Lubusz) 족의 오기라는 설, 미에슈코의 조부인 레스테크에서 파생되어 미에슈코가 다스리는 민족 전체를 가리킨다는 설 등이 제기되고 있지만 아직까지 합의되지 않았다.
이 무렵, 독일 귀족들은 여전히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은 슬라브인들이 거주하는 오데르강 일대에 대한 확장 정책을 추구했다. 963년, 변경백 게로는 루사티아 부족과 슬루피아 부족을 정복했고, 이로 인해 미에슈코 1세의 영역과 맞닿게 되었다. 당시 미에슈코 1세는 포메라니아 서부 일대에 거주하는 울린인과 벨레티인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으나 고전을 면치 못했다. 게다가 작센 빌룽 가문의 비흐만 2세가 포메라니아 서부로 망명한 뒤 그곳에 사는 슬라브인들을 이끌고 963년 미에슈코 1세를 상대로 2차례 승리를 거두고 미에슈코의 이름없는 형제를 살해했다고 한다.
이렇듯 독일 제후들의 위협이 가시화되자, 미에슈코는 964년부터 보헤미아 통치자인 볼레슬라프 1세와 협상했다. 그 결과 965년에 볼레스와프 1세의 딸 두브라우카와 결혼했다. 그리고 966년에 세례성사를 받고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폴란드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두브라우카와 결혼하기 전에는 7명의 아내를 취했지만, 두브라우카와 결혼하려면 이들과 헤어지고 그리스도인이 되겠다고 약속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자 받아들였다고 한다. 미에슈코는 기독교 개종을 통해 독일 변경백들이 이교도들을 기독교로 강제 개종시키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쳐들어올 가능성을 차단하고자 했을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중앙 집중화 정책에 방해가 되는 "오래된" 사제 계급을 제거하기 위해 기독교 개종을 감행했을 거라 추정하기도 한다.
기독교 걔종 후, 라틴 문화가 폴란드에 유입되기 시작했다. 교육을 받고 글을 읽을 줄 아는 최초의 고문이 궁정에 신설되었고, 교회 조직의 창설이 시작되었다. 968년에는 포즈난에 라틴 예식을 따르는 선교 주교단이 설립되었다. 폴란드 최초의 주교로 일컬어지는 요르단(Jordan)이 창설한 이 주교단은 다른 지역의 대주교가 아닌 교황의 직속 주교구를 자처했다. 그러나 기독교 개종을 거부하고 옛 슬라브 신앙과 관습을 고집하는 슬라브인은 여전히 많았고, 미에슈코는 이들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는 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어야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독교 개종을 감행해 독일과 보헤미아와의 관계를 개선한 뒤, 미에슈코는 포메라니아 정복 전쟁을 감행했다. 967년 2개의 기병부대로 구성된 보헤미아 지원군과 합세한 뒤 비흐만 2세가 이끄는 슬라브인들과 맞붙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비흐만 2세를 전사시킨 뒤 오데르 강 어귀를 정복했다. 뒤이어 노테치(Noteć)강 유역을 공략하고 970년 산토크(Santok)에 요새를 건설했댜. 972년 작센 동부 변경백 오도가 폴란인의 땅을 침공하자, 그는 이에 맞서 세디니아에서 2차례 맞붙었다. 첫번째 전투에서는 오도가 승리했지만, 두번째 전투에서는 미에슈코가 패퇴를 가장해 적을 유인하는 사이 그의 동생인 치데부르(Czcibor)가 적군의 측면을 기습하는 작전이 성공하면서 미에슈코가 승리를 거두었다.
973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1세는 미에슈코와 오도를 크베들린부르크에 소환해 두 사람이 자신의 허락 없이 전쟁을 벌인 것에 책임을 물으려 했다. 일부 사료에서는 미에슈코가 황제의 명령에 복종하여 크베들린부르크로 갔다고 하지만, 다른 사료에서는 위협을 느끼고 아들 볼레스와프를 대신 보냈다고 한다. 오토 1세가 어떤 판결을 내렸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크베들린부르크 회의가 끝난 지 몇 주 후인 5월 7일에 사망한 후 내전이 벌어졌기 때문에 판결이 집행되지 않았을 거라 추정된다.
오토 1세 사후,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가 오토 1세의 어린 아들 오토 2세를 밀어내고 제위를 차지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미에슈코는 보헤미아 공작 볼레스와프 2세와 함께 이 음모에 가담했다. 그러나 음모는 조기에 발각되었고, 오토 2세는 977년 보헤미아를 공격해 볼레스와프 2세를 복종시켰다. 979년, 오토 2세는 미에슈코 1세의 영역으로 진군했다. 원정의 과정과 결과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황제가 악천후로 인해 12월에 튀링겐과 작센 국경으로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볼 때 이렇다할 승리를 거두지 못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 후 양자는 980년 봄 또는 여름에 새로운 협정을 체결했고, 977년 아내 두브라우카가 사망한 뒤 홀아비로 지내던 미에슈코 1세는 북방변경백 디트리히의 딸인 할덴슬레벤의 오다와 재혼했다.
980년대 초, 미에슈코는 자신의 딸 또는 자매를 스웨덴 왕 에이리크 인 시그르셀리와 결혼시킨 뒤 스웨덴과 힘을 합쳐 포메라니아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덴마크인들을 몰아내려 했다. 덴마크인들은 991년경 폴란-스웨덴 연합군에게 패배했고, 포메라니아 방면 덴마크 세력 지도자는 추방되었다. 한편, 오토 2세는 982년 이탈리아에서 칼라브리아의 아랍인들에게 패배했다. 이로 인해 신성 로마 제국의 위세는 위축되었고, 983년 폴라비아의 슬라브인들이 대규모 봉기를 일으켜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같은 해 오토 2세가 사망하고 어린 아들 오토 3세가 제위에 오르자, 미에슈코 1세는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를 재차 지원해 이득을 챙기려 했다. 그가 제국 내전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기록이 부족해서 불분명하지만, 985년 자신의 영역으로 쳐들어온 폴라비아 슬라브인들을 상대할 때 오토 3세에게 충성을 바친 작센군의 지원을 받은 걸 보면 입장을 조기에 바꿔서 오토 3세에 가담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같은 시기 장남인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를 마이센 변경백 릭다그의 이름 미상의 딸과 결혼했다. 그러다 985년 릭다그가 사망하자 볼레스와프는 미련없이 릭다그의 딸과 이혼하였다. 986년 오토 3세의 군대가 보헤미아를 황폐화시키자, 미에슈코는 즉시 황제를 알연한 뒤 막대한 선물을 넘겼다. 일부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낙타를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이후 그는 오토 3세의 슬라브 원정에 가담해 각지를 황폐화하고 수많은 적병과 민간인을 살상했다. 두 사람이 공격한 지역의 위치는 기록이 미비해서 불확실한데, 일부 학자들은 폴라비아였을 거라 추정하고, 다른 학자들은 보헤미아였을 거라 본다.
같은 시기 986년에서 987년 사이에 헝가리 출신의 여인과 재혼했다. 이 여인의 실제 이름은 분명하지 않다. 15세기 폴란드 역사가 얀 디우고시(Jan Długosz)에 따르면, 헝가리 대공 게저의 딸 유디트라고 한다. 반면 브와제이 슬리윈스키(Błażej Śliwiński, 1954~) 등 현대의 일부 폴란드 및 헝가리 역사가들에 따르면, 트란실바니아 대공 줄러의 딸이라고 한다. 이 여인은 987~989년 사이에 볼레스와프 1세와 이혼하거나 사망했고, 987~989년 모라비아 또는 루사티아 출신의 귀족 도브로미르의 딸 엠닐다와 세번째로 결혼했다.
990년, 미에슈코는 단독으로 보헤미아와 전쟁을 일으켜 실레시아 일대를 정복하고 브로츠와프, 글로구프, 오폴레에 요새를 건설했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마워폴스카(Małopolska)를 정복하고 장남 볼레스와프의 영지로 삼았다.
991년경, 미에슈코는 다고메 유덱스(Dagome Iudex)로 명명된 유언장을 작성했다. 그는 이 유언장에서 자신의 국가를 교황의 보호하에 두고 자국의 국경이 어디까지인지를 설정했다. 이 유언장 덕분에, 미에슈코의 통치 말기에 폴란드 대공국의 국경을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당시 폴란드 대공국은 발트해에서 고대 프로이센, 루테니아, 크라쿠프, 모라비아 및 루사티아 상부, 그리고 그니에즈노를 포함한 오데르 강 어귀까지 이르렀다. 다만 문서에서는 모라비아에서 루사티아 상부까지 국경이 이어진다고 명시되었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확립되었는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 여기에 "인접 지역"으로 동부 포메라니아, 마조프셰, 시에라츠와 윙치차, 실레시아 및 루사티아의 일부가 거론되었다.
그 후 크베들린부르크 회의에 참석해 오토 3세와 황제의 모후인 테오파노 황후에게 선물을 교환하고 브레나 원정에 동행했던 그는 본국으로 귀환한 직후인 992년 5월 25일 포즈난에서 열병에 시달리다 사망했다. 사후에 포즈난 대성당에 안장되었다고 전해지나 현존하지 않는다. 일각에서는 그가 축복받은 성모 마리아 교회 지하에서 발견된 석관에 묻혔다고 주장했지만, 학계에서는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간주하고 있다. 사후에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 미에슈코, 람베르트 등 그의 세 아들들이 아버지가 물려준 영토를 나눠 가졌다. 그러나 얼마 후 볼레스와프 1세가 정변을 일으켜 이복형제 미에슈코, 람베르트와 계모 오다를 몰아내고 폴란드의 유일한 대공이 되었다.
볼레스와프 1세는 기독교가 아직 전파되지 않은 고대 프로이센에 영역을 확장하려 했다. 997년, 프라하에서 추방된 주교 보이치에흐 스와니코비치를 프로이센으로 보내 선교 사업을 벌이게 했다. 그러나 그 해 4월 23일에 보이치에흐가 원주민들의 공격을 받아 살해당하고 수급이 베어져 기둥에 박히자, 그는 자신의 몸무게 만큼의 금을 원주민들에게 주고 보이치에흐의 유해를 받은 뒤 그니에즈노 교회에 안치했다. 999년 보이치에흐의 시성식이 거행되었고, 그는 이를 정치적으로 활용하여 그니에즈노 대교구가 독일 대도시로부터 독립하도록 했다.
1000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3세가 그니에즈노에 방문해 성 아달베르트의 무덤을 순례했다. 이후에 열린 그니에즈노 회의에서, 그니에즈노에 대교구를 세우고 크라쿠프, 코워브제크, 브로츠와프에 주교구를 둔 독립된 폴람드 교회 조직을 설립하기로 했다. 또한 볼레스와프는 신성 로마 제국 황족의 형제로 인정받았고, 오토 3세와 선물을 교환했다. 학계에서는 오토 3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조짐을 보이는 폴란드를 붙들어두기 위해 이같은 조치를 취한 것으로 추정한다. 일부 학자들에 따르면, 오토 3세가 볼레스와프를 마이센 변경백 에크하르트 1세에 이어 제국의 두번째 후계자로 지명했으며, 나중에 에크하르트 1세가 살해되자 볼레스와프가 신성 로마 황제로 즉위하고자 전쟁을 단행했을 거라 추정한다. 그러나 이 일이 실제로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11세기 프랑스 연대기 작가 샤반느의 아데마르에 따르면, 오토 3세와 볼레스와프는 아헨에서 카롤루스 대제의 황금 왕좌를 발견했다고 한다.
4. 현 체코·슬로바키아 일대
4.1. 루기 왕국과 헤롤리 왕국
476년 서로마 제국 제국 붕괴 당시 현재의 체코 남부와 현재의 오스트리아의 오버 외스터라이히와 니더 외스터라이히의 지역에 동게르마족에 속한 루기족과 현재의 슬로바키아 남부 티사 강 유역에 헤롤리족이 정착해 각기 부족 왕국을 세운 상태였다.-
루기 왕국
476년 서로마 제국이 붕괴된 이후 펠레테우스는 동고트족 여성과 결혼해 동고트 왕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고, 오도아케르가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를 퇴우시키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동로마 제국의 제노의 이간책으로 적대적 관계가 되었고, 페레테우스는 오도아케르를 지지한 조카 프레데릭스를 처형했다. 그 후, 오도아케르는 루기 왕국을 침공하여 현재 비엔나 부근의 전투에서 루기 왕국을 멸망시켰다. 펠레테우스와 그의 아내는 붙잡혀 487년에 라벤나에서 처형되었고, 루기족의 영토는 헤롤리족이 차지했다. 2년 후 펠레테우스의 아들 프리드리히의 통치하에 살아남은 루기족은 동고트족의 왕 테오도리크 대왕의 신하가 되면서 루기족은 동고트 왕국에 흡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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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롤리 왕국
476년 서로마 제국이 붕괴된 상시 헤롤리 부족은 오도아케르에게 복속된 상태였으나 오도아케르가 이탈리아 국왕으로 있던 동안 그위세를 빌어 488년 루기 왕국의 영토를 장악하는데 성공하나, 493년 오도아케르가 동고트 왕국의 테오도리크 대왕에게 몰락한 후 동고트 왕국의 압박을 받게 되었다.
더욱이 오도아케르와 테오도리크 간의 전쟁 와중인 489년에 랑고바르드족이 옛 루기족들의 영토 일대로 이주해왔다.이때 루돌프란 이름의 왕이 헤롤리족을 통치하고 있었다. 루돌프는 자신의 영토에 들어온 랑고바르드족을 불쾌하게 여겼고, 랑고바르드족을 몰아내려고 했다. 이때 랑고바르드족들은 정착지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헤롤리족에게 복속되는 것을 택했다.
그러다가 500년경 랑고바르드와 헤롤리 간의 전쟁이 발생하게 되었다. 랑고바르드의 연대기 작가 파울 부제의 언급에 따르면 당시 랑고바르드족의 왕 타토의 딸인 로메트루드가 사절로 온 루돌프의 동생을 죽였다고 하고 동로마 제국의 연대기 작가 프로코피우스의 언급에 따르면 헤롤리족에 기본의 납부액을 세배로 올리면서 양자간 전쟁이 발발했다고 한다.
결국 508년 타토가 이끄는 랑고바르드족은 헤롤리족을 격파에 그들의 왕인 루돌프를 죽이면서 헤롤리 왕국은 붕괴되었고, 살아남은 헤롤리족들은 제각기 동고트 왕국이나 동로마 제국으로 도망친 후 현지에 동화되어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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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고바르드족
랑고바르드족은 490년경에 루기족의 옛 영토에 정착했는데, 당시 왕은 고데호크로 그의 조부인 레토를 시조로 하는 레팅스 왕조의 세번째 왕이었다. 당시 현재의 슬로바키아를 기반으로 다른 게르만족인 헤롤리족이 현재의 슬로바키아를 기점으로 랑고바르드족이 지배하고 있던 루기족의 영토까지 그들의 영토였다. 이에 고데호크나 아니면 그의 아들인 클라포가 헤롤리족에게 복속되는 것을 택했다. 또한 이시기에 게르만 전통 신앙에서 기독교의 이단 종파인 아리우스파로 개종했다.
그러나 5대 왕인 타토 때에 이르려 랑고바르드족은 헤롤리족과 전쟁을 하게 되었다. 랑고바르드의 연대기 작가 파울 부제의 언급에 따르면 당시 랑고바르드족의 왕 타토의 딸인 로메트루드가 사절로 온 루돌프의 동생을 죽였다고 하고 동로마 제국의 연대기 작가 프로코피우스의 언급에 따르면 헤롤리족에 기본의 납부액을 세배로 올리면서 양자간 전쟁이 발발했다고 한다. 결국 508년 타토가 이끄는 랑고바르드족은 헤롤리족을 격파해 그들의 왕인 루돌프를 죽이면서 헤롤리 왕국은 붕괴되었고, 살아남은 헤롤리족들은 제각기 동고트 왕국이나 동로마 제국으로 도망친 후 현지에 동화되어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타토는 조카 바초에게 살해되었고, 그의 아들 힐데키스는 게피드 왕국으로 도망쳐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숨어 살아야 했다.
왕이 된 바초는 튀링겐과 프랑크, 동고트와 게피드와 결혼 동맹을 맺었고, 아직 남아 있는 헤롤리족을 동화시키기 위해 헤롤리족 여성 실링가와 결혼했다. 그밖에도 동로마제국 동맹을 맺어 보헤미아에서 판노니아까지 롬바르드족의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으며 , 539/540년에 사망할 당시 그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왕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그의 명성과 무색하게도 레팅스 왕조는 그가 죽은지 7년도 안되어 무너지고 말았다. 그의 뒤를 이은 아들로 실링가의 소생인 발데리는 아직 어렸기에 튀링겐 왕족 출신으로 바초의 뒤링겐 족 아내인 라이쿤다의 이복남매로 알려진 아우도인이 섭정으로 통치했다. 그러다가 547년 발데리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는데, 동로마의 연대기 작가 프로코피우스(Procopius)는 그가 질병으로 사망했다고 말하지만, 아우도인(Audoin)이 왕좌를 확보하기 위해 성년이 되기 전에 그를 죽였을 가능성도 있다.
어째든 레팅스 가문의 혈통이 단절되자 섭정이었던 아우도인이 랑고바르드족의 왕으로 선출되었다. 이시기 랑고바르드족이 현재의 슬로바키아 지방에 정착한 상태였는데, 아우도인은 다뉴브 강을 건너 판노니아로 이주했다. 이때 게피드의 왕 엘레문드는 판노니아의 패자가 되었지만 546년 사망하고 게피드의 귀족 중 한명인 투리신드가 엘레문드의 아들인 오스트로고타를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
랑고바르드족의 갑작스러운 남진에 투리신드는 이들을 몰아내려 했고, 랑고바르드족은 살아남기 위해 처절한 항쟁을 벌여야 했다. 그 과정에서 동로마 제국의 도움을 받고자 그들의 봉신이 되었고,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을 벌일 때 대규모 보조군을 보내 나르세스 장군이 이끄는 동로마군이 동고트 왕국을 무너뜨리고 이탈리아를 석권하는 데 크게 기여했고, 랑고바르드족들 또한 552년 다뉴브강과 사바강 사이로 추정되는 아스펠드에서 아우도인의 아들인 알보인이 게피드 족의 군주 투리신드의 아들 투리스모드를 처단하면서 판노니아에 완전히 정착하는데 성공한다,
후대의 랑고바르드 왕국의 연대기 작가인 파울 부제에 따르면, 알보인은 전투가 끝난 후 관례에 따라 게피드 족의 본거지로 찾아가서 투리스모드가 생전에 착용했던 무기를 돌려줬고, 투리신드는 투리스모드의 팔을 그에게 주었다고 한다. 560년 아우도인이 죽자 알보인이 랑고바르드족의 왕이 되었다. 그는 동로마 제국에 종속된 부족이 새로운 길을 모색할 발판을 마련하고자 프랑크 왕국의 군주 클로타르 1세의 딸 클로신드와 결혼했다.
그 후 게피드족을 꺾기 위해 당시 판노니아로의 진출을 꾀하던 아바르족에 사절을 보내 자신을 도와준다면 게피드족의 땅을 넘기겠다고 제안했다. 아바르족의 군주 바얀 1세는 흔쾌히 수락하고, 랑고바르드족과 연합하여 게피드족을 대적했다. 파울 부제에 따르면, 567년 쿠니문드 왕이 이끄는 게피드족이 랑고바르드족을 선제 공격했지만 아바르족의 원군에 힘입은 랑고바르드족이 완승을 거두었고, 알보인은 쿠니문드를 주살한 뒤 수급을 전리품으로 가져가서 와인 잔으로 만든 후 허리띠에 착용했다고 한다. 일부 사료에 따르면, 바얀 1세가 쿠니문드를 죽이고 수급을 벤 뒤 알보인에게 넘겼다고 한다.
알보인은 쿠니문드의 딸 로자문드를 아내로 삼았지만, 실제로는 하녀처럼 대우했고 온갖 학대를 자행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바르족을 끌여들인 것이 큰 실책이었다는 것이 곧 드러났다. 바얀 1세는 게피드족의 영역을 빼앗은 뒤 랑고바르드족까지 몰아내려 했다. 알보인은 자신에게 귀순한 게피드족과 힘을 합쳐 아바르족과 맞섰으나, 아바르족의 군사적 역량이 월등했기에 도저히 이길 가망이 없었다. 이에 판노니아에 계속 있다가는 종족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장고를 거듭한 끝에 이탈리아로 이동하기로 마음먹고 판노니아를 떠난다.
이후 랑고바르드족의 영토들인 노리콤와 판노니아와 함께 현재의 체코·슬로바키아 일대가 아바르족의 영토가 되었다.
4.2. 사모 제국
현재의 체코와 슬로비키아 지역으로 이주한 서슬라브계 부족들은 622년까지 아바르 칸국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다가 623년 사모라는 인물이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슬라브 부족들을 규합하기 시작했다.서기 9세기까지 슬라브 부족에 문자가 도입되지 않았기 때문에, 동시대 슬라브인이 쓴 사모에 대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에 대한 주요 출처는 7세기에 신원 미상의 작가가 프랑크 왕국의 역사를 다룬 <프레데가르 연대기>이다. 이에 따르면, 사모는 본래 “세노나고(Senonago)” 지역 출신의 프랑크인이라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세노나고가 파리 남동쪽에 있는 상스(Sens)라고 추정하며, 다른 학자들은 벨기에 에노주의 수니에(Soignies)일 거라고 추정한다.
현대 학계에서는 사모가 프랑크인이었다는 프레데가르 연대기의 서술은 신뢰성이 떨어지며, 슬라브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일부 학자들은 사모(Samo)라는 명칭은 "주인" 또는 "나의 통치자"를 의미하는 고대 슬라브어 호칭이라고 주장하며, 슬라브식 이름 사모슬라프(Samoslav)의 약어일 거라는 견해도 제기되었고, 히브리어 이름 사무엘(Samuel)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슬라브인들은 6세기경에 모라비아, 북부 로어외스터라이히, 북서부 보헤미아, 카린티아, 티롤,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북부, 헝가리 등지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다 6세기 말에 판노니아 평원에서 출발한 아바르 칸국에 정복된 뒤 아바르 칸에게 공물을 바치고 아바르족이 치르는 전쟁에 동원되었다. 그러다가 아바르 칸국이 동로마 제국과 기나긴 전쟁을 치르면서 쇠락해지자, 슬라브 부족들은 이 때를 틈타 독립을 꾀했다. 프레데가르 연대기에 따르면, 아바르족[37]은 슬라브인[38]들의 아내와 딸과 함께 잠을 자며 겨울을 보냈으며, 슬라브인들은 매년 칸에게 경의를 표하고 공물을 바쳤다. 아바르족 아버지와 슬라브족 아내와 딸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은 이 수치스러운 억압을 참을 수 없어 칸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프레데가르 연대기에 따르면, 사모는 본래 슬라브 부족의 영역에서 상품을 판매하는 상인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슬라브족이 아바르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참여해 뛰어난 군사적 역량을 발휘해 그들이 승리를 거두는 데 일조했고, 이에 깊은 감명을 받은 슬라브인들에 의해 렉스로 추대되었다고 한다. 프레데가르 연대기는 이때가 프랑크 국왕 클로타르 2세 재위 40년이었다고 기술했는데, 현대 학자들은 이를 토대로 서기 623년 또는 624년에 사모가 지도자로 추대되었을 거라고 본다.
프레데가르 연대기에 따르면, 사모는 12명의 슬라브인 아내를 두고 22명의 아들과 15명의 딸을 낳았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이 아내들은 사모가 자신의 휘하에 들어간 12개 부족을 자발적으로 복종시키기 위한 정치적 결혼으로 맺어졌을 거라고 추정한다. 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프레데가르 연대기의 저자가 이교도인 사모의 야만성을 강조하기 위해 과장했을 거라고 본다. 또한 그는 장거리 무역에 전념해 상당한 부를 확보하고, 이를 토대로 군사력을 강화했다.
630년경, 프랑크 상인들이 사모가 다스리는 영역을 지나가던 중 슬라브인들의 습격을 받아 몰살당한 사건이 벌어졌다. 프랑크 국왕 다고베르 1세는 이를 빌미삼아 사모를 무력으로 굴복시키고 영토를 동쪽으로 확장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먼저 시카리우스(Sicharius)를 사절로 파견해 프랑크인을 학살한 것에 항의했다. 프레데가르 연대기에 따르면, 당시 회담은 아래와 같이 진행되었다고 한다.
사모는 자기 백성의 잘못을 바로잡지 않았다. 그는 단지 당사자 사이에 발생한 사소한 다툼에서 비롯된 일이었다고 주장했다. 시카리우스는 사모에게 부적절한 말을 했으며, 심지어 사모와 그의 백성이 다고베르에게 예속될 의무가 있다는 위협까지 했다. 사모는 이에 격분하며 대답했다.
"우리가 소유한 땅이 다고베르의 땅이고, 그가 우리에게 평화를 유지하라고 명령한다면, 우리도 그의 땅을 소유할 것이다."
시카리우스가 말했다.
"하느님의 종인 그리스도인이 개와 친구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모가 답했다.
“만일 너희가 하느님의 종이고, 우리가 하느님의 개라면, 너희가 계속해서 하느님을 대적하는 동안 우리는 마음대로 너희를 이빨로 갈기갈기 찢어 놓을 것이다."
그런 다음 사모는 시카리우스를 쫓아냈다.
"우리가 소유한 땅이 다고베르의 땅이고, 그가 우리에게 평화를 유지하라고 명령한다면, 우리도 그의 땅을 소유할 것이다."
시카리우스가 말했다.
"하느님의 종인 그리스도인이 개와 친구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모가 답했다.
“만일 너희가 하느님의 종이고, 우리가 하느님의 개라면, 너희가 계속해서 하느님을 대적하는 동안 우리는 마음대로 너희를 이빨로 갈기갈기 찢어 놓을 것이다."
그런 다음 사모는 시카리우스를 쫓아냈다.
회담이 결렬된 후, 다고베르 1세는 프랑스 왕국의 동쪽 분국인 아우스트라시아 전역에서 군대를 소집했다. 그는 군대를 3개 부대로 나누었다. 한 부대는 자신이 이끌었고, 알레만니인으로 구성된 2번째 부대는 흐로도베르크 공작이 이끌었으며, 랑고바르드족 출신 용병들이 세 번째 부대를 결성해 슬라브의 영역을 공격했다. 알레만니족과 랑고바르드족은 국경지대에서 벌어진 몇 차례의 소규모 접전에서 승리해 포로와 전리품을 확보했다. 다고베르가 이끄는 아우스트라시아군은 사모와 수행원들이 자리잡은 보가티스부르크 요새를 포위했다. 그러던 중 사모가 성문을 열고 병사들을 출격시켜 프랑크인에게 싸움을 걸었다. 3일간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한 프랑크인들은 숙영지, 보급품, 전리품을 남겨두고 도주했다. 프레데가르 연대기에 따르면, 이 패배는 슬라브인들이 특별히 용맹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고베르 왕의 왕권 강화 정책에 반감을 품은 프랑크 귀족들의 배신 때문이었다고 한다.
사모는 다고베르 1세를 물리친 뒤 프랑크 왕국으로 서진하여 튀링겐 일대까지 밀어붙이며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그동안 프랑크 왕국의 봉신으로 지냈던 소르브 공작 데르반은 다고베르를 떠나 사모에게 복종했다. 다고베르 1세는 보복 원정을 벌이려 했지만 귀족들을 통제하는 데 애를 먹었기 때문에 쉽사리 병력을 확보할 수 없었다. 631년, 슬라브인들의 서진으로 곤경에 처했던 색슨족이 다고베르에게 사절을 보내 슬라브인을 포함한 외적의 습격으로부터 아우스트라시아의 국경을 지켜줄 테니 공물을 줄여달라고 요청했다. 다고베르는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클로타르 1세 시기부터 매년 500마리의 소를 바치는 관례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켰다. 그러나 슬라브인들이 왕국의 영역을 침략해 약탈을 자행하는 상황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결국 튀링겐 공작 라둘프는 프랑크 왕국이 슬라브인의 습격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주지 못하는 것에 반감을 품고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독립한 뒤 사모와 동맹을 맺었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상에서 전해지지 않으나, 프레데가르 연대기에 사모와 프랑크인과의 전쟁이 더이상 기술되지 않은 걸 볼 때 프랑크 왕국을 침략하지 않고 자국의 내정을 다지는 데 주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학계에서 '사모 제국'으로 통칭되는 그의 제국의 위치와 영역은 기록이 부실해서 분명하지 않다. 대부분의 체코와 슬로바키아 학자들은 사모 제국의 탄생을 이끈 슬라브 봉기는 아바르 칸국의 북서쪽 가장자리인 브라티슬라바 일대에서 벌어졌을 거라고 추정한다. 프레데가르 연대기에서는 반란을 주동한 이들의 아버지는 아바르족이고 어머니는 슬라브족이라고 밝혔는데, 아바르족과 슬라브 문화의 혼합이 주로 이뤄졌음이 고고학 연구를 통해 확인된 지역은 브라티슬라바 일대 뿐이었기 때문이다.
체코 학자들은 오늘날 모라비아와 이웃한 로어외스터라이히, 서부 슬로바키아였을 거라 추정하며, 프레데가르 연대기에서 다고베르 1세를 물리친 사모에게 충성을 맹세한 데르반 공작이 이끌었던 소르브족의 영역은 서부 보헤미아 및 남서부 슬로바키아에 미쳤을 것이라 추정한다. 반면 슬로바키아 학자들은 남부 모라비아와 동부 로어외스트라이히에서 사모 제국이 탄생했으며, 오늘날의 체코에 해당하는 보헤미아는 사모 제국에 전혀 속하지 않았거나 630년대 이후가 돼서야 편입되었을 거라고 추정한다.
잘츠부르크 대교구가 7세기 이후 바이에른인과 카란타니아인들을 상대로 행한 선교 활동을 다룬 라틴어 문헌인 <Conversio Bagoariorum et Carantanorum(바이에른인과 카라타니아인의 개종)>에 따르면, 사모는 카란타니아의 통치자였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사모 제국이 카란타니아까지 복속시켰을 거라고 추정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당시 카란타니아는 랑고바르드 왕국의 지배하에 있었으며 사모가 랑고바르드 왕국을 물리쳤다는 기록은 없기에 여기까지 세력을 펼쳤을 가능성은 없다며, 이 기록을 쓴 성직자들이 카르눈툼을 카란타니아로 오인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35년간 통치했다는 프레데가르 연대기의 기술로 볼 때, 사모는 658년 또는 659년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후에 그의 아들들 중 누구도 아버지의 직위를 계승했다는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 것을 볼 때, 그가 사망한 직후 슬라브 부족들은 도로 뿔뿔이 흩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아바르 칸국은 사모가 사망한 후 신속하게 슬라브인들의 영역에 진입해 788년 카롤루스 대제가 아바르를 공격하기 전까지 슬라브인들을 다시 지배했다.
4.3. 니트라 공국
현재의 슬로베니아의 니트라에서 세워진 니트라 공국은 사모 제국의 잔재로서 아바르 칸국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당시 아바르와의 국경지대인 미콜리체와 포한스크에 요새들을 세워 방비했다. 이후 788년 카롤루스가 아바르를 공격하면서 니트라는 프랑크 왕국과 서쪽으로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이후 820년경 아바르족들이 프랑크 제국에 복속은 되나 제1차 불가리아 제국과 접하게 되었다. 이때 프리비나라는 인물이 니트라 공작이 되면서 니트라 공국은 프랑크 왕국과 기독교와 밀접한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822년 프리비나는 사절들을 제국회의에 파견하였고, 잘츠부르크 대주교 아달람이 니트라로 방문해 한 동안 선교 활동을 했다. 하지만 830년경 프리비나는 경쟁자였던 모이미르에 의해 니트라에서 추방되었고, 니트라는 모라비아 공국에 병합되었다.
4.4. 모라비아 공국 ⇒ 모라비아 왕국
아바르족의 지배는 140년은 가지 못했다. 카롤루스 대제의 수차례의 원정으로 아바르 칸국은 거의 붕괴되다시피 프랑크 제국에 굴복하고 말았다. 이때 820년대, 혹은 830년대 모이미르 1세라는 인물이 모라비아인들을 규합해 공국을 건국한다.기원은 분명히 알려지지 않았다. 보헤미아 출신의 가톨릭 성직자이자 역사가였던 얀 토마시 페시나 이 체코로두(Jan Tomáš Pešina z čechorodu, 1629 ~ 1680)에 따르면, 그는 슬라브 부족들을 끌어모아 제국을 건국했던 사모의 직계 후손이며, 804년에서 806년 사이에 파사우 주교 우롤프에게 세례를 받고 811년부터 820년까지 모라비아인들을 통치했다고 전해지는 모이미르의 아들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이 기록의 신빙성이 부족하다고 본다. 일부 학자들은 프리울리 공작 에리히를 섬겼던 8세기 슬라브 귀족 보이노마르가 모이미르의 아버지였다고 주장하며, 또다른 학자들은 모이미르라는 이름은 알란족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모이미르 1세가 언제 모라비아의 통치자가 되었는지는 불분명하나, 빠르면 820년대, 늦어도 830년대 초반일 것으로 추정된다. 833년경, 그는 니트라 시에 교회를 짓고 잘츠부르크 대주교 아달람의 축성을 받았던 경쟁자 프리비나(Pribina)를 모라비아에서 추방했다. 프리비나의 정확한 지위는 분명하지 않다. 일부 학자들은 프리비나를 니트라의 공작이라고 추정하며, 다른 학자들은 그를 모이미르 1세의 총독이며 모이미르 왕조의 일원일 거라고 주장한다. 만약 프리비나가 니트라를 중심으로 한 독립 공국의 공작이었다면, 모이미르 1세가 이 시기에 그를 쫓아내면서 모라비아가 통일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프리비나는 추방된 후 트라이스마우어에서 세례를 받았고, 루트비히 2세로부터 로어 판노니아 공작에 선임되었다. 로어 판노니아 공국은 모라비아인과 불가리아인이 신성 로마 제국에 쳐들어오는 것을 막아내는 보루 역할을 수행했다.
<다뉴브 강 북쪽의 도시와 땅에 대한 설명>이란 제목의 중세 라틴어 문헌에 따르면, 모라비아인은 총 11개의 시비타테(civitates, 성 또는 도시)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모이미르 1세 치하의 모라비아 공국의 경계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앗지만, 학자들은 서쪽의 보헤미아-모라비아 고원, 남쪽의 다뉴브 강, 동쪽의 바흐 강까지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한다. 일부 학자들은 루마니아 서부까지 이르렀다고 주장하지만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모라비아 일대는 800년 파사우에 최초로 교회가 세워진 이래로 기독교가 전파되고 있었다. 13세기에 저술된 <파사우 주교구와 바이아른 공국의 역사>에 따르면, 파사우 주교 레긴하르가 831년에 모든 모라비아인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고고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모라비아 일대에서는 9세기 중반까지 이교도 관습이 행해졌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모이미르 1세와 가족 및 친족들이 기독교로 개종했지만 모라비아인들 전체를 개종시키지는 못했다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학자들은 모든 모라비아인이 기독교로 개종했지만 이교도 관습을 그대로 병행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모라비아인들이 822년 루도비쿠스 1세에게 경의를 표한 이래, 신성 로마 제국은 모라비아를 봉신으로 여겼다. 제국 연대기에 따르면, 846년 8월 중순에 루트비히 2세는 모라비아인들이 충성을 거부하자 군대를 이끌고 진군해 그곳을 복속시키고 모이미르의 조카 라스티슬라프를 공작에 선임하고 질서를 회복했지만, 그 과정에서 큰 전력 손실을 입었다고 한다. 대다수 학자들은 이 구절에 대해 모이미르 1세가 조공을 바치길 거부하자 루트비히 2세가 무력으로 응징하고 폐위시킨 뒤 라스티슬라프를 공작에 세웠을 거라고 추정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모이미르 1세가 사망한 뒤 후계 분쟁이 벌어지자 루트비히 2세가 개입해 새 공작을 세우고 질서를 확립했다고 해석한다.
하지만 라스티슬라프는 공작이 된 이후 동프랑크의 통제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852년, 라스티슬라프는 간통 혐의로 의해 루트비히 2세에게 추방당한 알브기스(Albgis)의 망명을 받아들였다. 853년 불가리아인과 함께 동프랑크 왕국을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고, 854년 루트비히 2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오스트리아 변경백 라트포트(Ratpot)를 지원했다. 또한 855년까지 타이아강과 다뉴브 강 사이의 지역과 동부 슬로바키아 일대를 공략했으며, 여러 요새를 건설했다.
855년, 루트비히 2세는 라트보트를 굴복시킨 뒤 라스티슬라프를 응징하기 위해 모라비아에 군대를 파견했지만, 모라비아 요새의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 이후 모라비아인들은 반격을 개시해 바이에른의 여러 마을을 약탈했다. 이후 루트비히 2세는 아들 카를로만을 카란타니아 총독으로 삼아 모라비아인들을 상대하게 했다. 제국 연대기에 따르면, 856년과 857년에 모라비아인과 카를로만 사이에 승부가 나지 않은 전투가 이어졌다고 한다. 한편 라스티슬라프는 857년 동프랑크 왕국에 반기를 들었다가 축출된 보헤미아 공작 슬라비타(Slavitah)를 보호했다.
861년, 카를로만은 여러 사령관들과 갈등을 벌인 끝에 그들을 해임하고 추종자들로 교체했다. 루트비히 2세는 자기 허락을 받지 않고 임의로 인사권을 행사한 아들을 질책했다. 이로 인해 부자간의 사이가 나빠졌다. 이에 라스티슬라프는 카를로만과 동맹을 맺고 루트비히 2세에 대항하기로 했다. 862년, 두사람은 루트비히 2세에게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어 인 강까지 이르는 바이에른 일대를 공략했다. 이제 루트비히 2세가 아들과의 전쟁 때문에 모라비아에 신경을 쓰지 못하게 되자, 그는 완전한 독립을 꾀했다.
라스티슬라프는 교회 차원에서 독립하기 위해 교황에게 동프랑크 교회의 통제에서 독립된 모라비아 주교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교황청이 프랑크 왕국과의 관계를 고려해 이를 거부하자, 라스티슬라프는 862년 동로마 제국 황제 미하일 3세에게 슬라브어로 기독교 신앙을 전할 수 있는 학자들과 주교를 모라비아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863년 동로마 제국의 저명한 성직자이자 학자인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가 모라비아에 찾아왔다. 그들은 정교회 교리를 널리 전파하는 것과 동시에 글라골 문자를 만들었다.
863년, 루트비히 2세는 불가리아 제1제국의 칸 보리스 1세와 동맹을 맺은 뒤 불가리아군의 지원에 힘입어 카를로만을 무력으로 굴복시켰다. 라스티슬라프는 카를로만에게 어떤 도움도 주지 않았는데, 많은 학자들은 불가리아가 모라비아로 쳐들어올 지도 모른다는 것에 위협을 느꼈을 거라고 추정한다. 864년 8월, 루트비히 2세는 보리스 1세와 함께 모라비아를 협공하기로 했다. 불가리아군은 마지막 순간에 작전 참여를 취소했지만, 루트비히 2세는 공세를 이어가 다뉴브 강을 건너 도위나 요새[39]에서 라스티슬라프를 포위했다. 그는 도저히 버틸 수 없다고 여겨 항복하고 많은 모라비아 고위 인사들을 루트비히 2세에게 인질로 보냈다.
하지만 라스티슬라프는 이후에도 동로마 제국과의 우호관계를 이어갔으며,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가 만든 문자에 기반한 슬라브 언어로 예배가 치러지도록 후원했다. 865년 재차 반기를 든 라스티슬라프는 프랑크군의 공세를 막아냈다. 이후 그는 모라비아의 동부 지역인 나트라 공국을 조카 스바토플루크 1세에게 넘겼다. 루트비히 2세는 868년과 869년에 모라비아에 프랑크군을 연이어 파견했으나, 라스티슬라프와 스바토플루크 1세의 저항에 부딪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한편, 교황청은 메토디오스를 판노니아와 모라비아 대주교로 임명해 바이에른 교회 관할권에서 모라비아를 제거했다. 이리하여 모라비아에 최초의 슬라브 대주교구가 탄생했다.
870년, 스바토플루크 1세는 동프랑크 왕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동맹을 맺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라스티슬라프는 분노해 사냥을 함께 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그를 불러들인 뒤 죽이려 했다. 그러나 이 음모를 사전에 파악한 스바토플루크 1세는 라스티슬라프를 급습해 체포한 뒤 870년 11월에 동프랑크 왕국에 넘겼다. 라스티슬라프는 프랑크푸르트로 끌려간 뒤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루트비히 2세는 평결을 실명형으로 완화했다. 그 후 그는 로마에서 모라비아로 가던 도중에 바이에른 주교에 의해 체포된 메토디오스와 함께 바이에른 수도원에 감금되어 870년 이후에 사망했다.
이후 스바토플루크 1세는 모라비아 공작이 되었지만, 871년 카를로만이 파견한 오스트리아 변경백 빌헬름 2세와 어퍼 판노니아 변경백 엥겔샤크 1세에게 체포되어 바이에른으로 끌려갔다. 이에 슬라보미르가 반란을 일으켰다. 카를로만은 이에 대응해 스뱌토플루크 1세를 석방시킨 뒤 슬라보미르를 토벌하게 했다. 하지만 스뱌토플루크 1세는 슬라보미르의 항복을 받아내고 빌헬름 2세와 엥겔샤크 1세를 처단하고 모라비아 전역을 차지한 뒤, 동프랑크 왕국과의 관계를 단절했다.
871년, 루트비히 2세가 바이에른과 프랑크 군대를 동원해 보헤미아를 침공했다. 이때 프랑크인들은 보헤미아 요새로 향하는 좁은 통로에 매복해 있다가 모라비아인들을 습격했다. 이때 모라비아인들은 보헤미아 공작의 딸과 함께 모라비아로 귀환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아마도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모라비아의 고위 귀족과 결혼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모라비아인들은 말 644마리를 버려서 추격대의 앞을 막은 뒤 안전한 요새로 피신했다. 현대 학자들은 스바토플루크 1세가 보헤미아인들과 동맹을 맺기 위해 혼사를 진행했을 거라 추정한다.
루트비히 2세는 이 소식을 전해듣자 스바토플루크 1세를 위험한 인물로 여기고 모라비아 원정을 게획했다. 872년, 3개 군대가 모라비아를 향해 진격했다. 튀링겐과 작센군으로 구성된 한 부대는 레겐스부르크에서 출진했다가 그해 5월에 모라비아인들과 맞붙은 첫번째 교전에서 패퇴했다. 뷔르츠부르크의 아르노 주교와 풀다의 시기하르트 수도원장 휘하의 프랑크인으로 구성된 2번째 군대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반면, 카를로만의 지휘 아래 바이에른인과 카란타니아인으로 구성된 세번째 군대는 모라비아 영토를 황폐화시키고 스바토플루크의 군대를 격파해 요새로 피신하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카를로만이 매우 견고한 요새에 고전하는 동안, 스바토플루크는 대규모 병력을 모은 뒤 다뉴브 강 유역의 선박을 보호하기 위해 남겨져 있던 바이에른군을 급습해 궤멸시켰다.
873년, 스바토플루크 1세는 루트비히 2세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루트비히 2세는 모라비아에 대한 적대행위를 중단하기로 했고, 스바토플루크 1세는 루트비히 2세에게 매년 경의를 표하고 공물을 바치기로 했다. 또한 바이에른에 수감되어 있던 메토디오스는 교황 요한 8세가 바이에른 주교들을 호되게 꾸짖은 서신을 보낸 덕분에 석방된 뒤 모라비아로 돌아가 선교 활동을 벌일 수 있게 되었다. 동프랑크 왕국과 화해한 뒤, 스바토플루크 1세는 영토 확장을 단행했다. 874년 비스툴라 강 상류 지역을 공략했고, 북부 모라비아의 오파바 주변 일대를 평정했다. 880년 실레시아에 진출했고, 881년 티서강 중류 일대를 공략했으며, 890년경에 보헤미아와 루사티아를 공략했다.
스바토플루크 1세 때의 영토
881년 동프랑크 왕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된 카를 3세는 다뉴브 강에 걸친 동프랑크 국경지대에 주둔한 동프랑크군을 지휘하는 역할을 판노니아 백작 아리보에게 맡겼다. 이에 지난날 모라비아를 점령한 바이에른군의 사령관이었던 빌헬름 2세와 엥겔샤크 1세의 아들들은 불만을 품고 바이에른의 고위 귀족들과 공모해 아리보를 축출하려 했다. 이에 아리보는 스바토플루크 1세에게 도움을 호소하고 자기 아들을 인질로 넘겨줬다. 스바토플루크 1세는 빌헬름 2세와 엥겔샤크 1세가 지난날 모라비아를 점령한 뒤 백성들을 고통에 빠뜨렸던 걸 기억하고, 아리보를 돕기로 했다. 그의 군대는 바이에른으로 진군해 엥켈샤크 1세의 둘째 아들을 생포한 뒤 목을 베었다.
빌헬름 2세와 엥겔샤크 1세의 남은 아들들은 카란티아 변경백 아르눌프에게 망명했다. 스뱌토플루크 1세는 아르눌프에게 사절을 보내 그들을 즉시 넘기라고 요구했지만 거절당하자 카란티아를 침공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전쟁은 라바 강 동쪽의 판노니아를 황폐화시켰고, 불가리아인과 헝가리인도 양측에 고용되어 전쟁에 뛰어들었다. 884년, 카를 3세가 직접 나서서 양자를 중재했다. 스뱌토플루크 1세는 카를 3세가 모라비아를 절대로 침공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뒤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여기에 아르눌프와 스뱌토플루크 1세도 양자간의 영역을 존중하기로 합의했다.
885년 메토디오스가 사망한 뒤, 교황 스테파노 5세는 스바토플루크 1세에게 서신을 보내 신앙고백에 필리오케를 추가하고 토요일 단식 등 동로마 제국의 관습을 포기하라고 촉구했다. 이 서신에서, 교황은 그를 "rex Slavorum(슬라브의 왕)"이라고 칭했다. 이로 볼 때 스바토슬라프는 885년 이전에 모라비아 국왕을 칭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교황의 뜻에 순종하기로 하고, 로마에서 모라비아 주교구로 파견된 위칭과 함께 메토디오스의 제자들에게 교황에게 복종하라고 지시했다. 그들이 이를 거부하자, 스바토플루크는 위칭에게 이들을 마음대로 처리하게 했다. 이 제자들 일부는 감옥에 갇혔다가 모라비아에서 추방되었고, 나움 등은 노예로 팔려갔다. 모라비아에서 추방된 제자들은 불가리아 제1제국으로 망명해, 그곳에서 선교 활동을 이어갔다.
887년, 지난날 그와 전쟁을 치렀던 아르눌프가 동프랑크 왕국의 국왕이 되었다. 890년 겨울, 두 사람은 오문테스페르흐(Omuntesperch)에서 회담을 가졌다. 이때 그는 아르눌프에게 교황 스테파노 5세가이탈리아를 침공해 교황청을 보호해달라고 촉구하는 서신을 전달했다. 아르눌프는 스바토플루크에게 보헤미아를 다스릴 권한을 부여했다고 전해진다. 풀다 연대기에 따르면, 891년 어느 시점에 아르눌프는 평화를 갱신하기 위해 아리보가 이끄는 사절단을 모라비아에 파견했다. 스바토플루크는 "왕을 찾아뵙고 우정을 나누겠다"고 답하고 사절들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서약을 어겼고, 아르눌프는 모라비아를 침공하기로 마음먹었다.
891년, 아르눌프는 사바 강 유역의 공작 브라슬라프와 합류한 뒤 프랑크인, 바이에른인, 알레만니인, 마자르족으로 구성된 군대를 일으켜 모라비아를 침공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전쟁은 894년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풀다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894년에 전쟁에 뛰어들었다가 '가장 불운한 죽음'을 겪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정확한 사망 경위는 알려지지 않았다. 13세기 헝가리의 연대기 작가 케자의 시몬은 스바토플루크 1세가 쾨르니에(Környe) 인근에서 전투 도중 사망했다고 밝혔다.
콘스탄티노스 7세가 기술한 < 제국의 통치에 관하여>에 따르면, 스바토플루크 1세는 죽기 전에 큰 아들 모이미르 2세를 왕으로 세우고, 나머지 두 아들 스바토플루크 2세와 프레슬라프는 2개 지역을 분할받고 큰 형의 지시를 받게 했다. 그는 지팡이 3개를 가져오게 한 뒤, 이를 묶은 후 첫째 아들에게 주어 부러뜨리게 했다. 그가 그러지 못하자 둘째에게 다시 부러뜨려보게 했고, 그 역시 그러지 못하자 셋째 아들에게도 시도해보게 했다. 세 아들 모두 부러뜨리지 못하자, 지팡이 3개를 세 명에게 각각 하나씩 주게 한 뒤 부러뜨려보라고 했고, 세 아들 모두 지팡이를 쉽게 부러뜨렸다. 그후 그는 세 아들에게 이렇게 충고했다고 한다.
"만일 너희가 화합과 사랑 가운데 쪼개지지 않으면 너희 대적에게 패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너희 가운데 분쟁과 경쟁이 있어 너희가 스스로 세 정부로 나뉜다면, 너희는 서로 멸망하게 될 것이고, 너희들의 이웃인 원수들 때문에 완전히 망하게 될 것이다."
이 일화가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후대 학자들은 모이마르 2세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뒤 두 형제와 심각한 내전을 벌이다가
마자르족의 침략에 의해 나라 전체가 무너진 일로 인해 이러한 이야기가 생겨났을 것이라 추정한다. 895년, 스바토플루크 2세가 동프랑크 국왕 아르눌프의 지원을 받고 모이미르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후 양자가 서로 화해하면서 갈등이 종식되는 듯 했지만, 스바토플루크 2세는 897년 아르눌프와 다시 동맹을 맺고 반란을 일으켰다. 모이미르 2세는 토벌대를 파견했지만, 스바토플루크 2세를 돕기 위해 파견된 프랑크군에게 패배했다. 이렇듯 모라비아에서 내전이 벌어진 틈을 타 외세의 침략이 벌어졌다. 894년, 마자르족이 블라텐 공국을 공략한 뒤 동프랑크 왕국에 넘겼다. 895년, 보헤미아는 모라비아 왕국에서 독립해 아르눌프의 봉신이 되었다. 897년, 루사티아 역시 아르눌프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여기에 마자르족이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와 판노니아 평야 지대에 영구적으로 정착하고 티자강 상류와 증류를 따라 모라비아를 잇따라 침략했다.
898년, 모이미르 2세는 바이에른 성직자들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교황에게 모라비아에 새로운 성직자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바이에른인들은 모라비아를 침공했으나 격파되었다. 이때 스바토플루크 2세가 모이미르 2세에게 체포되었지만, 바이에른인들이 스바토플루크 2세를 구출한 뒤 바이에른으로 데려갔다. 899년 아르눌프가 사망한 뒤, 교황청은 모라비아에 대주교구 1개와 주교구 3개를 설립하여 바이에른 성직자들의 영향력을 줄이기로 결정했으며, 라틴어가 아닌 슬라브어로 예배를 보는 것이 다시 허용되었다.
900년, 마자르족이 다뉴브 강을 건너 모라비아인들과 합세한 뒤 바이에른을 습격했다. 이후 모이미르 2세는 901년에 바이에른인들과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이를 끝으로, 그에 대한 기록은 더 이상 전해지지 않는다. 907년 바이에른 변경백 루이트폴트가 이끄는 바이에른군과 아르파드가 지휘하는 마자르족이 모라비아 왕국의 영역이었던 프레스부르크(오늘날 브라티슬라바)에서 격돌해 마자르족이 압승을 거뒀는데, 모라비아 왕국과 모이미르 2세는 사료상에서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슬로바키아 역사가 얀 스테인휴벨(Ján Steinhübel, 1957 ~ )과 두샨 트레슈티크(Dušan Třeštík, 1933 ~ 2007)는 906년을 모이미르 2세가 사망하고 대 모라미아 왕국이 무너진 해로 가정했다. 두 역사가는 907년 바이에른인들이 바이에른에서 망명 중이던 스바토플루크 2세를 새로운 모라비아 통치자로 세우기 위해 공세를 개시했지만 프레스부르크에서 완패했고, 이후 모라비아 전역은 더 작은 지역 통치자들로 파편화되었다고 본다.
반면 체코 역사가 루보미르 에밀 하브릭(Lubomír Emil Havlík, 1925 ~ 2000) 등은 모이마르 2세의 통치가 924년이나 925년까지 지속되었다고 추정한다. 그들은 910년 모라비아 주교 4명이 교황청에 보낸 서신이 전해진다는 점을 들어 모라비아 왕국이 그때까지 유지되고 있었다고 추정하며, 924년 또는 925년 마자르족의 침략으로 왕국이 무너졌을 때 모이미르 2세 또는 스뱌토플루크 2세가 잘츠부르크로 망명했을 거라 추정한다.
이후 모라비아와 슬로바키아 지역은 마자르족의 영토가 되었고, 이중 슬로바키아는 오랫 동안 마자르족의 국가인 헝가리의 영토로 1920년 독립하기까지 오랫동안 헝가리의 영토 일부로 취급받게 되었다.
4.5. 보헤미아 공국
사모 제국의 해체 이후 현재의 보헤미아 분지에 살던 슬라브족들은 9세기까지 통일된 국가와 같은 정치조직이 부재한 상태로 부족 단위로 나눠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805년 카롤루스 대제의 침공으로 아바르 칸국이 복속된 후, 보헤미아는 프랑크 왕국의 지배를 받았다. 카롤루스 대제 사후 프랑크 왕국이 분열되면서 보헤미아에 아무런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을 때, 대 모라비아 왕국이 등장했다. 모라비아인들은 822년 동프랑크 왕국의 루도비쿠스 1세에게 경의를 표하고 봉신으로 자처하면서도, 보헤미아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857년 동프랑크 왕국에 반기를 들었다가 축출된 보헤미아 공작 슬라비타(Slavitah)를 모라비아 공작인 라스티슬라프가 보호해 줬는데 후대의 프르셰미슬 왕조에 그의 이름이 없는 것을 볼 때 이때까지 보헤미아는 분지 내의 고만고만한 세력의 부족장들 프랑크 왕국으로 부터 공작 칭호를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동프랑크 왕국과 모라비아 왕국 모두 보헤미아를 완전히 통제하지 못했다. 871년, 루트비히 2세가 바이에른과 프랑크 군대를 동원해 보헤미아를 침공했다. 이때 프랑크인들은 보헤미아 요새로 향하는 좁은 통로에 매복해 있다가 모라비아인들을 습격했다. 이때 모라비아인들은 보헤미아 공작의 딸과 함께 모라비아로 귀환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아마도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모라비아의 고위 귀족과 결혼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모라비아인들은 말 644마리를 버려서 추격대의 앞을 막은 뒤 안전한 요새로 피신했다. 현대 학자들은 스바토플루크 1세가 보헤미아인들과 동맹을 맺기 위해 혼사를 진행했을 거라 추정하고 있다.
890년 겨울, 동프랑크 왕 아르눌프와 스바토슬라프는 오문테스페르흐(Omuntesperch)에서 회담을 가졌고, 아르눌프는 스바토플루크에게 보헤미아를 다스릴 권한을 부여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던 중 872년 젼후로 중부 보헤미아에서 프르셰미슬의 후손을 자처하는 보르지보이 1세가 두각을 드러냈다.
- 프르셰미슬 가문의 건국 전설
12세기 프라하 성 비투스 대성당 학장이자 연대기 작가이며 외교관으로도 활동했던 코스마스(Cosmas, 1045년경 ~ 1125년)가 집필한 <보헤미아 연대기>에 따르면, 부족민들간의 분쟁을 슬기롭게 중재해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던 크록(Krok)에게는 세 딸이 있었다. 장녀 카지(Kazi)는 약초와 점술에 대한 지식이 뛰어났고, 차녀 테타(Teta)는 보헤미아 전통 신앙을 도입했다. 셋째 딸인 리부셰는 막내였지만 지혜는 가장 뛰어났고, 보헤미아에서 가장 강력한 성을 건설하고 자신의 이름을 본떠서 '리부신(Libušín)'이라고 이름 붙였다.
크룩이 사망한 후, 부족민들은 리부셰를 판관으로 선출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수많은 예언을 했는데 전부 들어맞았다. 한 번은 신탁의 정력이 리부신에 내려오자, 그녀는 위대한 도시가 나타날 것을 예언하고, 사람들에게 특정 장소에 성을 지으라고 지시한 뒤 그곳에 프라하라는 이름을 붙였다. 또한 나라에서 구할 수 없는 금속 매장지를 어디서 찾을 수 있는 지 조언해주기도 했고, 사람들이 앞으로 겪을 많은 전쟁과 고난을 예견했으며, 아들의 황금 요람을 블타바 강에 가라앉히고 요람이 나타났을 때 더 좋은 때가 올 거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리부셰는 사람들간의 분쟁을 공정하게 판결해 수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부족의 남자들이 여자가 판관이라는 사실에 불만을 품고 남자를 공작으로 세우라고 요구하자, 리부셰는 산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저 산 너머에 작은 강 빌리나(Bilina)가 있고, 그 강둑에는 스타디체(Stadice)라는 마을이 있다. 그 안에는 길이가 12보이고 너비도 같은 경작지가 있다. 이 경작지는 수많은 들판 사이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밭에도 속하지 않는다. 당신들의 공작은 이 경작지에서 가지각색의 황소 두 마리를 쟁기질하고 있다. 황소 중 하나는 흰색 줄무늬로 띠를 띠고 있는 것 같고, 머리도 흰색이다. 다른 하나는 머리부터 등까지 모두 흰색이며, 뒷다리도 흰색이다. 자, 원한다면 내 지팡이와 외투와 공작의 옷을 가져다가 백성과 나의 명령에 따라 가서 그를 당신들의 공작이자 내 남편으로 데려와라. 그 남자의 이름은 프르셰미슬이다. 그 사람은 너희의 머리와 목에 떨어질 많은 법을 고안할 것이다. 이 이름은 '계획적인' 또는 '과도한 생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의 후손들이 이 나라를 영원히 다스릴 것이다."
부족민들은 곧바로 사절단을 보냈다. 사절단은 프르셰미슬이 리부셰가 묘사한 모습 그대로 땅을 갈고 있는 것을 찾아냈다. 사절단이 그에게 공작으로 삼고 싶다는 뜻을 전하자, 프르셰미슬은 사절들에게 농민들이 먹는 음식을 대접한 뒤 자리에 앉아 지팡이를 땅에 꽃았다. 지팡이는 식사하는 동안 3개의 콩나물이 있는 나무로 변했는데, 한 새싹은 무성하게 자랐지만 나머지 2개는 말라버렸다. 사절들이 이 일이 벌어진 이유를 궁금해하자, 프르셰미슬은 이렇게 답했다.
"내가 리부셰와 결혼하면 세 아들이 태어나겠지만 한 사람만 통치하게 될 것이다."
그 후 프르셰미슬은 호화로운 말과 신발을 신었고, 좋은 말을 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출신을 잊지 않고 나무 인피로 짠 신발과 베낭을 가져다가 미래를 위해 보존하라고 명령했다. 이후 리부셰와 결혼한 뒤 세 아들 네자미슬, 라도빌, 루도미르를 낳았고, 보헤미아인들을 현명하게 다스려 야만성을 억제하고 오랫동안 유효한 법을 제정했다.
프르셰미슬의 통치는 리부셰가 죽을 때까지 평온했지만, 리부셰 사후 부족 내 여인들이 남자에게 복종하기를 원하지 않아 블라스타라는 여인의 주도하에 비셰가르드 맞은 편에 데빈 성을 지었다. 이후 남자와 여자간의 전쟁이 7년간 벌어진 끝에 블라스타가 전사했고 남자들이 성을 함락시켰다고 한다.
이후 네자미슬과 음나타, 보옌, 브니슬라프, 크레소미슬, 네클란, 호스티비트에 이르는 전설상의 군주들이 체코족을 통치했다고 한다. 연대기에 이름이나 몇몇 사소한 이야기 외의 내용은 없다.
체코의 민속학자 블라디미르 카르부시츠키(Vladimír Karbusický, 1925 ~ 2002)에 따르면, 보헤미아 역사의 신화적 인물 12명의 이름은 9세기에 보헤미아인이 프랑크 왕국에 보낸 고대 슬라브어 텍스트의 일부에서 유래했다. 이 텍스트에는 다음의 문구가 담겨 있었다.
카르부시츠키에 따르면, 이 문구는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고 한다.
"발걸음을 멈추세요, 테타[40]. 그리고 더 잘 생각하십시오. 나는 당신을 위해 전쟁이나 악행을 의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절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손님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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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아의 진정한 등장
보헤미아의 실직적인 통치자로서의 보르지보이 1세에 대해 기원은 분명하지 않다. 12세기 프라하 성 비투스 대성당 학장이자 연대기 작가이며 외교관으로도 활동했던 코스마스(Cosmas, 1045년경 ~ 1125년)가 집필한 <보헤미아 연대기>에 따르면, 전설상의 보헤미아 통치자 호스티비트의 아들이라고 한다. 현대의 대다수 학자들도 그가 보헤미아 출신이라는 점에 동의하지만, 호스티비트의 아들일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본다. 모라비아 지역 민족사 연구자인 페트르 시미크(Petr Šimík, 1948~)는 그가 모라비아 공국의 공작 라스티슬라프의 아들이라는 가설을 제시했지만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출생년도 역시 기록이 미비해 분명하지 않다. <성 바츨라프와 할머니 루드밀라의 전설>(이하 '그리스도인의 전설')에 따르면, 보르지보이 1세는 36세에서 38세 사이에 사망했다고 한다. 16세기 보헤미아 성직자이자 연대기 작가 리보차니의 바츨라프 하예크(Václav Hájek z Libočan)에 따르면, 호스티비트는 아름다운 아내 밀로슬라바와 결혼한 뒤 874년에 아들 보르지보이 1세를 낳았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하예크의 기록은 신빙성이 없다고 간주하며, 블타바 전투가 벌어진 872년 당시 성인으로 간주되는 15세 이상이었을 가능성이 높으니 857년 이전에 출생했을 거라고 본다. 그가 언제 집권했는지도 불확실하나, 블타바 전투가 벌어진 872년 이전부터 집권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보르지보이 1세가 집권하던 9세기 후반, 보헤미아 일대는 여러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각지의 통치자들은 보헤미아를 사이에 두고 경쟁하고 있던 동프랑크 왕국과 대 모라비아 왕국 중 어느 한 쪽을 택해야 했다. 872년 5월, 마인츠 대주교 리우베르트(Liutbert)가 이끄는 프랑크군은 모라비아로 진격한 카를로만의 본대를 돕기 위해 모라비아 왕국을 돕는 보헤미아인들을 상대로 공세를 개시했다. 튀링겐인과 작센인으로 구성된 리우베르트의 군대는 블타바 강가에서 보헤미아인들을 격파해 많은 적병을 사살하거나 부상 입혔고, 일부 보헤미아인은 강에 빠져 익사했지만 탈출한 사람들은 요새로 피신했다.
이때 보헤미아군 사령관 스바토슬라프(Svatoslav), 비티슬라프(Vitislav), 헤리만(Heriman), 스피티미르(Spytimír), 모이슬라프(Mojslav) 등 5명의 보헤미아 통치자들이 도망칠 수 있었다고 한다. 일부 사료에는 '고리웨이(Goriwei)'이라는 이름이 여섯 번째로 명시되었는데, 현대 학자들은 보르지보이와 동일인물로 간주한다. 19세기의 체코 역사가 프란티셰크 팔라츠키(František Palacký, 1798 ~ 1876)는 그가 여섯 번째로 명시된 것은 블타바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부하들에게 리우베르트를 저지하는 임무를 맡겼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체코의 법학자이자 역사가 바츨라프 바네체크(Václav Vaněček, 1905 ~ 1985)에 따르면, 보르지보이 1세는 이 전투에 아예 관여하지 않았으며, 보헤미아 남부의 다른 통치자들이 동프랑크 왕국과의 전쟁에서 큰 손실을 입은 틈을 타 보헤미아 남부를 장악했을 거라고 추정했다.
보르지보이 1세는 874년 또는 875년에 슬라비보르(Slavibor)의 딸 루드밀라(Ludmila)와 결혼했다. 코스마스와 <성 바츨라프와 할머니 루드밀리의 전설>에 따르면, 슬라비보르는 프쇼바니족의 지도자였다고 한다. 반면 러시아에 보존되어 있는 고대 슬라브어로 쓰여진 <성 루드밀라 서문>에 따르면, 어퍼 루사티아에 거주하는 서브 슬라브 부족 중 하나인 밀차니족의 지도자였다고 한다. 그리스도인의 전설에 따르면, 그는 루드밀라와의 사이에서 3명의 아들과 3명의 딸을 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사료에는 두 아들 스피티흐네프 1세와 브라티슬라프 1세만 알려졌다.
그리스도인의 전설에 따르면, 보르지보이 1세는 모라비아 국왕 스바토플루크 1세의 궁정에서 열린 연회에 참석했지만, 이교도들이 기독교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도였던 스바토플루크 1세가 탁자 위에서 식사하는 동안 자신은 땅바닥에 앉아서 식사했다. 당시 모라비아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메토디오스는 이 광경을 보고 그에게 "당신같이 훌륭한 분이 어째서 땅바닥에 앉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까?"라고 물었다. 이후 그는 메토디오스와 심도 높은 대화를 나눈 뒤 세례를 받기로 결심하고, 아내 루드밀라와 함께 메토디오스로부터 세례받았다고 한다. 프란티셰크 팔라츠키는 그가 세례받은 시기가 메토디오스가 바이에른 주교구에 억류되었다가 풀려난 직후인 874년이라고 추정했고, 고고학자 이반 보르코프스키는 스바토플루크 궁정에서 가톨릭 방식의 예배가 성행하기 시작한 880년 이전에 세례가 이뤄졌을 거라고 추정했다. 반면 체코 역사학자 바츨라프 로보트니(Václav Novotný, 1869 ~ 1932)는 스바토플루크가 보헤미아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게 된 시기인 882년 즈음일 거라 추정했다.
보르지보이 1세는 모라비아에서 돌아온 뒤 레비 흐라데츠에 교황 클레멘스 1세를 기리는 성당을 세웠다. 그러나 얼마 후, 불만 세력이 그의 친척인 스트로미르(Strojmír)를 공작에 추대하고자 반란을 일으켰고, 보르지보이는 모라비아로 도망쳤다. 일부 학자들은 스트로미르가 다른 통치자들과 함께 블타바에서 리우베르트와 맞서 싸웠던 스피티미르와 동일인물이라는 가설을 제기했지만 근거가 부족해 널리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전설에 따르면, 스트로미르는 독일인들과 함께 오래 살아서 슬라브어를 잊어버렸다. 이로 인해 보르지보이를 몰아내고 그를 추대한 사람들 사이에서 이 문제로 불만을 품은 이들이 늘어났다. 보르지보이의 지지자들은 이런 갈등을 조장하면서 반격할 기회를 엿봤다.
이후 보르지보이와 스트로미르는 한 곳에 만나서 협상하기로 했다. 스트로미르의 추종자들은 무기를 옷 아래에 숨긴 뒤, 그들 중 한 명이 "변화하자!"라고 외치면 무기를 들어 보르지보이 편에 있는 사람들을 죽이기로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내부의 배신자에 의해 보르지보이 추종자들에게 전해졌고, 보르지보이 추종자들 역시 무기를 숨겨두고 있다가 "변화하자!"라는 외침이 들리는 순간 무기를 곧바로 빼들어 스트로미르 지지자들을 선제 공격했다. 스트로미르 지지자들은 아무런 대응도 못하고 무너졌고, 스트로미르는 해외로 망명했다. 이후 보르지보이는 보헤미아로 돌아와 공작위를 되찾았다고 한다.
체코 고고학자이자 역사가 즈데네크 메르진스키(Zdeněk Měřínský, 1948 ~ 2016)는 이에 대해 다소 변형된 가설을 제기했다. 보르지보이 1세는 스트로미르의 반란으로 축출되어 모라비아로 도망친 뒤 스바토플루크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스바토플루크 1세는 884년 가을까지 판노니아에서 카란티아 변경백 아르눌프와 전쟁을 벌이고 있던 터라 그를 도와줄 여유가 없었고, 보르지보이 1세는 모라비아에 그대로 머물렀다. 그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3세의 중재로 아르눌프와의 전쟁이 마무리되자, 스바토플루크가 885년에 비로소 반란을 진압하고 그를 보헤미아 공작에 다시 앉혀줬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전설에 따르면, 보르지보이 1세는 모라비아에 망명 가 있는 동안 기독교 신앙이 더욱 투철해졌고, 모라비아 국왕 스바토플루크 1세에게 성당을 하나 더 세우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귀환한 그는 약속대로 프라하에 성모 마리아 성당을 건설했다.
보르지보이 1세가 언제 사망했는지는 불확실하다. 둘째 아들 브라티슬라프 1세가 태어난 888년에는 아직 살아있었다. 890년 3월 판노니아의 오문테스페르흐(Omuntesperch)에서 동프랑크 국왕 아르눌프와 스바토플루크 1세간의 회담이 열렸을 때, 아르눌프는 스바토플루크 1세에게 보헤미아를 다스릴 권한을 부여했다. 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그가 888년에서 890년 사이에 사망했으며, 아들들은 너무 어려서 그를 계승할 수 없었기에 스바토플루크 1세가 보헤미아의 통치자로 군림하게 되었을 거라 추정한다. 894년 스바토플루크 1세가 사망한 뒤, 장남 스피티흐네프 1세가 비로소 보헤미아 공작으로 등극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나이가 아직 어렸기에, 모라비아 국왕 스바토플루크 1세가 890년 3월에 판노니아의 오문테스페르흐(Omuntesperch)에서 동프랑크 국왕 아르눌프와 회담을 가진 끝에 보헤미아를 다스릴 권한을 인정받고 통치를 행사했다.
894년 스바토플루크 1세가 사망한 뒤 비로소 보헤미아 공국의 권력을 장악한 그는 895년 7월 보헤미아의 유력 귀족인 비티슬라프(Vitislav)[41]와 함께 동프랑크 국왕 아르눌프가 개최한 총회가 열린 레겐스부르크에 방문해 아르눌프의 가신이 되는 대가로 동프랑크 왕국의 보호를 받기로 했다. 또한 보헤미아는 공식적으로 레겐스부르크 주교구에 포합되었다. 이로 인해 보르지보이 1세가 보헤미아로 데려왔던 슬라브 성직자들이 추방되었다.
대 모라비아 왕국의 새 국왕 모이미르 2세는 이에 반발해 보헤미아를 여러 번 공격했다. 이에 보헤미아인들은 896년에 아르눌프에게 사절단을 보내 도움을 욫어했고, 897년에 보헤미아 사절단이 재차 레겐스부르크로 찾아와서 모라비아인들이 자신들을 괴롭히고 있다고 호소했다. 이후 보헤미아인들은 아르눌프와 함게 모이미르 2세를 상대로 반기를 일으킨 스바토플루크 2세를 지원했다. 900년 여름, 스피티네프가 이끌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보헤미아 전사들이 바이에른을 침공한 모라비아인들에 대항하는 바이에른인들을 도왔다. 이후 모이미르 2세는 901년에 바이에른인들과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906년, 에르츠 산맥 북쪽에 위치한 글로마코베족은 작센 공작 오토 1세의 아들 하인리히의 공세에 직면하자 마자르족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마자르족은 이들을 돕기 위해 진군하던 중 보헤미아 영토를 지나갈 때 스피티네프 1세에게 길을 빌려달라고 요청했다. 스피티네프 1세는 강력한 전투력을 갖춘 마자르족과 싸우고 싶지 않았고, 작센을 약화시키고 싶었기에 이를 받아들였다. 마자르족은 보헤미아를 통과한 뒤 글로마코베족과 연합하여 작센군을 격파했다. 한편, 같은 해에 동생 브라티슬라프 1세가 하벨 강 중류 주변에 정착한 슬라브 부족인 스토도르 족의 공주 드라호미라와 결혼했는데, 일부 학자들은 이것이 작센에 공동으로 대응하는 동맹을 체결하기 위해 맺어진 정략결혼이라고 추정한다.
그는 보헤미아 중부에 위치한 프르셰미슬 왕조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프라하에서 26~34km 떨어진 언덕에 5개 요새를 건설하고 그 안에 교회를 세운 뒤 왕실 내 여러 구성원들을 배치했다. 이 요새들은 훗날 멜니크 시, 리부신 시, 테틴 시, 르슈테니 시, 볼레슬라프 시로 발견했다. 또한 프라하 성 요새화에도 힘을 기울여 해자 성 주변에 건설하고 프라하 주변에 여러 소형 요새를 세웠으며, 프라하 시 자체도 확장했다.
그가 언제 사망했는지는 기록상에서 전해지지 않지만, 현대 학자들은 40세에 사망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915년에 사망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그가 죽은 뒤 동생 브라티슬라프 1세가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되었다.
블라티슬라프 1세는 즉위 직후 장남 바츨라프의 머리를 자르는 의식을 프라하의 성모 마리아 교회에서 거행하면서, 베로나의 주교 노테리우스 2세를 초빙했다. 체코 역사가 두샨 트르제스티크(Dušan Třeštík, 1933 ~ 2007)는 노테리우스가 동프랑크 국왕 콘라트 1세에 맞서 싸우던 바이에른 공작 아르눌프가 보헤미아인들의 지원을 받기 위해 파견된 외교 사절이었을 것이라 추정했다. 또다른 학자들은 브라티슬라프 1세가 노테리우스의 축복을 받고 보헤미아 통치자로 선포되기를 원했거나, 크로아티아 일대를 지배하던 트르피미르(Trpimir) 가문간의 결혼 동맹을 노테리우스의 중재하에 성사시키려 했을 수도 있다고 추정한다.
바츨라프 찰루페츠키(Václav Chaloupecký, 1882 ~ 1951)는 14세기에 쓰여진 비엔나 그림 연대기를 바탕으로 브라티슬라프 1세가 모라비아에서도 통치를 행사했으며, 작센과 손잡고 마자르족에 대항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두샨 트르제스티크는 브라티슬라프 1세는 보헤미아 중부 지역만을 효과적으로 통제했으며, 형의 정책을 그대로 받들어 마자르족과 싸우기보다는 동맹을 맺었다고 주장했다. 11세기 후반의 연대기 작가 브레멘의 아담 역시 보헤미아인들이 마자르족의 915년 작센 원정에 따라갔다고 밝혔다. 현대 학계는 두샨의 주장 대로 브라티슬라프 1세가 마자르족에게 협력했을 거라고 본다.
그는 902년경 프라하 성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 조지 대성당을 건설했다. 이 대성당은 이후 프르셰미슬 가문의 묘지로 각광받았으며, 베네딕토회 수도자들의 거점으로도 활용되었다. 또한 2층 짜리 왕궁과 파벨 신부의 목조 거주지도 건설되었으며, 형이 시작한 프라하 인근 언덕에서의 요새 건설 사업을 이어갔다. 그리고 '브라티슬라비아 언덕 요새'로 명명된 목조 요새를 건설했는데, 이곳은 훗날 브로츠와프 시로 발전했다.
921년 2월 13일, 브라티슬라프 1세는 3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3세기 연대기 작가인 케자의 시몬에 따르면, 마자르족이 판노니아를 정복했을 때 브라티슬라프 1세가 부상을 입었고 곧 사망했다고 한다. 하지만 두샨 트르제스티크는 시몬이 후대의 보헤미아 공작이자 국왕 브라티슬라프 2세와 착각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그가 사망했을 때 아들들은 아직 성년에 도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브라티슬라프 1세의 어머니 루드밀라와 아내 드라호미라가 섭정을 맡았다. 그러나 두 여인이 곧 분쟁을 벌이면서, 보헤미아 공국은 혼란에 휩싸였다.
그러던 921년 9월 15일, 루드밀라가 테틴 언덕 요새에서 드라호미라의 시종인 투나(Tunna)와 고몬(Gommon)에 의해 베일로 목이 졸려 살해당했다. 훗날 이 베일은 성녀로 추앙된 루드밀라의 상징이 되었고, 드라호미라는 기독교도를 잔혹하게 죽인 이교도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드라호미라가 이교도였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고 본다.
드라호미라는 루드밀라를 살해한 뒤 바이에른 성직자들을 추방했다. 바이에른 공작 아르눌프는 이를 빌미삼아 922년 보헤미아를 침공했다. 하지만 기록상에는 그 결과가 어찌 되었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925년 즈음에 성년이 된 바츨라프 1세는 루드밀라의 유해를 테틴 언덕에서 프라하로 이송하고, 드라호미라에게 추방된 사제들을 불러들였으며, 어머니 드라호미라를 추방하고 어머니를 추종한 인사들의 준동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그리스도인의 전설에 따르면, 그는 뒤이어 코우르짐의 통치자 바츨라프 또는 라드슬라프와 맞붙어 승리했지만,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공물을 바치는 대가로 그곳을 계속 다스리게 했다고 한다.[42] 이후 930년경에 성 비투스 성당을 세우고, 여전히 이교도가 많은 보헤미아에 기독교를 널리 전파하고자 성직자들의 선교 활동을 후원했다.
기독교인의 전설에 따르면, 바츨라프 1세는 거의 수도사처럼 살았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농사를 짓고, 포도주를 만들고 과자를 굽는 일을 했으며, 죄수들을 해방시키고 교수대를 허물었고 노예들을 해방시켰다. 또한 언젠가 동생 볼레슬라프 1세에게 공작위를 넘겨주고 로마에 있는 수도원에 들어가길 희망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이러한 기록은 훗날 성인이 된 그를 미화하고자 창작된 이야기로 간주한다.
그가 집권할 무렵, 보헤미아는 세 세력 사이에 끼여 있었다. 동쪽에는 유럽 전역에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던 마자르족이 있었고, 북쪽에는 엘베강 유역에 거주하는 슬라브 부족들[43]이 있었으며, 서쪽엔 독일 왕국에 속한 바이에른이 있었다. 보헤미아 공국은 스피티흐네프 1세 때부터 마자르족 및 엘베 강 유역의 슬라브족과 우호 관계를 맺었고, 마자르족이 바이에른 등지를 습격하는 것을 도왔다. 하지만 그는 어머니를 추방한 뒤, 어머니가 추방했던 선교사들을 불러들이고 바이에른과 화해하려 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929년, 독일왕 하인리히 1세가 엘베 강 유역의 슬라브족을 정벌했을 때, 어머니가 속한 스토도르족의 수도 브란덴부르크가 함락되었다. 그후 하인리히 1세는 바이에른의 아르눌프 공작과 함께 마자르족과 동맹을 맺고 있었던 글로마코베족을 공격해 수많은 이들을 살해했다. 뒤이어 하인리히 1세와 아르눌프가 프라하로 진격하자, 바츨라프 1세는 두 사람에게 평화 협상을 요청했다. 그 해 초여름, 바츨라프 1세는 독일 왕국에 매년 공물을 바치고 독일 군주에게 충성을 바치겠다고 서약하는 대가로 그들이 보헤미아를 파괴하지 않고 물러나게 하는 데 성공했다.
12세기 프라하 성 비투스 대성당 학장이자 연대기 작가이며 외교관으로도 활동했던 코스마스(Cosmas, 1045년경 ~ 1125년)는 보헤미아 공국이 소 120마리와 은 500 흐리브니아를 806년부터 비정기적으로 카롤루스 대제의 아들 피핀 카를로만에게 바쳤다고 기술했다. 현대 학자들은 카롤루스 대제 시기엔 보헤미아 공국이 존재하지도 않았으니 코스마스가 잘못 기술했다며, 실제로는 바츨라프 1세 시대부터 독일 왕국에 공물을 바쳤을 거라고 본다. 하지만 그 양이 코스마스의 기록과 같은 지는 불분명하다.
그리스도인의 전설에 따르면, 동생 볼레슬라프 1세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기독교 박해 시기에 순교한 성 코스마스와 다미안의 축일인 9월 27일에 형 바츨라프를 볼레슬라프 시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다음날 아침, 바츨라프 1세가 아침 예배를 하러 교회에 갔다가 귀가하던 중 볼레슬라프와 마주치자 덕담을 건넸다.
"네가 어제 우리를 잘 섬겼으니, 신께서 너에게 상을 주실 것이다."
볼레슬라프가 외쳤다.
"오늘 나는 당신을 이렇게 섬기고 싶습니다!"
그리고는 검을 빼들어 형의 머리를 가격했다. 바츨라프는 경미한 부상만 입었지만, 형제를 해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볼레슬라프가 들고 있던 검을 떨어뜨린 것을 빼면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고, 볼레슬라프의 추종자들이 뒤이어 바츨라프를 살해했다. 10세기 중반에 고대 슬라브어로 작성된 <성 바츨라프의 생애>에서는 좀더 자세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에 따르면, 바츨라프와 볼레스와프 형제가 아침에 미사를 드리러 가던 중 길가에서 말다툼을 벌였다. 볼레슬라프가 검을 빼들어 바츨라프를 공격하려 했지만, 바츨라프가 이를 막고 볼레슬라프를 쓰러뜨렸다. 이때 볼레슬라프의 측근인 투자(Tuža)가 달려들어 바츨라프의 팔을 때렸다. 바츨라프는 교회에 숨기 위해 달려갔지만, 교회 문은 굳게 잠겨져 있었고, 뒤따라 달려온 볼레슬라프의 부하들이 그를 검으로 난자해 살해했다.
그리스도인의 전설에 따르면, 귀족 므스티니(Mstiny)를 포함해 바츨라프와 함께 있던 인사들 역시 이날 피살당했으며, 볼레슬라프의 추종자들은 곧장 프라하로 달려간 뒤 바츨라프의 추종자들과 그들의 아이들을 산 채로 블타바 강 깊은 곳에 수장시켰다고 한다. 이때가 벌어진 해는 문헌 기록에 전해지지 않았는데, 1960년대까지는 929년이라는 설이 지배적이었지만 현재 학계에서는 여러 역사 기록들과의 대조를 통해 935년에 사건이 벌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살인 동기 역시 불분명하다. 일부 기록에서는 볼레슬라프가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형제를 살해했다고 기술되었고, 몇몇 학자들은 바츨라프 1세가 막대한 공물을 독일 왕에게 바치는 굴욕을 감수한 것에 대해 반감을 품은 보헤미아 귀족들이 볼레슬라프를 충동질했으리라 추정한다. 바츨라프 1세가 보헤미아를 기독교화시키기 위해 힘을 기울인 것에 대한 이교도들의 반발이라는 가설도 존재한다.
그리스도인의 전설에 따르면, 바츨라프는 금욕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성관계를 맺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동생과 귀족들의 강요를 받고, 어쩔 수 없이 아들을 낳기 위해 어느 여인과 동침해 즈브라슬라프라는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이 아이가 어찌 되었는지는 알려진 바 없지만, 추종자들의 아이들까지 죽였다는 기록으로 볼 때 그 역시 살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볼레슬라프 1세가 형을 살해하고 보헤미아 공작위에 올랐을 무렵, 독일 왕국의 국왕 하인리히 1세는 뇌졸중에 시달리고 있었다. 936년 7월 2일, 하인리히 1세가 끝내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사망한 뒤 아들 오토 1세가 뒤를 이었다. 이에 지난날 하인리히 1세의 원정으로 복속되었던 엘베 강 유역 슬라브 부족인 루티키인과 오보르테족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 역시 이에 호응해 지난날 보헤미아와의 관계를 끊고 하인리히 1세에게 귀부했던 이웃 공국을 치기로 했다. 이 이웃 공국의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대체로 믈라다 볼레슬라프 인근의 자브루샤니 언덕 요새 또는 흘로우메크 언덕 요새일 거라고 추정한다.
오토 1세는 엘베 강 유역의 슬라브족 반란 진압에 직접 착수하는 한편, 부하들에게 보헤미아를 공격하게 했다. 이에 메르제부르크에서 아식(Asic)이 이끄는 군대가 출발했고, 튀링겐에서 또다른 군대가 출격했다. 메르제부르크에서 출발한 군대에 소속된 장병들은 범죄를 저지른 뒤 처벌 대신 군복무를 택한 자들이었다고 한다. 볼레슬라프 1세는 이 소식을 접하자 군대를 나눠 각 군대와 상대하기로 했다. 중세 작센 연대기 작가 코버리의 비투간트에 따르면, 튀링겐군은 보헤미아군이 자신들을 향해 접근해오자 전투를 회피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아식이 이끄는 메르제부르크군은 보헤미아군과의 첫 전투에서 가볍게 승리를 거뒀지만, 이후 약탈에 전념하다가 볼레스와프 1세가 군대를 재정비한 뒤 반격을 가하자 크게 패했고, 아식은 전사했다. 볼레스와프 1세는 독일군을 격파한 뒤 이웃 공작의 성채를 완전히 허물고 새 성채를 세운 뒤 측근을 그곳의 영주로 삼았다.
938년, 볼레슬라프 1세는 볼레스와프 마을에 묻혀 있던 형의 유해를 프라하로 옮겨서 성 비투스 성당에 안장했다. 10~11세기 베네딕토회 수도자이자 아말피 대주교였던 로렌티우스가 라틴어로 집필한 연대기 <성 바츨라프의 수난>에 따르면, 볼레슬라프 1세는 바츨라프 1세의 유해가 담긴 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온종일 회개했다고 한다. 반면 코스마스는 바츨라프의 무덤에서 기적이 연이어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두려움을 느끼고 시신을 성 비투스 성당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가 형의 유해를 옮긴 것에 대해 형을 죽인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는 설과 바츨라프 1세를 추앙하는 이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을 우려했다는 설이 제기되고 있으나, 어느 쪽이 맞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볼레슬라프 1세는 오토 1세를 상대로 14년간 전쟁을 벌였다고 전해지지만, 국경 지대에서 사소한 전투가 벌어졌을 뿐 이렇다할 큰 충돌이 벌어지진 않은 듯하다. 그러다 모든 반란을 제압한 오토 1세가 950년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보헤미아로 쳐들어갔다. 그의 군대는 볼레슬라프 1세의 아들이 있던 성을 포위했지만, 병사들이 약탈하려 들자 이를 막느라 공성전을 미뤄야 했다. 볼레슬라프 1세는 아들을 구하려 했지만 적군의 숫자가 대단히 많은 걸 확인하고 오토 1세에게 평화 협상을 요청했다. 이후의 협상 결과, 볼레슬라프 1세는 오토 1세에게 경의를 표하고 배상금을 지불하며, 매년 공물을 바치기로 했다. 또한 오토 1세는 동생인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1세에게 보헤미아 감독을 맡겼다.
그후 볼레슬라프 1세는 오토 1세와 동맹을 맺었고, 955년 오토 1세가 레히펠트 전투에서 마자르족을 상대로 대승을 거둘 때 1,000명의 보헤미아 정예병을 파견해 오토를 도왔다. 960년대에 중부 유럽을 여행한 무슬림 유대인 이브라힘 이븐 야쿠브(Ibrahim Ibn yaqub)는 자신이 볼레슬라프 제국의 국경에서 프라하까지 이르는 데 3주가 걸렸다고 밝혔다. 슬로바키아 고고학자 미할 루토프스키(Michal Lutovský, 1961 ~)는 이를 근거로 볼레슬라프 1세가 키예프 루스와 접하는 부크강에서 스티르강 및 산 강까지의 영토를 통제했다고 추정했다. 또한 모라비아 남부 지역도 볼레스와프 1세의 손아귀에 넘어갔거나 간접 지배를 받았으며, 크라쿠프도 950년 이전에 볼레스와프 1세의 손아귀에 넘어갔을 거라고 추정했다. 많은 학자들은 이 설의 근거가 빈약하다고 보지만, 볼레슬라프 1세 치세 때 보헤미아 공국이 영역을 상당히 확장했다는 건 분명하다고 본다.
한편, 볼레슬라프 1세는 보헤미아식 데나리온을 최초로 주조했다. 이 시대에 주조된 데나리온의 지름은 21mm로 순은으로 만들어졌으며, 무게는 약 1g이었다. 데나리온에는 새, 칼, 십자가 또는 그리스도의 초상 등 기독교의 고전적인 이미지가 그려져 있었다. 이 동전은 발트해 연안, 포메른, 심지어 스웨덴의 고틀란드까지 출토될 정도로, 중부와 동부 유럽에 널리 쓰였다. 이브라힘 이븐 야쿠브는 보헤미아식 데나리온을 '데나르'라고 지칭하면서, 실로 높은 가치를 지녔다고 밝혔다. 하지만 야쿠브는 무역은 대부분은 물물교환으로 이뤄졌고, 오직 가장 높은 사회 계층만이 데나리온으로 거래했다고 덧붙였다.
965년, 볼레슬라프 1세는 자신의 딸 두브라우카를 폴란드 대공 미에슈코 1세와 결혼시키고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967년, 그는 2개의 기병 부대로 구성된 보헤미아 군대를 미에슈코 1세에게 지원해, 미에슈코 1세가 슬라브족의 지도자 비흐만 2세를 패사시키고 오데른 강 어귀를 장악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966년에 딸 믈라다를 로마로 파견해 교황 요한 13세로부터 프라하 주교구를 바이에른 대주교구로부터 독립시키고 보헤미아에 최초의 수녀원을 설립하게 해달라고 요청해 허락을 받아냈다. 보헤미아 최초의 수녀원은 프라하의 성 조지 대성당에 세워진 베네딕토회 수녀원이었고, 첫 수녀원장은 믈라다였다.
볼레슬라프 1세는 7월 15일에 사망했다고 전해지지만 사망년도는 불확실하다. 코스마스는 그가 967년에 사망했다고 기술했지만,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코버리의 비투간트가 967년에 미에슈코 1세에 대해 기술한 대목에서 "볼레슬라프 1세와 같은 세대"라고 밝힌 것을 볼 때 967년에 사망하지 않았고, 972년에 사망했다는 일부 연대기들의 기술이 좀더 그럴듯 하다고 본다.
어쨌든 볼레슬라프 1세의 사망 후 볼레슬라프 2세가 보헤미아 공작이 되었고, 973년 마인츠 대주교구에 종속된 프라하 주교구가 성립되었고, 작센 출신의 데트마르가 첫 주교에 선임되었다.
973년 5월 7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1세가 사망했다. 이후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가 오토 1세의 어린 아들 오토 2세를 밀어내고 제위를 차지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는 폴란드 대공 미에슈코 1세, 오보트리테스 연맹의 미스티보이와 함께 하인리히 2세를 도왔다. 그러나 음모는 조기에 발각되었고, 오토 2세와 하인리히 2세의 내전이 발발했다. 하인리히 2세는 보헤미아 전사들의 지원을 받고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지만, 976년, 오토 2세를 지지하는 귀족들의 대대적인 공세에 버티지 못하고 보헤미아로 망명했다. 이후 오토 2세는 보헤미아를 상대로 2차례 공세를 벌였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볼레슬라프 2세는 977년 오토 2세를 주군으로 인정할 테니 전쟁을 중단하자고 제안해 동의를 얻어냈고, 978년 크베들린부르크에서 오토 2세를 알현해 경의를 표했다.
977년 미에슈코 1세의 아내이자 볼레슬라프 2세의 여동생이었던 두브라우카가 사망했다. 그후 폴란드와 보헤미아간의 우호 관계가 악화되었다. 980년 봄 또는 여름, 미에슈코 1세는 북방변경백 디트리히의 딸인 할덴슬레벤의 오다와 재혼했다. 이후 미에슈코 1세의 장남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가 마이센 변경백 릭다그의 딸[44]과 결혼했다. 하지만 볼레슬라프 2세가 985년에 락다그가 사망하면서 공백이 생긴 틈을 타 마이센 성을 공략하고 마이센 주교 볼콜트를 추방하자, 미에슈코 1세는 며느리가 쓸모 없다고 보고 결혼을 무효화한 뒤 헝가리 대공 게저 또는 트란실바니아 대공 줄러의 딸 유디트와 장남을 결혼시켰다. 이로 인해 보헤미아가 폴란드와 헝가리 연합에 둘러싸일 위험에 처하자, 984년 하인리히 2세와 동맹을 굳건히 했다.
이 무렵, 보헤미아 북동부의 리비체나트치들리노우와 쿠트나 호라를 거점으로 삼은 슬라브니크(Slavník) 가문의 위세가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12세기 프라하 성 비투스 대성당 학장이자 연대기 작가이며 외교관으로도 활동했던 코스마스(Cosmas, 1045년경 ~ 1125년)에 따르면, 슬라브니크는 서쪽으로는 보헤미아, 남쪽으로는 오스트리아, 동쪽으로는 모라비아, 북쪽으로는 폴란드에 걸쳐 상당한 영토를 가진 강력한 영주였다고 한다. 현대의 일부 역사가들은 슬라브니크의 아내로 명시된 스트르제지슬라파(Střezislava)는 볼레슬라프 1세의 누이였을 거라고 추정하며, 슬라브니크는 볼레슬라프 1세로부터 보헤미아를 경유하는 상인들의 여행길을 지키는 임무를 수행했으리라 추정한다.
981년 슬라브니크가 사망한 뒤, 그의 아들 소베슬라프는 보헤미아 공국으로부터 독립을 추구하기 시작했고, 이를 위해 폴란드와 작센과 외교 활동을 벌였다. 이를 경계한 볼레슬라프 2세가 그를 굴복시키기 위해 무력을 행사했고, 소베슬라프는 2차례 영토를 떠났다가 복귀하길 반복했다. 그러던 983년 프라하의 주교 데트마르가 사망한 뒤, 소베슬라프의 형제인 보이치에흐가 새 주교에 선임되었다. 이로 인해 슬라브니크 가문의 위세가 더욱 강해졌다.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 시기에 슬라브니크 가문이 지배하던 지역에서 화폐를 독자적으로 주조했다고 한다.
986년, 독일 왕위를 찬탈하려는 하인리히 2세와 대적하던 오토 3세는 하인리히 2세를 지원하는 보헤미아를 응징하기 위해 공세를 개시했다. 볼레슬라프 2세는 크게 패해 마이센으로 도피했고, 폴란드 대공 미에슈코 1세는 즉시 오토 3세를 알현한 뒤 막대한 선물을 넘겼다. 이후 오토 3세와 미에슈코 1세는 슬라브 원정에 가담해 각지를 황폐화하고 수많은 적병과 민간인을 살상했다. 두 사람이 공격한 지역의 위치는 기록이 미비해서 불확실한데, 일부 학자들은 폴라비아였을 거라 추정하고, 다른 학자들은 보헤미아였을 거라 본다. 990년, 미에슈코 1세는 보헤미아를 공격해 실레시아 일대를 정복하고 브로츠와프, 글로구프, 오폴레에 요새를 건설했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마워폴스카(Małopolska)를 정복하고 장남 볼레스와프의 영지로 삼았다.
992년, 오토 3세에게 복종한 볼레슬라프 2세는 오토 3세와 함께 폴라비안 슬라브족을 정벌하는 원정을 진행했다. 995년, 그는 보헤미아의 강력한 귀족 집안인 브르쇼브치(Vrshovichi)를 지원해 갈수록 강해지며 독립을 꾀하는 슬라브니크 가문을 공격하게 했다. 브르쇼브치 가문은 리비체나트치들리노우를 공략하고 슬라브니크 가문에 속한 스피티미르, 포브라슬라프, 포르제이, 카슬라프, 소베보르 등 5명을 처형했다. 슬라브니크 가문에 속했던 프라하 주교 보이치에흐는 이에 분노해 브르쇼브치 가문을 파문하면서, 그들이 3번 멸망할 거라는 예언을 남겼다. 이후 보이치에흐는 프라하를 떠나 로마로 망명했다.
996년, 교황 요한 15세는 보이치에흐가 프라하 주교로 복귀하게 하자는 마인츠 대주교 빌리기즈의 주장을 받아들여 보헤미아 당국에 요청했지만, 볼레슬라프 2세가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했다. 그 후 보이치에흐는 폴란드로 이동한 뒤 폴란드 대공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의 지시에 따라 고대 프로이센으로 가서 선교 활동을 벌였지만, 그 해 4월 23일에 원주민들의 공격을 받아 살해되었다. 999년 2월 7일에 사망했고, 장남 볼레슬라프 3세가 뒤이어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되었다. 그리고 볼레슬라프 3세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형제들을 숙청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5. 판노니아 분지
5.1. 동고트 왕국령+게피드 왕국령
서로마 제국이 붕괴된 당시 현재의 형가리가 자리잡은 푸스타는 판노니아로 불렸으며 451년 서로마 제국과 게르만 연합군이 카탈라우눔 전투 훈족을 격파한 후, 454년 아틸라가 죽자 테오데미르와 그의 형제 발라미르가 함께 반란을 일으켜 훈족의 지배로부터 독립한 후 당시 동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마르키아누스는 동고트족을 제국의 영내인 판노니아 지역에서 살도록 허락해준 이례로 동고트족의 영역이었으나 도나우 강을 기점으로 서부 한정이였으며, 동부는 게피드족의 부족 왕국의 영토로 양분된 상태였다.476년 서로마 제국 붕괴 이후 테오테미르의 아들인 타우다릭스가 제노 황제의 제안하에 489년 이탈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오도아케르를 공격한 후 3년 간 라벤나를 공격하게 되었다. 이때 게피드의 왕 트라우스틸라(Thraustila) 왕은 타우다릭스의 정복 계획에 반대하자 타우다릭스는 판노니아에 남아 있던 동고트 왕국의 분대로 하여금 게피드 왕국을 공격하게 했고, 동고트 왕국군과 게피드 왕국군은 현재의 세르비아의 보이보디나에 위치한 시르미움에서 격돌하였고, 트라우스틸라가 지휘한 게피드 왕국군은 패배했다.
이후 타우다릭스는 3년간 라벤나를 포위하다가 라벤나의 주교 요한네스의 주선으로 테오도리크와 협상을 하게 되며, 493년에 이 협상이 타결되면서 4년 만에 전쟁이 끝나게 된다. 협상에 따라 오도아케르는 명목상이긴 하지만 테오도리크와 이탈리아의 공동 통치자로 임명되기로 했지만 라벤나 입성 10일 후 오도아케르와의 연합을 축하하는 잔치를 벌이다가 흥이 오를 때쯤 갑자기 오도아케르를 검으로 목 아래쪽으로부터 옆구리까지 단칼에 세게 베어내려 죽여 버린다. 동시에 오도아케르의 가족들과 친위세력도 테오도리크의 부하들에게 공격을 받아 잔치가 벌어지는 동안에 모조리 살해한 후 이탈리아 반도의 통치자가 되었다.
이후에도 판노니아는 동고트 왕국의 영토로 계속 남아있었는데, 시르미움을 두고 도나우강 동부에 위치한 게피드족과 불편한 관계를 지속해야 했다. 결국 504년 게피드 왕국은 시르미움을 되찾기 위해 다시 동고트 왕국과 분쟁을 이어갔고, 트라우스틸라의 아들 트라사리크는 시르미움을 탈환했지만 그의 외사촌인 문두스가 무법자들을 모아 반역하자 시르미움을 탈환하기 위해 동로마 제국군의 원조를 받고 군대를 파견하나 문두스는 테오도리크에게 복속하였고, 테오도리크는 자신의 부관 중 한 명인 피치아(Pitzia)와 그의 군대를 파견했고, 결국 동로마-게피드 연합군은 패전하고 만다. 이후 트라사리크가 사망하였고, 엘레문드가 게피드의 왕이 되었다. 이후 엘레문드는 동고트 왕국과 우호 관계로 맺게 되었다.
그러다가 535년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을 일으키자 테오도리크 사망 후 동로마 제국으로 본적을 옮인 문두스 또한 군대를 이끌고 동고트 왕국령 달마티아 내륙 지방을 공격해 여름에 달마티아의 중심 도시인 살로나(솔린)로 진군해 점령하는데 성공하지만 다음해인 536년 3월에 달마티아를 회복하고자 동고트 군대가 문두스의 군대를 공격하였는데, 문두스는 그들을 격파하였으나 이과정에서 아들인 마우리키우스가 사망하였고, 본인도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하고 만다.
동로마 제국이 달마티아를 공격하자 게피드 왕국 또한 동고트 왕국과 동맹을 맺고 동로마 제국에 대항했다. 엘레문드는 537년에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여 중요한 도시인 시르미움(Sirmium)을 점령했다. 이에 유스티니아누스는 게피드족에게 판노니아 세쿤다(Pannonia Secunda)에서 크리미아(Crimea)로 떠나라고 압박했다. 하지만 엘레문드는 유스티니아누스의 경고를 무시하고 539년에 그는 프랑크 왕 테우데베르 1세와 동맹을 맺어, 테우데베르는 베네치아를 공격하고, 엘레문드는 도나우 강을 건너 칼루크가 이끄는 트라키아의 동로마 군대를 격파한 뒤 시르미움, 모에시아 프리마, 다키아 리펜시스 북부 지역까지 점령한다. 이에 유스티니아누스는 100년 동안 이어온 게피드와의 동맹을 해체 하고 보조금 지급을 중단했다.
한편 이시기 랑고바르드족이 현재의 슬로바키아 지방에 정착한 상태였다. 이때 아우도인이 레딩스 혈족의 마지막 왕 발타리를 암살하고 랑고바르드족의 되자 그는 다뉴브 강을 건너 판노니아로 이주했다. 이때 엘레문드는 판노니아의 패자가 되었지만 546년 사망하고 게피드의 귀족 중 한명인 투리신드가 엘레문드의 아들인 오스트로고타를 몰아내고 왕이 된 상태였다.
랑고바르드족의 갑작스러운 남진에 투리신드는 이들을 몰아내려 했고, 랑고바르드족은 살아남기 위해 처절한 항쟁을 벌여야 했다. 그 과정에서 동로마 제국의 도움을 받고자 그들의 봉신이 되었고,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을 벌일 때 대규모 보조군을 보내 나르세스 장군이 이끄는 동로마군이 동고트 왕국을 무너뜨리고 이탈리아를 석권하는 데 크게 기여했고, 랑고바르드족들 또한 552년 다뉴브강과 사바강 사이로 추정되는 아스펠드에서 아우도인의 아들인 알보인이 게피드 족의 군주 투리신드의 아들 투리스모드를 처단하면서 판노니아에 완전히 정착하는데 성공한다,
후대의 랑고바르드 왕국의 연대기 작가인 파울 부제에 따르면, 알보인은 전투가 끝난 후 관례에 따라 게피드 족의 본거지로 찾아가서 투리스모드가 생전에 착용했던 무기를 돌려줬고, 투리신드는 투리스모드의 팔을 그에게 주었다고 한다.
560년 아우도인이 죽자 알보인이 랑고바르드족의 왕이 되었다. 그는 동로마 제국에 종속된 부족이 새로운 길을 모색할 발판을 마련하고자 프랑크 왕국의 군주 클로타르 1세의 딸 클로신드와 결혼했다. 그 후 게피드족을 꺾기 위해 당시 판노니아로의 진출을 꾀하던 아바르족에 사절을 보내 자신을 도와준다면 게피드족의 땅을 넘기겠다고 제안했다. 아바르족의 군주 바얀 1세는 흔쾌히 수락하고, 랑고바르드족과 연합하여 게피드족을 대적했다.
파울 부제에 따르면, 567년 쿠니문드 왕이 이끄는 게피드족이 랑고바르드족을 선제 공격했지만 아바르족의 원군에 힘입은 랑고바르드족이 완승을 거두었고, 알보인은 쿠니문드를 주살한 뒤 수급을 전리품으로 가져가서 와인 잔으로 만든 후 허리띠에 착용했다고 한다. 일부 사료에 따르면, 바얀 1세가 쿠니문드를 죽이고 수급을 벤 뒤 알보인에게 넘겼다고 한다. 또한 알보인은 쿠니문드의 딸 로자문드를 아내로 삼았지만, 실제로는 하녀처럼 대우했고 온갖 학대를 자행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바르족을 끌여들인 것이 큰 실책이었다는 것이 곧 드러났다. 바얀 1세는 게피드족의 영역을 빼앗은 뒤 랑고바르드족까지 몰아내려 했다. 알보인은 자신에게 귀순한 게피드족과 힘을 합쳐 아바르족과 맞섰으나, 아바르족의 군사적 역량이 월등했기에 도저히 이길 가망이 없었다. 이에 판노니아에 계속 있다가는 종족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장고를 거듭한 끝에 이탈리아로 이동하기로 마음먹고 판노니아를 떠난다.
5.2. 아바르 칸국⇒ 프랑크 제국령 아바르 공국 및 아바르 변경주
북부 캅카스 일대에 거주하던 아바르족은 557년 동로마 제국에 사절을 보내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와 협상한 끝에 매년 제국으로부터 금을 받는 대가로 동로마 제국의 영역에 속한 다뉴브 강 이남의 발칸 반도를 침략하는 이민족들을 물리쳐주기로 합의했다. 그 후 그들은 지속적인 원정을 통해 쿠트리구르족과 사비르족을 정복했으며, 안테스족을 격파했다. 562년, 아바르족은 다뉴브 강 하류 유역에서 흑해 북쪽의 대초원까지 이어지는 영역을 확보한 아바르 칸국을 건설했다. 서기 6세기 중반에 활동한 역사가 '수호자 메난데르(Menander the Guardsman)'에 따르면, 괵튀르크족 왕자 툼간(Tamgan)이 565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사절단을 보내 아바르족과 동맹을 맺은 것에 항의했다고 한다. 이들은 아바르족을 "탈출한 튀르크인 노예"라고 비하하며, 이들과 손잡는 건 제국에게도 이롭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임종을 눈앞에 둔 황제는 이들의 경고를 무시했다.
아바르 칸국은 초기엔 동로마 제국의 후원을 받으며 도나우 강 이북의 이민족들을 정복했고, 그 다음엔 북서쪽의 게르마니아로 진격했다. 그러나 프랑크 왕국이 이를 저지하자, 이들은 562년 동로마 제국 쪽으로 눈길을 돌려 트라키아를 침공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565년 11월 14일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사망하고 유스티누스 2세가 동로마 제국의 새 황제로 등극하자, 아바르 칸국은 사절단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파견해 황제 즉위를 축하하면서 선황제가 자기들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금을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유스티누스 2세는 아바르족을 신용할 수 없는 족속이라고 여겼고, 재정이 파탄 지경에 이른 상황에서 보조금 지급을 지속하는 건 무리라고 판단하고 사절단의 요구를 거부했다. 이후 그는 유스티니아누스가 보조금 지불을 약속한 다른 부족들과 사산조 페르시아에게도 보조금 지불을 거부했다.
그러던 중 랑고바르드족의 지도자 알보인이 아바르 칸국에 사절을 보내 자신과 함께 게피드 왕국을 협공해주면 그들의 땅을 넘기겠다고 제안했다. 아바르 칸 바얀 1세는 흔쾌히 수락하고 랑고바르드족과 연합해 게피드족을 협공해 567년경 완승을 거두었다. 이후 바얀 1세는 랑고바르드족을 압박한 끝에 그들이 이탈리아로 이동하게 만들고 게피드 족과 랑고바르드족이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판노니아를 동로마 제국에 귀순한 시르미움을 제외하고 대부분 장악했고, 나아가 이전 랑고바르드족의 정착지였던 노리쿰과 체코·슬로바키아 일대까지 손에 넣는다. 그 후 바얀 1세가 동로마 제국을 향한 공세를 본격적으로 벌이기 시작하면서, 장장 58년간 이어질 전쟁의 막이 올랐다.
568년, 아바르족은 동로마 제국에 귀순한 시르미움을 포위 공격했지만 공성전 역량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략에 실패했다. 여기에 아바르 칸국에 복속된 유목민족인 쿠트리구르족 10,000명이 동로마 제국의 영역인 달마티아를 침략해 심각한 약탈을 자행했다. 유스티누스 2세는 황실 친위대인 엑스쿠비토레스 병단의 코메스를 맡고 있던 티베리우스를 급히 파견해 아바르 칸국과 평화 협상을 하도록 했다. 티베리우스는 여러 아바르족 족장들과 협상한 끝에 그들이 데려갔던 포로를 제국군이 확보한 아바르족 포로와 교환하고 아바르족이 발칸 반도의 동로마 제국 영토에 정착하는 것을 허용하기로 했다. 그러나 유스티누스 2세는 아바르 칸 바얀 1세의 가족을 인질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고, 바얀 1세가 이를 거부하면서 전쟁이 재개되었다.
570년, 티베리우스는 트라키아에서 아바르족 군대를 격파하고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왔다. 그러나 570년 말 또는 571년 초, 그는 또다시 승리를 쟁취하려고 아바르족 군대와 맞붙었으나 대패하고 가까스로 죽음을 모면했다. 더이상 전쟁을 벌여봐야 소용 없겠다고 판단한 티베리우스는 유스티누스와 조약 조건을 의논하려는 아바르족 특사들에게 호위병을 제공했다. 이때 특사들이 지역 주민들에게 공격당해 물품을 강탈당하고 도와달라고 호소하자, 티베리우스는 책임자를 추적해 훔친 물건을 돌려주게 했다. 이후 유스티누스는 8만 솔리두스를 아바르족에게 매년 넘겨주는 조건으로 평화 조약에 합의했다.
그 후 아바르족은 574년 시르미움을 한 차례 습격한 것을 제외하고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위협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579년, 새 황제 티베리우스 2세가 이탈리아와 이베리아 반도의 로마 영토를 지키기 위해 병력을 파견하느라 발칸 반도 방면의 병력이 줄어들자, 바얀 1세는 다시 한 번 공세를 가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동로마 제국이 제때에 연공금을 지불하지 않았다는 명목을 내세워 시르미움을 포위해 581년 또는 582년에 함락에 성공했다.
582년 8월 14일 티베리우스 2세가 사망한 후 황위에 오른 마우리키우스는 사산 왕조의 지속적인 침략에 맞서고자 주력군을 동방 전선으로 파견했다. 이로 인해 다뉴브 강 유역의 동로마 수비대가 약화되자, 아바르족은 피지배 민족인 슬라브족, 불가르족 등을 총동원해 대대적인 공세를 준비했다. 583년, 바얀 1세는 동로마 제국에 공물을 10만 솔리두스로 늘리면 공격하지 않겠다고 제의했다. 마우리키우스는 이를 받아들이면 아바르족이 추가로 요구할 게 분명하다고 여기고 공물을 더 이상 바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이에 바얀 1세는 대대적인 공세에 착수해 싱기두눔을 공략하고 뒤이어 아우구스타이(Augustae), 비미나키움(Viminacium)을 공략했으며, 안키알루스(Anchialus)를 포위했다.
로마 사절단이 안키알루스 인근에서 바얀 1세를 찾아와 평화 협상을 요청했다. 바얀 1세는 병력을 좀더 끌어모아 더 많은 영토를 정복할 거라며 고압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안키알로스가 좀처럼 함락되지 않자 마음을 바꿔 협상에 임했다. 584년 마우리키우스는 바얀 1세가 처음에 요구한 대로 10만 솔리두스를 매년 공물로 바치기로 동의했다. 그러나 아바르 칸국에 귀속되었던 슬라브족은 이 협약에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고 아테네 인근 아티카와 펠로폰네소스 반도까지 쳐들어가서 약탈을 자행했다. 584/585년에는 트라키아를 습격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아나스타시우스 장성까지 이르렀다가 코멘티올루스 장군에게 격파되었다. 마우리키우스는 수도를 지킨 코멘티올루스에게 마기스테르 밀리툼 프라 에센탈리스(magister militum praesentalis)이란 직책을 내렸고, 얼마 후엔 파트리키우스 칭호를 하사했다.
586년, 아바르족은 평화 협약을 무시하고 다뉴브 강 유역의 요새화된 도시인 라티아리아(Ratiaria)와 오에스쿠스(Oescus)를 파괴하고 뒤이어 테살로니키를 포위했다. 코멘티올루스가 지휘하는 로마군은 수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 전면전은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유격전과 야간 습격을 벌여서 적군을 괴롭히는 작전을 구사했다. 이로 인해 식량 보급이 힘들어진 데다 테살로니키가 좀처럼 함락될 기미가 없자, 바얀 1세는 본국으로 후퇴했다. 587년 안키알루스에서 10,000명의 정예병을 집결한 코멘티올루스는 또다시 다뉴브 강을 넘어 발칸 반도를 휘젓고 있던 바얀 1세를 흑해 연안의 토미스에서 습격했다. 바얀 1세는 이로 인해 목숨을 잃을 뻔했지만 부하들의 분전 덕분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고 석호 모양의 해안을 통해 달아났다. 코멘티올루스는 다시 발칸 반도 남쪽 경사면에서 바얀 1세를 습격하려 했지만, 매복군 간의 의사소통이 잘못되어 병사들이 "도망쳐라"는 명령이 내려진 줄 알고 달아나는 바람에 실패했다.
588년 동방 전선으로 보내진 코멘티올루스를 대신해 다뉴브 전선을 맡은 프리스쿠스는 국고가 바닥나는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군대 급료를 4분의 1로 삭감한다는 마우리키우스 황제의 칙령에 분개한 병사들의 반란에 직면했다. 그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달아났고, 병사들은 포에니케 공작 게르마누스를 지도자로 선출하고 마우리키우스에게 대적했다. 하지만 마우리키우스가 계획을 취소하고 군심을 수습한 덕분에 반란은 곧 진압되었고, 프리스쿠스는 다시 다뉴브 전선을 맡아 아바르족에 맞서 원정을 벌이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원정군은 페린투스에서 아바르족의 측면 공격으로 패퇴했고, 아바르족은 치랄룸(Tzirallum)으로 퇴각한 프리스쿠스를 포위했다.
7세기 역사가인 시모카타의 테오필락토스에 따르면, 프리스쿠스는 한 병사를 시켜 마우리키우스가 프리스쿠스에게 보낸 것으로 위조한 편지를 들고 아바르족에게 일부러 체포되게 했다. 편지의 내용은 황제가 친히 해군을 동원하여 아바르 칸국 본토를 급습하려 하니 좀더 버티라는 것이었다. 바얀 1세는 이 편지가 사실이라고 믿고 서둘러 철수하기로 마음먹었다. 이후 프리스쿠스와 협상한 끝에 연간 공물을 다시 받는 대가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고 한다. 12세기 신학자이자 역사가인 시리아인 성 미하일에 따르면, 동로마 제국은 연간 60,000 솔라두스를 아바르 칸국에 지급하기로 했다고 한다.
590년, 마우리키우스는 안키알루스 등 트라키아의 여러 도시를 방문해 재건을 감독하고 군대와 지역 주민들의 사기를 높였다. 그리고 591년 마우리키우스의 지원 덕분에 샤한샤에 복위할 수 있게 된 호스로 2세가 아르메니아 대부분을 동로마 제국에 헌납하고 전쟁을 종식하면서, 동로마 제국은 마침내 발칸 전선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마우리키우스는 동방 전선에서 정예병을 차출해 다뉴브 전선에 투입시켜서 전력을 보강한 뒤 592년부터 반격을 개시했다. 이해에 그의 군대는 싱기두눔과 시르미움을 탈환했다. 또한 로마 분견대는 모이시아에 침입한 슬라브족 약탈자들을 토벌하는 임무를 착실하게 수행해 로마 도시들간의 교통을 재구축했다.
593년, 프리스쿠스는 다뉴브 강 연안도로스톨론으로 진군한 뒤 강을 건너려고 준비하던 슬라브 부족들을 야간 기습해 전멸시켰다. 이후 다뉴브 강을 도하한 뒤 그해 가을까지 현재 루마니아 문테니아의 여러 늪과 숲에서 슬라브족들을 여러 차례 격파했다. 그러나 마우리키우스가 다뉴브 강 북부 강둑에서 겨울을 보내라는 지시를 내리자,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 프리스쿠스는 황제의 명령을 거부하고 도나우강 남쪽의 오데소스(현재 비르나)에서 겨울을 보냈다. 로마군이 물러나자, 593년 겨울 슬라브족이 모이시아와 마케도니아 속주로 쳐들어가 도브루자의 아퀴스, 스쿠피, 잘다파 마을을 파괴했다. 여기에 프리스쿠스가 마우리키우스의 승인도 받지 않은 채 바얀 1세에게 보상금을 지급받는 대가로 5,000명의 아바르 포로들을 돌려보내고 휴전 협상을 추진하자, 마우리키우스는 격분해 프리스쿠스를 해임하고 형제 페트루스를 새 지휘관으로 선임했다.
594년 새 지휘관에 부임한 페트루스는 모이시아로 재차 쳐들어온 슬라브족과 맞붙었다. 초기에는 슬라브족에게 패배했지만, 군대를 수습한 뒤 마르키아노플리스에서 슬라브족을 격파하고 노바에(현재 스비슈토프)와 흑해 사이의 다뉴브 강을 순찰했다. 그해 8월 말에 노바에 서쪽에서 다뉴브 강을 도하한 뒤 새로운 약탈 원정을 벌이려던 적을 격파했다. 595년 마우리키우스의 용서를 받고 다뉴브 상류의 또다른 로마군 지휘관으로 부임한 프리스쿠스는 다뉴브 강의 로마 함대와 연합해 싱기두눔을 공략하려던 바얀 1세의 군대를 효과적으로 격퇴했다. 이에 바얀 1세는 달마티아로 이동한 후 프리스쿠스와의 직접적인 대결을 피하면서 여러 요새를 약탈했다. 로마 병사들이 구석진 곳인데다 빈곤해서 약탈물을 챙기기 어려운 달마티아로 가서 목숨 바쳐 싸우려 하지 않자, 프리스쿠스는 소규모 분견대만 파견해 아바르족의 진군을 방해하고 적이 확보한 전리품 일부를 탈취하는 정도로 그쳤다.
596년, 바얀 1세는 프랑크 왕국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가 이끄는 아바르군은 드라바 강에서 바이에른군을 격파한 뒤 튀링겐을 침공해 심각한 약탈을 자행했고, 프랑크인들로부터 막대한 조공을 확보한 뒤 귀환했다. 이 성과에 고무된 아바르족은 597년 가을 도나우강을 기습 도하한 뒤 토미스에서 프리스쿠스의 군대를 포위했다. 그러나 598년 코멘티올루스가 구원군을 이끌고 토미스에서 30km 떨어진 지키디바에 이르자, 지난날 자신을 상대로 탁월한 활약을 선보였던 코멘티올루스를 경계한 바얀 1세가 코멘티올루스부터 무찌르기로 하면서 토미스 포위가 풀렸다. 프리스쿠스는 모종의 이유로 코멘티올루스로 향하는 아바르군을 요격하지 않았고, 프리스쿠스는 이아트루스로 후퇴한 뒤 고지대에서 아바르족에 맞섰으나 끝내 패배를 면치 못하고 하이무스 산맥 남쪽으로 퇴각했다.
바얀 1세는 기세를 이어가 아드리아노폴리스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사이에 있는 아르카디오폴리스를 포위 공격했으나, 전염병이 창궐하는 바람에 7명의 아들을 비롯한 다수의 병력을 상실했다. 마우리키우스는 코멘티올루스를 일시적으로 해임하고 필리피쿠스로 대체하는 한편, 킵소스에서 병사들을 소환해 콘스탄티노폴리스 서쪽의 아나스타시우스 성벽을 지키게 했다. 그러면서 바얀 1세에게 평화 협상을 제의하면서 여러 아바르 귀족들을 매수했다. 바얀 1세는 아들들을 전염병으로 잃은 것에 깊은 충격을 받은 데다 귀족들이 철수를 종용하자 이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평화 협정을 맺은 뒤 돌아갔다. 그 직후, 마우리키우스는 협약을 파기하고 프리스쿠스와 코멘티올루스에게 아바르 칸국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벌일 준비를 하라고 명령했다.
599년, 프리스쿠스와 코멘티올루스는 다뉴브 강 하뉴의 비미나키움에서 강을 도하한 뒤 아바르족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그후 프리스쿠스는 아바르 칸국의 중심지인 판노니아 평야지대로 진격했고, 코멘티올루스는 다뉴브강 인근에 남아서 보급을 담당했다. 프리스쿠스는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이 발칸 반도에서 했던 것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티자 강 동쪽의 광대한 지역을 황폐화시켰고, 여러 아바르 부족과 게피드족을 학살했다. 599년 가을, 프리스쿠스는 수십년 동안 사용되지 않았던 트라야누스 관문을 재개통해, 발칸 반도 도시들간의 연락망을 정상화시켰다. 그러나 마우리키우스 황제가 아바르족이 잡아간 제국군 포로 1만 2천 명의 몸값을 지불하는 것을 거부해 포로들이 모조리 학살당하는 비극을 초래했다.
601년, 페트루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티사 강으로 진격해 아바르 칸국의 세력을 다뉴브 강 삼각주로부터 몰아냈다. 이 덕분에 로마 다뉴브 함대가 시르미움과 싱기두눔으로의 접근을 유지할 수 있게 했다. 602년 페트루스는 왈라키아에서 아바르-슬라브 연합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둬 2만여 명을 사살했고, 동로마 제국와 동맹을 맺은 안테스족이 아바르 칸국의 영역을 침범해 심각한 약탈을 자행했다. 여기에 여러 아바르 부족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면서, 아바르 칸국은 해체될 위기에 직면했다. 심지어 일부 아바르족은 동로마 제국에 귀순하기도 했다. 이렇게 아바르 칸국이 지리멸렬해지면서, 다뉴브 강 방어선을 성공적으로 재구축하고 왈라키아와 판노니아에서 아바르족을 몰아낸다는 마우리키우스의 목표가 현실화되는듯 했다.
그러던 602년 가을, 마우리키우스 황제는 원정의 성과를 더욱 많이 거두고 귀환에 필요한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다뉴브 강 남쪽의 겨울 숙영지로 돌아오지 말고 판노니아에서 겨울을 보내라는 지시를 내렸다. 593년 프리스쿠스가 같은 명령을 황제로부터 접수받았으나 병사들이 반발하자 명령을 거부하고 귀환한 적이 있었지만, 마우리쿠스의 형제인 페트루스는 황제의 명령에 복종했다. 병사들은 이에 격분해 포카스를 새 황제로 내세우며 반란을 일으켰고, 마우리키우스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이 호응하면서 결국 마우리키우스 정권은 붕괴되었다. 이리하여 동로마군의 아바르 칸국에 대한 공세는 중단되었고, 아바르 칸국은 멸망 위기에서 가까스로 벗어날 수 있었다
이후 마우리키우스를 무너뜨리고 새 황제에 오른 포카스 황제는 자신을 복위시켜줬던 마우리키우스의 원수를 갚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쳐들어온 호스로 2세의 사산 왕조군에게 연전연패했고, 이로 인해 동로마 제국의 동방 전선은 매우 위급해졌다. 반면, 발칸 전선은 포카스의 치세 내내 평온했다. 아바르 칸국이 마우리키우스 황제의 대대적인 원정으로 인해 막심한 피해를 입고 반란에 휘말렸기 때문에 전쟁을 재개할 여력이 되지 않기도 했을 테지만, 포카스를 황제로 옹립한 발칸 방면군의 충성도가 강력했기 때문에 변고가 일어날 여지가 적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포카스는 아바르족에게 상당한 공물을 보내 평화 협약을 맺고 발칸 전선군을 동방으로 보내 사산 왕조의 공세를 최대한 막아보려 노력했다. 몇몇 사료에서는 슬라브인들이 그의 치세에 테살로니카를 습격했다고 기술되었지만 다른 사료와 교차검증되지 않기에 신빙성은 의심된다.
한편 이시기 아바르족은 랑고바르드 왕국의 프리올리 공국 또한 공격해 프리올리 공작 지술프 2세의 군대를 궤멸시킨 뒤 프리울리 공국의 수도를 포위했다. 파울 부제에 따르면, 로밀다는 아바르 족장이 젊고 사내다운 기상을 풍기는 것을 보고 그에게 서신을 보내 "나와 결혼해준다면 도시와 주민들을 넘겨주겠다"고 제안했다. 아바르 족장은 이를 받아들였고, 로밀다가 은밀히 성문을 열자 즉시 군대를 투입해 도시를 장악했다. 로밀다는 소원대로 아바르 족장과 결혼해 하룻밤을 보냈지만, 다음날 족장이 "너에게 적합한 남편들이다"라고 말하며 12명의 망나니에게 보내 갖은 고문과 강간을 당하게 한 뒤 꼬챙이에 찔러 죽게 했다고 한다.
이후 프리울리의 랑고바르드인들을 모조리 끌고 판노니아로 귀환한 아바르족은 포로로 잡은 성인 남성을 모두 죽이고 여자와 아이들을 노예로 삼기로 했다. 이때 라도알트, 카코, 타소네, 그리말트 4형제는 탈출하기로 결의했다. 형제 중 한 명이 그리말트는 어려서 말을 탈 수 없으니 아바르족에게 능욕당하기보다는 지금 죽는 편이 낫다며 죽이려 하자, 그리말트는 스스로 말에 올라 타 능숙하게 이동함으로써 자신 역시 말을 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고, 네 형제는 곧 간수를 죽이고 프리울리로 피신했고 한다.
이후 614년, 아바르 칸국의 새로운 칸인 바얀 2세는 포카스를 몰아내고 제위에 오른 이라클리오스가 사산 왕조군을 상대로 연전연패한 틈을 타 달마티아를 습격해 달마티아의 수도 살로나를 공략하고 그곳에 살던 주민들을 노예로 삼았다. 뒤이어 니스를 공략한 뒤 발칸 반도로 깊숙이 침투해 여러 마을과 농촌들을 파괴했으며, 슬라브 해군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에게 해 섬까지 침략했다. 615년 아바르 족이 유스티아나 프리마와 살로나, 나이소스, 세르디카, 노바에를 공략하고 철저하게 파괴했다. 테살로니카 역시 615년과 617년에 2차례 포위되었지만, 동로마 해군의 물자 지원 덕분에 함락을 모면했다. 619년 마르마라 해 연안인 헤르클레아 페린토스에서 동로마 해군이 슬라브 해군에게 격파당했고, 623년 슬라브 해군이 크레타를 습격해 심각한 파괴를 자행했다.
이라클리오스는 가뜩이나 사산 왕조군이 대대적으로 쳐들어와서 시리아, 이집트, 소아시아 상당수를 상실한 상황에서 아바르 칸국과 전쟁을 이어가는 건 무익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아바르 칸국에 막대한 연공금을 바침으로써 평화 협약을 이루는 데 성공한 뒤, 사산 왕조와의 전쟁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후 이라클리오스의 활약으로 전세가 갈수록 불리하게 돌아가자, 사산 왕조 샤한샤 호스로 2세는 아바르 칸국에 사절을 보내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합동 공격하자고 제안했다. 마침 동로마 제국을 정복하고 발칸 반도를 완전히 제패하기 위한 원정을 기획하고 있던 바얀 2세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626년, 아바르족과 슬라브족[45] 연합군이 트라키아로 진입한 뒤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접근하면서 발렌스 수로를 파괴했다. 여기에 샤흐르바라즈가 이끄는 페르시아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보스포루스 해협 건너편 도시인 칼케돈으로 이동하여 바다를 건너려 했다. 그러나 동로마 해군이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제했기 때문에 바다를 건널 수 없었고, 공성 능력이 탁월했던 사산 왕조군의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된 아바르-슬라브 연합군은 콘스탄티폴리스 공략에 애를 먹었다. 그러다가 가까스로 무거운 공성 장비를 제작한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이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향해 한달 동안 공성전을 벌였지만, 지휘관 보노스의 지휘를 받은 수비대가 결사적으로 항전해 쉽사리 공략하지 못했다. 여기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세르지오 1세가 성모 마리아의 이콘을 들고 성벽을 행진하면서 병사들을 독려했고, 시민들 역시 합심하여 수비대를 지원했다.
그 해 8월 7일, 보스포로스 해협을 건너 군대를 수송하려던 페르시아 함대가 동로마 함대에 포착되어 파괴되었다. 여기에 아바르 칸국에 동원된 스칼베니족 함대가 골든 혼 건너편에서 바다쪽 성벽을 공략하려 했다가 보노스가 동원한 갤리선에게 격퇴되었고, 아바르족의 지상 공격 역시 격퇴되었다. 얼마 후 이라클리오스의 형제 테오도로스가 샤힌 바르마자데간이 이끄는 군대를 시리아에서 격파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연합군의 사기는 바닥나 버렸다. 8월 8일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은 철수하면서 공성 탑을 파괴했고, 뒤이어 블라케르나이 성당에 불을 질렀다. 하지만 로마인들이 불을 끄러 성당에 갔을 때는 이미 불이 꺼져 있었다고 한다. 샤흐르바르즈는 이후에도 칼케돈에 남아있었지만 해군이 무너졌기에 별다른 공세를 취하지 못하다가 결국 시리아로 철수했다.
당시의 정황을 묘사한 기록을 보면 아바르족들은 자신들이 지배하던 슬라브족들과 동맹으로 삼은 불가르족까지 이끌고 와서 수만 명의 대군으로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한 채 장장 한 달 동안이나 계속 공격을 퍼부었으나,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이 워낙 두터웠던 데다 아바르족들이 공성전에 서툴렀던 탓에 별다른 피해를 주지 못했고 피해가 쌓여가자 휘하의 슬라브족들과 불가르족들이 아바르족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떠나버려 결국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은 동로마의 승리로 끝났다고 한다.
626년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서 막대한 희생만 치른 아바르 칸국은 급격하게 쇠락했다. 630년 바얀 2세가 사망하자, 그동안 아바르족의 지배를 받았던 불가르족과 슬라브족이 대대적으로 반란을 일으켰고,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치르면서 전력 손실이 컸던 아바르족은 이를 조기에 진압하지 못했다. 여기에 이라클리오스가 연공금 지불을 중단해버리면서, 아바르 칸국의 경제적 기반이 박탈되었다. 심지어 620~630년경에 프리올리를 공격하다가 아리알트에 의해 격퇴되기까지 했다.
프레데가르 연대기에 따르면, 아바르족[46]은 슬라브인[47]들의 아내와 딸과 함께 잠을 자며 겨울을 보냈으며, 슬라브인들은 매년 칸에게 경의를 표하고 공물을 바쳤다. 아바르족 아버지와 슬라브족 아내와 딸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은 이 수치스러운 억압을 참을 수 없어 칸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즉 해당 봉기는 아바르-슬라브족 혼혈 세대들의 주도하에 발생한 것이었다.
슬라브인들은 사모(Samo)를, 불가르족은 쿠브라트(Kubrat)를 중심으로 독립에 성공해 판노니아 평원과 현재의 러시아 불가강 유역과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독자적인 왕국을 세웠고, 더욱이 635년 이라클리오스가 발칸 반도에서 아바르 족을 몰아내기 위해 불가르 족의 칸 쿠브라트와 동맹을 맺기까지 했다. 그나마 사모와 쿠브라트가 각각 658년과 665년에 사망한 뒤 재차 사모 제국의 영역을 형향력 하에 두는데에 성공하지만 불가르족은 또다른 튀르크계 유목민족인 하자르의 침략으로 인해 영향력 하에 두는데 실패한데다가 쿠브라트의 아들들이 제각기 분열되어 세방향으로 나눠 이동해 제각기 세력을 일구기 시작였고, 이후 아바르 칸국은 쇠락했다.[48]
그동안 아바르 칸국은 지금의 헝가리 일대에서 겨우 영역을 보전했고, 재차 영향력하에 두었던 보헤미아와 모라바 일대의 슬라브족들의 대한 영향력 또한 상실되었고, 자기들끼리 칸 자리를 두고 내전을 치르는 경우가 많았고, 이과정에서 알제코와 같은 부족장이 세력에서 이탈해 랑고바르드의 로무알트 1세에게 의탁하는 등 심한 내분이 나타났으며, 심지어 658년 동로마 황제 콘스탄스 2세가 발칸 반도 에 대한 원정을 착수하여 아바르 족을 격퇴하였고, 그나마 700년대쯤 아직 복속된 슬라브족들과 함께 발칸 반도를 공격하는 등의 반격적 행동을 보이기도 했지만 이마저도 얼마 가지 못했다.
780년 중반 프랑크 왕국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788년 아바르 족은 프랑크 왕국의 복속된 바이에른의 공작 타실로 3세와 동맹을 맺고 동프랑크 지역을 공격하였고, 카롤루스는 이를 명분으로 타실로 3세를 폐위시키고 바이에른을 프랑크 왕국의 일부로 편입시킨다. 이후 오보트리테스 연맹을 비롯한 북부 슬라브족들의 원정을 진행하던 카롤루스는 다뉴브 강 일대로 아들 피핀으로 바이에른 지역에 머물면서 아바르족에 대한 방어와 반격이 진행하게 했다. 이 당시 카롤루스는 이전에 군대를 둘로 나눠 움직이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군을 셋으로 나누어 움직였는데, 이는 그만큼 프랑크 왕국의 군대가 한층 강력해졌음을 뜻한다.
788년 아바르족의 공격에 대한 방어로 시작된 전쟁은 북 슬라브족에 대한 원정이 끝난 이후인 790년부터는 아바르족 본토에 대한 공격으로 전환하였다. 피핀이 이끈 랑고바르드 군대는 791년 드라바 계곡을 지나 아바르족의 본토인 판노니아로 진격했으나 페스트로 인해 군대가 타격을 받았으며 작센족의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면서 그 이상의 진격을 멈췄다.
작센족의 반란이 정리된 후인 795년, 카롤루스가 직접 지휘하면서 전쟁은 다시 시작되었다. 카롤루스의 전기인 <카롤루스 대제의 생애>에서도 이 전쟁은 매우 치열했고 어떤 전쟁보다도 많은 전리품을 얻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796년 아바르족의 핵심 야영지가 프랑크 왕국군의 손에 떨어지고 그곳에 비축되어 있던 모든 재화가 프랑크 왕국에게 빼앗겼다. 카롤루스는 이후 귀환하여 자신이 획득한 전리품들을 주변의 여러 세력들에게 배분할 수 있었다. 프랑크 왕국은 다뉴브 강과 드라브 강 사이의 아바르 세력권 서쪽 부분으로 달마티아, 슬라보니아, 크로아티아 일대를 자국 영토로 흡수했다. 이때 판노니아 지역에 거주하던 크로아티아족의 보이노미르 또한 카롤루스에게 복종하고 같이 아바르족을 공격했고, 이 공로로 보이노미르는 판노니아 슬라브족들의 공작 칭호를 받게 되었다. 결국 796년에 아바르족들이 항복하자 그들을 개종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프랑크 왕국의 세력권 하에서 국경선 일대에 위치한 변방 왕국으로 존속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프랑크 왕국에 지배를 받는 것을 거부하는 아바르족들이 있었고, 특히 달마티아, 슬라보니아, 크로아티아 일대를 담당하던 프리올리 공작 에리히가 테르사토 공성 도중 기습공격을 받아 전사하는 등 저항이 거셌다. 린츠를 중심으로 한 오버외스터라이히 지역의 대부분은 여전히 바이에른에 속해이었으며, 오버외스터라이히의 일부와 함께 니더외스터라이히에 속하게될 지역들이 아바르 변경주로 재편되었다.아바르 변경백은 초대 바이에른 지사인 게롤드가 겸하고 있었다가 799년 끝까지 복속하지 않은 아바르족들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날아온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고, 아바르 변경주의 통치는 르드흐에 주둔 중이었던 게롤드의 부관들인 베르너 1세와 고테람이 각기 분담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아바르 변경주의 지방 행정이 재조직되었는데, "구 바이에른" 트라우가우는 "신 바이에른" 카란타니아, 카를의 아바리아, 그리고 잃어버린 프리울리 공국의 북동부 지역과 합병되었다. 아바르 변경주의 주도는 당초 로마의 옛 마을인 로르히 앤 데어 엔스였으나 바이에른 지사가 변경백을 겸하고 있었기에 사실상 바이에른의 레겐스부르크가 주도 역할을 했다. 카롤루스는 점령지를 여러개의 가우(Gau)로 나눴으나 라바강까지만 직활 통치지였으며 그 너머에는 프랑크 제국의 봉신이지만 내부 독립성을 갖춘 아바르족 및 슬라브족들이 자치권역이었으며, 이후 니더 판노니아 지역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802년 복속되어 있던 아바르족들이 세번째 반란을 일으키자 고테람이 이들의 반란을 진압하다가 전사하고 만다. 이에 다른 지역의 카롤루스를 비롯한 프랑크 귀족들이 반란 진압과 함께 아직 미정복된 아바르의 영토를 공격했다. 결국 803년 아바르족의 칸 조던은 항복을 결정, 프랑크 왕국의 수도 아헨을 방문하고 샤를마뉴의 신하임을 맹세했다. 조단은 그리스도교 세례를 받아 테오도르라는 세례명을 받아 되돌아갔다. 이후 아바르족을 판노니아 평원의 서부로 이주시키고 전부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기 시작했다.
이후 804년 한때 피지배족이었던 불가르족의 불가리아 제1제국의 공격으로 트란실바니아 지역까지 빼았겼으며, 프랑크군은 아바르인들을 학살하였고, 이후 805년에 칸이 죽자 아브라함이라는 새로운 칸이 등장했다. 하지만 이 때를 기점으로 아바르 내에서도 단독으로 세력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것을 직시하기 시작했고, 결국 직접 카롤루스의 궁정에 직접 와 기독교 세례를 받고 그의 봉신이 되는 길을 택했다. 이때를 기점으로 아바르 공국(Awarisches Fürstentum)이 성립되었다. 또한 이대 베르너 1세가 사망한 후 아바르 변경주는 현재 이탈리아 북동부에 위치했던 프리올리 공국에 속하게 되었다. 810년 보이노미르가 죽자 판노니아 슬라브족들의 통치자가 되었다.
이후 811년에도 추가 원정이 이어졌다. 이 전쟁 과정에서 프랑크족의 영향력 아래 있던 국경 지역은 판노니아 깊숙한 곳까지 확장되었다. 카를루스 대제의 아바르 원정은 아바르 칸들과 다른 아바르 고위 인사들의 복속으로 끝났다. 그들이 최종적으로 복속되기 전에도 카룰루스는 아바르 변경주를 를 세운다.
이후 카롤루스는 805년을 기점으로 아바르족을 기독교화하려했다. 파사우 교구는 엔스 와 라브강 사이의 지역에 대한 아바르족의 기독교 선교를 담당했으며 잘츠부르크 대주교는 발라톤 호수 주변과 라브, 다뉴브 및 드라우강 사이의 지역을 담당했지만 현대 고고학자들이 이시기에 살던 아바르족들의 유적지를 발굴하면서 기독교 선교와 관련된 유물들이 발견되지 않아 아바르족들의 대부분이 여전히 탱그리 신앙을 유지했음을 추정하고 있다.
814년 카롤루스가 죽고 루도비쿠스 1세가 프랑크 제국의 단독 황제가 되기까지 아바르 변경주는 남쪽으로 현재의 크로아티아의 내륙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시기에 들어서 아바르족의 세력은 약해진 상태로 프랑크족이 지배층으로 아바르족과 슬라브족들은 부족장을 그대로 두며, 프랑크 왕실이 주는 칭호를 쓰기는 했지만 프랑크족 관리들의 통제하에 있어야 했고, 상술한대로 아바르 변경주는 프리올리 공국의 통제하에 있었다.
그러다가 817년 카돌라가 프리올리 공작으로 임명되었다. 카돌라는 자신의 통제하에 있던 판노니아 지역의 슬라브 부족들을 가혹하게 다뤘고, 류데비트를 비롯한 판노니아계 귀족들이 항소를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819년 프랑크 왕국에 반기를 들었다.
이때 달마티아계 크로아티아를 이끌고 있던 보이노미르는 류데비트 포사프스키의 반란에 동참하기 보다는 판노니아의 공작직을 주겠다는 루도비쿠스의 약조에 따라 친프랑크파로서 류데비트의 장인 드라고무에와 함께 반란을 진압하려는 카돌라와 합휴해 819년 쿠파 전투에서 류데비트에게 맞섰으나 패배해 드라고무에는 전사하고 보이노미르는 자신의 근위병들과 함께 가까스로 도주했고, 카돌라 또한 간신히 프리올리로 돌아왔으나 전투에서 얻은 중상 내지는 중병으로 사망하였다. 류데비트는 여세를 몰아 달마티아를 침공했다. 하지만 프랑크측에서 카돌라의 후임으로 발데릭을 프리올리 공작으로 임명했고, 820년 보이노미르를 지원하면서 류데비트는 세르비아인들에게 망명할 수밖에 없게 되면서 류데비트의 반란을 진압했다.
아바르족에 대한 마지막 기록으로 822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제국회의에 아바르족 대표가 참여한 것을 끝으로 아바르족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은 끝이 나게 되었다. 829년 불가리아 제1제국의 칸 오무르타그가 아바르 칸국의 중앙과 동쪽 무역항의 영토를 공격하자 이탈리아 분국왕 로타리우스 1세와 프리올리 공작 발데릭이 이를 막으려고 했으나 실패, 해당 지역들은 물론이고 다뉴브 강과 티자 강 사이의 옛 카가나테 동부 불가리아가 점령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판노니아에 기근까지 발생하자 많은 아바르족들이 불가리아로 이주했고, 828년 루도비쿠스 1세는 발드릭에게 패전의 책임을 물어 해임과 함께 프리올리 공국을 해체하면서 네 개의 변경주로 개편했고, 아바르 변경주를 해체, 서쪽 지역은 오스트리아의 전신인 동부 변경주, 동쪽는 로마 시대의 판노니아에서 따온 판노니아 변경주로 개칭하였다. 확실하게 이쪽 아바르를 가르키는 아바르란 이름이 마지막으로 기록된건 889년이였다.
8세기 말에 프랑크 왕국에 의한 아바르인의 파멸은 슬라브인에게 깊은 인상을 새겨 주었다. 러시아 최초 연대기(年代記)의 한 기록에 따르면, "신이 그들을 파괴시켰다. 그들 모두는 사라지고 단 한 사람도 살아 남지 못하였다. 러시아에서는 오늘날까지 '아바르인처럼 사라졌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어떤 종족도 어떤 상속자들도 남아 있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5.3. 프랑크 제국의 판노니아 변경주
828년 새롭게 개편된 판노니아 변경주는 아바르족들이 대거 사라지면서 슬라브족의 비율이 높았다. 아바르 변경주가 여전히 존치되어 있던 당시 판노니아 지역은 프랑크의 직활지로 북쪽의 엔스 강과 비엔나 숲에서 남쪽의 드라바 강까지 뻗어 있는 현재의 헝가리 서부와 오스트리아 동부에 해당된 지역은 오버 판노니아로 그리고 현재의 슬라보니아와 보이보디나 서부인 드라바 강과 사바 강 사이의 슬라브족 거주 지역을 니더 판노니아로 나눠진 상태였다.오버 판노니아는 프랑크 제국의 직활지로서 이중으로 통제되던 아바르 변경주 시절과 달리 동부 변경주와 카란티아와 함께 바이에른에 종속된 상태로 역대 변경백들도 동부 변경백들로 사실상 동부 변경주에 종속되어 있던 거나 다름없었다.
825년 불가리아의 칸 오무르타그가 슬라브계 티모차니 부족이 프랑크 왕국에 합류하려는 것에 대해 프랑크 왕국에게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위협했지만, 프리울리 변경백 발데리크와 국경의 방어를 맡은 게롤트는 불가리아의 군사력을 위험을 과소평가했다. 827년 불가리아는 판노니아 변경주와 그 북쪽 영토 일부를 침략하여 정복했고, 829년에는 라티미르를 판노니아 남부 공작으로 임명했다.
이 패배로 인해 828년 프리울리의 발데리크는 패전의 책임으로 경건한 루도비쿠스에에 의해 해임되었고, 게롤트는 황제와의 친족 관계 덕분에 그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833년 초에 라트보드로 교체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니트라 공작 프리비나가 모라비아 공 모이미르 1세와의 경쟁에서 패배한 후 가족들과 일부 추종자들과 함께 동부 변경주의 라트보드에게로 도망쳐야 했다. 라트보드는 그를 루트비히 2세에게 보냈고. 루트비히는 프리비나에게 트라이스마우어에서 세례를 받았한 후 다시 라트보드에게로 보낸 후 그의 군대에서 복무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라트보드와 프리비나는 분쟁이 발생하게 되었고, 프리비나는 생명의 위협까지 받게 되자 결국 다시 망명길에 올라 아들 코제치와 함께 1차 불가리아 제국령인 로어 판노니아를 통치하고 있던 라티미르에게로 도망쳤다.
그러나 로어 판노니아는 동부 변경주에 이중으로 복속되어 있었기에 라티미르가 프리비나의 망명을 받아들이는 것은 라트보드에 대한 반란과 같기 때문에 838년 루트비히는 라티미르를 진압하기 위해 라드보트를 선봉으로하는 바이에른의 군대를 파견했지만 카르니올라 변경백아 라드보드와 프리비나 사이의 화해를 중재했고, 루이는 프리비나를 자라 강 주변의 땅을 영지로 하는 로어 판노니아 발레톤 공(Lower Pannonia Balaton Fürst)으로 임명함으로써 반란을 무마시키는데 성공한다.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프랑크 왕국이 셋 으 로 분할되면서 동부 변경주 또한 동프랑크 왕국에 편입되었다. 라트보드는 오랫동안 바이에른에게 위험을 가져온 모라비아 공작 모이미르의 후계자인 라스티슬라프와 접촉을 가졌다. 생 베르탄의 연대기에 따르면 853년 서 프랑크 왕 샤를 2세는 불가리아인에게 뇌물을 주고 슬라브인[49]과 동맹을 맺고 함께 동프랑크 왕국을 공격했다. 불가리아와 모라비아의 공격 과정에서 반란까지 일어나게 되자 루트비히는 라트보드를 추방했다.
이에 라트보드는 라스티슬라프와 동맹을 맺었다. 855년에 라스티슬라프가 반란을 일으켰고, 856년 카를로만이 라드보드를 대신하여 변경백이 되었는데, 동부 지역뿐만 아니라 카란타니아와 함께 명목상의 판노니아 변경백의 지위를 주었다. 그러나 아버지 독일인 루트비히는 그에게 군사권 이외의 권리는 일부만을 넘겨주어, 자신의 재가를 받게 하였다.
858년 라체슬라프는 카를로만에게 많은 양의 금과 보물을 뇌물로 바쳐왔고, 그는 이를 받았다. 860년 무렵 독일인 루트비히는 이복 동생 대머리 카를의 서프랑크 영토를 공격했다가 실패하고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였다. 한편 카를만은 여러 사령관들과 갈등을 벌인 끝에 그들을 해임하고 추종자들로 교체했다. 루트비히 2세는 자기 허락을 받지 않고 임의로 인사권을 행사한 아들을 질책했다.
이로 인해 부자간의 사이가 나빠졌고, 동프랑크 왕국의 동부 국경지대를 관리하던 카를로만은 모라비아의 라디슬라프 대공 및 일부 콘라디안 가문 귀족들과 협력하여, 아버지 독일인 루트비히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포로로 잡혔지만 다시 동부지역의 이민족 군사들이 그를 탈옥시켜 바로 도망 칠 수 있었다.
이후 3년간 부자간의 내전과 함께 자간의 화해와 휴전 시도가 있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카를로만은 판노니아 후작 리하르트(Richart), 케른텐 백작 파보, 케른텐 후작 군다카르(Gundacart) 등을 부관으로 삼아 864년 베를린을 침공했고, 결국 아버지 독일인 루트비히는 세 아들에게 나눠줄 영토를 바이에른, 작센, 알레만니아로 삼분하고, 아들들을 각자 현지의 유력인사의 딸들과 결혼시켰다. 그러나 카를로만의 본부인의 이름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862년 카를로만은 아버지의 승인 없이 독자적으로 바이에른 밖의 부족들을 정벌하여 영토를 확장하려 했으나, 게르만 전사들에게 패배하고 돌아왔다. 865년 그는 프랑크푸르트에서 바이에른의 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카를만과 삼형제를 지원한 많은 동프랑크의 귀족들은 처벌받았다.
866년 카를로만은 영토 분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케른텐 후작 군다카르 등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었다. 870년 라스티슬라프의 친척인 스바토플루크 1세가 라스티슬라프를 체포한 뒤 동프랑크 왕국에 넘길 때 직접 가서 라스티슬라프의 신변을 확보했다. 라스티슬라프는 프랑크푸르트로 끌려간 뒤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루트비히 2세는 평결을 실명형으로 완화했다. 그러나 스바토플루크 1세도 얼마 지나지 않아 루트비히 2세를 상대로 반기를 들었다. 871년 프랑크군이 모라비아로 출격했으나 스바토플루크의 매복에 걸려 몰살당했다. 또한 이시기에 동부 변경주를 오버 판노니아와 니더 판노니아로 분할해 오버 판노니아 변경백에 빌헬름과 엔켈샬크을 임명했거, 니더 판노니아 변경백직은 본인이 겸직하다가 876년 서자인 아르눌프에게 양도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빌헬름과 엔켈샬크는 모라비아 공국과의 전쟁에서 전사하면서 트라우가우 백작 아리보가 동부 변경주의 통치자로 임명되었다. 아리보는 모라비아의 스바토플루크 공작과 평화를 유지했으나 882년 전임자들인 아들들이 카란시아 공작이자 카를로만의 서자 아르눌프의 지원을 등에 업고 무력으로 동부 변경백의 자리를 뺏았기 위해 내전을 일으켰다. 이에 아리보는 동맹인 스바토플루크는 물론이고, 뚱보왕 카를 3세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다.
스바토플루크는 판노니아를 침공하면서 엔켈샬크 2세의 형제 중 한 명을 죽였고, 살아 남은 빌헬미너 가문의 귀족들은 아르눌프의 비호하에 무사할 수 있었다. 이후 내전은 884년을 이어지다가 카를 3세가 카움베르그까지 와 스바토플루크를 봉신으로 삼으면서 종결되었으나 이로 인해 숙질간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888년 카를 3세가 실정 등으로 인해 인망을 잃다가 아르눌프의 압력으로 퇴위했다.
하지만 아르눌프가 아리보를 해임시키기에 동부 변경주에 아리보의 영향력이 너무나도 강했고, 결국 893년 아르눌프는 판노니아 일부 지역을 때어내 엔겔샬크 2세를 그곳의 백작으로 임명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시기에 아르눌프는 자신이 갖고 있던 카란시아 공작위 및 판노니아 변경백위를 바이에른 귀족인 루이트폴드에게 내주었다.
하지만 907년 아르파드의 지도하에 마자르족들이 동쪽으로 부터 쳐들왔다. 아리보는 마자르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분투했으나 906년 모라비아 왕국을 멸망시킨 마자르족들은 여세를 몰아 동부 변경주를 공격했고, 결국 프레스부르크 전투(Battle of Pressburg)에서 패배와 함께 동부 변경의 대부분을 빼앗기고 말았고, 판노니아 변경백인 루이트폴드는 전사하면서 판노니아 전역이 마자르족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5.4. 바라톤 호수 공국
바라톤 공국의 영역846년 현재의 헝가리 바라톤 호수 서쪽의 자라주에 있는 자라바르을 수도로 프리비나가 봉해진 바라톤 공국은 법적으로 오버 판노니아에 속해 있으나 실질적으로 반독립된 영지였다. 분봉 직후 자라바르에 도착한 프리비나는 발라톤 호수 지역에 자신의 권력 중심지로 큰 요새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무스부르크(Moosburg)로 알려진 그의 매우 잘 요새화된 성은 불가리아인과 모라비아인 모두에 대한 보루 역할을 했으며 프리비나의 권위는 북쪽의 라바 강, 남동쪽의 페치 , 서쪽의 프투이까지 확장되었다.
프리비나는 지역 주민들을 기독교화하고 지역에 교회를 세웠고, 그의 요청에 따라 잘츠부르크 대주교는 니더 판노니아 전역에 있는 여러 교회를 봉헌했으며 프리비나는 또한 자라 강의 무릎에 있는 300채의 농가와 포도원을 니데랄타이히 수도원(Niederaltaich Abbey)에 기부했다.
프리비나는 모라비아의 모이미르 1세에 대한 독일인 루트비히의 원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를 들어, 846년에 왕은 바이에른 변경주에서 그에게 100채의 농가를 관대하게 선물했는데, 이는 아마도 다가오는 원정에서 프리비나의 군대에 공급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847년 루트비히는 모라비아 원정에 대한 댓가로 잘츠부르크 대주교에게서 받은 것을 제외한 발라톤 호수 근처의 프리비나의 모든 성직을 개인 재산으로 전환했다.
프리비나의 죽음에 대해서는 약간의 불명확한 편으로 그는 루트비히 2세의 상속에 대해 반기를 든 루트비히 아들인 카를로만을 지지한 모라비아인들과의 전투에서 살해되었을 수도 있고, 카를로만에 의해 포로가 되어 모라비아인들에게 넘겨졌을 수도 있다. 그의 아들 코셀이 861년 독일 루트비히에 의해 니더 판노니아의 통치자로 임명되었다.
코셀은 아버지 Pribina의 기독교화 정책을 계속했습니다. 잘츠부르크 대주교 아달 윈은 865년 발라톤 호수 공국에 여러 개의 새로운 교회를 개척했다.
이곳은 867년 여름 로마로 여행하는 동안 살로니카의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 형제를 초대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두 명의 슬라브 선교사는 코셀의 수도인 무스부르크에서 최대 50명의 신학생을 교육했으며 코셀에 지속적인 인상을 남겼다.
869/870년 겨울, 코셀은 교황으로부터 메토디우스를 판노니아와 대모라비아의 대주교로 임명하고 옜 시르미움에 자리를 잡았다. 메토디우스가 대주교로 임명된 후, 코셀의 발라톤 호수 공국은 모라비아와 함께 새로운 대주교의 일부가 되었다.
876년 카를로만 왕의 추종자로서 그는 달마티아 크로아티아인을 상대로 실패한 동프랑코니아 바이에른 원정에 참여했고 그 과정에서 전사하였고, 후계자가 없는 관계로 발라톤 호수 공국은 모라비아 공작 스바토플루크 1세가 바라톤 공국을 차지하면서 위협적 존재로 부상했다. 카를로만의 서자인 카린티아의 아르눌프는 바라톤 공국의 법적 소유권만 인정받았다.
한편 독일왕 루트비히 2세가 죽고 876년 비만왕 카를 3세가 동프랑크 왕국의 왕이 된 이후 빌헬미너 전쟁이 발발했다. 빌헬름 1세(Wilhelm I)는 대 모라비아 사이 접경지대인 판노니아(Pannonia)를 개척한 뒤 변경백 작위를 하사받았고 그의 후손들은 '빌헬미너(Wilhelminer)'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후 판노니아 변경백령은 아들 빌헬름 2세(Wilhelm II)와 엔겔샤크 1세(Engelschalk I)에게 상속되었고, 둘은 죽을 때까지 판노니아 변경백으로서 대 모라비아 전선의 수비벽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이 죽은 뒤 동프랑크 왕국에서 아리보(Aribo of Austria)라는 새로운 변경백을 임명하자 엔겔샤크 1세의 아들인 엔겔샤크 2세(Engelschalk II)가 반발하여 882년 반란을 일으켰으니 이것이 빌헬미너 전쟁이다.
아리보는 지역의 지지를 받았던 데다가 카린티아 공작 아르눌프[50]까지 끌어들인 엔겔샤크 2세에게 크게 밀렸고, 결국 카를 3세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결정적으로 스바토플루크 1세에게도 도움을 요청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스바토플루크 1세는 곧바로 군사를 일으켜 판노니아 일대로 진격하여, 판노니아 변경백 시절 자신과 마찰을 벌였던 엔겔샤크 2세의 둘째 아들(이름은 불명)을 잡아 불구로 만들어 버리는 성과를 얻었다. 게다가 판노니아 및 빈 일대에 마자르인들 또한 함께 쳐들어갔기에[51] 판노니아 동부 일대가 궤멸적으로 파괴되었다.
결국 카를 3세는 스바토플루크 1세에게 점유지 일부를 넘겨주고, 그를 봉신으로 받아들이면서 화친을 꾀했다. 이 결과로 동프랑크 일대는 카롤루스 왕조를 불신하게 되었고, 대 모라비아가 전성기에 있음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스바토플루크 1세는 스스로를 왕으로 칭하며 대 모라비아 왕국을 선포하기도 했다. 이후 아르눌프 또한 아리보와 평화협정을 맺고 대 모라비아와 전쟁을 벌이지만, 아르눌프가 대 모라비아를 공격하던 중에 스바토플루크 1세가 불운의 사고로 894년에 세상을 떠나면서 이 전쟁도 끝이 났다.
그러나 896년 마자르족이 동로마 제국과 함께 불가리아 제국을 공격하다가 불가리아군의 반격에 의해 그들은 다시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 중앙 판노니아에 정착했다. 그 후, 아르눌프는 브라슬라프에게 하판노니아의 바라톤 호수 공국의 통치권을 준다. 이후 브라슬라프는 달마티아 해안지역을 공격하는 등 활발한 군사 활동을 했으나 판노니아쪽 패권을 두고 마자르족과의 분쟁으로 전사한 것으로 추정되며, 시사크 일대를 제외한 나머지 영토들은 그대로 마자르족들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5.5. 마자르⇒헝가리 대공국
마자르족은 7세기 서볼가 강과 카마 강 사이에 위치한 바시키리아 지역에 그들이 거주하면서 불가르 칸국에 속해 있었다. 이들은 알란족으로 부터 농경 문화를 수용하였고, 하절기에는 천막, 동절기에는 통나무집에 거주하는 반농반목 생활을 영위했고, 대 불가리아의 영향으로 장과 무사 계층을 바탕으로 한 부족 국가를 이루었다. 그러다가 7세기 하자르에 의해 불가르 칸국이 멸망한 후 하자르의 지배를 받았고, 이때 그들로부터 이중 군주제를 받아들였다. 제정분리 형태인 이중 군주제는 제사장인 켄데와 군사 지도자인 줄러로 권력이 양분되었으며, 사법 혹은 행정을 맡은 허르커가 그들을 보좌하는 형태였고, 이둘은 일곱 부족들로 구성된 마자르족들을 통치했다.그러다가 750년경, 대헝가리의 마자르인들 중 대부분은 레베디어라고 불린 돈 강 중류 일대로 이주하였다. 다만 일부는 대헝가리에 남았다.레베디어에서 마자르 부족은 볼가 불가르, 알란 등 다른 부족 출신의 이주민들을 수용하였다. 한편, 9세기 초엽 다른 튀르크계 민족인 페체네그족이 도래하며 하자르 칸국과 수십년간 이어질 전쟁을 벌이자 마자르인들은 레베디의 통솔 하에 재차 서쪽으로 향하였다. 드니프로 강과 드네스테르 강 사이의 땅(에텔쾨즈, 현 우크라이나 서남부)에 정착한 그들은 튀르크계인 카바르족을 8번째 부족으로 수용한다. 카바르족은 후에 세케이족이라 불렸다.
이후 830년 하자르의 지배에서 벗어났는데 당시 켄데(제사장)는 레베드, 줄러(군사령관)는 알모시였다. 알모시는 군사령관으로 하자르로부터 독립하기로 결정 즉각 같이 이동할 부족민들을 데리고 하자르의 지배하에 있던 정착지를 버리고 서진을 시작했다. 839년에 마자르 군대가 다뉴브 강 하류에 출몰한 것은 한 세기에 걸쳐 중부 유럽을 뒤흔들 민족 대이동의 서막이었다. 다만 1차 불가리아 제국의 중심부였던 다뉴브 강 하류에서 밀려난 마자르 인들은 몰다비아를 넘어 서쪽의 카르파티아 산맥 내의 분지에 주목하였다. 그곳은 아바르 칸국의 해체 이후 불가리아와 모라비아의 접경으로 주인이 없었다. 따라서 862년부터 이 지역으로 마자르인들이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다만 이동은 소규모였고 조직적이지 못했다. 대규모 이주가 벌어진 것은 894년, 오랜 대립 끝에 결국 하자르 칸국에게 패배한 페체네그족이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에텔쾨즈의 마자르인을 공격하면서부터였다. 이때 마자르족은 동프랑크 왕국과 접촉하게 되었다.
892년 켄데인 쿠르산의 주도하에 마자르족은 동프랑크 왕국의 아르눌프와 연맹을 맺고 모라비아의 왕 스바토플루크 1세에 대항했다. 그러나 스바토플루크는 겉으로 나마 아르눌프의 봉신이자 동맹자이기도 했지만 실질적으로 적대적 관계였다. 아르눌프는 모라비아인들을 경계했고, 모라비안인 지도자 중에서 스바토플루크를 내심 경계했고, 결국 스바토플루크가 판노니아를 공격하자 아르눌프는 마자르족과 동맹을 맺고 이들을 판노니아로 발을 들이게끔 했다.
893년 모라바의 왕 스바토플루크를 직접 만나 교섭하였다. 그해 로마의 교황이 된 포르모소가 사람을 보내 아르눌프에게 황제직을 제의하자, 아르눌프는 황제관과 이탈리아 문제로 관심사가 분산되면서 더이상 헝가리, 모라비아 등의 문제에 깊이 개입할 수 없게 되었다.
894년 헝가리인들은 다시 판노니아와 모라비아로 쳐들어갔다. 이후 쿠르산의 주도하에 마자르족들은 동로마 제국의 레온 6세와 동맹을 맺고 불가리아 제국 북부를 침략했으나 895년 시메온 1세가 지휘하던 불가리아 군대에 패하고, 스텝 지역에서는 불가리아와 동맹을 맺은 페체네그족의 압박을 받게 되자, 헝가리인들은 아르파드의 지휘 아래 판노니아 지역에 정착했다.[출처]
895년 줄러인 알모시는 마자르인들을 이끌고 판노니아 평원 정복에 나서던 도중에 트란실바니아에서 전사하면서 큰 위기에 봉착한 것처럼 보였다. 페체네그족에게 위협을 받은 마자르인들은 새로운 줄러로 알모시의 아들 아르파드를 선출하고는 본격적으로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 판노니아에 집단으로 이주해 정착했는데 이과정은 895~896년에 걸쳐 진행되었다.
899년 마자르 족 군사 5천명이 여러 분대로 나뉘어 최초로 이탈리아를 침략해 곳곳을 점령, 약탈했다. 이들은 포강변을 노략하였으며 이후 베네치아에서 집결하려 공략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베렝가리오 1세는 1만 5천 명의 이탈리아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 북부 브렌타 강변에서 마자르 군을 포위하는데 성공한다. 마자르 족은 이들에게 군대를 물러달라고 간청했고, 베렌가리오는 이들을 거의 무찔렀다고 보고 만만하게 봤다. 이탈리아 병사들이 갑옷을 벗고 편히 쉬던 중, 숲에 숨어있던 나머지 마자르족 군사들이 이탈리아 군을 급습하였다. 급습당한 이탈리아 군사들 중에는식사 중 입에 음식을 먹고 죽었다고 한다. 이탈리아 군은 크게 궤멸되었고 마자르족은 되돌아갔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마자르 족이 이탈리아를 침공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이 마자르족은 베렝가르나 아르눌프가 고의로 불러들인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베렌가르의 군대는 이들 마자르 족 군대에게 휴전을 요청하였지만 거절당한다. 베렌가르는 아르눌프에게 도움을 청했다. 899년 아르눌프는 케른텐과 헝가리, 바이에른 등을 침략하는 마자르 족의 침략을 격퇴하기 위해 이탈리아 문제에 신경쓸 수가 없었고, 아르눌프 사후 그는 다시 영주들에 의해 왕으로 선출된다. 그러나 마자르 족의 군대가 알프스 산맥을 넘어 포 계곡으로 침략해왔다. 베렌가르는 군사를 이끌고 마자르 족과 교전하지만 크게 패하고, 남부 브렌에서 많은 몸값을 주고 포로가 된 병사들을 석방시켜야 했다. 899년 9월 24일 베렝가리오는 이탈리아 북부를 쳐들어온 헝가리 마자르 족과 싸웠으나 브렌타 강가에서 패배했다. 마자르 족은 베렝가리오에게 거액의 돈을 요구했고, 그대로 들어주어 되돌려보냈다.
902년 베렝가리오 1세는 자신의 왕좌를 빼앗은 프로방스 왕 루이를 몰아내기 위해 마자르족들을 용병으로 고용해 자신의 군사 수를 키운 뒤 로마로 진격하여 루트비히를 격파했다. 루트비히는 베렝가르에 의해 다시는 이탈리아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받은 뒤 이탈리아에서 쫓겨났다.
904년 마자르 족이 이끄는 군대가 베르가모 성벽을 넘어 베르가모를 점령했다. 베렌가르는 군사를 이끌고 베르가모의 주교와 시민들을 신속하게 구출해내는데 성공한다. 남부 해안가로 들어오는 해적들은 베렌가리오의 치세기간 내내 그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 고민이자 골칫거리였다.
이러한 마자르족들의 성장에 동프랑크 왕국은 경계하기 시작했고, 결국 904년 여름, 동프랑크인의 왕 루트비히 4세가 피샤강에서 교섭을 하자고 쿠르산을 초청했다. 쿠르산과 그 수행단은 교섭장에서 프랑크인들에게 모두 살해당했다. 쿠르산을 마지막으로 켄데 직위가 없어지고 줄러, 즉 군사령관 직이 사실상 단독 군주로 행세하게 되면서 줄러였던 아르파드가 자신의 칭호 대공으로 하면서 마자르의 모든 권력을 독점하는 중앙집권화로 나아가게 되면서 사실상 헝가리 대공국을 건국하게 된다.
카르피티아 분지에 정착한 10만 가구의 마자르인들은 카르파티아 산맥을 동쪽 유목민들에 대한 방어선으로 삼고, 본격적으로 중부 유럽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905년 아르파드 시기의 는 이탈리아 북부를 다시 침략했다. 907년 아르파드의 지도하에 마자르족들이 다뉴브 강 동쪽에 있던 동프랑크 왕국의 동부 변경주를 쳐들어왔다. 아리보는 마자르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분투했으나 906년 모라비아 왕국을 멸망시킨 마자르족들은 여세를 몰아 다시 동부 변경주를 공격했고, 결국 프레스부르크 전투(Battle of Pressburg)에서 패배와 함께 동부 변경의 대부분을 빼앗기고 말았고, 이때 루트비히 4세의 섭정이었던 바이에른과 니더 판노니아 변경백인 루이트폴드는 전사했다. 그리고 아르파드 또한 얼마 안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줄탄이 헝가리 대공직을 계승한다.
줄탄에 대한 기록은 후대인 12세기 헝가리 국왕 벨러 3세의 공증인이자 연대기 작가인 아노니무스 노타리우스의 헝가리인의 사적에만 의지해야 하는 실정인데다가 무엇보다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903년 즈음에 태어났다고 하는데, 950년까지 무려 43년간 재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 사학자들은 이 기록의 신빙성을 부정한다. 현대 헝가리 학자들은 졸터가 880년대에 태어나 907년을 전후해 결혼한 것으로 보며[53], 아르파드의 다른 세 아들(즉 졸터의 형들)이 아르파드 사후 왕위를 계승했다가 형제상속의 원칙[54]에 따라 형들이 모두 사망한 후 졸터가 왕위를 계승했다고 본다. 그러나 실제로 907년부터 졸터가 사망한 950년까지 얼마나 많은 수의 군주들이 헝가리를 지배했는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며, 심지어 졸터가 950년에 사망했는지조차 논란의 대상이고 아닐 가능성이 높다. 한술 더떠 중세시대를 연구하는 중세학자들은 졸터가 당대 마자르족과 맞선 외국인들이 마자르족을 표현하기 위해 만든 가공인물이라고까지 주장하는데, 독일계 국가 뿐 아니라 비잔티움 제국의 기록에도 졸터가 나온 것을 근거로 이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지지는 않으나 하여간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다.
이런 일이 발생한 이유는, 졸터가 실존인물이라는 가정 하에졸탄의 바로 후대 대공인 퍼이스를 제외한 후대 헝가리 대공 및 국왕들이 모두 졸터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사실 퍼이스도 게스타 훙가로룸에는 나와있지 않고 비잔티움 제국의 기록과 기타 연대기들에만 나와있는데, 후대에 왕권을 확립한 졸터계 군주들이 이 시기 형제상속으로 난잡해진 시대의 역사를 지우고 졸터계 왕조가 계속해서 지배했던 것처럼 꾸미기 위해 역사를 조작한 것이다. 예를 들어 비 졸터계 군주들 중 거의 유일하게 이름이 살아남은 퍼이스는 아르파드의 3남 Jutocsa의 아들이며, 턱쇼니부터는 졸터의 후예로 비 졸터계의 가계가 끊겨 졸터계가 왕위를 독점한 것으로 보이나 그 이전에는 얼마나 많은 군주들이 헝가리를 얼만큼 다스렸을지 다른 기록이 발견되지 않는 한 미궁이다.
어째든 주변 국가들의 연대기 등으로 통해 그의 통치기의 마자르 대공국에 대해 알 수 있다. 시기의 마자르족의 정치 구조는 위로는 대공을 중심으로 허르커가 군사 지도자로 서부 트란스다뉴비아에서 그 역할을 수행했고, 줄러가 동부 에르테이에서 비슷한 역할을 수행했고, 이들 아래로 다시 족장(bo)들이 휘하에 군대(jobbagy)를 편성했고 그러한 족장 5~6명이 하나의 부대를 모았다.
마자르족들이 정착한 판노니아 평원 일대는 9세기초부터 카롤루스 대제부터 시작한 프랑크 왕국이 아바르족을 굴복시킨 후 일구어온 기독교화가 정체되었다. 많은 교구들이 붕괴되었고, 그자리에 마자르족의 종교가 대신했다. 이후 줄탄 시기의 마자르족들은 동프랑크 왕국 전역을 유린했고, 이탈리아 북부 또한 904년에 침략했다. 서프랑크 왕국 또한 910년경 마자르족의 침략을 당해 도버 해협 연안 지대를 제외한 거진 전 지역이 유린되었고, 924년 피레네 산맥 앞까지 노략질을 했다.
결국 마자르족에 의해 많은 피해를 입은데다가 907년 바이에른의 프레센부르크에서 교전했지만 참패하면서 왕권이 약화된 독일왕 콘라트 1세는 헝가리 대공국에 공물을 받쳐야 했다. 이후 911년 마자르족들은 라인강을 넘어 부르고뉴까지 침략했고, 912년부터 917년까지는 마자르 족은 동프랑크 왕국을 수시로 침략하였고, 특히 913년 마자르 족은 다시 라인강을 도하해 부르고뉴를 약탈한 후 돌아오는 길에서 슈바벤에서 현지 백작 에르찬가르가 오달리히(Odalrich)가 마자르족들을 공격했으나 반대로 격파했고, 913년에 바이에른의 아르눌프는 군대 대다수를 잃고 말았고, 결국 914년 아르눌프는 콘라트 1세에게 반기를 들다가 바이에른 공작위를 박탈당하고 마자르족에게 망명한다.
915년 마자르족들은 튀링겐과 작센을 공격했고, 다음해인 916년 아르눌프는 마자르족과 함께 레겐스부르크를 점령하고 다시 바이에른의 공작이 되었다. 그런 다음 헝가리인들은 라인강을 건너 모젤 계곡의 알자스와 로렌을 침략했고, 917년까지 원정의 일환으로 마자르족들은 1월 21일 바젤 전체를 방화했다. 이후 오랜만에 다시 발칸 반도에 대해 개입해 불가리아 차르 시메온 1세의 동맹자로서 그들은 동로마와의 전쟁에 참여했다.
그러다가 919년 콘라트 1세가 퇴위하고 작센 공작인 하인리히 독일왕 하인리히 1세로 즉위했다. 그는 콘라트 1세가 마자르족에게 정기적으로 납부하던 공물을 폐지했다. 하인리히 1세의 즉위식 직후에도 마자르 족이 동프랑크 왕국을 침공했다. 그런데 이때 슈바벤 공작 부르크하르트 2세는 하인리히를 도와주는 것을 거절했다. 부르크하르트는 내심 하인리히를 왕이 아닌 단지 공작 정도로 취급하였다. 하인리히는 부르크하르트 2세가 죽은 뒤 그의 아들 대신 헤르만을 슈바벤의 공작으로 임명하였다.
921년 마자르 족이 왕국의 동부와 이탈리아를 약탈하였다. 마자르 족의 상당한 병력에 대부분의 도시, 제후들은 패배했지만 일부 지역인 바이에른의 카란티아 후작령에서 에버하르트와 메란 백작(Count of Meran) 등은 마자르 족을 격파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엘사스(Elsass, 현재의 알사스)의 백작 리우트프리트는 마자르 족과의 전투에서 크게 패배했고, 마자르 족은 계속 동프랑크 왕국을 침공하였다. 한편 이시기 마저르족들은 이탈리아 남부까지 내려가 922년 동로마 제국령 바리 테마까지 약탈했다.
924년 동남부에 있던 마자르 족이 독일 영토를 침략하자 하인리히는 일단 그들에게 공물을 바치겠다 약속하여 되돌려보냈다. 동시에 이전에 포로로 생포했던 마자르 장군들을 넘겨주었다. 동시에 하인리히는 국내에 성곽을 쌓아 도시들을 요새화시키고, 기병대 양성 및 기병대에 대한 훈련을 강화하였고, 마자르족들은 다시 말머리를 돌려 이탈리아 북부로 향했고, 3월 15일 토요일, 마자르족은 파비아 시에 불을 질렸고, 파비아(Pavia)와 베르첼리(Vercelli)의 주교들도 화재로 사망했고, 마자르족들은 서프랑크 왕국으로 말머리를 돌려 툴루즈 백작의 영토인 고티아(Gothia)와 님(Nîmes) 주변 지역을 약탈했으나 전염병으로 큰 타격을 입고 물려난다. 한편 다른 부류의 마자르족들이 작센을 공격하다가 격퇴되었고, 익명의 부족장이 생포되었다.
926년 마자르족들은 다시 바이에른과 슈바벤에 거치는 원정을 단행했고, 5월 1일 장크트갈렌이 함락되었다. 그 후 마자르족들은 콘스탄츠의 외벽 에 불을 질렀으나 내부 성벽에는 불을 지르지 못했다. 그들은 더 서쪽으로 진군하여 피비린내 나는 전투에서 검은 숲에서 그들을 공격한 리우트프레드를 격파했다. 그 후 마자르족들은 알자스와 로렌을 황폐화한 뒤 쥐라 산맥, 브장송과 부르고뉴 지역을 건너 루아르 계곡을 거쳐 서프랑크의 서쪽 끝자락까지 진출했다. 바이에른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르눌프 왕자와 6년 동안 평화 조약을 채결한다.
하지만 하인리히는 군사를 이끌고 마자르 족을 공격, 마자르 족의 근거지인 헝가리를 들어가 926년 10월 마자르 족의 왕자를 사로잡고 마자르족에게 10년 간의 휴전을 얻어냈다. 동시에 마자르 족에게 공물을 바치겠다고 약속하였다. 동시에 하인리히는 요새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기병대 양성과 훈련을 강화한다. 11월 보름스에서 회의를 소집하고 마자르 족의 침략에 대한 전국적인 전쟁 대비를 하도록 제후들로부터 약속을 받아냈다. 하인리히는 데인 족의 침략을 대비하여, 과거 켈트 족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앵글로 색슨족이 도시를 요새화한 것을 참고하고 마자르 족과 슬라브 족의 침략을 대비하여 도시를 요새화하였다.
926년 교황 요한 10세의 동생으로 스폴레토 공작인 피에트로가 로마의 토스카나 공작 귀도와 마로치아를 제압하기 위해 마자르족들을 불려들였다. 당연히 마자르족들은 로마로 오는 동안 경로상에 있는 지역들인 토스카나와 폴리아 등의 지역들을 약탈했다. 932년에 가서 하인리히는 마자르 족에게 공물을 보내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자 마자르 족은 다시 동프랑크 왕국을 쳐들어오게 된다. 이후 마저르족은 927년 다시 이탈리아 남부 초입까지 침략했다.
932년부터 마자르 족이 지도자 허르커 불추의 지도 하에 다시 영토를 침략하였다. 933년에 와서 하인리히는 9년의 협정 종료를 이유로 마자르 족에게 더이상 공물을 보내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마자르 족은 다시 동프랑크로 쳐들어왔고, 하인리히는 직접 기병대를 이끌고 독일 왕국을 침략한 마자르 족을 상대하여 운스타트 강변을 따라 튀링겐 북부 지역 일대에서 마자르 족을 맞서 싸웠다.
933년 3월 15일에 메르제부르크 전투에서 마자르 족을 격파하고 승리를 거두었다. 비록 양측 모두 피해가 경미했으나 마자르족의 패배가 확실했던 것 만큼 메르제부르크에서 승리를 거둔 하인리히는 933년 헝가리까지 내려가 헝가리 북부에서 마자르 족을 크게 부수고 승리를 거두었다. 이로 인해 마자르족들은 하인리히 1세가 죽기 전까지 한동안 독일 왕국을 침공하지 않게 되었다. 한편 헝가리인의 사적에서 줄탄이 이 전투에서 패한 것을 계기인지 몰라도 조카인 퍼이스에게 양위하고 3년 뒤 죽었다고 한다.
934년 마자르족들은 군대를 둘로 나눠 하나는 서쪽으로 메츠(Metz)까지 진격했고 , 다른 군대는 발칸 반도에서 불가리아와 동로마 군대와 싸웠다. 935년 마자르족들은부르고뉴와 아키텐에서 부르주 지역까지의 원정을 단행했거, 에스트레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유물을 가지고 로슈 성으로 도망갔다. 이후 마자르족들은 부르군트왕 루돌프 왕의 군대를 피해 이탈리아로 도주했고, 이후 브레시아를 점령하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한다.
937년 들은 2월에 라인강을 건너 로렌(Lorraine)을 황폐화시켰습니다. 그들은 랭스 주변의 여러 수도원을 약탈하고 부르고뉴와 아키텐을 해안까지 황폐화되었다. 프랑스에서 그들은 전리품을 가지고 이탈리아로 행진하여 멀리 남쪽 으로 캄파니아까지 도달했다. 7월 14일, 마자르족의 오랜 동맹이었던 바이에른의 아르눌프 공작이 사망했고, 그의 아들인 에버하르트가 바이에른 공작이 되었다. 이후 얼마 안가 에버하르트는 오토 1세의 이복형인 탕그마르와 프랑켄 공작 비어만과 함께 오토 1세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마자르족들은 938년 독일 내전을 틈타 작센을 침공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새 헨리(Henry the Bird)에 의해 잘 요새화된 이 지역에 막히며 실패하게 되었다. 940년 마자르족들은 이탈리아 국왕 우고와 동맹을 맺고 알베릭 자작이 통치하는 로마 주변 지역을 공격했으나 큰 손실을 입었다. 이후 942년 마자르족들은 다시 이탈리아를 향해 군사 작전이 시작되었으나 이탈리아 왕 비엔의 우고(Hugh of Vienne)가 마자르족들에게 공물을 받쳐 평화를 사들였고 그들은 이베리아 반도를 향해 행진했다. 그들은 카탈루냐의 레이다(Lérida)를 점령하는데 실패했고, 이후 아라곤에 위치한 우에스카(Huesca)와 (Barbastro) 등의 도시에 도달했으며 원정 기간 동안 에브로 강을 건너지 않았기 때문에 최종 목적지인 코르도바에 도달하지 못했다.
943년 마자르족들은 다시 두 방향에서 원정을 시작했다. 남쪽에서 공격하면서 불가리아 제국과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파괴한 후 테오파네스 패트리키오스(Theophanesz patrikios)와 5년간의 평화를 맺었다. 한편 서쪽으로 공격해오던 마자르족군은 벨스(Wels)에서 바이에른 공작 베르톨트(Berthold)에 의해 저지되고 패배했다. 벨스에서의 패배로 4년의 공백 후, 947년 마자르족들은 이탈리아를 향한 원정을 단행했다. 군대를 지휘한 자는 아르파드의 손자 탁소니 (Taksony)로 마자르족들은 오트란토까지 반도를 황폐화시켰고, 로타리오 2세로부터 공물을 받는 대가로 평화 조약을 채결했다. 이후 판노니아로 돌아가던 도중 바이에른 공작 베른톨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바이에른을 공격했지만 948년 초 새로이 바이에른 공작으로 임명된 오토 1세의 동새인 하인리히에 의해 패배하고 만다.
마자르족의 이러한 군사적 행보는 서유럽 국가들을 약탈해 각종 물자들을 확보할 목적도 있으며, 유럽 지역에 자리하고 있는 기독교 국가들에게 공포감을 심어 심리적으로 자신들을 침략하지 못하게 하려는 전술적 목적도 갖고 있었다. 다만 마자르족 내에서도 점차 기독교 신앙이 전파되기 시작했다. 948년에 동로마에서 주교가 파견되고 제3의 통치자(허르커)였던 불추(Bulcsú, ?-955)가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하여 세례를 받기도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950년경부터 유럽의 정세는 헝가리 대공국에게 불리하게 흘려갔다. 이미 930년경부터 작센 왕조가 지배하던 독일 왕국에서 패배를 겪은 이후 마자르족들은 가급적 독일 왕국을 피해 왔고, 그것이 점차 독으로 작용했다. 950년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1세가 헝가리 대공국을 침공해 많은 전리품들을 노획하고 바이에른으로 돌아갔다.이후 951년 마자르족들은 서프랑크의 아키텐으로 원정을 떠났으나 회군길에 오토 1세의 군대를 만나 패배했다.
이후 953년 오토 1세의 아들인 슈바벤 공작 리우돌프와 사위인 로렌 공작 콘라트가 오토 1세에게 반란을 일으켰고, 954년 반란을 일으킨 공작들은 마자르족들에게 군사 원조를 요구했다. 마자르족들은 오토 1세의 군과는 충돌하지 않았지만, 3월 1일 라인 강을 건너 오토 1세의 지지 세력인 쾰른 대주교 브루노 1세, 에노 백작 레지날 3세를 공격했다. 이 기간 동안 그들은 먼저 오늘 벨기에의 지역들을 습격했다.
4월 6일, 캄브레이 교외에 방화가 행해졌지만, 성벽의 공략은 성공하지 않았다. 수비대는 볼추의 동생[55]을 잡아 참수했다. 헝가리인은 그의 목을 되찾으려고 시도했지만 수비대는 거부했고 헝가리인은 생포한 포로를 모두 살해했다. 그 후 그들은 랑, 랜스, 샤론, 메츠 주변의 촌락들을 습격하고, 부르고뉴 지방도 약탈하고, 그 후 이탈리아를 경유해 귀국했다.
955년 두 공작의 반란을 진압한 오토 1세에게 헝가리 대공 퍼이스는 7월에 사절을 파견했고, 사절은 평화롭게 왔다고 주장하지만 오토 1세는 실제로 반란의 결과를 평가하고 있다고 의심하고 며칠 후 작은 선물을 주고 보냈다. 곧, 오토 1세의 동생인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1세의 특사들이 도착하여 마그데부르크에 있는 오토 1세에게 헝가리 침공을 알렸다. 급사들은 헝가리인들이 오토 1세와의 전투를 모색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헝가리인들은 반란이 진행되는 동안 이미 한 번 침략한 적이 있다. 이것은 그가 프랑코니아에서 반란을 진압한 직후에 일어났다. 엘베강 하류에 있는 폴라비아 슬라브인들 사이의 불안 때문에 오토 1세는 그의 색슨족 대부분을 작센에 두고 가야 했다.
작센과 아우크스부르크는 거리가 멀리 떨어졌기에 오토 1세의 군대는 아우크스부르크 인근에 늦게 도착했다. 오토 1세는 자신의 군대에게 노이부르크와 잉골슈타트 부근의 다뉴브강에 집중하도록 명령했다. 그는 헝가리 통신선을 따라 행군하여 아우크스부르크 북동쪽을 습격하는 동안 그들을 뒤에서 붙잡기 위해 그렇게 했다. 그것은 또한 집결하고 있던 모든 파견대가 집중하는 중심 지점이기도 했다. 따라서 전략적으로 이곳은 오토 1세가 헝가리군에게 최후의 강하를 하기 전에 병력을 집중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마자르족들은 레히강을 가로질러 일러강까지 진격하여 그 사이의 땅을 황폐화시킨 다음 일레르에서 철수하고 국경 도시인 슈바벤의 아우크스부르크를 포위했다. 아우크스부르크는 954년 오토 1세에 대한 반란 동안 큰 피해를 입었다. 아우크스부르크는 주교 울리히가 방어했다. 그는 자신의 분견대에 헝가리군과 야전에서 싸우지 말고 요새의 남쪽 정문을 강화하라고 명령했다. 시편 23편의 구절인 '내가 죽음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을 암송하며 병사들의 사기를 유지시켰다. 수성전이 진행되는 동안, 오토 1세는 남쪽으로 진군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키고 있었다. 8월 8일 마자르족이 대규모 공격을 시도한 동쪽 성문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울리히는 근접 전투에서 적과 교전하기 위해 전문 민병대를 야전으로 이끌었다. 울리히는 군마에 올라탄 상태에서 비무장 상태로 스톨라만 착용했다. 군인들은 헝가리 사령관을 죽이고 헝가리인들은 진영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8월 9일 헝가리군은 공성전차와 보병으로 공격을 받았고, 이들은 헝가리 지도자들의 채찍에 쫓겨 앞으로 나아갔다. 전투 중 리지네스부르크의 베르히톨트가 독일군의 접근을 알리기 위해 도착했다. 하루가 끝날 무렵, 포위는 중단되었고 헝가리 지도자들은 전쟁 회의를 개최했다. 헝가리인들은 오토 1세의 군대를 파괴하기로 결정했고, 결과적으로 독일 전체가 그들에게 넘어갈 것이라고 믿었다. 헝가리인들이 떠나자 딜링겐의 디트팔트 백작은 밤 동안 병사들을 오토 1세의 진영으로 이끌었다.
8월 9일, 독일 정찰병들은 마자르족이 근처에 있다고 보고했다. 오토는 다음날 전투를 위해 그의 군대를 배치했다. 독일군의 행군 순서는 다음과 같았다: 3개의 바이에른 분견대, 콘라트 공작 휘하의 프랑크 분견대, 왕실 부대(중앙), 슈바벤의 2개 분견대, 그리고 독일의 보급열차를 지키는 보헤미아 분견대. 뒤쪽. 델브뤼크에 따르면, 바이에른인들은 바이에른 영토를 행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지역을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종대의 선두에 섰다. 모두 장착되었다. 독일군은 마자르족의 화살 폭풍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했지만, 마자르족을 움직임을 정찰하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든 삼림지대를 통해 행군했다.
연대기 작가 인 코르비의 위두킨트(Widukind of Corvey) 에 따르면 , 오토 1세는 "아우크스부르크 시 영토에 진을 치고 그곳에서 근처에서 중병을 앓고 있던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1세의 군대와 합류했고, 콘라트 공작은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있었다. 프랑켄 기병대의 뒤를 쫓는 콘라드의 예상치 못한 도착은 병사들을 너무나 격려해 주어 즉시 적을 공격하고 싶어하게 만들었습니다." 추방된 로트링겐 공작이자 오토 1세의 사위인 콘라트의 도착은 특히 고무적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최근 마자르족과 운명을 같이 했으나 이제는 오토 1세 밑에서 싸우기 위해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슈바벤 군단은 오토 1세의 조카 헤드비그와 결혼 한 슈바벤 공작 부르카드 3세가 지휘했다. 또한 오토 1세 휘하에서 싸운 사람들 중에는 보헤미아 공작 볼레슬라프 1세가 천명의 보헤이마 정예병들을 데리고 지원하고 있었다. 오토 1세 또한 중앙의 왕실 부대를 직접 이끌었다.
헝가리의 주요 군대는 아우크스부르크로 향하는 오토 1세의 진군을 막았고, 곧 헝가리 기마 궁수 부대가 아우크스부르크 서쪽 강을 건너 즉시 보헤미안 군단의 측면을 공격했다. 보헤미안군은 패주했고 2개의 스와비아 군단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헝가리인들은 독일의 보급품을 실은 마차를 약탈하기 위해 멈췄고, 붉은 콘라드 공작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취약한 헝가리인들을 공격하고 그들을 박살냈다. 콘라트는 포획된 헝가리 깃발을 가지고 오토 1세에게로 돌아왔고, 그의 승리로 독일군이 포위되는 것을 막았다.
오토 1세는 독일군이 헝가리군보다 더 나은 무기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연설을 통해 부하들을 규합했다. 오토 1세는 독일군을 이끌고 헝가리 주력군과 전투를 벌여 그들을 격파했다. 그러나 오토 1세의 주력군이 어떻게 헝가리군을 격파했는지는 다소 불분명하다. 이는 위두킨트의 전투 설명이 현저히 짧고, 세부 내용이 부족하기 때문인데, 이는 전투의 의미에 비해 놀라운 일이다. 이로 인해 일부 역사가들은 오토 1세의 전술이 플라비우스 베게티우스 레나투스의 저서 군사학 논고에 설명된 전략을 기반으로 짠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역사가들에 따르면 보병이 마자르 진형의 중앙에 접근하는 동안 콘라드의 기병대는 왼쪽 날개에 배치되어 근처 절벽에 위치하고 있던 헝가리 궁수들의 범위 밖으로 측면을 보호하면서도 그들을 더 많이 유인하려고 시도했다. 그들의 오른쪽에는 오토 1세가 직접 지휘하는 왕실 군단은 우익에서 적과 교전을 벌였다. 왕의 군대는 궁수들에게 피해를 입었지만, 이는 왕실 군단에게 마자르의 세력권이 아닌 근접 전투에서 마자르족을 직접 공격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콘라드의 군대는 오토 1세의 좌익에서 돌진해 헝가리군을 포위할 위험에 빠뜨렸다. 자신들에게 불리한 상황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아차린 헝가리군은 레흐 강을 건너 동쪽으로 질서정연하게 후퇴했다. 오토 1세의 군대가 추격해 포로로 잡힌 헝가리인을 모두 죽였고, 독일군은 헝가리의 군영을 점령하여 포로들을 해방시키고 전리품을 되찾았다.
하지만 레히펠트 전투가 벌어진 당시 날짜는 8월로 콘라트 적공은 사슬 갑옷을 헐렁하게 풀었다가 하필 마자르족이 쏜 화살에 목이 맞아 전사한다. 오토 1세는 마자르족 전사들이 전열을 재정비 후 매복할 것을 우려해 추적을 포기했고, 많은 대중의 믿음과는 달리, 헝가리 군대는 큰 패배를 당하지 않았고, 대부분의 전사들이 살아서 판노니아으로 돌아왔지만 이들을 이끌던 허르커 불추를 비롯한 아래의 부족장들인 렐과 수르가 생포되었고, 이들은 아우크스부르크 시내로 끌려가 처형되었다. 이로 인해 마자르족들은 현재의 오스트리아 지방에서 물려나야 했고, 반세기 가까이 다시 동부 변경의 땅을 회복한 오토 1세는 동부 변경주를 재건한다.
마자르인들은 헝가리 평원 서쪽에서 더이상 진격하지 못하게 되면서 이에 대한 책임으로 퍼이스는 대공의 자리를 줄탄의 아들인 탁쇼니에게 양위한다. 이후 마자르인들은 이전의 훈족, 아바르족, 노르만족 등의 선례들처럼 돌아가거나, 동화되거나, 영지를 얻거나, 혹은 정체성을 유지한 채로 정착하느냐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더욱이 그때까지만 해도 비기독교 국가였기 때문에, 주변의 기독교 국가들이 그것을 명분삼아 쳐들어올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아르파드의 손자 턱쇼니(Taksony, 재위 955-972)는 세간의 생각과는 달리 서유럽 방면의 원정을 포기했으나 대신 발칸반도에 집중하기로 했다. 960년 헝가리의 키쉬가 이끌던 부대가 세르비아의 영토였던 보스니아를 공격하여 약탈을 감행했다. 이에 차슬라프의 지휘 아래 세르비아 군대가 찌빌린(오늘날의 포차) 근처에서 헝가리군을 무찌르고 키쉬는 사망했다. 키쉬가 사망하자 그의 미망인이 군대를 거느리고 마츠바를 공격, 야음을 틈타 세르비아 진영을 습격하여 차슬라프를 비롯한 많은 사람을 생포했다.헝가리군에 생포된 차슬라프는 손발이 묶인 채 사바 강에 내던져 익사시켰다.
이후 961년 동로마 제국까지 쳐들어 갔으나 패배하고 만다. 이후 968년 키예프 루스의 대공 스뱌토슬라프 1세와 동맹을 맺고, 이른바 스뱌토슬라프 전쟁에 키예프측의 원군으로 참전해 969년 불가리아를 침략한다. 이후 불가리아를 유린한 스뱌토슬라프는 자신을 부추긴 동로마 제국마저 공격하기에 이른다. 이후 970년 키예프 루스와 헝가리-페체네그족 연합군은 트라키아까지 밀고 들어갔으나 연합군은 아르카디오폴리스 전투 에서 패배했고, 마자르족들은 더 이상 기독교 국가들을 상대로 약탈 원정을 하는 것을 잠정적으로 포기하는 것을 고려 해야 했다.
이후 972년 턱쇼니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게저(Géza, 940-997, 재위 972-997)는 즉위한 이후 친척과 귀족들을 상대로 대규모 숙청을 단행하면 중앙집권화를 단행하기 시작했고, 주변국들에게 침략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 로마 교회(가톨릭)로 귀의하기로 결정했는데, 대공이 된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장크트갈렌에 있던 오토 1세에게 사절을 파견해 서방 정교로의 개종 의사를 밝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토 1세가 파견한 장크트갈렌의 수도사 브루노가 와서 세례식을 거행했고, 게저를 비롯한 그의 가족 전원은 기독교로 개종했다.
973년 부활절에 그는 3월 23일 에 시작된 크베들린부르크의 제국 회의에서 12명의 헝가리 부족장들을 오토 1세에게로 보냈다. 체코 공작 볼레슬라프(Boleslav) 또한 직접 제국 회의에 참석했고, 폴란드 공작 미에슈코 1세(Mieszko I)는 아들인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Boleszló the Brave)를 대신 파견하였고, 덴마크 왕 하랄 1세 블로탄(Harald Bluetooth )또한 직접 참석했다. 그밖에도 교황 베네딕토 6세, 동로마 황제 요한네스 1세, 베네벤토의 아이언헤드 공작 판둘프 , 그리고 마케도니아의 불가리아 영주들 또한 직접 대리인들을 파견했다. 게저는 평화의 증표로서 오늘날 오스트리아의 린츠와 장크트갈렌 사이의 영토를 포기했다.
이후 게저는 졸러와 허르커, 그리고 그들의 밑에 있던 마자르족 부족장들에게 자신의 허락없이는 더이상 외국 원정을 나가는 것을 금지했고, 이에 반항적인 자들을 철저하게 찍어 눌렸다. 또한 유럽의 주변 국가들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딸들인 유디트, 일로나, 그리말다를 각각 폴란드 공국 미에슈코 1세의 아들 블레스와프 1세와 튀링겐 공작, 불가리아 제국의 실권자 사무일의 아들 가브릴 라도미르,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 오토 오르세올로에게 시집을 보냈다.
또한 아들인 바지크를 994년부터 프라하의 주교인 성 아달베르트, 혹은 이탈리아에서 온 테오다투스로부터 세례를 받고 이슈트반으로 개명시킨 후 2년간 서방식 교육을 받게했다. 이후 이슈트반의 나이가 14세 또는 15세일 때 마자르 족장과 전사들을 소집한 뒤 그가 자신의 후계자가 될 것이라고 발표하고 모두에게 충성 서약을 하라고 지시했다. 995년경 이슈트반을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의 딸 기젤라와 결혼시킨다. 바이에른 샤이에른 수도원에 보존된 연대기에 따르면, 결혼 의식은 샤이에른 성에서 열렸고 성 아달베르트가 중재를 맡았다고 한다. 기젤라는 바이에른 기사들과 함께 헝가리로 왔는데, 이중 몇몇은 토지를 받고 헝가리에 정착했다. 그들은 이때부터 그의 든든한 측근 세력이 되었다. 이슈트반은 아버지 게저가 살아있는 동안 니트라 공국의 영주를 맡았다.
이후 997년 게저가 사망하자 사망한 후 에스테르곰에서 회의를 소집한 뒤 추종자들로부터 헝가리 대공에 추대되었다. 그러나 트란스다누비아 남부 지역의 영주였던 코파니(Koppány)가 자신의 아버지 '대머리 제린드'와 게저가 체결한 협정에 따라 자신에게 헝가리 대공 직위를 상속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고, 게저의 아내 셔롤트와 결혼하겠다고 선포했다. 코파니는 게저 시절에 억압받았던 마자르 귀족들을 끌어모았고, 이슈트반은 이에 맞서 아내가 이끌고 온 바이에른 호위대와 함께 헝가리 정규군과 독일 기사들을 소집했다. 코파니는 그의 군대와 함께 북부 트란스다누비아를 침공하여 각지를 약탈했다. 이에 이슈트반이 그를 향해 진격했고, 양측은 베스프렘 인근 셰드 계곡에서 맞붙었다.
반나절 동안 이어진 격전 끝에, 이슈트반이 코파니가 이끄는 경기병대를 격파했다. 코파니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고, 이슈트반은 시신을 매장해야 한다는 헝가리의 불문법을 무시하고 계곡에서 그대로 썩게 내버려두라고 명했다. 이는 대공의 권위에 불복종하는 자의 말로를 모두에게 보여줌으로써 다시는 반란을 꿈에 꾸지 못하게 하려는 정치적 술수였다. 그는 뒤이어 코파니의 영지를 공략하고 부하들에게 토지를 분배했으며, 코파니의 옛 부하들에게 판노할름 수도원에 십일조를 바치라고 강요했다.
999년, 이슈트반은 판노할름 수도원장을 로마로 파견했다. 하르트비크 연대기에 따르면, 교황 실베스테르 2세는 판노할름 수도원장을 접견한 뒤 헝가리를 가톨릭 국가로 봉헌하겠다는 이슈트반의 의지를 전해듣고 매우 기뻐하며 헝가리 왕으로 봉하고 강복했다고 한다. 75년 후,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그가 나라 전체를 교황에게 헌납했다며 헝가리를 교황령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이슈트반 생전에 발행된 공식 문서에서는 이를 입증하는 내용이 적히지 않았다. 그는 헝가리 왕이 된 뒤 첫 번째로 반포한 법전 서론에서 자신을 하느님의 은혜로 통치하는 왕이라고 칭했다. 한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3세 역시 그가 헝가리 왕이 되는 것에 동의했다고 한다. 오토 3세는 1000년 8월 14일부터 1001년 2월 15일까지 로마에 머물렀으니, 이때 판노할름 수도원장을 교황과 함께 면담했을 가능성이 있다.
대관식의 날짜는 불확실하다.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1000년 12월 25일 또는 1001년 1월 1일에 대관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페크스 주교의 헌장에 따르면, 1009년 8월 23일은 이슈트반 왕의 통치 9년차였다고 한다. 이에 따른다면, 대관식은 1000년 8월 23일에서 1001년 8월 22일 사이에 거행되었을 것이다. 11~12세기에 보관된 헝가리 왕실 등록부에 따르면, 이슈트반의 통치 기간은 37년 7개월 14일이었다고 한다. 그가 사망한 날짜는 1038년 8월 15일이므로, 대관식 날짜는 1001년 1월 1일로 간주할 수 있다.
[1]
이때 파견된 군대 수가 7만 5천 명이었다는 예기가 있다.
[2]
일설에는 말라리아 역시 그의 사망원인의 하나로 지목된다.
[3]
현재 랑겐첸
[4]
프라에센란트, 사라, 슈묄른으로 비정되기도 한다.
[5]
즉, 우리가 백인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현대의
영어권
백인 민족들 대부분이 독일계를 뿌리로 둔다.
[6]
그와 벌인 전쟁에서 프랑크 왕국의 고위 신하 4명이 전사할 정도로 프랑크 왕국의 피해도 컸다.
[7]
수백년 후에 기독교화된 작센인들은 동방으로 몰려가서 프랑크 왕국이 자기들 선조에게 했던 짓을 발트 지역의 다신교도들에게 똑같이 하게 된다.
동방식민운동 참조.
[8]
작센족들은 대부분이
보병이어서 프랑크 왕국의 강력한
기병과 평지에서 싸우기를 꺼렸고, 대신 프랑크
기병들을 숲속으로 유인한 다음 미리 대기하고 있던 작센족 보병들의
매복으로 포위하여 섬멸시키는 전술을 즐겨 사용했다. 이는 작센족들의 먼 조상인 게르만족들이 로마 군대를 상대로
토이토부르크 숲에서 사용한 전술을 그대로 반복한 것이었다.
[9]
<카롤루스 대제의 생애>에서는 이를 "적에게 복수를 하고 정당한 원한을 풀기 위해 필요에 의해 취해진 조치"라고 강변하고 있다.
[10]
비두킨트가 어찌나 이름을 날렸는지 하드리아노 1세 교황은 그가 개종하였다는 소식에 3일간 감사기도를 올릴 정도였다.
[11]
마녀사냥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녀사냥하려는 자를 처벌하기 위한 조항이었다. 중세 초기에는 마녀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마녀가 문제가 아니라 없는 마녀를 우기는 자가 문제라고 생각했다.
[12]
836년 사망
[13]
다만 성 베르탱 연대기((Annals of St. Bertin))에서는 루드비히 2세가 폭력, 협박, 약속 또는 기타 이유로 라인 강 우안의 귀족들을 자신의 목적에 따를 수 있게 했다고 보고있다.
[14]
독일 바이에른주의 남부와 오스트리아 포어아를베르크주 전역,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에 거쳐 있는 티롤 지방의 전역 및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주의 북동부
[15]
이를 보아 가리발드는 프랑크 인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16]
정확히는 테우데리크를 꼭두각시 왕으로 조종하고 있던 샤를 마르텔
[17]
다뉴브강의 지류
[18]
프레데가르 연대기에서는
훈족이라고 기술되었다.
[19]
프레데가르 연대기에서는 '벤트인'이라고 기술되었다
[20]
정확히는 자신들을 칸이라 주장한 인물들이다
[21]
연대기에선 모라비아인의 지칭이다.
[22]
오늘날의 아스텐
[23]
다뉴브강의 지류
[24]
프레데가르 연대기에서는
훈족이라고 기술되었다.
[25]
프레데가르 연대기에서는 '벤트인'이라고 기술되었다
[26]
조부인 비친과 아버지 드라스코가 프랑크의 봉신의 의무를 행한 것
[27]
936년 오토 1세는 헤르만을 작센 공국의 검사관 자라를 주면서 그의 가문명을 딴 변경주 설립을 허가해 줬다.
[28]
두 형제는 955년 락사 전투에 오보트리테스측으로 참전한 바가 있으며 오보트리테스 연맹이 패배하자 간신히 서프랑크 왕국으로 도주했다가 다시 독일 왕국으로 돌아와 게로의 아들인 지그프리드가 두 형제의 처남이었기에 이 연줄로 오토 1세에게 사면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게로 변경주에 다시 정착했지만 자신들의 유산을 날로 먹은 숙부 헤르만 빌룽과 지속적으로 대립했다.
[29]
탈출에 실패한 비흐만 2세의 부하들은 전부 헤르만 빌롱에 의해 처형되었다.
[30]
오보트리테스 교구의 문서는 990년 바그리아 봉기에서 살아남은 한 아마도 늦어도 1018년 미스티스와프가 루티젠에 의해 추방되었을 때 파괴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31]
카르파티아 산맥 북서부, 현
슬로바키아 일대.
[32]
이곳에 살던 발트족은 '
프로이센인' 혹은 '프루센'이라고 불렸다. 이들의 이름에서 지명 '
프로이센'이 유래되었다.
[33]
발트어족의 일파로 동프로이센에 살던 프로이센인은 슬라브족에 동화되지 않았고, 폴란드가 건국된 후에도 독자성을 유지하였다. 이들은 (당시 유럽인 기준에서) 기독교를 믿지 않는 이교도였고, 13세기 초반에
마조프셰(현 폴란드 동부 지역) 공작 '콘라트 1세(Konrad I mazowiecki, 1187-1188 ~ 1247, Książę mazowiecki)'는
튜튼 기사단에 이들을 정복하고 기독교화 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결국 프로이센인은 튜튼 기사단에 정복되어 피지배민족이 되었으며, 이후 독일 이주민에 동화되거나, 학살, 추방되어 자취를 감추었다. 이들이 사용하던 '고대 프로이센어'도 17~18세기에 사멸하였다.
[34]
훗날 폴란드 민주화에 기여하는
레흐 바웬사의 이름도 여기서 따온 것이다.
[35]
수레바퀴라는 뜻이다
[36]
크라쿠프 수도사이자 폴란드 역사 연대기 저자인 빈센티 카드우벡(Wincenty Kadłubek, 1150년경 ~ 1223년 3월 8일)에 따르면, 피아스트를 찾아온 두 손님은 일반인이 아니라 천사가 된 사도 요한과 바울로였다고 한다.
[37]
프레데가르 연대기에서는
훈족이라고 기술되었다.
[38]
프레데가르 연대기에서는 '벤트인'이라고 기술되었다
[39]
슬로바키아의 데빈 성으로 추정된다.
[40]
카르부시츠키는 이 용어는 당시 프랑크족의 지도자 이름이거나 보헤미아에 거주하는 슬라브인들이 서쪽 이웃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추정했다.
[41]
일부 학자들은 이 인물이 스피티네프 1세의 남동생인 브라티슬라프 1세라고 추정하지만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42]
그리스도인의 전설에 따르면, 바츨라프 1세는 전투 도중 사상자가 많이 생기자 코우르짐의 통치자에게
결투를 신청해 동의를 얻어냈다.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전진했을 때, 바츨라프의 이마에
십자가 형태를 띤 환상이 생겨났다. 코우르짐의 통치자는 그걸 보자마자 무기를 멀리 내던지고 바츨라프 1세의 발 앞에 몸을 던지며 "하느님께서 표창을 내려 도움을 베푸시는 사람을 이길 자가 없다"고 선언했다고 한다.
[43]
드라호미라가 속한 스토도르족이 여기에 해당했다.
[44]
성명은 전해지지 않는다.
[45]
아바르족들은 휘하의 슬라브족을 강압적이고 폭력적으로 지배했기 때문에 슬라브족들은 아바르족들을 영 좋아하지 않았다. 이들이 아바르족의 요구대로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에 참가했던 이유는 단지 동로마를 약탈하기 위해서였다.-동로마 제국 입장에선 그놈이 그놈-
[46]
프레데가르 연대기에서는
훈족이라고 기술되었다.
[47]
프레데가르 연대기에서는 '벤트인'이라고 기술되었다
[48]
이때 세력을 분할한 쿠브라트의 삼남이
불가리아 제1제국 초대 칸
아스파루흐였다.
[49]
연대기에선 모라비아인의 지칭이다.
[50]
훗날
신성 로마 제국, 이탈리아, 동 프랑크의 왕이 되었다. 유아왕
루트비히 4세의 아버지.
[51]
이를 기록한 잘츠부르크 행장에서는 스바토플루크 1세나 아르눌프가 용병으로 고용해서 쳐들어왔다고 하지만 근거는 없다.
[출처]
크리스토퍼 백워드, 《중앙유라시아 세계사:프랑스에서 고구려까지》 (소와당, 2014) 315페이지
[53]
심지어 이 결혼의 존재도 부정하고 대모라비아 왕국의 몰락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일 뿐이라는 급진적인 견해도 있다. 모라비아가 멸망한 년도가 907년이기 때문이다.
[54]
이시기 헝가리를 포함한 대부분의 유목민이나 부족들은 형제상속을 따랐다. 특이한 사례로 신롬에 가입해 봉건제로 전환되고도 한참동안 형제상속을 유지한 프르셰미슬 왕조 보헤미아의 경우도 있다.
[55]
혹은 사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