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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르토크 벨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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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음악사의 주요 인물 · 기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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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평생 공로상 수상자 · 레전드상 수상자 }}}}}}}}}
<colbgcolor=#000><colcolor=#fff> 버르토크 벨러
Bartók Béla
파일:1000004445.jpg
본명 버르토크 벨러 빅토르 야노시
Bartók Béla Viktor János
출생 1881년 3월 25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너지센트미클로쉬
사망 1945년 9월 26일 (향년 64세)
미국 뉴욕 주 뉴욕 시
국적
[[헝가리|]][[틀:국기|]][[틀:국기|]]
직업 작곡가, 피아니스트, 음악학자
사조 국민악파
종교 무종교 ( 무신론)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원숙기2.3. 미국으로 이주
3. 버르토크의 음악
3.1. 민속음악적 경향3.2. 타악기적 피아니즘3.3. 황금분할 피보나치 수열
3.3.1. 현, 타악기, 첼레스타를 위한 음악
4. 주요 작품
4.1. 음악 목록에 대해4.2. 오페라4.3. 발레음악4.4. 관현악4.5. 협주곡4.6. 실내악4.7. 피아노4.8. 무반주 작품4.9. 가곡4.10. 합창
5. 여담

[clearfix]
버르토크의 현과 타악기와 첼레스타를 위한 음악. Texas Festival Chamber Orchestra with Linus Lerner

1. 개요

헝가리의 작곡가, 피아니스트, 음악학자.

말년에 미국에서 여생을 보냈기 때문에 미국식으로 '벨라 바르톡'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지만 본인의 고국인 헝가리식으로 이름을 칭하면 버르토크 벨러(Bartók Béla)이며 풀네임은 버르토크 벨러 빅토르 야노시(Bartók Béla Viktor János)이다.[1] 선배 프란츠 리스트, 후배 리게티 죄르지와 더불어 헝가리가 낳은 위대한 음악가이며[2] 스트라빈스키, 쇤베르크 등과 더불어 현대음악의 형성에 크게 기여했던 거장 중 한 명이다.

생전에는 작곡가 못지 않게 피아니스트로도 유명했으며 중부 유럽을 비롯한 세계 각지의 민요를 수집해서 연구한 음악학자이기도 했다.[3] 그의 음악은 낭만주의 후기에 태동했던 국민악파 성향을 이어받아서 헝가리를 비롯한 동유럽의 민속음악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낭만주의를 벗어나 현대음악의 지평을 여는 독창적인 어법을 창시하였기 때문에 음악사적으로 특별히 주목받고 있는 인물이다. 한편으로 뛰어난 음악 이론가였으며 자신의 이론을 작곡에 효과적으로 활용했기 때문에 오늘날 작곡가와 작곡가 지망생들에게 자주 탐구되는 연구 대상이기도 하다. 또한 민요 등 민족음악을 수집하는데 일평생을 바친 만큼 음악학자로서의 업적도 빼놓을 수 없기에, 연주자나 작곡가 말고도 음악학, 인류학자 등 여러 인접학문의 학자들에게도 매우 관심사인 인물이다.[4]

2. 생애

2.1. 초기

버르토크는 1881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헝가리 부분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너지센트미클로쉬(Nagyszentmiklós)는 성 이슈트반 왕관령의 버이더샤그-반샤그 지역[5]에 속하며, 현재 루마니아의 슨니콜라우 마레(Sânnicolau Mare)이다. 아버지인 버르토크 벨러 시니어(아들과 이름이 같다)는 지역 농업학교 교장이었으며 버르토크가 8살때 사망하였다. 바르톡과 여동생 엘자는 피아노 선생이었던 어머니 파울라 바르톡과 이모 이르마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9살때 작곡을 시작했으며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에 두각을 나타내어 11살때 최초로 연주회를 가졌다. 이후 포소니(Poszony, 현재는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 Bratislava)에 정착했으며 4살 위의 도흐나니를 만난 후 그와 각별한 인연을 맺었다. 1899년 그는 빈으로 가서 오디션을 본 후 비엔나 왕립음악원에 장학생으로 입학허가를 받았으나 도흐나니의 권유로 그가 있는 부다페스트 왕립음악원에서 음악을 공부했다. 당시 그는 작곡가보다는 피아니스트로 더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고[6] 입학 후 3년 동안은 습작수준의 작곡만 하다가 1903년 작곡가로서 최초의 본격적인 작품 교향시 코슈트(Kossuth)[7]를 완성하여 이듬해 초연하였다. 1904년에는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광시곡(Op.1),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스케르초(Op.2), 피아노 5중주 C장조 등을 작곡하는 동시에 최초로 민요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이 민요 수집은 그의 음악스타일에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그의 필생의 작업이 되었다.

예전의 그를 비롯한 헝가리의 음악인들은 헝가리 민요에 대해 프란츠 리스트의 곡에서 보여지는 것과 같은 집시 멜로디가 그 근본이라고 생각했었고 버르토크는 교향시 코슈트나 피아노 랩소디 등에서도 그런 선율을 사용했었다. 그러나 마쟈르(헝가리인) 농부들의 민요를 본격적으로 접하고 나서는 집시 멜로디가 아니라 이 농촌의 민요가 진짜 헝가리의 민속음악이라고 생각하고 그의 작품에 반영하기 시작했다.[8] 버르토크는 자신보다 1년 후배이자 이후 자신에 필적하는 거장이 된 코다이 졸탄과 같이 민요를 수집하면서 그의 음악은 점점 더 민요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코다이가 클로드 드뷔시를 파리에서 데려오면서 그와도 교류했다.

1906년에 코다이와 합작으로 최초의 민요집인 '20개의 헝가리민요'를 출판하였고[9], 이후 주기적으로 버르토크는 다수의 민요를 편곡한 성악곡을 작곡했으며 기악곡에도 점차 민속음악의 특성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 민요의 영향을 제대로 반영한 최초의 기악작품은 바로 오케스트라 모음곡 2번(1905-7)이다. 하지만 당시 그의 수입원은 피아노 연주였기 때문에 본격적인 작곡이나 민요채집은 제한적으로 행해질 수밖에 없었다. 1907년 부다페스트 왕립음악학원에서 피아노 교수직을 맡으면서 드디어 제대로 된 고정수입원을 얻어 정착하게 되었고 이 때부터 마음놓고 작곡활동과 민요 수집을 할 수 있었다. 그는 트란실바니아 일대의 민요를 다수 수집하였다.

한편 그의 초기 관현악 수법에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큰 영향을 주었는데, 1902년 교향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부다페스트 초연을 들었을 때 버르토크는 큰 충격을 받았고 '영웅의 생애'는 아예 피아노로 편곡하여 직접 연주할 정도로 슈트라우스에게 열광하였다. 코슈트 교향시를 비롯한 버르토크의 초기 관현악곡(예를 들면 관현악 모음곡 1, 2번 등)을 들어보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짙은 영향을 느낄 수 있다.

2.2. 원숙기

1908년은 그의 음악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 시점에 나온 14개의 바가텔(Sz. 38)이나 현악 4중주 1번(Sz. 40) 등의 작품에서 바르톡은 이제까지의 후기 낭만주의적 성향과 완전히 결별하고 민속음악의 각종 어법을 소재로 좀더 급진적이고 실험적인 작법을 추구하게 되었다. 관현악 쪽에서도 점차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어법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1907년에는 지글러 가문의 두 딸을 제자로 받아들였는데 2년 후 동생인 마르타 치글러(Márta Ziegler)와 결혼하여[10]1910년에 버르토크 벨러 주니어를 낳았다.

한편 버르토크는 1차대전이 막바지로 치닫을 때까지 작곡가로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의 음악은 당시에는 너무 급진적었으며 헝가리 민요의 선법체계를 응용한 그의 작법은 청중이나 동료 음악가들을 이해시키지 못했다. 마르타와 결혼 직후 프랑스 파리를 방문해서 부조니의 주선으로 뱅상 댕디나 이시도르 필립 등 당시 프랑스의 유력음악인들을 만났으나 이들은 버르토크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모국인 헝가리에서도 크게 환영받지는 못했는데 1911년에는 아내 마르타에게 헌정한 버르토크의 유일한 오페라 푸른 수염 영주님의 성(Blubeard's Castle)을 헝가리 고등예술 협회(Hungarian Fine Arts Commission) 주최의 콩쿠르에 출품했지만 연주할 수 없다며 출품을 거부당했다. 콩쿠르의 일이 있고 나서 그는 작곡을 중단하고 항의의 차원에서 모든 형태의 공적인 음악활동에서 물러났다. 이 시기 그는 음악학자로서 민요수집에 열중하였고 민속음악의 가치를 알리기 위한 다수의 글을 언론에 기고하였다. 또 중앙 유럽과 발칸 반도, 터키 일대의 민요를 수집하여 정리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민요 수집이 힘들게 되자 그는 다시 작곡을 시작했다. 1차대전 중 작곡된 발레곡 허수아비 왕자(Wooden Prince)가 1917년 크게 성공을 거두면서 뒤늦게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 주었다. 공교롭게 허수아비 왕자의 대본도 전술한 벌라지 벨러가 작성했는데, 이 발레곡이 큰 성공을 거두고 나서야 이제까지 연주되지 못했던 푸른 수염 영주님의 성도 1918년 마침내 초연이 이루어진다.[11] 같은 시기에 피아노 모음곡(op. 14, sz 62)과 현악 4중주 2번(sz 70) 같은 버르토크 초기를 대표할만한 작품들이 작곡되었다.

1차 대전은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패배로 끝이 났고 헝가리는 정치적, 경제적 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버르토크 가족의 경제상황도 계속 악화된데다 1919년 6월에는 건강이 크게 악화되어 목숨이 위험한 지경에까지 이른다.[12]

정치적 혼란을 피해 여기저기 도피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계속 작곡을 하였는데, 허수아비 왕자에 이어 스트라빈스키와 쇤베르크의 영향을 받은 또다른 발레곡 중국의 이상한 관리(The Miraculous Mandarin)와 두 개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썼다. 두 바이올린 소나타는 그의 작품 중 화성적으로나 구조적으로나 가장 난해하며 당시의 통상적인 음악문법에서 가장 멀어져 있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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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르토크와 22살 연하의 두번째 아내 디타
1923년 버르토크는 마르타와 이혼하고 그에게 피아노를 배운 디타 파스토리(Ditta Pásztory, 1903-1982)와 재혼하여[14] 다음해인 1924년에 두 번째 아들 페테르(Péter)를 낳았다. 버르토크는 이후 한동안 작곡에 손대지 않다가 아들 페테르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기 위한 여섯 권 분량의 피아노 연습곡 《미크로코스모스》(1926~37)를 썼다. 이후에 쓴 현악 사중주 제6번(1939)는 그가 유럽에서 쓴 마지막 곡이 된다.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 5~6년간은 작곡가 버르토크의 진정한 황금기로서 이 시기에 현악4중주 6번과 미크로코스모스 외에도 현악4중주 5번(1934), 현과 타악기와 첼레스타를 위한 음악(1936), 두 대의 피아노와 타악기를 위한 소나타(1937, 1940년에 협주곡 버전으로 개작), 바이올린 협주곡 2번(1938), 현을 위한 디베르티멘토(1939) 등 그의 대표작들이 대거 탄생하였다. 그간 알음알음 커리어를 쌓고 있었던 버르토크였지만, 이 시기에 이르면 유럽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현대 작곡가 중 하나로 확고하게 자리잡게 된다.

2.3. 미국으로 이주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나치 독일에 부정적이었던 바르톡은 헝가리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1939년 미국 여행 때 시게티를 알게 된 바르톡은 그의 권유로 미국 망명을 결심하고, 1940년 10월 8일 부다페스트에서 야노슈 프렌치크의 지휘로 최후의 연주회를 열게 된다.

그는 나치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어서 그가 독일에서 유명해졌을 때에도 독일에서의 콘서트를 거부했고 독일 출판사와도 계약하지 않았을 정도였다.[15] 그리고 그의 자유분방한 세계관은 헝가리의 우익 세력의 반감을 샀다. 그는 부인과 함께 마지못해 미국으로 떠났다. 페테르는 1942년 미국으로 가서 후에 미 해군에 입대한다. 전처 마르타의 소생이었던 버르토크 벨러 주니어는 헝가리에 남았다.

그러나 미국에서 그의 생활은 편하지 않았다. 뉴욕으로 건너간 바르톡은 콜럼비아 대학의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몇 차례 강연도 하고 각지에서 채록한 민요도 정리했으나 경제적으로는 매우 어려웠다. 그는 당시 미국에서 많이 알려진 작곡가가 아니었으며 미국인들에게 그의 음악 스타일은 너무 생소하고 어려웠다. 그의 재정 상황은 매우 안 좋았고, 건강은 점점 나빠졌으나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했다.[16]

그는 현악 사중주 제6번(1939)을 끝으로 작곡을 그만두려 했지만, 지휘자 세르게이 쿠세비츠키의 위탁으로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Concerto for Orchestra)(1943~5)을 작곡했고 바이올리니스트 예후디 메누힌의 위탁을 받아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를 작곡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생애 최후의 작품인 피아노 협주곡 제3번과 비올라 협주곡에 착수했으나, 두 작품 모두 완성되지 못하고 유작으로 남게 된다.[17]

미국에서 버르토크의 음악성향은 유럽에서 보여주었던 전위성과 실험성 대신 좀 더 듣기 편하고 전통적인 작법으로 회귀하였지만 민요의 선율과 리듬을 차용하는 수법은 그대로 사용하였다. 미국 시절의 버르토크는 자작곡 편곡이나 민요에 의한 가곡 등을 제외하면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피아노협주곡 3번/비올라 협주곡 4작품만 남겼다. 모두 의뢰를 받고 작곡한 것들인데 그나마도 피아노 협주곡과 비올라 협주곡 두 작품은 결국 미완성으로 남아버렸다. 하지만 이 4작품은 모두 음악적 가치가 높은 명작들이며 현재에도 자주 연주된다.

1945년 9월 버르토크는 뉴욕 시에서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버르토크의 유해는 뉴욕 주 Hartsdale에 있는 펀클리프 묘지(Ferncliff Cemetery)에 안장되었다가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되기 직전인 1988년 7월 7일에 부다페스트의 파르카스레티 묘지(Farkasreti Cemetery)로 안장되었다.

한편 아내 디타 파스토리 버르토크는 남편 사후 부다페스트로 복귀했으며 1982년 사망할 때까지 부다페스트에서 살았다. 피아니스트였던 그녀는 남편의 작품을 알리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했으며 1981년 버르토크 탄생 100주년 기념식을 주관하기도 했다.

3. 버르토크의 음악

버르토크의 작곡기법은 오늘날 작곡가 지망생들에게 거의 전공필수라고 해도 될만큼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으며 논문도 굉장히 많이 나온다. 또한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버르토크 음악 연구서도 상당히 많다.[18] 그가 출판한 민속음악 1집 1쇄(1500부)가 모두 팔리는데 30년 넘게 걸렸다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 격세지감.

그의 음악을 요약해서 표현하자면 구조적, 민속적, 타악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작곡가인만큼 제대로 파고 들어가면 공부할 거리가 굉장히 많은데, 이 항목에서 소개되는 내용은 매우 초보적이고 간략한 수준이니 좀더 관심이 있다면 음악 전문가의 책이나 논문을 참고하기 바란다.

버르토크의 음악은 전방위적인 불협화음, 불규칙한 리듬, 자주 바뀌거나 모호한 조성, 타악기적이고 거친 음향을 특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얼핏 들으면 세련되지 못하고 무질서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실제 버르토크의 음악은 오히려 상당히 구조적이며, 전례없는 수학적 원리를 응용한 정교한 구성미를 추구하고 있다. 괜히 그의 작품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고 논문이 많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19] 그가 황금분할과 피보나치 수열 등의 수학적 원리를 어떻게 자신의 음악에 활용했는지에 대해서는 후술.

3.1. 민속음악적 경향

생애 편에서 이야기했듯이 버르토크는 평생 민속음악을 수집하고 연구했다. 그가 모아 놓은 민요선율은 13000개에 달하며 자료의 가치가 높아서 현재까지도 민속음악 연구에 활발하게 인용되고 있다. 대부분은 버르토크 자신의 출생지와 관련이 깊은 헝가리/루마니아/슬로바키아 지역의 선율이지만 이외에도 아라비아, 투르크(터키), 우크라이나, 세르비아-크로아티아, 불가리아의 민요도 채집했다. 기타 중국/일본/인도 등을 비롯한 동양의 민요도 수집했는데 직접 작품에 활용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20]

한편으로 그는 그간 고정관념으로 인식되었던 헝가리 전통음악 = 집시 음악이라는 등식에 반대했다.[21] 집시음악은 나름 전문적인 악사들이 창작하고 연주하는 것이기 때문에 민속음악이라고 볼 수 없으며 헝가리 시골에서 불려지고 있는 단순하고 소박한 민요들이 진정한 전통음악이라고 주장했다.[22]

버르토크의 민속음악 이용법을 보면, 그는 강연에서 작곡가가 민속음악을 쓰는 데에는 크게 세 가지 유형이 있다고 했다. 첫 번째는 선율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으로서,[23] 이 때 작곡가는 작품의 구조와 화성을 통해 그의 창조성을 드러내게 된다. 둘째는 민속적 모티브를 작품 내에 이용하는 것으로, 작곡가는 더 많은 재량권을 갖는다. 마지막으로는 완전히 새로운 민속적 선율과 리듬을 창조하여 이용하는 것으로서, 그는 이 방법은 '민속음악을 진정으로 체화한' 작곡가만이 할 수 있다고 보았다.

버르토크도 세 가지 유형에 해당되는 작품을 남겼는데 첫번째 유형에 해당되는 작품으로 '15개의 헝가리 농민의 노래(Sz.71)'나 '6개의 루마니아 민속 무곡(Sz 56)', '루마니아 크리스마스 캐롤(Sz. 57)' 등이 있고 두 번째 민속적 모티브를 사용한 작품으로 '슬로바키아 민요에 의한 3개의 론도'(Three Rondos on Slovak Folk Tunes Sz.84)나 '모음곡(Sz. 62)' 등이 있다. 세 번째, 민속적 요소를 이용해서 완전히 새로운 작품을 만든 경우로 '피아노 소나타(Sz.80)', '야외에서(Sz. 88)' 등이 있다. 미크로코스모스(전 153곡)에는 이 세가지 유형으로 작곡된 곡들이 고루 섞여 있다.

버르토크는 민속음악에서 단순히 선율만을 응용한 것이 아니라 음계와 리듬과 같은 좀더 본질적인 요소를 도입하였다. 바르톡은 초기에 반음계나 복조/다조 등을 도입하는 음악적 실험을 했는데, 중기 이후부터는 조성을 확실하게 유지하는 대신 민속음악에서 자주 쓰이는 5음 음계 선법을 적극 도입해서 기존의 장단조 체계를 넘어섰다. 음계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대단히 복잡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예시만 간략하게 제시하며 관심이 있다면 좀더 전문적인 문헌을 참고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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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크로코스모스 1권 34번 '프리기아 선법으로'

버르토크는 미크로코스모스에서 다양한 음계와 선법을 활용하고 있기 때문에 비교해서 들어보면 각 음계의 특징과 차이를 이해하기 쉽다. 위에 예시로 인용한 34번곡은 이름 자체가 '프리기아 선법으로'이다. 이 곡과 리디아 선법으로 작곡된 2권 37번 곡('리디아 선법으로'), 5음 음계로 작곡된 3권 78번곡('5음 음계로'),[24] 온음음계로 작곡된 5권 136번 곡('온음 음계로')[25] 등을 비교해서 들어보면 음계의 차이를 좀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버르토크는 민속음악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리듬패턴을 활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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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크로코스모스 5권 126, '템포의 변화'

3.2. 타악기적 피아니즘

버르토크는 자신의 피아노 작품에서 큰 규모, 감미로운 선율과 레가토, 어렵고 화려한 기교로 대표되는 낭만주의식 피아니즘에 반기를 들면서 좀더 직선적이고 원초적인 음향을 추구했다. 1908년에 작곡된 14개의 바가텔(op. 6)부터 본격적으로 자신의 음악세계가 드러나는데, 기교성을 완전히 배제하고 단순하고 간결한 악구로 구성되어 있으며 선법을 도입하고 복조나 반음계를 활용해서 조성체계를 무너뜨리고 있다(이렇게 되면 당연히 선율도 모호해진다). 예를 들어 바가텔 1곡은 왼손(f단조 - 프리기아 선법)과 오른손(E장조)의 조가 다른 복조로 진행되며, 8번곡은 무조에 가까운 반음계적인 진행을 보여주고 있다.

1911년 작곡된 알레그로 바르바로(Sz.49)에서 그의 피아니즘은 또 한단계 도약하는데, 이후 그의 피아노곡은 선율은 최소한의 흔적만 남겨놓고 레가토를 배제하는 대신 리듬과 분절성을 강조하며, 여기에 불협화음과 반복적이고 다이나믹한 움직임(특히 저음부)이 가세하여 마치 타악기를 연주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와 같은 타악기적 피아니즘은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소련의 작곡가 프로코피예프가 추구했던 피아니즘과도 일치하며, 곧잘 비교된다. 다만 타악기적 음향을 구현하는 방법론은 두 작곡가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있는데, 바르톡이 기교적인 패시지를 최대한 억제하고 악구도 경제적으로 사용하여 기계적인 느낌을 낸다면 프로코피예프는 바르톡보다는 훨씬 기교적이며 아르페지오와 같은 장식적인 악구도 많이 사용하는 편이다.[27]

버르토크는 피아노곡을 작곡할 때 타악기 효과를 강화하기 위해 몇가지 기법을 사용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오스티나토, 즉 일정한 리듬이나 음형을 계속 반복하는 기법이다. 또한 마르텔라토(Martellato)라는 기법도 사용했는데 양손이 번갈아서 피아노를 강하게 내려쳐서 마치 큰 북(저음)과 작은 북(고음)이 번갈아 울리면서 쿵쾅거리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다음 항목에 예시로 인용된 '알레그로 바르바로' 악보에 사용된 기법이 바로 오스티나토 - 마르텔라토 조합에 해당된다.

1920년대 이후 바르톡은 타악기 효과를 좀더 높이기 위해 톤 클러스터(음괴) 기법을 도입했는데, 이는 미국의 작곡가 헨리 카웰((Henry Cowell, 1897-1965)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톤 클러스터를 사용하면 강한 불협화음때문에 선율성이 거의 사라지고 음향만 남게 된다. 아래 예시로 든 악보를 보면 한 손으로 인접한 6개 또는 7개의 음을 동시에 눌러야 되는 경우가 보이는데, 이런 경우 손가락이 아니라 손바닥으로 건반을 짚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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톤 클러스터의 예시(피아노 소나타 3악장).

기타 급속하고 급격한 강약의 변화(예를 들면 ff => pp 또는 그 반대) 또는 리듬의 변화, 북을 잘게 두들기는 효과를 내기 위한 장식음 사용(이를 플램:flam 이라고 한다) 등을 통해 타악기적인 효과를 배가시켰다.
타악기적 피아니즘의 진수를 보여 주는 자유 속에서(Out of Doors) 중 1곡 북과 피리.

3.3. 황금분할 피보나치 수열

버르토크는 자연에서도 발견되는 수학적 원리이자 아름다움의 공식으로 널리 알려진 황금분할이나 피보나치 수열의 원리를 음악에 적용하면 큰 음악적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생각했다.[28] 그는 황금분할과 피보나치 수열을 음의 수직적 구조(즉 화음의 구성)와 수평적 구조(곡 전체의 구성)에 모두 사용했다.

이와 같은 원리를 적용한 최초의 작품이 1911년에 작곡된 피아노곡 '알레그로 바르바로(야만적인 알레그로)'이다. 버르토크는 전체 224마디로 되어 있는 이 곡에서 분위기가 가장 고조되는 부분을 황금비에 해당되는 138마디 중간에 배치했다(224 * 0.618 = 138.432). 또한 한 마디 안에서도 황금분할을 적용했는데, 4/4박자 한 마디를 일반적인 8분 음표로 2/8+2/8+2/8+2/8로 분할하는 대신 3/8+2/8+3/8, 2/8+3/8+3/8 등으로 분할하고 있다. 덕분에 연주자들은 리듬을 맞추느라 고생을 한다 또한 이 곡에서 피보나치 수열도 응용이 되고 있는데, F# 단조 화성을 갖는 오스티나토(& 마르텔라토)의 마디수가 3/5/8/13 으로 각 마디수가 피보나치 수열의 항에 대응하고 있다.[29] 곡의 분위기만 보면 야만적인 알레그로라는 제목이 어울리지만 곡의 구성을 보면 오히려 수학(기하학)적인 알레그로라는 제목이 더 어울릴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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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그로 바르바로 오스티나토의 예시(숫자는 마디 수)

이후 버르토크는 황금비율과 피보나치 수열을 자신의 작품에 말그대로 황금의 작법처럼 활용하였는데, 심지어 소품이나 어린이들을 위해 쓴 쉬운 작품에도 이 원리를 적용해서 작곡한 경우가 많다.[30]

전술한 것처럼 버르토크의 작품은 악곡 전체 마디수를 기준으로 황금비에 해당되는 마디에서 중요한 변화나 클라이막스가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현을 위한 디베르티멘토'의 1악장은 총 563마디인데 563의 황금비 마디인 348마디(563 * 0.618=347.934)에서 재현부가 시작한다. 또 피아노/바이올린/클라리넷을 위한 실내악 콘트라스트(Kontrast) 1악장은 93마디로 이루어져 있는데 황금비에 따라(93*0.618=57.474) 57마디 중간부분에서 재현부가 시작된다. 훨씬 단순하고 짧은 곡에서도 이런 작법이 나타나는데, 예를 들어 6개의 루마니아 민속무곡중 제 4곡은 18마디로 되어 있는 짧은 곡인데 황금비에 따라(18 * 0.618 = 11.124) 11마디째에 제 2 선율이 등장하고, 제 5곡(28마디) 역시 황금비(28*0.618 = 17.305)에 따라 17마디째에 한 옥타브 낮은 반복이 시작된다. 이 외에도 정말 많으니까 혹시 관심있는 버르토크의 작품이 있다면 이런 원리가 어떻게 활용되었는지 직접 확인해 보자.

버르토크는 전술한 것 처럼 수평적인 곡의 구성에 황금분할과 피보나치 수열을 활용했을 뿐만 아니라 수직적인 구성, 화음의 구성에도 두 원리를 응용했다. 아래 악보는 '2대의 피아노와 타악기를 위한 소나타' 1악장의 오스티나토(leitmotif)와 1주제, 2주제의 선율이며 맨 오른쪽에 악구의 음역을 음정으로 나타내고 있다. 오른쪽 음정을 나타낸 숫자[31]에서 볼 수 있듯이 선율의 음역대가 기준음 C를 중심으로 각각 3+5=8도, 5+8=13도, 13도/21도가 된다. 한편으로 제 1 주제는 8마디로 구성되어 있고 제 2 주제는 13마디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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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아래 악보의 a), b), c), d)는 같은 1악장의 제 1주제, 간주부, 제 2주제, 종결부의 수직적인 화음구조를 나타낸 것인데, 화음의 음정이 황금분할의 원칙에 맞춰서 각각 2+3+2도, 3+5+3도(가운데 5도는 다시 3+2도로 세분된다), 5+8도, 8도로 구성되어 있다.
파일:sonatafor2pianopercussion2.jpg

3.3.1. 현, 타악기, 첼레스타를 위한 음악

이처럼 버르토크는 원숙기로 갈수록 자신의 음악의 좀더 세세한 부분까지 수학적인 원리를 적용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의 후기 작품들은 차라리 '음향기하학'이라고 부르는게 어울릴 정도로 정교하고 복잡해진다.[32]

특히 1936년에 씌어진 '현, 타악기, 첼레스타를 위한 음악'은 버르토크가 추구했던 음악의 종착역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언급할만한 가치가 있다. 위 그림은 현, 타악기, 첼레스타를 위한 음악을 공부할 때 반드시 보게 되는 1악장을 도식화한 다이어그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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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악장은 총 88마디로 되어 있는 푸가인데, 피보나치 수열의 항에 해당되는 마디에서 음악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21마디째에서는 주제의 제시부가 끝나고 짧은 간주(episode)-캐논이 진행되며 34마디에서는 스트레토(stretto)[33]가 시작되면서 동시에 타악기(팀파니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어 55마디에서 긴장이 급격히 고조된 후 56마디에서 절정(climax)에 도달한다. 한편으로 88마디의 황금분할에 해당되는 마디는 54.4(88 * 0.618 = 54.384)마디로, 올림을 하면 피보나치 항에 해당되는 55마디가 된다. 즉, 이 55마디는 피보나치 수열 뿐만 아니라 황금분할에서도 의미가 있는 마디이다. 이 절정기를 거친 후 65마디째부터는 이전의 전개과정과 대칭을 이루면서 스트레토 캐논 - 유니즌/첼레스타 등장(78마디) - 스트레토(82마디)를 거쳐서 피보나치항 89의 바로 전에 해당되는 88마디에서 곡이 끝난다.

한편 수직방향, 즉 음역이나 화음 측면에서 1악장을 살펴보면 처음에는 A음(라)에서 시작된 후 점점 음역대가 넓어지다가 절정부에서 4옥타브(피아노 건반으로 봤을 때 2번째 Eb와 6번째 Eb)에 이른다. 절정이 끝난 후 다시 음역대가 좁아지면서 78마디에서 다시 A음으로 회귀하는 유니즌에 도달한다.

이처럼 가로를 마디, 세로를 음역으로 설정하고 곡을 전개해 보면 그림과 같은 마름모형태의 다이어그램이 나온다.

현, 타악기, 첼레스타를 위한 음악 2~4악장에서도 이처럼 흥미롭고 효과적인 구성의 묘미가 곳곳에 숨어 있다. 바르톡의 주요 작품에 대한 해설과 분석을 해 놓은 문헌이 굉장히 많으니까 좀더 깊이 알고 싶다면 이와 같은 학술문헌을 참고하기 바란다.

4. 주요 작품

4.1. 음악 목록에 대해

버르토크의 음악 목록은 언드라시 쇨뢰시(András Szőllősy , Sz.), 라슬로 숌퍼이(László Somfai , BB.) , 데니츠 딜(Denijs Dille, DD.) 세 사람에 의해 정리되었으며 각각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sz.와 BB.를 함께 사용하는데, 죌뢰지나 솜파이는 바르톡의 발표되지 않은 초기작품이나 습작에 대해서는 따로 분류를 하지 않은 관계로 그의 초기 작품은 DD. 번호를 사용하여 분류한다.[34]

한편 버르토크 본인이 붙인 작품번호(Opus, Op.)도 존재하긴 하지만 번호를 붙인 작품 자체가 그리 많지 않은 관계로[35] 잘 쓰이지는 않는다.

4.2. 오페라

4.3. 발레음악

4.4. 관현악

4.5. 협주곡

피아노 협주곡 3번

4.6. 실내악

4.6.1. 현악 4중주

현악 4중주 4번

버르토크의 현악 4중주는 베토벤의 현악 4중주 이후 실내악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군으로 손꼽히고 있다. 각 현악 4중주마다 새로운 실험과 작곡수법들이 시도되고 있어서 작곡된 시점의 바르톡 음악의 현재와 미래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이정표와도 같은 작품들이다. 6곡 중 2번이나 5번을 최고로 치는 경우도 있는데 각 작품 모두 뚜렷한 특징과 개성들이 있어 우열을 논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버르토크는 7번째 현악 4중주 곡도 작곡하려고 계획했지만 27마디의 스케치만 남기고 결국은 작곡하지 않았다.

4.6.2. 기타

4.7. 피아노

6곡의 불가리아 리듬무곡[37] 알레그로 바르바로
모음곡 '야외에서' 소나티나

4.8. 무반주 작품

4.9. 가곡

4.10. 합창

5. 여담



[1] 헝가리는 작명 순서가 성+이름순으로 한국과 같다. 버르토크가 성이고 나머지가 전부 이름. 일반적으로 알려진 '벨러 버르토크'는 헝가리 국외에서 표기하는 방식이다. [2] 다만 리스트는 출생지만 헝가리였을 뿐 오스트리아에서 소년기를, 프랑스에서 청년기를 보냈고, 장년기 이후 주거주지는 독일이었다. 그는 오스트리아 비밀경찰의 감시를 받을 정도의 헝가리 애국자로서 부다페스트 음악원을 설립했지만, 헝가리 집시 음악을 헝가리 민속음악으로 착각하는 등 헝가리 음악에 대한 이해도는 높은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의 마자르 달록이나 헝가리 랩소디는 사실 헝가리 집시 선율에 기반을 두고 있다. [3] 중국, 일본의 민요도 수집했고 한국의 민요도 두 곡 정도 수집했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이 헝가리, 슬로바키아, 루마니아의 민요들이다. [4] 특히 음악인류학(민족음악학, 비교음악학 등 모두 같은 말임) 전공자들은, 연구 대상이 예를 들면 인도네시아 가믈란이나 일본의 가부키 등 주로 비 서구권 음악, 즉 비 클래식 음악 위주인 여러나라의 "민족음악"을 위주로 연구하지만, 그런 이들에게도 바르톡이라는 인물과 그의 음악만은 매우 중요한 연구 대상이다. [5] 보이보디나 공국. [6] 사실 버르토크는 생애 중반까지는 작곡가보다는 피아니스트로 더 유명했다. 버르토크의 피아노 연주실력을 본 부다페스트 음악학원 원장이 그를 월반시켜서 바로 2학년으로 입학시켰을 정도. [7] 1848년 헝가리 혁명의 영웅 코슈트 러요시(Kossuth Lajos)를 기리기 위한 작품. [8] 그 때까지 헝가리의 음악인들은 화려하고 정교한 집시의 음악에 비해 단순하고 소박한 농촌의 민요는 음악적 소양이 없고 문화수준이 낮은 사람들의 천한 음악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집시 음악 우위론은 바르톡보다 70년 먼저 태어난 헝가리출신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였던 프란츠 리스트에 의해 굳건하게 형성된 개념이었는데, 버르토크와 코다이 시대가 돼서야 비로소 이런 편견이 무너지게 된 것이다. [9] 하지만 초판이 완전히 팔리는데 40년이 걸렸을 만큼, 거의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10] 결혼당시 버르토크는 28세, 마르타는 16세로 띠동갑이었다. 첫번째 부인 마르타도 버르토크의 제자였지만 후처인 디타도 그의 제자였고 모두 나이 차이가 많이 났다. 사실 예전에 좋아하던 사람이 있었으나, 차였다. [11] 벌라지는 1차대전 직후 헝가리를 장악한 공산주의 정권에 투신해서 적극적으로 활동했으나 공산주의 정권이 급속하게 몰락하는 바람에 해외로 망명하게 되고, 이후 바르톡과도 더 이상 인연을 맺지 못했다. [12] 버르토크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해서 주기적으로 큰 병을 앓았으며 이런 증상은 그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큰 병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 지내야 했으며 학자들은 이런 점들이 바르톡이 평생 내성적이고 사교적이지 못한 성격을 갖게 하는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고 있다. 바르토크가 얼마나 주변 사람과 교류가 없었던지, 바르토크와 지글러의 결혼은 그의 어머니조차 결혼식 당일(!) 알게 되었으며, 코다이와 도흐나니 같은 친구들은 한참 후에야 알고 뒤늦게 축하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13] 버르토크는 이 작품 이후 한동안 별다른 작품을 내놓지 못하다 1926년 들어 다시금 활동을 시작하는데, 이는 그가 그동안 추구해온 무조음악과 민속음악의 융합을 포기한 것이며, 그 이후 버르토크의 모든 작품들은 표현주의를 멀리하며 확고한 조성 위에 자리잡게 된다. [14] 이혼의 원인은 바르톡의 불륜. 첫 번째 아내도 12살 연하였는데, 결혼 당시 디타는 겨우 20살로 바르톡보다 무려 22살이나 연하였다! 다만 두번째 아내와는 특별한 잡음 없이 평생 같이 살았다. [15] 다들 아시다시피 버르토크의 모국인 헝가리는 2차대전 당시 나치와 파시스트에게 부역했던 나라이며 공식적으로는 2차대전의 패전국이다. 다만 독일이나 이태리에 비해 국력이 시원찮았고 전쟁참여도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크게 욕을 먹지 않았을 뿐. 그가 미국으로 떠나게 된 배경에는 이런 국가적인 분위기도 한몫 했다. [16] 한편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일반적으로는 그가 미국에서 가난하게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는 이런저런 후원으로 그럭저럭 먹고 살 수 있었다는 것이다. [17] 버르토크는 자신의 사후 부인과 아들의 생계를 위해 죽기 직전까지 작곡을 했다. 사망 당시 그의 악보에는 비올라 협주곡 스케치와 더불어 7번 현악 4중주의 스케치도 남아 있었다고 한다. [18] 세광음악사에서 출판한 '피아노 명곡집 2'권에는 버르토크의 소나티네가 수록되어 있다.그리고 프롬나드와 함께 멘붕을 일으킨다 [19] 다만 이렇다 보니 버르토크의 음악에 대한 글은 감상보다는 분석에 치우치는 경우가 많고, 가슴으로 느끼기보다는 머리로 이해하는 음악이라는 편견이 생겼다. 물론 어디까지나 편견. [20] 한국 민요도 2곡 정도 채집했다고 하는데 정확하게 어떤 곡인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21] 리스트의 헝가리 광시곡이 대표적인 예인데, 그가 인용한 헝가리의 민속 선율은 실제로는 집시 음악의 선율이다. [22] 다만 그가 작품에 인용한 민속음악 상당수에 집시 음악의 영향이 보인다. '6개의 루마니아 민속 무곡(Sz 56)'이 대표적 [23] 버르토크 선율의 인용을 표절이라고 비난하는 것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셰익스피어나 페로 같은 사람들의 작품이 당대의 통속 구전들을 편집하거나 그대로 썼던 적도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것이 작품의 창의성과 예술성을 저하시키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24] 이 곡은 D음을 기준음으로 해서 D-E-F#-B 다섯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25] C음을 기준음으로 C-D-E-F#-G#-A# 6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26] 헝가리어는 장모음과 단모음을 제대로 구별하지 않으면 동음이의어가 엄청나게 많아져서 의미가 뒤엉켜 버린다. 따라서 노래를 할 때에도 장모음과 단모음을 확실하게 구별해야 하기 때문에 부점 리듬 형태의 선율이 나오는 것이다. [27] 이처럼 화려한 효과가 상대적으로 덜하기 때문에 난이도 측면에서 간과되기는 하나, 버르토크의 어려운 피아노 곡들은 연주하기 굉장히 까다로운 것으로 악명이 높다. 일례로 연주자들에게 버르토크의 피아노협주곡 2번은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협주곡 2번보다 더 연주하기 어렵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것을 초연 때 자신이 연주까지 했다 [28] 황금비와 피보나치 수열은 서로 관련이 있는데 피보나치 전항과 후항 비율의 극한값은 황금비가 되기 때문이다. 버르토크가 활동하던 시기만 해도 황금비는 자연에서 널리 관찰되며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놀라운 공식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황금분할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 황금비는 실제로는 자연에서 관찰되지 않으며 아름다운 조각이나 건축물들이 황금비를 갖고 있다는 것도 사실과는 다른 것으로 확인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버르토크 음악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29] 곡 초반부에 등장하는 오스티나토의 마디수를 차례대로 적으면 3-8-5-5-3-13 이렇게 된다. [30] 그래서인지 황금비율과 피보나치 수열의 원리를 활용한 작곡 지도나 음악 교육에 대한 논문과 책이 꽤 많다. 이들 문헌에서는 당연히 버르토크가 매우 중요하게 언급된다. [31] 온음음정이 아니라 반음음정을 기준으로 계산한 것이다. [32] 다만 미국으로 이주한 이후에 씌어진 최후기의 작품들은 특유의 정교함이 약해지고 대신 좀더 전통적인 작법을 많이 도입하고 있다. [33] 스트레토는 푸가나 캐논에서 쓰이는 기법이다. 보통 푸가(캐논)의 시작부는 한 성부의 주제가 완전히 제시된 다음에 다른 성부에서 주제가 등장하는데(이를 응답:answer 또는 모방:imitation이라고 한다), 전개부에서 주제가 다시 제시될 때 주제 제시가 끝나기 전에 다른 성부에서 주제를 제시하기 시작하는 기법을 스트레토라고 한다. [34] 버르토크의 초기작품 상당수는 작곡가 본인의 요구에 의해 최근까지 공개나 출판이 금지되어 있었다가 저작권 기간이 끝난 후에야 공개되었다. 이런 이유로 초기 작품들만 뒤늦게 따로 정리가 된 것이다. [35] 세 개의 리스트로 되어있는데, 1번과 2번은 습작들로, 3번만이 학생 시기 이후의 곡이다. [36] 정확히 말하자면, 부다와 페스트(다뉴브 강을 경계로 좌우로 나뉘어진 부분)의 합병 50주년 [37] 미크로코스모스 6권에 수록된 6개의 모음곡 [38] 참고로 미국의 현대음악 작곡가 조지 크럼은 이 곡을 기초로 하며 곡명이 비슷한 마크로코스모스(Makrokosmos) 곡을 썼는데, 이 쪽은 버르토크의 작품과는 달리 피아노의 내부 조작과 타악기적인 사용 등에 중점을 두었다. [39] 1.Serenata: Comodo 2.Allegro diabolico 3.Scena della Puszta: Andante 4.Per finire: Comodo [40] 이와 비슷하게 벨기에의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 외젠 이자이도 같은 이름의 작품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