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의 주요 수상 및 수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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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Мстисла́в Ростропо́вич | Mstislav Rostropovic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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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므스티슬라프 레오폴도비치 로스트로포비치 Mstislav Leopoldovich Rostropovich Мстисла́в Леопо́льдович Ростропо́вич |
별칭 | 슬라바(Slava) |
출생 | 1927년 3월 27일 |
소련 자캅카스 SFSR 바쿠 | |
사망 | 2007년 4월 27일 (향년 80세) |
러시아 모스크바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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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첼리스트, 지휘자 |
학력 | 모스크바 음악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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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의 첼로 연주자.파블로 카잘스와 함께 20세기 최고의 첼리스트 중 한 명으로 여겨지는 거장이다. 뛰어난 기술과 해석을 선보이며 첼로의 위상을 전에 없이 높였다고 평가받는다. 또한 프로코피예프, 쇼스타코비치, 벤저민 브리튼 등 동시대의 유명 작곡가들과 영향을 주고받았고, 그들로부터 새로운 헌정 작품을 받아 첼로 레퍼토리를 크게 확장시켰다.
로스트로포비치는 슬라바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며, '첼로의 천재'(Genius of the Cello)[1] 등의 수식어 또한 가지고 있다.
내가 천국에 간다면
모차르트 시대에 첼로를 연주했던 사람들에게 화를 낼 것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악기의 진가를 보여주지 못한 것이 정말 이해 가지 않는다.
―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2]
―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2]
2. 생애
2.1. 유년 시절
로스트로포비치는 1927년 당시 소련의 공화국이었던 아제르바이잔의 바쿠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그의 가족은 오렌부르크로 이주했고, 이어 1943년 모스크바에 정착했다.로스트로포비치는 4살 때부터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웠고, 파블로 카잘스를 사사한 아버지에게 10살이 되면서부터 첼로를 배우기 시작했다.
16세가 되는 1943년에 그는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했다. 그 곳에서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로부터 배우기도 했다. 두 거장이 모두 젊은 로스트로포비치를 굉장히 총애했던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2.2. 청년 시절
1945년에 있었던 소련 연주대회를 비롯한 다양한 경연에서 우승하면서 첼리스트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50년에는 당시로서는 가장 권위있었던 스탈린상을 받기도 했다.1955년에 그는 볼쇼이 극장 소속의 인기 소프라노였던 갈리나 비시넵스카야(Galina Vishnevskaya)와 결혼했으며, 1956년에는 모스크바 음악원 첼로 교수가 되었다.
2.3. 음악 활동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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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로스트로포비치, 쇼스타코비치, 리흐테르 |
1949년 프로코피예프는 그를 위해 첼로 소나타(Cello Sonata in C major, Op. 119)를 작곡했고, 쇼스타코비치의 첼로 협주곡 1,2번도 로스트로포비치를 위한 것이었다. 1950년에는 스비아토슬라프 리흐테르와 협연했다.
그의 국제적 경력은 1963년 리에주 음악원[3]에서, 그리고 1964년 서독에서 시작되었다.
로스트로포비치는 서유럽에서 수 차례의 콘서트 투어를 가졌고, 서방에서 많은 녹음을 하여 그의 명성을 굳혔다. 리흐테르와의 협연으로 베토벤 첼로소나타를 녹음하였고,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과 협연하여 오이스트라흐, 리흐테르와 녹음한 베토벤 3중 협주곡은 불멸의 명반으로 손꼽힌다. 아울러 셀이 지휘하는 클리브랜드 오케스트라와 협연하여 오이스트라흐와 녹음한 브람스 2중 협주곡 역시 오늘날까지도 이를 뛰어넘는 녹음을 찾기 힘들 정도이다.
서방 작곡가와의 교류도 깊었는데, 그 중에는 그에게 첼로 소나타, 첼로 교향곡을 포함한 많은 첼로 곡을 헌정한 벤저민 브리튼도 있었다.
뛰어난 피아노 반주자이기도 했던 브리튼은 로스트로포비치와 함께 대표적인 명연으로 기억되는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를 녹음하기도 했다. 로스트로포비치가 '브리튼과 연주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평했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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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트로포비치와 벤저민 브리튼 |
1968년 8월 21일, 영국의 음악 축제인 '더 프롬스'에서 로스트로비치는 소련 국립 교향악단과 안토닌 드보르자크의 첼로 협주곡 B단조를 연주했다. 공교롭게도 전날 밤 소련과 바르샤바 조약군이 프라하의 봄을 저지하기 위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했고, 드보르자크는 체코 작곡가였다.
비록 그의 공연은 야유와 시위 이후에 진행되었지만, 공연 후 그는 관객들에게 큰 박수를 받았다. 로스트로포비치는 작곡가의 고향이자 그가 사랑했던 도시, 프라하를 향한 연대의 표시로 지휘자 악보를 하늘 높이 들었다고 한다.
2.4. 망명
로스트로포비치는 러시아의 민주주의와 표현의 자유를 위해 저항했던 인물이고, 그 결과 소비에트 체제로부터 많은 탄압을 받았다.일찍이 1948년 그의 스승이자 음악적 동료인 쇼스타코비치가 교수직을 박탈당했듯이, 로스트로포비치 또한 학교에서 쫓겨났다. 1970년에는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을 자신의 집에서 보호하며 그를 옹호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는 그를 큰 정치적 위기에 빠뜨렸다.
외국 공연이 제한되었고, 소련 주요 도시에서도 그의 연주 기회가 줄어들었다. 결국 로스트로포비치는 1974년 가족과 함께 소련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했다. 1978년에는 소련 시민권을 박탈당하기까지 했다. 그는 1990년에서야 소련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2.5. 망명 이후
1977년부터 1994년까지 로스트로포비치는 미국 워싱턴 D.C.에서 미 국립 교향악단의 음악감독 겸 지휘자를 맡았다. 그러면서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마르타 아르헤리치,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 등의 피아니스트들과 계속해서 음악적 관계를 이어갔다.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동안, 로스트로포비치는 그 벽 아래서 즉흥 연주를 선보였다. 이 연주는 세계적으로 크게 유명해졌다. 연주 영상 링크 (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3번 부레 1번을 연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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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장벽 아래의 로스트로포비치 |
1980년 4월 23~24일 국립 교향악단과 함께 내한해서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을 하였고, 이후 같은 해 5월 31일부터 6월 1일까지 다시 내한해서 연주회를 할 예정이었으나 갑작스럽게 취소했다. 당시 언론에선 갑작스러운 발병으로 인해 공연을 취소했다고 밝혔다. 활기잃은 舞臺藝術界(무대예술계) 매일경제 6월 14일 기사
2.6. 말년
2005년 6월 20일 빈 무지크페라인에서 첼리스트로서의 은퇴 공연을 했다. 그러다가 로스트로포비치의 건강은 2006년 악화되었고, 지휘자로서의 공연도 2006년을 끝으로 은퇴했다. 2007년 3월에는 팔순을 기념하기 위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초청으로 크렘린 궁에 방문하기도 했지만, 이후 건강이 다시 급격히 악화되어, 그 해 4월 27일에 대장암으로 숨을 거두었다. 모스크바 노보데비치 묘지에 묻혔다. 향년 만 80세.3. 연주 스타일 및 음악 성향
살아생전 그의 연주스타일은 굉장히 화려하였고 거대한 톤으로 기억 된다. 당대로서는 한계가 있던 첼로주법을 뛰어넘어 무수히 많은 귀중한 첼로 주법을 만들어 내었고 이는 훌륭하고도 소중한 첼로계의 자산이 되었다. 살아생전 벤저민 브리튼,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등과 친구 사이였으며 음악적으로 교류하고 작곡을 사사하기도 하였다. 주로 낭만 시대의 곡을 연주하기를 좋아했고 특히 지금도 명음반으로 회자되고 있는 안토닌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 b단조를 대단히 아끼고 즐겨 연주했다.4. 악기
그가 평생 그의 분신처럼 아꼈던 악기는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 의 1711년작 duport(듀포르) 이다. 이 첼로는 1800년대 첼리스트 듀포르의 이름이 붙어있으며 당시 나폴레옹 앞에서 연주를하고 나폴레옹 의 치하를 받을때 잠시 그의 손에 잡혔다가 나폴레옹의 실수로 낸 큰 상처자국이 아직도 남아있다. 1711년 부호의 위촉으로 제작된 이 첼로는 구매자인 부호가 스트라디바리에게 평소 첼로값의 두배를 줄테니 걸작 하나 만들어 주시게 라는 부탁을 받고 만들어 졌다고 하며 이에 자극받은 스트라디바리가 최고의 재료들을 사용해서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그의 걸작이라 평가 받는다. 로스트로포비치 사후 일본 음악재단(nippon music foundation) 에서 미화 2000만불[4]에 매입 하였다. 관련 자료5. 평가
20세기를 빛낸 불세출의 명첼리스트로, 파블로 카잘스와 함께 현대 첼로계의 아버지라 불린다. 카잘스가 현대 첼로계의 길을 제시하고 설계했다면 로스트로포비치는 그길을 세련되고 화려하게 디자인 했다. 로스트로포비치의 스타일은 카잘스의 그것을 넘어 당시로는 혁명적이게 화려하고 세련되었으며 많은 혁명적 주법을 고안해내었고 그만의 거대한 톤으로 기억된다. 무엇보다도 로스트로포비치의 안토닌 드보르작 첼로 협주곡 B 단조는 첼로계의 성서 이자 교과서로 불리면서 카잘스의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처럼 그의 트레이드 마크 이자 상징이 되었으며 지금도 무수히 많은 첼리스트들 에게 많은 영감과 배움을 주고 있다.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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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트로포비치와 카라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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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트로포비치-비시넵스카야 가족 |
제자 장한나를 육성했으며, 유수한 첼리스트들 중 유일하게 장한나의 생애 첫 앨범의 지휘를 맡기도 했다. # 당시 악단은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나 벤자민 브리튼 외에도, 오자와 세이지와 상당한 친분이 있었다. 둘은 유럽, 미국, 일본 등지에서 수십 차례 협연을 하였고, 사적인 교류도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로스트로포비치의 마지막 첼로 협연의 지휘를 맡은 것도 오자와였다.
7. 수상 및 수훈
로스트로포비치는 평생 50여개의 상을 받았다.음악 관련 수상
- 그래미상(1984년, 루돌프 제르킨과 협연한 브람스 피아노와 첼로를 위한 소나타 앨범)
- 폴라음악상(1995년)
- 에른스트 폰 지멘스 음악상(1976년)
- 그라모폰 명예의 전당 헌액(2012년)
- 울프상 예술 부문(2004년)
- 런던 왕립 음악원 명예 회원
- 왕립 필하모닉 협회 금메달(1970년)
러시아와 소련으로부터
- 대조국공훈훈장(2007년, 1급 - 세계 음악에 대한 뛰어난 공헌 및 다년간의 창의적 활동)
- 자유 러시아의 옹호자 메달(1993년,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용기와 헌신)
- 레닌상(1964년)
외국으로부터
- 오스트리아 과학 예술 명예 훈장(2001년, 1급)
- 아제르바이잔 '독립' 훈장(2007년)
- 아르헨티나 자유의 훈장(1994년)
- 벨기에 레오폴드 훈장(1989년)
- 영국 명예 KBE(1987년)
-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198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