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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테러 관련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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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납치된 비행편 |
<colbgcolor=#ffffff,#1f2023> AA11 · UA175 · AA77 · UA93 | |
납치 오인 비행편 | KE085 · DL1989 | ||
충돌 | 구 세계무역센터( 붕괴) · 펜타곤 | ||
관련 정보 | 최후의 메세지 · 노란 리본 작전 | ||
관여 인물·단체 | 알카에다 · 오사마 빈 라덴 ·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 · 모하메드 아타 | ||
테러 피해자· 영웅 |
베티 옹 · 키스 A. 글래스코 · 릭 레스콜라 · 토드 비머 | ||
관련단체 | 뉴욕 경찰국 · 뉴욕 뉴저지 항만청 · 뉴욕 소방국 · 미국 연방항공청 · 윈도우즈 온 더 월드 · 아메리칸 항공 · 유나이티드 항공 | ||
테러 이후 | 반응과 여파 · 테러와의 전쟁 · 애국자법 · 9.11 메모리얼 & 뮤지엄 · 세계무역센터( 트윈타워즈 2) | }}}}}}}}} |
1. 개요
2001년 9월 11일에 발생한 9.11 테러에 대한 각계의 반응과 그 여파에 대하여 다루는 문서이다.에릭 홉스봄이 제1차 세계 대전의 영향력을 두고 " 20세기는 1914년부터 시작되었다"라고 표현한 것과 같이 9.11 테러로 인해 진정한 21세기가 시작됐다고 말할 정도로 이 테러는 인류 전체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9.11 테러의 여파로 인해 순차적으로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 대침체, 정치적 극단주의의 부흥 등이 차례로 일어났고 사건 이후 20여년이 흐른 지금 돌이켜봐도 코로나 대유행과 더불어 21세기 가운데 가장 영향력 큰 사건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2. 여파(종합 요약)
이 날 발생한 테러는 인류 역사상 가장 피해가 큰 테러로 기록되고 있으며, 미국은 물론이고 국제적으로도 굉장히 큰 여파와 수많은 변동 사항들이 양산된 끔찍한 사건이었다. 9.11 테러 사건에 대해 잘 모르거나, 그냥 이 사건이 존재했다는 사실만 아는 정도의 사람들이라면 그냥 비행기가 충돌해서 생긴 건물붕괴 사태 정도로만 알고 있겠지만, 해당 테러는 그 속에 숨은 수많은 여파들이 존재했고 미국을 포함해 전 세계를 두려움에 떨게 했다. 이 날에 대한 공포심과 무력감, 슬픔은 [age(2001-09-1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되고 있으며 상당수의 미국인들은 본인이 살아오면서 겪었던 충격적인 사건으로 9.11 테러를 가장 먼저 꼽는다.1. 미 정부 입장
우선 미국은 이 사건으로 엄청난 분노를 표출했으며,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해 테러를 직접적으로 주도한 단체와 이하 연루된 집단들을 모조리 척살하려 들었다. 심지어 본인들의 조사에 협조해 주지 않는 국가 및 단체들은 모두 테러범들과 한통속인 것으로 생각하고 미국과 적대적인 세력으로 간주하겠다고 할 정도로 수틀리면 국가간의 전면전도 할 태세였다. 실제로 조지 부시 당시 대통령은 사건 이후 연설에서 "우리는 테러를 행한 자와 테러를 지원한 자를 따로 구분하지 않겠다."라고 선언하였고 이 말에 소규모 테러 단체부터 미국과 친하지 않은 국가들까지 모두 꼬리를 내리고 미국의 요구에 협조했다.[1]
2. 테러 당시의 상황
테러 당시의 미국이 느낀 무력감과 패닉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납치된 비행기들은 이미 이륙해 버려서 관제소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그들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현위치는 어디인지 식별하는 것 밖에는 아무런 방법도 취할 수가 없었고[2], 미 공군 입장에선 그들을 격추시키자니 윤리적인 문제에 충돌해 섣불리 강행할 수가 없었다. 또 이미 불바다가 되어버린 뉴욕 입장에서도, 불길에 휩싸인 세계무역센터를 도저히 손 쓸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북쪽 건물과 남쪽 건물 모두 충돌 지점이 80~90층대로 높은 위치였어서 소방차로 살수를 하는 것도 불가능했고[3], 충돌 지점 위에 가까스로 살아남은 상주자들도 이미 건물 계단들이 모조리 파괴되어 버려서 아래로 내려가 대피하는 것 조차 불가능했다.
뉴욕 소방국에서도 당연히 소방 헬기를 이용해 그들을 옥상에서 구조하려 했으나, 화재에서 흘러나오는 연기들이 위로 뿜어져 나오면서 헬기의 시야를 가리고, 동체의 온도를 급상승시키는 데다 뜨거운 상승기류는 헬기의 추력을 상쇄시켜서 추락시킬 수도 있는 바람에, 그 헬기마저 구조 작전으로 투입시킬 수가 없어서 회항시켜야 했다. 당시 소방관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주변 상황 수습 정도와, 소방관들이 직접 일일이 계단을 타고 올라가, 죽기를 각오하고 신고자들에게 다가가는 수밖에 없었다.[4][5] 건물을 지탱하던 철골은 고열로 인해 변형되어가지, 그들을 구조할 방법은 없지, 뉴욕 소방국에서도 충돌 지점 상부에 있던 생존자들을 그저 지켜만 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경찰의 경우에도 다를 바는 없었다. 테러범들은 이미 테러 직후 사망했으니 체포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순식간에 교통 마비가 와버린 맨해튼 가를 정신 없이 통제하기 바빴다.
관제소를 비롯해 미국 전역에 있는 시민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첫 번째 납치 비행기인 아메리칸 항공 11편까지만 봐도, 관제소는 이미 충분히 패닉에 빠질 정도로 황당한 상황이었다.[6] 그렇게 정신 없던 와중에 유나이티드 항공 175편마저 통신이 끊긴 채 제멋대로 항로를 변경해 버렸고 이 둘은 각각 오전 8시 46분, 오전 9시 3분에 세계무역센터의 북쪽 건물과 남쪽 건물에 그대로 강타했다. 두 번째 충돌 기체인 UA175편이 충돌했을 당시 미 정부는 황급히 미국 상공에 있는 모든 비행기들을 강제 착륙하라 지시하였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이땐 이미 납치된 비행기가 두 대나 더 있었고, 이들은 뒤늦게 식별이 되어버린 바람에 손 쓸 도리가 없었다.
오전 10시 경 납치된 것으로 확인된 비행기만 무려 4대나 되었으니, 관제소와 미국 시민들은 도대체 비행기가 몇 대나 납치 당한 건지 예측할 수가 없어 극심한 불안과 공포를 느꼈다.[7] 즉, 약 1시간 30분 동안 매우 짧은 텀으로 4대의 비행기가 미국 각지의 주요 시설들[8]에 일제히 충돌을 당했으니, 언제 어디서 본인이 있는 곳이 공격 받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공포에 떨었던 것. 관제소도 여기저기 교신을 시도하고, 어떻게든 테러범들을 저지하려 바쁘게 움직였지만, 이미 상공에 떠버린 비행기를 가로막을 수는 없었다. 심지어는 테러 당일 전국 곳곳의 학교들조차 비상 휴교령이 내려질 정도로, 당시의 시민들이 느낀 공포감은 실로 최고조에 달했다.[9]
3. 엄격해진 공항 심사
오늘날의 미국 공항의 심사가 이토록 까다롭다고 소문이 자자한 것도 9.11 테러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2001년 당시의 미국 항공 보안은 지금처럼 엄격하지가 않았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기내에 칼을 소지하고 탑승할 수가 있었다. 액체가 담긴 텀블러나 물병, 4인치(약 10~11cm) 이내의 칼, 라이터, 기타 위험할 수 있는 물건 등등 모두 다 허용이 됐었다. 그리고 조종실의 문도 잠그지 않았다. 이 허점을 이용하여 알카에다 조직은 비행기를 납치할 수 있었고[10], 이 날 이후 미국의 항공 보안법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강화되었다. 이전에 허용됐던 칼이나 액체들은 얄짤 없이 반입이 불가해졌으며, 조종실 잠금은 물론이고 입출국 심사 과정을 거쳐 탑승객 한 명 한 명에게 미국에 방문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며 심문하고 있다.
4. 해외에도 미친 영향
9.11 테러의 여파는 미국으로 한정된 것이 아닌 전 세계 각국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일단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장 있을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도 경비 인력을 더욱 충원하여 경계를 강화해야만 했으며, 실제로 오사마 빈 라덴은 9.11 테러를 기획하고 있을 당시 한국도 테러 대상으로 지목한 바가 있다.[11][12] 바로 위에 있는 북한에서도 사건 직후 바로 테러 집단을 비난하며 본인들 소행이 아님을 밝혔다. 북한 이외에 미국과 대적 관계에 있는 국가들도 순순히 영역 진입을 허용해 주었으며[13], 테러만 발생했다 하면 본인들 소행이라며 큰소리치던 타 테러 단체들조차 9.11 테러는 절대로 본인들 소행이 아님을 강조할 정도로 미국의 분노에 벌벌 떨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것 말고도 수많은 국제 관계들이 얽혀 있다.
5. 관련주 주가 폭락
9.11 테러가 발생하면서, 이날과 연관되어 있는 기업들이나 관련주들의 주가가 폭락하는 계기가 되었다.
6. 인종 차별 및 증오
테러 직후 한동안 이슬람이나 사우디 국적의 사람들이 대중교통을 이용하려고 하면 내려달라며 탑승을 거부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특히 무슬림은 물론 이슬람과 하등 관련없는 시크교도들까지 터번을 쓰고 다닌다는 이유로 덩달아 공격 당하는 등 보복성 증오범죄도 생겨났다.
7. 막대한 경제적 손실
미국 전 영공에 있는 비행기들의 이착륙을 강제로 제한시켰으니 실시간으로 발생하는 경제적 손실도 매우 상당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테러와의 전쟁이나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발발하면서 지출된 국방비도 만만치 않았다.
8. 무고하게 희생된 피해자들
2001년 9월 11일의 날씨는 너무나도 맑고 화창했다. 바람도 거의 불지 않아 산책하기 딱 좋은 날이었으며, 기온은 20도로 덥지도 춥지도 않은 선선한 기후였다. 그런 평화로운 날에 갑자기 하늘을 가르는 굉음과 함께 비행기가 충돌하면서 순식간에 뉴욕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으며, 미국 전체를 패닉에 빠트렸다. 납치된 비행기 4대의 모든 탑승객들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하고 전원 사망하였으며, 당시 세계무역센터에 근무하고 있던 상주자들[14]과 펜타곤 직원들, 뉴욕 소방관과 경찰관, 주변에 있던 뉴욕 시민 등 총 2900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하루 아침에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3. 정치
9.11 테러의 여파로 미국은 ' 애국자법'을 통과시키며 '국가위기사태'라는 명목 하에 국민의 권리를 제한하는 법을 제정하였고, 연방 정부의 관료주의의 벽으로 인해 정보 공유가 안 된 점이 사태를 막지 못한 원인이라 보고 국토안보부와 같은 최고 국가기관을 만드는 등 여러 가지로 민주주의 사회, 특히 미국 같이 자유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국가에서 보기 드문 제약이 가해졌다.게다가 팔레스타인에서는 이 소식을 듣고 테러단체 회원들과 주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축제를 열어 환호했다고 한다. 이는 얼마 안 가 공포 분위기로 돌변하게 되는데 이스라엘의 아리엘 샤론 총리가 계획적으로 PLO를 도발해서 화해무드를 박살내고 언론이 잠잠한 틈을 타 팔레스타인에 폭격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미국에게 한 방 먹이고자 했던 알카에다의 작전이 오히려 미국의 역린을 건드리는 바람에 팔레스타인의 무슬림 동포들이 그 대가로 학살의 참상에 놓이게 된 것이다.[15][16] 설상가상으로 아리엘 샤론은 테러단체와의 협상은 무효라며 오슬로 협정을 무시하고 PLO의 수장 야세르 아라파트의 집무실을 공격해 파괴하고 아라파트가 촛불에 의존하여 집무를 보게 하는 역사적인 순간을 연출함으로써 분노한 팔레스타인 대중들이 이스라엘과의 대화의 길을 선택하는 대신 하마스 류의 극렬 무장 투쟁단체를 지지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게 되어 가자지구에서 또 다시 피를 흘리는 유혈사태의 단초를 제공했다.
한편 2004년 10월, 오사마 빈 라덴은 인터넷을 통해 "왜 9.11 테러를 계획하게 되었는가?"를 비로소 밝혔다. 1982년 6월 이스라엘 공군의 무자비한 폭격으로 붕괴되는 베이루트의 고층 빌딩과 무고한 희생자들의 모습을 TV로 지켜보며 이를 갈았던 빈 라덴은 이스라엘의 후원국인 미국의 건물을 공격해서 그대로 되갚아줄 것을 결심했다고 한다. 번역본 그리고 20년 뒤 빈 라덴과 휘하 테러리스트들은 이스라엘이 그랬듯이 미국인들에게 끔찍한 결과를 안겨주었고 그것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다시 증오와 복수의 악순환으로 계속 이어지게 되었다.
또 이 사건은 미국 내와 전 세계 무슬림들을 암묵적으로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인식되게 만들었고 사건 이후 미국에서만 1년 동안 400여 명의 무슬림들이 증오범죄를 당했다고 한다. 알카에다의 테러 때문에 애꿎은 무슬림들까지 피해를 본 것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9.11 테러 이후 '테러리스트'라는 무슬림들을 칭하는 멸칭이 하나 더 생겼다.
이때부터 그 유명한 슬로건인 테러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테러와의 전쟁은 끝이 없는 수렁으로 빠지게 된다.
4. 경제
사건이 일어난 것이 미국 주식시장 개장 전이었기 때문에 미국 정부는 긴급히 1주일동안 주식 시장을 열지 않는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17] 그러나 테러 장면이 여과 없이 생중계로 전 세계에 전파되면서 세계 주식시장은 그야말로 폭삭 무너져 버렸다. 안 그래도 IT버블 붕괴로 인해 기진맥진한 상태였던 코스피 시장과 버블 붕괴로 인해 이미 아작나 버린 코스닥 시장은 "종목 89.7%[18]가 하한가, 종목 98%[19]가 하락"이라는 진기록[20]을 세우며 폭락했다.[21]어쨌거나 한국증시와 일본증시가 폭락하자 인도증시, 중동증시 등이 싹쓸이로 폭락하고 결국 유럽증시까지 싸그리 폭락하는 등 도미노 폭락 사태가 1주일 간 지속되었다. 주가가 이정도로 폭락하고 미국의 성장률도 1%에 근접하자 연준은 경기부양을 위해 테러가 발생한 시점부터 2001년 말까지 기준금리를 4차례 인하했다. 이에 따라 2000년 말에 6.5%였던 미국 금리가 2001년 말에는 1.75%로 급락했다.
9.11 테러 이후 월드컵이라든가 이라크 전쟁[22]이 터지면서 세계 증시는 상승 추세로 돌아섰지만 결국 대침체가 일어났다.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는 이 사태 이후 자금 세탁 방지 업무 뿐만 아니라 테러리스트 자금 조달 방지 업무도 맡게 된다.
5. 국제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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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피해 당사국. 당시 미국의 분노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미국 건국 이래 이 정도의 분노와 비견될 수 있는 사건은 진주만 공습 정도.[24] 미국이 아니었다면 감히 내세우지도 못할 흑백논리를 내세우면서까지 테러 주도국에 대해 차원이 다른 보복을 예고했다. 위의 삽화와 같이 우리 편이 아닌 국가는 전부 적으로 간주하겠다고 전 세계를 향해 대갈하며 초강대국의 영향력을 여실히 드러냈다. 테러와 조금이라도 연관된 국가는 아예 지도에서 지워버릴 기세인 미국의 반응에 미국과 사이가 좋지 않거나 틈만 나면 미국에게 크고 작은 시비를 걸던 나라들도 유감을 표하며 납작 엎드렸고, 이는 러시아와 중국 같은 군사 강대국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전에도 아랍 국가들에 대한 미국인들의 인식이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이로 인해 미국 국민들은 아랍 국가들에 대해 매우 큰 반감을 갖게 되었으며 미국 정부 및 미국 의회에서도 알카에다를 완전히 멸망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절대다수였다.[25]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특수부대를 풀어 오사마 빈 라덴을 수색했다. 마침내 빈 라덴의 거취를 찾아낸 미국은 DEVGRU를 투입하여 작전명 넵튠 스피어를 실행해 테러가 일어난지 10년 만에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한다. 그렇게 복수를 어느 정도 끝낸 뒤에는 이슬람권에 한해서 개입을 줄여나가고 있다.[26]
- 동아시아
- 대한민국: 혹여 윗동네에서 일으킨 사건이었다면 6.25 전쟁이 재발하거나 최악의 경우엔 제3차 세계 대전이 한반도에서 벌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대한항공 085편이 납치되었다는 잘못된 소문이 알려지면서 또 다시 비상이 걸리기도 했다. 경찰은 주한미국대사관을 통제하고 주한미군도 1급 비상경계령을 내려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국군도 10여 년 뒤에 일어난 천안함 피격 사건과 연평도 사태 때처럼 휴가가 짤리고 군장차고 근무할 정도의 준 전시상태는 아니었지만 훈련이나 경계가 강화되었다. 하지만 후술하듯 북한이 이례적으로 꼬리를 내리고 미국에게 애도를 표하며 자신들의 소행이 아님을 분명히 하였기에 크게 한시름을 놓게 되었다. 다만 북한과 연관은 없었다고 해도 강대국이자 우방국인 미국이 본토 공격을 당한 만큼 상당히 긴장할 수밖에 없었고, 거기에 당장 2002 한일 월드컵 개최를 앞두고 있는 상태였기에 굉장히 골치 아픈 사태였다. 김대중 대통령도 "반드시 위기를 극복하겠다"고 담화했다. 한국인은 1명( 재미교포 포함 시 28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고 한다.[27] 한국은 9월 13일과 14일을 전국적으로 추모일로 정하고 5분간 묵념 시간을 가졌으며, 비인도적인 테러에 대해 공식적으로 애도를 표하는 성명서를 내고 국회도 규탄 결의안을 냈다. 후에 알카에다가 한국에서 미국 국적 여객기를 납치해서 주한미군 기지를 테러하려 했음이 밝혀지면서 한국 정부가 알카에다에 격분하기도 했다. 국가정보원은 그해 11월에 기존의 테러대응 방침만으로는 미흡하다는 것을 명분으로 테러방지법을 국회에 발의했다. 그러나 국정원의 권력이 강화된다는 점을 들어 제2의 국가보안법이 아니냐는 여러 시민단체 및 언론 등의 반발 및 동년 설립된 독립국가기관 국가인권위원회의 반대에 부딪혀 좌초되었다. 참여정부 시기인 2003년에 여러 수정안을 거쳐 다시 발의되었으나 통과되지 않았다가 2016년 3월 2일 테러방지법이 발효되었다.
- 북한: 틈만 나면 간악한 미제놈들 어쩌고 하며 미국을 비난하던 북한도 이례적으로 사건이 터진 뒤 단 몇 시간만에 테러 규탄 및 희생자 애도 성명을 발표했다.[사진] 북한은 사실상 대부분의 국가들과 단절하는 쇄국 정책을 고수하고 있는지라 타국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나도 웬만하면 묵묵부답으로 반응하지 않기에 이것은 정말 이례적인 것으로 당시 미국에게 본인들이 테러의 주범이라고 오해받지 않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29] 당시 북한은 테러지원국 지정 및 경수로 지원 약속 파행으로 굳어버린 북미관계의 개선을 원하고 있었던 참이었기 때문에 당시 테러 행위에 대해 규탄했고 알카에다와 북한은 어떠한 관계도 없다며 적극적으로 해명했다. 북미관계의 개선을 원했던 당시 북한의 상황이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치기도 해서 2001년 11월 3일에는 반테러 국제 협약에 전격적인 가입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저팔계 외교가 한창일 때였고 2002년 1월에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 악의 축'으로 지목되면서 한반도 정세는 복잡한 긴장감이 높아졌으며 북미관계는 더욱 틀어졌고 이는 하반기 영변 핵 파동으로도 이어졌다.
- 일본: 한국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최우방국이던 일본도 비상에 걸렸다. 하물며 2002년 한일 월드컵 개최도 확정된지라 더더욱. 사건 다음날 아침부터 일본 정부는 북한 선박 침투 사건 이후 2년 만에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열어 미국에 긴급 지원팀을 파견할 것을 검토했고, WTC에 입주한 자국 기업 주재원 생사확인에 주력했다. 아울러 재미 일본인 후송을 위해 홋카이도에 있던 정부 전용기 2대를 도쿄 국제공항에 파견토록 했으며 경찰측도 주일미대사관 및 총영사관, 이스라엘 대사관 등지에 경비를 강화했다. NHK를 포함 모든 방송사들 역시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특보를 거듭 내보냈다. 더 나아가 정부측은 '테러대책 특별조치법'을 제정하고 그동안 준비한 '유사법제 3법' 통과에 박차를 가해 2003년에 최종 통과시켰다. 그 외 2001년 올해의 한자로 戰(싸움 전)이 선정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 중국: 당시 중국은 1999년 코소보 전쟁 중 미국의 중국 대사관 폭격과 테러 몇 달 전에 일어난 하이난 섬 정찰기 충돌 사건[30], 대만으로 이지스함 판매 논란 등으로 미국과 대립하고 있었고 사건 이후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위한 영공 통과를 강요받고 있던 파키스탄의 후견국이었으나 꼼짝도 못하고 파키스탄에게 영공을 통과시켜달라고 권유까지 했다. 일단 장쩌민 국가주석이 직접 미국 정부에게 애도 성명과 테러집단에 대한 비판 성명을 내긴 했지만, 당시 반미 감정이 팽배했던 터라 일부 중국인들은 속보를 듣고 만세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중국 내부에서도 매우 격렬한 논쟁이 오갔다. 미국은 밉지만 무고한 민간인들을 공격하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행위라고 반박되었다. 리버럴한 사람들 중에는 편들 게 없어서 저런 광신도를 편드냐는 사람들도 있었다. 결국 보다못한 중국 정부가 개입해서 논쟁글들을 무더기로 삭제하고 입단속을 시키는 사태가 벌어지고 나서야 조용해졌다. 하지만 중국도 극단 이슬람 세력의 테러에 당한 경험이 있어서 2010년대 이후에는 이슬람 테러리스트 세력에 관한 문제만큼은 미국과 뜻을 함께하고 있다. 사실 중국의 입장만 놓고 본다면 9.11 테러는 미국과 단교 위기에 놓였던 당시 중국의 국면을 타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는데, 천안문 6.4 항쟁 이후 미중관계는 크게 악화되어 클린턴 행정부 시기부터 공공연하게 베이징 올림픽 보이콧을 운운하는가 하면 미국은 베트남과 수교하고 북한과 제네바 협정을 체결함으로 중국 주변국들과 중국의 관계를 약화시키는 한편 대만 총통 리덩후이의 미국 방문을 허용하고 대만에 무기를 판매하여 중국을 격노하게 했다. 여기에 앞서 말한 하이난 섬 정찰기 사건으로 인해 존 볼턴을 필두로 한 미국 지도부가 하나의 중국 원칙 따위는 깨부수고 대만과 재수교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9.11로 인해 중국이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저자세로 나왔고, 이 덕분에 미국과의 단교를 면한 것. 하지만 반대급부로 9.11 이후 미국이 이라크와의 전쟁에 매달리고 있던 시기는 중국에겐 그야말로 천금 같은 기회가 되었다. 개방 이후 급속한 발전의 길을 걷던 중국은 이 시기에 미국의 견제를 거의 받지 않고 냉전 이후 미국과 경쟁관계에 오르게 될만큼의 국력신장을 이루게 된 것.
- 이슬람권
-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 알 카에다와 오사마 빈 라덴을 내놓으라는 미국의 요구에 탈레반은 거절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은 전혀 상관없다고 발뺌했지만[31] 당연히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탈레반의 현대문물 탄압으로 미국에 테러가 있는지도 몰랐던 수많은 아프간 주민들은 뜬금없이 미국과 전쟁이 났다는 소식을 전해들어야 했다.
- 파키스탄: 탈레반 정권의 후원자였으나 죽고 싶지 않으면 당장 길을 비키라는 미국의 요구에 조용히 길을 비켰다. 처음에는 미국이 자신들의 영공을 통과하는 것을 거부했으나, 미국의 리처드 리 아미티지 국무부 부장관의 "영공을 통과시켜주지 않으면 파키스탄부터 당장 석기시대로 돌아갈 준비를 하라"는 협박에 영공을 개방했다. 물론, 그냥 통과시켜준 것은 아니고 영공 통과료는 받았다. 이 부분에 대해 원래 파키스탄이 후견국인 중국을 믿고[32] 미국의 영공통과를 거절했는데, 이 소식을 전해들은 중국 정부가 깜짝 놀라 파키스탄에게 영공을 개방하는 게 낫지 않겠냐는 권유 하에 이뤄졌다. 사실 미국의 요구는 엄청난 외교적 결례였지만 그 당시의 미국은 정말로 눈이 제대로 뒤집힌 상황이라서 파키스탄이 영공을 열어주지 않았다면 국제법이고 나발이고 전부 무시하고 파키스탄부터 개박살을 내고 지나갔을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외교압력에 굴복한 파키스탄의 무샤라프 대통령은 영공통과에 대한 최소한의 명분을 확보하기 위하여, 파키스탄이 지고 있는 300억 달러의 부채를 갚아주는 것을 미국이 적극적으로 도와서 파키스탄이 UN의 지지를 얻어낸 뒤 인도와 이스라엘을 전쟁에 개입시키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당시 최빈국이었던 파키스탄은 이때 미국이 부채를 거의 다 갚아 준 덕분에 경제 재건에 성공해서 국가부도를 면했다. 파키스탄이 세계 최빈국에서 그나마 먹고 사는 게 어느 정도 가능한 나라로 바뀐 때가 바로 이 테러 참사 이후부터였다.
- 이라크: 이 상황에서도 이라크 정부는, 정확히 말하자면 사담 후세인은 " 9.11 테러는 신의 응징"이라는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 이후 2002년에는 미국으로부터 북한, 이란과 더불어 ' 악의 축'으로 찍힌 상태였는데 2003년 초에 STS-107 폭발 사고로 미국/이스라엘의 우주비행사 8명이 숨졌을 때도 "신의 뜻이다!"라고 어그로를 끌었고 이에 후세인을 벼르고 있었던 미국은 분노하여 이라크 전쟁으로 후세인 정권을 붕괴시키며 후세인은 목이 매달렸다. 또한 후세인 자신은 텔레비전을 통해선 미국에 큰소리를 쳐놓고는 부총리이자 외무장관인 타리크 아지즈를 시켜서 뒤로 호박씨 까는 태도로 미국에게 알카에다 소탕을 돕겠다는 의사를 몰래 전달하면서 "우리도 테러리즘에 시달리는데 공조합시다."라는 태도를 보여줬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안면몰수하는 태도가 이미 꼭지가 돌아버린 미국 대통령 앞에서는 그저 기만책으로밖에 안 보였다는 것이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공식적인 자리에서 꼴 좋게 됐다고 조소해 놓고 뒤로 장관급 친서를 보내 말장난하는 것은 "내가 너희 나라에 벌어진 참사를 조롱해서 국내 지지율을 뽑고 있지만, 그건 내 진심이 아니었으니까 알아서 잘 헤아려달라"라는 행태였고 안 그래도 화가 머리끝까지 난 미국 입장에서 이해해 줄 너그러운 아량 따위는 없었다.[33] 하지만, 이라크가 아무리 이중적이고 도발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해도 정작 9.11 테러의 배후도 아니었고 주동자도 아니었던데다가 진짜 테러의 주동 세력과는 종교적으로 대척점에[34] 서 있는 국가였다는 점에서 미국의 이라크 처리는 그저 분풀이를 위해 엄한 놈을 상대로 멱살을 잡는 꼴에 지나지 않았다. 그저 분풀이를 위해서 대량 살상 무기라는 허상의 트집을 잡아 전쟁을 시작한 미국은 정작 대량살상무기는 못 찾고 전쟁에 매달려 막대한 경제적 손해를 봤으며, 이라크는 후세인 정권의 붕괴와 함께 일어난 종파 간 대립으로 정치적으로 혼란만 겪게 되었다. 이후엔 되려 ISIL이라는 희대의 악마들이 나오는 바람에 이라크 지역은 한동안 더한 혼돈에 시달려야 했기에, 미국은 이라크에서 10년 넘게 현지인은 물론 "자국민에게도 피해를 줘 놓고 큰 돈까지 버리며 뭐 했냐?" 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더욱 치명적이었던 것은 전쟁에 매달리느라 정작 이후 진짜 새로운 적이자 경쟁상대로 떠오르게 되는 국가의 발호에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 팔레스타인: 사건 초기에 이들이 일으킨 일이라는 잘못된 정보가 알려지자 중국과 북한처럼 즉시 부정하며 테러에 대한 애도의 뜻을 밝혔다. 하지만 신문에는 "우리의 피는 싸구려가 아니다!"라는 기사를 썼는데,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매일 죽어나가는 것에는 추모는커녕 관심도 없으면서 미국인이 죽는 것에는 대서특필을 하며 애도하는 것에 항의한 것이다. 그러나 아라파트는 애도를 했으면 했지 하마스를 비롯한 테러단체 대원들과 주민들이 테러에 대해 환호한 사례도 있는 바람에 미국과 그 우방국인 이스라엘의 심기를 건드렸고, 결국 미국의 묵인 아래 이스라엘 총리인 아리엘 샤론의 지시를 받은 이스라엘군의 폭격으로 처참히 박살나고 말았다. 이스라엘의 레바논 내전 개입으로 빈 라덴이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기 위하여 이스라엘의 후원국인 미국에 이를 갈면서 복수를 결심했는데[35] 그것이 이루어지자 테러 피해 국가인 미국의 우방국인 이스라엘이 다시 이슬람 민족인 팔레스타인을 공격했고, 이에 분노한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하마스를 지지하는 엄청난 악순환이 된 것이다.
- 사우디아라비아: 범인 대다수가 자국민이었다는 점에서 사우디는 패닉에 빠졌다. 사우디 외교관들이 연일 미국 방송에 나와서 읍소하는 한편, 사우디 정부는 미국 측의 수사에 절대적인 협조를 선언하면서 테러범의 가족들까지 죄다 붙잡아서 미국에 조공으로 바쳤다. 미국의 칼날이 아프간으로 향한 것을 확인한 사우디는 처음에는 중재를 시도하다가 미국이 협상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즉시 아프간과 단교하고 미국에 군사기지를 제공하는 등 한동안 납작 엎드렸다. 얼마 안가 공화국으로 세워진 아프간과 다시 수교하지만 2021년 탈레반이 재점령했어도 단교하지 않고 얼마 후 사우디 외교관은 대사관으로 복귀하였다.
- 유럽
-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서유럽 국가: 당시 유럽도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자본주의 진영이자 서방세계의 대표적인 나라들인 만큼 전반적으로 미국과 입장이 같았다. 특히 영국의 경우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지시로 버킹엄 궁의 군악대가 미국의 국가인 Star Spangled Banner를 추모의 의미로 연주했다. 국빈 방문 없이 버킹엄 궁에서 타국의 국가가 연주된 최초의 사례였다. 각국 정상들은 직접 미국 정부에 애도 성명과 테러집단에 대한 규탄 성명을 냈다.
-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직접 애도 성명과 테러집단에 대한 규탄 성명을 냈으며, UN에 테러 대책 기구 신설을 제안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때까지의 푸틴 대통령은 친미, 친서방파로 평가되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남오세티야 전쟁 이후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며 돌아선 뒤에도 9.11에 대해서는 단호한 입장이다. 오히려 푸틴은 중동 지역의 안정화를 위해 바샤르 알 아사드를 도와야 하고 그래야 9.11의 원수인 알카에다에게 복수를 할 수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러시아도 체첸을 필두로 한 캅카스 지역의 이슬람 반군에 시달리고 있으며[36] 베슬란 학교 인질사건 당시 미국은 체첸군을 독립군이 아닌 테러리스트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했고 체첸 독립을 부정적으로 여겼다. 매년 스페츠나츠와 바그너 그룹[37] 부대들을 보내 매년 수천 명씩 반군을 소탕하며 심지어 테러단원의 시신을 헬기 갈고리에 매달고 순회공연을 하기도 한다. 이 곳 반군은 자살테러 정도는 일상이고 포로로 잡은 군인들을 모조리 참수하는 걸로 유명해서 러시아도 테러에는 학을 뗀다. 콘돌리자 라이스에 따르면 테러가 벌어진 당일에 상황이 상황인지라 군대 비상 체제에 돌입한다고 푸틴에게 미리 연락을 해 뒀다고 한다. 푸틴은 당일에 예정된 모든 군 훈련을 취소해서 미국과 러시아 간의 긴장 상태를 낮춰 주었다고 한다.
- 그 외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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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이로 인해 이슬람공포증이 본격적으로 도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비 이슬람 문화권 국가에서는 이슬람에 대한 혐오, 분노, 공포를 은연 중에 드러내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이슬람교 포교가 쉽지 않게 되었다.[38] 또한 문화적으로도 신나고 흥겨운 음악이 쇠락하기 시작했는데 당대의 라틴 팝 음악가인 라 오레하 데 반 고흐가 남미와 스페인에서는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라틴 팝이 미국 내에서 힘을 못 쓰게 되었다.
그 외에 평소 무슨 테러만 일어나면 서로 자기들이 했다고 자랑하기 바빴던 테러조직들도 미국의 보복이 두려워 미국의 정보기관들에게 자기가 한 짓이 아니라고 적극적으로 해명하고 다닌 것은 기본이고, 더 나아가 다른 놈들이 의심스럽다고 앞다투어 밀고를 했다. 알카에다 역시도 자기들이 벌인 일이 절대로 아니라고 극구 부정했다. 오사마 빈 라덴 본인도 미국이 자기뿐 아니라 탈레반을 통째로 멸망시켜 버리겠다고 노발대발하자 "난 모르는 일이다"라고 발뺌을 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서 결국 자신들의 소행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했다.
소련 붕괴 이후 한동안 국제사회는 냉전의 위기감에서 벗어난 것과 더불어 미국의 국제문제 개입도 많이 줄어들면서 선진국들을 중심으로 탈냉전이라는 매우 낙관적이고 낙천적인 분위기가 주를 이뤘다.
그러나 9.11 테러 이후 10여 년간 미국이 다시 전 세계적인 영향력을 휘두르면서 이러한 낙관적인 분위기는 사라졌다. 당장 9.11 이전에 나온 90년대 세계 국가들과 역사, 미래를 전망한 책들과 9.11 이후의 세계와 역사, 미래를 예측하는 내용을 다룬 책들만 봐도 분위기가 일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200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9.11의 영향이 조금은 사그라들었다고 하지만 2008년 미국을 강타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세계적인 대공황을 불러오면서 팍스 아메리카나 체제 아래서 인류의 영원한 번영을 외치던 낙관주의는 사라져 버렸다.
오리아나 팔라치는 9.11 테러 소식을 듣고 오랜만에 펜을 들어 9.11을 '이슬람이 미국을 침공한 역 십자군 전쟁'이라고 부르면서 알 카에다와 이슬람 세력을 맹비난해서 만년에 파시스트란 오명을 얻었다. 이슬람 단체들의 고소에도 팔라치는 후속편까지 썼다.[40]
시랜드 공국 역시 큰 곤경에 처할뻔했다. 9.11 테러 이전에 1975년부터 여권을 대량 발행해 왔기 때문인데 다행히 테러 등 범죄에 악용된다는 우려로 인해 1997년에 대량 말소하여 화를 피할 수 있었다.[41] 그대로 방치했다면 미국이 빡친 상황인데 영국 입장에선 골머리를 썩었을 것이다.
6.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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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가 건축물을 들이받은 사례는 테러 이전에도 이미 존재했다. 가장 유명한 사건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훈련 중이던 B-25 중형 폭격기 1대가 안개 때문에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빌딩을 들이받아 버린 것. 승무원을 비롯한 다수의 사망자가 나왔고 92층과 93층이 박살났으나 건물이 무너지는 정도의 큰 피해는 없었다. 이로 인해 쌍둥이 빌딩 또한 1960년대 당시로서는 가장 큰 비행기인 보잉 707이 건물에 충돌해도 버틸 수 있게 설계되었다.[42] 이로 인해 디스커버리의 특집에 나온 건설업계 사람들의 인터뷰에서는 모두들 비행기가 쌍둥이 빌딩에 충돌했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에는 기껏해야 몇 층이 부서질 정도의 피해를 생각했으며, 건물이 무너졌을 때에는 큰 충격을 받았다는 의견을 들려주었다.
비행기가 충돌하면서 엄청난 크기의 충격이 가해지긴 했지만 어찌됐든 항공기 충돌에도 바로 붕괴하진 않아 한동안 버티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문제는 여객기에 적재되어 있던 4만 리터에 달하는 항공유가 발화하면서 고열이 발생해 철골이 약해진 것. 쌍둥이 빌딩에 사용된 공법은 튜브 프레임 구조라는 것으로, 대부분의 건물 하중을 건물 최심부의 엘리베이터 코어와 건물의 철제 외벽으로 지탱하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은 하중을 지탱하는 기둥과 내력벽을 최소화할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건물 내부의 공간 확보에는 유용한 공법이었다. 그러나 항공유가 탑재된 항공기가 충돌한 후 내벽이 적은 구조를 타고 층 전체에 연료가 퍼져 동시다발적인 화재가 발생했고, 화재의 열기는 철골이 버틸 수 있는 온도를 넘어서게 되었다.
여기서 그 유명한 "Jet fuel can't melt steel beams"라는 음모론이 나왔다. 단순히 당시 환경에서 발생했을 온도와 철의 녹는점만 비교하여 건물의 붕괴에는 화재가 아닌 다른 원인이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별로 신빙성이 없다. 철의 녹는점은 1500도가 넘지만, 강철의 특성이 변하여 물러지기 시작하는 온도는 600도에서 철물의 내력이 3분의 1로 감소하고 800도에선 0에 수렴한다. 대장장이가 쇠를 불에 달궈서 모양을 내는 것과 대형 제철소의 섭씨 수천 도에 달하는 용광로를 비교해서 생각하면 쉽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하중의 상당 부분을 지탱하던 외벽이 충돌로 인해 크게 파손된 데다가 코어 또한 충격으로 손상된 상태였다. 여기에 고열로 인해 철골이 더더욱 힘을 잃게 되자 더 이상 상층부의 무게를 지탱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걷잡을 수 없는 붕괴가 시작되고 말았다. 훗날 빈 라덴과 알 카에다는 자신들도 건물이 무너질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으며, 기대 이상이었다는 발표를 하기도 했다.
자세한 사항은 9.11 테러/세계무역센터의 붕괴 문서 참고.
7. 항공
제트엔진 시대의 도래 이후 세계 항공업계에 가장 큰 충격을 준 사건으로 이 사건 이후 전 세계 항공업계는 공황 상태에 빠져 버렸다. 대형 여객기가 뉴욕 한복판의 랜드마크를 들이받는 초유의 사건이 일어났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이렇게 비행기에 대한 공포가 퍼지고 승객수가 급감하면서 여러 항공사들이 도산하였는데, 대표적인 회사들이 사베나 항공[43], 스위스에어[44], 안셋 오스트레일리아 항공 등이다.미국의 메이저 항공사들도 결국 2000년대 차례차례 챕터 11 파산 보호 신청을 하게 되어 결국 부시 대통령이 9월 22일 항공교통안전 및 시스템안정화법을 제정해 항공교통안정위원회를 통해 연방 차원에서 항공사들에게 대출보증을 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본의 아니게 델타, 유나이티드, 아메리칸, 사우스웨스트의 대형 4개사로 반 구조조정이 이루어진 상태다.
게다가 일부 기종이 이 사건의 여파로 운항을 중지하게 되는데, 대표적으로 뉴욕과 런던/파리를 오가던 초음속 여객기 콩코드가 있다.[45]
한편 이 사건을 계기로 전세계의 항공 보안이 매우 엄격하게 강화되었다. 현재 전 세계의 민항기들은 반드시 조종실 문을 철저히 잠가야 하며[46] 조종사 교대, 승무원들의 용무, 극히 제한적인 일부 상황이 아니라면 절대로 문을 열지 않는다.[47][48] 설령 출입시도자가 항공사 사장이든 심지어 대통령이나 국왕이라도 마찬가지다. 과거에는 이것이 의무가 아니어서 쉽게 조종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49] 9.11 테러가 터지기 전 미국 국내선은 커튼 한 장으로 조종실이 분리되어 있는 경우도 있었고[50], 설령 잠겨 있어도 문을 두드리면 열어주는 경우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심지어 러시아에서는 조종실을 구경한다고 기장의 아들이 들어왔다가 비행기를 추락하게 만든 적도 있는데, 이 사건은 내셔널 지오그래픽 《 항공 사고 수사대》에서도 방영되었다.[51]
현재 여객기들의 조종실 문은 굉장히 튼튼하게 제작되며 잠금장치를 훼손하거나 물리적으로 문을 여는게 불가능하도록 설계돼있다. 조종실에서 문 밖의 상황을 볼 수 있는 CCTV도 설치되어 있으며 실수로 조작되어 문이 열리는 일이 없도록 조종사가 특정 스위치를 누르고 있을 때에만 조종실 문의 잠금장치를 조작할 수 있는 스위치가 작동된다. 만약 정해진 절차를 거치지 않고 조종실에 출입하려는 시도가 벌어지면 (대표적으로 노크) 조종사는 즉시 차단 스위치를 설정하도록 규정되어 있는데, 그렇게 되면 조종실 문은 일정 시간 동안 완전히 봉쇄돼서 조종실 안에서도 문을 열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조종실 문을 잠가야 한다는 철저한 규정과 항공기 설계는 아이러니하게도 저먼윙스 9525편 추락 사고라는 또 다른 비극을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52]
이후로 미국 항공기에서는 보안검색이 매우 엄격해져서 손톱깎이와 면도기도 휴대하지 못하게 되었다. 탑승권이 없으면 탑승구까지 들어갈 수 없게 하는 규정도 이때 시작됐다. 마찬가지로 기내식에서도 칼로 썰어먹는 요리가 사라지고 미리 잘게 잘라 칼을 사용할 필요가 없도록 했다. 또 독극물 음식 테러로 기장과 부기장이 동시에 사망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 액체류 반입도 엄격하게 제한하여 물도 함부로 마시지 못하게 했으며, 기장과 부기장이 식사를 하는 시간도 서로 다르게 설정하고 식사 메뉴도 서로 다르게 제공한다고 한다.[53] 심지어 미국행 항공기에 한해서는 기내에서 단체로 모여있지 말라는 안내까지도 한다.[54] 이러한 조치는 항공 뿐만 아니라 철도를 비롯한 거의 모든 다중이용시설에 적용되었다.
게다가 공군과 민간항공의 항공 관제 용어 차이가 초동대응에 혼선을 불렀다는 지적이 나왔고 이후 군과 민간의 항공용어가 통일되었다. 기존의 공군과 항공국의 대응 체계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이외에도 공항 내의 안전수칙과 보안이 강화됐으나,, 여전히 내부평가에서 많은 평가요원들이 칼을 비롯한 흉기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총(!)까지 들키지 않고 통과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후로도 비행기 폭탄 테러 시도가 계속 일어나는 등,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미국 교통안전청은 늘 새로운 수칙을 도입하고 보안강화를 한다고 하지만 TSA 직원의 불법 무기 및 마약 밀수[55], 신체 스캐너 실험 과정 중 흉기를 발견하지 못하고 넘어가는 등 사건이 자꾸 터지는 바람에 미국 언론에서 심심할 때마다 단골손님처럼 까는 부서가 돼버렸다.
미국은 9.11 테러 이후로 항공 보안을 강화했으며, 각종 논문과 전문가들이 CAPPS II나 SecureFlight의 실용성과 그 성능에 대해 의구심을 표하면서도 미국이 끝끝내 프로파일링 시스템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CAPPS I과 같은 프로파일링 시스템의 유효성은 9.11 테러 이전까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가 9.11 테러로 인해 제한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9.11 테러 직후나 요즘이나 그 효과가 의심받는 건 여전하다. 그러나 이런 시스템이 테러 시도를 어렵게 할 수 있고 항공기 테러를 단념시키는 데에도 한몫할 것이다라는 주장도 있다.
문제는 CAPPS나 SecureFlight 같은 시스템의 효과를 알기가 힘들다는 것. 이유는 간단하다. 이 시스템을 거쳐가는 승객들 중 몇 명이 범죄자 또는 잠재적 범죄자인지 우린 모른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인권 단체들은 사람들을 대놓고 프로파일링하고 특정 인종[56]을 주시하는 시스템은 모든 사람들이 동등하다는 헌법을 위반하는 위헌적 시스템이며 이는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미국 사법계에서는 이것이 위헌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고 TSA에서도 특정 인종을 목표로 프로파일링을 실시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되었듯 TSA의 정확도가 의심받고[57] 프로파일링 시스템의 정확도가 의심받으며 이를 없애라는 주장은 여전히 나오는 게 현실이다.
공항의 보안이 한층 상승하면서 미국 국적의 항공기에도 보안 요원이 탑승하게 되었다. 이를 Federal Air Marshal(연방 항공 보안 요원)이라 하는데 여긴 아예 총을 소지하고 승객으로 위장해 항공기에 탑승한다. 요지는 테러리스트가 날뛰면 요원이 나서서 테러리스트를 제압한다는 것. 그러나 TSA와 프로파일링 시스템처럼 비판받는 건 여기도 마찬가지다. 일단 근무를 하지 않고 잠을 잔다는 건 워낙에 잘 알려진 사실이고, 2001년에는 아예 항공기 화장실에 .357 구경 권총을 놓고(!) 자리로 돌아와 이후 화장실에 들어온 10대 소년이 이를 발견해 승무원에게 이를 건네주는 사건도 있었다. 그 와중에 동료 보안 요원은 그 소년과 승무원이 대화하는 게 조금 심각해 보여 끼어들었다가 별 거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 자리로 돌아갔다고 한다. 비슷하게 2004년에는 공항 화장실에 권총을 두고 나오는 사례도 있었다고. 그리고 항공 보안 요원의 정확도에 의구심을 갖는 사람들도 많다.[58]
항공 업계에 미친 영향에 대해 말하자면 당시 안좋은 방면에서 포화 상태였던[59] 미국의 항공업계를 리셋시킨 것에도 9.11 테러가 한몫했다는 주장이 있다. 당시 항공 업계는 인프라가 포화 상태라 모든 게 뻑뻑하게 돌아갔는데, 9.11 테러가 일어나 모든 항공기가 착륙한 데다 며칠간은 항공기 운항이 금지된 바람에 포화 상태의 업계에 한숨 돌리고 모든 것을 재정비할 시간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외 당시 민항 산업의 불투명한 미래로 인해 각종 시위를 벌이던 항공사들의 노동조합들은 9.11 테러 이후 항공사와 회유하려는 자세로 돌입하고 승객들은 서비스의 질보다는 안전을 우선시하며 항공 산업의 새로운 판도를 짜기도 했다는 주장이 있다. 한마디로 9.11 테러 이후 항공 업계가 침체된 것을 9.11 테러에서만 그 이유를 찾을 게 아니라는 뜻. 다만 전 세계 항공기 승객 수는 2004년 중순이 돼서야 9.11 테러 이전의 수와 엇비슷해진 건 사실이다.
게다가 이 사건으로 수많은 항공사들이 엄청난 재정적 타격을 입고 회사가 휘청거리면서 몇몇 항공사들은 재정 상태를 되돌리기 위해 서비스 품질을 크게 줄여 원가 절감을 함으로써 서비스 품질의 하락을 불러일으켰다. 아메리칸 항공은 직항 대륙횡단 노선을 제외한 국내선 이코노미 승객들에게 기내식 제공을 전면 중단했으며, 델타항공과 유나이티드 항공은 4시간 미만의 항공편에서는 이코노미 기내식을 제공하지 않게 되었다. # 특히 유나이티드 항공은 팬 아메리칸 항공이 파산한 이후 미국 최고의 서비스 품질을 자랑할 정도로 좋은 항공사였으나, 9.11 테러로 인해 파산 위기에 빠지자 서비스 품질을 크게 하락시켜 2010년대 중후반까지 온갖 비판을 받다가 유나이티드 익스프레스 3411편 강제 하기 사건으로 나쁜 면에서의 클라이맥스를 찍으며 온갖 비판을 받고서야 제정신을 차리고 2019년에 와서야 서서히 9.11 테러 이전의 서비스 품질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여담으로 9.11 테러가 일어난지 정확히 2개월 하고도 하루가 지난 2001년 11월 12일, 뉴욕 상공에서 존 F. 케네디 공항을 이륙한 AA587편이 뉴욕 퀸즈 주택가에 추락하는 대형 참사가 터졌다. 원인은 잘못된 비행 규정으로 밝혀졌으나, 시기가 시기였던지라 9.11 테러 당시처럼 모든 항공기가 강제로 착륙하고 출입이 통제되는 등 큰 혼란에 빠졌다.
그리고 이후 항공기 관련 범죄에 대한 국제여론은 그야말로 바닥까지 추락했다. 9.11보다 10여년 전에 발생한 승객과 승무원 전원이 사망한 에어 인디아 182편 폭파 사건의 경우, 배후가 시크교였음에도 제노포비아나 시크교에 대한 증오가 거의 없었던 것에 비해서 땅콩 회항 때는 사상자가 전무했던 것에 비해 국제여론이 매우 싸늘했다.
덤으로 승무원들이 자발적으로 호신술 훈련에 참가해 승무원은 안전요원이라는 인식을 심게 했다.
8. 스포츠
참사의 여파는 스포츠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NBA, NFL, NHL, PGA, LPGA 등 주요 스포츠 대회들도 경기를 취소하거나 경기 중 유니폼에 추모 뱃지를 달도록 했다. 특히 NBA 측은 2001/02 시즌 동안 전 구단 유니폼에 성조기와 리본 모양 추모 뱃지를 달도록 했다.미국 프로레슬링 단체 WWF 측도 스맥다운 9월 13일 방영분을 추모 특집으로 제작하고 1997년부터 사용해 오던 브랜드 이름인 'RAW is WAR'를 10월 1일 방영분부터 'RAW'로 되돌렸으며, 현재 WWE 소속인 젤리나 베가의 부친이 9.11 테러 희생자 중 한명이었고 2003년 2주기 행사와 2021년 20주기 행사에 참여해 사망자 호명식을 진행했다.
9월 26일 개최 예정이던 뉴욕 세계 레슬링 선수권대회도, 10월 7일 개최되려던 뉴욕장사씨름대회도 다음해로 각각 연기되었다. 2002 한일 월드컵 준비를 앞두고 있었던 한일 양국도 경비를 강화했다.
마침 한 달 뒤 열린 2001년 메이저리그 월드 시리즈에서 뉴욕을 연고로 하는 뉴욕 양키스는 월드시리즈 4연패에 도전했지만 창단 4년차 열풍을 일으킨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의 7차전 명승부 끝에 지고 말았다.
또한 바로 이듬해에 열린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는 이곳 현장에서 발견된 성조기를 들고 와서 미국의 애국주의가 대폭발하는 대회가 되었다.
9. 학계
9.11 테러의 여파는 학계, 특히 문명 및 역사학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미 1996년 발간된 새뮤얼 헌팅턴의 저서 < 문명의 충돌>이 갑자기 날개 돋친 듯 팔려 '문명 충돌론'이 크게 힘을 얻었다. 이에 에드워드 사이드는 <도전받는 오리엔탈리즘> 등을 내며 끈질기게 반박했다.10. 대중매체
테러가 발생한 직후에는 대중매체에서 9.11 테러나 기타 테러를 연상시키는 묘사도 금기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다음 사례들처럼 많은 대중매체에서 의도치 않게 테러를 연상시켜 검열된 경우도 있다.세계무역센터가 들어가는 미디어 매체가 대부분 수정되었다. 영화 《 스파이더맨》에서 스파이더맨이 세계무역센터 사이에 친 거미줄로 은행강도를 붙잡는 장면이 있었으나 장면을 수정했고 개봉도 늦어졌다.[60] 또한 《 커맨드 앤 컨커 레드얼럿2 유리의 복수》에서 연합군의 해리어 전투기가 유리군의 핵발전소에 부딪치는 장면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덤으로 세계무역센터 관련 캠페인을 제거했다고 한다.
《 메탈기어 솔리드 2》에서도 아스널 기어가 맨해튼을 들이받는 장면[61]이 아예 없어졌고, 바로 주인공과 최종 보스가 페더럴 홀(미국 의회 옛 의사당 건물) 위에서 대치하고 있는 장면으로 넘어간다. 나 홀로 집에 2에도 세계무역센터가 잠깐 나오는데 영화가 개봉되고 사건이 발생한 이후 미국의 케이블 TV에서는 빌딩 장면 전체를 통편집해서 내보내고 있다. 이는 신세계무역센터가 완공된 현재도 이어지고 있는데, 재난영화에서 뉴욕이 등장할 때에 세계무역센터가 직접적으로 붕괴되는 모습은 절대 찾아볼 수 없다.
시즌 10까지 나왔던 세계적 인기 시트콤인 프렌즈는 당시 시즌8이 제작되어 2001년 9월 27일부터 방영을 시작하였는데, 이 사건으로 인하여 동년 10월 11일 방영될 시즌8 3회차 내용이 긴급하게 바뀌어 방영 전 재촬영하여 방영되었다. 해당 회차에는 챈들러가 신혼여행을 가려고 온 공항에서 쓸데없이 폭탄에 관한 농담을 하고 비행기 납치범으로 오해를 받아 조사를 받는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다른 때 같았으면 문제 없었을 내용이지만 해당 회차 방영 정확히 한 달 전에 비행기 납치를 통한 세계무역센터 테러 사건이 발생하였고, 제작진이 도저히 방영을 못 하겠다고 판단해 급하게 재촬영할 수밖에 없었고 다른 신혼부부가 챈들러 부부보다 먼저 와서 온갖 특혜를 받자 이를 질투한다는 내용으로 변경되었다. 원래 촬영분은 시일이 지나 2004년에야 영국판의 DVD 특전영상으로 공개되었다. 그리고 시즌8 전까지는 이 장소가 뉴욕임을 알려주기 위해 중간중간 화면 전환 시에 나오던 세계무역센터 빌딩의 모습이 이 시즌부터 나오지 않게 되었다.
마이크로소프트 플라이트 시뮬레이터 시리즈는 2002년 버전부터 WTC나 일부 마천루들을 삭제한 후 출시했다. 이후 2020년에 발매된 플라이트 시뮬레이터 2020에 와서야 Bing지도 기반 위성정밀지도가 기본으로 딸려오면서 마천루들이 부활하게 되었다.
뉴욕을 모티브로 한[62] 《 Grand Theft Auto III》에서는 LCPD의 경찰차량의 디자인이 NYPD에 가까운 디자인에서 LAPD와 유사한 디자인으로 변경되었고, 비행기가 고층 빌딩 근처로 날지 않도록 비행경로도 수정되었다.[63] 결정적으로 북미판 박스 아트가 변경되었는데[64] GTA 시리즈는 지금도 이 박스 아트의 전통을 물려받고 있다.
《 Grand Theft Auto IV》역시 뉴욕을 배경으로 한 게임이다 보니 9.11 테러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게임 중 하나이다. 작중에는 리버티 시티라는 가상의 도시로 뉴욕이 등장하지만 배경은 뉴욕과 비슷하다 못해 거의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65] 그러나 세계무역센터는 본작이 개발되기도 전에 붕괴되어 찾아볼 수 없고 작중 배경이 되는 리버티 시티는 테러 위험 때문에 모든 다리가 봉쇄되어 있고 지하철이나 관공서 건물에서 근무중인 경찰들은 자동소총으로 중무장하고 있다. 또 GTA 4에는 탑승하여 조종할 수 있는 항공 교통수단이 헬기 이외에는 없다.[66][67]
프로그레시브 메탈 밴드 드림 시어터의 뉴욕 공연을 수록한 5집 라이브 앨범이 불타는 세계 무역 센터가 그려진 앨범 커버로 9월 11일 발매되었으나 테러로 인해 급히 물량을 회수하고 수정된 커버를 사용해야 했다.[68]
게임 《 데이어스 엑스》에서는 개발자가 스카이박스에 세계무역센터를 넣는 것을 까먹는 바람에 게임 제작자들은 이를 보완할 게임 설정을 추가했는데, 그 설정의 내용이 "세계무역센터는 테러로 붕괴되었다."였다. 그리고 게임이 출시된 지 1년 뒤 실제로 일어났다.
SNK가 2008년에 출시한 KOF 98 UM의 미국 스테이지에서도 세계무역센터가 삭제되었다. 1998년에 출시된 KOF 98 때는 있었으나 리메이크 버전인 98UM을 내면서 그 사이에 사라진 세계무역센터를 지웠다.
노토리어스 B.I.G.의 1집 앨범 Ready to Die의 10번 트랙 Juicy에는 "blow up like the World Trade"라는 가사가 나오는데[69] 이를 따 온 JAY-Z의 The Blueprint 2: The Gift & The Curse[70]의 A Dream에서는 묵음 처리되어 나온다.
그리고 세계무역센터와는 관계없지만 비행기가 건물을 들이받거나 고층건물에 구멍이 난다거나 하는 관련 연출도 전부 퇴짜를 맞았다. 이 때문에 건블레이드 NY의 Wii 이식판에서는 이지 코스 3스테이지에서 건물이 뻥 터지는 연출이 아예 안 나오게 되었고, 아예 대놓고 건물에 구멍을 내면서 진행하는 구성이 일본이면 2스테이지에 있는 캐리어 에어 윙은 절대 캡콤 클래식 시리즈로 이식해 주지 못하고 있는 것.
또한 제작자들의 가치관에도 크고 작은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요코오 타로는 드래그 온 드라군 제작 이래 게임에서의 '폭력'에 대해 고민하던 와중 9.11 테러와 이어진 이라크 전쟁이 자신의 생각에 큰 전환점이 되었고, 후속작인 니어 레플리칸트에 그 영향이 들어가 있다고 술회한다.
악역이 얼마나 악랄한지 보여주기 위해 9.11 테러를 재현하는 사례도 나왔다. 테라포마스에선 테라포머가 여객기 조종사에게 독침을 쏴 조종해 그대로 항공모함에 들이받는 장면이 나왔고, 아인에선 사토가 암살대상 1명을 죽이기 위해 여객기를 납치하고 암살대상이 있던 건물을 들이받는 장면이 나왔다. 단, 애니에선 근처 빌딩을 무너뜨리는 것으로 대체됐다.
이후의 뉴욕을 배경으로 한 매체에서도 이 테러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캐릭터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대표적인 게 CSI : NY의 주인공 맥 테일러로, 아내를 9.11 테러 때 잃었다. 첫 화에서는 아예 그라운드 제로를 찾아가 아내를 추모하는 장면이 있을 정도.
또한 시간적 배경이 2001년 이전을 배경으로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치로도 사용되기 시작했다. 예시로 영화 아이리시맨에서는 1975년의 뉴욕 장면에서 잠시 저 멀리 뒷배경에 서있는 쌍둥이 빌딩을 보여준다.
10.1. 실화 바탕 작품
테러 후 한동안은 상술했듯 대중매체에서의 묘사가 금기시되다가, 몇 년이 지나고 나서는 테러 그 자체를 소재로 삼은 작품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때의 작품들로는 사건 당시의 영웅적 실화를 다룬 플라이트 93이나 월드 트레이드 센터 같은 영화 등이 있다. 이후 시간이 더욱 지나면서 9.11 테러를 소재로 삼았다 하더라도 분위기와 내용 면에서 보다 다양한 작품들이 등장했다.10.2. 밈화
이런 엄청난 피해를 입힌 초유의 테러 사건이었지만 정작 사건 발생 후 시간이 지나며 희화화를 금기시하는 불문율을 비틀고 밈이나 유머 소재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인터넷 커뮤니티 같은 곳뿐만이 아니라 심슨 가족, 사우스 파크, 패밀리 가이 등 유명 블랙 코미디 애니메이션이나 각종 시트콤에서도 자주 쓰이는 유머이다. 영어 위키백과에도 9.11 관련 유머를 따로 정리해놓은 문서가 있을 정도이다.레딧의 역사 관련 밈이 올라오는 서브레딧 r/historymemes에는 20년이 지나지 않은 사건에 관한 밈을 올릴 수 없는 규칙이 있는데, 사건으로부터 20년이 경과한 2021년 9월 11일이 되자마자 9.11 테러 관련 밈으로 도배되었다.
많은 사람이 사망한 실제 테러 사건을 희화화한다는 것이 한국의 정서로는 이해하기 어렵고 비도덕적이라고도 느낄 수 있지만 학자들 사이에서는 특유의 유머가 테러로 인한 트라우마의 극복을 도운 방어기제로 작용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학자 빌 엘리스는 사건이 발생한 바로 다음 날부터 유머로 쓰이기 시작했다는 조사 결과를 밝히기도 했다. 링크
[1]
물론 협조를 거부한 국가도 있었다. 바로
파키스탄인데, 그들은 당시 미국이 영공 통과를 요구했을 때 1차로 거절하였다가, 미국 국무부 장관이었던 리차드 국장이 "그래, 폭격 당할 준비나 해라. 석기시대로 돌아가게 될 테니까."라고 격노하였다. 파키스탄은 이 말을 듣고 바짝 겁 먹은 채 영공권을 통과시켜 주었다. 그래도 공짜가 아닌 영공 통과 사용료를 지급받고 미국이 파키스탄의 엄청난 부채를 대신 갚아준 덕택에 파키스탄은 최빈국에서 그나마 살만한 국가로 거듭나게 되었다.
[2]
그마저도 하이재커들이 트래스폰더를 강제 종료하고, 비행 중 기체 식별 번호를 계속해서 무단 변경하는 바람에 위치 추적 또한 쉬운 일은 아니었다.
[3]
소방차의 사다리를 최대로 올려, 호스를 끌어 올린다해도 80~90층대까지 물이 닿게 하는 것은 당연히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최신형 고가사다리차 또한 수압으로 인한 물 분사 높이까지 합쳐도 30층을 넘지 못한다.
[4]
그들도 이 방법이 너무나도 무모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겠지만, 이외에 달리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들은 이론대로라면 1층에서부터 80-90층 부근까지 직접 걸어 올라갔다는 게 된다. 물론 당시의 대다수 소방관들은 건물이 붕괴되면서 내부에 있다가 그대로
순직하였지만.
[5]
그들은 낮은 층에 있던 생존자들이나, 충돌 지점 밑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아 계단을 통해 내려오고 있던 사람들을 뒤로한 채, 계단을 반대로 오를 수밖에 없었다. 이 날 계단을 이용했던 생존자들은 올라오는 소방관들을 마주하면서, 본인들을 뒤로 하고 위를 향해 올라가는 모습을 보고 고마운 마음에 박수를 치면서도, 동시에 느껴지는 안타까움과 미안함에 무척 괴로웠다고
한다.
[6]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정상적으로 교신하던 비행기가 갑자기 통신이 끊겨 버렸고, 10분 뒤에 겨우 들려온 음성이라곤 신원불명의 한 사람이 보낸 의문의 구두 경고뿐이었다. 이후 기체 항로는 남쪽으로 급선회하여 갑자기 미국 남부로 향하기 시작했고, 당시 해당 기체 사무장이었던
베티 옹에게서는 비행기가 납치된 것 같다는 비상 연락을 해올 정도였으니 관제소 입장에선 AA11편 이 한 대만으로도 충분히 크게 당황할 만한 부분이었다.
[7]
물론 UA175편의 충돌 이후 전 미국 상공에 강제 착륙을 지시하였으니, 전과 같은 큰 사고는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이재킹 당한 비행기들이 국내 상공에만 존재한다고는 장담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항상 긴장하고 두려움에 떨어야 했을 것이다.
[8]
AA11편은 세계무역센터 북쪽 건물, UA175편은 세계무역센터 남쪽 건물, AA77편은 펜타곤, UA93편은 펜실베이니아주 외딴 광산에 각각 충돌했다. 참고로 마지막 기체인 UA93편은 아직까지도 정확하게 공개된 바가 없으나, 정황 상 워싱턴 D.C의 백악관에 충돌시킬 계획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기체는 당시 타고 있던 승객들의 영웅적인 반격으로 백악관까지 가지 못한 채 비행 도중에 공터로 추락하게 되었다.
[9]
애초에 정상적으로 이륙한 비행기가 갑자기 미국의 고층 빌딩에 충돌했다는 것부터가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상식 밖의 일이었고, 공포심과 불바다가 된 뉴욕 현장이 불러 일으킨 혼란은 9월 11일의 미국을 하루종일 난리법석으로 만들었다.
[10]
더군다나 이날 납치된 비행기 4편은 모두 국내선 비행기들이었다. 국내선 비행기들은 국제선보다 보안이 더욱 허술하였기에, 심사 과정이 더 느슨했을 것이다.
[11]
물론 기타 여러가지 문제들로 다행히 기각되었다.
[12]
납치가 실제로 진행됐던 4대의 비행기 외에 납치된 것으로 오해를 받은 납치 오인 민항기들도 두 대가 있었다. 그중에 한 대가 바로
대한항공.
[13]
소규모부터 대규모까지 수많은 테러 단체들이 보복이 두려워 자신들 소행이 아님을 적극 해명하기에 나섰다. 심지어 테러를 계획한 진범인
알카에다마저 처음엔 자기들의 소행이라고 했으나, 미국의 분노에 겁 먹어 갑자기 본인들이 아니라고 거짓말하기 시작할 정도였다.
[14]
충돌 지점 층에 있던 근무자들은 당연히 현장에서 즉사했고, 가까스로 살아남은 충돌 지점 외의 생존자들도 화재 연기나 건물 붕괴에 휘말리면서 수 백명에 달하는 희생자가 나왔다.
[15]
하지만 아랍인들에게 팔레스타인은 그냥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고, 같은 아랍인이라는 동족의식 같은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같은 나라 사람들끼리도 어떤 부족 출신이냐에 따라서 유혈사태가 끊이지 않는 동네가
중동인데, 외국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16]
앞선 주석은 중동 정치인들의 인식에 가깝고 어느 나라든 정치인이든 셈속은 비슷하게 마련이다. 반면 적어도 아랍 민중들 사이에서 팔레스타인은 분명히 동정과 지지의 대상이며 따라서 각각의 이슬람 파벌의 수호자라는 명분을 갖고 있는 사우디나 이란의 지도자들은 정치적 실익이 없을 때조차 팔레스타인에 우호적인 언행을 해온 것이 사실이다.
[17]
테러가 일어난 지역이 바로
뉴욕증권거래소와
나스닥 시장이 있는
월 스트리트를 비롯한 온갖 금융거래사들이 모여 있는 금융행정구(Financial District)였던 이유도 있었다. 이 지역에 있는 모든 시민들을 대피시키느라 주식 시장이 제대로 돌아갈 수 없었던 것.
[18]
591개. 이 기록은 아직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19]
646개.
7년 뒤에 하락종목 최다 기록은 무려 941개라는 기록으로 깨졌다.
[20]
당시 뉴스
[21]
다만 당시 풋옵션은 엄청난 수익률을 자랑했다.
[22]
대체로 전쟁은 자국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조건 하에 주식시장에서는 호재로 분류된다.
[23]
대문자로 쓴 US는 '우리(us)'를 가리키는 동시에 '미국(United States)'의
이니셜을 가리킨다.
미국의 상징인 흰머리수리와 함께 싸우든가, 아니면 열받을 대로 받아 독을 잔뜩 품은 독수리에게 맞서 싸우다가 갈기갈기 찢기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뜻이다. 첫 컷은
흰머리수리, 마지막 컷은
독수리.
[24]
어쩌면 진주만 공습보다 더 심했을 수도 있다. 비록
일본이
선전포고 없이 기습적으로 군사 건물과 군함들을 공격했지만 어쨌든
일본군vs
미군의 공식적인 군사 작전이었던
진주만 공습과는 다르게 9.11 테러는
테러리스트들이 세계 최대도시
뉴욕주
맨해튼의
랜드마크인
WTC와 뉴욕의 비무장인 무고한
시민들을 노리고 공격한
민간인 학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1940년대 당시
진주만이 있던 하와이는 지금의
괌,
푸에르토리코처럼 미국의 속령이었지만, 9.11테러로 공격받은 뉴욕은 미국의 중심부이다. 덤으로 사망자도 9.11이 진주만 공습보다 많다.
[25]
그러나 알카에다는 멸망시키지 못하고 이라크를 때려잡았다. 더 웃긴 건 당시 이라크는
세속주의, 범아랍주의를 정체성으로 하는
바트당이 집권해 있었고 오히려
이슬람 극단주의자들과 철천지 원수였다. 물론 하술하듯 가장 큰 원인은 사담 후세인이 입을 잘못 놀린 것. 그리고 그 때려잡은 이라크마저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등 이후 전개는
테러와의 전쟁 문서 참조.
[26]
그러나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으로 인해 흐지부지하게 되었다.
[27]
구본석
LG화재 뉴욕지사장.(향년 42세) 그 외에도 항공기 승객으로 탑승했던 재미교포 1명도 사망했다. 구 지사장의 시신은 결국 수습되지 못했다. 대신 사고 현장에서 그의
ID 카드를 발견했고, 유족들은 뉴욕시로부터 사고 현장에서 채취한 흙을 받아 귀국했다.
[사진]
[29]
북한은 2001년으로부터 25년 전
미국을 잘못 건드렸다가 지도상에서 사라질 뻔한 적이 있었다.
[30]
중국 영공에 근접하여 초계비행하던 미국 해군 전자첩보기 EP-3C가 요격을 위해 출동한 중국 F-8 전투기와 충돌해
하이난 섬에 비상착륙한 사건. 사고 경위와 기체, 승무원 반환을 놓고 양국 간에 감정싸움이 벌어졌으나 일단 승무원과 기체는 무사히 미국으로 송환됐다.
[31]
테러 2일 전, 탈레반의 숙적이자 북부 동맹의 리더였던
아흐마드 샤 마수드를 알카에다가 암살해주는 대가로 알카에다를 아프가니스탄에 숨겨주기로 되어 있었다. 탈레반은 내부적으로는 9.11을 저지른 걸 알고 분개했지만 그래도 빈 라덴을 숨겨주자고 했다가 결국 미국의 분노로 탈탈 털렸다. 그나마 9.11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는 게 밝혀져서 알카에다처럼 아예 말살 대상 수준으로 분류되지는 않고 협상의 대상이 되고 있다.
[32]
이 판단을 할 수 있었던 게 현재로써는 상상하기 힘들지만 2000년대 초반 당시만 하더라도 중국이 미국을 넘어설 것이라는 전망들이 상당히 많이 나왔었다. 무시할만한 소수의 의견 수준이 아니라 무려 대한민국 초중고 사회교과서에도 중국의 미국 추월 예측이 실릴 정도였다.
[33]
미국의 입장에서 자국이 테러를 당했는데 되려 그것을 옹호하는 입장을 내놓는다는 얘기는 한마디로 후세인이 테러범들과 관련이 있다고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는 굳이 멀리 가지 않아도 예를 들자면 북한이
핵실험을 하는 것이 말레이시아와 같은 나라들을 건드릴 의도는 없는데도 말레이시아 정부는 규탄 성명을 내곤 한다. 이유는 말레이시아 정부가 우리는 북한과 아무런 연관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 만약에 어느 나라가 그것도 정부 명의로 핵실험을 환영하는 성명을 내놓는다면 당연히 북한의 핵실험 지원 의혹을 받으면서 같이 제재를 받을 수도 있다.
[34]
미국과 척을 지긴 했지만 이라크는 독재라고는 해도 중동에선 그나마 세속적인 면모를 보이는 축에 속하는 편이었고, 이는 종교적 극렬성을 띤 알카에다가 절대 타협할 수 없는 지점이기도 했다. 이런 둘을 한편으로 몰아세운다는 것 자체부터가 무리수였다.
[35]
그러나 이스라엘은 테러와의 전쟁에 개입을 하지 못했다.
[36]
사실 이곳의 과격파들이 중동으로 가서 풍부한 전투경험으로 테러단체의 정예 전투원이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체첸 반군 출신이라는 건 그 러시아의 토벌에서 살아남은 걸로 모자라 타국까지 숨어서 기어들어올 정도의 능력이 있다는 걸 반증하기 때문에 특히 더 위험분자로 취급되는 것.
[37]
일종의
용병으로 고액을 받는 대신 고위험 지역에 투입된다. 특히 대다수의 계약병들은 이런저런 행정적 처리를 통해
PMC처럼 정규군 취급을 받지 않아서 정규군을 투입하기 힘든 작전이나 전장에 투입되기도 하고 공식적인 사상자 목록에 포함되지도 않는다. 일반적인 PMC와 다른 점은 계약주체가 기업이 아닌 개인이며, 온갖 출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모아 보내는 PMC와 다르게 이 계약병들은 모두 한때 러시아 정규군 소속이었던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38]
난민 사태가 일어난 뒤 난민 대부분이 10명중 9명이 무슬림일텐데 남의 국가에서
샤리아 법대로 가겠다고 하니 서방 주민들이 곱게 볼리가 없었다.
[39]
모든 국가가 상호간 투자와 협력을 하면 전쟁을 일으키는 게 모두에게 손해이므로 전쟁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는 논리. 여기엔 한 때 냉전의 한 축이었던 러시아도 포함되었을 정도다. 당시
모스크바에 문을 연
맥도날드 매장은 탈냉전의 상징과도 같았다.
[40]
물론 그녀는 과거에 이슬람뿐만 아니라 미국이나 유럽, 기독교도 비난했다.
[41]
무려 15만권으로 추산된다.
[42]
다만 항공유로 인한 2차 피해는 고려하지 않았다.
[43]
다만 이쪽은 이미 수십 년째 적자를 내고 있었다. 이후 모회사인
스위스에어와 동시에 파산했으며, 벨기에의 플래그 캐리어는
브뤼셀 항공이 잇게 된다.
[44]
한때는
스위스라는 국가 브랜드의 아이콘이나 다름없는 최고의 항공사였으나, 1990년대 말 위의 사베나와 같이 이 회사 저 회사 인수하더니, 급기야는
큰 사고까지 터지고 9.11까지 겹치면서 결국 무너졌다. 이후 자회사인 크로스에어가 이 파산한 회사를 인수하여
스위스 국제항공이 되었다.
[45]
물론, 이쪽은 1년 전에 있던
추락 사고도 한몫했다.
[46]
하지만 이미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이 저지른
민항기 납
치 사건들 때문에 9.11 테러 이전부터 이를 의무사항으로 규정해놓았다.
[47]
대한민국을 포함한 일부 동아시아 국가들은 (일본, 중국 등) 조종실 방문, 또는 내부를 촬영하는 것조차 금지되어 있다. (또는 촬영을 허가하되 계기판 같은 중요한 부분은 보안 문제로 인해 전부 모자이크 처리)
[48]
외항사의 경우 동아시아 국가들보다 조금 관대하기 때문에 항공기 출발 전, 또는 도착 후에 승무원에게 부탁하여 기장의 승낙을 받으면 일반인도 조종실 방문이 가능하다. 물론 문제가 되지 않는 이상 사진 및 동영상 촬영도 가능하다. 일부 외항사는 조종실 출입이 안 될 가능성도 있으니 이 점 유의 바람.
[49]
하지만 생각보다 이 조항이 아직 잘 안 지켜지는 경우가 있다. 선진국의 항공사에서는 메이저, 저가항공 할 것 없이 칼 같이 지켜지나
개도국의 경우 자국에서 나름 유명한 항공사에서조차 똑똑 두드리면 문을 열어주는 건 예사요, 아예 조종실 문을 열어 놓고 운행하는 경우도 다반사이다. 심지어 모 메이저급 항공사는 비즈니스석에 탑승한 승객을 조종석으로 초청한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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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 2년 전인 1999년에 출시한 FPS 게임
카운터 스트라이크의 맵 중 cs_747에 있는 비행기 안에서 조종석과 승객석의 경계가 겨우 커튼으로 구분되어 쉽게 진입할 수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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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593편 사고 이후에도 많은 서구권 항공사들은 점프시트에 항공사 직원의 가족을 탈 수 있게 하는 것을 일종의 사내복지제도로 시행하고 있었고, 심지어 이 제도는 몇몇 항공사에는 9.11 테러 이후에도 한동안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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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고 이후 조종사 한 명이 자리를 비울 때에는 무조건 그를 대신할 다른 조종사나 승무원이 조종실에 들어가 조종실에 조종사 한 명만 남는 상황을 원천 방지하는 조항이 보편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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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그 이전부터 식사는 다르게 줬다는 이야기도 있다. 기장과 부기장이 둘 다
식중독에 걸리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9.11 이후에도 일부 국가에선 지키지 않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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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국적기의 미국행 노선에 탑승하면 "보안상 여러 승객들이 한 곳에 모여 있지 않도록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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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 TSA 직원들이 마약 밀수를 도운 혐의로 체포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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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 계통 인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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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과 2005년 시행된 실험에서 TSA는 70%의 실패율을 보였다.
# 다만 기사에 따르면 이후 시정되긴 했다는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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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테러리스트가 여러 명이고 요원은 한 명일 때 테러리스트 한 명이 설쳐서 요원이 정체를 드러내고 나머지 테러리스트들이 요원을 제압한다거나. 그런 이유로 요원을 2명 태우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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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공항 크기 대비 취항 항공기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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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 이전에 공개된
예고편은 해당 장면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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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파일 내에는 맨하탄을 들이받은 아스널 기어의 모습이 담긴 사진 자료가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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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 도시 이름은 리버티 시티(Liberty City)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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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비행기가 있었으나 이 사건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지워야 했고 남은 건 작은 경비행기 하나뿐이라는 건 항간에 떠돌던 소문일 뿐이고, 실은 GTA 3의 게임 엔진에 비행 메커니즘이 구현되어 있지 않았다는 걸 보면 애당초 비행기를 추가할 계획이 없었으며 도도는 개발진 측에서 재미로 넣어 놓은 것이고 실제로 날리라고 만든 비행기가 아니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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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널 박스 아트에는 고층 빌딩이 그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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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과
크라이슬러 빌딩,
브로드웨이,
타임스퀘어에 심지어 세계무역센터 바로 옆에 있는 브룩필드 플레이스까지 재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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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저들이 비행기로 9.11 테러를 재현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추정된다. 배경이 사실적으로 묘사돼서 그런지 경비행기라도 줬던 3편과 다르게 탑승할 수 있는 비행기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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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다른 해석도 존재하는데 전작들에 비해 현실성을 크게 강조하는 GTA4에서 비행기를 조종하는 것이 어색할 것이라는 반응이 있고 상대적으로 좁은 면적에 고층빌딩이 밀집되어 있는 리버티 시티 특성상 비행기를 몰기에는 너무 좁았을 것이라는 반응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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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시어터는 또 다른 면에서 영향을 받았는데 바로 다음해 발매되는 6집 앨범에
줄기세포에 대한 논란을 다룬 곡인 'Conflict at Ground Zero(
그라운드 제로에서의 충돌)'이 있었으나 'Ground Zero'가 거의 고유명사화되면서 제목을 바꿔 'The Great Debate(대토론)'로 발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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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의 테러를 언급하는 가사인데, 이 사건을 몰라서 비기가 9.11를 예언했다느니 오해하는 사람이 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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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테러 이후인 2002년에 발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