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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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령대군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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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이씨 효령대군파의 역대 종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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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령대군 | 孝寧大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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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이씨 효령대군파 초대 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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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령대군 영정[1] | |||
출생 | 1396년 1월 29일[2] | ||
한성부
정안군 사저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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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486년 6월 12일[3] (향년 90세)[4] | ||
한성부
효령대군 사저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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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서울특별시 서초구 방배동 | ||
재위기간 | 조선 효령군 | ||
1407년 11월 2일 ~ 1412년 6월 11일 | |||
조선 효령대군 | |||
1412년 6월 11일 ~ 1486년 6월 12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본관 | 전주 이씨 | |
휘 | 호(祜) → 보(𥙷)[5] | ||
부모 |
부왕
태종 모후 원경왕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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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자매 |
부왕 기준 12남 17녀 중 차남 모후 기준 8남 4녀 중 차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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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예성부부인
해주 정씨[6] (藝城府夫人 海州 鄭氏, 1394 ~ 14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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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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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불교 | ||
자 | 선숙(善叔) | ||
호 | 연강(蓮江) | ||
군호 |
효령군(孝寧君) → 효령대군(孝寧大君) |
||
시호 | 정효공(靖孝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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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전기의 왕족.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차남. 그러나 요절한 형이 3명이 더 있으니 태어난 순서대로 하면 5남이다.[7] 양녕대군의 동생이고 세종의 작은 형.[8] 이름은 보(𥙷),[9] 50만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의 파조이다.2. 생애
왕자인 대군 시절에 특별히 사건은 없는 편인데 태종 10년(1410) 인녕부(仁寧府) 행수(行首) 이호(李護)가 효령대군에게 청탁하여 호조의 벼슬을 얻었다가 태종에게 들통이 난 사건이 있다. 태종은 "어린아이를 통해(효령대군은 당시 14살) 이름을 얻으려 했으니 죄를 주어야 하지만 이름을 얻으려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하면서 죄를 묻지는 않고 파직만 시켰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종이 효령대군을 두고 "내 말을 들으면 그저 빙긋이 웃기만 할 뿐이므로 나와 중궁(中宮)은 효령이 항상 웃는 것만을 보았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 온화한 성품으로 태종의 사랑을 받았다고는 하나 위아래로 형과 아우의 임팩트가 강하고[10] 효령대군은 그리 눈에 띄지 않는 아들이었는지 부모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에피소드는 거의 없는 편이다.[11] 아래 일화와 태종이 아들들을 모아 놓고 우애깊게 지내라고 강조한 일화가 거의 전부. 그 밖에 효령대군의 가신과 가노들이 비리를 저질러서 문제가 된 사건이 조금 등장하는데 가노 등이 주인의 뒷배경을 믿고 잘못에 연루되는 일은 조선시대 왕자들에게는 흔한 일이다.야사에서는 양녕대군이 폐세자될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듣자 갑작스럽게 책을 펴고 공부하는 척했지만[12] 형 양녕대군이 "헛짓거리 그만하라!"하며 꾸짖었다고 하는데, 딱히 정치적 배경이 없던 효령대군이 정말로 왕위에 욕심을 낸 정황은 없을뿐더러 양녕대군이 누구를 훈계할 처지도 아니었고 효령대군도 파는 분야가 워낙 매니악해서 그렇지 공부에 관해서라면 하는 척을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13]
아이러니하게도 효령대군은 말년에 다른 형제들보다 오래 살아[14] 종친의 높은 웃어른으로서 영향력이 커졌다. <조선왕조실록> 등에서 확인할 수 있는 양녕대군의 모습은 전형적인 한량이고 효령대군은 정치에 큰 뜻이 없는 인물로 보이는데 야사에서는 오히려 둘의 성격이 정반대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은 것도 신기한 점이다.
야사에 의하면 효령대군은 번뇌(괴로움)를 씻기 위해 절에 들어가서 북 가죽이 늘어지도록 북을 쳐댔다고 하는데 여기에서 "효령대군 북 치듯 한다."라는 속담이 생겼다고 한다.
술을 마시는 것이 비록 무익(無益)하나, 그럼에도 중국의 사신을 대하여 주인으로서 한 모금도 능히 마실 수 없다면 어찌 손님을 권하여서 그 마음을 즐겁게 할 수 있겠느냐?
충녕은 비록 술을 잘 마시지 못하나 적당히 마시고 그친다…. 효령대군은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니, 이것도 또한 불가(不可)하다.
태종실록 태종 18년(1418) 6월 3일 기사
태종실록 태종 18년(1418) 6월 3일 기사
양녕대군이 폐세자될 때 세자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지만 태종은 효령대군이 지나치게 점잖은 성격이었고 술을 일절 못 마시기 때문에 술 마실 일이 많은 왕으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해서 3남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회에 참석한 기록은 있는데 이는 왕실의 일원으로서 반드시 얼굴을 비춰야 하는 연회였던 것으로 보인다. 왕의 아들이니 왕만 넘어가주면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문제가 될 일도 없다.
고작 술을 못 마신다는 이유로 왕같이 이것저것 따져야하는 중요한 직책을 바꾼다고 어이없어 하는 의견도 있을 수 있겠지만 전근대에 술이라는 것은 문화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주량은 그 자체로 체력 측정의 한 방편이 되었을 정도이고[15] 왕은 결국 정치인으로서 술이란 것을 자주 마시는 자리이다. 특히 술을 못 마신다는 건 그야말로 약골 중의 약골로 취급당한다. 한마디로 충녕대군보다 형이었던 효령대군이 체력이 한참 더 딸려서 걱정했다는 해석이 가능해진다.[16] 이미 처가를 조지고 사돈댁도 박살낼 준비를 하면서 강한 왕권을 물려주려 혈안이 되어있던 태종의 입장에서는 중요한 문제였다. 관료와 종친 생활을 경험한 태종의 입장에서는 연회 자리에서 입에 잔도 안 댈 정도로 융통성이나 임기응변이 없는 효령대군이 살벌한 정치판에서 제대로 왕 노릇을 할 수 있을지도 걱정이 되는게 당연한 일이다. 다른 자리도 아니고 중국 사신 접대를 운운한 것을 보면 요동 정벌 부르짖던 정도전을 쳐내고 명나라에 대한 사대 노선을 확립한 태종으로서는 효령대군의 이러한 태도가 특히 외교적인 면에서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크다고 우려했을 가능성도 있다.
효령대군이 불도에 그렇게 심취했던 점을 생각하면 술 문제는 효령대군의 사상적 부적격성을 에둘러 드러낸 것일수도 있다. 사실 고려 불교 문화와 조선 유교 문화의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이 바로 차( 불교)와 술( 유교)일 정도다. 효령대군이 본격적으로 불도에 정진한 시점은 확실하지는 않으나 효령대군이 아버지 정안군의 잠저에서 태어나 자랐다고는 해도 어렸을 때 입궁해 왕족 교육을 받았음을 생각하면 충녕대군처럼 아무리 못 마셔도 몇 잔 받아 넘기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데 그조차도 거부할 정도라면 이미 이 시절부터 불도에 빠졌을 가능성도 있다. 개국 군주인 태조가 무학대사를 왕사로 초빙하고 재위 내내 법회를 여는 등 친불교적인 성향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조선의 유자들은 개국 초부터 내내 불교를 비판하고 배척했으며 태조 이후 왕들의 불사도 어디까지나 죽은 가족에 대한 추도의 목적[17]이 강했지 불도에 귀의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나 태조 같은 개국 군주도 아니고 새로 즉위할 후계자가 벌써부터 공공연히 불제자임을 드러내고 다닌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18] 이럴 경우 술도 못 마신다 운운은 왕실 체면상 차마 왕의 적차자가 불경이나 읊고 다녀서 왕이 못 된다 할 수는 없으니 우회적으로 문제를 지적했을 가능성이 있다.
술 문제는 영특했던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한 핑계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있다.[19] 사실 태종이 고작 술 못 마신다는 이유 하나만 가지고 효령대군을 제치고 충녕대군을 택한 것이 아니다. 술 문제가 하도 임팩트가 커서 요것만 쏙 빼서 회자되고는 하는데 태종의 말 앞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효령대군(孝寧大君)은 자질(姿質)이 미약하고, 또 성질이 심히 곧아서 개좌(開坐)[20] 하는 것이 없다. 내 말을 들으면 그저 빙긋이 웃기만 할 뿐이므로,
나와
중궁(中宮)은 효령이 항상 웃는 것만을 보았다.
충녕대군(忠寧大君)은 천성(天性)이 총명하고 민첩하고 자못 학문을 좋아하여, 비록 몹시 추운 때나 몹시 더운 때를 당하더라도 밤이 새도록 글을 읽으므로, 나는 그가 병이 날까봐 두려워하여 항상 밤에 글 읽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나의 큰 책(冊)은 모두 청하여 가져갔다. 또 치체(治體)를 알아서 매양 큰 일에 헌의(獻議)하는 것이 진실로 합당하고, 또 생각 밖에서 나왔다.
태종실록 태종 18년(1418) 6월 3일 기사
태종실록 태종 18년(1418) 6월 3일 기사
이 바로 다음에 술 문제가 나온다. 이를 이어보면 한마디로 효령대군은 군주의 자리에 앉기에는 너무 순한데다가 융통성도 없어 도저히 후계자로 세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술은 어디까지나 이런 효령대군의 성품을 방증하는 사례 중 하나로 거론되었을 뿐이다. 태종은 6조직계제로 조정을 모조리 자기 손아귀에 넣고 주무르며 의정부를 뒷방 노인정으로 만든 사람이다. 당연히 후계자의 일머리에 높은 비중을 둘 수밖에 없었다.
사실 후계자의 교체는 승계의 원칙이 흔들린다는 측면에서도 문제지만, 그동안 후계자에게 투자된 유무형의 자원들을 한순간에 매몰비용으로 만들어버린다는 점에서도 엄청난 부담이다. 양녕대군은 거의 14년 가까이의 세월을 세자로 살면서 후계자 수업을 받았고, 이 과정에서 무수한 엘리트 자원들이 세자의 스승으로 투입되었으며, 이때면 태종도 나이가 있는 만큼, 다시 14년을 기다릴 여유는 없었다. 그러므로 이제 양녕을 대신해 책봉될 세자는 그 14년의 간극을 메우고 후계자 노릇을 해내야 하는 것이다. 단순히 형제간의 서열만을 따져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고, 특히나 이미 빠른 양위를 결심했던 태종으로써는 더더욱 그랬다.
다만 능력이 없는 사람이 야심만 큰 경우도 있고 보통은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도 대권을 얻을 기회가 오면 조금이라도 욕심이 생기는게 보통 사람의 심리인데[21] 차기 세자 책봉을 놓고 효령대군이 특별히 계승권을 주장하거나 계승에서 배제되고 나서 실의에 빠졌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22] 사실 조선의 국시인 유교의 장자 계승 원칙에 따르면 좋든 싫든 효령대군에게는 차순위 적장자로서 타고난 계승권이 있었다. 그런 효령대군이 자신의 계승권을 주장하는 한 아무리 태종이라고 해도 충녕대군에게 계승을 시키는 것은 어려웠을텐데도, 어떠한 갈등도 없이 홀연히 충녕대군에게 자리를 넘겼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세간의 평판이나 세속의 권력에 전혀 미련이 없는 모범적 재가 불제자의 표상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양녕대군이 충녕대군에게 자리를 양보했다는 썰은 실제 역사와 반대인 전혀 근거가 없는 윤색이지만, 효령대군은 나름의 정치적 판단이 있었든 아니면 정말로 스스로 권력욕이 전혀 없어서였든 간에 자리를 기꺼이 양보한 셈. 심지어 아버지 태종한테 '저놈은 술 한 잔도 못 하니 부적격이다'라고 공공연한 디스를 당하면서까지 그리 했다면, 왕재는 아니었다 한들 인품만큼은 분명 높이 평가할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동생 세종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일화가 거의 없어, 자세히 알 수 없으나 특별히 우애가 틀어질 만한 사건도 없었다.[23][24] 효령대군의 성품이 온화한 점과 세종 또한 효령대군을 정성스럽게 대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형제 관계는 양호했으리라고 추정된다. 그러나 형 양녕대군은 효령대군을 상당히 얕잡아 본 듯한데 양녕대군이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는 효령대군을 비난하거나, 얼굴이 닮은 점을 이용하여 효령대군을 사칭하거나 효령대군이 불공을 드리는 절에서 사냥한 짐승을 조리해 먹는 등, 막 나가는[25] 일화들이 꽤 상당히 많다. 그럼에도 효령대군이 형 양녕대군에게 화를 냈다는 기록조차 없으니 실로 그의 대인배스러움을 알 수 있다 하겠다. 불교를 믿어서 여러 차례 법회를 주관해 열고 절을 중건했기 때문에 불교를 이단시하는 유학자 관료들에게 자주 비판을 받았다. <조선왕조실록>의 효령대군 관련 기사는 거의 대부분 법회 주관이나 불사, 절 중건 등을 한 일로 신하들에게 까이는 것. 그러나 세종이 언제나 이러한 비판으로부터 형 효령대군을 비호하였다.[26]
살아 있을 때 계유정난이 벌어졌으나 계유정난을 지지한 형 양녕대군과는 달리 효령대군 본인은 정치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아서 그냥저냥 넘어갔다. 그나마 당시 왕실에 관여한 것이라면 수양대군과 함께 단종의 왕비인 정순왕후를 간택하는 것에 관여하거나 세조가 즉위한 뒤 형 양녕대군과 함께 단종에 대해 처벌할 것을 주장한 정도. 이것도 전자는 단지 왕실의 어른으로서 한 일에 가깝고 후자는 양녕대군의 행동에 묻어간 것. 이 외에는 효령대군이 정계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흔적이 없다. 사실 단종 처벌도 그 시대로는 어쩔 수 없었는데, 사육신의 계획이 발각되었을 때 단종의 개입이 명백히 확인되었다. 세조가 왕위에 오른 방법은 잘못되었지만, 어쨌건 현재 임금은 세조니 사육신은 명백한 반역자며 단종은 그 반역자들이 추대하려 한 인물이자 배후의 인물이라 가만히 놔두면 왕권에 좋지 않을 것은 자명했다. 그래도 세조의 측근에게나 반대파에게나 인망이 있어서인지 세조가 생육신 6명 중 1명으로 유명한 매월당 김시습의 설법을 듣고 싶었으나 워낙 세조를 싫어하는 김시습이 가지 않으려 하는 걸 효령대군이 설득하여 가게 한 이야기가 있다.
일부에서는 불가에 귀의하여 승려가 되었다고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승려가 되지는 않았다.[27] 안 그래도 불교에 심취해서 신하들에게 비판을 많이 받았는데 머리까지 깎았다가는 정말 큰일 났을 것이다. 건국 초 무학대사가 그나마 이성계와 친했기 때문에 조선 초기에 그나마 불교 좋아하는 걸 봐준 거지 조선은 근본적으로 숭유억불의 나라였다. 조선시대의 승려는 고려시대와 달리 도성출입도 금지되었고 대놓고 양반계층에게 천시와 적대를 당하던 집단이었는데, 명목상 차순위 왕위계승권이 있는 직계 왕자가 출가를 해버리면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 자체가 도로아미타불이 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왕자가 출가를 했다면 정말 큰일이라 <조선왕조실록>에 실렸어야 하는데 당대 실록[28]에는 그런 기사가 없고 한참 후대인 선조실록에나 가서야 '효령 역시 가사(袈裟)를 걸치고 불문(佛門)에 몸을 의탁하고 말았다.'는 구절이 있다. 선조실록에 '세자 양보설'도 같이 실려 있는데 이는 충녕대군의 왕위승계과정을 미화 윤색하기 위한 목적으로 야사를 기입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은 그냥 불교에 매우매우 심취한 거사로 지내며 불교 공부에 힘썼다 정도로 보는게 맞을 것이다.
향년 90세. 태조는 물론 조선의 최장수 군주인 영조보다도 더 오래 살았다. 영조가 81세 생을 마감했으니 효령대군은 9년 더 산 것이다. 심지어 장수의 아이콘인 황희가 89세 생일을 맞은 뒤 나흘 뒤에 죽었는데 효령대군은 90년하고도 4개월을 더 살았다. 방계라고는 하나 왕자로 태어나 평생을 왕족으로 지냈고 권력에서 일찌감치 떨어져서 평화롭게 잘 먹고 잘 산 인생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평균 수명은 40대 중반으로, 당시 평균 연령의 2배에 가까운 기록[29]이다. 태어난 1396년은 할아버지가 즉위한 지 햇수로 5년째 되는 해이고, 죽은 1486년은 성종의 25년 재위 기간 중 17년째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서 조선 전기의 왕 9명의 재위 기간을 합친 만큼 오래 살았다. 할아버지 태조 5년에 태어나 큰아버지 정종과 아버지 태종의 즉위와 외 삼촌과 그 외 대소신료들에 대한 아버지의 숙청을 지켜봤고, 이후 동생인 세종, 첫째 조카 문종, 종손 단종의 즉위와 그 이후의 둘째 조카 수양대군이 벌인 계유정난을 두 눈으로 목격했으며, 이후 예종과 성종의 즉위와 세종의 현손 연산군의 탄생까지 지켜보고도 10년을 더 살았다. 1년 10개월 정도만 더 살았다면 중종이 태어나는 것도 볼 수 있을 뻔 했다. 그야말로 조선 초기 100년 역사의 산 증인으로, 조선 왕족 중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이자 전 세계 왕족 중에서도 이처럼 90대까지 사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성종 조까지 장수한 덕분에 성종실록에도 효령대군의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종실의 가장 큰어른[30]인지라[31] 매년 잔치를 베풀고 비단을 하사했다는 기록들로 보아 성종도 굉장히 그를 살핀 듯. <조선왕조실록>에 있는 효령대군 몰기에는 날 좋은 날에는 가족 연회를 열면서 60살이 넘은 효령대군의 아들들이 90살이 다 되어 가는 아버지 앞에서 춤을 추었다는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32]
병에 걸렸다는 기록이 있는 등 그리 건강하지만은 않았던 것 같은데도 장수한 이유는 불교식 웰빙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또한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치판에서 얻는 스트레스만큼은 적은 삶이어서 그랬을 가능성도 많다.[33] 효령대군은 90세를 넘어 천수를 다 하고 1486년(성종 17년) 5월 11일( 음력)에 세상을 떠났다.
묘는 서울특별시 서초구 방배동에 부인인 예성부부인( 해주 정씨)과 함께 예장되었고 묘소 옆에는 청권사(사당)가 있다. 위치는 서울 지하철 2호선 방배역에서 5분 거리에 있다. 이례적으로 서울특별시, 그것도 강남 한복판에 묘소가 자리잡고 있다. 서울교통공사~ 뱅뱅사거리 구간의 도로가 효령로가 된 것도 효령대군 묘소가 있어 따온 것. 맞은편에 위치한 빌딩 이름은 프린스 효령 빌딩으로 2014년 완공된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 종회 회관이다. 그래서 건물이 효령대군 묘소 바로 앞에 잡은 것이다.
3. 가족 관계
- 부 : 태종(太宗, 1367~1422)
- 모 :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 閔氏, 1365~1420)
- 장인 : 좌찬성 정역(鄭易, ? ~ 1425년)
- 장모 : 정경부인 안동 권씨(貞敬夫人 安東 權氏, ? ~ 1428년)
- 정실 : 예성부부인 해주 정씨(藝城府夫人 海州 鄭氏, 1394~1470)
- 장남 : 의성군 채(誼城君 寀, 1411년 ~ 1493년) - 7남 6녀
- 며느리 : 회인군부인 성주 이씨(懷仁郡夫人 星州 李氏)
- 손자 : 무송군, 잠성정, 운림도정, 서림도정, 봉성군, 영신군, 총곡수
- 손녀 : 6명
- 차남 : 서원군 친(瑞原君 □, 1413년 ~ 1475년) - 6남 5녀[35]
- 며느리 : 의령군부인 경주 이씨(宜寧郡夫人 慶州 李氏)
- 손자 : 회의도정 - 정의공주의 차남 안온천(安溫泉)의 장인
- 손자 : 덕은도정, 제천군, 예천군, 고림군, 청거수
- 손녀 : 5명
- 3남 : 보성군 합(寶城君 㝓, 1416년 ~ 1499년)[36] - 7남 6녀
- 며느리 : 청풍군부인 인천 이씨(淸風郡夫人 陜川 李氏) - 광록시소경 이무창(李茂昌)의 딸, 영락제 후궁 이소의(李昭儀)의 조카
- 손자 : 신풍도정, 율원군, 춘양군, 평성군, 물거군, 원산군, 동양정
- 손녀 : 6명 - 이 중 한명이 임사홍과 혼인함.
- 4남 : 낙안군 녕(樂安君 寧, 1417년 ~ 1474년) - 1남 1녀
- 며느리 : 양산군부인 언양 김씨(梁山郡夫人 彦陽 金氏)
- 손자 : 청원정
- 손녀 : 1명
- 5남 : 영천군 이정(永川君 李定, 1422년 ~ ?) - 2남 3녀
- 며느리 : 군부인 예천 권씨(郡夫人 醴泉 權氏)
- 손자 : 태강수 이동(泰康守 李仝)
- 손자며느리 : 어우동(於宇同)
- 증손녀 : 번좌
- 손자 : 양포수
- 손녀 : 3명
- 장녀 : 비인현주(庇仁縣主, 1427 ~ 1514) - 안소공 이훈(安昭公 李塤)에게 출가
- 6남 : 원천군 의(原川君 宜), (1423년 ~ 1476년) - 3남, 성녕대군에게 출계
- 며느리 : 군부인 배천 조씨(郡夫人 白川 趙氏)
- 며느리 : 군부인 한양 조씨(郡夫人 漢陽 趙氏)
- 손자 : 열산도정, 기성수, 가은군
- 측실 : 평해 손씨(平海 孫氏)[37]
- 7남 : 안강도정 이량(安康都正 李㝗, 1430 ~ ?)[38] - 7남 2녀
- 며느리 : 신부인 진주 류씨(愼夫人 晋州 柳氏)
- 며느리 : 함양 이씨(咸陽 李氏)
- 손자 : 영평부정, 습계군[39], 회양부정, 개산부수, 천령군, 자인부수, 양양정
- 손녀 : 2명
- 차녀 : 현주 이씨 - 전진형(全晉亨)에게 출가
- 외손자 : 전개(全愷)
- 외손자 : 전걸(全傑)
- 3녀 : 현주 이씨 - 김현(金現)에게 출가
- 처조카 : 이수현
효령대군의 후손인 효령대군파는 현재 전주 이씨 내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명종 이후 적통이 끊겨 덕흥대원군의 3남인 선조로 후사를 이었고 종래에는 강화도로 유배가 있던 왕손인 철종으로 대를 이었던 후기 조선 왕실 상황과 대조해서 보면 아이러니한 부분이다. 그런데 이후 조선 왕실에 효령대군의 핏줄이 섞였고 이들의 후손들이 왕통을 이었으니 조선 후기의 임금들은 세종대왕의 후손인 동시에 효령대군의 후손이라고 봐도 된다. 효령대군의 3남 보성군 이합의 외손들이 3차례나 왕실 직계와 혼인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효령대군파 공식 홈페이지인 청권사에 따르면 효령대군의 후손은 무려 50만 명으로 전주 이씨 내에서 20%를 차지하고 있다. 효령대군파 내에서 가장 번창한 율원군(여양군-전성군)[40]계로 이것만 따지면 10만 명으로 효령대군파 내에서 20%를 차지한다.
유명한 인물로는 숙종 시절 청백리로 유명하고 백성들에게 칭송받는 이형상이 있었고 과거 이승만 정권 시절의 2인자이자 사사오입 개헌, 3.15 부정선거로 악명 높은 이기붕(18세손)이 있다.[41] 이외에도 전 아나운서 겸 국회의원이었던 이계진[42]과 前 인천광역시 서구 국회의원인 이학재(20세손)도 효령대군의 후손이다. 이철규 의문사 사건의 이철규도 22세손이다.
유명 연예인으로는 개그맨 이수근, 개그맨 이휘재, 개그맨 이혁재, 배우 이성재, 배우 이정재, 가수 이상은, 가수 이수만, 이만희 - 이혜영 부녀, 이경규, 이순규[43], 가수 겸 배우 이준호, 인터넷방송 BJ 슈로제(이가을)가 있다.
효령대군파 종회는 방배동과 무교동에 빌딩을 보유하고 시세는 약 1천억에 달한다. 청권사 맞은편의 프린스 효령 빌딩이 바로 효령대군파 소유의 빌딩이다.
4.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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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MBC 드라마 〈
조선왕조 오백년〉 2부 〈뿌리깊은 나무〉, 3부 〈설중매〉- 김웅철[44]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으로 나오며 〈뿌리깊은 나무〉 후반과 〈설중매〉 전반에는 왕실의 어른 자격으로 형 양녕대군( 송기윤 분)과 거의 함께 나온다. 문종(임정하 분)의 2번째 세자빈으로 순빈 봉씨가 좋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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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KBS 드라마 〈
용의 눈물〉-
장성원[45]
처음에는 아무런 특색이 없다가 양녕대군( 이민우 분)이 주색에 빠져든 이후부터 불경에 관심을 보이는 모습이 묘사되기 시작한다.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는 성녕대군( 허정민 분)에게 불경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조언을 하기도 하고 양녕대군이 표창으로 공부방 밖에서 시끄럽게 우는 까마귀 2마리를 한꺼번에 잡자 "함부로 살생을 한다"며 비판하는 장면도 있다. 세자는 "우리 부처님 제자께서는 못마땅하신 모양이구먼."이라고 웃어넘겼다. 양녕대군의 비행이 점점 더해가자 끝내 폐세자당할 것이라 예측하고 총명한 동생 충녕대군( 안재모 분)이 다음 세자가 되는데 형인 자신 때문에 분란이 일지 않도록 아예 절을 돌기 시작한다. 나중에는 하도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불경 공부를 하느라 도성에 자주 들리지를 못하니 안 그래도 심란한 태종( 유동근 분)이 오랜만에 궁에 온 효령대군에게 "큰 놈은 거러지패들이랑 어울려다니고 작은 놈은 염불에 미쳐 절간을 전전하고 잘들 하는 짓이다."라면서 양녕대군과 함께 세트로 깐다.
-
1998년
KBS 드라마 〈
왕과 비〉-
김인태[46]
형 양녕대군( 신구 분)과는 대립하는 역할로 왕실의 안정과 형 양녕대군이 벌인 일들을 수습하는 역할. 양녕대군이 제1화부터 등장한 것과 달리 제41화에서야 수양대군( 임동진 분)이 효령대군을 수행하며 등장하는데 이래저래 상처 많은 왕실 사람들을 달래주며 왕실 최고 어른으로서 활약한다. 세조, 예종( 이영호 분), 성종( 이진우 분)도 모두 상담 역으로 효령대군을 찾았는데 특히 성종이 종증조부 대군으로 즉위 때부터 많이 따르고 효령대군도 성종을 많이 보듬어줬다. 제163화 정희왕후 사망과 제164화 폐비 윤씨( 김성령 분) 사사 때에 마지막으로 등장하는데 기록을 따르자면 87세에 퇴장하나 양녕대군 때처럼 사망 장면은 버로우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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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KBS 드라마 〈
대왕 세종〉- 안신우 (아역 :
유태웅)
아역 때는 어울리지 않게 충녕대군( 이현우 분)과 양녕대군( 이인 분) 모두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말을 툭 내뱉는 역이었고 성인이 되어서는 어렸을 때 목격한 2차 왕자의 난 당시의 참혹한 기억으로 인해 정치에는 뜻을 거두고 모든게 부질없다며 조용히 난을 키우며 살아가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후 역사대로 불교에 입문하여 충실한 불교 신도로써 활동한다. 그러나 세종의 숭유억불 정책에 화가 나고 효령대군을 왕으로 삼자는 모반을 성공시키면 다시 불교의 시대가 올거다 라고 생각한 일부 불교 원로들이 "효령대군을 진정한 왕"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포고문을 전국의 사찰에 돌리려고 했다가 이 소식을 먼저 감지한 세종에 의해 탄압당하면서 증거물로 채택된다. 한편 이 사실을 모른 채 세종에게 따지러 왔다가 "형님이 두렵습니다. 형님을 이용하려고 드는 자들을 허락하는 형님이 매우 두렵습니다."라는 말과 이후 체포되어온 고승들 앞에서 고승이 모반을 책동하려던 포고문을 보고 경악한다. 이후 원경왕후가 쓰러지자 세종과 함께 사찰에서 간호하였고 이후 원경왕후, 경녕군, 경녕군의 어머니와 함께 민중들을 위한 봉사로 출연을 하지 않는다.
-
2021년
KBS 드라마 〈
태종 이방원〉- 정시훈 (아역 : 신서우)
실제 실록의 기록대로 어린 시절부터 시건방진 성격을 드러내는 형 양녕대군이나 은근한 야심을 드러내는 동생 충녕대군과 달리 항상 해맑게 웃는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성인이 되어서도 보위엔 욕심이 없고 예전엔 화목했던 가족들이 권력에 매몰되어 상처입는 모습들을 보며 안타까워 하지만, 그걸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뾰족한 방법이 없어 그저 지켜보고만 있다.
5. 기타
- 초상화가 전해지는 몇 안 되는 조선 전기 인물 중 1명. 효령대군 초상화를 보면 부드러워 보이는 인물됨과는 달리 제법 덩치도 있고 수염도 야성적이다. 할아버지 이성계의 피를 이어받아서 그런 듯하다.[47] 초상화에서 태종, 세종, 양녕대군의 얼굴도 추측해볼 수 있으며 기록에 의하면 아버지 태종이 효령대군을 두고 자신의 외모와 닮았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48] 효령대군 초상화 기록에 의하면 양녕대군, 세종과 닮았다고 전해진다. 참고로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은 얼굴이 너무 닮아서 양녕대군이 장난을 칠 때 "나 효령이다!"라고 거짓말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런 기록들과 할아버지 이성계, 큰아버지 이방의, 조카 수양대군의 초상화로 미루어 보아 정종, 태종, 양녕대군, 세종의 얼굴도 효령대군 초상화 속의 얼굴과 비슷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 평생에 걸쳐 정치적으로 특별한 입장에 있던 것도 아니고 비교적 조용하게 살아간 인물이지만 불교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게 양반들에게는 곱지않게 보였던지 조선왕조실록에는 효령대군을 두고 세조가 불교를 숭상한건 효령대군 때문에며 청렴한듯 굴지만 매우 탐욕적이라서 거짓 문서를 만들어 남의 노비를 빼앗곤 했고 죽은 뒤에는 아들들이 재산을 두고 서로 다투었다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1]
경기도
과천시 연주암에 소장된 초상화. 진본이 아니라 옮겨 그린 그림이지만, 조선 전기 인물들 중 초상화가 전하는 몇 안 되는 사례라 가치가 높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1호.
[2]
음력
1395년
12월 11일. 다만, 선원속보 효령대군파보에는 1396년 음력 9월 16일에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만약 이렇게 된다면 친동생 세종대왕과 불과 7개월 차이로, 세종대왕은 미숙아로 태어난 것이 된다.
[3]
음력
1486년
5월 11일
[4]
조선의 왕자 중에서 가장 장수했다.
[5]
示+
甫. 왕실 족보인 선원계보기략에는 ‘補’라고 적혀 있으나, 조선왕조실록에는 ‘𥙷’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쪽이 옳다. 태종의 아들들은 모두 보일시(示)변을 사용했다. 이러한 오류가 발생한 이유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종실의
족보가 회진(灰塵)한 바람에 1681년에야 겨우 기억에 의존해서 다시 편찬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이전 시기의 내용은 두찬(杜撰)인 것이다. 선원계보기략의 오류에 대해서는 홍성익, 「조선시대 태실의 역사고고학적 연구」,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2015 참고.
[6]
처음에는 숙의옹주로 봉했다.
[7]
원경왕후가 태종과 사이에서 4남 4녀를 낳았다고 알려졌는데, 사실은 양녕대군에 앞서 세 아들,
1412년에 막내아들을 낳았다. 따라서 실제로는 8남 4녀를 낳았던 것이다. 이 내용은
상왕으로 물러앉은 태종이 지난 날을 회상하면서 남긴 말로 <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3권, 세종 1년 2월 3일 무인 3번째기사에 자세히 기록되었다.
[8]
세종의 왕위 즉위 전 양녕대군이 세자였을 당시 흔히 양녕대군을 세자로, 당시 충녕대군이였던 세종을 셋째 왕자로 부르는 경우가 간간히 있었는데 그 사이에 있던, 흔히 말하는 '둘째왕자'가 바로 이 인물이다.
[9]
태종 14년(1414)에 이름을 호(祜)에서 보(𥙷)로 고쳤다.
[10]
다만 그 임팩트의 방향성은 정반대. 형님은 조선 왕실사에 손꼽히는 개망나니라 틈만 나면 부왕한테 혼나느라 임팩트를 남겼고 아우님은 거꾸로 조선 왕실사에 손꼽히게 화기애애한 부자지간으로 임팩트를 남겼다. 패륜아와 영웅 사이에 불상이 설 자리가 없는 것과 같다.
[11]
그래도 그의 졸기에 조금 이야기가 있긴 한데 활쏘기를 해서 다섯발 쏘아 다섯발 모두 맞춰 감탄하게 만들었다거나 태조가 아플 때 직접 탕약을 올렸다거나 잠저 시절의 세종과 사이가 좋아 자주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 정도가 있다. 정리하자면 아직 무인 기질이 강했던 조선 초 왕실의 일원답게 어느 정도 무인 기질은 있지만, 가족들한테 정이 많아 온순하게 지내는 성격이었던 모양.
[12]
그런데 실제로도 효령대군은 동생인 충녕대군만은 아니겠지만 책 좋아하는 사람인지 졸기에 독서와 활쏘기를 좋아하였다고 되어있다. 그래서인지 동생인 충녕대군에게 자주 방문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13]
종교는 경전을 해석하고 교리를 익히는 등 작정하고 파고들면 의외로 상당한 공부를 요하는 분야이며, 불교도 그 성격상 제왕학과 거리가 있어서 그렇지 마찬가지다. 애초에 '공부'라는 말의 어원이 불교의 영향을 받은 성리학 용어일 정도. 이 때문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중세~전근대의 고명한 종교인은 당대에 손꼽히는 석학인 경우가 많았으며, 현대에도 신부가 되려면 수 년간의 공부를, 승려가 되려면 거기다 시험까지 봐야 하는 등 공부를 안 할 수가 없다. 더구나 효령대군의 동생은 조선 역사를 넘어 한국사를 통틀어서도 손에 꼽히는 먼치킨급 천재이고 형도 그 개차반 성격을 못 죽여서 그렇지 의외로 정치적 감각이 없진 않았던 판에 효령대군이 머리가 나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14]
양녕대군은 68세로 당시 기준으로는 장수했고, 세종도 52세에 사망해 당시 기준으론 그래도 명대로 살다 간 편이지만, 효령대군은 90세에 사망해 현대인을 기준으로 봐도 매우 오래 살았다.
[15]
괜히 전근대
영웅들의 스테레오 타입으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주당과 말술이 등장하는게 아니다. 조선시대 여경이라 할 수 있는 다모 선발 조건 중에는 막걸리 5 사발을 한번에 마실 수 있는지 검증하는 것도 있을 정도였다.
[16]
세종 역시
건강한 편은 아니라서 이미 30대 때부터 툭하면 몸져눕던 판이라 세자인 이향(
문종)이 10대 초반부터 사신을 접대해야 할 정도였다.
[17]
이 경우 행위는 불교적이더라도 그 목적이 유교적 효와 애의 달성에 있었으니 비판을 막아낼 명분이 되었다.
[18]
특히나 조선 유자들의 입장에서 불교가 문제가 되는 것이 불사 1번 치르고 절을 세우고 하면 나가는
돈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재정 지출을 줄여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준다는데 정치의 지향점이 있었던 나라였던만큼 불교적 행위에 대한 비판에는 꼬박꼬박 돈 문제가 등장했다. 주류 관료층으로서는 향교나 서원처럼
국가 이념에 기반한
교육을 수행하는 것도 아니고 성이나 병영처럼
국방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닌 그저 목탁 두드리며 염불이나 외는 절간 따위에 돈 들어가는 짓을
극혐할 수 밖에 없었다.
[19]
폐세자 논의 시점에서부터 이미 장자냐 아니냐가 가장 중요한 쟁점이었는데 장자조차 폐세자 되는 판에 새삼 순번을 지키겠답시고 굳이 둘째에게 왕위를 물려줄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20]
자세하게 조목조목 일을 처리함.
[21]
당장 동생 충녕대군이 온순한 성품에도 불구하고 기회가 오자 대권에 대한 야심을 보인 인물이다. 물론 이쪽은 능력도 출중했기에 자신이라면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까지 뒷받침된 경우지만.
[22]
이 형제들의 첫째 큰아버지 되는
진안대군 이방우가 조선 건국 후 세자가 되지 않고 잠적하다 술병으로 죽은 것에 대해서 고려에 대한 충의 때문이었다는 설도 있지만 아예 정치적으로 배제된 것이라는 설도 있는데, 후자의 경우 이 때문에 실의에 빠져 술로 세월을 보내다 그리 되었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 뿐만 아니라 동서양 역사를 막론하고 동생에게 계승권에서 밀린 형이 불만을 품는 경우가 많이 있었는데 효령대군은 알려진 일화조차 별로 없을 정도로 잠잠했다는 것.
[23]
별 일화가 없다는건 뒤집어 말하면 큰 사고 안 치고 조용히 유유자적했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큰형 양녕대군의 경우 아버지 태종은 물론 세종 치세에도 하도 사고를 치고 다녀서 일화가 넘쳐나는 것이 그 반증.
[24]
다만 훗날 세종은 자신의 총애를 많이 받았던 막내아들
영응대군과 손녀
경혜공주를 효령대군의 처조카들과 혼사를 맺게 한 것을 보면 나름 효령대군과의 관계도 신경을 쓴 것으로 보인다.
[25]
여기선 효령대군도 보기 거북했던지 지금 불공을 드리는 중인데 이러면 안 된다고 말렸지만 양녕대군은 "부처가 있다면 네 오뉴월
이엄은 왜 못 벗기냐?(이엄은 겨울에 쓰는 방한모다. 그런데 이 방한모를 오뉴월 여름에 쓴 이유는 당시 효령이 귓병을 앓고 있어서였다. 즉 이 "이엄을 못 벗기냐"라는 말은 "네 귓병 하나도 못 치료해주는데 부처는 무슨 얼어죽을 부처!"라는 말로 부처를 모욕하는 언사였다.) 나는
살아서는 왕의 형으로 부귀를 누리고 죽어서는 불자의 형으로 보리에 오를 것이니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라고 답했는데, 이러한 형의 말에 어이가 없어서인지 효령대군은 웃기만 했다고 한다.
[26]
세종도 유학자로서 국시를 따라 불교를 억압하면 억압했지 결코
불교를 지켜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효령대군이 나서면 불교에 대한 적대감보다도 형제애가 우선이었던
세종은 형을 위해 한발 물러섰고 그 덕에 조선 초기 불교계에서는 효령대군이 엄청난
우군이었다. 더구나 유학자들에게 욕은 먹을지언정 자신에게 왕권을 위협할 의도가 전혀 없다는 것을 사고뭉치
큰형과는 달리 비교적 점잖게 드러내는 방법이기도 했고, 자칭
선
비 나부랭이들이
숭유억불을 핑계로 벌이는 지나친 반달리즘 때문에 생기는 불교계의 불만을 달래는 효과도 있어서 결과적으로는 세종 재위기의 정정안정에 기여하게 되었다.
[27]
이 시기를 다룬 코믹 사극
영화인 <
나는 왕이로소이다>에서는 진짜 머리 깎고 출가해서
스님이 된 걸로 나오는데, 걍
개그 요소.
[28]
특히 조선 초기 사관들은 하다못해 왕이 말을 타다 떨어졌거나 걷다가 헛발질한 것을 실록에 쓰지 말라고 말했다는 것까지 실록에 쓴 사람들인데 이런 사관들이 왕자의 출가 사실을 안 적었을 리 없다.
[29]
다만 여기에는
의학 발달의 부진, 높은 영아 사망률로 실질 수명보다 떨어진 것은 반영해야 한다. 즉, 영아기에 안 죽고 40대 중반까지 사는 게 아니라 영아기에 많이 죽어서 40대 중반이 된 거다. 마찬가지로 조선시대 왕들의 평균 수명도
단종,
예종,
헌종 같이 비정상적으로 단명한 왕들과
연산군처럼 죽음에 대한 진실이 불명확한 왕도 있다. 이런 왕들만 빼면 보통 30 ~ 50대에 사망했고[49] 태조,
정종,
광해군, 영조,
고종의 경우 예외적으로
환갑을 넘겼다.
[30]
세조 때까지는 양녕대군이 종실의 큰어른이었지만, 양녕대군이
1462년에 죽어서 이후 24년간은 효령대군이 종실의 큰어른 자리를 지켰다.
[31]
관계를 따져보면 성종의 큰종증조할아버지다.
[32]
당나라 사람
이한이 지은 <몽구> 고사전에 실린 '노래지희'에서 따온 행동이다.
초나라 사람
노래자는 칠순
노인이었는데 백세장수하는 늙은 부모 앞에서 자식으로서 기쁘게 해드리려고 색동
저고리를 입고
아이처럼 춤추면서 재롱을 피웠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사관은 효령대군의 아들들의 이런 행위를 두고 성사(盛事), 즉 이 시대의 훌륭하고 장한 일이라고 기록하였다.
[33]
실질적으로
왕비 자리에는 그리 오래 머물지 못했던
단종비
정순왕후도
중종이 즉위할 때까지 장수했다. 이런 것을 봐도
궁중 생활에서 얻는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하는 듯하다.
[34]
참고로 경혜공주는 세종의 손녀이니, 효령대군에게는 처조카가 조카손녀의 남편이 된 셈이다. 인척간인 것이지 혈연은 없긴 하다만.
[35]
차남 서원군 이친의 아들인 회의도정 이추(懷義都正 李菆)의 사위는
세종의 차녀인
정의공주의 차남 안온천(安溫泉)이다.
[36]
아들을 총 7명을 두었는데 그 중 2남 율원군 이종의 증손녀가 청릉부원군 심강과 혼인하여 낳은 딸이
명종의 왕비
인순왕후 심씨이다. 즉, 인순왕후는 효령대군의 외5대손(현손녀의 딸)이다. 그리고 4남 평성군 이위의 손녀가 구순과 혼인했고 그 손녀가
인헌왕후 구씨로
인조의 생모이다. 즉, 인헌왕후는 효령대군의 진외6대손(현손녀의 손녀)이다. 또한 7남 동양정 이서의 증손녀가 김한우와 혼인하여 낳은 딸이 선조의 후궁
인빈 김씨이다. 즉, 인빈 김씨는 효령대군의 외5대손(현손녀의 딸)이다. 그러니 정리하자면
인순왕후와
인빈 김씨는 10촌 자매 지간이다. 그리고 인순왕후의
양자이자 인빈 김씨의 남편 선조는 저 둘과 13촌 지간이며
인헌왕후는 저 둘과 11촌 지간이다. 그런데
인헌왕후의 남편인
정원군은
인빈 김씨의 3남이다. 그러니
정원군과
인헌왕후는 12촌 남매 뻘이다. 그런데 저건 태종 - 효령대군을 기준으로 한 것이고 파고 들면 다른
촌수도 나온다. 사실
인헌왕후의 혈통과 왕실과의 관계가 상당히 복잡하다. 인헌왕후의 고조할머니(아버지 구사맹의 친증조모)가 세종의 손녀(
영응대군의 딸 길안현주)이고 어머니 평산부부인의 할머니 역시 세종의 증손녀(계양군의 손녀)이기 때문이다. 즉, 이중삼중으로 왕실과 혼인했기 때문에 저렇게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 인헌왕후는 부계로도 모계로도 세종의 6대손이 된다. 정원군은 세종의 7대손이므로 세종 기준으로 보면 저 둘은 13촌 고모 - 조카 뻘이다. 그리고 이들의 후손들로 조선
왕조 최후까지 왕통이 이어지니 그 중심에는 효령대군의 혈통이 존재하는 셈이다.
[37]
낭장(郞將) 증
병조판서 유례(有禮)의 증손녀이고 군수 증 찬성 밀(密)의 손녀이며 인효(仁孝)의 딸이다.
[38]
휘는 량(㝗). 1444년 창선대부 안강정(安康正)에 제수된 후 1476년, 1478년, 1479년에
성종이 효령대군 저택에 거둥하여 위로 잔치를 베푼 자리에 입시하였다. 1489년 12월 16일 문소전(文昭殿)에 입직할 때 수복노(守僕奴)끼리 싸우고 또 제사 때 쓰는 돗자리인 지의(地衣)를 태운 일을 계달(啓達)하지 않은 책임으로 직첩(職牒)이 회수되었으나 곧 환급(還級)되고 명선대부에 가자(加資)되었다.
[39]
습계군(習溪君) 효의(孝議)는 1493년 윤 5월 9일에 실시된 종친시예(宗親試藝)에서 차석을 차지하였다.
[40]
조선 중기의
권신인
이량(6세손)이 율원군의 증손자이다. 이량의 12대손이 바로
이기붕이다.
[41]
공교롭게도 이승만
대통령은 양녕대군의 16대 후손이다.
[42]
본인은 항렬자를 쓰지 않았으나 할아버지가 효령대군 21세손 항렬자인 '廷'자를 사용해서 이름이 이정현(李廷賢)이며 아버지가 효령대군 22세손 항렬자인 '揆'자를 사용해서 이름이 이문규(李文揆)이므로 효령대군 23세손이다.
[43]
효령대군 22세손 항렬자인 '揆'자를 사용한다.
[44]
1부 〈추동궁 마마〉에서는
공양왕 역.
[45]
주호성의 아들,
MBC 24기 공채
탤런트이자 가수
장나라의 오빠.
[46]
2000년
KBS 드라마 〈
태조 왕건〉에서는
아지태 역.
[47]
이게 단순히 체구만 그럴싸한게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에는 활쏘기를 잘하여 다섯발 쏴서 다섯발 모두 맞추었다며 효령대군의 무예에 대해 기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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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할아버지
이성계와 아버지
태종은 서로 외모가 닮았다는 기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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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명은 50대에, 3명은 40대에, 8명은 30대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