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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46a38><colcolor=#ff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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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24년 12월 25일 | ||
인도 제국 괄리오르 | |||
사망 | 2018년 8월 16일 (향년 93세) | ||
인도 공화국 뉴델리 | |||
재임기간 | 제10대 총리 | ||
1996년 5월 16일 ~ 1996년 6월 1일 | |||
제10대 총리2기 | |||
1998년 3월 19일 ~ 2004년 5월 22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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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46a38><colcolor=#fff> 학력 |
빅토리아 대학교[1] (
영문학, 인도어문학 /
B.A.) (1941-1945년) 아그라 대학교[2] 대학원 ( 경제학 / M.A.) (1945-194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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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힌두교 | ||
신체 | 168cm | ||
소속 정당 |
[[인도 인민당| 인도 인민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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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
인도 외교부장관 (1977년 - 197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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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인민당 초대 당대표 (1980년 - 198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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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하원의원 (1986년 - 1991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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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도의 정치인. 제10대 총리로 처음으로 장기집권에 성공한 비- 인도 국민회의 출신 총리이기도 하다.집권기간 인도의 핵개발을 통한 파키스탄과의 극한 대립으로 이그노벨상을 수상하기도 한 인물이었지만[3] 인도에선 경제 개혁과 사회 개방을 이룩했다는 평을 듣기도 하는 인물이다. 라이벌 정당의 만모한 싱 총리도 '위대한 분'이라고 치켜세워준 적이 있을 정도로 좌우에서 나름 존경받는 총리였다.
2. 생애
2.1. 정계 입문 전
아탈 비하리 바즈파이는 1924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당일에 영국의 식민지배 하에 있던 인도 제국 괄리오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부유한 집안의 학교 교사였고, 인도 카스트의 최상층인 브라만 출신이었던 덕분에 상당한 교육을 받으면서 살 수 있었다고 한다. 1942년 아버지가 우자인 지방의 중등학교에 교장으로 부임한 후 그 곳에서 중등 교육을 받았고, 이후 괄리오르 빅토리아 대학에 입학해 힌디어, 산스크리트어 등에서 학사 학위를 땄다.바즈파이는 16세에 불과한 어린 나이였던 1942년에 우익 힌두 단체 RSS에 가입해 열성 당원이 되었고, 같은 해에 마하트마 간디가 시작한 반영 독립 운동인 Quit India(인도를 떠나라)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바즈파이는 이 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1942년 8월에 영국 군경들에게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4] 바즈파이는 이후 뛰어난 언변과 능력으로 RSS 내에서도 승승장구하면서 1951년에는 RSS의 2인자 자리까지 올라간다.
2.2. 정계 입문 후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자 RSS도 기존의 정치 단체에서 벗어나 제도권 정당인 '바라티야 자나 상'을 창당하고 총선을 준비했다. 바즈파이는 바라티야 자나 상의 북인도 총책을 맡고 델리를 거점으로 선거를 이끌었다. 그러다 바즈파이는 1957년 치러진 제2회 로크 사바[5] 선거에서 당선되어 하원으로 입성하는 데 성공, 이후 원내에서도 타고난 입담과 연설 능력으로 빠르게 몸집을 불려나간다.[6] 1968년에 바즈파이는 바라티야 자나 상의 당대표에 취임했고 이후 나나즈 데쉬무크, 발라즈 마드혹, L. K. 아드바니 등과 함께 당을 이끌어나간다.다만 이때까지는 아직 마하트마 간디와 자와할랄 네루의 후광을 등에 업은 인도 국민회의가 독주하고 있던 시점이었기에 야당에 불과했던 바즈파이와 바라티야 자나 상이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바즈파이가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1975년 인디라 간디 총리가 총선에서 이뤄진 부정을 덮기 위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독재정치를 감행하면서 달라진다. 국내외로 이 계엄령에 대한 비판이 쏟아져나오자 이를 비판하는 야당의 체급이 급속도로 커졌고, 자연스레 반-인디라 간디 세력의 구심점으로 바즈파이의 체급도 커지게 된 것. 바즈파이는 앞장서서 인디라 간디의 계엄령 해제를 촉구하다가 방갈로어 지방의 자택에 연금당하기까지 했다. 2년 후 인디라 간디 총리가 계엄령을 해제하고 1977년에 총선을 다시 치르기로 하자, 바즈파이를 포함한 기타 야당 인사들도 풀려나 인도 국민회의에 대항할 야당 연합을 꾸리니 이게 바로 '자나타 당'이다. 자나타 당은 1977년 총선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자나타 당 연합을 이끌었던 모라르지 데사이가 새 총리로 취임한다.
바즈파이는 데사이 내각 아래에서 외무부 장관을 맡았다. 하지만 자나타 당이라는 정당 자체가 4개에 달하는 야당들이 오직 반-인도 국민회의라는 명분 하나만으로 모여있던 것에 불과했으니 정작 국정을 잡았을 때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었다. 2년 동안 자나타 당 내부에서는 내분이 극도로 심해졌고, 수많은 의원들이 당을 탈당해버렸다. 데사이 총리는 불신임 의결을 막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취임 2년 만인 1979년 사임을 발표했고 그렇게 야당 연합은 허무하게 무너진다. 이때 바즈파이도 함께 국정에서 일시적으로 물러났다. 장관직에서 물러난 바즈파이는 이후 기존 자나타 당의 잔재에서 제 세력들을 끌어모아 1980년 인도 인민당을 창당한다.
하지만 인도 인민당은 창당 초창기만 해도 딱히 두각을 드러내는 정당은 아니었다. 바즈파이는 인민당이 자나타 당을 계승한 후계 정당이라는 걸 내세워 유권자들에게 어필했지만 국민들은 큰 관심이 없었고, 특히 인디라 간디가 암살당하면서 전국적인 동정여론이 일어 인도 국민회의가 총선에서 의석들을 쓸어가버리면서 인민당은 고작 2석 밖에 챙기지 못하며 대패를 거둔다. 바즈파이는 총선 참패에 책임을 지고 잠시 동안 당대표직에서 물러나 자숙했고 이후 1986년에 하원 총선에서 당선되어 다시 잠깐 동안 당대표직을 맡는다.
그러나 바즈파이의 당대표직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강경론자인 L. K 아드바니가 당권을 잡았고, 라마의 탄생지에 기존의 바브리 모스크[7]를 헐어버리고 힌두 사원을 세우는 것을 당론으로 밀어붙였다. 인민당이 이렇게 과격한 힌두주의 종교 정책을 내세우자 여론의 호응을 얻었고 덕분에 인민당은 1989년 총선에서 86석으로 급성장하는 데 성공한다.
2.3. 인도 총리
2.3.1. 내각 1기
1996년 5월 16일 총리 취임사를 발표하는 바즈파이 총리.
90년대 들어서도 계속 세를 키우던 인도 인민당은 기어코 1995년 11월, L. K 아드바니가 바즈파이를 총선에서의 총리 후보로 지명했고[8], 1996년 총선에서 인민당이 실제로 승리하면서 집권당이 된다.
바즈파이는 1996년 5월 16일 인도의 제10대 총리로 취임했지만 그의 앞길은 험난했다. 인민당이 비록 최대 정당이긴 했지만 의회에서 과반을 차지하진 못했기에 타 정당들의 연립이 필수적이었는데 연립 정부 구성에 필요한 정족수를 제대로 채우지도 못했던 것. 결국 바즈파이 총리는 취임 후 16일만에 허무하게 사임하고 만다.
2.3.2. 내각 2기
1996년부터 1998년까지 군소 정당들이 난립하며 그 어떠한 정당도 주도권을 쥐지 못하고 지지부진한 상태가 이어지자 결국 의회는 조기 해산을 결정하고 1998년에 새로 총선을 치르기로 합의했다. 이 1998년 총선에서 인민당은 다시 승리를 거두었고,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자 이번엔 힌두주의와 보수주의를 추구하는 정당들을 싸그리 긁어모아 인민당이 주도하는 '국민민주동맹(NDA)'을 결성한다.바즈파이는 국민민주동맹을 기반으로 다시 총리직을 맡게 되는데, 이번에는 처음과 다르게 나름 탄탄한 의석수를 확보했고 의원들도 잘 관리하면서[9] 13개월 동안 연정을 이끌었다. 다만 1999년 중반에 전인도 안나 드라비다 무네트라 카자감(AIADMK)당이 연정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면서 정족수를 채우지 못해 다시 연정이 붕괴해버리고야 만다. 하지만 인도 국민회의를 포함한 야당 세력들 역시 독자적으로 연정을 구성할 의석수는 차지하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또다시 의회가 해산되고 새로 총선을 실시하게 된다.
참고로 이때는 파키스탄과의 군사 충돌과 인도의 핵개발이 가속화되던 시기였다.[10] 1998년 5월에 라자스탄 주에서 1976년에 실시된 '미소짓는 부처 프로젝트(Smiling Buddha Project)' 이래 처음으로 5번에 걸친 핵실험이 이뤄졌고, 이에 격분한 주변 갈등국 파키스탄은 똑같이 핵실험을 감행하며 핵무기를 손에 넣었음을 과시했다. 한창 탈냉전으로 평화 무드가 이뤄지고 있던 시점에 이런 짓거리를 저질렀으니 당연히 전세계적으로 비난이 쏟아졌고[11] 유럽, 미국, 일본 등 주요 국가들이 인도에 기술, 정보 관련 제재를 때렸다고 한다. 이로 인해 인도는 경제적 타격을 입긴 했지만 원체 대규모의 내수 시장이 있는지라 생각보다 잘 버텨냈고, 인도 대중 여론 역시 핵무기 보유에 압도적으로 찬성했기 때문에 인도는 끝끝내 핵무기 보유를 밀어붙여 결국 전세계의 묵인을 받아내는 데 성공한다.[12]
허나 이를 계기로 악화된 파키스탄과의 갈등은 점점 심해져[13] 1999년 카길 전쟁까지 터지는데, 참고로 카길 전쟁은 핵무기 보유국들 간에 일어난 최초의 전쟁으로, 1999년 5월에 파키스탄 군대가 카길 지방에 침투해 강제로 점유하면서 발발했다. 이때 파키스탄은 핵무기 보유국이라는 타이틀을 업고 함부로 세계가 개입하거나 인도를 도와주지 못할 것이라 믿었지만 현실은 파키스탄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격분한 인도 정부가 무려 3만에 달하는 대군을 투입해 대대적인 공격을 펼쳤고[14], 중국 등 전통적인 우방국조차 명백한 침략국인 파키스탄을 외면하면서 외교적으로도 수세에 몰리고야 만 것. 결국 파키스탄의 페르베즈 무샤라프 대통령은 군대 철수를 지시했지만 이 사태로 인해 인도와 파키스탄의 관계는 나락으로 떨어진다.
반대로 이 카길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바즈파이 정권의 인기는 압도적으로 올라간다. 상기했듯 전인도 안나 드라비다 무네트라 카자감(AIADMK)당이 끈질긴 설득에도 불구하고 1999년 중반에 인민당과의 연정을 때려치고 나가버리자 그 어떠한 정당도 정부를 구성할 만큼의 우세를 쥐지 못해 1999년에 새 총선이 실시되었는데, 이 총선은 카길 전쟁 바로 직후에 치러졌고, 기세를 몰아친 바즈파이 정부와 인민당에 대한 인도인들의 지지가 정점에 달해있던 덕에 인도 인민당은 전체 543석 가운데 인민당 182석, 연합 330석을 차지하는 대승을 거둔다. 그리고 바즈파이 총리는 1999년 10월 13일 세 번째로 총리 취임선서를 하고 임기를 시작한다.
2.3.3. 내각 3기
1999년 10월 13일 세번째 임기를 시작한 바즈파이였지만 얼마 안가 여러 국내외적 난관에 봉착한다. 가장 대표적인 건 취임 후 몇 달도 안되어 터진 인도 항공 IC 814편 납치 사건이었다. 탈레반 등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1999년 12월 카트만두에서 델리로 향하던 비행기를 납치한 후 이들을 볼모로 잡고 테러리스트들을 인도 감옥에서 석방할 것을 요구한 것. 딱히 뾰족한 수가 없었던 인도 정부는 이에 굴복해 테러리스트 일부를 석방하고 대신 승객들을 돌려받았다. 카길 전쟁으로 급격히 관계가 나빠졌던 파키스탄과도 관계회복을 위해 나름 정상회담을 진행하려 시도하기도 했지만 카슈미르 문제에 이견이 터져나오면서 별다른 해법은 거두지 못했다. 다만 나쁜 것만 있는 건 아니었고 2003년(?)에는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이 22년 만에 처음으로 미국 대통령 신분으로 인도를 국빈방문하기도 했다.[15]집권 2년차인 2001년에는 인도 국회의사당이 무장한 괴한들에게 점거되는(...) 사건이 터졌다. 괴한들은 국회 경비원들을 죽이고 건물을 죽이고 건물을 장악했지만 인도 군경이 총동원되어 제압한 덕에 얼마 못가 사살되거나 체포된다. 문제는 이들이 파키스탄 국적의 젊은 남성들이었다는 것. 이로 인해 안그래도 카길 전쟁으로 악화되어있었던 인도-파키스탄 관계는 급경색에 들어갔고 바즈파이 총리는 50만~75만 명에 달하는 엄청난 대군을 파키스탄 국경에 배치하며 노골적으로 파키스탄을 위협했다. 자칫하면 정말 또다시 한번 전쟁이 터질 위기였기에 전세계가 나서서 인도와 파키스탄을 뜯어말렸고, 결국 국제사회의 중재를 받아 인도와 파키스탄 간의 평화협정이 체결되어 군대를 물리는 데는 합의했지만 양국 간의 관계는 여전히 최악이었다. 이후에도 바즈파이 총리의 재임기간 내내 인도와 파키스탄의 외교 관계는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뭐니뭐니해도 그의 재임기간 내 인도에서 일어난 최대 사건은 2002년 구자라트 폭동이었다. 때는 바야흐로 2002년 2월 27일,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던 힌두교도들이 기차를 타고 가던 중 고드라 마을에 정차했는데, 이와중에 힌두교도들과 무슬림들간에 싸움이 발생했고 이 과정에서 화재가 발생해 수 십여 명의 힌두교도들이 불타 사망했다. 문제는 여기에 더해 희생자들의 시신을 아마드바드에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에 그대로 전시했는데, 이 무책임한 조치는 해묵은 인도내 힌두-무슬림 사이의 악감정에 불을 붙이고야 말았다. 격분한 힌두교 폭도들이 구자라트 주에서 폭동을 일으키고 수 천명의 무슬림들을 죽이고 여성들을 강간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최소 1,000여 명의 사람들이 살해당했으며 더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다. 그와중에 당시 구자라트 주 총리였던 나렌드라 모디는 상황을 방관하기만 했다는 지적을 받았고[16], 바즈파이 총리 역시 폭동 직후 '무슬림들은 타 종교인들과 공존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라는 발언을 내뱉으며 상황을 전혀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는 욕을 들어먹었다.[17]
험악했던 폭동이 가라앉고 난 후 바즈파이 총리는 집권 후반기인 2003년부터 2004년까지 경제성장에 집중했다. 주로 외국인 직접투자 장려, 정부 소유 기업의 민영화 정책, 국가 부정부패 일소 밑 경제 개혁 정책들을 중점으로 펼쳤고 덕분에 인도는 2003~2004년 연 7%에 달하는 고공 성장률을 기록했다. 또 열악한 인도의 도로 사정을 해결하기 위해 전국에 국도를 깔고 정비하는 국책사업도 벌였으며 초등, 중등 학교의 교육의 질 개선에 앞장서기도 했다. 특히 집권 후반부에 중국과의 관계가 크게 개선되었는데, 가장 큰 이유는 그가 2003년 7월 중국을 국빈방문해 티베트를 중국의 영토로 공식 인정했던 덕이 컸다. 중국은 보답으로 시킴 지방의 인도 영유권을 인정했고 중인관계는 급속도로 호전된다. 그외에도 집권 말까지 파키스탄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긴 했고 군사적 적대행위도 일시적으로 중지했다.
2.4. 2004년 총선 패배
구자라트 폭동의 여파가 남아있었지만, 그래도 집권 막판 경제성장률이 좋게 나오기 시작했기에 당시 상당수 평론가들은 바즈파이 총리가 2004년 총선에서도 승리할거라 예측했다. 당시 바즈파이 내각도 '빛나는 인도'라는 슬로건 아래에서 경제성장률을 최대 치적으로 발표하면서 선거 운동을 벌였다. 바즈파이 총리는 파키스탄과의 일시적인 평화 분위기를 이용하기 위해 일부러 선거를 6개월 앞당기면서까지 총선을 조기 실시했고, 많은 여론조사에서도 인민당 승리를 예상했다. 그러나 투표함을 막상 까보니 인민당은 543석 가운데 고작 138석만을 겨우 수비했다. 인민당이 주도하는 보수정당연합 국민민주동맹(NDA)를 다 합쳐봤자 185석 밖에 되지 않았다. 이전의 인민당 자체 182석, 연합 330석과 비교하면 거의 절반 가까이가 털린 것이었다.반대로 당시 소냐 간디가 이끌던 인도 국민회의는 145석을 획득하며 최대 단일 정당으로 급부상했다. 국민회의는 좌파 계열 정당들을 모아 총 220석의 '통합진보동맹(UPA)'를 구성했고 연립정부를 수립할만한 의석수 획득에도 성공한다. 선거에서 패배한 바즈파이 총리와 인민당 각료들은 모두 사임했고 이후 경제관료로 이름이 높던 만모한 싱 총리가 소냐 간디의 추천을 받아 새로운 인도 총리로 취임한다.
2.5. 퇴임과 사망
바즈파이 전 총리를 조문하러 온 정치인들. |
결국 바즈파이는 투병 생활을 하다 2018년 6월 11일 신장 감염으로 급히 입원했고, 2018년 8월 16일 오후 5시 5분에 별세했다. 당시 나렌드라 모디 총리와 람 나트 코빈드 대통령 등 많은 인사들이 그를 조문했다. 생전 투닥거린 파키스탄을 포함한 많은 나라들에서도 조의를 표했다. 그의 유골은 8월 19일 갠지스 강에 뿌려졌다.
상기되어있듯 집권기간 핵실험 논란이나 구자라트 폭동 대처 미비 등 일부 과오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개인적으론 큰 구설수 없이 인생을 살았다보니 퇴임 이후엔 괜찮은 평가를 받는 총리로, 사후엔 인도 인민당 비판자들도 "나쁜 당에서 나온 좋은 인물"(...)이라고 평하기도 한다는 모양. 심지어 반대 정당 소속인 만모한 싱 총리가 물론 립서비스도 있겠지만 어쨌든 연설 도중 그를 서사시 마하바라타에 등장하는 인물에 비유하며 '위대한 분'이라고 추켜세워줬을 정도였다.
3. 기타
[1]
현재 지와지 대학교 M.L.B. Govt. 칼리지.
[2]
현재 D.A.V. 카푸르 대학교.
[3]
평화를 위해 경쟁적으로
핵폭탄을 터뜨려댔다는 게 이그노벨상의 수여 이유였다. 참고로 이때 파키스탄 대통령이던
페르베즈 무샤라프 대통령도 이그노벨상을 공동으로 수여받았다.
[4]
이때 바즈파이는 자신이 군중 속에 섞여있었을 뿐 시위에는 가담하지 않았다는 내용의 각서를 쓰고 풀려났는데, 이는 두고두고 그가 정적들에게 공격 당하는 원인이 된다. 바즈파이가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게 거짓이라는 증거라는 것이다.
[5]
인도의 하원에 해당한다.
[6]
그의 연설을 직접 들은
자와할랄 네루 총리가 바즈파이의 연설 실력에 감탄해 '언젠가 저 자가 인도의 총리가 될 것이다'라고 예언하기도 했다고.
[7]
무굴 제국의 초대 황제인
바부르가 세운 모스크였다. 주변 무슬림들에게는 역사적, 종교적 가치가 큰 모스크들 중 하나였다고 한다. 결국 1992년 헐려나간다.
[8]
여담으로 바즈파이는 개인적으로 이 지명을 싫어했다고 한다. 선거를 이기는 게 먼저지 총리 지명부터 하는 짓은 김칫국 마시기라고 생각했기 때문.
[9]
이게 까다로웠던 이유는 타 군소 정당들이 인민당의 과격한 힌두 중심주의에 동조할 생각이 별로 없었던 탓이 크다.
[10]
결과적으론 바즈파이 총리 시절 핵버튼을 눌렀기 때문에 그가 부각되어 국제사회의 욕을 먹긴 했지만, 사실 핵실험 자체는 이전 인도 국민회의 정부 시절부터 이어져내려오던 것이었다. 특히
P. V. 나라심하 라오 총리 시절 거의 마무리가 된 상태였기에, 바즈파이 총리는 이후 '나는 그저 폭탄을 터뜨린 것 밖에 없다.'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거의 모든 작업은 라오 총리 시절 이미 끝냈다는 뜻이다.
[11]
참고로 당시 인도와 파키스탄은 NPT(핵확산 금지조약)에 가입하지 않은 상태에서 핵무장에 나섰는데, 이스라엘도 비슷한 경우다. 이 점에서 1) NPT가 등장하기 전에 핵무기를 개발한 미국 등 5대 핵보유국, 그리고 2) NPT에 가입했다가 탈퇴한 후 핵무장에 나선 북한과 차이를 나타낸다.
[12]
미국이 핵실험을 이유로 인도와 파키스탄에 부과한 제재도 몇 달 안가서 풀렸다. 다만 이 조치는 이후 한반도 정세엔 매우 안좋은 선례를 남긴 꼴이 되는데, 이걸 보고 북한 역시 제재 무시하고 계속 핵실험하다 보면 묵인해주겠지 싶어 핵실험을 강행한다.(...)
[13]
물론 인도나 파키스탄 내부에도 그저 갈등 증폭만 원하는 사람들은 없는지라, 서로 핵무기를 쥐게 된 인도와 파키스탄은 관계 개선의 필요성을 느껴 1998년 말부터 1999년 초까진 해빙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1999년 2월에
델리와
라호르를 잇는 버스 노선 개통과 함께 '라호르 선언'의 발표로 인도-파키스탄 간의 경제 협력을 촉진하기로 합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평화무드는 3달도 못가 카길 전쟁으로 박살난다.
[14]
냉정하게 보면 같은 핵무기를 들고 있더라도 그 핵을 쓰는 순간 진짜 파키스탄은 지도에서 사라질 각오까지 해야 되기에 사실 핵은 국가 멸망 테크에서나 최후의 수단으로 쓸 수 있는 돈만 쳐바른 장식품일 뿐이었고, 재래식 군사력에선 파키스탄이 인도에 밀리는건 자명했다.
[15]
여담으로 1990년대 총리 시절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지각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시기상 인도의 핵실험이 터진지 얼마 안되었던 때였으므로, 양측의 불편한 입장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그래도 클린턴의 임기 마지막해인 2000년에는
백악관의 초청을 받아 방미, 정상회담을 갖기도 했다.
[16]
모디가 강경 힌두 성향이었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그가 일부러 상황을 방치한거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다.
[17]
이후 바즈파이 총리는 2004년 총선에서
인도 인민당이 대패하자 구자라트 폭동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으며, 당시
나렌드라 모디 총리를 해임하지 않은 것은 실수였다고 후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