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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8 19:25:21

라지브 간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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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공화국 제6대 총리
라지브 라트나 간디
राजीव गांधी

Rajiv Gandhi
파일:rajiv gandhi hindu.jpg
출생 1944년 8월 20일
인도 제국 봄베이[1]
사망 1991년 5월 21일 (향년 46세)
인도 공화국 타밀나두 스리페룸부두르
재임기간 제6대 총리
1984년 10월 31일 ~ 1989년 12월 2일
서명 파일:라지브간디서명.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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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46a38><colcolor=#fff> 학력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컬리지 (중퇴)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 (중퇴)
종교 힌두교
신체 178cm, O형
조부모 외할아버지 자와할랄 네루 (1889 ~ 1964)
부모 어머니: 인디라 간디 (1917 ~ 1984)
아버지: 페로제 간디 (1912 ~ 1960)
형제자매 남동생 산자이 간디 (1946 ~ 1980)
배우자 소냐 간디 (1946 ~ )
자녀 아들: 라훌 간디 (1970 ~ )
딸: 프리양카 간디 (1972 ~ )
소속 정당
[[인도 국민 회의|
인도 국민 회의
]]
약력 인도 하원의원
인도 국민 회의 당수
}}}}}}}}}

1. 개요2. 상세
2.1. 인도 총리2.2. 스리랑카 내전 개입2.3. 보포스 스캔들2.4. 총리직 사임과 암살
3. 가족 관계

[clearfix]

1. 개요

인도 정치인. 제6대 인도 총리를 지냈다.

어머니 인디라 간디 총리와 네루-간디 가문의 후광을 등에 업고 인도 총리에 취임했다. 인디라 간디 총리가 1984년에 암살당한 직후 전국적인 동정 여론을 등에 업고 1984년 총선을 역사적인 인도 국민회의의 초압승으로 이끌 수 있었다. 재임 기간에 몰디브 스리랑카의 내전에 개입하는 등 남아시아의 패권국으로서의 면모를 드러냈으며 경제적으로는 자유주의적인 정책을 펼치려고 시도했지만 모든 것이 다 마음대로 돌아가진 않았다. 스리랑카 내전을 중재하기 위해 보내 놓은 인도 평화유지군은 끝없는 타밀족 반군 세력 LTTE에 시달리면서 내전 제압에 실패했고 심지어 현지에서 강간과 약탈을 일삼으며 국제적으로 욕을 처먹었다. 뿐만 아니라 경제 자유화 정책도 빈익빈부익부를 우려한 당내 지도부와 농민들의 저항으로 제대로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라지브 간디 내각의 정치생명을 끝장낸 건 1987년 터진 '보포스 스캔들'이었다. 스웨덴 방산업체 보포스 사가 무기 수출을 위해 라지브 간디를 포함한 인도 정치인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뿌렸던 사건으로, 이 사건이 터짐에 따라 인도인들의 민심은 완전히 돌아섰다. 특히 라지브 간디가 신선한 신인 정치인으로서의 청렴한 이미지를 강조했기 때문에 부정부패 스캔들은 그에게 치명타였다. 결국 인도 국민회의는 1989년 총선에서 정권을 야당 연합 자나타 달에게 내주었고 라지브 간디도 자연스레 총리직에서 사임하고 말았다. 이후 와신상담을 노리며 1991년 총선에 나섰지만 스리랑카 반군 세력 LTTE가 보낸 암살자에게 폭탄 테러를 당하면서 목숨을 잃었다.

여담으로 탈자본주의 실험 운동 중 하나인 오로빌 특별법도 그의 재임 시기인 1988년 인도 국회를 통과했다.

2. 상세

파일:nehru,rajiv.jpg 파일:rajiv-gandhi-with-indira-gandhi-1502281335.jpg
외할아버지 자와할랄 네루와 함께. 어머니 인디라 간디와 함께 걷는 라지브 간디의 모습.
1944년 8월 20일 인도의 독립운동가 겸 초대 총리인 자와할랄 네루의 외손자이자 인디라 간디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51년에 동생 산제이 간디와 함께 학교에 입학해 초엘리트 교육을 받았고 당시 선생들은 라지브 간디를 수줍음이 많고 내성적이며 그림 그리기를 즐겼다고 회고했다. 이후에는 영국으로 건너가 유학생활을 했다. 1961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공부를 시작했지만 썩 공부를 잘 하는 편은 아니어서 학위를 따는 데는 실패했다. 결국 1966년에 대학을 옮겨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에서 공학 학사과정을 시작했으나 이마저도 마치지 못했다고 한다. 라지브 간디도 훗날 자신이 공부를 잘하는 우등생은 아니었다고 고백했다.

이후 간디는 어머니 인디라 간디가 총리에 오른 이듬해 1967년에 인도로 귀환했지만 총리 어머니라는 든든한 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에 별 뜻이 없었기 때문에 평소 관심이 많던 비행기 조종사 생활을 하며 시간을 보냈으며 1970년에는 에어 인디아에 조종사로 고용되었다. 참고로 소냐 간디를 만나 결혼식을 올린 것도 이즈음이다. 라지브 간디는 무려 3년 동안의 구애 끝에 소냐 간디와 결혼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결혼식을 올린 지 2년이 지난 1970년에는 둘 사이에서 첫 아들 라훌 간디를 낳았고, 1972년에는 딸 프리앙카 간디를 낳았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라지브 간디는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 라지브 간디가 본격적으로 정계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동생 산제이 간디의 죽음이었다. 이미 옛날부터 어머니를 따라 정계에 깊숙이 개입하던 산제이 간디가 1980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자 라지브 간디는 그때부터 정계에 뛰어들었다.

권력욕과 독점욕이 강했던 인디라 간디 총리는 제 혈육만을 제일 신뢰했다. 그래서 기존에 산제이 간디에게 막대한 권력을 부여하며 후계자처럼 대했는데 산제이 간디가 뜻밖의 사고로 사망하자 남은 라지브 간디를 제 후계자로 삼으려고 했다. 총리의 의중을 알아차린 인도 국민회의 의원들 역시 70명이 한꺼번에 모여 라지브 간디의 정치 입문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결국 라지브 간디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1981년 5월에 열린 인도 국민회의 전국대회에서 라지브 간디는 아메티 선거구의 국민회의 의원후보로 지명되었으며 그해 8월 의원직에 당선되면서 하원에 입성했다. 라지브 간디는 1981년 7월 다이애나 비 찰스 3세의 결혼식에 참여하는 걸로 첫 공식일정을 시작했으며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에서 24시간 근무하면서 타의 모범을 보이며 훌륭한 지도자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단순히 인디라 간디의 휘광만을 업고 탱자탱자 노는 인간은 아니었다.

2.1. 인도 총리

어머니 인디라 간디 총리는 1984년 10월 31일 시크교 경호원들에게 암살당했다. 당시 인디라 간디는 '블루스타 작전'을 펼쳐 시크교 무장 분리주의 세력들을 강경진압했는데 이 과정에서 시크교 최대 성지인 암리차르 황금사원이 일부 파괴된 것에 원한을 품은 시크교도 경호원들이 작당해 인디라 간디 총리를 살해한 것이다. 이후 인디라 간디 총리의 죽음에 분노한 인도인들에 의해 전국적인 폭동이 일어났고 전국적으로 8,000여 명의 시크교도들이 보복살해당했다. 하지만 인도 경찰은 딱히 이 폭동을 제지하려고 시도하지 않았고 심지어 인도 국민회의 간부들이 이 폭동을 뒤에서 조장하기도 했다는 루머까지 돌기도 했으며 심지어 라지브 간디도 '거대한 고목이 쓰러지면 땅이 흔들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라고 발언하면서 인디라 간디의 죽음으로 인한 혼란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듯한 모습을 보이며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라지브 간디는 어머니 인디라 간디가 사망선고를 받은 지 몇 시간만에 바로 인도 총리로 지명되었다. 라지브 간디 총리는 총리직에 취임하자마자 대통령에게 의회를 해산하고 새로 총선을 치를 것을 요구했고 공식적으로 인도 국민회의 당대표직에 오른 뒤 1984년 총선을 압도적인 대승으로 이끌면서 지지기반을 단단히 했다. 이때 인도 국민회의와 라지브 간디는 인디라 간디의 암살에 따른 동정여론에 힘입어 543석 중 411석을 차지하며 역사에 길이남을 압도적인 승리를 따냈다. 뿐만 아니라 라지브 간디의 신인 정치인으로서의 이미지와 부정부패에서 자유로워보이는 듯한 인상도 꽤 영향을 미쳤다. 라지브 간디는 1984년 12월 31일 총리 취임 선서를 했고 인도 최연소 총리로서 정계 입문 3년 만에 총리직에 오르는 대기록을 썼다.

라지브 간디가 총리 취임 후 가장 먼저 한 일이 '반란표 금지법' 통과였다. 이 법은 1985년 1월에 의회를 통과했는데 내용은 한 번 의원이 뽑히고 나면 다음 총선이 실시되기 이전까진 정당을 함부로 옮길 수 없도록 금지하는 것이었다. 가장 큰 이유는 워낙 부패가 판을 치던 인도 정계에서 의원들이 대가를 받고 정당을 옮기거나 당내 분란이 있을 때마다 사분오열해서 찢어지는 경우가 엄청나게 많았기 때문. 당장 1980년에만 해도 인디라 간디에 반발한 당내 지도부를 포함한 수많은 의원들이 인도 국민회의를 탈당해 다른 당으로 옮겨가며 정계가 혼란스러워지기도 했다.

1985년에는 유명한 샤 바노 사건이 터졌다. 인도 대법원은 1985년에 이혼한 무슬림 남편이 이혼녀인 샤 바노에게 위자료를 지급해줘야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우리야 당연한 판결이었지만 무슬림들은 아니었다. 무슬림들은 이번 판결이 선례가 되어 이혼시 남편이 아내에게 위자료를 지급하게 되는 걸 우려했고, 대대적인 시위를 벌이며 정부를 압박했다. 무슬림들의 목소리를 함부로 무시하긴 어려웠던 라지브 간디 총리는 무슬림들의 손을 들어줬다. 결국 1986년 잇다(Iddah)[2] 기간에 이혼한 경우, 아니면 이혼 후 90일까지만 생활비를 지급하면 된다는 내용의 법안이 의회를 통과하고야 말았고, 이로 인해 인도 무슬림의 여성 인권은 상당히 후퇴하게 된다. 법안을 주도했던 라지브 간디 총리 역시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었고 전문가들은 '소수 무슬림들의 목소리를 듣겠답시고 나라를 뒤로 후퇴시켰다'라고 맹비난했다.

경제적으로는 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펼치려 노력했다. 점차 나라의 민영 부문을 늘려나갔고 인센티브를 제공하면서 외국 자본의 유입을 들여오려 시도했다. 하지만 라지브 간디의 자유주의화 시도는 바로 난관에 부닺히게 되는데, 가장 큰 이유는 일단 인도 국민회의 정당 자체가 좌파 정부였고 인디라 간디의 폐쇄주의, 보호주의적 경제정책을 따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었다. 인도 국민회의 당 수뇌부 역시 라지브 간디의 정책이 부자들만 더 잘살게 만들 것이라 비난했고, 시골과 농촌에 사는 압도적 다수의 농민들 역시 라지브 간디의 경제관을 비판하자 라지브 간디 총리는 슬그머니 꼬리를 내릴 수 밖에 없었다. 다만 이후에도 경제 개발에 대한 꿈을 아예 버린 것은 아니어서 'License Raj'라고 하는 거래허가증 제도를 대폭 축소해 기업들이 정부를 거치지 않고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3] 과학기술 개발에 막대한 정부 자금을 투자하거나 기술산업에 관세를 줄여주는 등 정책을 펴기도 했다. 또한 인도 전역의 고등교육을 확장하면서 교육의 질을 상승시키려 노력했고, 시골 곳곳에 공중전화선을 까는 업적을 남겼다.

2.2. 스리랑카 내전 개입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스리랑카 내전 문서
번 문단을
인도의 개입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파일:external/thuppahi.files.wordpress.com/f6-ipkf-troops-on-guard.jpg 파일:external/www.sangam.org/NewsweekNov91987sarongclad.jpg
전투 중인 인도 평화유지군(IPKF). 주위를 둘러보는 LTTE 대원의 모습.
외교 면을 보자면 강한 인도를 추구하며 타국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대표적으로 세이셸에서 프랑스 알베르 르네 대통령에 반대하는 쿠데타가 일어나자 간디 총리는 바로 군대를 파견해 이를 제압했고, 1988년에 몰디브에서 쿠데타가 일어나자 1,500여 명에 달하는 군대를 파견해 쿠데타를 제압했다. 다만 파키스탄과는 1987년 심라 협정 재이행을 확인하는 등 딱히 큰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1987년 2월에는 파키스탄 대통령 지아 울 하크 델리를 국빈방문하기도 했다. 라지브 간디 총리가 가장 큰 족적을 남긴 외교 사건은 스리랑카 내전 때였다. 당시 스리랑카는 북부 타밀 주에 사는 타밀족들이 허구한 날 독립을 요구하며 분리주의 운동을 펼치고 있었는데, 이들이 인도 내 분리주의 세력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우려했던 라지브 간디 총리는 스리랑카에 대놓고 개입할 것을 시사했다.

당시 스리랑카는 주류인 싱할라족과 북부에 모여사는 타밀족 간에 민족갈등으로 치고받고 싸우고 있었다. 싱할라족은 북부에서 유입된 아리아인들과 스리랑카 토착 베다인들의 혼혈이었고 타밀족은 인도 남부에서 건너온 민족이었다. 그러나 싱할라족이 스리랑카의 주권을 잡으면서 이에 반발한 타밀인들이 대놓고 정부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스리랑카에서 싱할라와 타밀의 내전이 격화되자 인도 역시 난처한 상황에 놓인다. 인도 남부에도 역시 타밀족들이 대거 살고 있었고 인도 타밀족들은 안그래도 북인도 중심 정책에 불만이 많던 터라 스리랑카 내전이 격화되면 언제든지 인도에까지 불이 옮겨붙을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이다. 그와중에 타밀족은 '타밀 엘람 해방 호랑이(LTTE)'를 결성해 무장단체를 세우고 본격적 전쟁을 벌였다. 결국 라지브 간디 총리는 스리랑카 정부군과 타밀족을 중재하기 위해 1987년 인도 평화유지군(IPKF)을 파병하게 된다. 이후 스리랑카 북동부에 인도군 주둔, LTTE의 무장해제, 스리랑카의 타밀어 공용어 지정 등을 골자로 하는 인도-스리랑카 조약이 맺어지며 잠시 평화를 찾는 듯 보였다.

처음에는 LTTE도 인도의 무장해제 요구를 받아들이는 듯 싶었지만 결국 끝끝내 무장해제를 거부하자 이젠 인도 평화유지군과 LTTE 사이에서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인도군은 '평화유지'라는 이름과는 걸맞지 않게 스리랑카 현지에서 온갖 약탈과 강간을 일삼으면서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켰고 LTTE와의 교착은 끝이 날 기미가 보이지 않으며 진흙탕으로 변해버린다. 결과적으로 인도의 스리랑카 분쟁 해소는 완전히 물 건너가 버렸다. 심지어 인도는 인도-스리랑카 조약에서 따낸 교전권과 전작권을 스리랑카에 넘겨주면서까지 LTTE와 전쟁을 벌였지만 게릴라 전법을 쓰는 LTTE를 완전히 제압하긴 무리였다.[4] 결국 스리랑카 자국내의 여론도 '인도군은 스리랑카에서 철수하라.', '스리랑카의 문제는 우리나라가 해결해야 할 문제다!'라며 주둔 인도군 병력 철수를 요구하는 주장이 커지는 등 점점 악화되었고, 인도 내에서도 '인도판 베트남 전쟁,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만들꺼냐는 비난이 커졌지만 라지브 간디는 끝끝내 철군을 거부했다.[5] 결국 인도군은 1989년 총선에서 라지브 간디 총리가 패배하고 이듬해인 1990년에 와서야 스리랑카에서 철군했다.

여담이지만 라지브 간디 총리는 스리랑카 내전 개입 과정에서 암살당할 뻔했다. 그는 직접 스리랑카 대통령과 인도-스리랑카 조약을 맺기 위해 스리랑카로 건너갔는데 조약 체결 바로 다음날인 1987년 7월 30일에 라지브 간디가 콜롬보의 대통령궁에서 호위병들을 시찰하는 중에 스리랑카 수병들 중 하나가 라지브 간디를 암살하려고 시도했다. 천만다행으로 라지브 간디 총리가 반사적으로 몸을 숙여 간신히 총탄을 피해서 살아남았다. 해당 수병은 바로 옆 호위병들에게 끌려갔고 총리 암살 미수로 약 2년 반 동안 투옥됐다. 참고로 라지브 간디 총리가 암살 시도를 당한 사례는 이번뿐만 아니라 1985년과 1986년에 걸쳐 세 번이나 더 있었다. 한 번은 1985년에 시크교도 2명이 몰래 나무 위에 숨어 라지브 간디를 죽이려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1986년에도 시크교도들이 2번 씩이나 각각 라지브 간디를 암살하려고 시도했지만 역시 무위로 돌아갔다.

2.3. 보포스 스캔들

파일:Haubits_77_(_Field_Howitzer_77__or_FH-77).jpg
보포스 사(社)에서 제조한 견인포.
라지브 간디 총리는 그럭저럭 인도 국민회의를 이끌어 내각을 구성했고 잘만 하면 다음 총선까지도 순항할 수 있었을 것이지만 라지브 간디 내각을 한순간에 나락으로 보내 버린 사건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보포스 스캔들'이다. 보포스 스캔들은 인도뿐만 아니라 스웨덴에서도 사상 최대의 방산비리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1986년 3월 24일 인도 정부와 스웨덴 방산업체인 보포스 사가 410문의 155mm 견인포의 납품 계약을 따내면서 시작됐다. 최초 입찰에는 보포스와 프랑스의 소프마(Sofma) 사가 참가했다.

인도군은 최초 요구도로 사거리 30km 견인포를 요구했는데 소프마의 155mm 포는 사거리가 29.2km, 보포스 측은 사거리가 21.5km에 불과한 견인포를 제안했다. 그나마도 둘 중 소프마 쪽이 최초 요구도와 가까웠지만 인도 국방부는 재입찰하는 대신 불법적으로 요구도를 변경하면서 2억 3,500만달러로 보포스를 선정했다. 하지만 1년 후인 1987년 4월 16일 한 스웨덴계 라디오 방송사는 보포스 사가 인도뿐 아니라 스웨덴의 정치가들에게 엄청난 금액의 뇌물을 전달한 의혹을 제기했다. 당시 이 비리에서 중간책으로 등장한 인물은 오타비오 콰트로키(Ottavio Quattrocchi)라는 이탈리아인 방산 브로커였는데 그는 당시 총리였던 라지브 간디 집안과의 개인적인 친분을 이용해 약 1,000만달러에 달하는 뇌물을 인도 정계와 국방관련 주요 인사에게 뿌린 것으로 추정됐고 중계 비용 명목으로 총액의 약 3% 정도를 챙긴 것으로 확인됐다.

보포스 스캔들의 여파는 엄청났다. 인도 정부는 보포스 사를 인도 내 거래금지 처분했고 최대한 파장을 줄이려 시도했지만 워낙에 액수가 컸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특히 라지브 간디는 신선한 신인 정치인, 깨끗하고 부정부패로부터 자유로운 이미지로 국민들에게 인기가 많았는데 보포스 스캔들이 터지면서 그 이미지에 치명타를 입어버리면서 국정 장악력을 거의 상실하고야 말았다. 라지브 간디 총리는 이 보포스 스캔들의 여파로 1989년 총선에서 크게 패했고[6] 결국 총리직에서 사임했다.

라지브 간디를 이어 총리직에 오른 사람은 라지브 간디 내각에서 국방장관을 맡고 있던 비슈와나트 프라탑 싱이었다. 그는 '미스터 클린'으로 불릴 정도로 굉장히 청렴한 걸로 유명했는데, 국방장관에 임명되어 보포스 스캔들을 조사하려 시도하다가 라지브 간디로부터 압력을 받고 반강제적으로 사임한 인물이었다. 당연히 보포스 스캔들에서 라지브 간디와 대척점에 서있는 인물이었으니 유력한 정치인으로 떠올랐고, 프라탑 싱은 인도 국민회의에서 탈퇴한 후 '자나타 달' 정당을 창당해 1989년 총선을 승리로 이끌었다. 물론 인도 국민회의의 197석에 비하면 훨씬 적은 143석을 차지했지만 인도 인민당 인도 공산당 등 기타 군소 야당들과 연립정부를 꾸리면서 인도 국민회의를 제치고 내각을 구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2.4. 총리직 사임과 암살

라지브 간디는 총리직 사임 이후에도 끝없이 부정부패 스캔들에 시달렸다. 비록 자나티당과 인도인민당, 인도공산당 등과의 연립정권이 혼란에 휩싸였고 국민회의도 어부지리로 1991년에 정권에 복귀할 수 있었지만 그 해 스위스 언론에서 이멜다 마르코스를 포함한 제3세계 정치인들이 스위스 비밀계좌에 은닉금을 보관해 두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를 내보냈는데 이 정치인들 가운데 라지브 간디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기사에 따르면 라지브 간디는 스위스 계좌에 약 25억 스위스 프랑에 달하는 거금을 꿍쳐두고 있었다. 당연히 야당 세력들로부터 집중포화가 쏟아졌고 그해 12월에는 의회 안건으로까지 상정된다. 하지만 라지브 간디가 속한 네루-간디 가문의 권력이 지나치게 컸던 탓에 제대로 파헤쳐지지는 못했고 불과 3년 후에 라지브 간디가 암살되며 거의 불가침의 영역으로 지정되면서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스캔들이 되어버렸다. 2011년에 의회에서 야당이 이 사건을 재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인도 국민회의 의원들의 야유를 받고 사과하기까지 했다고.

불과 1년 후인 1992년에는 '타임스 오브 인디아'에서 라지브 간디 전 총리가 소련 KGB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충격적인 내용을 폭로했다. 소련 정부도 이 사실을 인정했고 이후 라지브 간디가 소련 산하 국영기업들로부터 받은 혜택을 감사하는 내용을 쓴 편지가 발견되면서 거의 확정적인 분위기로 흘러갔다. 이 소련 기업들로부터 받은 자금들의 대부분은 인도 국민회의 운영자금으로 쓰였다고 한다. 1971년부터 꾸준하게 소련 정부로부터 보조금과 각종 혜택을 받으면서 상당히 많은 돈을 중간에 헤쳐먹었던 것이다. 다만 이 KGB 스캔들 역시 라지브 간디의 암살 이후 제대로 조명되지 못하고 묻혔고 2002년에 재조사를 시도했지만 러시아가 워낙 민감한 문제라 자료 공개를 거부하면서 이루어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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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지브 간디가 암살당하기 바로 직전에 찍힌 그의 마지막 사진. 붉은색 원으로 표시된 사람이 테러범 텐모지 라이아라트남이다.

이후 와신상담을 노리며 1991년에 정권에 복귀했고 그 해 총선에 다시 나섰는데 국민회의가 1당이 되지만 200석 남직한 결과가 나와서 연정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왔으며 1차 투표 결과는 국민회의의 참패로 나왔을 정도로 상황은 좋지 않았다. 그러다가 타밀족이 많이 사는 타밀나두 주 유세를 하던 중 꽃다발을 들고 지지자로 위장한 타밀족 여성 텐모지 라이아라트남(Thenmozhi Rajaratnam)의 자살 폭탄 공격에 사망했다.[7] 이 폭발로 인해 라지브 간디를 비롯해 25명이 사망하고 50여명이 다쳤는데 라지브 간디는 머리가 잘려나간 채 다른 희생자들과 함께 쓰러져 있었으며 그의 복장으로 신원이 겨우 확인되었다. 상단의 사진은 자살폭탄이 터지기 직전의 사진이며 사진을 찍은 직후 폭탄이 터져서 사진기사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지만[8] 필름은 훼손되지 않아서 그의 마지막 사진이 남게 되었다. 사후 수사 결과에 따르면 이 여성은 스리랑카 타밀족 출신이고 스리랑카의 타밀족 반군 단체 타밀엘람해방호랑이(LTTE)에서 파견한 암살자였으며 스리랑카 내전 당시 스리랑카에 주둔하던 인도군 병사들한테 성폭행까지 당하는 등 스리랑카 내전에 인도군을 파병한 라지브 간디 인도 총리에게 원한이 있었다고 한다.

라지브 간디의 장례식은 1991년 5월 24일 거행되었고 전세계 60개국 이상에서 온 고위급 인사들이 참석했다. 장례식을 치른 후에는 외할아버지 자와할랄 네루, 어머니 인디라 간디 등의 가족묘가 있는 야무나 강 인근에서 화장되었다. 인도 정부는 그가 폭탄 테러로 암살당한 5월 21일을 '테러 방지의 날'로 지정하고 매년 기념하고 있다.

한편 1차 투표에서 참패했던 국민회의는 2차 투표와 3차 투표에서는 동정표에 힘입어 의석을 늘리는데 성공해서 국민회의가 2년만에 재 집권하는데 성공했다.

그의 사후 부인인 소냐 간디(이탈리아 출신, 결혼 후 귀화)가 90년대 인도 국민회의의 당수에 추대되었고 인도 최초의 외국인 출신 의원까지 등극했다. 심지어 이후에도 국민회의 당대표직을 꿰차고 있기에 네루-간디 가문의 영향력은 현재진행형이다.

3.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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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도 마하라슈트라 뭄바이 [2] 이슬람법의 재혼금지기간으로 오직 여성들에게만 적용된다. [3] 하지만 완전히 폐지된 건 아니라서 이 제도 자체는 90년대까지 쭉 존속된다. [4] 물론 인도가 국제 이미지 따윈 신경쓰지 않고 밀여붙였다면 LTTE가 졌을 것이다. 스리랑카는 섬나라라 아프가니스탄처럼 다른 곳으로 빠져나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5] 당시 베트남 전쟁은 끝난지 약 10년 정도 된 시기였으며,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도 인도가 스리랑카 내전에 군사 개입하던 동시기 무자헤딘 반군과의 오랜 장기전에 지쳐버린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이 아프가니스탄 주둔 소련군 철수를 추진하고 있었다. [6] 정확히 말하면 패배는 아니었다. 전체 543석에서 197석을 차지하며 여전히 원내 1당 지위는 유지했다. 하지만 몇 년 전 인디라 간디의 동정여론 덕에 400석이 넘게 차지한 것에 비하면 훨씬 초라한 결과였다. [7] 그녀는 일부러 옷 아래에 RDX 700g을 숨기고 라지브 간디 바로 곁으로 접근한 후 폭약을 터뜨렸다. [8] 21세의 하리바부라는 이름의 사진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