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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2 01:17:06

로알 아문센 vs 로버트 스콧

아문센 vs 스콧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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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탐험 준비
2.1. 탐험 동기2.2. 후원 단계2.3. 남극 대륙 도착2.4. 준비작업
3. 탐험 일지
3.1. 10월: 출발3.2. 11월: 마지막 보급3.3. 12월: 아문센 남극점 도착3.4. 1월: 스콧 남극점 도착, 아문센의 귀환3.5. 2~3월: 스콧의 죽음
4. 전략 비교 분석
4.1. 옷4.2. 이동 수단
4.2.1. 아문센의 개썰매4.2.2. 아문센의 스키4.2.3. 아문센의 배, 프람 호4.2.4. 스콧의 스노모빌4.2.5. 스콧의 조랑말4.2.6. 스콧의 인력4.2.7. 스콧의 개썰매
4.3. 식량과 물자
4.3.1. 페미컨과 고열량 식품들을 비축한 아문센4.3.2. 통조림 및 가공식품을 들고 간 스콧4.3.3. 보급품의 양
4.3.3.1. 연료4.3.3.2. 식량4.3.3.3. 여분의 물자
4.3.4. 저장고
4.4. 경로와 스케줄4.5. 탐험대 구성
4.5.1. 아문센4.5.2. 스콧4.5.3.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
4.6. 시행착오4.7. 악천후에 대한 대처법과 관점의 차이4.8. 설맹 대비책4.9. 자금력4.10. 목숨을 건 오기4.11. 부질없는 자존심4.12. 남극점 검증4.13. 탐험과정
5. 이후6. 반응
6.1. 영국의 반응6.2. 영국을 제외한 세계 각국 반응6.3. 노르웨이의 반응6.4. 번외: 시라세 노부
7. 국내 위인전에서8. 미디어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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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지식해적단의 관련 유튜브 동영상

1910년대 노르웨이의 탐험가 로알 아문센 영국 로버트 스콧 해군 대령 남극점 정복 경쟁을 살펴보는 문서이다.

세계 역사상 인상적인 탐험담이 여러 가지 있었지만, 한 목표를 놓고 두 탐험대가 동시에 경주하듯이 경쟁한 일은 보기 드물었다. 뿐만 아니라 대영제국이라 불리며 전세계를 호령하던 최강국 영국이 끼어 있었기 때문에 세계가 주목했다.[1] 범국가적인 관심사였던 이 경쟁은 결국 승자에게는 인류 역사에 남을 무한한 영광, 그리고 의도하지는 않았다지만 패자에게는 고통스러운 죽음이라는 극과 극을 달리는 결말로 끝났다.

정복 경쟁 외적 뿐만 아니라 내적으로도 흥미로운 점이 많았다. 두 탐험가는 성격과 행보가 극단적으로 달랐다. 놀라울 정도로 계획적이고 신중한 아문센과, 열정과 용기로 무장했지만 다소 무모했던 스콧, 두 리더의 성격은 탐험대의 행보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아문센의 탐험대는 철저한 전략을 바탕으로 남극점을 공략하고, 위기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대응하여 생환하고 귀환한 반면, 스콧 탐험대는 안일한 대처법으로 남극점에 늦게 도달한 데다 위기 상황에서도 실수를 연발하다가 귀환 도중 식량 부족과 동상으로 끝내 동사하고 만다.

사실 아문센이 남극탐험 도중에 겪은 위기라 할만한 것도 아문센이 초반에 스콧이 먼저 남극점을 향했을 지도 모른다는 초조함을 이기지 못해 너무 일찍 탐험을 시작한 탓에 남극의 혹독한 추위를 맛보고 다시 프람하임으로 복귀한 것 정도가 전부였다. 아문센의 철저한 준비 덕에 저 탐험 초기의 전진 실패 외에는 위기랄 것도 없이 너무나도 순탄하게 탐험을 완수했다.

2. 탐험 준비

2.1. 탐험 동기

원래 아문센은 북극을 목표로 삼았다. 일찍이 북서항로를 개척하여 영광을 얻었지만, 더욱 위대한 이름을 얻고 싶었다. 북극은 지리적으로 노르웨이와 가까웠으며, 고국의 선배 탐험가 프리드쇼프 난센이 실패한 곳이기 때문에, 아문센은 난센이 쓰던 '프람' 호를 물려받자, 프람 호로 북극을 정복할 생각을 하였다.

그런데 1909년 미국인 탐험가 로버트 피어리 미합중국 해군 공병 소장이 세계 최초로 북극점에 도달했다고 주장하여[2] 아문센은 어쩔 수 없이 미개척지인 남극 정복으로 목표를 수정했다. 이 때 아문센은 피어리 제독이 거기서 죽었어야 했다고 저주할 정도로 크게 분노했고, 자신이 남극점을 정복하고 저술한 책 《남극》에서도 북극점의 반대편인 남극점을 정복한들 누가 반대편에서 얻은 영광을 좋아하겠느냐고 탄식할 정도였다.

영국 해군의 스콧 대령은 이미 1901년에서 1904년에 걸쳐서 남극 탐험대를 지휘해 남극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1차 탐험대의 대원이던 어니스트 섀클턴 1908년 12월에 남극점 100마일 전방(남위 88도 23분)까지 갔다가 돌아오자, 스콧은 남극을 정복하는 영광을 빼앗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조바심이 났다. 스콧은 섀클턴의 탐험보도를 보고 "다음 번에는 성공하겠군." 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게다가 1910년 3월 3일, 미국의 전국 지리학회( 내셔널 지오그래픽 잡지를 발행하는 그 곳이다)가 1911년 12월부터 남극탐험을 시작하여 1년 뒤에 남극을 정복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내놓았다. 탐험대장은 1909년 4월 북극을 정복한 (것으로 알려진) 피어리가 될 예정이었다. 정작 이 미국 탐험대는 엎어지고 말았지만, 이 도전장을 받은 영국 탐험대는 조바심을 내며 탐험 준비를 서둘렀다.

2.2. 후원 단계

아문센은 과학조사를 위해서 북극 탐사를 떠난다고 공식 발표하여 진짜 목표를 숨기는 연막작전을 펼쳤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경쟁자가 생겼음을 알면 영국인들이 자극받아 스콧의 진영에 후원을 쏟아부을 것이 분명했으며, 막 독립한 신생국 노르웨이 정부가 강대국 영국과 경쟁하기를 두려워하여 아문센 후원을 중단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이 작전은 성공하여 아문센은 무사히 노르웨이 왕실의 후원을 받아 수월하게 탐험을 준비할 수 있었다.

스콧도 당시 정부 예산을 쉽게 따내지 못했고, 그래서 여러 회사의 이사회장과 강연장을 돌아다니며 기금을 모으고 다녔으며, 『 타임즈』에 영국 탐험대의 찬란한 성과가 답보하고 있어 안타깝다는 기사와 스콧의 호소문을 실었다. 결국 영국 정부는 기금을 내놓았고, 여러 회사도 동참하였다. 특히 본사 상표가 지명도 높은 탐험사업으로 유명해지길 바라는 식품회사들이 많이 참여했다. 스콧은 탐험에 약 40,000파운드(2020년대 물가로 한화 61억이 넘는 돈이다)가 필요할거라 계산을 했고, 이중 절반은 정부가 지원해 줬으며 나머지 절반은 후원해준 회사들이 줬다. 스콧은 영국뿐만 아니라 남아프리카, 호주, 뉴질랜드등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곳에서도 기금을 모으고 다녔다. 이중 12,500파운드는 남극으로 갈 배 테라노바를 살때 사용했는데, 그 때문에 이 배의 이름을 따서 스콧의 원정을 테라노바 탐험(Terra Nova expedition)라고 부르기도 한다. 덕분에 아문센보다는 자금에 여유가 있었다. 스콧과 후원자들은 표면적으로는 탐험의 주 목적이 과학 탐사라고 했지만, 탐험에 참가했던 모든 인원은 진짜 목적이 남극점에 도달하는거란걸 알고 있었다.

2.3. 남극 대륙 도착

1910년 6월 15일 세돛대 포경선을 개조한 테라 노바(Terra Nova) 호가 사우스웨일즈의 카디프에서 출항했다. 스콧은 모금 활동을 하다가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에서 테라 노바 호에 합류했고, 인도양을 가로질러 오스트레일리아로 향했다. 참고로 당시에는 전부 영국 영토였다.

아문센은 8월 9일 프람 호를 타고 노르웨이를 떠났다. 원래 혼 곶(Cape Horn)을 돌아 아메리카 대륙 서해안을 따라 올라가 북극 지방으로 갈 예정이었으나, 9월 6일 마데이라 제도에 도착하여 식수와 보급품을 챙긴 다음 선원들에게 북극으로 간다는 건 거짓말이고, 진짜 목적은 영국의 스콧 탐험대를 앞질러 남극 정복을 이루는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아문센이 밝힌 가짜 계획은 ' 샌프란시스코에서 정비를 마친 뒤 알래스카를 거쳐 북극 탐사를 하는 것'이었는데, 당시에는 파나마 운하를 한창 파고 있어서 4년이나 지난 1914년에나 완공했기에, 대서양에서 북미 태평양 연안까지 배가 이동하려면 최소한 남아메리카까지는 남하했다가 다시 북으로 올라와야 했으므로 이러한 속임수가 가능했다.

아문센은 형 레오 아문센에게 10월에 이 사실을 전보로 알리도록 부탁해 두었으며, 이제 노르웨이 탐험대의 목표 변경이 세계에 알려졌다. 희대의 레이스가 막을 연 것이다. 10월 12일 저녁, 스콧은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 항에 도착해 아문센이 남극으로 가고 있다는 전보를 받았다. 스콧을 지원한 클레멘츠 마컴(Clements Markham) 경은 아문센을 가리켜 '지저분한 기만술을 쓴 불량배'라고 비난했다. 어니스트 섀클턴조차 아문센이 스콧의 영향권에서 겨울을 나고 있다고 경멸하는 논조의 의견을 냈다. 난센은 이에 타임즈에 아문센을 위해 변명하는 글을 기고했다. 스콧은 1911년 1월 4일 로즈 섬에 상륙했고, 아문센은 1월 14일 그레이트 아이스 보빙 지역에 상륙하여 배의 이름을 따서 그 이름을 '프람하임'이라 지었다.

2.4. 준비작업

3개월이 남은 남극의 여름 동안 두 팀은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탐험대의 예정로에 따라 최대한 멀리까지 식량, 연료, 예비 피복 등 각종 물자들을 쌓아 놓은 보급기지( depot)들을 미리 만드는 것이다. 시작부터 탐험 끝까지 필요한 물자를 전부 가지고 출발하는 것은 비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영국 탐험대는 남위 79도 30분까지 나아가 엄청난 양의 식량을 쌓아놓고 '1톤 보급소'[3]라는 이름을 붙였다. 노르웨이 탐험대는 남위 80도·81도·82도상의 여러 군데에 보급소를 설치하였다. 남극 480마일(772.5㎞) 반경 이내에 보급소를 설치하여 총 1.5톤을 보관하였다. 또한 펭귄 바다표범을 사냥하여 기지에 식량을 쌓아두었다.

두 베이스 캠프는 서울- 부산 거리의 1.5배 정도인[4] 약 650㎞ 남짓 떨어져 있었지만 가끔 두 탐험대가 우연히 마주치기도 했다. 서로의 베이스 캠프의 위치는 짐작할 수 있고 베이스 캠프에서 준비하는 동안 그들이 타고 온 배는 놀고 있었으므로, 남극해안 탐사를 하기 위해 해안을 끼고 항해하다 보면 서로의 베이스 캠프를 지나가거나 상대의 장비 및 준비 상태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의외로 큰 갈등은 없었고 나름대로 우호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노르웨이인들은 영국인들을 다정하게 대해주었고, 영국인들은 노르웨이인의 강인함과 훌륭한 장비에 놀라기도 했다. 또한 서로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신경전도 없지는 않았는데 영국팀은 하역 실수로 바다에 빠져 버린 스노모빌이 무사히 내렸다고 말하는 등 블러핑을 쳤다. 스콧은 어느 날 갑자기 침낭에서 벌떡 일어나서, 아문센이 영국 영토에 침범한 것이므로 붙잡아서 배를 태워 귀국시킬 수 있었는데 기회를 놓쳤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스콧은 그레이트 아이스 보빙 지역이 자신과 섀클턴이 직접 탐사한 곳이므로 대영제국의 일부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영국인 입장에서 하는 일방적인 주장이었지만…

참고로 당시의 남극은 주인이 없는 땅이었고, 한 50년 쯤 뒤인 1959년 남극조약이 맺어지면서 그 누구도 영유권 주장을 할 수 없는 공유지로 남게 되었다.

1911년 4월 21일, 남극 대륙에서 해가 사라지는 긴 겨울밤이 찾아왔다. 극지방은 기울어진 자전축으로 인해 여름과 겨울에 낮이 계속되는 백야와 밤이 계속되는 극야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 그래서 두 팀은 베이스 캠프에서 겨울을 났다. 4달이 지난 8월 24일이 돼서야 해가 다시 떠올랐다.

9월 8일, 아문센은 초조함을 견디지 못하여 한 차례 프람하임을 떠나 8명의 대원과 함께 남극으로 향했지만, 너무 빨리 출발했기에 추운 날씨를 견디지 못한채 참담한 실패를 맛보고 돌아와야 했다. 아문센은 이 사건 때문에 선배 탐험가 요한센과 갈등을 겪었고, 요한센을 추방하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사실 이 탐험대를 구성한 실질적인 대장은 아문센이었으나 낙하산으로 내려온 요한센이 딴지를 걸 수 있고, 심지어 지휘체계가 이중화될 수도 있는 구도였으며 거기다 요한센은 당시 알코올 중독이기도 했으므로 탐험에는 거의 도움은 되지 않고 걸림돌에 불과한 상황이라 아문센도 할 말은 있긴 했다.

아무튼 아문센은 이 실패를 잊지 않고, 왜 실패했는지 그 이유를 끈질기게 분석했다. 단순히 추위로 실패했으니 더 생각할 게 있겠냐 싶겠지만, 한 번 실전 경로를 밟아본 이상 이를 기반으로 실제 이동 가능거리나 식량 및 열량 소모, 악천후 대응 등을 최대한 검토하고 계산을 다시 해서 대응할 필요가 있었다. 실제로 스콧은 거의 2달 후에 출발했음에도 부실한 검토 및 준비로 인해 무지막지한 악천후에 시달렸다.

3. 탐험 일지

내셔널 지오그래픽 홈페이지에서 두 팀의 경로를 볼 수 있다. #

3.1. 10월: 출발

아문센은 1911년 10월 20일 대원 5명과 4대의 썰매, 52마리의 개와 함께 남극점으로 다시 출발했다. 협곡을 지날 때 어려움이 있기는 했으나 대체로 순조롭게 진행하였고, 10월 24일에는 남위 80도에 구축해 둔 보급소에 도착했다.

3.2. 11월: 마지막 보급

11월 1일, 스콧이 베이스 캠프에서 아문센보다 13일 늦게 출발했다. 출발 때부터 스노모빌이 말썽을 일으키더니 5일 뒤에는 완전히 고장나버려서 스노모빌을 포기해야 했다. 아문센은 문제 없이 하루 20마일(32㎞)씩 전진했으나, 스콧은 일진이 좋은 날에도 10마일(16㎞)을 채 가지 못했다.

11월 7일, 아문센은 남위 82도에 마련한 최후의 보급소에 도착했다. 최후 보급소에서 가져온 식량은 100일치로, 1912년 2월 6일까지도 버틸 수 있는 양이었다. 아문센 일행은 악셀 하이베르크(Axel Heiberg) 빙하의 얼음봉우리를 넘어 남극 고원에 이르기까지 보급품 1톤을 끌고 갔다.

스콧 일행은 비어드모어 빙하의 기슭에서 로런스 오츠(Lawrence E. G. Oates) 육군 기병 대위가 마지막 조랑말을 잡았다. 이제부터 스콧 일행은 짐 약 700파운드(약 317.5㎏)가 실린 썰매를 사람의 힘으로 끌고 가야 했고, 남극까지 갔다가 기지로 돌아가는 왕복 거리는 1,000마일(약 1,600㎞)이었다. 하루 10마일도 못 가는 스콧 일행으로서는 남극점으로 한 걸음 뗄 때마다 생존율이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지고 있는 상황. 스콧도 섀클턴처럼 이때 포기했더라면 남극점 정복은 실패했을지언정 자신의 목숨만큼은 부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슨 근자감인지, 아니면 알고도 자존심 때문에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스콧은 가망도 없는 전진만을 계속하고 있었다.

참고로 어니스트 섀클턴도 이런 상황이 되자 탐험을 포기했는데, 그가 남극점까지 남긴 거리는 이때의 스콧보다도 살짝 가까웠지만 섀클턴은 무리하게 전진하는 것을 포기하여 과감하게 돌아섰고, 목표를 이루지 못한 대신 휘하 탐험대 전원을 살려서 돌아왔다. 탐험가로서 스콧의 수준이 기술적인 면은 고사하고 마음가짐 면에서도 당시의 경쟁자 아문센은 고사하고, 위대한 실패자 섀클턴에도 쫓아가지 못하는 수준이하의 함량 미달자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여기서 돌아섰다면 스콧은 본국의 후원자들 및 기타 다른 사람들에게 비아냥을 들었겠지만, 그래도 동료들과 자신의 목숨은 건졌을 것이다. 오히려 남극점을 향해 가는 동안 연구 목적으로 채집한 광물 등 다른 방면으로 주목을 받으며 적어도 체면치레는 했을 것이다.

3.3. 12월: 아문센 남극점 도착

12월 8일, 아문센은 어니스트 섀클턴이 기록한, 인류가 도달한 최남단 지역인 88도 23분을 넘어섰다. 남극점까지는 100마일(160㎞)이 남았을 뿐이었다. 개들은 굶주림과 피로에 시달렸고, 팀원들의 얼굴에는 부스럼과 동상 자국이 있었다. 남극점에 가까이 갈수록 노르웨이 탐험대는 혹시나 스콧이 먼저 남극에 도착하지 않았을지 걱정했다.

비욜란은 12월 14일에 자신의 일기에 "우리가 거기서 영국 국기를 보는 것이 아닐까? 신이시여, 우리를 보호하소서. 난 그걸 믿고 싶지 않다."라고 적었다.

1911년 12월 14일 오후 3시, 아문센 일행은 남위 90도 남극점에 도착했다. 아문센 탐험대의 대원들은 남극점 도달 직전에 "개들은 누가 앞에 가는 걸 좋아합니다." 하고 우기면서 아문센을 선두에 세웠다. 그래서 아문센은 문자 그대로 인류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한 사람이 되었다. 그곳에 보이는 것은 그저 드넓게 펼쳐진, 반짝이는 눈으로 뒤덮인 평야였다. 사람이 있었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문센 일행은 인류 최초로 남극점에 도착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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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문센 일행은 노르웨이의 국기와 프람 호의 깃발을 남극점에 꽂았다. 좌측부터 로알 아문센, 헬메르 한센(Helmer Hanssen), 스베르 하셀(Sverre Hassel), 오스카르 비스팅(Oscar Wisting).

그리고 4일 동안 남극점에 머물면서 지자기 측정 · 인증샷 촬영 등 작업을 하고, 행여 스콧 일행이 도착했을 때 그들이 물자 부족에 시달리지 않을까 해서 식료품 약간과 순록 가죽으로 만든 털옷을 남겨두었다. 그리고 불행히도, 아문센의 예측은 정확했다. 스콧이 남극점에 도착할 즈음에는 이미 심각한 물자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콧 탐험대는 장갑을 잃어버린 보워스가 장갑 한 쌍을 챙긴 것 말고는 자존심 때문에 아문센이 남기고 간 물자는 일절 건드리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아문센이 남극점에 머무는 동안 찍은 사진의 상당수가 귀환길에 카메라 고장으로 유실되어 버렸기에,[5] 이 당시 탐사대가 남긴 사진은 비욜란이 자신의 카메라로 찍은 사진 몇 장만이 전부다.

아문센 일행은 12월 18일 온 길을 다시 돌아 프람하임으로 돌아가는 여행길에 올랐다. 왔던 길을 정확히 찾아갈 수 있었던 것도 그동안 일정한 간격으로 깃발을 꽂아 두어서였다.

파일:external/farm8.staticflickr.com/6504289787_e8a41afde2_b.jpg

남극점 정복 인증샷. 노르웨이 국립 문서보관소 소장. #

여기서 아문센은 한 가지 빗나간 예측을 했다. 아문센은 한센에게 "난 영국인을 잘 알아. 그들은 일단 시작하면 포기하지 않아. 스콧은 앞으로 하루 이틀 내에 여기에 도착할 거야." 하고 말하였다.[6] 그 때 스콧은 360마일(579.4㎞) 뒤처져 비어드모어 빙하를 힘겹게 오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남극점에 도착하리라는 예측은 맞았으나, 날짜를 틀린 것이다.

이때 비어드모어 빙하를 오르던 스콧과 내려가던 아문센은 100마일도 되지 않는 거리에 있었다. 그와 별개로 저 "시작하면 포기하지 않는다"는 발언은 본의 아니게 스콧의 죽음을 예견한 셈이 되어버렸다.

3.4. 1월: 스콧 남극점 도착, 아문센의 귀환

1월 3일, 스콧은 남극까지 150마일(241km)이 남은 곳에서 팀원 8명을 반으로 나눠서 남극으로 도착할 일행을 선발했다. 마지막까지 스콧과 함께한 사람은 로렌스 오츠 영국 육군 기병 대위, 헨리 보워스(Henry R. Bowers) 해병 소위, 에드거 에번스(Edgar Evans) 해군 중사, 스콧의 친구이자 민간인 탐험가 에드워드 윌슨이었다.

1월 16일, 스콧 일행은 충격적인 것을 발견하였다. 썰매 지지목과 수많은 개 발자국이었다. 이는 노르웨이 탐험대가 자신들을 앞서 갔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1월 17일, 스콧 일행은 남극점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노르웨이 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또 아문센이 쳐놓은 텐트와 남겨둔 장비, 식량, 그리고 아문센이 스콧 앞으로 보내는 편지를 발견하였다.
친애하는 스콧 대령님께.
당신이 우리 다음으로 이 지역에 도착한 첫 번째 사람이 될 것 같으므로 이 편지를 호콘 7세께 발송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텐트 속에 남아 있는 물건들 중에서 쓸모 있는 것이 있으면 부담 가지지 말고 사용하도록 하십시오. 무사히 귀환하시기를 빌며.
-로알 아문센.
아문센은 혹시라도 자신이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할 경우에 대비하여 스콧에게 증거품을 남겨두려는 의도와 스콧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생각으로 편지와 물자를 남긴 것이었지만, 갖은 개고생을 하며 도달했는데 1등까지 뺏긴 데다 영국인 특유의 선민의식까지 있는 스콧에게 있어 이는 티배깅으로 받아들여지기 충분한 행동이었고, 자존심 때문에 장갑을 잃어버린 보워스가 장갑 한 쌍을 챙긴 것 외에 아문센이 남긴 물자에는 일절 손도 대지 않았다. 이는 나중에 발생한 일을 생각하면 큰 실수였다. 스콧 일행이 사망한 원인이 바로 물자 부족 및 스콧의 부질없는 자존심이었기 때문이다.[7]

1월 26일, 아문센 일행은 프람하임에 도착했고, 나흘 뒤 남은 개 39마리[8]와 함께 오스트레일리아로 출발했다. 3월 7일, 아문센 일행을 태운 프람 호는 태즈메이니아 섬의 호바트에 도착했다. 그리고 아문센의 남극 정복 업적을 전 세계 신문이 대서특필했다.

이후, 아문센 일행은 2주 가량 호바트에 머물렀고, 그 동안 남극의 미탐사 지역 탐험을 준비하던 오스트레일리아 탐험대의 대장 더글러스 모슨과 만나 탐험과 관련된 조언을 해주었다. 그리고 호바트를 떠나기 전에는 모슨에게 탐험에서 살아남은 개들 중 21마리를 선물로 주었다. 불행히도 모슨이 이끌었던 탐험조인 파 이스턴 파티는 악천후와 잇따른 사고로 탐사에 실패했고, 대원 두 명과 개를 모조리 잃어 모슨 혼자서만 가까스로 생환했다.

이후 귀환한 아문센은 탐험계의 슈퍼 스타가 되었고, 각지에서 강연 요청이 빗발쳤으며 남극 탐험 과정을 책으로 집필하였다. 그리고 세계는 도대체 스콧 탐험대는 어디로 갔길래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지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3.5. 2~3월: 스콧의 죽음

스콧 일행은 자신들이 패배했음을 깨닫고 힘겹게 귀환을 서둘렀다. 하지만 남극점에 도달하기 전부터 부족하던 식량과 연료 사정은 이제 스콧 탐험대의 생존을 위협하였다. 연료를 담아둔 용기에 함석으로 땜질해둔 부분이 있었는데, 극저온 때문에 함석이 떨어져 나가면서 연료가 고스란히 새어버리는 것도 모자라 얼어서 터져버린 통조림에 새어나온 등유가 스며들어서 오염되는 바람에 완전히 먹지 못하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2월 16일, 비어드모어 빙하에서 에반스가 쓰러져 사망했다. 에반스는 탐험 도중 크레바스에 3번이나 빠졌고 머리에 심한 충격을 3번이나 받았다. 결국 3번째 사고때 에반스는 뇌손상으로 인사불성이 돼서 갈길 바쁜 스콧 탐험대의 앞을 가로막고 아무말 대잔치를 하는 등,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한다. 남은 일행은 한 달 동안 그레이트 아이스 보빙 지역을 내려갔다.

3월 17일, 보어 전쟁 때 입은 다리의 총상이 동상으로 도져 절뚝거리던 오츠는 자기가 빨리 못 걷기 때문에 동료들의 발목을 잡는다고 생각하여 살신성인의 희생을 하였다. 이 날은 오츠의 생일이었다. 오츠는 "시간이 좀 걸릴지도 모르겠지만, 밖으로 나갔다 오겠소(I am just going outside and may be some time)" 라는 말을 남긴 채, 침낭 하나만 챙겨들고 눈보라 속으로 걸어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스콧은 오츠의 희생을 일기에 적었다.

힘겹게 한 걸음씩 전진하던 스콧 탐험대는 끝내 기력이 다했고 윌슨, 보워스가 먼저 죽음을 맞았다. 마지막 생존자가 된 스콧은 최후까지 견뎠으나 식량이 완전히 바닥나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진짜 '식량'은 바닥난 데다 남은것도 연료에 오염되어 하나도 먹을 수가 없었고 식량 대용으로 연료 없이 생으로 씹어먹던 '홍차잎'도 모두 소진되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끝까지 버텨볼 생각이다. 하지만 몸이 점점 쇠약해져서 이제 끝이 멀지 않았다. 정말 안 된 일이다. 나는 더 이상 쓸 수 없다. R. 스콧.
추신: 신이시여, 우리 국민을 보호해 주소서.
1912년 3월 29일, 스콧은 마지막 일기를 쓰고 식량 부족과 동상으로 끝내 동사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보급소에서 11마일(17.7㎞) 떨어져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이들이 사망한 장소는 보급소에서 고작 800m 떨어진 곳이었다. 눈보라가 친다면 안 보였을 수도 있겠지만 눈에 띄게 신경 써서 만든다면 충분히 식별할 수 있는 거리였다. 저장고 문제는 결국에 목숨을 잃게 만든 치명적인 실수였던 셈이다.

아문센이 고국으로 돌아오고 대영광을 만끽하고 나서도 스콧 탐험대가 돌아오지 않자, 구조대가 파견되었으나 4월에 남극의 여름이 끝났기 때문에 수색은 진행될 수 없었고, 10월 말이 되어서야 수색대가 출발하여 11월 12일에 들어 수색대가 스콧 일행의 텐트를 발견했는데 그 곳에서 윌슨·보워스·스콧의 시체를 발견하여 수습, 확보했다. 그러나 살신성인한 오츠의 시체는 발견하는 데 실패했다. 그래도 오츠가 들고 나갔던 침낭은 발견할 수 있었다. 그나마 수습한 침낭을 보면 자살하려 했지만 오츠가 그 와중에 어떻게든 살려고 애쓴 정황이 보인다고 한다.

4. 전략 비교 분석

아문센은 목표를 달성하고 돌아와 인류사에 남을 영광을 만끽했고, 스콧은 굶주림과 추위 속에서 절망에 빠져 생을 마감했다. 밑에서도 서술하겠지만, 아문센과 스콧의 대결은 시작부터 이미 승자가 정해졌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아문센은 북유럽 노르웨이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스키를 즐기며 동계 활동에 친숙하였다.[9] 또한, 북서항로 탐험 등을 하면서 오랫동안 북극 근처의 혹한지에 거주하던 이누이트들을 찾아가 친하게 지냈으며[10] 그들의 생활방식을 배웠다. 이와 관련되어 아문센 자신도 모계로 이누이트 혈통이 섞였다는 설도 있다. 그러면서 극지방 현지인들이 주로 먹는 페미컨 같은 전통 보존식품이나 순록의 털가죽으로 만든 코트와 장화, 개썰매로 이동하는 방식이나 임시 쉼터용 이글루를 짓는 방법, 사냥법 등 현지 적응 방식을 완벽히 터득했다. 추운 곳에 적응하는 법은 추운 곳에 사는 사람들이 가장 잘 안다고 봤던 것이고 그것이 적중했던 것. 또한, 이전의 탐험가들(주로 영국)의 기록을 상세히 조사했으며, 동시에 그들의 문제점과 한계를 고찰하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탐험계획과 기술을 신중하게 보완하였다.

반면에 스콧은 경로도, 장비도 모두 어니스트 섀클턴과 동일한 방식을 그대로 답습했고 섀클턴이 실패한 이유에 대해서는 제대로 연구조차 하지 않았다. 그나마 스노모빌, 통조림 같은 신문물을 도입했지만 이마저도 제대로 된 테스트도 없이 바로 실전에 투입하는 실책을 저지르는 바람에 탐험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이래저래 짐덩어리만 늘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 외에도 새로운 시도조차 거의 없었다. 그 수많은 실패 속에서도 아문센이 남긴 물자와 같이 생존 기회 또한 분명히 있었지만 그마저도 스스로 걷어찼다. 그로 인해 스콧은 섀클턴보다 훨씬 크게 실패했고, 그 대가를 죽음으로 치러야만 했다.

즉, 극한의 남극 대륙에서는 스콧이 택한 대영제국의 첨단 기술보다, 아문센이 택한 이누이트들의 전통이 더 도움이 되었다. 그 당시 대영제국의 소위 "첨단 기술"이라는 것은 영국 주변에서만 검증되었을 뿐, 남극 현지의 예상 이상으로 혹독한 환경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현지에서 생활하는 극지 주민들의 전통 생존법의 효율성을 따라가지 못했다.

스콧의 접근법은 아마추어 스포츠맨십이란 말이 어울리고 아문센의 접근법은 철저한 생존투쟁에 가까웠다. 그리고 남극의 가혹한 환경은 후자의 손을 들어 주었고, 스콧은 안일한 판단의 대가를 목숨으로 치러야 했다.

그나마도 스콧이 남극을 탐험하는 게 처음이었다면 몰라서 그랬다는 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스콧은 이미 남극에 아문센보다도 먼저 다녀간 적이 있었다. 그것도 해안가만 탐험하고 끝난 게 아니라 82도 17분까지 갔을 정도로 깊숙이 들어가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스콧은 본국의 막대한 지원과 과학기술을 과신하며 자만에 빠져 지나치게 안일하게 준비했고 이는 그가 파멸하는 원인이 된다.

4.1.

아문센은 이누이트가 입는 털가죽 방한복을 준비했고, 스콧은 영국 신사가 야만인의 추한 옷을 입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영국제 모직 방한복을 고집했다. '검증되지 않았다'도 아니고[11] 야만인들이 입는 옷이고 '추하다'는 이유로 선택하지 않은 것만 봐도, 스콧이 얼마나 남극점 정복에 대해 안일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

이누이트의 털가죽 옷은 외부의 물을 먹지 않고 땀을 밖으로 발산할 수 있는데, 고어텍스가 개발되기 전까지는 그런 기능을 할 수 있는 옷은 털가죽으로 만든 옷뿐이었다. 이 덕분에 아문센의 팀은 스키를 타고 개썰매를 따라잡을 만큼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고된 운동을 하고도 옷 때문에 덥다는 말 한번 하지 않았다. 현대에는 무게 때문에 고어텍스 외피에 다운[12]이나 중공사[13]로 충전된 패딩을 털가죽 대신 사용할 뿐, 잘 만들어진 털가죽 옷은 이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반면에 스콧 탐험대의 방한복은 버버리 사가 개발한 트렌치 코트에 쓰이는 개버딘 천으로 만들었다. 영국에서 겪을 수 있는 추위라면 방한 성능이 충분하였고, 털가죽 옷보다 훨씬 가벼웠다. 모직의류가 비록 흡습성이 조금 있지만, 면 등 다른 직물에 비해서는 낮은 편이어서 원래 겨울 옷으로 많이 쓰이기도 했다. 게다가 남극이 워낙 건조하므로 흡습성은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 생각하였다. 남극은 강수량이 상당히 적고 공기 중 수증기가 죄다 얼어버려서 습도가 심하게 낮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남극의 혹독한 추위가 에서 나오는 수증기조차 외투에 얼어붙게 할 정도였고, 이는 옷이 아니라 그냥 옷 모양 얼음을 입고 있는 셈이 되어버려 점점 체온을 빼앗는 것도 모자라서 나중에는 보온 능력도 없애버렸다. 결국 스콧은 남극 내륙의 혹한에 시달린 뒤에야 비로소 이누이트식 가죽옷이 있었으면 좋았으리란 생각을 일기에 적었지만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그럼에도 이누이트식 가죽옷이 좋은 거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자기 자존심이 먼저였는지 후술한 대로 아문센이 남겨준 옷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1924년, 조지 말로리 에베레스트 등반을 하다가 실종되었을 때도 스콧 탐험대와 마찬가지로 개버딘으로 만든 등산복을 입고 있었다. 모직 방한복은 남극은커녕 에베레스트의 추위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자세한 것은 조지 말로리 문서 참조.

4.2. 이동 수단

4.2.1. 아문센의 개썰매

아문센은 1905년 이누이트족에게서 개들을 다루는 법을 배우고, 개를 잘 다루는 한센과 개썰매 대회 우승 경력이 있는 스바레 하셀을 최종 팀원으로 넣을 만큼 개썰매에 많은 신경을 썼다. 그리고 예상대로 잘 훈련된 개들은 아문센 일행이 순조롭게 눈 위를 나아가도록 해줬다. 그리고 아문센은 썰매를 끄는 동물로 그린란드견을 선택했다. 극지방 교통 수단으로 검증된 개썰매가 최고라고 생각한 것이다. 몇백년도 전에 있었던 몽골 제국이 만든 역참 제도 역시 몽골이 말을 흔히 다뤘음에도 불구하고 최북단에서는 말이 아니라 개썰매를 이용했으니 말 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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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대부분의 포유류처럼 개 역시 일반적으로 몸에서 땀을 흘리지 않고[14] 숨을 몰아쉬어 체온을 낮추는데 이러한 점은 남극에서 살아남기 매우 좋은 특징이었다. 남극의 추위는 땀이 증발한 수증기마저 얼게 만들 정도로 혹독한데, 그래도 땀을 흘리지 않아 쉽게 동상에 걸리지 않는다. 또한 그린란드견처럼 추운 곳에서 사는 개는 본능적으로 눈을 파서 추위를 피할 공간을 만들기 때문에 굳이 사람이 개가 추위를 피할 시설을 만드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 또한 장점이다.

게다가 아문센은 이 여정에서 약해지거나 죽은 개가 있다면 버리고 가지 않고 가차없이 식량 자원으로 재활용하는 철저한 계획성을 보였고 이를 잘 활용했다. 반대로, 스콧에겐 개를 먹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문센은 애초에 탐험 계획단계부터 개가 죽은 이후, 개고기를 얼마만큼 먹을 지 계획하였다. 거기다 개들의 힘을 고려해 탐험기간의 75%동안 매일 움직여야 하는 최대 거리보다 조금씩 덜 움직였고, 매일 최대 16시간의 휴식을 취하게 해서 최대한 효율적으로 개들을 이용했다. 그리고 그 개고기를 남은 개에게 먹이로 주기도 했다.[15] 한센은 썰매개 관리 담당이었던 만큼 개들을 무척 아껴서 개들을 죽여 잡아먹는 행위에 거부감을 느꼈지만, 생존을 위한 것임을 알았기에 먹기를 거부하지 않았다. 아문센이 귀환한 후 영국 기자단이 이 부분을 꼬투리 잡아 아문센을 비방했으나, 아문센은 "그 녀석들은 우리를 위해 명예롭게 죽었다."며 그런 말이야말로 개들의 희생을 모욕하는 거라며 분노를 표하고는 덧붙여 "당신들이라면 극한의 상황에서도 개고기를 안 먹고 버티겠느냐?"라고 일갈했고, 개들을 아꼈던 한센 역시 아문센을 거들면서 기자들에게 반발했다.

애초에 원래 그린란드견, 시베리안 허스키 등 북극의 썰매개들은 원래 본능적으로 같이 썰매 끄는 동료가 약해지면 집단으로 공격하여 죽이고 잡아먹는 습성이 있다. 말라뮤트 시베리안 허스키 같은 견종들은 혹독한 환경 하에 인간과 공존하기 위하여 오랜 세월에 결쳐 사나운 개체들을 모두 도태시켰기 때문에 순하다고 알려졌으나, 그건 애완견이나 스포츠를 위한 개썰매 개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다.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경악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극지방에서 삶을 영위하는 개들이 동료를 잡아먹는 일은 흔하며 극한의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방법의 하나다. 사람도 할 수 없으면 이런 짓을 하기도 하고. 당시로부터 100년 전에 실종된 존 프랭클린의 탐험대 일부의 시신을 21세기에 조사한 결과, 극한까지 몰려 아예 인육을 먹은 흔적도 있었다.

따라서 아문센의 개를 이용한 식량 보충은 그 환경에선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또한, 개썰매에 신경을 많이 쓴 만큼 아문센의 개들은 철저히 훈련받았다. 개썰매를 모는 요령도 뛰어났고 전속력으로 달리던 개 수십 마리가 명령을 듣자마자 곧바로 멈춰설 정도였다. 이와 대조적으로 스콧 탐험대의 개들은 개썰매 전문으로 훈련받지 않았으므로 수준을 감히 비교하기 어려웠다. 스콧이 개를 등한시한 이유는 개썰매를 신뢰하지 않아서였다. 첫 번째 탐험에서 스콧은 훈련되지 않은 썰매개들이 명령을 듣지 않아서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대신, 스콧은 야쿠트 조랑말에 기대를 걸었다. 아문센은 이를 알고 기겁하여 개를 쓰라고 권유했으나 스콧은 듣지 않았다. 그래도 아문센은 스콧이 마지막에 마음을 바꿔 개를 선택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개 구입 대리인에게 다른 곳에서 주문이 온다면 자신에게 먼저 알려달라고 미리 지시를 내렸을 정도였다. 그러나 스콧은 마음을 바꾸지 않았고 이는 스콧의 치명적인 실책 중 하나가 됐다.

스콧이 개를 사용하지 않은 이유로 해군 출신인 스콧은 동물을개를 사랑하고 자립심을 중시하는 영국 해군의 전통을 답습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스콧은 아문센과 경쟁하기 전에 저명한 지리학회 강연에서 이런 말을 했다.
피어리 씨의 북극탐험 이후, 개를 이용한 탐험이 늘고 있지만 사실 개의 유무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개 없이도 탐험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게다가 개썰매를 이용한 탐험이 개에게 얼마나 잔혹한지 아십니까?[16] 얼마 전, 탐험에서 개썰매를 끌도록 썰매개 열여덟 마리가 동원되었지만 단 한 마리만이 살아남았습니다. 굶어 죽고 과로로 죽어갔고 그 시체는 다른 썰매개들의 먹이로 사용되었죠. 결론적으로 썰매개를 사용한 탐험은 너무나 잔혹한 탓에 지양되어야 마땅합니다.

그 말에 박수갈채가 일었지만[17] 그 학회에 동석하고 있었던 누군가가 듣자마자 어이없어하면서 반박했는데, 극지탐험계의 대선배인 프리드쇼프 난센이다.
나는 개를 사용한 탐험도 해봤고 개를 사용하지 않고도 탐험을 해봤소. 스콧 씨는 개를 사용한 탐험이 잔혹하다고 했고 실제로 잔혹한 건 사실이오. 그렇다면 묻겠는데, 만약에 사람이 무거운 썰매를 끌도록 강요하는 건 어떻다고 생각하시오? 이게 몇 배나 더 잔혹한 일 아니오?

난센의 이 반박은 나중에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스콧 본인은 말들을 전부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결국에는 잡아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고장난 스노모빌과 죽어버린 말 탓에 난센이 말한대로 스콧의 탐험대는 썰매를 직접 끌고 갔다. 심지어 말을 저렇게 해놓고 사실은 개도 끌고 갔는데, 그렇다고 제대로 써먹지도 못했다. 이로 인한 문제는 정말 심각 그 자체였는데 밑에 보면 알겠지만 계산 오류+연료 부족+식량 부족+쓸데없는 오기 및 자존심+기타 등등의 콤보에 열량은 더 많이 필요한데 연료와 식량이 부족하니 버틸 수가 없었다.

거기에 스콧과 대원들, 그리고 스콧 탐험대에 참가한 동물들(개+조랑말)은 모두 죽었다. 스콧은 죽어가는 개가 불쌍하다며 풀어줬지만 아무것도 없는 남극 한복판에서 대책 없이 풀려난들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겠나? 그에 반해 아문센이 데려간 52마리의 개 중에서 11마리가 살아서 남극점에 도달했다.

먹이 면에서도 개가 말보다 크게 유리했다. 개는 잡식동물이라서 어지간하면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고, 여차하면 평상시라면 혀와 정신에 괴로운 선택이긴 하지만 인간이 반대로 개 먹이를 먹어서 어떻게든 버티기가 가능하기에 조랑말처럼 전용 먹이를 준비할 번거로움도 없다. 사실 개와 인간이 같은 걸 먹을 수 있으니, 굳이 개 먹이를 따로 마련할 필요도 없이 처음부터 인간과 개의 식량을 통일해도 되며, 실제로 아문센 탐험대 역시 그랬다 보니 굳이 개 먹이를 먹을 필요가 없었다. 그보다는 식량 소모 주기를 조절해서 위에서 나온 것처럼 약해진 개를 잡아먹었다. 그리고 고기를 날로 먹는 것도 문제없으니 개를 위해 음식을 조리하느라 연료 낭비를 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아문센 일행도 여행 내내 대부분 극도로 아껴가며 먹긴 했지만 페미컨과 식량, 이것조차도 적다며 출발전에 간간히 사냥해온 바다표범 고기들을 날로 씹을 때, 개와 인간의 음식 공유에 큰 걱정이 없었다.

그리고 남극을 탐험하다 보면 종종 크레바스를 만나기 마련인데, 개는 상대적으로 무게가 적게 나가다 보니 크레바스에 빠졌을 때도 한두 사람의 힘만으로도 쉽게 끌어올릴 수 있어서 구조하는데 드는 체력 소모가 적었다.

썰에 따르면 아문센이 남극이 아닌 북극점을 목표로 했을 때 곰썰매를 이용하려고 독일의 유명한 동물 거래상 카를 하켄베크를 통해 북극곰을 얻어 조련사의 도움을 받아서 훈련시켰지만 조련사가 탐험에 불참을 선언하자, 결국 곰썰매를 포기하고 예전처럼 개썰매를 이용하기로 한다. 이 썰이 사실이라면, 이라는 동물의 위험성을 생각했을 때 천만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위험성도 위험성이지만,[18] 설령 말을 잘 듣는다 해도 먹이를 너무 많이 먹고 개뿐만 아니라 스콧이 데려간 조랑말보다도 덩치가 더 큰데다 무게도 훨씬 더 많이 나가서 크레바스에 빠지기라도 하면 답이 없다.

4.2.2. 아문센의 스키

아문센 탐험대는 전원 스키에 능숙했다. 스키 대회 세계 챔피언 올라프 비욜란도 끼어 있었다. 물론, 일반적으로 스키 하면 떠올릴 알파인 스키가 아니고 노르딕 스키, 즉, 크로스컨트리 스키다. 발과 스키가 꽉 물려 있어서 경사를 빠르고 안정적으로 내려올 수 있는 알파인 스키와는 달리, 노르딕 스키는 발뒤꿈치가 떨어져 있어서 걷듯이 이동할 수 있다.

그러나 스콧 탐험대는 스키에 능하지 못했다. 눈 위를 이동할 때 걷는 것과 스키를 타는 것 중 뭐가 나을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다만 스콧도 스키를 타려고 시도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1901년부터 1904년까지 어니스트 섀클턴 등과 함께 했던 디스커버리호 탐험 중에 스키를 타보려고 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스키를 제대로 탈 줄 몰랐기 때문에 오히려 걸어가기가 더 편할 정도로 실수를 거듭했고, 결국 스키를 때려치웠다. 다만, 스콧은 난센의 충고를 받아서 트뤼그베 그란(Tryggve Gran,1888~1980)이라는 노르웨이 출신 파일럿을 데려와 스키를 가르치게 했다. 문제는 스키 배우기를 대원들에게 의무적인 과업으로 지시하지 않아 몇 명 배우지도 않았고, 결정적으로 스키가 능숙한 그란을 탐험에 참가시키지 않았다. 이유는 그란이 노르웨이 사람이어서일 가능성이 높다. 스콧의 시체를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이 바로 그란이었다는 것을 감안했을 때 만약 그란이 만약 탐험에 참가했으면 최소한 스콧은 살아 돌아올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스콧을 위해 변명하자면 지금이야 스키가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스포츠지만 이 당시의 유럽에서 스키는 그리 널리 알려진 기술이 아니었다. 이제 막 스포츠화돼서 알려지기 시작했던 무렵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웨덴이나 노르웨이같은 북유럽 일대가 아니면 스키에 능숙한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스키가 무슨 극비리에 전승되는 '비장의 기술'도 아니고 북유럽 국가 출신으로 스키에 능숙한 사람을 찾아서 대원이나 스키 교육자로 영입하면 되고, 이미 스키 타는 법을 가르칠 수 있는 그란을 영입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럼에도 스콧은 스키를 진지하게 배우지도, 스키에 능숙한 사람을 대원으로 삼지도 않았다. 이렇듯 스콧은 전반적으로 개썰매나 스키처럼 한 번 자기 마음에 안 들면 그대로 포기해버리고 반대로 스노모빌처럼 한 번 꽂히면 무슨 삽질을 해서라도 끌고 가는 등 리더로서는 영 함량미달인 모습을 자주 보였다.

4.2.3. 아문센의 배, 프람 호

스콧의 테라 노바 호와 섀클턴의 인듀어런스 호는 원래 포경선이어서 극지를 항해하는 데는 적합했으나, 유빙에는 프람 호만큼 잘 대처할 수 없었다. 물론, 배가 스콧 탐험대의 직접적인 실패 원인은 아니었지만 이후의 제국 남극 횡단 탐험대의 실패 원인은 바로 배였다. 인듀어런스 호가 유빙에 갇혀서 오도가도 못하다가 결국 박살나버린 것이다.

아문센은 난센에게서 프람 호를 물려받아 디젤 기관을 설치하여 개조하였는데, 프람 호는 원래부터 탐험을 위하여 건조한 배였다. 난센은 프람 호를 얼음의 압력에 견딜 수 있도록 골조를 튼튼히 하고, 바다가 얼면 배가 얼음 위에 올라타도록 선저를 둥글게 건조하였다. 또한, 승무원들이 오랜 기간 동안 지치지 않고 견딜 수 있도록 선내에도 충분한 편의시설을 갖추었다. 참고: 프람 호 박물관 관람기

난센은 비범하게도 '아예 유빙에 갇혀서 몇 년간 표류하다 보면 북극점에 도달하겠지'하는 발상으로 8년 치 연료와 5년 치 식량을 싣고 탐험을 떠나 3년 동안 유빙에 갇힌 채 탐험하여, 비록 북극점 도달에는 실패하였지만 나름대로 큰 성과를 거두고 무사히 귀환하였다. 난센의 프람 호 운항 경험과 성과들은 고스란히 아문센에게 전수되었고, 아문센은 범선이었던 프람 호를 디젤 기관을 장착한 기범선으로 개조하여 남극 탐험을 준비한다. 이렇듯 결과적으로 아문센은 배에서부터 영국 탐험대보다 훨씬 발전되고 완전히 검증된 준비를 해놓았던 것이다.

4.2.4. 스콧의 스노모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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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콧이 탐험에 이용했던 스노모빌은 빙판 도하를 고려해서 메인프레임을 목재로 제작해 경량화를 추구했으며 2~30도 이상의 등판능력도 있었다. 1회 주유 시 최대 주행거리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최대 적재 중량 및 견인 중량은 300kg에 달했다고 한다. 비록 증기기관차가 아직 현역으로 굴러가던 1900년대 초반이라는 시대적 한계 때문에 잘해야 시속 30km에 불과한 속도밖에 낼 수 없어 시속 100km도 간단하게 낼 수 있는 요즘 스노모빌과는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제대로 굴러갔다면 스콧 탐험대에게 큰 도움이 됐을 것이다. 당시 세계 언론, 특히 영국 언론은 유럽 몇몇 강대국들만 보유하고 있는 이 최첨단 장비를 집중 보도했고, 그들은 이런 화려한 장비를 보유한 스콧 탐사대가 당연히 이기리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스노모빌이 제몫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바퀴 달린 고철 덩어리가 되어버렸다는 것. 왜냐면 남극의 기온이 설계 당시 예상보다도 너무 낮아서 연료가 얼어버린 것이다. 심지어 스콧이 가져온 3대의 스노모빌 중 1대는 탐험이 시작되기도 전에 물에 빠져 고장 나면서 못쓰게 되었다. 물론 스콧이 아무 검증도 없이 스노모빌을 가지고 갈 정도로 아주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스콧의 스노모빌은 혹한기 스코틀랜드 평원에서 여러번 테스트를 거치며 나름대로 실용성을 검증한 물건이었다. 그저 남극의 한파가 스코틀랜드의 한파 따위[19]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사실을 간과했을 뿐. 이 스노모빌들은 탐험 초반에 얼어버려 얼마 쓰지도 못 했다.

그리고 이 고장난 스노모빌의 처분에 대해서도 스콧은 어리석은 판단을 내린다. 왜냐면 스콧은 스노모빌 수리 기술을 가진 대원인 레지널드 스켈턴(Reginald Skelton) 영국 해군 기관 중위와 마찰을 빚은 끝에 그가 떠나 버렸기에 스노모빌을 고칠 수도 없었다.[20] 만약 레지널드가 동행했더라도 연료가 응고될 정도의 혹한에서는 수리가 불가능했을 확률도 크고, 그렇다면 아무런 쓸모도 없고 무겁기만 한 고장 스노모빌을 그냥 버리고 갔어야 했다. 그러나 문제는 스콧이 비싼 장비를 그냥 버릴 수 없다고 하여 사람이 끌고 가는 정신 나간 짓거리를 벌였다. 즉, 프리드쇼프 난센이 위 항목에 스콧에게 반박한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스노모빌을 남극에 끌고 간 것까지는 어쩔 수 없다고 치더라도, 고장난 스노모빌을 사람이 끌도록 강요한 것은 난센 말대로 개고기를 먹이로 삼는 것보다 수십 배는 잔혹한 일이었다. 난센의 예측이 조금은 다른 의미로 들어맞은 것이다. 애초에 당시 남극에서 쓸만한 이동 수단은 개썰매뿐이었는데 그걸 거부한 이상 스콧의 미래는 난센 같은 베테랑 모험가가 보기에 미래가 어떻게 될 지는 뻔했다. 일설에는 스콧이 이 스노모빌을 사는 데 든 돈이 개와 조랑말을 사는데 쓴 돈의 거의 7배나 되었다고 하니 그게 사실이라면 비싸니까 아까워할 법도 하지만, 그래도 당연히 생존이 먼저이다.[21] 정말 아깝다 해도 남극 탐험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끌고 오는 방법도 있었다.[22] 소용도 없는 것을 끌고 올라간 것은 체력만 소모한 헛짓거리였다.

그렇다고 스콧이 이 스노모빌 여러 대를 끝까지 지켜낸 것도 아니었다. 결국 오래 가지 못해 스노모빌 두 대가 모두 극심한 추위 속에 얼어서 움직이지 않거나 물에 빠져버린 것. 아니, 애초에 스콧을 포함한 탐험대원 전원이 죽어버렸으니 어느 시점까지 스노모빌을 지켜냈던 결과적으론 의미 없는 짓이었다.

우습게도 스콧은 탐험 전에 일기장으로 개썰매를 폄하하면서 스노모빌의 장점을 찬양했는데, 반대로 아문센은 스노모빌을 보고 저게 추위 속에서 정말 제 몫을 하는지 실험이라도 해봤는지 모르겠다며 실패를 예상했다고 한다.

4.2.5. 스콧의 조랑말

스콧은 한파에 강하다는 야쿠트 조랑말을 데려가고, 말을 돌볼 전문 인력도 겸할 수 있는 오츠를 대원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을 19마리나 데려간 것은 결과적으로 치명적인 패착이었다. 이중 탐험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에 바다에 빠져 익사한 말이 9마리나 되고, 생존한 나머지 10마리도 남극에 발을 붙이고 얼마 못 가 동사하거나 크레바스에 빠져 전부 죽어버렸다.

어니스트 섀클턴 문서에 나온 계산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견인력과 식량 소모량의 비를 계산하면 말이 개보다 효율이 5배나 높은 것이 맞다. 문제는 그게 인간이 살 수 있는 대륙이나 반도, 섬 지역에서나 그렇고, 남극은 그 계산이 통하지 않는 동네였다는 것이다.

4.2.6. 스콧의 인력

'개들과 함께 하는 여행에서는 사람들이 자력으로 하는 어려움, 위험, 가난을 무릅쓸 때의 그런 높은 모험정신에 도달할 수 없다.'
- 로버트 스콧

'그들은 개가 끄는 썰매를 타고 편안한 여행을 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처럼 사람이 비참하게 썰매를 끌어야 하는 여행은 하지 않은 것 같다.'
- 오츠의 일기, 위로부터 몇 달 후
스콧은 원래부터 비어드모어 빙하까지 조랑말이 썰매를 끌게 하고, 그 뒤에는 조랑말을 잡아 식량으로 한 다음 인간이 썰매를 끌고 가는 것으로 계획하고 있었다. 이것은 위의 발언에서 보듯이 스콧이 탐험에서의 극기정신과 인력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마저 원래 계획과는 달랐다. 원래는 조랑말을 식량으로 쓴다는 계획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는 무모한 계획이었다. 스콧이 처음 캠프를 세운 로스섬에서 남극점까지 직선거리로만 대략 1,357㎞, 실제 이동거리는 거의 1,381㎞다. 알기 쉽게 비교하자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경부고속도로를 따라 가는 최단거리(경부고속도로 시점인 양재IC부터 종점인 구서IC까지)를 기준으로 한 401㎞와 비교했을 때, 무려 3.4배에 달한다. 탄탄하게 손질된 고속도로를 타고 걸어가도 끔찍할 정도로 먼데, 그곳은 남극이었다. 남극 고원은 춥기도 엄청나게 춥거니와 평균 해발고도도 수천 미터나 되고 식물류가 없어 산소도 부족해서 평지에서 걷는거보다 체력이 훨씬 빨리 소모된다. 스콧 일행은 이 기나긴 거리를 생존에 필수적인 많은 물자를 운반하며 이동해야 했다. 남극 고원의 무자비한 환경에서는 인간의 육체를 극한까지 몰아넣는 선택이었다. 거기다 스콧은 동물도 아니고 기계 스노모빌을 끌고갔으면서 정작 나중에 힘들어지자 개썰매 운운하며 인간의 극기정신을 설파하니 어불성설이라 할 수 있겠다.

또한 비어드모어 빙하에서 인간의 힘으로 간다는 계획을 세웠는데, 이 계획은 조랑말들이 버티질 못하고 전부 죽어버려서 결국 실제로 이루어지긴 했지만 이를 계획으로 세웠다는 것에서 남극을 너무나도 우습게 봤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실제로 비어드모어 빙하에서 700파운드(317.5kg)의 짐수레를 끌고 걸어갔는데 비어드모어 빙하에서 극점까지는 97.5해리(약 180km)였다. 즉 영하 수십 도의 날씨와 해발고도 수천미터가 넘는 곳에서 300kg도 넘는 짐을 끌며 180km를 걷겠다는 말도 안 되는 계획을 실제로 세웠다는 것이다.(...)

거기다 결국 최후에는 인간의 힘만으로 간다는 생각도 멍청하기 짝이 없다. 충분히 가능성이 검증된 곳에서 했다면 또 모르겠는데 남극이라는 미지의 장소에서 했다.[26]

4.2.7. 스콧의 개썰매

그렇다고 스콧의 탐험대가 개와 개썰매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스콧의 설득으로 탐험에 참가한 러시아 출신의 드미트리 기레프(Dmetri Girev)와 시베리아 산 개를 구입해 온 세실 미어스(Cecil Meares)가 개썰매와 개 32마리를 지휘했다. 그럼에도 스콧은 개썰매를 베이스캠프와 전초 저장 창고를 구축하는 데에만 사용하고 정작 남극점 정복에 투입하지 않았다. 결국 이는 적극적으로 개와 개썰매를 탐사에 활용하여 남극점 정복에 주력했던 아문센의 탐험대에게 뒤처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세실 미어스에 대한 추가적인 내용은 아래의 '탐험과정' 문단에 있다.

4.3. 식량과 물자

4.3.1. 페미컨과 고열량 식품들을 비축한 아문센

물품의 준비와 비축 계획은 겉으로 보면 서로 큰 차이가 없었다. 오히려 자금 지원은 스콧이 더 빵빵하게 받은 만큼 준비 과정에서는 더 여유가 있었을 것이다.

1910년 10월 19일에 출발한 노르웨이 탐험대는 개 52마리가 끄는 개썰매에 800㎏이 넘는 온갖 물품을 가득 실었다. 아문센은 식량 저장고들을 만들면서 높은 깃발을 꽂아서 멀리서도 보이기 쉽도록 해두었다. 각 저장고들에는 기본적으로 페미컨 12상자, 바다표범 고기 30㎏, 비계 50㎏, 마가린 한 상자, 초콜릿 20상자, 비스킷 12상자, 등유 25갤런(약 114 L),[27] 붕대 및 구급품과 담요 같은 만일의 사태를 위한 물품들을 꼼꼼하게 비축해 두었다. 아문센 탐험대는 이외에도 과일 설탕절임이나 , 치즈 등도 비축하고 있었지만, 이들 물품이 탐험에는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해 기지였던 프람하임에 그대로 남겨두었다. 이는 의외로 매우 현명한 선택이었다. 절임이나 잼은 액체인 특성상 담고 갈 용기가 필요했는데 병조림 유리라는 특성상 무겁고 약했으며, 통조림은 그 당시로서는 비싸고 깡통따개가 필요하며, 무엇보다도 은 의외로 냉기에 약해서 영하 30도를 넘기면 달걀 껍데기처럼 부서져 버리는데, 남극은 알다시피 지구상에서 가장 추운 지역이다. 치즈는 운반 자체는 어럽지 않지만 꽁꽁 얼어붙으면 식량으로서 의미를 잃는다. 당장 퐁듀가 왜 생겼는지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아문센이 선택한 비스킷, 초콜릿, 페미컨, 바다표범 고기는 대단히 효과적이었는데, 조리할 필요 없이 그냥 생으로 먹어도 되기 때문이다. 극지방에서 비타민 등을 섭취하려면 고기를 익히지 않고 그냥 먹는 게 낫고, 일반적인 상황에서 생식을 '위험한 것'으로 만드는 세균이나 해충은 남극의 어마어마한 추위와 건조함 때문에 애시당초 살 수가 없는 환경이라 증식하지 못해서 생식을 해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이 지혜 역시 모두 이누이트 족에게 전수받은 것이다. 저 시절보다 세균과 질병 등에 대한 연구를 더 오래 한 21세기의 인류가 운영중인 남극 기지에서도 똑같이 어차피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살 수가 없는 환경이라는 이유로 냉장/냉동고를 잘 구비하지 않으니 실제로도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페미컨은 극지방에서 무려 수십 년 동안 보존할 수 있는 데다가 가볍고, 당시의 발달되지 않은 기술로 만든 통조림과는 달리 납에 중독될 염려도 없는 데다 영양분도 풍부했다. 새클턴 탐험대가 남긴 페미컨은 백 년 정도 지났을 때도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더군다나 아문센 탐험대의 페미컨은 에너지바처럼 말린 야채나 과일, 오트밀을 섞어서 만든 개량형이라, 기존 페미컨보다 더 맛도 좋고 섬유질과 비타민 등 다양한 영양소를 부족함 없이 섭취할 수 있었다. 결정적으로 비스킷과 페미컨 등은 수분이 거의 없어서 남극의 한파에도 얼지 않으므로 많이 데울 필요가 없었고, 이렇게 함으로써 전술한 날고기 섭취와 더불어서 연료 소비를 최소화할 수 있었던 요소가 되었다.

아문센 탐험대가 먹은 바다표범 고기는 자신들이 준비해간 식량이 부족해질 것을 염려해 현지에서 출발하기 전 준비기간 동안 사냥으로 조달했다. 당연히 남극의 내륙에는 바다표범 같은 동물이 없지만, 해안가에는 아주 많이 살았다. 아문센은 이들을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으로 보았고, 대원들은 바다표범을 볼 때마다 열심히 사냥해서 주식을 바다표범 고기로 하고 자신들이 가져간 식량은 바다표범이 잡히지 않을 때와 별미로만 먹었다. 이러니 식량이 여유로울 수밖에 없었다. 비록 예상보다 식량소모가 많아서 나중에는 개를 죽여 먹어야 했지만, 스콧 일행에 비해 식량 및 물자 사정이 훨씬 더 여유로웠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이렇게 식량 비축을 위해서 사냥을 하기는 했지만, 아문센은 개인적으로 사냥을 즐기지 않았으며 동물은 자연 상태 그대로 살아있는 것이 더 아름답다고 여겼다. 사방이 얼음과 눈뿐인 재미없는 남극에서 따분해진 탐험대원들이 사냥에 재미를 붙여서 필요 이상으로 동물들을 잡아대자, 아문센은 쓸데없이 동물을 잡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했다.

그런데 이를 뒤집어 생각하면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극한까지 몰아넣는 극지탐험 중에 따분해졌다는 소리가 나오는 상황 자체가 아문센 탐험대에게는 여유가 있었다는 소리이며 탐험 과정에서 절대 무리하지 않도록 철저한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대로 움직여 오히려 여유가 남을 정도로 순조롭게 진행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물론, 인간은 스트레스가 쌓일수록 어떻게든 무슨 여가 활동을 해서라도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싶어하지만, 극지 탐험 정도의 극한 상황에서는 그저 목표를 향해 전진하는 것만으로 기력을 완전히 상실할 위험이 있으니 어지간해서는 이런 말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는 아문센 일행의 스트레스와 체력이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서 뭔가 했을 만큼 적정한 선까지 잘 유지되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또한 비스킷의 재질도 아문센의 꼼꼼함이 두드러지는데, 아문센은 비스킷을 고를 때 고운 밀가루제를 피하고 호밀 귀리, 이스트가 많이 들어간 것을 선택했다. 이런 비스킷은 식감이 거칠지만, 섬유질이 풍부하고 도정하지 않은 곡물에 많이 포함된 비타민 B 복합체도 섭취할 수 있다. 아문센은 그 동안에 한 여러 탐험 동안 밀가루빵이나 비스킷보다는 자신들이 많이 먹었던 잡곡류가 극지방 탐험에서도 유용함을 경험으로 익혔기 때문에 각기병의 위험도 피할 수 있었다. 노르웨이같은 고위도 지방에서는 주식으로 잡곡을 많이 먹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꼼꼼하게 식량을 고르고 또 준비한 덕분에, 아문센 탐험대는 식량의 가짓수를 최소한으로 줄여갔으면서도 스콧 탐험대가 시달린 영양실조를 피할 수 있었다. 이렇듯 가장 기본적인 식량의 영양분 파악 및 조사까지 스콧은 아문센을 이길 수 없었다.

4.3.2. 통조림 및 가공식품을 들고 간 스콧

사실 스콧도 보급품 비축에 있어서는 나름 아문센 못지않게 신경을 썼다. 저장고마다 통조림 24상자, 훈제 고기 25kg, 마가린 6상자, 초콜릿 40상자, 비스킷 30상자, 홍차[28], 등유 8 갤런(약 36 L), 구급품을 비축했다. 비축품 중에서 식량은 아문센과 비교해도 더 많아 보이지만, 식량 자원의 지방질 구성이 상당히 적었고, 연료는 1/3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진짜로 큰 문제는 따로 있었는데, 남극점으로 간 아문센 탐험대는 5명이었고 스콧 탐험대는 8명이었다. 남극점으로 향할 스콧 탐험대의 인원은 5명이었으나, 남극점에서 150마일 떨어진 지점까지 동행한 인원이 3명 더 있었기 때문이다. 비어드모어 빙하 바로 앞까지 동행한 8명의 지원대를 제외하더라도 이렇다. 인원이 많다면 보급품을 더 챙겨야 하는 건 당연하므로, 식량과 연료를 아문센 탐험대보다 월등히(최소 2배 이상, 심지어 스콧 탐험대는 아문센 탐험대보다 훨씬 더 인력에 많이 의존한다. 즉, 그들은 더 먹어야만 한다.) 많이 가져가야 한다. 그런데 스콧은 그러지 않았다. 이게 얼마나 큰 문제인지는 아래에 있는 '보급품의 양' 문단에서 따로 설명할 것이다.

식품 명단을 보면 채소가 안 보이는데, 사실 극지방 탐험에서 채소는 그렇게 크게 필요한 물건이 아니었다. 스콧 탐험대가 남극에서 기지를 세우자마자, 겨울을 보내면서 가장 많이 남았던 음식이 바로 피클이었다. 채소가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가져왔지만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극지에서는 몸 자체가 피클 같은 음식을 거부하는 것 같다."라고 탐험대원이 증언했을 정도. 사실 무리도 아니다. 피클은 기본적으로 소금물이나 식초에 절이는 음식인지라 그냥 상온에 뒀다 먹어도 차가운데 그걸 극지에서, 당장 추위에 벌벌 떠는 가운데 꽝꽝 얼어버린 피클을 집어먹는다고 생각해보자. 얼음을 씹는 거랑 별다를 바 없이 느꼈을 것이다.

물론 채소와 피클만 먹지 못했다면 사실 그다지 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스콧 일행이 준비한 식품 중 상당수를 먹지 못하게 되었다는 데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문제는 단백질 지방 보급을 위해서 잔뜩 비축해둔 통조림이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엄연히 스콧이 잘못 계획한 것인데, 극지방 정도의 추위라면 무엇이든 바짝 마른 물건으로 통일시켜야 마땅했다. 수분이 조금이라도 들어가면 일단 무게가 무거워지는 데다가, 극지방의 추위에 얼어붙어 터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수분이 있는 물건은 데워 먹지 않으면 마른 음식보다 신체 체온에 더 큰 영향을 미치므로 보온에도 매우 불리하다. 데워 먹는다면야 마른 음식보다 체온을 유지하기 유리하겠지만 상술했듯이 스콧의 탐험대는 연료가 부족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통조림은 현대보다도 훨씬 무거웠고, 기술적인 한계로 깡통에 을 땜질해 밀봉했기 때문에, 몇 달 동안 계속 통조림만 먹다가는 납에 중독된다. 이는 19세기 존 프랭클린 제독의 탐험대가 저지른 오류다. 하지만 이에 대한 다른 해석으로 스콧 탐험대가 주석 땜납을 실험적으로 적용한 통조림을 가져갔다는 기록에 근거해서 납 중독이 아니라 주석 페스트 현상 때문에 땜납이 부스러져서 터졌다는 해석을 내놓기도 한다. 실제로 다른 탐험가가 가져갔던 통조림을 온전한 형태로 발견한 사례도 있다.

그리고 애초에 통조림을 갖고 갈 필요가 없었다. 통조림이 발명된 것은 장기 보존을 위해서인데, 남극은 일반적인 식재료도 적당히 말리거나 훈제 처리만 했다면 1년 가까이는 별다른 보존이 필요없을 정도로 춥다. 짐승 시체가 썩지 않고 미라 상태로 보존되어 수천 년을 가는 지경인데 고작(?) 수 개월 사이에 식품이 식용이 불가능할 정도로 부패할 리가 없다. 실제로 스콧 탐험대 자신들이 남극에 1911년에 들고 갔었던 통조림 과일 케이크는 깡통이 파손된 상태에서도 케이크 자체는 106년이 지난 2017년에도 거의 멀쩡한 상태(식용 가능)였다고 한다. 통조림이 파손되어 있으나마나 한 상태였어도 (심지어 당시에 지구상에 살아있던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 죽은 뒤인) 100년 뒤까지 멀쩡하게 남아있었을 음식을 '보존'하려고 쓸데없이 통조림으로 갖고 갔던 것이다.

다만 스콧이 통조림을 선택한 이유로 해당 통조림을 제조한 회사에서 스폰서 형식으로 무상지급을 해줘서라는 말도 있지만 이는 근거가 없다. 이러한 주장대로라면 스콧은 통조림을 위주로 한 물자로만 남극 탐험을 해야 했을텐데 그러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무엇보다도 스폰서를 할 정도 되는 회사가 그러한 제약 조건을 걸었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일단 탐험이 성공해야 스폰서도 그 반사이익을 누릴 수 있으니, 탐험에 제약을 거는 방식으로 후원할 리가 만무하다.

스콧이 바다표범 사냥을 하지 않고 통조림을 선택한 것은 영국의 식문화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실제로 노르웨이 등 북유럽권 국가들에서는 현재도 생식을 하고 문화와 관련된 음식이 많이 발달했지만, 영국을 포함한 서유럽권에는 날고기를 먹는 문화가 없어서, 회 및 초밥 등으로 날고기를 먹는 문화가 세계적으로 보편화된 21세기에도 못 먹는 사람들이 많다.[29] 그나마 이탈리아를 비롯한 남부 지방에서 생굴을 먹긴 하나, 그 외의 어패류나 짐승 고기는 전통적으로 생으로 먹지 않았다. 반 세기도 지난 20세기 후반에서나 국제교류의 발달로 서유럽이나 동유럽권에서도 스시나 생선회 등을 먹는 사람이 생기거나 카르파초같은 회 요리를 개발하는 정도이며, 현재도 회 문화가 이전부터 발달했던 문화권에서도 생선회와 육회 중 한쪽, 또는 둘 다 못 먹는 사람이 심심찮게 있는 판이니,[30] 1900년대 초기 영국인인 스콧에게 고기를 생으로 먹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리해서 먹으면 되지 않나 싶지만 한정된 자원만으로 탐험을 이어나가는 여정에서 조리를 위해서 연료를 소모하는 것도 큰 모험이다. 게다가 위에서도 설명했듯 스콧 일행은 연료가 모자랐다. 현대에도 혹한지 탐험에서 연료를 사용하는 것은 큰 부담이다. # 하물며 그 옛날의 시대에 연료를 단순히 고기를 조리하기 위해 사용하기란 여러모로 무리였다.[31] 어차피 휴식 중엔 난방을 해야 하니 불을 피우긴 해야 하므로 겸사겸사 난방 겸 조리도 가능은 하지만, 당연히 조리시엔 난방만 할 때보다 연료가 더 필요하다. 아문센 일행은 조리 없이 날고기를 자주 먹긴 했어도 수시로 불을 피워 조리를 해 스프 등을 끓여 먹었는데, 당연히 연료를 풍족히 비축해둬서 별 문제가 없었다.

통조림만 터졌다면 내용물들은 오염되지 않은 눈밭에 떨어져 변질되지는 않았을 테니 금속 잔해들을 치우고 내용물만 주워다 어떻게 먹을 수도 있기는 했을 것이다. 그런데, 엎친데 겊친격으로 옆에 같이 저장해둔 등유통들도 사이좋게 같이 터지며 내용물들을 오염시켜 그마저도 먹을 수 없게 되어버린 치명적인 사태가 발생했다. 어떻게 보면 저장고를 만들 때도 실수를 했다고 할 수 있는데, 물품을 배치하는 높이를 조절한다든지, 식량을 배치하는 공간과 등유를 배치하는 공간을 나누는 식으로 등유가 새더라도 식량을 오염시키지 않도록 배치했다면 식량을 회수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영국인답게 홍차도 챙겨갔는데, 스콧 탐험대의 오판과 비참한 최후 때문에 이것 또한 평가절하당하지만 사실 남극에서 차 종류는 상당히 도움이 되는 물건이다. 섀클턴도 위험천만한 길을 가는데 홍차를 가지고 갔으며 실제로 섀클턴과 여정을 함께한 워슬리는 항해불능이 된 배의 목재를 태운 불로 홍차를 끓여 마시며 살아갈 의지를 얻었다고 한다. 남극같은 극한의 자연환경 속에서 마시는 따뜻한 차 한 잔은 피로에 지친 심신을 빠르게 회복시키고 마음을 위로해주는 유일한 즐거움이 될 수 있다. 당장 겨울에 추운 날씨를 겪을 때 따뜻한 음료를 먹어 기운이 나고 정신이 맑아지는 경험은 누구나 해 봤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들에게는 고국의 음식이었으니 그 효과는 배가 되었을 것이다. 야채가 부족한 식단에서 비타민을 조금이나마 얻을 수도 있다. 몽골인 등 유목 민족이 중국에 말을 팔고 차를 구해 간 것도 차를 통해 유목민 식단에서 결핍되기 쉬운 비타민을 보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차 300mL를 끓이는 데 필요한 찻잎의 양은 2~3g 정도다. 고작 몇백 그램 정도만 챙겨가면 긴 탐험기간 내내 차를 마실 수 있으니 필요한 양도 매우 적다. 얼음과 눈이 지천에 깔렸으니 물 구하기도 매우 쉽다.

하지만 스콧 탐험대는 그놈의 연료 부족 때문에 쉬는 동안에도 마음대로 불을 피우지 못했다. 그 때문에 스콧 일행은 홍차 한 잔이 마음을 위로해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차로 못 마시고 살기 위해 강제적으로 생 홍차 잎을 씹어먹어야만 했다. 이는 단순히 식량 부족만이 아닌 심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극심한 고통을 겪은 스콧 일행에게 있어서 더욱 심각한 타격이자, 생존 요인만 하나 더 제거하게 된 치명적인 요인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연료 부족은 바로 식수 부족 문제로도 연결되었다. 물론, 수만 년 동안 한 번도 오염되지 않은[32] 청정수가 얼어 만들어진 눈과 얼음이 사방에 널렸으니 굳이 식수를 따로 챙길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이런 자원을 바로 옆에 두고도 연료가 부족해서 물로 만들 수가 없으니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었고 그야말로 사막 한가운데 있는 것(사족이지만 남극도 사막으로 분류된다.)이나 다름없는 고통이 추위 등의 각종 문제와 함께 영국 탐험대를 덮친 셈이다. 억지로 눈을 입에 넣어 녹여 어떻게든 수분을 보충할 순 있었지만, 연료가 부족해서 당장 추위와 동상으로 고통받는 마당에 억지로 얼음까지 녹여 먹어야 하는 영국 탐험대의 고통은 대단했을 것이다. 인간이 정온동물이라곤 하지만, 정온동물이 체온을 유지하는 원리는 열량을 소모해서 체온을 올리고 그걸 유지하는 것이니 이렇게 추운 곳에서 눈을 자기 체온으로 녹여가며 마시는 행위는 수분 보충은 가능할지 몰라도 전체적인 신체적 열량을 까먹는 행위다. 배부르게 먹을 수 있어도 괴로울 판인데 안 그래도 배고픈데도 살려면 해야 했으니 이 역시 대단한 악재인 셈이다.

게다가 추울 때 찬 것을 먹으면 위장운동에 영향을 주어 소화불량, 위장 장애가 생길 확률이 높다. 게다가 입안 온도도 크게 변하다 보니 치아에도 손상이 갈 수도 있다. 날씨가 추울 때는 체온을 잘 유지하기 위해 몸이 따뜻해야 하는데 지나치게 찬 게 들어가면 몸의 기초 체온 조절 중추에 혼란이 오게 된다! 내부 온도가 떨어지면 외부로부터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침투가 쉽고, 면역이 떨어지게 된다. # 그 결과, 눈과 얼음은 녹이기 위해서 머금은 입 속을, 그럼에도 충분히 데우지 못했을 물은 식도를 망가트려 버렸을 것이다. 천하의 베어 그릴스도 한대지방 탐험 시엔 무조건 얼음이나 눈을 녹이고 데워서 마시지, 절대로 얼음과 눈을 그대로 먹지는 않는다. 얼음을 그대로 먹게 되니 체온이 떨어져 저체온증이 오기 쉽고, 저체온증이 오면 당연히 몸을 따뜻하게 해야 하는데, 누차 말하지만 스콧의 탐험대는 연료가 부족했다.

게다가 아문센이 통밀과 귀리가 들어간 비스킷을 선택한 반면 스콧은 자신들이 영국에서 먹던 밀가루 비스킷을 싣고 갔다. 스콧이 챙겨간 식료품 목록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스콧 탐험대의 식량은 비타민과 무기질이 상당히 결핍되었다. 스콧의 식단에서 비타민 B와 C를 섭취할수 있는 식품은 죽은 조랑말과 개뿐이었는데, 이걸로는 부족해 모두가 영양실조와 괴혈병에 걸렸다. 아마 부족한 영양소를 과일 통조림 등으로 해결하려는 계산이었겠지만, 위에서 설명했듯 스콧이 준비한 통조림은 대부분 터지고 기름에 오염되어 먹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영양불균형은 탐험 중반 이후에 이들이 고전하는 큰 원인이 되었다. 다리에 총상을 입었던 오츠가 계속 약해진 것도 동상 외에 각기병을 비롯한 영양실조까지 같이 겪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영양불균형은 엄밀히 따지면 스콧의 잘못만은 아니다. 원래 전통적인 영국식 식사는 영양적으로 매우 불균형했기 때문에 영국 탐험가들은 똑같은 상황에서도 다른 서방 국가 탐험가들에 비해서 영양실조나 괴혈병 등을 앓는 비율이 더 높았다. 당시 영국 선원과 해군 수병들이 괴혈병에 잘 걸렸던 까닭도 이에 기인한다. 오죽하면 영국 정부에서도 자국 선원이나 해군 수병들에게 괴혈병 예방을 위해 채소와 과일 섭취를 권고했을 정도이며, 베이스 칵테일인 그로그도 수병들의 괴혈병 예방을 위해 럼에 레몬즙이나 라임즙을 섞어서 보급했던 것에서 유래했다. 우습게도 앞서 영국인 제임스 린드가 괴혈병 치료법으로 과일을 제시했을 때는 그야말로 개무시했다.

제대로 챙겨갔어도 영양적으로 불균형한데 이 문제점투성이 식품마저도 부족했으니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맛은 말할 것도 없고 영양소 균형까지 등한시한 당시 영국식 식생활의 문제점은 스콧의 탐험에서도 치명적인 폐해를 가져왔다.

4.3.3. 보급품의 양

위 문단에서 지적했듯 스콧 탐험대는 무려 8명이나 되었으나 보급품은 매우 부족했다.
4.3.3.1. 연료
우선 추위를 견디는데 큰 도움이 되는 연료의 저장량 면에서도 스콧은 열세를 보이고 있었는데, 위에 쓴 대로 영국 탐험대는 각 저장고에 등유 8 갤런(약 36L)을 들여놓았다. 반면에 아문센은 등유를 스콧보다 세 배나 많은 25갤런(약 114L)씩 각 저장고마다 비축해두었다. 이것부터 아문센 일행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아문센 일행은 등유를 3배나 많이 비축하여 추위가 불어닥치면 불을 피워서 몸을 녹이고 여유롭게 쉴 수 있었으나, 스콧 일행은 연료 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스콧 탐험대가 8명이라는 게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아문센 탐험대 5명은 114L의 연료를 비축했으니 1인당 22.8L의 연료를 쓸 수 있는 반면에, 스콧 탐험대 8명은 36L밖에 연료가 없으니까 1인당 4.5L의 연료로 버텨야 한다. 8명 중 3명은 도중에 돌아갔으므로 연료를 조금은 덜 썼겠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1인당 4.5L에서 조금 더 불어나는 정도밖에 안 된다. 탐험대가 출발할 때 갖고 갈 연료를 합치더라도 연료가 매우 모자랄 것이 분명하다. 비어드모어 빙하 앞에서 돌아간 8명의 지원대를 제외해도 이렇다.

게다가 당시에 납 리벳으로 만든 연료용기는 혹한에 작은 틈이 생겨 등유가 스며나오는 일이 있었는데, 앞선 탐험대에서 이런 현상을 보고한 바 있었으나 스콧은 이를 무시했다. 그러고서는 스콧은 탐험일지에 "비축해둔 등유가 줄어들어 있어서 기존에 쓰려던 양보다 부족하다." 하고 한탄하였다. 가뜩이나 연료 자체도 부족한 상황에서 그나마 비축해둔 연료마저 쓸 수 없게 되었으니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반대로 아문센은 이러한 선발대의 온갖 실패 경험을 꼼꼼하게 조사하여 등유가 최대한 유출되지 않도록 연료통을 두툼한 가죽으로 덮는 것과 같은 여러 노력을 했고, 그러고도 연료가 새거나 증발하는 경우도 생기기에 여유분을 더 가져가는 등 스콧과는 차원이 다르게 철저히 준비했다.

아문센 탐험대의 연료 소모량이 적었던 것도 중요하다. 아문센 탐험대의 식량은 페미컨과 바다표범 고기였는데, 이건 조리할 필요가 없이 그냥 먹으면 된다. 당연히 조리 과정에서 소모되는 연료가 없으며, 페미컨처럼 바싹 말린 식량은 얼지 않으므로 저체온증에 걸릴 일도 없다. 땀을 흘리지 않는 개를 이용하므로 연료를 소모해서 개들을 덥혀줄 필요도 없다. 반대로 스콧 탐험대는 조리 과정에서 연료를 소모하는 데다가, 말이 썰매를 끌었기 때문에 말들을 덥혀주기 위해 연료를 또 소모해야 했다. 연료도 적은데 소비량은 더 많으니 스콧 탐험대가 월등히 불리할 수밖에 없다.
4.3.3.2. 식량
문제는 연료만 부족한 게 아니라 식량 등 모든 보급품이 다 모자랐다.

극지에서 인간이 겪는 피로와 열량 소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스콧 일행은 하루에 4000㎉를 소모한다고 예상하고 식료품을 준비했지만, 현실은 그보다 배는 더 많은 평균 6000-7000㎉부터 많게는 11,000㎉였다. 한술 더 떠 스콧 탐험대는 스노모빌이 고장나고 말들이 죽어나가 썰매를 사람 손으로 끌고 다니느라 열량 소모가 더욱 극심했다. 현대 미군의 평시 하루 권장 배식 열량이 3800㎉, 한국군이 3100㎉이고, 미군이 만든 혹한지용 전투식량인 MCW의 끼니당 열량은 1540㎉, 하루치 패키지당 4500㎉이다. 21세기 초의 미군이 날씨가 평범한 곳에서 그냥 일상적 생활 동안 밥 먹는 수준에서 별반 차이 없는 급의 열량을 남극에서 하룻동안 섭취하는 것으로 생각했단 것이고, 미군의 혹한지용 식사량보다도 조금 모자라는 수준이다. 거기다 MCW가 쓰기로 예상하는 '혹한지'는 남극에 비하면 엄청나게 따뜻한 곳이니, 스콧이 계산한 4000㎉는 지나치게 낮은 수치였다. 이 무렵의 식품영양학은 걸음마 단계였음을 감안해야겠으나 필요 열량을 2~3배나 틀린 것은 계산을 너무 날로 한 것이다. 더구나 남극 탐험이 인류 역사상 최초인 것도 아니라서 참고할 만한 사례도 분명 존재했기에 더더욱 변명의 여지가 없다. 반면에 아문센은 저장고에 무려 3톤이나 되는 식량을 보급소 세 군데에 나누어 미리 준비했으니 스콧이 계산했던 1톤에 비하면 세 배에 달하였다. 아문센 탐험대는 저렇게 많이 챙겨갔고 이것도 부족할까봐 바다표범까지 사냥하여 고기를 비축했으나 식량 소모가 예상보다 많아 나중에는 개를 죽여 먹어야 했다. 덕분에 아문센 일행은 건강하고 심지어는 좀 더 살찐 채로 돌아왔다. 스콧보다 열량 소비는 적으면서 식량을 세배나 더 많이 가져갔으니 당연했다.

1인당 식량이 얼마인지 계산해보면 스콧이 얼마나 큰 실수를 했는지가 드러난다. 아문센 탐험대는 3톤의 식량을 저장했고 5명이니 1인당 600kg의 식량이 있다. 그런데 스콧 탐험대는 8명이고 식량은 1톤이므로 1인당 125kg의 식량밖에 없다. 아문센 일행이 개썰매를 타고 달린 덕에 에너지 소비량이 적었던 데다 개를 잡아 먹어서 식량을 보충한 데 비해, 스콧 일행은 개를 잡아먹지 않았고 손으로 썰매를 끌고 다니느라 에너지 소모도 많았다. 중간에 3명이 먼저 귀로에 오른 걸 감안해도, 1인당 식량은 아문센 탐험대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했다. 돌아간 대원들이 하나도 안 먹었다고 해도 극지공격대 5명에게 주어지는 식량은 1인당 200kg밖에 안 된다. 당연히 3명의 대원들이 하나도 안 먹을 수는 없으니까 먹을 수 있는 양은 200kg에 한참 못 미친다. 원래부터 식품을 잘못 고른 탓에 아문센 일행과 같은 양의 식량을 가져갔더라도 영양 부족에 시달릴 판인데 양까지 부족했다. 조랑말을 잡아먹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모자랐다. 비어드모어 빙하 앞에서 돌아간 8명의 지원대가 저장고에서 식량을 축내지 않았다고 가정해도 이렇다. 이렇게 열량 계산도 잘못해서 필요한 열량의 반 정도만 먹게 된 스콧 팀의 대원들은 전부 안 그래도 힘든 남극에서 더 고생을 하게 되었다.

이 문제는 스콧 탐험대의 발목을 단단히 잡았다.스콧 탐험대는 극지 공격대 5명 외에도 3명이 더 있었는데, 이들은 남극에서 150마일 떨어진 지점에서 극지탐험대 5명과 헤어진 후 먼저 돌아왔다. 이들은 당연히 원래 계획대로 저장고에 들러서 식량 일부를 꺼내 먹었는데, 이건 돌아올 때 그들이 소비할 몫이었으니까 딱히 문제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스콧의 일기를 보면 저장고에 비축한 비스킷이나 고기가 한두 명 분량이나 줄었다고 경악하며 스콧과 일행도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적었다. 스콧 자신도 배가 고팠을 텐데, 식량의 양을 잘못 계산했다는 사실을 못 알아차린 것이다.

그러나 계산과 현실은 매우 달랐다. 스콧 탐험대의 식량 1인분은 4000kcal밖에 안 되는데, 3명이 하루에 7000kcal에서 11000kcal의 칼로리를 소모했다면 그걸 보충하기 위해서는 1인당 3000kcal에서 7000kcal를 더 섭취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3명은 3~6인분을 더 먹어야 한다. 그런데도 줄어든 식량이 고작 한두 명 분량밖에 안 된다는 말은 3명 역시 뒤따라올 탐험대원들이 먹을 걸 남겨두기 위해 어떻게든 덜 먹으려고 애썼다는 뜻이다. 이후 3명은 괴혈병과 식량부족에 시달리며 귀환하다가 눈보라에 갇혔지만, 3명 중 하나인 톰 크린이 혼자서 눈보라를 뚫고 18시간이나 돌격하는 미친 짓을 한 끝에 간신히 기지까지 도착해서 구조대를 부른 덕에 살아남았다.

거기다 막판에 바워스가 합류하는 바람에 안 그래도 모자란 식량이 더 부족해졌다. 원래대로라면 남극에서 150마일 떨어진 곳에서 귀환했어야 할 인물이 극지공격대에 합류하는 바람에 그만큼 식량을 더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연료소비량도 그만큼 늘어난 건 말할 필요도 없다. 처음부터 연료와 식량을 넉넉하게 준비했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스콧 탐험대의 물자비축량은 매우 부족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바워스의 합류가 아니고, 손을 다쳐서 탐험에 도움이 안 되는 에드거 에반스를 굳이 극지공격대에 합류시킨 것이었다. 에반스가 5명의 극지공격대를 편성하기 전에 다쳤다면 스콧이 큰 실수를 한 것이고, 편성한 이후에 다쳤다면 불운이겠지만.

따라서 보급품을 너무 적게 준비한 것은 스콧 탐험대의 가장 치명적인 실수였다. 보급품이 충분했다면 상술한 내용처럼 스콧 일행이 준비한 식량과 통조림, 연료, 식수 분야의 문제는 물론, 체온 유지 문제 역시 대부분 해결된다. 바꿔 말하면 보급품이 모자라서 그나마 살릴 수 있는 장점도 하나도 못 살리고 오히려 이미 나열한 수많은 단점을 죄다 보완하기는커녕 악화시키기만 해 결국 탐험대의 발목을 잡고, 끝내 죽음이라는 비극을 피할 수 없었다.

실제로 2006년 BBC에서 아문센과 스콧 팀을 그대로 재현하여 영상 BBC 홈페이지하여 그린란드에서 각각 같은 장비, 의복, 식량을 가지고 아문센과 스콧 팀이 간 거리만큼의 탐사를 시도한 적이 있다. 오늘날에는 '환경보호에 관한 남극조약 의정서'에 따라 남극에서는 개썰매를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그린란드로 바꿨다. 이때 스콧 팀은 중간에 모든 대원들이 너무 체중을 잃자 중간에 포기해야 했다. 몇몇 학자들은 스콧이 기후가 안 좋아서 고생을 했다는 기록이 에너지 부족으로 인해 썰매의 무게가 더 무겁게 느껴지고, 추위를 더 느끼게 돼서 그렇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4.3.3.3. 여분의 물자
보급품의 양이 적다는 것은, 유사시를 대비한 예비용 보급품도 모자란다는 의미이다. 탐험 도중에 손상되는 물자가 없을 리가 없으므로, 이를 보충하려면 예비용 보급품이 반드시 필요했는데 여기서도 아문센이 우세했다.

아문센은 예비용 털가죽 방한복을 준비했다. 탐험하다가 옷이 찢어지기라도 하면 대체할 옷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근거는 남극점에 아문센이 세운 폴하임 텐트에 있다. 여기에 아문센은 털가죽 방한복을 남겨두었는데, 남극 같은 추운 곳에서 자기가 입을 털가죽옷을 벗어서 남겨둘 턱이 없다. 따라서 이것은 유사시를 대비해서 아문센이 가져온 예비용 피복일 것이며, 탐험이 순탄하게 진행되었기에 굳이 이걸 꺼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걸 다시 프람하임으로 가져가는 것은 그만큼의 무게를 늘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굳이 방한복을 가져간다고 해도 문제는 없었다. 식량과 연료가 넉넉하니 방한복 정도는 큰 부담도 아니고, 돌아가는 도중에 방한복이 파손될 경우 예비용 방한복을 써야 했기 때문이다. 아문센은 아직 평생의 꿈인 북극점 정복을 하지 못했으므로, 멀쩡한 방한복을 버리고 이후에 새로 장만하는 것보다는 방한복을 도로 가져가는 게 더 낫기도 했다.

그런데 아문센이 남극으로 오기 전에 스콧 탐험대의 배가 프람하임에 온 적이 있으며, 이때 아문센은 스콧 탐험대의 개버딘 방한복을 봤고, 그걸로는 추위를 버틸 수 없다는 사실도 꿰뚫어봤을 것이다. 그렇다면 새 방한복이 필요할 터인데, 마침 자기는 털가죽 방한복이 남게 되었으니 이걸 스콧에게 주자고 생각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실제로 스콧 탐험대 5명이 남극점에 왔을 때에는 방한복이 얼어붙어서 벌벌 떨고 있었다. 아문센이 왜 방한복을 폴하임 텐트에 남겨뒀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스콧을 배려해서 그렇게 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아문센이 영국인의 집념을 경계한 건 사실이지만 이미 승부는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결과가 나왔다면 더 이상 경계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스콧은 예비용 방한복을 준비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스콧 탐험대의 방한복은 남극의 추위를 버티지 못해서 얼어버렸는데, 이걸 갈아입었다는 이야기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새 방한복으로 바꿔 입었다면 다시 얼어붙을 때까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리므로 추위를 견디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아문센은 남극점으로 가면서 천문관측용으로 육분의와 경위의를 모두 가져갔다. 남극점에서 경위의가 고장났는데도 자기 위치를 측정할 수 있었던 것은 육분의 덕분이었다. 탐험을 기록하기 위해 가져간 카메라도 극심한 추위를 버티지 못해 고장났지만, 비욜란이 가져간 아마추어용 카메라가 있었기에 사진을 건질 수 있었다. 하나가 고장나도 대신할 물건이 있었기에 탐험에 방해가 되지 않았다. 예비용 방한복조차 없어서 덜덜 떨던 스콧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아문센은 남극점에 폴하임 텐트를 두고 떠났다. 남극점에 텐트를 두고 떠났다는 것은, 자기가 돌아갈 때 쓸 텐트가 따로 있기 때문이다. 아문센은 예비용 텐트까지도 치밀하게 준비한 셈이다. 폴하임 텐트가 조금 작으니까 예비용으로 쓰기에는 부족하다고 주장할 수는 있겠지만, 예비용 텐트가 아예 없는 것보다는 백배 낫다. 이런 것까지 준비한 점에서 아문센의 꼼꼼함을 알 수 있다.

4.3.4. 저장고

두 탐험대는 저장고 시설부터 꽤 차이가 컸는데 일단 겉보기에는 스콧 쪽이 우세했다. 아문센 쪽은 목재와 이글루 등으로 급조한 반면, 스콧 쪽은 돈을 들여 더 꼼꼼하고 더 튼튼하게 지었다.

그러나 물자 보관 상태는 아문센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위에 서술했듯이 아문센의 물자는 대체적으로 손실이 적었고, 아문센이 이 탐험 이후 남기고 간 연료통이 50년이나 지난 뒤에도 연료가 가득 차있었다는 보고도 있다. 그러나 스콧의 물자는 통조림이 터지거나 연료가 새는 등의 다양한 문제를 일으켰다. 애써 튼튼히 구축한 저장고를 천신만고 끝에 찾아냈지만 캔버스 천으로 두른 코크 연료 용기에서 등유가 새어나와 옆에 쌓여있던 식료품들을 오염시켜 상당수를 먹을 수 없게 만들어버렸다는 사례도 있었을 정도다. 스콧 탐험대가 전멸하고 나서 파견된 다른 탐험대원들이 이 저장고들을 정밀 조사했는데, 연료 저장에 사용한 코크 용기는 매우 튼튼하고 추위에도 강한 물건이라서 이렇게 터진 것이 그야말로 최악의 수난이었다고 기록했다. 물론 이도 수난이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다. 위에서 언급했듯, 애당초 잘못된 관리 등으로 인해 발생한 일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배고프고 지친 채로 겨우 행군하는 와중에 기껏 찾은 저장고의 기름이 터져나와 식량까지 못 쓰게 된 걸 본 스콧 일행의 좌절감은 엄청났을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저장고가 터진 것은 아니고 물자가 온전히 남은 곳도 있었다. 스콧 탐험대의 시신을 발견하고 15개월이 지난 1913년 8월, 미국 탐험대가 스콧 탐험대가 남긴 저장고를 발견했는데 저장고 안에는 시간이 지나면서 새어나간 등유 정도를 제외하고 보급품 대부분이 멀쩡하게 남아있었다.

문제는 아무리 저장고 안에 물자가 가득해도 어디 있는지 모르면 의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아문센은 급조한 저장고라도 큼지막한 깃발을 꽂아서 잘 보이도록 한 반면에, 스콧은 기껏 돈을 들여 더 튼튼한 저장고를 지어놓고도 가시성에 관련된 조치를 하지 않았다. 남극의 날씨는 매우 험악하므로 블리자드나 눈보라 때문에 시야가 가려져서 저장고가 안 보일 수도 있고, 눈이 저장고를 덮어버려서 위치를 잃어버릴 수도 있으며, 깃발을 세웠다 해도 단단히 고정시키지 않으면 깃발이 부러지거나 뽑혀서 날아갈 수도 있다.

실제로 스콧의 사망 지점으로부터 고작 서쪽 800m 지점에 스콧이 만들어 둔 저장고가 있었으니, 갖은 끔찍한 실패와 타격에도 불구하고 남은 세명, 혹은 마지막까지 살아있던 스콧 단 한명이라도 살아올 가능성마저 이 실책 탓에 사라진 셈이다. 어처구니없을지도 모르지만 남극에 불어닥치는 상상을 초월하는 눈보라를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또한, 남극에서는 눈보라가 불지 않더라도 하늘과 땅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심한 화이트아웃 현상 때문에 눈 앞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대로 방향감각을 상실하기 쉽다. 그렇기 때문에 항해술 숙련자와 이정표가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콧은 항해술을 아는 본인만으로 충분했다고 여겼는지 다른 항해술 숙련자를 대원으로 데리고 가지도 않고 이정표를 설치하지도 않았다. 참고로 그들이 죽고 나서 몇 달이 지난 다음에 온 수색대는 기지에서 12마일(19.2㎞) 떨어진 저장고는 빨리 찾아냈지만 저장고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이들의 시체를 찾는 데는 무려 한 달이 넘게 걸렸다.

일반 평지에서조차 지리를 잘 모르는 탓에 불과 몇십미터 남겨 놓고도 길을 헤매는 사람들도 허다하다. 운전자만 봐도 그렇다. 네비게이션 없이 평상시 알던 길이라고 자신만만하다가 길을 잃어버리는 경우도 수두룩하다. 그런데 스콧은 이러한 행동 남극에서 저질렀으니 이후 상황이 어땠을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아무리 극지방이 가혹하고 이미 지칠 대로 지쳤다 한들, 이미 그런 끔찍한 환경에서 수천 킬로미터를 걸어서 돌파할 만큼 대단한 사람이라면 고작 800m도 더 못 가서 주저앉았을 가능성은 적다. 하지만 목표까지 800m 떨어진 것만 알 뿐이지 위치를 모른다면? 단순 계산으로도 5㎞(1600π미터) 이상의 거리를 '돌아봐야' 목표를 찾을 수 있을 가능성도 있다. 더구나 '대략 이 근처'인 것만 알고 정확한 위치나 거리조차 모른다면? 말 그대로 목표를 찾기 위해 이동해야하는 거리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따라서 남은 탐사대는 저장고가 근처에 있었겠지 하면서 떠돌았거나, 아니면 아예 저장고가 어딨는지도 모르는 채로 그저 남극 바깥으로 나가기만 하려다 죽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저장고 800m 앞에서 주저앉은게 결정타긴 했지만, 애초에 저장고의 위치를 알아보기 쉽게 만들었다면 그 전에 지나쳤을 다른 저장고 역시 상대적으로 쉽게 찾을 수 있었을테니 돌아오는 동안 이렇게 지치다가 죽었을 가능성도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고, 돌아오는 길도 더 효율적으로 찾아서 실수로 엉뚱한 방향으로 전진해 안 그래도 부족한 체력을 더 낭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거기다 아문센은 돌아올 때 역시 후각이 좋은 가 여전히 살아있었다. 알아서 고기 냄새를 맡고 저장고로 달려갈테니 설령 잘 안 보여도 상대적으로 찾기가 수월했다. 그러나 스콧 탐험대에는 개가 없었으니 이런 수단도 쓸 수 없었다. 결국 물자를 넉넉하게 저장한 데다 대부분을 회수한 아문센은 성공했고, 물자도 충분히 저장하지 못한 데다 그것조차 대부분 회수하지 못한 스콧은 참담한 실패를 맛보았다.

어처구니 없는 건 스콧이 군인이라는 점이다. 군인이라면 병참의 중요성을 몰라서는 안 되는데, 일개 병사도 아니고 지휘관인데도 물자 저장고를 이딴 식으로 관리했으니 보급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작전에 실패한 장수는 용서받을 수 있지만, 보급에 실패한 장수는 용서받을 수 없다."라는 말은 그냥 나온 게 아니다. 남극이라는 적군 앞에서 방심한 대가는 이렇게도 컸다.

4.4. 경로와 스케줄

아문센은 남극점으로부터 1335㎞ 떨어진 웨일스 만에 프람하임 기지를 세워 1911년 10월 19일에 출발한 반면, 스콧은 1448㎞ 떨어진 맥머도 만에 있는 에번스 곶에 윈톤 기지를 만들어 동년 11월 1일에 출발했다. 출발거리부터 113㎞씩이나 차이가 난 데다 아문센이 13일이나 빨리 출발했으니 스콧이 압도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아문센은 개썰매와 스키 등의 이동수단이 있었고 이를 끝까지 유지했지만, 스콧은 스노모빌이 고장나고 말도 다 죽으면서 마지막에는 걸어가야만 했다. 거기다 걸어가야 했던 시점에서 이미 둘의 거리는 500㎞나 차이가 났다.

그 대신 아문센은 아무도 가본 적이 없는 길로 간 탓에 자신이 직접 길을 개척해야 했고 위험한 지형의 존재 여부도 가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복불복이었지만, 스콧은 어니스트 섀클턴이 개척한 길을 그대로 따라갈 수 있었다. 그러나 스콧은 섀클턴이 아니었다. 그리고 아문센에게는 다행히 아문센이 택한 루트는 스콧과는 달리 비어드 모어 빙하처럼 위험한 지역은 없었다. 비어드 모어 빙하에서 스콧 일행이 데리고 갔던 조랑말 중 한 마리가 크레바스에 추락해서 죽은 적도 있었다.

4.5. 탐험대 구성

4.5.1. 아문센

아문센은 스키 선수 및 어릴 적부터 추운 곳에서 태어나고 자라면서 추위에 적응되면서 살아온 이들을 골라서 데려갔다. 참고로 노르웨이 탐험대에 소속된 다른 일원들의 직업 및 특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보면 알겠지만 모두 각자 맡은 일이 극지방 생존에 필수적인 기술을 갖춘 인재겸 생존 전문가들이었다.

* 헬메르 한센 (Helmer Hanssen, 1870-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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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극지방 출신이라서 어린 시절부터 한파에 강했다. 물론, 스키 실력도 있었고, 빙해도선사로 일할 만큼 극지방 항해술에도 뛰어나 아문센이 북서 항로를 개척할 때부터 탐험에 참가했다. 이 기간 중 아문센과 함께 이누이트들에게 개썰매 모는 법을 배웠고, 이후 아문센에게 추가 스카웃된 스베레 하셀과 함께 개들의 관리와 개썰매 조종을 담당했다.
남극점에서 귀환할 때, 아문센이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서 정든 개들을 쏴 죽이는 것을 슬퍼했지만, 상술했듯 아문센이 살육을 즐기지 않을 뿐더러 개고기를 좋아해 잡아먹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냥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하며 아문센을 비난하지도 않았다. 1980년대 한국 위인전에서는 아문센이 개를 쏴 죽일 때 곁에서 개들의 명복을 빌며 울면서 기도했다고 나오기까지 했다. 당연히 귀환 이후에 노르웨이 탐험대가 개고기를 먹었다고 야만인이라며 비꼬던 영국 기자들에게 가장 강하게 항의했다. 이후, 아문센과 한 번 더 북동 항로 개척 탐험에 선장으로 참가했다. 향년 86세로 아문센 탐험대 참가자 중에서 올라프 비욜란에 이어 두 번째로 오래 살았다.

* 오스카르 비스팅 (Oscar Wisting, 1871-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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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 때부터 선원 생활을 시작했고, 노르웨이 해군에 입대해 오랫동안 극지방에서 근무했던 인물이라서 역시 한파에 강했다. 스키 실력은 대원들 중에서는 좀 서툰 편이었지만 그래도 노르웨이인답게 탈 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해군 시절 포수여서 탐험 준비 기간에는 사냥을 담당했고, 바다표범 고기를 저장고에 비축해 비상식량 보충에 큰 기여를 했다. 게다가 대원들 중 요리를 가장 잘해서 남극점 정복 후 돌아오는 길에 개를 도살할 때, '이걸 어떻게 먹을 수 있을까'하고 고민하던 대원들에게 개고기 수프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별거 아닌거같아보여도 극한상황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는건 한계까지 내몰린 심신에 안정감을 가져다주고 활기를 불어넣어주는 매우 중요한 요소다. 남극탐험 후 아문센이 북극 횡단 비행을 할 때도 동행했다.

* 올라프 비욜란 (Olav Bjaaland, 1873-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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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대회 스키 챔피언. 게다가 자신의 스키 장비를 직접 만드는 능란한 목수이기도 해서, 탐험 준비 기간 중에 무게 88㎏의 조립식 썰매를 마개조 22㎏으로 대폭 감량시키면서 내구성은 거의 떨어뜨리지 않았다. 덕분에 아문센 탐험대의 개들은 훨씬 가벼워진 썰매를 빠른 속도로 끌고 갈 수 있었다. 탐험대에서 유일하게 천문항법을 몰랐지만, 탐험대의 메인 카메라가 고장나는 악재에도 불구하고 비욜란이 개인 카메라로 찍은 사진이 남았기에 현대에도 아문센 탐험대의 남극 탐험을 사진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생몰년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아문센 탐험대 참가자 중에서 향년 88세로 가장 오래 살았다.

* 스베레 하셀(Sverre Hassel, 1876-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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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팅과 마찬가지로 일찍부터 선원 생활을 했고, 오토 스베르드루프가 이끈 그린란드 일주 탐험에 참가하는 등 극지방 탐험 경력도 갖고 있었다. 이후에는 세관원으로 근무하다가 개썰매 대회에 참가해 우승하며 개썰매를 준비하던 아문센으로부터 관심을 받고, 무급 휴가를 받아 아문센 탐험대에 참가했다. 한센과 함께 탐험 중 개의 관리와 개썰매 조종을 맡아 탐험 성공에 큰 기여를 했다.

4.5.2. 스콧

스콧은 탐사대를 해군 장교인 스콧 대령 자신을 비롯해 군인과 과학 및 여러 전문가 위주로 편성했다. 물론, 목적은 남극점 도달 외에도 과학 탐사를 위한 것이었다. 원래 비어드모어 빙하를 넘을 때까지 동행한 대원은 8명이었고 그 중 4명을 뽑아서 남극점에 갈 예정이었지만, 최종적으로 스콧과 동행한 것은 아래에 소개된 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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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Henry Robertson Bowers.jpg 파일:Edgar Evans.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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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시피 이들은 각자 군 장교와 부사관 및 지질학자, 기후학 및 여러모로 학문과 과학 분야에서는 전문가들이기는 했지만, 결국 탐험에서 가장 중요한 '생존'에는 문외한이었기 때문에 압도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 프로 대 아마추어인 상황이었다.

4.5.3.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

아문센 탐사대와 스콧의 탐사대는 길찾기 능력에도 차이가 있었다. 이정표가 될 만한 지형지물이 드물고 미리 만들어진 지도도 없는 남극을 탐험하는 만큼 태양이나 달이나 별 같은 천체를 관측하여 계산함으로써 현재의 위치와 앞으로 갈 방향을 알아낼 수밖에 없었다. 즉, 천문항법을 발휘해야 했다.

아문센 탐험대는 천체측정에 작고 가벼우며 계산도 간편한 육분의[33]를 이용했으며 아문센부터가 선장으로서 북서항로를 개척할 정도로 노련한 뱃사람이며 탐험대 구성원 중 4명이 항해사 자격을 갖출 정도로 천문항법에 숙달된 덕분에 여럿이 힘을 합쳐 계산 속도도 빠르고 오차 범위도 굉장히 줄일 수 있었다.

그러나 반대로 스콧 탐험대에서 천문항법을 갖춘 길잡이는 해군장교인 스콧밖에 없는 탓에, 다른 일행은 그만 바라보며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스콧이 사용한 경위의는 천체나 지구 표면의 물체의 고도와 방위각을 재는 장치로, 작은 망원경에 천체의 고도와 방위각을 재는 데 필요한 자눈이 새겨진 바퀴가 붙어 있다. 경위의는 육분의에 비해 장점도 있는데 정확도는 육분의보다 높다. 계측 오차나 실수가 없다고 가정했을 때 육분의는 오차범위가 ±1.5~5㎞ 정도로 잡히는 반면, 경위의는 ±1~2㎞ 정도다. 하지만 경위의는 바닥에 설치해야 하므로 크고 무거웠으며 계산을 더 많이 해야 했다. 스콧이 숙련된 탐험가이기는 했지만 아무리 재주가 좋아도 5명이 힘을 합치는 것보다는 계산이 느릴 수밖에 없었고 실수도 가끔 저질러서 탐험이 지연되곤 하였다. 게다가 스콧은 천문항법을 가르치라는 앱슬리 체리개러드의 조언을 무시했고 탐험대원 중에서도 윌슨이 위도를 읽는 방법을 배우려고 했으나 결국 제대로 숙달하지 못한 듯 하다.

결론은 그냥 육분의와 경위의를 모두 가져가면 된다. 이렇게 하면 평소에는 육분의를 사용하고, 정밀한 측정이 필요할 때에는 경위의를 꺼내서 확인하면 된다. 양쪽의 장점을 모두 취할 수 있는 것이다. 위에서는 아문센이 육분의만 쓴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사실 아문센도 경위의와 육분의를 모두 챙겼다. 경위의가 고장나서 남극점에서 써먹지 못했을 뿐이다. 그래서 섀클턴은 아문센의 남극점 도달 이후 남극 횡단 도전때 그냥 육분의와 경위의를 모두 챙겼고, 이는 드레이크 해협을 뚫고 사우스조지아 섬으로 향하는 구조요청길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해낸다.

아문센 탐험대는 남극으로 향하면서 8㎞마다 깃발을 꽂아두었다. 영문 위키피디아에서는 아문센이 3마일(4.8km)마다 눈덩어리로 탑을 쌓아서 길을 표시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13km마다 깃발을 꽂았다는 주장도 있다. 양쪽 모두 사실일 경우, 아문센은 눈덩어리로 작은 탑을 쌓은 후 깃대를 깊게 꽂아서 고정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하면 남극의 거센 바람이 불어와도 깃발이 쉽게 날아가지 않으며, 깃발이 찢어져서 없어지더라도 깃대와 눈덩어리 탑은 그대로 남는다. 어차피 남극에는 눈덩어리가 얼마든지 있으므로 탑을 쌓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스콧처럼 극심한 눈보라를 겪더라도 보급기지를 놓칠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낮았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설령 이정표를 못 보더라도 아문센에게는 개가 많이 있었고, 개의 후각은 매우 민감하기에 저장고에 있는 페미컨이나 바다표범 고기 냄새를 찾아서 달려가면 됐다. 저장고가 너무 멀리 있어서 개의 후각이 무용지물이 되더라도 천문항법을 아는 사람이 네 명이나 있다.

이렇게 이정표를 세우는 것에는 또 하나의 이점이 있다. 아문센의 개들이 아무리 튼튼해도 오래 달리면 지치는데, 일정 간격마다 깃발을 꽂고 이것을 단단하게 고정하려면 개썰매를 멈춰야 한다. 지친 개들에게 휴식을 줄 수 있다는 뜻이다. 아문센 탐험대의 탐험이 99일이나 걸렸음을 감안하면, 개들이 무리하게 하지 않는 것도 중요했다.

그에 비해서 스콧 탐험대는 이러한 준비를 하지 않았고, 이정표는커녕 어니스트 섀클턴이 갔던 길만 그대로 따라가기를 고집했으며, 시야마저 가리는 강한 눈보라가 수시로 휘날리는 통에 근처에 있던 저장고도 찾지 못하고 헤매다가 지나쳐버리는 등의 실수를 거듭했다. 결국 길을 잃고 우왕좌왕하다가 스콧 탐험대 자신들이 설치한 식량 저장소를 겨우 800m 남겨둔 매우 가까운 곳에서 전원이 얼어 죽었다.

스콧 일행의 원래 계획은 귀환 도중 82.30도에 위치한 보급소에서 예비대가 끌고 오는 개들과 합류할 예정이었지만 보급을 온 일행 중에 항해술을 익힌 자가 없었다. 사실 항해술을 익힌 기상학자가 있었으나 그는 예비대에 합류하지 못했으며 결국 예비대는 약속 지점까지 이동을 하지 않았다. 스콧의 일지에 보면 해당 지점에서 개들을 마주하기를 목을 빼고 기대했으나 아무도 나타나지 않자 실망을 하는 대목이 있다. 그리고 본인이 위치를 잘못 계산해 엉뚱한 위치에서 기다린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을 한다. 예비대의 행적과 기상학자의 합류실패에 대한 내용은 아래에 있는 탐험과정 문단에 있다.

아문센 탐험대는 구성원 중에 의사가 없었다는 약점이 있었지만 이조차도 대장인 아문센이 젊은 시절 어머니의 강요로 인해 의과대학에 다닌 경험이 있어서 간단한 의료조치 정도는 가능했고, 그나마도 결과적으로는 부상자가 없었기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렇듯 아문센은 탐험에 필요한 모든 기술을 자기 자신이 스스로 갖추려고 노력했다. 항해사의 기술을 갖췄고, 자의는 아니지만 의학을 배워 의사처럼 대원을 돌볼 수 있었으며, 독학으로 지자기 측정, 기상학 등을 배워 과학자 역할도 부분적으로 할 수 있었다. 탐험에 필요한 모든 기술을 스스로 배우고자 했던 아문센은 나중에는 항공기 조종법까지 익혔다.

4.6. 시행착오

아문센은 일단 처음에 스콧에게 남극점 점령을 빼앗길까봐 조바심을 내서 무턱대고 달려들었다가 대원들 전원이 동상에 걸리는 등의 고생을 했다. 그래서 아문센은 복귀한 후 한 달 동안 푹 쉬면서 뭐가 잘못되었는지 연구를 했고, 대원들끼리 연구한 내용을 검토하기를 반복하거나 필요한 기술을 습득하는 등 문제점을 최대한으로 수정하거나 보완했다.

또한, 아문센은 생존 투쟁을 중요시한 탐험가답게 거친 성격에 고집이 매우 강해서 이 과정에서 당시 대원들 중 요한센과 자주 다투었다. 아무래도 아문센 사건 이후의 행보 때문인지 위인전은 난센만 있고 극화에서는 대부분 2인자로만 묘사하지만, 사실 요한센은 아문센보다 선배였고 난센과 함께 유명한 북극 탐험에 나섰던 베테랑 탐험가인 만큼 일개 대원이라고만 볼 수는 없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한 조직에 머리가 둘이니 당연히 지휘권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아문센이 '내가 대장이다'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하여, 남극점 탐험에서 요한센을 배제시키고 주변 섬 탐험으로 돌려버리자 요한센은 화를 참지 못하고 노르웨이로 돌아가고 말았다. 아문센은 남극점 도달에 성공하고 귀국한 이후에도 앙금이 남았는지 언론과의 인터뷰 등에서 요한센을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즉, 요한센은 일행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고 아문센이 리더십을 발휘하는데 방해하는 짓을 저지른 적이 있어서 잘렸다는 말이 된다. 아문센은 남극점 레이스 이전 북서항로 개척 이후 때의 회고록에서 자신이 선장 면허까지 딴 이유가 탐험대에서 선장과 탐험대장이라는 두 리더가 있으면 각자 의견 충돌로 팀이 무너질 가능성이 너무 높기 때문이라고 하기도 했으니, 요한센이 지휘권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그냥 놔둘 수는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요한센이 정말로 우수하고 도움이 되었다면 아무리 아문센이 그를 배제하려고 해도 그리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즉, 요한센이 팀에서 문제가 많았으며 주위 탐험대원들도 그를 좋게 보지 않아 아문센이 요한센을 배제하는데 암묵적으로 동의했을 거라는 말.

결국 요한센은 이후 노르웨이에서 푸대접을 받다가 우울증에 빠져서 자살하고 말았다. 하지만 아문센만 탓할 수도 없다. 왜냐면 요한센은 난센과의 북극 탐험 이후, 이런저런 개인적인 일이 실패한 뒤 알코올 의존증에 시달렸고 성격적인 문제가 심해졌다. 남극탐험도 기술고문의 자격이자, 높으신 분의 강요 때문에 데리고 온 것이었고, 합류해서도 리더인 아문센의 말을 듣지 않고 협조를 거부하였다. 이런 사람을 리더로 삼아서 탐험에 나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거기다 이번 탐험은 원래부터 아문센이 기획한 것이었으니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는 격이었다.

물론, 이것만 가지고 아문센이 빌런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이 불화 사건은 나중에 1등 자리를 빼앗기고 열폭하던 영국이 아문센을 깎아내리는 수단으로 쓰기도 했다.[34] 그러나 스콧도 이런 갈등 면에선 다를 게 없었다. 본인의 무능함에 의한 질투나 열폭으로 다른 이들을 폄하하던 걸 보면 훨씬 더하다. 거기에 더해 대원들을 선정할 때 그들이 가진 능력이나 필요성조차 구분하지 못했다. 스콧도 이런저런 불화로 많은 인원들을 잘랐다. 특히나 섀클턴을 자르고 척을 진 것은 매우 유명한 이야기. 만약 섀클턴과 함께 했거나 그의 조언을 듣거나 둘 중 하나만 했어도, 남극점 정복은 알 수 없다 한들 스콧 일행의 전원 사망이라는 운명은 바뀌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아문센은 탐험에서 필요없는 대원 하나를 뺀 것 만으로 생존의 원동력이 되었다. 일단 귀중한 물자를 필요없는 대원이 축내는 것을 막았고, 무엇보다 극지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덕목인 단합이 깨지지 않았다. 알다시피, 서바이벌에서 단합은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중요한 조건이다. 단합이 깨지는 순간, 그 집단은 생존 가능성이 극도로 희박해지기 때문이다. 정작 스콧은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스노모빌을 수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유일한 기술자를 내쫓았고, 스키 전문가 그란이나 개썰매 전문가 드미트리 기레프 & 셰실 미어스 듀오를 멀리하여 최종 탐험대에 동참시키지 않는 등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해 꼭 필요한 인재를 스스로 거르는 자충수를 저질렀다. 반면 섀클턴은 제국 남극 횡단 탐험대 당시 밀항자인 퍼스 블랙보로를 내치지 않은 것은 물론[35], 거기다 대원들과 마찰을 빚던 존 빈센트를 자신과 동행시켜서 엘리펀트 섬에 남은 대원들과 떼어놓고, 자신의 오른팔 프랭크 와일드를 남겨 자신이 부재하는 동안 섬에서 기다릴 대원들을 지도할 수 있게끔 하는 등 훌륭한 용인술을 보였다. 덕분에 비록 원래 계획은 처참하게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탐험대 전원을 살려서 돌아가는 기적을 일으켜 불후의 명성을 남겼다.

반면에 스콧은 섀클턴이 귀환했다는 소식을 듣자 "다음에는 (섀클턴이) 성공할 것이다."라고 발언했지만, 정작 자신은 섀클턴이 '이미 실패했던' 그 루트를 따라서 탐험을 한 것은 물론 섀클턴이 '이미 실패한' 장비들을 그대로 똑같이 가지고 갔다. 조랑말과 스노모빌도 이미 섀클턴이 가지고 갔다가 실패한 기록이 있다! 심지어 조랑말을 데려가려던 스콧을 아문센이 말렸듯 섀클턴 역시도 난센이 말린 바 있다. 당연히 섀클턴도 스콧이 그랬듯 대부분의 말이 얼어죽었고 그나마 남은 말마저 비어드모어 빙하에서 죽었으며 스노모빌 역시도 작동이 멈춰서 일행이 끌고가야 했다. 이후 섀클턴이 개썰매가 확실히 조랑말보다 나았을 것이라고 회고했던 만큼 조랑말을 데려가는 것은 효용성이 없었다. 다른건 몰라도 말과 스노모빌의 실패는 남극에 이런걸 가져갔다간 실패한다는걸 명백히 보여주는데도 스콧은 실패했다는 걸 뻔히 알고 있는 수단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무엇보다 도중에 귀환했다는 것 자체가 문제점이나 위험을 인식했다는 뜻인데도, 스콧은 그저 근성이 부족하고 좀 덜 과감해서 한계에 부딪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섀클턴이 덜 과감했다는 말 자체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전원의 생존이었다. 목표 달성과 생존의 갈림길에서 생존을 선택한 대가로 섀클턴 일행은 남극점 도달에 실패했으나 인간 대원 전원이 무사 귀환했고, 열악한 상황에도 조금 더 과감한 결단을 내린 스콧 일행은 전원 사망이라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다. 아래 "목숨을 건 오기" 문단에서도 보듯 목숨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것 역시 탐험가의 필수 덕목이다. 상술했듯이 아문센 역시 초반에 그렇게 '과감하게' 나갔다가 실패를 겪었으나, 스콧과 달리 대원들의 목숨은 지키는 선에서 후퇴했다.

요약하자면 아문센은 비록 동료와 심각한 다툼을 벌이고 추방하기도 했지만, 과감한 판단으로 극지 탐험에 있어서 해가 되는 존재는 가차없이 제거하는 등 하나라도 극지 생존에 유리한 요인을 더 추가했다. 반면에 스콧은 섀클턴이 패배한 이유를 분석하지도 않았고, 하다 못해 현재의 상황을 받아들일 준비도 되어있지 않는 등, 결국 마지막까지 아문센과의 대결에서 패배를 인정하지 못했고 그 결과는 죽음이었다.

4.7. 악천후에 대한 대처법과 관점의 차이

인간이 어찌할 수 없었던 악천후도 두 탐사대의 운명에 큰 영향을 주었다. 노르웨이 탐사대는 그다지 혹독한 눈보라를 만나지 않았고, 행여나 눈보라를 만났다고 해도 꼼꼼하게 준비해둔 연료로 큰 문제는 겪지 않았다. 하지만 스콧의 탐험일지에 따르면 영국 탐험대는 며칠이고 계속 불어대는 지독한 눈보라인 블리자드에 수시로 노출되었고, 안 그래도 방한복 성능이 떨어지고 몸을 녹여줄 연료도 조금밖에 없었던 그들에게 이는 재앙이었다. 스콧의 일기를 보면 영하 40~50도의 추위 및 눈보라에 시달렸다고 적혀 있다. 준비도 덜 된것도 모자라 운까지 따라주지 않았던 것이다.

2002년에 미국 기상학자 수잔 솔로먼이 당시 아문센과 섀클턴, 스콧 탐험대가 기록한 기상 조건과 기후를 조사해 발표한 연구 자료에 따르면, 아문센 탐험대가 가장 운 좋게 강추위를 피한 반면, 스콧 탐험대는 가장 운 나쁘게 내내 추위와 눈보라에 시달렸음을 확인했다고 한다. 이쯤하면 하늘조차 스콧 탐험대의 편이 아니었던 건가 싶을 정도다. 스콧 탐험대가 참고한 날씨예측표는 무려 한 세기나 지난 21세기 기준으로도 정확한 물건이고 그에 따라 행동계획을 세워 행동한 건데, 하필이면 15년만의 한파를 만났으니 운이 나빠도 너무 나빴다. 평년 기온 정도를 유지했다면 1등은 못했어도 살아 돌아올 수는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악천후가 불가항력이라도 그것만으로 스콧의 탐험 실패에 대한 면죄부가 되기는 힘들다. 앞에서 언급했듯 어디를 가더라도 악천후는 필히 나타나는 것이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남극이니 어떤 악천후가 시시각각 들어닥칠지 아무도 모른다. 중점은 그 악천후 및 기상악화와 같은 환경변화를 어떻게 대처하는지, 아니면 그 변수를 어떻게 최소화하는지에 있다. 아문센이 아주 운 좋게 악천후를 피할 수 있었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아문센이 악천후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은 것은 전혀 아니었고 오히려 매우 철저했다. 아문센은 등유가 새어나올 것을 걱정하여 단단하게 밀봉한 등유통에 가죽을 덧씌워가며 철저하게 대비했다. 그야말로, 이 항목에 나온 두 탐험대 준비성을 봐도 압도적으로 아문센이 시행착오를 몸소 겪어가며 극과 극으로 철저하게 준비했다.

게다가, 근본적으로 이런 탐험에서 악천후를 피해갈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문센처럼 기후가 좋을 때 가능한 한 빠르게 이동하여 탐험 시간 자체를 줄이는 것 또한 철저한 대비나 마찬가지다. 따지고 보면 나쁜 날씨는 언제든지 있을 수밖에 없으므로 악천후를 원망하기보다는 날씨가 좋을 때 빨리빨리 행동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아문센도 조급하게 9월에 출발했다가 혹독한 추위에 시달렸고 심지어 동상까지 입었는데, 그렇다고 탐험을 강행하지 않았고 몰살당하기는커녕 탐험대 전원이 살아왔다. 스콧의 경우도 잊으면 안 되는 것이 본래 직업이 해군 장교였다. 해군은 주 활동 영역이 바다인 특성상 육군[36]에 비해 악천후에 훨씬 민감하고 그만큼 철저하게 대비해야 하며, 심할 경우 계획 수정도 필요하다. 감당할 수 없는 악천후를 만나고도 계획을 바꾸지 않고 억지로 강행했다는 점에서 해군 장교로서의 자질도 의심되는 수준이다.

여기에 더해 스콧 본인이 일지에 적은 불운담은 어느 정도 걸러 들을 필요가 있다. 일단 스콧 일행은 상술했듯이 식량 부족에 시달렸기에 근본적으로 정신적, 육체적으로 극도로 약해진 상태였으며, 이런 상황에서는 건강한 상태에서는 충분히 버틸 수 있는 악천후 역시 몇 배 더 강하게 느낄 수 있다. 애초에 이 불운을 실제 불운이라기 보다는 식량 부족으로 인한 체력 악화로 그렇게 느꼈던 결과라고 해석하는 주장도 있다. 또한 스콧 자신이 상당히 감정적이라서, 성향 자체가 탐험 중의 여러 문제를 '불운'으로 돌리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당시 스콧은 탐험 도중에 겪어야 했던 심각한 문제로 인해 모든 것을 절망적으로 느꼈을 것이고, 날씨 문제 역시 정확한 측정 결과라기보다는 스콧이 '주관적으로 느낀 어려움'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반대로 아문센은 상대적으로 건강하고 활력 있는 상태로 탐험을 했기 때문에 이러한 어려움을 적게 느꼈을 것이다.

요약하자면 악천후에 대한 관점과 대처능력에서도 아문센의 비교 불가 완승이었다. 애당초 아문센은 처음부터 최대한 악천후를 피하는 쪽으로 탐험을 택했으니 이러한 위험성이 적었고, 그걸 감안하고 더 철저하게 물량을 배치했기에 생존 가능성이 더 높았던 것이다. 반면 스콧 일행은 안 그래도 지독한 악천후에 본인들의 가장 결정적인 패착인 물자 부족을 비롯하여 본인들이 저지른 각종 실수들과 이런저런 부정적인 요인들이 겹치면서 끝내 생존하지 못했다.

4.8. 설맹 대비책

눈(雪)에 반사되는 자외선은 여름의 해수욕장보다 4배나 더 강하다. 모래사막의 알베도(빛 반사율)가 30%가 안되는 것과는 달리, 갓 내린 눈은 최대 85%까지 육박하며, 눈이 쌓인지 오래되어 알베도가 떨어진 경우에도 40%를 넘는다. 현대에도 이 원리로 생기는 스키장 자외선을 피부미용의 적으로 여겨서 경계하는데, 이 자외선은 너무 강렬하기 때문에 계속 받다보면 시력이 손상된다. 이것이 현대에도 극지 탐험대나 스키어를 괴롭히는 설맹 증세고 스키장에서 고글을 쓰는 이유다. 강한 자외선을 계속 안구에 조사하면 자외선의 높은 에너지가 안구의 단백질을 변형시키고 칼슘염을 침착시켜서 백내장으로 진행된다. 그래서, 아득한 옛날부터 이런 걸 겪어본 이누이트는 가는 구멍을 낸 나무판이나 뼈로 편광 선글라스의 원조격 되는 도구를 만들어서 쓰고 눈길을 오고 갔다.
파일:이누이트식 선글라스.jpg
이누이트가 쓰던 선글라스
아문센은 이누이트의 생존 방식을 배우며 이 도구도 적극적으로 도입해 아문센과 대원들이 단체로 착용한 채 찍은 사진이 남아있다. 1911년 8월 28일에 찍은 아문센과 동료들이 쓴 이 선글라스 착용사진. 참고로 당시 동료이던 할머 한센이 쓰던 이 선글라스는 지금도 남아 노르웨이 스키 박물관에 전시중이다. 또한, 가고 있는 앞쪽에 태양이 떠 있을 때는 쉬고, 태양이 등 뒤에 있을 때가 (한겨울이나 한여름이 아닐 때에는 밤이) 되었을 때만 움직이는 수칙을 정해 지켰다. 이것은 눈밭이 햇빛을 반사하여 지나치게 많은 빛이 눈을 괴롭히고 시력을 떨어뜨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스콧은 이 문제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스콧 탐험대는 자외선에 무방비하게 계속 눈을 혹사시켰고, 그로 인해 스콧 본인을 비롯해 탐험대 모두가 설맹 때문에 고전했다고 탐험일지에 기록했다.[37] 마찬가지로 이런 설맹 대응책 없이 동원된 구조대의 일원이었던 앱슬리 체리개러드(Apsley Cherry-Garrard)도 비슷한 증세가 있었음을 증언했다. 설령 탐험대원들이 살아 돌아왔어도 평생을 시각 장애에 시달리거나 실명했을 가능성이 크다.

4.9. 자금력

자금력은 심지어 스콧 탐험대가 더 유리했다. 당시 노르웨이는 독립국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문센은 그다지 많은 자금을 지원받지 못한 반면, 그 당시 강대국이자 최고 선진국 중 하나였던 영국 정부와 많은 기업들이 스콧에게 자금을 지원해줬다. 그러나 지금까지 서술했듯이 방한복, 통조림, 스노모빌, 저장고 등 영국 원정대의 의식주가 모조리 불량했던 것을 감안하면, 압도적인 자금력으로 '그들 기준에서' 최첨단 장비들을 구입했으니 아무 문제 없을 거라며 방심한 것에 가깝다. 장비의 성능을 시험해 본다고 해도 영국 최북단에서나 적당히 해보고 말았고 결국 스콧 본인은 목숨을 잃고 후원자들의 거금까지 날아가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4.10. 목숨을 건 오기

여기까지 글을 다 읽은 사람이면 스콧이 그 악상황과 오판에도 불구하고 어찌어찌 남극점까지 도착이라도 했다는 사실이 굉장히 흥미로울 것이다. 하지만 어떤 탐험이라도 탐험의 성공과 실패보다 '목숨'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것은 모든 탐험사에 있어서 상식이다. 실패했지만 탐험대는 전원 생존한 어니스트 섀클턴의 사례도 있고, 프리드쇼프 난센도 그랬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망망대해에서 반란이라도 발생하면 모든 게 끝이었기에 날마다 거짓말로 선원들을 안심시켜 가며 아메리카에 도착한 사례도 있고 똥고집을 부린 건 스콧과 같지만 적어도 콜럼버스는 물자가 부족해서 굶어죽지는 않았다. 바다 위인 만큼 물자가 떨어지면 물자를 구할 수단도 있다.

식량 부족이나 체력 한계, 위기를 고려하지 않고 '목숨을 버리기로 결심했다면 목표에 도달할 수 있었던' 탐험가는 사실 무수히 많았지만 결코 목숨보다 중요하진 않기 때문에 포기하였다. 무엇보다도 일단 살아남아야 이번의 실패를 분석하고 재도전하여 다음에 성공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이는 오늘날 등산을 할 때조차도 유념해야 하는 상식이다.[38] 다시 말해, 스콧이 여러 오판에도 불구하고 남극점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한계에 도달한 상태에서 남극점에 가기로 한 결정이야말로 스콧 탐험대의 가장 큰 오판이었다. 살아만 있으면 탐험은 언제든지 다시 재도전을 할 수 있고, 목숨을 던져가면서까지 지금 당장 이루어내야만 하는 일이 아니다.[39] 탐험이란 인간의 생존을 통해 끈기를 증명하는 데에 주 목적이 있기 때문에, 결국 생존하지 못하고 죽으면 오히려 의미가 퇴색된다.

심지어 산악은 일반 평지와는 달리, 지형의 고저차 및 식생으로 인한 태양광 차단까지 더해져 심각할 정도로 기온이 낮고, 기온차 및 기후 변화가 심해서 조금이라도 추위에 노출되면 바로 저체온증으로 이어진다. 더군다나 산악 등반으로 인해 몸에 땀으로 가득 차 있는 상황이라면, 저체온증을 더욱 악화시킬 뿐만 아니라 저체온증의 위험성을 더욱 크게 높인다. 저체온증이 심각해지면 심장마비로 이어지며, 심한 경우 사망에 이르기까지 불과 2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 스콧 탐험대의 상태는 상식적인 상황이었으면 불과 하루 이틀 사이에 사망에 이르렀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스콧은 이러한 점을 전혀 고려하지 못했다. 일반인들이 가볍게 운동을 하거나 등산을 할 때도 '무리하지 않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으로 여기고, 운동선수만큼 쥐어짜듯 운동을 하는 경우에는 충분히 몸을 회복할 수 있는 조건과 환경이 갖춰져 있다는 전제가 있다. 생명이야말로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콧은 탐험 과정에서 이 원칙을 망각했거나 무시했기 때문에 어설픈 준비에도 불구하고 남극점에 도달했고, 그 대가는 탐험대 전원의 사망이라는 최악의 방법으로 치러야 했다.

따지고 보면 스콧 탐험대가 겪은 어려움을 먼저 겪은 게 바로 섀클턴의 탐험대다. 조랑말과 스노모빌을 썼다가 낭패를 본 것도 그렇고, 인간의 힘으로 썰매를 끌며 비어드모어 빙하를 넘어야 했던 것도 그렇다. 심지어 스콧 탐험대의 코스까지도 섀클턴이 먼저 간 길을 따라간 것이었다. 이 정도면 섀클턴 탐험대에도 희생자가 다수 나와야 마땅했다. 하지만 섀클턴은 대원을 단 한 명도 잃지 않았다. 남극점까지 156㎞를 남겨둔 시점, 돌아갈 길을 포기한다면 인류 최초의 남극점 정복자가 될 수 있는 상황에서 '식량 부족 때문에 더 이상 전진하면 살아서 집에 못 돌아간다'고 순순히 인정하고는 발걸음을 돌렸던 것이다. 이후 섀클턴은 이 부분을 회상하며 아내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죽은 사자보다는 산 당나귀가 낫다.

섀클턴 역시 아문센과 마찬가지로 물러설 때를 알았던 것이고, 그 결정이 섀클턴과 대원들을 살렸다. 사자처럼 용감하게 나가다가 죽느니, 당나귀처럼 바보 취급을 받을지언정 살아서 돌아가는 게 낫다는 판단을 내린 것. 돌아가던 중에도 추위와 굶주림으로 고생하기는 했지만, 전원이 살아서 귀환한 것이다. 극도로 위험한 극지 탐험, 그것도 아직 아무도 탐험한 적이 없는 남극 탐험을 시도했다가 전원이 무사히 돌아온다는 것은 탐험의 성공 여부 이전에 그 자체로 굉장한 업적이었기에 섀클턴은 남극점 정복에 실패했음에도 칭송받았다. 아문센의 남극점 도달 이전에는 남극점을 정복한다는 생각조차 못할 정도로 남극이 극한지역이었음을 기억하자. 그런 극지에서는 '생존' 그 자체만으로도 명성을 얻을 만하다고 볼 수 있다. 어차피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면 도착하지도 못했을 것이니, 특정 지역에 도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환경에 적응하는 법'을 터득했다는 말이다. 이런 판이니 사실 몇명 쯤 죽어도 안 이상한게 가본 적 없는 극지 탐험이고, 살아돌아온다는 보장도 사실 없었다. 하지만 그런 난관에도 불구하고 사망자 한 명 없이 전원 귀환한 데다, 남극점까지 도달하지 못했을 뿐이지 당시로는 가장 남극점에 접근한 탐험대였으며 여러가지 과학적 성과를 올렸으니 실패를 했다 한들 칭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영광은 스콧의 열폭에 한몫해서 결국 스콧이 남극점으로 떠나게 되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어쩌면 스콧이 섀클턴과 동일한 루트와 유사한 장비로 남극점에 도전한 이유중 하나는 이 열폭 역시도 이유일 것이다. 스콧은 섀클턴과 디스커버리 호를 타고 남극 탐험을 했을때 그를 변변찮은 인물로 펑가했었다. 그런데 그 변변찮은 섀클턴이 엄청난 성과를 거두고 돌아왔으니 스콧의 생각이 어떨지는 너무나 뻔한 거였고 당연히 (자기 생각이지만) 더 뛰어난 자신은 똑같은 조건이라면 더 크고 위대한 업적을 이룰 수 있을 것 이라고 스스로 믿었을 것이다. 물론 누가 변변찮은 인물인지는 각자 판단해 보자.

아문센이 남극점을 정복한 이후 섀클턴은 제국 남극 횡단 탐험대를 이끌었는데, 이때 그는 과거의 실패를 교훈삼아서 개썰매, 페미컨, 육분의 등 아문센이 유용하게 쓴 장비들을 도입했다. 불운하게도 웨들해 한가운데서 얼어붙은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대원 27명과 함께 조난당하지만, 스콧과 반대로 이번에도 탐험대원 전원을 생환시킴으로써 불멸의 명성을 얻었다. 심지어 이 탐험대원 중에는 원래 계획에서는 고려하지도 않은 밀항자 한 명까지 있었는데, 섀클턴은 이 사람까지 포함해서 전원을 살려서 돌아왔다. 비록 밀항자는 동상에 한쪽 발가락을 모두 포기해야 했지만, 마지막까지 섀클턴과 동행하며 활약했다.

어떻게 보면 스콧은 공연한 열폭으로 자신과 부하 일동의 목숨을 팔아 자신의 남극점 도착 명성을 샀다고 볼 수 있다. 그에 비해 스콧보다 먼저 남극점 정복에 시도했다가 실패한 섀클턴은 '이대로 가다간 우린 다 죽는다'고 판단하자, 깔끔하게 돌아가면서 단 한 명의 대원도 잃지 않은 것으로 명성을 얻었고 그 뒤에도 다른 업적으로 실패를 극복하고 명성을 계속 쌓아나갔다. 설령 남극점 정복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더라도, 스콧은 이후에 다른 명성을 쌓을 기회를 포기한 것과 같다. 애초에 스콧 자체가 제대로 된 탐험대장으로는 실격인 인물인지라 이거 아니면 딱히 명성을 쌓을 길이 있었을지도 의문이다. 섀클턴에 대한 태도를 보면 본인도 이 부분을 인지하고 있었다.

더 극단적으로 설명하자면, 아무리 아문센에게 패배했더라도, 스콧이 '인류 최초'라는 타이틀에 집착하지 않고, 도박수나 무리 없이 나아갔더라면 그 역시 남극 탐험가 역사상 두 번째로, 영국인으로선 최초로 남극점을 정복한 전무후무한 탐험가로 명성을 올리는 업적을 쌓았을 것이다. 더욱이 스콧이 아문센보다 과학 탐사에 더 적합한 멤버를 이끌고 갔다는 것을 고려하면,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아문센과는 달리 최초로 남극에 대한 자세한 과학적 조사를 행한 사람으로는 대접할 수 있을테니 결국에는 단순히 남극점에 도달만 한 아문센과 대등하거나 심지어 아문센을 뛰어넘는 명성을 얻었을 수도 있다. 탐사 면에서는 몰라도 과학적인 조사 면에서만은 아문센보다는 확실히 우위였으니 말이다. 스콧이 향후 아문센은 물론이고 섀클턴보다도 낮은 평가를 받은 이유는 결국 생존이라는 가장 중요한 전제를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탐험을 강행한 판단 착오로 인해 그나마 이룩한 것마저 저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결국 초창기에는 찬사를 받았던 스콧이 낭만주의보다는 합리주의가 자리잡은 21세기에 들어서는 결국 무책임한 리더의 대명사라는 불명예까지 뒤집어쓰고 만 것이다. 탐험대의 대장은 대원들의 목숨에 책임이 있는 리더다.

1956년 영국 지질학자인 레이먼드 프리슬리(1886~1974)는 늘그막에 세 사람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아문센, 섀클턴, 로버트 스콧 세 사람을 모두 만나보고 같이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 세 사람은 각자 특징이 있더군요. 우선 스콧은 과학탐사대를 이끌 대장으로서 누구도 따라가지 못할 겁니다. 다음으로 아문센은 빠른 움직임과 꼼꼼한 준비로 전문적인 속전속결 탐험대장으로 누구도 따라가지 못하죠. 하지만 절망적인 상황에서 살아날 길이 보이지 않는다면 무릎을 꿇고 섀클턴을 보내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

4.11. 부질없는 자존심

스콧 탐험대가 남극점에 도착한 뒤, 아문센 탐험대가 일부러 남기고 간 식량과 순록 가죽으로 만든 의복을 발견했다. 아문센이 이런 것들을 남겨둔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이 있는데, 아문센이 호의로 그렇게 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이유는 위의 '여분의 물자' 문단에서도 나와있다.

그러나 아문센이 스콧을 배려한 게 아니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아문센은 남극점에 도달하는 순간까지 영국의 스노모빌을 비롯한 충분한 보급과 '영국인' 스콧의 집념에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었고, 애초에 필요가 없는 것을 버려둔 것이라서 가져가는 의미가 없었을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 특히나 귀로 시를 생각해 식량은 남겨두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필요없는 것을 버려뒀을 것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낡고 해져서 버리는 것이라면 굳이 남극점까지 들고 가서 버릴 필요 없이 그냥 그때그때 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령 쓸모없어져서 버린 물건이라 해도 애초에 남극점까지 가지고 온 물건들은 다 필요해서 가지고 온 물건임이 분명하다. 털가죽 방한복이 남극에서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한지는 스콧 탐험대가 걸친 개버딘 방한복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방한복은 남극의 추위를 견뎌내지 못해서 얼음이 되어버렸고, 스콧 탐험대는 이런 걸 걸친 채 덜덜 떨고 있었다.

복귀에 지장이 될 것 같아서 두고 갔을 가능성은 낮다. 연료와 식량이 남아도는 데다가, 개썰매까지 갖고 있는 아문센 탐험대라면 털가죽 방한복 좀 가져간다고 해도 심각한 문제가 생기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오히려 돌아가다가 방한복이 찢어지는 사고가 날 경우, 예비용 방한복이 없다면 곤란해진다. 가져갈 이유는 이것만으로도 족하다.

영국인 스콧의 집념을 경계했으니 스콧을 배려해서 물자를 놔둘 리가 없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낮은 게, 이미 아문센은 승리했다. 집념을 경계할 필요도 없다는 이야기다. 오히려 '여분의 물자' 문단에 나와있듯 아문센은 스콧 탐험대의 처참한 실상을 이미 꿰뚫어보고 있었으므로,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려고 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그리고 아문센이 호의를 베푼 게 아니라고 가정해도, 남극점 폴하임 텐트에 남겨둔 물자들은 귀환 실패의 기로에 있는 스콧 탐험대로서는 매우 유용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실제로 아문센 일행이 남긴 물자 중에서 가죽 장갑 한 쌍은 남극점에 오는 도중 장갑을 잃어버린 바워스가 가져갔다. 그런데 스콧은 본인의 일지에 옷의 방한 효과가 사라져버려 아문센처럼 가죽옷이 있었어야 했다고 한탄하기까지 하면서도 아문센이 놓고 간 짐들 중 가죽옷을 가져가지 않았으니 이는 부질없는 자존심 때문이라고밖에 해석할 길이 없다. 극지탐험대 대장이란 사람이 자기 자존심을 지키려고 4명의 대원들을 혹한 속에 팽개친 거다.

이후 스콧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문센은 "난 스콧을 그 끔찍한 죽음으로부터 구할 수만 있었다면 모든 영광과 돈을 포기했을거다."라며 안타까워했다. 심지어 아문센은 나중에 이탈리아의 노빌레가 북극 탐험 도중 조난당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급히 구조에 나섰다가 비행기 추락으로 목숨을 잃었다. 노빌레가 아문센에게 사사건건 시비를 걸던 원수지간이었는데도 이랬다. 남극점으로 출발하기 전에 아문센 탐험대와 스콧 탐험대가 남극 해안에서 만났을 때도 "조랑말은 안된다. 내가 개를 많이 끌고 왔으니, 원한다면 절반을 주겠다."라고 충고한 게 아문센이다. 이런 사람이 호의 외에 다른 이유로 남극점에 물자를 남겨두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4.12. 남극점 검증

12월 14일에 남극점에 도착한 아문센은 폴하임 캠프를 세우고 3일간의 검증 작업에 돌입했다. 로버트 피어리가 북극점을 정복했다고 선언한 후 엄청난 논쟁에 휘말린 꼴을 자신도 겪기는 싫었기 때문이다. 그런 불상사를 피하려면 아무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할 정도로 철저하게 자료를 수집해야 했다.

우선 아문센은 3명의 대원을 남극점에서 16km 떨어진 지점까지 보냈다. 한 명은 아문센 탐험대가 남극으로 온 루트를 그대로 따라갔고, 또 한 명은 좌측으로 90도 방향으로, 나머지 한 명은 우측으로 90도 방향으로 전진했다. 이들은 목표에 도달한 후 검은 깃발을 세우고, 아문센 탐험대가 도착한 남극점의 위치를 적은 쪽지까지 첨부했다. 뒤늦게 남극점에 오던 스콧 탐험대가 이 깃발들 중 하나를 발견했고, 그들은 "최악의 사태다. 노르웨이인이 우리보다 먼저 남극점에 갔다"며 경악했다.

아문센은 남은 한 명의 대원과 함께 자신이 있는 '남극점'의 위치를 천문항법으로 측정했다. 경위의가 고장났으므로 육분의를 사용했으며, 측정 결과 자신은 진짜 남극점에서 8.9km 떨어져 있음을 알았다. 곧바로 아문센은 대원과 함께 그곳으로 갔고, 거기서 또 천문항법으로 위치를 측정했다. 두 사람이 상대의 측정을 감시하고, 서로의 여행일지에 서명하고 관측기록을 남김으로서 문서상의 증거도 확보했다. 그러나 이번 관측에서도 진짜 남극점에서 2.4km 떨어져 있음이 확인되자, 아문센은 다시 그곳으로 갔다. 여기서 또 추가로 확인작업을 거쳤으며, 그러고도 모자랐는지 아문센은 의심가는 지점마다 모조리 깃발을 꽂아버렸고, 수많은 '남극점'들 사이에서 대원들이 스키를 타게 했다. 격자무늬까지 그리면서! 아무리 육분의의 정밀도에 한계가 있더라도 의심가는 곳에 다 가본다면 남극점에 안 갔다고 트집잡을 사람이 나오지 못할 거라는 계산이었다.

아문센이 이런 식으로 한 이유는 육분의의 오차 때문이다. 육분의는 오차범위가 ±1.5~5㎞ 정도로 잡히는 반면, 경위의는 ±1~2㎞ 정도다. 그런데 경위의가 고장났으므로 육분의만 써야 하는데, 이러면 오차범위가 최대 5km나 된다. 남극점에서 5km 떨어진 곳에서 축배를 들 수도 있다는 뜻이다. 남극점의 특성상 모든 경도가 한 점에 모이므로 경도 측정도 곤란하니 오차가 더 커질 수도 있다. 이러면 "남극점 근처까지만 간 주제에 남극점을 정복했다고 거짓말을 했다"며 욕을 먹을 수 있으므로 아문센은 육분의의 오차를 극복할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게 바로 남극점으로 의심되는 지점 주위에 네모난 구역을 설정하고, 격자무늬 형태로 대원들을 가로지르게 하는 것이었다. 네모난 구역은 육분의의 오차 범위 바깥으로 정함으로서, 남극점이 네모난 구역 안에 반드시 위치하게끔 만들었다. 이제 네모난 구역 안을 빠짐없이 밟으면, 남극점을 밟고 지나간 꼴이 된다. 그러나 모든 구역을 밟는 것은 비현실적이므로 대원들은 네모난 구역의 모서리에 선 후, 일정 간격을 유지하면서 질주했다. 질주가 끝나면 옆으로 이동한 후 반대편으로 질주했고, 네모난 구역 안은 줄무늬로 뒤덮였다. 이게 끝나면 다른 쪽의 모서리로 이동해서 똑같은 방법으로 질주를 반복했다. 작업이 끝나면 네모난 구역 안은 격자무늬로 뒤덮이며, 직접 남극점을 밟지 않더라도 남극점에서 매우 가까운 곳을 반드시 지나가게 된다.

심지어 아문센은 지자기 관측 결과까지도 챙겼고, 남극점에서 사진을 찍으려고 카메라도 가지고 갔다. 비록 카메라는 고장났지만, 비욜란이 아마추어용 카메라를 가져갔기에 사진은 건질 수 있었다. 그 당시 기술로 할 수 있는 모든 검증수단을 동원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스콧은 이렇게 철저하게 검증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천문항법을 아는 사람이 스콧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식이면 스콧은 남극점(?)에 도달한 후 경위의에 의존해서 자신의 위치를 측정하고 "여기가 남극점이다!"라고 선언한 후 기념사진을 찍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경위의가 육분의보다 정확하긴 하지만, 스콧도 사람이니까 실수할 수도 있고 경위의가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 아문센은 천문항법을 아는 대원을 본인 포함 4명이나 데려갔고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며 면밀한 측정을 거듭했기에 오류를 최대한 줄일 수 있었지만, 스콧은 그럴 수 없었다.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이것이야말로 어마어마한 실수다. 이런 식이면 스콧이 남극점(?)에 먼저 갔더라도 이후에 "스콧은 남극점에서 Xkm만큼 떨어져 있었다. 그는 남극점 정복자가 아니다!"라는 결과가 나왔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현대에 와서 아문센의 세심함은 더더욱 고평가를 받게 된다. 현대 연구자들은 극지 탐험가들에게 날카로운 잣대를 들이댔고, 로버트 피어리는 북극점에서 40km 정도 떨어진 곳까지만 갔다는 것이 밝혀졌다. 아문센처럼 지독하게 조사하지 못한 대가를 치른 것이다. 결국 피어리에게 남은 것은 이누이트들을 학대했다는 오명, 그리고 북극점 도달에 실패한 탐험가라는 낙인뿐이었다.

그러나 아문센의 남극점 정복에 대해서는 아무도 부정하지 않았다. 현대의 연구에 따르면 아문센의 마지막 캠프가 진짜 남극점에서 2.3km 이내에 있었으며, 아문센 탐험대가 스키를 타고 남극점 일대를 휩쓸고 다니던 도중 헬메르 한센이 진짜 남극점으로부터 180m 이내를 지나갔다고 한다. 180m는 맨눈으로도 쉽게 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인만큼, 이 정도면 아문센을 남극점 정복자라고 봐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남극점에서 격자무늬를 그려가며 수고한 대가를 받은 것이다.

4.13. 탐험과정

윗 문단들에 기재된 다양한 문제점들을 탐험일지에 조합해보면 아문센과 스콧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아문센은 처음부터 끝까지 계획대로 진행했으며 중간에 고비는 있었을지언정 모든 것을 그야말로 순조롭게 진행해 별다른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고 끝내 생존에 성공했다. 그러나 스콧은 감당하기 힘든 실수를 여러 차례 연발했고 끝내 그 실수가 쌓이고 쌓여 죽음이라는 비극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물론 고비란게 반드시 있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둘의 결정적 차이는 극지에서의 상황 판단 능력이었다. 아문센은 고비에 직면해도 냉정하고 현명한 판단으로 남극점 정복에 성공하고 전원 무사 귀환했지만, 스콧은 이런 고비에서 모두 최악의 선택만 내린 것도 모자라 그 선택에 대한 실수도 인정하지 않았고, 결국 대원들 전원 사망이라는 비극을 맞이했다.

스콧이 저지른 첫 번째 실수는 계획이 너무 복잡하다는 것이다. 아문센의 계획은 '5명이 남극점으로 간다. 중간에 저장고에 들러서 보급품을 꺼내간다'인데, 이건 초등학생도 알아볼 정도로 쉬운 계획이다. 실수할 만한 구석이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스콧의 계획은 '4명이 스노모빌에 보급품을 잔뜩 싣고 먼저 출발한다. 12명이 개썰매와 조랑말을 타고 나중에 출발한다. 먼저 출발한 4명은 지정된 곳까지 가서 보급품을 내려놓고 대기한다. 두 팀이 합류하면 보급품을 인수하고, 4명과 개썰매는 돌아간다. 12명은 비어드모어 빙하를 올라간 후, 여기서 4명을 뽑아 남극점으로 간다. 남극점 정복 후 4명은 귀환하며, 과학조사도 병행한다. 중간에 저장고에 들러서 보급품을 회수한다. 개썰매팀은 기지로 돌아갔다가 3월 1일에 북위 82도 부근에서 최종공격대 4명과 만나 기지로 귀환한다'라는 복잡한 계획이다. 이렇게 계획이 복잡하면 실패하기 쉽고, 실제로도 그랬다.

아문센과 스콧은 남극의 겨울이 오기 전에 보급품 저장고를 세웠다. 아문센이 세운 보급품 저장고는 3군데였으며 첫 번째 창고는 남위 80도, 두 번째는 남위 81도, 그리고 세 번째 저장고는 남위 82도였다. 스콧이 세울 원톤 데포가 남위 80도에 세워질 예정임을 감안하면, 아문센 탐험대가 좀 더 남쪽에 저장고를 세운 셈이다. 이것으로 아문센은 스콧보다 조금 우위에 섰다.

스콧이 남극점으로 가는 경로에 세운 보급품 저장고는 헛 포인트, 코너 캠프, 원톤 데포 3군데였다. 그러나 코너 캠프에서 폭풍을 만나 3일을 소비했고, 험한 길을 가던 조랑말이 쓰러지는 등 상황이 안 좋아졌다. 결국 스콧은 오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원래의 계획보다 48km 이상 북쪽에 원톤 데포를 설치했다. 매우 중요한 복선이니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이 사실을 잘 기억하자. 이 외에도 아문센이 저장고 앞에 깃발을 꽂고 단단히 고정해둔 덕에 저장고의 위치를 쉽게 알아볼 수 있었던 반면에, 스콧은 그러지 않았다.

스콧 탐험대의 테라노바 호가 과학조사를 하던 도중 아문센 탐험대와 만난 적이 있는데, 아문센은 이들을 친절하게 대했다. 이때 스콧 탐험대가 조랑말을 쓴다는 소리를 듣고 경악한 아문센은 "조랑말은 안된다. 내가 개를 많이 끌고 왔으니, 원한다면 절반을 주겠다."라고 조언했으나, 아문센 탐험대와 테라노바 호가 조우했다는 소식을 2월 22일에 전해들은 스콧 탐험대는 "(남극에서) 나가라"라고 외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고 한다. 아문센은 스콧이 원한다면 개를 구입할 수 있게 도와주려고 했지만 스콧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이후의 일을 생각하면 엄청난 실수였다.

1911년 9월 8일, 아문센은 초조함을 견디지 못하고 8명의 대원과 함께 남극점으로 출발했다가 추위를 못 견디고 후퇴해야 했다. 아직 겨울이 끝나지도 않았으므로 상당히 멍청한 행동이었고, 아문센이 이 탐험에서 저지른 유일한 실수였다. 아문센의 비참한 꼴을 보고 나대던 선배 탐험가 요한센이었으나, 아문센은 요한센을 탐험대에서 추방시켜서 지휘권을 확립했다. 이후 아문센은 왜 자신이 실패했는지를 놓고 모든 계산을 다시 했다. 반면에 스콧은 아문센처럼 서두르다가 낭패를 보지는 않았지만, 자신과 사이가 안 좋은 개썰매 책임자 세실 미어스를 그냥 놔두는 실수를 했다.

겨울이 지난 후, 아문센은 10월 20일에 남극점으로 출발했고, 스노모빌을 탄 스콧 탐험대 4명이 10월 24일에 출발했다. 문제는 이날 아문센은 남위 80도에 있는 첫 번째 보급창고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스콧 탐험대 본대는 11월 1일에 출발했다. 보면 알겠지만 스콧이 너무 늦게 출발했다.

10월 24일에 먼저 출발한 4명이 탄 스노모빌은 고장났지만, 4명은 예정대로 목표지점까지 보급품을 운반하는 데 성공했다. 11월 1일 출발한 스콧 탐험대 본대가 11월 21일에 4명을 따라잡았다. 원래는 여기서 개썰매를 돌려보낼 예정이었지만 계획보다 늦어졌기에 스콧은 개썰매를 더 쓰기로 결정했고, 2명이 우선 기지로 돌아가서 상황을 전한다. 이후 12명이 비어드모어 빙하로 올라갔고, 2명은 기지로 돌아가서 상황을 전했다. 12월 22일, 스콧은 4명의 지원대를 기지로 돌려보냈고 해를 넘긴 1912년 1월 3일, 마침내 남극점을 공격할 5명이 선발되었다.

여기서 스콧은 큰 실수를 저질렀다. 남극으로부터 260㎞ 떨어진 비어드모어 빙하로 돌입하기 직전에 지원대를 기지로 돌려보내면서 24마리나 되는 많은 개들도 같이 돌려보낸 것이었다. 이 개들을 최대한 이용했다면 사람이 썰매를 끌고 빙하를 넘지 않아도 되었을지 모르며, 그렇게 해서 돌아갈 때 필요한 체력을 보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콧은 여기서 더욱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는데, 스콧 일행이 데려간 나머지 8마리 개들이 굶주림과 피로로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자 잡아먹을 생각도 하지 않고 불쌍하답시고 풀어주는 어리석은 판단을 하고야 말았다! 풀어준다고 한들 남극 얼음덩이 한복판에서 개들이 무슨 자연으로 돌아간 것 마냥 사냥이라도 하며 살 수 있을 리가 없었고, 결국 이 개들도 탐험대와 마찬가지로 추위와 굶주림으로 죄다 죽어버렸다. 차라리 탐험대가 먹기 위해서 죽였다면 고통받는 시간이라도 적었겠지만, 갑자기 보금자리에서 쫓겨나 오래도록 고통스럽게 얼어죽어간 것이다. 이러니 스콧이 이 개들을 다 데리고 갔다고 해도 제대로 써먹지는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남극 한가운데에서 개들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었던 것도 아닐테고, 스콧은 자신이 데리고 있던 개들이 어떻게 하든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설령 쇠약해졌지만 살아있는 개를 도축하진 못하더라도 죽은 후에라도 그 고기를 먹는 결단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스콧은 불쌍하다던 개들을 더 불쌍하게 죽여버렸다.

반대로 아문센의 탐험대는 개를 잡아먹은 것은 물론이고 탐험 도중 발견하는 펭귄이나 바다표범 같은 모든 동물들을 사냥해서 그 동물들의 고기도 식량에 포함시킬 만큼 철저하게 살아남기 위한 노력을 했지만 스콧의 탐험대는 이러한 노력도 없었다. 아문센이 남극 탐험에서 괜히 작살을 구비한 것이 아니었다. 덤으로 아문센이 개를 죽일 때는 총으로 단숨에 끝냈다. 개들에게 고통을 주지 않고 편히 죽인 것이다.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면서 고통스럽게 죽어간 스콧의 개들에 비하면 훨씬 나았다.

그러나 스콧이 멍청해서 개썰매를 돌려보낸 건 아니었다. 남극점은 평균 고도가 3000m에 달하는 남극 고원에 있는데, 스콧 탐험대의 기지는 로스 해의 케이프 에반스에 있었다. 여기서 남극점으로 가려면 우선 로스 해를 횡단한 후 비어드모어 빙하로 가서 남극 고원까지 올라가야 하는데, 스콧이 보기에 여기를 동물이나 스노 모빌로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미 섀클턴 탐험대가 이곳을 넘다가 조랑말을 다 잃었던 전례도 있었다. 아문센 탐험대도 로스 해에서 남극 고원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조건은 동일했으므로, 비어드모어 빙하로 가지 않더라도 그에 준하는 매우 가파른 빙하와 만날 것이었다. 스콧이 보기에 개썰매로 남극 고원까지 올라가는 건 불가능하므로 아문센 역시 낭패를 볼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스콧이 사람의 힘만으로 비어드모어 빙하를 돌파하려고 한 것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11월 17일 아문센 탐험대는 서남극과 동남극을 나누는 산맥인 남극 횡단 산지 기슭에 도착했다. 스콧이었다면 여기서 개썰매를 돌려보내고 도보로 올라갔을 것이지만, 아문센은 며칠동안 주위를 조사한 끝에 악셀 하이베르크 빙하를 통해 이곳을 돌파할 수 있음을 알아냈다. 이 빙하는 매우 가파른 오르막길이었지만, 아문센 탐험대는 개썰매와 함께 이 난관을 3일 만에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아문센은 개썰매를 끌고 남극 고원에 올라간 것이다! 빙하를 돌파한 후 아문센은 엄청나게 기뻐했다고 한다. 영국인이 못하니까 아문센도 못할 거라고 착각한 스콧의 실수였다.

남극 고원에 오른 후, 아문센 일행은 지금까지 따라온 개 45마리 중 18마리만을 남기고 모두 죽였다. 죽은 개들은 창고에 보관되었으며, 아문센은 60일 분의 물자를 3대의 썰매에 실었다. 악천후 때문에 발이 묶였으나, 11월 25일에 그들은 출발할 수 있었다.

이 시점에서 아문센이 개썰매에 실은 물자는 1톤이었지만, 스콧 탐험대가 남극 고원으로 끌고 올라간 물자는 317.5kg이었다. 개썰매의 유무가 짐의 무게를 결정지은 것이다.

12월 14일 오후 3시 무렵에 아문센 탐험대는 남극점에 도착했다. 이후 그들은 이곳을 '하콘 7세 고원'이라고 명명하고, 이곳이 남극점인지 확인하기 위해 3일간 과학조사를 했다. 아문센은 철수하면서 남극점 위에 폴하임이라는 이름의 텐트를 쳤고, 보급품과 편지를 남겨두었다.

1912년 1월 3일에 극점공격대를 뽑을 때가 되자, 스콧은 바워스를 마지막 탐험조에 합류시켰다. 원래 스콧의 계획은 150마일(240㎞) 지점에서 4명이 최종팀으로 남극점 정복을 나서는 것이었지만, 바워스가 합류한 것 때문에 인원은 5명이 되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비어드모어 빙하에 도달했을 때 일행의 체력 소모가 너무 심해서, 남극을 정복하려면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인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결정은 탐험 계획을 뒤틀리게 만들어서 안 그래도 여유없이 빠듯한 식량과 연료를 무려 1인분만큼 더 소모하는 결과를 낳았고 스콧 탐험대의 물자 사정을 더욱 악화시켰다.

스콧이 만난 불운은 또 있었다. 극점공격대를 뽑기 전에 일어난 일인지 그 후에 일어난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에드거 에반스는 남극점으로 향하던 도중에 손을 다쳤고 이 상처는 회복될 수 없었다. 손도 제대로 못 쓰는 사람이 남극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스콧은 후퇴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스콧이 저지른 최악의 실수라고 말한다. 이 정도면 일이 잘못되고 있음을 깨달았어야 한다는 것이다.

1월 17일에야 스콧 탐험대는 남극점에 도착했고, 폴하임 텐트를 보며 절망했다. 텐트 안에는 앞에 서술했듯 보급품과 편지가 남아 있었으나, 스콧은 보급품에 손도 대지 않았다. 장갑을 잃은 바워스만이 장갑을 챙겼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도 스콧의 명줄을 재촉한 실수였다. 이미 패배했다면 차라리 아문센이 남기고 간 물자로라도 목숨을 연명했어야 했다. 자존심을 지킨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지 않은가.

여기서 스콧이 저지른 또 하나의 실수가 드러났다. 아문센은 이누이트가 입는 털가죽 방한복을 채용했고 이것은 현재까지도 최고의 방한 성능을 자랑한다. 그러나 스콧이 입은 최첨단 기술력의 방한복은 남극의 추위에 얼어붙어서 얼음 덩어리가 되어 있었으므로 새 방한복이 절실히 필요했는데, 폴하임 텐트에 새 털가죽 방한복이 놓여있었다! 꼼꼼한 아문센은 예비용으로 털가죽 방한복을 많이 준비했지만, 탐험이 순탄하게 돌아가자 남게 된 방한복을 스콧에게 선물로 준 것이다. 참으로 착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스콧은 이걸 받지 않고 버렸다!

1월 26일에 아문센 탐험대는 프람하임에 돌아왔다. 이것으로 아문센 탐험대의 남극점 정복은 대성공으로 끝났으며, 죽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아문센 탐험대 5명은 살이 더 쪄서 왔는데, 식량이 남아돌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일부 저장고에 남겨진 연료통은 가득차 있었다. 연료가 남아돌았기 때문이다. 남극점에 보급품을 일부 남겨두고 왔는데도 이랬다.

절망하며 귀로에 오른 스콧 탐험대는 얼마 안 가 재난을 만났다. 2월 4일에 에드거 에반스가 크레바스에 빠져 뇌진탕을 일으켰고, 2월 16일에 사망했다. 대원이 죽는다는 계획은 없었으니까 이것만으로도 참담한 실패다. 이렇게 계획이 어긋났다면 '살아서 돌아간다'는 목적에만 집중하는 게 현명하다. 이미 사람이 죽었는데 다른 데에 눈을 돌릴 여유는 없다.

그러나 스콧은 남극점의 온갖 광물도 관심을 가지고 수집하여 가져왔다. 말과 개를 모두 잃고 사람도 죽어나가는 와중에 16㎏이나 되는 이러한 물건은 탐험대원들에게 무거운 짐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이로 인해 스콧이 살아돌아오는데 실패했음에도 탐사 분야에서 나름대로 기여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었다. 아문센이 오로지 남극점만을 목표로 한 것과는 달리, 스콧은 탐험일지에 기후와 여러 가지 자연 현상들을 죽기 직전까지 꼼꼼하게 기록했고, 이 기록과 수집품은 남극의 과학적인 조사에 큰 기여를 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스콧은 남극점을 정복하러 온 것이지 과학적 조사를 하러 온 것이 아니다. 심지어 스콧은 인류 최초로 남극점을 정복한다는 목적도 달성하지 못했고, 보급품 부족으로 생사의 기로에 몰린 상황이다. 이럴 때 16kg의 짐을 추가하는 건 자살행위다.

설상가상으로 스콧 탐험대는 도보로 남극을 걸어가야 했다. 아문센 탐험대는 전원이 스키에 능숙했기에 눈밭을 빠른 속도로 지나갈 수 있었지만, 스콧은 스키를 배울 생각도 안 했기에 이런 꼴이 된 것이다. 스콧 탐험대에 스키에 능숙한 그란이 있었지만, 스콧은 스키를 배울 생각도 안 했고 그란을 데리고 오지도 않았다. 무거운 짐을 끌고 도보로 걸으니 빨리 갈 수가 없었다.

악재는 또 터져나왔다. 아문센이 깃발을 꽂으며 귀로를 미리 표시해둔 데 비해, 스콧은 귀로를 표시하지 않았다. 결국 천문항법을 동원해서 길을 찾아야 했지만, 스콧을 제외하면 항해술을 아는 사람이 없었기에 길찾기는 상당히 어려웠다. 스콧 탐험대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에서 나오는 "대장이 길을 잃었어"라는 대사는 결코 픽션이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남극점으로 오면서 보급품 저장고를 미리 만들어두었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비어드모어 빙하 기슭에서 조랑말들이 모두 죽었을 때, 스콧 탐험대는 귀로에 식량으로 쓰기 위해 저장고를 만들고 조랑말들을 보관해둔 바 있다. 스콧 탐험대는 원래 15명이고 그들 대부분이 중간에 돌아갔을 것이므로, 이들이 보급품 창고를 몇 개 더 만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짐작하는 이유는 스콧 탐험대가 원래 만들어둔 헛 포인트, 코너 캠프, 원톤 데포에 도달하려면 아직 멀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콧은 아문센처럼 귀로에 깃발을 꽂지 않았고 창고 앞에 깃발을 세우지도 않았으므로, 보급품이 있는 저장고를 찾지 못하고 지나치는 불상사가 터졌다. 간신히 찾은 저장고조차 연료통와 통조림이 터지면서 뒤섞이는 바람에 못쓰게 된 경우도 속출했다. 보급품 부족에 시달린 스콧 탐험대의 건강은 계속 악화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스콧의 실수였다. 아문센은 저장고를 만들면서 연료통에 가죽을 두르고, 식품과 연료를 따로 분리해두고, 양을 넉넉히 준비하고, 저장고 앞에 깃발을 세워서 위치를 표시하는 등 온갖 궁리를 다했다. 심지어 아문센이 준비한 페미컨과 바다표범 고기, 곡물 비스킷 등은 통조림처럼 춥다고 터지지 않았으며, 신선한 생고기를 먹었기에 스콧 탐험대처럼 괴혈병에 시달리지도 않았다. 아문센의 연료통이 터지지 않은 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스콧 탐험대가 남극점으로 떠난 후 기지를 총괄하게 된 에드워드 앳킨슨도 실수를 저질렀다. 먼저 귀환하던 3명은 식량부족과 괴혈병 등으로 죽어가고 있었는데, 톰 크린이 2월 18일에 단독으로 눈길을 돌파해서 18시간만에 기지에 도착했고 앳킨슨은 구조대를 보내서 남은 2명도 기지로 데려왔다. 이게 2월 22일이었는데, 이 정도면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챘어야 했다. 그러나 앳킨슨은 그러지 않았고, 스콧 탐험대를 지원할 예비대에게도 "이건 구조대가 아니다. 다음 시즌의 활동을 위해 개들을 보호하라"고 지시했다. 예비대의 책임자로서 개썰매를 이끌 사람은 앱슬리 체리-가라드로 결정되었고, 경험많은 개썰매 운전자인 드미트리 게로프가 함께 가게 되었다.

그런데 예비대 책임자는 원래 체리-가라드가 아니었다. 처음에 개썰매를 맡은 사람은 세실 미어스였는데 그는 스콧 탐험대가 쓸 조랑말을 구입한 사람이기도 하다. 문제는 미어스가 조랑말을 잘 몰랐기에 별로 뛰어나지 않은 녀석들만 구입했다는 것으로, 나중에 탐험대에 합류한 조랑말 전문가 오츠를 크게 실망시키기도 했다. 심지어 미어스는 탐험기간 내내 스콧과는 사이가 안 좋았고, 예정보다 2주 늦게 기지에 돌아오기도 했으며, 원톤 디포에 보급품을 운반하라는 스콧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고 있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재산에 눈이 팔려있었기에 남극에서 떠나려고 배만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결국 원톤 디포에는 보급품이 충분히 채워지지 않았고, 앳킨슨은 체리-가라드로 책임자를 교체했다. 체리-가라드와 드미트리는 개썰매에 물자를 싣고 남쪽으로 향했다. 세실 미어스는 1912년 3월에 테라노바 호를 타고 남극을 떠났다. 여담이지만, 세실 미어스는 이후 앳킨슨으로부터 스콧 탐험대의 파멸에 책임이 있다는 비난을 받았으며, 그런 비난을 한 건 앳킨슨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스콧은 예비대를 만나지 못했다. 사실 계획부터가 비현실적이었는데, 무전기도 없는 시대에 서로의 위치를 어떻게 안단 말인가? 길을 찾으려면 항해술을 아는 사람이 필요했는데, 체리-가라드와 드미트리는 그렇지 못했다. 두 사람은 남쪽으로 내려와서 원톤 디포에 보급품을 채워 넣었으나, 예비대 지휘자인 체리-가라드는 위험을 무릅쓰고 남하하다가 스콧과 만나지 못할 것을 염려해서 그냥 대기했다. 스콧 탐험대가 깃발을 꽂아서 남극점으로 가는 길을 표시한 것도 아니고, 날씨도 나쁘고, 세실 미어스가 일을 게을리해서 원톤 데포의 보급품도 부족했다. 심지어 원톤 데포에는 개사료도 없었고, 체리-가라드가 가져온 개사료를 합해도 남쪽으로 가기에는 매우 부족했다. 체리-가라드는 이 상황에서 남쪽으로 가면 개들을 잃을 게 분명하다고 판단했고, 이는 앳킨슨이 내린 "개들을 보호하라"는 명령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환장할 일은 "예비대를 3월 1일에 위도 82도에서 82도 30분 사이로 보내서 극지탐험대의 귀환을 지원하라"고 스콧이 이미 지시했다는 거다. 원톤 데포 남쪽으로 내려와서 극지탐험대를 지원하라는 스콧의 명령은 이렇게 무시되었고, 이것이 최악의 실수가 되었다.

결국 체리-가라드는 남하를 포기하고 1주일 동안 원톤 데포에서 기다렸다. 이때 스콧 탐험대와의 거리는 113km도 되지 않았는데, 체리-가라드는 결국 3월 10일에 돌아가고 말았다. 힘들게 북상하던 스콧 탐험대도 이날 개썰매가 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명백함을 깨달았다. 스콧 탐험대는 살기 위해 열심히 걸었지만 오츠의 다리 부상이 악화되면서 전진속도가 느려졌다. 이때 스콧 탐험대의 속도는 하루 8km였다.

그런데 아문센 탐험대가 남극점에서 프람하임으로 돌아갈 때의 속도는 하루 28km였다. 개썰매를 타고 있는데도 이것밖에(?) 속도를 내지 못한 이유는 개들이 무리하면 안 된다는 거였다. 심지어 아문센은 설맹을 막기 위해 태양을 등지고 이동했으며, 태양빛이 약해지는 밤에만 이동하는 등 철저하게 조심했다. 설맹 대비책이 없어서 시력이 손상된 스콧 탐험대와는 달랐다. 심지어 1월 7일부터는 하루에 56km씩 달렸다. 스키와 개썰매도 없고 설맹 대비책도 마련해두지 못한 스콧의 실수였다. 비어드모어 빙하를 개들이 올라갈 수 없다고 생각하고 개썰매를 뺀 것이 이런 결과를 낳은 셈이다. 비어드모어 빙하가 아문센이 넘은 길보다 험난했다고 주장할 수야 있겠지만.

결국 오츠는 3월 17일에 침낭만 든 채 눈보라 속으로 사라졌고, 스콧과 다른 대원들은 북쪽으로 갔다. 오츠의 희생 덕분에 행군속도는 다시 빨라졌지만 스콧을 포함한 3명은 괴혈병과 동상,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고 있었고 결국 그들은 원톤 디포에서 17.7km 떨어진 곳(이라고 판단한 지점)에서 주저앉고 만다. 한계에 몰린 데다가 보급고가 한참 멀리 떨어져있다고 생각했던 스콧 탐험대가 보급고 지척까지 당도할 수 있었던 것은 스콧 탐험대의 끈기가 이루어낸 마지막 기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들에겐 힘이 모자랐다.

그러나 이것도 스콧의 실수였다. 스콧이 오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원래의 계획보다 48km 이상 북쪽에 원톤 데포를 설치했다는 게 매우 중요한 복선이라고 한 이유가 이것이다. 원래 계획대로 원톤 데포를 남위 80도 지점에 지었더라면, 스콧 일행은 무사히 원톤 데포에 들어갔을 것이다. 48km 이상 북쪽에 원톤 데포를 짓는 바람에 스콧 탐험대 전원이 죽게 된 것이다. 심지어 스콧은 또 하나의 결정적인 실수를 범했다. 스콧은 원톤 데포까지 17.7km 떨어져 있는 것으로 판단했지만, 사실은 서쪽으로 800m만 더 가면 원톤 디포가 있었기 때문이다. 목표가 지척이라고 생각하면 좀 더 힘을 낼 수 있고, 한참 남았다고 하면 있던 힘도 내기가 힘들어진다. 결국 스콧 탐험대는 원톤 데포 코앞에서 눈보라에 갇혔고, 남극점에 갔던 대원 전원이 사망했다. 마지막으로 죽은 스콧의 사망일은 3월 29일.

케이프 에반스 기지로 돌아온 체리-가라드는 앓아 누웠고, 앳킨슨은 다른 대원을 데리고 다시 남하를 시도해서 3월 30일에 코너 캠프에 도달했지만, 날씨가 너무 나빠서 더 이상의 남하는 불가능했기에 이들도 돌아가고 만다. 수색팀이 스콧의 시체를 발견한 것은 11월 12일이었다.

스콧이 저지른 최악의 실수는 인사를 잘못했다는 것이다. 스콧 탐험대에도 극지방에 적합한 인재가 없는 건 아니었으나, 스콧은 스키 전문가인 그란을 극지공격대에서 제외시켰고 스노모빌 전문가인 스켈턴 중위는 쫓겨났다. 남극점을 공격할 대원을 뽑을 때도 낙하산인 헨리 로버트슨 바워스, 손을 다친 에드거 에반스를 최후의 5명에 포함시키고 톰 크린을 귀환대 3명에 집어넣는 삽질을 했다. 톰 크린의 활약으로 3명의 귀환대는 살아남았으나, 에드거 에반스는 손을 다친 탓에 큰 도움이 못 된 데다 귀로에서 크레바스에 추락해서 뇌진탕을 일으킨 후 사망했다. 바워스는 힘이 좋아서 짐을 끌고 가는 데는 도움이 되었지만 남극탐험 경험이 없었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고, 결국 스콧과 함께 얼어 죽었다. 이럴 바에는 에드거 에반스를 귀환대에 포함시키는 게 나았을 것이다. 최소한 입은 하나 줄일 수 있으니까.

지원팀의 인사도 실패했다. 세실 미어스를 탐험대원으로 뽑은 것은 완전한 실패로 드러났고, 그 뒤를 이은 체리-가라드는 항해술에 익숙하지 못했다. 경험 많은 여행가이고 항해사이며 물리학자인 찰스 라이트가 있었고 그도 남극점으로 갈 극지공격대에 합류하기를 갈망했지만, 이 기상학자는 극지탐험대 본대에도 못 들어간 데다 수석 과학자 조지 심슨이 "과학탐사를 우선시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는 바람에 예비대에도 끼지 못했다. 예비대가 원톤 디포에서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한 것도, 항해술을 아는 라이트가 배제된 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천문항법을 아는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눈더미 속에서 길을 찾겠는가. 다만 앳킨슨의 명령과 원톤 디포의 부족한 물자량을 감안하면 라이트가 체리-가라드의 개썰매 팀에 합류했다고 해도 원톤 디포 남쪽으로 갈 수 있었을지는 미지수이긴 하다. 이후 라이트는 11명으로 이루어진 수색대에 가담했고, 스콧 탐험대가 죽은 텐트를 발견하게 된다. 영문 위키피디아에서는 그란이 아닌 그가 가장 먼저 텐트를 발견했다는 말도 있는데, 누가 먼저 찾았든간에 스콧과 앳킨슨의 인사가 실패한 것만은 분명했다. 이후 기지 책임자였던 앳킨슨은 왜 이런 인사를 했냐는 질문에 대해 "스콧도 라이트를 베이스 캠프에 머물게 한 결정을 승인했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여담으로 조지 심슨은 1912년 8월에 남극을 떠났는데, 이후 스콧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우울증에 걸렸다고 한다.

조언을 듣지 않은 것도 치명적이었다. 난센을 비롯해 스콧에게 조언을 해줄 사람은 많았지만, 스콧은 그 말을 무시했다. 오츠는 자신의 조언이 거절당했을 때 "대장님, 저의 조언을 무시한것에 대해 후회 하실겁니다."라는 말을 남겼는데, 정말로 그렇게 되었다.

비록 스콧은 처음에 선택을 잘못해서 이 레이스에서 승리를 아문센에게 빼앗겼지만 살아서 생환할 수 있는 많은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이 많디 많은 기회를 스콧이 스스로 포기하거나 실수로 죄다 놓쳤고, 인선도 잘못했으며, 예비대가 도착하지 못한 실수까지 겹치면서 결국 남극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5. 이후

아문센과 스콧의 대결은 요약하자면 빨리 출발한데다가 준비성도 철저하고 운까지 좋았던 아문센출발이 늦은데다가 운도 없고 준비성도 허술했으며 굉장히 안일하고 오만했던 스콧 둘의 대결로 전자가 이기지 않는게 이상하고 실제로도 전자의 승리로 끝난 경쟁이었다. 애초에 이 승부 자체는 준비성도 준비성이지만 현지인의 생활방식에 맞춘 최적화를 고수했던 아문센과 달리 스콧은 나름 경험있는 탐험가인데다가 대영제국을 후원자로 뒀음에도 불구하고 검증도 되지않은 최신 기술만 과신하여 자신만이 아닌 죄없는 탐사대원들의 목숨마저 잃게 만들었으니 속된 말로 개죽음을 자초한 꼴이었다.

아이러니한 점은, 스콧의 시신과 일지가 발견 된 이후 양측의 일대기에 대해 대중이 보여준 반응은 이들의 성공여부와는 정반대였다는 것. 탐험을 성공한 아문센은 본인의 일지를 정리해 '남극'이라는 책으로 출판했는데, 그의 책은 매우 건조하고 객관적인 필체로 글을 쓴 탓에 사료로는 우수했을지 모르나 당시에 효율성보다도 낭만을 추구하던 민간인들에겐 자뭇 심심하고 지루한 글이었을 뿐이었다. 특히나 철저하게 준비한데다가 운마저 따라준 덕분에 대중들이 좋아하는 고난이나 희생, 비극과 극복등 극적인 요소가 없다시피했기에 더더욱 그런 기조를 굳히기도 했다.[40] 즉, 아문센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철저히 대비를 했기에 겪을 고난도 없었고, 고난이 없으니 극복할 위기도 없었고, 극복할 위기도 없었으니 비극적인 희생도 필요없었던 것이다.

그에 비해 스콧의 일지는 그가 겪었던 비극과 고난이 여실히 드러난데다가 당시 시대가 낭만주의적 분위기가 팽배하다 보니 객관적으로 보면 사실상 죄없는 탐사대원들마저 끌어들인 개죽음일 뿐이었으나 당시에는 스콧의 이런 결과마저 최후에 꺾였을지언정 끝까지 고난에 맞서길 포기하지 않은 사나이로 극찬받았다. 특히나 아문센의 필력이 떨어지는 편이 아니었으나 스콧의 일지가 굉장히 명문이라 문학적인 면에서도 큰 감명을 준 것이 컸다. 이게 얼마나 심했냐면 아문센은 자칫 잘못하면 자기들이 죽을지도 모를 상황에서 스콧을 위해 물자 일부를 남기는 등 오히려 그들을 배려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에서 시작된 선동에 의해 '스콧을 죽게 내버려둔 냉혈한'이라는 오명을 한동안 뒤집어 썼으며 스콧은 정반대로 '아쉽게 실패한 2인자', '위대한 패배자'라는 격에 맞지 않는 화려한 이명을 얻었다.

아문센 입장에서 자뭇 억울한 이런 기조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을 기점으로 일변하게 되는데, 자국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스콧의 우상화를 강행하던 영국의 국력이 쇠퇴하고 미국이 세계의 주도권을 잡게 되면서 영국이 이전까지 밀고가던 판단과 정반대로 스콧의 행동을 '객기'로 단언하며 오히려 만전의 준비를 거듭하여 희생없이 탐험을 성공시킨 아문센의 실력을 높이 사는등 이성적인 주장이 대두되었기 때문이다.[41] 특히나 20세기 후반에 이르며 합리주의가 기본적인 이념으로 대두되고, 냉전 해체 이후로 전세계가 시장경제 체제로 재편되어 기업을 필두로 한 민간영역에서 리더십 열풍이 불면서 과거 아문센을 그리도 비하하며 그의 죽음을 축하하기까지 했던 영국마저 아문센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결국 스콧은 그리도 우상화되며 떠받들여지던 영국에서마저 실패한 리더의 표본으로 격하되고 말았다. 이는 냉전이 시작되면서부터 더 이상 국력이 예전 같지 않음을 실감한 영국이 '우리가 무조건 세계 최초 타이틀을 차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버리게 된 데서도 기인한다. 과거에는 '낭만'으로 평가되었던 스콧의 탐험은 점차 무계획·무책임· 징징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고, 아문센의 계획적인 탐험활동이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두 사람의 대결을 빅토리아 시대 낭만주의에 대한 현대의 합리주의의 승리라고까지 평가하기도 한다.[42]

이 둘의 탐사에 앞서 시도했다가 실패를 깨닫고 그나마 탐사대를 온전하며 복귀에 성공했던 섀클턴 역시 21세기 들어 아문센과는 다른 의미의 '리더의 본보기'로서 재평가 받기도 했다. 이는 포기할지언정 전력을 온전했단 면에서 합리주의적 관점에서 적합한 인물이기도 했고 영국 입장에서 섀클턴은 나름대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다가 본인부터가 아문센을 칭송하는등 그와 사이가 좋았던 만큼 아문센 고평가 ≠ 영국 패배라는 퇴로를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스콧을 총알받이로 만들고 대체제로 섀클턴을 세우는 것으로 영국은 스콧의 우상화로 인한 과거의 흑역사를 지운 것.

이누이트에 대한 만행 때문에 평가가 나락으로 떨어진 로버트 피어리조차 인성과 별개로 북극점 정복 시도 이후 동료들과 함께 무사히 귀환한 점에서 최소한 탐험대장으로서의 평가만큼은 스콧보다 그나마 나은 편이다. 그만큼 피어리가 북극에서 무사히 살아서 돌아올 수 있게 철저히 준비를 한 것이므로 이러한 점에서 봐도 스콧은 더더욱 비판을 받아야 한다. 탐험대장으로서의 역량이 인간말종보다도 못한 셈이니 말이다. 당연히 순수하게 인성만 놓고 보면 스콧이 피어리급의 막장인 것은 아니다만, 본인에게 부적합한 탐험대장이라는 직책을 맡고 그것에 대해 제대로 책임지지도 않아서 더더욱 욕을 먹는 것이다.

후일, 남극엔 이 둘의 경쟁에서 딴 아문센-스콧 남극점 기지가 세워지게 되나, 여기에 스콧의 이름이 들어간 것도 엄청난 로비가 들어갔을 거란 뒷얘기까지 도는 등 영국의 미화는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각 인물에 대한 세간의 평가의 변천사는 역사는 객관적으로 적히더라도 그것이 모두 객관적인 사실의 서술이 아니라 수많은 개인과 집단의 이해관계가 얽힌,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시이기도 하다.

6. 반응

북극 정복에서 로버트 피어리와 쿡 의사 간에 논쟁이 있었던 것처럼, 아문센은 탐험의 중요성뿐이 아니라 탐험 결과를 홍보하는 언론의 중요성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남극에 도착했을 때는 철저하게 지자기 관측 결과 등의 인증자료를 뽑았고, 북극 정복 때처럼 논쟁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다.

위에 있는 '남극점 인증' 문단에도 설명되어 있듯이, 아문센은 3일동안 남극점에 머물면서 지독하게 조사를 거듭했다. 여러차례 육분의로 관측을 해서 자신들이 처음 도착한 자리가 정확한 극점이 아니라는 걸 알고 새로 측정한 '남극점'에까지 가서 인증샷 시도를 했다. 이런 확인 작업은 여러 번 반복되었으며, 남극점으로 의심되는 곳은 모조리 다 가봤다. 대부분의 사진은 귀환 도중 카메라 파손으로 망실되었지만 그래도 일부는 남았고, 정확한 관측자료를 남겼기 때문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스콧의 일기도 증거품이었다. 스콧은 남극점에 아문센이 먼저 도달했음을 비통한 심정으로 기록했는데, 스콧이 아문센을 위해 거짓말을 할 이유는 전혀 없으므로 확실한 증거가 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스콧 탐험대가 찍은 사진 중에는 아문센이 남극점에 남긴 폴하임 텐트를 찍은 것도 있었다. 스콧 탐험대조차도 아문센의 성공을 인정했는데 어떻게 반론을 하겠는가.

6.1. 영국의 반응

아문센의 성공 소식이 알려지자 미국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왕 조지 5세는 호바트에 있는 아문센에 축하전보를 보냈는데, 특히 조지 5세는 아문센이 귀환하는 첫번째 기항지가 대영제국의 영토였던, 오스트레일리아인 것에 대해 특별한 기쁨을 표현했다. 정확히는 자치령의 지위를 가진 호주 자치령.

영국에서는 아문센의 승리에 대한 언론의 반응은 자제되었으나 일반적으로 긍정적이었는데, 아문센의 성공에 재정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데일리 크로니클(Daily Chronicle)과 일러스트레이트 런던 뉴스(Illustrated London News)의 아문센에 대한 열광적인 보도 뿐만 아니라, 맨체스터 가디언(Manchester Guardian)지는 노르웨이인의 용기와 결단력에 의해 모든 비난의 원인이 지워졌다고 보도 했으며, 영 잉글랜드(Young England)지 역시 독자들에게 용감한 노르웨이인이 얻은 명예에 대해 원망하지 말것을 권고 했다. 또 The Boy's Own Paper지는 모든 영국의 소년들이 아문센의 탐험기록을 읽어야 한다고 추천했고, 더 타임즈 특파원은 아문센이 너무 늦게 스콧에게 알리지 않은 것에 대해 가벼운 질책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문센의 성실성을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그가 극점에 도달했다고 말했기 때문에 믿을 수밖에 없다"고 평론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왕립지리학회 (Royal geographical society)의 고위직은 아문센의 업적에 대해 특히 적대적인 반응을 보였는데, 전 왕립지리학회 회장이었던 클레멘츠 마컴 (Clements Markham, 1830~1916) 경은 아문센의 주장이 사기일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며 진실을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며 평가 절하하였고, 1912년엔 아문센이 왕립지리학회에서 연설할 때엔 학회 회장인 조지 커즌 (George Curzon, 1859~1925, 커즌 라인의 그 사람 맞다)경으로부터 '개들을 위한 건배'를 요구받자 아문센은 자신이 무시당한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영국에서 아문센에게 적개심을 보일 이유가 없는 건 아니었다. 아문센은 영국인들이 그토록 노력해도 개척할 수 없었던 북서항로를 사상 최초로 개척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얼마나 분했는지 영국은 북서항로 개척자에게 준다며 걸어둔 상금을 아문센에게 주지 않고 다른 데에 썼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번에 남극점 도달 경쟁에서도 참패했으니 열폭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아문센의 남극점 정복은 이미 죽은 스콧조차도 인정한 사실이었으니 부정할 수도 없었다. 승리자 아문센이 형편없는 인물이라면, 그런 사람에게 참패한 스콧은 더더욱 형편없어진다는 사실을 까먹어서 탈이지만.

새클턴은 아문센의 승리를 폄하하는데 동참하지 않았는데, 그는 아문센에 대해 "오늘날 가장 위대한 극지 탐험가"라 칭송했다. 로버트 스콧의 부인인 캐슬린 스콧(Kathleen Scott, 1878~1947) 역시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기 전 아문센에 대해 "그의 여정은 매우 훌륭한 위업이었다. 짜증이 나기는 해도 감탄할 수밖에 없다."며 그를 인정하였다.

귀환에 실패하고 죽은 스콧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이었으나, 스콧의 시체가 발견되고 그의 일기가 공개된 후에는 영웅화되었다. 비록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에 그의 평가는 추락했지만, 탐험대원들에 대한 평가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스콧과 동료 대원들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희생한 오츠는 용감한 영국 신사로 기억되었으며 그 평가는 지금도 그대로다. 스콧 탐험대 5명과 헤어져 귀환한 톰 크린과 윌리엄 레슐리는 괴혈병으로 쓰러진 에드워드 에반스를 구해낸 공로로 알버트 메달을 받았다. 그러나 스콧이 없을 때 남은 대원들을 지휘했던 에드워드 앳킨슨은 개썰매 운용을 잘못한 게 아니냐는 논쟁에 휘말렸으며, 개썰매 팀의 첫 책임자였던 세실 미어스는 여러가지 물의를 일으킨 탓에 스콧 탐험대의 전멸에 책임이 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 외에 스콧 탐험대 대원이었던 노르웨이인 그란은 성공적인 삶을 살았으나, 제 2차 세계대전 중 노르웨이의 매국노인 비드쿤 크비슬링의 집권당에 가담했다가 18개월 징역을 살기도 했다.

6.2. 영국을 제외한 세계 각국 반응

세계인들은 아문센의 승리에 찬사를 보냈다. 거의 400년간 동군연합이었던 노르웨이의 형제국가이자 같은 글뤽스부르크 왕가가 다스리던 덴마크도 축하했다. 그중에서도 영국과 앙숙인 프랑스가 더욱 즐겁게 환호성을 울렸다. 스페인도 프랑스만큼 극단적이지는 않았지만 풍악을 울리며 아문센을 크게 축하해 줬으며 심지어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일랜드 인도에서도 우리나라의 국권을 강탈한 원수 영국놈들을 북유럽 먼 나라 출신의 탐험가가 영국에서 독립하지 못한 우리나라를 대신해서 이겨줬다며 아문센의 남극점 정복에 훈훈한 반응을 보인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이 두 나라는 아문센이 죽고 영국의 지배에서 독립한 이후에 아문센을 남극점의 최초 정복자로 기록하며 스콧을 남극점의 최초 정복자라고 역사왜곡을 하며 우기던 지배국인 영국과 다른 모습을 보였다.

6.3. 노르웨이의 반응

왕실에서 훈장까지 수여했을 정도로 환호했다. 노르웨이 입장에서는 국가적으로도 영광스러울 것이다. 상대가 대영제국이고 자국은 이 때로부터 10년도 안 된 1905년에 갓 독립한 신생국임을 감안하면, 어찌 되었든 간에 신생 독립국이 세계 대제국을 이긴 것이니 말이다. 난센을 비롯한 후원자들은 아문센이 북극으로 간다고 했다가 남극으로 목표를 바꾼 데 대해 하나도 문제삼지 않았다.

남극 탐사를 할 때 아문센을 후원했던, 노르웨이가 독립할 때 막 왕위에 올랐던 국왕 호콘 7세도 개인적으로 동갑내기이던 아문센을 좋아했는지, 15년 뒤에 북극을 비행선으로 탐험하려던 아문센이 자금이 부족하다고 하소연하자 "노르웨이를 세계에 알린 당신의 부탁을 왜 마다하겠소?" 라며 기꺼이 비행선을 사줬다. 이후에 아문센이 북극에서 실종자 수색 중 행방불명되고 결국 죽음이 공표되자, 국왕도 명복을 빌며 대리인을 보내어 국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6.4. 번외: 시라세 노부

아문센 vs 스콧의 경쟁이 치열해지자, 일본 제국도 육군장교인 시라세 노부([ruby(白瀨,ruby=シラセ)] [ruby(矗,ruby=ノブ)], 1861.07.20.~1946.09.04.)를 중심으로 자기들도 남극점을 정복해 보겠다고 뛰어들었다. 나름 군인이 장거리 이동을 하는데 정부에서는 한 푼도 지원해 주지 않아 시라세는 어쩔 수 없이 본인이 후원금을 모아야 했다. 남극의 ㄴ자도 모르고 그냥 남이 장에 간다니까 거름 지고 간다는 식으로 뛰어든 이 무모한 남극점 도전은 1912년 1월 28일 남위 80도선에서 끝났다. 이때 시라세 노부는 자신이 지나온 지역을 일본령으로 선포하고, 해당 지역을 # 야마토 유키하라라고 명명했는데, 이곳의 위치는 루스벨트 섬 남쪽에 위치한 로스 빙붕, 즉, 바다였다.

당시 시라세는 탐험한 곳에서 암석 하나 줍지 못하여 의아해했는데, 바다 위에 두껍게 뒤덮인 얼음 지대니 당연히 암석같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이런 곳에 암석이 있으려면 운석 밖에 없다.

말할 것도 없이, 남극 조약과 무관하게 영토로 인정받을 수 없는 곳이라서 일본의 영유권 주장은 그냥 붕 떠버렸다. 영토로 인정받으려면 영주권을 부여해야 하고 그 남극의 광활한 영토에 대해 영주권으로 국가령 선포할 수준 되려면 1만명을 데려와도 어려운데 남극에 1년 동안 제일 많이 사람이 있는 시기에도 4000명밖에 안 온다. 그래도 로버트 스콧과는 반대로 죽지는 않고 살아 돌아왔지만, 모든 탐사비용은 시라세에게 청구했다. 왜냐하면 후원회가 돈으로 자기들 먹는 거랑 유흥비에 쓴 게 탄로나서(...). 덕분에 그는 30년도 넘게 지나 1946년 9월 향년 만 85세로 죽을 때까지도 끝내 빚을 갚지 못했다. 참고로 금액은 4만엔 상당(현재 돈으로 약 1억 5천만엔). 대원들 월급 주는 것조차 불가능해질 지경이 돼서 평생 강연도 돌아다니고 남극 사진집도 팔면서 갚으려고 시도했지만 말년에 죽을 땐 그런 사람이 같은 마을에 있다는 사실조차 마을 사람들은 몰랐다.

다만, 그의 무모한 도전은 일본 남극탐사선 시라세(しらせ)가 이름을 따는 것으로 흔적을 남겼다. 시라세의 무모한 탐험에는 아이누족의 도움이 그나마 한줄기 빛이 되었다. 그 덕분에 그저 야만인 취급되던 아이누족이 처음으로 관심을 받게 되는 나비효과도 남았다. 공교롭게도 아문센에게 북극에서의 생활방식을 가르쳐준 이누이트처럼 아이누족 역시 북극 문화권 민족이다.

7. 국내 위인전에서

어린이용 위인전기 책에서는 그냥 "아문센이 이겼어요 끝."이라고 나오고 스콧 일행의 죽음은 생략하기 때문에 나중에 커서 스콧의 최후를 알고 충격을 받는 경우들이 있었다. 그럴만도 한 것이 스콧 탐험대의 최후는 어린이용에 그대로 싣기엔 다소 충격적인 내용이기도 하다. 그밖의 아문센의 탐험과정도 생존을 위한 철두철미한 준비성이 돋보이고 그로 인해 다소 심심하게 진행된 탐험이라는 게 어른들의 시각이지만, 개에게 중노동을 시키다가 죽으면 그대로 식용으로 먹거나 하는 등 어린아이들에게 있는 그대로 말해주기에는 동심파괴 정서적으로 논란이 될만한 부분도 꽤 많다보니 최대한 둥글둥글하게 뭉갤 수 밖에 없다. 설령 스콧 일행의 죽음에 대해 다루더라도 그냥 추워서 죽었다는 표현 정도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청소년용 위인전에는 스콧의 최후 정도는 소개한다. 왜 실패했는가도 어느 정도 나온다. 그 실패의 배경에 얼마나 비합리적인 요소들이 있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서술하지 않을 뿐이다. 70~80년대 출간된 대부분의 위인전기 책들도 그랬다.

스콧이 말을 잡아 말고기를 먹고 아문센이 개를 잡아 개고기를 먹었다는 이야기들도 누락한 경우도 많이 있다. 그나마 어린이용 책 중에는 로버트 피어리가 북극점을 정복했다는 설이 정설이었던 시기에 발간된 Why 시리즈의 ≪남극과 북극≫편이나 ≪ 탐험대장 떡철이≫가 스콧의 죽음을 간략하게 다뤘다.

어린이용과 청소년용의 중간즈음에 있는 책인 살아남기 시리즈는 남극을 소재로 다루기도 했는데, 작품의 내용이 남극에서의 조난을 다루다 보니 필연적으로 아문센과 스콧의 이야기도 실어넣었다. 스콧의 실책도 그런대로 실어 넣었지만, 만화 이외에 글로 된 보론 정도로 소개해서 아마 읽은 사람은 거의 없을 듯하다. 오히려 살아남기라는 컨셉 때문인지 어니스트 섀클턴의 일화가 훨씬 더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게다가 어린이용 책 중 여러 인물들을 함께 다루는 위인전류에서는 스콧에 대해서도 다룬다. 물론 이런 책들은 여러 사람을 한꺼번에 다루다 보니 간략하게 설명하는 데다, 어린이용이라 스콧의 부실한 준비, 탐험에 관한 실상은 상당 부분 생략되는 경우들이 많다. 적당히 '스콧은 열정은 있었지만 계획을 제대로 세우지 않았다.' 정도로만 표현한다.

Why에서는 스콧 탐험대가 겪은 일을 전부 적었다가는 더는 아동용 만화가 아니게 되는지라 사실을 최대한 순화해서 '조랑말을 몰고 기계를 들고 갔다가 조랑말은 다 죽고 기계는 싹 다 얼어붙어서' 사망했다고 써놨다. 떡철이에서는 떡철이의 꿈에서 떡철이가 동사하기 직전 스콧의 묘비를 보면서 울부짖는 컷으로 묘사했다. 이 이야기의 내용이 떡철이가 죽은 지 72시간 후에 되살아나는데, 얼굴은 고스란히 썩어서 해골 상이 된 탓에[43] 수술을 받아 다시 원래의 얼굴로 돌아오는 장면에서 꿈을 깨는 등 지금 기준으로도 약을 한 사발 들이킨 듯한 묘사가 많다.

그 외에도 ≪노빈손의 남극 어드벤처≫는 스콧 일행의 참담한 현실과 그나마의 학술적 성과를 나름대로 묘사했지만, 스콧의 각종 오판들은 역시나 대부분 생략했다. 자신이 멍청했다고 자책하는 스콧에게 그러게 왜 그렇게 했냐고 깐족거리는 노빈손의 모습으로 간단하게 묘사하긴 하지만…

하지만 1980년대에 나온 책이나 만화에서는 제법 상세하게 설명한 적도 있었다. 이게 왜 그러냐면 1970~80년대에는 국내 출판계가 아무 생각없이 일본에서 나온 전집을 직역 수준으로 번역해서 그대로 출간했기 때문이다.

8. 미디어

9. 관련 문서



[1] 이는 마치 훗날 미국과 소련의 우주 경쟁과도 유사했다. 다만 사실 미국과 소련은 어느 정도 대등했고 또 이념이 끼어있는 등 복잡한 관계였는데 비해 아문센 vs 스콧에서는 애시당초 국력 면에서는 영국이 노르웨이에 넘사벽으로 앞섰는데도 정작 패배한 쪽은 영국이었고 그렇다보니 제국주의 영국에서 일방적으로 열폭한 것이었다. [2] 하지만 아문센이 죽은 이후 반세기도 넘은 1996년 이후에 진행한 이 주장을 검증하기 위한 여러 연구 결과 연구자 대부분이 '로버트 피어리는 북극점에 매우 가까이 갔을 뿐이었고 최초로 북극점을 정복한 사람 역시 아문센이다' 고 인정한다. [3] 참고로 이 은 '롱 톤'이라는 영국식 야드파운드법으로 2240파운드, 미터법으로는 약 1016 kg인 별도 단위다. 미국쪽 톤과는 다른데 미국쪽 단위를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4] 시발점으로 따지는 광화문을 기점으로 서울-부산은 약 428㎞, 경부고속도로 시점인 양재IC를 기점으로 했을 때는 약 401㎞ 정도(네이버 지도 계산 기준)다. 물론 부산에서도 세부적인 위치에 따라 거리는 다르게 나올 수 있다. [5] 자세한 경위는 알 수 없지만 남극의 극한에 노출되어 카메라 건전지가 맛이 갔던 것으로 보인다. 추위 속에서 배터리가 더 빨리 닳는 것은 내부 입자가 추위에 쭈그러들어서 발생하는 것이기에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한계인데, 남극의 혹한에 오랫동안 있었던 만큼 배터리가 언제 퍼져도 이상하지 않긴 하다. 거기다 당시 기술력의 한계도 있었다면 카메라 속 필름마저 대부분이 복구 불가 수준으로 손상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6] 역설적이게도, 스콧과는 정 반대로 포기해야 할 땐 포기할 줄 알았기에 남극에서 두 번이나 살아남은 어니스트 섀클턴 역시 영국인이었다. [7] 남극점에 2등으로 도착한 것 또한 스콧 자신의 실책 등 수많은 요소들이 겹치긴 했지만 그래도 그것 나름대로 훌륭한 업적임이 분명했다. 그나마 남은 영광은 물론 가장 중요한 탐험대 자신들의 목숨을 연명할 기회마저 걷어찬 최악의 실수가 바로 스콧 탐험대가 남극점에 도착한 이후에 나왔다. [8] 남극점에서 돌아온 11마리, 3명의 대원과 동쪽으로 에드워드 7세 반도(King Edward VII Land)를 탐험하고 온 17마리, 프람하임에 남아있던 11마리. [9] 경사를 내려가는 알파인 스키가 유명하지만 크로스컨트리 스키처럼 평지에서 타는 스키도 있다. 현재도 북유럽 국민들 대다수가 어린 시절부터 스키와 스케이트를 타기 시작하며, 핀란드 겨울전쟁에서 스키 부대를 운용하여 게릴라전을 벌임으로써 소련군을 괴롭혔고, 특히 노르웨이에는 "노르웨이 아이들은 스키를 신고 태어난다"라는 말도 있을 정도다. 동계 올림픽에서 이 나라들의 선수들이 메달을 휩쓰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10] 다문화 아이도 만들었다는 설도 있는데, 유전자 검사 결과 아문센은 혐의를 벗었고 아문센의 탐사대원 중 한 사람이라고 한다. 출처. 당시 일부 지역 이누이트들이 자신의 아내를 손님의 침실에 들이는 풍습(외지인의 혈통을 얻기 위해서라고 한다. 아마 고립된 외지에서 사는 소수 집단 내에서 근친혼의 부작용이 일어날 것을 예방하기 위한 것으로 추측된다)이 있었으니 딱히 그 대원을 욕할 이유는 없다. 물론 어디까지나 외지인과 마주칠 일이 좀처럼 없고 인구가 적은 곳이나 이럴 뿐이며, 아마존이나 아프리카에도 극히 인구가 적고 외지인이 없는 부족들이 같은 이유로 비슷한 풍습을 보이곤 했다. [11] 사실 남극은 이 시점에서 인류가 처음 내딛는 곳이고, 남극과 비슷한 환경을 인공적으로 만들 수 있는 기술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엄밀한 의미에서 검증된 것은 무엇 하나도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나마 북극 지방의 원주민들이 비슷한 환경에서 적응했다는 점에서 일정 부분 검증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2] 오리털, 거위털 등의 보온성이 좋은 새의 솜털. [13] 中空絲, 속이 비어 있는 합성 섬유. 특수 공정으로 실을 뽑거나 실에 비활성 기체를 첨가하는 등의 방법으로 만들며, 가볍고 보온성이 높다. 주로 인공 신장을 만드는 데 쓴다. [14] 땀이 전혀 안 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개의 땀샘은 네 발에만 아주 조금씩 있어서 몸통으로는 땀이 나지 않는다. [15] 어떤 위인전에서는 이를 조금 순화해서, 더 이상 달릴 수 없을 정도로 약해진 개들을 짐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죽였다고 표현했고 아문센도 이들을 죽일 때 미안하다고 속으로 독백하는 것으로 묘사했다. 게다가 옛날 위인전에서는 죽고 나서 자신의 고기까지 바친다면서 개의 충성심을 극찬하기도 했다. [16] 사실, 어떻게 보면 이 발언만 봐도 스콧이 남극 탐험을 굉장히 우습게 봤음을 엿볼 수 있다. 아무도 도달하지 못한 곳에 가는지라 본인의 생존도 장담할 수 없는 마당에, 개들의 안전을 걱정하는 등 방심이 하늘을 찔렀던 것. 심지어 썰매개에 쓰이는 견종들은 더 몸집이 큰 대형 애완견, 사냥개들도 '따위' 취급을 할 정도로 말도 안되는 운동량과 힘을 보여주는 종들이다. 물론 남극의 가혹한 환경은 썰매개들에게조차도 생존을 장담할 수 없게 만드는 곳이지만, 개썰매가 개에게 잔혹하다는 말에는 꽤 어폐가 있다. 특히 스콧이 이후 내린 선택을 보면 더더욱. [17] 뭔가 대단해 보이겠지만 위에 나왔듯 여기는 탐험가들을 모아놓고 한 강연도 그렇다고 탐험에 대해서 뭘 아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한 강연도 아니었다.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대다수가 탐험 경험이 없거나 부족한 지리학자나 지리학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들뿐일 것이다. 즉, 탐험에 대해선 문외한인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18] 특히 북극곰은 곰과에 속하는 동물 중에서도 흉폭하기로 손에 꼽는다. 주 서식지의 특성상 경계심이 강한 데다 식성도 육식을 주로 하기 때문이다. [19]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 등 영국 다른 지역에 비해 혹독한 겨울 날씨를 보이는 것은 사실이나, 해양성 기후의 특성상 한겨울에도 평균 기온이 섭씨 5도를 웃도는 정도로 체감치에 비해 온화한 편이다. 스카치 위스키가 수십 년 이상의 장기 숙성이 가능한 것도 겨울에도 비교적 높은 습도로 인해 위스키 증발률이 연 1~2% 정도로 낮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서울의 겨울 평균 기온보다도 훨씬 높은 것이다. 즉, 남극에 가져가야 할 물건을, 북극에서 겨울에 실험하고 가져왔어도 어떨지 모를 것을 스코틀랜드에서 날로 검증하고 가져갔다 보아도 무방하다. [20] 스켈턴 중위는 이후에도 해군에서 계속 근무하며 영국 해군 기관 병과 장교의 진급 상한선인 중장까지 진급하여 제독에 이르고 해군 기관 병과장을 지내는 등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어나갔고 천수를 누렸다. 중위가 대령과 마찰을 빚고 떠나버리고 그 대령이 탐험 중 사망한 것이 평가에 저하 요소가 되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어차피 스콧이 죽은 원인은 스켈턴 중위가 아니었으니까 그랬을 수도 있다. [21] 참고로 이 탐험 이후에 있었던 어니스트 섀클턴 남극 횡단 탐험에서 조난 시 제일 먼저 폐기처분한 것이 바로 이었다. 탐험에 쓸 예비 물자를 아르헨티나 등지의 항구에서 조달하려고 가져온 막대한 액수의 지폐였다만, 남극에서 조난당하여 생사를 오가게 된 상황에서는 그저 쓸모없는 종이 뭉치에 불과했기에 과감히 버리고 그만큼의 생필품들을 챙긴 것이다. 섀클턴은 이후의 생존 투쟁에서 27명에 달하는 대원들은 물론, 계획에도 없던 밀항자 1명까지 전원의 목숨을 살려서 영국으로 귀국시키는 데 성공했으니, 상황에 대한 판단력에 있어서 로버트 스콧이 감히 비빌 감이 못 되는 것이다. [22] 만약 돌아오면서 못 찾을 것이 걱정됐던 것이라면 중간의 물품 저장고까지만 끌고 가고 거기에 보관 후 나중에 챙겨도 됐을 것이다. 다만 아래에서 보듯 스콧 탐험대는 저장고나 경로 표시에도 소홀했기 때문에 그렇게 했어도 못 갖고 돌아올 가능성이 높긴 했을 것이다. [23] 이는 극지 탐험에서 생존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부분인데, 극한 탐험 중에는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살아남지 못한다. [24] 전래동화나 시골 드라마 같은 것에서 봤을 법한, 시골에서 밭갈기를 시키는 소에게 쇠죽을 끓여 먹이는 것은 여물의 소화 효율을 올려주기 위해서이다. 극한 환경에서 짐이 가득한 썰매를 끄는 말의 체력소모는 보통 환경에서보다 몇 배나 심한 것은 당연하다. [25] 출처: 말의 전쟁, 최강 기마대의 기록. [26] 오늘날에는 남극에서 300 클럽이라는 기행을 벌이는 사람이 있지만 이것 역시도 당연히 다른 구조 인원이나 의약품을 충분히 충원한 상태에서, 이런걸 할 만한 사람들, 즉 강인한 남극점 기지의 연구원이 한다. 300 클럽은 스트레스 해소가 목적이고 그들이 뛰는 곳은 이미 아문센과 스콧이 지나간 남극에 세운 아문센-스콧 남극점 기지이며, 기지에서 남극점까지는 약 100미터에 지나지 않는데 이것도 절대 쉽지 않다. [27] 영국 갤런을 리터로 환산하여, 소수점 첫째 자리에서 반올림한 수치이다. 아문센이든 스콧이든 미국 갤런을 기준으로 물품을 기록했을 리가 없으므로 영국 갤런일 것이다. [28] 당시 스콧 탐험대가 남극에 가져간 것에 가깝게 블렌딩한 홍차는 영국의 대형 유통업체로 유명한 테스코에서 제조한다. 한국에서도 테스코의 자회사인 홈플러스에서 '캡틴 스콧 블렌드'라는 이름으로 된 홍차를 구할 수 있었다. 홈플러스가 MBK파트너스에 매각된 이후로는 더 이상 신규 물량이 들어오지 않고 있다. 이 홍차는 다른 홍차에 비해 맛이 매우 진한 편이라 밀크티를 만들기에 적합하며, 판매 수익금 중 일부는 스콧 탐험대의 전초기지였던 남극 캠프를 관리하는 영국 남극유산기금(Antarctic Heritage Trust)에 기부된다. [29] 2002년에 방송한 영국의 요리 서바이벌 프로그램인 Jamie's Kitchen을 보면, 중도에 진행자이자 심사위원인 제이미 올리버가 현장에서 직접 떠준 신선한 참치 를 먹어보는 미션이 있는데, 이걸 못하겠다고 거부해서 탈락한 참가자가 등장했다. 여전히 생식에 대한 거부감이 영국인 사이에서 어느 정도 남아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30] 당장 한국만 하더라도 생선회를 언급하는 고려 시대 문헌이 있을 만큼 생선회 문화가 일본 못지않게 오래 전부터 발달한 나라이고 1인당 해산물 소비량도 세계 5위권에 들 만큼 해산물을 많이 먹음에도 생선회를 못 먹는 사람이 의외로 꽤 있다. [31] Huxley, Scott's Last Expedition, Vol. I [32] 단, 오늘날 남극에 거주하는 사람은 당장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 아니라면 절대 얼음과 눈을 녹여 식수로 쓰지 않는다. 그 안에 어떤 바이러스나 박테리아가 얼어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33] 두 점 사이의 각도를 정밀하게 재는 광학기계. 천체의 수평선상의 각도를 재어 관측 지점의 위도를 간단하게 구하는 데에 쓴다. [34] 남극일기란 제목으로 국내에 번역된 스콧의 일기 번역자 박미경도 서문에서 아문센의 불화 사건을 들먹이며 빌런같이 묘사하는 오류를 저질렀다. 배경지식 없이, 또는 교차검증을 하지 않고 작업할 작품만 읽고 몰입해서 번역 작업을 할 때 흔히 저지르는 오류다. 엄밀히 해당 도서 서문은 아문센의 남극점 정복 이전의 사전 측량 작업조차 '애초에 쉬운 길을 골랐다'는 표현을 쓰는 등 양 측 탐험대에 대한 중립적 서술 측면에서 결함이 존재한다. 자신이 떠날 길조차 제대로 사전에 알아보지 않고, 자신과 동료들의 목숨이 걸린 여정을 떠나는 판에 굳이 힘든 길을 골라서 가는 탐험가가 세상에 어디 있으며, 자신이 지도하는 훌륭한 집단의 통솔력을 갑자기 다른 리더를 들여와 흐려버리며 집단을 망치는 결정을 내릴 리더가 어디 있단 말인가? [35] 정작 블랙보로는 마치 처음부터 탐험대의 일원이었던 것인 양 대원들과 잘 화합하여 섀클턴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비록 퍼스가 밀항을 한 대가를 치르듯 동상으로 왼쪽 발가락을 전부 잃긴 했지만. [36] 스콧이 군인으로 복무하던 시기인 19세기 말에는 아직 공군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전쟁사에서 공군을 처음 창설한 것은 1914년 발발한 1차 세계 대전이다. [37] Apsley Cherry-Garrard, The Worst Journey in the World - Antarctic 1910-13, Chapter X. [38] 등산의 경우 물량이나 체력이 부족하다거나 혹은 등산을 늦게 시작해서 거의 저녁 무렵이 돼서야 산 정상에 도착하는 등산객이 꽤 있다. 하지만 겨울 산행은 빠르면 4-5시부터 이미 해가 지기 시작하고 여름 산행도 저녁 7시부터는 해가 지기 시작한다. 상식적으로 저녁이 되기 전에 하산을 마치는 것이 기본 상식이다. 그 시간대가 지나서 산행을 진행한다면 정상에 도달할 확률도 낮을 뿐더러 설령 정상에 도달한다 하더라도 조난당할 위험이 매우 높다. [39] 반대로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긴박한 상황(전투에서 누군가는 방어선을 사수해야 하는 등), 다른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상황이라면 목숨을 던지는 결정도 충분히 이해받을 수 있다. [40] 아문센은 오히려 여행 이전보다 살이 쪘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생명의 위기를 크게 느낀 적이 없다. 물론 아문센 본인을 포함한 탐사대원들도 크고 작은 동상이나 일시적인 피부병 질환을 앓았으며 남극의 혹독한 기후에 시달리며 많은 피로를 느끼기도 하였긴 했지만 당시 인류가 도달해 본 적이 없는 미답지에 도전한 대가로 보기엔 말도 안되게 싸게 먹힌 장사다. [41] 이러한 관점은 냉전 이후 미국이 명예훈장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볼 수 있다. 누군가 명예훈장을 수여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 희생이 필요한 상황이 발생했다는 뜻이므로, 오히려 장병이 자기 희생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처음부터 작전을 잘 짜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마치 손자가 진정한 승리를 거두면 영웅적인 활약도 무엇도 없이 겉으로는 별 볼일 없어 보인다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42] 심지어 스콧의 죽음에 대해서도, 어떻게든 살려고 하면 살 수도 있었지만 패배자로 살아남기보다 사람들이 자신을 '숭고한 순교자'처럼 기억하기를 원해서 동료들까지 같이 죽음에 몰아넣었다는 극단적인 평가까지 나오기도 했을 정도다. [43] 어차피 개그만화라 별 의미는 없겠지만 극지방에서는 시신이 얼어붙으면 몰라도 썩지는 않는다. 애초에 극지방이 아니라 웬만큼 더운 곳에서도 시신이 72시간 만에 뼈가 드러날 정도로 부패가 진행되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 [44] 1948년 개봉이면 비록 영연방의 뉴질랜드 국적이나 1953년 역사상 최초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에드먼드 힐러리가 영국 국기인 유니언잭을 꽂기도 5년 전이다. 이 영화는 아이러니하게도 대부분을 노르웨이에서, 일부는 스위스의 알프스 등지에서 촬영했으며, 남극의 실상을 보여주기 위해 실제로 남극으로 가서 담은 장면을 대거 보여주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