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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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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고대 ~ 중세 초3. 중세4.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5. 체코슬로바키아 (1918~1992)6. 체코 공화국 시기(1993~)

[clearfix]

1. 개요

체코의 역사를 다루는 항목.

2. 고대 ~ 중세 초

오늘날 체코 일대는 고대 로마 제국의 진출 한계선에 속한 지역이었는데, 특히 2세기에는 마르코만니의 영역이었다. 기원후 170년대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마르코만니 전쟁을 치르며 이곳으로 진출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마르코만니를 어느 정도 굴복시킨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나아가 마르코만니아 속주를 신설하려 했다. 그러나 아우렐리우스의 사망 후 콤모두스는 영역 확장 계획을 접었고, 이후 이 지역은 줄곧 로마 제국의 통치 영역에는 속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지역에 살던 부족들은 인접한 로마 속주에서 문화적 영향을 받았다.

오늘날 체코 국가의 기원은 고대 말기 동유럽에서 중앙유럽으로 이주해 온 슬라브족의 한 분파로 거슬러 올라가며, 현 체코인들은 서기 5세기~6세기경에 체코 지역에 정착한 것으로 보이며, 그 이전에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켈트족 게르만족이 살았다.

슬라브족들이 체코 지역에 정착한 이후로 부족국가를 이루며 살다가, 아바르족이 체코 지역에까지 집적거리기까지 하다가 서기 624년경에 최초의 나라다운 나라인 사모 제국이 건국되었다. 사모는 프랑크 제국의 상인이었지만 아바르족의 침공에 대항해온 슬라브 부족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으며 그 영토도 체코와 슬로바키아 일대는 물론이고 독일 폴란드 일부지역, 슬로베니아에 이르기까지한 광활한 국가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사모왕국은 어디까지나 사모의 개인적인 능력으로 지탱해온 국가였기 때문에 사모가 죽은 지 오래치 않아 곧 소국으로 분열되었으며 사모왕국과 그 후예국가에 대한 기록이 위낙 소락하기 때문에[1] 이 당시의 정세를 알기 어려우나 이후로 소국들이 난립해온 것으로 보인다. 이후로 다시 국가다운 국가가 나올 때까지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

서기 830년경 대 모라비아 왕국이 등장하며 체코 동부 일대와 폴란드 남부, 슬로바키아 서부 일대를 지배했으나 906년 마자르족의 침공으로 멸망했다. 이후 좀 더 서쪽의 보헤미아 분지를 중심으로 새로운 국가가 수립되었다. 전설적인 농부 프르셰미슬을 시조로 하는 보헤미아 공국 프르셰미슬 왕조가 성립하여 9~14세기 체코를 지배했으며 바츨라프 1세 (921~929) 무렵에 완전히 기독교화되었다. 이후 갓 성립한 신성 로마 제국과 수없이 투닥거렸다.

3. 중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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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로마 제국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오타카르 1세(1192~1230) 시기 1198년 보헤미아 공작이 왕의 칭호를 하사받으면서 보헤미아 왕국으로 승인받았다. 이 무렵 보헤미아 국왕 오타카르 2세 오스트리아 공국, 슈타이어마르크 공국까지 흡수하여 신성 로마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제후로 급부상했다. 그러나 독일왕위를 두고 합스부르크 가문 루돌프 1세와의 다툼에서 독일 제후들과 연합한 루돌프 1세에게 패배하면서 오타카르 2세는 전사했고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는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넘어갔다.[2] 이 사건과 이어진 동방식민운동을 계기로 많은 독일인이 오늘날의 체코 땅에 정착했다.

바츨라프 3세의 암살로 프르셰미슬 왕조가 끊기자 케른텐의 하인리히나 루돌프 1세의 손자이자 독일왕 알브레히트 1세의 맏아들 오스트리아 공작 루돌프 3세 등이 보헤미아 왕위에 오르기도 했으나 모두 왕조를 세우지는 못했다. 보헤미아 귀족들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7세의 아들이자 바츨라프 2세의 딸 엘리슈카 공주와 결혼한 요한에게 보헤미아 왕위를 제안했고 요한이 이를 수락하면서 얀 루쳄부르스키로 즉위하여 룩셈부르크 왕조가 성립했다. 얀은 프랑스 왕국 잉글랜드 왕국이 벌인 백년전쟁에 참전했다가 크레시 전투에서 전사했고 보헤미아 왕국을 상속받은 그의 아들이 루트비히 4세를 물리치고 카를 4세로 선출되어 할아버지가 보유했던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까지 차지하였다. 카를 4세는 금인칙서를 반포하여 보헤미아 국왕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를 선출할 권한을 가질 선제후로 선언하여 제국 내에서 보헤미아 왕국의 독자적 지위를 더욱 공고화하고 체코어 학문 부흥을 지원하는 한편, 프라하 프라하 대학교를 설립했다.

잉글랜드의 종교 개혁가 존 위클리프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은 얀 후스 마르틴 루터보다 한 세기 앞서 보헤미아와 모라바에서 프로테스탄트 개혁에 착수했다. 1415년 가톨릭 교회가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그를 처형한 것을 계기로 체코인들이 봉기하였다. 체코 귀족들은 후스의 처형을 전후로 무능한 국왕 바츨라프 4세와 콘스탄츠 공의회에 체코어로 쓴 서한에서 "우리 민족과 보헤미아 땅의 치욕"에 항의했다. 프라하 대학교의 체코인 교수들 역시 독일인이 후스를 처형했다면서 다른 체코인에게 봉기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발발한 후스 전쟁 동안 얀 지슈카 등의 명장의 지휘의 힘입에 체코인은 제국군의 침략을 격퇴했다. 얀 지슈카가 이끄는 농민 봉기군은 제국군을 격파하여 주변 국가들에게 충격을 주고 다른 지역에까지 쳐들어가 보복 공격을 감행하여 승리를 견인하였다. 얀 후스가 이끄는 종교 개혁 운동의 명목상 쟁점은 종교적인 것이었지만, 대체로 이는 주로 체코인이 자신들과 독일인의 정체성을 구별하기 위한 운동이었고 체코의 귀족층과 도시, 농촌 가릴 것 없이 일어났다. 바츨라프 4세를 감금하고 즉위한 이복동생 지크문트에 의해 후스 봉기는 결국에는 진압되었지만 체코의 독립성과 자치 제도, 체코어의 사용 권리 등을 보장받는 결과를 이끌어냈다.

지크문트가 아들 없이 사망하면서 룩셈부르크 왕조는 단절되었고, 이후 사위인 합스부르크 가문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5세가 선출되어 오스트리아 공국, 보헤미아 왕국,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 왕국 동군연합 단초가 마련되었으나 알브레히트 2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그의 유복자 라디슬라프 포흐로베크는 태어나지도 않았던 까닭에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에서는 폴란드 왕국 야기에우워 왕조 브와디스와프 3세가 즉위했고 보헤미아 왕국은 유력 귀족이었던 이르지 스 포데브라트가, 오스트리아 공국은 친척인 프리드리히 5세가 섭정을 맡게 되었다. 라디슬라프가 후사 없이 어린 나이에 사망하면서 헝가리와 크로아티아는 다시 후녀디 가문의 마치시 코르비누스가, 보헤미아는 이르지 스 포데브라트가 각기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후스파였던 이르지는 가톨릭 교회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했으나 후스파를 적대한 교황 비오 2세는 이르지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를 필두로 다른 유럽 국가들 역시 이르지를 인정하지 않았다. 비오 2세의 선종 후 선출된 바오로 2세는 이르지를 파문했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국왕 마차시 1세가 이에 동조했다. 마차시 1세가 보헤미아 일부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 침공을 감행했으나 이르지에게 포위되어 협조를 맹세하고 풀려났지만 곧 다시 반기를 들어 모라바, 슬레스코, 루지체에서 지지를 받았다. 이르지는 1471년 사망했고 이르지의 지지자들은 리투아니아 대공 겸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4세 야기엘론치크의 맏아들 브와디스와프를 새로운 보헤미아 국왕 블라디슬라프로 선출했다.[3] 그러나 교황청을 비롯해 모라바, 슬레스코, 루지체 뿐만 아니라 보헤미아 왕국 내의 가톨릭교도 대부분이 마차시 1세를 보헤미아 국왕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전쟁은 계속되었고, 결국 올로모우츠에서 협약이 맺어져 보헤미아에서는 블라디슬라프가, 모라바와 슬레스코 및 루지체에서는 마차시 1세가 지배권을 갖기로 하였다. 1490년 마차시 1세가 사생아만 남기고 사망하면서 블라디슬라프는 보헤미아 왕국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회복하였고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에서도 새로운 국왕 울라슬로 2세로 선출되었다.

4.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

16세기에 들어서 희대의 영토 승계가 이루어지는데, 블라디슬라프는 늦은 나이에 안나 러요시 2세를 두었고, 이때 보헤미아와 헝가리-크로아티아를 오랫동안 탐낸 합스부르크 가문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대공 막시밀리안 1세가 접근했다. 막시밀리안 1세는 자신의 손자, 손녀와 블라디슬라프의 딸, 아들을 결혼시키자 제의했고 안나와 페르디난트, 러요시 2세와 마리아의 결혼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어린 나이에 즉위하게 된 러요시 2세는 누나 안나와 함께 막시밀리안 1세의 호프부르크 궁정에서 자랐고 사실상 합스부르크 가문의 꼭두각시로 전락했다. 1526년 오스만 제국 파디샤 쉴레이만 1세가 헝가리 왕국을 침공하자 이를 막기 위해 친정을 떠난 러요시 2세는 모하치 전투에서 패배해 전사했고, 러요시 2세의 매형이자 처남인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는 보헤미아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 새로운 보헤미아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이때부터 체코는 1918년 독립할 때까지 400년 가까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받았다.[4]

합스부르크 치하에서 보헤미아 왕국은 경제력이 가장 발달한 곳이었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토인 오스트리아 대공국보다도 훨씬 부유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에 반감이 컸다. 페르디난트 1세의 경우 신성 로마 제국의 개신교 제후들에게는 관대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다스리는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에서는 대항종교개혁을 시행해 개신교를 억압했다. 루터교회에 호의를 보였던 막시밀리안 2세는 보헤미아의 신교도에게 관용을 베풀었지만, 외가인 스페인 합스부르크에서 보수적인 가톨릭 교육을 받고 온 루돌프 2세 프라하를 수도로 삼았음에도 불구하고 보헤미아의 신교도들을 억압했다. 여기에 민족감정까지 겹쳐서 보헤미아 왕국은 30년 전쟁의 발단 원인이 되었다. 보헤미아의 봉기가 독일 전역으로 확산되어 독일이 초토화된 것과는 별개로, 이 전쟁에서 보헤미아는 페르디난트 2세를 폐위하고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를 옹립했다가 패배하여 복위한 페르디난트 2세의 더욱 강압적인 지배를 받게 되었다. 페르디난트 3세 베스트팔렌 조약을 체결하여 30년 전쟁을 끝낸 1648년 즈음에 이르러 체코인 인구는 전쟁 전에 3분의 1도 안 되는 수준으로 감소하였다. 체코 민족주의자들은 30년 전쟁부터 18세기 말에 이르는 시점을 감소한 보헤미아인 인구를 대체한 독일인 이주와 독일화, 경제 침체를 이유를 들어 이 시기를 암흑시대로 간주한다. 당시 상당수의 체코인 개신교도 귀족들은 추방당하고 영토가 몰수되었으며 독일인, 헝가리인 등등이 이들의 영지를 접수하였다. 나중에 1781년 요제프 2세에 의해 개신교를 관용하겠다는 선언이 나오긴 했으나[5] 반종교개혁 운동의 후유증으로 인해 아직도 체코에서 개신교 숫자는 가톨릭을 넘지 못한다. 물론 현재는 공산주의 시절 영향으로 무신론이 훨씬 많다.

아들이 없던 카를 6세가 사망하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지자 보헤미아 귀족들은 바이에른 카를 알브레히트를 국왕으로 선출하기도 했으나 오스트리아군이 프라하를 탈환하자 마리아 테레지아를 보헤미아 국왕으로 인정할 수 밖에 없었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는 더더욱 공고해졌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보헤미아 발전에도 심혈을 기울였고 그 후에도 보헤미아 왕국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여타 지역보다 우월한 상업적 기반을 바탕으로 합스부르크 세습령에서 가장 중요한 세금 획득지 구실을 톡톡히 했다.[6] 그러나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당시 자신을 버리고 카를 알브레히트를 지지했던 보헤미아 귀족들을 고깝게 여겼고 이후 보헤미아는 합스부르크 제국 내에서 헝가리와 비교하여 점점 밀려나기 시작했다. 심지어 1749년에는 보헤미아 왕관령이 사실상 해체되어 보헤미아 왕국의 업무가 프라하가 아닌 에서 처리되기 시작했다.

18세기 말, 요제프 2세 시기부터 체코 문화 부흥운동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고, 나폴레옹 전쟁의 결과 체코에서도 민족주의 열기가 고조되었다. 1815년 결성된 독일 연방 보헤미아 왕관령이 포함되었기 때문에 독일 통일 문제에서도 문제지역으로 거론되었다. ' 대독일주의'에 따라 오스트리아, 체코까지 포함한 독일국가를 세우면 독일인이 아닌 체코인까지 영토에 포함시킨다는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이는 순수한 민족국가의 성립이라는 '지상과제'가 중부유럽에서는 허상에 지나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7]

아무튼 독일이 통일되면 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우세한 독일인에게 영원히 종속될 것을 우려해 체코인 독립운동의 대부인 프란티셰크 팔라츠키는 1848년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의 초청을 거부했다. 그는 오히려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구조를 존속시키고 체코인이 여기에 협력해 오스트리아의 '파트너'로 대우받는 '오스트로슬라브주의(Austroslawismus)'를 제시했는데, 이는 1918년까지 약 70여년 간 체코인의 독립운동에서 가장 우세한 이론으로 자리잡았다. 이는 1848년의 독립운동이 좌절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라는 현실을 인정하고 오스트리아에 협력하는 것이 살아날 길이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또 오스트리아가 억지로 해체되면 오스트리아를 흡수한 독일과 다른 슬라브족을 삼키려 드는 러시아 사이에 낀 체코인이 좋은 꼴 보기 어렵다는 통찰도 반영되어 있었다.

범슬라브주의를 앞세운 러시아의 위협을 막기 위해 합스부르크 가문의 보호 속에서 체코인의 발전을 추구해야한다는 팔라츠키의 통찰력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체 이후 체코가 당한 수난을 생각하면 엄청난 혜안이었으나, 정작 팔라츠키의 제안은 오스트리아 당국에 의해 무시당했고, 오히려 1867년 프란츠 요제프 1세 헝가리를 오스트리아의 '파트너'로 선택하면서 체코인은 더 강한 억압을 받았다. 이런 가운데서도 상공 시민 계층의 노력으로 1881년 체코 지역 내의 행정기관에서 체코어를 사용하는 업무처리가 허락되고[8], 1907년 보통 선거권이 인정되는 등 부분적인 타협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체코인은 제국 내에서의 '파트너'로의 승격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슐람페라이(Schlamperei)로 대표되는 오스트리아 정부의 관대함 때문이 아니라 체코인이 그만한 힘을 키웠기 때문이었다. 19세기 말에 이르면 보헤미아 내의 주요 도시들은 모두 철도망으로 연결되었고 체코인들은 대부분 문맹 상태를 벗어난 후였다. 빈 정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서 가장 산업화된 보헤미아 지방의 체코인들을 더이상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한편 헝가리는 자국 내 슬라브 민족의 자치 요구를 우려하여 오스트리아 정부에게 체코인의 자치 요구를 받아들이지 말 것을 압박하였고 주데텐란트 프라하에 주로 거주하는 독일계 역시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고자 체코인의 자치 요구를 반대하였다. 제위 계승자이자 제국 내에서 비주류였던 프란츠 페르디난트 동등한 민족들의 연방 국가를 구상하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오스트리아-헝가리-크로아티아 제국 방안도 논의되고 있었기 때문에 과거처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가 필연이었다는 의견이 더이상 주류는 아니지만 삼중제국 방안은 어디까지나 크로아티아인에게만 동등한 주권을 주자는 논의였기에 만약 실현되었다면 체코인들은 자신들에게도 30년 전쟁 이전의 동등한 주권을 다시 줄 것을 요구했을 것이다.

사라예보 사건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고 나서도 1916년까지 오스트로슬라브주의는 보헤미아 왕국에서 큰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제국의 패색이 짙어지기 시작하고 슬라브 민족에 대한 동등한 주권은 논의 대상도 아니며 마사리크 등이 제출한 청원서가 펼쳐지지도 못하고 파기되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오스트로슬라브주의 세력이 분리독립 세력에 가담하며 체코는 결국 독립을 추구하기로 결정했고, 동맹국의 패전으로 1918년 11월 체코는 카렐 3세를 폐위하고 헝가리 왕국 북부의 슬로바키아와 연계하여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 그리고 귀족 제도를 폐지하여 합스부르크 가문의 복위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이후 당시 6만에 이르는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중 러시아에 주둔하던 일부가 체코가 독립한 것을 듣고 귀국하려 하지만 당시 볼셰비키에 막혀 육로로 가지 못하고 있었다. 때문에 이들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배를 타고 프랑스를 통해 체코로 가기로 하고 이 과정에서 더이상 필요 없어진 이들의 무기들을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에 주고 왔다. 이를 가지고 북로군정서군은 청산리 전투를 수행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가 끝난 현재, 체코 역사학계에서 300여 년의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는 민족 문화 발전이 저해된 흑역사 취급을 받고 있다. 합스부르크 가문 보헤미아 국왕은 막시밀리안 2세를 제외하고는 죄다 부정적인 평가[9]밖에 없다.

5. 체코슬로바키아 (1918~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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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슬로바키아는 독립 이후 영국, 프랑스와 연계하여 의회주의를 발달시켜 점차 민족주의 파시즘이나 권위주의 독재국가로 돌입한 헝가리 왕국,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 오스트리아 연방국,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루마니아 왕국, 유고슬라비아 왕국, 폴란드 제2공화국 등 주변국들과 차이를 보였다. 그렇지만 체코슬로바키아도 존속기간 내에 자국 내 폴란드인 루신인 소수민족을 차별하는 정책을 펴기도 했다. 물론 나치에 비하면 별 것 아니었지만. 이 시절 프라하는 "동유럽의 파리" 소리를 들었다.

1930년대가 되자 체코슬로바키아는 경제불황의 여파 속에서 아돌프 히틀러 나치 독일에게 영토할양 요구를 받는 등 이중고에 시달렸다. 체코와 독일의 접경지역인 주데텐란트에 다수의 독일인이 거주하니 이를 넘기라는 압박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가 믿을 수 있는 건 영국, 프랑스 등의 우방국 뿐이었지만, 전쟁을 막기에 급급했던 영프에게 체코는 철저히 관심 밖이었다. 1938년 뮌헨회담에서 독일은 유럽열강에게 주데텐란트의 할양을 공인받았으며, 이에 그치지 않고 1939년에는 체코 전역을 합병, 슬로바키아를 괴뢰국화해버렸다(그 유명한 뮌헨 협정이다. 체코에서는 "뮌헨의 배신"이라고도 부른다). 사족으로 이때 체코슬로바키아의 대통령은 에밀 하하이다.[10]

곧이어 벌어진 제2차 세계 대전 중 체코는 공업력의 착취를 받았으며, 유럽 전선에서 가장 최후의 전투도 체코에서 일어났다. 전쟁이 끝나자 체코는 붉은 군대에 의해 해방되었지만 동시에 소련의 통제에 들어갔다. 전쟁 막판에 타결된 얄타 회담에 따라 체코슬로바키아는 동슬라브인이 다수 거주지역이었던 동쪽 끄트머리의 카르파티아 루테니아를 소련에 빼앗겼다.

전후 체코슬로바키아의 전략적 위치가 가진 중요성 때문에 연합국은 폴란드와 더불어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자유선거로 신정부를 구성할 것을 소련에 요구했지만, 이오시프 스탈린은 처음에는 듣는 척하다가 결국 공산당의 쿠데타를 조종해 1948년 2월 공산정부를 수립시켰다. 이 사건은 그리스 튀르키예에서 진행된 공산당의 빨치산 게릴라, 국공내전의 격화와 더불어 초기 냉전을 형성한 주요 사건 중 하나가 된다.

1948년 공산당의 지배를 받게된 체코슬로바키아는 소련에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으로 종속되어 위성국가로 전락했다. 특히 스탈린식 공산주의의 엄격한 통제와 폭압을 견디다 못한 체코인들은 1968년 이른바 ' 프라하의 봄'으로 스탈린 스타일 공산주의에서의 해방을 요구했지만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보낸 군대에 의해 무차별 진압당했다. 이 사건으로 유럽의 좌파들은 소련에 대한 '환상'을 모두 버리게 된다.

프라하의 봄이 처절하게 진압당한 것과 벨벳 혁명 이후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타 동구권 국가들과 달리 비교적 안정적인 경제회복, 성장을 이루었기 때문에[11] 실제로 유튜브 등을 통해 1970~80년대 음악이나 영화, 방송등을 검색해 보면 생각보다 그렇게 억압적인 분위기는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으며 종교활동도 공산화 이전보다 많이 위축된 건 사실이지만 당시에도 대부분의 가톨릭, 개신교 교단들은 어느 정도 인정되었고 미사와 예배 참석도 허용되었다.[12] 그리고 '카르비나'사의 킬스위치라는 게임이 공산정권과 연관되었다는 괴담 역시 거짓으로 판명난 상태이다. 공산정권 시절 체코슬로바키아는 슈퍼마켓이 존재했고 자본주의 국가들처럼 돈 주고 사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게다가 아무리 서독에 비교해서 떨어진다 해도 당시 체코슬로바키아는 동구권에서 동독 과 함께 경제력이 최상위였던 나라다.[13]

브레즈네프 독트린(제한 주권론)에 의해 다시 통제당한 체코슬로바키아는 결국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소련의 실질 지배하에 있다가,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노선 전환으로 소련이 개혁에 착수하자 비로소 '해방'되었다.

1988년 체코슬로바키아 시장경제 체제를 공식 도입하고, 1989년에는 공산당 1당 독재가 종식되고 바츨라프 하벨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에 체코 슬로바키아 사이의 갈등이 벌어지면서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양자의 차이를 인정하고 평화적으로 분리, 독립하기로 결의하였다.

6. 체코 공화국 시기(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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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정권을 몰아낸 이후[14] 1993년 1월 1일부터 체코는 어느 한 나라에 귀속된 역사가 아닌, 진정한 체코인만의 역사를 시작하였다. 1999년에는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에 가입하였다. 2004년에는 다른 중부유럽, 발트 3국, 발칸 반도 국가들과 함께 유럽연합(EU)의 정회원국이 되었다.

여타 동유럽보다 높은 경제력 때문에 유럽 난민 사태에서 막대한 수의 이라크, 시리아 난민들을 떠맡아야 할 판이 되었다. 당연히 체코는 아일랜드, 스위스, 슬로바키아, 기타 동유럽 국가들과 함께 결사 반대한다. 영국이나 프랑스는 제국주의 시절에 중동에 저지른 짓(종교, 민족 분열, 일방적인 식민지 국경선 획정 등)이 있으니 어느 정도 자업자득이긴 하지만, 체코 같은 경우는 역사적으로 중동에서 깽판을 치긴 커녕 오스트리아나 독일 등 강대국들한테 시달리던 입장이라 자국이 난민을 떠맡아야 한다는 것에 상당히 억울해한다.

바츨라프 광장에 모인 약 25만 명의 시위자들이 200만 유로(약 26억 원)의 EU 보조금을 불법적으로 받았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안드레이 바비스 총리와 신임 법무장관의 사임을 요구하고 나섰다. 1989년 벨벳혁명 이후 최대 규모다. #

2023년에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분리된지 30주년이 된다.

[1] 애초에 사모왕국에 대한 기록도 많지 않으며 사모왕국에 대해 전해져 내려오는 기록가운데서 신빙성이 적은 것도 포함되어있다. [2] 참고로 오타카르 2세는 당대 최고의 영웅으로 단테 알리기에리 신곡에 황금과 철의 왕으로 등장한다. [3] 이때 러요시 1세처럼 국왕이 폴란드를 비우는 사태를 우려한 폴란드 귀족들은 카지미에시 4세가 죽자 3남인 을 선출했다. [4] 페르디난트 1세는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에서도 국왕으로 선출되었으나 크로아티아는 오스만 제국으로 인해 1/3 정도만 차지했고, 헝가리 역시 오스만 제국과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거부한 동부 귀족들로 인해 오늘날의 헝가리 서부와 슬로바키아에 해당하는 1/3만 차지했다.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전역은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과 1713년 파사로비츠 조약이 체결되고 나서야 수복했다. [5] 이 당시에 지어진 일명 '관용교회(toleranční kostel)'라는 것들이 현재에도 남아있다( 체코어 위키) [6] 이 지역이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에 중요했다는 것은 나폴레옹 전쟁 때 오스트리아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이탈리아 반도 밀라노 공국과 현재의 벨기에 룩셈부르크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프랑스 알자스 독일 슈바벤 일대의 월경지 외지오스트리아(Vorderösterreich)를 뜯기면서도 체코와 헝가리, 크로아티아 등 핵심 영토는 지켜냈다는 것에서 드러난다. [7] 결국 독일 통일은 1866~71년 사이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주도한 ' 소독일주의'통일로 귀결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통일된 ' 작은 독일'조차 민족적 순수성이 없었다. 왜냐하면 프로이센 왕국 영토인 동프로이센 남부와 서프로이센, 포젠, 오버슐레지엔에는 폴란드인이 있었다. 게다가 1864년 프로이센에 병합된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도 덴마크인이 거주했고, 1871년 합병한 알자스-로렌에는 프랑스인이 살았으므로 순수한 독일인의 제국이라는 이상은 결국 허상에 불과했다. 이는 보통 독일 통일이라는 거창한 사건 때문에 역사적으로는 잘 조명되지 않는 문제다. 사족으로 오늘날 독일 동부 브란덴부르크 작센 일부인 라우지츠(체코어로 루지체) 지역에는 현재에도 소르브인(Sorbs)이라는 슬라브계 소수민족이 약 6~7만 명 정도 살고 있다. [8] 물론 쉽지는 않았다. 식당 메뉴판에 독일어를 적느냐 체코어를 적느냐 등 사소한 문제부터 의사당에서 독일계 의원들과 체코계 의원들이 서로 주먹다짐을 벌이는 등 크고 작은 말썽이 많았다. [9] 루돌프 2세는 프라하의 문화, 예술 부흥만 긍정적일 뿐, 정치적으로는 부정적인 견해가 훨씬 강하다. 그나마 예외는 레오폴트 2세인데 여기는 빈으로 빼앗아갔던 보헤미아 국권의 상징인 성 바츨라프 왕관(Svatováclavská koruna)을 프라하로 돌려주었기 때문에 우호적인 시각이다. [10] 엄밀히 말하면 뮌헨 협정 체결 당시 대통령은 에드바르트 베네시(Edvard Beneš)이다. 뮌헨 협정 이후 베네시가 퇴임하자 그 후임으로 대통령직을 이은 게 바로 이 에밀 하하(Emil Hácha) 대통령이며, 그는 독일이 체코를 합병한 뒤에도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의 명목상 대통령으로 남았다. 재임기간 동안 독일의 강압적인 통치에 항의를 표시하기도 했으며(비록 별 효과는 없었지만...), 외국에서 체코슬로바키아 망명정부를 이끌던 전임자 베네시 대통령과 이따금 비밀리에 협력하기도 했다고 한다. [11] 참고로 빈부격차가 크냐면 그것도 아니라서, 체코 같은 경우는 지니계수가 0.28 정도에 불과해 유럽에서도 가장 작은 축에 속한다. [12] 체코 개신교단(ČCE)에서 쓰는 예전의식서(Agenda)의 현 형태는 공산체제 후반기인 1983년에 만들어진 것을 개정한 것이다. [13] 냉전이 한창이던 1970년에 체코슬로바키아의 1인당 GNP는 1972달러였고, 동독의 1인당 GNP는 1801달러였다.한편 서독은 2206달러였고, 미국과 소련은 각각 4304(...),1735달러였다. 한편 냉전이 끝날 무렵 체코슬로바키아의 1인당 GNP는 7,878달러로 대한민국의 4,600달러보다 훨씬 높았다. 참고로 소련의 1인당 GNP가 9,211달러, 동독이 9,679달러였다. 물론 공산주의 국가의 환율은 국가가 정하는 것이고 시장의 환율과는 괴리되어 있음을 감안해야 한다. [14] 다만 그런것 치고는 공산당의 세력은 의외로 강한 편이다.(...) 각종 선거에서 득표율 10%는 기본으로 찍으며 하원에서 30석은 기본적으로 확보하고 있기 대문에 사회민주당과 시민민주당만 못하지만 그래도 양당의 세력이 과반을 확보하는 수준은 아닌지라 기본적으로 제3정당으로써의 입지는 있기는 하다. 하지만 상원은 소선거구제와 결선투표제가 적용되기 때문에 몇 석 정도나 확보하는 것이 고작인 수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