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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통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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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 행렬도[1]

1. 개요2. 역사3. 여정4. 규모5. 목적 및 활동
5.1. 의례 싸움5.2. 히데요시 법단 호코지 다이부츠젠 연회
6.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7. 역대 조선 통신사8. 논란
8.1. 일본 우익계의 '조공사절' 주장 및 강조8.2. 기록화 내 닭도둑 묘사 논란
9. 일본국왕사(日本国王使)10. 대중매체11. 관련 단체12.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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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朝鮮通信使

조선 시대 일본으로 보낸 외교 사절단. 당시 어휘 '통신'은 '국왕의 뜻을 전함'이라는 의미였다.

일반적으로는 1607년( 선조 40년)부터 1811년(순조 11년)에 이르기까지 조선이 에도 막부에 파견한 사절단들을 가리키지만 연구자에 따라서는 조선 전기에 파견한 사절도 포함시키기도 하며 실제로 실록을 찾아보면 태종 대부터 '통신사' 가 일본에 파견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역으로 일본에서 조선에 파견한 '일본국왕사'의 일본과 맞추기 위해 후대에 '조선 통신사(朝鮮通信使)'라고 부르고 있을 뿐 정확한 당대의 공식 명칭은 그냥 通信使(통신사)로, 조선시대에 '조선 통신사'라는 호칭을 조선측이 스스로 쓴 적은 전혀 없었다. 조선 시대에 파견된 통신사라는 것을 교육하기 위해 후대에 '조선'이라는 말이 앞에 추가된 것으로 추정된다.

2. 역사

임진왜란 이전 무로마치 막부 시절에는 딱히 규칙을 정해놓지 않고 몇 번 오갔고[2] 오닌의 난 이후 일본 전역이 전란에 빠지면서 중앙 정부가 지방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우치 등 지방 다이묘가 따로 조선에 공물을 바치고 교류하기도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해 전국 시대를 끝내고 임진왜란을 일으킨 직후에는 당연히 일본과 외교가 단절됐다. 임진왜란 전까지는 사절단이 일본 각지로 70번 가량 방문했다.

그러다 전쟁이 끝난 지 채 10년밖에 안 된 1607년에 그동안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자신의 정권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임진왜란과는 상관없다는 언급을 하며 먼저 국교 재개를 수차례 요구한 끝에 조선 조정이 이를 받아들여 국교를 재개한다.[3] 이후 포로 교환 및 정보 수집 목적으로 3회에 걸쳐 사명당을 비롯한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라는 사절을 파견한다. 조선에선 원수였던 일본과 화해하는 게 달갑지는 않더라도 일본과 계속 사이 나쁘게 지내면 언젠가 다시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도 있었고 후금(후일의 청나라)이 날이 갈수록 강성해지니 후방에 있는 일본과 좋게 지낼 겸 임진왜란의 전범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세력을 멸망시킨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어떤 사람인지는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도쿠가와 입장에선 새로 집권하긴 했지만 1615년 오사카 전투 이전까지는 도요토미 파벌을 완전히 제압하지는 못한 상태라서 국제적으로 인정받아 명분을 쌓을 필요가 있었던 데다가 그는 조선을 공격할 생각도 없었으므로 조선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게 이득이었다.

이후 에도 막부 시기인 1811년까지 일본의 요청을 받아들여 회답겸쇄환사가 3번, 통신사가 9번 파견되었다.[4] 처음에는 쇼군의 아들이 태어난 것을 축하한다거나 태평성대가 오래 유지되는 것을 축하한다는 등 갖가지 명목으로 파견되었지만 회답겸쇄환사까지 포함하여 6회째인 1655년부터 새로운 쇼군의 취임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보내졌는데, 쇼군은 스스로 물러나지 않는 한 종신직이었으므로 비정기적으로 파견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통신사는 한양을 출발해 육로로 동래까지 간 다음 배를 타고 오사카, 강을 거슬러 교토까지 가서 에도까지 이동했다.[5]

마이너 버전(?)으로 류큐 왕국에서 보낸 사절단인 류큐 사절(琉球使節)이 있으며, 이들의 에도 방문을 에도노보리(江戸上り)라고 했다. 류큐 왕국은 당시 일본 본토와 달리 청나라와 적극적으로 교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의 사정을 궁금해했던 많은 일본인들이 관심을 가졌다.[6] 류큐 사절단은 은사사, 하경사로 불렸는데 대등한 관계로 쇼군에게 바로 국서를 보낼 수 있던 조선과 달리 이미 일본에 예속되어 있던 류큐 국왕은 막부의 실력자인 로주들에게만 국서를 보낼 수 있었다.

조선 중후기 일본어 교재인 첩해신어는 동래 왜관에서 조선 통신사 관련 준비 작업을 하는 것을 주제로 대사가 짜여 있다. 저자 강우성부터가 통신사로 일본에 몇 번 갔다 왔던 사람이고 실제 통신사의 세세한 부분을 그대로 작성하여 관련 연구에 참고되기도 한다.

3.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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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가 끝이 아니고 닛코까지 이어지는 것은, 그곳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당인 닛코 동조궁이 있었기 때문으로 4~6대 통신사가 이곳을 방문했다.

통신사가 한양에서 에도까지 왕복하는 데 짧게는 5개월에서 길게는 1년이 걸렸다. 기본적으로 거리만 왕복 4,000km에 달하는데다 일정에 한여름이나 한겨울이 껴있으면 시간이 더 걸렸다. 한양을 떠난 통신사는 부산까지 가는 도중에 충주, 안동, 경주 등을 거치며 전별연(餞別宴)을 받았고 격군(格軍), 기수(旗手), 노자(奴子) 등 사행에 필요한 인원을 합류시켰다.[7] 부산에 도착해도 바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길일(吉日)을 정해 출발하였으며 또한 무사히 갔다오길 바라며 부산 영가대(永嘉臺)[8]에서 용왕에게 해신제(海神祭)를 지냈다. 일본까지 타고 갈 배는 경상좌수영, 경상우수영이 기선 3척과 복선 3척, 총 6척을 제작했으며 삼사(三使)를 구성하는 정사(正使), 부사(副使), 종사관(從事官)이 각각 기선 1척씩을 나눠 타고 복선 3척에는 짐을 실었다. 물론 최종적으로는 날씨와 바다가 도와줘야 출항이 가능했다.[9]

부산을 떠날 때는 대마도주가 보내온 배를 따라 갔는데 풍향에 따라 대마도의 좌수포(佐須浦, 사스우라) 또는 악포(鰐浦, 와니우라)에 입항하였다. 그 후 바람이 잘 불어주기를 기다렸다가 대마도 해안을 시계 방향으로 따라 돌면서 내려가 최종적으로 대마도주가 있는 부중포(府中浦, 이즈하라)에 입항하여 영접을 받았다. 이때 조선과 막부 사이에서 대마도주의 역할이 중요했는데 통신사가 대마도에 온 시점부터 에도로의 여정, 쇼군 알현, 그리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갈 때까지 통신사 일행과 함께 하면서 안내를 맡았다. 그 후 대마도주의 안내를 받으면서 이키섬, 시모노세키를 거쳐 세토 내해로 진입하는데 여기서부터 지나가는 지역의 번주들의 호위를 받으며 해로를 따라 오사카의 정포(淀浦, 요도우라)까지 가 배를 남겨두고 육로로 교토로 간 후 에도까지의 여정을 이어나갔다. 교토부터는 막부가 만든 조선인가도(朝鮮人街道)라는 특별한 길로 행차하였으며 에도에 도착하면 아사쿠사에 있는 히가시혼간지[10]에서 머물렀다.[11]

기본적으로 부산에서 오사카까지 가는 항해 일정에서 시간이 많이 걸렸는데, 아직 엔진이나 증기 기관이 아니라 돛과 노를 썼으니 당연하지만 파도가 높거나 역풍이 부는 날에는 나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행록을 보면 몇 날 며칠 동안 같은 마을에 머무니 답답하다는 구절이 많이 보이며, 이 정도면 갈 만하지 않느냐는 통신사 측과 충분히 위험하니 내일 떠나자는 대마도 측의 언쟁도 적잖게 일어났다. 당연하지만 바다를 건널 때 자칫 태풍이라도 만나는 날에는 배가 뒤집혀 전원 끔살당할 수도 있었고[12] 도중에 왜구들의 습격을 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13] 통신사로 파견되는 것을 꺼리는 사람들도 많았다.[14] 실제로 항해 도중 크고 작은 사건사고들이 일어나기도 했는데[15] 그럼에도 새로운 경험이 하고 싶어서 일부러 자원한 사례도 있었다.[16]

통신사가 에도에 도착하면 막부는 길일을 정하여 방문 일정을 통보하는데 그때까지 통신사는 숙소에 머물며 대기하였다. 일정이 정해지면 통신사는 국서와 예물 리스트를 가지고 에도 성에 입성하여 각지에서 온 다이묘와 신하들이 도열한 혼마루의 연회장에 가 쇼군을 알현하고 국서를 전달했다. 그 후 쇼군은 통신사와 면담하면서 국서를 확인하고 조선에서 가져온 예물을 살펴본 다음 통신사를 위한 연회를 열어주었다. 일정이 끝난 통신사는 쇼군의 답서를 받을 때까지 에도에서 기다리며 다이묘나 로주들과 어울리다 답서와 조선으로 가지고 갈 예물이 나오면 그간 어울렸던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대마도주와 함께 귀로에 올랐다.[17] 그 후 한양에 도착해 임금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보고하는 것으로 모든 여정이 끝났다. 보통은 이런 일정이지만 1636년의 4대 통신사는 막부의 요청으로 닛코 동조궁에 처음 방문하였고[18] 1643년, 1655년에 파견된 5, 6대 통신사들은 참배까지 하고 돌아갔다.

통신사는 일본에 있는 내내 융숭한 접대를 받았는데, 실제로 통신사들의 사행록을 읽어 보면 'ㅁㅁ에서 묵었다. ... 호화로운 대접을 받았다/사치스러운 것이 비할 데가 없었다' 라는 식의 기록을 무척 많이 접할 수 있다. 에도 시대 도쿠가와 막부 쇄국정책 때문에 오히려 이전의 센코쿠 시대보다 외국과의 교류가 줄어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거창하게 들어오는 외국 사신이다 보니 볼만한 화젯거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일본에서는 통신사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아 이들이 지나갈 때마다 지역 전체가 들썩이고 유행이 바뀐다 할 정도로 파장이 대단했다. 통신사의 서예 작품을 얻으려고 성황이었고, 일본인들이 통신사의 하인들에게 다가가서 글자 하나만 써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통신사들의 사행록을 읽어 보면 일본 측의 요청을 다 들어주기가 대단히 힘들었다거나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었다는 식의 기록이 곳곳에 있고,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려 주는 것을 전담하는 사람들은 잠도 제대로 못 자거나 일이 너무 힘들다고 울기도 했다고도 쓰여 있다. 그나마도 통신사에게 글이나 그림을 요구하는 일을 도중에서 독점하며 이득을 챙기려는 대마도주가 통제한 것이 그런 수준이었으니 그야말로 대단했던 것. 통신사가 준 사소한 선물이 일본의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고, 통신사 일행과의 접견으로 중국의 소식을 전해 듣기도 했다.

막부는 위엄과 권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통신사가 거쳐가는 번으로 하여금 최고 수준의 의례로 이들을 대접하게 하였는데 통신사 일행을 한번 맞이하는데 1,400여 척의 배와 1만여 명의 인원이 동원되었다고도 한다. 초기(17세기)에는 쇼군이 조선 통신사를 맞이하기 위해 사용한 비용이 100만 냥이나 되었는데 이 당시 막부의 1년 수입은 76만~77만 냥에 불과했다.[출처] 그러다보니 통신사의 경로에 있는 번에서는 접대를 하느라 거액의 비용을 쓸 수 밖에 없었으며 이는 각 번에게 상당한 부담이 되었다. 이 문제가 현실화한 것이 1711년( 숙종 37년)의 8대 통신사때이다.

당시 일본의 유력한 대신이자 6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의 두터운 신임을 받던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20]는 일본이 통신사에게 너무 저자세를 취하는 데다 낭비가 너무 심하다는 이유로 통신사를 맞이하는 각종 의례를 대대적으로 개혁했다. 문제는 이것이 조선에는 통보하지 않고 마음대로 저지른 일이라는 것. 통신사는 갑작스럽게 의례를 변경할 수 없다고 격렬하게 반박했으나 결국 적잖게 타협하는 것으로 결론 내렸는데, 이 때문에 조선에 돌아와 '왕명을 욕되게 했다' 라는 이유로 처벌을 받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때의 의례 개변은 일본 내에서도 지나치다는 평을 받기도 했고, 마침 이듬해인 1712년에 도쿠가와 이에노부가 사망하면서 아라이 하쿠세키도 실각하자 통신사를 맞이하는 의례는 대부분 이전의 것으로 복구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조선과 막부 사이에서 교환하던 국서에서 쇼군의 칭호 문제인데 1636년 이후로 조선은 막부의 쇼군을 '일본국 대군(大君)'으로 칭하였으나 이때는 하쿠세키가 강력하게 주장하여 일본국왕으로 칭호를 바꾸었다. 이 칭호 역시 이후로는 다시 일본국 대군으로 바뀌게 된다. 한편 1714년에 파견된 류큐 하경사에게도 일본 측은 귀국(貴國), 일본국 대군, 태청(台聽) 등의 단어가 건방지다고 새로 써서 오라고 따졌는데, 조선 측에 국서를 고칠 것을 요구할 때는 통신사들이 일본에 도착하기 전에 미리 문제제기를 했으나 류큐 사절단은 만만하게 봤는지 이들이 에도에 오자 일방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어쨌든 사행이 거듭되면서 소요되는 비용은 점차 줄어들었고 마지막인 12대 통신사의 사행 당시에는 아예 대마도에서 국서를 교환하는 형식으로 간략화되었다.

통신사는 귀국 후 사행에 대한 기록이자 견문록인 사행록을 남겼는데 이는 당시 일본 사회의 면면을 볼 수 있는 제3자의 자료로서 일본에서도 활발히 연구되고 있으며 중국에서도 명이나 청을 주제로 통신사와 일본 측 인사가 주고받은 대화를 연구 대상으로 삼으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에 파견된 통신사의 사행록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607년 통신사행 당시 부사였던 경섬(慶暹)이 쓴 해사록(海槎錄)이다. 다만 조선 전기에 일본에 파견되었던 인물들도 통신사라고 불렸으므로 이들의 사행록도 몇 편 남아 있는데, 현존하는 것 중 가장 오래된 사행록은 의외로 정몽주의 정포은봉사시작(鄭圃隱奉使時作)이다. 정몽주의 경우 1377년 9월부터 1378년 7월까지의 사행 기록을 남겼는데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협조를 얻으려 다녀왔다.[21]

조선 시대에는 1420년에 일본을 다녀온 송희경(宋希璟)의 일본행록(日本行錄)이 가장 이르고 1443년에 일본에 다녀온 신숙주가 쓴 사행록 신고령봉사시작(申高靈奉使時作)과 그보다 뒤인 1471년에 성종의 명으로 쓴 견문록 형태의 해동제국기도 있다. 임진왜란 직전인 1590년에 일본에 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직접 만났던 김성일도 해사록(海槎錄)이라는 사행록을 남겼다. 후에 10대 통신사의 정사였던 홍계희가 이전에 발간된 사행록들을 수집해 해행총재라는 책을 냈다.

전해지는 사행록은 대체로 임진왜란을 기준으로 내용이나 성격이 갈리는데 왜란 전에 일본에 다녀온 사람들은 아직 사이가 나쁘지 않았으므로 여정 중에 받은 개인적인 감상이나 경험 등을 시의 형태로 남긴 것이 대부분인 반면, 왜란 이후 일본에 다녀온 사람들은 주로 보고나 정보 수집이 중요했기 때문에 매일매일 보고 들은 일들을 기록한 일기 형식으로 사행록을 남겼다.[22] 다만 모두가 일기로 된 것은 아니고 사행이 점점 진행될수록 일기만으로 된 것, 일기와 시로 된 것, 시만으로 된 것 등 다양해지며, 이 중에는 짤막한 백과사전 형식으로 일본에 대해 종합적으로 소개한 글이 뒤에 붙는 경우도 있고 그런 것이 없는 경우도 있다.

4. 규모

통신사의 총 책임자인 정사(正使), 정사를 보좌하는 부사(副使), 정사와 부사를 보좌하고 한편으로 통신사의 행렬을 모두 기록한 후 조정에 보고해야 하는 종사관(從事官)이 삼사(三使)라고 하여 전체 사절단의 대표들이었으며, 그 외에 일본과의 외교 실무를 담당하는[23] 당상역관(堂上譯官) 및 역관, 통사(通事)[24], 일본측과 문서를 주고 받으며 글을 담당하는 제술관(製述官), 문서를 베껴 쓰는 사자관(寫字官), 축문을 읽는 독축관(讀祝官), 문서와 기록 등을 담당하는 서기(書記), 의료를 담당하는 의원(醫員), 그림으로 기록을 남기는 화원(畵員), 호위를 맡는 군관(軍官)들이 있었다.

마상재(馬上才), 악공들의 지휘자격인 전악(典樂), 악기 연주자인 악공(樂工), 요리 담당인 도척(刀尺), 잔심부름을 맡는 아이들인 소동(小童), 행렬에 깃발을 드는 기수(旗手), 풍악을 담당하는 풍악수(風樂手), 노를 젓거나 각종 허드렛일을 하는 격군(格軍) 등은 정해진 수가 없어서, 각 사행마다 총인원은 제각각이었다. 역대 최소 인원은 1624년 사행 당시의 300명, 최대 인원은 1711년의 500명이었으며, 보통은 400명 대였다.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중엽까지 일본은 통신사 접대에 상상을 초월하는 예산을 투입했다. 이 문제 때문에 민란이 발생하기까지 했으며, 옥스퍼드 대학 제임스 루이스 교수의 추산에 따르면 당시 일본 쌀 수확량의 12%가 소요되었을 정도. 현지 일식이 입맛에 맞지 않는 통신사 사절단들을 배려해서 3끼 음식이 모두 일식이 아닌 퓨젼 일식으로 만들어져 체류 기간 동안 사절단 모두에게 제공되었다.

다만 최후의 사행인 1811년에는 규모가 줄어들어 336명이 파견되었는데, 정조 11년(1787) 도쿠가와 이에나리가 취임했으나 당시 막부의 재정이 바닥을 치고 있었기에 실권자인 마츠다이라 사다노부에 의해 에도가 아닌 쓰시마에서 통신사를 맞이하기를 희망했고(1794), 마찬가지로 살림이 어려웠으나 전례(前禮)를 중시하던 조선은 17년간 거부하다가 순조 11년(1811) 와서야 승인했기 때문이다.

5. 목적 및 활동

관련 참고 글
얼핏 보면 별 의미가 없어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해 온 이유는 양국이 전부 이익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일본의 사정을 살피고 이들과의 우호를 유지, 강화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이 제대로 전쟁을 걸어오면 어떤 일이 생길 수 있는지를 뼈저리게 경험하게 된 조선은 다시는 그런 경험을 하지 않아야겠다. 즉 전쟁을 사전에 미리 방지해야 하며 그것이 어렵다면 적어도 언제쯤 터질지는 알아야겠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일본이라는 나라가 요즘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정탐할 필요가 있었고[25] 전쟁을 걸어오지 않도록 우호적으로 지낼 필요가 있었는데, 통신사는 바로 이를 위해 파견된 것이었다.[26]

또한 조선이 대마도를 넘어 일본 내지에까지 파견하는 유일한 공식 사절단으로서, 일본과 외교적인 마찰이 있을 때 쇼군이나 일본의 대신들과 직접 교섭하여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비록 쇼군이 새로 즉위할 때 파견되는 경우가 많았지 외교 문제가 발생할 때 곧바로 보낸 것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1711년 통신사의 경우 왜관에서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 일어나는 충돌을 줄이기 위해 신묘약조를 체결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27]

이 밖에는 1회성 사건이기는 했지만 수행 무관들을 통해 일본을 통해 들어오는 서양의 신무기를 몰래 구하는 작전이 펼쳐지기도 했고, 고구마가 조선에 전래된 것도 1763년 당시 통신정사였던 조엄의 덕이었다.

한편 한국의 국사 교과서 등에서 문화 교류를 강조하다 보니 문화 사절로 불리는 경우도 많은데, 통신사와 일본 측의 문인들이 시를 주고받는 등으로 교류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애초에 문화 교류가 통신사의 목적은 아니었다. 이들은 어디까지나 외교 사절단이었고, 문화 교류는 일본과의 우호를 유지, 강화한다는 본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 정도였기 때문이다. 즉 "왜인들이 우리가 시를 써 주거나 그림을 그려 주면 좋아하더라. 이렇게 해 주는 게 나라의 체면을 크게 깎아먹는 일도 아니고, 오히려 우리의 문화적 역량을 자랑할 수 있는 기회도 될 것이다. 그러니 이들과의 우호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 쯤으로 생각하면 못 해 줄 것도 없다." 정도로 생각했다고 보면 적절하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도쿠가와 막부가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권력임을 선전하는 정치적인 성과를 얻고 막부의 권력이 중국에도 알려질 수 있게 되니 중국과의 교섭에도 보다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또한 일본 국내에서는 백성들에게 통신사를 조공 사절로 선전하여 일본이 마치 조선을 식민지로 거느리고 있는 양 왜곡하며 국가적 자부심을 높였고,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게는 조선은 일본에 조공을 바치는 종속국이라고 속여 일본이 네덜란드와의 무역 교역을 독차지하는 효과도 있었다( #).[28]

재미있는 점은 조선 통신사의 수행원으로 따라간 자들이 남긴 기행 기록 가운데 외국인이기에 쓸 수 있었던 민감한 내용들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일본의 정치 구조를 간파하고 이를 바탕으로 일본의 먼 미래 정세까지 예측했다. 이들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천황의 조정이 있는 교토의 지식인들의 경우 덴노의 조정과 관백(쇼군)의 막부를 각각 왕자(王者)와 패자(覇者)라 인식했다. 대놓고 막부와 도쿠가와가의 쇼군들을 왕망이나 조조로 비유하기도 했고, 몇몇 일본 지식인들이 덴노와 구게 앞에서 존왕론을 강의하거나 토막(討幕, 막부 전복)을 꾀했다는 이유로 막부에 적발되어 처형되는 사건도 있었다. 조선 통신사들의 기록에는 '정통성'을 갖춘 진정한 군주인 덴노가 무사들을 뒤에 거느린 힘 있는 '권신(權臣)'에 불과한 쇼군의 힘 앞에 눌려 실권을 빼앗긴 것에 비분강개하던 당대 교토 지식인들의 모습도 함께 담겨 있다. 일본인들은 막부의 보복이 두려워 이런 솔직한 기록들을 남길 수 없었지만, 제3자인 조선 통신사 일행들은 외국에서 온 사신단이었으니 거리낄 것이 없었다. 자국의 군주가 하는 욕 한마디도 꼼꼼하게 기록하는 문화가 발달해 있어서 가능한 행위.[29]

성대중이나 남옥, 조명채, 원중거 등 실제 그들을 만나 대화를 나눠본 조선 통신사 수행원들은 그 주고받은 이야기를 기행문에 적고 한결같이 "지금의 막부가 언젠가 힘이 쇠약해지고 그때까지 숨죽이고 있던 무리들이 움직일 때가 오면 분명 천황을 둘러싸고 국권을 쟁탈하려는 자들이 나타날 것이다"고 판단했고, 그 예상은 약 백여 년 뒤에 존황양이, 대정봉환, 무진전쟁이라는 형태로 적중했다. 아울러 원중거는 이런 상황이 되면 조선에도 자칫 피해가 올 수 있을 거라며 미리 대비를 해 둬야 한다고 말했지만, 메이지 유신으로 일본의 권력이 통일될 때 조선은 스스로 무너지고 있었고 결국 경술국치로 끝을 맞이했다.( #)

5.1. 의례 싸움

일본은 통신사를 속국의 사절로 각인시키려 했기 때문에 의례를 둘러싸고 여러 기싸움이 존재했다. 대표적으로 배례가 있다. 조선 사신들은 국왕의 국서에 배례한다고 인식했지만, 일본측은 쇼군이 국왕의 국서 뒤에 자리함으로서 통신사가 쇼군인 자신에게 배례를 하는것이라고 인식했다.

5.2. 히데요시 법단 호코지 다이부츠젠 연회

교토의 호코지에서 통신사는 연회를 했는데 문제는 이곳이 히데요시의 명복을 빌기위해 세운 법당이었다. 조선 통신사는 이전까지 이 사실을 모르다가 1719년 최초로 문제제기를 하게된다. 그러나 일본측은 일본연대기라는 가짜 책으로 히데요시와 상관없다고 왜곡하여 종사관 이명언을 제외하곤 참여한다. 하지만 그 이후는 통신사들은 들리지 않게 되었다.

6.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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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해례본)』

『조선왕조실록』
[朝鮮王朝實錄
]

『불조직지심체요절』 하권-
佛祖直指心體要節 (下卷)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
(高麗大藏經板-諸經板)

조선왕조 『의궤(儀軌)』

『동의보감(東醫寶鑑)』

1980년 인권기록유산
5·18 광주 민주화운동 기록물

『일성록(日省錄)』

『난중일기(亂中日記)』:
이순신 장군의 진중일기(陣中日記)

새마을운동 기록물

KBS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기록물

한국의 유교책판

조선통신사에 관한 기록 –
17세기~19세기 한일 간 평화구축과
문화교류의 역사

조선왕실 어보와 어책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4.19혁명 기록물

동학농민혁명기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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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파일: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로고.svg
이름 한국어 조선통신사 기록물
영어 [30]
프랑스어 [31]
국가·위치 대한민국 일본
소장·관리
등재유형 기록유산
등재연도 2017년
제작시기 1643년-1811년
조선 통신사가 진행되었던 과정에서 서로 시를 지어주고 물건을 교환하거나 마상재(馬上才) 같은 공연을 선보였으며, 통신사의 행렬을 그림이나 기행문 등으로 기록하는 등 파생된 문화 교류가 많아 가치가 높다. 한일 양국은 이 조선통신사 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 등재를 추진하여, 2017년 10월 세계기록유산 등재가 확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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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역대 조선 통신사

역대 조선 통신사
순서 연도 정사 부사 종사관 총인원 목적 및 특징 사행록[32]
<colbgcolor=#FFFFC2,#1F2023>초대 <colbgcolor=#FFFFE6,#2D3032> 1607년
( 선조 40= 게이쵸(慶長) 12)
여우길
(呂祐吉)
경섬
(慶暹)
정호관
(丁好寬)
467명 <colbgcolor=#FFF,#191919>국교 회복 해사록 (경섬)
2대 1617년
( 광해군 9= 겐나(元和) 3)
오윤겸
[吳允謙]
박재
(朴梓)
이경직
(李景稷)
428명 오사카 전투 직후 방문 동사상일록 (오윤겸)
동사일기 (박재)
부상록 (이경직)
3대 1624년
( 인조 2=칸에이(寬永) 1)
정립
(鄭岦)
강홍중
(姜弘重)
신계영
(辛啓榮)
300명
(역대 최소 인원)
도쿠가와 이에미츠 취임 동사록 (강홍중)
4대 1636년
(인조 14=칸에이 13)
임광
(任絖)
김세렴
(金世濂)
황호
(黃帍)
475명 병자호란 중 방문[34] 병자일본일기 (임광)
해사록 (김세렴)
사상록 (김세렴)
동사록 (황호)
5대 1643년
(인조 21=칸에이 20)
윤순지
(尹順之)
조경
(趙絅)
신유
(申濡)
462명 도쿠가와 이에츠나 탄생 동사록 (조경)
해사록 (신유)
계미동사일기 (미상)
6대 1655년
( 효종 6=메이레키(明曆) 1)
조형
(趙珩)
유창
(兪瑒)
남용익
(南龍翼)
488명 도쿠가와 이에츠나 취임[35] 부상일기 (조형)
부상록 (남용익)
일본기행 (이동로)
7대 1682년
( 숙종 8=텐나(天和) 2)
윤지완
(尹趾完)
이언강
(李彦綱)
박경준
(朴慶俊)
475명 도쿠가와 츠나요시 취임 동사일록 (김지남)
동사록 (홍우재)[36]
8대 1711년
(숙종 37= 쇼토쿠(正德) 1)
조태억
[趙泰億]
임수간
(任守幹)
이방언
(李邦彦)
500명
(역대 최대 규모)
도쿠가와 이에노부 취임 동사록 (조태억)
동사록 (임수간)
동사록 (김현문)
9대 1719년
(숙종 45=교호(亨保) 4)
홍치중
(洪致中)
황선
(黃璿)
이명언
(李明彦)
479명 도쿠가와 요시무네 취임[38] 해사일록 (홍치중)
해유록 (신유한)
부상기행 (정후교)
부상록 (김흡)
10대 1748년
( 영조 24=칸엔[寬延] 1)
홍계희
(洪啓禧)
남태기
(南泰耆)
조명채
(曺命采)
475명 도쿠가와 이에시게 취임 봉사일본시견문록 (조명채)
수사일록 (홍경해)
일본일기 (미상)
일관요고 (미상)
11대 1763년
(영조 39=메이와(明和) 1)
조엄
[趙曮]
이인배
(李仁培)
김상익
(金相翊)
472명[41] 도쿠가와 이에하루 취임 해사일기 (조엄)
일관기 (남옥)
사상기 (성대중)
일본록 (성대중)
승사록 (원중거)
화국지 (원중거)
일동장유가 (김인겸)
동사록 (민혜수)
동사일기 (오대령)
계미수사록 (미상)[42]
12대 1811년
( 순조 11=분카(文化) 8)
김이교
[金履喬]
이면구
(李勉求)
없음 336명 도쿠가와 이에나리 취임.
대마도에서 이루어짐.
마지막 통신사.
신미통신일록 (김이교)
도유록 (김선신)
동사록 (유상필)

8. 논란

8.1. 일본 우익계의 '조공사절' 주장 및 강조

朝鮮通信使とは、室町時代から江戸時代にかけて李氏朝鮮から日本へ派遣された外交使節団である。正式名称を朝鮮聘礼使と言う。その名の通り江戸幕府はこれを事実上の朝貢使節として扱っていた。
조선통신사는 무로마치시대에서 에도시대에 걸쳐 이씨조선으로부터 일본에 파견된 외교사절단이다. 정식명칭을 조선빙례사라고도 부른다. 그 이름대로 에도막부는 이것을 사실상조공사절로서 취급했다.\
일본어 위키백과 「朝鮮通信使(조선통신사)」의 설명 (현재 조공사절이라는 서술은 수정되었다.)

일본 극우 및 국수주의 역사학계에서는 "조선에서 일본으로 사절을 파견한 반면 일본에서 조선으로 파견하지는 않았으니 조선이 일본에게 조공을 했다"고 왜곡하며, 이를 교과서나 서적에서 그대로 차용한 탓에 조선이 굴욕적인 조공외교를 했다는 설이 일본 국내에서는 팽배해 있다. 특히 일본 인터넷에서 조선 통신사에 대해 검색해 보면 열 중 아홉은 이렇게 설명하며, 역사 분야의 혐한 소재로까지 쓰이는 주제이다. 그러나 실제 조공의 경우 천자국도 칙사를 제후국에 보내기 때문에 전제부터 틀렸다. 그리고 조선은 에도에 보내는데 일본이 한양에 안 보낸 이유를 따져보면, 무로마치 시대 일본도 한양까지 외교 사절을 파견하기는 했으며 따라서 조선 전기까지는 한양에 동평관이라는 일본 사신 전용 숙소가 있었다.

그런데 일본 사신들이 왕래했던 길이 임진왜란 때 그대로 침공로가 되는 바람에 조선 조정은 안보 차원에서 일본인이 동래의 왜관과 그 주변 일정 반경을 벗어나는 것을 엄금하게 되었고[44], 그는 일본 사신도 예외가 아니었다. 즉 오늘날로 치면 대한민국이 일본에 파견하는 외교관은 총리를 만나고 돌아오는 반면 일본 외교관은 부산광역시장하고만 이야기하다 오는 것으로, 일본의 사절보다 조선의 통신사가 훨씬 격이 높았던 셈이다. 또한 통신사를 구경할 땐 싸움이 일체 금지되거나, 2층이나 다리에서 칭견하면 안되고 삿대질을 금하는 등, 예의범절이 정해져 있었다. 통신사보다 일본 사절이 파견된 횟수가 훨씬 많았으며, 그러다 보니 일본에 대한 조선의 지식이 늘 한 박자 늦었다는 연구도 있다. #

당장 당시 동양 국가간 관계에 대해 무지했던 서양인들도 운좋게 조선통신사와 일정이 겹쳐 구경할 기회가 있었던 사람들은 "일본쪽에선 조선에서 항복 사절을 보낸 것이라 말하나 그런것 같지 않다"고 기록했을 만큼 뻔히 보였던 내수용 구라였다. 당장 일본측에서도 1870년대의 정치 싸움 기록에서 조슈번 공직자 본인들이 과격한 지방 정한론자들 욕하면서 옛날에 막부가 국내 선전용으로 퍼뜨렸던 거짓말을 지방 촌놈들이 문자 그대로 믿고 상황판단도 못하고 남의 나라랑 전쟁하자고 거품물고 있다고 욕했을 만큼 뻔한 내수용 뻥이란거 알고 있었다.

8.2. 기록화 내 닭도둑 묘사 논란

파일:15f7501f61313590f.png

1748년경 와타나베 젠우에몬이 조선 통신사가 요도 번(현대 교토 후시미구 일대)을 방문한 것을 묘사한 민화를 그렸고, 그것이 2004년 교토에서 다시 발굴되었다.

근데 그 중 한 장면이 문제가 되었는데, 통신사 두 명이 닭을 들고 있고 주변 일본인들이 어지럽게 모여 있는데 몇몇 일본인들이 뭔가 싸우는 듯한 동작을 보인 것이다. 따라서 발굴 당시에 "조선 통신사가 닭을 훔치는 것을 보고 주변의 일본인들이 제지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 통신사는 닭 도둑질이나 하는 한심한 사신들이었다."라는 주장이 인조이재팬 등지에서 제기되었다.

반면 닭을 훔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주변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45]을 묘사한 것이며, 그 사이를 우연히 근처에서 날뛰는 닭을 잡은 통신사가 지나갔던 것 뿐이라는 반론도 있다. 최초 발견 당시 관련자 등은 이 해석을 지지하고 있다.

하지만 '통신사는 도둑질이나 하는 한심한 사신들이었다' 라는 말은 지나친 것이지만, 통신사를 수행하는 조선인들의 기강이 문란했던 적이 없던 것은 아니다. 가령 1682년에 역관으로서 일본에 다녀와 사행록을 남긴 홍우재와 김지남은 조선 측이 빌미를 제공하여 일본인과 싸움을 벌이는 적이 많음을 개탄하기도 했다.

가령 홍우재의 『동사록』 1682년 7월 1일조에는 '우리 일행 중의 하인배들이 금령을 지키지 않고 함부로 출입하다가 왜인과 싸우는 일이 있었는데, 그 책임이 우리들에게 있으니 마음 아프기가 이를 수 없었다.' 라는 부분이 있고, 같은 해 9월 25일조에도 '우리 측의 병졸이 대마도주의 행렬을 범하여 그들이 이를 책망하며 말에서 내리라고 하니 그 병졸이 군중(軍中)의 행렬에 있어서 범(犯)한 것이 없다고 하여 서로 말다툼하다가 심지어는 서로 때리는 데까지 이르렀다. 피차에 함께 죄를 조사한 후 대마도주의 행렬은 앞서거나 뒤에 서도록 하여 우리 행렬과 더불어 혼란되어 뒤섞이는 폐단이 없도록 했다.' 라는 구절이 있다. 1763년의 정사였던 조엄은 아예 출발하기 이전부터 이러저러한 행동을 하지 말 것을 당부하는 글을 한문뿐 아니라 한글로까지 써서 수행원들에게 뿌리기도 했다.

유튜브에 올라온 조선 통신사와 관련한 영상들의 일본인들은 여전히 위 민화를 근거로 주장하며 조선 통신사를 닭 도둑 조공 사절로 여기려 들고 있다. 심지어 그것들이 베스트 댓글[46]이다.

다시 한번 유의해야 할 점은, 통신사의 기강에 대한 지적은 있고 그것이 닭을 훔치는,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했다는 사실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닭을 훔쳤다는 주장은 한마디로 별다른 근거도 없이 저 그림보고 '훔치는 장면 아니냐'는 소리가 나온 것이다.[47] 게다가 이런 건 전근대적 사절단에서 별난 것도 아니다. 청나라와 조선 사절단 사이 하인들끼리 난투극이 나도 오늘날과 다르게 그냥 윗선끼리 "아랫것들이 그렇지 뭐 허허" 넘길 수준으로 취급되었다.

조선 통신사의 성격에 대한 논란의 뿌리는 아무리 도쿠가와 막부 정권이 들어섰다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숭상하는 신사에 일부러 통신사를 머물게 해 골탕먹이려 하는 등 도저히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고 과거를 들춰내며 미화하고 있는데,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화를 내며 "다 끝난 일을 왜 들춰내냐" 며 화를 내고 있었다.

9. 일본국왕사(日本国王使)

조선에서 일본으로 보낸 것은 조선통신사, 역으로 일본에서 조선으로 보낸 사신단은 일본국왕사라고 불렀다. 사실 일본에서 보낸 사신은 실질적으로는 막부의 사신이거나 쓰시마를 포함한 각번의 사신이었지만 조선에서 자신들보다 격이 낮다고 여긴 이들의 이름으로 보내면 상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 국왕의 사신이라는 형식을 취했다.[48]

조선에서 일본으로 통신사를 보낸 것처럼 역으로 일본에서도 조선으로 사신단이 왔지만 이들은 조선 수도 한양까지는 가지 않고 부산 동래부까지만 왔다 갔다. 이렇게 한 이유는 임진왜란의 기억 때문인데, 조선은 도쿠가와 막부 정권도 완전히 믿지 못했고 이들 일본 사신단이 한양으로 가고 다시 돌아오면서 주변 지리를 익혀둘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대신 조선 정부는 사신을 맞이하는 동래를 도호부로 높여 중요시했다.[49] 원래는 수도 한양에서 치러야 하는 외교사신 맞이를 부득이하게 부산에서 했기 때문에 부산항에 '연향대청(宴享大廳)'이라는 큰 관청을 만들었고, 일본 측 사신은 여기서 조선 국왕을 모신 전패에 절을 해서 실제로 한양에서 왕을 만나는 행사를 대신했다.[50]

지금의 부산 중구 광복동에 있었던 초량 왜관에서 사신단은 도착 후 며칠을 머물었다. 지금의 대각사 위치의 참판옥이 당시 초량왜관 서관에 속해 사신단의 숙소 역할을 했다. 왜관 바깥 초량객사나 연대청에서 의식을 치룰 때만 잠깐 왜관을 나갈 수 있었다.

10. 대중매체

아오이 도쿠가와 삼대에서 1607년 통신사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알현하고 국서를 전달하는 이야기가 오다 노부나가의 아들에 의해 오사카의 도요토미가에 알려진다. 더불어 그 국서에는 이에야스가 '일본국 국왕 전하'라고 표시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에 요도도노가 분노한다.[51] 10년 뒤 1617년, 오윤겸을 정사로 하는 통신사가 쇼군 히데타다를 알현하는 장면이 나오며 17년 뒤 정구립을 정사로 한 통신사가 도쿠가와 이에미츠를 알현하게 된다. 일본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통신사 역을 맡은 배우의 한국어가 매우 매끄럽고[52] 조선에 대한 고증도 꽤 잘되어 있다. 사모를 쓰는 방식이 칸무리처럼 머리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모양새[53]인 것만 빼면 거의 완벽하다. 정사 오윤겸의 동사상일록에 따르면 히데타다와 삼사(三使)는 서로 술을 다섯 잔 마시는 의식을 행한 것으로 되어 있는 반면 여기에서는 국서만 전달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물론 드라마이기 때문에 의식까지 일일이 보여주기에는 러닝타임이 짧다는 문제 등등이 겹쳐서 의도적으로 내용은 생략되어 있고, 시청자에게 설명하기 위함인지 통신사가 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어 교토에서 에도로 돌아가는 기한을 늦추기까지 했던 히데타다가 사신의 목적이나 서한의 내용을 다소 의아한 어조로 새삼스럽게 측근에게 물어보고 있다.

8대 쇼군 요시무네 20화에서도 조태억을 정사로 하는 통신사가 쇼군을 알현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한국에서는 불멸의 이순신이나 징비록 등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나 소설 등에서 황윤길을 정사, 김성일을 부사로 파견한 통신사가 으레 언급되지만, 이때의 사행도 통신사에 포함시키는 경우가 있고[54] 에도 막부 창건 이후의 사행만 통신사로 보는 경우가 있는지라 조금 애매하다. 에도 막부 창건 이후의 통신사를 다루는 건 노빈손 시리즈의 노빈손, 조선통신사의 누명을 벗겨라가 대표적이며 19세기 조선을 배경으로 하는 대역들도 존황파에게 엿을 먹이거나 일본의 정보를 얻기 위해 통신사를 재개하는 방식으로 언급이 되기도 한다.

11. 관련 단체

12. 관련 문서



[1] 정확히는 숙종37년(1711년) 통신사 행렬도 가운데 정사 부분이다.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되어 있는데, 한국에 있는 행렬도 중에서는 그림이 가장 괜찮기에 통신사와 관련된 행사나 서적 등에 적잖게 활용되고 있다. [2] 일본쪽에서 사신을 보내면 조선쪽에서 이에 대한 답으로 회례사를 파견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송희경이며 그가 쓴 일본행록이 자료로 남아있다. [3]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조선이 국교 재개 조건으로 내건 임진왜란 사과, 포로 환송, 성종능과 중종능 도굴범 체포였는데 이를 본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는 이걸 막부에서 받아들면 국교 재개가 힘들것이라 보고 국서와 범인을 조작(!)하여 보냈다. 당연히 조선도 알아챘지만 대마도쪽에선 그거 말하면 대마도주 죽는다고 울고불고 난리치고 조선입장에서도 받자마자 가짜인걸 알은 건 아니라 그냥 눈 감고 넘어갔다. [4] 정확히 말하면 이렇지만 이름을 빼면 회답겸쇄환사나 통신사나 크게 다른 것이 없고, 이 때문에 조선이나 일본 측에서도 통신사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한 이후로는 회답겸쇄환사나 통신사나 거기서 거기라는 식의 인식을 보이게 된다. 당장 1624년에 회답겸쇄환사를 맞이하고 1636년에 통신사를 맞이했던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부터가 "통신사를 두 번 맞이하다니 이건 아버지나 할아버지도 못 하셨던 일이다."라며 기뻐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에 회답겸쇄환사와 통신사를 아주 엄밀하게 구분해야 할 필요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면 회답겸쇄환사 3번, 통신사 9번이 아니라 통신사가 12번 파견되었다는 식으로 퉁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5] 1636년, 1643년, 1655년 한정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당이 있는 닛코까지 올라가기도 했다. [6] 조선의 경우엔 소중화를 내세우면서 청과 적극적으로 교류하지 않았기에 중국의 사정이 궁금했던 일본 입장에서는 류큐가 나았다. [7] 폐단이 커 중간에서 하는 전별연은 10대 통신사를 끝으로 사라졌다. [8] 현재 범일동 부산진성에 영가대가 있는데, 2003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원래는 근처 성남초등학교 옆에 있었는데 일제시대에 경부선 철도를 놓으면서 철거됐다. 현재는 영가대 본터 자리에 축소한 영가대 모형과 비석이 있다. 지금은 현 영가대든, 옛 영가대든 도심지에 있고 바다에서 꽤 멀어 상상이 안가지만 예전에는 주변이 모두 바다였다. [9] 예를 들어 10대 통신사는 1747년 11월 28일 임금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고 한양을 떠났는데 부산에 도착한 후인 1748년 1월 9일에는 해신제까지 지냈지만 풍향이 맞지 않아 이를 기다리다 2월 16일에서야 대마도로 출항할 수 있었다. 이 당시 통신사의 총인원은 475명이었는데 이들이 부산에 갑자기 오래 머무는 바람에 먹을 음식물을 대기 위해 부산 주변 고을들이 피폐해져 몇 년간 회복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0] 교토에 있는 히가시혼간지가 아님. [11] 1~7대까지는 시바(芝)의 혼세이지(本誓寺)에 머물렀는데 화재로 소실되면서 8~11대에는 히가시혼간지가 숙소로 사용되었다. 마지막인 12대는 에도까지 가지 않았다. [12] 실제로 역대 통신사들의 사행록에서 부산을 출발하여 대마도까지 가는 날의 기록을 읽어보면 물살이 심히 높아 배에 탄 사람들이 구토를 하고 난리를 쳤다는 부분이 자주 발견된다. 뿐만 아니라 통신사가 탄 배가 파손되거나, 예정된 항로를 벗어나 다른 항구에 잠시 정박하거나, 배들 가운데 한 척이 부산으로 다시 떠밀려가 먼저 대마도에 도착한 일행들이 발을 동동 구르거나 하는 일도 잦았다. 실제로 1703년의 문위행(問慰行, 대마도주에게 파견한 외교사절)은 대마도 근처에서 좌초해 112명 전원이 사망하였으며 1766년의 문위행은 부산 앞바다에서 좌초해 103명 중 93명이 사망하는 일이 있었다. 히타카츠에 있는 한국전망대에는 1703년의 사망자들을 위한 추모비가 있다. [13] “소 긴의 배에 탄 여러 사람들이 ‘그들은 해적입니다’라고 말했다. 우리 모두는 두려운 마음이 들어 돛을 멈추고 나아가지 못했다. 우리는 작은 배를 돌려보내 호송선을 부르도록 한 다음 갑옷을 입고 을 잡았다… 나도 갑옷을 입고 호송선을 기다렸다.” (책 '조선통신사의 일본견문록’, 강재언 저) 조선통신사가 본 중세 일본의 기상천외한 풍습 3가지 [14] 1682년 통신사행의 종사관 자리를 예로 들면 본래 이언강이 임명되었으나 4품직으로 승진했다는 이유로 부사로 다시 임명되고 종사관에는 박치도가 임명되었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는데, 박치도에게 지병이 있다는 이유로 임영으로 교체. 임영은 노부모를 봉양해야 한다는 이유로 신엽으로 교체. 그리고 신엽은 코피가 나는 병이 있다는 이유로 다시 박경준으로 바뀌었다. 한편 생명의 위협(?)은 오히려 삼사(三使)보다는 하인이나 격군 등 낮은 신분이 더 많이 느꼈을 것이다. 통신사들의 사행록을 보면 누가 죽었으니 안됐다는 식의 기록이 가끔 발견되며, 사행 도중에 죽은 사람은 어떻게 조선으로 돌려보낸다는 식의 규정도 비공식적으로나마 있었다. [15] 10대 통신사는 1748년 2월 16일 부산을 떠나 대마도의 악포(와니우라)에서 바람을 기다리며 머물던 중 2월 21일, 부사 남태기가 탄 배에 불이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화재로 2명이 죽고 10명이 부상당했으며 쇼군에게 보내는 예물 일부가 불에 탔는데 문제는 불에 타버린 예물 중 하필 인삼 70근이 있었다는 것. 예로부터 인삼은 매우 귀한 것이라 보고를 받은 영조도 걱정이 되어 3월 1일, 조정 회의를 연다. 회의에서 영조가 다시 보낼 인삼이 있는지 묻자 다양한 의견들이 나왔는데 가장 먼저 영의정은 가을이나 되어야 수확이 가능할 것이라는 원론적인 의견을 냈다. 호조판서는 보관하고 있는 인삼이 10근밖에 없는데다 다시 구한다 해도 원래 보낼 분량인 70근을 맞추기 힘들테니 대신 다른 것을 보내자는 의견을 내는데 좌의정은 다른 것을 보냈다가 일본에서 안받으면 국가 망신이라는 의견을 냈다. 이에 박문수는 일본에 보낼 예물은 반드시 충당해야 하는 것이니 일단 구해볼 수 있는만큼 구해보고 그래도 부족하면 가을 수확시기까지 기다리자는 의견을 내는데 대부분 이 의견에 동의하면서 인삼을 구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인삼이 불에 탔다고 해서 인삼을 못구한 채 사신을 빈손으로 보내는 것은 국가의 체면이 달린 일이니 어떻게든 구해서 보내자는 의견으로 취합된다. 며칠 후 인삼이 얼마나 있는지 찾아봤더니 인삼은 꽤 있는데 나라에서 인삼을 살 때 시가를 쳐주지 않다보니 안 팔고 숨기는 거라며 제값을 주고 사서 보내자는 좌의정의 의견에 따라 인삼을 사서 보내게 된다. 한편 일본에 있던 통신사는 5월 21일, 에도에 도착했는데 막부에서는 5월 27일을 쇼군 알현 일정으로 전달했다. 그러자 통신사들이 다시 보낸 인삼이 아직 안왔는데 어쩌냐고 하자 처음에는 날짜를 못바꾸겠다고 하다 그러면 며칠 미뤄주겠다 하여 6월 1일로 날짜를 바꾼다. 그 후 조선에서 다시 보낸 인삼이 도착하여 6월 1일, 예정대로 통신사들은 쇼군을 만나게 된다. [16] 1763년 통신사행에 서기로 파견된 원중거를 예로 들 수 있다. 그는 원래 일본에 갈 뜻이 없었다가 통신 부사로 임명된 자가 간곡히 부탁하는 것을 물리치지 못해 지원하게 되었는데, 나중에 부사가 교체되었다는 말을 듣고도 물러나지 않았다. 그의 저작인 '승사록' 에는 원래 가지 않으려 했는데 '문득 하늘 끝을 살피고자 하는 생각이 들어서' 지원했다고 되어 있다. [17] 이와 별개로 막부는 먼 길을 온 통신사에게도 따로 하사품을 챙겨주었다. [18] 요청이라기보다 강요에 가까웠다. 본래 통신사 파견과 관련해서 논의해야 할 문제가 생기면 파견 이전에 미리 모두 결정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통신사가 한참 일본 내지를 가고 있던 도중에 갑작스럽게 전달된 것이었기 때문. 이에 통신사는 강력히 항의했으나 이미 일본 한가운데 들어와 있는 상황이었기에 끝내 참배가 아니라 유람이라는 단서를 붙여 허락했으며, 좋아서 간 게 아니었던 만큼 이들의 사행록을 읽어 보면 일광산과 동조궁을 크게 비난하는 내용이 있다. 파견 이전부터 동조궁을 방문할 것임을 합의하고 갔던 1643년, 1655년 통신사가 동조궁의 풍경에 크게 감탄하는 투의 기록을 남긴 것과 대조된다. [출처] <일본근세사>, 이계황, 116쪽 [20] 1657~1725, 이에노부가 코후의 번주이던 시절부터 그를 섬기다 이에노부가 쇼군이 되면서 개인적인 친분이 작용해 하쿠세키가 올리는 개혁안을 이에노부도 대부분 신임하면서 로주(老中)보다 더 큰 권력을 쥐게 된다. 이에노부와 그의 아들 도쿠가와 이에츠구까지 대를 걸쳐 하쿠세키의 정치력이 발휘되는데 이 시기를 당시 연호를 따 정덕의 치(正德之治, 쇼토쿠노치, 쇼토쿠의 치)라고 부른다. [21] 다만 제목이 말해 주듯이 일기라든가 산문이 아니라 시. 그것도 몇 편 정도이기 때문에, 고려 시대의 기록이라는 의미는 있지만 정몽주의 사행에 대해 상세하게 알기는 어렵다. 다만 조선 후기의 통신사들도 충신으로 이름이 높은 정몽주가 다녀갔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어서 정몽주가 파견되어 왔던 곳 주변을 지나갈 때 남긴 일기에 으레 그의 이름을 언급했으며, 그의 시를 활용해서 시를 짓거나 "정몽주의 시에 이러이러한 구절이 있는데, 와서 보니 이러이러한 모습을 쓴 것인 모양이다" 라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22] 따라서 형식은 분명 일기임에도 불구하고 "뒤에 사신으로 오는 사람은 이러저러한 것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 라거나 "이러한 것들은 뒤에 올 사람이 일일이 알지 못해도 되므로 생략한다" 등 후대의 통신사들을 의식하는 구절들이 간간이 보이며, 아예 "나는 ㅁㅁ하였다" 식이 아니라 "신(臣)은 ㅁㅁ하였다" 식으로 쓴 경우도 있다. 다만 이렇다고 해도 일기이긴 한 만큼, 개인의 감상도 꽤 풍부하게 기록되어 있다. [23] 사절단의 대표는 전술되었듯이 삼사였으나, 역대 삼사들 중에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자가 없었던 관계로 실무는 역관이 알아서 했다. 일본 측이 요구를 하거나 부탁을 하거나 해도 이것을 알아들어야 대답을 할 것이 아니겠는가. 다만 역관들이 삼사의 뜻을 거스를 수는 물론 없었으므로 삼사를 얼굴마담 정도로 보면 곤란하다. [24] 통사 중에는 일본어 역관이 아니라 중국어 역관이 파견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 사람의 전공을 몰라서 그랬던 것은 물론 아니고, 다른 나라를 상대해야 하는 직업인 만큼 견문이 넓을수록 좋다는 이유. 1682년에 압물통사로 파견되어서 사행록을 남긴 김지남이 대표적인데, 그는 자신의 기록에서 이런 사실을 기록하면서 조정의 방침이 참으로 지당하다는 식으로 평했다. [25] 이런 이유로, 사행록 중에는 나름대로 일본 각 지방의 다이묘들이 영지가 어느 정도 되니 군사를 어느 정도 징집할 수 있겠다고 일일이 따지는 식으로 일본의 군사가 얼마나 된다고 계산한 기록도 있다. 다만 실제보다 훨씬 많이 잡은 경우가 많은데, 실제와 얼마나 맞든 간에 이런 것을 계산했다는 것 자체가 일본을 경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26] 특히 북쪽 변경에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내다보기 힘들었던 명청교체기에는 남쪽 국경을 확실하게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기에 더더욱 이러한 것이 강조되었다. 실제로 1636년 통신사가 이런 목적에서 파견되었으며, 이 때 파견되었던 통신사는 일본에서 돌아오고 나서야 병자호란이라는 큰 사건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27] 조선 후기에 일본과의 관계에서 가장 자주 문제가 되었던 것이 왜관의 운영이나 범죄 등과 관련된 것이었는데, 대마도주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영 협조적이지 않은 경우 도주의 윗사람인 쇼군과 직접 담판을 벌였던 것이다. [28] 반대로 헨드릭 하멜 표류 사건에서는 조선에게 네덜란드가 자국의 속국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조선은 일본 측의 이 같은 주장을 전혀 믿지 않았다. [29] 다만 흥미로운 점은 통신사들이라고 그런 교토 지식인들의 태도를 모두 좋게 보지만은 않았고 각자 평가가 엇갈렸다는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막부가 실권자인데 막부 앞에서는 대들지 못하면서 뒤에서 구시렁거리는게 잘 하는 짓이냐는 반응도 있던 반면 어쨌든 군주는 덴노니까 저것들도 유교를 공부하고 하더니 드디어 뭘 알긴 아는구나 라고 기특(?)하게 여기는 반응도 있었다. [30] Documents on Joseon Tongsinsa/Chosen Tsushinshi: The History of Peace Building and Cultural Exchanges between Korea and Japan from the 17th to 19th Century [31] Documents sur Joseon Tongsinsa / Chosen Tsushinshi: l'histoire du maintien de la paix et des échanges culturels entre la Corée et le Japon du XVIIe au XIXe siècle [32] 일단 영조 대에 ' 해행총재' 라고 해서 역대 사행록을 모두 정리한 서적이 출간된 바 있으나 누락된 것도 적지 않고, 최근에도 간혹 가다가 사행록이 새로 발견되고 있다. [吳允謙] 인조때 영의정까지 했던 사람이다. [34] 다만 병자호란이 일어나서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했던 것은 아니고, 오히려 통신사는 조선에 돌아온 뒤 전쟁이 있었고 망극한 일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통신사를 파견했던 명목은 '오랫동안 태평성대를 누리는 것을 축하한다' 라는 명목. 더불어 이때 조선 통신사의 닛코 동조궁 방문이 처음 이뤄졌다. 통신사들은 에도까지 올 줄 알았지 닛코라는 곳까지 갈 줄은 몰랐던 데다 갑자기 이뤄진 일이라 거부하다 결국 강권을 이기지 못하고 '유람'을 조건으로 방문하였다. 어쨌든 허락없이 이뤄진 일이라 동조궁 방문에 대해 대단히 부정적으로 기록했다. 하지만 조선 측에서는 이후 닛코 참배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 인조는 종과 삼구족(향로,화병,촛대), 효종은 어필을 내려주기도 했다. 끝으로 이전까지는 '회답 겸 쇄환사' 라는 이름으로 파견되었고 통신사라는 이름이 정식으로 붙은 것은 이것이 처음으로 정식 통신사로서는 처음인 만큼 조선과 일본 사이의 이런 저런 외교 형식이 새로 정해졌는데, 일본의 쇼군을 대군이라고 부르기로 정한 것도 이때다. [35] 이 때부터 쇼군이 취임하면 통신사가 파견되는 것으로 정해지며, 닛코 참배가 마지막으로 이루어진 사행이기도 하다. [36] 역대 통신사행 가운데 삼사가 쓴 사행록이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은 유일한 사례다. 김지남은 중국어 역관이었고, 홍우재는 일본어 역관. 다만 역관들이 남긴 사행록이니만큼, 통신사행에 파견된 역관들의 활동을 연구하는 데 유용하다. [趙泰億] 소론의 주요 대신으로 조태구, 조태채의 친척이다. [38] 이에 따라 단명한 도쿠가와 이에츠구는 제외되었다. [寬延] 사실 조선 통신사의 방문 때의 연호는 칸엔 이전에 엔쿄(延享) 5년이었는데, 모모조노 덴노의 즉위로 개원한 것이다. 원래 덴노는 즉위 직후인 4월 25일 개원을 시도했으나, 도쿠가와 이에츠구의 제사와 통신사 방문 등의 이유로 7월 12일로 개원을 미뤄야 했다. [趙曮] 고구마를 들여온 그 사람이다. [41] 일본 본토에 간 마지막 통신사. 서기관으로 따라간 김인겸이라는 사람이 쓴 기행문 형식의 시인 ' 일동장유가' 라는 작품이 전해지는데, 고등학교 문학 시간이나 언어 영역 등에서 가끔 소재로 쓸 때가 있다. 또한 통신사 서열 3위 서장관이던 ' 청성잡기'의 저자 성대중이 쓴 기행문 '일본록' 이 '부사산 비파호를 날듯이 건너' 라는 제목으로 정리되어 출간되어 있고 서기였던 원중거가 쓴 '승사록' 과 '화국지' 가 각각 '조선 후기 지식인, 일본과 만나다', '와신상담의 마음으로 일본을 기록하다' 라는 이름으로 나와 있으니 관심 있는 분을 읽어 보실 것. [42] 역대 통신사행 가운데 가장 많은 사행록이 남은 경우로, 이 때문에 조선과 일본 간 문화 교류의 황금기였다는 평가도 받는다. [金履喬] 8자흉언사건을 일으켜 벽파를 재기불능으로 빠뜨린 인물이다. 일본 화가가 통신사로 온 김이교와 이면구 일행을 그린 그림이 남아있다. [44] 정해진 규정을 어기고 왜관 주변을 벗어나는 것을 난출(闌出)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자주 일어나는 바람에 조선 조정의 골치를 썩이기도 했다. 심지어 일본인들이 조선 조정에 강력히 요구할 일이 있을 때 일부러 난출을 감행하여 관심을 끌었다는 연구도 있는데, 오늘날에도 한두 명도 아니고 수십 명의 건장한 외국인이 무기를 들고 시청 앞까지 쳐들어간다면 신문 1면에 실리게 된다. [45] 특히 우측에 죽도(?)를 든 일본 서민을 단순히 칼싸움놀이로 해석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46] 일본어로 업로드된, 조선 통신사를 재현한 행렬에 '조선은 당시 휘어진 칼(곡도)을 만드는 기술조차 없었다'는 황당한 댓글들이 공감을 얻는 판이다. [47] 애초에 닭을 훔친다는 해석 자체가 실제로 일어났다고 보기 힘들다. 물론 조선통신사가 아무리 대접 잘 받았다 하더라도 사신 수행원들까지 항상 전부 잘 먹이고 호사스럽게 대접했다는 보장은 없지만 적어도 일반적인 사절단이 받은 대접을 보면, 일부러 남의 나라에 가서 소란 일으키는 것 자체가 목적인 어지간한 또라이가 아닌 한 고작 닭 한마리 아쉬워서 민가에 행패를 부린다는 것 자체가 상상하기 힘들다. [48] 중국으로 보낼 때도 마찬가지였으며 임진왜란 이후 1609년 류큐를 합병한 뒤에는 류큐 사신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49] 임진왜란 이전 조선 수도로 파견된 일본 사신의 왕래 길을 일본군이 그대로 침략 루트로 써먹는 바람에 조선 측은 일본 사신의 한성 진입은 커녕 초량 왜관~동래성 이외의 출입을 엄금하였다. [50] 지금은 연향대청 건물은 사라졌지만, 연향대청이 있던 동네는 대청이 있었다고 해서 대청동으로 이름이 남아있다. [51] 그녀는 통신사가 오사카성의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알현하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했지만, 측근들은 조선으로서는 임진년, 정유년 침략으로 인한 원한이 있으니 도요토미의 후계자를 만나고 싶어 할 리가 없다고 충고한다. 덧붙여 히데요리 알현은 실제로도 시도되었으나 실패했던 일. [52] 발음에서 일본어 특유의 억양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실제 한국인을 섭외한 것일 확률이 높다. [53] 이렇게 살짝 모자를 삐딱하게 쓴 이유는 당대 일본의 기본 헤어스타일인 촌마게 때문인데, 당연히 이런 문화가 없는 조선인에게는 이렇게 사모를 쓸 이유가 전혀 없다. [54] 이 경우 신숙주가 파견된 경우 등 조선 전기의 사행도 모두 포함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