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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21 00:47:40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대한민국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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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파일: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로고.svg
이름 한국어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영어 [1]
프랑스어
국가·위치 대한민국 대구광역시
소장·관리
등재유형 기록유산
등재연도 2017년
제작시기 1907년
파일:국채보상운동 기록물.jpg

1. 개요2. 내용3. 의의4. 기록물 주요 홍보 내용
4.1. 민중이 주체가 된 최초의 평화적 항일 구국운동4.2. 언론 주도 캠페인의 효시4.3. 20세기 초 동북아의 국제적 사건4.4. 최초의 여성 국채보상 운동4.5. 전세계적 국채보상운동의 효시
5. 주요 문적 목록6. 참고영상7. 외부 링크

1. 개요

國債報償運動 記錄物. 근현대 격변기였던 1907년 2월 당시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던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기록물들. 주요 문적 200여종과 수기, 언론, 정부기록물 2,475건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본군 위안부기록물, 조선통신사 기록물, 조선왕실의 어보와 어책과 함께 201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신청 후보로 공식 지정되었다. 그리고 2017년 10월 31일, 기록유산으로 공식 지정되었다.

2. 내용

1900년대 초 국채보상운동 전개 당시 만들어졌던 각종 기록물들을 총체적으로 분류, 총집편한 것으로, 국채보상운동 100주년 기념 자료집을 통해 모은 약 8,000여종의 한국의 문적 자료 중 엄선된 2,475건의 기록물이 201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후보로 공식 지정되었다.

2015년 7월 20일부터 8월까지 문화재청의 심사 과정을 거쳐 세계기록유산 신청대상으로 최종 통과되었고, 2016년 3월 유네스코에 등재신청이 완료되었다. 2017년에 10월 24일에 열린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에서 등재 여부가 최종 결정되었다.

유네스코에서는 19세기 말 세계 제국주의 열강이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등에 엄청난 규모의 빚을 지게 해 무력화시키고 지배권을 강화하는 상황에서 전세계적으로 가장 앞선 시기에 자국을 구하고자 전 국민의 약 25%가 자발적으로 외채를 갚아 국민으로서 책임을 다하려 한 전국민적 기부운동이었다는 점과 이후 중국· 멕시코· 베트남 등 비슷한 상황의 여러 국가에서 한국의 국채보상운동을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아 유사한 방식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연이어 일어난 점 등을 세계적 중요성으로 인정하였다.

문화재청에서는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은 20세기 식민지와 피식민지 사이에 존재했던 외채 문제가 전세계 각지에서 중요한 현안이 되는 계기로 작용했다며, 국내에 있는 영어신문들이 국채보상운동을 전세계에 상세히 보도했고,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서 거론된 뒤 중국과 멕시코, 베트남 등에서 유사한 방식의 외채 상환 운동이 일어났다는 점에서 전세계적 자립 운동의 효시가 되었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에 의해 국채보상운동을 추진했던 대구군민회의가 최초로 일어났던 북후정 유적지 등이 모조리 불살라지거나, 국채보상운동 전파에 가장 큰 역할을 하였던 어니스트 베델 대한매일신보를 일제 기관지로 전락시키는 등 국채보상운동 관련 기록물들을 크게 탄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목숨을 건 노력에 의하여 이러한 시민적 연대를 통해 국난을 극복하고자 했던 유산이자, 전 국민이 참여한 기념비적 사건의 기록물이 상당수 온전히 보존돼 있다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3. 의의

한국의 국채보상운동은 이후에 일어난 운동과 비교하여 시기적으로 가장 앞선 것으로 이후 전 세계 각국에서 벌어졌던 국채보상운동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국채보상운동은 가장 긴 기간 동안 전 국민이 참여했던 국민적 기부운동이었다는 점에서 기념비적이며, 당시의 역사적 기록물이 온전히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역사적 가치가 큰 기록물이다. 국채보상 운동은 대구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된 최초의 시민운동이라는 점, 우리나라 최초의 기부 문화 운동이자 여성·학생운동, 언론 캠페인 운동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높으며, 또한 대외적으로도 국가의 부채를 국민이 대신 갚고자 한 운동은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일이라는 점에서 그 독창성과 우수성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국채보상운동 정신은 시민적 연대를 통해 채무자의 책임을 다함으로써 국난을 극복하고자 한 인류 보편의 정신이다. 이런 점에서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은 국가적 위기에 자발적으로 대응하는 국민적 책임의식과 평화 사상의 전개 과정을 담고 있는 기록물로, 중요한 세계사적 의미를 지니는 역사적 사료이다.

4. 기록물 주요 홍보 내용

4.1. 민중이 주체가 된 최초의 평화적 항일 구국운동

한국 내에서 일반 민중들이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무기를 들고 외적에 맞섰던 사례는 더러 있었다. 임진왜란과 19~20세기 의병 투병 등이 그런 경우였다. 하지만 남녀노소 귀천 모든 국민이 참여한 평화적 구국운동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무엇보다 이 운동은 특정한 지도자나 운동을 주도한 조직도 거의 없는 상황에서 민중만이 주체가 되어 전국으로 널리 퍼진 당시 기준으로도 굉장히 특이한 형태의 민족적 애국운동이었다.

4.2. 언론 주도 캠페인의 효시

국채보상운동이 조선 전국으로 번져나가 거대 민중운동으로 발전하고 이후 여러 국가들 사이에 유명해진 것은 신문과 같은 미디어의 역할이 큰 역할을 하였다. 신문을 통해 운동의 취지가 널리 퍼져나갔고 신문사가 의연금을 거두는 중심기관의 역할을 맡았다. 1960년대에 세계학회에서는 동아시아 최초로 국민적인 운동이 언론에 의해 주도된 이러한 국채보상운동 내 신문기관들의 역할을 '프레스 캠페인'이라 명명하였다. 이 운동은 이후 동양권의 언론들이 벌이는 여러 캠페인의 효시가 되었다.

이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 중반까지 전국적으로 전개한 문자보급운동은 이러한 국채보상운동의 기반에 뿌리를 두고 이루어지게 되었다.

4.3. 20세기 초 동북아의 국제적 사건

국채보상운동의 탄압 과정에서 영일 간에는 심각한 외교 문제가 발생하였다. 양기탁의 구속에 영국 총영사관이 항의하고 통감부가 이에 대응하면서 영일 양측을 중심으로 하여 미국, 러시아 등 여러 나라의 외교관 및 외국민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이는 국채보상운동이 동북아 세력권을 바탕으로 한 국제사건의 의미를 띄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멕시코, 구미한인들의 참여 및 옥천군 창명학교를 중심으로 국내 일본인 교사들이 호응하거나 삼화항 삼화학교 중국인 교직원 및 학생들, 수원 성공회, 평안도 영유군 천주교 서양 외국인 신부들이 운동에 참여하는 등 국가를 뛰어넘어 공동운명체를 통한 평화문화운동이 전개되었다.

4.4. 최초의 여성 국채보상 운동

국채보상취지서가 만들어지고 북후정 대회가 일어난지 이틀만에 대구 남일동의 부인 8인이 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를 조직하고 여성들이 스스로 주체가 되어 운동권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취지문에서 국채보상운동의 부녀 차별적 현상을 지적하면서 "여자는 나라 백성이 아니냐"고 항의하였고 그 성과 또한 남성들의 3개월 60전론을 크게 상회하는 것이었다. 남자들이 의연형 현금 기부가 주를 이루었던 반면 부녀들은 현금의연을 넘어 패물폐지 감선, 감반 등 다양한 방법으로 구국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대구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를 시작으로 수많은 여성단체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파일:국채보상운동 대구여성가족재단.jpg
출처 : 대구여성가족재단

특히 그중에서도 안중근 의사 어머니도 참여한 삼화항(진남포)패물폐지부인회는 조선 일천만 여성들이 3원씩 은패물을 모아 일천만원은 국채를 갚고 일천만원은 학교를 세우고 일천만원은 은행을 설립하여 세계 제일의 상등국민이 되자는 구호 아래 남성 평균의 다섯배를 능가하는 참여를 이끌었다.

이러한 국채보상운동을 통해서 여성들 또한 더 이상 조용히 좌시하지 않고 이제 역사와 사회의 중심부에 우뚝 서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으며, 이는 가히 동아시아 최초의 근대적 여성 주체 운동이라 할만한 것이었다.

이준 열사는 이에 "부녀들이 적극 참여하니 이제 우리나라는 국채도 갚고 남녀 평등도 획득할 수 있게 되었다"라는 소감을 밝혔으며, 30여개에 가까운 국채보상 부녀단체들이 남성의 계도를 전혀 받지 않고 부녀들 스스로의 의지로 조직, 활동하면서 국권 수호와 같은 절실한 민족적 과제 해결에 부녀들이 주권의식을 가지고 참여하며 현대적 남녀동권의식을 성장시켜나갔다. 이러한 의식은 이후 3.1 운동, 물산장려운동에서의 여성 계층 활약의 뿌리가 되었다.

4.5. 전세계적 국채보상운동의 효시

1907년 대구에서 처음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난 후 이 운동은 점차 한반도를 넘어 전세계로 퍼지기 시작하였다. 당시 세계 열강에 경제적으로 예속되어 착취당하면서 무기력해져 있던 수많은 식민지 지역의 인사들이 한국의 국채보상운동에 크게 감명을 받고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청나라 청일전쟁 패배 이후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 일본군에 2억냥의 백은과 웨이하이웨이 일본군 주재비용 150만냥을 부담해야 했고, 신축조약으로 열강에 백은 4,5억냥을 배상해야 했다. 또한 삼대서양차관이라 하여 러프차관 4억프랑, 영독차관 1,600파운드, 영독재차관 2,000파운드의 차관을 진 상태였다. 헤이그 평화회의에서 한국의 국채보상운동이 화제가 된 동시에 청나라 재정에 대하여 열강들이 밀의하였다는 소식이 들리자 청나라 국민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고, 1909년 11월 천진상회의 총리 왕죽림(1939년 피살됨)이 중국 최초로 국채상환을 제창하였다. 1910년 3월 25일 대공보의 '강독반대국채상환' 게재 이후 실패하였고 이후 중화민국 초기 황흥이란 사람이 다시 한번 국채보상운동을 제창하기도 하였다.

베트남은 한국 국채보상운동에 영향을 받아 '황금주 운동'(The ‘Gold week’ movement in Vietnam)을 일으켰다. 한국을 본받아 프랑스 제국의 식민통치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하기 위하여 단 1주일 만에 전국의 베트남인들이 금, 은, 보석, 쌀, 기타 재산들을 모두 모아 2천만동(현재 가치로 2조동)과 370킬로의 금을 내놓은 사건으로 베트남 역사에 황금주로 기록되어 있다.

그 외에도 멕시코 등 여러 나라에서 한국의 국채보상운동에 큰 감명을 받아 다양한 나라빛 갚기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최초로 전개된 한국의 국채보상운동보다 오래 지속되고 광범위한 참여를 이끌어낸 운동은 없었다는 점에서 대한민국의 국채보상운동에 세계사적 중요성과 특이성이 있다.

5. 주요 문적 목록



기타 등등해서 국채보상운동 관련 문적이 총 199종 수록되어 있다.그리고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만세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신한국보, 국민보, 경성신문, 권업신문, 경성신보 등의 여러 신문 기사들이 2,000여종 수록되어 있다.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은 위 두 종류에다 기타 회고문류, 통감부문서, 수기, 정부기록물 등을 모두 합쳐 총 2,475건으로 이루어져 있다.

6. 참고영상

7. 외부 링크



[1] Archives of the National Debt Redemption Mov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