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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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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지리학적, 인류학적 접근3. 고대4. 중세
4.1. 정통 칼리파 시대4.2. 우마이야 왕조4.3. 아바스 왕조
4.3.1. 페르시아계 왕조들4.3.2. 튀르크계 군벌 왕조들
4.4. 몽골 제국의 침공
4.4.1. 몽골계 왕조들4.4.2. 흑양, 백양 왕조
5. 근세6. 근현대7. 이란 이슬람 공화국 (1980 - 현재)

1. 개요



오늘날의 이란 이슬람 공화국 지역을 중심으로 한 지역사 문서이다. 팔라비 왕조 이전에는 이란 페르시아라는 명칭이 혼용되었으나 1935년 팔라비 왕조에 의해 이란으로 고정되었다.

2. 지리학적, 인류학적 접근

이란, 이란인 그리고 페르시아와 페르시아인이라는 단어는 한국인 입장에서 혼동의 소지가 있다. 이란인 다시 말해서 아리아인은 인도유럽어족 이란어군 전반을 지칭하는 용어이고 인도유럽어족 인도아리아어군 언어는 대개 남아시아에서 사용되는 언어이다. 캅카스 오세트인이나 고대 말 스페인에 정착한 알란족들 역시 아리아인이고 독일인들은 위대한 아리아인종이라는 프로파간다를 내세운 바 있으며, 현재도 인도에서는 아리아라는 단어가 힌두 브라흐민, 크샤트리야 고위 혈통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한다.
좀 더 범위가 적은(?) 페르시아, 페르시아인이라는 어휘 역시 한 마디로 쉽게 잘라 말할 수 없다. 고대 페르시아인이라는 단어 파르시는 사산 왕조의 주민들을 의미하지만[1] 중세에는 (중앙아시아의 주민들이 소그드어, 박트리아어, 호라즘어 등등 토착어 대신 페르시아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게 된 것을 계기로) 페르시아인이라는 단어는 이란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타지키스탄 일대의 이란어군 계열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들을 전반적으로 지칭하는 어휘로 확장되기도 했다.[2] 동아시아와 한 번 비교해보자. 이를테면 한족, 중국인 같은 단어는 중국어를 쓰는 특정 민족을 지칭하지만 페르시아인이라는 단어는 정의가 간단하지 않다. 북쪽으로는 만리장성, 서쪽으로는 티베트 고원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으로는 열대우림 정글과 동쪽으로는 황해에 막힌 중국과 다르게 역사상 페르시아의 여러 왕국들은 국경이 건조한 평원 지대로 사실상 열린 마당이나 다름 없었다. 동쪽에서는 맨날 유목민들이 쳐들어왔고 서쪽에서는 마케도니아 제국, 로마 제국, 오스만 제국이 쳐들어왔다. 문제는 이란 입장에서 중국 중원에 해당되는 이란고원 지대는 건조지대에다 고원이라서 생산성이 높지 않았고, 그 때문에 페르시아의 여러 왕국들은 절대 중국처럼 장성 쌓고 방어만 하면 안 되었다는 점이다. 이란의 왕국들은 빈곤을 벗어나기 위해 메소포타미아 지방, 동쪽의 인더스 강 유역으로 확장하기 위해서 외국과 맨날 싸워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란인, 페르시아인들의 정의 및 거주지역은 시대에 따라 그리고 분류 기준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변환되어 왔다.

3. 고대

3.1. 엘람 메디아

파일:external/gracethrufaith.com/Elam-map.jpg
파일:터키 리디아.png
엘람 메디아
이란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인류의 흔적은 무려 기원전 1만년 전에 만들어진 카샤푸르드 유적지다. 대략 구석기 중기 즈음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미 이보다 한참 오래전부터 현생 인류가 이란 지방에서 살고 있었다는 뜻이다. 기원전 1만년부터는 초기 농업 공동체들이 우후죽순 만들어지기 시작하더니, 기원전 8천년 즈음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마을'과 정착지들이 등장했다.

마을들이 등장한 후에는 국가가 등장했다. 당시 이란 지방에는 여러 마을과 소도시들이 옹기종기 번성하고 있었는데, 이 마을들이 점차 하나로 합쳐져 국가 비슷한 연합체를 이루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 가장 먼저 등장한 왕국이 바로 슈쉬를 기반으로 세워진 엘람 왕국이었다. 이란 남서부 쪽에 떡하니 자리잡은 엘람 왕국은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도시들과 경쟁하며 번영을 누렸다. 엘람은 메소포타미아 도시들과 치고받고 싸우기를 반복했는데, 아카드, 우르 제3왕조, 고바빌로니아 등 여러 왕조들에게 수도가 털리기도 했지만 카시트 왕조 시절에는 오히려 바빌론을 함락하기까지 하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엘람 왕국 역시 신아시리아 제국에게 멸망당했다. 당시 바빌로니아, 페니키아, 이집트 등 주요 세력들을 죄다 꺾어버릴 정도로 강했던 신아시리아라 엘람 왕국 역시 버텨낼 도리가 없었기 때문. 게다가 아리아인들이 유입되면서 엘람 왕국의 국경을 위협했고, 기원전 1000년 경부터는 메디아인, 페르시아인, 파르티아인 등 새로운 민족들이 속속 유입되며 엘람 왕국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결국 엘람 왕국은 기원전 646년 신아시리아의 아슈르바니팔 대왕에게 정복당하며 완벽히 멸망한다.

엘람이 무너진 이후 이란 지방은 아시리아의 패권 아래에 숨죽이고 살았지만, 패권국이던 신아시리아가 급격히 쇠퇴하면서 판도가 뒤바뀐다. 바로 메디아 왕국이 등장한 것이다. 메디아인들은 원래 엘람 왕국 시절부터 이란에 유입된 민족이었는데, 아시리아와 맞서 저항하는 과정에서 데이오케스 왕 아래 자연스레 하나의 거대한 세력으로 통합하는 데에 성공했다. 힘을 키운 메디아인들은 기원전 7세기 후반 아시리아에게서 독립을 얻어냈다. 기원전 612년에는 데이오케스의 손자 키악사레스가 신바빌로니아의 나보폴라사르와 힘을 합쳐 신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마저도 무너뜨리며 명실상부한 이란 지방의 최강자로 부상했다. 이란 남서부에 머물렀던 엘람과는 달리 메디아는 이란 전역을 장악해냈고, 심지어는 저멀리 카파도키아까지 진출하며 대제국을 만들었다.[3]

3.2. 아케메네스 왕조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chemenids500BC.png

메디아는 이란과 소아시아 지방을 장악하고 번영을 누렸다. 하지만 메디아에게는 불행하게도 당시 파르스 지방에서는 키루스 2세라는 희대의 괴물이 자라나고 있었던 것이다. 키루스 2세는 메디아, 리디아, 신바빌로니아를 연달아 무너뜨리고는 아시리아를 능가하는 거대한 대제국을 세웠으니, 이 제국이 바로 그 유명한 아케메네스 왕조다. 특히 키루스 2세는 피정복민들을 가혹히 억압하다가 망해버린 신아시리아를 타산지석 삼아 상당한 관용 정책을 베풀었다. 유대인들의 바빌론 유수를 끝내준 사람도 바로 이 키루스 2세다. 덕분에 키루스 2세 치하의 아케메네스 왕조는 끝을 모르고 뻗어나갈 수 있었다.

키루스 2세의 아들 캄비세스 2세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강대국 고대 이집트마저도 정복했다. 당시 중동에서 가장 인구부양력이 높았던 메소포타미아 + 이집트 + 시리아 + 아나톨리아를 죄다 먹어치운 아케메네스 왕조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지녔던 국가이자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였다. 다리우스 1세 페르세폴리스, 슈쉬에서 거대한 궁전과 성들을 짓는가하면 왕의 길 건설, 다릭 금화와 시글로이 은화 발행 등 수없이 많은 업적을 남겼다. 이 당시의 아케메네스 제국은 관용과 다문화를 기반으로 한 진정한 의미의 '최초의 세계제국'이었으며 이란-페르시아 역사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다는 데에 그 의의가 매우 크다.

하지만 이런 아케메네스 제국에게도 아픈 손가락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그리스 문제였다. 이미 페르시아는 다리우스 1세 시절부터 여러 차례 그리스 원정을 감행한 바 있다. 페르시아는 기원전 511년 마케도니아 왕국을 속국으로 삼는 데는 성공했으나 정작 본토의 아테네, 스파르타 등을 굴복시키는 데에는 실패했다. 다리우스 1세의 후계자 크세르크세스 1세 역시 제2차 그리스 원정을 감행했다. 페르시아 군대는 아테네를 2번씩이나 불태웠지만 살라미스 해전, 플라타이아이 전투 등에서 연달아 대패하며 결국 원정을 포기하고 돌아오고야 만다. 그렇게 페르시아는 마케도니아, 트라키아, 이오니아 등에 대한 통제권을 잃어버렸고,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 치하에서 번영을 누린 반면 페르시아는 이집트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등 패권에 조금씩 금이 갔다.

하지만 아케메네스 왕조가 대그리스 전쟁 직후 바로 망한 건 전혀 아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 등 연달아 강력한 군주들이 즉위하며 그리스 폴리스들 간에 분열을 획책했고, 이집트 등 각지 반란들도 성공적으로 진압하면서 꽤 오랫동안 중동 일대의 패권을 꽉 잡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150년 정도의 시간이 지난 이후, 저 서쪽 마케도니아 왕국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라는 불세출의 천재가 등장하면서 페르시아는 그대로 폭싹 망해버린다. 알렉산드로스가 그라니코스 전투, 이수스 전투, 가우가멜라 전투 등에서 연달아 페르시아 대군을 격파하며 빛의 속도로 진군했던 것. 결국 다리우스 3세가 암살당하고 제국 전역이 알렉산드로스에게 정복당하며 아케메네스 시대가 종결되고 본격적인 헬레니즘 시대가 열린다.

3.3. 파르티아

파일:1024px-Map_of_the_Parthian_Empire_under_Mithridates_II.svg.png

그 큰 아케메네스 제국을 무너뜨린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오래 못가 요절했다. 대왕이 죽자 그 후계자들이 제국을 갈라가져갔는데, 개중 이란 지방을 가져간 건 셀레우코스 1세가 세운 셀레우코스 왕조였다. 광대한 영토를 독차지한 셀레우코스 왕조는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끊임없이 대립하며 꽤나 오랫동안 패권을 유지했다. 안티오코스 3세 시절에는 아르메니아를 멸망시키고 파르티아와 박트리아를 멸망시키며 이집트를 빼면 거의 옛 알렉산드로스 시절의 영광을 재현하는 모습까지 보였을 정도. 하지만 이후 암군들이 연달아 등장하고,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며 나중에는 시리아 지방으로 쫒겨났고 파르티아가 그 틈새를 꿰차고 새로운 이란의 지배자로 떠올랐다.

파르티아는 유목민 태생 부족으로 원래 아케메네스 왕조 치하에서 살다가, 알렉산드로스 이후에는 셀레우코스 왕조 아래에서 힘을 기르다가 떨어져나간 왕국이었다. 셀레우코스 왕조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싸우느라 동방 영토에 신경쓰지 못한 틈을 노린 것이었다. 파르티아는 기원전 171년 즉위한 미트리다테스 1세 아래에서 미친 듯이 뻗어나갔다. 파르티아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데메트리오스 2세 안티오코스 7세를 연달아 격파하며 시리아만 빼고 셀레우코스 왕조의 영토를 대부분 집어삼키는 데에 성공했다.

끊임없이 서쪽 영토를 집어삼켜가던 파르티아는 로마 공화국이라는 새로운 대적을 만났다. 파르티아는 아르메니아와 폰토스 왕국 등의 영유권을 두고 로마와 충돌하기 시작했다. 파르티아는 카르헤 전투에서 크라수스를 전사시키는 전과를 올렸으나 얼마 못가 격퇴당했고,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죽은 틈을 타 시리아까지 정복하는 데에 성공했지만 혼란이 잦아들자 얄짤없이 로마에게 얻어터지고 시리아를 뱉어냈다. 이후 안토니우스 파르티아 원정이 실패하고 아우구스투스가 로마의 1인자가 되자 파르티아와 로마 사이에서는 마침내 평화가 들어섰다. 아우구스투스가 파르티아와의 평화를 천명하면서 가끔 군사적 충돌이 있긴 했지만 대대적인 전쟁은 없었다.

파르티아는 동방 왕조들 중에서도 꽤나 오래 버틴 축에 속한다. 하지만 113년부터 다시 로마 제국과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파르티아도 서서히 쇠락세를 타기 시작하고야 만다. 로마 제국이 한창 트라야누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등 그야말로 최전성기를 지나고 있었기에 일방적으로 얻어터지는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파르티아는 1세기 만에 수도가 3번이나 점령당하는 굴욕을 겪었다. 게다가 유목민 출신인 파르티아 왕가답게 내전과 왕위 다툼도 끝이 없었다. 결국 파르티아가 내전과 로마와의 전쟁으로 국력이 급격히 약화된 틈을 타, 파르스에서 봉기한 아르다시르 1세가 급격히 세력을 확장해 224년 사산 왕조를 세우면서 파르티아의 패권도 종식된다.[4]

3.4. 사산 왕조

파일:1280px-SassanidEmpirebiggerbymae.png

파르티아를 뒤이어 동방 제국의 자리를 꿰찬 나라가 바로 사산 왕조였다. 파르스 지역을 기반으로 출발한 사산 왕조는 파르티아가 로마와의 전쟁, 내전으로 피폐해진 틈을 타 독립을 선포했다. 사산 왕조의 개창자 아르다시르 1세는 파르티아 황제 아르타바노스 4세를 죽여버리고 수도를 크테시폰으로 옮기며 화려하게 등장했다.

사산 왕조 역시 옆쪽의 로마 제국과 치열하게 치고받고 싸웠다. 1차 전성기인 샤푸르 1세 시절에는 파르티아보다도 더 잘 로마군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에 성공했는데, 고르디아누스 3세 황제의 공격을 막아내고 필리푸스 아라부스 황제와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했으며, 무엇보다 발레리아누스 황제를 에데사 전투를 산 채로 사로잡는 엄청난 전과를 올린 것으로 유명하다. 물론 샤푸르 1세도 로마군의 치열한 반격 때문에 멀리 확장하지는 못했지만 밀리기만 하던 서부 전선을 반전시켰고, 게다가 문화의 관용과 종교적 자유를 베풀어 문화 발전을 꾀하기까지 했다. 마니교의 창시자인 마니 역시 이 시대 사람.

샤푸르 1세 사후 30년 간의 침체기를 겪으며 빌빌거리던 사산 왕조는 309년 즉위한 샤푸르 2세부터 다시 2차 전성기를 맞았다. 샤푸르 2세는 율리아누스 황제가 이끄는 로마군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격퇴해냈고 페르시아에게 유리하게 평화협상을 맺어 아르메니아 일대를 다시 손아귀에 넣었다. 무너질 뻔한 사산 왕조의 국경을 성공적으로 재확립한 샤푸르 2세는 70년의 재위 끝에 숨을 거뒀다.

샤푸르 2세가 죽자 사산 왕조는 다시 120년 간의 침체기를 맞았다. 이 기간의 가장 큰 특징은 로마 제국과 평화를 유지했다는 것. 서로 간 체급이 어느 정도 비슷해서 한쪽을 완전히 멸망시키기도 불가능했고, 서로 북방의 게르만족과 내부 반란을 막기에도 급급했던 탓이 컸다. 그럭저럭 버텨나가는 것 같던 사산 왕조는 483년 에프탈의 침공군에게 페로즈 1세 황제가 사로잡히며 대굴욕을 맞았다. 에프탈은 이란 동부를 휩쓸고 지나갔고 사산 왕조는 에프탈에게 막대한 재물을 뜯기며 나라가 휘청이는 수준까지 갔다. 그와중에 귀족들과 황제 사이의 권력 다툼은 갈수록 심해졌기에 사산 왕조는 사상누각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침체기는 카바드 1세 호스로 1세가 즉위하면서 종식된다. 카바드 1세는 로마 제국으로부터 재물을 뜯어내 흔들리는 재정을 복구하고 지나치게 강력해진 귀족들과 교단들을 억눌렀다. 흔들리던 황권을 다시 다잡았던 것. 그의 뒤를 이은 호스로 1세 역시 절대 권력을 쥔 채로 내정 개혁을 감행했다. 외치로도 557년에는 에프탈을 궤멸시켰고 571년에는 예멘을 속국으로 삼았다. 다만 로마 제국과의 전쟁은 이 시기에마저도 끊이지 않아서, 어느 한쪽이 압도적인 승기를 잡지도 못한 채로 지지부진한 상태로 수십년 동안 계속 소규모 국지전만 이어졌다.

590년 즉위한 호스로 2세는 사산 왕조 최후의 전성기를 이끌었지만 반대로 멸망의 단초로 제공하기도 했다. 602년 포카스가 반란을 일으켜 로마 황제위를 꿰차고 폭군짓을 하는 틈을 노려 호스로 2세가 아나톨리아 대원정을 실시한 것이다. 내전으로 쇠약해진 동로마는 이를 막을 힘이 없었고, 페르시아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 바로 앞까지 진군했다. 바야흐로 아케메네스 왕조의 부활이 눈 앞으로 다가온 것처럼 보인 것이다. 하지만 내전을 수습한 이라클리오스 황제가 메소포타미아 북부, 아르메니아 일대 같은 곳들을 빈집털이하겠다는 묘수를 내면서 모든 게 꼬이고 말았다. 호스로 2세는 전쟁에서 대패했고 권위는 밑바닥으로 추락했다.[5]

충격에 빠진 호스로 2세가 폐위당하자 사산 공위시대가 벌어지며 페르시아 전통놀이인 내란과 귀족 간의 암투가 지리멸렬하게 이어졌다. 불과 몇 년만에 완전히 망해버린 제국은 주변 모든 세력의 표적이 되어버렸고, 로마, 튀르크, 하자르 등 수많은 적들이 사산 왕조의 숨통을 끊어버릴 준비에 들어갔다. 이 때 등장한 것이 바로 신흥 종교 세력 이슬람이었다. 수많은 이슬람 군대가 무너져가는 제국에 물밀듯이 몰려왔고, 결국 사산 왕조는 651년 멸망하고야 만다. 워낙 이 이슬람의 유입 이전과 이후가 차이가 심하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이 시기부터를 '페르시아의 중세'라고 본다.

사산 왕조는 이란인들의 민족 정체성을 확립한 국가이지만, 결코 아케메네스 왕조 수준의 전성기를 구가한 제국은 아니었다. 사산 왕조의 영토 중 중원에 해당하는 이란 고원은 생산성이 낮았고, 이라크 지역은 주민들 상당수가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이란인이 아니라 기독교나 마니교, 만다야교 등을 믿는 아시리아인인 것은 물론 동로마 제국이 정기적으로 침공해왔으며, 인더스 강 유역은 아프가니스탄 일대에서 남하해온 유목민들이 맨날 쳐들어왔다. 오늘날 이란 민족주의자들은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학문이 발달했으며 아랍인들이 크테시폰의 도서관 책을 다 불질러서 남는게 없다는 식의 주장을 하고 있지만, 사산 왕조는 중세 유럽의 암흑시대와 비슷하게 고도로 군사화된 봉건 사회였고 인도나 중국 수준으로 과학 등 각종 학문이 구체적으로 발달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페르시아의 학문이 중국이나 인도 부럽지 않은 수준으로 올라간 시대는 바로 후술할 아바스 왕조 시절이다.

4. 중세

4.1. 정통 칼리파 시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00px-Mohammad_adil-Rashidun-empire-at-its-peak-close.png

아케메네스 왕조 - 파르티아 - 사산 왕조로 이어지는 정통 페르시아 제국은 이슬람 제국의 침략으로 무너지고야 말았다. 이 시기의 이슬람 제국은 바로 정통 칼리파 시대. 제2대 칼리파 우마르가 이슬람 군대를 모아 633년 페르시아에 대침공을 감행한 것이다.

당시 페르시아를 지배하던 건 사산 왕조 야즈데게르드 3세였다. 가까스로 왕위에 올랐으나 고작 8살의 어린아이에 불과했고 실권은 대귀족들이 휘어잡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눈여겨보던 우마르가 군대를 몰아 페르시아를 침공한 것이다. 이슬람 침략군이 쳐들어오자 제국의 귀족들은 두 파로 나뉘었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잽싸게 이슬람 편에 붙었지만 미흐란 가문 등 여전히 사산 제국에 충성을 바치는 가문들도 있었다. 미흐란 가문은 나름대로 아랍인들과 분투했지만 봉신가문이던 이스파부단 가문에게 배신당하고 처참하게 패배해버렸다.

오갈데가 없어진 야즈데게르드 3세는 수도 크테시폰을 탈출해 전국을 돌면서 지원을 호소했다. 하지만 642년 니하완드 전투에서 마지막 충성파 군대가 패배하고 야즈데게르드 3세는 651년 살해당하며 제국멸망은 기정사실이 되어버렸다. 674년에는 이슬람 군대가 저멀리 트란스옥시아나 호라산 지방까지 정복하며 옛 사산 왕조의 영토를 죄다 집어삼키고야 만다. 본격적인 이슬람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정통 칼리파조의 페르시아 정복은 조로아스터교의 쇠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우마르를 포함한 정통 칼리파들은 비무슬림들에게 종교세 지즈야를 강제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대량 개종을 강요하거나 비무슬림을 죽여버린다거나 그러지는 않았지만 한때 국교라는 위상을 가지던 조로아스터교는 점차 탄압받았고 이슬람교가 득세했다. 조로아스터교도들은 지즈야를 납부할 때 조롱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다만 아직 페르시아가 정복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정세 불안정을 감안해서 현지인들을 안정시키는 정책들을 주로 폈다고 한다.

4.2. 우마이야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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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 칼리파 시대는 마지막 정통 칼리파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가 살해당하면서 끝났다. 이후 들어선 것이 바로 무아위야 1세가 개창한 우마이야 왕조였다. 정통 칼리파 시대와 우마이야 왕조를 구분하는 이유는 이 무아위야 1세 시절부터는 자신의 혈육에게 칼리파직을 세습하기 시작했기 때문. 우마이야 왕조가 들어서면서 페르시아 지방도 자연스레 이 우마이야 왕조 아래로 들어갔다.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파들은 페르시아 문화에 심취했다. 특히 페르시아의 선진적인 행정 체계와 궁정 매너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고, 아랍의 지방 총독들은 페르시아화된 아람인들이거나 페르시아인이었다. 그만큼 오랫동안 지역 패권을 장악해온 페르시아의 문화적 소프트웨어가 강했다는 증거. 페르시아어는 692년 전까지만 해도 제국의 공식 행정언어이자 칼리파 궁정의 언어로 남아있었을 정도다. 물론 이후 아랍어가 공식 언어로 채택되며 이같은 지위는 사라지지만...

우마이야 칼리파들이 페르시아 문화를 좋아한 것과는 별개로, 페르시아인들은 이 우마이야 왕조 아래에서 심각하게 탄압당했다. 우마이야 왕조는 아랍어를 공식 언어로 채택하고 페르시아인들 역시 아랍어를 반드시 쓰도록 강제했다. 게다가 이교도인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 사제들을 대거 살해했는데, 지식인이자 학자 계급인 사제들을 죽여버리니 문맹율만 크게 늘어났다. 우마이야 왕조는 존속 기간 내내 페르시아인들을 억눌렀고 페르시아인들의 불만은 하늘을 찔렀다.

심지어 페르시아인이 개종을 해서 무슬림이 되었다고 해도 토종 아랍인과 똑같은 대우를 받지 못했다. 개종한 페르시아인들은 '마왈리', 즉 주인이 아닌 '손님'으로 불렸고 어딜가나 2등시민 대접을 받았다. 사실 이건 아랍인 중심, 개중에서도 쿠라이시 가문 중심의 족벌주의식 정치체제를 운영했던 우마이야 왕조의 근본적인 한계였다. 게다가 초기 이슬람은 보편종교라기보다는 아랍 가문들 간의 연맹체에 더 가까웠던 터라 당연히 외부인들에게 배타적일 수 밖에 없었다. 이는 소수민족과 피지배층들의 극심한 불만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얼마 못가 우마이야 왕조가 붕괴하는 원인이 되고야만다.

다만 이때 이란 전역이 우마이야 왕조 치하에 있었던 건 전혀 아니다. 이란 북부 산악지대에는 다일람인들이 독립적으로 살고 있었고, 특히 타바리스탄에는 다부이 왕조 판두스판 왕조가 사산 왕조의 잔해로부터 살아남아 명맥을 잇고 있었다. 다마반드 산 역시 독립 상태를 유지했다. 우마이야 왕조는 여러 차례 이 지방들을 침공했지만 정복에 실패했다. 특히 다부이 왕조의 파루칸 국왕이 우마이야 대군을 격파하는 데에 성공하면서 타바리스탄 지방은 아바스 왕조에게 복속되기 전까지 독립을 유지했다.

4.3. 아바스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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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 민족들을 심각하게 억누르고 쿠라이시 가문 중심으로만 모든 걸 헤쳐먹던 우마이야 왕조는 결국 얼마 못가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743년 칼리파가 사망하자 이슬람 세계는 내전에 돌입했다. 특히 이 때 등장한 인물이 페르시아 출신인 아부 무슬림이다. 당시 우마이야 왕조에 맞서는 주요 세력은 아부 알 아바스가 이끄는 아바스 왕조였는데, 아부 무슬림은 페르시아인들을 선동해 아바스 왕조에게 가담시켰다. 호라산에서 군대를 모은 아부 무슬림은 우마이야 총독을 격파, 페르시아 전역을 장악해냈으며 얼마 안가 우마이야 왕조의 수도 다마스쿠스마저도 함락하는 데에 성공했다.

서구 역사가들이 우마이야 왕조의 멸망과 아바스 왕조의 건국이 페르시아인들에게 가해지던 차별에 대한 반발 때문이라고 주장했을 정도로 아바스 왕조에서 페르시아인들의 역할은 필수불가결적이었다. 그래서 새로 들어선 아바스 왕조는 기존 우마이야보다 훨씬 유화적이고 관용적일 수 밖에 없었다. 이 아바스 왕조의 성립은 단순히 왕조가 바뀐 것을 넘어, 기존의 경직된 아랍 제국에서 벗어나 전 민족을 대통합하는 보편 제국으로서의 이슬람 제국으로 탈바꿈했다는 점에서 대단히 의의가 크다.

우마이야 왕조를 멸망시킨 아바스 왕조는 수도를 기존 다마스쿠스에서 바그다드로 천도했다. 아무래도 레반트의 다마스쿠스보다 훨씬 페르시아에 가까운 바그다드로 옮김으로써 아바스 궁정에서 페르시아인들의 입김은 훨씬 강력해졌다. 아바스 왕조 성립부터 몽골 제국의 침략 이전까지의 시기는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와 함께 이란 역사의 최고 리즈 시절로 꼽을 수 있다. 아랍인들의 정복으로 그동안 이란인들과 맞장떠온 동로마 제국 영토가 크게 축소되고, 중앙아시아 유목제국이 동쪽으로 후퇴하면서 페르시아인들은 본격적으로 학문과 생업에 전념할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이란 문화는 본격적으로 전성기를 맞았다. 이른바 이슬람 황금기는 어떻게 보면 페르시아의 황금기이기도 했다.

애초에 아바스 칼리프조의 건국 세력부터가 페르시아인들이 많았고, 한동안 아랍인들 지배 밑에서 2등 시민으로 차별받던 페르시아인들은 아바스 칼리파가 들어서고 나서야 이슬람 제국의 학문과 산업을 떠받드는 중추가 되었다.[6] 다른 한편으로 중앙아시아가 이슬람화 되는 과정에서 중앙아시아 각지에 호라즘인, 박트리아인, 사카족, 소그드인 등등은 현지어 대신에 아랍어와 페르시아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게 되었고, 그 결과 아제르바이잔에서부터 아프가니스탄, 타지키스탄에 이르는 지역이 "대 페르시아 문화권"으로 묶여서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오늘날 이란인들이 반아랍 민족주의 성향이 강하면서도 이슬람을 부정하지는 않는 이유는 아바스 칼리프조 시대 그중에서도 서기 8~12세기가 바로 페르시아 문화의 최전성기였기 때문이다.

4.3.1. 페르시아계 왕조들

이렇게 번영을 누리던 아바스 왕조는 9세기 경부터 서서히 몰락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수많은 민족들이 살아가는 그 거대한 땅덩이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가 더 힘든 일이니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아바스 칼리파들은 9세기 초 트란스옥시아나로 이주해온 튀르크계 전사들인 맘루크들을 노예 전사들로 모집해 부족한 군사력을 때웠는데, 문제는 이들이 군권을 장악하자 역으로 칼리파를 좌지우지하는 실권자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칼리파의 권위는 바닥으로 떨어졌고 맘루크들이 권력을 쥐고 휘둘렀다.

중앙 정부의 상황이 이모양이었으니 페르시아에서도 독립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8~9세기 이란에서 일어난 일련의 독립 움직임을 호람딘이라고 부르는데, 개중 가장 유명한 건 816년 일어난 바바크 호람딘의 반란이다. 아르다빌 출신 페르시아인이었던 호람딘은 반아바스 비밀결사에 가입하고 세를 모아 반란을 일으켰다. 바바크의 반란은 이란 서부와 중부 지역으로 빠르게 확산됐다. 하지만 기겁한 알 무타심 칼리파가 진압군을 파견했고, 진압군이 바바크의 물자를 끊고 포위 공격하면서 결국 소멸하고야 만다.

하지만 호람딘의 반란은 시작일 뿐이었다. 아바스 왕조가 갈수록 국력이 약해지자 단순한 반란 수준을 넘어 본격적인 페르시아 독립 왕조들이 출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수많은 자치 세력들이 나고 망하기를 반복했지만 개중 가장 중요한 건 타히르 왕조 사파르 왕조, 사만 왕조, 그리고 부와이 왕조였다. 당시 이란에는 많은 왕조와 세력들이 있었지만 간단하게 당시 페르시아의 패권은 타히르 왕조 -> 사파르 왕조 -> 사만 왕조 -> 부와이 왕조 순서로 넘어갔다고 생각하면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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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히르 왕조 사파르 왕조
가장 먼저 등장한 왕조는 바로 821년 건국된 타히르 왕조였다. 당시 알 마문이 아바스 칼리파 자리에 오르는 것을 도와준 공로로 페르시아 귀족 출신인 타히르 이븐 후세인이 이란 지방을 분봉받았는데, 이게 타히르 왕조로 이어진 것이다. 타히르 왕조는 아바스 칼리파에게 충성을 다하면서 이란 지방을 다스리다가 아바스가 쇠퇴하자 반독립적으로 페르시아를 지배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알라비 왕조, 사파르 왕조 등의 침략으로 무너지더니 결국 873년 사파르 왕조에게 수도 니샤푸르가 함락되며 멸망당했다.

타히르 왕조를 꺾고 새로운 페르시아의 패자로 떠오른 사파르 왕조는 아프가니스탄의 작은 마을의 대장장이 가문 출신 '야쿠브 이븐 알 라이스 알 사파르'가 창건했다. 야쿠브는 아바스 왕조가 혼란스러워 페르시아까지 신경을 쓰지 못하는 틈을 타 마구잡이로 영토를 확장해나갔다. 전성기인 9세기 말에는 발루치스탄, 아프가니스탄, 이란 대부분을 장악하면서 현대 이란 강역의 2배에 달하는 영토를 차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사파르 왕조의 번영은 오직 야쿠브 한 사람의 능력 하나에만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었고, 결국 창립자인 야쿠브가 죽자 바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결국 사만 왕조에게 이란 고원 대부분을 빼앗기고 부와이 왕조한테 치명타를 맞은 다음 1003년에 가즈니 왕조에게 완전히 멸망해버리고야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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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만 왕조 부와이 왕조
사파르 왕조에게서 이란 고원을 뺏어내고 페르시아의 패권국 지위를 얻어낸 건 사만 왕조였다. 819년 세워진 사만 왕조는 처음에는 아바스 왕조의 봉신국으로 시작했지만 이후 아바스 왕조가 몰락하자 반독립을 선포하고 떨어져나갔다. 타히르 왕조를 물리치고 이란을 장악한 사파르 왕조가 개국군주 야쿠브의 사망 이후 흔들리자, 사만 왕조의 이스마일 1세는 바로 역습에 들어갔다. 이스마일 1세는 호라산 지방 등을 장악하고 이란 지방 대부분을 빼앗아냈으며 타바리스탄, 아프가니스탄 대부분을 정복했다. 이렇게 번영하던 사만 왕조 역시 몰락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바로 튀르크계 노예 때문이었다. 로마 제국 게르만족을 병사로 부린 것처럼 사만 왕조도 튀르크계 전사들을 군대로 영입했는데, 문제는 이들이 힘을 길러 나라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것. 거기다가 왕실 내부의 갈등이 겹치면서 사만 왕조는 속절없이 몰락했다. 결국 떠오르는 신생국가인 부와이 왕조가 쳐들어오면서 사실상 페르시아의 패권을 잃어버렸다.[7]

부와이 왕조의 모태는 지여르 왕조다. 지여르 왕조 자체는 930년 세워져 저 길란과 타바리스탄을 중심으로 세워진 정복국가였는데,[8] 이 지여르 왕조의 장군 출신인 알리 이븐 부야가 세운 나라가 바로 부와이 왕조다. 알리 이븐 부야는 한창 팽창해나가던 지여르 왕조의 왕이 죽은 틈을 타 독립을 선포, 남쪽으로 도망쳐 파르스에서 기반을 닦은 다음 사만 왕조 지여르 왕조 모두를 무찌르고 이란을 거의 통일했다. 심지어 945년에는 저먼 바그다드를 점령해 튀르크계 장군들을 쫒아내고 칼리파를 손아귀에 넣는 쾌거를 이루기까지 한다. 특히 부와이 왕조는 페르시아 최초의 시아파 왕조라는 걸 감안하면 수니파 칼리파가 시아파 페르시아인에게 조종당하는 셈이었다. 그러나 부와이 왕조도 983년 명군 아두드가 죽자 분열됐고, 이란 동부는 1029년에 가즈니 왕조에게 빼앗기고 1062년에는 셀주크 제국에게 멸망당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4.3.2. 튀르크계 군벌 왕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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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니 왕조 셀주크 제국
페르시아계 왕조들의 시대는 부와이 왕조를 끝으로 막을 내린다. 그 다음을 이어 페르시아 지방을 차지한 것은 바로 가즈니 왕조였다. 가즈니 왕조는 977년 사만 왕조의 튀르크계 총독 사부크티긴이 세웠다. 사부크티긴은 아프가니스탄과 페샤와르를 정복해 아프간 대부분을 장악했고, 이후 힘을 기르다가 사만 왕조에게서 독립을 선포하고 떨어져나갔다.

가즈니 왕조는 페르시아보다는 인도 원정으로 더 유명하다. 사부크티긴의 뒤를 이은 술탄 마흐무드가 1000년부터 시작해 무려 17차례나 인도로 원정을 감행해 북인도에 대한 이슬람 원정을 치른 것이다. 이 원정으로 인해 이슬람이 본격적으로 북인도에 유입되기 시작했고, 이후 무굴 제국에 이르기까지 700여년 넘게 이어질 북인도 이슬람 왕조들의 기반을 닦았다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가즈니 왕조는 1030년 술탄 마흐무드 사후 바로 무너져내렸다. 뛰어난 군사적 재량으로 제국을 유지하던 술탄 마흐무드가 죽자 재정에 구멍이 나버렸고 전국에서 내란이 발생하며 영토가 급속도로 수축된 것이다. 특히 페르시아 지방은 신흥 강자인 셀주크 제국이 홀랑 가져가버렸다. 셀주크 제국은 중앙아시아 출신의 튀르크계 유목민들이 세운 국가로, 10세기 경부터 남하해 중동으로 진출하더니 가즈니 왕조가 약화된 틈을 타 단다나칸 전투에서 승리하며 페르시아 전역을 장악해버렸다.

셀주크 제국은 11세기부터 14세기까지 소아시아부터 중동, 페르시아까지 강력한 수니파 질서를 확립하면서 상당한 번영을 누렸다. 게다가 1055년에는 바그다드의 아바스 칼리파에게 '동방의 왕'이라는 칭호까지 받아 그 정통성을 인정받았으며 특히 3대 술탄인 말리크샤 시절에 황금기를 맞았다. 말리크샤와 명재상 니잠 알 물크의 통치 아래에서 페르시아는 오랜만에 평화기를 맞았으며 과학적, 문학적, 예술적인 르네상스를 누렸다. 하지만 이렇게 화려한 전성기 뒤에는 분열의 씨앗이 심어지고 있었는데 1092년 말리크샤가 칼리파를 무단으로 폐위시키며 아바스 왕조와 거리가 멀어진 것이다. 아바스 칼리파와 셀주크 사이의 거리는 갈수록 멀어졌고 나라는 서서히 기울어갔다.

전성기를 이끈 말리크샤는 얼마 못간 1092년 사망했다. 확실한 후계자가 없었기에 셀주크 제국은 4조각으로 나뉘었는데, 개중 페르시아 지방은 마흐무드 1세가 가져갔다. 하지만 마흐무드 1세의 페르시아 정권 역시 인근의 형제들로부터 끊임없이 위협을 받았고 셀주크의 국력은 이전의 성세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무너져갔다. 셀주크 세력이 약해지자 바그다드의 칼리파가 다시 세를 불리기 시작했고, 특히 저멀리 트란스옥시아나에서 들어온 호라즘 왕조가 야금야금 기어들어오기 시작했다. 결국 호라즘 왕조가 1194년 토그릴 3세를 격파하고 페르시아의 패권을 잡으면서 셀주크의 페르시아 지배는 그 마침표를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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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라즘 왕조 호라즘의 수도 쿠냐우르겐치
보통 호라즘 왕조는 칭기즈 칸에게 잘못 대들었다가 끝장나버린(...) 비운의 나라 정도로만 알려져 있지만 당시 호라즘 왕조의 세력은 굉장한 수준이었다. 원래 호라즘 왕조는 셀주크 왕조의 봉신국이었지만 셀주크가 쇠락하자 독립해 떨어져 나갔는데, 나중에는 힘을 길러 역으로 셀주크의 본토인 페르시아까지 쳐들어갔다. 1172년 즉위한 호라즘의 샤 '테키쉬'는 내란을 진압하는 한편 활발한 정복 활동을 펼쳤다. 테키쉬는 셀주크의 술탄 토그릴 3세를 격파하는가하면 저멀리 이란 서부까지 죄다 정복했다.

테키쉬의 뒤를 이은 무함마드 2세 역시 그에 걸맞은 명군이었다. 무함마드 2세는 북인도의 패권국 고르 왕조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막아냈고, 트란스옥시아나에서 서요의 세력을 완전히 축출하기까지 했다. 이후 무함마드 2세는 카라한 왕조를 완전히 멸망시키고, 수도를 구르간지에서 사마르칸트로 천도했으며, 1215년 고르 왕조가 멸망하자 아프간 북부와 가즈니 일대까지 차지했다. 호라즘 왕조는 역대 최대의 영역을 확보했으며, 동부 이슬람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패권국이었던 것이다. 다만 이런 무리한 영토 확장이 좋은 것만은 아니어서, 호라즘 왕조는 그 거대한 덩치에는 걸맞지 않게 외형만 거대한 조각이불 같은 처지였다. 호라즘 왕조의 최대 불행은 이런 불안정한 상황에서 인류 사상 최강의 정복자를 맞닥뜨리게 되었다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4.4. 몽골 제국의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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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제국의 확장
그렇게 호라즘 왕조가 무함마드 2세 치하에서 번영을 누리고 있었던 와중에, 저멀리 몽골 고원에서는 칭기즈 칸이라는 괴물이 자라나고 있었다. 칭기즈 칸은 정말 미친 듯한 속도로 정복을 거듭해나가더니, 결국 몽골은 서요를 멸망시키고 호라즘 왕조와도 국경을 접하게 된다. 원래 칭기즈 칸은 호라즘 왕조를 바로 정복할 생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복해도 인근의 서하 금나라를 먼저 치는 게 우선순위였지 멀리 떨어진 호라즘에 군사를 보낼 이유는 딱히 없었다. 하지만 무함마드 2세가 몽골 사신의 수염을 깎고 일부는 죽여 돌려보내는 인생 최악의 악수를 두자,[9] 격노한 칭기즈 칸은 전군을 이끌고 페르시아로 진격해왔다.

1219년, 칭기즈 칸이 이끄는 몽골 대군이 물밀듯이 밀려들어왔다. 주로 기마병으로 구성된 몽골군은 호라즘의 예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진격해 트란스옥시아나를 침공했다. 호라즘 군대는 대도시에 고립된 채로 하나하나씩 각개격파당했고, 무함마드 2세는 몽골군에 맞서려 시도했지만 모조리 실패로 돌아간 채로 비참하게 도망쳤다. 1220년~1221년 사이의 기간 동안 사마르칸트, 부하라, 발흐, 마르브, 니샤푸르 등 호라즘 측의 주요 대도시들이 몽골 제국에 점령당했고 무함마드 2세는 저멀리 카스피해의 한 섬까지 목숨만 부지한 채로 도망쳐 비참하게 객사했다. 그의 아들 잘랄 웃 딘 밍부르누가 왕위를 이었지만 그도 얼마 못가 비참하게 패하면서 호라즘 왕조는 완벽히 멸망하고야 만다.

칭기즈 칸은 1227년 사망하기 전까지 무려 아제르바이잔 지방까지 진격했고, 이후 페르시아 지방으로 들어와 어마어마한 대량학살을 자행했다. 몽골의 침공은 페르시아인들에게 말그대로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무려 600년에 걸친 찬란한 페르시아의 문화유산들이 대거 파괴됐고 수많은 도시들이 정말 '삭제'됐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아바스 왕조 시절부터 내려오던 관개 수로 시설마저 철저히 파괴되면서 페르시아의 경제력과 농업 생산력은 수직추락했다.

4.4.1. 몽골계 왕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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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칸국
몽골 제국을 이끌던 칭기즈 칸이 사망하고, 몽골의 정복지들은 여러 장군들이 나뉘어 관리하게 된다. 개중 페르시아 지방을 맡은 인물은 바로 훌라구 칸이었다. 훌라구는 칭기즈 칸의 대업을 이어 이스마일파가 세운 니자리 이맘국을 무너뜨리는가 하면 1258년, 몽골군을 이끌고 바그다드로 진격해 아바스 왕조를 끝장냈다. 아바스 칼리파 알 무스타심을 자루 안에 넣어 말들이 밟아 죽이도록 만들어버린 것. 아바스 왕조가 무너진 이후에도 아이유브 왕조, 안티오키아 공국, 트리폴리 백국을 모두 복속시켰지만 1259년 큰형 몽케 칸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권력 다툼을 우려해 확장전쟁을 멈추고 정복지 페르시아로 귀환해 1259년 일 칸국을 세웠다.[10]

일 칸국은 무려 80여 년 동안 페르시아를 다스린 통일 국가였다. 그러나 훌라구는 일 칸국을 세운지 얼마 되지 않아 킵차크 칸국 베르케 칸과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베르케는 비옥한 페르시아 땅을 탐내고 있었는데, 게다가 몽골의 상속 관습에 의하면 베르케가 페르시아를 차지하는 게 옳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슬림으로 개종한 베르케 입장에서 칼리파를 죽여버린 훌라구가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결국 일 칸국과 킵차크 칸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지만 누구 하나를 멸망시키지는 못한 채로 끝났다.

일 칸국은 처음에는 몽골계의 정체성을 유지했지만, 이후 갈수록 페르시아에 동화되기 시작했다. 1295년 즉위한 훌라구의 증손자 가잔 칸은 본인 스스로가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강력한 친이슬람 정책을 폈다. 가잔 칸은 이슬람을 일 칸국의 국교로 삼았다. 일 칸국은 가잔 칸과 명재상 라시드 앗 딘 치하에서 짧은 경제적, 문화적 전성기를 맞는다. 이 시기에는 장인에 대한 세금 감면, 농업 장려, 관개시설 복구, 무역로 재개 같은 정책들이 연달아 쏟아져나왔다고. 라시드 앗 딘은 수많은 정책을 쏟아내며 개혁에 착수했지만 1304년 가잔 칸이 죽으며 대부분이 무위로 돌아갔다.

가잔 칸 사후 올제이투 칸을 거쳐 아부 사이드 칸이 새로운 칸으로 즉위했다. 아부 사이드 칸은 11세의 젊은 나이에 즉위했음에도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하여 일 칸국의 전성기를 이어갔다. 특히 추판 가문을 이용해 내우외환을 극복한 후 지나치게 강대해진 추판 가문 역시 숙청하는 노련함을 보이며 올제이투 칸 이래로 분권화가 가속화되던 제국의 중앙 집권화를 추진했다. 외교적으로도 맘루크 왕조와 종전을 맺는 등 공존과 평화를 지향했다. 하지만 아부 사이드 칸이 1335년 후계자를 남기지 못한 채로 요절하며 일 칸국은 내전과 함께 빠르게 붕괴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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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칸국 멸망 이후 분열된 페르시아의 모습
일 칸국이 멸망하자 수많은 왕조들이 등장해 일 칸국의 후계를 자처했다. 이때 이란에서 수많은 세력과 왕조들이 잠깐잠깐 등장했다가 망하기를 반복했는데, 개중 가장 대표적인 왕조들을 바로 잘라이르 왕조, 추판 왕조, 무자파르 왕조, 카르트 왕조, 인주 왕조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왕조들은 티무르 제국이 등장해 다시 페르시아를 통일하기 전까지 서로 치고받으며 내전을 계속했다. 그야말로 페르시아 최악의 혼란기들 중 하나였던 셈.

1335년 세워진 잘라이르 왕조는 원래 일 칸국의 총독령이었는데 일 칸국이 흔들리자 독립을 선포하고 떨어져나갔다. 잘라이르 왕조의 실질적인 개창자 '하산 부주르그'는 일 칸국 최후의 칸인 아부 사이드 칸의 사촌이자 휘하 총독이었다. 아부 사이드 칸이 후계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하산 부주르그는 1337년 잠시나마 전 일 칸국의 지배자로 인정받았지만 1338년 추판 왕조에게 치명타를 얻어맞고[11] 이라크 지방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잘라이르 왕조는 두 번째 군주인 우웨이스 1세 시절에 다시 전성기를 맞는다. 북동면의 숙적 추판 왕조가 킵차크 칸국에게 치명타를 맞은 틈을 타 추판의 영토(아제르바이잔, 타브리즈)를 1360년에 합병하여 건국 당시의 강역을 회복했고, 무자파르 왕조의 내분에도 개입하여 자신의 사위의 왕위 계승을 도왔다. 그 후 본국 바그다드에서의 반란을 진압한 우웨이스 샤는 서북면의 바이람 크와자가 이끌던 흑양 왕조와 북쪽의 캅카스(코카서스)의 시르반 샤도 격파하여 왕국의 완전한 안정을 가져왔다. 이후에도 왕국의 영토를 엘부르즈 산맥 이남, 즉 테헤란 일대까지 확장했고, 당시 주변(서아시아)에 잘라이르 왕조를 위협할 만한 세력은 없었다. 티무르라는 괴물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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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페르시아의 세력도
그나마 잘라이르 왕조가 일 칸국의 멸망과 티무르 제국의 등장 이전까지 페르시아의 패권에 가장 근접했던 국가였지만, 그 외에도 다른 왕조들도 많았다. 제일 먼저 추판 왕조가 있다. 추판 가문은 일 칸국 시절부터 실권을 가진 명문가였는데, 아부 사이드 칸의 견제로 잠깐 주춤하다가 일 칸국이 망하자 바로 독립해나가 왕국을 차렸다. 처음에는 승승장구하며 타브리즈를 정복, 잘라이르 왕조를 털어먹는 등 상승가도를 달렸지만 내란, 잘라이르 왕조에게 당한 연이은 전쟁 패배, 페스트가 겹치며 끊임없이 쇠락했다. 결국 추판 왕조는 킵차크 칸국에게 치명타를 얻어맞고 1357년 멸망하고야 만다.

인주 왕조도 있다. 일 칸국이 망하자 파르스 이스파한을 거점으로 이란 남부에 존속한 국가인데 오래는 못갔다. 1335년 세워졌는데 건국된 지 3년 만에 왕족들끼리 후계 분쟁으로 내란이 나는 바람에 추판 왕조에게 내정간섭을 받기도 했다. 그 내란을 종식하고 1343년 왕위를 차지한 아부 이샤크는 권위를 세우겠답시고 무자파르 왕조와 무리한 전쟁을 벌이다가 1352년 대패하고 쉬라즈로 숨어들어갔다. 그러나 학정을 펼치던 백성들이 그를 배신했고, 아부 이샤크는 이스파한으로 또 도망쳐 농성을 벌였지만 결국 패배하고 잡혀죽었다. 그렇게 인주 왕조는 1357년 고작 40년도 돼서 망해버렸다.

인주 왕조를 멸망시키고 세워진 무자파르 왕조는 원래 일 칸국의 총독 출신인 무바라즈 알 딘이 세웠다. 무바라즈 알 딘은 아부 이샤크의 인주 왕조를 멸망시킨 뒤 파르스와 이스파한 지방을 정복, 이런 서부 전체를 손아귀에 넣으면서 상당히 거대한 제국을 세웠다. 14세기 중후반 전성기 시절에는 잘라이르 왕조를 공격해 수도 타브리즈를 일시적으로 함락시키도 하는 등 위세를 떨쳤다. 하지만 전성기 와중에도 계속된 내분...으로 이란의 패자가 될 기회를 종종 날려먹었다. 그래도 그 국력은 어디 가지 않아서 티무르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잘라이르 왕조와 함께 페르시아를 양분하는 2강으로 군림하는 왕조기는 했다.

그 외에도 일 칸국이 망하고 잽싸게 호라산을 차지한 카르트 왕조 등 다양한 왕조와 세력들이 수없이 많이 페르시아 지방에서 등장했지만, 모두가 군소 세력에 머무르며 제대로 된 국가를 구성하지 못했고 서로 싸우기만 했다. 결국 이같은 혼란기는 티무르가 나타나 티무르 제국이라는 페르시아 통일 제국을 세우고 난 이후에야 종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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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무르 제국
티무르는 칭기즈 칸과 같은 보르지긴 씨족에서 갈라져 나온 바를라스 부족 출신이다. 티무르는 1369년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트란스옥시아나와 여러 유목집단들을 통합하기 시작하더니, 1370년부터 1405년까지 약 35년 동안 원정을 벌이며 혼란스럽던 페르시아 지방을 모조리 통일했다. 초반 10년은 모굴 칸국, 호라즘, 킵차크 칸국을 공격해 죄다 무찔렀고 1380년 이후부터는 남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1381년에는 아프간의 헤라트를, 1383년에는 칸다하르를, 1386년까지는 서부 이란까지 정복하는 엄청난 업적을 남겼다.

1392년부터는 서아시아를 목표로 소위 '7년 원정'을 단행했다. 티무르는 아나톨리아 동부에 근거지를 둔 흑양 왕조 세력을 격파한 뒤, 시리아 지방을 차지하고 있던 맘루크 왕조를 몰아내고 알레포 다마스쿠스를 점령했다. 1402년에는 오스만 술탄국과 전쟁을 벌여 앙카라 전투에서 술탄 바예지드 1세를 생포했고, 1404년 사마르칸트로 귀환했다. 이렇게 티무르는 생전 연전연승을 거듭하며 중앙아시아-페르시아-서아시아 지방에서 비할 바가 없는 절대적인 패자로 군림했다. 당시 티무르 제국에 비빌만한 제국은 저 동쪽의 명나라 밖에 없을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랬던 티무르 제국도 티무르가 죽자 점차 쇠퇴하기 시작한다.

티무르가 죽고 그 후계자들인 샤 루흐, 울루그 베그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세력은 유지하고 있었지만 점점 세력권은 축소되어가는 실정이었다. 흑양 왕조, 백양 왕조 등이 야금야금 티무르 제국의 영토를 먹어치워갔고 내분이 끊이지 않았다. 게다가 울루그 베그의 암살 이후 제국의 붕괴에는 미친 듯이 가속도가 붙고야 말았다. 결국 제국은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 버렸고, 결정적으로 우즈베크인들이 세운 샤이바니 왕조가 쳐들어오면서 멸망하고야 만다. 최후의 보루였던 헤라트 발흐까지 점령당하면서 티무르 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4.4.2. 흑양, 백양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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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양 왕조 백양 왕조
한때 페르시아를 통일했던 티무르 제국이 허무하게 멸망하자 그 자리를 놓고 싸운 나라는 흑양 왕조 백양 왕조였다. 먼저 흑양 왕조는 1374년 세워진 투르코만 부족연맹국가였다. 원래는 옛 잘라이르 왕조의 가신들이었는데, 힘을 길러 타브리즈를 중심으로 독립 국가를 세웠다. 흑양 왕조는 자한 샤가 다스리던 1400년대 초중반의 전성기 시절에는 바그다드를 정복하고 이란 서부, 이라크 일부, 아라비아 해안 일대 일부를 다스릴 정도로 세력이 강했다. 하지만 끊임없는 내분과 아들들의 권력 다툼, 백양 왕조와의 전쟁 때문에 점점 세력이 약해졌고, 결정적으로 자한 샤가 1466년 백양 왕조 우준 하산과 싸우다가 전사하면서 치명타를 얻어맞고 2년만에 멸망한다.

그나마 백양 왕조가 티무르 제국의 뒤를 이어 통일 페르시아 국가에 가장 근접한 국가였다. 백양 왕조는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유목민 출신이었다. '백양'이라는 뜻도 유목민 출신답게 하얀 양을 상징으로 내세웠기에 붙여진 이름. 이들은 오갈데 없이 방랑하고 다녔지만 티무르가 1402년 디야르바크르 지방을 하사했고, 백양 왕조는 이 곳에서 힘을 길렀다.

티무르 제국이 약화되자 1467년 백양 왕조의 군주 우준 하산은 본격적으로 동쪽으로 세력을 넓혀나갔다. 1466년 최대 경쟁자인 흑양 왕조를 박살내면서 동쪽으로의 활로를 뚫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이후 국가 막장 테크로 비실거리던 티무르 제국을 탈탈 털어먹으면서 동쪽으로 나아갔고 현재의 이라크, 페르시아 만 연안지역, 이란 고원을 점령하면서 페르시아의 강자로 급부상했다.

하지만 백양 왕조 역시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2세에게 격파당하고야 말았고, 이후 아나톨리아 일대의 영향력을 상실하는 등 골골거리는 모습을 보여줬다. 결정적으로 왕조의 전성기를 이끈 우준 하산이 죽자 사후 왕위계승을 놓고 벌어진 내전으로 서서히 몰락하기 시작했다. 주변 국가나 군소제후들이 야금야금 백양 왕조의 땅을 갉아먹으면서 콩가루 신세로 전락했으며, 게다가 시아파를 믿고 있던 이스마일 1세 사파비 왕조를 설립하고 백양 왕조의 숨통을 끝장내면서 1508년 멸망했다.

5. 근세

5.1. 사파비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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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파비 왕조
백양 왕조 티무르 제국의 잔재 속에서 탄생한 사파비 왕조근세 페르시아의 시작이라고 불릴 정도로 중요한 국가다. 몇 백여년에 걸쳐 평화를 이루지 못하고 허구한 날 내란과 부침을 반복하던 페르시아를 꽤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통치했을 뿐더러, 가장 중요하게는 이 사파비 왕조를 기점으로 이란은 수니파 국가에서 시아파 국가로 변했다. 이는 페르시아 역사에서도 가장 중요한 기점으로 꼽힌다. 최전성기에는 이란, 이라크,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조지아 대부분을 집어삼키고 저멀리 아나톨리아까지 뻗어나간 거대한 제국을 세웠다. 무굴 제국, 오스만 제국과 함께 화약 제국이라 불렸을 정도.

사파비 왕조는 시아파 종교단체인 사파비야에서 출발했다. 이 사파비야의 지도자였던 이스마일 1세는 수하 키질바시들을 이끌고 어린 나이부터 활발한 정복 활동을 펼쳤다. 이스마일 1세는 쉬르반 왕조를 격파하는 걸 시작으로 1501년에는 백양 왕조의 수도 타브리즈마저 함락하며 '이란의 샤'에 즉위하고 사파비 왕조를 세웠다. 최대 경쟁국인 백양 왕조를 쓰러뜨린 이스마일 1세는 연달아 이란 전역의 잔당 세력들을 토벌하며 1509년에는 헤라트 바그다드 등 주요 대도시들마저 죄다 먹어치웠다. 분열되어있던 페르시아를 하나로 묶어내는 데에 성공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사파비 왕조의 흥성은 바로 옆 오스만 제국의 경계를 샀고, 결국 이스마일 1세가 찰디란 전투에서 오스만에게 대패하며 크게 흔들린다. 이스마일 1세는 크게 상심해 술에 빠져있다가 죽었고,[12] 그의 뒤를 이은 타흐마스프 1세 역시 오스만의 쉴레이만 대제에게 수도를 빼앗기고 도망치는 등 패전을 거듭했다. 그나마 타흐마스프 1세가 나름 능력은 있었던 덕에 제국이 망하지는 않았다.

사파비 제국은 아바스 1세 시절에 최전성기를 맞았다. 아바스 1세는 오스만과 1500년대 후반 내내 전쟁을 벌여 잃어버렸던 영토 일부를 수복해내기도 했다. 또한 조지아 지방의 카르틀리 왕국 카헤티 왕국을 아예 싹 황폐화시키고 20만의 조지아인, 30만의 아르메니아인, 15만의 체르케스인들을 이란으로 끌고왔다. 내정에도 관심을 기울여서 네덜란드와 활발히 무역을 펼치는가 하면, 확고한 중앙정치체제를 구축해 흔들리던 제국을 확고히 다잡았다. 이 시기의 사파비 제국은 세계에서 가장 번영하던 나라들 중 하나였다.[13]

그러나 아바스 1세가 죽자 연달아 무능한 샤들이 집권하며 사파비도 몰락하고야 만다. 샤들이 정치보다는 술과 여자에 쩔어서 향락에 찌들어있었던 것. 특히 1666년 아바스 2세가 죽자 본격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는데, 수많은 세력들이 내부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외침도 잦아졌다. 특히 1722년 러시아 제국 표트르 대제가 쳐들어와 캅카스 지방의 영토 상당수를 뜯어가기까지 했다. 게다가 아프간에서 반란이 일어나 세워진 호타키 왕조가 일시적으로 수도 이스파한을 함락시키기까지하자, 사파비 제국은 곧 멸망할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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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샤르 왕조 잔드 왕조
수도 이스파한이 호타키 왕조에게 점령당해 정말 나라가 망하기 직전까지 가자, 한 왕자가 수도에서 빠져나와 타흐마스프 2세로 즉위하고 재기만을 노렸다. 타흐마스프 2세는 나라를 되찾기 위해 분투하고 있었는데 이때 혜성같이 등장한 인물이 바로 나디르 샤였다. 아프간 출신의 걸출한 신인 영웅 나디르 샤는 천재적인 군사 재능을 발휘하며 타흐마스프 2세의 군사 총사령관으로 발탁, 얼마 안가 1729년 9월 호타키 왕조마저 꺾어버리면서 사파비 왕조를 부활시키는 데에 성공한다.

나디르 샤는 여세를 몰아 심지어 오스만까지도 침공했다. 나디르 샤의 천부적인 재능이 어디 가지 않았던지 나디르 샤는 그 오스만 군대마저도 대파하고 대부분의 영토를 수복하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러시아와도 협상을 해서 페르시아령 코카서스를 다시 되찾아오기까지 했다. 이렇게만 갔으면 사파비 왕조를 부활시킨 희대의 영웅으로 남았겠지만... 타흐마스프 2세의 독단과 나디르 샤의 야망이 충돌하는 바람에 결국 나디르 샤는 1736년 사파비 왕조를 뒤집어엎고 아프샤르 왕조를 세웠다.

전쟁사 하나만 놓고 보면 나디르 샤개인 군벌조직 아프샤르 왕조 역시 이란 역사 최고의 리즈 시절에 해당한다. 나디르 샤는 이란을 정복한 파슈툰족들을 순식간에 몰아낸 것은 물론 서쪽의 오스만 제국을 무찌르고 무굴 제국의 수도 델리까지 약탈하는 기염을 토했다.[14] 역대 이란 전성기 왕조들 중 인더스 강 유역까지 진출한 왕조들은 많았어도 북인도 한복판 당시 가장 부유한 도시 중 하나이던 델리를 정복한 것은 나디르 샤의 아프샤르 군대가 유일했다. 그러나 나디르 샤는 전쟁만 잘했지 내정은 개판이었던 터라 끊임없이 피정복민들과 반목했다. 나디르 샤가 폭정을 펼치다가 결국 암살당하자 그의 제국은 장기 지속되지 못한 채 허무하게 무너졌다.

페르시아를 하나로 묶어놓던 나디르 샤가 죽고 아프샤르 왕조는 호라산의 지방정권으로 축소되자 페르시아는 다시 무정부 상태로 빠져들었다. 오스만은 나디르 샤가 기껏 되찾아놓은 영토를 다시 빼앗아갔고, 부하라 칸국, 히바 칸국이 다시 독립했다. 나디르 샤의 장군이었던 아흐마드 샤 두라니는 따로 두라니 왕조를 세워 떨어져나갔으며 카르틀리 왕국이나 카헤티 왕국 등 조지아 왕국들도 모두 독립했다.

그나마 페르시아 지방은 잔드 왕조가 물려받아서 통치했기에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상태였다. 잔드 왕조의 개창자 카림 칸 쉬라즈를 수도로 삼고 그나마 평화와 번영을 구가했다. 12년 간 지속되던 페르시아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나름대로 안정적인 정세를 유지한 것이다. 하지만 잔드 왕조의 통치력은 어디까지나 이란 서부 일대에만 국한됐고, 1779년 카림 칸이 죽자 페르시아에서는 또다시 내전이 벌어졌다. 결국 잔드 왕조 최후의 샤인 로트프 알리 칸이 1794년 새롭게 등장한 카자르 왕조 아가 모하마드 칸에게 잡혀죽으면서 페르시아의 패권은 신생국가 카자르 왕조에게 넘어갔다.

6. 근현대

6.1. 카자르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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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르 왕조
카자르 왕조를 세운 아가 모하마드 칸은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다스리던 키질바시 가문 출신이다. 그는 잔드 왕조 카림 칸 아래에서 엎드리고 있다가, 카림 칸이 죽자 그 혼란기를 틈타 세력을 규합해 카자르 왕조를 세우고 페르시아를 재통일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나디르 샤 사후 독립해나간 캅카스 일대를 다시 이란에 재편입시키기에 착수했다. 조지아의 헤라클리오스 2세가 러시아에 원병을 청하는 등 자신의 최후통첩을 거부하자 7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가 모든 사람들을 쳐죽이고 15,000여 명의 포로들을 끌고 페르시아로 돌아왔다. 조지아를 박살낸 이후에도 호라산으로 진격해 페르시아를 완벽히 통일하는 데에 성공했다.

아가 모하마드 칸은 하도 성격이 괴팍해 1797년 불만을 품은 부하들한테 암살당하고야 만다. 그나마 군사적 능력이라도 뛰어났던 아가 모하마드 칸 사후 즉위한 샤들은 죄다 한심하고 무능력한 샤들 밖에 없었다. 제2대 샤인 파트 알리 샤 카자르는 아가 모하마드 칸이 기껏 정복해놓은 캅카스 일대를 모두 러시아에 빼앗겼다. 1813년의 굴리스탄 조약, 1828년의 투르크만차이 조약으로 페르시아는 캅카스 전역에 대한 통제권을 완벽하게 잃어버렸고 이후에도 다시는 되찾지 못했다.

파트 알리 샤가 죽고 난 이후에도 상황이 나아지기는커녕 더더욱 악화됐다. 제3대 샤인 모하마드 샤 카자르는 국정에 관심을 잃었고, 제4대 샤인 나스레딘 샤 카자르는 근대적 개혁을 시도했지만 중간에 때려치고 50년 간의 담배 전매권을 영국에 팔아넘겼으며, 모자파르 앗딘 샤 카자르는 유럽 여행에 필요한 자금을 대느라 60년 간 페르시아 전역에서 석유를 무제한으로 뽑아쓸 수 있는 권리를 영국에 또 팔아치웠다. 카자르 왕조는 근대화에 전혀 대응하지 못하고 사치에만 탐닉하는 추태를 보였다. 괜히 5000년 이란 역사상 최악의 국가라고 불리는 게 아니다.

1870년에는 대기근이 들어 200만 명이 죽었지만 무능한 정부는 별다른 방책이 없었다. 나라가 정말 껍데기만 남은 수준으로 전락하고 서구 열강들의 침탈이 갈수록 심해지자, 분노한 페르시아 민중들은 1906년 입헌 혁명을 일으켜 당시 샤였던 모하마드 알리 샤 카자르의 권력을 박탈하고야 말았다. 하지만 아직도 정신을 못차린 샤가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1908년 국회의사당을 폭격하는가 하면 전제군주제를 복원하려 시도하자 국민들이 1909년 샤를 아예 폐위시키고 입헌군주제를 확립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해 오스만 군대, 러시아 군대, 영국 군대 등 온갖 나라들이 전시상황을 핑계로 페르시아를 마음대로 휘젓고 다녔다. 이쯤되자 카자르 왕조는 수도 테헤란 일대를 제외하면 영향력이 미치지도 않는 유사 지방정권에 불과했다. 마침내 1921년 2월 레자 칸 장군이 이끄는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썩어빠진 카자르 왕조는 그대로 붕괴했다. 카자르 왕조를 무너뜨린 레자 칸 장군은 '레자 샤'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왕조를 세우니 이게 바로 페르시아 역사상 최후의 왕조인 팔라비 왕조다.

6.2. 팔라비 왕조

1935년 국호를 '페르시아'에서 ' 이란 제국'으로 통일[15]하고 국왕(king)으로 변역되던 군주의 칭호인 황제(emperor)로 격상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전쟁에 참전은 안 했으나, 팔라비 1세는 영국의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으로 독일과 거래하기 시작했고, 소련의 물자 수송 요구도 거부하게 된다. 1940년 북아프리카에서 영국과 독일의 교전이 시작되고 이란과 국경을 접한 이라크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반영친독으로 선회하자 영국은 페르시아만에 면한 송유시설과 중동지역 안보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 또한 이란이 소련으로 향하는 렌드리스 물자가 통과하는 기점이어서 철도가 엄청 깔렸던 데다가[16] 이란인들의 반영 폭동까지 일어나게 되자 불안해진 영국과 소련이 사전 경고나 선전 포고도 없이 무단으로 침공했다.( 페르시아 침공) 영국이 남쪽에서 치고 올라오는 동안 소련또한 3개 군을 동원해 북쪽에서 밀고들어왔고, 결국 나라가 두쪽나고 팔라비 1세는 퇴위, 망명하였다. 그 후 팔라비 1세의 아들이자 팔라비 왕조의 최후의 황제인 모하마드 레자 샤 팔라비(팔라비 2세)가 즉위하면서 이란은 완전히 영국의 영향하에 놓이게 된다.

팔라비 1세가 물러나면서, 이란인 최초로 유럽에서 법학 학위를 받은 인물로 이란의 민주화를 주도한 모하메드 모사데크와 같은 정치범이 사면되었고, 모사데크는 의회에 출마해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또 이 시기에 팔라비 1세에게 쫓겨났던 아야톨라 카샤니 같은 종교지도자가 이란으로 돌아오면서 모사데크의 세력과 연합해 황권에 반대하게 된다.

이 즈음 거의 9 대 1의 비율로 이익을 가져가고 있던 영국의 극심한 석유 수탈로 영국에 대한 악감정이 이란에 팽배하면서 파업이 일어나고 반대시위가 발발한다. 이란에서는 석유산업의 이익을 50:50으로 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요구를 내세웠으나 영국에서는 이를 전면 거부하였고, 영국의 사주를 받은 황제와 총리들은 영국의 이득만을 대변하는 성명만을 발표하여 반대 여론이 팽배하게 된다.

당시 영국의 꼭두각시 총리였던 라즈마라가 암살되는 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지며, 결국 모사데크가 총리에 오르게 되고, 석유산업을 전면 국유화시킨다. 모사데크는 이 외에도 황가와 귀족들의 땅을 농부들에게 나누어 주는 토지개혁과 황권의 약화와 민주주의 강화를 추구하는 등 개혁정치로 국민들에게 열화와 같은 지지를 받는다. 하지만 국유화된 석유산업은 이란에 거의 이득을 가져다 주지 못했는데, 첫번째로 영국의 기술자들이 일시에 빠져나가자 석유산업이 제대로 굴러가기 힘들었고, 두 번째로 영국이 강력한 해군을 동원해 다른나라와 해상을 통한 석유 교역을 봉쇄하였기 때문이다. 영국은 이후 정치인과 종교 지도자들을 매수해나가며 계속적으로 모사데크에 반대하는 세력을 만들고, 정치불안을 조성했다.

그 즈음, 미국은 매카시즘 광풍이 불면서 공산화에 대한 공포가 팽배해지고 있었는데, 이란의 정치가 불안정한 틈을 타서 공산화되면 막대한 석유가 소련에 넘어갈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조성되었다. 여기에 이란에 적대중이었던 영국이 이란이 공산주의 아래에 떨어질지도 모른다고 부채질한 끝에(사실상 거의 속여넘겨서) 미국은 CIA를 통한 쿠데타[17]를 일으켜 황제를 복권하고 모사데크를 끌어내리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모사데크 총리가 체포된 후 팔라비 2세는 다시 돌아왔고 황권은 모사데크 전보다 훨씬 더 강화되었으며, 미국은 친미이자 반소련인 팔라비 왕조에게 많은 지원을 해주었다. 미국의 비호하에 팔라비 왕조는 서구화와 근대화, 친서방, 친 이스라엘 정책을 추구해 이란을 어느 정도 발전시키는데 기여했다. 73년 4차 중동전쟁으로 인한 오일 쇼크 때에도 전혀 국력 소모도 없이 그야말로 앉아서 떼돈을 벌어들일 수 있었고 다음 해에는 아시안 게임을 개최할 정도로 안정가도를 달리는 듯했다.[18]

하지만 팔라비 2세는 황권 강화를 위한 탈이슬람화 정책과 노골적인 친미주의 성향을 보였고, 비밀경찰 사바크(ساواک, SAVAK)[19]에 의한 철저한 통제를 시도했다. 또 70년대 중반 팔라비 2세가 독일 크루파사의 지분 25%를 소유했을 정도로 황제 개인의 부패 또한 심해졌으며, 오일 쇼크로 얻은 부는 도리어 빈부격차를 확대시켰다. 이에 서구식 교육을 받은 젊은 학생들을 중심으로 반정부 운동이 벌어지기 시작했는데, 정치적 재기를 노리던 이슬람 세력이 합세하여 규모는 더욱 커졌다. 급격한 전통 붕괴에 당혹해 한 민심의 이탈도 더해졌다. 또한 팔라비 왕조의 친미주의 성향은 반미 감정을 싹트게 했는데, 나중에 모사데크의 축출에 CIA가 개입했다는 증거가 밝혀지면서 미국에 대한 이란인의 반감이 뿌리깊게 자리하게 된다.

여기에 기회만 노리던 외부 세력이 얼씨구나하고 끼어들었다. 소련은 반정부 학생 운동을 지원했으며 사우디아라비아 프랑스는 이슬람 세력과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를 지원했다. 한편 미국은 카터 행정부의 도덕 정치와 인권 외교 정책으로 방관했다.

1978년, 학생들의 반황제 시위로 출발한 반정부 운동은 계엄령에도 불구하고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학생들은 물론이고 종교 세력과 노동자들까지 합세하였다. 결국 1979년 1월 16일, 신병을 핑계로 팔라비 2세가 이집트로 도피하면서 팔라비 왕조는 무너지고 이란 혁명이 달성된다. 한 달여의 짧은 임시 내각을 거치며 주도권을 잡은 이슬람 세력이 국민투표를 거쳐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 공화정을 수립한다. 이후 79년 11월의 테헤란 미대사관 점령 사건으로 카터 정권을 작살내면서 미국과의 관계는 급격히 냉각되었다. 퇴위한 팔라비 2세는 이후 이곳저곳 떠돌다가 1980년에 이집트에서 사망했다.

7. 이란 이슬람 공화국 (1980 -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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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 인물은 현임 라흐바르(최고지도자)인 알리 하메네이[20]

혁명을 성공시킨 호메이니는 혁명에 함께했던 사회주의 세속주의 세력을 빠르게 숙청한 후 나라 이름을 이란 이슬람 공화국으로 바꾸었는데, 공화국이 아니라 이슬람에 방점이 찍혀 있다. 성직자로 구성된 율법 전문가 회의가 종신직인 라흐바르(최고지도자)를 선출하며 주요 국정 전반에 대한 광범위한 권한을 행사한다. # 이란 이슬람 혁명을 일으켜 초대 최고지도자가 된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는 이란에선 국부급으로 존경을 받지만, 주변 나라들이나 미국이나 유럽이나 이스라엘, 터키에선 악의 축이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 프랑스의 입장에선 기껏 도와줬더니 이권도 챙겨주지 않은 한 배은망덕한 놈, 좀 더 좋게 평가해도 꼴통 이슬람 근본주의자 정도로 대우받는 아야톨라 호메이니에 대한 내용은 해당 항목에서 참고하길 바란다.

이 혁명은 이후에 이스라엘과 함께 양대 중동문제의 시발점이 되었는데 종파는 달라도 '이슬람 국가를 세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이슬람 근본주의가 본격적으로 극성을 부리기 시작한 것. 혁명에 위기감을 느낀 이라크가 1980년 9월 22일에 선전포고도 없이 쳐들어온 것을 시작으로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했고, 무려 8년이나 전쟁을 벌여야 했다.

전임이자 초대 최고지도자인 호메이니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1989년 이후 최고지도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하메네이도 국민 직선으로 선출한 대통령을 능가하는 권력을 쥐고 있다. 또한 사실상 라흐바르가 인사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헌법수호위원회에서 대통령, 국회의원 후보들의 자격심사권도 가지기 때문에 라흐바르의 입맛에 맞지 않는 자는 대통령 및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할 수가 없다.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민주주의 국가가 아닌 라흐바르의 독재국가이다.

90년대에 저유가와 환율현실화 조치 등으로 인해 이란 경제는 어려움을 겪었고 이로 인해 하타미가 대통령이 되면서 하에서 어느 정도 개방정책에 나서며 경제는 90년대 초중반 시절보다 크게 나아졌고 사회통제도 완화되었으며 언론자유도 보장되는 편이었지만 그리 성공적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임기 후기에는 조지 W 부시로부터 악의 축 내지 테러지원국이라는 소리를 듣는 수모를 겪었다. 이 상황에서 치러진 2005년 대선에서 라프산자니가 대통령에 당선될 것으로 보였지만 예상을 깨고 마무드 아마디네자드가 대통령이 되었으며 이 시기에 경제는 일단 고유가로 호황을 누리기는 했지만 언론과 표현의 자유는 후퇴되었으며 사회통제는 강화되어가며 도심부 젊은층들 사이에서 반발여론은 심해져갔다.

2009년 6월 13일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이 압도적인 표 차로 재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부정선거 논란으로 국가가 비상상태. 점점 민주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이리저리 시끄럽기 시작하는 가운데, 미국은 미국대로 이란이 민주화돼서 친미정권 세우면 좋다라는 태도인지라 이리저리 개입하려고 하니 안팎으로 시끄러운 상태이다.

단 이란의 민주화=친서방, 이슬람 국가 붕괴라는 등식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일반 국민들 입장에서 역사적, 사회적으로 가진 원한인지라[21] 이란인들의 반미, 반서방 감정은 지금도 매우 강하다. 선거 폭동 당시 시위대가 개혁정책을 추구했지만 CIA의 쿠데타로 쫓겨났던 모사데크 전 총리를 영웅으로 내걸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또 아마디네자드에게 패하여 선거 폭동을 촉발시킨 미르호세인 무사비 역시 어디까지나 이슬람 국가 체제 안에서 개혁적인 정책을 내건 야당 지도자다. 이 시위대가 친서방 성향을 가졌다는 것은 그들을 탄압하는 수구 세력의 주장인 동시에 서방 국가들의 희망사항일 뿐이다.[22]

선거에서 개혁파들을 걸러냈음에도 개혁파의 득표율이 높은 편이고[23] 2016년 율법 전문가 회의 선거에서 개혁파와 중도파가 다수를 점한것으로 나왔기 때문에 알리 하메네이가 도중에 사망한다면 선전할수 있겠지만 이 선거도 8년에 한 번씩 치러서 민심 반영이 어렵다.

율법 전문가 회의가 이란 군사력의 핵심인 이슬람 혁명 수비대를 거느리고 있기도 한데, 혁명수비대는 석유 등 주요 산업에 진출하여 막대한 이권을 취하고 있으며 정치적 보수파에 힘을 실어 주어 개혁 세력의 성장을 방해하고 있다. #

2011년 아랍권을 뒤흔든 민중 혁명 여파로 이란에서도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튀니지와 이집트,리비아와 달리 그 규모는 작은 편이다. 미국은 열심히 이 기회에 엎어버려! 응원하지만 다른 나라와 달리 역사적인 측면에서 반서방 감정을 가진 나라이기 때문에[24] 그다지 희망은 없었고, 결국 별다른 영향을 주지못하고 흐지부지되어 미국을 실망시켰다.

2013년 대선에서는 보수파의 후보가 난립한 반면 중도온건파가 후보단일화를 성사시켜서 결국 성직자 출신의 중도온건파 로우하니 후보가 과반 득표로 당선되었다. 강경한 보수파가 핵무기 개발에 집착하면서 제제로 인해 경제난이 가중된 것이 국민들의 반감을 샀다는 분석. 로우하니 당선자는 아마디네자드 치하의 억압을 풀겠다고 밝혔다. 미국도 은근히 핵무기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를 바라는 눈치. 드디어 버락 오바마와의 핫라인이 성사되었다. 그러나 최고지도자 밑으로 3권분립이 되어있는 신정국가 이란의 현실을 감안한다면 과연 미국 기대대로 될지는 의문이다.

2014년 시리아, 이라크를 강타한 다에시에 대하여 반감을 보이며 이라크 정부군을 돕고 있다. 이 와중에 미군과 이란군이 협조할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오는 상태. 하지만 이스라엘이 결사반대하기에 이뤄지기 어려워 보인다.

이란의 진보적 청년층이 이슬람 정권에 대한 마지막 기대까지 버리게 만든 사건은 역설적으로 2015년 이란 핵협상 타결이었는데, 이 때 서방국에서 받은 석유 수출 등의 자금을 시급한 민생고 해결이 아니라 시리아와 헤즈볼라, 팔레스타인 등 시아파 벨트의 세력 확장에 사용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2016년 이후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이란 시위에서는 2009년 시위 때만 해도 감히 상상도 하기 어려웠던 "이슬람 공화국 타도!" " 독재자에게 죽음을!" 같은 구호가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2017-2018 이란 시위 참조.

2016년부터는 그동안 조용하던 이란 내 쿠르드인들과 발루치스탄 위주의 수니파들이 반시아파의 무장단체를 결성하여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새로운 골칫거리로 떠올랐다.[25] 쿠르드인들과 수니파 무장단체들은 게릴라전으로 이란을 괴롭히고 있어 이란은 이들 때문에 골치가 아픈 상황.

2019년에는 또 대규모 반정부시위가 일어났는데, 1979년 이후 가장 큰 항쟁이었다. 하메네이는 '미 제국주의자의 개들'을 처단할 것을 명령, 유혈진압으로 시위자 수백 명이 사망했는데 일명 피의 11월, 혹은 페르시아력으로 피의 어번[26](آبان خونین)이라 부른다.

2020년 들어서 미국과의 전운이 감돌고 있다. 미국은 이란이 지원하는 민병대가 바그다드 주재 미국 대사관을 공격한 것과 2019년 K-1 공군기지 공격으로 미국인이 위험해졌으며, 추가공격이 있을 것이란 첩보를 입수하자 솔레마이니 제거작전을 시행했으나 이란의 장군인 카셈 솔레마이니 장군이 죽자 이란측에서는 핵합의에서 사실상 탈퇴를 결정함과 동시에 이스라엘의 주요도시에 보복공격을 감행할것이라 공표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만약 보복공격이 있을 시에는 이란의 주요거점 52곳을 폭격할 것임을 공표함으로서 경고를 줬다. 이란이 이라크 내 미군기지를 공습하면서 긴장강도가 한 층 높아졌다. 그러나 미리 미국 측에 알려줬으며, 미군들이 퇴근한 후 정밀하게 조율된 공격으로 미국의 보복을 피하려 했다는 분석이 있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도 피해가 없었으니 미국의 군사적 보복은 없을 것이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2021년 대선에서 보수파 에브라힘 라이시가 당선되면서, 8년 만에 정권 교체를 이룩하였다.

2022년 9월 한 이란 여성이 히잡을 제대로 쓰지않았다는 이유로 사설 경찰에게 끌려간 뒤 맞아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전국적인 규모의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고 있다. #1 #2

2024년 1월 16일 이란이 파키스탄과의 국경지역에서 활동하는 수니파 분리주의 무장단체를 소탕하기 위해 탄도미사일과 드론 6발을 발사했다. 파키스탄 외무부는 격노하며 이란의 공습을 강하게 비난했다. 이 공습으로 어린이 2명이 죽고 6명이 다쳤다.[27] # #

이틀 후인 1월 18일 파키스탄도 이란과의 국경지역을 보복 공습하면서 갈등의 파장이 커지는 양상이다. #

2023년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서 하마스를 지원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는 이란에 대해, 2024년 4월 1일 이스라엘 이스라엘의 주시리아 이란영사관 공습을 시행하면서 이란과 이스라엘 간의 확전의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에 대해 세계 각국에서 우려를 표명하였으나 4월 13일 이란은 진실의 약속 작전을 발동하여 300발이 넘는 탄도탄과 드론으로 이스라엘을 전면 공습하여 이란-이스라엘 전면전의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2024년 5월 19일 오후 이란 대통령 헬기 추락 사고가 발생했다.

10월 26일, 이스라엘 공군이 테헤란에 공습을 감행했다.


[1] 물론 여기서 아시리아인 기독교인과 아르메니아인, 소그드인 주민 등등을 제외하면 범위는 더 좁혀진다. [2] 오늘날의 이란 고원이 시아파화 되면서 중앙아시아 일대의 순니파 무슬림 페르시아어 사용자들은 따로 타지크인으로 분류되었다. [3] 이런 업적 덕분에 아케메네스 왕조가 이란 역사의 시작을 알렸다면, 메디아는 이란 역사의 기초를 다졌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4] 224년에 바로 망한 건 아니고 볼로가세스 6세가 셀레우키아 등을 거점으로 저항했지만 얼마 못가 4년 만인 228년에 완벽히 망했다. [5] 특히 627년에는 조로아스터교의 3대 성화(聖火)이자 전사-귀족 계급을 상징하는 아두르 구쉬나습의 사원이 로마군에게 파괴되어 호스로 2세의 권위는 밑바닥까지 추락했다. [6] 이전 우마이야 칼리프조의 학문과 산업을 떠받드는 중추는 시리아와 이라크 일대의 아람어 사용자들이었다. 비교하자면 우마이야 왕조의 수도는 오늘날 시리아 수도에 해당하는 다마스쿠스이고 아바스 왕조는 처음에 호라산 일대에서 시작하여 후일 바그다드를 수도로 삼았다. [7] 사만 왕조 자체는 조금 더 버티다가 결국 999년 카라한 칸국에게 멸망한다. [8] 이 이전까지 길란과 타바리스탄을 다스리던 국가는 알라비 왕조다. 원래 이 타바리스탄 지방은 이란 본토와 산맥으로 막혀있는 땅이라 카린반드 왕조 같은 사산 왕조의 잔당들이 끝까지 저항하는 등 아바스 왕조마저도 쉽게 동화시키지 못했다. 이 점을 파고든 시아파 반아바스 세력들이 타바리스탄 지역으로 이주해온 것이다. 시아파 세력들은 아바스 왕조가 쇠락하자 864년 아바스 왕조의 대리인인 타히르 왕조에게 반란을 일으켜 알라비 왕조를 세웠다. 다만 이후 사만 왕조의 침략으로 쇠락하다가 결국 지여르 왕조에게 흡수된다. [9] 당시 칭기즈 칸은 3명의 사신과 친서를 파견해서 우호를 다지고자 했다. 하지만 무함마드 2세의 외가 친척이자 오트라르의 아미르였던 이날추크가 그들을 죽여버리고 재물을 약탈했다. 칭기즈 칸은 항의성 서신을 보냈지만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무함마드 2세는 사신의 수염을 깎고 모욕한 채로 돌려보낸다는, 인생 최악의 실수를 저지르고야 만다. [10] 이때 훌라구는 페르시아로 돌아가기 전에 키트 부카에게 일부 별동대를 주고 시리아 등 점령지를 지키도록 했지만 맘루크 왕조에게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시리아 지방을 잃어버렸다. [11] 당시 추판 왕조는 정통성을 노리기 위해 일 칸국의 핵심 지대이자 수도였던 타브리즈를 원했다. 그래서 타브리즈를 다스리던 잘라이르 왕조를 공격한 것이다. [12]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환생이라고 믿었을 정도로 스스로의 신화에 집착했다. 그런 인간이 대패했으니 상심은 정말 엄청났다. 아예 사람이 무너져버린 수준이었다고. [13] 이때 한편으로는 사산 왕조 시대 제국의 정치와 군사는 조로아스터교도들이 경제는 기독교도들이 책임졌던 경제 구조가 다시 한 번 부활하였다. 사파비 제국의 시아파들은 정치와 군사를 맡았다면 아르메니아인들은 유럽인 기독교도 및 오스만 제국의 수니파 무슬림들과 교역하며 제국의 경제를 안정화시켰던 것이다. [14] 무굴 제국은 이를 기점으로 완전히 망해버린다. 이미 아우랑제브 사후 쇠락해가고는 있었지만 대제국의 규모는 유지하고 있었는데, 나디르 샤가 델리를 털어버리면서 완벽하게 몰락한다. 이 이후의 무굴 제국은 그냥 델리 지방정권 수준이다. [15] 사산 왕조 때부터 국호는 이란이었지만 서방에서는 '페르시아'로 통용되고 있었다. [16] 당시 대소 랜드리스물자 다수는 대서양에서 출발, 스칸디나비아 반도 북부, 북극해를 거쳐 소련 아르항겔스크로 이어지는 항로로 운반되었으며, 이 지역은 험악한 날씨와 노르웨이에 배치된 U-보트와 폭격기의 위협을 받았다. [17] 작전명 아이아스/아작스Operation Ajax 작전을 추진하게 된다. 별 실적이 없던 CIA가 타국의 정치에 개입하여 성공으로 이끈 첫 번째 비밀 작전이다. 이를 계기로 CIA가 과테말라를 비롯해 다른 나라의 정치에 계속적으로 개입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 작전은 정작 영국에게는 그다지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는데, 미국의 석유이권 개입으로 이란에서 처음 제시한 50:50에도 못미치는 20%의 이득만을 가져가게 된다. [18] 이런 것 때문인지 이란인들 중에서는 아직도 팔라비 왕조를 그리워 하는 사람이 많다 카더라. 틀린 말은 아닌게 파라 팔라비 이란 황후의 경우를 봐도(...). [19] 사바크의 최대 협력자는 놀랍게도 이스라엘의 모사드였다. [20] 하메네이는 민족상으로는 이란 인구 대부분(5400만)을 차지하는 페르시아인이 아닌 아제르바이잔인이다. 물론 옛 소련이었던 아제르바이잔 공화국 출신인 것은 아니다. 아제르바이잔인은 본국(820만)보다 오히려 이란(1700만)에 더 많이 산다. 상대적으로 페르시아민족에 비해 소수인 민족 출신(하지만 이란 인구 20%가 넘기에 소수민족이라고 우습게 볼 정도는 아니다) 이 최고 지도자 자리에 오른 것에서도 보다시피, 이란에서는 시아파 무슬림이라는 가정 하에 민족 차별 문제는 크지 않은 편. [21] 이란은 중산층, 유년층 막론하고 반 신정경향이 강해 신정이 무너지고 세속적인 지도자가 들어서면 곧 정상화 된다. 다만 외세의 개입은 필히 이란을 불행하게 만들기에, 이란 망명자들조차 서방이 직접 붕괴시키는 것이나 이를 사주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한다. [22] 이란의 70, 80년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마르잔 사트라피 원작, 뱅상 파로노드(Vincent Paronnaud) 감독의 페르세폴리스라는 애니메이션이 있으니 관심이 있으면 보도록 하자. 물론 마르잔 사트라피가 만든 원작 만화책도 훌륭한 참고문헌이다. [23] 이것도 지역마다 얘기가 다르다. 물론 테헤란같은 대도시에서야 보수파 VS 진보파 간의 대결이 성사되지만 농어촌 지역으로 가면 얘기가 달라서 보수파와 개혁파를 왔다갔다하는 의원들이 꽤 된다. [24] 물론 튀니지와 이집트, 리비아도 반미, 반서방 감정이 없진 않지만 이란처럼 격렬하게 미국이나 서방을 증오, 적대하진 않는다. [25] 사실 이란의 신정통치가 워낙에 악랄해서 쿠르드인들과 수니파는 예전부터 불만이 가득했다. [26] 페르시아력의 제8월 [27] 참고로 이란은 전날인 15일 이라크 쿠르디스탄 지역에 있는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의 첩보시설을 탄도미사일로 공격해 이라크 민간인 4명이 사망했다. 같은 날 케르만 폭탄 테러의 보복으로 시리아의 IS 근거지도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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