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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1 15:24:54

에레클레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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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헤티 왕국 14대 군주
카르틀리-카헤티 왕국 초대 군주

ერეკლე | 헤라클리오스 2세
파일:헤라클리오스 2세.jpg
제호 한국어 헤라클리오스 2세
조지아어 ერეკლე II
라틴어 Heraclius II
가족 테이무라즈 2세(아버지)
타마르 2세(어머니)
케테반(누이)
엘레네(누이)
아나(누이)
케테반 음하이트제(첫째 아내)
안나 아바시제(둘째 아내)
다레얀 다디아니(셋째 아내)
바크탕(장남)
기오르기 12세(차남)
솔로몬(삼남)
레반(사남)
이울론(오남)
바크탕(육남)
테이무라즈(칠남)
소슬란-다비트(팔남)
알렉산드레(구남)
아르칠리(십남)
루아르사브(십일남)
루수단(장녀)
타마르(차녀)
엘레네(삼녀)
마리암(사녀)
소피아(오녀)
살로메(육녀)
아나스타샤(칠녀)
케테반(팔녀)
미리암(구녀)
예카테리나(십녀)
테클라(십일녀)
파르나오즈(십이녀)
생몰 년도 1720년 11월 7일 ~ 1798년 1월 11일
재위 기간 1744년 ~ 1762년(카헤티 국왕)
1762년 ~ 1798년(카헤티-카르틀리 연합 왕국 국왕)
서명
파일:에레클레 2세 서명.svg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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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헤티 왕국 14대 국왕이자 카르틀리-카헤티 왕국 초대 국왕.

2. 생애

카헤티 왕국 13대 국왕이자 카르틀리 왕국 18대 군주 테이무라즈 2세와 카르틀리 왕 바크탕 6세의 딸 타마르 2세의 장남이다. 누이로 케테반, 엘레네, 아나가 있었다. 테이무라즈 2세는 1732년 12월 이복형제이자 당시 카헤티 왕국의 군주였던 콘스탄틴 2세 오스만 제국의 장성 유수프 파샤와 협상을 시도하다가 피살된 뒤 왕위에 올랐다. 이후 오스만 제국의 압박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이란에서 강대한 세력을 구가하고 있던 나디르 샤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그러나 예레반에 주둔한 나디르 샤를 찾아와서 충성을 맹세하려 하는 순간 갑작스럽게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었다. 페르시아군은 나디르 샤의 명령을 받들어 카헤티와 카르틀리 전역을 황폐화시켰고, 많은 조지아인이 학살당하거나 페르시아로 강제 이주되었다.

테이무라즈 2세는 감옥을 가까스로 탈출한 뒤 은신하다가 나디르 샤가 철수한 후 카헤티로 돌아왔다. 얼마 후, 트빌리시의 총독인 세피 칸이 카헤티 왕으로 인정해줄 테니 힘을 합쳐 나디르 샤에 대항하자고 제안했다. 테이무라즈 2세는 세피 칸과 고리에서 협상하는 척했다가 긴급 체포한 뒤 나디르 샤에게 세피 칸을 넘겼다. 나디르 샤는 테이무라즈 2세를 아프가니스탄 원정에 데려가면서, 장남 헤라클리오스 2세와 딸 케테반을 인질로 넘기는 대가로 카헤티 국왕으로 세워주겠다고 제안했다. 테이무라즈 2세는 이를 받아들여 카헤티로 돌아갔고, 나디르 샤는 헤라클리오스 2세를 인도 원정에 데려갔으며 케테반은 나디르 샤의 조카 알리 쿨리 칸과 결혼했다. 케테반과 알리 쿨리 칸의 결혼식이 거행되던 날, 나디르 샤는 헤라클리오스에게 이슬람교로 개종하라고 권유했다. 그러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저를 죽이는 건 가능하지만 제 영혼을 부패시키고 변질시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저를 무슬림으로 만들려 하지 마십시오."

나디르 샤는 자신에게 대놓고 거부 의사를 밝히는 당돌한 젊은이의 패기를 마음에 들어했다고 한다. 이후 인도 원정에서 탁월한 무공을 선보여 나디르 샤의 신임을 얻었다. 1783년 인도 원정이 끝난 뒤 카헤티 왕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카헤티군 지휘관을 맡은 그는 아버지의 전쟁에서 활약했다. 1744년 아할치헤의 유수프 파샤가 15,000명의 오스만군을 이끌고 동부 조지아를 침략하자, 트빌리시 총독은 테이무라즈 2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테이무라즈 2세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고리에서 트빌리시 총독과 합세한 뒤 오스만군에 대항했으나 패배했다. 유수프 파샤는 고리에 틀어박힌 적을 포위하고 군대 일부를 다케스탄의 고지대로 보냈다. 군대가 분산된 걸 알게 된 테이무라즈 2세는 아들에게 이들을 요격하라고 지시했다. 헤라클리오스는 아라그비 강둑에서 다케스탄으로 이동 중이던 오스만군을 습격해 큰 타격을 입히고 막대한 물자를 탈취했다. 뒤늦게 패전 소식을 전해들은 유수프 파샤는 고리 포위를 해제하고 아할치헤로 퇴각했다.

1744년, 나디르 샤는 테이무라즈 2세를 카르틀리의 왕으로 세우고 헤라클리오스를 카헤티의 왕으로 선임했다. 1747년 나디르 샤가 암살된 뒤 이란이 혼란에 휩싸이자, 1749년 이란에서 본국으로 귀환한 아버지와 함께 독립을 꾀했다. 아스트라바드, 마잔다란, 길란 지방을 다스리고 있던 이란 사령관 무하마드 하산 칸 카자르가 이란으로부터 독립하려 드는 예레반 칸국을 포위 공격하자, 테이무라즈 2세는 예레반 주민들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여 아들과 함께 에레반으로 진군했다. 헤라클리오스가 선봉에 서서 무하마드 하산 칸을 격파했고, 무하마드는 코르투라프 요새로 도주했다. 헤라클리오스는 요새를 곧 함락시킨 뒤 무하마드를 아버지에게 바쳤다. 테이무라즈 2세는 무하마드를 정중하게 대접하고 풀어준 뒤, 예레반 칸국을 자국의 속국으로 삼고 공물을 부과했다.

1751년, 아제르바이잔의 이란군 사령관 아자트 샤가 예레반을 포위 공격했다. 이번에도 예레반의 원조 요청을 받아들인 테이무라즈 2세는 아들에게 소규모 병력을 맡겼다. 헤라클리오스는 키르불라키 인근에서 더 많은 병력을 갖추고 있던 아자트 샤의 군대를 격파하고 아제르바이잔으로 쫓아냈다. 1752년, 간자 칸 샤하베르드는 더 이상 테이무라즈 2세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겠으며 공물도 바칠 수 없다고 통보했다. 이에 테이무라즈 2세는 아들과 함께 간자로 진군했다. 샤하베르드는 셰키 칸, 다케스탄 산악 부족들과 연합하여 이에 대항했다. 테이무라즈 2세와 헤라클리오스는 수적으로 우세한 적에게 패퇴하여 조지아로 돌아갔다. 셰키 칸은 조지아에 대한 보복 원정을 계획하고, 아들 아가 키시 벡에게 다케스탄인, 쉬르반인, 다르벤트인, 간자인으로 구성된 대군을 맡겨 조지아를 침공하게 했다. 테이무라즈 2세와 헤라클리오스는 이에 대항하여 트빌리시 외곽에서 맞붙었다. 이번에는 조지아군이 대승을 거두었고, 아가 키시 벡은 50마일 동안 추격한 적군을 가까스로 회피해 본국으로 귀환했다.

1755년, 헤라클리오스는 크바렐리 전투에서 다케스탄 산악민족을 제압하여 다시는 조지아를 침략하지 못하게 했다. 한편, 조지아 영토를 배회하던 투르코만인들이 아르메니아로 이주했다. 아버지의 지시를 받아 예레반 칸국으로 파견된 헤라클리오스는 아르메니아에 이주한 투르코만인들이 이전 목초지로 돌아가도록 강요하고 투르코만인들에게 이주를 허용한 예레반들에게 벌금을 부과했다. 얼마 후, 셰키 칸의 세력이 날로 확장되는 걸 두려워한 간자, 카라바흐, 예레반, 카라다그, 나히체반 칸들이 헤라클리오스와 동맹을 맺고 공동으로 셰키 칸을 도모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간자 근처에서 회의가 진행되고 있을 때, 매복하고 있던 조지아군이 습격하여 5명의 칸을 체포했다. 셰키 칸은 이 사실을 알게 되자 "무슬림 칸들을 무단으로 잡은 이교도를 응징한다"라는 명분을 내세워 헤라클리오스를 추격해 악스타파차이 강 인근에서 격파하고 5명의 칸을 구출했다. 뒤이어 조지아를 침공해 카라바흐와 보르찰라 지역을 점령하고 아가 키시 벡을 그곳에 남겨뒀다. 헤라클리오스는 일단 후퇴했다가 병사들을 끌어모아 반격에 나섰고, 카라바흐인 2,000명이 가세한 것에 힘입어 아가 키시 벡을 셰키로 몰아냈다.

1758년, 카르틀리의 테이무라즈 2세, 카헤티의 헤라클리오스 이메레티 왕국 솔로몬 1세는 동맹을 맺고 외세가 조지아를 침략할 때 공동으로 대응하기로 했다. 1762년 1월 8일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머물며 러시아 제국의 지원을 호소하던 아버지가 갑자기 사망했다. 그 후 헤라클리오스는 카르틀리-카헤티 연합 왕국의 초대 군주로 즉위했고, 명목상 카르틀리, 카헤티의 주군이었던 잔드 왕조의 카림 칸도 이를 받아들였다. 그는 나라를 전면적으로 개혁하고 조지아 전역을 통합할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러시아에 사절을 보내 조지아에서 러시아 법률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요청하여 승인을 얻었다. 이와 동시에, 조지아의 진보주의자들을 끌어들여 국가 시스템의 근본적인 변화에 대한 법안 초안을 작성하게 했다.

진보주의자들은 강력한 중앙집권 정부를 수립해 조지아 전체를 통솔하게 하고, 무역 관계를 최대한 활성화시키고 국내 무역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여겼다. 그들은 충분한 원자재를 가지고 있는 조지아의 특성을 살려 광업 및 채굴업에 힘을 기울여야 하며, 공예품 개발을 위해 교육받은 사람이 필요하니 학교를 곳곳에 설립하고 국가가 교사들을 지원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들의 대표인 요안니스 바그라토니는 조지아의 중세 관직인 에리스타비, 사타바도스 등을 폐지하고, 이들이 보유하고 있는 토지들을 소작농들에게 나눠줘야 한다고 여겼다. 그는 이 모든 제안을 수락하고 나라의 체계를 러시아식으로 개편했으며, 서양 과학자와 기술자들을 초빙했다. 그는 군대에도 손을 댔다. 상병, 하사관, 상사, 장교, 포병 대령 등 계급 조직을 확립했으며, 포병 지휘관으로 펠드저그마이스터(feldzeugmeister)를 설립했다. 이와 동시에, 왕국의 군대는 러시아에서 파견된 군사 고문으로부터 훈련을 받았다. 이러한 헤라클리오스의 전면 개혁에 반감을 품은 카르틀리 귀족들은 바크탕 6세의 사생아인 파이타를 새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 1765년, 그는 이 음모를 적발하여 반대파를 모조리 처벌했다. 또한 노예 신분인 이들을 해방시키고 전 주인이 그들에게 손을 대지 못한다는 내용의 법령을 공표했다.

1763년 아르메니아 출신 러시아통 정치가 요제프 에민이 트빌리시를 망문하자, 그는 에민을 영예롭게 맞이하고 아르메니아인과 조지아인을 통합할 필요성에 관해 논의했다. 에민은 그가 지체없이 아르메니아인을 외세로부터 해방시키길 바란다고 밝혔다. 그는 이에 적극적으로 동의했고, 인도의 마드라스에서 아르메니아인 해방운동조직을 창설한 샤하마르 샤카미르얀과 손을 잡았다. 그러던 1768년,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이 전쟁을 단행했다. 러시아 차르 예카테리나 2세는 1770년 그에게 사절을 보내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 참여하라고 독려했다. 그는 이 기회에 오스만 제국의 치하로부터 아르메니아를 구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전쟁에 뛰어들었다.

그해 3월, 7,000명의 병력을 소집한 그는 코카서스로 진군한 1,200명의 러시아 분견대 지휘관 토틀레벤과 합세한 뒤 아할치헤로 쳐들어갔다. 4월 14일 사제르 요새를 공략한 연합군은 4월 17일 아즈쿠리 요새를 포위했다. 그는 아즈쿠리 요새를 공략하느라 시간 낭비하지 말고 아할치헤로 계속 진군하자고 제안했지만, 토틀레벤은 적 요새를 후방에 놔둘 수 없다고 판단해 공성전을 벌였으나 공략에 실패했다. 아할치헤 파샤가 구원군을 파견하자, 토틀레벤은 4월 19일에 갑자기 철수했다. 그는 단독으로 아할치헤군을 격파한 뒤 아할치헤로 계속 진격했다. 아할치헤 파샤는 이를 막기 위해 1,500명의 병사를 케르트비시 요새에서 차출하여 반격했지만, 그는 이번에도 격파했다. 얼마 후 8,000명의 오스만군이 아스핀자 근처에 나타나자, 그는 적군 대부분이 므트바리를 넘도록 허용한 뒤 야간에 아가바 에리스타, 시몬 무크란바톤, 쿠디아 보르바할렐리가 분견대를 이끌고 적의 퇴로를 끊게 했다.

1770년 4월 20일, 그가 이끄는 조지아군은 아스핀자 전투에서 오스만군과 맞붙었다. 그의 군대는 오스만군을 상대로 맹공을 퍼부었고, 후방에 매복하고 있던 아가바, 시몬, 쿠디아 휘하 분견대가 적이 다리 쪽으로 후퇴할 때 가로막았다. 이 전투에서 오스만군 4,000명이 전사했고, 여러 지휘관이 목숨을 잃거나 사로잡혔다. 또한 수많은 포로와 깃발, 기마 및 대포들을 노획했다. 그러나 토틀라벤이 러시아군을 이끌고 본국으로 돌아가버린 데다 오스만군이 더 많은 병력을 보낼 기미가 보이자 조지아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1771년 다시 공세를 개시해 케르트비시 요새를 공략했고, 1772년 조지아 총대주교 안톤과 그의 아들 레반이 이끄는 사절단을 러시아에 파견해 지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1773년 솔로몬 1세와의 상호 방위 동맹을 연장한 그는 1774년 의무군을 창설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결과, 그는 항시 5,000명의 병력을 보유할 수 있었고 아들 레반이 이들의 지휘관을 맡았다.

1777년 크사니 공국을 완전히 폐지하고 왕국의 영역에 배속시켰으며, 1778년, 간자의 통치자 알리 칸을 상대로 공세를 가해 상당한 타격을 입혔고, 1779~1780년에 예레반 칸국을 몰아붙인 끝에 굴복시켰다. 1782년 12월 21일 러시아 제국에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왕국을 보호해달라고 공식 요청했다. 1783년 7월 24일, 게오르기에프스크에서 러시아 제국과 카르틀리-카헤티 연합 왕국 사이에 조약이 체결되었고, 그해 11월 2일 2개의 러시아 대대가 트빌리시에 진입했다. 1784년, 조지아인과 러시아인 연합군은 라차 토후국을 공격해 큰 승리를 거두었다. 1785년 9월, 아바리의 통치자 오마르 칸은 2만 대군을 이끌고 조지아로 쳐들어갔다. 러시아군이 승산이 없다고 철수해 버리는 바람에 대항할 여지가 없던 그는 오마르 칸에게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돌려보냈다. 1786년, 그는 아할치혜의 쉴레이만 파샤와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그해 12월 18일 사가레조에서 고위급 간담회를 열고 지원에 소극적인 러시아에서 다른 나라로 외교 방향을 수정하는 문제를 논의했지만, 협조를 얻을 만한 나라가 따로 없었기에 러시아와 계속 손잡기로 했다.

한편, 이메레티의 국왕 솔로몬 1세는 자신에게 후계자가 없는 점을 고려하여 그의 손자이며 자신의 조카인 다비트 아르칠로비치를 후계자로 삼았다. 그런데 1784년 솔로몬 1세가 사망한 후 다비트 2세가 밍그렐리아 공작 카지아 2세 다디아니 등 일부 귀족들의 지원을 바탕으로 이메레티 왕으로 추대되었다. 1789년, 그는 손자 다비트를 왕좌에 앉히기 위해 이메레티 왕국으로 쳐들어갔다. 1789년 6월 10일 맛호지 전투에서 이메레티 귀족들의 배신으로 패배한 다비트 2세는 아할치헤로 도주했다. 다비트 아르칠로비치는 왕국의 수도 쿠타이시에 입성한 뒤 솔로몬 2세를 칭하고 즉위했다.

1790년, 이메레티 왕국의 군주 솔로몬 2세가 파견한 사절단이 그를 찾아와서 자신들이 그의 왕국에 합류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국무 회의를 열었다. 기오르기 바토니쉬빌리, 다비트 오르벨리아니, 차부아 오르벨리아니, 조지아 총대주교 안톤은 찬성했지만, 이오란 무크란 바토니 등은 반대했다. 그는 고심 끝에 이메레티 왕국을 병합하면 이메레티의 주군을 자처하는 오스만 제국을 심히 자극하여 전면전이 벌어질 우려가 있으니 받아들이지 않기로 하고, 그 대신 그의 손자인 솔로몬 2세의 이메레티 왕위를 인정하고 원조를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얼마 후, 다비트 2세가 솔로몬 2세를 무찌르기 위해 투르크군과 함께 이메리티로 진군했다. 한때 수도 쿠타이시를 장악하고 이메레티 왕위에 복귀했으나, 1791년 러시아 제국의 지원을 받은 솔로몬 2세에게 패배하고 오스만 제국에 망명했다. 그는 다비트 2세와 솔로몬 2세를 중재하여 화해시킨 뒤 다비트 2세가 이메레티로 귀환하여 많은 영지를 받게 했다. 하지만 왕위에 복귀할 야심을 포기하지 않았던 다비트 2세는 1792년 다케스탄에서 용병을 고용해 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또다시 패배하고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했다.

1794년 이란을 통일하여 카자르 왕조를 창건한 아가 모하마드 칸은 조지아를 정복하기 위한 군사 원정을 기획했다. 1795년 6월, 코카서스 남동부의 많은 지역을 공략한 모하마드 칸은 예레반과 슈시 칸국을 마저 정복하러 군대를 파견했다가 헤라클리오스 2세의 아들 알렉산드레에게 격파되었다. 모하마드 칸은 헤라클리오스가 이란의 종주권을 다시 인정하고 러시아와의 관계를 단절한다면 왕위를 인정하겠다고 약속했다. 헤라클리오스가 거부하자, 모하마드 칸은 그해 9월 35,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조지아로 쳐들어갔다. 양군은 크르차니시 전투에서 맞붙었다. 초반에는 조지아군이 상대의 맹공을 번번이 격퇴했지만, 모하마드 칸의 끈질긴 공격을 견디지 못한 조지아군 일부 부대가 이탈하면서 헤라클리오스는 끝내 패배했다. 이 전투에서 5천 명의 병력을 잃은 그는 트빌리시로 도주했다.

모하마드 칸이 트빌리시를 공격해오자 "이 소중한 도시를 떠나느니 차라리 죽겠다"라고 선언했지만, 경호원들과 가족들의 필사적인 호소에 굴복하여 도시를 떠났다. 모하마드 칸은 트빌리시에 입성한 뒤 도시를 황폐화시키고 백성들을 학살했다. 러시아 제국은 게오르기예프스키 조약에 의거해 조지아에 구원군을 보내야 할 의무가 있었지만, 헤라클리오스의 연이은 요청에도 제때 움직이지 않다가 트빌리시가 함락된 뒤에야 뒤늦게 출진했다. 그러나 1796년 예카테리나 2세가 사망했고, 뒤이어 차르가 된 파벨 1세는 모든 러시아군을 조지아에서 철수시켰다. 그 후 모하마드 칸이 러시아와 동맹을 맺은 조지아인들을 징벌하기 위한 2차 원정을 계획했으나 1797년 암살당하면서 조지아는 망국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는 생전에 세 번 결혼했다. 1740년 케테반 음하이트제와 결혼하여 아들 바크탕과 딸 루수단을 낳았다. 1744년 아내가 사망한 뒤 1745년 안나 아바시제와 재혼하여 기오르기 12세, 타마르를 낳았다. 1750년 다레얀 다디아니와 결혼하여 8남 9녀를 낳았다. 1798년 1월 11일 텔라이브에서 사망했고, 아들 기오르기 12세가 뒤이어 왕위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