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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레클레 2세 | 기오르기 1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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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틀리-카헤티 왕국 2대 군주 გიორგი | 기오르기 1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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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한국어 | 기오르기 12세 |
조지아어 | გიორგი XII | |
라틴어 | George XII | |
가족 |
헤라클리오스 2세(아버지) 안나 이바시제(어머니) 타마르(누이) 케테반 안드로니카슈빌리(첫째 아내) 미리암 치치슈빌리(둘째 아내) 다비트(장남) 이오안(차남) 루아르사브(삼남) 바그라트(사남) 솔로몬(오남) 테이무라즈(육남) 미하일(칠남) 지브라엘(팔남) 이오세브(구남) 스피리돈(십남) 오크로피르(십일남) 스비메온(십이남) 이라클리(십삼남) 바르바라(장녀) 소피오(차녀) 니노(삼녀) 살로메(사녀) 가야나(오녀) 타마르(육녀) 아나(칠녀) 일리아(팔녀) 아나(구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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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 년도 | 1746년 11월 10일 ~ 1800년 12월 28일 | |
재위 기간 | 1798년 ~ 1800년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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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르틀리-카헤티 왕국 2대이자 마지막 군주.2. 생애
카헤티-카르틀리 연합 왕국 초대 군주 헤라클리오스 2세와 안나 아바시제의 장남이다. 여동생으로 타마르가 있었으며, 아버지가 다른 아내 케테반 음하이트제, 다레얀 다디아니와의 사이에서 낳은 이복형제 9남 10녀가 있었다. 그는 1760년대부터 공직에 참여해 아버지를 보좌했다. 1795년 카자르 왕조의 아가 모하마드 칸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된 트빌리시를 재건하는 사업에 도맡았다. 그는 인구 조사를 실시하고 궁전을 복원하기 위해 세금을 도입했다. 하지만 헤라클리오스 2세는 모인 돈을 교회 복구에 썼다.다레얀 다디아니 왕비는 그가 후계자로 지명된 것에 반감을 품고 헤라클리오스 2세에게 자기 아들들 중에서 후계자를 세우라고 강력히 권고했다. 그러나 헤라클리오스 2세는 그녀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는 1798년 1월 11일 사망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새 군주가 되었다. 그러나 다레얀 다디아니 왕비와 이울론, 알렉산드레 왕자는 그의 즉위에 반발했다. 그들은 보르찰로, 카라바흐, 샴샤딜 등 무슬림이 다수인 지역을 점거하고 새 왕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했다. 그는 이에 대응하여 아버지가 창설했던 "의무군"을 복원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는 한편 조지아와 아르메니아 기독교의 통합을 위해 노력했으며,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정교회를 전파하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한편, 그는 아버지의 친 러시아 정책을 이어갔다. 러시아에 러시아군을 조지아에 진주시켜달라고 요청했으며, 조지아인들에게 러시아 시민권을 발부해달라고 청했다.
1799년 4월, 파벨 1세는 카헤티-카르틀리 연합 왕국과 후원 계약을 체결하고 그해 가을에 러시아군을 파견했다. 1799년 11월 26일 러시아군이 트빌리시에 진주하여 그의 영접을 받았다. 1800년 6월 24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조지아 사절단은 시민권에 관한 문서 초안을 러시아 외교부에 넘겼다. 그는 이 문서에서 자신의 후손, 성직자, 귀족 및 그에게 복종하는 모든 사람들이 러시아 제국의 시민권을 받아들이고 러시아인이 하는 모든 것을 신성하게 수행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장남 다비트가 왕위를 이어받도록 해주기를 희망했다.
1800년 9월 23일, 또다른 러시아군 연대가 트빌리시에 도착했다. 그해 11월 7일, 라자레프 장군이 이끄는 2개의 러시아 연대가 이오리 강 유역의 카카베티 마을 인근에서 조지아군과 함께 알렉산드레 왕자와 연합한 아바르 칸의 아제르바이잔군을 격멸했다. 이후 중병에 걸린 그는 라자레프 장군과 러시아 정부에서 파견한 관료들이 조지아의 권력을 장악하는 걸 용인했다. 1800년 11월 14일, 파벨 1세는 조지아 사절들에게 조지아인들에게 러시아 시민권을 발부하겠다고 약속했으며, 그의 아들 다비트를 왕으로 인정해주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1800년 12월 28일 그가 사망한 후, 파벨 1세는 조지아를 러시아에 병합하고 다비트를 러시아에 소속된 조지아 속주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1801년 1월 18일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서 파벨 1세의 카헤티-카르틀리 왕국 합병에 관한 선언문이 공포되었고, 그해 2월 중순 트빌리시에서도 발표되었다.
1801년 3월 12일 파벨 1세가 암살된 뒤 새 차르에 오른 알렉산드르 1세는 조지아를 러시아에 합류시키는 문제를 재고려했다. 그들은 조지아가 중동에서 러시아의 진출에 중요한 교두보임을 고려하여 카르틀리와 카헤티의 자치 행정을 폐지하고 러시아 행정기구를 도입하기로 결의했다. 이 결정에 따라 기오르기 12세의 장남 다비트는 축출되었고, 라자레프 장군이 조지아 주지사로 임명되었다. 러시아의 결정에 분노한 다레얀 다디아니 왕비와 자식들은 조지아의 러시아 병합과 기오르기 12세의 장남 다비트 12세의 권력 승계를 절대적으로 거부했다. 이중 알렉산드레 왕자는 이란과 오스만 제국을 오가며 30여 년간 러시아를 상대로 항전했으나 끝내 진압당했다.
기오르기 12세는 1766년경 케테반 안드로니카슈빌리와 결혼하여 다비트, 이오안, 루아르사브, 바그라트, 솔로몬, 테이무라즈 등 6명의 아들과 바르바라, 소피오, 니노, 살로메, 가야나 등 5명의 딸을 낳았다. 1783년 미리암 치치슈빌리와 재혼하여 미하일, 지브라엘, 이오세브, 스피리돈, 오크로피르, 스비메온, 이라클리 등 7명의 아들과 타마르, 아나, 일리아, 아나 등 4명의 딸을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