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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 모하마드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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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르 왕조 초대 샤한샤
아가 모하마드 샤
آغا محمد خان قاجار
파일:A_portrait_of_Agha_Muhammad_Khan,_Persia,_Qajar,_dated_1795.jpg
<colbgcolor=#F16765><colcolor=#fff,#fff> 이름 아가 모하마드 칸 카자르
آغا محمد خان قاجار
출생 1742년 3월 14일
아프샤르 왕조령 아스트라바드[1]
사망 1797년 6월 17일 (향년 55세)
카라바흐 칸국령 파나하바드[2]
재위 기간 카자르 왕조 샤한샤
1789년 ~ 1797년 6월 17일 (8년)
후임자 파트 알리 샤 카자르
종교 이슬람 시아파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카림 칸의 죽음과 잔드내전, 그리고 아가 모하마드 칸의 웅비2.3. 잔드 vs 카자르 왕조2.4. 이란 통일2.5. 최후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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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란 페르시아 카자르 왕조의 건국 군주. 투르크족 카자르 부족 출신이다. 능력을 보면 매우 출중하여 이란에서 손꼽히게 뛰어난 전략가이자 정복군주이다. 1747년, 아프샤르 왕조의 아딜 샤에게 아버지 모하마드 하산 칸의 세력이 패배해 포로로 잡혔을 때, 목숨을 살려주는 대가로 거세당하고 말아 어린 나이에 고자가 되었다.[3] 이후 아프샤르 왕조가 이란 본토에서 밀려나고 계속해서 세력을 키워나가던 모하마드 하산 칸은 결국 잔드 왕조와 맞붙어 패배, 사망하고 아가 모하마드는 카림 칸 잔드의 궁정에 끌려와 그 정치적 능력을 인정받아 정치적 조언자로 일하게 된다.

그렇게 카림 칸에게 인정받아 출세를 거듭한 아가 모하마드는 마침내 잔드 왕조에 반역, 잔드 왕조를 무너뜨리고 아프샤르 왕조를 정복하여 페르시아 전역을 장악했다. 고자의 복수 아가 모하마드 칸은 1794년 잔드 왕조의 마지막 왕 로트프 알리 칸을 고문하고 죽였고, 2년이 지난 1796년 3월에 대관식을 했다. 1797년 캅카스 원정을 준비하던 도중 암살당했고 왕위는 조카 파트 알리 샤 카자르[4]가 이어받는다.

2. 생애

2.1. 초기

모하마드는 카자르족 부족장 모하마드 하산 칸의 아들이었다. 나디르 샤 사후 아프샤르 내전 와중 1747년 7월, 이스파한에 입성한 아프샤르 조의 아딜 샤는 고르간에서 반란을 일으킨 카자르 부족의 모하마드 하산 칸을 격파하고, 그 5세 아들 모하마드를 사로잡아 거세하였다. 모하마드의 별칭 아가도 사실 환관의 명칭이다.[5]

이후 잔드 왕조의 카림 칸에게 모하마드 하산 칸이 패해 죽자 아가 모하마드는 잔드 조의 수도 쉬라즈로 압송되어 카림 칸의 휘하에서 궁중 신하로 복무하게 된다.

2.2. 카림 칸의 죽음과 잔드내전, 그리고 아가 모하마드 칸의 웅비

1778년, 잔드 왕조의 개국 군주 카림 칸의 죽음을 틈타 연금되어 있던 아가 모하마드 칸은 쉬라즈를 탈출하였다. 이에 자키 칸은 조카 알리 모라드 칸을 보내 추격하게 했는데, 후자는 이스파한에 당도한 후 아볼 파스를 지지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쉬라즈를 탈출했던 사데크 칸 역시 니자리 이맘 아불 하산 알리의 도움으로 케르만에서 군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자키 칸은 태후의 요청으로 아볼 파스를 모하메드 알리 샤와 함께 공동 샤로 추대했지만, 연이은 반란 소식에 결국 아볼 파스를 감금하였다, 그후 반란 토벌에 착수한 자키 칸은 먼저 이스파한으로 출병하였는데, 중간 지점의 이즈다카바스에서 과도한 징세에 저항한 주민들에 대한 잔혹한 학살을 저질렀다. 그 정도가 지나쳐 신하들과 병사들 역시 충격을 받았고, 결국 자키칸은 막사에서 자고 있던 도중에 신하들과 병사들에게 암살된다. (1779년 6월 6일) 그 무렵, 모하메드 알리 칸 역시 심장마비로 요절하였다. 자키 칸의 부고가 전해진 후 사데크 칸은 쉬라즈로 진격, 자키 칸의 아들 아크바르 칸을 간단히 제압하였다. 6월 19일, 쉬라즈에 입성한 사데크 칸은 아볼 파스를 단독 샤로 추대하였다. 아볼 파스는 정치보다는 향락에 관심이 많았기에 사데크 칸이 실권을 휘두르게 되었다.

하지만 그에 만족하지 않은 사데크 칸은 8월 22일, 조카를 폐위해 실명시키고 스스로 샤가 되었다.[6] 한편 정예 병력을 이끌고 이스파한에 주둔하며 고르간을 기반으로 한 카자르 조를 견제하던 알리 모라드 칸은, 주민들을 착취하여 많은 부를 축적하였다. 그리고 1781년 2월, 쉬라즈를 포위한 그는 3월 14일 도시를 함락, 사데크 샤를 죽이고 샤가 되었다. 알리 모라드 샤는 사촌 루스탐에게 대군을 주어 마잔다란의 카자르 조에 맞서게 하였다. 루스탐은 자파르 쿨리 칸이 이끄는 카자르 군과 여러 차례 싸웠으나 결국 패퇴하였다. 이에 알리 모라드 샤가 친정에 나섰다. 그러자 쉬라즈 함락 당시 사데크 샤의 아들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자파르 칸이 기회를 틈타 이스파한을 포위하였다. 알리 모라드 샤는 전선에서 남하하였으나 이스파한 근처 무르차쿠르 마을에서 매복당하여 전사하였다. (1785년 2월 11일) 이로써 육촌인 자파르 샤가 즉위하였다.

2.3. 잔드 vs 카자르 왕조

같은 무렵 아가 모하마드 칸의 카자르 군이 이스파한으로 남하하자, 자파르 샤는 군대를 보내 반격하게 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싸워보지도 않은 채 으로 철수해버렸다. 이에 자파르 샤는 더 큰 규모의 군대를 편성해 보내었으나, 카샨 부근에서 아가 모하마드 칸에게 패하였다. 이에 자파르 샤는 쉬라즈로 도주하였고, 아가 모하마드 칸은 쉬라즈에 남겨진 보물과 하렘 여인들을 취하였다. 잔드 조 제2의 수도였던 이스파한은 카자르 군에게 약탈당하였다. 이후 아가 모하마드 칸이 본진으로 회군하자 1786년 자파르 샤는 신속히 북상하여 이스파한을 수복하였다. 뒤이어 그는 카샨과 쿰에 파병한 후 자신은 하마단으로 진격하였다. 하지만 자파르 샤는 호스로 칸과 모하마드 호세인 칸 카라고즐루 등 현지 부족에게 패하였고, 이스파한으로 철수하였다. 한편 소식을 접한 아가 모하마드 칸이 재차 남하하자 자파르 샤 역시 다시 쉬라즈로 철수하였다.

1788년, 자파르 샤가 성내에 없길 바라며 아가 모하마드 칸은 쉬라즈로 진군하였다. 다만 자파르 샤가 성내에 있었기에 모험은 실패하였고, 견고한 수비 태세를 확인한 아가 모하마드 칸은 본인이 수도로 삼은 테헤란으로 철수하였다. 그러자 자파르 샤는 다시 이스파한 진격을 위해 군대를 모았고, 이스파한 총독인 아가 모하마드 칸의 동생 알리 콜리 칸은 쿠미샤 부족 등을 남파해 방해하게 했으나 잔드 군에게 격되되었다. 이에 알리 콜리 칸은 카샨으로 철수하였으나, 아가 모하마드 칸이 급히 남하하여 자파르 샤는 다시 쉬라즈로 후퇴하였다. 아가 모하마드 칸 역시 결과에 만족하고 테헤란으로 돌아갔다. 카자르 조에 비교적 성공적으로 맞서던 자파르 샤는 1789년 2월 23일, 알리 모라드 칸의 아들 사예드 모라드 칸에게 암살당하였다. 그후 사예드 모라드가 샤로 즉위하였으나 곧바로 복수에 나선 자파르 샤의 아들 로프트 알리 칸의 군대에게 포위되었다.

두 달 가량 버티던 사예드 모라드 샤는 결국 항복하였고, 처형당하였다. (1789년 5월 10일) 이후 로프트 알리 샤가 즉위하였다. 4개월 동안 샤가 2번이나 바뀌는 사태에 기회라 여긴 아가 모하마드 칸은 재차 쉬라즈로 진군하였다. 성밖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그는 낙타를 이용해 잔드 군의 말들을 놀라게 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다만 로프트 알리 샤가 견고한 쉬라즈 성채에서 우주방어에 나서자 테헤란으로 회군하였다. 1790년 로프트 알리 샤는 직접 와서 복속을 표하라는 명을 거부한 케르만 총독을 응징하기 위해 출정했으나 겨울 추위로 많은 병사들만 잃고 돌아왔다. 그럼에도 1791년 그는 이스파한 회복을 위해 출정하였는데, 도중 쉬라즈의 칼란타르 (수비대장) 핫지 이브라힘의 충성심을 의심하여 그 아들을 인질로 대동하였다. 예상대로 군대가 떠나자 핫지 이브라힘은 남은 군대로 하여금 자신의 형제에게 충성을 서약하게 하며 쉬라즈를 장악하였다.

2.4. 이란 통일

로프트 알리 샤는 수백의 근위대와 쉬라즈로 돌아왔지만 성문이 굳게 잠긴 것을 본 병사들 대부분은 성 내의 가족들이 보복당할까 우려하며 이탈해버렸다. 따라서 로프트 알리 샤는 소수의 측근들과 부셰르로 향하였으나 역시 박대당하였고, 그를 동정한 반다르 리그 총독의 도움으로 현지인들로 소수지만 군대를 편성하였다. 그들과 함께 로프트 알리 샤는 부셰르와 카제룬의 군대를 격파하였고, 사로잡힌 후자의 총독을 실명시켰다. 이후 로트프 알리 샤는 쉬라즈로 돌아갔다. 이미 핫지 이브라힘이 카자르 조에게 도시를 넘긴 상태였지만, 로프트 알리 샤는 수적 열세에도 아가 모하마드 칸의 동생 모스타파 콜리 칸과 카자르 조의 원군을 연달아 격파하였다. 이에 아가 모하마드 칸은 4만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였고, 페르세폴리스 부근에서 양측은 격돌하였다. 이란의 운명을 건 전투에서 로프트 알리 칸은 대담한 야습을 통해 카자르 진영에 혼란을 야기하였다.

로프트 알리 샤는 카자르 병사들이 도주하는 것을 보고 아가 모하마드 역시 그랬을 것이라 여겨 병사들에게 적진의 약탈을 금하고 진영으로 돌아와 일출을 기다렸다. 이로써 왕실 막사에 숨어있던 아가 모하마드 칸은 기적적으로 목숨을 구하였고, 새벽 기도 소리에 맞춰 카자르 군을 재정비하였다. 이에 로프트 알리 샤는 후퇴하여 케르만으로 향하였다. (1792년) 카자르 군의 집요한 추격에 로프트 알리 샤는 자신에 동정적이던 타바스 총독의 임지로 향하였다. 그의 도움으로 로프트 알리 샤는 쉬라즈 수복을 시도했으나 아가 모하마드 칸이 직접 수비했기에 실패하였다. 그해 7월, 아가 모하마드 칸은 잔드 왕실과 로프트 알리 샤의 하렘을 테헤란으로 압송하였다. 한편 로프트 알리 샤는 칸다하르로 향하여 두라니 왕조의 티무르 샤에게 도움을 청하려 했으나 후자가 며칠 전 사망한 상태였기에 회군하였다. 다만 과 나르마쉬르의 부족장들이 지원을 약속한 것이 그에게는 호재였다.

그들에게서 얻은 1천 기병을 더한 로프트 알리 샤는 1794년 케르만을 점령하고 자시의 이름으로 금화를 발행하였다. 금화를 보고 분노한 아가 모하마드 칸은 테헤란에 포로로 잡혀 있던 로프트 알리 샤의 아들 파톨라 칸을 거세시켰다. 그후 대군을 이끌고 케르만을 포위하였다. 로프트 알리 샤는 주민들의 협력으로 시타델에서 4달간 버텼으나, 일부 병사들이 변심하여 성문을 여는 바람에 함락되었다. 로프트 알리 샤는 카자르 대군과 맞서 3시간 동안 분전하였으나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밤을 틈타 밤으로 피신하였다. 아가 모하마드 칸은 성인 남성 주민들을 죽이거나 실명시켰는데, 그 앞에 2만개의 눈알 더미가 쌓였다고 한다. 남은 여인들과 아이들은 노예가 되었고, 시가지는 9일간 잿더미로 변하였다. 한편 로프트 알리 샤는 자신의 동생이 카자르 군에게 잡혀 있던 밤 총독에게 배신당하였다. 그는 14명의 병사들과 2시간 동안 격투를 벌이다가 사로잡혔다.

잔드 조에 대한 복수를 염원하던 아가 모하마드 칸은 우선 로프트 알리 샤를 실명시켰고, 테헤란에 감금하여 고문한 후 교살시켰다. 그후 아가 모하마드 칸은 로프트 알리 샤의 병사들을 모아 얼마나 충성했는지 물었다. 그들이 주군이 죽을 때까지 충성했다고 하자, 다시 서로를 아끼냐고 물어봤다. 역시 그렇다고 답하자, 아가 모하마드 칸은 무기를 주며 서로 싸우고 죽이라 명하였다. 병사들은 명령을 따르지 않고 각자 자살을 택했다고 전해진다. 그후 1795년 아가 모하마드 칸은 아제르바이잔의 아자드 칸을 격파한 적이 있던 조지아의 카르틀리-카헤티 왕국을 복속시킨 후 샤한샤로 즉위하며 카자르 왕조를 설립하였다. 1796년에는 호라산을 공격해 아프샤르 왕조를 멸망시켰다. 장님 군주인 샤로흐 샤가 순순히 항복했음에도 아가 모하마드 샤는 나디르샤가 숨긴 보물 위치를 말할 때까지 그를 고문하였고, 결국 샤로흐 샤는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한다.

2.5. 최후

아가 모하마드 칸은 뛰어난 지도자였으나 그가 일으키는 계속된 전쟁과 적에 대한 잔혹한 보복은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반감을 크게 샀고 이로 인해 결국 그는 군대를 이끌고 캅카스로 원정하던 중 천막에서 잠을 자다 암살당하고 만다. 이때 그의 나이 55세였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현 나고르노 카라바흐 지역의 슈샤를 점령했을 당시 두 조지아인 하인들이 다투는 것을 듣고 짜증이 나 처형을 명했지만 하필 그 날이 이슬람 안식일인 금요일이기에 형은 다음날 집행하라고 정정하면서 두 하인을 감금하지 않고 그대로 왕실 막사에서 일하도록 두었는데, 당연히 그들은 가만히 죽음을 기다릴 리가 없었고, 아가 모하마드 샤가 잠들었을 때 칼로 암살했다고 한다.

암살당했지만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져 시신이 이맘 알리 모스크에 묻힌다. 고자였던 그는 자녀가 없었기에 사후 왕위는 조카 파트 알리 샤가 계승하였다. 이는 과거 페르가몬 왕국의 창건자 필레타이로스의 경우와 같다.[7]

3. 기타


[1] (현 이란 골레스탄주 고르간 [2] 아제르바이잔 나고르노카라바흐 슈샤 [3] 이 때문에 수염이 있는 다른 왕들과 달리 위의 초상화만 봐도 수염이 없다. [4] 동생 호세인 콜리 칸의 아들. [5] 이때문에 모마하드는 아딜 샤를 평생 증오하게 된다. 하지만 모하마드를 거세한 아딜 샤도 결국엔 반란을 진압하다가 패하여 도주하다가 붙잡혀 눈이 뽑히다가 나중에는 처형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6] 내전 도중 잔드 조가 점령했던 바스라 오스만 조에게 수복되었다. [7] 그 역시 고자라 사후 조카 아탈로스 1세가 계승하였다. [8] 거세당한 후유증일 가능성이 높다. [9] 이러다보니 초상화를 그리면 항상 원래보다 키를 크게 그리게 했다. 그래서 모하마드가 그려진 그림을 보면 키가 다른 사람과 대등할 정도로 크다. 다만 체격은 어쩔 수가 없어 마르고 왜소한 체격임을 알수있다. [10] 다만 이 단호함이 지나쳐서 문제였다. 유연성이 부족하여 상황이 바뀌더라도 끝까지 자신의 결정과 신념을 바꾸지 않았기에 잔인한 행동을 많이 벌였고, 이로 인해 인망을 크게 잃었다. 이는 모하마드가 암살당하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 [11]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 톨레도, 부르고스 등 기존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주요 도시들이 아닌 마드리드를 수도로 삼은 것과 비슷하다. 펠리페 2세 역시 토착 귀족들을 견제할 목적으로 별볼일 없던 촌락인 마드리드를 수도로 삼았다. 수도가 된 초창기에는 별로 큰 도시가 아니었으나 19~20세기를 거쳐 폭발적인 성장을 한 것도 유사한 점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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