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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21:55:38

키질바시

파일:사파비 제국 국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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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교리 및 기원3. 사파비 제국4. 이후

1. 개요


튀르키예어로 붉은 머리라는 뜻의 키질바시[1] 이슬람 시아파를 추종하는 수피 집단 중 하나로 오늘날의 아제르바이잔 남아제르바이잔 일대에 정착한 오우즈 튀르크 계열의 시아파 무장집단을 의미한다. 사파비 제국의 창건 집단으로 원래 수니파 다수 지역이던 오늘날의 이란을 시아파 다수 국가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적지 않은 집단이라고 하겠다. 이름의 기원인 '붉은 머리'란 이들이 쓰던 붉은색 터번 때문인데 12이맘과 이맘 후세인의 순교를 기억한다는 의미로 터번으로 피를 상징하는 빨간색 천을 12바퀴 감았다고 한다.

2. 교리 및 기원

시아파 수피 사파비 교단에 소속된 기마 전사 조직이었던 이들이 믿던 교리는 오늘날 12이맘파 내 일반적인 자파리파 마드하브와는 차이가 적지 않았다. 이슬람 역사 학자들은 이들의 기원을 이란 북부에 잔존하던 마즈다크교 신도들이나 조로아스터교 잔존 반란세력 호람딘으로 보고 있다.[2] 호람딘의 잔존 세력이었던 쿠르드족과 루르족 상당수가 13세기 수피 지도자 사피웃딘(1252~1334)의 지휘하에 수피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수피 선교를 통해 몽골 제국의 침입 이후 이란 북부에 정착한 튀르크계 전사 집단들을 포섭하기 시작했다. 이후 사파비 수피 교단은 교단주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수니파 수피에서 다시 시아파 수피로 개종한 것으로 보고 있다. 반이슬람 성향의 조로아스터교도들이 시아파로 개종하면서 이들은 필연적으로 극단적인 반수니파 반아랍 성향을 띄게 되었다.

키질바시들이 발흥하기 전에는 시아파와 수니파 사이의 갈등이나 상호 혐오가 오늘날과 같은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으나 이들이 이란 대부분을 시아파로 다시 개종시키면서 시아파 12이맘파는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이란 민족주의- 반아랍주의와 결합하는 형태로 변화하였다.

3. 사파비 제국

사파비 교단의 기마 전사 집단이던 키질바시들은 사파비 왕조의 초대 왕이자 즉위 당시 소년이었던 이스마일 1세를 보좌하면서 세계사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오늘날의 아제르바이잔 일대에 정착한 투르크멘 부족들은 키질바시의 영향으로 수피 시아파로 개종하여 이들에게 강력한 군사력을 보태었다. 이스마일 1세를 비롯한 사파비 왕족들은 자신들이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직계 후손으로서 알리와 후세인의 복수를 위해 모든 수니파를 쓸어버려야 한다는 믿음을 가졌다. 사파비 왕조의 왕족들은 정기적으로 이슬람 초창기 4명의 칼리파 중 알리를 제외한 나머지 3명(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 이븐 아판)을 참칭자라며 저주하는 예배를 근행했으며 키질바시들은 활쏘기를 연습할 때 “이 화살이 우마르의 심장에 꽂히기를”이라는 말을 구호로 외쳤다 한다.

이스마일 1세가 이끄는 군대는 1501년 바쿠를 정복하고 바쿠의 수니파 통치자를 처형한 것을 기점으로 1502년까지 다게스탄과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장악해나가기 시작했다. 1510년에는 오늘날 아제르바이잔에 해당하는 전 지역이 이들의 영토가 되었다. 이후 이들은 남하하여 수니파 튀르크계 왕조들을 격파하고 영역을 이란 전역으로 확장하였다.

이스마일 1세 시절 튀르크계 키질바시들은 페르시아인들을 자주 학살하였고 이스마일 1세가 키질바시들을 견제하기 위해 페르시아인들을 관료로 임용하는 것을 적극 반대하였다. 찰디란 전투에서 키질바시들이 대거 전사한 후 타흐마스프 1세 시대에 이르러서야 키질바시에 대한 숙청이 이루어지고, 이란인들은 시아파로 개종하되 키질바시 수피 종파 대신 12이맘파 자파리파로 개종하였다.[3] 키질바시들이 믿던 수피 교단 사파비야는 신비주의와 구세주 신앙이 강했기 때문에 소수 정예 교단으로서는 막강했지만 반대로 다수파가 될 경우 통제하기 매우 곤란했기 때문이다.

이스마일 1세와 타흐마스프 1세의 제위 시기까지 페르시아인들은 대부분 수니파 이슬람을 믿고 있었다. 그랬기에 시아파를 기반으로 하던 사파비 왕조는 수니파들을 강제 개종, 학살, 추방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었고 당연히 수니파들이라고 가만히 있지않고 집단 봉기로 맞섰다. 이때 키질바시들은 아제르바이잔 인근 조지아, 아르메니아, 체르케스, 다게스탄 일대의 기독교인들을 납치해 12이맘파로 강제 개종시킨 후 굴람으로 만들어 이란 각지에 주둔시켜 수니파들의 봉기를 차례로 진압하였다.[4] 이 과정에서 페르시아인 수니파 무슬림 상당수가 이웃한 오스만 제국와 부하라 칸국 등으로 탈주하였으며 이로서 이란은 시아파 다수 지역이 되었다.

사파비 왕조가 키질바시 대신 점차 조지아인, 체르케스인 굴람에 군사력을 의지하기 시작하면서 이란 내에서 키질바시의 위상은 점차적으로 축소되기 시작하였으며 아바스 1세는 키질바시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샤의 직속 토지로 전환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이후 키질바시들은 이란 역사에서 비주류로 전락하였다. 사파비 왕조는 국가 토대가 갖추어진 이후에는 광신적인 구세주 신앙을 믿는 키질바시들을 점차 배제하고 대신 같은 시아파이지만 좀 더 온건한 형태의 12이맘파 자파리파를 국교화하였다.

4. 이후

사파비 왕조가 멸망한 후 키질바시 수피 교단은 아프샤르 왕조 시절 아프가니스탄에 대거 정착하기도 했으나 이는 일부러 위험한 지역에 주둔시켜서 소모시킨다는 목적이 강했다.[5] 아프가니스탄으로 대거 이주한 키질바시들은 영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당시 영국 측에 협력했던 일 때문에 아프가니스탄의 주류 파슈툰족에 찍혀서 상당수가 축출당했으며 오늘날에는 겨우 수만여 명( 아프간 키질바시) 정도만 남아 있다고 한다.

근대 이란과 아제르바이잔을 다스렸던 카자르 왕조는 키질바시를 구성하던 가문 중 하나였던 아제르바이잔의 카자르 일족이 그 기원이다. 다만 사파비 왕조 멸망 이후 키질바시 수피 교단은 아제르바이잔에서도 비주류 교단으로 전락하였다.


[1] 정확한 발음은 튀르키예어로는 크즐바쉬이며 아제리어로는 그즐바쉬이다. [2] 아직 조로아스터교 문화의 영향력이 강했던 페르시아 북부 주민들을 포섭하기 위해 사파비 교단주들과 사파비 샤한사들은 자신들을 성스러운 불을 수호하는 화신으로 묘사하였다. [3] 당시 사파비 왕조에서는 페르시아인 신민들을 시아파로 개종시킬 시아파 성직자 수가 부족하여 시리아 북부, 바레인, 이라크에서 12이맘파 학자들을 초빙했다. 물론 해당 12이맘파 학자들도 초빙한 사파비 왕조들의 키질바시들의 눈치를 보느라 키질바시 수피 교단 교리와 전통적인 아랍 사회 내 시아파 교리 사이의 절충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이란의 12이맘파 정체성과 문화가 확립되었다. [4] 아바스 1세 제위 시기 동안 조지아인 20만여 명, 아르메니아인 30만여 명, 체르케스인 수만여 명이 이란으로 강제이주 되었다. 이 가운데 아르메니아인들은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를 유지하였고 이란으로 이주당한 조지아인들은 시아파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이란인 사회 속으로 흡수되었다. [5] 아프샤르 왕조의 나디르 샤는 수니파 신자였던지라 시아파를 굉장히 싫어했고 이란을 다시 수니파 지역으로 만들고 싶어했던 사람으로 사파비 왕조의 한 축이었던 키질바시들을 좋아할 리 만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