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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6 09:48:26

율 브리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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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 브리너의 주요 수훈 및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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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자
'''[[틀: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자|Academy Award for Best Ac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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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1929년)
제2회
(1930년)
제3회
(1931년)
제4회
(1932년)
제5회
(1933년)
에밀 야닝스
( 최후의 명령)
( 육체의 길)
워너 백스터
( 추억의 아리조나)
조지 알리스
( 디즈레일리)
라이오넬 배리모어
( 자유의 혼)
프레드릭 마치
( 지킬 박사와 하이드)
월레스 비어리
( 챔프)
제6회
(1934년)
제7회
(1935년)
제8회
(1936년)
제9회
(1937년)
제10회
(1938년)
찰스 로튼
( 헨리 8세)
클라크 게이블
( 어느 날 밤에 생긴 일)
빅터 맥라글렌
( 밀고자)
폴 무니
( 과학자의 길)
스펜서 트레이시
( 굿바이 마이 라이프)
제11회
(1939년)
제12회
(1940년)
제13회
(1941년)
제14회
(1942년)
제15회
(1943년)
스펜서 트레이시
( 소년의 거리)
로버트 도나트
( 굿바이 미스터 칩스)
제임스 스튜어트
( 필라델피아 스토리)
게리 쿠퍼
( 요크 상사)
제임스 카그니
( 성조기의 행진)
제16회
(1944년)
제17회
(1945년)
제18회
(1946년)
제19회
(1947년)
제20회
(1948년)
폴 루카스
( 라인의 감시)
빙 크로스비
( 나의 길을 가련다)
레이 밀랜드
( 잃어버린 주말)
프레드릭 마치
( 우리 생애 최고의 해)
로널드 콜먼
( 이중 생활)
제21회
(1949년)
제22회
(1950년)
제23회
(1951년)
제24회
(1952년)
제25회
(1953년)
로런스 올리비에
( 햄릿)
브로데릭 크로포드
( 모두가 왕의 부하들)
호세 페레
( 시라노)
험프리 보가트
( 아프리카의 여왕)
게리 쿠퍼
( 하이 눈)
제26회
(1954년)
제27회
(1955년)
제28회
(1956년)
제29회
(1957년)
제30회
(1958년)
윌리엄 홀든
( 제17 포로수용소)
말론 브란도
( 워터프론트)
어니스트 보그나인
( 마티)
율 브리너
( 왕과 나)
알렉 기네스
( 콰이 강의 다리)
제31회
(1959년)
제32회
(1960년)
제33회
(1961년)
제34회
(1962년)
제35회
(1963년)
데이비드 니븐
( 애수의 여로)
찰턴 헤스턴
( 벤허)
버트 랭카스터
( 엘머 갠트리)
막시밀리안 셸
( 뉘른베르크의 재판)
그레고리 펙
( 앵무새 죽이기)
제36회
(1964년)
제37회
(196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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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제39회
(196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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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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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마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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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회
(1969년)
제42회
(1970년)
제43회
(1971년)
제44회
(197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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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프 로버트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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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C. 스콧
( 패튼 대전차군단)
진 해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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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론 브란도
( 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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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제47회
(1975년)
제48회
(1976년)
제49회
(197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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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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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랑이를 구하라)
아트 카니
( 해리와 톤토)
잭 니콜슨
(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피터 핀치
( 네트워크)
리처드 드레이퍼스
( 굿바이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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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제5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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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회
(1981년)
제54회
(1982년)
제55회
(198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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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향)
더스틴 호프먼
(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로버트 드 니로
( 분노의 주먹)
헨리 폰다
( 황금 연못)
벤 킹슬리
( 간디)
제56회
(1984년)
제57회
(1985년)
제58회
(1986년)
제59회
(1987년)
제60회
(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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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텐더 머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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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회
(1989년)
제62회
(1990년)
제63회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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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행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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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4a1a1><colcolor=#fff,#000> 이름 율 브리너
Yul Brynner
분야 파일: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영화 심볼.jpg 영화
입성날짜 1960년 2월 8일
위치 6162 Hollywood Blvd. }}}}}}}}}

<colbgcolor=#111><colcolor=#fff> 율 브리너
Юл Бринер | Yul Brynner
파일:1571164057_instagram-jul-brinner-48.jpg
본명 율리 보리소비치 브리네르
Юлий Борисович Бринер
Yuliy Borisovich Brynner
출생 1920년 7월 11일
극동 공화국 블라디보스토크
사망 1985년 10월 10일 (향년 65세)
미국 뉴욕주 뉴욕시 맨해튼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1943~65)
[[스위스|]][[틀:국기|]][[틀:국기|]] (1965~85)
직업 배우, 음악가, 작가, 사진작가, 감독
활동 1941년 ~ 1985년
신체 173cm
묘지 성 로베르토 벨라르미노 교회 묘지[1]
배우자 버지니어 길모어 (1944년 ~ 1960년, 이혼)
도리스 클라이너 (1960년 ~ 1967년, 이혼)
자클린 시몬 티옹 드 라 숌 (1971년 ~ 1981년, 이혼)
캐시 리 (1983년 결혼)
자녀 5명
종교 동방 정교회

1. 개요2. 생애3. 작품4. 사생활

[clearfix]

1. 개요

러시아 태생의 미국 영화 배우.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태생으로 본명은 율리 보리소비치 브리네르(Юлий Борисович Бринер). 날카로운 눈매, 위엄있는 목소리, 당당한 몸놀림, 그리고 배우에게 외모상 큰 약점이 되기 쉬운 대머리[2]를 오히려 매력으로 승화시킨 카리스마[3][4]로 1950~60년대 할리우드 대작 역사영화물에서 군주 역할을 주로 맡았다. 특히 브리너의 눈빛은 카리스마가 넘친다.[5] 영화 외에도 작가, 가수로도 활동했을 정도.

그는 엄청난 카리스마와 포스로 유명하지만 미국 할리우드 산업에서 요구하는 외모 조건과는 거리가 멀었다. 키가 170cm 전후(프로필 상 175cm, 실제 172~3cm 추정)로 그다지 크지 않고[6] 대머리의 소유자이기까지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율 브리너의 아이덴티티가 될 정도로 할리우드 내에서 엄청난 인상을 남긴 배우들 중 하나이다. 게다가 동안이기까지 해서, 사망 당시 65세였지만 50대로 보일 정도로 젊은 외모를 자랑했다. 젊을 때는 좀 노안이긴 했다. 십계, 왕과 나에 나올 때 35세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게 그대로 유지되어 20대부터 50대까지 얼굴이 거의 똑같다. [7]

왕과 나, 십계, 웨스트월드 같은 영화에서 어마어마한 씬스틸러로 나오며, 워낙에 포스가 강해서 그런지 맡은 배역의 상당수가 반동인물 혹은 악역이다. 크지 않은 키와 동양적인 외모로 러시아인(아나스타샤), 태국인(왕과 나), 이집트인(십계), 아메리카 원주민(사바타) 등 여러 민족의 역할을 맡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의 전담 성우는 박상일(KBS 방영판 전담) 또는 양지운(MBC 방영판 전담)이 맡았으나 양지운이 은퇴하고, 박상일이 2021년에 지병인 암으로 사망한 지금은 국내에서 율 브리너를 연기하던 성우들이 모두 사라졌다.

2. 생애

조부는 율리우스 요세프 브리너(Julius Josef Bryner),[8] 스위스에서 러시아로 이민을 온 스위스계 러시아인이다.[9] 친할머니가 몽골 부랴트인이어서 동양적인 느낌도 얼굴에서 풍긴다. 그래서 젊었을 때 타이제 칸(Taidje Khan)이라는 몽골식 예명도 쓴 적이 있다. 조상 중에 집시 혈통도 있었다고 하며, 이 때문에 집시의 인권을 위한 활동에도 헌신했다. 이국적인 외모로 왕과 나에서는 태국 왕 역을 맡았을 정도이다. 다만 친할머니 나탈리아 쿠르쿠토바가 몽골계인 부랴트인이라는 건 사실이지만, 몽골 칸이나 집시라는 설정들은 그가 미국으로 이민오면서 신비로움을 더하기 위해 만들어 낸 설정으로 본다. 물론 설정이 아니라 진짜라면 이는 당대에 만연했던 화이트워싱일 뿐이다.[10]

아버지 보리스 브리너가 기업을 물려받았다. 볼셰비키 혁명으로 러시아가 공산화가 되자 많은 러시아 사업가들이 미국, 유럽으로 떠났으나 보리스 브리너는 러시아에 남아서 정권과 협상에 나섰고 결국 사업을 유지했으나 레닌이 죽고, 스탈린이 집권하자 상황이 급변했다. 결국 그는 기업을 반납하고, 중국 하얼빈으로 이주했다.

율 브리너의 어머니는 페트로그라드 음악학교(현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오페라를 전공했고, 어머니의 여동생은 피아니스트이자 러시아 최초의 정신과 의사였다. 율 브리너가 4살 때, 아버지 보리스 브리너는 여배우 예카테리나와의 불륜으로 이혼했다. 그렇지만 율 브리너의 할머니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함께 살다가 1927년 중국 하얼빈으로 이주했으나 1931년 일본군이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하얼빈을 떠났고, 프랑스 파리로 향했다. 그렇게 조부 요세프 브리너가 유럽을 떠난지 50여 년 만에 다시 유럽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프랑스 파리에서 율 브리너는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키워나갔다. 그가 처음으로 노래를 부른 곳은 러시아인이 운영하던 레스토랑으로 그 러시아 가족은 집시였는데, 그는 집시 문화에 매료되었고, 14살 때는 서커스를 보면서 흥미를 느껴 곡예를 배우다가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7세에 배우가 되기로 결심했다. 아버지 보리스 브리너는 반대했지만 두번째 부인이자 여배우였던 예카리나는 율 브리너를 이해했고,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의 수제자이자 연출가인 미하일 체호프로부터 연기 수업받기를 권했다. 1939년 율 브리너는 영국으로 건너가 미하일 체호프의 극단에 들어갔으나,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율 브리너는 폐암 투병 중이던 어머니와 함께 온 가족이 또 다시 유럽을 떠나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다. 연기 스승인 미하일 체호프도 미국으로 이민을 갔는데, 그의 명성은 대단해서 그가 연기학원을 열자 수많은 연기 지망생들이 몰려들었는데, 그들 중에는 안소니 퀸, 클린트 이스트우드, 마릴린 먼로와 같은 훗날 대스타들도 있었다. 율 브리너도 미하일 체호프의 연기학원에 다니다가 제2차 세계 대전에 미국이 참전하게 되자 군대에 가게 됐고, 미군 심리전 부서에서 대 프랑스 선전방송을 담당했다.

전쟁이 끝난 후 배우로 데뷔했지만 한동안 단역만 맡았다. 그러나 1950년대 뮤지컬 '왕과 나'애서 주연을 맡아 대성공을 하며 유명해졌고, 뮤지컬이 1956년 영화화되고, 역시 같은 해인 1956년에 '십계', '아나스타샤'가 함께 개봉하면서 월드 스타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왕과 나' 영화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그렇게 1950~60년대에 전성기를 맞았고 1980년대에는 영화배우로서는 활동이 뜸했지만 여전히 뮤지컬 '왕과 나'로 브로드웨이에서 활약했다.

냉전시대였던 만큼 러시아 즉 소련에서 할리우드 영화 자체를 개봉하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러시아에서는 그를 몰랐으나, 미국과 소련의 화해무드가 조성되면서 헐리우드 영화들이 개봉되자 그의 인기는 폭발적이였다. 다만 쿠바 미사일 위기로 다시 냉전무드가 되자 고향을 방문할 수는 없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집권하면서 그의 귀국 길이 열리는가 했으나 이때 율 브리너는 폐암 말기였고, 결국 1985년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고향 땅을 밟지는 못했다. 그는 나탈리 우드, 커크 더글러스, 더스틴 호프만, 숀 펜, 스티븐 시걸, 밀라 요보비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11] 실베스타 스텔론[12]그리고 스티븐 스필버그[13]까지 러시아 출신, 러시아 이민자 2세, 3세 영화인들 중에서도 러시아 국민들로부터 독보적인 위상을 지니고 있다.

여담으로 브리너 집안과 한국 사이엔 사연이 있는데, 이건 1980년대에 와서야 보도되며 널리 알려졌다. 조선 말기 고종은 일본이 침략 야욕을 드러내자 1896년 러시아를 끌어들이기 위해 러시아에 상당한 경제적 혜택을 제공했는데,[14] 율 브리너의 할아버지가 조선의 두만강, 압록강 연안 삼림 채벌권을 받았다고 한다. 중앙일보가 2008년 이걸 특종인 냥 1면 보도했지만 묻히고 지나갔다. 관련기사 그도 그럴 게 이미 알려진 내용이고, 율 브리너가 사망한지 20년도 지난 때였으며, 정작 율 브리너는 어릴 때 집안의 부를 누리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의 삼림 채벌로 엄청난 부자가 된 것처럼 기사를 냈는데, 원래 그전부터 상당히 부유한 집안이였고,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면서 조선의 삼림 채벌권을 행사하지도 못했다.[15] 원래 조부가 블라디보스톡 개발에도 큰 역할을 했고, 현재 러시아 극동 지역 최대 종합대학인 극동연방대학교의 전신인 '동양학 대학' 설립에도 참여할 만큼 부유한 집안이였다. 그러나 율 브리너가 태어나기도 전인 러시아 혁명 와중에 조부가 재산을 다 뺐기고, 아버지가 그나마 연이 닿았던 조선을 오가며 벌목업과 숙박업 등 사업을 하다가 결국 경제적 어려움과 여러 문제로 4살 때 부모가 이혼했다.

집안이 몰락한 상황에서 태어난 율 브리너는 블라디보스톡에서 7살 때까지 살다가 1920년대 만주, 조선에서 잠시 지냈는데 그 시절에 매년 아버지를 따라 여름마다 함경북도 주을온천 관련기사에서 지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아들 록 브리너(Rock Brynner)에 의하면 율 브리너는 생전에 자신이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낸 러시아 극동 지역과 한국에 짙은 향수를 지녔었다고 한다. 이런 인연으로 록 브리너 또한 남북관계에 관심이 많으며, 남북관계가 해피엔딩이길 기대한다고도 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Yul_Brynner_Park%2C_Vladivostok%2C_Russia.jpg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율 브리너의 생가 앞에는 그의 동상이 서 있다. 블라디보스토크 국제 영화제에 오는 사람들은 한 번씩 찾는 명소.

여러 나라를 떠돌았기 때문에 독일어, 러시아어 수개 국어에 유창했다. 전쟁 당시 프랑스어 선전방송을 했을 정도로 프랑스어도 유창했지만, 20살 때 영어권에 진입했는데도 영어 발음이 유창하며 매우 카리스마가 있다.

사진에도 조예가 깊어서 부인과 자식들, 그리고 친구들을 찍은 사진들이 많다. 매우 돈독한 친구 사이였던 오드리 헵번을 특히 여러 번 촬영했다.

대단한 골초여서 하루에 담배를 1~2갑씩 꼭 피우다보니 에디 밴 헤일런 등 지인들이 경악하며 말렸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피웠다.[16] 결국 말년에 폐암에 걸려서야 금연 홍보 운동에 전력했다.[17] 1985년 10월 10일 세상을 떴을 때 그의 나이 65세였다.[18] 네레트바 전투(Bitka na Neretvi)(1969)에서 공동 주연을 맡은 오슨 웰스와 한날한시에 함께 영면에 들었다. #

3. 작품

4. 사생활


[1] " Yul Brynner", findagrave.com [2] 젊었을 때부터 탈모가 심해 삭발했다. 24살때 이 정도였으니. [3] 한국의 액션배우 조춘은 그와 외모가 비슷한 데다, 똑같이 삭발해서 성공했기에 영화가에서 '한국의 율 브리너'라는 칭송을 받았다. [4] 비슷한 대머리 카리스마 배우로 텔리 사바라스(1924~1994)나 패트릭 스튜어트도 있지만 브리너에는 못미친다. 1950년대 나온 김성환의 4컷 신문만화 고바우 영감에서는 당시 전쟁 직후라서 물자가 시원찮아서 저질 샴푸가 탈모현상을 일으키는 사태를 풍자한다. 만화에 나온 불량 샴푸 업자가 율 브리너식 머리를 만들어주는 샴푸로 선전. 특히 왕과 나에서 보여준 카리스마 덕에 2000년대 간지대머리인남캐형님의 원조격인 인물. [5] 심지어 50년이 지나서도 영화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에서 람세스 역을 맡은 조엘 에저튼의 연기가 영화 십계에서 율 브리너의 카리스마에 묻힌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이다. [6] 헐리우드 유럽계 남성 배우 기준이다. 당시 일반인 평균 신장보다는 그리 작지 않다. [7] 웨스트월드 출연 당시 이미 50세를 넘겼다. 아마 대머리여서 그런지 노화가 잘 보이지 않는 외모인 듯. 심지어 생전 율 브리너가 헤비 스모커였고, 잦은 흡연이 노화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경이로운 동안인 셈이다. [8] 율 브리너는 미국에서 '브리너'를 '브라이너'로 발음하지 않도록 'n'을 하나 더 넣어 'Brynner'로 고쳤다. [9] 스위스 제네바 인근에서 태어나 바깥 세상에 호기심이 많았던 그는 16살 때 해운회사 무역선 보조 조리사로 취직해 중국 상하이를 오가며 무역을 시작해 크게 성공한다. 일본 요코하마에도 정착하였다가 25살에 신생 도시 블라디보스토크에 정착한다. 러시아 사업가 쿠즈네초프와 동업으로 '브리너, 쿠즈네초프&Co.'라는 회사를 차렸고, 목재 수입과 해운업, 광산업으로 사업이 번창하였으나 훗날 러시아 페스코(FESCO) 해운 회사와 합병된다. 페스코(FESCO) 그룹은 현재 러시아 최대 물류 운송기업이다. 현재 보존되고 있는 율 브리너의 생가도 페스코 그룹 소유이다. [10] 태양의 제국이라는 영화에서는 아메리칸 인디언 전사 역을 맡았다. 웃긴 건 거기 나오는 마야족 상급계층은 다들 백인이다. [11] 외할머니가 현재는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 오데사 출신이다.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자 독일로 이민갔다. 그래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자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우크라이나에 천만 달러를 기부했다. [12] 실베스타 스텔론의 증조모 로사 라비노비치가 물론 현재는 러시아와 전쟁 중이지만 우크라이나 오데사 출신이다. 그래서 러시아 보드카 광고에 출연하기도 했었다. 광고 문구는 "우리 모두의 몸속에는 러시아가 있다(There is a bit of Russian in all of us)"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실베스타 스텔론은 '팍스 아메리카나'를 상징하는 배우이기도 하다. [13] 스티븐 스필버그의 조부가 유대계 러시아인으로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1906년 미국으로 이민갔다. [14] 매국노의 대명사 이완용이 등장해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는 이완용이 친일파로 흑화되기 전으로, 심지어 고종의 총애를 받으며 친일파 척결에 나서기도 했다. 물론 이때 이완용이 애국심이 넘쳐서 그랬던 것은 아니고 간을 보는 시기였다. [15] 러일전쟁 전부터 일본의 반대가 심했고,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자 1904년 5월 정식으로 폐기되었다. [16] 정작 에디 벤 헤일런도 유명한 골초였고 설암 판정을 받고 수술했지만 금연에 실패하다 결국 후두암으로 2020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죽음은 흡연에 대한 경고를 줬다. [17] 폐암으로 사망하기 직전 공익광고에서 이런 유언을 남겼다. "나는 이제 떠나지만 여러분께 이 말만은 해야겠습니다. 담배를 피우지 마십시오. 당신이 무슨 일을 하든, 담배만은 피우지 마세요." 출처 공익광고 원본 [18] 공교롭게도 절친 오드리 헵번도 엄청난 골초였고, 이로 인해 암에 걸려 1993년에 브리너의 사망 당시와 비슷한 나이인 63세로 사망했다. 그리고 그의 지인이던 에디 밴 헤일런 역시 지독한 골초였으며 후두암으로 2020년 65세에 세상을 떠났다. [19] 모세의 연인이었다가 강제로 그의 왕비가 된 네페르티티가 "난 절대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거에요"라고 하자 차갑게 비웃으며 "그게 의미가 있소? (Does that matter?)"이라고 하는 장면에서 절대군주의 여유와 카리스마, 냉혹함이 느껴진다. [20] 이전 판(최초방영)에서는 양지운이라고 되어 있었으나, 여기서(재방영)는 박일이 연기했다. [21] 화이트 왁싱 영화인데다, 주인공이 속한 마얀족이 멕시코에서 북미로 이주하는 것이나, 적대 부족인 후나켈은 청동검으로 무장하는 등, 고증은 그냥 안드로메다로 간 수준이다. [22] 맞을 만 했다. 아들이 살해당한 아버지에게 “넌 네 아들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한 것이다. [23] 총잡이의 복장은 "황야의 7인"의 크리스의 옷을 그대로 입고 나온다. [24] 단순히 식량 정도가 부족한 게 아니라 연료나 총알도 없어서 대부분 칼이나 몽둥이를 들고 다닐 정도로 막장이다. 그나마 석궁 쓰는 폭도가 하나 있긴한데 별 비중 없이 중반에 끔살. [25] 주무기가 철퇴다(...) [26] 실제로 배런이 챙겨준 짐 속에 시가 상자가 들어있긴 했지만 농담이 아니라 양쪽 집단에서 콜을 보낼 때 배런의 집단을 선택한 이유가 배런에게 시가가 있어서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