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미네 유타의 역대 기록 / 등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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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바 롯데 마린즈 등번호 1번 | |||||||||||||||||||||||||||||||||||||||||||||||||||||||||||||||||||||||||||||||||||||||||||||||||||||||||||||||||||||||||||||||||||||||||||||||
코사카 마코토 (1998~2005) | → | 오미네 유타 (2007~2009) | → | 키요타 이쿠히로 (2010~2021) |
치바 롯데 마린즈 등번호 11번 | ||||
칸다 요시히데 (2003~2009) | → | 오미네 유타 (2010~2016) | → | 사사키 치하야 (2017~) |
치바 롯데 마린즈 등번호 30번 | ||||
이토 요시히로 (2008~2016) | → | 오미네 유타 (2017~2019) | → | 이시자키 츠요시 (2020~2021) |
치바 롯데 마린즈 등번호 126번 | ||||
타무라 료헤이 (2008~2010) | → | 오미네 유타 (2020) | → | 공번 |
치바 롯데 마린즈 등번호 64번 | ||||
후타키 코타 (2014~2019) | → | 오미네 유타[1] (2020~2021) | → | 사토 쇼마 (20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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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네 유타 大嶺祐太/Yuta Omin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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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월일 | 1988년 6월 16일 ([age(1988-06-16)]세)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출생지 | 오키나와현 이시가키시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우투우타 |
학력 | 오키나와현립야에야마상공고교 |
프로입단 | 2006 NPB 고교생 드래프트 1라운드 |
소속팀 |
치바 롯데 마린즈 (2007~2021) 주니치 드래곤즈 (2022) |
등장곡 | Kotona[2] - Vitality~自分への挑戦状~ |
1. 개요
일본프로야구 전 주니치 드래곤즈 소속 야구선수.2. 선수 경력
이시가키 출신으로 초등학교 때 3루수로 야구를 처음 시작해서 중학교 때부터 투수로 활동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봄 여름 코시엔에 연속으로 출장하면서 야에야마상공고교의 돌풍을 주도했고 코시엔에서 151km/h의 패스트볼을 던지면서 1라운더 후보로 부상했다.[3]드래프트 때는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가 고교생 드래프트 1라운드에서 지명할 것으로 예상되었고, 다른 구단들은 관심갖지 않는 분위기였으나, 후쿠다 슈헤이를 1라운더로 뽑겠다고 공헌했던 롯데가 뜬금 스틸픽을 하는 바람에[4] 중복지명이 되어버렸고, 추첨에서 롯데가 승리하게 되면서 소프트뱅크에 가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오미네는 소프트뱅크가 아니면 프로에 가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인 훈련을 하면서 내년 드래프트에 재도전하겠다고 선언하는 입단 거부 사태가 일어나게 되었고[5], 결국 선배투수들과 바비 발렌타인 감독 본인이 직접 이시가키까지 찾아가서 스프링캠프를 이시가키로 옮겨주고 등번호 1을 주겠다는 등의 극진한 설득 끝에 마음을 고쳐먹고 입단하게 되었다.[6][7]
2.1. 치바 롯데 마린즈 시절
데뷔 1년차인 2007년부터 1군에서 선발로 1경기 출장하는 영광을 얻었지만[8] 2.1이닝 5실점으로 털렸고 데뷔 1년차의 1군경기는 이게 끝. 다만 초구부터 147km/h를 던지고 최고구속 151km/h를 기록하면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하위선발로 기회를 받은 2009, 2010년에 ERA 5점대를 기록하면서 성장하지 못했고 2011~2012년은 부상으로 인해 2년 동안 1경기에 등판하는 등 점차 망한 1라운더가 되어갔다.[9]그나마 부상에서 회복한 후 2014년에 스팟선발로 54.2이닝에서 ERA 3.46을 기록하며 뒤늦게나마 터져주나 싶었고, 2015년에는 24경기에서 133.1이닝을 던지면서 8승 7패 ERA 3.17을 기록하며 규정이닝에는 미달했지만 드디어 선발로 빛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2015년의 활약은 딱 한 해 플루크로 끝나버렸고, 2016년에는 다시 스팟선발로 추락해서 ERA 6점대를 기록, 2017년에는 아예 불펜으로 전향하여 20경기 30.2이닝에서 ERA 3.82를 기록했으나 안정감이 떨어져서 시즌 중반 이후로는 1군에 올라오지 못했다.
2018년에는 부진으로 1군에 올라가지 못했고 2019년 1월 팔꿈치 수술을 받으면서 전치 12개월로 스프링 캠프도 가기 전에 시즌아웃을 당했다. 시즌 종료 후 육성선수로 전환되었다.
2.1.1. 2020 시즌
수술과 재활이 끝나서 2군 경기에서 종종 등판하고 있다. 8월 23일에 지배하등록으로 전환됐다.9월 1일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전에 선발로 내정되면서 3년 만에 1군에 복귀한다. 상대 선발은 누굴 만나서 얻어터지다가도 롯데만 만나면 귀신같이 부활하는 타카하시 코나였다.
그리고 예상대로 5이닝 7실점을 기록했다. 호세 플로레스의 일본인 버전이다. 속구 구속이 150까지 나오지만 귀신같이 처맞는것도 같다.
9월 8일 또 선발로 나왔다. 이날은 4이닝 2실점. 실점은 적었지만 엄청나게 꾸역투를 해 댄 거라 4이닝만에 투구수가 90구 가까이 돼서 그냥 내려갔다. 팀은 3대2로 이겼지만 5이닝을 못 채워서 승리투수는 못 됐다.
이후 1군에서 말소되며 일단 이 시즌에는 살아남았다.
2.1.2. 2021 시즌
2월 16일 연습경기에 선발등판해 2이닝 무실점.그 후 2군에서 1점대 ERA를 찍으며 순항하다 요코야마 리쿠토와 함께 1군으로 콜업되었다.
5월 23일 패전처리로 1이닝 무실점을 기록.
5월 25일 한신과의 교류전 개막전에서 조기강판한 후타키 코타의 뒤를 이어 2이닝 무실점으로 팀이 역전승을 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그 후로는 그럭저럭 가비지 이닝을 먹으며 던지다가 6월 11일 요마우리전에서 뜬금없이 1대1 동점 상황에서 올라와서 1이닝 4실점으로 불을 지르고 패전투수가 되었다.
6월 22일 경기에서 등판 이후 2군행.
1군 등판은 이걸로 끝. 결국 시즌 후 방출 통보를 받았다. 팬들은 이제 이시가키에서 스프링캠프 안 하는 거냐는 말을 하는 중.
이후 주니치에서 영입하려고 한다는 뉴스가 나왔다. 성적은 개판이어도 여전히 150km/h의 패스트볼을 던질 수 있고, 선발과 불펜이 모두 가능하며 2군은 폭격중이라 투수친화구장인 나고야 돔에선 혹시 모른다는 생각인 듯. 참고로 롯데는 2016년 오프의 오마츠 쇼이츠 이후로 5년째 방출당한 선수가 NPB 타 팀에 재취업한 사례가 없었다.
그리고 12월 13일. 주니치가 오미네의 영입을 정식으로 발표하면서 재취업에 성공했다. 5년 만의 롯데 출신 재취업자가 나온 것.
2.2. 주니치 드래곤즈 시절
일단은 육성선수로 출발한다. 그러나 나이도 많고 더 성장할 것도 없는 선수라서 스프링캠프 때나 시즌 도중 지배 등록이 되지 못하면 1년만에 겨우 연장한 현역 생활이 끝날 듯.2.2.1. 2022 시즌
시범경기는 1이닝 무실점을 기록한 게 전부.개막은 2군에서 육성선수 신분으로 맞이한다.
3월 27일 2군 경기에 불펜으로 등판하여 0.2이닝 무실점을 기록.
결국 1군 기록 없이 2군에서 11경기(4선발) 21이닝 1승 2패 1세이브 ERA 3.86을 기록하며 시즌 후 바로 방출되어 이렇게 주니치에서의 생활도 끝났다. 방출 직후 은퇴를 선언했다.
시즌 후 그의 고향인 이시가키에서 조그맣게 은퇴식을 치러준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12월 30일에 은퇴경기 형식으로 치뤄졌으며 오미네는 함께 고시엔을 누볐던 옛 동료들(아에야마 상공고교 OB)과 한 팀이 되어 현내 라이벌이었던 우라소에 상업고교 OB를 상대로 9대 1 승리를 거두며 선수로서의 마지막을 그럭저럭 행복하게 매듭지었다.
3. 플레이 스타일
패스트볼 평균 구속은 선발로는 142km/h, 불펜으로는 146km/h 정도에 최고구속은 151km/h까지 나온다. 고교 때부터 150km/h을 던지는 선수로 주목받았지만 부상 등으로 인해서 그렇게까지 구속이 빠르진 않다. 커리어하이인 2015년에는 최고구속이 140km/h대에 불과했다.[10] 또한 파이어볼러 유망주답게 고질적인 제구난을 갖고있으며 결정구의 부재라는 문제점도 가지고 있다.다만 2021년에는 재활이 끝나면서 구속은 다시 괜찮아졌다. 물론 불펜 전향이 큰 것도 있다.
4. 기타
- 2016년 12월 23일 가수 겸 DJ인 코토나와 결혼했다. 현재 오미네의 등장곡을 부른 가수로 2007년부터 연애해왔다고 한다. 오미네가 부인을 만나자마자 첫눈에 반했다고. 부부사이는 상당히 좋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부인의 내조가 정말 헌신적이다.[11] 그래서인지 오미네는 원정간 날이 아니면 거의 항상 집에서 밥을 먹으며[12]코토나 쪽에서 오미네가 털리고 온 날에는 일부러 기분 전환 겸 외식하러 끌고 간다고 한다. 여담으로 어릴 때부터 교제해왔다보니 친구들과의 모임에도 부부동반으로 참석한다.
-
3살 어린 동생 오미네 쇼타(大嶺翔太)[13][14]도 야구선수였고 똑같이 롯데 소속이었다. 형과는 달리 코시엔에는 나가지 못했으며 내야수였다. 형처럼 엄청난 주목을 받은 것도 아니라서 프로에는 3라운드에 지명. 데뷔 5년차인 2014년부터 1군에서 백업으로 나오다가 2018년 시즌 중 은퇴하면서 형보다 일찍 은퇴했다. 또한 별다른 사생활 문제가 터지지 않았던 형과 달리 미성년자 시기부터 음주와[15] 흡연을 하다가 드래프트 지명 직후 걸리는 바람에 입단이 무산될 위기까지 처한 적이 있었고, 20대라는 젊은 나이에 몇백만엔짜리 빚이 쌓이는 바람에[16] 팀 후배들에게 강제로 돈을 빌리는 등의 행동[17]을 하다가 결국 이 빚 문제 때문에 스스로 팀을 떠나게 되었다.[18] 은퇴 후에도 자신을 인터뷰했던 기자를 상대로 공갈짓을 하다가 구속까지 되고 마는 등 형보다 한참 모자란 동생.
형은 야구만 못했지... - 상술했듯 원래 등록명은 OHMINE(大嶺)였지만, 동생 쇼타가 등록명을 바꾸면서 본인도 덩달아 본명으로 등록명을 바꿨고, 유니폼네임도 Y.OHMINE(大嶺祐)가 되었다.
- 어린 시절 가정환경이 전혀 좋지 못했다. 아버지는 10살도 되기 전에 가출해서 사라졌고, 어머니는 아버지가 사라진 5년 후에 또 가출해서 5남매를 두고 사라졌다.[19] 그리하여 어린 시절부터 할머니와 할아버지, 숙부와 살아야 했다. 이때 8명이 사는 집에서 숙부 혼자 독방을 쓰고 나머지 7명이 5평짜리 방에서 같이 지냈다고 한다. 할아버지와 숙부는 어부였는데 두 사람의 연봉은 합쳐서 연 300만엔 정도였다고 하니 상당히 가난한 어린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굉장히 가정환경이 안 좋았다보니 동생 쇼타가 불량청소년을 거쳐 성인이 되고나서도 방탕한 삶을 산 것이 어느정도 이해는 되는 상황. 오히려 이런데도 사고 안 치고 야구선수를 해온 게 대단한 지경이다.
- 상술한 가난한 어린시절 때문에 고등학교 시절에는 야구를 접을 생각도 여러번 했다고 한다. 집안에서 벌어오는 300만엔 중 100만엔이 자신이 야구하는 데 들어갔다고 할 정도였으니. 하지만 할아버지가 돈 걱정하지말고 야구를 하라고 격려해 주면서 야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미네는 입단 계약금으로만 1억 엔을 받자 바로 2층짜리 큰 주택으로 이사가면서 제대로 할아버지에게 효도했다.[20]
- 밴드 BEGIN[21]하고도 친분이 있다.[22] 결혼식 때 축가도 불러줬다.
- 훈훈하게 생긴 듯 하면서도 묘하게 험상궂은 외모와 오키나와 출신이라는 점 때문인지 카쿠나카 카츠야[23]에게 섬 고릴라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이는 동생 오미네 쇼타도 마찬가지.
- 사토자키 토모야가 드래프트 상위픽 선수들에 대해 평론할 때 무명이라고 까였다. 참고로 동생 오미네 쇼타도 무명이라고 까였다.
- 프로에서 엄청난 커리어를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오키나와 본섬도 아닌 이시가키 출신이라 그런지 현민들 사이에서는 상당히 인기를 끌고 있다. 2022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한다고 했을 때 이시가키시 시장 나카야마 요시타카가 격려의 메시지를 보내줬고, 이시가키현 차원에서 은퇴식을 열어줄 정도.
- 타이라 카이마와 같은 고등학교 출신이다. 타이라가 진학했을 때 이시가키 내 고교야구 선수는 한참 줄어있었기 때문에 아에야마상공고교 야구부는 타 고교와 연합팀을 짤 정도로 상태가 열악했다고 한다.[24]
- 은퇴 후에는 도쿄 칸다에 야키토리 가게를 차려서 제 2의 인생을 살고 있다. 비싼 고급 음식점은 아니고 칸다에서 일 끝난 샐러리맨들이 한잔 걸치는 서민적인 분위기의 가게로 가게 리뷰에 따르면 오오미네 본인이 직접 요리를 하는 건 아니고 요리는 따로 고용된 주방장이 하며, 오오미네 본인은 서빙을 주로 한다고. 2024년 기준 해당 가게를 매각하고 도쿄에 새로운 음식점을 차렸다. 역시 서민적인 분위기의 이자카야로 점심때는 햄버그 스테이크를 판다. 이외에도 의류 브랜드를 창업했으며 야구교실도 운영하고 있는 등 여러 사업을 하고 있다. 와이프가 가수 출신이라 보이스 트레이닝도 한다는 듯. 부부가 회사 하나를 차려서 이 회사를 통해 음식점 사업, 야구교실 운영, 의류 판매, 보이스 트레이닝을 모두 운영하고 있다.
[1]
시즌 중 지배하등록되면서 126에서 64로 바뀌었다.
[2]
가수가 본인의 부인이다. 琴菜라고 한자로 쓰기도 한다.
[3]
여담으로 일본 고등학교는 전면 비평준화라 입시를 치러야 했는데 아에야마상공고교의 입시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야간부로 입학했다고 한다(...). 이후 2학년 때 편입에 성공하여 일반 학급에 배치되었다.
[4]
드래프트 10일 전
바비 발렌타인 감독이 오미네의 투구를 보고 오미네를 뽑아달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다고 한다.
[5]
수업을 듣고 있던 오미네에게 교장이 교실로 들어가서 롯데 지명 사실을 알려주자 당황하는 표정이 카메라에 잡혔다. 이때 살짝 우는 모습도 보였고, 원래 예정되었던 야구부 동기와 후배들의 헹가래도 취소되었다.
[6]
이후 발렌타인은 선수 설득에 자신이 붙었는지
쵸노 히사요시를 저런 식으로 강행지명하게 되었으나 쵸노는 끝내 입단하지 않게 되어서 이 일이 결국 감독직을 떠나는 데 큰 원이 되었다. 또한 3년 후인 2009년 대졸사회인 드래프트에서 롯데에 지명된
키요타 이쿠히로 역시 라운드가 맘에 안 든다고(4라운드였다.) 입단거부 소동을 일으켜서 1라운더와 동일 연봉에 등번호 1번까지 주면서 겨우 입단시켰다.
[7]
여담으로 이때 롯데가 1라운드로 지명하려 했던
후쿠다 슈헤이는 결국 추첨에서 패한 소프트뱅크가 하즈레 1라운드로 지명하면서 데려가게 된다. 그리고 후쿠다가 FA로 롯데에 이적하면서 이들은 그 드래프트 이후 13년이 지나 같은 팀에서 보장금액만 4억 8천만엔인 FA대박을 터트린 1번타자 중견수 후보와 2군에서도 가장 끝자락인 육성선수 신분으로 재회하게 된다. 다만 후쿠다도 먹튀로 전락한 건 똑같아서 사이좋게 2군에 있다가 후쿠다도 4년 계약이 끝나자마자 그대로 전력외통고를 받고 방출당했다.
[8]
마침
NHK에서 전국으로 생중계하는 경기였다.
[9]
참고로 이 때 재활하면서도 술을 퍼마시는 등 몸관리를 소홀히 하는 모습을 보였다. 덕분에 당시 결혼 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코토나가 식단 관리를 직접 하면서 몸을 챙겨주게 되었다고 한다. 코토나는 인터뷰에서 당시의 오미네에 대한 질문이 들어오자 ‘약을 먹으면서 술도 먹는다는 건 바보 아니야?’ 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고 답변했다. 그때가 정말 힘들었다고.
[10]
1군에 나왔던 2017년에는 그래도 최고구속이 150km/h까지는 나왔다.
[11]
후술할 어린 시절의 불우한 가정 환경을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때부터 부인이 오미네의 인생을 다잡아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2]
부인이 집에서 식단도 꽤 깐깐하게 짜서 밥을 해 준다. 방송 취재에서 인터뷰할때 소고기나 돼지고기보다는 닭고기를 주로 메인으로 많이 요리하고, 그 외에 생선과 채소도 신경써서 먹이는 듯 하다.
[13]
데뷔 초에는 형과 성이 겹쳐서 이름인 SHOTA(翔太)로만 등록했으나, 나중에는 풀테임으로 등록명이 변경되었다. 유니폼네임도 S.OHMINE(大嶺翔)로 변경(참고로 형인 유타는 Y.OHMINE). 등번호는 50번이었으며 내야 유틸이었으나 주로 3루수, 유격수, 1루수를 봤다.
[14]
참고로 오미네 쇼타가 들어오고 1년 뒤에 이름이 비슷한
이시미네 쇼타도 입단했는데, 이쪽은 성인 이시미네가 등록명이었다. 참고로 이시미네는 대졸이라 나이는 고졸인 오미네 쇼타보다 3살 위. 응원콜은 이시미네 쇼타는 성인 '이시미네', 오미네 쇼타는 이전 등록명이자 이름인 '쇼타'.
[15]
다만 형 유타도 재활 중에 약 복용과 음주를 동시에 해서 당시 여자친구(현 아내)의 속을 엄청 썩인 걸 보면 술을 좋아하는 건 유전인듯.
[16]
참고로 오미네는 2017~2018년 연봉이 천만엔이 넘었다. 빚이 200만엔 정도였다고 하는데 2016년까지는 연봉이 적었으니 그렇다쳐도 2017~2018년 연봉만 따지면 세금을 떼도 아껴 쓰면 200만엔 정도는 1년만에 갚는다. 선수 본인이 파칭코를 좋아했다는 증언도 있다 보니 방탕한 생활로 돈을 날린 것이 아닌가 싶다.
[17]
롯데는 선수 본인이 허락한다고 해도 선수 간에 돈을 빌려주면 안된다고 규정을 정했는데, 선배라는 권력을 이용해 후배에게 압박을 넣어서 억지로 돈을 빌려간 것으로 보인다.
[18]
거기다가 빚이 쌓여서 결국 이혼까지 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한 여자만 10년을 만나다가 결혼해서 잘 살고있는 형과는 정반대.
[19]
두 사람 다 이시가키도 떠난 것으로 보인다.
[20]
사실 계약금 한 번 받았다고 이런 수준의 인생역전이 일어나는 건 보통 중남미에서 주로 일어나는 상황인 걸 감안하면 오미네의 어린 시절은 엄청나게 가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1]
오키나와 밴드.
야마카와 호타카의 등장곡을 부른 그 밴드다.
[22]
재밌게도 동생 오미네 쇼타의 응원가의 원곡이 밴드 BEGIN의 三線の花였다. 정확히는 노래의 후렴에 맞춰 박수만 치는 식이긴 했지만...
[23]
둘 다 2007년에 입단했고, 카쿠나카가 1살 위다.
[24]
여담으로 이시가키 출신 프로야구 선수로는 이레이 타다히토, 카야마 신야, 오미네 쇼타 3명이 더 있는데, 이레이는 이시가키를 떠나 본섬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케이스였고, 카야마의 경우 아에야마농림고교를 나왔다. 오미네 쇼타는 친형의 모교인 아에야마상공고교를 그대로 나와서 아에야마상공고교 출신 프로 선수는 셋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