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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2세/생애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엘리자베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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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1353b4,#1353b4>재위 <colbgcolor=#fff,#1f2023> 영국 여왕 · 영연방 왕국 여왕 ( 캐나다 여왕 · 호주 여왕 · 뉴질랜드 여왕) · 영국 왕실 수장
재위시기 제2차 엘리자베스 시대 · 사건 일람
생애 생애 · 사망
가족관계 가족관계
아버지 조지 6세 · 어머니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 배우자 필립 마운트배튼 · 동생 마거릿 공주 · 장남 찰스 3세 · 장녀 프린세스 로열 앤 · 차남 요크 공작 앤드루 왕자 · 3남 에든버러 공작 에드워드 왕자
기타 퀸 엘리자베스 · 퀸 엘리자베스 제도 · 퀸 엘리자베스 2세 파크 · RMS 퀸 엘리자베스 2 · 엘리자베스 여왕배 · 기타 창작물 · 더 크라운 ( 엘리자베스 2세(더 크라운)) · 벤틀리 스테이트 리무진 · 영국 왕실과 정부의 전용기 · God Save the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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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즉위 이전
2.1. 어린 시절2.2. 아버지의 즉위2.3. 결혼과 가정
3. 즉위 이후
3.1. 재위 초중반기3.2. 군주제의 변화3.3. 왕실의 위기3.4. 재위 후반기
3.4.1. 건강 악화
3.5. 사망3.6. 정치적 영향력
4. 주빌리
4.1. 재위 25주년, 실버 주빌리4.2. 재위 50주년, 골든 주빌리4.3. 재위 60주년, 다이아몬드 주빌리4.4. 재위 70주년, 플래티넘 주빌리

1. 개요

엘리자베스 2세의 생애를 서술한 문서이다.

2. 즉위 이전

2.1. 어린 시절

1926년 4월 21일 오전 2시 40분, 런던에 위치한 외가 메이페어[1]에서 조지 5세의 차남 요크 공작 앨버트 왕자 요크 공작부인 엘리자베스의 맏이이자 장녀로 제왕절개를 통해 태어났다.
엘리자베스와 저에게, 우리의 어린 딸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모르실 겁니다. 저희 부부는 우리의 행복을 완성시켜 줄 아이를 계속 기다려 왔었고, 드디어 아이가 태어났으니, 정말 신비롭고도 환상적인 기분이 듭니다.
1926년 4월 22일, 요크 공작이 어머니 테크의 메리에게 보낸 편지.
조지 5세의 첫 손주이자 큰아버지 에드워드 왕세자, 아버지 요크 공작의 뒤를 이어 계승서열 3위였던 만큼 대중에게 화제가 되었으며 축복을 받았던 탄생이었다. 하지만 왕자의 딸인 방계였던데다, 미혼이긴 했지만 큰아버지 에드워드 왕세자의 나이가 아직 젊었기 때문에 훗날 그녀가 여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름은 엘리자베스 알렉산드라 메리로 엘리자베스는 어머니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으로부터, 알렉산드라는 태어나기 6개월 전 사망한 증조할머니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공주, 할머니 테크의 메리에게서 따왔다. 아버지 앨버트 왕자가 할아버지 조지 5세에게 "아이의 이름을 빅토리아로 지어야 합니까?"라고 걱정스럽게 물었으나, 원하는 대로 하라는 조지 5세의 뜻에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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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식 기념 가족사진
생후 1개월이 지난 1926년 5월 29일, 버킹엄 궁전 개인 예배당에서 성공회 유아세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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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첫 돌 맞이 사진 1928년, 두 돌 맞이 사진
런던 하이드파크 코너에 위치한 자택과 리치몬드 파크의 화이트 로드지, 윈저 성, 밸모럴 성, 샌드링엄 하우스, 글래미스 성, 외갓집 등을 오가면서 지냈다. 어린 시절부터 가족 및 주변인들에게 주로 '릴리벳(Lilibet)'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는데, 이는 자신의 이름인 '엘리자베스'를 발음하기 어려워해 본인 스스로를 릴리벳이라고 부른 것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1920년대에 들어 급격히 건강이 악화되었던 할아버지 조지 5세는 자주 병문안을 왔던 엘리자베스 공주를 매우 예뻐했다고 한다. 엘리자베스는 조지 5세를 영국 할아버지(Grandpa England)라고 불렀다. 부모님이 공무를 위해 해외 순방을 나가면 버킹엄 궁전에서 조부모님과 함께 지냈는데, 평소에 무뚝뚝하고 근엄하던 조지 5세가 엘리자베스 공주를 등에 태우고 궁전 안을 말처럼 기어다녀 시종들이 놀라워했다는 일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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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마거릿 공주와 함께
1930년 8월 21일, 4살 터울의 여동생 마거릿 공주가 태어나면서 언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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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5월 6일, 조지 5세의 재위 25주년 기념행사 실버주빌리에 참석하였다.

당시 학교를 다니는 상류층 여식들이 늘고 있었지만, 엘리자베스와 마거릿은 학교에 가지 않고 가정교사 메리언 크로포드에게 교육을 받았다. 할머니 메리 왕대비는 공주들을 학교에 보낼 것을 권유하기도 했으나, 어머니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이 자녀들이 학교에 다니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한다.[2]

어린 나이에 비해 자신의 위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대해 왕실에 전해져 내려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1933년 어느날, 엘리자베스가 여동생 마거릿에게 "나는 3이고 너는 4야."라는 말을 했다. 이를 이해하지 못한 마거릿은 "아니야, 나는 3이고 언니는 7이야!"라고 반문했는데, 한참 뒤에서야 언니가 말했던 숫자가 나이가 아닌 왕위 계승 서열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 외에도 가정교사에게 "만약 내가 언젠가 여왕이 된다면, 일요일에는 승마를 해선 안 된다는 법을 만들 거예요. 말들도 쉬어야 해요." 라는 말을 했다는 일화가 있다. #

2.2. 아버지의 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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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5월 12일, 조지 6세의 대관식
1936년 할아버지 조지 5세가 사망하여 큰아버지 에드워드 왕세자가 즉위하였으나, 그해 말 월리스 심프슨과 결혼하기 위해 남동생 앨버트 왕자에게 왕위를 넘겨버리는 사태가 벌어져 왕위 계승 서열 1위가 되었다.

그후 추정상속인으로서 여러 교육을 받게 되었다. 이튼 칼리지의 부총장 헨리 머튼에게서 헌법사 법률을 배웠고[3] 프랑스인과 벨기에인 가정교사들로부터 프랑스어를 배웠다. 또한 캔터베리 대주교에게서 종교 교육을 받았다. 가정교사는 궁전 내에 고위 공직자와 궁전 직원들의 자녀들로 구성된 걸 스카우트를 조직해 또래 아이들과 어울릴 수 있도록 하거나, 일주일에 한 번정도 궁전 밖에 데리고 나가 평범한 런던 시민들의 일상을 관찰할 수 있도록 하는 등 평범한 삶을 최대한 많이 경험할 수 있도록 했다. 할머니 메리 왕대비 역시 공주의 교육에 관심이 많아서 가정교사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교육 내용을 직접 지시하기도 했으며, 엘리자베스와 자주 만나 왕실의 역사와 예법을 가르쳐주었다.[4] 또한 엘리자베스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보모인 마거릿 보보 맥도날드와 자주 대화했으며, 13세가 되기 전까지는 보모와 같은 침실에서 지냈다.[5]

동생 마거릿 공주는 왕위계승자 신분이 된 언니를 불쌍하게 여겼다. 엘리자베스가 마거릿에게 아버지가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전해주자, 마거릿이 "그럼 언니도 여왕이 되겠네?"라고 물었다고 한다. 엘리자베스가 쿨하게 "그래, 언젠가."라고 대답하자, 마거릿은 "불쌍한 언니..."라고 반응했다고 한다. 후일 필립 공이 그리스 왕자 출신이어서 엘리자베스와의 결혼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가정교사에게 "불쌍한 언니, 결혼도 마음대로 못하네..."라고 말했다고 한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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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기간이던 1940년에는 안전을 위해 마거릿 공주와 함께 윈저 성에서 시간을 보냈다.[7] 이때 원저 성을 호위하는 근위대 장교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았는데, 안전을 위해 외부인들이 성 안으로 들어올수가 없어서 근위대 장교들이 공주들의 놀이 친구 역할을 해주었다. 이들 중 대부분은 엘리자베스가 즉위한 후에도 계속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8] 또 낮에는 여전히 윈저 성에서 가정교사와 도서관 사서로부터 개인 교습을 받았다.

1944년 11월 30일, 영국 해군 HMS 뱅가드의 진수식에 참석해서 축사를 하고 포도주를 던지며 첫 단독 공무를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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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이던 1945년, 아버지 조지 6세의 허락을 받아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을 앞둔 시기에 영국군 여군 부대인 ATS[9]에 중위(subaltern)로 입대해 대위(junior commander)[10]로 진급하였다. 임무는 보급차량 운행이었다. 이 때문에 여왕이 제2차 세계 대전 때 일개 운전병으로 참전한 것으로 와전되기도 한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이 끝났기 때문에, 비록 군에서 활동한 기간은 약 3주 정도였지만 세계 대전에 참전한 경력이 있는 마지막 국가원수다.
1947년 4월 21일, 21세 생일 기념 대국민 연설
1947년, 21세가 된 엘리자베스 공주는 가족들과 함께 남아프리카 연방[11]을 순방했다. 이곳에서 엘리자베스는 생일 기념 대국민 연설을 통해 "제 삶이 길든 짧든, 영연방 국민들을 섬기는데 제 일생을 바칠 것"이라고 선언했다. 지금까지도 영국인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명연설로 꼽힌다. 이 연설 5년 뒤, 엘리자베스 공주는 여왕으로 즉위했다. 그리고, 대국민 연설에서 한 약속을 평생 동안 지켜나갔다.

2.3. 결혼과 가정

1934년 숙부 켄트 공작 조지 왕자 그리스와 덴마크의 마리나 공주의 결혼식에서 그리스와 덴마크의 필리포스 왕자[12]를 처음 만났고, 이후 1937년에 다시 만났다. 필리포스는 그리스 국왕 요르요스 1세의 친손자로[13] 두 사람은 크리스티안 9세를 기준으로 7촌, 빅토리아 여왕을 기준으로 8촌인 먼 친척이기도 하다. 이후 1939년에 조지 6세, 엘리자베스 왕비, 마거릿 공주와 함께 왕립 해군사관학교를 시찰했는데, 13세이던 엘리자베스 공주는 18세이던 필리포스 왕자에게 반해 편지를 주고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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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포스는 조지 6세에게 엘리자베스와의 결혼을 허락받으러 갔었으나, 1947년, 공주가 21세 생일을 맞을 때까지 기다리는 조건으로 비밀리에 약혼했다. 그리고 1947년 7월 9일 약혼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약혼은 몇몇 논란을 불러일으켰는데 일단 필리포스 왕자는 사실상 망국의 왕자로[14] 지지해 줄 재정적인 기반도 없었고, 그의 누나들은 모두 독일인과 결혼했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 이후 독일에 대한 감정이 최악이었다.[15] 실제로 엘리자베스의 어머니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은 필리포스와의 결혼을 반대하였고, 특히 필리포스가 독일 혈통[16]인 걸 항상 의심했으며 그를 Hun(독일놈)이라고 불렀다고 한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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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에 거행된 엘리자베스 공주와 필립 공의 결혼식[18]
결혼 전 필리포스는 그리스 왕국 덴마크의 왕자 직위와 계승권을 포기하고 이름도 영어식인 필립으로 바꾸고, 외가의 성인 '마운트배튼'을 사용하여 ' 필립 마운트배튼'으로 개명하면서 상기된 논란거리를 정리했다. 이후 필립 마운트배튼은 장인어른 조지 6세에게 에든버러 공작, 메리오네스 백작, 그리니치 남작 작위를 받았다. 두 사람은 1947년 11월 20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결혼식을 올렸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반독 감정이 심했던 상황이었던지라 필립 공의 누나들은 아무도 참석할 수 없었다.

당시 전쟁이 끝나지 얼마지나지 않은 시점이었기 때문에, 영국은 여전히 배급으로 생활하고 있었는데 왕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때문에 엘리자베스는 웨딩 드레스를 마련하기 위해 배급 쿠폰을 모아야 했으며,[19] 공주가 쿠폰을 모으고 있다는 소식에 당시 국민들은 자신의 배급 쿠폰을 모아 버킹엄 궁전으로 보냈다.[20] 결국 영국 정부에서 200배에 달하는 추가 쿠폰을 특별히 발행해주어 웨딩 드레스를 겨우 마련할 수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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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가족사진
결혼 후 1년 만인 1948년에 첫자식이자 후계자인 찰스 필립 아서 조지 왕자를 낳았고, 2년 뒤인 1950년에는 둘째이자 장녀 앤 공주를 낳았다. 그러나 결혼한 지 5년도 안 되어 조지 6세가 사망하면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찰스 왕세자 앤 공주에게 많은 애정을 주지 못했다고 한다. 심지어 1953년엔 아이들을 두고 남편과 함께 영연방으로 6개월에 걸친 순방을 떠났다. 엘리자베스 2세는 아이들과 작별 인사를 하며 눈물을 보였으며, 훗날 순방을 마친 후 궁으로 돌아와 아이들과 상봉하던 순간을 "아이들은 끔찍하게 예의가 발랐다. 나는 애들이 우리가 누구인지 정말 몰랐다고 생각한다."라고 회고했다.

3. 즉위 이후

3.1. 재위 초중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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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2월 15일, 조지 6세의 장례식
"어떤 면에서 나는 준비된 사람이 아니었고, 아버지는 너무 일찍 돌아가셨다. 매우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일을 해야했다. 매일은 새로운 시작이다. 나는 내 삶을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은 옳은 일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라는 것을 안다. (중략) 왜냐하면 나는 연속성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 인생의 목적이다.
1992년, 즉위 40주년 인터뷰 중[21]
국왕 조지 6세의 건강이 나빠져 가자, 1951년 11월 14일에 엘리자베스 공주 부부가 대리인으로 임명되어 1952년 1월, 영연방 순방을 떠났다. 그러나 첫번째 국가인 케냐를 방문 중이던 1952년 2월 6일, 조지 6세가 암투병 도중 사망한다. 필립은 이 소식을 트리탑 호텔[22]에서 사가나 롯지로 이동했을 때 전해 들었고, 부인에게 직접 소식을 전해주었다고 한다. 조지 6세의 사망에 따라 추정상속인이었던 엘리자베스가 해외에 나간 상태에서 왕위에 오르게 되었고, 공주 신분으로 출국했던 그는 여왕 신분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암흑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엘리자베스 1세[23] 빅토리아 여왕[24]을 잇는 새로운 젊은 여왕의 시대가 열리자 여왕은 사람들의 기대와 지지를 한몸에 받으며 "동화 속 여왕"으로 묘사되었다.

관습대로라면 여왕이 사망한 후에는 부군의 가문으로 왕조명이 바뀌었었기 때문에 찰스 왕세자가 왕위에 오를 경우 윈저 왕조의 왕가가 마운트배튼 왕가로 바뀌느냐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하지만, 메리 대왕대비가 왕조명을 정할 당시의 합의 사항으로 인해 "영국의 왕가는 앞으로 계속 윈저로 고정"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여왕은 1952년 4월 2일에 "왕조명은 윈저로 계속 한다"고 발표했다.
1953년 6월 대관식 기록영화
1953년 6월 2일, 세달 전 메리 대왕대비가 사망했음에도 그녀의 유언에 따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14개월 동안 준비해 온 대관식이 지체되지 않고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정통적으로 대관식 위원회 의장을 맡고 있던 세실사가 아닌 부군이었던 필립 마운트배튼 공이 의장을 맡았던 이 대관식은 필립 마운트배튼 공의 아이디어로 유럽 왕실 최초로 TV로 중계 된 대관식으로, 당시 대관식의 TV 중계에 대해서 영국 내각 내에서 상당한 논쟁이 벌어졌었다. 그중에서도 윈스턴 처칠은 이에 반대했다. 여왕 또한 TV 중계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고 한다.[25] 하지만, 대관식 중계를 금지한다는 결정에 많은 국민들이 아쉬워하는 것을 보고 개인적인 의사와는 상관없이 TV 중계를 허락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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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식을 마치고 촬영한 가족사진[26]
해당 대관식은 최초로 TV로 중계되는 세계적인 주요 행사였다. 많은 가정집이 여왕의 대관식을 보기 위해 텔레비전을 구입했다.[27] 중계 당시 영국내의 시청자만 약 2,700만명이었고, 라디오로 들은 청취자는 1,100만명이었다고 한다. 전 세계 시청자는 2억 7,700만명이었다.[28] 대관식에서 여왕이 쓰고 있는 왕관은 영국의 공식 왕관인 성 에드워드 왕관이다. 무게가 2.2kg에 달할 정도로 엄청나게 무거워 여왕은 "목뼈가 부러지는 줄 알았다."라며 BBC와의 인터뷰에서 이 당시를 회고했다. 대관식 후 런던을 드라이브했고,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웨일스를 방문했다.

1953년, 6개월간 여왕 부부는 영연방 포함 13개국을 순방했다. 처음 방문한 나라는 호주 뉴질랜드로, 투어 기간 동안 군중의 수는 엄청났는데, 호주 인구의 3/4 정도가 몰려든 것으로 추정된다.

1979년 영국은 최초의 여성 총리 마거릿 대처를 맞이했다. 여성 국가원수와 여성 정부 수반의 관계는 어색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엘리자베스 2세는 평생 영연방의 수장으로서 영연방 국가간 우호 관계 유지에 열정적이었고, 이로인해 마거릿 대처와 갈등설을 일으키기도 했다. 특히 남아프리카 공화국 아파르트헤이트 정책과 관련해 심한 의견 대립을 보였고, 이 사실이 언론을 통해 간접적으로 보도된 적도 있었다.

1991년 걸프전쟁 이후 그는 미국을 방문해 영국 군주로는 최초로 합동의회에서 연설하기도 했다. 당시 대통령이던 조지 H.W. 부시는 여왕을 "우리가 기억만큼 오래된 자유의 친구"라고 부르기도 했다.

3.2. 군주제의 변화

하지만 새 여왕의 즉위로 인한 기대감과는 달리,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영향력은 점점 더 줄어들고 있었다. 특히 1957년 수에즈 운하 사태로 촉발된 제2차 중동전쟁은 영국이 위기 상황에서 협상 능력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결국 사태는 앤서니 이든 총리가 사퇴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때 여왕은 국왕의 특권을 사용해 앤서니 이든의 후임으로 해럴드 맥밀런직접 총리로 지명했다.

한편, 이러한 시대의 변화 속에서 영국 군주제와 왕실은 시대에 뒤쳐진다는 평가를 듣기 시작했다. 여왕은 일트린참 경으로부터 사적인 공격을 받기도 했는데, 일트린참이 자신이 발행하는 잡지에 여왕의 궁정이 "너무 영국"스럽고 "상류층"이라면서 여왕이 원고없이는 단순한 연설조차 할 수 없다고 비난했다. 이 발언은 당시 영국에서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는데, 이전까지만 해도 국왕이나 왕가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하는 것은 암묵적으로 금기시되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일트린참은 이 발언을 한 후 왕정을 지지하는 한 단체의 소속 회원으로부터 길거리에서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 사건은 왕실에 대한 대중적인 인식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29]

1960년대부터 엘리자베스 2세와 필립 공은 왕실 개혁에 대한 작업을 실현해 나가기 시작했다. 우선 매년 결혼 적령기에 접어든 상류층 여성들이 궁전을 방문해 여왕을 알현하는 사교계 데뷔 행사는 전면 폐지되었으며, "군주(The monarchy)"라는 표현은 점진적으로 훨씬 친근하고 가족적인 "왕가(the royal family)"로 교체됐다.

1963년 해럴드 맥밀런이 총리직에서 사임하면서 여왕은 또다시 정치적 갈등의 중심에 섰다. 보수당은 여전히 새 지도자를 뽑는 시스템을 마련하지 못했고, 결국 여왕은 그의 조언에 따라 국왕의 특권을 사용해 알렉 더글러스흄 백작을 총리직에 앉혔다. 그러나 귀족 출신인 흄이 총리가 된 것을 두고 큰 논란이 일어나자, 여왕은 유사시 총리를 직접 임명할 수 있는 특권을 포기했다. 이후에는 보수당에서 지도부를 선출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했으며, 현재는 총리직에 공석이 발생해도 정당 내부에서 선거를 통해 새로운 총리를 지명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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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에 방영된 BBC 다큐멘터리 '로열 패밀리'의 한 장면
1960년대 말, 버킹엄 궁전은 왕실이 국민에게 보다 친근한 모습으로 다가서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 결과 다큐멘터리 로열 패밀리가 제작되었다. BBC는 왕실의 집안 촬영을 허락받았다. 가족이 바베큐를 즐기고,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하고, 드라이브를 가는 등 여태 공개되지 않았던 왕실의 일상을 담은 장면들이 공개됐다. 일각에서는 이 다큐멘터리가 필립 공이 밸모럴성에서 소시지를 굽는 등 지나치게 평범한 모습으로 왕실의 신비주의를 깼다고 비판하기도 했다.[30]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다큐멘터리는 왕실에 대한 호감도를 높이고 국민의 지지를 이끌어내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3.3. 왕실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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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2월 재위 40주년 루비주빌리 기념 만찬
1992년, 엘리자베스 2세는 각종 스캔들과 재난에 휩싸이며 최악의 해를 보냈다.

여왕의 둘째 아들인 앤드루 왕자과 그의 부인 사라 퍼거슨은 별거에 들어갔고, 프린세스 로열 앤 마크 필립스는 이혼했다. 찰스 3세 다이애나 스펜서 역시 결혼생활이 불행하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결국 이들도 헤어졌다.

이 해는 여왕이 가장 좋아하는 거주지인 윈저 성의 대화재로 막을 내렸다. 위기에 처한 왕가를 상징하는 듯 했다. 또 윈저 성의 수리비용을 납세자가 부담해야 할지 여왕이 직접 내야 할지에 대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결국 여왕은 면세 특권을 포기하고 세금을 내기 시작했으며, 버킹엄 궁전을 개방해 성의 복구 비용 일부를 충당했다.

엘리자베스 2세는 재위 40주년을 맞아 열린 런던 금융특구 시장 주최 만찬에서 1992년을 자신의 "아누스 호리빌리스(Annus Horribilis·최악의 한해)"이라고 칭했다. 또한 연설을 통해 더 개방적인 군주제의 필요성에 대해 간접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

여왕의 통치 초기엔 매우 높았던 영연방에 대한 기대는 해외에선 실현되지 못했다. 영국은 유럽과 새로운 합의를 위해 과거 파트너들로부터 등을 돌렸다.

그럼에도 여왕은 영연방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아파르트헤이트를 폐지하자 여왕은 매우 흐뭇해했다. 또한 이를 기념하기 위해 1995년 3월 남아공을 방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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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는 김대중 대통령의 초청으로 1999년 4월 19일부터 3박 4일 일정으로 방한했다.[31] 당시 여왕은 서울 인사동 거리, 이화여자대학교 그리고 안동을 방문해 봉정사[32], 하회마을 등 몇 군데 명소를 방문했는데, 특히 하회마을에서 한옥[33]을 방문할 때 화제를 모았다. 입식 문화인 서양에서는 발을 밖에서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것을 금기시하는데, 좌식 문화인 한옥에 들어가려면 신발을 벗어야 하는 까닭이었다. 여왕은 한국 문화를 존중해 맨발로 들어갔고, 신발을 벗자마자 외신 기자들이 미친 듯이 플래시를 터뜨렸다. 이에 대한민국 기자들은 문화의 차이 때문에 어리둥절해 했다.

하회별신굿탈놀이를 관람하고 고추장과 김치를 담그는 모습을 지켜보는 등 한국 문화를 체험하기도 했다. 또 한국의 문화와 어린이들에 대해서도 각별한 관심을 표한 것으로 알려졌다.

마침 방문 날짜에 73회 생일 4월 21일이 끼어 있어서 간 김에 한식 전통 생일상도 받았다. 안동소주 기능보유자인 인간문화재 조옥화 여사가 상차림을 맡았다. 국왕의 방문인 만큼 생일상 메뉴는 주로 과거 조선 국왕의 수라에 오르던 궁중음식들로 구성되었다. 과일, 국수, 편육, 찜, 탕 등 47가지에 달하는 음식으로 된 상차림. 조 여사는 그 생일상을 준비하기 위해 11명의 도우미와 함께 사흘 밤낮을 꼬박 새우다시피 했다고 한다. 다른 건 그럭저럭 어렵지 않게 끝마칠 수 있었지만 문제는 60㎝에 달하는 높이의 떡꽃 화분.[34] 높이 20㎝의 놋쇠 화분에 매화나무 가지를 심은 뒤 고추와 새, 토끼, 나비 등 갖가지 동물 형상의 떡을 빚어 옛 음식 그대로 재현했다. 이 음식을 만드느라 두 차례 리허설을 거쳤으며 최종 작품은 여왕의 생일 전날 저녁부터 시작해 당일 아침까지 지극 정성을 기울인 뒤에야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다. 조 여사는 여왕보다 4살 연상으로 당시 77세의 나이였지만 일생의 영광이라며, '여왕께서 한국을 찾아주신 것만 해도 영광스러웠기 때문에 힘든 줄도 모르고 생일상을 차렸다'고 이후 말했다.

처음에는 영국 대사관 측이 생일상을 사양했으나 안동시 측이 "일국의 여왕께서 생일을 맞이하셨는데 그냥 지나치는 것은 양반 고을의 법도가 아니다"라고 하여 어렵게 성사됐다고 한다. 조 여사는 이에 화답하고자 생일상 마련에 드는 적지 않은 비용을 직접 부담했고 그 일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그때 차려진 음식의 모형을 만들어 하회마을 박물관에 기증하기도 했다.

이때 대한민국 사과를 맛보고는 감탄하여 이후 영국에서 매년 대한민국산 사과와 배를 공수해간다는 이야기가 있다. 특히 사과는 안동에서 여왕에게 특별히 진상할 품종을 개발해 보낼 정도였다.[35]

3박 4일 일정으로 사용할 의전 차량으로 대우 체어맨(쌍용 체어맨)[36]을 선택했다고 한다. 남편인 필립 공 현대 다이너스티 리무진을 탔다.[37]

1995년 11월 20일, 찰스와 별거중이던 다이애나가 BBC와 가진 단독 인터뷰가 방송되면서 국제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여왕을 비롯한 왕실 일원들은 방송 직전까지 다이애나의 인터뷰 사실을 알지 못했으며, 방송 당시 여왕은 버킹엄 궁전 내 자신의 방에서 인터뷰를 시청했다고 전해진다. 훗날 BBC 임원들과의 만찬 자리에서 이사회 일원인 리처드 에어 경에게 "끔찍한 일을 했어. 내 며느리가 끔찍한 일을" 이라고 말하며 적지 않은 충격을 보였다고 한다. 결국 여왕은 이들의 이혼을 재가한다는 문서를 보내고, 1996년 9월 4일 찰스와 다이애나는 정식으로 이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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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8월 31일, 다이애나 스펜서가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왕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여왕 또한 이례적으로 비판을 받았다. 대중이 왕세자빈을 애도하기 위해 런던 곳곳의 궁으로 모이는 상황 속에서 여왕은 평소와 다르게 구심점 역할을 꺼리는 듯했다. 여왕을 비판하는 이들을 그녀가 공개석상에서의 과도한 애도를 기피하는 세대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여왕은 또 할머니로서 가족의 사적 울타리 안에서 손주들을 위로하고 싶어 했다. 여왕은 결국 생방송으로 며느리의 죽음을 애도하고 왕실이 이 변화에 적응할 것이라고 발표하며 여론을 달랬다. # 이후 장례식에도 직접 참석했으며, 다이애나의 운구가 버킹엄 궁전 앞을 지나갈때는 이례적으로 고개를 숙이며 묵례를 하기도 했다.[38]

1999년 영연방 왕국의 일원이자 영연방 주요 회원국인 호주에서 여왕을 호주 국왕 자리에서 폐위시키고 헌법을 바꿔 공화정으로 전환하고자 하는 운동 끝에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선거 결과는 54.87% vs 45.13%로, 과반수의 호주 국민들이 왕정 존속을 선택해 호주의 군주직을 유지하게 됐다. 당시 공화정 전환 운동의 지도자였던 맬컴 턴불은 이후 공화정 전환 운동 지도자 자리에서 물러났으며, 이후 여러 정치 활동을 거쳐 2015년 결국 호주 총리 자리에 오르게 됐다. 호주 국민들의 여왕에 대한 애정이 크기 때문에 총리 당선 이후 계속되는 공화주의자들의 압박에도 공화정 전환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으나, 여왕이 만약 가까운 시일 안에 타계할 경우 맬컴 턴불 총리가 호주 왕정 유지에 불안 요소가 될 것이라는 예측도 많았다.[39] 2022년 또 다른 공화주의자 앤서니 앨버니지가 총리가 되면서 또 모르게 되었다.[40] 또한 호주의 공화정 국민 투표의 여파가 캐나다, 뉴질랜드, 자메이카 등 다른 영연방 왕국들로 퍼졌다. 해당 국가들의 여론 조사 등을 봤을 때 여왕 사후 왕위 계승의 향방에 따라 영연방 왕국들의 군주제 폐지 여부가 결정될 확률이 높다.[41]

3.4. 재위 후반기

2004년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국빈 초청해 런던에서 회담을 가졌다. 대한민국 대통령 역사상 영국 왕실로부터 국빈 초대를 받은 대통령은 노무현이 최초였다.[42]

2005년, 아들 찰스 3세 카밀라 파커 보울스와 정식으로 재혼하였다.[43] 여왕 부부는 결혼식에는 불참했지만 윈저 성 성 조지 예배당에서 열린 감사성찬례와 피로연에 참석했으며, 이는 영국 왕실이 이들의 재혼을 인정하고 카밀라를 정식 왕세자비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다만 카밀라는 웨일스 공비(Princess of Wales) 호칭은 대외적인 시선을 고려해 사용하지 않았으며, 콘월 공작 부인의 호칭을 대외적으로 사용했다.

2006년 4월에는 80세 생일을 맞았으며, 이때 윈저 성 앞에서는 수천 명의 지지자들이 몰려들어 여왕을 반겼다.

2007년 11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열린 여왕과 필립 공의 결혼 60주년 기념일 예배에는 2000여 명의 사람이 참석했다.

2011년 4월 여왕의 손주인 윌리엄 왕세손 캐서린 미들턴의 결혼으로 왕실은 또 하나의 경사를 맞았다.

같은 해 5월 여왕은 왕실 인사로서는 최초로 아일랜드를 방문했다. 이는 역사적으로도 대단히 의미 있는 행사였다. 여왕은 아일랜드어로 한 연설에서 관용과 화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년 뒤 여왕은 재위 60주년인 '다이아몬드 주빌리'를 맞아 북아일랜드를 방문해 전직 IRA 사령관 마틴 맥기네스와 악수했다. 이는 매우 의미 있는 순간이었는데, 여왕의 친척인 루이 마운트배튼 백작이 1979년 IRA의 폭탄에 숨진 바 있기 때문이다. 다이아몬드 주빌리를 맞아 수천 명들이 길에 나와 축제를 즐겼고, 런던에서의 주말 축제로 마무리됐다.

2010년대 들어 스코틀랜드 분리독립하려는 움직임이 가시화되자 "400년간 이어온 연합왕국의 왕관이 나의 대에서 끝날지도 모른다"며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그리고 2012년 10월, 영국 정부와 스코틀랜드가 스코틀랜드 분리독립 투표를 시행하기로 합의하면서 여왕의 우려는 현실이 될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 2014년 투표를 앞두고 영국 정가에서는 스코틀랜드 국민들에게 "앞으로 잘해줄 테니까 제발 남아줘요"하며 읍소하고 있으며 여러 정치인들은 여왕에게 "폐하! 한마디라도 해주세요."라고 호소하였다. 하지만 개인적인 우려에도 불구하고 "독립 문제는 스코틀랜드인들의 선택에 따라야 한다"며 개입하지 않겠다고 선을 그었다.[44]

다니엘 크레이그와 2012 런던 올림픽 개회식 영상에 출연한 적이 있다. 당초 개회식 제작진 측에서는 엘리자베스 여왕과 같은 옷을 입은 대역을 출연시키려고 했는데, 여왕이 직접 출연하겠다고 나섰다고 한다. 당시 여왕의 깜짝 등장과 자연스러운 연기로 많은 화제를 모았다. 단, 뛰어내리는 스턴트는 대역이 했다.[45][46]

2013년 4월 8일, 영국 71대 총리 마거릿 대처의 사망에 큰 슬픔을 드러내며 유족에게 조의를 표했고, 대처의 장례식을 국장보다 한 단계 낮은 군장 규모로 치를 것을 명했다.[47]

2015년 9월 9일에는 고조모인 빅토리아 여왕의 재위 기간을 넘어서면서 영국 최장수 군주 기록을 세웠다. 막상 여왕은 "딱히 열망했던 것은 아니다"라며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2016년 4월, 여왕은 90세 생일을 맞았다.

엘리자베스 2세는 90대가 되어서도 공무를 계속 이어갔고, 2017년 필립 공이 왕실 공무에서 완전히 은퇴한 뒤에는 혼자서 이를 감당한 경우도 많았다.

<더 선>의 주장에 따르면 브렉시트 투표 직전 식사 자리에서 유럽연합 잔류에 대한 회의적인 뉘앙스의 발언이 있었다고 하며, 탈퇴파에서 이를 막판 캠페인에 활용하기도 했다. 여왕이 저녁 식사 자리에서 "영국이 유럽의 일부여야만 하는 이유 3가지를 대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여왕이 브렉시트를 두둔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 배경이다. 이에 언론 규제 단체인 IPSO는 "<더 선>의 기사 제목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misleading)"고 발표했지만, <더 선>은 2명의 소식통을 통해서 "여왕이 당시 부총리였던 닉 클레그한테 말했다"고 주장했다. # ## 닉 클레그는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던 마이클 고브가 <더 선>에 이와 같은 사실을 전한 소식통 중 한 명이다"라고 지적했으나, 마이클 고브는 대답하기를 거절했다. 닉 클레그는 "여왕이 언제 떠날지 모르는 일개 부총리한테 이런 중대한 사건에 대해 논평을 했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없다"고 대답하면서, <더 선>의 주장을 보증해주기를 거절했다.

2017년 영연방 총회에서는 영연방 수장을 찰스 왕세자에게 물려줬으면 하는 발언을 하였다. # 이후 찰스 왕세자를 차기 영연방 수장으로 지명하는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2018년 12월 29일 엘리자베스 여왕이 비밀리에 새로운 요트를 구매하기 위해서 로비를 진행한 것이 밝혀졌다. 버킹엄 수석 비서는 내각에 보내는 편지에 "여왕은 새로운 요트를 구매하고 싶지만, '대중들에게 공개되면 왕실 이미지에 큰 타격이 갈 것'이라고 걱정하고 있다"고 적었다. 지금까지 다른 왕족들이면 몰라도 엘리자베스 여왕이 내각에 압력을 가했다는 증거는 없었다. 그러나 이 편지의 폭로로, 여왕도 사사로운 이유로 내각에 압력을 가했다는 사실이 증명됐다. #

2019년 1월 25일 엘리자베스 여왕은 이례적으로 중립적이지만 정치와 관련하여 의원들에게 합의점을 찾기를 촉구했다. 브렉시트가 노딜로 끝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시점에서 엘리자베스 여왕은 "모두 모여서 합의점을 찾읍시다"라고 의원들에게 부탁했다. # 일각에서는 "총리인 테레사 메이가 아니라 의원들에게 직접 말한 것은, 여왕이 총리와 내각을 더 이상 신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했다.

2019년 2월 2일 브렉시트가 노딜로 끝날 가능성이 높아지자 " 영국 정부는 여왕과 왕족들을 다른 곳으로 피신시키는 계획까지 고려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 내각 관계자는 "이 계획은 냉전 시기부터 있던 것으로, 노딜 브렉시트로 시민들의 소요사태가 일어나면 대비하기 위해서 다시 고려 중이다"라고 대답했다. 영국의 재계와 경제 전문가들은 "노딜로 갑자기 관세가 생기면 식약품을 수입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어 혼란이 가중될 수 있다"고 여러 차례 경고했었다. 이에 하드 브렉시트 지지자인 제이콥 리스-모그는 "내각이 노딜 브렉시트에 불필요하게 긴장한다. 영국 왕실은 2차 세계대전 때도 런던에 남아있었다."고 강조했다.

그러던 중 독일 슈피겔이 1988년 11월 이임 인사를 하러 엘리자베스 2세를 만난 뤼디거 베히마어 주영 독일대사가 본국에 보고한 전문의 요약에서 “영국의 미래는 유럽에 달렸다”고 했다는 내용의 외교전문이 공개됐다. #

일본 천황 아키히토가 생전에 물러나고 그의 장남인 황태자 나루히토가 즉위하면서, 영국 내에서도 엘리자베스 2세의 양위가능성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 물론 여왕 본인이나 왕실 및 정치권에서 공식적으로 언급한 적은 아직 없다.

2019년 8월 11일 영국 일간 타임즈에서 여왕이 브렉시트 문제로 혼돈을 겪고 있는 영국의 정치 현실과 관련해 현 집권 세력에 대해 "inability to govern(제대로 통치를 못 한다, 통치 능력이 없다)"며 답답한 심경을 드러냈다고 보도했다. 기사1 기사2

2019년 9월에는 스코틀랜드의 왕실 별장인 밸모럴 성에서 휴가를 보내던 도중, 성을 방문한 미국인 관광객들에게 장난을 쳤다는 기사가 나왔다. 여왕을 몰라본 관광객들이 "이곳에 사시냐"고 질문하자 엘리자베스는 "인근에 집이 있다"고 대답하고, "여왕을 만나본 적이 있냐"는 관광객들의 질문에 대해 "아직 만나본 적이 없다."라고 답하고 옆에 있던 수행원을 가리키며 "저 사람은 여왕을 만나 본 적이 있다"라고 말했다. 관광객들은 끝까지 여왕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헤어졌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거짓말은 전혀 하지 않은 채 관광객들을 속인 것이다. (서울신문 기사)

말년에는 각종 스캔들과 악재에 시달려야 했는데, 2019년 1월에는 당시 98세였던 필립 공 윈저 성 주변에서 자동차를 운전하다 교통사고를 내는 일이 있었다. 2020년 1월에는 해리 왕자의 독립과 관련해서 왕실 고위직 회의를 가졌으며, 독립을 승인하였다. # 여왕이 가장 아끼는 자녀였던 앤드루 왕자는 미성년자 성매매 스캔들에 휘말렸다.

2020년 6월 25일에는 6.25 전쟁 70주년을 맞아서 다른 참전국 국가원수들과 함께 추념 메시지를 보냈다. 다만 영상으로 직접 출연한 다른 국가원수들과는 달리 엘리자베스 2세는 출연하지 않고 사이먼 스미스 주한영국대사가 메시지를 대독했다. 메시지 전문

2021년 4월 9일, 70년 넘게 해로한 남편 필립 마운트배튼 공과 사별하였다. # 왕실 성명에 따르면 여왕은 부군을 기리기 위해 당분간 윈저 성에 남아있겠다고 밝혔다. 2020년에도 코로나 때문에 윈저 성에서 보낸 시간이 많았으니 이상할 것은 없지만, 일각에선 여왕의 처소가 윈저 성으로 고착되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48] 그리고 2022년 3월 6일, 여왕은 "앞으로 버킹엄 궁전을 떠나 남은 여생을 윈저 성에서 보낼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2022년 2월 6일 즉위 70주년을 맞았다. 기념 케이크를 자르는 등 조촐한 기념행사를 했다. 여왕의 70주년(플래티넘 주빌리) 공식 기념행사는 6월 2~5일 연휴에 대대적으로 개최된다. 거리 파티, 군 퍼레이드, 팝 콘서트 등 다양한 축하 행사가 진행되었다. 다만 여왕은 모든 행사에 참여하지는 못했고, 참여하지 못한 행사에서는 대신 영상으로 얼굴을 드러냈다.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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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6일 리즈 트러스가 여왕이 머물고 있는 스코틀랜드 밸모럴 성으로 향해 신임 영국 총리로서 알현하였는데, 이 모습이 대중에게 공개된 여왕 생전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49] 당시 여왕을 접견했던 리즈 트러스 총리에 따르면, 여왕은 건강이 악화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이를 내색하지 않아 총리조차도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 될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사망 전날인 9월 7일에는 추밀원과의 화상 회의가 예정되어 있었지만, 건강 악화를 이유로 전화 회의로 변경되었고 이후 회의가 완전히 취소되었다.

3.4.1. 건강 악화

2020년대에 들어서자 고령인 여왕의 건강에 대한 우려가 본격적으로 불거져 나오기 시작했다. 2010년대까지만 해도 아들 찰스 왕세자에게 결코 양위하지 않는다는 투의 이 소비되곤 하였으나[50] 2020년대 들어 달라졌다.

2021년 4월에는 부군 필립 마운트배튼 공이 사망하면서 여왕의 건강에 대한 우려가 점점 더 많아지기 시작했다.

2021년 10월 12일, 웨스트민스터 사원( 성공회 성당)에서 열린 재향군인회 100주년 기념 감사성찬례에 검은색 지팡이를 짚고 참석했다. # 2003년 무릎 수술 이후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서 지팡이를 사용한 것이다. 왕실 측에서는 "건강상의 이유가 아니고, 단순히 편의를 위한 조치였다"라고 밝혔다.[51][52]

하지만, 20일 예정되어 있던 북아일랜드 방문을 취소한 데 이어서, 병원에 입원한 것이 알려지면서 건강이상설이 빠르게 퍼지기 시작했다. 버킹엄 궁 측에서는 "'공무를 취소하고 휴식을 취하라'는 의사들의 반강제적 권고를 수용한 것이며, 병원 입원은 간단한 검사를 받기 위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밝히며 건강 이상설을 일축했다. 하지만 어떤 검사를 받았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이후 26일, 윈저 성에서 김건 주영한국대사를 접견하는 등 공식 일정을 재개했다. #

CNN은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3주간 1,000km의 엄청난 일정을 소화했다. 심각한 건강 이상일 가능성은 낮다."고 분석했다. #

26일, 버킹엄궁은 여왕이 입원 이후 첫 외부 일정으로 예정되어 있던 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회의에 참석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 이는 의사들의 휴식 권고에 따른 것이며, 영상 메시지 형태로 대체할 예정이라고 한다.

영국 선데이타임스는 "여왕이 빡빡한 개인 일정과 늦은 시간에 텔레비전을 자주 시청하여 신경이 쇠약해졌다"고 주장했다. 보도에 따르면, 여왕은 4월 필립 마운트배튼 공과 사별한 이후 혼자 있는 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해 가족이나 친구들을 불러 계속 점심, 저녁을 같이 했다고 한다. 특히 자신의 자녀들을 키워준 동갑내기 유모 마벨 앤더슨과 함께 자주, 밤늦게까지 TV를 시청하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 미국 NBC의 보도에 따르면, 의사들은 여왕이 건강에 집중할 시간을 갖도록 스케줄을 조정할 것과 저녁 일과 시간을 변경할 것을 권고했다고 한다. 더불어 여왕이 밤마다 마시는 칵테일도 포기하라고 조언했으며[53][54] 신체에 무리가 가는 장시간 산책도 멈추라고 했다고 한다. 영국 ITV는 "왕실이 여왕의 의무보다 건강을 더 우선시하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 즉, 나이가 나이인 만큼, 건강 관리를 위해 외부 일정을 더 줄여나갈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이에 따라 다음 계승 순위인 맏아들 찰스 왕세자의 공무가 이전보다 더 늘어나거나 아예 섭정을 맡길 가능성이 더욱 높아졌다.

하지만, 이와 같은 영국 왕실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건강 이상설이 쉽게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지난해 1월 여왕이 매해 방문하던 샌드링엄 여성 연구소를 '사소한 감기'를 이유로 가지 못한 것도 건강이상 징후였다는 의혹이 증폭되고 있다. 더불어 왕실에서 독립해 미국에서 거주중인 손자 서식스 공작 해리 왕자가 여왕을 걱정하고 있다는 보도도 나오면서[55]"크리스마스에는 영국으로 돌아가 여왕을 만나기를 희망하고 있다"고 발언했다고 한다.], 여왕의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다는 의혹이 계속 확산되고 있는중이다. #

그러나 이후 런던 근교 윈저 성에서 여왕이 직접 재규어 차량을 운전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건강 이상설은 현재로써는 사실무근이거나 적어도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

한 왕실 전문가는 여왕이 올해 직접 '최악의 해'라고 칭했던 1992년 이후[56] 재위 중 가장 최악의 한 해[57]를 보냈으며, 이것이 여왕에게 건강상의 문제를 끼쳤을지는 불분명하지만, 큰 정신적인 상처를 남긴 것은 분명하다고 분석했다. #

이후 11월 14일, 제27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 불참 이후 첫 공식 외부 일정이었던 현충일 감사성찬례마저 허리 부상을 이유로 불참했다. # 그러나 여왕은 사흘 뒤인 11월 17일 런던 근교 윈저성에서 퇴임을 앞두고 있는 닉 카터 국방참모총장을 만났는데 지팡이도 짚지 않은 채 허리를 곧게 세우며 건강한 모습으로 카터 총장을 맞이함으로써 건강 이상설을 불식시켰다. #

또한 12월 23일(현지 시간) 녹화한 크리스마스 담화에서 필립 공에 대한 그리움을 나타내며 평년과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앉아 약 8분 간의 연설을 이어가며 건강에 이상이 없음을 증명했다.[58]

2021년 10월, 북아일랜드 순방이 취소된 이후 여왕은 대면 업무와 순방[59] 등을 자제하고, 비대면 업무만을 수행중이었으며, 버킹엄궁에서는 여왕의 대외 업무 복귀를 계획중이었다고 한다. 여왕의 대외업무 복귀는 당분간 미뤄질 것으로 보인다.

2022년 2월 20일, 버킹엄 궁에서 "여왕이 코로나에 확진되었으며, 가벼운 감기와 같은 증상을 겪고 있다"고 발표했다. # 여기에 대해 왕실 전기 작가인 로버트 잡슨은 '가벼운 감기'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어 여왕의 상태가 위중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았다. 여왕 스스로도 가벼운 왕실 업무를 이어나간다는 것을 보면, 건강에 크게 이상이 있거나 무리가 갈 상황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그는 "만약 여왕의 상태가 위중했다면 '여왕이 COVID-19에 감염되었다'라고만 버킹엄 궁이 밝혔을 것이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여왕의 코로나 19 확진으로 인해 예정되었던 화상 접견 일정이 취소되었다. #

BBC 기자 다니엘라 랄프는 "궁의 분위기는 조심스럽지만 경계심이 없다"며 "여왕은 95세의 나이로, 작은 감염에도 매우 취약한 고령이며,[60] 또한 지금 여왕은 1년 전보다 훨씬 더 날씬하고 허약해졌다.[61] 여왕을 주의 깊게 모니터링해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

2022년 2월 28일, 여왕의 건강이 많이 회복되었으며 가족과 함께 프로그모어[62]에서 시간을 보냈다고 보도되었다. 코로나 19에 걸렸다가 얼마 안 가 완치되는 등 나이에 비해서 여전히 건강한 편이지만, 최근 들어서 예전에 비해 건강이 많이 악화된 상태라고 한다. # 왕실 측 관계자는 "여왕은 여전히 그 어느 때보다 기민하고, 능력 있고, 관심이 있지만, 육체적으로는 예전만큼 강하지 않다"고 말했다.

여왕이 오랜 시간 동안 서 있거나 걷기 극도로 어렵다며, 곧 휠체어가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한다. # 다만 필립 공의 사망 이후 약 1년 만에 진행되는 첫 추도식(3월 29일)에는 참석할 것이라고 밝혔다.

5월 10일에 예정된 영국 의회 개회식에 여왕이 건강문제로 참석이 어려울 것에 대비해 찰스 왕세자가 대신 참석하는 안이 내부적으로 검토중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 여왕이 재위 기간 중 의회 연설에 불참한 적은 1959년과 1963년 앤드루 왕자와 에드워드 왕자를 임신 중이었을 때를 제외하고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다. 다만, 여왕의 참석 의사가 강하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여왕이 정상적으로 참석할 가능성이 크다.

여왕의 건강 악화로 인한 이동 불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약 62,000파운드를 들여 윈저 성 경내에 첨단 이동 장치를 설치해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
2022년 4월 14일, 매년 부활절을 기념해 열리는 마운디 서비스 행사에 여왕이 불참했고, 찰스 왕세자 카밀라 파커 보울스 내외가 대신 참석했다. 여왕이 이 행사에 불참한 것은 1970년 이후 처음이며, 즉위 이후 단 4번 밖에 없었다. 왕실전문가 로버트 잡슨은 "여왕이 Zoom 국왕이 될 수 없다"며, "찰스 왕세자에게 정식으로 섭정을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63] #

2022년 5월 4일, 버킹엄 궁에서 "올해 여왕은 버킹엄 궁 가든 파티에 참석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 여왕이 가든파티에 불참하는 것 역시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다.

2022년 5월 9일, 버킹엄 궁은 "여왕이 5월 10일에 열리는 의회 개회식에서 연설하는 것을 포기했다"고 발표했다. 여왕은 참석하기를 희망했으나 주치의들의 권고로 결국 참석하지 않기로 하면서, 개회식에는 찰스 왕세자 윌리엄 왕세손이 참석하기로 했다. # 의회 연설은 찰스 왕세자가 대독했는데[64] 이는 왕세자가 된 지 70년만에 처음으로 여왕의 역할을 대신한 것이다.

2022년 5월 15일, '플래티넘 주빌리'를 축하하는 로열 윈저 호스 쇼를 관람하며 1시간 넘게 야외에 머문 데 이어서, # 5월 17일에는 런던 패딩턴역에서 개최된 엘리자베스선[65] 개통식에 건강한 모습으로 막내아들과 함께 깜짝 등장했다. # 23일에는 골프용 카트를 타고 첼시 플라워쇼 행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 공개적인 야외행사를 재개하며 건강에 대한 우려는 다소 누그러졌지만, 지팡이나 골프 카트를 사용하는 등 여전히 거동은 불편한 것으로 보인다.

2022년 6월 2일 플래티넘 주빌리 기념 퍼레이드에도 정정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3일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열리는 감사성찬례에는 불참한다고 한다. #

2022년 9월 7일, 버킹엄 궁 측은 "전날 여왕은 공식 일정을 소화했으나, 주치의들에게 휴식을 권고받았다"며 "당일 예정돼있던 추밀원 회의 일정은 다음주 수요일로 변경되었다"고 밝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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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8일, 버킹엄 궁전이 발표한 성명문[66]여왕은 편안하게 발모랄에 머물러 있습니다.]
2022년 9월 8일, 여왕의 주치의들이 건강 상태가 우려되어 의료적 관찰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찰스 왕세자, 카밀라 파커 보울스 윌리엄 왕세손[67]이 소식을 듣고 여왕을 찾아 갔다. 앤 공주 앤드루 왕자, 에드워드 왕자, 소피 리스존스 또한 밸모럴 성에 모였으며, 왕실 고위직에서 물러나 미국에서 거주하고 있는 서식스 공작 해리 왕자 또한 스코틀랜드에 도착하였다고 전해졌다.[68] # 또한, 베니스 국제 영화제 참석차 이탈리아에 머무르던 사라 퍼거슨이 베니스를 출국하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69]

영국 BBC의 의료 편집자 퍼거스 월시(Fergus Walsh)는 일찍이 버킹엄 궁이 공개한 성명에서 핵심 문구는 "의사들은 우려하였다"라며 그는 또한 왕족들의 (여왕이 여름 동안 머물고 있는) 밸모럴 도착의 중대성을 강조하였다. 최근까지 그녀는 상대적으로 정정하였다고 그는 설명하였다. #

영국 서민원에서 에너지 가격과 예산에 대한 토론에서 수상의 발언이 진행되는 가운데 서민원 의장 린지 호일 경에 의해 회의장에 여왕의 건강에 문제가 있음이 전해졌는데 이 공지 뒤에 서민원 의원들의 표정과 목소리에서 우려하고 있음이 느껴졌다고 BBC 정치부 편집자 크리스 메이슨(Chris Mason)이 전했다. #

BBC의 전직 왕실 기자가 무언가 심각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왕실에서는 절제된 표현을 사용하는데 자신은 기동성 장애[70]의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며 여왕의 연령을 생각해 보면 여러 건강상의 문제들이 얽혀있을 수 있다고 한다. # 현직 왕실 출입기자 니콜라스 위첼(Nicholas Witchell)도 같은 맥락의 주장을 제기하였으며 왕실이 9월 8일에는 더이상 자세한 사항을 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영국 BBC는 여왕의 건강에 대한 성명이 발표된 직후, 현지 시각으로 저녁 6시까지 모든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뉴스특보를 방송하기 시작했다.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와 기자, 수어통역사까지 모든 출연자들이 상복을 연상하게 하는 검은 옷과 넥타이를 입고 나왔다. # 영국의 공영방송이 여왕의 건강에 대한 특집 방송을 진행하는 것은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극히 이례적이며,[71] 그만큼 영국 정부와 언론 측에서 해당 사안을 엄중히 판단하는 것으로 보였다.[72]

여왕의 건강 이상설이 전해진 직후, 버킹엄 궁전 근위병 교대식이 취소되었다. #

사망 이후 발간된 전기에 따르면, 여왕이 말년에 골수 투병을 했다고 한다. # 골수암의 가장 흔한 증상은 뼈의 통증, 특히 허리와 골반의 통증이다. 이 때문에 말년에 지팡이를 짚고 다닌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 알려진 치료법은 없으며, 면역 체계를 조절하는 약물을 통해 환자의 생존 기간을 몇 달 또는 2~3년 연장하는 방법 밖에 없다고 한다. 다만 이것이 공식적인 사망 원인은 아니고, 사망 진단서 상에는 노환으로 사망했다고만 나와있다.

3.5.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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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0220909_064549.jpg
여왕께서 오늘 오후 밸모럴 성에서 평화롭게 서거하셨습니다. 왕비께서는 오늘 저녁 밸모럴 성에서 머무를 것이며 내일 런던으로 돌아옵니다.
버킹엄 궁전 발표문
현지 시각 2022년 9월 8일 오후 6시 30분, 버킹엄 궁전은 "여왕이 밸모럴 성에서 평온히 승하했다."고 발표했다. # # 현지시각 오후 3시 10분에 사망했으며, 당시 여왕의 곁은 장남 찰스 3세와 장녀 앤 공주가 지켰다. 앤드루 왕자 에드워드 왕자, 손자 웨일스 공 윌리엄, 서식스 공작 해리 왕자도 급히 스코틀랜드로 떠났지만 여왕 사망 후에 도착하여[73]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사후 발간된 왕실 전기에 따르면, 여왕은 골수암에 걸렸었다고 한다. #

이어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버킹엄 궁 정문에 여왕의 사망 성명을 게시하였고, 여왕의 스코틀랜드 체류 중 사망 시나리오를 상정한 장례 프로토콜 유니콘 작전이 실행되었다.

3.6. 정치적 영향력

입헌군주제가 이미 확립되어 근대 정치가 다 잡힌 상태에서 즉위하였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정치 권력은 전무함에 가깝다. 본인도 이 점을 생각해서 정치에 관해서는 발언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아서 현대 왕가의 귀감이 되고 있다. 심지어 1965년에 거행된 윈스턴 처칠의 국장 이외에는 50년 가까이 영국 총리들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다가, 2013년에 거행된 마거릿 대처의 장례식에 간만에 참석하기도 할 정도.[74] 그래서 그런지 영국인들의 평가가 매우 좋은 편이다.

물론 그러면서도 공개적인 정치 불화가 없는 선에서는 국정에도 일부 관여하고 있어, 실은 영국을 움직이는 흑막이 아닐까 싶은 모습도 보여주곤 한다. 예를 들면 내각불신임으로 인해 총리가 사퇴했을 때 국왕의 특권으로 총리를 2번 임명한 경력이 있고,[75] 브렉시트 국민 투표에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 막판에 탈퇴파들이 뒤집기에 성공하도록 개입했다는 의혹도 있다.[76]

이처럼 정치에 일부 개입하는가 하면, 전쟁 등의 민감한 사안의 경우 여왕의 승인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물론 여왕이 이를 거부한 적은 한 번도 없긴 했지만, 불만을 표시한 적은 있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마가렛 대처 포클랜드 전쟁 개전 선언인 아르헨티나 선전포고 결의안에 대해 엘리자베스 2세는 "불만족스럽다"고 거부권을 행사하지는 않았지만 불만 의사를 표현한 적이 있다. "부적절하다"고 했으면 거부권 행사인데, 당시 영국 여론이 전쟁 여론으로 기울어졌던 상황이라 포클랜드 전쟁을 막지 않는 선에서 불만 의사를 표시했다.

2021년 2월 더 가디언지가 여왕의 동의권(Queen's Consent)에 관한 보도를 내놓았다. 동의권이란 국왕의 권한이나 사적 권리가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법안이 입안될 경우 국왕이 동의해야 비로소 의회에서 논의를 시작할 수 있는 절차를 말한다. 이미 의회를 통과한 법안을 여왕의 이름으로 승인해 법적 효력을 갖도록 하는 국왕 재가(Royal Assent)와는 다르다.[77] 총리실 문서가 기밀 해제 되면서 여왕 또는 찰스 왕세자가 동의권을 행사하여 1952년부터 1,063건의 법안을 입법 절차 전에 검토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 <가디언>의 주장은 여왕이 왕실과 관련이 없거나 적은 법안에 대해서도 사전에 검토하는 행위 그 자체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1986년 연어법[78]이나 2019년 주차 관련 법 등. 그리고 이 중 최소 4건의 법안은 왕실 측이 불만을 표시하여 수정되었다.[79] 또, 스코틀랜드 의회에서 통과된 신재생에너지 사용 촉진법을 사전에 검토하여 신재생에너지 사용 의무에서 국가원수를 면제하는 조항을 추가시켰다는 보도가 나왔다. 찰스와 윌리엄 왕세손이 탄소배출 절감 운동에 참여하는 한편 스코틀랜드에서 손꼽히는 규모의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는 여왕이 모순적인 행태를 보였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왕실 측 대변인은 "여왕은 한 번도 동의 거부를 통해 법안을 거부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또 "동의권 행사 여부는 여왕의 요청이 아닌 의회의 결정으로, 해당 정부 부처가 왕실에 의견을 묻는 형식적인 절차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엘리자베스 2세의 실질적인 권력 행사, 즉 영국 헌정 체제에서 군주의 역할은 이면적으로 매우 복잡한 문제이다. 영국은 전세계 역사상 통치 전략이 가장 교묘하게 뛰어난 국가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법의 조항이 아닌, 영국인들의 심리에 대한 이해가 더욱 중요하다. 영국인들은 귀족과 평민이 법적으로 평등한 신분제를 인정하고, 왕족들과 귀족들에게 사회적으로 부여된 의무를 이행한다면 그들의 권위를 인정했다. "그들은 자격이 있기에 우리와는 다르다."라는 주의인 것이다. 이런 개념 탓과 제2차 세계대전을 성공적으로 치러낸 핏줄의 엘리자베스 2세는 여전히 영국 대중들에게 절대적인 존재로 각인되어 있는 경우가 많고, 법적으로 보장받는 권한과 별개로 초월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80]

또한 영국 총리들의 중요한 정치적 업무 중 하나가 바로 여왕을 알현하여 보고서를 올리는 것인데, 이 역시도 에피소드가 많다. 첫 총리인 윈스턴 처칠은 친한 친구를 대하는 것처럼 시가를 피우면서 대담하는가 하면, 마거릿 대처가 왔을 때는 대처가 자신을 존경함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15분쯤 기다리게 했다. 포클랜드 전쟁 때 마거릿 대처의 전쟁 준비안을 승인한 뒤에 " 내 아들이 이번 전쟁에 참가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솔직히 내키지는 않았다. 그녀(대처 총리)가 너무 서두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말하지 않았다."라고 전했다. 자식을 전쟁터로 보내는 모든 어머니들의 마음을 잘 보여주는 장면. 야사 같은 이야기지만, 대처의 신자유주의 정책 등 정책 전반이 내키지가 않아 아침마다 "오늘은 그녀가 얼마나 내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했는가?"[81]라고 씹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래도 미운정이라고, 2013년 4월 17일 엄수된 대처의 장례식에 처칠 이후 처음으로 왕실 자격으로 참석했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처음으로 여왕을 알현했을 때 "총리직을 맡게 된 걸 축하하오. 그러고 보니 짐은 12명의 영국 총리를 만났구려."라고 말해 캐머런이 쑥쓰러운 웃음을 짓게 만들었다.

상술한 여군부대에 입대한 경력이 있기 때문에, 2009년에 열린 노르망디 상륙작전 65주년 기념식에서 니콜라 사르코지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 엘리자베스 2세를 초대하지 않아 여왕이 격노하고 국민적인 분노가 일어나는 등 외교적으로 큰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문서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노르망디에서 죽어나간 건 미군 영국군이었다. 거기에 당시 국가 원수 중 유일한 참전 용사이자 영국군의 총사령관인 엘리자베스 2세를 초대하지 않는 행위는 그야말로 큰 결례. 비난받는 가운데에도 사르코지는 정신 못 차리고 "여왕이 오는 건 환영하지만, 노르망디 기념식은 전통적으로 미국- 프랑스 간의 행사다"라는 발언을 해서 더욱 어그로를 끌었다. 당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중재해서 어쩌어찌 넘어가긴 했지만, 분이 풀리지 않았던건지 여왕은 자신이 가는 대신 장남 찰스 왕세자를 보냈다. 일단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의 집권기인 2014년의 D-Day 70주년 기념식에서는 참석했다. 2019년 75주년 기념식은 여왕이 고령인 점을 감안해, 영국-프랑스 간 합의를 통해 프랑스 영국에서 나눠서 시행했다. 엘리자베스 2세는 프랑스 쪽 행사에는 참여하지 않고 영국 쪽 행사에만 참석했다. 영국쪽 행사 프랑스 쪽 행사

이후 1992년에 발생한 윈저성 대화재의 복구사업에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갈 것이라 추산되어 국민들의 반발이 있자 스스로 왕실이 가진 면세 특권을 포기했다. 때문에 그 이후로 영국 왕실은 지금까지 계속 납세의 의무를 지고 있다. 왕권신수설이 횡행하던 시대나 입헌군주제를 시행하던 무렵과 이것을 비교하면 정말 엄청난 변화인 셈이다. 즉, '같은 국민이지만 직업이 왕인 것'이라고 직접 인정한 것이다.[82][83] 전통이 오래되긴 했어도 봉건적이라고 매도하기는 어렵다. 올리버 크롬웰에 의해 찰스 1세가 참수된 해는 효종 원년으로 유서 깊은 반역의 역사를 가진 나라. 게다가 프랑스 대혁명보다 훨씬 전에 있었던 일이다. 물론 "귀족 같은 것 없이 국가수반도 일반 대중에서 선출되는 민주공화국에 비교하면 구시대적"이라는 말은 부정할 수 없지만 말이다.

그러나 2017년 11월 여왕이 본인 사유 재산을 관리하는 랭커스터 공국을 통해서 일부 자산을 조세피난처에 투자했다는 사실이 파라다이스 페이퍼스 폭로로 밝혀지자, 그녀의 대인배라는 이미지에 타격이 가고 말았다. 랭커스터 공국은 "두 피난처 모두 영국의 해외 영토며 투자 자체는 불법이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

맏며느리였던 다이애나 스펜서와의 껄끄러운 관계 때문에 나라 안팎에서 여왕을 비난하는 여론이 종종 나왔고, 다이애나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직후 무관심하게 대응하자 급기야는 왕실 폐지를 주장하는 공화정 소리까지 터져나오기에 이르렀다.[84]

4. 주빌리

4.1. 재위 25주년, 실버 주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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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버 주빌리 공식 초상사진[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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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버 주빌리 공식 행사를 마치고 버킹엄 궁전 발코니에 선 왕실 가족들[86]
1977년 2월 6일, 재위 25주년(실버 주빌리)을 맞았다. 실버 주빌리 기념 행사가 열리는 것은 조지 5세 이후 영국 역사상 2번째 였다. 이때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나이가 불과 51세였기 때문에, 이후에 진행된 주빌리 행사들보다는 비교적 작은 규모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1935년 조지 5세의 실버 주빌리 이후 42년만에 열린 주빌리 행사여서 당시 축하 열기가 상당히 뜨거웠다고 한다.
실버 주빌리를 기념해 필립 공과 영국 내 36개 지역을 순회했다.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시작된 순회는 총 3개월 동안 이어졌으며, 이후 피지 통가를 시작으로 호주, 뉴질랜드, 파푸아뉴기니 영연방 왕국을 순방했다. 순방은 캐나다를 끝으로 마무리되었으며, 캐나다 순방에는 당시 왕세자였던 찰스 3세가 여왕 부부와 동행했다.

6월 7일에는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실버 주빌리 기념 예배가 열렸는데,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과 제임스 캘러헌 영국 총리, 에드워드 히스 전 영국 총리 등을 비롯한 전현직 국가 정상들이 참석했다. 기념 예배가 끝난 후에는 길드홀에서 런던 금융특구 시장이 주최하는 리셉션이 개최되었다. 리셉션에서 여왕은 실버 주빌리를 맞은 소감을 짧게 발표했다.
"내가 스물한 살 때, 나는 우리 백성을 위해 내 삶을 바치겠다고 맹세했고, 그 선언을 이행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비록 그 맹세는 내가 판단력이 미숙했던 어린 시절에 이루어졌지만, 나는 그 맹세를 한 마디도 후회하거나 철회한 적이 없습니다."
리셉션이 끝난 후에는 버킹엄 궁전까지 화려한 퍼레이드가 이어졌으며, 여왕은 1953년 대관식 때 사용했던 황금 마차를 탔다.[87]약 100만 명의 군중들이 왕족들이 발코니에 등장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이날 전세계에서 5억명이 넘는 사람들이 생방송으로 실버 주빌리 행사를 지켜봤으며, 실버 주빌리를 축하하기 위해 영국 전역에서 열린 파티만 4000개 이상이었다고 한다.

이틀 후인 6월 9일에는 여왕이 그리니치에서 램버스까지 템스 강을 따라 배로 이동하며 런던 지역을 순회했다. 순회 중 여왕은 실버 주빌리 기간에 맞춰 개장한 주빌리 워크웨이와 램버스의 주빌리 가든을 방문했다. 이날 저녁 화려한 불꽃놀이를 끝으로 실버 주빌리의 모든 공식 행사가 마무리되었다.

4.2. 재위 50주년, 골든 주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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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2세의 골든 주빌리 공식 초상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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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주빌리 공식 행사를 마치고 버킹엄 궁전 발코니에 선 왕실 가족들.[88]
2002년 2월 6일, 재위 50주년(골든 주빌리)을 맞았으며 10년 전인 1992년 재위 40주년을 기념한 루비 주빌리 행사 이후 10년만에 열리는 여왕 즉위 기념 행사였다. 반세기라는 상징적인 재위 기간을 달성한 만큼, 이전의 실버 주빌리나 루비 주빌리 행사보다 훨씬 큰 규모로 행사가 진행되었다. 다만 골든 주빌리를 맞은 2002년은 여왕의 여동생인 마거릿 공주와 어머니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이 한 달 간격으로 나란히 사망하면서 여왕 개인으로서는 사별의 아픔을 겪어야 했던 시간이기도 했다. 공주와 왕대비의 사망으로 행사가 축소되어 진행될 것이라는 예상이 있었지만, 행사 자체는 기존에 계획했던 스케일 그대로 진행되었다.

여왕은 2월 18일 자메이카 방문을 시작으로 골든 주빌리 기념 해외순방을 시작했다. 마거릿 공주의 장례를 치르고 단 9일만에 이루어진 방문이었으며, 여왕은 몬타고 베이와 킹스턴을 방문했고 자메이카 총리와 회담을 가졌다. 4일 뒤인 2월 22일에는 1953년 방문 이후 49년만에 뉴질랜드를 국빈 방문하여 헬렌 클라크 총리와 정상회담을 가졌고, 2월 27일 호주로 이동해 총독의 알현을 받고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퀸즐랜드를 잇따라 방문했다.

2002년 5월부터 7월까지, 골든 주빌리를 기념하여 영국 본토에서 2개월간 기념행사가 열렸다. 개막 하루 전인 4월 30일 여왕이 영국 의회에서 즉위 50주년 기념 연설을 통해 영국 시민들과 의회에 감사의 뜻을 표했으며, 토니 블레어 총리와 오찬을 가졌다. 6월 1일부터 6월 4일까지 버킹엄 궁전에서 골든 주빌리를 기념하는 대형 행사와 콘서트가 열렸으며 콘서트에는 폴 매카트니 브라이언 메이 로저 테일러, 에릭 클랩튼, 클리프 리차드, 토니 베넷이 게스트로 출연해 공연했다. 특히 브라이언 메이가 버킹엄 궁전 테라스에서 연주한 God Save the Queen[89]이 팬들 사이에서 유명하다.
브라이언 메이가 버킹엄 궁전 테라스에서 라이브로 연주한 <God Save the Queen>

6월 4일에는 성 바오로 대성당에서 즉위 50주년 기념 감사성찬례가 열렸으며 조지 캐리 켄터배리 대주교가 집전하였다.
여왕은 이 날 감사성찬례 후 버킹엄 궁전 앞 광장에서 50주년 기념 마차행진을 했으며 콩코드와 전투기가 고공행사를 했다. 고공행사가 진행될 때 여왕 내외를 비롯한 왕족들이 발코니로 나와 버킹엄 궁전 앞으로 몰려든 군중들을 맞이했는데, 사람들이 일제히 대관식 찬가 Land of Hope and Glory를 떼창하는 명장면이 연출되었다. 당시 환영 인파의 열기가 상당히 뜨거워 전투기 고공행사가 끝난 후에도 발코니로 다시 나와 군중들을 맞이해야 했다. 이 날 골든 주빌리 행진에는 70만명의 인파가 참석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7월 5일에도 버킹엄 궁전에서 다시 한 번 퍼레이드가 거행되었다. 2002년 영연방 경기대회는 여왕의 즉위 50주년을 맞아 성대하게 개최되었으며 7월 25일 여왕이 참석하여 개회 선언을 했다. 개막식에서는 여왕의 즉위 50주년을 축하하는 퍼포먼스가 연출되기도 하였다.

2002년 10월 4일부터 10월 15일까지 여왕은 골든 주빌리 기념으로 캐나다를 11일간 국빈방문하였다. 빅토리아, 벤쿠버, 토론토, 헤밀턴, 위니펙, 오타와, 석세스, 프레드릭턴, 훌 등 9개 도시를 방문하였고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 의회에서 기념 연설을 하고 캐나다의 문체부 장관이 총리를 대신해 참석하여 축하연설을 했다. 10월 13일에는 오타와에서 골든 주빌리 기념 행진이 열렸으며 여왕은 이 날 기념 행진 후 예배에 참석한 뒤 무명의 용사비에 헌화, 참배하였다. 영국에서는 골든 주빌리 기념 초상화를 따로 찍지 않았지만 캐나다에서 공식적으로 초상화를 촬영했다.

영연방 왕국이 아닌 곳에서도 여왕의 50주년 즉위 기념을 맞아 축전을 보내는 등 성대히 기념하였다. 특히 미국 뉴욕에서 기념 행사가 열리기도 했는데, 직전 해 있었던 9.11 테러 때 여왕이 추모예배에 직접 참석해 미국 국가를 부르고, 버킹엄 궁전 앞에서 근위병들이 미국 국가를 연주하며 추도식을 열어준 것 때문에 왕실에 대한 호의적인 여론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여왕은 2002년 한 해동안 골든 주빌리 기념 투어를 다니며 영연방 왕국 국가들을 찾아 기념식을 가졌고, 이에 대한 영국과 영연방 왕국 내의 여론도 좋아지면서 1997년 다이애나 왕세자비 작고 이후 왕실에 대한 긍정적인 여론이 매우 높아지기도 하였다. 사실 50주년 골든 주빌리 행사는 여왕에게 매우 중요한 연례행사였는데, 97년 다이애나가 사망한 이후 왕실 책임론이 부각되면서 2000년대 초반 당시에는 왕실에 대한 국내/외 여론이 꽤나 부정적이었던 시기였다. 특히 1999년에는 호주가 공화국 전환을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했다가 부결된 적이 있을만큼 영연방 왕국 사이에서 왕실 폐지 및 공화제 전환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던지라 여왕으로서는 영연방 왕국 내 여론을 잡는 일이 매우 중요했다. 다행히도 2002년 골든 주빌리 행사를 성공적으로 끝마치고 영국과 영연방 왕국 내 여론을 호의적으로 돌리는데 성공하면서 지지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성공적인 골든 주빌리 행사를 치룬 여왕은 2002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메세지를 발표하고 다시 한번 즉위 50주년을 축하해준데에 감사를 표하며 골든 주빌리 행사를 폐막했다.

4.3. 재위 60주년, 다이아몬드 주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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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2세의 다이아몬드 주빌리 공식 초상사진
2012년 2월 6일부로 재위 60주년(다이아몬드 주빌리)을 맞았는데 이는 고조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의 다이아몬드 주빌리가 거행된 1897년 이후 115년 만의 경사. 관련기사 여왕은 영국의 어려운 경제 상황과 공화주의자들의 반발을 고려해 가급적 기념행사의 규모를 축소해서 낭비를 줄이려고 하지만, 영국 정부에서는 2012 런던 올림픽 개최와 맞물려 관광객을 대거 유치할 수 있는 호기로 보고 각종 행사를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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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아몬드 주빌리 공식 행사를 마치고 버킹엄 궁전 발코니에 선 왕실 가족들.[90]
2월 3일, 100만 그루 나무 심기 캠페인에 참석해 첫 번째 나무를 심는 것으로 다이아몬드 주빌리를 시작했다. 2월 6일은 60주년 당일이지만 그와 동시에 부왕 조지 6세의 기일이기 때문에 행사가 간소하게 진행되었다. 이날 노퍽 주의 소도시 킹스린과 샌드링엄[91] 및 인근 학교를 방문한 여왕은 어린이와 시민들을 만나 축하를 받았으며, 즉위 60주년 대국민 메시지를 통해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데 다시 헌신하겠다"고 밝혔다. 런던 하이드 파크와 에든버러, 고스포트에서는 축포를 쏘았고,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여왕의 통치에 존경을 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2월 8일, 빅토리아 앨버트 미술관에서 여왕을 찍은 사진 1백 점이 4월 22일까지 전시된다. 2월 15일, 여왕과 필립 공이 참석한 가운데 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의 공관인 램버스 궁전에서 다종교 지도자들이 함께 한 즉위 60주년 기념 리셉션이 열렸다.

3월 10일, 임시공휴일로 지정된 6월 본행사를 앞두고 주빌리투어 일정을 시작했다. 이 여행은 오는 7월까지 와이트 섬, 버밍엄, 머서티드빌, 에든버러 등을 거칠 예정이라 알려졌다. 남편과 손자며느리 캐서린 왕세손비를 대동한 여왕이 제일 먼저 방문한 도시는 레스린으로, 이를 기념해 도시의 광장을 주빌리 스퀘어로 개칭하고 여왕이 참관한 가운데 명판 제막식을 가졌다. 여왕 일행은 드몽포르 대학에서 학생들이 연 패션쇼를 관람한 후 레스터 성당에서 열린 감사성찬례에도 참석했다. 3월 20일, 의회를 방문해 재위기간 동안의 감회를 밝히는 연설을 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 헌신을 지속하겠다는 의지와 더불어 영국적인 덕목으로 복원력, 창의력, 관용성 등을 예찬한 여왕은 영국군의 희생과 용기, 영연방 내 우호관계 증진 등을 강조했다. 이날 영국 의회는 여왕의 즉위 60주년을 기념해 의원들의 사비를 모아 1,500 조각의 유리로 왕실 문장을 나타낸 스테인드글라스를 웨스트민스터 홀에서 공개했다. 한편 왕세자 콘월 공작부인이 주빌리투어의 일환으로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을 순방하기 위해 이날 출국했다. 3월 23일, 영국/역사상 즉위 60주년을 맞은 국왕은 빅토리아 여왕과 엘리자베스 2세뿐이며 영국 국회의사당 서쪽에 빅토리아 타워가 있는 만큼 그동안 영국을 위해 헌신한 엘리자베스 2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빅 벤을 엘리자베스 타워로 개명하자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3월 24일, 주빌리 투어로 맨체스터를 찾은 여왕 부부가 한 서민 커플의 결혼식에 깜짝 참석해 부부와 하객 모두를 놀라게 했다. 평소 왕실의 열렬한 팬이었던 존 캐닝이 버킹엄 궁전에 청첩장을 보냈지만 당연히 거절되었는데, 마침 그의 결혼식 날 주빌리투어 공식 일정으로 맨체스터를 방문한 여왕 부부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는 결혼식장을 찾은 것. # #

4월 16일, 장녀 앤 공주가 주빌리투어 일정으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3일간 방문했다. 4월 19일, 다이아몬드 주빌리 행사의 시작을 축하하는 의미로 어린이 20만명이 그린 자화상이 여왕의 초상화와 함께 버킹엄 궁전 정면에 3일간 영사된다. 4월 26일, 3남 에드워드 왕자가 주빌리투어 일정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여기서 에드워드 왕자는 고조부 에드워드 7세가 152년 전 왕세자 시절에 방미해 2그루의 나무를 기념식수했던 필라델피아 지라드 칼리지(Girard College)를 찾았다.

5월 2일, 차남 앤드루 왕자가 주빌리투어 일정으로 인도를 이틀간 방문했다.

5월 10일, 17개국에서 온 550필의 말과 1,200명의 무용수들이 참가한 윈저호스쇼가 왕실의 성원하에 13일까지 개최되었다. 여왕 부부가 참석한 폐막식에는 스코틀랜드 출신 수잔 보일 호주의 유명 연예인 롤프 해리스[92] 공연이 있었다. 5월 14일, 마담 투소 박물관이 다이아몬드 주빌리를 기념해 새로 제작한 여왕과 필립 공의 밀랍 인형을 공개했다. 5월 17일, 1952년 즉위한 이래 현재까지의 여왕을 주제로 한 60점의 회화 작품이 선보이는 'The Queen: Art & Image'전이 영국 런던 국립초상화미술관에서 10월 21일까지 열리는데, 김동유 교수가 아시아 작가로는 유일하게 초대되었으며 다이애나비의 사진 1,106개로 여왕의 얼굴을 완성한 사진을 출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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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8일, 세계 각지의 군주국 왕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다이아몬드 주빌리 기념 점심 만찬이 윈저성에서 열렸고, 저녁에는 찰스 왕세자가 주최하는 만찬이 버킹엄 궁전에서 열렸다. 사진에 등장하는 왕족들은 다음과 같다.(왼쪽부터 오른쪽으로) 볼드체는 당시 촬영 시점 기준으로 현직 국가원수.
같은 날 버킹엄 궁전 앞에서는 바레인 국왕이 행사에 초청된 것을 규탄하는 인권단체들의 시위가 있었다. 그가 민주주의를 탄압하고 독재로 국민을 억압하기 때문이라고. 5월 19일, 다이아몬드 주빌리를 기념하는 군대의 열병식이 윈저에서 열렸다. 5월 21일, 찰스 왕세자 부부 주빌리 투어로 4일간 캐나다를 방문한다.

다이아몬드 주빌리의 본격적인 행사는 임시공휴일인 6월 2일부터 6월 5일까지 나흘간 열린다.( 관련기사) 이 기간 동안 들어가는 행사 비용은 세금을 포함해 1,200만 파운드(약 216억 원)가 소요될 것으로 추산된다. 영연방 15개국에서는 2,012개의 기념등을 밝히는 행사를 개최한다.

임시공휴일의 첫날인 6월 2일, 영국 최고 권위의 경마대회 '엡섬 더비(Epsom Derby)'가 개최되어 여왕과 왕실 가족이 관전했다. 엡섬 더비의 개막을 통해 나흘간의 다이아몬드 주빌리 행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대회에는 경마팬인 여왕의 경주마도 출전했다.

6월 3일, 왕실이 국민에게 점심을 무료로 제공하는 빅 런치가 열려 다이아몬드 주빌리 행사의 분위기를 돋구었으며 찰스 왕세자 부부도 런던 피카딜리 서커스를 방문해 시민들과 함께 축하했다. 이번 거리 파티를 위해 영국 주요 도시에서 9,500건의 거리 폐쇄 신청이 허가되었다. 또한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를 포함한 331명의 의원들이 영국 국회의사당의 빅 벤을 '엘리자베스 타워'로 개명하는 캠페인에 서명했는데, 1897년 빅토리아 여왕의 다이아몬드 주빌리를 기념해 의사당 건너편 광장의 타워를 '빅토리아 타워'로 개명한 전례를 따랐다고. 템스강에서는 여왕 부부와 왕실 가족이 첼시 부두에서 로열 바지선 스피릿 오브 차트웰 호에 승선한 가운데 대규모 수상 퍼레이드가 열렸다. # # 스피릿 오브 차트웰 호는 해군 함정과 영연방 53개국에서 온 선박 및 9백여 척의 민간 선박 등 도합 1천여 척의 호위선을 거느리고 템스강 서쪽 배터씨 브리지에서 출발해 동쪽 타워 브리지까지 11km 구간을 90분간 항행했으며, 비가 오는 날씨에도 150만 명의 군중이 강변과 다리에 운집해 350년 만에 최대 규모로 수상 퍼레이드가 거행되었는데, 왕실 가족이 외부에 장시간 노출되기 때문에 경호선 190척과 경찰 5,500명이 현장에 투입되었다. 한편 영국의 소도시 글로스터에서 중세부터 이어진 관례에 따라 자기 고장의 전통음식인 칠성장어 파이를 2002년 골든 주빌리(즉위 50주년) 때와 마찬가지로 여왕에게 선물로 보냈는데, 글로스터산 칠성장어가 급감하면서 미국와 캐나다의 오대호에서 수입한 칠성장어로 파이를 만들어 논란이 벌어졌다.

6월 4일, 여왕의 부군인 필립 공이 전날 있었던 수상 퍼레이드 참석 후유증으로 급성 방광염 증세를 보여 런던 킹 에드워드 7세 병원에 입원했다. 비가 오는 날씨에 2시간 가까이 선 채로 있었던 것이 원인으로 보이며, 당국은 이로 인해 다이아몬드 주빌리 콘서트를 비롯해 5일에 열리는 세인트 폴 대성당 기념 감사성찬례와 거리행진에 필립 공은 불참하지만, 여왕은 공식 일정을 그대로 소화할 예정이라 밝혔다. 버킹엄 궁전 앞에서 로비 윌리엄스, 윌아이엠, 제시 제이, JLS, 게리 발로우, 셰릴 콜, 클리프 리처드, 랑랑, 알피 보, 줄스 홀랜드, 루비 터너, 그레이스 존스, 에드 시런, 애니 레녹스, 르네 플레밍, 톰 존스, 셜리 배시, 카일리 미노그, 엘튼 존, 스티비 원더, 매드니스, 폴 매카트니 등이 공연한 대규모 야외 콘서트가 성황리에 열렸다. 한편 영국 전역과 영연방 국가를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4,180개의 횃불을 밝히는 행사가 열렸다. 횃불 점화는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40주년과 60주년 때의 행사를 재연한 것으로 오후 10시에 첫 점화가 시작되어 버킹엄 궁전 앞에서 열린 다이아몬드 주빌리 콘서트에 참석한 여왕이 마지막 횃불을 점화히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6월 5일,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2천의 인사가 함께 한 기념 감사성찬례를 마친 여왕과 왕실 가족은 근위대와 기마대, 군악대의 호위를 받으며 영국 국회의사당에서 버킹엄 궁전까지 마차로 행진했으며, 트라팔가 광장부터 궁전 앞의 더 몰(The Mall)까지 모인 군중은 약 150만으로 추산되었다. 이밖에도 길드홀에서의 리셉션과 웨스트민스터 홀에서의 점심 만찬이 있었다. 나흘간 이어진 다이아몬드 주빌리 행사는 여왕이 버킹엄 궁전 발코니에서 축제 기간 동안 아낌없는 환호와 축하를 보내준 군중들에 대한 답례를 하고 영국 공군기가 궁전 상공에서 공중 분열식을 펼치는 것으로 대단원을 막을 내렸다. 관련기사 이 날 여왕은 영국과 영연방 국가에 방영된 대국민 연설에서 '나를 겸허하게 만든 경험'이었다며 국민에게 감사를 표했다. 여왕이 대국민 연설을 한 것은 1997년 다이애나비의 교통사고 사망 이후 15년 만이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백악관 홈페이지에 올린 동영상 메시지를 통해 '미영 양국은 오랜 기간 특별한 관계 속에서 역경도 있었지만 항상 동맹을 유지했으며, 여왕은 이 역사의 살아있는 증인'이라고 축하했다. 관련기사

6월 26일, 엘리자베스 2세와 필립 공이 주빌리투어 일정으로 북아일랜드 이틀 동안 방문했다.

9월 11일, 윌리엄 왕세손 캐서린 왕세손비가 주빌리투어 일정으로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솔로몬 제도, 오스트레일리아 등 동남아시아와 남태평양 국가를 10일간 방문했다.

11월 4일, 찰스 왕세자 카밀라 파커 보울스가 주빌리투어 일정으로 파푸아뉴기니,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 오세아니아의 영연방 국가를 13일간 방문했다.

4.4. 재위 70주년, 플래티넘 주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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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티넘 주빌리를 맞아 공개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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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티넘 주빌리 공식 행사를 마치고 버킹엄 궁전 발코니에 선 왕실 가족들.[103][104]

영국 국왕으로서 사상 최초, 유럽의 군주로서도 역사상 3번째[105]로 2022년 2월 6일 달성.[106] 또한 당해 년도 생일을 넘어 96세가 되었고 5달 더 살았다. 플래티넘 주빌리 기념 행사는 2022년 6월 2 ~ 5일에 개최할 것이라고 영국 정부가 밝혔다. 해당 기간은 임시 공휴일로 지정된다. # 전날 5일 샌드링엄 별장에서 지역 봉사단체 대표들, 연금 생활자, 여성단체 회원 등을 만났다. #

해당 행사의 1년여 전인 2021년 4월 9일, 남편인 에든버러 공작 필립이 세상을 떠나면서 부군이 없는 행사를 치렀다. 일각에서는 2022년에 찰스 왕세자에게 양위는 아니더라도 공식적으로 섭정을 맡기지 않을까 하는 예상도 나왔다. 하지만 여왕은 96세가 된 당시까지도 큰 병치레 없이 건강을 유지하며 장수하고 있었고, 만일 생전에 물러날 시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등 주요 영연방 국가들의 연방 탈퇴 및 분열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판단하여 끝까지 왕위를 지켰다.[107] 특히, 백부인 에드워드 8세의 사례를 어린 시절 직접 겪었던 여왕[108]은 양위 혹은 생전 퇴위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일찍부터 드러내 건강상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 한 양위나 생전 퇴위는 하지 않을 것으로 예측되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6월 2일(대한민국 시간)에 여왕 생일 퍼레이드가 버킹엄 궁전에서 열렸다. 말 1마리가 기수의 말을 듣지 않고 나대다가 퇴장하는 사고는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원활하게 진행되었다. 물론 여왕은 건강상의 이유로 전체 행사를 소화하지 못하였다.



여왕의 플래티넘 주빌리에 으레 있던 마차 행렬을 홀로그램으로 대체해 화제가 되었다. 해당 금장 마차의 승차감이 상당히 불편하다는 것을 언급한 바 있는 여왕이 건강을 이유로 더 이상 마차에 승차하지 않게 되었고, 이를 홀로그램으로 대체한 것이다. 행렬을 지켜보며 흥미롭다는 듯 손짓하는 찰스 왕세자와 앤 공주의 반응이 인상적이다.



플래티넘 주빌리 기념 영상으로 패딩턴 베어와 함께 등장했는데, 꽤나 화제가 된 영상이다. 패딩턴 베어가 상징이기도 한 마멀레이드 잼 샌드위치를 꺼내주자 엘리자베스 2세가 자신의 검정 로버 백에서 능청스럽게 "나에게도 마멀레이드 잼 샌드위치가 있다"며 꺼내주는 장면이 인상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109] 여왕에게 모든 것을 감사한다는 말을 하는 패딩턴 베어와, “친절도 하셔라.“로 화답하는 여왕, 그리고 궁전 밖에서 울려 퍼지는 비트를 티 스푼으로 따라하는 모습까지 엘리자베스 2세 본인, 패딩턴 베어, 밴드 퀸, 홍차 영국 소프트파워의 저력을 보여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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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4일, 버킹엄 궁전에서 플래티넘 주빌리 콘서트가 열렸다.

만약, 2024년 5월 27일까지 여왕이 생존한다면, 프랑스 루이 14세를 제치고 전 세계[110]에서 가장 오래 재위한 국왕이 될 예정이었지만, 엘리자베스 2세가 해당 행사를 치르고 나서 석달 후인 2022년 9월 8일 사망함으로써 이 기록은 결국 깨지 못했다.[111]

후에 알려진 바에 따르면, 당시 여왕은 이미 건강이 상당히 악화된 상황이어서 휠체어를 타야했으나, 엘리자베스 2세가 "국민들에게 짐이 휠체어를 타고 있는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다"고 완강히 거절해 지팡이를 짚고 일어서 있을 수 있도록 군대식 훈련을 했다고 한다. 윈저 성에서 버킹엄 궁전까지는 헬기 안에 있는 휠체어를 탑승해 이동했으며, 버킹엄 궁전 헬기장에 도착한 후에는 찰스 왕세자 카밀라, 윌리엄 왕세손의 부축을 받으며 발코니까지 올라갔다.[112] 결국 플래티넘 주빌리 행사에 지팡이를 짚고 무사히 발코니에 서있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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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건물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폭격으로 파괴되어 더이상 남아있지 않으며, 현재는 중국 식당이 들어서 있다. # [2]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역시 어린 시절 가정 교사에게 교육을 받은 것이 전부였고, 상류층 여성은 가정 교사에게만 교육을 받아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3] 이튼을 출입하면서 공부했다고 하는데, 이튼은 예나 지금이나 남학교로 뭇 남학생들의 주목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4] 당시 어머니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은 바쁜 공무로 인해 자녀들의 교육에 신경을 쏟을 여유가 없었다. [5] 맥도날드 부인은 엘리자베스가 즉위한 후에도 의상 담당자로 계속 일했으며, 나이가 들어 은퇴한 후에도 1993년에 사망할 때까지 버킹엄 궁전에 계속 살았다. 궁전의 스위트룸을 배정 받아 생활했다. [6]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엘리자베스는 필립 공과 결혼하는데 성공해 73년의 세월 동안 해로했지만, 마거릿 공주는 첫사랑이었던 피터 타운젠드 대령과 결혼하는데 실패했다. [7] 조지 6세와 엘리자베스 왕비는 낮에는 버킹엄 궁전에 가서 공무를 수행했으며, 밤에 윈저 성으로 돌아와 공주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8] 이중에서는 엘리자베스 2세의 결혼 상대로 거론되었던 7대 카나본 백작 헨리 허버트도 있었다. [9] Auxiliary Territorial Service,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 육군 여군부대. [10] 당시 영국군 계급과 약간 차이가 있다. [11] 당시에는 영연방 왕국으로 조지 6세가 국가원수였다. 1960년에 인종분리를 본격적으로 추진한 백인정권의 국민투표로 1961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전환. [12] 숙모 마리나 공주의 사촌 동생이었다. [13] 아버지 그리스와 덴마크의 안드레아스는 요르요스 1세의 4남이다. [14] 당시 그리스 왕국은 필리포스 왕자의 사촌 형인 파블로스가 재위 중이었는데, 저 시점에서는 독일군이 쳐들어와 나라 전체가 쑥대밭이 된 상태였고, 종전 이후에는 그리스 내전이 터지면서 혼란이 끊이지 않았다. [15] 필립의 누나들은 모두 독일의 왕공족들과 결혼했는데 일부는 나치당원, 독일군 장교이기도 했다. [16] 웃기는 건 앵글로 색슨족만 봐도 알겠지만 영국인들의 기원도 결국 게르만족의 한 분파라는 것이다. 이건 오래전 일이라 그렇다 쳐도 영국 왕실도 원래 독일계인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였지만, 제1차 세계 대전 때 반독일감정을 의식한 조지 5세에 의해 윈저 왕조로 개명했다. [17] 이러한 배경이 있어서 필립 공은 훗날 맏며느리였던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남편이자 필립 공의 아들인 찰스 3세의 불륜 행각에 괴로워할 때 왕실 내에서 거의 유일하다시피 다이애나를 이해해주고 위로해줬다고 한다. [18] 이 때 착용한 프린지 티아라는 수 십년 후 손녀인 베아트리스 공주의 결혼식 때도 사용된다. [19] 물론 쿠폰으로 값비싼 웨딩 드레스를 마련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을 것이다. [20] 하지만 배급 쿠폰을 거래하는 것은 불법이었기 때문에 왕실에서 다시 되돌려주었다. [21] 엘리자베스 2세가 생전 아버지의 사망과 갑작스러운 즉위에 대해 언급한 거의 유일한 공개 발언이었다. [22]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으며 '엘리자베스 2세와 에든버러 공작이 여기서 묵는 동안 왕위를 계승했다'는 문구가 적힌 안내판도 걸려있다. [23] 엘리자베스 1세 사후 약 348년 만에 '엘리자베스'가 왕호로 쓰였다. [24] 빅토리아 여왕 사후 약 51년만에 즉위한 여왕이었다. [25] 엘리자베스 2세는 대관식을 최초로 생중계하고, 라디오 방송으로 진행되던 성탄 연설을 텔레비전 방송으로 바꾸며 미디어를 가장 잘 활용한 군주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의외로 재위 초기에는 텔레비전을 싫어했다고 한다. 여왕은 조용한 삶을 원했기 때문에 자신의 얼굴과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생중계 되는 것을 어색하게 여겼다고 한다. [26] 윗줄 왼쪽부터 삼촌 글로스터 공작 헨리 왕자, 남편 필립 공, 사촌동생 켄트 공작 에드워드 공자
아랫줄 왼쪽부터 사촌동생 켄트의 알렉산드라 공녀, 사촌동생 켄트의 공자 마이클, 숙모 켄트 공작부인 마리나, 동생 마거릿 공주, 엘리자베스 2세, 어머니 엘리자베스 왕대비, 고모 프린세스 로열 메리, 숙모 글로스터 공작부인 앨리스, 사촌동생 글로스터의 공자 윌리엄, 사촌동생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 공자
[27] 흑백으로 중계되었으며, 기록 영화 제작을 위해 컬러 버전이 따로 촬영되었다. [28] 다만 성유 도유 성체성사는 중계되지 못했으며, 클로즈업을 금지한다는 조건을 걸어 멀리서 촬영된 모습만 전파를 탔다. 해당 의식은 하느님과의 교감을 갖는 신성한 의식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29] 한편, 일트린참 경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 여왕은 일트린참을 궁전으로 불러들여 직접 독대하며 왕실이 변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되는지 자문을 구했다고 한다. 이때 일트린참은 몇가지 건의 사항을 여왕에게 전했는데, 훗날 이것들이 모두 실현되었다고 한다. [30] 왕실 측에서도 이런 비판을 의식했는지 1977년 이후로 방영을 한 번도 허가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2001년에 인터넷을 통해 방영분이 유출되었으며, 현재는 유튜브를 통해 시청할 수 있다. [31] 맏아들인 찰스 왕세자도 7년 전인 1992년에 노태우 대통령의 공식 초청으로 방한한 적이 있다. [32] 국보 제 15호 [33] 풍산 류씨 문중의 고택 '충효당' [34] 나뭇가지에 갖가지 동물 형상의 떡을 주렁주렁 매달아 놓은 전통음식. 궁중이나 지체 높은 양반가에서도 회갑이나 칠순 등 특별한 날에나 겨우 볼 수 있었던 진귀한 음식이다. [35] 실제로 여왕의 생일 파티에 여러 차례 사과가 보내졌으며, 사과를 전달받은 여왕이 답장을 보내기도 했다. 안동 농협 측에서는 로얄 워런트 인증까지 추진했으나 여왕이 사망하면서 무산되었다. [36] 당시는 쌍용이 대우의 자회사였어서 3분할 그릴을 단 대우 체어맨이었다. 당시 대우의 워딩 연구소가 영국에 있었던 것도 영향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이 때는 에쿠스가 데뷔하기 4일 전이어서 그 정도 길이를 가진 차가 체어맨(리무진)밖에 없기도 했다. [37] 당시 현대자동차에서 가장 큰 차는 다이너스티였다. 에쿠스는 여왕이 방문한 뒤 4일 뒤에 시판된다. [38] 국왕은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사람에게 고개를 숙일 수 없기 때문에, 사실 이는 왕실예법에 어긋나는 행종이다. [39] 하지만 2018년에 턴불은 퇴임했고, 후임 총리 스콧 모리슨은 본인이 근왕파임을 밝혀 일단은 식은 떡밥 로그인 필요인 줄…알았으나, 다시 불이 붙었다. [40] 앨버니지 내각에는 공화제 담당 차관이 아예 따로 있다. 3년 간 여론전을 펼친 뒤, 2025년에도 노동당이 재집권한다면 그 때 공화제 국민투표를 다시 밀어붙이려는 것으로 보인다. [41] 영연방 각국 국민들에게 인기가 없는 찰스 왕세자가 왕이 될 경우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가 영연방 왕국에서 이탈할 수도 있다는 예측도 나오고 있다. [42] 1999년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초청으로 여왕이 한국에 내한했다. [43] 이미 두 사람은 재혼 전인 2003년부터 클래런스 하우스에서 동거하고 있었다. [44] 이 투표는 2014년 9월 19일 부결되어, 대브리튼 연합왕국에서 탈퇴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자세한 내용은 스코틀랜드 분리독립 투표 참고. [45] 크레이그에 따르면, 개막식 연출을 맡은 대니 보일 감독이 이미 왕실의 허락을 받고 자신을 찾아온 거라서 거절을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46] 마침 런던 올림픽이 열린 2012년은 007 시리즈 50주년이기도 했고, 기념작인 007 스카이폴이 개봉을 앞두고 있기도 했다. [47] 모친인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왕대비, 첫째 며느리 다이애나 비와 동일한 수준이다. 대처 본인이 "장례를 조촐하게 치러달라."라는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48] 이 주장을 한 Paul Burrell은 다이애나 스펜서 집사를 맡았던 사람이다. [49] 건강이 악화되어 보행이 불편했던지라 지팡이를 짚고 나왔다. [50] 양위는 생존을 전제로 한 표현이다. 즉 여왕의 건강에 대해서 대중적으로는 심각한 우려가 없는 편이었다. [51] 괜한 논란인 것이, 당시 95세였던 엘리자베스 2세의 나이를 생각하면 아무리 건강해도 컨디션에 따라서 관절이 쑤실 때인데, 지팡이를 짚는다고 이상할 것이 전혀 없다. 특히나 무릎 수술 이후로 18년 만에 처음으로 지팡이를 짚는다는 것은 그 동안 얼마나 건강 관리가 잘 되었는지, 신체에 큰 이상이 없었는지를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다. [52] 여담이지만 그녀보다 14세 연하인 덴마크 마르그레테 2세는 보행 보조기의 도움을 받아 보행하고 있다. [53] 이 지점을 통해 여왕이 일평생 음주를 즐겼다는 점을 추정할 수 있다. [54] 부왕 조지 6세는 흡연자로 잘 알려져 있지만, 모후 퀸 마더는 음주가무로 유명했다. [55] 현지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할아버지( 필립 마운트배튼 공)께서 작고하기 전 작별인사를 하지 못한 것에 죄책감을 느낀다"며 "사랑하는 할머니(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게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결코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56] 1992년은 찰스 왕세자의 불륜 폭로가 담긴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회고록 출간과 함께 이어진 찰스 왕세자 부부의 별거, 앤 공주 마크 필립스의 이혼, 사라 퍼거슨 앤드루 왕자의 불륜설과 별거, 그리고 윈저성 화재사건 등 각종 스캔들이 연이어 터지면서 여왕에게는 재위 중 가장 최악의 한 해였다. [57] 2021년은 왕실을 탈퇴한 서식스 공작 해리 왕자 메건 마클의 인터뷰가 방송되면서 1996년 BBC 파노라마 프로그램의 다이애나 비 폭로 인터뷰 사건 이후 영국 왕실이 또 다시 큰 스캔들에 휩싸인 데다가, 앤드루 왕자가 성폭행 혐의로 고소당하는 일이 있었다. 거기에다가 4월에는 여왕의 정신적 버팀목이었던 남편 필립 마운트배튼 공이 사망했다. [58] 그러나 해당 크리스마스 연설은 엘리자베스 2세의 생전 마지막 크리스마스 연설이 되고 말았다. [59] 대면 업무를 수행하더라도 대규모 행사나 업무는 수행하지 않았으며, 비교적 적은 사람을 만나는 소규모의 행사와 업무만을 수행중이었다. [60] 실제로 여왕의 어머니인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도, 작은딸 마거릿 공주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것에 충격을 받아 신경이 쇠약해진 후, 일상적인 업무 수행이 가능한 가벼운 정도의 감기 증상을 보이다 사망한 바 있다. 즉, 여왕의 나이를 고려했을 때, 아무리 경미한 증상을 보이고 있다 하더라도 고위험군인 점을 고려해 절대로 안심할 단계는 아닌 것이다. [61] 실제로 불과 1~2년 전 모습과 비교했을 때, 남편 필립 공의 사망을 기점으로 눈에 띄게 야윈 모습을 볼 수 있다. [62] 샌드링엄을 비롯한 왕실 사유지 중 한 곳. [63] 그렇다고 잡슨 씨가 선위 내지는 역적모의를 한 것은 결코 아니다. 영국 왕위계승법에 따르면, 국왕이 해외순방이나 건강상의 문제로 인해 공무 수행이 불가능할 경우, 왕실법에 따라 정한 공식 섭정에게 국왕의 역할을 대신 맡길 수 있다. 21세 이상 왕위계승권을 갖고 있거나 국왕이나 왕세자의 배우자 중 4명을 선정할 수 있다. [64] '의 상하원 의원들(My Lords and members of House of Commons)은 그대로 읊으면서 본문에서는 ' 여왕 폐하의 정부' 등 3인칭 표현을 사용하는 이색적인 모습이 연출되었다. [65] 엘리자베스 2세의 이름을 따 만들어진 노선이다. [66] 번역: 여왕의 주치의들은 오늘 아침 추가적인 진단을 한 후 여왕의 건강을 우려했으며, 여왕이 의료적인 감독하에 있을 것을 권고했습니다. [67] 아내 캐서린 미들턴은 첫 등교를 하는 아이들을 위해 윈저에 남았다. [68] 나중에 알려진 바로는 해리 왕자는 여왕이 사망한 이후 출발한 것으로 밝혀졌다. [69] 다만 스코틀랜드로 향하는 것인지는 불확실하다고 한다. [70] 영국 내의 전문가들도 다른 문제로 가벼운 수술을 받았을 수도 있고 이 기동성 장애가 있음이 알려져 있기에 이것이 문제일 수도 있다고 한다. [71] 당장 바로 직전에 사망한 왕실 가족인 필립 마운트배튼도 공식적으로 사망 발표가 나기 이전까지, 건강 이상에 대한 특집 방송이 진행된 적은 없었다. [72] 왕실 전기 작가 로버트 하드먼(Robert Hardman, Queen of Our Times.'의 작가)은 BBC 5에서 진행된 생방송에서 오늘 소식이 여왕의 중요성을 상기시킨다고 하며 "그녀는 이 연속성, 이 영구적인 감각 그리고 안정성을 상징한다."라고 전했다. 확실히 영국이라는 국가에 있어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존재는 국가원수, 그리고 전통적 가치 그 이상임이 확인되었다. [73] 애버딘 공항 도착이 3시 50분이었다고 한다. 밸모럴 도착 시각은 5시 넘어서. [74] 오죽하면 본인이 가장 높게 평가하고 친했던 해럴드 윌슨 총리 장례식에도 참가하지 않았다. 윈스턴 처칠 이후 최초로 퇴임직전 다우닝가에서 여왕이 송별연 참가했을 정도로 각별한 사이임에도 [75] 그러나 1963년 해럴드 맥밀런의 후임으로 귀족 출신인 알렉 더글러스흄을 총리로 임명한 것을 두고 논란이 일어나자 여왕은 이 권한을 포기했다. 이후에는 총리가 사퇴하는 일이 생기면 정당 내부에서 다시 전당대회를 치러 새 총리를 지명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76] 본인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결국 브렉시트 직전에 했다고 알려진 발언이 막판에 탈퇴파들에게 "여왕 폐하께서도 탈퇴를 지지하신다."라고 주장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했다. [77] 영국 국왕은 재가 거부를 통해 이미 의회에서 통과된 법을 거부할 수 있지만 1708년 이후 그런 사례는 없다. [78] "연어를 들고 있는 모습이 수상하면 불법"이라는 그 법 맞다. 연어 항목 참조. [79] 1973년 정부를 압박해 재산 투명성 법안에서 국가원수를 예외로 하는 조항을 포함시켜 재산 공개를 회피하였다는 보도 국립공원, 도로안전, 토지 임대 관련 법안 수정을 요구했다는 보도 [80]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의 군대를 전부 움직일 수 있는 막강한 군통수권도 보유하고 있다. [81] 여왕의 우려대로 노동계층 지역이었던 리버풀은 대처 총리 시절 심각한 경제난을 겪어야 해서 주민들이 대처를 증오했고, 실제로도 대처가 사망했을 당시에도 "마녀가 죽었다"며 기뻐하고 조소하였다. [82] 영국 신분제는 참 복잡한데, 일단 왕족ㆍ귀족에게 제도상 특권은 없다. 있는 거라면 귀족의 경우 전통적으로 군인이었으므로 사관학교 특례입학이 가능하다는 정도. 귀족원과 서민원이 따로 있고 그 권한을 마치 미국의 상원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서민원의 의견을 거부할 수 없다. 간단하게 전통이라 없애지 않고 남겨두는 거라 귄한이 없다. 게다가 최근 수십 년 동안 비왕족귀족 작위는 수여된 적도 없다. 오히려 대가 끊기는 귀족가들이 나온다. 소설이나 역사책에 나오는 근대 왕국ㆍ제국 같은 느낌으로 아는 사람들이 있는데 전혀 아니다. 그냥 소선거구제 기반 의원내각제국가다. 국왕한테 허락을 맡네 마네 하는데 국왕이 의회에서 통과된 안건을 거부한 적이 없다. 거부하면 괜시리 긁어 부스럼이고, 국왕의 권한은 그냥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고 사석이나 사적으로 말하면 그게 국왕이라서 큰 영향력을 가지는 게 전부다. 그마저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83] 그러나 상술한 브렉시트 토론 건을 보면 나서야 될 땐 나섰던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여왕 본인이 국정에 대한 토론을 회피하지 않았던 것은 여러 증언을 통해 검증된다. [84] 그런데 다이애나 스펜서에 대한 냉담한 반응은 여왕 본인의 의사보다는 어머니 엘리자베스 왕대비의 요구를 따랐다는 말이 있다. 왕대비는 심프슨 부인과의 험악했던 관계 때문에 이혼녀를 매우 싫어했고, 이 때문에 찰스와 이혼한 다이애나를 탐탁치 않게 봤기 때문이다. 왕대비는 왕실 가족들에게 장례식에 참석하지 말 것을 주문했지만, 토니 블레어 총리의 강력한 설득으로 결국 왕대비와 여왕이 모두 장례식에 참석했다. [85] 1953년 대관식 초상화를 제외하면 거의 유일하게 제국관을 착용하고 촬영한 초상사진이다. [86] 맨 왼쪽부터 찰스 3세, 에드워드 왕자, 앤 공주, 루이 마운트배튼 백작, 마크 필립스, 엘리자베스 2세, 필립 공, 마거릿 공주, 앤드루 왕자, 엘리자베스 왕대비 [87] 이 황금 마차는 이후 재위 50주년 골든 주빌리와 재위 70주년 플래티넘 주빌리 퍼레이드에도 사용되었다. 다만 플래티넘 주빌리 당시에는 여왕이 건강상의 이유로 퍼레이드에 참석하지 않아 홀로그램으로 대체했다. # [88] 왼쪽부터 찰스 왕세자, 해리 왕자, 윌리엄 왕세손, 에든버러 공작부인, 에드워드 왕자, 피터 필립스, 엘리자베스 2세, 필립 공, 앤 공주, 티모시 로런스, 앤드루 왕자, 유지니 공주, 베아트리스 공주 [89] 참고로, 퀸은 모든 콘서트를 항상 God Save the Queen으로 마무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다만, 아일랜드에서는 하지 않는다. 그랬다가는 테러당하기 딱 좋기 때문. [90] 맨 왼쪽부터 카밀라 파커 보울스, 찰스 왕세자, 엘리자베스 2세, 윌리엄 왕세손, 캐서린 왕세손비, 해리 왕자 [91] 샌드링엄은 번잡한 런던에서 떨어진 여왕 소유의 별궁과 드넓은 사냥터 및 삼림 부지가 혼자한 대규모 영지로, 여왕과 왕실의 오랜 휴식처이기도 했다. [92] 소름끼치게도 공연 몇 달 후 지미 새빌이 발단이 된 연예계의 아동성범죄자 색출 프로젝트 유트리 작전에서 자기 딸 친구를 성폭행한 혐의로 유죄가 입증되어 징역을 살게 된다. 현재는 Sad satan 미야자키 츠토무 지미 새빌 같은 인간들과 함께 나올 정도로 아동성애자의 아이콘이 된 상태이다. [93] 뷔르템베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2세 오이겐을 기준으로 12촌 [94] 빅토리아 여왕, 크리스티안 9세를 기준으로 8촌 [95] 182cm. 여성임에도 이 세계 각국의 왕족들 중에서조차 수위권으로 키가 크다. [96] 빅토리아 여왕, 크리스티안 9세를 기준으로 8촌 [97] 빅토리아 여왕, 크리스티안 9세를 기준으로 8촌 [98] 빅토리아 여왕을 기준으로 8촌 [99] 크리스티안 9세를 기준으로 9촌 [100] 크리스티안 9세를 기준으로 8촌 [101] 에드워드 7세를 기준으로 6촌 [102] 빅토리아 여왕, 크리스티안 9세를 기준으로 9촌 [103] 맨 왼쪽부터 콘월 공작부인, 찰스 왕세자, 엘리자베스 2세, 조지 왕자, 윌리엄 완새손, 샬럿 공주, 루이 왕자, 캐서린 왕세손비 [104] 엘리자베스 2세가 생전 버킹엄 궁전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 날이 마지막이었다. [105] 프랑스 루이 14세의 72년 재위가 첫 번째, 리히텐슈타인 요한 2세의 70년 재위가 2번째이다. [106] 대한민국 시각으로 2022년 2월 6일 16시 30분, 영국 시각으로는 같은 날 7시 30분. 이는 아버지 조지 6세가 1952년 2월 6일 영국 시간 7시 30분에 영국 노퍽 샌드링엄 별장의 침실에서 수면 중에 사망한 채로 발견된 시점으로부터 셈한 것이다. 영국 국왕 자리는 선대 국왕이 사망한 그 순간부터 1순위 계승자가 이어받은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 대관식이나 영국 총리의 즉위선언 같은 건 필요하지 않다. [107] 아들 다이애나 비 관련 잘못된 처신들로 인해 스스로의 평가를 엄청나게 깎아먹은데다가, 대영제국이 무너진 이후에 태어났기에 애초부터 어머니와 같은 카리스마를 가질 수 없는 위치이다. [108] 이로 인해 왕위를 반강제로 떠맡은 부왕이 건강을 크게 해쳐, 60살도 살지 못했다. [109] 여왕이 70년의 재위기간 동안 핸드백에서 무언가를 꺼내주는 모습을 대중에게 공개한 유일한 케이스이다. [110] 공식적으로 정확하게 즉위한 날짜가 기록되어 있는, 주권 국가의 국왕 한정이다. 기록의 신뢰성을 따지지 않는다면 고대에 더 오래 즉위했다고 추정되는 인물들은 더 있지만, 신빙성이 담보가 되지 않는다. 당시엔 부풀리기나 과장이 흔했기 때문. 당장 일본의 신화 시대 천황들은 비정상적으로 즉위기간이 길고, 100년 넘게 살았다는 천황도 여럿 기록되었지만 신뢰받지 못한다. 한국만 해도 태조대왕이나 수로왕도 오래 즉위했지만, 거의 천년도 전의 인물들이라 정확한 즉위 날짜가 기록되어 있지 않아 여기선 빠졌다. [111] 다만 루이 14세는 5살에 즉위하여 23살까지는 섭정을 두어 왕권을 직접 행사하지 못했지만, 엘리자베스 2세는 즉위 당시부터 성인이었으므로 70년 내내 본인이 직접 왕권을 행사했다. 전세계 국가 지도자로 범위를 확장시켜 봤을 때 에스와티니 소부자 2세가 80년 이상 재위하며 1위이지만, 그 역시 루이 14세와 마찬가지로 섭정 기간을 제외하면 엘리자베스의 70년보다 적다. 즉 가장 오랫동안 왕의 권한을 지니고 행사한 군주는 엘리자베스다. [112] 아들과 손자의 부축을 받는 모습이 외부에 공개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