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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럴드 윌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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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시는 대수를 건너뛰어 중임한 횟수를 의미한다.
보수당 당수 · 자유민주당 당수 · 스코틀랜드 국민당 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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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G OBE PC FRS FSS
파일:harold_wilson_portrait.jpg
<colbgcolor=#01013A><colcolor=#FFC224>본명 제임스 해럴드 윌슨
James Harold Wilson
출생 1916년 3월 11일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요크셔 주 허더즈필드
사망 1995년 5월 24일 (향년 79세)
영국 런던 램버스
재임기간 제67대 총리
1964년 10월 16일 ~ 1970년 6월 19일
제69대 총리
1974년 3월 4일 ~ 1976년 4월 5일
서명 파일:해럴드 윌슨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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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1013a><colcolor=#ffc224>작위 리보우의 윌슨 남작[1]
상훈 대영제국 훈장 4등급 (1945)
가터 훈장 (1976)
부모 아버지 허버트 윌슨
어머니 에셀 윌슨
배우자 메리 윌슨
자녀 로빈 윌슨
길스 윌슨
학력 위럴 그래머 스쿨 (졸업)
옥스퍼드 대학교, 지저스 칼리지 ( PPE / B.A)
종교 기독교 ( 개신교, 회중교회)
정당
의원 선수 11
의원 대수 38, 39, 40, 41, 42, 43, 44, 45, 46, 47, 48
지역구 하이튼 (Huyton) }}}}}}}}}
1. 개요2. 생애
2.1. 정계 입문 이전2.2. 정계 입문 이후
2.2.1. 총리 취임 이후
2.2.1.1. 집권 1기: 1964년 ~ 1970년2.2.1.2. 다시 야당 당수로: 1970년 ~ 1974년2.2.1.3. 집권 2기: 1974년 ~ 1976년
2.2.2. 퇴임 이후
3. 선거 이력4. 여담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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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 노동당을 대표하는 정치인 중 한명으로 제67대와 제69대 영국 총리를 역임하였다.

윈스턴 처칠 이후 유일하게 공백기를 두고 총리직을 두 번 역임한 인물이며 노동당 당수를 맡아 치른 5번의 선거 중 무려 4번을 이긴 선거의 귀재이기도 하다.

2. 생애

2.1. 정계 입문 이전

1916년 3월 11일, 원래 자유당을 지지하다가 노동당으로 지지 정당을 바꾼 약사 제임스 허버트 윌슨과 학교 교사를 했던 에델 윌슨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인 전기에 나온 어린 시절 일화가 있는데, 8살에 총리 공관인 다우닝 가 10번지를 생애 처음으로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에게 "나는 총리가 될거예요!"라고 했다는 것.

정계 입문 이전에는 주로 교육계에 종사했으며 21세에 최연소 옥스퍼드 대학교 단과대 교원을 역임하기도 했으며 1937년에는 뉴 칼리지에서 경제사 강사를 맡기도 했다.

이후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처음에는 군부대쪽에서 자원봉사를 했지만 곧 경제분야 전문가로 분류되어 자유주의 경제학자인 윌리엄 베버리지[2]의 조수로 활약하며 석탄 산업 관련 통계학자 겸 경제학자가 되었다. 이후 연료 및 전력부 경제통계국장을 맡았으며 이때의 공로로 대영 제국 훈장(OBE)을 수여받았다.

이때의 활약을 바탕으로 1943년에는 왕립통계학회 회원이 되면서 영국의 경제 통계학의 권위자로 활동하게 된다.

2.2. 정계 입문 이후

2차 세계 대전 유럽 전선이 연합군의 공세로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연합국의 일원인 영국도 윈스턴 처칠이 이끌던 거국 내각을 마무리하고 본격적으로 차기 총리 선출을 위한 총선을 준비하게 된다. 이 시기에 맞춰 노동당에 입당한 해럴드 윌슨도 총선 출마를 위해 국가노동당 출신 스티븐 킹홀이 지키고 있던 옴스커크 지역구에 도전장을 내게 된다. 출마를 앞두고 공직 사퇴 시한까지 정중동 행보를 유지할 것인가라는 의문도 있었지만 윌슨은 깔끔하게 공직에서 조기 사퇴하고 총선을 준비한다. 이 시기 총선을 준비하면서 탄광 국유화 등을 골자로 한 '석탄 뉴딜'(New Deal for Coal)을 집필하는 데 이 책이 이후 노동당 정권의 기간 산업 국유화 정책의 근간이 되기도 했다.

1945년 총선에서 예상을 뒤집고 클레멘트 애틀리가 이끈 노동당이 무려 196석 차 압승을 거뒀는데 이 바람을 타고 윌슨도 보수당의 A C 그레그 후보를 제치고 당선, 서민원 초선 의원이 되었다. 애틀리 정권 하에서 노동부 산하 비서관을 거쳐 1947년 상무장관이 되었다. 이때가 윌슨의 나이 31세 때였는데, 무려 영국의 20세기 최연소 장관 기록이다. 이후 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고갈된 재정 회복을 위해 전시 배급제를 일부 폐지하는 등 전시에 무너진 예산 균형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1950년 총선에서는 리버풀 경계에 있는 휴이튼으로 지역구를 옮겨 1.9%p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재선에 성공하고 노동당도 가까스로 과반을 지키면서 정권을 유지했다. 이무렵 전후 재정 악화로 고심하고 있던 애틀리 총리가 내각 내에 경제 분야를 담당하는 젊은 장관들을 불러 의견을 들었는데, 이 자리에서 윌슨은 재무장관 더글러스 제이, 연료 및 전력부 장관 휴 게이츠컬 등과 파운드화 평가절하를 두고 심하게 반목하면서 신임을 잃었다. 이후 노동당 내 좌파를 대변하던 윌슨은 1951년, 국가 재정 개선을 위해 NHS에 이용료를 부과하는 정책이 도입되자 이에 반발해 장관직에서 사임했다.

하지만 윌슨 장관의 사임 후에도 계속되는 재정난에 시달리던 애틀리 내각은 정책 노선 변경[3]과 그로 인한 당내 갈등으로 흔들렸다. 애틀리 총리는 1951년 조기 총선을 실시하며 승부수를 걸었다. 윌슨은 보수당의 프랜시스 레슬리 닙을 2.6%p 차로 누르고 3선 의원이 되었지만 절치부심한 윈스턴 처칠이 이끄는 보수당에 노동당이 패하면서 정권을 상실했다.

이후 1964년까지 13년간 보수당 정권 시대가 이어지는 와중에 노동당의 그림자 내각에서 재무 장관 및 외무 장관 자리를 맡았다. 그리고 1963년 1월, 노동당 당수를 맡고 있던 휴 게이츠컬이 급사하면서 후임 대표 선출을 위한 경선이 열렸는데 당 내 좌파 세력의 지지를 얻어 승리해 드디어 노동당의 당수 자리에 올랐다.

당수 취임을 전후하여 본격적으로 정권 교체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는데, 보수당 해럴드 맥밀런 총리가 60년대에 찾아온 불황으로 인기를 잃던 도중 프로퓨모 사건[4]이 터지면서 급작스레 사임하게 되었고 후임 총리가 된 알렉 더글러스 흄은 영국에서 현대적 내각 제도가 만들어진 이후 처음으로 현직 귀족이자 非 하원 출신으로 자리에 오르면서 정치적 논란에 시달렸다.

윌슨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흄과 보수당 정권을 구시대적, 귀족주의적 정권으로 묘사하고 스스로를 ‘민중의 남자(man of the people)’라고 자칭하며 스스로를 차별화했다. #[5] 거기다 이 시기 TV가 영국 전역에 보급되면서 그동안 영국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던 윌슨의 미디어 정치가 엄청난 파급력을 발휘했고 맥밀런 정권부터 이어진 보수당의 경제 실책을 적극적으로 지적하였다. 이덕분에 1964년 총선을 앞둔 여론조사에서도 노동당이 보수당에 3~4%p 차이로 앞서가기 시작했다.
파일:article-2532051-0002EA7500000C1D-986_634x471.jpg

결국 당수가 된 1년 남짓만에 열린 1964년 총선에서 노동당이 44.1% 득표율로 317석을 확보하며 과반을 2석 넘겨 304석에 그친 보수당을 누르고 13년만에 정권 교체에 성공하고 총리 자리에 올랐다.

2.2.1. 총리 취임 이후

2.2.1.1. 집권 1기: 1964년 ~ 1970년
야심차게 출범한 윌슨 내각이지만 앞에 놓여있는 상황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하원에서는 겨우 과반에서 2석을 넘은 수준이라 내각을 운영하는 데 상당히 어려움을 겪었고 내치 면에서는 보수당 내각 내내 지속된 무역 적자와 이로 인해 촉발된 파운드 평가 절하가 국가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었고 외치 면에서는 로디지아 독립 문제가 터진 것. 결국 과반을 겨우 넘는 의석으로 산재한 국내외 문제를 해결하기 버거워했던 윌슨은 1966년 조기 총선을 선언했고, 에드워드 히스가 이끄는 보수당을 상대로 364석을 획득하는 압승을 거두며 정권 유지에 성공해 드디어 앞길이 트였다.

이전 보수당 정부보다 더 많이 신규 주택을 공급하고 재개발을 촉진시켰다. 개인 의약품 구매를 원천 무료로 했다가 3년만에 폐지하는 대신 상한가를 정하고 면제 범위를 확대시켰다. 양도소득세를 도입하고 이어 모든 근로자에게 걷어들이고 특정 산업에 혜택을 주는 선택고용세를 실시하여 제조업, 농업 종사자들을 보호하고자 했다.[6]

북로디지아 니아살랜드 독립을 허용한 상태에서 윌슨은 남 로디지아에 대해서도 흑인 참정권을 충분히 보장한다면 독립을 허용하겠다고 했으나, 백인 소수로 구성된 스미스 정권이 이를 거부하고 1965년에 영국의 허락 없이 로디지아라는 국명으로 독립을 선언했다. 이에 반발해 1966년, 윌슨 내각에서는 자체 경제 제재와 협상을 통해 저지하려했지만 로디지아는 윌슨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부했다. 이후에도 영국은 계속해 로디지아의 국가 승인을 거부하는 안보리 결의안 채택을 주도하는 등 외교적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했지만 아파르트헤이트가 남아있는 등 로디지아와 백인우월주의를 공유하던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당시까진 포르투갈령이었던 모잠비크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거기다 계속되는 국내외 압력으로 1967년, 미루던 파운드화 평가 절하 조치를 단행하였는데 이로 인해 영국 국내 경기가 얼어붙으면서 윌슨 정부의 인기가 급격하게 하락하기 시작한다. 거기다 다음해에는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면서 나름대로 미·소를 오가며 중재 외교를 펼쳐 전쟁의 확대를 막으려 했지만 전임자인 흄 총리와의 악연으로 다시는 영국 총리를 믿지 않겠다고 극렬한 반영감정을 품게 된 린든 B. 존슨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에 밀려 뜻을 이루지 못했다. 오히려 존슨 대통령이 베트남전 동참을 강력하게 압박해 이를 저지하느라 어려움을 겪었다.

경제난을 타개할 방법으로 1963년에 이어 1967년 두번째로 유럽 경제 공동체에 가입을 신청하지만 프랑스의 샤를 드골의 반대로 무산된다.

노동당 내 강경 좌파들은 미국을 맹비난하면서 반미 정책을 선동하였고 친미와 월남전 불참 사이에서 어렵게 줄타기를 하던 윌슨을 대단히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결국 윌슨은 저 인간들이 미국에 해대는 것 반만큼이라도 중국과 월맹에 해대는 꼴을 본 적이 없다고 분노를 터트릴 정도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부분에 있어 전 총리인 흄을 비롯하여 보수당의 일각에서 윌슨을 도와서 결국 영국의 월남전 참전을 모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냥 실패와 고난만 있었던 것은 아닌데 집권 1기에 사형제의 사실상 폐지, 동성애 비범죄화, 극장 검열 폐지, 임신 중절 자유화, 선거권 연령 21세 하향 조정 등 여러 사회적 개혁 법안들이 의회를 통과했다. 윌슨은 이 법안들을 자유 투표에 부쳤지만 진보적 성향이 강한 노동당 의원들이 다수를 차지한 의석 구성 상 부결이 될리 만무했다.

그 외에도 보수당 정권 시기 축소되었던 사회 복지를 위한 지출을 다시 대거 늘리고 군사비 지출을 대거 삭감했다. 그 외 경제 활성화를 위해 기술부와 경제부를 신설하고 연 3.8% 성장률을 목표로 한 국가 발전 계획을 새로 수립하여 69년을 즈음하여 국제수지가 다시 흑자로 돌아서며 재정이 안정을 되찾기 시작한다. 또한 문화산업 발전에 공을 들였는데 상징적으로 비틀즈에게 1965년 영국 왕실 훈장을 수여하도록 추천한게 바로 윌슨 총리였다. 관련된 내용의 블로그 글

또한 교육 예산을 크게 확장해 종합 대학을 44개까지 늘리고 오픈유니버시티 제도[7]를 도입해 국민들의 교육 접근성을 확대했다. 실제로 이 시기 정부 교육 예산이 처음으로 국방 예산을 추월하기도 했다. 비틀스에 훈장 … 현대식 정치 도입한 ‘민중의 남자’

이렇게 다사다난했던 6년이 지난 후 열린 1970년 총선을 앞두고 진행된 6월 여론조사에서 보수당을 상대로 7%p나 리드하는 등 노동당의 총선 3연승이 확실해 보였으나 정작 7월 본선에서 에드워드 히스가 이끄는 보수당에 다시 과반을 내주면서 실각하고 말았다. 당시에도 엄청난 이변으로 묘사되었으며, 미국 리처드 닉슨의 1968년 대선 승리, 프랑스 조르주 퐁피두의 1969년 대선 승리와 더불어 침묵하는 다수 이론이 정치계에 확산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2.2.1.2. 다시 야당 당수로: 1970년 ~ 1974년
예상치 못한 선거 패배에 노동당의 상흔은 심했는데 윌슨 본인은 다시 무난히 당선되었지만 당의 득표율이 1935년 이후 최저치(43.1%)로 떨어지고 그 바람에 당시 부당수였던 조지 브라운 등 노동당 내 여러 유명 인사들이 낙선하고 만 것. 1969년말부터 실물 경기가 회복 시점에 있었지만 보수당의 히스 대표가 이전 파운드화 평가 절하로 인한 내수 침체를 노동당 실정론으로 밀어붙여 여론을 움직이는 데 성공한 것이 컸다.

하지만 1972년 북아일랜드에서 피의 일요일 사건이, 1973년 오일 쇼크가 터지면서 노동당 입장에서는 이것이 전화위복이 되었다. 집권하자마자 찾아온 내우외환으로 히스 내각은 크게 흔들렸으며 유럽 공동체(EC) 가입 문제로 집권 여당인 보수당마저 크게 분열되고 말았다

1974년 2월, 오일쇼크 발 경제 위기[8]로 흔들리던 히스 총리는 조기 총선을 승부수로 띄웠고[9], 노동당은 1970년의 복수를 하듯 보수당 경제 실정론을 꺼내들어 선거에 나섰다. 선거 결과, 득표율은 지난 선거보다 무려 5.9%p나 하락했지만 13석을 늘리면서 301석을 획득해 33석을 잃은 보수당을 누르고 제1당 지위를 회복했다.[10]

하지만 노동당과 보수당 둘 다 과반 의석을 차지하지 못한 상태( 헝 의회) 에서 히스 총리가 자리 유지를 위해 자유당에 연정 제안을 했지만 자유당 제러미 소프 대표가 이를 거부해 정부 구성권이 다시 노동당에게 넘어왔다. 노동당 역시 자유당과 연정을 구성하지는 못했지만 대신 자유당의 지지를 확보하며 윌슨 총리를 중심으로 소수당 내각을 출범시켰다.

하지만 소수당으로 내각을 꾸려나가는 데 한계를 느낀 윌슨 총리는 같은 해 10월, 다시 조기 총선을 선언했고,[11] 단독 과반을 한 석 넘는 319석을 확보하며 무사히 재집권에 성공했다. 히스 내각을 괴롭혔던 광부 파업 문제가 노동당 재집권 이후 끝난 것이 큰 영향을 끼쳤다.
2.2.1.3. 집권 2기: 1974년 ~ 1976년
야심차게 2기 임기를 시작했지만 이번에도 상황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히스 내각부터 이어진 유럽 공동체(EC) 가입 문제였는데 노동당 내 좌파는 가입을 반대했지만 우파는 가입에 찬성하면서 당내 여론이 크게 분열된 것. 결국 1975년, 윌슨은 EC 회원 가입을 위한 조건을 재협상한다는 전제로 가입 여부를 국민투표에 맡기기로 한다.

총리가 공식적으로는 중립을 표방한 상황에서 영국 역사상 처음 열린 국민투표에서 가입 찬성이 67.23%, 가입 반대가 32.77%를 득표하면서 노동당과 보수당을 모두 둘로 쪼개놓았던 오랜 논란을 끝내고 영국은 유럽 공동체에 공식 가입하게 된다. 국민투표의 결과를 내각이 무조건 따라야한다는 강제성은 없었지만, 윌슨 내각은 국민투표 결과를 그대로 실현하면서 이후 국민투표가 관례적으로 강제성을 가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는데[12], 이것이 41년 후 엄청난 나비효과를 만들게 된다.

내치에 있어서 복지 정책 확대를 위해 교육, 보건, 주택 임대료 지원에 대한 정부 지출을 늘리기 위해 노력했고 일부 성과를 냈지만, 1차 오일 쇼크 때문에 찾아온 세계적 불황의 영향으로 실업률이 2차 임기 내내 증가했고 실직한 영국인들의 수가 임기 중 100만 명을 넘어서기도 했다. 1기 임기 때와 마찬가지로 복지 분야에만 치중하지는 않고 1975년에는 국가기획국(NEB)을 설립하고 민간 기업에 대한 지분 보유의 대가로 공공 투자를 민간 산업으로 유도하고 불황 중 기업 파산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던 와중 1976년 3월 16일, 갑작스럽게 총리직 사임을 발표했다. 본인은 항상 60세에 사임할 계획이었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지쳐서 사임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어중간한 타이밍으로 인해 사임의 배경을 둘러싸고 여러 추측을 낳았다.

2기 임기 시작 후 북아일랜드 문제를 비롯해 계속된 노동단체 파업, 오일 쇼크로 인한 경제 상황 악화에 질려버려서 자리를 놓은 것이란 얘기부터, 알츠하이머가 발병해 직무를 계속해 어려운 상황이라는 얘기도 나왔는데 물론 윌슨은 사망할 때까지 그 어느쪽도 공식적으로 인정한 적은 없다. # 한참 뒤 만들어진 드라마 더 크라운에선 알츠하이머설을 지지해서 윌슨이 여왕을 찾아가 자신에게 알츠하이머가 찾아왔음을 고백하면서 사임 의사를 밝히는 것으로 묘사한다.

후임 총리로는 당수 경선에서 마이클 풋 고용부장관을 누르고 승리한 제임스 캘러헌 외무부장관이 취임했다.

2.2.2. 퇴임 이후

총리 사임 이후에도 서민원 의원직을 한동안 유지하길 원했기 때문에 관례에 따라 귀족 작위를 서임받는 대신 가터 훈장을 먼저 받았다.

결국 1983년 하원 의원직을 떠나 완전히 정계를 은퇴하면서 이때에 이르러서야 윌슨오브리볼 남작으로 서임을 받았다. 이후 상원에서 자리를 지키다가 1995년, 대장암과 알츠하이머로 향년 7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열린 추도식에는 당시 왕세자였던 찰스 3세를 비롯해 전직 총리인 에드워드 히스, 제임스 캘러헌, 마거릿 대처, 현직 총리인 존 메이저와 제1야당 당수 신분이었던 토니 블레어 등 정계의 유명 인사들이 모두 참석하여 조의를 표했다고 한다.

해럴드 윌슨의 유해는 세인트 메리 섬의 한 교회에 안장되었다.

2016년 발표된 리즈 대학교가 주관한 조사에 따르면 1945년 이후 취임한 '전후 총리'들 중에서 역대 5위로 평가받았다. 윌슨의 위에는 클레멘트 애틀리, 마거릿 대처, 토니 블레어, 해럴드 맥밀런이 있었으며 윈스턴 처칠보다도 평가가 높았다.[13] #

3.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45 영국 하원의원 선거 옴스커크
30,126 (46.3%) 당선 (1위) 초선
1950 휴이튼 21,536 (48.4%) 재선
1951 23,582 (51.3%) 3선
1955 24,858 (52.7%) 4선
1959 33,111 (54.9%) 5선
1964 42,213 (63.9%) 6선
1966 41,122 (66.4%) 7선
1970 45,583 (63.1%) 8선
1974.2 31,767 (56.7%) 9선
1974.10 31,750 (60.8%) 10선
1979 27,449 (51.9%) 11선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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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e50038>생애 <colbgcolor=#fff,#1f2023> 생애 및 정치 경력
정책 민주사회주의 · 사회민주주의
사건사고 애버밴 참사 · 토리 캐니언 호 좌초 사고 · 오일 쇼크
전쟁 베트남 전쟁
역대 선거 1974년 2월 영국 총선
지역구 하이튼
관련 정치인 제임스 캘러헌 · 에드워드 히스 · 휴 게이츠컬 · 클레멘트 애틀리 · 윈스턴 처칠 · 마거릿 대처 · 해럴드 맥밀런 · 알렉 더글러스 흄
기타 해럴드 윌슨 내각 · 1차 G6 정상회의 · 영국병 · BAC TSR-2 · LNER A1/A3 · 더 크라운 · 1963년 영국 노동당 지도부 선거 · 노동당
파일:빨간색 깃발.svg 사회주의 }}}}}}}}}


[1] Baron Wilson of Rievaulx [2] 그 유명한 베버리지 보고서를 작성했던 인물이다. [3] 6.25 전쟁 발발 후 방위비를 증액하기 위해 복지비를 축소한게 결정타였다. [4] 1963년 국방장관 존 프로퓨모가 불륜 및 소련 스파이 등과 연루됨에 따라 사임하게 된 정치 스캔들 [5] 그 예로 윌슨은 본래 시가 애호가였지만 노동당의 전 총리 클레멘트 애틀리의 이미지를 차용하기 위해 공식 석상에선 파이프를 물고 다녔다. [6] 하지만 선택고용세는 이후 보수당 정부에서 사실상 폐지된다. [7] 한국으로 치면 방통대, 사이버대학 등과 유사하다. [8] 보수당 정부의 긴축 정책과 민영화에 반대하는 노조의 반발이 매우 컸고, 정국 혼란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탄광 노조의 파업이 매우 강력했다. [9] 당시 보수당의 캐치 프레이즈가 "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누구인가 - 의회냐, 노조냐"였을 정도 [10] 득표율에선 보수당에 뒤졌다. 히스 총리로서는 두고두고 아까운 국면. [11] 1910년 이후 64년만에 벌어진 일이다. [12] 영국은 관습법 국가로 한번 관례가 만들어진다면 그것을 뒤에 쉽게 바꾸기 어렵다. [13] 물론 전후 총리로서만 평가한 것이기 때문에 전시 수상으로서의 처칠의 활약은 반영되어 있지 않아서 그런 면이 크다. [14] 반대로 가장 사이가 나빴던 총리는 독불장군 스타일이었던 마거릿 대처, 공화주의 성향이 있어 다이애나 왕세자비 문제와 관련해 매번 충돌했던 토니 블레어였다. 여왕이 사석에서 대처 총리의 어투를 따라하면서 놀린 적도 있다고 한다. 이 역시 드라마에 반영되어, <더 크라운>의 시즌 4에는 아예 한 에피소드를 할애해 대처의 경제 정책을 비판하는 에피소드가 있을 정도로 윌슨과 달리 비교적 부정적이고 반왕실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토니 블레어 역시 시즌 5~6 내내 왕실 현대화와 관련해 여왕과 미묘한 갈등을 빚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15] 적극적으로 언론플레이를 지시했다기보단 그런 움직임을 방관하는 태도를 보인다. [16] 다만 여왕이 탄광을 방문한 뒤 남들이 눈물을 흘릴 때도 본인은 그러지 못한다고 고백하자, "나는 노동자가 아닌 학자지만, 유세를 할 때는 서민적으로 보이도록 파이프 담배를 피운다. 우리 둘 다 리더로서 위기를 만드는 게 아니라 잠재워야 하는 입장이고, 그렇게 모두를 만족시키려면 자신에게 솔직할 수는 없다. 폐하의 결여된 감정은 오히려 국가 지도자로서는 장점일 수 있다."라고 조언 겸 격려를 해주기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