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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양

선위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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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과정4. 역사
4.1. 불분명한 시초4.2. 불안한 부활4.3. 피바다의 시작
4.3.1. 남조4.3.2. 북조
4.4. 악순환의 연속4.5. 선양의 붕괴4.6. 선양의 회귀 및 소멸4.7. 선통제
5. 총평6. 한국사의 선양7. 말말말8. 기타9. 미디어의 선양10. 같이보기

1. 개요

선양()은 혈통상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행위이다. 중국의 고사에서 임금이 임금에게, 순 임금이 임금에게 왕위를 물려준 고사에서 유래했다.

혈연관계가 있는 사람에게 물려준다는 의미인 양위와는 다른 개념이었으며, 일단 선양이 발생하면 실질적으로 이전 왕조는 멸망한 것으로 본다.

역성혁명처럼 기존의 통치자가 패배하고 새로운 왕조로 바뀌는 상황에서 군주의 지위가 새로운 인물에게 이양되는 두 가지 방식 중 하나로, 한 마디로 말해 기존의 군주가 자발적으로 평화롭게 권력을 후임자에게 넘겨주는 것이다. 이에 반해 다른 하나인 방벌은 무력을 쓰는 것처럼 강제로 군주를 끌어내리는 것이다.

2. 배경

동아시아의 군주제는 신권주의(神權主義)와 강력하게 연관되어 있었고, 하늘에서 부여받은 의무인 ' 천명'을 수행하는 자로 여겨졌다.[1] 여기서 맹자의 그 유명한 이른바 역성혁명 이론이 등장하는데. 아무리 지엄한 천자라도 천명을 잘 받들지 못하면 더 천명을 잘 받들 수 있는 자가 새로운 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새로운 군주가 기존의 군주보다 덕성이 있다는 것을 증명받을 수만 있다면 왕조의 교체는 동아시아사상적 관점에서 완벽하게 허용된 행위인 것이다. 따라서 선양을 잘 받아내기만 하면 질 떨어지는 날조 명분으로 유력자들을 구슬리는 길고 지루한 과정들을 모조리 생략하고, 이전 왕조의 구성원들에게 당장 충성을 요구할 수 있다. 이는 정권 안정에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 반대로 선양도 받지 못한 채 명분 없이 무력만으로 권력을 쟁취하는 것은 후손들에게도 두고두고 수치스러운 일로 여겨졌을 뿐 아니라, 민심을 잃고 다른 제후들에게 외면을 받았다는 점에서 현실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상당히 불리했다.

그렇기 때문에 동아시아의 군주들은 '덕성(德性)'이라는 것에 목을 매게 되어 아무리 잔혹한 성품의 폭군이더라도 대외적으로는 품위와 인덕을 갖춘 지도자로 행동하며 위선을 떠는 풍조가 생겼다. 예를 들어 전임 왕조의 신하들은 모두 대숙청을 하더라도 전임 왕족만큼은 멸족시키지 않고 관대하게 대접하면서 그냥 살려둔다거나, 역사 기록에 "새 왕은 전임 왕조를 지지하는 세력들을 포용했고 인품도 좋은 대인배같은 성군이었다"는 식의 미화된 거짓 기록이라도 남긴다거나 하는 행위를 하였는데, 이는 지구상의 다른 동네에서는 볼 수 없는 유교문화권만의 고유한 특징이다.

그러나 실제 동아시아 역사에서 선양은 방벌(放伐)에[2] 가까운 것이었다. 생판 남에게는 밭 한 뙈기 물려주는 것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 인간 세상인데, 혈연에 연연하지 않고 최적임자에게 나라와 종묘사직을 깔끔하게 넘겨주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처럼 인간 본성에 반하는 사건은 동아시아사를 넘어 세계 역사를 손꼽아 거의 존재한 적이 없다.

따라서, 역사에 수도 없이 기록된 선양은 모두 잘 포장된 찬탈이며 보여주기를 위한 정치적인 요식 행위에 불과했다. 다만 선양이고 뭐고 없는 것 보다는 학살이 조금이나마 줄어들었다는 것, 대의명분을 이용하여 정권 시스템을 조금이나마 안정화 시켰다는 것, 그리고 폭군을 몰아낼 합리적 수단이 마련된 점이 선양의 순기능이었을 것이다.

3. 과정

군주나 다름 없을 정도로 모든 실권을 장악한 권신과 그 신하들이 원래의 군주에게 꾸준히 압력을 넣어 왕위를 물려주도록 만든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왕위를 물려받게 될 사람은 절대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다. 성질 급하다면 직접 나서기도 하지만 그러면 쇼맨쉽의 품격이 떨어진다.

또 다른 불문율로는 양위가 결정되었더라도 한 번에 낼름 받아먹으면 안 된다는 것. 예의상 3번 정도 튕긴 후에 4번째 요구를 받아서 "딱히 왕위에 욕심이 있던 건 아니지만 기어코 준다고 하시니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어서 마지못해 받는다"라면서 받아먹는 것이 보통이다. 이것은 한고제 유방이 세운 전통으로, 항우를 토벌한 후 황제로 등극하라는 부하들의 권유[3]를 세 번 거절하고 네 번째에 즉위했다는 데서 유래한다. 이후 유비, 조비 등 많은 황제들이 이를 따라했다.[4] 어떻게든 권좌에 욕심이 없었음을 강조하며 온갖 미사여구로 양위받은 상황을 포장하면 끝이다.

원칙적으로는 이왕삼각(二王三恪)이라 하여 보통 선대 왕조의 군주와 그 후손들에게는 명예직과 함께 작위를 주어 생활을 보장해주기도 하는데, 이게 위진 시대에는 그럭저럭 지켜졌지만, 남북조 시대부터는 명성에 금이 좀 가더라도 위협을 뿌리까지 제거하는 게 낫다는 사상에 힘이 실리게 된다. 하여 유송부터는 선양하고나서 적당히 시간이 흐른 후 몰래 족쳤다. 주로 사용하는 죄목은 옛 신하들과 작당해 역모를 꾸민다는 역모죄였다. 뭔가 이상하게 들리지만 선양을 한 결과 군주가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으니 아무리 이전에 군주였어도 현재는 군주의 부하나 신하에 불과하니 역모죄로 처벌받을 수가 있다는 논리였다.

그나마 북송 정권이 수립되면서 피를 보기 싫어하는 정권의 성향 덕분에 다시 온건한 쪽으로 선회했다. 어찌보면 진짜 중국 역사 속에서 확인되는 그나마 뒷탈없는 선양의 거의 유일한 케이스. 송으로 시작해서 송으로 끝났다 송나라 이후는 그냥 무력정복의 연속이라 더이상 선양 자체가 없었다.

앞선 정권이 너무 막장이라서 평판이 나쁘면 선양같은 작업이 없이도 정권교체가 별탈없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또 양쪽 정권이 상하관계를 가지지 않고 수평적 관계일 경우도 선양을 하지 않는다.

4. 역사

4.1. 불분명한 시초

중국의 가장 대표적인 선양 사례는 아래와 같다.

4.2. 불안한 부활

일단 우임금 이후 이 제도를 사용한 적이 없었는데, 황제는 되고 싶은데 방법을 찾던 왕망이 고대 문헌에 적혀있던 선양이란 과정을 되살린다. 그리고 왕망은 고대 방식에 따라 유자영을 죽이진 않았다. 그리고 이 선례를 따라 서진까지는 선양한 황제를 죽이진 않았기 때문에 이때까지만 해도 비교적 평화로웠다.

4.3. 피바다의 시작

이때부터 선양한 군주가 목숨을 보전한 사례는 드물었다.
自是之後, 禪讓之君, 罕得全矣.
호삼성
하지만 위의 사례들과 달리 남북조시대대부분의 황제는 선양한 후에 일족과 함께 죽음을 당했는데, 이것은 남북조시대( 육조시대) 남조 송나라의 창건자인 무제 유유가 시작했다. 유유는 환현의 난을 진압한 다음 동진의 안제 사마덕종을 죽이고, 선양받은 이후 공제 사마덕문을 죽였으며 사마씨들을 거의 대부분 몰살했다.

이후로 남조와 북조 모두 살벌한 레이스가 진행된다.

4.3.1. 남조


공통적으로 이전 황제였던 사마덕문, 유준, 소보융, 소방지가 모두 제거되었다. 다만 양나라의 소연은 제나라의 황족 방계에 해당되므로 소씨 전체를 죽이지는 않았고, 진패선은 소방지를 죽였으나 강릉에 위치한 서위의 괴뢰 정권인 후량은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 소방지 외의 양나라 소씨를 죽이지는 않았다. 그래서인지 진나라 마지막 황제 후주 진숙보 수나라 양견에게 죽지 않고 진씨 일족 모두 서북 지방을 영지로 받고 천수를 누렸다. 이때 후주는 선양이 아니라 육조의 첫 타자인 손호와 같은 경우로 정벌로 멸망한 것이다.

4.3.2. 북조

북조에서는 북위가 일단 동위 서위로 갈라서면서 막장이 시작된다. 북위는 강대했지만 나중에 선무제 원각의 후궁이였던 호태후가 여러 전횡을 휘두르며 나라를 말아먹었는데, 호태후는 자신의 친아들인 효명제 원후가 자신과 대립하자 독살하고, 그의 딸을 아들로 속여 황제로 세웠다. 당시 이주영이 호태후와 '가짜 황제' 원소, 대신들 2천여 명을 황하에 처넣거나 처형하는 하음의 변을 일으키고, 권력을 잡은 다음 효장제 원자유를 세웠다. 이주영은 원자유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냈는데, 원자유는 황후 이주씨가 사내아이를 낳았다고 거짓으로 소문냈고, 이것을 믿은 이주영이 입궐했다가 원자유에게 암살당했다.

두 달 후 이주영의 조카 이주조가 군대를 이끌고 원자유를 생포해 유폐했다가 죽여버린다. 이때 이주영의 부장이었던 고환이 이주조를 토벌하고 대승상 대장군에 올라 권력을 잡았다. 당시 황제였던 효무제 원수는 고환에게 모욕을 당하자 말을 타고 홀로 수도 낙양에서 장안으로 도망가버렸다. 고환은 추격했지만 잡지 못 하자 그의 친척이었던 원선견을 황제로 세우니 이것이 동위 정권이었다. 한편 장안으로 달아난 원수는 관서 도독 우문태에게 의지하니 그가 권력을 잡는데 이것이 서위 정권이었다. 참고로 원수는 <북사>에서는 효무제라고 되어있으나 북제 정권에서 출판된 < 북위서>에서는 도망친 황제라고 조롱하는 의미에서 '출제'(出帝)라고 되어있다.

원수는 고환에게서 도망칠 때 사촌누이들도 함께 데리고 갔는데 음란해서 그들과 마구 사통했다. 이것을 우문태가 자주 지적했지만 무시하자 우문태는 황제의 사촌누이들을 죽여버렸다. 이에 원수는 자신의 입장도 생각 안 하고 화를 내며, 빈 활시위를 우문태를 향해 당기고 책상을 손으로 강하게 치는 등 불만을 표시했다. 결국 원수는 우문태에게 독살당하고, 우문태가 그의 친족 원보거를 황제로 세우니, 원보거는 16년간 그럭저럭 바지황제로 체면치례하면서 살다가 죽었다. 하지만 그의 아들들인 폐제 원흠, 공제 원곽은 천수를 누리지 못했다. 그 후 동위의 원선견은 고환의 아들 고양에게, 서위의 원곽은 우문태의 아들 우문각에게 선양하면서 동위는 북제, 서위는 북주가 되었다.

4.4. 악순환의 연속

이때쯤 가면 선양 = 죽음이란 공식이 완성된다.

4.5. 선양의 붕괴

오대십국시대에 접어들면서 그나마 껍데기였던 선양은 제도마저 완전히 사라졌다. 말 그대로 약육강식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4.6. 선양의 회귀 및 소멸

이 시기에 오면 선양 따위는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선양을 받은 사람이 인간답게 일을 처리해서 그나마 유종의 미를 남겼다.
이후의 황조 교체 과정에서는 선양이 개입할 틈도 없었다. 송나라는 몽골 - 원나라의 칼끝 아래 멸망했고 애산 전투와 함께 황제와 황족들이 대부분 몰살당했으며, 원나라는 주원장의 군대에 쫓겨 몽골고원으로 달아났다.[20] 명나라 이자성의 난으로 숭정제가 자살하면서 멸망하여 청나라는 명나라에게서 별도로 선양을 받을 수가 없었고, 오히려 이자성 순나라 황제를 참칭하자 북경으로 밀고 들어가 이자성을 처단하고 중원에 입성한 케이스였기 때문에 선양을 받을 황제가 남아 있지 않았다. (물론 중국 남부에서 여러 황족들이 제각기 황제를 칭했으나, 모두 잡혀 죽었다.) 무엇보다도 송-원, 원-명, 명-청 교체는 한족 왕조와 이민족 정복왕조의 교체였으므로 유교적인 의식인 선양을 치를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4.7. 선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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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 선통제.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 푸이는 후대가 공화정이라는 점에서 약간 특수하지만, 권력의 이동이라는 면에서 보면 평화로운 선양(?)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신해혁명 후 제정이 폐지되면서 중화민국에 평화롭게 정권을 인계한 선통제는 퇴위는 했지만, 1) 대청 황제의 존호 유지, 2) 매년 400만 냥[21]의 세비를 중화민국 정부가 부담, 3) 자금성, 이화원 거주 허용, 4) 공사 중이었던 광서제 황릉 공사 지속 5) 청나라 황실 의식 허용 등의 특전이 있었다. 무혈로 순순히 물러난 보답으로 중화민국 정부가 예우를 해준 것이다. 일종의 "왕 있는 공화정( 비주권군주제)"이라고 봐도 될 정도. 위안스카이가 황제가 되네 마네 할 때도 어린 황제는 자금성에서 중화민국과 무관하게 "청나라의 황제"로서 평화롭게(?) 살았지만 선양의 피비린내 나는 선례에 따라서 자기 목숨도 위험하다는 생각에 불안해 했다고( 청나라 소조정도 참조).

사실 이렇게 순순히 물러난 것은 푸이가 아니라 그의 생부[22]이자 광서제의 이복동생인 순친왕(감국섭정왕)의 결단 때문이었다. 당시 푸이는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아이였고, 사실상 협상을 주도한 감국섭정왕은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황실이 더 이상 존속하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순순히 물러나는게 황족이 사는 길이라고 판단해 황실 폐지에 동의했다. 이후에도 이런 저런 복벽음모나 만주국 같은 곳에도 전혀 가담하지 않았고, 일본의 침략을 반대하고 중국의 단합을 외쳤다. 그 결과 그는 중화민국 시기는 물론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에도 청나라 황족의 최고 어른으로서 존경을 받으며 천수를 누릴 수 있었다.

후에 장훈( 장쉰)의 복벽(왕정복고) 소동이 진압되었지만 공모자라 할 수 있는 선통제에 대한 예우는 계속되었다. 이런 복벽소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민국을 흔들었기에 푸이는 자금성에서 추방당하지만, 그래도 예우는 계속되어 매년 50만 원의 세비와 개인 재산은 보호받았다. 그러나 푸이는 불만을 느끼고 나중에 일본의 괴뢰국 만주국 집정을 거쳐 황제로 집권한다. 거기서도 괴뢰 신세였던 것은 매한가지였지만 일단은 황제였다.

국공내전을 지나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후 푸이는 전범으로 기소되어 10년간 푸순(撫順) 수용소에서 복역했으나 예상과는 달리 처형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 최후의 황제 니콜라이 2세와 그 일가가 적백내전의 급박한 상황에서 쫒기듯이 사살당했다는 것이 컸다. 설립 당시부터 러시아 공산당에게 버려진 자식 취급이나 당하고 사이도 그리 좋지 않았던 중국 공산당의 입장에서는 "러시아 너네는 황제를 죽였지만 우리 중국은 황제까지 감화시켜서 공산당으로 만들었다." 같은 자부심을 세울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중국에서 공산당이 집권한 후 수많은 지배계급 인사들이 인민재판 후 처형당했지만,[23] 정작 우두머리급인 만주국 황제 푸이와 그의 동생 푸제, 장징후이(張景惠) 총리는 목숨을 건졌다.

푸이 자아비판 후 1959년 출소, 저우언라이 총리의 배려로 처음에는 베이징 식물원 정원사로 발령났다. 이건 구체제의 황제가 노동 계급으로 갱생했다는 일종의 통과의례로 봐야 할 것으로 보이며, 이 경력 때문에 자신이 황제로 살아가던 자금성에 정원사로 되돌아왔다는 영화 마지막 황제 속 이야기가 성립되었다. 후에 전국정치협상회의 문사(文史)연구위원회의 전문위원이 된다.[24] 그리고, 1964년에는 저우언라이의 추천으로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 만주족 대표)에 선출되었는데 국회 정책자문위원과 비슷한 격이다.

이후 문화대혁명 당시엔 다른 사람들이 홍위병에 의해 고초를 당하는 모습을 목격하는 등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이건 푸이뿐만 아니라 공산당 개국공신에게도 다 해당되는 일이었으므로 전 황제라는 이유로 핍박받았다고 보긴 어렵다. 물론 푸이의 경우는 어릴 때 실권을 다 내줘 본인 입장에선 딱히 아쉬움을 실감할 틈도 없었고, 이후엔 돈방석에서 지내 서민들 입장에선 핍박 운운하는 것도 좀 웃긴 인생이었겠지만...

5. 총평

선양은 원래 그 시초부터 불분명한 점이 있으나, 고대적 의미에서는 힘이 있는 사람이 예절을 갖추어가며 전임자에게 합법적으로 권력을 이어받는다는 느낌을 살릴 수 있었으므로 없어졌다 다시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애초에 부활한 이유부터 형식만 차리려는 것이었기 때문에 후대로 넘어갈수록 눈 가리고 아웅하는 절차로 격하되어 위선적인 제도로 낙인찍혔고, 사람들의 뇌리에서 고대적인 생각이 사라지자 더 이상 제도 자체가 있을 의미가 없어서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된다.

그나마 송나라까진 유지라도 되었지만, 중국에서 그 이후 나라들은 대놓고 서로 싸우며 역성혁명을 하였기 때문에 딱히 선양이라는 형식을 취할 필요도, 관심도 사라지게 된다. 수나라와 당나라처럼 적당한 예전 왕조의 방계 혈족 하나를 억지로 제위에 올린 다음 조금 시간이 지나서 선양을 받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나 싶겠지만, 원나라의 경우는 남송을 멸망시키기 전에 이미 황제를 칭하고 있었고, 명나라는 원나라가 그동안 폭정으로 인해 인심을 얻지 못한데다 원나라 황실은 북원으로 존속하고 있었고 이민족이기까지 하여서 정통성이 떨어지는지라 굳이 원나라의 계승자를 자처할 필요가 없었으며, 청나라 또한 원나라와 마찬가지로 이미 명나라를 멸망시키기 이전에 칭제건원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전처럼 겉으로나마 신하의 신분으로 전 왕조를 윗전으로 인정하다가 이양받기도 뭐했다. 대신 청나라는 이자성에게 멸망당한 명나라의 복수를 명분으로 하였고, 명나라에게서 빼앗은 게 아니라 명나라가 이자성에게 도둑맞은 걸 탈환한 것이라는 주장을 내세워서 어느 정도 정통성을 노리긴 했다. 형태는 다르지만 '정통성 있는 정권을 억지로 빼앗은 게 아니다'라는 퍼포먼스는 일맥상통하는 셈이다.

대체로 한 왕조가 선양받은 후 그 전황제와 일족을 살육하고, 그 자손들이 다시 똑같은 일을 당하는 것을 보면 인과응보 업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6. 한국사의 선양

한국사에서는 후삼국시대까지 전쟁으로 수도가 함락되거나 해서 무력으로 멸망하는 사례가 많았고, 왕족들이 중국으로 압송당하는 등 기본적으로 선양을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중국의 천명사상이 한반도에는 제대로 전파되지 않아 한국사의 고대는 명분보다는 힘의 원리, 약육강식의 구도로 진행되었다. 다만 신라에서 마지막 성골 진덕여왕이 죽게 되어 성골의 대가 끊기자 원래는 왕이 될 수 없는 신분이었던 진골이자 당시 신라의 실권자였던 김춘추가 대신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고 김춘추가 세 번 사양했다가 마지못해서 받아들였다고 하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같은 왕족에게 왕위를 넘기는 양위에 가까울뿐 선양이 아니었다. 왕족 계급이 정해져 있었다가 단절되고 새로운 인물을 추대해야 했던 신라 사회의 특수성으로 인해 나타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의 선양 개념과 비슷해 보이는 형태는 먼저 신라 경순왕 고려 왕건에게 항복한 사건에서 나타나는거처럼 보이나, 왕건은 이미 그 전부터 918년에 역성혁명으로 태봉을 멸망시키고 고려라는 나라를 건국하여 왕이 된 상태였으며 경순왕이 한 일은 별도의 나라였던 신라를 고려에 들어다 바친 것일 뿐이라 선양의 정의에 맞지 않는다. 견훤이 왕건에게 위협하는 편지를 보내고 왕건이 견훤을 비판하는 답서를 보내는 과정에서 신라 왕실을 중국의 주나라 한나라에 비유하고 신라 왕을 멋대로 죽인 견훤을 왕망 동탁에 비유하거나[25] 서로 존왕(尊王)을 논하는 등 신라왕실을 고려나 후백제보다 명목상 일종의 한반도판 천자로 간주하는 의식이 엿보이기도 하지만, 이런 의식과 허례는 경순왕이 귀부를 청하기 전부터 없어져 있었다. 935년 경순왕이 고려에 귀순을 청할 때 왕건이 몇 차례 거절했던 건 여러 차례 사양하는 선양의 구도를 따라한 것이지만, 대왕 신라왕에게서 왕위를 넘겨받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신라왕이 적국의 대왕인 고려왕에게 나라를 바치는 구도로 진행되었다.

중국의 선양 개념에 가장 가까운 형태는 고려 공양왕이 조선의 태조 이성계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이라 하지만, 선양은 협박에 의할지라도 왕이 스스로 물려주는 것을 말하는데 이건 공양왕이 이성계에게 순순히 선양한 게 아니라 태후가 함부로 임금을 폐위한 다음 성이 다른 이성계에게 왕위를 전하는 전개였기 때문에 고려 - 조선의 교체 또한 어쨌든 전형적인 중국식 선양의 형태와는 조금은 달랐다. 그리고 조선이 개국된 뒤에는 선양한 공양왕을 비롯한 개성 왕씨 대다수가 나중에 조직적으로 살해당한다.[26]

최초의 선양은 오히려 조선 왕조 내에서 몇 번 이뤄졌으나, 엄밀히 말하자면 이건 선양이 아니라 양위다. 우선 첫째 사례는 조선 정종 태종의 관계. 다만 두 사람은 친형제 사이고 즉위 때부터 실권은 이방원에게 있는 형태였으며 즉위 2년 만에 곧바로 왕위를 넘겼기에 선양의 다른 사례와는 달리 순조롭고 평화롭게 이루어졌다. 정종과 태종의 사이는 선양한 뒤에도 매우 좋아서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에는 ' 격구(擊毬)하고 술자리를 마련하여 극진히 즐거워하였으니 태상왕이 부른 것이다.'라는 기록이나 '태상왕(정종)이 일어나 춤을 추니 임금도 일어나서 춤을 추었다. 태상왕께 헌수하고 춤을 추고 연구로 화답하며 매우 즐기다.'라는 기록도 남아있으니 정말로 사이가 좋았던 듯하다. 선양의 정의가 '혈연이 아닌 남에게 물려준다'이고 보면 선양도 아니고 그냥 양위다. 그 후엔 단종-세조의 교체가 있는데, 사실 세조는 단종의 숙부이기에 이 또한 선양이 아니고 양위.

다만 이렇게 실제로 양위의 형태를 띔에도 선양이란 표현을 쓴 것은 조선 깊숙히 자리잡은 유학의 영향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유교는 도덕적인 군주가 천하를 다스리면서 인의를 실현하는 것을 이상적으로 보았다. 때문에 한 임금이 평가를 좋거나 나쁘게 받는 기준은 도덕성과 인의였고, 다음 임금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기준 역시 인의였다. 때문에 다음 왕에게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물려주는 왕에게 인의가 있다는 것을 표현할 필요가 있었고, 이는 중국 고전에서 선양이란 형태로 이루어졌으므로 선양이라 표현한 것이다.

선양은 협박에 의할지라도 왕이 스스로 물려주는 것을 말한다. 일제강점기에 전주 이씨 황족이 일제 황가로 편입된 것은 이완용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맺은 한일합방조약에 의한 것이었으며, 순종은 끝까지 합방조약에 반대했고, 원래 존재하던 다른 나라의 황가에 왕공족으로 편입해 들어간 것이므로 당연히 선양이 아니다.

7. 말말말

"옛날 , , , [27]은 만고의 죄인입니다. 그들 때문에 뒷세상에 여우처럼 아양 부려 임금의 자리를 빼앗은 자가 선위(선양)를 빙자하여 신하로서 임금을 치고서도 정의를 외쳤습니다. 그러니 네 임금이야말로 도둑의 시초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원생몽유록》,[28] 복건자[29]

8. 기타

베트남에서도 선양이 있었는데 대월 리 왕조가 진 왕조로 바뀔 때 소황 이불금(이천형)이 부군 태종 진경에게 선양했다. 베트남에서도 선양 후 이전 왕조는 수난을 겪어서 소황은 자녀가 없다는 이유로 이혼당했고[30], 리씨 황족들은 숙청당하거나, 성을 바꾸거나 외국으로 망명해야만 했다.

유럽에서도 로마 제국 오현제나 독일( 동프랑크 왕국)의 콘라트 1세- 하인리히 1세, 스웨덴 칼 13세- 칼 14세의 사례처럼 혈통상 관계가 없는 사람에게 왕위를 자발적으로 물려준 사례가 여럿 있으나 이들은 모두 현임 군주가 사망한 뒤에 왕위를 승계받았기 때문에 현임 군주가 살아있을때 왕위를 물려주고 선양한 이전 군주는 명목상 제후로 대우해준다는 개념인 중국식 선양과는 약간 다르다. 뭣보다 오현제와 칼 13세-칼 14세의 경우엔 어디까지나 양자로 입양하고 즉위시킨 케이스고[31] 콘라트 1세-하인리히 1세는 아예 콘라트 1세의 의지와는 연관도 없었다.

한편, 조지 워싱턴의 행보를 보고 '세습하지도 않고 추거의 법을 세워 천하가 공공의 것임을 천명했으며, 왕후를 세우지도, 세습의 법도를 따르지 않으며, 나라의 일을 공론에 따라 처리해 고금에 없는 새로운 체계를 세운 기인'으로 평가한 청나라 학자들은 대통령제를 이상적인 선양의 사례로 꼽았던 것으로 보인다. 서계여와 그의 지인들은 워싱턴을 찬양하는 글을 미국 의회에 전달했고, 이는 워싱턴 기념탑에 새겨져 있다.

9. 미디어의 선양

10. 같이보기


[1] 그리하여 의무이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의무를 부여받은 자(=군주)는 본인이 싫어도 천명을 수행해야 했다. [2] 덕을 잃은 폭군을 쫓아내는 것. [3] 한신, 영포, 팽월 초한전쟁 당시의 7왕. [4] 웃기게도 공화국의 총통이었던 장제스도 이를 따라하여 나중에 중화민국 총통 자리를 세 번 사양하는 척 하다가 받았다. [5] "요 임금의 덕이 쇠해지자, 순 임금이 요 임금을 감금했다"는 기록이 나와 있다. 나중에 풀어주긴 하지만, 애초에 둘의 사이가 나빴다는 것. [6] 당시 남중국은 열대우림에 가까울 정도로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영역이었다. 화남이 완전히 개척된건 북송 시기로, 상당한 시간이 흘러야 했다. [7] 즉, 이 2명은 생몰년이 완전히 일치한다. [8] 정작 헌목황후는 조씨임에도 망해가는 한나라 헌제에게 충성을 다했으며 조비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뒤 사자를 보내 인수를 달라고 했다. 이에 '유일하게 헌목황후만이 저항하였으며 몇 차례나 성을 내면서 주지 않았으나 끝내 막을 수 없을 것 같자 결국 옥새를 난간 아래에 집어던지고 나서 소리내어 울며 말하기를 "하늘이 절대로 너희를 돕지 않을 것이다!"라고 외치면서 통곡했다. 이후 조위 사직은 후한 말 헌제가 당한 것을 그대로 똑같이 아니 그 이상으로 비참한 수모들을 겪으며 망조가 단단히 들고 말았다. [9] 아닌게 아니라 바로 본인이 선양받은 환현을 역관광 시켜버렸기 때문에 본인 입장에서는 자기도 환현처럼 다른 유력자가 세력을 규합시킨 뒤 역관광 시킬 수 있다는 두려움을 크게 느꼈을 것이다. [10] 실제로 유송의 마지막 황제 순제와 왕경칙의 대화에서도 이게 나온다. 자세한 내용은 송순제 항목 참고. [11] 후세의 사학자들은 이 살육을 무쓸모라고 평가하고 있다. 오죽하면 소도성의 유송 황가의 학살을 두고 이미 후폐제가 저지른 막장 행각들로 천명이 유씨에게서 떠났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겠느냐는 평가도 존재했다. [12] 그런데 소연 제(육조) 종친으로 촌수를 따지면 소보융의 4종숙부(11촌)이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양위지만 국호가 바뀌어서 다들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 [13] 북위에서 제왕에 봉해졌고 관직이 삼공에 이르렀으나 모반 세력중 하나인 묵기추노에게 잡힌 이후 반란을 종용받다 이주영에게 토벌되어 죽었고 그의 자식들도 다른 죄에 휘말려 모두 죽어 결국은 멸족당했다. [14] 소종의 어머니 오씨는 소보권의 후궁이었고 소종은 소보권이 죽은 지 7개월 만에 태어났다. 하지만 소보권이 죽은 후 소연이 손에 넣었으므로 소연의 아들이라고도 한다고는 하지만 소보권의 아들일 확률이 높다. [15] 이것은 고환에게 모욕을 당한 북위의 효무제가 말을 타고 장안으로 도망친 일이 또 일어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16] 동위와는 다르게 일족 자체가 멸족되지는 않아서 당나라때 원씨는 명문귀족가가 된다. 애초에 당나라 황실에 원씨의 피가 섞여 있기도 하고. [17] 여담으로 주전충은 이와 동시에 당나라의 지배층을 제대로 도륙해버리는데 그 덕분이라고 해야 할 지 한나라때부터 이어지던 문벌귀족의 역사가 이 때에 완전히 끝장났다. 새로이 들어선 통일왕조인 송나라가 과거제를 통한 새로운 지배계층을 세울 수 있었던 건 사실 이렇게 주전충이 구 왕조의 지배층을 제대로 박살낸 덕도 있었다. [18] 사실상 이변이 제위를 찬탈한 것에 가깝다. [19] 돌에 유훈을 새기고 새 황제가 즉위하면 반드시 이를 보고 지키도록 했는데, 이것의 존재는 송 황실 최고의 극비였던 까닭에 아무리 총애받는 신하라고 해도 그 존재를 몰랐다고 한다. 결국 금나라 송의 수도 변경(개봉)을 점령한 후에야 그 정체가 공개되었는데, 내용은 제위를 선양한 시씨 가문을 지켜줄 것과 '상소하는 사람을 죽이지 말 것', 그리고 '어기는 놈은 하늘이 조질 것'이었다고. [20] 다만 주원장에게 선양의 대상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실질적으로는 서로 다른 세력에 불과했지만, 명목상 같은 홍건적인 용봉정권의 황제 한림아가 송 황실의 후계자를 자처하고 있었다. 명 건국 직전의 시기에 주원장은 세력을 잃고 몰락한 한림아를 보호하고 있었으나 선양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한림아 사후 주원장이 독자적으로 즉위하였는데, 이에 대해서 주원장이 의도적으로 한림아를 살해했다는 의혹도 있으나 명확히 밝혀진 바는 없다. [21] 1냥은 은으로 계산되며 현재 중국 돈 200위안, 한국 돈으로 4만 원 정도라고 한다. 현재 한국 돈으로도 1600억 원 정도이니 대단한 금액이다. 물론 황실이 거느린 시종 같은 인원이 꽤 많았던 데다 각종 행사에 지출되는 금액도 꽤 되었을 테니 퇴임 황제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은 이보단 적었을 것이다. [22] 푸이가 광서제의 양자 자격으로 황위를 이었기 때문에 푸이의 법적 아버지(양부)는 광서제다. [23] 패왕별희에 보면 잠시 이 장면이 묘사된다. [24] 한국으로 비교하면, 국회 도서관의 연구원쯤 된다. [25] 왕망과 동탁 둘 다 신하로서 주군인 천자를 폐위하고 죽인 인물들이다. [26] 그래서 여기서 피하기 위해 왕(王) 자를 살짝 고친 전(田)씨나 전(全)씨, 옥(玉)씨 등으로 위장한 사람도 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런 이야기는 전씨나 옥씨가 가짜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어 해당 성씨 당사자들은 불쾌해하는 사람이 많음을 주의해야 한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성을 바꿔 숨어 지낸 사례는 분명히 있다. 다 그런 건 당연히 아니지만. [27] 상나라의 건국자. 이 사람은 엄밀히 말해 선양을 받은 게 아니라 하나라를 멸망시키고 왕이 된 것이다. [28] 조선 선조 때 임제의 소설. 선비가 책을 읽다가 꿈에서 단종과 사육신을 만나 대화를 나누게 된다는 내용의 소설이다. [29] 소설 내에서 복건자가 이 말을 하자마자 임금(단종)은 '네 임금이 덕이 있었고 각자에 맞는 시대를 만났기에 네 임금의 선위(선양) 역시 옳은 것이었으며, 훗날 이를 빙자한 이들이 문제였을 뿐'이라고 반박한다. 이후 복건자도 스스로의 마음속에 불평이 쌓여 지나치게 분개했다며 임금의 반박을 수용한다. [30] 그래도 다행히 재혼도 하고 재혼한 남편 사이에서 1남 1녀도 얻었으며 천수를 누리고 60세에 사망하여 선양한 군주 치고는 최후가 좋은편에 속한다. [31] 다만 차이가 조금 있는데 오현제의 경우엔 왕조 이름이 바뀌지 않았지만 후자의 경우 아얘 왕조의 이름까지 바뀌었다. 이는 당연한데 오현제의 경우 네르바만 빼면 직계만 아니지 집안은 동일했고 그게 아니더라도 당시 로마는 직계자손이 없다면 친척 등에서 양자를 입양해 대를 이었기에 충분히 왕조 이름이 같을 명분이 있었지만 칼 13세와 칼 14세는 국적조차 생판 다른 남남이었다. 칼 13세는 당연히 스웨덴인이지만 칼 14세는 프랑스인에 그것도 평민 출신이다. 칼 14세라는 이름조차 스웨덴식으로 바꾼 이름이고 본명은 '장바티스트 쥘 베르나도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