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미야자키 츠토무 [ruby(宮,ruby=みや)][ruby(﨑,ruby=ざき)][1][ruby(勤,ruby=つとむ)] | Tsutomu Miyazak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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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 |
오타쿠 살인마 The Otaku Murderer |
인간 드라큘라 The Human Dracul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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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62년 8월 21일 |
일본
도쿄도
니시타마군
이츠카이치정 (現 도쿄도 아키루노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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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2008년 6월 17일 (향년 45세) |
일본 도쿄도 도쿄 구치소 사형집행장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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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 정보 | |
유형 | 유괴, 토막살인, 시간, 사체유기 |
피해자 | 5명[2] |
범행기간 | 1988년 ~ 1989년 |
체포 | 1989년 7월 23일 |
형량 | 사형( 교수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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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뉴스 보도에 나온 미야자키 츠토무의 모습 |
"소녀들의 몸을 내 것으로 하고 싶었다. 사체는 썩어버려도 비디오는 다시 볼 수 있지."
1988년부터 1989년까지 발생한 도쿄·사이타마 연쇄 유아납치 살해사건(東京・埼玉連続幼女誘拐殺人事件)의 범인.
2. 생애
그의 성장 배경에 대해 다룬 영상이다. 고등학교 시절 사진이 나오는데 검거될 때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 보인다.
1962년 8월 21일 일본 도쿄도 니시타마군 이츠카이치정(五日市町, 현재 아키루노시)에서 아키카와 신문(秋川新聞)이라는 지역 신문사를 운영하는 유복한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집안은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 여동생 2명으로 7명의 대가족이었다.
미야자키 츠토무의 생가[3] |
그의 증조부는 촌(村)회 의원, 조부는 정(町)회 의원으로 일했기 때문에 그 지역의 명사였다고 한다. 미야자키 가는 대대로 직조공장을 운영하다가 아버지 대인 1957년부터 주간 발행 신문사를 시작하였는데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양잠업이 쇠퇴하여 경영이 악화되자 새로운 사업을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 아버지가 지역정보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신문 발행을 떠올렸다고 한다. 무가지였기 때문에 광고 수입만으로 회사를 유지했으며, 인쇄소에 돈을 내고 나면 남는 것이 없어 나중에 인쇄기를 들였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광고 모집 영업, 할머니는 광고료 수납, 아버지가 취재와 편집, 어머니가 인쇄를 맡는 가내수공업 수준이었다. 본래 신문에 문외한이었기 때문에 전문 기자였던 초등학교 동창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으며, 그의 동생인 사카모토 테이지가 취직 전 젊은 시절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출생 당시 미숙아였고, 손에 기형이 있어 손바닥을 뒤집지 못하는 장애가 있었다. 정확한 병명은 양측 선천성 요척골 유합증(両側先天性橈尺骨癒合症)인데 당시 일본에 150명 정도밖에 사례가 없는 매우 드문 질환으로, 팔목과 팔꿈치를 잇는 2개의 뼈의 일부 또는 전체가 붙어 있어서 손바닥이 하늘을 바라보도록 회전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되는 희귀한 질환이다. 정도가 심한 경우에는 손등으로 세수를 할 수밖에 없기도 하며[4] 유전적으로 문제가 있는 증상이기 때문에 수술로 뼈를 강제로 분리시켜도 곧 조직이 재생된다. 정도가 심하지 않은 이상 물리치료만 하고 수술은 권장하지 않는 것이 중론이다.
어릴 적 손의 상태를 본 의사에 따르면 "수술하더라도 100명 중 1명밖에 성공하지 못한다. 일상생활에 큰 장애가 없다면 좀 더 크고 나서 수술을 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했고, 그의 아버지는 "츠토무는 어릴 적부터 손이 자유롭지 못한 것을 신경쓰며 무언가 잘 되지 않으면 손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왔다. 4살쯤 수술도 생각했지만 만약 수술 후 장애인이라는 평판을 받는다면 장래에 나쁜 결과를 끼칠 것이라 판단해서 수술하지 않고 그대로 놔두었다"고 하며 사실상 방치시켰다. 이 때문에 그는 살아오며 어머니보다 아버지에게 큰 증오를 느꼈고, 가부장적이며 일밖에 모르던 아버지에게 어떠한 애정도 받지 못했다.
부모는 맞벌이를 하느라 분주한 탓에 태어난지 얼마 안 된 갓난아기였던 그는 가족들이 딱하게 여겨 고용한 지적장애가 있는 남성 베이비시터와 할아버지의 보살핌을 받고 자랐다. 집안의 엄격한 분위기로 인해 권위적이었던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못했고 그를 이해하는 사람은 오직 그의 할아버지뿐이었다.
3. 학창 시절
중학교 시절 |
초등학교 시절에는 천재 혹은 박사라고 불릴 정도로 공부에 열중하여 우등한 성적을 거두었고, 중학교 시절에는 육상부와 장기부에 소속돼있었다. 장기의 재능은 뛰어나서 다양한 공략 책으로 팁을 얻으며 처음에 졌던 상대에게 이길 때까지 도전했다고 한다.
하지만 초등학생 시절부터 반에서 딱히 인기 있거나 눈에 띄는 학생은 아니었다. 중학교 때 통신교육으로 가라테를 배웠는데, 어둡고 조용한 그가 운동을 배우는 것에 대해 동급생들이 놀리자 “그럼 손으로 책상을 베어볼까?”라며 미친듯이 책상을 쳤다고 한다.
고등학교 시절 |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 시절에는 손의 장애를 이유로 일부러 남고이자 편도 2시간이나 걸리는 메이지대학 부속 나카노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명문대인 메이지대학으로 추천 입학을 희망했지만 상위권이었던 초, 중학생 때와는 다르게 성적은 맨 끝에서 놀 정도로 하위권을 맴돌았고, 그 희망은 이루지 못했다.
입학 당초에는 그를 잘 모르던 동급생들이 말을 걸어주거나 같이 집에 가는 등의 친분을 보여주었으나 점점 몸집도 작고, 목소리도 작고, 성적도 나쁜 그를 다른 학생들이 괴롭히는 이지메가 있었다.
그는 학교가 끝나면 근처 책방에서 항상 아니메쥬 같은 애니메이션 잡지를 사고는 했는데 책방 주인은 그의 인상에 대해 "매번 ‘이거 주세요’라는 한번의 말 없이 입을 닫고 계산을 하러왔다. 전혀 특별한 특징이 없이 그냥 조용한 학생"이라고 증언했다.
대학 졸업 시절 |
1981년 고교 졸업 후에는 도쿄공예 단기대학에 진학했다. 이 시기에 퍼즐에도 관심을 두면서 자작 퍼즐을 전문지에 투고하거나 퍼즐 회답자로 잡지에 자신의 이름이 올려질 정도로 높은 성과를 거두었다.
1982년 NHK의 “YOU"라는 방송에 친구를 따라 방청객으로 TV에 노출된 적이 있는데 아나운서가 인터뷰를 진행하려고 하자 친구의 등 뒤로 황급히 숨어 버려 인터뷰는 진행되지 않았다.
심지어 단기대학에 재학하면서 학업을 거치던 와중에도 좋아하던 동급생에게 고백했으나 손을 뒤집지 못하는 장애로 인해 거절당했다고 한다.
NHK 방송 “YOU"에 잠깐 비춰진 모습 |
대인관계는 가족관계와 더불어 그야말로 막장 그 자체였다. 앞서 말한 손의 장애가 있었던 만큼 학창시절 집단괴롭힘을 당했다. 한 동급생의 언급에 의하면 그는 상당히 어둡고 눈에 띄지 않으며 타인들 눈밖에 난 소년이었다고 한다.
당시 대학 동급생이었던 아이돌 출신 가수 카와사키 마요(川﨑麻世)[5]가 훗날 미야자키가 체포된 후 인터뷰에서 "나는 기억력이 좋은 편으로, 80명 정도의 적은 학급이었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어야 하지만(기억나지 않았고), 다른 동급생에게 물어봐도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고 할 만큼 존재감이 희박했다.
1983년 대학 졸업 이후에는 숙부의 소개로 코다이라시의 인쇄 회사에 취직해서 인쇄기 오퍼레이터로 근무했지만 근무 태도와 평판이 아주 엉망이라고 평가할 정도였으며 일을 하다가 잠을 자거나 갑자기 일어나서 “저 집에 갈게요”라 말하고는 그대로 돌아가 버리기도 하는 등의 어리숙하며 낮은 사회성을 가지고 있었다. 숙부가 회사의 높은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사원들은 그의 각종 기행을 보면서도 쉽게 불만을 표출하지 못했다.
결국 1986년 3월, 상사에게 가나가와현으로 전근을 가라는 통보를 받았는데 그가 거부했기 때문에 퇴직당하고, 이후부터 자택 방 안에서만 머무는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 생활이 시작되었다.
당시 그는 심한 스트레스성 이명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하며 그런 그를 나무라며 부모가 가업을 도우라고 몇 번이나 이야기하여 9월 경부터 광고 원고를 받으러 가는 정도의 간단한 심부름으로 가업을 돕기 시작했다.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의 근무였고, 이 때 그가 받은 수당은 당시 대졸자 첫 월급인 14만 4,500엔보다 많은 15만엔이었다.
이 무렵부터 애니메이션 동인지를 발행하고 수많은 비디오 서클에 가입해서 전국 각지의 회원이 녹화한 애니메이션이나 특촬물 비디오를 더빙하고 교환하며 수집하기 시작했지만 자신은 비디오를 회원들에게 주지도 않으면서 다른 회원에게는 지속적인 녹화와 더빙 주문을 했기 때문에 결국 심한 질책과 미움을 받으며 겨우 1회만에 발행이 끝나 버렸다.
E・T・C大腕이란 서클명으로 참가한 코미케 카탈로그. |
이 때부터 그는 유소녀에게 집착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부모의 잦은 불화와 갈등, 선천적 장애로 인한 이지메, 그에 따른 사회부적응까지 더해 완전히 맛이 가기 시작해 이는 후술할 최악의 사태를 일으키고 말았다.
4. 도쿄·사이타마 연쇄 유아납치 살해사건
자세한 내용은 도쿄·사이타마 연쇄 유아납치 살해사건 문서 참고하십시오.5. 미야자키 츠토무의 방
언론에 공개된 미야자키의 방. |
자택 옆에 연결 통로로 이어진 건물에는 어린이 방이 있었다. 방은 3개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서쪽 사각에 위치한 작은 방이 그의 방이었다. 아버지의 허락에 취재를 간 기자들은 그의 방의 불길하고 음습한 기운에 말을 잃었다고 한다.
조그마한 방에는 창문을 가려 빛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어두컴컴하고 칙칙한 방에 비디오 테이프들이 천장까지 빽빽히 쌓여 있었고 그 수는 6,000개 가량이었다. 대형 TV와 4개나 되는 비디오 데크, 상자, 애니메이션, 아이돌 잡지와 만화책, 피규어들이 그의 평소 생활을 예측하게 했다.
방 바닥에는 온갖 서적들이 나뒹굴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유치원 입학 팜플렛같은 소아성애를 의미하는 묘한 것도 있었고 여성의 사진이 있는 테니스 클럽의 팜플렛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유행하던 소녀 애니메이션 아이돌 천사 어서오세요 요우코의 잡지도 있었다. 몇 개의 로리콘물을 빼면 대부분은 특촬 비디오나 영화, 지브리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하는데 취재차 들어간 한 기자가 생각보다 대중의 눈길을 끌만한 것이 없자 바닥에 겹쳐져 있던 ‘젊은 유부녀의 세탁하지 않은 속옷(若奥様のナマ下着)’이라는 에로 만화를 앞으로 끄집어내서 촬영했다. 이 만화는 뉴스 보도의 영상에도 송출되었다.
이 방 안에서 4번째 사건의 피해자인 노모토 아야코가 절단되고 시체가 전시되는 일이 벌어졌다.
6. 판결
1989년 8월 24일, 도쿄 지방 검찰청 총무부 진단실에서 간이 정신가정을 받은 그는 조현병이 있을 가능성은 부정할 수 없으나 인격장애에 더 가깝다고 판단하여 검찰에 기소되었다.첫 공판은 1990년에 진행되었는데 피고인으로 출석한 그는 범행의 외형적 사실은 인정했으나 유괴, 살인의 계획성에 대해서는 부인했다.
아버지에게 사선 변호인을 써 줄 것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여 국선 변호인이 같은 해 11월 그의 정신감정을 요구하였다.
5명의 정신과 의사와 1명의 임상심리학자로 이루어진 감정단은 "미야자키 츠토무가 어릴 적부터 손의 장애로 인한 열등감이 피해망상으로 번졌고, 그로 인해 이상성욕과 수집벽이 맞물려 범행을 저지르게 되었지만, 조현병은 아니며, 책임 능력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가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뼈를 먹었다"고 증언하면서 정신병에 의한 심신미약을 주장했으나 신빙성이 낮다고 판단했다.
그의 변호인은 할아버지의 묘지가 살짝 움직여 있다(=묘지를 파내 뼈를 먹었다)고 주장했으나 근거가 낮다고 결론지었다.
결국 1997년 4월 판결공판에서 도쿄 지법은 그에게 사형 판결을 확정지었다.
7. 사형 확정 이후
그는 사형 확정 이후 바로 집행되지 않고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었다.일본의 사법부는 사형이 확정되면 6개월 이내에 집행하게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바로 집행하지 않으며, 높으신 분들이 특별히 재촉하지 않는 이상 수 년은 기다려 주는데 혹시라도 재심을 청구할 가능성도 있고[6] 인생을 정리하고 죽음을 받아들일 시간을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1997년의 판결로부터 약 11년이 지난 2008년에야 그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비슷한 사건으로 2004년 아동 납치 살인죄로 2013년 2월에 처형된 고바야시 가오루 사건이 있었는데 범인은 자신이 ‘제2의 미야자키 츠토무’라는 망언을 늘어놓았다.
구치소에 수감된 상태로 고바야시 가오루의 이 말을 들은 미야자키 츠토무는 "정신 감정도 받지 않은 자가 제2의 본인이라고 운운하지 마라"고 반박하기도 했다
8. 기타
수감 생활 중 잡지 「창」 편집부와 주고받은 서신을 묶어 다음 2권의 저서를 냈다.- 꿈 속 - 연속 유녀 살해 사건 피고의 고백 - 1998년 12월 창출판(ISBN 9784924718302)
- 꿈 속, 지금도 - 연속 유녀 살해 사건 전 피고의 고백 - 2006년 2월 창출판(ISBN 9784924718722)
그에 대해 형사 책임 능력 판단을 위한 정신감정에 참석한 의사가 정신감정에 대해 자세히 쓴 책이 번역되었다.[7]
이 충격적인 사건은 일본의 미스테리 소설이나 관련 매체에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살육에 이르는 병 등이 있다. 일본의 추리 소설가 누쿠이 도쿠로도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소설 '통곡'으로 데뷔했다.
대한민국에선 이 사건을 MBC 실화극장 죄와 벌 65~66회(2004년 5월 11일, 18일 방영분. 1, 2)에서 다루었는데 그의 이름은 방영 당시 ‘토모야’라는 가명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당시 대한민국에서는 오타쿠 문화가 정착되기 전이었으므로 그가 오타쿠였기 때문에 이러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보지 않고 선천적인 손의 장애, 그로 인한 이지메와 엄격한 집안 분위기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일어난 범죄로 묘사하였다.
이 방송에서는 가택수사를 통해 음란물을 수집했다는 사실이 공개되었다. 방송하던 시기는 그의 정신감정이 진행되던 중이었기 때문인지 다중인격설을 어느 정도 반영해 할아버지 흉내를 내는 그의 모습이 등장했다. 당시로서는 신인이었던 재연배우 이중성[8]이 미야자키 츠토무를 연기했는데 나중에 그는 츠토무보단 3개월 뒤 방영된 77~78회 천공교 편의 신도였던 이호섭(가명)의 연기가 더 좋았다고 말했다. 참고로 둘 다 정상보다 약간 모자란 캐릭터였다.
츠토무의 아버지가 공판 도중 자택에서 목을 매 자살하는 장면도 나왔는데 드라마와는 달리 실제로는 강가에 뛰어내려 자살하였다. 마지막에 츠토무가 사형 선고를 받고 변호사(연극배우 이성용이 연기)가 "최선을 다했지만 일이 이렇게 되었다."고 사과하자 츠토무가 "결국 이렇게 죽냐?"며 말하다가 갑자기 할아버지 목소리로 횡설수설한다. 그러자 교도관이 머리를 때리며 변호사에게 "이 자식은 교도소에서 맨날 이런다. 속지 말라."고 한다. 변호사는 벙찐 표정을 지으며 끝.
2004년에 방송되었고 2년 뒤인 2006년에 사형이 확정되었으며 4년 뒤인 2008년에 사형이 집행되었기 때문에 대법원 상고까지의 내레이션까지만 나오고 사형 집행 장면까지는 방송되지 못했다. 이 에피소드의 제목이 꿈속의 살인인데 상술한 그가 옥중에서 낸 2권의 저서에서 따 온 듯하다.
9. 여담
정신과 의사들의 감정 결과, 그는 소아성애자라기보다는 단순히 어린아이가 범행 대상으로 삼기 쉽기 때문에 선택한 것이라고 한다. 그는 최초 심문에서 네번째 사건 때 시신을 집에 놓아둔 것에 대해 “옆에다 두면 내 것이 될 수 있으니까”라고 답변하였고 “어른인 여성은 날 상대해주지 않아서”라고 했다. 그는 누구보다 여자 자체에 관심이 많았지만 평상시에도 동등한 또래 여성들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섹스라는 단어도 불편하다고 얘기하였다. 실제로 아동 성범죄는 소아성애자가 저지르는 경우보다 성인 남성이 약취하기 쉬운 약자라서 저지른 경우가 많다. 둘 다 아동 성범죄자라는 것엔 변함이 없지만.그가 범행을 저지른 하치오지시 코미네 터널의 변전소는 한때 살해된 아이들의 유령이 보인다는 목격담이 떠돌아 일본의 심령스팟 장소 1위에 오르기도 하였다.
이곳에 들어가면 더 자세한 내용을 볼 수 있다.
호러 게임인 새드 사탄에 그의 이미지가 등장한다.
10. 유사 사건
- 나라 초1 유괴 살인사건
- 안양 초등생 유괴 살인 사건
- 인천 동춘동 초등학생 유괴 살인사건
- 조두순 사건
- 찰스 맨슨 - 어두운 성장 배경과 특정 문화에 심취한 점, 살인범이라는 점이 비슷하다.
[1]
많은 매체에서는 崎로 표기하는데 애초에 둘은
동자(同字) 관계에 있는 데다 﨑가 상용한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2]
살인 4명, 성폭행 미수 1명.
[3]
사건 이후 전부 철거되어 주차장이 돼있다. 토지를 내놨으나 사는 사람이 없어 아직도 미야자키 가가 관리 중이다.
[4]
연행되는 도중 촬영된 사진 상으로는 손등으로 세수하는 정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5]
일본의 중견 배우 겸 가수. 1963년 3월 1일
교토부
교토시 출생으로 2015년에는
박상철의
무조건을
일본어로 리메이크하여 불렀다.
[6]
실제로
누명을 쓴 게 의심되어 집행을 보류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인 예시로
나바리 독포도주 사건 등이 있다.
[7]
와다 히데키의 다중인격(이준석 옮김, 학지사) ISBN9788975489921
[8]
현재는
이수완으로 개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