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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연방 상원의원 (매사추세츠 주 클래스 1) | ||||
제87대 벤저민 스미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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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7~111대 테드 케네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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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제87-111대 연방 상원의원 에드워드 무어 "테드" 케네디 Edward Moore "Ted" Kenned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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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44C9><colcolor=#fff> 출생 | 1932년 2월 22일 | ||
미국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 | |||
사망 | 2009년 8월 25일 (향년 77세) | ||
미국 매사추세츠 주 하이애니스 포트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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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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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페이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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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44C9><colcolor=#fff> 가문 | 케네디 가문 | |
부모 |
아버지
조셉 P. 케네디 (1888~1969) 어머니 로즈 피츠제럴드 케네디 (1890~19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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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자매 |
형
조셉 P. 케네디 주니어 (1915~1944) 형 존 F. 케네디 (1917~1963)[3] 형 로버트 F. 케네디 (1925~19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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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조앤 케네디 (결혼: 1958년, 이혼: 1982년) 빅토리아 케네디 (결혼: 199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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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장녀 캐라 케네디 (1960~2011) 장남 에드워드 케네디 주니어 (1961~)[5] 차남 패트릭 J. 케네디 (196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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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 188cm | ||
학력 |
밀튼 아카데미 (졸업) 하버드 대학교 ( 역사학, 행정학 / B.A.) 버지니아 대학교 ( 법학 / L.L.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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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기독교 ( 가톨릭) | ||
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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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 선수 | 9 (상원) | ||
의원 대수 | 87, 88, 89, 90, 91, 92, 93, 94, 95, 96, 97, 98, 99, 100, 101, 102, 103, 104, 105, 106, 107, 108, 109, 110, 111[7] | ||
지역구 | 매사추세츠 클래스 1[8] | ||
별명 | 상원의 사자(Lion of the Senate)[9], 끔찍한 테디(Teddy the Terrible)[10], EMK[11] | ||
경력 |
연방 상원의원 (매사추세츠 클래스 1 / 1962~2009) 상원 다수당 원내총무 (1969~1971) 상원 사법위원장 (1979~1981); 상원 보건위원장 (1989~1995, 2001, 2001~2003, 2007~2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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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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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기 / 중년기 / 노년기 |
케네디 가에서 정계에 진출했던 3명의 형제 중 유일하게 암살을 피했으며, JFK의 지역구를 물려받아 무려 47년간 매사추세츠 주의 연방 상원의원으로 재직했다.[13] 21세기에 들어서도 유일하게 생존했던 케네디 가의 형제라는 점과 40년 이상 상원의원으로 재직한 정치경력 때문에 말년에는 상원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렸다. 같은 민주당 뿐 아니라 공화당에서조차 테드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위상과 권력이 무지막지했다. 민주당의 진보적 계파를 대표하는 리더로서 보편 건강보험을 비롯한 여러 진보적 법안을 통과시켜 오늘날까지 민주당 내 진보 계열의 정치적 선구자 중 1명으로 평가받고 있다.[14] 또한 건강이 악화되던 말년까지도 병실에서 직접 업무를 챙기는 등 의정활동에 있어 매우 성실한 태도를 보여 유권자들과 정가로부터 좋은 평가를 듣기도 했다.
그러나 1969년 차파퀴딕 사건으로 여비서를 부당하게 숨지게 했으면서 정작 자신은 인맥과 지위를 이용해 중형을 피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 이후로도 반성 없이 무분별한 알코올 중독, 마약 복용[15], 난잡한 성생활 등 적절하지 못한 사생활을 영위했으면서도 "케네디 가문"이라는 이름만으로 자신에 대한 모든 형사 처벌을 무효화시켰다.[16] 이 때문에 자신의 권력을 남용한 전형적인 "기득권 좌파"라고 비판받았으며, 역사가들 사이에서도 그에 대한 평가는 "미국 진보정치의 이상을 구현하려 한 인물" 혹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 다닌 인물"로 양극화되어있다. 여러모로 케네디 가문의 이미지에 부합하는 인물이라는 평가도 받는다.
차파퀴딕 사건을 비롯한 사생활적인 문제 때문에, 오랜 정치경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권의 꿈에 다가가지 못했다.
2. 생애
2.1. 유년기와 청년기
미국의 대표 정치 명문가인 케네디 가문의 9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첫째 조 케네디 주니어와는 무려 17살 차이로 어릴 때에는 조 케네디 주니어, 존 F. 케네디와는 데면데면한 사이였다고 한다. 로버트 F. 케네디와는 친했다고. 아버지 조셉 P. 케네디와도 44살 차이로 거의 할아버지와 손자 수준의 나이 차이가 있었다. 조셉 케네디는 아들을 엄하게 대했지만 테드만큼은 중년이 된 후에 얻은 자식이라 귀여워하며 키웠다고 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나이 차이가 컸고 정치 명문가 특성상 테드 케네디는 어릴때부터 가족과 떨어져 기숙 학교에서 외롭게 자랐다.어린 시절 누나와 형이 각각 지병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전사 등으로 불우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을 보고 트라우마를 얻기도 했다. 이런 사정 때문에 고등학교 시절에는 테니스 같은 운동에 빠져들었고, 공부는 거의 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성적은 평균 C~D 학점으로 바닥을 쳤고, 졸업반 56명 중 36등으로 졸업하는 등 결코 우등생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 조셉 케네디가 하버드 대학교 총장과 친구였기 때문에 아버지가 빽을 써서 기부입학 전형으로 하버드 대학교에 들어간다.
그렇게 하버드 대학교에 들어가놓고 또 퇴학당했다. 1학년 1학기 시험에서 다른 학생의 시험지를 통째로 배끼고, 2학기에는 통크게 스페인어 수업 시간에 친구한테 대리시험을 봐달라고 부탁했다가 들통이 나 쫓겨난것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또 빽을 써줘서 하버드 대학교 측에서는 1~2년 기간동안 사고를 안치면 재입학하게 해주겠다고 통보했다. 테드 케네디는 이 말을 듣고 1951년 6월 미군에 입대했다.[17] 원래 테드 케네디는 한국 전쟁의 최전선에 배치되어야했지만, 아버지가 또 손을 써줘서 편하게 주프랑스 미군으로 입대했고 이 기간 동안에도 놀아서 알프스 산맥에 여행을 가고 스키를 타는 등 황제와 같은 생활을 누렸다.
1953년, 21개월의 군 생활을 마친 테드 케네디는 다시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했다. 역시 공부를 전혀 하지 않고 미식축구만 열심히 해서 3년 내내 성적이 개판이었다. 마지막 1년동안 정신을 차리고 공부했지만 학점은 B학점 이상으로 오르지 않았고 딱 졸업할 수 있을 정도만큼의 학점만 챙겼다. 성적이 너무 엉망이어서 하버드 대학교 로스쿨에 진학할 수 없었고 그 대신 버지니아 대학교 로스쿨에 진학했다. 버지니아 대학교 로스쿨 교수진은 테드 케네디 같은 열등생에 부정행위 전과자가 입학하는건 말이 안된다며 난리를 쳤지만 역시 아버지 빽으로 해결. 로스쿨에 다니면서도 무면허 운전과 난폭운전 혐의로 여러차례 경찰에 붙잡혔지만 또다시 아버지 빽으로 문제를 해결하였다. 성적은 C학점으로 중간정도였다.
1958년 테드 케네디는 형 존 F. 케네디의 상원의원 재선을 도우면서 정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2.2. 1960년대: 정계 진출
1959년 로스쿨을 졸업한 테드 케네디는 더욱 적극적으로 지역 정계에 진출할 야심을 보였다. 지역 유지들과 함께 스키를 타고 파티도 하면서 친목을 다지는 한편, 남아메리카를 여행하며 견문을 쌓고 이를 바탕으로 유력 신문인 보스턴 글로브에 칼럼을 기고하는 등 보스턴 지역에서 인망을 차곡 차곡 쌓아나갔다. 물론 백수는 아니었고 보스턴 지역에서 지방검사(DA)로 활약했지만, 월급을 받지 않았고 경력을 쌓기 위한 인턴십에 가까웠다.그러던 중 1960년 대통령 선거에서 존 F. 케네디가 당선되면서 존 F. 케네디의 지역구였던 매사추세츠 주 클래스 1 의석이 공석이 되었다. 테드의 나이 역시 상원의원 선서를 할 수 있는 30세가 되었고, 그렇게 1962년 치러진 매사추세츠 주 상원 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했다. 테드는 매사추세츠 주 상원의원 선거를 위한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에드워드 매코맥 주니어[18]를 69% 대 31%로 격파하고 본선에 진출, 헨리 캐벗 로지의 아들 조지 C. 로지를 55% 대 42%로 크게 꺾고 당선되었다. 로스쿨 졸업 후 어떤 경력도 없었던 점을 감안하면 그저 가문의 이름빨만으로 당선된거나 다름이 없던 셈.
이 때문에 테드 케네디는 형 로버트와 달리 당의 중진 의원들에게 언제나 공손하게 대했고 남부 의원들에게서 귀염을 받았다. 심지어 로버트와 존 모두를 경멸했던 린든 B. 존슨 부통령마저 테드 케네디는 좋아했고 그가 최고의 케네디가 될 것 같다고 말했을 정도이다. 악명높은 극우 인종주의자인 제임스 이스트랜드는 그런 테드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줬다. 그러면서도 묵묵하게 흑인 민권법을 비롯한 진보적인 입법 활동으로 경력은 부족할지언정 정치력은 부족하지 않다는 평가를 받는데 성공한다.
1963년, 형 존 F. 케네디가 총격을 받아 사망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테드 본인도 1964년 비행기 사고로 죽다 살아났다. 테드는 인디애나 주 상원의원인 버치 베이와 함께 민주당 전당대회 참석을 위해 비행기를 타고 워싱턴에서 매사추세츠로 날아가고 있었는데, 악천후 때문에 비행기가 불시착해 한 과수원에 추락해 박살이 난 것이다. 테드 케네디의 보좌진과 비행기 조종사는 즉사했고, 테드 케네디도 비행기 잔해에 끼어 크게 다쳤다. 다행히 버치 베이 의원은 무사했고, 베이 의원은 그를 잔해 속에서 끄집어내 구급차를 불렀다. 비록 목숨은 건졌지만 갈비뼈가 몇개나 부러졌고 내출혈이 있어서 몇달간 병원에 누워있는 신세가 되었다.
이어 1968년 대선을 앞두고 형 로버트 F. 케네디마저 암살당하자, 테드는 큰 절망에 빠졌다. 테드는 로버트 케네디가 출마하지 않기를 바랬지만, 1968년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존슨 대통령이 유진 매카시에게 일격을 당하면서 재선 불출마를 선언해 로버트 케네디가 뒤늦게 예비선거에 뛰어든 상황이었다. 로버트 케네디 진영 측에서는 불과 36세에 불과했던 테드 케네디를 대타로 세우자는 "Draft Ted" 운동을 벌였지만 테드 본인이 거부했고, 대신 로버트 케네디의 측근이었던 사우스다코타 주 상원의원 조지 맥거번이 로버트 케네디 측 선거운동원과 테드 본인의 지지를 얻게 되었다. 결국 조지 맥거번은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휴버트 험프리를 꺾지 못하고 대통령 후보 지명권을 얻지 못했으나, 휴버트 험프리 그 자신도 1968년 대선에서 닉슨에게 패배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겪으면서 테드 케네디는 몇년만에 케네디 가문의 총아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는 1972년 대선에서의 선두주자였으며 이를 뒷받침하듯 1969년 1월 민주당 상원 원내총무[19] 자리에 출마해, 현직 러셀 B. 롱[20]을 31대 26으로 꺾고 원내총무의 자리에 오르는 이변을 일으켰다.
2.3. 1969년: 차파퀴딕 사건
자세한 내용은 차파퀴딕 사건 문서 참고하십시오.그러나 1969년 7월 18일, " 차파퀴딕 사건"(Chappaquiddick incident)에 휘말리며 정치 생명에 치명타를 입었다. 테드 케네디는 보스턴 교외에 위치한 차파퀴딕 섬의 개인 소유 별장에서 술 파티를 가졌고 새벽에 늦게 여비서 메리 조 코페크니와 자동차를 타고 드라이브를 했다. 그런데 밤중인데다 음주운전 상태라 테드 케네디의 눈이 흐려졌고 낡은 나무 다리를 지나던 중 자동차가 거꾸로 바닷물에 빠지고 말았다. 테드 케네디는 간신히 빠져나왔지만 여비서는 숨을 거두었다.
문제는 이때 테드 케네디의 대응이었는데 테드 케네디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10시간동안이나 경찰에 신고를 하지 않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물에 빠진 자동차를 발견한 것은 동네 낚시꾼들이었고, 테드가 경찰에 신고를 한 것은 이미 낚시꾼들이 신고를 해서 경찰에 의사까지 출동하고 잠수부가 차의 시신도 발견한 뒤였다.
이틀 뒤 역사적인 아폴로 11호 달 착륙이 이루어져 테드 케네디의 스캔들은 잠깐 잊혀지나 싶었지만 테드 케네디와 아내의 소원한 관계가 부각되고 급기야 물에 빠져 죽은 여비서가 임신 초기 상태였다는 근거 없는 헛소문까지 퍼지며 논란이 커졌다. 젊은 나이에 부와 명예를 모두 가졌고 잘생기기까지 한 테드가 여비서와 바람이 났고 이 관계를 숨기려고 일부러 여비서를 물에 빠트려 죽였거나 혹은 관계가 들키기 싫어 방조했다는 음모론이다.
물론 이는 근거가 없는 것이고 테드 케네디의 전기작가들에 의하면 테드가 10시간 동안이나 신고를 하지 않은 이유는 음주운전으로 인한 사고 때문에 대권주자 + 케네디 가문의 간판으로서의 이미지에 타격이 갈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말해 한순간의 실수 때문에 차기 대선 출마에 발목이 잡힐걸 걱정하다가 결국 영원히 대선에 출마하지 못하게 된 소탐대실이었던 것이다. 거기다 술을 마신 상태라 의사 판단 능력이 흐릿해졌고 10시간이 지난 후라면 술 기운이 가셨기 때문에 음주 운전 판정이 나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도 있었다.[21]
하여간 이 때문에 테드 케네디는 "여비서와의 섹스 스캔들을 덮으려 차 사고를 내고도 여비서를 구하지 않은 냉혈한" 혹은 "여비서와 놀아나는 문란한 부잣집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얻게 되었고 정치 경력마저 거의 끝장나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 그나마 케네디 가문이라는 이름이 있었기에 징역 2개월, 집행유예 1년, 운전면허 정지 1년이라는 솜방망이만도 못한 처벌을 받았지만, 이 사건으로 테드 케네디는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측근 조지 맥거번에게 다시 대통령 선거 출마를 양보해야했고, 1971년에는 극우 성향 로버트 버드[22]에게 민주당 상원 원내총무 자리까지 잃는다. 그것도 표결 결과 24표 대 31표라는 제법 큰 차이로.[23] 테드 케네디의 원내총무 연임 실패는 1972년 대선 선두주자로서 그의 지위를 완전히 박살냈다. 일반 정치인이었다면 정계에서 퇴출되고도 남았을 사건을 겪였음에도 계속 활동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케네디 가문의 일원이었기 때문이다.
이 스캔들은 2018년에 영화로도 나왔으며, 그보다 한참 전인 1990년대 초반에 조이스 캐럴 오츠가 차파퀴딕 스캔들을 소재로 해서 '블랙 워터'라는 단편을 발표한 바 있다.
2.4. 1970년대: 진보주의의 사자
테드 케네디는 비록 차파퀴딕 사건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던 대권 유망주라는 기대는 물론 원내총무직까지 잃고 말았지만 오히려 이는 테드에게 기회가 되었다. 테드 케네디는 1971년 원내총무 직위를 로버트 버드에게 잃으면서 그 이전까지 자신이 대권 출마를 위해 억누르고 있던 진보적인 신념을 공개적으로 표출할 수 있게 되었다며 차라리 해방감을 느꼈다고 후일 진술한 바 있다. 테드 케네디는 1972년 대선에서 민주당 진보진영을 이끄는 또다른 상원의원 조지 맥거번이 대선 후보가 될 수 있도록 도왔으며, 본선에서도 그를 열심히 지원해 매사추세츠 주에서 맥거번이 꽤 크게(55대 45) 이기는데 도움을 주었다.[24]이 시기 테드 케네디는 상원 보건위원회에서 열심히 활동하며 보편적인 건강보험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 그의 목표는 모든 미국인들이 저렴한 가격에 질 높은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었으며 이를 위해 전방위적으로 정책을 연구하고 상원의원들을 설득한다. 이런 노력은 결실을 빚어,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케네디 의원을 의식해 2차례 의료보험 개혁안을 발표하기까지 한다. 또 외교적으로도 관심을 가지고 아일랜드 통일을 지지하는 한편,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의 현장에도 방문하는 등 대통령 못지 않은 정력적인 활동을 벌였다.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이 일어나면서 닉슨이 퇴진하자, 테드 케네디는 정치자금법 및 선거법 개정 운동을 벌이며 다시 한번 두각을 드러낸다. 테드 케네디는 1976년 대선에서도 여전히 선두주자였고 잠재적인 경쟁자였던 휴버트 험프리, 헨리 잭슨, 조지 월리스, 제리 브라운 등을 모두 크게 제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역시나 케네디 가문은 차파퀴딕 스캔들로 인한 역풍을 고려해 그의 출마를 주저했고 테드 케네디 자신 역시 출마를 고사한다. 이로 인해 1976년 대선 경선에서는 모 유돌(Mo Udall)과 제리 브라운 등이 진보파를 대변하게 되었는데, 두명 모두 중량감 있는 인사는 아니었고 선거 전략도 부족했기에 결국 정치 신인 지미 카터에게 예비선거에서 패하고 만다.
테드 케네디는 지미 카터를 좋아하지 않았다. 지미 카터는 신남부(New South)의 기수로서, 환경 문제나 인종 문제에 관해서는 진보적인 시각을 취했지만 그 외의 문제에서는 다른 남부민주당원과 같은 입장을 취했다. 지미 카터의 이런 보수적인 성향은 테드 케네디의 진보적인 신념과 상충되는 것이었고 그래서 테드 케네디는 상원 진보파의 실질적 리더로서 테드 케네디와 계속 갈등했다. 특히 테드 케네디의 숙원 사업이었던 의료보험 개편안에 대해 지미 카터가 계속 훼방을 놓았기에 테드 케네디는 그런 카터를 매우 싫어했고, 카터 역시 테드 케네디가 가문 빨로 지나친 주목을 받고 있다고 생각해 테드 케네디를 부담스러워했다고 한다. 실제로 지미 카터는 테드 케네디가 사법위원장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기존 사법위원장 제임스 이스트랜드 상원의원의 은퇴를 만류했을 정도로 매우 적극적으로 테드 케네디를 견제했다. 1979년, 의료보험 개편안에 관한 케네디와 카터의 갈등은 극에 달했고 이 갈등은 테드 케네디가 1980년 대선 예비선거에 출마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둘의 사이는 카터 행정부 이후에도 계속 안좋았는데, 지미 카터는 퇴임 후 테드 케네디가 지나치게 좌파적인 입장을 고집하는 바람에 꼭 필요한 의료보험 개혁안이 통과되지 못했다고 테드 케네디를 비판했고, 반대로 테드 케네디는 죽기 직전 회고에서도 카터가 협상하기 어려운 고집불통 보수 민주당원이었다고 비난했다.
2.5. 1980년 대선 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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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 케네디 선거 캠페인 로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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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의 테드 케네디 |
- [ 1980년 케네디 지지자 명단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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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의원- 조지 맥거번 (사우스다코타)
- 헨리 M. 잭슨 (워싱턴)
- 로버트 버드 (웨스트버지니아)
- 하워드 메첸바움 (오하이오)
- 게리 하트 (콜로라도)[A][비공개]
- 에드먼드 머스키 (메인)
- 폴 송거스 (매사추세츠)
- 리처드 클라크 (아이오와)
- 해리슨 A. 윌리엄스 (뉴저지)
- 윌리엄 해서웨이 (메인)
- 팁 오닐 (매사추세츠 8구)[비공개]
- 폴 사이먼 (일리노이 24구)
- 모리스 유돌 (애리조나 2구)
- 셜리 치좀 (뉴욕 12구)
- 카디스 콜린스 (일리노이 7구)
- 에드 마키 (매사추세츠 7구)
- 팻시 밍크 (하와이 광역구)
- 제인 번 (시카고)
- 윌리엄 J. 그린 3세 (필라델피아)
- 노동조합 AFL-CIO
- 전미 자동차 노동조합(UAW)
- 전미 공공운수 노동조합(TCU)
- 전미 항공기 조종사 노동조합(IAM)
- 국제경찰 노동조합(IUPA)
- 전미 교사노조(AUT)[비공개]
- 뉴욕시 교사노조(NYSUT)
- 민권운동조직 남부흑인목회자연합(SCLC)
- 원내 흑인코커스[비공개]
1980년 대선을 앞두고 지미 카터 대통령의 지지율은 매우 저조하였다. 장기간의 경제 침체와 지속되는 의회와의 갈등 때문에 국민 대다수가 지미 카터를 불신하였으며, 민주당 내 진보 그룹 내에서는 카터를 몰아내야한다는 여론이 더욱 큰 상황이었다.[31] 테드 케네디는 이런 민주당 내에서의 불만을 등에 업고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대권에 도전하겠다고 밝혔다. 원래 재선을 도전하는 대통령을 상대로 당 내 예비선거에서 도전하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이지만[32], 카터의 낮은 인기 때문에 테드 케네디는 실제로 당선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졌다. 실제로 아이오와 코커스를 앞둔 CBS와 뉴욕타임스의 합동 여론조사에서 케네디는 54%를 얻어 20%를 얻은 카터를 크게 앞지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케네디는 현직 대통령을 상대로 당 내 예비선거에 출마한 후보 중에서는 가장 광범위하고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전미 최대 노조인 AFL-CIO가 테드 케네디를 지지했으며, 정치인 중에서는 조지 맥거번 상원의원, 헨리 M. 잭슨 상원의원, 에드먼드 머스키 상원의원, 하워드 메첸바움 상원의원, 폴 송가스 상원의원, 폴 사이먼 하원의원, 모 유돌 하원의원, 패트릭 루시 위스콘신 주지사[33], 스튜어트 유돌 전 내무장관, 제인 번 시카고 시장, 배우 마틴 쉰, 배우 헨리 폰다 등으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특히 1976년 대선에서 지미 카터를 지지했던 휴버트 험프리 전 부통령 측 인사 및 조직이 다수 테드 케네디를 지지했기 때문에 승산이 있었다.
그러나, 예비선거 캠페인이 매우 형편이 없었고 지지율이 계속 하락했다. 언론 대응에 미숙한 능력을 보였던 것이 결정적이었다. 1979년 11월 스타앵커 로저 머드(Roger Mudd)와의 인터뷰에서 횡설수설을 하는가 하면, 집요하게 차파퀴딕 사건에 대해 질문하는 기자들에게 고함을 지르는 등 지지율을 깎아먹을 짓을 골라서 했다. 또한 주 이란 대사관 인질 사태가 일어나자 카터의 지지율은 급속하게 치솟았다. 미국은 안보 위기가 있을 때, 대통령의 안정적인 리더십을 기대하고 대통령의 지지율이 올라가는 경향이 있는데다, 이때는 카터가 이란 인질극 사태에 미숙한 대처를 하기 이전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테드 케네디는 이 문제에 대해 "이란 혁명의 과격성에는 반대하지만 팔라비 왕조는 너무 폭압적인 독재 정권이었다"라고 하고 팔레비의 입국에 강력히 반대하며 호메이니를 옹호하는듯한 스탠스를 취해 다시 지지율을 깎아먹었다.
결국 테드 케네디는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예상과 달리 59%대 31%로 카터에게 참패한다. 뒤이은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에서도 47% 대 37%로 패배. 이때부터 테드 케네디의 캠페인은 동력을 잃었고, 최종 스코어 51.1% 대 37.6%로 카터에게 패배하고 만다. 이는 현직 대통령에 도전하는 예비선거 후보자 치고는 꽤나 선방한 것이었지만 초기 여론조사에서 케네디의 압도적 승리가 예상되었기에 이는 테드 케네디의 정치적 완패에 가까웠다.
비록 예상과 달리 패배하긴 했지만, 테드 케네디는 민주당 전당대회 패배 승복 연설에서 "희망은 계속 살아남고, 꿈은 죽지 않을 것"( The hope still lives, and the dream shall never die)이라는 명연설을 남기기도 했다. 카터 대통령이 "내가 이제껏 들은 정치 연설 중 최고"라는 찬사를 보내고, 에드워드의 지지자들이 "진작에 이런 연설을 했으면 좋았을 것을..."이라고 반응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케네디는 여전히 카터에 대해 명확한 지지를 보내지 않았고, 전당대회장에서도 카터와 갈등하는 모습을 보이며[34] 민주당의 분열상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패트릭 루시 위스콘신 주지사 등 카터에 극렬히 반대하던 일부 민주당원은 사회적으로 중도진보 성향[35]이었던 존 B. 앤더슨 하원의원을 대통령으로 지지하기도 했다. 앤더슨은 전국적으로 6% 정도 득표했지만, 케네디의 홈그라운드였던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선방했고 특히 매사추세츠 주에서는 무려 16%나 득표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1980년에 카터 대신 케네디가 나섰다면 어땠을지가 호사가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비교적 진보 성향이 있는 케네디가 나섰다면 앤더슨이 독자 출마를 했을 가능성이 낮고, 카터의 저조한 인기와 자신을 구별지을 수 있어 레이건을 이겼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말도 있지만, 예비선거에서 보여준 케네디의 형편없는 미디어 대응 능력과 차파퀴딕 스캔들의 리스크를 감안한다면 별반 차이가 없는 참패를 당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중론이다.
2.6. 1980년대: 미국의 우경화와 맞서다
1980년대, 미국 민주당의 진보주의 기류는 점차 잦아들고 있었다. 1980년 상원의원 선거에서 1970년대 내내 베트남 전쟁 종식과 진보좌파적 대의를 위해 함께해왔던 제이컵 재비츠, 조지 맥거번, 게일로드 넬슨, 프랭크 처치, 마이크 그레이블 등 많은 동료 상원의원들이 은퇴하거나 낙선했다. 또 1984년 대선에서 게리 하트, 앨 고어를 위시로 한 소장파 의원들이 민주당의 중도개혁 노선을 내세우면서 테드 케네디가 표방하는 노동자 중심 진보주의는 설 곳을 잃었다. 그럼에도 테드 케네디는 의회에서 가장 진보적인 상원의원으로서, 로널드 레이건이 이끄는 복음주의 우경화에 가장 적극적으로 맞서 싸운 "상원의 진보주의 사자"로 거듭났다.테드 케네디는 여전히 대통령이 되려는 야망을 접지 않고 있었으며, 1982년 미국 중간선거에서 단기 불황으로 공화당이 참패하자 1984년 대선 출마를 준비했다. 이를 위해 소련의 유리 안드로포프와 접선해, 소련에 방문해 핵군축과 평화를 위한 회담을 하는게 어떻겠냐고 제안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케네디가 소련에 미국 대선 조작을 사주한게 아니냐는 음모론도 나도는데[36], 일단 케네디의 제안은 실패했고, 테드 케네디 본인도 상원의원 직을 계속 붙들고 있는 것이 정치적으로 이익이라고 생각해 월터 먼데일을 대선에서 지지했다.
1980년대 말에는 사법위원회 활동에 집중했다. 테드 케네디는 본인이 사법위원장이 되는 것을 희망했지만 당내 보수파의 견제와 차파퀴딕 사건으로 인해 꿈을 이루지 못했고 대신 보다 온건한 상원의원이자, 사적인 친구이기도 한 조 바이든이 사법위원장이 되는걸 도울 수 밖에 없었다. 조 바이든과 테드 케네디는 1980년대 말 로널드 레이건을 맹공하는 파트너로 이름을 날렸다. 특히 1987년 로버트 보크(Robert Bork) 대법관 인준을 저지하면서 테드 케네디는 다시 한번 주목받았다.
Robert Bork's America is a land in which women would be forced into back-alley abortions, blacks would sit at segregated lunch counters, rogue police could break down citizens' doors in midnight raids, schoolchildren could not be taught about evolution, writers and artists could be censored at the whim of the Government.
로버트 보크가 원하는 미국은 여성이 뒷골목 낙태를 강요당하고, 흑인이 밥을 먹을 때 백인과 분리되는 차별을 겪어야하고, 경찰이 한밤 중에 집 문을 부수고 쳐들어와 수색을 하고, 학생들에게 진화론을 가르칠 수 없고, 작가와 예술가들이 정부의 변덕에 따라 검열을 당할 나라입니다.
로버트 보크 대법관 인준 표결 당시 테드 케네디의 연설문. 이 연설문은 미국 사회의 우경화에 경종을 울리는 연설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로버트 보크는 1973년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닉슨 대통령이 자신을 압박하던 아치볼드 콕스 특별검사를 해임하라는 부당한 명령을 그대로 따라 논란이 되었던 인물이었다. 테드 케네디는 가장 적극적으로 워터게이트의 "공범"인 로버트 보크가 대법관으로 인준된다면 미국 사회의 공정성은 심각할정도로 훼손될 것이라는 일장연설을 했고, 이 연설은 많은 상원의원들의 마음을 움직여 이례적으로 미국 상원이 정치적인 이유로 대법관의 인준을 거부한 하나의 사례가 되었다.[37] 테드 케네디는 로버트 보크 인준 저지 사건으로 다시금 주목을 받았고, 함께 보크의 인준을 저지한
조 바이든은 1988년 대선의 대권주자로 급부상했다.로버트 보크가 원하는 미국은 여성이 뒷골목 낙태를 강요당하고, 흑인이 밥을 먹을 때 백인과 분리되는 차별을 겪어야하고, 경찰이 한밤 중에 집 문을 부수고 쳐들어와 수색을 하고, 학생들에게 진화론을 가르칠 수 없고, 작가와 예술가들이 정부의 변덕에 따라 검열을 당할 나라입니다.
로버트 보크 대법관 인준 표결 당시 테드 케네디의 연설문. 이 연설문은 미국 사회의 우경화에 경종을 울리는 연설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조 바이든와 테드 케네디는 1991년 클래런스 토머스 대법관 인준 역시 저지하려고 시도했다. 클래런스 토머스는 서굿 마셜의 은퇴로 부시 대통령이 임명한 강경보수 성향의 흑인 대법관 후보자였는데, 그의 부하 중 한명이었던 애니타 힐이 토머스가 상사였던 시절 지속적으로 성희롱을 했다고 폭로를 하는 "애니타 힐 사건"이 일어나며 궁지에 처한 상황이었다. 테드 케네디는 열불을 내며 클래런스 토머스와 같은 준 강간범은 대법관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여론전을 전개했다.
하지만 이때는 테드 케네디가 성공하지 못했다. 테드 케네디는 1980년 대선 출마 좌절 이후 알코올 의존증에 가까울 정도로 술을 폭음하고 있었으며, 저체중과 비만을 오가는 사생활로 주변에서 많은 우려를 사고 있었다.[38] 이 때문에 사생활에서 판단력이 흐려져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자는 것을 밥먹듯이 하는 것은 물론, 1985년에는 친한 친구였던 크리스 도드 의원과 함께 레스토랑에서 술을 마시다가 웨이트리스를 성폭행했다는 논란까지 일으켰다.[39] 1990년대 초반에는 요트를 타고 수십년 연하의 내연녀와 섹스를 하는게 파파라치 카메라에 잡혀 망신을 사기도 했다. 이 때문에 테드 케네디가 클래런스 토머스의 성 스캔들을 지적할만한 위치에 있지 않다는 여론이 커졌다.
또 1991년 테드 케네디의 친척 중 하나인 윌리엄 케네디 스미스가 강간 혐의로 기소되는 사건이 터졌다. 테드 케네디와 함께 해변 휴가를 간 윌리엄 케네디 스미스가 여성을 성폭행했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윌리엄 케네디 스미스는 합의 하에 이루어진 섹스라고 주장했지만, 결국 법정까지 가는 것을 피할 수 없었고, 클래런스 토머스 대법관 인준이라는 배경과 겹쳐 윌리엄 케네디 스미스의 강간 재판은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이 시청한 재판이 되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이 일어나자 부시와 공화당 측은 케네디를 역공하여 이런 내용의 광고를 내보냈다.
케네디 의원님, 바이든 사법위원장님은 토머스 대법관의 인준을 거부할 수 있을만큼 깨끗할까요? 윌리엄 케네디 스미스 사건은 잊으신건가요? 케네디 의원님은 하버스 대학교 시절 대리시험을 쳤다가 퇴학까지 당하셨잖아요. 그리고 바이든 사법위원장님은 대선에 출마한다고 남의 연설을 자기 연설인것마냥 나불거리다가 결국 사퇴하지 않았습니까?[40]
케네디는 이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으며, 클래런스 토머스와 공화당 상원의원들이 윌리엄 케네디 스미스 사건을 언급할때마다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클래런스 토머스 대법관 인준안은 52 대 48로 근소하게 통과되었고, 테드 케네디는 큰 정치적인 타격을 입었다.1994년 미국 중간선거에서, 빌 웰드 주지사가 상원의원으로 출마한다면 케네디가 25%p 차이로 진다는 여론조사 결과까지 나왔을 정도였다. 본선에서는 상대적으로 약체이자 조지 W. 롬니의 아들인 밋 롬니가 출마했는데, 롬니는 케네디와 다른 혁신적 보수주의와 젊음을 내세웠다. 비록 롬니는 낙선하긴 했지만 58% 대 42%로 수십년 동안 케네디 가문에 맞선 모든 정치가 중 가장 선전하였다. 또한 이 선거에서 공화당이 상원 다수당으로 올라서면서 케네디의 친구였던 조 바이든도 사법위원장 직에서 내려올 수 밖에 없었고, 그렇게 시대를 풍미한 케네디의 사법위원장 활약은 막을 내렸다.
2.7. 말년과 죽음
1990년대에 접어들어 테드의 정치적 커리어는 뉴트 깅리치의 등장 및 깅리치 혁명으로 사실상 전성기를 다하게 되었고, 테드가 추진하고자 한 진보적 성향의 정책들은 공화당이 다수를 점한 상원 본회의에서 대부분 가로막혀 상정되지 못했다. 민주당 내부에서도 정치적 영향력을 회복하는 건 쉽지 않았는데, 1992년 대통령에 당선되어 수십년만에 민주당 출신 대통령으로 재선에 성공한 빌 클린턴은 당내에서 보수적 색체를 띄었고 클린턴의 영향력과 인기가 높아지면서 테드가 기대하던 진보적 입법은 실현되기 어려운 상황까지 갔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테드는 민주당 내 보수파 의원들이나 공화당 의원들을 꾸준히 설득해가면서, 이들과 협력하며 건강보험 이동성 및 책임성법(Health Insurance Portability and Accountability Act), 정신건강 평가법(Mental Health Parity Act) 등의 법안을 통과시키며 건강보험의 개혁에 말년의 정치 커리어를 바쳤다.또한 90년대에 들어 어머니인 로즈와 존의 장남인 JFK 주니어가 사망하면서 어수선해진 케네디 가문의 수장 역할을 맡으면서 조 케네디 2세, 캐롤라인 케네디, 조 케네디 3세,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와 같은 케네디 가문의 차세대 주자들을 육성하는데 힘을 쏟았다. 2003년에는 조카사위인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공화당 소속으로 캘리포니아 주지사에 당선되기도 했으며 2007년 재선에 성공했다.[41]
1990년대 후반 ~ 2000년대에 접어들어 케네디는 로버트 버드, 다니엘 이노우에와 함께 민주당의 원로급 의원이 되었고 미국 정계에서 진영을 뛰어넘은 영향력을 행사하며 정치적 활동을 다시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1998년 모니카 르윈스키 사건 때 빌 클린턴을 적극 변호하기도 했으며, 2000년 대선과 2004년 대선에서는 각각 엘 고어와 존 케리를 지원하였다. 특히 2004년 대선 당시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직접 지지연설을 하였는데, 테드의 지지연설이 기폭제가 되어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역전승을 거두는데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42]
2003년 이라크 전쟁 당시에는 버드와 함께 적극적으로 전쟁을 반대하였다. 직전 해 상원에서 표결로 부쳐졌던 이라크 침공안에도 반대표를 던졌으며 전쟁이 발발한 뒤에도 적극적으로 반전 활동 및 이라크 침공의 부당성을 설토하기도 하였다.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 시즌이 되면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지만, 재클린 케네디와 함께 버락 오바마를 적극 지지하며 선거 유세에도 따라다니는 투혼을 발휘해 그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데 기여했다. 그러나 악화된 건강으로 오바마 행정부 출범 이후에는 정치활동이 매우 힘들어졌고, 오바마의 취임식 만찬에서 급작스럽게 구토를 하고 쓰러져 병원에 실려가게 되었다. 결국 얼마 안 가 종양이 몸 전체로 퍼져 치료가 불가능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2009년 7월 30일 테드는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자유의 메달을 수여받았으며, 건강이 악화되어 직접 행사에는 참석하지 못하고 병상에서 받았다. 메달 수여 후 1달 뒤인 2009년 8월 25일, 매사추세츠의 한 병원에서 평온하게 숨을 거두었다.[43] 장례식은 보스턴에 있는 한 성당에서 거행되었으며 유해는 먼저 세상을 떠난 존과 로버트가 안장되어 있는 알링턴 국립묘지에 뭍혔다. 말년 들어 건강악화와 민주당 내 새로운 세력이 부상하면서 정치적 영향력이 많이 하락했지만, 그가 숙원하던 건강보험 개혁안을 오바마 행정부가 통과시키는 모습을 보고 사망하게 되어 그나마 마지막 소원은 풀 수 있게 되었다.
3. 평가
매우 복합적인 평가를 받는 정치가이다. 테드 케네디는 미국 민주당의 진보주의를 수십년간 옹호해온 "상원의 사자"이자, 동시에 수많은 성범죄와 불미스러운 스캔들에 휘말린 양면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그가 다른 어떤 케네디 가문의 구성원들보다도 많은 입법을 했다는 평가도 있지만, 동시에 그런 입법 기록이 허상에 불과하다는 반박도 있다.3.1. 긍정적 평가
오늘 우리는 대부를 잃었습니다. 테드 케네디 의원의 꿈은 그의
형
제들이 꿈꿔온 것과 같고, 멀게는
건국의 아버지들이 꿈꿔온 것이기도 합니다. 그는 자유주의의 사자로서 더이상 포효할 수 없게 되었지만, 그의 꿈은 결코 죽지 않을 것입니다.
해리 리드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 그의 장례식에서
케네디 가문이 이미지 정치를 한다는 비판은 널리 알려져있고 특히
로버트 케네디는 실적이 없으면서 대선에 출마한 것으로 매우 박하게 평가받는다.[44] 그러나 테드 케네디는 형제와 달리 50년에 걸친 상원 의정활동을 하면서 쉴세 없이 진보적인 입법 활동을 펼쳤고, 형제들에 비해 성향 역시 더 진보 좌파 쪽에 가까웠다. 특히 의료보험을 현대화하려고 한 테드 케네디의 노력은 후일
오바마케어라는 이름으로 현실화되기도 하였다.해리 리드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 그의 장례식에서
조지 맥거번, 웨인 모스, 유진 매카시 등 민주당에 수많은 진보 좌익 아이콘이 있었지만, 그중 가장 진보적이면서 가장 꾸준히 입법 활동을 벌인 것은 테드 케네디였다. 케네디는 의료보험 문제 뿐만 아니라 성소수자 인권, 여성 인권, 소수인종 인권 등 미국 사회에서 소외받는 사람들을 위한 정력적인 활동을 벌였고, 이는 로널드 레이건이 주도한 1980년대의 우경화 바람에 자유주의의 불길을 유지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역시 테드 케네디의 인턴으로 활동했던 경력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테드 케네디는 자칫 무너질뻔한 민주당의 진보좌파 전통을 가장 잘 지켜낸 인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동료 정치인들 사이에서의 평가는 나쁘지 않았다. 47년간 상원의원으로 지내면서 좌우를 가리지 않고 친구를 많이 만들었다. 특히 조 바이든과는 평생의 친구 사이였고[45] 조지 맥거번, 존 매케인, 대니얼 이노우에, 밥 돌과도 절친이었다. 젊은 시절에는 로버트 버드와 서로 극혐했지만[46] 시간이 지나면서 1990년대~2000년대 둘은 민주당의 최고참 상원의원이 되었고 결국 노년이 되어서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47]
3.2. 부정적 평가
미국 정치를 공부하는 것은 신화를 공부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미국은 수십년간 열성적인 미디어를 통해 케네디 가문의 "카멜롯 사가"와 "비극"을 신화화하였습니다. 아마 "케네디의 신화"가 어떻게 작동하고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관심을 가지고 이해하는 미국인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정확한 평가는 이와 같습니다: 테드 케네디 같은 사람에게 있어, 신화는 필요한 시간을 벌 수 있는 도구라는 점입니다. 그 시간이란, 케네디 가문에게는 미디어 전략을 세울 시간, 죽은 여비서의 시신을 감추는 시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판결을 내릴 수사관을 구할 시간, 테드 케네디가 감옥에 가지 않도록 할 시간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알코올 중독에 빠지고, 수많은 여자를 후리고, 결과적으로 그가 민주당과 진보 언론들에게 존경을 받은 "상원의 자유주의 사자"가 될 시간을 만들어냈습니다.
보수 언론 <시카고 트리뷴>, "차파퀴딕과 신화의 힘"(2018년 4월 11일)
테드 케네디에 대한 가장 큰 비판점은 사생활에 관한 점이다. 그는 특권층의 자녀로 태어나 공부를 엄청나게 못했는데도 하버드 대학교에 기부 입학 전형으로 들어갔고, 거기서도 공부를 소홀히 해 부정행위를 저지르다 쫓겨나기까지 했다. 또 한국전쟁의 최전선에 배치되어야했으나 아버지 빽으로 병역회피를 저지르기도 했다. 이렇듯 커리어가 형편이 없었음에도 단순히 케네디 가문의 일원이라는 이유만으로 9선 상원의원을 지냈다는 점에서, 전혀 공정하지 못한 방식으로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것이다.[48]보수 언론 <시카고 트리뷴>, "차파퀴딕과 신화의 힘"(2018년 4월 11일)
또한 여성 문제는 케네디의 지지자들도 옹호할 수 없는 케네디의 최악의 실책 중 하나이다. 케네디는 나이가 60에 접어들어서도 성욕을 주체 못하고 셀 수 없이 많은 여성과 잠자리를 가졌으며, 심지어 성추행 혹은 강간 혐의도 제기되었다. 1980년대 후반 케네디의 여비서들이 케네디에게 성추행이나 성희롱을 당했다는 증언이 있으며, 그는 상원에서 가장 여성 편력과 여비서 평판이 안좋은 의원으로 동료 상원의원들의 입에 오르내리곤 했다. 결국 자기 성욕을 주체 못했기 때문에 클래런스 토머스 인준 거부도 말아먹었고, 이것이 차파퀴딕 사건과 연관이 되어있다는 루머도 있다.
또한, 정치 활동 자체가 과장되었다는 지적도 존재한다. 1980년 대선에서 케네디는 분명히 압도적으로 카터를 누르고 있었으나 자신의 온갖 실수와 이란 위기에 대한 부적절한 대응으로 인하여 그 지지율을 까먹었다. 또한 카터 대통령은 퇴임 후 그가 고집을 부려서 꼭 필요한 진보적 개혁안들이 좌초되었고, 레이건의 보수화 경향을 스스로 초래한것이라며 케네디를 크게 비판하기도 했다.
이런 사생활 문제 때문에 테드는 케네디가의 형제들 중에서도 유독 인기가 적고 비토정서가 높은 편이다. 케네디 가문은 부유한 환경속에서도 약자의 입장을 기꺼이 대변하고 용감하다는 이미지 때문에 미국 정계에서 높은 인기와 영향력을 행사해왔고, 대통령이 된 존과 유력 대권 후보였던 로버트를 비롯해 다른 형제들에 대한 대중들의 호감도 역시 매우 높다. 그러나 테드는 여러 사생활 문제로 인해 케네디 가문의 보편적인 이미지에 부합하지 않는, 심각한 사생활 문제를 그저 가문의 이름값으로 무마시켰다는 부정적인 인식이 높고 특히 차파퀴딕 사건과 케네디가에서 사건사고가 많이 벌어졌던 1960년대~1970년대를 직접 경험했던 고령층일수록 테드에 대한 비토정서가 크다. 실제 2014년 경 미국의 한 설문조사 업체에서 케네디 가문 일원들에 대한 호감도를 조사한 결과, 테드만 유일하게 비호감도가 호감도보다 높게 나왔다.
이러한 사생활 문제로 비롯된 비토정서로 인해, 테드는 오랜 정치경력과 케네디 가문의 이름값 및 당내에서 영향력 높은 계파를 이끌고 있었음에도 끝내 대권의 꿈을 접어야했다. 특히 차파퀴딕 사건은 정치생활 내내 그에게 비판거리로 따라다니며 정치적으로 도약할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그의 발목을 잡았다.[49]
4. 선거 이력
<rowcolor=#fff> 연도 | 선거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율 (득표수) | 당선 여부 | 비고 |
1962 | 미국 연방상원의원 보궐선거 | 매사추세츠 |
|
1,162,611 (55.44%) | 당선 (1위) | 초선 |
1964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1,716,907 (74.26%) | 재선 | |||
1970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1,202,856 (62.16%) | 3선 | |||
1976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1,726,657 (69.31%) | 4선 | |||
1982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1,247,084 (60.82%) | 5선 | |||
1988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1,693,344 (64.97%) | 6선 | |||
1994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1,265,997 (58.08%) | 7선 | |||
2000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1,887,479 (72.61%) | 8선 | |||
2006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1,500,738 (69.30%) | 9선[50] |
5. 대중매체에서
- 2019년 제작된 대체역사물 드라마 For all mankind에서는 달 착륙 경쟁에서 소련에게 패한 NASA의 청문회에 참석하느라 차파퀴딕에도 가지 않게 되고, 그 결과 1972년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다. 하지만 피는 못 속이는지 당선 후 섹스 스캔들에 휘말리게 되고 1976년 대선에서 로널드 레이건에게 패배한다.
- 심슨 가족에 나오는 부패하고 색골인 스프링필드의 시장 조 큄비 시장의 모델이라고 한다. 참고로 큄비 시장 아내인 마사 큄비 모티브는 재밌게도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6. 여담
- 형 존, 로버트와 함께 젊어서 꽃미남이라는 소리를 들었고, 중노년기에는 특유의 사자갈기와 같은 헤어스타일로 유명해졌다. 이는 테드 케네디가 그의 맹렬한 진보입법 활동과 엮여서 "상원의 사자"라 불리는 계기가 되었다.
- 친이스라엘 성향으로 유명했다. 1970년대 소련 유대인 강제 추방 관련되어 유대인들을 많이 도와주었기에 친 이스라엘 성향이 있는 케네디 가문 중에서 유독 이스라엘, 유대인 커뮤니티와 사이가 좋았고, 비록 노골적으로 이스라엘의 전쟁을 지지한건 아니었지만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가장 강경하게 주장하던 사람 중 하나였다. 때문에 2009년 그가 죽었을 때 베냐민 네타냐후를 포함한 이스라엘의 고위 정치인과 군인들이 "이스라엘의 가장 친한 친구가 죽었다"라며 유감을 표했다.
- 한국에서는 "에드워드 케네디"라고 불리는 경우도 많지만, 미국에서는 아주 공식적인 석상이 아닌 이상 언제나 "테드 케네디"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미국에는 이런식으로 애칭을 본명처럼 사용하는 정치인들이 많다.[51]
7. 가족관계
4남 | 이름 |
에드워드 무어 케네디 (Edward Moore Kennedy) 1932년 2월 22일 ~ 2009년 8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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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혼 | 이름 |
버지니아 조안 케네디 (Virginia Joan Kennedy) 1936년 9월 2일 ~ 현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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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 1958년 11월 29일 | ||||||
이혼 | 1982년 | ||||||
자녀 | 1녀 | 이름 |
카라 앤 케네디 알렌 (Kara Anne Kennedy Allen) 1960년 2월 27일 ~ 2011년 9월 1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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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편 | 마이클 알렌 (Michael Allen) | ||||||
자녀 | 1녀 | 이름 |
그레이스 케네디 알렌 (Grace Kennedy Allen) 1994년 9월 19일 ~ 현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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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남 | 이름 |
맥스 그레이트하우스 알렌 (Max Greathouse Allen) 1996년 12월 20일 ~ 현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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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남 | 이름 |
에드워드 무어 케네디 주니어 (Edward Moore Kennedy Jr.) 1961년 9월 26일 ~ 현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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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
캐서린 앤 절시먼 (Katherine Anne Gershman) 1959년 6월 9일 ~ 현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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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1녀 | 이름 |
킬리 엘리자베스 케네디 (Kiley Elizabeth Kennedy) 1994년 8월 7일 ~ 현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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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남 | 이름 |
에드워드 무어 케네디 3세 (Edward Moore Kennedy III) 1998년 2월 25일 ~ 현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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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남 | 이름 |
패트릭 조셉 케네디 2세 (Patrick Joseph Kennedy II) 1967년 7월 14일 ~ 현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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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
에이미 사벨 (Amy Savell) 1975년 ~ 현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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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1남 | 이름 |
오웬 패트릭 케네디 (Owen Patrick Kennedy) 2012년 4월 15일 ~ 현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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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녀 | 이름 |
노라 카라 케네디 (Nora Kara Kennedy) 2013년 11월 19일 ~ 현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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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녀 | 이름 |
넬 엘리자베스 케네디 (Nell Elizabeth Kennedy) 2015년 11월 29일 ~ 현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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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남 | 이름 |
마샬 패트릭 케네디 (Marshall Patrick Kennedy) 2018년 5월 27일 ~ 현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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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혼 | 이름 |
빅토리아 앤 케네디 (Victoria Anne Kennedy) 1954년 2월 26일 ~ 현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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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 1992년 7월 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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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0044C9> 일생 | 생애 | ||
평가 | 평가 | |||
가족 |
아버지
조셉 P. 케네디 첫째 형 조셉 P. 케네디 주니어 · 둘째 형 존 F. 케네디 · 셋째 형 로버트 F. 케네디 전처 조앤 케네디 · 후처 빅토리아 "비키" 케네디 장녀 캐라 케네디 · 장남 에드워드 케네디 주니어 · 차남 패트릭 케네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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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선거 | 1980년 미국 대통령 선거 (민주당 예비선거) | |||
관련 인물 | 로버트 맥나마라 · 아서 슐레진저 · 피에르 샐린저 · 테드 소렌슨 · 리처드 닉슨 · 제임스 이스트랜드 · 사전트 슈라이버 · 조 바이든 · 버치 베이 · 조 타이딩스 · 조지 맥거번 · 지미 카터 · 클래런스 토머스 · 크리스 도드 · 오린 해치 · 밋 롬니 ·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 |||
저서 | True Compass (자서전, 2009) · Ted Kennedy: A Life (평전, 2023) | |||
사건사고 | 차파퀴딕 사건 | |||
기타 | 오바마 케어 | |||
자유주의 · 진보주의 · 케네디 가문 · 존 F. 케네디 · 로버트 F. 케네디 | }}}}}}}}} |
[1]
전임자
존 F. 케네디 사임(대통령 취임)으로 발생한 공석을 채우기 위해 매사추세츠 주지사에 의해 대체 상원의원으로 임명. 이후 보궐선거에서 테드 케네디(민주당) 당선.
[2]
전임자 테드 케네디 사망으로 발생한 공석을 채우기 위해 매사추세츠 주지사에 의해 대체 상원의원으로 임명. 이후 보궐선거에서 스콧 브라운(공화당) 당선.
[3]
미국 연방 상원의원 (1953~1961), 제35대 미국 대통령
[4]
미국 법무장관 (1961~1964), 미국 연방 상원의원 (1964~1968), 1968년 미국 대선 민주당 예비선거 후보자
[5]
코네티컷 주 상원의원(2015~2019)
[6]
로드아일랜드 1구 하원의원(1995~2011)
[7]
제111대 의회 임기 중 사망.
[8]
과거
형의 지역구였으며, 그보다 한참 이전에는
찰스 섬너의 지역구이기도 했다. 현재는
엘리자베스 워런이 현직 의원인 지역구로, 가히 미국 진보주의의 상징과 같은 선거구라고 할 수 있다.
[9]
긍정적인 별명으로 그의 진보적인 입법 경력을 칭송하는 것이다.
[10]
부정적인 별명으로 그의 상습적인 알코올 남용과 끔찍한 여성관계를 비난하는 별명이다.
[11]
JFK, RFK에 비해 잘 쓰이지는 않는 이니셜이다.
[12]
장남 조셉은 1915년생, 차남 존은 1917년생, 3남 로버트는 1925년생으로 32년생인 테드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 장남인 조셉은 테드가 12살이었던 1944년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해 전투 중 사망했다.
[13]
역대 상원의원 재직 순위 5위이다. 참고로 1위는 53년간 상원의원으로 재직한 같은 당 의원인
로버트 버드다.
[14]
사회주의 정치가로 유명한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도 대학생 시절 테드 케네디 의원실에서 인턴으로 일한 적이 있다.
[15]
그의 아들
패트릭 케네디는 테드 케네디가 상원의원으로 재직하던 도중 오피오이드 성분의 진통제를 술에 타 자주 복용했으며 복용하지 못하면 전신이 마비되어 일상생활을 할 수 없었다고 2015년 증언했다.
[16]
1986년에는 강간 미수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불기소되었고, 1991년에는 코카인 밀반입 및 상습 복용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마찬가지로 불기소되었다.
[17]
이 당시 미국은 징병제였다.
[18]
미국 하원의장인
존 W. 매코맥의 조카였다. 즉 미국 대통령의 동생 대 미국 하원의장의 조카가 치른 결전이었던 샘.
[19]
의원 개개인의 표를 단속하는 지위로 민주당 원내 조직의 2인자이다. 당시 원내대표는 마이크 맨스필드.
[20]
그 유명한
휴이 롱의 아들로 1960년대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상원의원으로 불렸다.
[21]
현재는
워터마크 공식이 도입되어서 술이 깬 상태로 출두해도 이 공식을 기준으로 혈중알코올농도를 측정할 수 있다.
[22]
무려
KKK 고위간부 출신 정치인이었으며, 원내에서 가장 인종차별적이라는 말도 들었다. 심지어 "내 인종 차별적인 표결 기록은 정치적 계산이 아니라 나의 개인적인 신념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광기어린 자랑까지 하고 다녔을 정도의 인물이었다. 차파퀴딕 사건으로 상원의원 사이에서 테드의 이미지가 얼마나 나락으로 추락했는지를 보여 준다. 다만, 로버트 버드는 말년에 젊은 시절 본인의 인종 차별적 행각에 대해 지속적으로 반성을 표하면서 참회하는 태도를 보여줬다.
[23]
물론, 테드 케네디가 이끌던 원내 진보파와
휴버트 험프리가 이끌던 기득권파의 갈등을 감안한다면, 테드 케네디가 차파퀴딕 사건들에 휘말리지 않았더라도 버드에게 총무 직을 잃었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24]
조지 맥거번은 테드 케네디가 부통령 후보가 되기를 바랬지만, 케네디 가문의 반대로 불발된다.
[A]
출처
[비공개]
공개적으로는 카터와 케네디 사이에서 중립을 유지
[비공개]
[A]
[비공개]
[비공개]
[31]
단적으로
조지 맥거번은 1976년 대선에서 포드에 투표했다고 하며 심지어 급진좌파 성향으로 유명한 가수
존 레논도 지미 카터 대신 로널드 레이건을 선호했을 정도로 당시 진보좌파 사이에서 지미 카터의 이미지는 최악 그 자체였다.
[32]
맥거번-프레이저 위원회 출범으로 현대적인 경선 방식이 도입된 1972년 이래 이런 경우는 1976년 공화당(포드 대 레이건), 1980년(카터 대 케네디), 1992년(부시 대 뷰캐넌) 정도 밖에 없다.
[33]
지미 카터의 승리 이후 케네디의 경선 패배를 불복하고
존 B. 앤더슨을 지지해, 앤더슨의 부통령 러닝메이트가 되었다.
[34]
대표적으로 카터와 케네디가 손을 잡긴 했지만 똥씹은 표정이었고 손도 치켜들지 않았다. 재밌는건 그때 카터와 케네디의 의견이 갈린다는 점이다. 카터는 케네디가 손을 들지 않았다고 주장했고, 케네디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자신은 언제든 손을 치켜올릴 준비가 되어있는데 카터가 손을 꼭 붙잡고 꿈쩍도 안했다고 술회했다.끝까지 쪼잔하다 어느쪽이 맞는지는 당사자들만이 알 일.
[35]
록펠러 공화당원으로 사회적으로는 중도진보, 경제적으로는 중도보수 성향이었다.
[36]
이게 아니더라도 케네디는 비공식 연락망을 이용해 소련과 접선한 것이기 때문에 국가 안보 측면에서 문제가 많았다.
[37]
에이브 포타스(Abe Fortas),
에이미 코니 배럿,
메릭 갈랜드 인준 때에도 이러한 정치적 논란이 빚어졌다.
[38]
이미 신경쇠약 증세는 형들이 암살당했던
1960년대부터 겪고 있었다. 로버트가 암살당하고 이듬 해인 1969년에는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기내에서 불안감을 이기지 못하고 소리를 지른 적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테드 역시 사망할 때까지 수차례 암살 위협에 시달렸으며 이로 인해 외부 행사 중 큰소리만 들려도 크게 놀랄 정도였다.
[39]
이른바 "waitress sandwich" 사건인데 루머에 의하면 테드 케네디가 웨이트리스를 크리스 도드의 무릎에 앉혀놓고 자기 생식기를 웨이트리스 생식기에 문질렀다고 한다. 다만 추후 조사에 의하면 의도적인 것은 아니고 우연한 신체적 접촉이었던 것으로 결론이 났다.
[40]
1988년 미국 대선에서 프론트러너 중 한명이었던
조 바이든이 영국 정치가
닐 키녹의 연설을 표절했다가 논란이 되어 조기 사퇴한 일화를 공격한 것이다.
[41]
공화당 소속인 아놀드가 민주당의 텃밭인 캘리포니아에서 당선될 수 있었던 건 케네디 가문의 영향력이 컸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둘이 당적이 달랐음에도 관계는 괜찮았고 2009년 테드의 장례식 때 아놀드도 참석했다.
[42]
다만 두 사람 모두
조지 W. 부시에게 패배하였다.
[43]
공교롭게도 테드의 누나인 유니스 역시 남동생이 사망하기 14일 전 먼저 세상을 떠났다.
[44]
무엇보다 존과 로버트는 실질적인 정치경력이 매우 짧아서 유명세와 달리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 정치적인 유니크함으로 부각되는 경우는 적다. 그러나 테드는 형들과 달리 50년 가까이 되는 기간동안 의정활동을 하면서 여러 법안의 통과를 주도했기 때문에 유명세와 더불어 정치적 활동에 대한 내용도 대중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편이다.
[45]
1988년 바이든이 뇌동맥류로 쓰러졌을 때 바이든은 레이건 대통령의 안부 전화도 가족이 받게 했지만 테드 케네디만큼은 직접 병원으로 병문안을 오게 했다.
[46]
1971년 민주당 원내총무 선거에서 맞붙었고 케네디는 원내 진보파의 리더, 버드는 원내 남부민주당파의 리더로 거의 성향이 반대였다.
[47]
로버트는 테드가 사망한 뒤 큰 충격을 받아 건강이 악화되었고, 이듬해인 2010년 6월 사망하였다.
[48]
하다못해 형 존 F. 케네디는 "왜 영국은 잠자고 있었는가"라는 유명 논문을 출판했고 작은 형 로버트 F. 케네디도 상원 직원으로 10년 가까이 활동했던만큼 아무 경력도 없이 상원의원이 된 테드 케네디에 비해서는 경력이 길었다.
[49]
1980년 경선 당시에도 카터의 지지율이 워낙 떨어져서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승부였지만, 사생활 문제가 끝내 테드의 발목을 잡아 대선 후보 자리를 카터에게 넘겨줘야 했다.
[50]
2009. 8. 25. 임기 중 사망
[51]
대표적으로 조 바이든(본명 조셉 R. 바이든), 지미 카터(본명 제임스 E. 카터), 빌 클린턴(본명 윌리엄 J. 클린턴), 딕 체니(본명 리처드 B. 체니)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