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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6 22:41:05

게리 하트

파일:미국 상원 문장.svg 미국 연방 상원의원 (콜로라도 주 클래스 3)
제88-93대
피터 H. 도미닉
제94-99대
게리 하트
제100-102대
팀 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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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제94-99대 상원의원
게리 워런 하트
Gary Warren Hart
파일:Gary Hart.jpg
<colcolor=#fff><colbgcolor=#0044C9> 출생 1936년 11월 28일 ([age(1936-11-28)]세)
미국 캔자스 오타와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재임기간 국토안보자문위원회 부의장
2009년 6월 5일 ~ 2011년 2월 8일
북아일랜드 미국 특사
2014년 10월 21일 ~ 2017년 1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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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44C9><colcolor=#fff> 부모 아버지 칼 R. 하트펜스[1]
어머니 니나 하트
배우자 올레타 하트 (결혼: 1958년, 사별: 2021년)
자녀 2명
학력 서던 나사렛 대학교 ( B.A.)
예일대학교 신학대학원 ( 신학 / BDiv)
예일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 법학 / LL.B.)
옥스퍼드 대학교 성 안토니 칼리지 ( 정치학 / DPhil)[2]
종교 가톨릭
혈통 아일랜드계 미국인
의원 선수 2 (상원)
의원 대수 94, 95, 96, 97, 98, 99
지역구 콜로라도 클래스 3
소속 정당

약력 존 F. 케네디 선거운동 자원봉사자 (1960)
미국 법무부 변호사 (1964~1965)
콜로라도/ 워싱턴 D.C. 변호사 (1965)
미국 내무부 변호사 (1965~1967)
로버트 F. 케네디 선거운동 자원봉사자 (1968)
조지 맥거번 대선 캠페인 선대위원장 (1972)
미국 상원의원 (1975~1987 / 콜로라도)
1984년 대선 민주당 예비선거 후보
1988년 민주당 대선 예비선거 후보 (중도사퇴)
21세기 국가안보위원회 위원장 (1998~2001)
국토안보자문위원회 부의장 (2009~2011)
오바마 행정부 북아일랜드 미국 특사 (2014~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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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조지 맥거번의 캠페인 매니저2.2. 콜로라도 상원의원2.3. 두 번의 대선 출마
2.3.1. 1984년 대선 출마2.3.2. 1988년 대선 출마
2.4. 정계 은퇴 이후의 삶
3. 평가4. 선거 이력5. 대중 매체에서6. 여담

[clearfix]

1. 개요

My problem is that I’ve revealed too much about myself.
내 문제점은 내가 나 스스로를 너무 많이 (언론에) 공개했다는 점이다.
게리 하트, 1987년 성스캔들로 인한 대선 후보직 사퇴 직후
미국의 정치인. 콜로라도 주 연방상원의원직을 역임하였다.

2. 생애

2.1. 조지 맥거번의 캠페인 매니저

1936년, 캔자스의 아일랜드계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 성은 하트펜스(Hartpence)였는데, 1961년에 아버지가 하트(Hart)가 더 기억하기 쉬운 이름이라는 이유로 성을 바꾸었다. 처음에는 신학 대학교에 진학했고 신부가 되려고 했는데, 예일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후 법학 공부로 진로를 바꿔서 1960년대에 잠깐 변호사로 일하며 정계 입문을 시도했다.

1960년 존 F. 케네디의 자원봉사자로 참여하며 정계에 입문했고, 1968년 로버트 F. 케네디의 대선 캠프에서 일하면서 두각을 드러냈다.
파일:게리 하트 1972.jpg
1972년 게리 하트
1972년, 그는 정치에 관심이 있던 당대 대부분의 2~30대와 마찬가지로 조지 맥거번을 열성적으로 지지하던 사람이었다. 조지 맥거번은 베트남 전쟁 반대로 청년 대학생 사이에서 인기를 모으고 있던 진보파 상원의원이었는데 1972년 대통령 선거의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에드먼드 머스키, 휴버트 험프리 등 민주당 당권파의 지지를 받던 정치인들을 상대로 출마했다. 1970년 민주당 예비선거 규정의 변경으로 기존 선거제도[3]에서 현재와 비슷한 경선 시스템[4]으로 개편되면서 새로운 전략이 필요해진 상태였는데, 하트는 맥거번의 캠페인 매니저를 맡으면서 맥거번의 경선 승리를 이끄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하트는 새로이 개편된 선거제도를 이용해 맥거번이 각 지역에서 최대한의 표를 끌어모을 수 있게 했고, 험프리나 월리스, 머스키와 같은 쟁쟁한 경쟁 후보를 상대로 맥거번이 여러차례 승리를 거둘 수 있도록 했다. 그 결과 맥거번은 1972년 민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다.

비록 본선에서 맥거번은 너무 진보적인 공약과 닉슨의 높은 지지율을 이기지 못하고 역대급 대참패를 당했지만, 하트는 처음으로 민주당의 당권파의 의사에 반하는 사람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시킨 공신으로 정치권에서 주목받는 신예로 떠올랐다.

2.2. 콜로라도 상원의원

파일:church hart.webp
상원의원 시절의 게리 하트[5]
1974년, 불과 38세의 나이로 콜로라도의 상원의원으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이는 역대 미국 최연소 상원의원의 기록 중 하나이다.[6] 당시 상대는 재선 상원의원 피터 도미닉(Peter Dominick)이었는데 워터게이트 사건 때문에 공화당의 인기가 없어져서 하트는 도미닉을 무려 18점 차이로 꺾고 승리했다. 당시 콜로라도는 기본적으로 공화당 우세주였던데다가, 그의 승리는 1948년 이후 민주당이 콜로라도에서 거둔 가장 결정적인 승리였기에 전국적으로 주목을 모았다.

1980년에는 카터 대통령의 인기가 하락했고, 하트가 파나마 운하 반환 같은 카터의 정책을 지지했기에 공화당이 하트를 낙선시킬 것이라는 예측도 있었지만 약 2만 표차로 공화당의 상대 후보를 꺾고 재선에 성공했다.

상원의원 시절에는 실용중도적인 모습을 많이 보였다. 상원 처치위원회의 소속으로 CIA 개혁에 앞장서는 등 진보적인 모습도 보였지만 동시에 1984년 반도체 칩 보호법(Semiconductor Chip Protection Act of 1984) 발의 등 친-산업계의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그는 기술 혁신과 중소기업 지원이 미국 사회의 진정한 진보를 이끌 수 있다는 식의 제3의 길을 주장해, 민주당 중도파의 떠오르는 기수로 평가받았다. 하트의 뜻을 따르는 젊은 중도 성향 민주당원들을 아타리 민주당원(Atari Democrat)이라 불렀는데 앨 고어 등이 여기에 포함되었다.

2.3. 두 번의 대선 출마

2.3.1. 1984년 대선 출마

파일:게리 하트 1984 DNC.png
1984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하트와 그의 아내
1984년 게리 하트는 민주당 대선 후보로 출마를 선언했다. 당시 민주당에서는 월터 먼데일 부통령이 사실상 대통령 후보로 확실시되고 있었다. 그는 대중적으로 인지도가 높았고, 노동조합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먼데일에 대항하는 중도파로 유명 우주비행사 출신 정치인인 존 글렌이 있었으나, 지지율이 빠르게 감소하며 사퇴했다. 한편 반핵을 기치로 출마한 상원 원내총무 앨런 크랜스턴이나 하트 본인이 12년 전 보필한 조지 맥거번도 출마를 시사하며[7] 하트가 승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보였다. 1982년 12월 여론조사에서는 명단에도 없었고, 1983년 10월 여론조사에서는 겨우 지지율 1%만을 기록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하트는 스티븐 킹 같은 셀럽을 동원하고, 먼데일을 노동조합과 뉴딜 정책, 위대한 사회 정책에 의존하는 구식 좌파라고 비난하며 정치 혐오에 빠져있던 젊은 민주당 지지층을 빠르게 포섭하며 지지율을 16%까지 끌어올렸다. 그는 여피족 대다수의 지지를 받았다. 먼데일은 기존 민주당 지지층인 저학력자, 노동자, 농민, 노동조합원, 민주당 기득권층 등의 지지를 받은 반면, 하트는 새로운 민주당 지지층인 청년층, 대학생, 고학력자, 화이트칼라, 대도시 거주자, 중산층의 지지를 받았다.

하트의 중도실용적 캠페인은 돌풍을 일으켰고,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에서 먼데일을 무려 10%p차로 꺾는 이변을 일으켜 민주당 당권파를 충격에 빠트렸다. 또 먼데일이 우세할 것이라고 예상된 슈퍼 화요일 경선에서도 비등한 성적을 기록하며 모멘텀을 얻었다.

하지만 그의 아이디어는 먼데일에 비해 다소 모호했으며, 중도주의적이고 실용적이거나 혹은 먼데일/뉴딜에 반대한다는 점 외에는 별다른 인상을 주지 못하였다. 먼데일에 비해 하트는 자금력과 조직력이 부족했다. 먼데일은 노동조합으로부터 수백만 달러를 기부받은 반면 하트는 만성적인 적자에 시달렸기 때문에 선거운동에서 뒤쳐졌다. 또 조지 맥거번 등이 경선에서 사퇴하고 먼데일을 지지하며[8] 먼데일은 다시 하트를 상대로 리드를 되찾게 된다.
"Where's my meat?"
먼데일은 민주당 경선 후보자 토론회에서 하트가 핵심 공약이 없다며 "내 소고기는 어딨는거야?"(Where's my meat?)이라는 돌직구를 날렸다. 미국 정치권에서 소고기는 정당의 핵심 지지층을 만족시킬만한 공약을 의미하는 은어인데, 하트가 민주당 유권자들을 흥분시킬만한 공약이 하나도 없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하트는 먼데일의 공격에 대응할 수 없었고, 지지율이 하락했다. 하트는 자신이 중도층에서 유리하기에 본선 경쟁력은 먼데일보다도 뛰어나다고 주장했지만 정작 며칠 후 발표된 갤럽 여론조사에서 먼데일과 하트 모두 레이건에 9포인트 차이로 뒤지는 것으로 드러나며 하트의 주장은 무력화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전당대회 날까지는 어찌 어찌 버텼고, 먼데일의 38%에 대항해 36%를 얻으면서 경선을 접전으로 끌고갔고 전당대회에서 판세를 뒤집으려는 시도까지 했다. 획득 대의원 수는 먼데일 1,929명, 하트 1,164명으로 두 후보 모두 지명에 필요한만큼의 대의원을 얻지 못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먼데일이 2,191의 대의원의 표를 받으며 대통령 후보로 낙점되었다. 부통령 후보로 매우 유력하게 거론되었지만, 실패했고 제럴딘 페라로가 러닝메이트로 추대되었다.

1984년 대선 본선에서 먼데일이 엄청난 참패를 당하자, 차라리 하트가 나갔으면 49개 주에서 지는 망신은 안당했을 것이라는 여론이 일었고, 하트의 1988년 대선 출마는 거의 확실시되었다.

2.3.2. 1988년 대선 출마

1988년 대선을 앞두고 하트는 확고한 프론트러너의 지위를 굳혔다. 1987년 마리오 쿠오모 뉴욕주지사가 불출마를 선언하며, 하트가 민주당 경선에서 이길 것에 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1987년 4월 하트의 지지율은 46%로 집계되어 2위인 제시 잭슨 목사의 18%를 압도했다. 하트 이외의 후보는 대부분 경쟁력이 없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1987년 4월 말 마이애미 해럴드 지에 익명의 제보자가 하트의 여성 관계를 폭로하는 사건이 터졌다. 젊고 잘생긴데다 여피족의 지지를 받던 하트가 섹스 스캔들에 걸리자, 모든 유권자들은 "닥칠 것이 닥쳤다"라는 식으로 반응했다. 아니다 다를까 며칠 뒤 모델 도나 라이스가 하트의 무릎 위에 앉아있는 사진이 공개되면서 하트의 이미지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손상되었고, 하트는 의혹 제기 2주만인 5월 7일 후보직 사퇴 의사를 밝혔다.
파일:하트 라이스.webp
도나 라이스와 게리 하트가 같이 찍힌 사진
기본적으로 모든 정치인들은 뒤에 하나 둘 쯤 치명적인 스캔들을 감추고 있기 마련이다.
마리오 쿠오모 뉴욕주지사, 게리 하트를 변호하며[9]
일반적으로 대중에게 하트가 섹스스캔들로 몰락했다고 알려져있으나, 과장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게리 하트는 도덕적이거나 완전무결한 이미지라기보다는 에너제틱한 청년 정치인의 이미지가 더 강했기에 섹스스캔들이 그를 완전히 무너트렸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실제로 갤럽의 여론조사에서, 당대 민주당 지지자의 55%가 불륜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하트의 주장을 신뢰하며 44%는 언론이 이 문제를 너무 많이 다루고 있다는 의견을 드러냈다. 전체 유권자 64%는 언론이 너무 편향되었으며 하트가 부당하게 공격을 받는다고 응답했고, 60%는 도나 라이스와 하트의 부정한 관계가 사실이라 치더라도 그것이 대통령직 수행과는 관련이 없다고 응답했다. 즉 하트의 섹스 스캔들은 하트에게 아주 큰 충격은 아니었다는 뜻이 된다.

진정한 문제는 하트가 대선을 1년 반이나 남긴 시점에서 너무 빠르게 캠페인을 종료해버리면서 대중에게 "연약한 정치가"라는 이미지를 줬다는 점에 있다. 하트가 사퇴한지 얼마 안가 앨 고어, 조 바이든, 폴 사이먼, 딕 게파트, 팻 슈뢰더와 같은 후보가 다수 출마를 선언했는데, 이들은 온건파이거나 청년 정치인이라는 점을 강조하여 하트의 지지율 잠식을 시도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되돌릴 수 없는 하트의 손실이었다. 하트의 사퇴 이후 민주당 예비선거의 여론조사에서 마이클 두카키스가 1위를 차지하긴 했지만 겨우 12%였고, 잭슨 7%, 고어 6%, 게파트 6%, 바이든 3% 등 확고한 리드를 차지한 후보가 없었기에 하트가 사퇴하지 않았더라면 1위 자리를 수성했을 가능성이 크다. 후일 슈뢰더와 바이든이 사퇴하긴 했지만[10] 나머지 중도 후보들은 경선을 완주해 하트의 잠재적인 지지자 대부분을 잠식하였다.
파일:1986-1988 민주당 예비선거 후보 지지율.png
1986-1988년 사이 하트의 지지율 하락세
하트는 가족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조상의 나라인 아일랜드로 장기 여행을 떠났지만, 무려 7개월이나 대선 판에서 떠났기에 그의 지지층은 분열되었다. 1987년 12월 뉴햄프셔 프라이머리를 앞두고 급하게 경선에 복귀했지만 그의 지지율은 30%로, 압도적인 1위와는 거리가 있었다. 이후 지지율은 후년 2월 8일 아이오와 코커스까지 점진적으로 줄어들어, 1988년 1월 30일 뉴욕타임스 여론조사에서는 18%로 추락한 상태였다. 또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에서는 이미 두카키스에게 리드를 내주고 있었다.

아이오와 코커스 결과는 충격적이었는데 그는 13,000표도 얻지 못해 딕 게파트, 마이클 두카키스, 제시 잭슨에 이은 4위를 차지했다. 여기서 하트의 손실은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고, 그의 지지율은 단숨에 3%로 내려앉았다.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에서 두카키스는 압도적 1위를 차지한 반면, 하트는 겨우 5% 밖에 얻지 못했다. 하트의 대선 승리 가능성은 거의 없어졌고, 결국 1988년 3월 12일 후보직 사퇴와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여담으로 게리 하트의 성스캔들과 관련해 리 애트워터가 연루되어있다는 음모론이 있으나, 하트의 혼외정사 의혹을 처음으로 보도한 <마이애미 헤럴드>의 기자가 직접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11]

2.4. 정계 은퇴 이후의 삶

정계은퇴를 한 이후에 그는 작가로 전직했다. 그는 대선 사퇴 직전에도 "내 마음 중 50%는 작가를, 50%는 대통령을 원하고 있다"라고 말했는데, 영원히 대통령이 될 수 없게 된 후에는 소설가로 전업해 여러 소설을 작성했다. 또 역사가로도 활동해 제임스 먼로의 전기를 포함한 여러 대통령 전기를 써서 막대한 인세를 벌어들였다.

정계 은퇴 이후에도 민주당 내에 친한 정치인이 많았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정계 복귀 제의를 받았다. 클린턴에게는 안보 위원회 자리를 제의받아 한동안 재직했고, 여기서 모은 데이터를 토대로 몇년 안에 중동의 테러집단이 미국을 상대로 돌이킬 수 없는 끔찍한 공격을 할 것이라는 예언을 했지만 모두에게 무시당했다. 2004년 대선에서 존 케리는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하트를 국방부 장관이나 국토안보부 장관, 혹은 CIA 국장에 앉히겠다고 공약했지만 근소하게 낙선하며 흐지부지 되었다.[12] 2014년에는 오바마 대통령에 의해 아일랜드 대사로 임명되어 2017년까지 근무했다.

2007년부터 허프포스트의 기자로 일하면서 정치평론가로도 여생을 보내고 있다. 2020년 대선에서는 조 바이든을 지지했으며, 버니 샌더스를 "그는 조지 맥거번이 아니다"라며 비판했다.

2021년, 부인과 사별했다.

3. 평가

게리 하트 상원의원은 레이거노믹스의 낙수식 경제 정책에 반대표를 던지고 포괄적인 대안을 제시할 유일할 대선 후보입니다. 그는 우리가 예산 적자를 줄이고, 금리를 낮추는 것 뿐 아니라 더 많은 일을 해야한다고 믿습니다. 그의 세부 계획은 여러가지 새로운 전략을 가지고 있습니다.

* 그는 공장을 현대화하고 근로자를 재교육하는데 정부 기금을 투자해, 우리의 제조업이 외국의 기업과 경쟁할 수 있도록 도울 것입니다.
* 그는 불필요한 규제를 철폐하고 연기금 활용을 확대해 새로운 투자재원을 창출하여 신흥 성장 산업을 활성화할 것입니다.
* 그는 실업자를 위한 직업 재훈련 자금을 효과적으로 조달하기 위해 "개인 직업 훈련 계좌"를 만들 것입니다. 근로자와 기업의 세금을 일부 활용하여 이를 위한 자금을 마련할 것입니다.
* 그는 세계 경제에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공격적인 수출 프로그램을 시작해야한다고 믿습니다. 연구 개발에 대한 정부 투자를 GNP의 3% 규모로 늘리고, 보호무역 관세를 하는 대신 생산적 투자와 저축에 집중하도록 조세 제도를 개혁할 것입니다.
1984년 하트의 선거공보물 中[13]
비록 성스캔들로 불명예스럽게 물러난 정치인이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민주당의 역사에서는 중요하게 평가받는 인물이다. 과거 민주당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해리 S. 트루먼, 애들레이 E. 스티븐슨, 리처드 러셀, 린든 B. 존슨, 휴버트 험프리, 헨리 M. 잭슨, 월터 먼데일 등 노동조합의 지지를 받고 복지 확대와 적극적인 정부의 시장개입, 완전고용 등을 중시하는 "뉴딜 자유주의자"들이 당권을 잡고 있었다. 일부 존 C. 스테니스 같은 보수적 민주당원이나 조지 맥거번 등 아웃사이더들이 여기에 대항하긴 했지만 유의미한 세력을 이루지는 못했다.[14]

하지만 게리 하트는 노동조합이 아닌 대도시 청년층과 중산층을 지지 기반으로 하여 복지에서 탈피한 친환경, 친여성, 친소수자, 자유무역, 조세 개혁, 중소기업 지원, 기술 혁신, 금융 규제 개혁 등 오늘날 민주당을 이루는 여러 의제를 체계적으로 제시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처음으로 뉴딜 민주당원과 비등한 세력을 이루며 반란을 일으켰다는 의의가 있었다. 당대에는 이미지 정치만을 한다고 비판받았지만, 그가 주장한 모든 것이 1990~2000년대 민주당의 주류를 이룬 중도 성향 신민주당원들에게 계승되었다.

게리 하트가 먼데일을 거의 꺾을뻔한 1984년 민주당 경선과 먼데일의 1984년 대선 참패 이후, 민주당 내에서 뉴딜 자유주의를 이어가기 힘들다는 믿음은 광범위해졌다. 그 결과 1988년 대선에서 상대적으로 온건했던 마이클 두카키스가 대선후보로 결정되고, 1992년 대선에서는 하트의 정치노선을 계승한 "제3의 길 민주당원" 혹은 "신민주당원" 빌 클린턴 앨 고어가 각각 대통령과 부통령으로 당선되며 하트의 유산은 빛을 발했다.

특히 앨 고어의 경우, 상원의원으로서 게리 하트와 함께 반도체 사업을 육성하고 첨단 IT 산업을 지원하는 법안을 발의하는데 앞장선 대표적인 "아타리 민주당원"으로 게리 하트의 중도실용적 친산업 노선을 잇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클린턴의 경우 아타리 민주당원이라기보다는 "신남부 민주당원"[15]의 후손 격에 가까웠지만, 그램-리치-블라일리 법을 통과시키는 등 게리 하트와 마찬가지로 재임기간 내내 월스트리트 산업에 대한 여러 규제를 철폐하는 신자유주의, 친산업적 입장을 표명했다.

1992년 대선에서 클린턴이 내세운 슬로건 역시 "새로운 종류의 민주당원"(A New kind of Democrat)이었는데, 이는 험프리나 먼데일, 테드 케네디 같은 북부의 고리타분한 좌파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온건한 의제를 받아들이는 온건파 민주당원을 어필한 것으로 본래 1984년 대선 경선에서 게리 하트가 내세운 슬로건이었다. 이후 온건한 민주당원들이 오랜 기간동안 민주당을 이끌었고, 세계 금융위기 이후 민주당이 좌경화했음에도 산업 육성과 노동조합의 지지에서 벗어난 도시 거주자, 여성, 대학생 등의 지지를 바탕으로 선거에 임하고 있다는 점에서, 하트의 유산이 오래 지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 선거 이력

<rowcolor=#fff> 연도 선거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율 (득표수) 당선 여부 비고
1974 연방 상원의원 선거 콜로라도

471,688 (57.23%) 당선 (1위) 초선
1980 연방 상원의원 선거 590,501 (50.34%) 재선

5. 대중 매체에서


* 2018년 개봉된 영화 <프론트러너>는 그의 1988년 대선 성 스캔들을 다루고 있다. 휴 잭맨이 게리 하트를 연기했다. 비평가와 정치평론가 그리고 게리 하트 본인(...)에게 스토리에 깊이가 없으며 진지하게 하트의 스캔들에 접근하지 못했다는 악평을 받았다. 2,500만 달러로 제작되어 360만 달러의 수익을 거두어 흥행에도 참패했다.

6. 여담



[1] 1961년 칼 하트로 개명. [2] 정계 은퇴 이후인 2001년 획득했다. [3] 예비선거는 요식에 불과하고 대부분의 대의원이 고위 정치인의 영향을 받는 제도 [4] 당원의 표심이 대의원에 즉각적으로 반영되는 제도 [5] 하트 왼쪽에 서있는 사람은 아이다호 주 상원의원인 프랭크 처치이다. [6] 물론 미국 상원의원 출마 기준 나이는 30세이기 때문에 하트보다 젊은 상원의원들도 많다. [7] 맥거번은 승리하기 위해 출마했다라기보다는 민주당에 진보적인 가치를 다시 불어넣기 위한 홍보용 후보로 출마한 것에 가까웠다. [8] 맥거번은 먼데일과 사적으로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하트 대신 먼데일을 지지했다. [9] 원문은 skeletons in everybody's closet인데, 벽장 속에 해골이 들어가있다(skeleton in closet)라는 표현은 미국 정치 은어로 정치 생활을 끝장낼만한 치명적인 스캔들을 의미한다. [10] 슈뢰더는 하트의 캠페인 매니저였기에 하트의 대타 후보였고, 하트가 재출마를 선언하자 후보직을 사퇴했다. 바이든은 연설문 표절 의혹 때문에 사퇴했다. [11] 1988년 대선 캠페인 과정에서 리 애트워터의 활약이 과장되어있다는 주장이 많다. 후일 아들 부시의 선거를 도맡는 칼 로브나 Fox의 사장이 되는 로저 에일스, 네거티브 선거를 실질적으로 진두지휘한 조지 W. 부시(!) 등의 역할도 컸고, 결정적으로 리 애트워터의 네거티브가 나오기 이전부터 두카키스의 지지율이 폭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2] 참고로 국무장관으로는 조 바이든을 앉히겠다고 공약했다. [13] 완전고용과 노동조합 보호, 복지 확대를 추구하던 기존 뉴딜 민주당과 차이가 두드러지는 부분이다. [14] 또한 조지 월리스 같은 극보수파더라도 통념과 달리 뉴딜 정책을 지지하는 일이 많았다. 남부의 농민들이 뉴딜 정책의 직접적인 수혜자였기 때문이다. [15] New South. 지미 카터, 루빈 애스큐, 로이드 벤슨 같이 기존 남부민주당원의 보수적인 사회관, 경제관을 유지하지만 남부민주당원의 트레이드마크 격인 인종차별주의를 포기하고 환경, 교육 등 일부 의제에서는 진보적 노선을 받아들인 남부의 온건한 민주당원들을 의미한다. [16] 1969년 소련이 미국보다 먼저 달에 착륙하면서 시간축이 뒤틀려 차파퀴딕 사건이 일어나지 않으며 테드 케네디가 닉슨을 꺾고 당선되었다. 테드 케네디 역시 섹스 스캔들에 휘말려 1976년 로널드 레이건에게 밀려 낙선했고, 레이건은 오일쇼크를 겪었지만 독수리 발톱 작전을 대성공시켜 1980년 근소하게 재선에 성공한다. 그러나 임기 2기 동안에는 소련과 핵위기를 일으켜 전쟁광이라 비난받는 등 실제 역사보다는 확실히 평이 안좋은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