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제112대 황제
알렉시오스 2세 Αλέξιος 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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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알렉시오스 콤니노스 Αλέξιος Β' Κομνηνός |
출생 | 1169년 9월 14일 |
동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 | |
사망 | 1183년 9월 (향년 13-14세) |
동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1180년 9월 24일 ~ 1183년 9월 (3년) | |
전임자 | 마누일 1세 |
후임자 | 안드로니코스 1세 |
부모 |
아버지 :
마누일 1세 어머니 : 안티오키아의 마리아 |
종교 | 기독교( 정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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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제112대 황제이자 동로마 제국 콤니노스 왕조 제5대 황제.2. 출생
마누일 1세와 안티오키아의 마리아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마누일은 전 황후와의 사이에서 딸만 둘을 보았고 그 외에는 사생아들 뿐이었기에 적자의 탄생은 큰 기쁨이었다. 게다가 황실의 입장에서는 급한 후계자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한 셈이었고, 황후의 친정인 안티오키아 공국과 제국의 동맹인 예루살렘 왕국의 입장에서는 더 강한 연결고리가 생긴 셈이었으며, 로마인 황제가 서방인 황후 사이에서 포르피로옌니토스인 후계자를 본 통합의 상징이 생긴 사건이기도 했다.[1]3. 어린 황제
그러나 아버지인 마누일의 나이가 이미 50살이었다는 점이 문제였다. 마누일은 황자를 본 이후에도 적극적인 대외 활동을 이어갔는데, 1176년의 미리오케팔론 전투를 전후하여 건강이 악화되자 문제는 수면으로 떠올랐다.결국 죽음을 예감했는지 마누일은 어린 아들을 위해 온갖 안전 장치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밖으로는 그의 장기인 외교술을 발휘하여 주변의 정세를 안정시켰고, 아들을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의 막내 공주인 프랑스의 아녜스와 약혼시키는 등 결혼 동맹을 맺었으며, 1177년 룸 술탄국이 침공하자 히엘리온-리모키르 전투에서 이를 대파하고 1179년까지 노구를 이끌로 친정을 불사하는 등 성공적으로 전쟁을 수행하여 거꾸로 제국이 압박하는 형세를 만들었다. 안으로는 황후와 대제의 조카인 알렉시오스 대군주(1135?~1182, 요안니스 2세의 차남 안드로니코스의 아들)를 필두로 한 섭정단을 꾸렸으며, 죽어가는 와중에도 힘세고 강한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를 고명 대신으로 붙여주었다.
그럼에도 알렉시오스 2세의 자리는 불안했다. 어린 황제는 단독 황제가 되었음에도 정무보다는 놀이나 각종 경기 구경에 관심을 보였고[2], 황제를 대행할 섭정단은 서방인들이 많았기에 썩 지지받지 못했다. 결국 알렉시오스 2세 이전의 황위 계승권자이던 마누일의 장녀 마리아 콤니니가 남편 몬페라토의 레니에르와 함께 쿠데타를 일으켰고 섭정 알렉시오스 대군주는 여론의 압박에 진압을 흐지부지 끝낸 상황이었다. 결국 이 틈을 파고든 당숙 안드로니코스 콤니노스가 여론을 업고 황태후를 비롯한 섭정단을 모조리 잡아 죽임은 물론이요 잠재적인 경쟁자인 마리아 황녀 부부까지 제거해버렸고, 어린 알렉시오스 2세는 당숙과 공동 황제가 되어 선임 황제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4. 죽음
아버지도, 어머니도, 섭정단의 핵심인 4촌 형 알렉시오스 대군주도 잃은 어린 황제를 보호할 세력은 없었다. 황제가 된 안드로니코스 1세는 당질인 알렉시오스 2세를 살해한 뒤 시신을 비밀리에 마르마라 해에 던져 유기했다. 그리고 2년 뒤, 안드로니코스도 폭정 끝에 민란으로 살해당해 제위가 이사키오스 2세의 앙겔로스 가문에게 넘어가게 되면서 마케도니아 왕조 이후로 다시 한번 백년동안 로마 제국의 중흥을 이끈 콤니노스 왕조는 제국의 제위를 영영 잃게 되고 그나마 4차 십자군 시기에 안드로니코스 1세의 손자였던 알렉시오스가 폰토스 지역으로 도주해 그의 이모였던 조지아 여왕 타마르의 도움을 받아 트라페준타 제국을 세우고 1461년까지 그 지역을 다스리게 된다.5. 방대한 인척 관계
알렉시오스 2세가 아버지 마누일 1세의 외교 활동의 결과물이고 마누일 1세가 말년에 그를 중심으로 대전략을 구축했기 때문에 근대 유럽의 왕조들이 떠오를 정도로 복잡한 인척을 12세기에 가졌다. 안티오키아 공작이 외삼촌, 헝가리 왕이 이모부, 프랑스 왕국이 처가, 예루살렘의 왕과 몬페라토 변경백이 매형의 형제이기까지. 그 외에도 촌수를 올리면 더 늘어날 정도로 지중해 외교의 핵심이었다.6. 가짜 알렉시오스 2세
그가 죽은 이후로도 러시아의 가짜 드미트리마냥 가짜 알렉시오스 2세가 앙겔로스 왕조 시대에 불쑥 불쑥 튀어나왔다.
[1]
마누일 1세는 서방 친화적인 정책을 펼쳤고 첫 황후 역시 서방인인
줄츠바흐의 베르타였으나 끝내 아들은 보지 못했다. 43세의 나이로 16세의 신부와 재혼해가며 8년여만의 결혼 생활 끝에 얻은 염원하던 아들이었으니 그 기쁨은 남달랐을 것이다.
[2]
사실 이는 알렉시오스 2세 동년배들이 현대에도 보이는 전형적인 모습인 만큼 나이 기준으로 봤을때 크게 이상한 건 아니었다. 하필 그의 직위가 황제라는것이 문제였을 뿐. 그나마도 섭정단이 정무를 사실상 맡고 있으니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아직 아이니까하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지만 이 섭정단도 썩 지지를 받지 못한 상태에 누나라는 작자가 야심을 못 버리고 쿠데타나 벌이고 있고 당숙도 암약하는 등 주변 상황이 알렉시오스 2세의 편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