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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1f2023> 이름 | <colbgcolor=#fff,#1f2023>프레데리크 쇼팽 걸작선 | |
The Masterpieces of Fryderyk Chopin | ||
국가 | 폴란드 | |
소장·관리 |
쇼팽협회(The Fryderyk Chopin Society) 폴란드 국립도서관(The National Library) |
|
등재유형 | 기록유산 | |
등재연도 | 1999년 | |
본문 |
프레데리크 쇼팽(Fryderyk Chopin, 1810~1849)은
바흐(J. S. Bach)나
모차르트(W. A. Mozart),
베토벤(L. van Beethoven),
베르디(G. Verdi)와 마찬가지로 지속적이며 보편적인 가치를 지닌 작곡가로 평가된다. 그의 음악이 지닌 가장 중요한 특징은 독창성과 새로움이다. 쇼팽은 아시아, 남아메리카와 북아메리카 지역에 이르기까지 유럽 밖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바르샤바에서 열리는 프레데리크 쇼팽 국제 콩쿠르(Fryderyk Chopin International Competition)에서는 각 대륙을 대표하는 음악가들이 모여 쇼팽이 작곡한 곡을 연주한다. 낭만주의 음악의 아버지 중 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는 쇼팽의 음악은 독특한 개성을 지니며, 그가 이룬 음악적 성과의 우수성은 전무후무하다. 폴란드를 떠나 19년을 살았던 쇼팽의 음악 작품은 여러 컬렉션에 흩어져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쇼팽의 작품의 상당 부분을 소장하고 있는 프레데리크 쇼팽 협회(Fryderyk Chopin Society)와 폴란드 국립도서관(National Library)은 특별한 중요성을 가진다. 쇼팽의 음악적 성과가 너무도 중요한 까닭에 유네스코(UNESCO)는 1999년을 ‘국제 프레데리크 쇼팽의 해(Fryderyk Chopin International Year)’로 선언하여 전 세계가 쇼팽 150주기를 기념하기도 했다. |
}}}}}}}}} |
프레데리크 쇼팽 Frédéric Chopin |
||||
|
||||
본명 |
프레데리크 프랑수아 쇼팽[1] Frédéric François Chopin |
|||
국적 |
[[바르샤바 공국| ]][[틀:국기| ]][[틀:국기| ]] → [[폴란드 입헌왕국| ]][[틀:국기| ]][[틀:국기| ]] → [[프랑스| ]][[틀:국기| ]][[틀:국기| ]][A] |
|||
민족 | 폴란드인[A] | |||
출생 | 1810년 3월 1일 | |||
바르샤바 공국 젤라조바 볼라 (現 폴란드 마조비에츠키에 주 젤라조바 볼라) |
||||
사망 | 1849년 10월 17일 (향년 39세)[4] | |||
프랑스 공화국 파리 | ||||
직업 | 작곡가, 피아니스트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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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colbgcolor=#fff,#1f2023>프랑스 파리 페르 라셰스 묘지 폴란드 바르샤바 성 십자가 성당 (심장) |
||
학력 | 바르샤바 음악원 (1826년~1829년) | |||
활동 기간 | 1825년 - 1849년 | |||
사조 | 전기 낭만주의 | |||
신체 | 170cm, 45kg[5] | |||
종교 | 가톨릭 | |||
부모 |
아버지 니콜라 쇼팽 (1771-1844) 어머니 테클라 유스티나 쇼팽[6] (1782-1861) |
|||
배우자 | 없음 | }}}}}}}}} |
|
초상화 |
[clearfix]
1. 개요
쇼팽은 그의 모든 인생을 피아노에 바쳤고, 우리 피아니스트들은 그를 피아노의 절대,
절대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그 어떤, 그 어느 작곡가보다도 훨씬 더 피아노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 아르투르 루빈스타인[7][8]
피아노의 시인이라고 불리는
폴란드의
작곡가,
피아니스트,
독립운동가.[9]― 아르투르 루빈스타인[7][8]
그는 낭만주의 클래식 음악사, 특히 피아노계에서 프란츠 리스트와 함께 최고의 업적을 이룩한 작곡가이다. 폴란드인이 자부심을 갖고 존경하는 폴란드 최고의 위인 중 한 명이기도 하다. 폴란드의 관문 바르샤바의 공항 이름도 바르샤바 쇼팽 국제공항이다.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1927년 만들어진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도 폴란드 역대 대통령들의 중요한 공무이자 매년 국가지정 관광시즌으로 지정될 만큼 피아노 분야 최고 위상의 콩쿠르로 명망을 떨친다.[10]
2. 생애
2.1. 초기 활동
프레데리크 쇼팽은 1810년 3월 1일[11]에 프랑스인 아버지 니콜라 쇼팽(Nicolas Chopin, 1771~1844)[12]과 폴란드 귀족의 딸이었던 어머니 테클라 유스티나 크시자노프스카(Tekla Justyna Krzyżanowska, 1782~1861)[13] 사이에서 1남 3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위로는 누나 루드비카(Ludwika, 1807~1855)가 있었고, 아래로는 두 여동생 이자벨라(Izabela, 1811~1881)와 에밀리아(Emilia, 1812~1827)가 있었다. 막내 에밀리아는 15살 때 결핵으로 요절했다.[14] 당대의 결핵은 굉장한 난치병이었다.쇼팽은 어릴 때부터 피아노에 재능을 보였으며, 8살 때는 폴로네이즈 두 곡을 작곡했을 정도였다.[15] 어린 쇼팽의 재능은 바르샤바의 귀족들에게까지 알려져 그들 앞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쇼팽이 얼마나 연주를 잘 했는지, 당시 폴란드 언론이 "천재는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서만 태어나는 줄 알았지만 우리나라에도 드디어 천재가 태어났다."라고 극찬했을 정도였다.
정식으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1816년으로, 체코계 폴란드인이었던 보이치에흐 지브니(Wojciech Adalbert Żywny)[16]라는 피아니스트에게 배우게 됐다. 지브니는 엄청난 골초에 보드카에 빠져 살았지만, 쇼팽의 연주를 듣자마자 그를 의욕적으로 가르쳐 주었다. 훗날 쇼팽이 말하기를, "지브니 선생님 앞이라면 노새도 천재가 될 겁니다."라고 했을 정도. 1818년에 아달베르트 기로베츠(Adalbert Gyrowetz)의 협주곡을 완벽하게 연주하는 쇼팽을 보고, 지브니는 더 이상 가르칠 게 없다면서 쇼팽이 자유롭게 성장하도록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17]
이후 1822년에 바르샤바 음악원의 창설자인 유제프 엘스네르(Józef Antoni Franciszek Elsner)를 통해 본격적으로 음악을 배우게 됐고, 1825년 중학생 때는 러시아 황제 앞에서 연주할 기회를 얻게 됐다. 이후 피아니스트 바츨라프 빌렘 뷔르펠(Václav Vilém Würfel)을 사사하며 바르샤바 음악원을 다녔다. 바르샤바 음악원을 졸업한 후, 1828~29년에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를 여행하면서 음악의 중심지인 빈으로 가서 피아니스트로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2.2. 해외 진출
1830년 다시 한 번 빈에 갔다.[18] 이때 그를 위한 고별 연주회에 그가 연모했던 콘스탄치아 그와트코프스카(Konstancja Gładkowska)가 찬조 출연했는데, 사실 그가 빈에 유학을 간 이유는 그녀에게 고백하지 못하자 고민 끝에 그녀가 없는 곳으로 가기 위해서였다는 카더라가 있다.[19] 그의 곡 중 에튀드 3번 '이별의 곡'과 협주곡 1, 2번은 사실 그녀를 위해 작곡한 곡이라는 소문이 있을 정도.빈에 다시 한 번 가서 카를 체르니, 요한 네포무크 훔멜 등과 교류했지만, 빈의 청중들은 쇼팽에게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동갑내기인 로베르트 슈만은 비평에서 그에게 "모두 모자를 벗어라. 천재가 등장했다."라는 표현을 써가며 쇼팽을 극찬했다. 정작 쇼팽은 "슈만은 나를 천치로 만들고 있다."라고 말하며 마뜩잖아 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폴란드에서 러시아에 대항해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게 됐고[20], 빈을 떠나[21] 슈투트가르트에 도착했을 때 러시아군의 잔혹한 진압으로 혁명이 실패로 끝났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때 겪은 분노와 조국과 집에 있는 가족들에 대한 걱정 등이 뒤엉켜서 쓴 곡이 에튀드 ' 혁명'으로 알려져 있다. 쇼팽의 집도 당시 러시아군의 약탈로 사라져 있었고, 러시아군은 그의 집에 있던 피아노까지 도끼로 작살내 땔감으로 썼다. 이를 보고 쇼팽은 자신의 일기에 "하느님, 당신은 러시아인이십니까?"라고 적으며 울분을 토로했다. 같은 시기에는 술집에서 러시아인들이 하던 "하느님의 최대 실수는 바로 폴란드인을 창조한 거야."라는 말을 듣는 수모도 겪었다.[22]
이후 쇼팽은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다. 쇼팽은 폴란드 출신이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프랑스에서 보냈다. 그는 파리의 예술가들과 교류하였으나, 파리에서도 신통치 않은 결과만을 얻었고,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불리던 프리드리히 칼크브레너(Friedrich Wilhelm Michael Kalkbrenner)에게 피아노를 더 배울까 생각했지만 칼크브레너의 피상적인 연주 스타일 때문에 쇼팽이 개성을 상실할까 우려한 친구 프란츠 리스트와 펠릭스 멘델스존, 힐러 등이 만류했고, 3년이나 배워야 한다는 말에 그만두게 됐다.
파리에서도 별 소득이 없자 쇼팽은 미국으로 건너갈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러다가 파리 길거리에서 고향 귀족을 만나게 되어 귀족들과 당대 유명인사들이 드나드는 살롱에 소개됐고, 살롱에서의 연주회로 호평을 받아 쇼팽은 파리에 정착하기로 결심하고 본격적으로 후대에 널리 알려진 많은 피아노 곡을 작곡하게 됐다. 쇼팽은 꽤나 베스트 드레서였다고 하며[23] 이따금씩 건반에 피아노 헝겊을 덮고 연주를 하는 묘기도 보여주었다. 다만 본인은 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1836년, 드레스덴을 여행하던 중 바르샤바에서 사귀었던 친구의 여동생 마리아 보진스카(Maria Wodzińska)와 다시 만나게 된 쇼팽은 보진스카와 비밀리에 약혼했지만, 쇼팽의 건강이 나쁜 것을 눈치챈 보진스카 주변 사람들의 반대로[24] 결국 파혼하고 말았다.[25][26]
2.3. 필생의 여인 상드
이후 마리 다구(Marie d'Agoult) 백작부인이 주최한 파티에서 당대 화제의 인물이었던 소설가 조르주 상드를 만나[27] 사랑에 빠져 수 년 간[28] 사귀게 된다. 상드는 당대에 성공한 소설가로서[29] 문학계에서 상당히 뛰어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여성 인권 옹호자였고, 남장을 하고 살롱에 출입하며, 남편 외에도 많은 남자들과 염문을 벌인 여러 가지 일로 화제가 되던 인물이었는데, 보수적인 성향이 있던[30] 쇼팽은 그런 상드를 보고 처음에는 싫어했지만, 점점 마음을 열게 됐다. 병으로 인해 성적인 능력은 상실한 쇼팽이었지만, 상드의 헌신적인 돌봄 덕분에 10여 년 동안 연인 관계를 지속했다.널리 알려진 것과는 달리 두 사람의 관계는 상드의 일방적인 헌신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작곡, 연주와 레슨으로 얻는 수익의 대부분이 상드와 자식들에게 돌아갔다. [31][32] 반대로 정열적인 팜므파탈 상드가 순진한 쇼팽을 갖고 놀다 찬 듯한 이미지도 널리 퍼져 있는데, 사실 상드도 쇼팽을 많이 사랑했다. 몸이 약한 쇼팽이 죽을 뻔했을 때 헌신적으로 간호해 살려놨으며 마요르카 섬에서는 피아노를 들여오고 보금자리를 마련하며 생필품을 구입하는 등 생활 일체를 지휘했고[33] 수줍음을 타는 쇼팽이 큰 연주회를 앞두고 긴장할 때도 격려해주기도 했다. 실제로 상드를 몇 년 동안 제대로 본 적도 없던 쇼팽의 가족들마저 상드에게 쇼팽을 부탁할 정도였다.
쇼팽의 건강이 좋지 않자, 쇼팽과 상드는 요양차 1838년 지중해의 마요르카 섬으로 가게 됐다.[34] 마요르카는 연중 따뜻하고 온화한 기후의 휴양지로 쇼팽의 요양을 위해 고른 곳이었지만, 이사온 그 해 겨울에 하필이면 몇백년만의 추위가 몰려온 탓에 쇼팽의 건강이 악화되고 말았다. 그들은 버려진 발데모사 수도원 근처의 오두막집에서 지냈는데, 오두막의 환경이 지하실 내지 다락을 방불케 했을 정도로 최악이었다. 심지어 사육제에 코스튬을 한 사람들을 보고 진짜 괴물로 착각했을 정도. 그런 중에도 쇼팽은 파리에서 마요르카까지 피아노를 옮겨와 수도원에서 피아노를 치며 작곡을 했다. 결국 더 못 버티고 이듬해인 1839년 그들은 마르세유를 거쳐 상드의 고향인 프랑스의 노앙으로 옮겼다. 상드는 한 달만 더 있었으면 스페인에서 죽었을 거라고 온갖 욕이란 욕은 다 했다.[35][36]
노앙으로 옮긴 둘은 그제서야 안정을 찾았으며, 파리와 노앙을 오가는 생활을 반복했다. 그러나 상드와의 관계는 점점 악화됐다. 자유분방한 상드는 쇼팽과의 연애를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타인들의 시선을 무시했으나, 쇼팽은 그러지 못했다. 더군다나 점점 몸이 약해져가는 쇼팽은 갈수록 신경질적으로 변하는데[37], 10년 중 자그마치 7년 간의 섹스리스와 지루한 병구완에 상드는 점점 지치게 된다. 둘 사이의 관계가 점점 안 좋아지던 시기에 상드는 쇼팽과의 결혼생활을 다룬 소설을 집필했고, 그걸 쇼팽과 지인들에게 낭독했다. 당시 지인들은 쇼팽을 겨냥한 글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정작 쇼팽 자신은 몰랐다.[38] 그런 와중에 매달 의사가 왕진을 오고 매년 한 번씩 의식불명이나 위독한 지경으로 한 번은 그릇된 부고기사가 나갔을 정도로 심각했던 쇼팽의 건강은 꾸준히 악화됐고, 상드의 딸의 결혼생활 문제로 관계가 완전히 틀어지게 된다.
상드의 딸 솔랑주는 조각가인 장바티스트 오귀스트 클레쟁제르(Jean-Baptiste Auguste Clésinger, 1814-1883)와 결혼했는데[39] 이 부부는 신혼초부터 흥청망청 돈을 써대면서 갖고 있던 돈을 탕진하고 빚까지 지게 된다. 솔랑주 부부는 뻔뻔하게 상드에게 아첨을 떨면서 돈을 요구했는데 상드가 이를 거절하자 부부와 상드 사이에 갈등이 생긴다. 솔랑주 부부는 상드에게 돈을 달라고 노앙의 별장까지 찾아왔고 결국 큰 다툼이 벌어졌는데, 솔랑주는 상드가 수양딸로 삼았던 여성보다 친딸인 자신에게 더 지참금을 적게 줬다고 난리를 피우면서 결국 집기를 집어던지고 폭력까지 행사했다.[40]
결국 솔랑주와 그녀의 남편은 노앙 별장에서 내쫓겼는데, 솔랑주는 당시 임신중이었기 때문에 흔들림이 심한 일반 마차로 파리까지 가기는 어려웠다. 솔랑주 부부는 저택 근처의 여관에 머무르면서 노앙 저택에 있는 쇼팽의 고급마차를 빌려달라고 했지만 상드는 거절해 버렸다. 솔랑주 부부는 절박한 심정으로 쇼팽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이런 정황을 전혀 몰랐던 쇼팽은 편지를 받고 마차의 사용을 허락했으며 상드에게 따로 마차를 빌려주라는 편지를 보냈다.[41][42]
그런데 이게 상드를 제대로 화나게 한다. 상드는 쇼팽이 솔랑주 부부의 편에 섰다고 생각해서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고, 쇼팽을 비난하는 장문의 편지를 써 보냈다.[43] 이 편지를 끝으로 상드는 쇼팽을 떠났고, 결국 두 사람의 관계는 이렇게 끝나고 말았다. 쇼팽은 죽기 직전까지 상드와 주고받은 편지를 상드의 머리카락과 함께 보관했지만 상드는 쇼팽과 주고받은 편지를 모두 불태워 버렸다. 심지어 상드는 쇼팽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44]
파리에서의 쇼팽의 입지도 많이 좁아져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사정이 좋지 않아 쇼팽은 제자 제인 스털링의 초청을 받아 영국과 스코틀랜드로 여행을 가게 됐다. 그러나 영국에서도 쇼팽은 큰 굴욕을 당해야 했다. 영국 왕과 귀족, 명사들이 참석한 파티에서 연주를 하게 됐지만, 쇼팽 혼자 어두운 옆방에서 연주해야 했고, 왕과 귀족들은 쇼팽의 연주에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쇼팽 정도의 음악가가 한 마디로 배경 음악 취급을 받은 굴욕을 당한 셈이다.[45] 더욱이 영국의 기후는 쇼팽에겐 치명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쇼팽은 런던에서 어렵게 사는 폴란드인들을 위해 열린 자선 연주회에 참가하기도 했는데, 이는 쇼팽이 대중 앞에서 한 마지막 연주회였다.
2.4. 투병과 사망
파리로 돌아온 쇼팽은 개인교습 말고는 일절 다른 연주 활동도 못할 만큼 중병에 걸려 있었다. 침대에서 화장실까지 가는 것도 힘들었고, 누군가 업어주지 않으면 2층으로 올라가지도 못했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됐다. 1849년 6월 경 작곡된 마주르카 Op. 68, No. 4의 자필보를 보면 이전과 같은 깔끔한 악보 대신 베토벤이 쓴 듯한 낙서와도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그래서 결국 이 곡을 마지막으로 절필하고 만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면도와 옷매무새만큼은 단정히 했다고 한다.쇼팽은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죽기 직전에 자신의 첼로 소나타[46] 도입부를 연주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이를 채 다 듣기도 전에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며 연주를 중단시켰다. 이후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두려워하던 것과 똑같이 살아 있는 채로 묻히는 것을 막아달라는 육필 메모를 남겼으며, 자정 즈음 몸이 어떠냐는 의사의 질문에 "이제는 안 아파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결국 1849년 10월 17일, 쇼팽은 "어머니...나의 어머니..."[47][48]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쇼팽의 소망대로 지인들은 쇼팽의 장례식 때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연주하려 했지만, 쇼팽의 장례식이 치러질 예정이었던 성 마들렌 성당에서 여가수가 성당 안에서 연주할 수 없다고 반대하는 바람에 장례를 치르지 못하게 됐다.[49] 다행히 쇼팽의 간절한 마지막 소원이라는 지인들의 적극적인 설득 끝에 2주만에 성당 측이 이를 양보했고, 그렇게 모차르트의 레퀴엠이 연주되는 가운데 쇼팽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쇼팽의 묘에는 그가 폴란드를 떠나기 전 은잔에 담아온 폴란드의 흙이 뿌려졌고[50], 후에 쇼팽의 심장은 유언에 따라 그의 누이에게 인도되어 나중에 바르샤바의 성 십자가 성당에 안치됐다. 이 부분은 2014년 11월 30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뤄졌다.
세월이 지나 2차 세계 대전 당시 바르샤바 봉기 당시 이 성당은 폐허가 될 정도로 포격을 받았으나, 이전에 심장은 무사하게 안전한 곳으로 옮겨졌다. 어처구니없게도 쇼팽의 심장을 안전한 곳으로 정중히 옮기도록 한 장본인은 봉기 진압과 학살을 주도한 나치 친위대의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였다. 사실은 보관되어 있던 쇼팽의 심장을 약탈한 후 바르샤바 시민들의 민심을 가라앉히기 위해 다시 반환한 것이다. 전쟁이 끝난 뒤 쇼팽의 심장은 다시 성 십자가 성당에 안치됐다.
이후 2014년에 쇼팽의 정확한 사망 원인을 연구하기 위해 학자들이 심장을 꺼냈다. 일반적으로는 쇼팽이 결핵[51]으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쇼팽이 사망한 직후의 부검서에 따르면 의외로 폐보다 심장의 상태가 더 나빴다는 내용이 있는 것을 토대로 쇼팽의 사망 원인이 실제로는 결핵이 아니라 심장 질환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성당 측에서는 심장의 보존 문제 때문에 공개를 거부하다가, 결국 심장이 담긴 병을 공개했다. 본격적인 심장 해부 및 조직 검사는 이뤄지지 않았고, 대신 육안 및 촬영 장비로 겉을 관찰하는 것만 허용됐다. 연구 결과, 학자들은 심장에 발생한 심낭염이 쇼팽의 직접적인 사인이라고 발표했다. 다만 엄밀히 따지면 결핵 또한 사망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심낭염이 발병하는 원인 중 하나가 바로 결핵이기 때문이다. 이 연구 결과의 내용은 2017년 11월 '전미 의학 학술지(the American Journal of Medicine)'에 실렸다. 성당에 안치된 쇼팽 심장, 2014년 다시 꺼내 보니
3. 음악적 특징과 평가
음악은 그의
언어, 즉 소수의 엄선된 사람들만이 인정할 수 있는 모든 정서의 영역을 표현하는 신성한 언어였다... 그의 고향의 뮤즈는 그의 노래를 지시하고 폴란드의 고통스러운 절규는 그의 예술에 신비롭고 정의하기 힘든
시를 선사한다. 이 시는 진정으로 경험한 모든 이들에게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피아노만으로는 그의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드러내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간단히 말해서 그는 우리의 최고 수준의 헌신을 지휘하는 가장 주목할 만한 사람이다.
― 프란츠 리스트 #
― 프란츠 리스트 #
쇼팽은 대단한 인물이다. 피아노만으로 모든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 클로드 드뷔시
― 클로드 드뷔시
쇼팽,
리스트,
탈베르크 중 파리에서 가장 대중적인 인기가 있었던 것은 탈베르크였을 것이다. 탈베르크의 연주는 평범한 사람이라도 노력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경지지만, 나머지 두 명은 그렇지 않으니까.
― 찰스 할레 경[52]
― 찰스 할레 경[52]
3.1. 작품 성향
쇼팽은 일평생 거의 피아노를 위한 곡만을 작곡했다. 가곡이나 다른 악기를 위한 곡 같은 다른 장르의 작품도 있긴 하지만 피아노 곡이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첼로 소나타나 가곡과 같은 곡이라 하더라도 그의 모든 작품에는 피아노가 들어간다. 당대는 낭만주의 음악의 시대였음에도 쇼팽은 자신의 음악이 낭만주의로 평가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심지어 초기에는 몇몇 사람들에겐 낭만주의자로도 인정받지 못했다. 그의 대담한 전조나 그 당시 절대적으로 기피됐던 불협화음, 생소한 기교 등은 그를 음악사에서 완전한 돌연변이로 만들다시피 했고 심지어 그를 제대로 된 음악교육을 받지 못한 아마추어 음악가로 오해하고 착각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의 음악은 당시에도 완전히 이해되지 않을 정도의 음악이어서[53] 그와 비슷한 곡을 작곡한 몇 사람은 사후 쇼팽과 대등한 명성을 얻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고트샬크(가초크)와 스테판 헬러가 있다.[54] 그렇지만 오늘날엔 쇼팽이 낭만주의 작품의 대명사처럼 불리며, 대중들이 가장 잘 아는 낭만주의 피아노 작곡가 중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피아노로 다양한 음색을 구현하기 위해 페달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장식음이 대부분 기교적이기만 한 악절 정도로 취급됐던 당시 쇼팽은 장식음을 기능적으로 사용하여 선율의 하나로서 취급하여 루바토 기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쇼팽의 생전에는 작품이 대중에게 널리 인기를 끌지 못했다. 당시 악보 업계에서 원하던 피아노 곡은 가볍고 경쾌하면서도 아마추어들도 어렵지 않게 연주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피아노가 중산층 가정에 빠르게 보급되던 시점이었지만 아직 라디오, 전축이 나오기 이전이었고 피아노가 오늘날의 오디오 기기 역할까지 도맡던 상황이었다. 쇼팽은 당시 악보 업계에서 원하던 종류의 곡을 작곡하기보다는 내면성, 임기응변을 중시하는 비전통적인 작품을 만들었다.
동시대의 작곡가이자 쇼팽의 동료이기도 했던 리스트의 음악에 비해 난이도 면에서는 왠지 모르게 어렵다는 평가를 하지 않는 듯하지만 피아노를 치다가 피아노를 부숴버리고 싶을 정도로 애매하게, 왠지 모르게 어려운 패시지가 눈에 엄청 자주 띈다. 리스트와는 다르게 왠지 어렵게 들리지는 않으나 상당히 어려운 곡들이 많다. 이유를 따지기에 먼저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리스트의 작곡 스타일 자체가 웅장한 효과, 화려함만을 부각시키기 위한 악절들을 상당히 많이 썼다. 즉 나쁘게 말하자면 곡 전체에 있어서 안 써도 될 부분을 남발했다는 점이다.[55] 쇼팽은 그런 악절들을 거의 쓰지 않았고 기교 자체를 중시하는 게 아니라 내용적인 측면에서 기교적인 악절을 단순히 도구로 취급하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리스트보단 기교적인 효과를 중시하는 악절들이 상대적으로 눈에 덜 띄거나, 어떤 부분은 단순하게 봐선 어려운 악절인지 아닌지 파악하기 어렵게도 쓰여있다. 그런 면에서 슈만이나 쇼팽의 몇몇 곡들은 치기 매우 어려운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단지 악보를 읽고 손놀리는 부분을 익히는 데에서만 어려움을 느끼는 것으로 테크닉적인 난이도를 평가하는 건 절대 금물이다.
그리고 쇼팽은 관현악에 대한 지식이 상대적으로 부족해서 그런지 오케스트라 부분은 다소 미숙한 면이 느껴지는데, 그것을 커버하기 위해 일부러 피아노 파트를 화려하게 전개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op. 2 돈 조반니 변주곡, 2개의 협주곡 등에서 그런 면을 찾아볼 수 있으며, 연주회용 알레그로에서도 원래 협주곡 계획이 있었던 만큼 기교적으로 상당히 어렵다는 점이 그렇다.
유튜브의 한 클래식 작곡가가 쇼팽의 왈츠에 등장하는 작곡 기법들과 표현 방식들을 본떠서 쇼팽스러운(?) 왈츠를 만들어 헌정한 적이 있다. 쇼팽 음악세계의 여러 구성요소들을 시각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
3.2. 바흐, 모차르트의 열광적인 추종자
쇼팽은 자신의 일생 동안 바흐와 모차르트를 가장 존경하며 추종했다. 세계 음악 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인 바흐와 모차르트가 작곡한 곡의 치밀함과 완성도처럼 쇼팽의 곡도 구조적으로 짜임새가 있고 한 음이라도 틀릴 시 틀렸다는 티가 바로 난다. 바흐의 아주 완벽한 음악 체계를 자신의 음악으로 끌고 와서 새로운 피아노 테크닉을 만들어냈는데, 오죽하면 자신의 제자들에게 “손가락 연습을 하려면 바흐의 곡을 통해 테크닉을 기르라”라고 말했을 정도다. 모차르트의 영향력도 이에 못지 않은데,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에 나오는 이중창 내게 손을 주렴(La ci darem la mano)[56]이라는 곡을 자신이 피아노 변주곡(Variations)으로 새롭게 작곡했다. 모차르트의 완벽하고 천재적인 음악성은 쇼팽의 피아노 창작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유명한 쇼팽의 어록 중 하나가 “모차르트는 음악 창작에 있어 전 영역을 아우르지만,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내 부족한 머리로 이 (피아노) 건반에 손을 대는 것일 뿐이다.”이다. 또한, 자신의 장례식에 반드시 단 하나의 곡만을 꼭 연주해달라고 지인들에게 사실상 유언인 부탁을 했는데 그 곡이 바로 모차르트의 레퀴엠이다. 쇼팽이 죽고 나서 약 3,000여 명이 장례식에 참석했는데, 그 가운데 모차르트의 레퀴엠이 연주됐다. 그만큼 쇼팽은 음악 창작과 자신의 일생에 있어 바흐와 모차르트의 영향을 매우 많이 받았다.3.3. 피아노사에 남긴 업적
그의 연습곡에서 볼 수 있듯이 과거의 곡과는 거의 완전히 다른 기법과 기교를 사용했다. 구세대식 교육을 받긴 했지만 훌륭한 예술가였던 모셀레스는 한때 그의 연습곡를 쳐보곤 '기교적으로 어렵고 비예술적인 부분에서 나의 손가락은 돌아가지 않았다.'라고 썼다.4. 작품 목록
자세한 내용은 프레데리크 쇼팽/작품 목록 문서 참고하십시오.5. 대중문화에서
유명한 클래식 음악가인 모차르트, 베토벤과 더불어 다양한 2차 창작물에서 등장한다. 아마 전자가 '괴팍한 괴짜 천재'의 전형적인 이미지라면 이쪽은 '연약하고 섬세한 예술가'의 이미지에 잘 부합하기 때문인 듯. 영화라고 예외는 아니다.- 리듬스타 - 에튀드 "대양"과 "겨울바람"이 최고난이도 곡으로 등장한다.
- 클래시컬로이드 - 쇼팽(클래시컬로이드): 내성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 피아노의 숲
- Frederic: The resurrection of music: 폴란드의 인디 게임
5.1. Frederic: The resurrection of music
그의 고국(!) 폴란드에서 제작한 인디게임이다. 장르는 리듬 게임.스팀 appstore 구글플레이
1편. 9곡 + 히든곡(쇼팽 난이도로 스토리 모드 클리어) 1곡 + DLC 2곡(0.99$)로 있다.
2편인 Evil Strikes Back! 10곡이 전부.
마이클 잭슨, 레이디 가가 등의 현대 음악가들이 출연한 것과, 원곡의 작품명이 표기되지 않는 것과 후속작에 대한 떡밥이 없다....기보다는 딸랑 물음표 하나.
그런데 전작에 비해서 이스터 에그와 유머가 없고, 스토리도 흥미진진하지 않아서 재미가 영 떨어진다. 설상가상으로 쇼팽도 정이 떨어진다. 1편에서도 심장이 없어도 점잖게 행동하더니, 이제는 그것을 되찾기 위하여 수단을 가리지 않는 등 과도하게 너무 집착해댄다. 게다가 주변 사람들이 봉변을 당해도 "걔네들 자유의지니까."라며 신경쓰지 않는다. 음악으로 최면술을 부릴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1편에서는 쇼팽이 현대 시대에 누군가에 의해 부활되고, 세 명의 여신이 마차와 피아노를 주며 떠난다. 그는 세계를 떠돌아 다니며 쇼팽을 없애라는 명령을 받은 뮤지션들과 음악대결을 펼친 후에, 모든 음악가들의 저작권을 사재기하고 쇼팽을 없애라고 명령한 매스터마인드 X(보라색 망토)라는 사람과 결국 이겨 원상태로 되돌린다. 엔딩 후에는 누군가에게 습격을 받는데...
2편에서는 매스터마인드 X를 물리친 직후에서 이어지는데, 이번에는 그를 부활시킨 퍼펫 마스터가 갑자기 그의 심장을 도로 빼앗고 여신들까지 납치하고는 튄다. 심장이 없어져 성격이 건방지게 된 쇼팽은 다시 가 보지 않았던 세계를 떠돌아다니며 쇼팽을 물리치려는 '인형'들과 음악 대결을 펼친 후에, 퍼펫 마스터인 레이디 즈가가를 물리치고, 둘이 탔던 배가 사이보그 만악의 근원인 '그레이트 신디사이저'로 변하자 그것도 물리친다. 그러고 나서 쇼팽은 레이디 즈가가에게 사회봉사로 도시를 청소하는 벌을 준 다음에 여신들을 차에 태우고 간다.
5.2. 피아노의 숲
이시키 마코토의 만화 피아노의 숲에 중후반부 메인 무대가 위에 언급한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이다.5.3. 리듬스타
2008년 3월 31일부터 2013년 3월 1일까지 리듬스타는 꾸준히 신곡을 출시했는데, 쇼팽 명의의 노래가 전체 노래 중 무려 13%나 차지한다![58] 대중들에게 매우 유명한 베토벤과 모차르트가 각각 10%, 6%인 걸 감안하면 엄청난 대우를 받은 셈. 리듬스타 공식 팬카페 역시 쇼팽의 곡을 매우 좋아했다. 첫 스마트폰 버전인 리듬스타T에서도 쇼팽의 노래를 최우선적으로 리마스터했고, 2018년에 출시된 리부트 작에서 쇼팽은 S급 캐릭터가 됐고, 그를 본떠 너프 시킨 쇼팽 주니어는 스타팅 캐릭터로 선정된 걸 보면 제작사에서도 전폭적인 지지를 하는 셈.리듬스타T/스토리모드에서 쇼팽의 곡은 흉기로 쓰인다 카더라. 리듬이가 쇼팽의 추격을 마따라는 캐릭터에게 3배속 랜덤을 걸어서 강제로 플레이하게 했더니, 마따는 그 충격으로 응급실로 실려갔다.[59]
6. 기타
- 위에 기재된 사진은 알려진 두 장의 쇼팽 사진 중 제일 유명하고 쇼팽이 사망하던 해에 찍은 것이다.[60] 1846년이나 1847년의 것으로 추정되는 나머지 한 장은 훼손 상태가 심하다. 보기. 2017년 1월 쇼팽 연구가 알랭 쾨너가 1847년 경의 것으로 보이는 쇼팽 사진을 발견했으나, 9개월 뒤에 슬렌진스키라는 폴란드 화가가 1951년경에 그린 그림 일부분을 편집한 것으로 드러났다. 선술한 첫 번째 사진을 본 사람들은 대개 해리 포터 실사영화 시리즈의 세베루스 스네이프[61](알란 릭맨이 맡은)와 비슷하다고 평한다.[62]
- 생전에 신랄한 입담으로 유명했던 듯하다. 워낙 타인에게 음악적 영향을 안 받기도 했고 깐깐했기도 했지만, 베를리오즈에 대해서는 "잉크를 여기저기 튀기면서 작곡한다"라고 했고, 19세기의 아이돌이나 다름없던 프란츠 리스트에 대해서는 "쟤는 나중에 어느 나라의 왕이나 국회의원이 되겠지"라고 했다. 누군가 리스트는 자네에게 왕국을 만들어 줄 수도 있다고 하자 "리스트의 제국 안에 있는 작은 왕국이겠지"라고 답했다고. 그러나 험담의 주인공인 베를리오즈와 리스트는 쇼팽의 음악에 대해 여러 칭찬을 남겼다.
- 쇼팽을 기리기 위해, 1927년에 시작되어 1955년부터 5년에 한 번씩 열리는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가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하며 굉장히 권위있고 명망있는 대회라서 우승하면 온 세계에 이름을 알리게 된다. 아르헤리치, 폴리니, 부닌 등이 이 대회에서 우승해 유명 피아니스트로 거듭났다. 임동혁, 임동민 형제는 2005년 2위 없는 공동 3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리고 2015년 조성진이 1위를 한국 최초로 차지했다.[63]
- 쇼팽이 생전에 사용하던 피아노는 플레옐[64] 피아노로, 현재는 없어진 브랜드이다. 이 피아노의 특징은 페달을 밟았다가 떼었을 때에 어느 정도 그 효과가 유지된다는 것. 따라서 생전에 그가 의도했던 느낌을 살리기 위해서는 연주 시 페달링을 좀 더 길게 할 필요가 있다. 쇼팽의 곡을 연습하는 이들은 이 점을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 LOT 폴란드 항공의 바르샤바 허브 공항이 바르샤바 쇼팽 국제공항이다. 역시 쇼팽을 기리기 위하여 붙여졌다. LOT의 제2허브인 부다페스트의 공항명은 쇼팽과 친했던 리스트의 이름을 본뜬 부다페스트 리스트 페렌츠 국제공항이다.
- 2차 세계대전 폴란드 침공 때 있었던 폴란드군과 독일군의 바르샤바 공방전 기간 동안, 바르샤바 방송국은 확성기와 스피커를 통해 쇼팽의 음악들을 큰 소리로 도시 전역에 송출했다. 나라가 위기에 빠진 절체절명의 순간, 국민들의 애국심을 고취 시키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던 셈. 폴란드인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결국 바르샤바는 독일군에게 점령당했다. 그리고 바르샤바 방송국을 점령한 독일군은 바르샤바가 독일의 지배하에 들어갔다는 뜻에서 독일의 음악가 바그너의 곡을 송출했다.
-
쇼팽과 관련된 여인으로는 상드가 유명하지만 쇼팽의 스코틀랜드인 제자 제인 스털링(Jane Wilhelmina Stirling, 1804~1859)도 주목할만 하다. 부유한 상속인이자 독신자였던 그녀가 쇼팽을 알게 된 것은 1842~1843년경이었는데 처음 소개받았을 때부터 둘은 서로를 존중하였다고 한다. 상드와 쇼팽이 헤어지자 그녀는 홀로 지내던 쇼팽의 비서, 매니저, 대리인의 역할을 하면서 쇼팽의 런던행도 이끌었다고 한다. 꽤 헌신적인 인물이었던 모양이지만 냉정하게 말하자면, 제인은 쇼팽 입장에선 그의 연인이 되기엔 인간적인 매력이 좀 떨어지는 사람이었다. 제인은 그의 언니와 함께 쇼팽에게 쉬지않고 성경책을 읽어주고 포교를 하는 바람에 쇼팽이 기겁하고 도망친적도 있다고 한다. 아무래도 쇼팽 입장에선 낭만적인 상드에 비하면 제인이 지나치게 종교적으로 엄숙하고 경건한 성격이라 재미없고 따분한 사람으로 여길 수 밖에 없었고 좋은 친구로 여길지언정 사랑을 느끼기 힘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인은 쇼팽이 세상을 떠난 후 쇼팽의 장례비용뿐만 아니라 쇼팽의 누나 루드비카가 바르샤바로 돌아 갈 때의 여행비용도 모두 부담했다. 또 쇼팽의 유품을 경매를 통해 매입하였고 쇼팽이 쓰던 피아노는 바르샤바로 보내주었다. 제인은 자기가 매입한 유품을 스코틀랜드로 가져가 따로 방을 만들어 잘 보관하였다. 쇼팽의 가족이 유작을 출판하기로 결정했을 때, 자신이 사들인 미 출판 악보를 활용하여 유작의 정리, 출판에도 도움을 주었고, 쇼팽 연구가들에게도 수집한 자료를 제공하기도 했다. 쇼팽의 사망 일년 후 기일에는 가족에게 부탁하여 바르샤바의 흙을 가져다 쇼팽의 무덤 주위에 뿌렸다. 재능 있는 피아니스트였지만 그녀는 쇼팽의 사후 일년간 피아노를 연주하지 않았고 검은 상복을 입었다. 그런 제인을 미망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제인이 세상을 떠난 후 유언에 따라 그녀가 보관하던 쇼팽의 유품은 바르샤바의 가족에게 보내졌는데, 그 대부분은 다른 유품과 함께 1863년 러시아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유일하게 제인이 간직했던 쇼팽의 적갈색 머리카락 한 묶음은 살아 남았다. 쇼팽이 죽은 후에도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던 그녀는 쇼팽의 임종을 돌보길 거부한 상드를 남은 평생 동안 증오했다고 한다.
- 쇼팽의 시신은 프랑스 페르 라셰즈 묘지에 있지만 그의 심장은 폴란드 바르샤바 성 십자가 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쇼팽의 시신에서 적출된 심장은 그의 누나인 루드비카가 고향에 묻히고 싶다는 그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고국으로 가져와 폴란드 성 십자가 성당 기둥에 묻었고, 쇼팽은 1894년 심장이 없는 상태로 프랑스 묘지에 묻혔다. 링크
- 이탈리아의 가수 Gazebo가 그의 이름을 딴 I like chopin이라는 곡을 불렀다.
- 2024년에 뉴욕 맨해튼의 박물관의 그의 분실된 왈츠 악보가 공개되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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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 샹보니에르 · 륄리 · 레벨 · 마레 · 캉프라 · 샤르팡티에 · 라모 · 쿠프랭 · 드 라 게르 · 르클레어 · 루아예 | |||
이탈리아 | 몬테베르디 · 알레그리 · 프레스코발디 · 카발리 · 카리시미 · 스트로치 · 스트라델라 · 코렐리 · 스테파니 · 토렐리 · A. 스카를라티 · 비탈리 · 로티 · A. 마르첼로 · 칼다라 · G. 보논치니 · 알비노니 · A. M. 보논치니 · 비발디 · 사로 · D. 스카를라티 · B. 마르첼로 · 포르포라 · 제미니아니 · 빈치 · 페오 · 타르티니 · 로카텔리 · 레오 · R. 브로스키 · 로그로시노 · 셀리토 · 파리넬리 · 페르골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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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 퍼셀 · 헨델 · 애비슨 | |||
고전주의 | 전고전(로코코) | 하세 · J. G. 그라운 · C. H. 그라운 · 마르티니 · 아라야 · F. 벤다 · 루소 · W. F. 바흐 · 보이스 · C. P. E. 바흐 · 글루크 · 욤멜리 · J. 슈타미츠 · L. 모차르트 · 아벨 | ||
초기 고전파 | G. 벤다 · 베르토니 · 트라에타 · 하이든 · 고세크 · M. 하이든 · C. 슈타미츠 · J. C. 바흐 · 파이지엘로 · 보케리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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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주의 | 전기 낭만주의 | 초기 낭만파 | 아구아도 · 베버 · 파가니니 · 레냐니 · F. 모차르트 · 슈베르트 · 글린카 · 슈포어 · 메르츠 | |
독일, 오스트리아 낭만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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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폴란드어식 이름은 프리데리크 프란치셰크 쇼펜(Fryderyk Franciszek Chopin)이다. 그러나 그의 부친인 니콜라가 프랑스인이라 그는 프랑스계 폴란드인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그래서 프랑스계 성씨 Chopin을 폴란드어에서도 프랑스어식 발음을 따라한 '쇼펜'으로 발음하며, 이 발음을 폴란드어식으로 전사한 Szopen([ˈʂɔpɛn\], 쇼펜)이라 적기도 한다.
[A]
쇼팽 생전에 폴란드는 프랑스 및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고, 1835년 이후에 그는 법적으로 프랑스 시민권자가 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폴란드인으로 여기고 또 폴란드인으로 생을 살았다.
[A]
[4]
39년 230일
[5]
출처
[6]
혼전 성은 크시자노프스카
[7]
# // 너새니얼 존슨과의 인터뷰 초반부. 원문: "He devoted all his life to the piano. So we pianists consider him as our supreme, supreme God of the piano. He has much more to do with the piano than any, any other composer."
[8]
실제로 피아노계에서 쇼팽의 지위는 그만큼 절대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피아노 대회인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가 오직 그의 피아노 레퍼토리로만 이루어져있다.
[9]
그가 음악 활동을 하며 벌어들인 수익의 대부분은 폴란드
독립운동에 사용됐다.
[10]
쇼팽 콩쿠르는 클래식 음악계에서 최초로 특정 작곡가, 특정 악기를 위한 콩쿠르이자 곡 별 상금이 걸려있는 콩쿠르이며, 우승하면 음반사와 소속사 계약까지 이뤄내기에 역대 우승자들이 더 이상 피아노 콩쿠르에 출전하지 않는 일종의 콩쿠르 공식 졸업장으로 인정받는다.
의외로 우승자 상금은 많지 않으나, 피아노 올림픽이라는 별칭이 있을 만큼 메달의 가치가 크다. 또 쇼팽협회가 폴란드 정부 산하에 있어, 국제 피아노 콩쿠르 중 유일하게 현직 국가 원수로부터 3위 내 입상자들이 직접 메달을 수여받는 권위를 인정받는다. 이러한 관계로 현대에 들어 피아노계 최고의 위상이라는 표현이 명예이자 악명이 되었는데, 가장 오래된 콩쿠르답게 나이 제한과 5년 간격 개최로 인해 운이 좋아도 최대 2-3회 밖에 출전하지 못한다는 엄격한 규정 탓도 있다. 또한 오랜 역사와 명성을 반영하듯, 입상자가 타국 콩쿠르에 출전할 때 서로 예선심사 통과 혜택도 적용되는 고급 콩쿠르에 속한다. 반대로 소규모 콩쿠르 우승이나 입상자는 쇼팽 콩쿠르의 영상 예선 통과 혜택을 받지 못하며, 쇼팽협회의 규정대로 연주녹음과 영상을 보내 심사를 다시 받아야 한다. [11] 일반적으로 이 날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가 출생한 젤라조바 볼라(Żelazowa Wola) 마을의 성당에는 2월 22일에 유아세례[67]를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실제 생일은 2월 중인 것으로 보인다. 다만 쇼팽 본인은 자신의 생일이 3월 1일이라고 주장했다. [12] 프랑스 동부 보주(Vosges)주 에피날(Épinal) 아롱디스망 마렌빌쉬르마동(Marainville-sur-Madon) 출신의 프랑스인으로, 폴란드에 와서 귀족의 프랑스어 가정교사를 하고 있었다. 폴란드어 이름은 미코와이 쇼펜(Mikołaj Chopin). [13] 원래 폴란드인 귀족이었지만 집안이 몰락하여 다른 귀족의 집안에서 일하던 중이었다. 그러다가 먼 친척인 스카르베크 가문을 통해 그 가문의 가정교사인 니콜라 쇼팽과 만나 결혼하게 된 것이다. [14] 프레데리크 다음으로 뛰어난 음악 재능을 지녔다고 하는 에밀리아의 죽음은 쇼팽 가족에게 크나큰 상처를 남겨, 온 가족이 막내의 빈 공간을 볼 때마다 우울증에 시달리던 끝에 이사를 가서[68] 귀족 자제들을 위한 사립 기숙방을 만들어 생계를 이었다. 아버지는 교육활동을 병행했고 어머니는 고급 하숙생인 귀족가문 아들들을 아이들과 함께 관리하고 돌보았다. 이러한 환경의 영향으로 쇼팽은 평생 귀족들과 친구로 지냈으며 마치 귀족 자제들과 같은 사고방식, 생활방식으로 살았다. 프로같은 어머니의 살림 실력 덕분에 쇼팽은 성인이 되어서도 식탁보와 손수건까지 평생 청결해야 직성이 풀렸고, 우아한 분위기로 귀족 부모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또 옷과 액세서리, 향수, 마차와 가구는 늘 최고급을 선호했지만 아버지의 영향으로 입맛은 귀족이기보다는 토속적이라 프랑스 보주식 걸죽하고 따끈한 수프와 폴란드식 고기요리를 매우 좋아하고, 파리에서도 이 시절에 즐겨 먹은 프랑스와 폴란드 퓨전 식 고향 음식을 종종 그리워했다고 한다. [15] 폴로네이즈 g단조와 b플렛 장조 [16] 지브니는 그다지 음악사에서 유명하거나 중요한 인물은 아니지만, 재미있는 사실이 있는데 그는 오랫동안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의 마지막 항목의 주인이었다. 당연히 음악인 사전에서도 마지막 항목이었고 그 때문에 이름이 남았다. 본래 체코어식 성은 Živný였으나 쇼팽과 연관되는 바람에 폴란드인인 줄 알고 Żywny라는 표기가 정식 표기가 됐다. 고향인 체코에서는 체코어식인 보이테흐 지브니(Vojtěch Živný)로 표기한다. [17] 그 덕에 쇼팽은 그만의 독자적인 연주 스타일을 갖게 됐다 [18] 11월 2일. 이때 그는 "죽기 위해 떠나는 기분"이라고 말했는데, 실제로 그는 죽기 전까지 다시는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19] 쇼팽은 콘스탄치아에게 반지를 주었고 콘스탄치아는 쇼팽에게 리본을 주었는데, 이 리본은 쇼팽 사후 그의 유품에서 발견됐다. [20] 당시 폴란드는 러시아에게 지배당하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듣고 그와 동행했던 친구 티투스 보이치에호프스키(Tytus Wojciechowski)는 폴란드로 돌아갔다. 쇼팽도 고국으로 돌아가 혁명을 도울까 고민했지만 주변인들이 만류했다. [21] 이때 빈에서 프랑스로 가는 여권을 발급해주지 않아서 영국이 목적지이며 프랑스는 경유지라고 거짓말을 해서 겨우 여권을 발급받았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폴란드를 3분할한 나라 중 하나였으며 러시아와 동맹이였고 프랑스와 사이가 안 좋았다. 그러니 폴란드인인 쇼팽이 프랑스로 가는 여권을 발급해줄 리 만무했다. [22] 이러한 러시아와 폴란드의 악연은 계속 이어진다. 훗날 폴란드의 또 다른 위인 마리 퀴리가 예시. 쇼팽과 달리 퀴리는 1차대전 이후 1918년 독립한 폴란드 땅을 1925년에 드디어 밟을 수 있었다. 다만 방사능 연구로 인해 그 기쁨은 그 후 약 9년 밖에 되지 않았고 결국 재생 불량성 빈혈로 사망했지만 말이다. [23] 그는 가끔씩 버는 것보다 더 못 쓴다고 불평하기도 했으며, 버는 돈에 비해 낭비가 심하다는 말에 자신의 패션을 위해 쓰는 돈보다 버는 돈이 적은데 어떻게 많이 번다고 생각할 수 있겠냐며 불평하기도 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 바로 다음 세기부터 최정상급 음악가들은 명품 정도야 풍선껌 사듯이 살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돈을 벌게 됐으니... 시대를 앞서간 불평이라고 할 수 있겠다. 비슷한 예로 20세기 초중반의 축구, 야구 스타들은 짧은 선수생활에서 많이 받아봤자 당대 직장인보다 몇 배 정도밖에 안 되는 연봉을 받았다. 제대로 저축한 선수들도 은퇴 후 당연히 일자리를 찾았던 판에 명품까지 밝히면 얼마나 돈이 빨리 바닥나는지는 설명이 필요없다. [24] 쇼팽은 이미 폐결핵을 앓고 있던 중이었다. [25] 마리아가 보내는 편지의 양이 줄어들고 점점 그의 어머니의 편지로 바뀌더니, 결국 위의 통보가 오게 됐다. [26] 마리아의 어머니는 편지에서 둘의 약혼을 해 질 녘에 일어난 일이라고 돌려서 언급했다. [27] 특이한 점으로 상드는 쇼팽의 친구인 프란츠 리스트와 사귀기도 했었는데, 상드를 쇼팽에게 소개해 준 사람이 바로 리스트 본인이었다. [28] 8년이나 10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9년이라는 주장이 대다수다. [29] 특이한 점은 쇼팽과 다르게 상드는 무명이던 시절이 없었다. [30] 패션 또한 극단적으로 보수적이었다. [31] 사실 상드는 유명한 작가였기에 쇼팽이 없어도 생계에 지장은 없었을 것이다. 쇼팽과 상드가 처음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일개 피아니스트로 알려졌던 쇼팽과는 달리 상드는 (당시 기준으로) 솔직하고 파격적인 소설을 집필해 유명세를 떨치던 작가였다. [32] 소설가로 성공하기 전에도 애초 상드는 궁핍하지 않았다. 귀족 아버지가 물려준 재산 지키려 급하게 결혼해서 지킨 재산도 있었고, 남편도 남작으로 귀족이라, 남편과의 사이와는 별개로 금전적 어려움은 없었다. [33] 불륜 커플이라고 소문이 나서 보수적인 지역민들이 담합하여 생필품 판매를 거부했다. 결국 장을 보려면 멀리까지 나갔다 와야 했다. 게다가 쇼팽이 결핵 환자인 것이 알려지며 더욱 박한 대우를 받았다. [34] 마요르카에서 쇼팽이 지내던 곳은 노앙 저택과 더불어 현재까지 가장 사랑받는 쇼팽 박물관이 됐다. 이곳의 입구 옆쪽으로 들어가면 파노라마 풍경이 펼쳐지는데, 절로 악상이 떠오를 듯한 아름다운 장관이므로 마요르카에 가게 된다면 한번 들러보기 괜찮다. # [35] 쇼팽은 몸이 끔찍하게 약해졌고 상드는 생필품을 공수하러 다니다 마차사고까지 겪었다. 이때 상드가 죽은 줄 착각했던 쇼팽은 울며 어떤 곡을 연주했는데,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상드의 기록에 따르면 이 곡은 '빗방울 전주곡'으로 유명한 전주곡 Op.28 15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36] 다만 환경이 끔찍했던 것과 별개로 둘의 사랑은 이때 더욱 깊어졌다. 상드는 몸도 아픈 쇼팽이 군소리 한번 안 하는 인내심과 적응력에 감동했으며 쇼팽은 상드의 생활력과 헌신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37] 원래 쇼팽은 화내는 걸 본 적이 없는 천사나 보살 수준의 사람이라고 상드도 인정했다. 특히 이들의 불행한 스페인 여행 중 밤새 피를 토하면서도 신음소리도 내지 않고 참았던 모습은 왕자처럼 품격 있었다며, 고결한 그를 살리기 위해서 무엇이든 다 할 것이라고 맹세했다고 한다. 그러나 갈수록 병이 악화되는 데다 절친한 사람들이 줄줄이 죽거나 손절하고 부친상까지 겪는 등 악재를 겪으면서 관계 후반에는 친구나 상드 지인에게 화풀이를 할 정도로 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였다. 화를 내는 방식은 물어도 대답하지 않거나 고개를 돌리고, 짜증나는 얼굴로 입을 다무는 것. 그리고 세탁이나 요리 상태에 불만을 표시하는 다분히 귀족적이고 소극적인 방법이었다. 그러나 화가 나면 대화로 푸는 것을 선호하며 직설적인 성격의 상드는 이러한 성격의 사람을 매우 싫어했기에, 그를 보고 점점 환멸을 느끼며 주변 친구들, 쇼팽과 함께 친분이 있는 이들에게 왜 이렇게 구는지 모르겠다며 종종 편지로 하소연했다. [38] 그 소설을 보면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의 외모, 나이 차이, 출신 성분 등이 실제 상드-쇼팽 커플과 굉장히 유사하다. 훗날 리스트는 쇼팽에 대한 책을 쓰면서 이 소설을 출처도 명시하지 않고 여러 군데 가져다 썼다. 이렇게나 비슷한데 어째서 쇼팽은 눈치채지 못했는지 신기할 정도. 들라크루아와 함께 낭독을 듣다 말고 자리를 떴다니 모른 척했던 것일수도 있다. 훗날 둘 사이가 끝내 파국을 맞았을 때 쇼팽의 편지에서 "내가 차라리 루크레치아(소설의 여주인공이자 상드 자신이 본인을 투영한 인물)를 증오할 수 있었다면 좋으련만!"이라는 구절이 발견되면서, 듣자마자 눈치챘으나 낭독회의 웅성거림과 살벌한 분위기에 동조하기 민망해 일부러 모르는 척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39] 쇼팽의 무덤 앞에 있는 쇼팽의 조각상을 만든 사람이 바로 이 클레쟁제르이다. 난동을 부리기는 했으나, 번번히 돈을 빌려주고 신세를 졌던 것에 감사하는 의미로 그를 기리는 조각상을 만들었다. 조각가로서는 생전의 쇼팽도 인정할 만큼 나무랄 데 없는 실력이었다. 이러한 실력을 가릴 정도로 심각한 사생활과 낭비벽이 그의 심각한 단점이었다. [40]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친딸에게 수양딸보다 적은 지참금을 줄 수 있냐고 생각할 수 있는데, 내막을 알면 이상할 것이 없다. 솔랑주 부부는 이미 결혼 전부터 제대로 낭비벽을 과시했기 때문. 상드는 진작에 이들의 낭비벽을 알고 돈이 아닌 비싼 부동산을 증여했으나, 이들 부부는 부동산 없이 현금만 준 수양딸의 지참금 액수에 분노하고 자신들이 더 많은 지참금을 받았음에도 현금을 기준으로 더 적게 받았다고 우겨 상드의 분노를 키웠다. 쇼팽이 상드에게 지불한 돈은 그리 많지 않았으나 서두에 말했듯 상드 가문에 쇼팽이 쓴 돈은 대부분 솔랑주 부부를 돕고자 진 빚이다. 이들 부부가 돈이 다 떨어졌다며 쇼팽에게 하소연해 안 그래도 자신의 이사 빚을 청산하지 못한 쇼팽이 친구에게 또다시 돈을 빌려 이들의 여비를 만들어주어야 했던 것은 덤. [41] 쇼팽은 평소에도 아들에 비해 상드의 사랑을 덜 받는 솔랑주의 편을 들어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42] 여담으로 임신 중이었던 솔랑주는 파리에 돌아온 후 딸을 낳았는데 일주일만에 죽었다. 운 나쁘게도 쇼팽은 출산 소식을 듣자마자 할머니가 된 것을 축하한다며 상드에게 축하 차, 그리고 화해를 청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하필 운수 나쁘게도 편지가 도착한 날은 아기가 죽고 난 뒤였다. 분노의 절교 편지에 대한 조롱이라며 상드는 또다시 그의 의도를 오해하고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43] 쇼팽은 상드에게 받은 모든 편지를 죽을 때까지 보관했는데 이 장문 편지만은 보관하지 않았다. 잃어버렸는지 없애버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튼 이 편지는 현존하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쇼팽은 그 편지를 친구이자 화가인 외젠 들라크루아한테 읽어주었는데, 이 때 들라크루아는 "정말 문학적으로 잘 쓴 편지다. 이게 소설이었다면 정말 재미있게 읽었을 것이다."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44] 다만 쇼팽이 죽기 얼마 전 그의 누이 루드비카에게 쇼팽의 건강이 괜찮은지 좀 알려달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루드비카는 답장하지 않았다). 만약 참석하려는 의지가 있었더라도 쇼팽의 새로운 보호자이자 마지막까지 쇼팽과 혼인신고를 하려 했던 제인 스털링은 자신이 싫어하는 상드를 절대로 입장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유언을 듣고 고인의 머리카락을 나누어받는 자리에서 쇼팽의 지인들을 정중히 반겼던 스털링은 솔랑주가 병간호를 하겠다며 찾아오자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으나 쇼팽이 친딸처럼 반기자 마지못해 허용했을 정도다. 이런 저간의 상황을 상드도 지인들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또 쇼팽의 사망소식을 들은 후 큰 충격을 받아서 한동안 두문불출했다고 한다. [45] 반면 당대의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던 리스트는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1세가 연주 도중 얘기를 하면서 제대로 듣지 않자 연주를 중단하고 일어나서 "니콜라이가 말하면 음악은 조용해져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쇼팽과 달리, 리스트는 사회적 명망도 쇼팽과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46] op. 65. 그가 살아생전 마지막으로 출판한 곡이다. [47] 혹은 "어머니...가엾은 나의 어머니..."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48] 일각에서는 어머니를 조국 폴란드로 해석하기도 한다. [49] 오랫동안 가톨릭 교회에서는 여성이 극장이나 교회에서 노래하는 것을 터부시하였다. 터부시 수준을 떠나, 한 때 유럽에서 노래하는 여자는 창녀와 같은 취급을 받던 시절도 있었다. [50] 그 흙은 쇼팽이 폴란드를 떠날 때 송별식에서 친구들이 담아준 것이다. 송별식 자리에 있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후에 쇼팽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 [51] 그가 사망하기 전에 설사가 심했던 사실을 토대로, 결핵이 장으로 전이됐다고 추측하는 의견도 있다. [52] 영국 할레 관현악단의 창시자이며 당대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다. [53] 리스트도 한때는 '대담하고 이상한 불협화음들 투성이'라고 그의 곡을 평가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리스트는 나중에 쇼팽보다 더 대담하고 이상한 화성법을 구현했다. [54] 고트샬크는 전성기에 실력이 굉장한 피아니스트이긴 했지만 작곡 능력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 그의 작품은 시대적인 매력은 있지만 몇 작품을 제외하면 소품 수준이거나 평작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55] 하지만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인 알프레드 브렌델이나 아르투르 슈나벨 등이 집중적으로 연구했을 만큼 지금 세대에선 충분한 천재성이 담긴 작품들로 인정받기도 한다. [56] 돈 조반니와 체를리나의 2중창. 돈 조반니가 체를리나를 유혹하면서 부른다. [57] 쇼팽은 병약함이나 소심함 등의 이유 때문에 일생 동안 공개 연주회를 많이 하진 못했지만 30번 정도 상대적으로 사람들이 적게 모이는 살롱에선 많이 연주했다고 한다. 이때의 연주회장이란 수용 인원 2~3000명 정도 대비 살롱은 가장 큰 곳이 2~300명 정도라고 한다. [58] 출처: 리듬스타/출시된 곡 통계 [59] 쇼팽의 에튀드 Op. 10, No. 4는 9키 기준 ☆9(시즌 1)/☆10(시즌 2)의 엄청난 난이도를 지닌 곡으로, 당장 정배치 기준으로도 패턴 연습곡 취급을 받을 정도로 연습이 없다면 쳐내기 매우 곤란한 패턴이 다수 출현한다. 다만 BPM이 140(시즌 1)/150(시즌 2)으로 너프되고 부자연스러운 커팅도 많이 발견돼 리메이크가 불만족스러운 곡 중 하나라는 평가가 존재한다. 만약 원곡 BPM인 176으로 높이고 리메이크도 커팅 없이 원곡을 따라갔다면 ☆10 난이도 중상급의 곡이 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60] 당시 다게레오타입이 발명된지 10년 정도 됐을 무렵이다. [61] 그의 독설 대상이었던 프란츠 리스트도 스네이프 닮았다는 말이 있다. [62] 이와 더불어 같은 해리 포터 실사영화 시리즈에서 해리 포터(다니엘 레드클리프가 맡은)를 닮은 작곡가로는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를 꼽기도 한다. [63] 폴로네이즈 '영웅'으로 폴로네이즈 상도 수상했다. [64] 요제프 하이든의 제자이기도 했던 음악가 이그나츠 요제프 플레옐이 런칭한 피아노 브랜드. 후에 아들 카미유 플레옐과 공동으로 회사를 운영한다. 플레옐은 연애 문제로 인해 엑토르 베를리오즈에게 살해당할 뻔했다.결전의 날 베를리오즈가 살인 계획을 포기하고 놀다 와서 망정이지
[65]
폴로네이즈 G단조, 1817년
[66]
마주르카 op.68 no.4, 1849년
의외로 우승자 상금은 많지 않으나, 피아노 올림픽이라는 별칭이 있을 만큼 메달의 가치가 크다. 또 쇼팽협회가 폴란드 정부 산하에 있어, 국제 피아노 콩쿠르 중 유일하게 현직 국가 원수로부터 3위 내 입상자들이 직접 메달을 수여받는 권위를 인정받는다. 이러한 관계로 현대에 들어 피아노계 최고의 위상이라는 표현이 명예이자 악명이 되었는데, 가장 오래된 콩쿠르답게 나이 제한과 5년 간격 개최로 인해 운이 좋아도 최대 2-3회 밖에 출전하지 못한다는 엄격한 규정 탓도 있다. 또한 오랜 역사와 명성을 반영하듯, 입상자가 타국 콩쿠르에 출전할 때 서로 예선심사 통과 혜택도 적용되는 고급 콩쿠르에 속한다. 반대로 소규모 콩쿠르 우승이나 입상자는 쇼팽 콩쿠르의 영상 예선 통과 혜택을 받지 못하며, 쇼팽협회의 규정대로 연주녹음과 영상을 보내 심사를 다시 받아야 한다. [11] 일반적으로 이 날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가 출생한 젤라조바 볼라(Żelazowa Wola) 마을의 성당에는 2월 22일에 유아세례[67]를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실제 생일은 2월 중인 것으로 보인다. 다만 쇼팽 본인은 자신의 생일이 3월 1일이라고 주장했다. [12] 프랑스 동부 보주(Vosges)주 에피날(Épinal) 아롱디스망 마렌빌쉬르마동(Marainville-sur-Madon) 출신의 프랑스인으로, 폴란드에 와서 귀족의 프랑스어 가정교사를 하고 있었다. 폴란드어 이름은 미코와이 쇼펜(Mikołaj Chopin). [13] 원래 폴란드인 귀족이었지만 집안이 몰락하여 다른 귀족의 집안에서 일하던 중이었다. 그러다가 먼 친척인 스카르베크 가문을 통해 그 가문의 가정교사인 니콜라 쇼팽과 만나 결혼하게 된 것이다. [14] 프레데리크 다음으로 뛰어난 음악 재능을 지녔다고 하는 에밀리아의 죽음은 쇼팽 가족에게 크나큰 상처를 남겨, 온 가족이 막내의 빈 공간을 볼 때마다 우울증에 시달리던 끝에 이사를 가서[68] 귀족 자제들을 위한 사립 기숙방을 만들어 생계를 이었다. 아버지는 교육활동을 병행했고 어머니는 고급 하숙생인 귀족가문 아들들을 아이들과 함께 관리하고 돌보았다. 이러한 환경의 영향으로 쇼팽은 평생 귀족들과 친구로 지냈으며 마치 귀족 자제들과 같은 사고방식, 생활방식으로 살았다. 프로같은 어머니의 살림 실력 덕분에 쇼팽은 성인이 되어서도 식탁보와 손수건까지 평생 청결해야 직성이 풀렸고, 우아한 분위기로 귀족 부모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또 옷과 액세서리, 향수, 마차와 가구는 늘 최고급을 선호했지만 아버지의 영향으로 입맛은 귀족이기보다는 토속적이라 프랑스 보주식 걸죽하고 따끈한 수프와 폴란드식 고기요리를 매우 좋아하고, 파리에서도 이 시절에 즐겨 먹은 프랑스와 폴란드 퓨전 식 고향 음식을 종종 그리워했다고 한다. [15] 폴로네이즈 g단조와 b플렛 장조 [16] 지브니는 그다지 음악사에서 유명하거나 중요한 인물은 아니지만, 재미있는 사실이 있는데 그는 오랫동안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의 마지막 항목의 주인이었다. 당연히 음악인 사전에서도 마지막 항목이었고 그 때문에 이름이 남았다. 본래 체코어식 성은 Živný였으나 쇼팽과 연관되는 바람에 폴란드인인 줄 알고 Żywny라는 표기가 정식 표기가 됐다. 고향인 체코에서는 체코어식인 보이테흐 지브니(Vojtěch Živný)로 표기한다. [17] 그 덕에 쇼팽은 그만의 독자적인 연주 스타일을 갖게 됐다 [18] 11월 2일. 이때 그는 "죽기 위해 떠나는 기분"이라고 말했는데, 실제로 그는 죽기 전까지 다시는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19] 쇼팽은 콘스탄치아에게 반지를 주었고 콘스탄치아는 쇼팽에게 리본을 주었는데, 이 리본은 쇼팽 사후 그의 유품에서 발견됐다. [20] 당시 폴란드는 러시아에게 지배당하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듣고 그와 동행했던 친구 티투스 보이치에호프스키(Tytus Wojciechowski)는 폴란드로 돌아갔다. 쇼팽도 고국으로 돌아가 혁명을 도울까 고민했지만 주변인들이 만류했다. [21] 이때 빈에서 프랑스로 가는 여권을 발급해주지 않아서 영국이 목적지이며 프랑스는 경유지라고 거짓말을 해서 겨우 여권을 발급받았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폴란드를 3분할한 나라 중 하나였으며 러시아와 동맹이였고 프랑스와 사이가 안 좋았다. 그러니 폴란드인인 쇼팽이 프랑스로 가는 여권을 발급해줄 리 만무했다. [22] 이러한 러시아와 폴란드의 악연은 계속 이어진다. 훗날 폴란드의 또 다른 위인 마리 퀴리가 예시. 쇼팽과 달리 퀴리는 1차대전 이후 1918년 독립한 폴란드 땅을 1925년에 드디어 밟을 수 있었다. 다만 방사능 연구로 인해 그 기쁨은 그 후 약 9년 밖에 되지 않았고 결국 재생 불량성 빈혈로 사망했지만 말이다. [23] 그는 가끔씩 버는 것보다 더 못 쓴다고 불평하기도 했으며, 버는 돈에 비해 낭비가 심하다는 말에 자신의 패션을 위해 쓰는 돈보다 버는 돈이 적은데 어떻게 많이 번다고 생각할 수 있겠냐며 불평하기도 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 바로 다음 세기부터 최정상급 음악가들은 명품 정도야 풍선껌 사듯이 살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돈을 벌게 됐으니... 시대를 앞서간 불평이라고 할 수 있겠다. 비슷한 예로 20세기 초중반의 축구, 야구 스타들은 짧은 선수생활에서 많이 받아봤자 당대 직장인보다 몇 배 정도밖에 안 되는 연봉을 받았다. 제대로 저축한 선수들도 은퇴 후 당연히 일자리를 찾았던 판에 명품까지 밝히면 얼마나 돈이 빨리 바닥나는지는 설명이 필요없다. [24] 쇼팽은 이미 폐결핵을 앓고 있던 중이었다. [25] 마리아가 보내는 편지의 양이 줄어들고 점점 그의 어머니의 편지로 바뀌더니, 결국 위의 통보가 오게 됐다. [26] 마리아의 어머니는 편지에서 둘의 약혼을 해 질 녘에 일어난 일이라고 돌려서 언급했다. [27] 특이한 점으로 상드는 쇼팽의 친구인 프란츠 리스트와 사귀기도 했었는데, 상드를 쇼팽에게 소개해 준 사람이 바로 리스트 본인이었다. [28] 8년이나 10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9년이라는 주장이 대다수다. [29] 특이한 점은 쇼팽과 다르게 상드는 무명이던 시절이 없었다. [30] 패션 또한 극단적으로 보수적이었다. [31] 사실 상드는 유명한 작가였기에 쇼팽이 없어도 생계에 지장은 없었을 것이다. 쇼팽과 상드가 처음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일개 피아니스트로 알려졌던 쇼팽과는 달리 상드는 (당시 기준으로) 솔직하고 파격적인 소설을 집필해 유명세를 떨치던 작가였다. [32] 소설가로 성공하기 전에도 애초 상드는 궁핍하지 않았다. 귀족 아버지가 물려준 재산 지키려 급하게 결혼해서 지킨 재산도 있었고, 남편도 남작으로 귀족이라, 남편과의 사이와는 별개로 금전적 어려움은 없었다. [33] 불륜 커플이라고 소문이 나서 보수적인 지역민들이 담합하여 생필품 판매를 거부했다. 결국 장을 보려면 멀리까지 나갔다 와야 했다. 게다가 쇼팽이 결핵 환자인 것이 알려지며 더욱 박한 대우를 받았다. [34] 마요르카에서 쇼팽이 지내던 곳은 노앙 저택과 더불어 현재까지 가장 사랑받는 쇼팽 박물관이 됐다. 이곳의 입구 옆쪽으로 들어가면 파노라마 풍경이 펼쳐지는데, 절로 악상이 떠오를 듯한 아름다운 장관이므로 마요르카에 가게 된다면 한번 들러보기 괜찮다. # [35] 쇼팽은 몸이 끔찍하게 약해졌고 상드는 생필품을 공수하러 다니다 마차사고까지 겪었다. 이때 상드가 죽은 줄 착각했던 쇼팽은 울며 어떤 곡을 연주했는데,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상드의 기록에 따르면 이 곡은 '빗방울 전주곡'으로 유명한 전주곡 Op.28 15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36] 다만 환경이 끔찍했던 것과 별개로 둘의 사랑은 이때 더욱 깊어졌다. 상드는 몸도 아픈 쇼팽이 군소리 한번 안 하는 인내심과 적응력에 감동했으며 쇼팽은 상드의 생활력과 헌신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37] 원래 쇼팽은 화내는 걸 본 적이 없는 천사나 보살 수준의 사람이라고 상드도 인정했다. 특히 이들의 불행한 스페인 여행 중 밤새 피를 토하면서도 신음소리도 내지 않고 참았던 모습은 왕자처럼 품격 있었다며, 고결한 그를 살리기 위해서 무엇이든 다 할 것이라고 맹세했다고 한다. 그러나 갈수록 병이 악화되는 데다 절친한 사람들이 줄줄이 죽거나 손절하고 부친상까지 겪는 등 악재를 겪으면서 관계 후반에는 친구나 상드 지인에게 화풀이를 할 정도로 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였다. 화를 내는 방식은 물어도 대답하지 않거나 고개를 돌리고, 짜증나는 얼굴로 입을 다무는 것. 그리고 세탁이나 요리 상태에 불만을 표시하는 다분히 귀족적이고 소극적인 방법이었다. 그러나 화가 나면 대화로 푸는 것을 선호하며 직설적인 성격의 상드는 이러한 성격의 사람을 매우 싫어했기에, 그를 보고 점점 환멸을 느끼며 주변 친구들, 쇼팽과 함께 친분이 있는 이들에게 왜 이렇게 구는지 모르겠다며 종종 편지로 하소연했다. [38] 그 소설을 보면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의 외모, 나이 차이, 출신 성분 등이 실제 상드-쇼팽 커플과 굉장히 유사하다. 훗날 리스트는 쇼팽에 대한 책을 쓰면서 이 소설을 출처도 명시하지 않고 여러 군데 가져다 썼다. 이렇게나 비슷한데 어째서 쇼팽은 눈치채지 못했는지 신기할 정도. 들라크루아와 함께 낭독을 듣다 말고 자리를 떴다니 모른 척했던 것일수도 있다. 훗날 둘 사이가 끝내 파국을 맞았을 때 쇼팽의 편지에서 "내가 차라리 루크레치아(소설의 여주인공이자 상드 자신이 본인을 투영한 인물)를 증오할 수 있었다면 좋으련만!"이라는 구절이 발견되면서, 듣자마자 눈치챘으나 낭독회의 웅성거림과 살벌한 분위기에 동조하기 민망해 일부러 모르는 척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39] 쇼팽의 무덤 앞에 있는 쇼팽의 조각상을 만든 사람이 바로 이 클레쟁제르이다. 난동을 부리기는 했으나, 번번히 돈을 빌려주고 신세를 졌던 것에 감사하는 의미로 그를 기리는 조각상을 만들었다. 조각가로서는 생전의 쇼팽도 인정할 만큼 나무랄 데 없는 실력이었다. 이러한 실력을 가릴 정도로 심각한 사생활과 낭비벽이 그의 심각한 단점이었다. [40]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친딸에게 수양딸보다 적은 지참금을 줄 수 있냐고 생각할 수 있는데, 내막을 알면 이상할 것이 없다. 솔랑주 부부는 이미 결혼 전부터 제대로 낭비벽을 과시했기 때문. 상드는 진작에 이들의 낭비벽을 알고 돈이 아닌 비싼 부동산을 증여했으나, 이들 부부는 부동산 없이 현금만 준 수양딸의 지참금 액수에 분노하고 자신들이 더 많은 지참금을 받았음에도 현금을 기준으로 더 적게 받았다고 우겨 상드의 분노를 키웠다. 쇼팽이 상드에게 지불한 돈은 그리 많지 않았으나 서두에 말했듯 상드 가문에 쇼팽이 쓴 돈은 대부분 솔랑주 부부를 돕고자 진 빚이다. 이들 부부가 돈이 다 떨어졌다며 쇼팽에게 하소연해 안 그래도 자신의 이사 빚을 청산하지 못한 쇼팽이 친구에게 또다시 돈을 빌려 이들의 여비를 만들어주어야 했던 것은 덤. [41] 쇼팽은 평소에도 아들에 비해 상드의 사랑을 덜 받는 솔랑주의 편을 들어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42] 여담으로 임신 중이었던 솔랑주는 파리에 돌아온 후 딸을 낳았는데 일주일만에 죽었다. 운 나쁘게도 쇼팽은 출산 소식을 듣자마자 할머니가 된 것을 축하한다며 상드에게 축하 차, 그리고 화해를 청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하필 운수 나쁘게도 편지가 도착한 날은 아기가 죽고 난 뒤였다. 분노의 절교 편지에 대한 조롱이라며 상드는 또다시 그의 의도를 오해하고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43] 쇼팽은 상드에게 받은 모든 편지를 죽을 때까지 보관했는데 이 장문 편지만은 보관하지 않았다. 잃어버렸는지 없애버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튼 이 편지는 현존하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쇼팽은 그 편지를 친구이자 화가인 외젠 들라크루아한테 읽어주었는데, 이 때 들라크루아는 "정말 문학적으로 잘 쓴 편지다. 이게 소설이었다면 정말 재미있게 읽었을 것이다."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44] 다만 쇼팽이 죽기 얼마 전 그의 누이 루드비카에게 쇼팽의 건강이 괜찮은지 좀 알려달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루드비카는 답장하지 않았다). 만약 참석하려는 의지가 있었더라도 쇼팽의 새로운 보호자이자 마지막까지 쇼팽과 혼인신고를 하려 했던 제인 스털링은 자신이 싫어하는 상드를 절대로 입장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유언을 듣고 고인의 머리카락을 나누어받는 자리에서 쇼팽의 지인들을 정중히 반겼던 스털링은 솔랑주가 병간호를 하겠다며 찾아오자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으나 쇼팽이 친딸처럼 반기자 마지못해 허용했을 정도다. 이런 저간의 상황을 상드도 지인들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또 쇼팽의 사망소식을 들은 후 큰 충격을 받아서 한동안 두문불출했다고 한다. [45] 반면 당대의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던 리스트는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1세가 연주 도중 얘기를 하면서 제대로 듣지 않자 연주를 중단하고 일어나서 "니콜라이가 말하면 음악은 조용해져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쇼팽과 달리, 리스트는 사회적 명망도 쇼팽과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46] op. 65. 그가 살아생전 마지막으로 출판한 곡이다. [47] 혹은 "어머니...가엾은 나의 어머니..."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48] 일각에서는 어머니를 조국 폴란드로 해석하기도 한다. [49] 오랫동안 가톨릭 교회에서는 여성이 극장이나 교회에서 노래하는 것을 터부시하였다. 터부시 수준을 떠나, 한 때 유럽에서 노래하는 여자는 창녀와 같은 취급을 받던 시절도 있었다. [50] 그 흙은 쇼팽이 폴란드를 떠날 때 송별식에서 친구들이 담아준 것이다. 송별식 자리에 있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후에 쇼팽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 [51] 그가 사망하기 전에 설사가 심했던 사실을 토대로, 결핵이 장으로 전이됐다고 추측하는 의견도 있다. [52] 영국 할레 관현악단의 창시자이며 당대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다. [53] 리스트도 한때는 '대담하고 이상한 불협화음들 투성이'라고 그의 곡을 평가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리스트는 나중에 쇼팽보다 더 대담하고 이상한 화성법을 구현했다. [54] 고트샬크는 전성기에 실력이 굉장한 피아니스트이긴 했지만 작곡 능력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 그의 작품은 시대적인 매력은 있지만 몇 작품을 제외하면 소품 수준이거나 평작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55] 하지만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인 알프레드 브렌델이나 아르투르 슈나벨 등이 집중적으로 연구했을 만큼 지금 세대에선 충분한 천재성이 담긴 작품들로 인정받기도 한다. [56] 돈 조반니와 체를리나의 2중창. 돈 조반니가 체를리나를 유혹하면서 부른다. [57] 쇼팽은 병약함이나 소심함 등의 이유 때문에 일생 동안 공개 연주회를 많이 하진 못했지만 30번 정도 상대적으로 사람들이 적게 모이는 살롱에선 많이 연주했다고 한다. 이때의 연주회장이란 수용 인원 2~3000명 정도 대비 살롱은 가장 큰 곳이 2~300명 정도라고 한다. [58] 출처: 리듬스타/출시된 곡 통계 [59] 쇼팽의 에튀드 Op. 10, No. 4는 9키 기준 ☆9(시즌 1)/☆10(시즌 2)의 엄청난 난이도를 지닌 곡으로, 당장 정배치 기준으로도 패턴 연습곡 취급을 받을 정도로 연습이 없다면 쳐내기 매우 곤란한 패턴이 다수 출현한다. 다만 BPM이 140(시즌 1)/150(시즌 2)으로 너프되고 부자연스러운 커팅도 많이 발견돼 리메이크가 불만족스러운 곡 중 하나라는 평가가 존재한다. 만약 원곡 BPM인 176으로 높이고 리메이크도 커팅 없이 원곡을 따라갔다면 ☆10 난이도 중상급의 곡이 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60] 당시 다게레오타입이 발명된지 10년 정도 됐을 무렵이다. [61] 그의 독설 대상이었던 프란츠 리스트도 스네이프 닮았다는 말이 있다. [62] 이와 더불어 같은 해리 포터 실사영화 시리즈에서 해리 포터(다니엘 레드클리프가 맡은)를 닮은 작곡가로는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를 꼽기도 한다. [63] 폴로네이즈 '영웅'으로 폴로네이즈 상도 수상했다. [64] 요제프 하이든의 제자이기도 했던 음악가 이그나츠 요제프 플레옐이 런칭한 피아노 브랜드. 후에 아들 카미유 플레옐과 공동으로 회사를 운영한다. 플레옐은 연애 문제로 인해 엑토르 베를리오즈에게 살해당할 뻔했다.
[67]
쇼팽의 대부는 당시 18살의 프리데리크 스카르베크(Fryderyk Florian Skarbek)로 니콜라 쇼팽의 제자였다.
[68]
프레데리크가 18세였을 때 사스(Sas,
작센) 궁에서 크라신스키(Krasiński) 궁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