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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6 17:13:46

벌거벗은 세계사/문제점 및 비판/시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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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19화 냉전3. 33회 초한지(항우와 유방)4. 44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5. 51화 그리스 vs 페르시아6. 56화 기축통화 달러7. 72화 엘리자베스 2세8. 78화 이란 역사 편9. 80화 여왕 마고 편10. 106화 영락제 자금성11. 108화 합스부르크 가문12. 109화 화산폭발과 백두산13. 116화 오펜하이머14. 121화 프랑스 와인15. 123화 교황의 탐욕16. 128회 야쿠자17. 129화 이스라엘 vs 이슬람 근본주의18. 130화 크리스마스 특집 1탄19. 131화 크리스마스 특집 2탄20. 138화 마거릿 대처21. 141화 바이킹22. 142화 초콜릿의 역사23. 144화 프랑스 침공24. 156화 이스라엘 vs 이란25. 162화 알프레드 노벨26. 163화 명나라의 폭군들27. 164화 소련의 스파이28. 170화 플라스틱29. 171화 로마 제국 쇠망사30. 172화 시베리아31. 173화 바다를 닫아 몰락한 중국32. 178화 이슬람교

1. 개요

tvN 역사 예능 벌거벗은 세계사 시즌 3의 나오는 문제점과 비판을 정리한 문서. 비교적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된 시즌 1,2와 다르게, 시즌 3는 순항에 성공하면서 장기 컨텐츠로 자리잡았고, 그 결과 이런저런 오류가 꽤 많이 나오고 있다.

다만, 가르치는 교수가 오류를 저지른 부분과 제작진들이 잘못된 증거자료나 편집방향 등으로 오류를 낸 사례가 혼용되어 있으니 참고할 것.

2. 19화 냉전

냉전의 3번 문항인 '대리전쟁'에서 한국전쟁을 '최초의 대리전'이라고 소개했으나, 이후 대리전의 예시에서 국공내전이 언급되었다. 하지만 국공내전은 냉전보다 훨씬 이전부터 진행되어오던 전쟁이었다. 중간에 일본군의 대대적 침공에 의한 중일전쟁의 발발로 공산당과 국민당이 일시적으로 연합해 일본군에 대항했을 뿐, 본질적으로는 1927년에 일어난 4.12 상하이 쿠데타 이후 둘은 앙숙이었고, 일본이 패퇴하자마자 다시 제2차 국공내전을 치른게 우연히 냉전과 시기가 겹쳐있었을 뿐이었다. 제2차 국공내전마저도 1949년에 국민당이 국부천대를 단행하며 사실상의 종전을 맺은, 1950년에 시작된 한국전쟁보다도 먼저 끝난 전쟁이었다.[1] 물론 제2차 국공내전의 결과가 냉전에 미친 영향은 컸지만[2], 대체로 냉전의 최초 대리전으로 평가하는 전쟁은 6.25 전쟁이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국공내전 자체는 냉전과는 무관한 중국 군벌의 세력 싸움의 연장선이었을 뿐이었다.[3] 실제 강의자는 한국전쟁을 최초의 대리전이라 칭했으니, 제작진이 '공산권과 비공산권이 싸워 공산권이 승리한 전쟁'이라는 결과만 가지고, 무리하게 예시로 넣어 발생한 오류일 가능성이 크다.

3. 33회 초한지(항우와 유방)

후술할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전체적으로 가공의 소설인 《초한지》를 중심으로 해석한 결과로 빚어진 문제가 많다. 특히 강의 내용을 보면 거진 고우영 화백의 《초한지》를 보고 강의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해당 작품에서 설명하는 인물상과 거의 일치하는 방향으로 인물들을 설명하고 있다.[4][5]

4. 44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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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51화 그리스 vs 페르시아

6. 56화 기축통화 달러

금 1 온스를 설명하면서 1 온스가 28.35g이라고 표시했다. 그러나, 이는 상용 온스(avoirdupois ounce)와 트로이 온스(troy ounce)를 구별하지 못한 오류이다. 일반적인 물체의 무게를 재는 단위로는 '상용 온스'(OZ)가 사용되지만, 황금을 비롯한 귀금속의 무게에는 '트로이 온스'(OZ.T)가 사용된다. 흔히 금 1 온스라고 말하더라도 이는 금 1 트로이 온스를 의미하는 것이다. 1 상용 온스는 약 28.35g[16]이고, 1 트로이 온스는 약 31.1g[17]이다.

7. 72화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가계도에서 오류가 있었는데, 셋째이자, 차남 앤드루 왕자의 전 배우자인 사라 퍼거슨의 출생연도가 1959년이 아닌 1969년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8. 78화 이란 역사 편

팔레비 왕조에 대한 여론이 악화된 원인이 이란의 시아파 이슬람주의자들과 1970년대에 밝혀진 팔레비 왕가의 부정부패 때문이라고 설명하지만 직접적인 원인은 1953년에 이란 민족주의자였던 모하메드 모사데크 CIA가 몰아낸 것이었다. 게다가 팔레비 왕조의 백색혁명이라는 것도 도시의 상•중산층에 한정되어 있었고 대부분을 차지하는 하류층은 사회적으로 소외받고 있었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았다. 이러한 설명은 대안 우파 신우파 진영이 " 이란인들이 미개한 신념에 빠져 팔레비 왕가의 은혜를 모르고 루홀라 호메이니라는 독재자를 선택했다."라는 인종주의적 수사를 정당화하는데 악용되고 있다.[18]

게다가 모하메드 모사데크를 몰아낸 CIA가 1979년에 반서방을 내세우는 루홀라 호메이니에게는 그러지 않았는지에 대해 의혹이 나돌고 있는데 이에 로버트 드레이퍼스는 영국과 미국 정부가 루홀라 호메이니를 중앙아시아에서 반공주의를 확산시키는 도구로 활용하기 위해 그랬다고 주장한 적이 있었을 정도이다.

9. 80화 여왕 마고 편

결말부에서 위그노 전쟁으로 수많은 피를 본 결과 프랑스에 톨레랑스가 뿌리를 내렸다고 언급했는데, 애초에 프랑스=톨레랑스라는 공식 자체가 허구적인 면이 많을 뿐더러 당시 낭트 칙령 이후 위그노들이 누렸던 자유는 지속적으로 제약이 확대되다가 100년도 못 가 루이 14세의 손에 롤백됐다. 프랑스에서 가톨릭 외 종교가 안정적인 대우를 받기 시작한 건 프랑스 혁명 이후다.

10. 106화 영락제 자금성


구성상으로 보면 대체로 홍무제든, 영락제든 정화의 대원정 정도만 빼면 업적[20]은 축소하거나 거의 다루지 않고, 일방적으로 호람의 옥이나 임오순난, 어여의 난 같은 폭정만 부각시켰다. 물론 명나라와 자금성의 역사 전반을 다루다 보니 분량상 생략한 게 크겠지만, 그래도 영국 해군의 아버지로서의 업적을 어느 정도 인정했던 헨리 8세 편이나 무주의 치를 대대적으로 묘사한 측천무후 편에 비하면 아쉬운 부분이다.[21]

11. 108화 합스부르크 가문

주제와 밀접한 권위있는 전문가들을 꾸준히 섭외하며, 사실관계 오류가 거의 사라진 시즌 2~3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 편 다음으로 가장 오류가 많은 에피소드로 꼽힌다. 다만 러우전쟁 편에 비해 욕은 거의 안 먹었는데, 가장 예민한 주제에서 중심 내용인 양국 간 갈등의 맥락 부분이 획일화되고, 왜곡된 러우전쟁 편과 달리 이번엔 상대적으로 화제성이 적은 주제에다가 오류들도 수만 많지, 거의 다 강의 내에서는 지엽적인 부분이었고, 오류가 발생한 원인 역시도 상당수 납득되기 때문이다.[22] 시청률도 밤 10시 편성으로 변경된 이후, 가장 잘 나온 축에 들어간다.

12. 109화 화산폭발과 백두산

고대 로마 학자 소 플리니우스(Pliny the Younger)를 잘 쓰지 않는 영거 플리니우스라고 번역했고, 영어 철자도 Pliny the Youger라고 잘못 썼다.

13. 116화 오펜하이머

14. 121화 프랑스 와인

고대 로마에서의 로마군에 의한 와인 보급을 설명할 때 석회질의 물 대신 와인을 사실상 식수로 썼다는 언급을 했는데, 포도주/역사에서 보듯 이는 오랜 기간 정설로 인정받긴 했으나 최근으로 올수록 반례가 제기되면서 부정되는 학설이다. 실제 로마군이 식수로 사용했던 건 포도주 식초를 물에 섞어서 마시는 포스카(Posca)다.

15. 123화 교황의 탐욕

16. 128회 야쿠자

17. 129화 이스라엘 vs 이슬람 근본주의

헤즈볼라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오류가 심하다. 설명에선 마치 헤즈볼라가 하마스 수준의 극단적인 이슬람주의로 묘사되나, 실제 헤즈볼라는 오히려 파타 사우디아라비아와 흡사하게 현실과 타협한 이슬람주의 정당에 더 가깝다.

비록 헤즈볼라의 주요 동맹 세력들이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이긴 하지만, 헤즈볼라는 비이슬람권에도 유하게 대처하고 있다. 애당초 그들이 집권하고 있는 레바논은 기독교계도 40%가 넘는데다가, 현재 헤즈볼라가 참여 중인 연정은 제1당이 마론파 기독교 정당 자유애국운동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헤즈볼라가 이스라엘을 적대하는 이유는 애당초 헤즈볼라의 창립부터가 PLO를 쫓아내겠다고 레바논을 침공한 이스라엘 세력을 방어하기 위해 탄생한 시아파 유격대에서 출발한 집단이기 때문에 이스라엘과는 친하게 지낼 건덕지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즉, 창립 이념부터 반 이스라엘•반 유대주의가 잡혀있는 집단일 뿐, 이념 자체는 이슬람 원리주의 계열이 아니며, 오히려 다른 종파나 종교도 수용하고 문화 개방에도 적극적인 세속주의에 가까운 집단이기에 과격한 이슬람 근본주의를 신봉하는 하마스와는 거리가 꽤 있는 집단이다.

똑같이 박현도 교수가 진행했으며 이란-이스라엘 관계에 집중한 156화에서는 헤즈볼라에 대해 '이슬람 강경파'라고 언급했는데, 이는 해석이 갈릴 수는 있으나 일단 129화의 ' 이슬람 국가 건설론'이나 하마스에 대해 사용하는 수사인 이슬람 근본주의(원리주의)보다는 온건한 표현으로 바꾼 것이다.[26] 거기다 이후에도 헤즈볼라의 비판점은 무장투쟁 과정에서의 문제점으로 국한하고, 현 헤즈볼라 자체는 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집권했다는 점 등을 부각하며 과거에 비해 훨씬 중립적으로 묘사했다.

18. 130화 크리스마스 특집 1탄

19. 131화 크리스마스 특집 2탄

132화 예고편에서 조조에게 촉나라 깃발을, 유비에게 위나라 깃발을 연결하는 오류를 범했다.

20. 138화 마거릿 대처

다트포드 그레이터런던(大런던)의 그리니치 자치구에 위치하고 있는 것처럼 표시했다. 다트포드는 그레이터런던 동부에 인접한 켄트주의 서부에 위치한 도시이다.

21. 141화 바이킹

알프레드 대왕의 화면에 아무런 설명 없이 (871년~988년)이라고만 표기했다. 이럴 경우 보통 생몰년으로 생각하게 되는데, 제작진은 재위기간을 의도했던 것 같다. 그러나 어느 경우로 보든 오기이다. 알프레드 대왕의 생몰년은 849년~899년이고, 재위기간은 871년~899년이다.

22. 142화 초콜릿의 역사

자막에 마야 문명의 피라미드인 엘 카스티요(El Castillo)가 9~13세기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해놓고는 이어진 자막에 수천 년 전에 만든 건축물이라고 했다. 그러나 마야 문명이 시작된 것이 약 4000년 전[27]으로 수천 년 전인 것이지, 엘 카스티요 자체는 700~1200년 전의 건축물이다.

23. 144화 프랑스 침공

레지스탕스의 역할을 실제보다 지나치게 과장해서 설명했다. 안톤 작전과 비시 프랑스의 해체 이후 나치가 망할 것 같은 시점에 레지스탕스의 활동이 증가한 기회주의적인 면모가 작지 않으며, 요시프 브로즈 티토 휘하의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은 명색이 빨치산이면서 항공기에 전차까지 운용하고, 독일군 70,000명을 묶어둔 것에 비해,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활동은 매우 초라하다. 전선에 유의미한 도움을 제대로 주지도 못한 레지스탕스에 비해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은 조직적인 철도 파괴와 기습으로 독일군의 동부전선에 유의미한 피해를 주었고, 심지어 명장 발터 모델에게 중상을 입히기도 했다.

그리고 비시 프랑스를 괴뢰국으로만 설명하고, 자유 프랑스가 처음부터 지지를 받았던 것처럼 묘사했지만, 프랑스의 식민지 대부분은 비시 프랑스를 지지했고, 자유 프랑스는 별로 지지를 받지 못했다. 비시 프랑스 정부가 프랑스 본토를 통제하고 있었고, 프랑스 군대 대다수가 비시 프랑스 정부에 충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식민지 관료 중에는 파시즘 사상에 호의적인 인물도 적지 않았고, 다당제 폐지·노동 3권 부정·엄벌주의 등 비시 프랑스 정부의 강력하고 억압적인 사회 통제 정책에 호의적인 사람들도 많았다. 일부 가톨릭 성직자들이 현지 식민지 관료에게 '비시 프랑스를 지지해야 한다'고 압력을 넣는 경우도 있었다. 1940년 8월 차드 총독 펠릭스 에부에가 자유 프랑스 지지를 선언한 것을 시작으로, 1942년까지 서아프리카를 중심으로 아프리카 일부 식민지가 자유 프랑스 측으로 넘어왔을 뿐이었다. 이런 상황은 1942년 연합군이 알제리를 탈환하고, 알제가 자유 프랑스의 수도가 되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비시 프랑스를 공격한 안톤 작전의 배경인 횃불 작전이나, 그 배경인 캐터펄트 작전으로 발생한 반영 감정도 넣지 않았으며, 단순히 나치가 통수를 친 것처럼 묘사했다. 마찬가지로 툴롱 프랑스 함대 자침도 넣지 않았다. 도대체 왜 나치 독일이 괴뢰국이라는 비시 프랑스를 공격하는지, 충실한 나치 괴뢰라던 비시 프랑스가 함대를 자침시키는지 그들도 이유를 설명할 수 없으니 대충 독일이 비겁해서라는 이유로 넘겼다.

1945년 이후 전범 척결도 개판으로 묘사했다. 68운동 이전까지 비시 프랑스의 고위급 관료들 상당수가 샤를 드골에게 붙어먹어 승승장구했으며, 살기 위해 독일군에게 부역한 이들이 많았는데도 화풀이성으로 머리카락을 자르고 하켄크로이츠를 새기는 등 전범 척결의 과정도 개판으로 이루어졌다.
파일:external/2.bp.blogspot.com/A+French+woman+has+her+head+shaved+by+civilians+as+a+penalty+for+having+consorted+with+German+troops,+1944.jpg
독일인과 관계를 맺었다며 삭발당하는 프랑스 여자
독일 군인과의 연애와 매춘 그리고 청소나 접시닦이 같은 잡역도 처벌되었는데, 독일군에게 강간당한 여성 피해자도 부역자로 몰리는 일이 있었다. 이들은 정식 재판도 없이 레지스탕스에 의해 사적인 제재를 당했다. 보통은 위의 사진처럼 삭발을 하고 조리돌림을 시켰으며, 일부는 처형당했다.

반면 고위층에서 나치 독일과 비시 프랑스에 부역한 자들은 여전히 정치, 경제 부문의 요직에 앉아 부와 권력을 누렸다. 대표적인 예로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어 전 서독 총리, 테오도르 오버랜더 전쟁 피해자-추방자 연방 장관, 한스 글롭케 연방 총리청장, 라인하르트 겔렌 연방 정보국장, 헤르만 요제프 압스 당시 도이체방크 총재, 한스마르틴 슐라이어 독일 경제인 연합회장, 에른스트 폰 지멘스 지멘스감독위원회 의장, 1950년대 서독 최고의 갑부들 중 한 명이었던 프리드리히 플리크 등이 있다. 이들로 대표되는 기성세대는 홀로코스트 등 자신들이 일으킨 전쟁범죄에 대해 없었던 일로 취급하며 사회적인 망각을 강요했다. 이는 68 운동이 발생한 이유들 중 하나가 되었다.

종합적으로 보자면 최근의 연구 성과보다는 레지스탕스와 제4공화국의 과거사 청산을 무조건적으로 띄워주는, 68운동 이후 주류 학계에서 사장된 전통적 레지스탕시알리즘 사관 위주로 설명했다고 볼 수 있다. 정작 이날 강사였던 이용우 교수의 저서나 논문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이러한 레지스탕시얼리즘 사관에 대해 사실상 신화에 가깝다며 선을 긋고 있는데 #[28] #, 프랑스의 대 나치 레지스탕스 활동을 한국의 항일 독립운동에 투영하는 경향이 강한 한국 사회 특성상 현실적인 묘사 쪽이 오히려 리스크가 높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24. 156화 이스라엘 vs 이란

진실의 약속 작전 당시 양국이 치른 비용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이스라엘의 방어 비용은 한화 기준 2조 원, 이란의 공격 비용은 330억 원 정도로 추산했는데 이는 군사 전문가들의 추산 중 가장 크게 잡은 편인 자료들을 가져온 것이긴 해도 오류라고 할 수는 없으나, 바로 뒤에 두 비용의 비율이 분명 60:1 정도임에도 120:1로 계산하는 문과스러운 실수를 범했다.

25. 162화 알프레드 노벨

일설에는 1888년 알프레드 노벨의 형인 루드비그 노벨(Ludvig Emmanuel Nobel)이 사망했을 때 한 신문에서 실수로 알프레드 노벨이 사망했다는 기사를 실었는데, 그 기사에서 노벨을 '죽음의 상인'으로 지칭했고, 이에 충격을 받은 노벨이 자신의 사후 이미지를 걱정해 상을 만들었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해당 오보의 원본이 발견된 바 없으며, 심지어 노벨상 공식 홈페이지 등에서도 이러한 이야기를 언급하거나, 인용한 바 없어서 잘못 알려진 풍문일 가능성이 높다.

26. 163화 명나라의 폭군들

27. 164화 소련의 스파이

28. 170화 플라스틱

태평양 거대 쓰레기 지대에 대한 설명에서 그 넓이를 '대한민국 영토 면적[29]의 16배인 160만 ㎢'라고 언급해야 함에도 강사의 언급과 자막 모두 '대한민국 영토 면적의 16배인 160㎢'로 언급하는 바보짓을 저질렀다. 실제 160㎢라면 서울특별시 면적에도 못 미친다.

29. 171화 로마 제국 쇠망사

소위 '3세기의 위기'때, 고트족 같은 대규모 부족이 로마 제국의 영역 내로 침공해 들어와 데키우스 황제가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혔지만 왕국을 세워 정착하지도 않았고, 한때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사산조 페르시아군에게 포로로 잡히고 갈리아 제국, 로마 제국, 팔미라 제국의 삼국으로 분열되는 혼란의 시기도 있었지만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통일되고 게르만계 부족들의 침략도 전부 격퇴했다.

30. 172화 시베리아

에드워드 1세를 잉글랜드 왕국 제5대 국왕이라고 자막 표시했는데, 에드워드 1세는 플랜태저넷 왕조의 제5대 국왕이었므로, 플랜태저넷 왕조까지 자막 표시했어야 했다.

31. 173화 바다를 닫아 몰락한 중국

정화의 원정때 사용된 함선의 규모에 대해서는 현재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왜냐하면 계획적인 소각과 대규모의 전란으로 인해 남겨진 기록이 희귀하기 때문이다. 방송에서는 이 점을 예기하지 않았다. 참고로 《 명사》는 정화의 원정으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뒤인 청나라때 편찬되었으며, 따라서 함선의 규모에 대해 기록 그대로 신뢰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32. 178화 이슬람교

박현도 교수는 영상 후반에서 이슬람에 대한 오해를 나름대로 설명했지만 그 설명이 2000년대 당시 수사와 다를 바가 없어 새로운 점이 없었다.

영상 초반에 이슬람의 초기 역사를 설명하는 것은 좋았지만 그 이후인 19세기 후반부터 발흥했던 이슬람 모더니즘의 역사와 또 그 이후인 이슬람주의의 발흥으로 현재와 같은 이슬람의 모습으로 변한 것이라고 설명해야[30] 역사라는 주제 하에서 방송 프로그램의 일관성이 있었을 것이다. 이는 아직 한국 사회가 대(大)중동 및 이슬람권 전공 역사 교수들의 수가 부족하고 영미권 언론, 여론에 의존에 이슬람 관련 정보를 수집해야하는 상황에서 못 벗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1] 애초에 6.25 당시 북한군에 지원을 보낸 중국공산당군 대다수가 이 국공내전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이었고, 공식 지원 이전에 자발적으로 북한에 지원을 간 조선족 부대 등도 전부 이 국공내전에서 공적을 쌓았던 군인들이다. [2] 중국공산당 정권의 승리로 아시아 일대에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력이 매우 커졌고, 6.25 전쟁의 발발 원인에도 지분이 있을 정도였다. 이 탓에 유럽 전선에선 다소 신승한 자유주의 정권이 아시아권에선 사실상 패배 판정을 받고, 사회주의 정권이 태평양으로 진출하지 못하도록 해안 국가들을 포섭하는 단계에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3] 다만, 승리자측이 사회주의 정권 세력이라 결과적으로 냉전에서 사회주의쪽 세력에 힘이 크게 실렸을 뿐이다. [4] 오히려 고우영 화백은 대놓고 한고조 유방을 찌질이 취급했고, 한신은 미화했으나, 역으로 한신이 저지른 과오도 모두 넣었기에 미화와는 별개로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한신의 잘못도 어느정도 존재하는걸 볼 수 있었으나, 이 강의에선 한신의 과오가 전혀 담겨있지 않다. [5] 똑같이 이성원 교수가 진행한 3편의 삼국지 강의들은 정사 《삼국지》 위주로 진행하며 《삼국지연의》의 각색된 부분들을 조목조목 지적한 것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후술하는 대로 시간적인 문제로 제대로 내용을 설명할 시간이 부족했거나, 아니면 교수 본인의 시기별 전문성에 차이가 나는 듯 보인다. [6] 특히 송의는 항량이 저러다 크게 패할 것이란 예측을 의제에게 들려주고 이를 맞췄기에 더더욱 의제의 신임이 커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7] 56만 명은 머릿수만 많지, 전혀 통솔되지 않은 군벌들의 연합체라는 점이나, 승리에 도취해 방만해진 점 등. [8] 이성왕이 아니라 동성왕이라고 해도 중앙정부에서 제대로 견제하지 않으면 오초 7국의 난이나 서진시대 팔왕의 난같은 꼬라지가 나게 된다. [9] 대표인 한신도 후술하겠지만 소하, 장량급 공신인 역이기를 죽게 만든 원흉인데다가 그렇게 유방의 공신마저 죽음에 이르게 한 후 얻은 제나라에서는 '왕으로 임명을 안해주면 안가겠다'고 밍기적대는 등, 제대로 눈 밖에 날 짓을 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한나라의 통일 이후에도 과거 유방의 숙적인 항우의 수하 종리말을 거두는 등 어그로를 있는대로 끌었음에도, 유방은 끝내 회음후 강등 이후로는 한신을 견제하지 않았으나, 여후가 손을 써 한신을 제거한 것이었다. [10] 그나마 가장 억울하다고 여겨지는 팽월도 여러 번 중앙에 바쳐야 할 공물을 쌩까는 등 중앙정부를 무시하는 태도를 보인 적이 있었다. [11] 거의 유일한 예외가 번쾌로, 이쪽은 외척인 여씨 가문을 견제하기 위해 임의로 처형하려 했던 인물이었으나, 고조 유방이 붕어하여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12] 참고로 역이기는 그 소하 장량에 버금가는 초창기 개국공신급에 해당하는 인물이었는데, 유방이 관중으로 향할 때 남부 영토 대다수를 역이기 덕분에 넘을 수 있었다. 즉, 유방이 관중에 최초로 입성할 수 있게 큰 도움을 준 공신들 중 한 명이었던 셈이다. [13] 다만, 이는 조금 이해해야 할 것이 패널들이 하도 영화 300을 언급해댔기 때문에 강사 본인이 혼동이 왔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방송을 보면 강사는 꾸준히 영화와 현실의 차이를 지적하면서 강의를 했다. [14] 실제 이 전투의 여파인지 스파르타는 테르모필레 이후 1년 가까이 제대로 군을 꾸리지 못하다가, 최후의 전투인 플라타이아이 전투에 가서야 제대로 활약하게 된다. [15] 정작 웃긴건 강사는 되려 후방에 군이 있어 시간을 끌어야했기에 남았을 것이다라는 추론을 그대로 말했었다. 즉, 강의 문제가 아닌 순수하게 편집에서 오류가 난 것이다. [16] 1 상용 온스(OZ)=28.349523125g [17] 1 트로이 온스(OZ.T)=31.1034768g [18] 이 부분은 역시 박현도 교수가 진행한 156화 이란-이스라엘 관계 편에서 훑고 지나가는 수준이긴 했으나, 백색혁명 이후 심각했던 빈부격차 문제가 혁명의 원인 중 하나로 언급되며 어느 정도는 정정되었다. [19] 173화 중국의 해양정책 편에서는 800명이라는 숫자는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20] 농업 생산량의 증대, 중앙집권체제 강화, 성공적인 정복 활동 등. 두 사람의 치세 모두 숙청은 잔인했어도 대체로 중국사에서 손에 꼽히는 한족 왕조의 황금기로 평가받는데, 강의에서는 마치 이러한 치세가 운 좋게 얻어낸 결과물인 것마냥 다뤄진다. [21] 단 영락제의 경우 173화 중국의 해양정책 편에서는 숙청 문제는 굳이 다룰 필요가 없다 보니 대부분 생략됐고, 반대로 최대 업적인 정화의 대원정은 초반 20~30분을 통째로 잡아먹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비중을 가지다 보니 같은 황제가 맞나 싶을 정도로 취급이 파격적으로 개선됐다. 경항대운하 완성 부분도 중국의 해양 진출 포기 원인으로 지목하기 위해 언급되긴 하지만 당대 기준으로는 어쨌든 실책보다는 업적이었기도 했고. 이후 다뤄지는 후대 황제들이 정통제, 경태제( 토목의 변으로 인한 명의 북방 집중 및 해양 포기 부분), 가정제( 해금령 관련 부분) 등 평균 이하 내지 폐급에 가까운 이들이라 상대적으로 나아 보이는 것도 있다. [22] 합스부르크 가문은 수백 년 동안 서양사 전체를 주름잡은 가문이라 그 역사의 스케일이 무지막지한데, 서양사 전공자도 아닌 독일어 전공자인 라영균 교수에게 그 모든 부분을 완벽하게 설명하라고 하는 것이 오히려 무리한 요구라고 할 수 있다. 설령 오류를 지적하더라도 비판받아야 하는 건 강사 본인보다는 100분 분량으로 무리해서 방대한 내용을 담아내려 하고, 오락적인 면모에만 집중한 제작진일 것이다. [23] 카를 5세의 동생이었던 페르디난트 1세의 아들이었다. 즉 펠리페 2세의 친사촌으로 둘은 동갑내기였다. [24] 현재는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나뉘어짐. [25] 물론 이 부분은 세계사 중등 교육과정부터 분량 문제로 대놓고 해당 이분법을 쓰고 있는지라 직접 반박하기는 애매하긴 했다. [26] 실제로 헤즈볼라는 이슬람 근본주의는 아니지만, 반서방주의-반이스라엘주의로 서방계열에선 강경파로 볼법한 정당은 맞고, 한국도 엄연히 서방세계의 일원인지라 이런 시각으로 가르친게 아주 틀린 것도 아니다. [27] 방송에서는 마야 문명이 BC 1500년경에 시작되었다고 했으나, 일반적으로는 BC 2000년경에 시작되었다고 보는 듯하다. [28] 서평 부분을 보자. [29] 사실 헌법상으로는 북한 영토도 대한민국 영토에 포함되므로 20만 ㎢로 잡는 게 맞으나, 실효지배 중인 10만 ㎢로 잡은 듯하다. [30] 실제 129화가 이런 방식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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