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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6 21:33:56

카노사의 굴욕


중세 교황청 주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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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카노사의 굴욕.jpg
하인리히 4세(가운데 인물)가 클뤼니 대수도원 장 우고[1](왼쪽 인물)와 마틸다 디 카노사 디 토스카나 여변경백(오른쪽 인물)[2]에게 간청하는 장면을 묘사한 12세기의 유명한 삽화이다. 하단에 라틴어로 "Rex rogat abbatem / Mathildim supplicat atque"[3]라고 적혀 있다.
<colbgcolor=#fcffe5,#4e4e47><colcolor=#000,#DDD> 역사적 정보
날짜 1077년 1월 25일 - 1077년 1월 28일( 그레고리력)
장소 이탈리아 토스카나 카노사성
(현 이탈리아 에밀리아로마냐주 레조넬에밀리아 카노사)
언어별 명칭
이탈리아어 l'umiliazione di Canossa
독일어 Gang nach Canossa / Canossagang
프랑스어 Pénitence de Canossa
영어 Walk to canossa / Road to Canossa
Humiliation of Canossa
1. 개요2. 오해3. 사건의 시작4. 파문의 의미5. 파문 선포, 하인리히의 선택6. 또 한 번의 파문, 하지만...7. 하인리히 4세의 복수8. 그 후9. 의의10. 여담11.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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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성 로마 제국 잘리어 왕조의 제3대 황제였던 하인리히 4세 이탈리아반도 북부의 카노사성에서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게 파문을 취소해 달라고 1077년 1월 25일부터 1월 28일까지 사흘동안 관용을 구한 사건이다.

일반적으로는 중세 종교 세력의 전성기 때의 위상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알려져 있지만, '카노사의 굴욕'은 황제와 봉신들 사이의 알력으로 교황권이 대두된 경우이지, 교황의 영향력 자체가 주요 사안은 아니었다.

강력한 행정 세력이면서, 물질적인 세속 권력인 영지까지 대규모로 쥐고 있었던 주교 영주들은 서유럽의 군주들에게 있어 상당한 문젯거리였는데, 특히, 황권과 봉신 권력 간의 싸움이 잦았던 신성 로마 제국의 경우, 황제의 황권 강화 노력의 일환으로 주교 서임권을 황권 아래에 두려 했으며, 이러한 황권을 직접적인 군사적 위협으로 본 교황청은 교리를 명분으로 내세워 봉신 권력에 편승하여, 주교 서임권을 교황청에 존속시키려고 했다.

하인리히 4세는 황제의 명령을 안 듣고, 반란을 주구장창 일으키는 봉신 권력을 약화시킬 목적하에 주교 서임권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그레고리오 7세가 격렬히 반발하면서, 황권 강화를 싫어하는 황제의 봉신들과, 신성 로마 제국 자체를 견제할 수 있는 노르만 세력 및 이탈리아 독립 세력의 지지를 바탕으로 하인리히 4세와 정면 충돌 한 결과가 '카노사의 굴욕'이었다. 이 와중에 퇴물 취급이긴 해도 최후의 거점이었던 바리를 통해 교황청에게 무력시위를 하던 동로마 제국까지 얽힌 상당히 복잡한 상황이 배경으로 깔려 있다.

2. 오해

교황 권력의 위상은 교황청에 군사적인 압력을 넣을 수 있는 세력의 존재 유무에 크게 달려 있었으며, 해당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서 교황청은 중세 서유럽의 핵심 행정 세력이자 상당한 세속 세력이기도 한 교회 영지들에게 달린 이권 문제를 활용하고, 교리를 명분으로 내세워 왕권과 봉신 권력 사이의 다툼에서 줄타기를 해왔다. 교황이 무소불위의 위상을 가지게 된 것은 실질적으론 신성 로마 제국의 봉신 권력의 증대, 최후의 거점이었던 바리의 상실로 인한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 상실, 그리고 교회와 교황권에 친화적인 강력한 세속 영주들의 지지가 모두 모인 결과였으며, 그로 인해 십자군이라는 크고 아름다운 원정으로 전 서유럽이 헤딩하러 가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수박 겉핥기식으로 가르치는 교과서에서는 카노사의 굴욕과 아비뇽 유수를 각각 기독교와 왕권의 '정점'이라고만 설명하고 끝내니, 아비뇽 유수를 이 사건의 연장선으로 인지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비뇽 유수는 카노사의 굴욕과는 아예 무관하다. 아비뇽 유수는 신성 로마 제국과 교황청의 충돌이 아닌, 프랑스 왕국과의 충돌이었으며,[4] 세속 권력과 교황청이 충돌한 사건이란 점만 같지, 본질적으론 아무런 상관이 없다. 중앙 권력 vs. 지방 권력이라는 중대한 담론을 철저하게 무시하는 황당한 처사이다.

이는 교황권이라는 것이 교회가 서유럽 세계에 가지는 위상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강력한 주변 세력으로부터 교황청이 스스로를 보호하는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다. 무려 서로마 제국의 붕괴 이후 나폴레옹의 공격으로 교황청이 개박살 날 때까지 이어왔던 기나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로마 교구의 권력 줄타기가 핵심이고, 그게 잘 풀리면 자연스럽게 교황청이 세속 권력마저 강력하게 쥐게 되는 것이고, 안 풀리면 사코 디 로마 같은 꼴이 났다.

아비뇽 유수는 기존 세속 권력의 꽃(?)이었던 개별 봉신들의 권력이 대폭 약화됨에 따라, 왕권으로 결집되는 세속 권력의 영향을 교황청이 억누를 수 없게 됨과 동시에, 각종 세력 변동으로 인한 서유럽 사회 구조 급변의 결과, 교황이 적대적인 세속 군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게 된 상황이 일으킨 사건이다.

물론, 교황의 처신 문제라는 점에서는 본질적으로 카노사의 굴욕과 같다고 할 수 있으나, 둘을 연장선상에서 보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애초에 위협을 가한 세속 권력이 신성 로마 제국이 아니라 프랑스 왕국이라서 이 둘을 하나로 이어진 사건으로 보는 건 무리수이다.

교황의 권위가 실추되고, 세속 권력도 쇠락하고, 서유럽 세력 구조가 교황에 적대적으로 변하게 된 결과, 교황권이 총체적으로 약화됐음이 교황청의 강제 이전을 통해 가시적으로 드러났을 뿐이지, 아비뇽 유수 한참 이전부터, 기존 사회 구조가 격변을 겪으면서 교황권 개념 자체가 십자군 원정과 그 이전의 교황권과는 전혀 다른 형태가 된 지 오래였다.

물론, 숙고 집회의 결성과, 그를 통한 필연적인 권력 분립에 따라 왕권의 개념이 단순 철권통치가 아닌, 권위를 통한 은은한 압력으로 변모한 것을 따지면, 카노사의 굴욕이나 아비뇽 유수 모두 진주인공은 교황청이다. 물론 실질적 세속 권력보다는 권위에 특히 의존하는 교황권은 단순히 처세술 따위로 따질 수 있는 것이 아닌, 명백한 권력임은 확실하다. 하지만, 권위를 통한 압력을 이용하는 후대의 세속 군주권과 비교하기 미안할 정도로 교황권이 정말로 불안정한 입지에 있었음은 무시하기 어렵다.[5]

한편, 교황권은 단순히 아비뇽 유수 등으로 그 실추된 위상을 악랄하게 알리고 종 친 것이 아니라, 이후에도 꾸준히 강력한 종교적 권위 행사를 통해 서유럽의 정신적 지주이자 교회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시즌 2를 찍어왔다. 여전히 꾸준히 막대한 위상을 자랑하던 교황청은, 하필이면 소빙하기로 인해 천하 만민들이 고통받으며 교회에 간절히 답을 구할 때, 면죄부 장사나 해 처먹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로 인한 막대한 반발로 종교 개혁이 일어나고, 이것이 변동하는 서유럽의 이해관계와 결부되어 30년 전쟁으로 이어졌다.[6]

세속 권력 간의 알력이 사건의 중요한 축이란 점에서 차라리 30년 전쟁이 카노사의 굴욕과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는 것이 이치에 맞을 것이다. 물론, 아비뇽 유수와 연장선상에 있는 사건은 나폴레옹의 교황청 침공이다.[7] 애초에 카노사의 굴욕과 아비뇽 유수는 300년이란 긴 텀이 존재하기에 연속된 사건이라 보기도 좀 그렇다.

3. 사건의 시작

먼저 '성직자 임명권'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데, 이 임명권 자체는 프랑크 왕국 시절부터 존재했던, 제법 역사 깊은 국왕의 권한 중 하나였다. 다만 이때까지 종교와 왕권이 서로 대립할 이유는 적었기 때문에 오랜 기간 크게 영향을 끼치지 않다가 하인리히 1세가 스스로의 혈통이 카롤링거 왕족도, 프랑크족도 아니라는 취약점을 만회하기 위해 왕이 쓸 수 있는 온갖 권리를 동원하여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했고, 임명권 또한 하인리히 1세 때 실질적이며 적극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하인리히 1세의 아들인 오토 1세는 아예 성직자들에게 봉토를 하사하고 충성을 맹세받는 것으로 기존의 봉건 영주에 맞설 성직 제후들을 만들기 시작한다. 이는 명분상으로는 기독교의 수호자 겸 지지자라는 의지 표명이었고, 속물적으로는 주교 개개인에게 충성을 받음과 동시에 그들을 통해 종교 세력에도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 세습제인 봉건 영주에 비해 성직 제후는 세습이 아니었으므로[8] 그들이 죽으면 다시 나라로 봉지가 반환되었다. 즉 그들에게 있어서는 봉지를 '하사'한다기보단 '대여'하는 것에 가까워서 성직 제후들이 아무리 늘어나봤자 봉건 영주들을 늘리는 것에 비해선 왕권에 큰 타격을 주지도 않았다.

그 후 임명권은 계속해서 왕권에 포함되어 있었으나, 1073년 교황으로 등극한 클뤼니 대수도원 출신의 그레고리오 7세는 원칙주의와 교회의 개혁을 주장하는 동시에 당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하인리히 4세가 작센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혼란스러워하는 틈에 성직자 임명권은 교황과 교황청에게만 있다고 일방적인 선언을 한다. 이때 작센 반란 진압에만 몰두하던 하인리히 4세는 난데없이 들려온 해당 통보에도 신경 쓰지 않았으며, 2년 뒤 1075년에 반란을 모두 진압한 뒤 교황의 사전 주장을 일방적으로 묵살한 채 여전히 밀라노의 주교 선출 권리를 행사했다.

결국 이를 빌미 삼아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1076년에 하인리히 4세 황제를 기독교에서 파문시키게 된다.

4. 파문의 의미

사실 중세 유럽에서 교황청으로부터의 파문이라는 건 단순히 황제 한 명을 비종교인으로 만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존재 자체를 교회가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따라서 파문의 진정한 의미는 신성 로마 제국이 가진 가장 큰 대의명분 중 하나였던 '기독교의 수호자'라는 자격을 박탈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물론 이 조치는 우리(교황청)랑 너네(신성 로마 제국)는 이제부터 적이다!라고 대놓고 말하는 거나 다름없는 일종의 선전 포고이기도 했으므로 잘못하면 그대로 교황의 목이 달아날 수도 있었다.[9] 실제로 신성 로마 제국의 황권은 교황 따위가 감히 침범할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해서 하인리히 4세의 선황이자 친부였던 하인리히 3세본인의 재위 기간에만 교황을 세 번이나 갈아치웠다. 그 외에도 역대 황제 중에서는 교황을 통해 타국을 위협하기도 하는 등, 교황청과 기독교 세력은 사실상 황권에 종속된 상태였다.[10]

문제는 하인리히 3세의 집권 말기에 들어서 이런 상황에 대해 반전을 꾀하는 세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인데, 이 세력의 배경엔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이 속했던 클뤼니 대수도원이 존재했으며, 이들은 속세에 찌들고 종속된 현재의 종교 세력을 다시 독립시켜 그 위상을 드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렇게까지 활동할 수 있었던 건 당시 황제였던 하인리히 3세가 어린 아들을 둔 채 급사한 점과 생전에는 봉건 영주들과의 대립으로 인해 성직 제후들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황제 측에서 이들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기연도 있었다. 결국 이들은 이 기회를 최대한 살리고자 배수의 진을 친 셈인데, 물론 아무리 그래도 제대로 독립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종교 세력 따위로 막 작센을 진압하고 황권을 드높이던 하인리히 4세 황제에게 단독으로 덤비는 건 딱 죽기 좋은 수였다.

5. 파문 선포, 하인리히의 선택

이 사건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황제의 능력이 너무 뛰어난 게 발목을 잡았다. 라고 할 수 있다. 왜냐면 작센 반란을 진압하고 백성들을 위해 통치하던 하인리히 4세는 뛰어난 능력으로 제국 내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누리게 되며 황권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이에 제국의 제후들이 위기감을 느끼면서 파문을 구실로 이제 막 반발하기 시작한 교황 측과 담합하게 된 것이다. 교황 측에서도 제후들을 등에 업은 채, 실질적인 무력을 갖추게 되자 황제가 서임했던(즉 교황을 까기 바빴던) 주교들마저 이에 지레 겁을 먹고 교황과 화해를 시도하는 등 간을 보게 됐다. 물론 제국 각지에서도 제후들이 교황의 파문을 구실로 황제에게 대항하는 동시다발적인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이니 하인리히 4세는 선황처럼 무력으로 교황청을 찍어 누르지 못했다. 애초부터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 황실의 직속 군사력이 강하지 못한 데다가 교황청이 비단 제후들만이 아니라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정복하고 한창 이름을 날리던 노르만족과도 동맹을 맺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교황 측의 반발을 크게 생각하지 않았던 하인리히 4세는 적당히 화해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내부 반란부터 진압하기 위해 교황 측에 사신을 보냈다.

사신을 통해 하인리히 4세는 독일 남부의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만나자고 요청했으나, 교황은 이를 군사적 위협으로 생각하여 거부했고 결국 하인리히 4세는 친히 이탈리아로 내려가야 했다. 문제는 하인리히 4세의 남하를 들은 교황은 황제가 선대 황제처럼 종교 세력을 무력으로 찍어 누를 거라고 생각하여 겁을 먹었고 이때 자신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였던 마틸다 디 카노사 여백작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녀가 기거하던 카노사성으로 피난을 가버린다.

결국 교황을 만나지 못한 하인리히 4세는 이에 화를 내긴커녕 그대로 길을 돌려 1077년 1월 말, 황비와 황자와 함께 카노사성에 당도했고 그 추위에 누추한 옷과 맨발로 성문 앞에 나서서 교황과의 주선을 요청한다. 교황은 처음엔 수상하게 여겨 하인리히 4세의 모략이라 여겨 거절을 통보했으나, 이후 계속 성문에 머물며 무릎 꿇고 기다리던 하인리히 4세의 행동에 마음이 흔들리게 됐고 성직자들과 마틸다 여백작이 찾아와서 변호하자[11] 이내 마음을 돌려 황제가 도착한 후 3일이 지나서야 그를 받아들이고 파문을 취소한다.[12]

이때의 전후 사정을 보면 그레고리오 7세가 하인리히 4세와의 만남을 피한 것은 정치적 행동보다는 상술한 대로 '설마 저래 놓고 내가 나가면 지 아비처럼 날 죽이려는 게 아닐까?'하고 의심하는 동시에 황제와 다시 손을 잡아도 될지 고민하느라 늦어졌을 것이라는 추측이 지배적이다.

6. 또 한 번의 파문, 하지만...

하인리히 4세는 파문이 취소되자마자 바로 제국으로 귀환했으나 몇 달 사이에 제국은 환란에 빠졌고, 잔류했던 교황파 제후들이 슈바벤 공작이었던 루돌프를 대립 국왕으로 추대하면서 그를 황제로 옹립한다는 명분[13]하에 훗날 작센 대반란으로 명명되는 사건을 일으켰다.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은 파문 직후엔 하인리히 4세 황제의 적대 세력이었던 루돌프를 ' 적의 적은 친구'라는 생각으로 편들었으나 파문을 취소하고 하인리히 4세의 세력이 약세인 것 같자, 루돌프의 지지를 철회하고 하인리히 4세를 지지하겠다고 표명했다. 그러나 3년 뒤 하인리히 4세가 내전을 거의 정리하자 교황이 다시 루돌프를 지지한다며 말을 바꾸고는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한다고 또 한 번 선언했다. 하지만 서로 격돌 중이던 양대 세력에선 물론이요, 상황을 지켜보던 중립 세력들까지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꾸는 교황의 태도에 분개하다 못해 이번에는 제후들 대부분이 하인리히 4세에 합류하도록 만들었다. 결국 1081년 바이세 엘스터강 전투에서 반란군에게 황제로 추대된 루돌프가 패사하고 구심점을 잃은 작센 제후들은 제각각 활동하다가 끝내 하인리히 4세에게 각개 격파 되어 작센 대반란은 종결되었다.

7. 하인리히 4세의 복수

내란을 종식시킨 뒤 황권을 복구한 하인리히 4세는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게 붙었던 배신자들을 모두 숙청함과 동시에 측근들을 키워주는 등 황권을 더욱 튼튼하게 굳힌다.

그러던 때, 남부 이탈리아의 노르만족 수장이었던 로베르 기스카르 동로마 제국을 침략하자, 동로마 제국의 황제 알렉시우스 1세가 하인리히 4세에게 막대한 뇌물을 바치면서 군사 협정을 요청해 왔다. 마침 노르만족은 교황 세력의 주요 군사 기반 중 하나였으므로, 그들의 기세를 꺾을 수만 있다면 동로마 제국을 돕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판단했기에 하인리히 4세는 기꺼이 협정을 받아들인다.

이후 노르만족을 발칸반도까지 격퇴시킨 후 곧장 브릭센 교회 회의를 소집하여 이전과는 정반대로 하인리히 4세가 카노사에서 당했던 굴욕을 갚아줄 생각으로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폐위시키고 해임되었던 라벤나의 대주교 귀베르토를 클레멘스 3세로 선포하고 이탈리아로 쳐들어갔다. 4년여에 걸친 전쟁 끝에 로마가 함락되고 그레고리오 7세는 카스텔 산탄젤로( 산탄젤로성)에 유폐되었으며 하인리히 4세는 클레멘스 3세가 집전하는 대관식을 통해 정식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위에 올랐다. 이후 알렉시우스 1세와의 협정을 준수하기 위해 하인리히 4세는 남부 이탈리아의 노르만족 영토를 공격하였으나, 그의 침략에 대한 보고와 함께 그레고리오 7세 교황으로부터 다급히 지원 요청을 받은 로베르 기스카르가 동로마 제국과의 전선에서 이탈리아로 급히 복귀하게 되면서 하인리히 4세는 로마에서 철수하였고, 결국 그레고리오 7세는 구출되었다.

8. 그 후

그러나 그레고리오 7세를 구출한 로베르 기스카르는 교황이 로마로 돌아가면 그대로 하인리히 4세가 노릴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그를 강제로 자신의 근거지인 살레르노로 거처를 옮기게 하고 감금시켜 버린다. 결국 그레고리오 7세는 1년 뒤 먼 타지에서 유언[14]을 남기고 사망하게 된다. 교황을 사실상 납치 감금 했던 로베르 기스카르는 1085년 제국과의 전장으로 복귀했다가 전염병으로 죽었다. 그리고 직계도 불행하여 보에몽은 동생에 밀려 안티오키아의 공작이 되었다가 로마에 패배하려 몰락, 로베르의 후손은 1127년 단절되어 로베르의 조카인 시칠리아 백작 루지에로 2세가 시칠리아 왕국을 건국한다.

황제로서 실권을 회복한 하인리히 4세는 반란으로 황폐화된 제국을 재건하는 한편 귀족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시민과 하급 기사들의 권리 신장을 위해 노력하여 하급 기사들과 백성들로부터 지지와 존경을 받는 황제가 되었다. 하지만 카노사의 굴욕 사건 때 교황을 받아들였던 여백작 마틸다와 교황 우르반 2세는 은밀히 하인리히 4세의 반대파를 규합한 후 롬바르디아를 다스리고 있던 하인리히 4세의 장남 콘라트를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했다. 성격이 급하고 변덕스러운 아버지가 자신에게 제위를 물려줄지 확신을 못 하고 있었던 콘라트는 마틸다와 교황의 유혹에 넘어가 1097년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콘라트의 반란은 하인리히 4세가 진압하면서 실패로 끝났다. 하인리히 4세는 1098년 콘라트를 차기 황제인 독일 왕에서 폐하고, 차남 하인리히 5세를 새로 독일 왕위에 올렸다. 그러나 1104년에 하인리히 5세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하인리히 4세는 폐위되고 감금당한다.

하인리히 4세는 곧 탈출하여 여론의 지지를 바탕으로 휘하의 귀족들과 백성들을 결집시켜 다시 세력을 회복했다. 하인리히 4세는 기세를 몰아 제위 탈환을 목전에 두었으나 1106년 병으로 몸져 누워 몇 주 후 사망했다. 폐위될 뻔했던 하인리히 5세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제위를 지킬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불효를 저질러 황제가 된 터라 귀족들과 백성들의 신망을 잃어 황권은 취약할 수밖에 없었고, 그레고리오 7세의 후임 교황들은 다시 교황권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결국 하인리히 5세는 1122년 교황 갈리스토 2세가 내민 보름스 협약에 서명하면서 1075년 시작된 서임권 투쟁에서 사실상 패배를 선언하고 말았다.그리고 하인리히 5세도 3년 후 요절하며, 잘리어 왕조가 단절된다.

훗날 종교 개혁이 일어난 시기에 하인리히 4세 프로테스탄트 측으로부터 "독일의 수호자이자 난폭하고 억압적인 가톨릭에 맞서 싸운 위대한 황제"로 칭송받았다. 독일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다시 살아나 독일을 구원할 거라는 전설의 주인공이 될 정도로 말이다. 그 후에도 독일 및 북유럽에서는 '굴복하지 않고 맞서 나간다'는 의지를 표명하거나 '하기 싫어도 억지로 굴복, 복종함' 따위를 말할 때면 이 사건을 언급하게 되었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우리의 영혼과 몸, 둘 다 카노사에 가지 않을 것이다"라 하였고, 아돌프 히틀러도 감옥에서 풀려난 뒤에 이 표현을 썼다.

9. 의의

하인리히 4세와 그레고리오 7세 간의 충돌은 그레고리오 7세의 압도적 패배로 끝났지만, 중앙 집권을 싫어하는 봉신들의 본능이 사라진 건 아니었기에, 결국 후대까지 분쟁이 이어진 끝에 주교 서임권이 교황 측에 반환되면서 '전투에선 졌지만 전쟁에선 이긴' 상황이 되었다.

정치적 퍼포먼스이긴 했지만 황제를 무릎 꿇리고 추운 밖에서 기다리게 한 것이나, 교황의 파문에 호응하여 반란이 발호한 것 등, 교황 세력 자체로는 힘에 부쳐도, 교황을 지지하는 봉신 세력까지 동원하면 신성 로마 제국의 황권도 교황권 상대로 간단히 일을 해결할 수 없을 만큼 당대의 영주들이 강성함을 드러낸 사건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론 교황 측의 승리로 카노사의 굴욕과 그와 관련된 이후 사건들이 정리되었고, 동로마 제국이 교황청에 압력을 넣도록 해주던 최후의 거점 바리도 박살 나면서 교황청은 위협 없이 떵떵거리며 살 수 있게 되었지만, 이렇게 정점을 찍은 교황권은 세속 권력이 왕권을 중심으로 결집되면서 천천히 쇠퇴하게 된다. 이후, 종교 개혁의 열풍을 거치면서도 역개혁을 통해 어느 정도는 견뎌 내었으나, 변화하는 유럽 속에서 교황청은 이전과 같은 위상을 유지할 수 없었고, 사코 디 로마 같은 치욕까지 겪게 된다.

하지만 사코 디 로마 같은 사건을 겪으면서도 교황청이 서유럽에 가지는 권위는 여전히 대단한 것이었으며, 가톨릭의 권위가 세속 권위에 완벽히 굴복하게 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주교 서임권이고 뭐고 아무 의미가 없어지게 만든 앙시앵 레짐의 폐단[15]과 더해 교황청이 의존할 세속 권력 자체가 증발해 버린 후였다. 물론 이 모든 세속주의 vs. 종교주의 대결에서 교황청에 가장 뼈아픈 치명타를 날린 것은 바로 세속의 문민 사교 조직, 곧 프리메이슨과 같은 단체들이었다.[16]

10. 여담

11.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1] St. Hugh the Great. 1024~1109 [2] 이탈리아어 표기는 "Matilde di Canossa, Margravio di Toscana"이며 생몰은 1046~1115 [3] 국왕이 아빠스(대수도원장)에게 부탁하다. 또한 마틸다에게 탄원하다. [4] 오히려 이 시기에 신성 로마 제국은 교황청 편이었다. [5] 이는 근현대의 문명화된 권력 구조와, 전근대적인 주먹구구식 (Ad Hoc) 권력 구조의 본질적인 차이이기도 하다. 그만큼 숙고 집회의 존재는 중요하다. [6] 고통스러운 시기에 면죄부 장사나 해 처먹는 교회에 대한 서유럽 사람들의 배신감이 얼마나 막대했는지, 일련의 사태를 계기로 서유럽의 미술이 완전히 뒤집어 엎어졌을 정도이다. 그 충격은 가히 아우구스투스의 신격화에 맞먹는 수준이다. [7] 두 사건 모두 교황청을 위협한 세속 권력이 둘 다 프랑스 세력이다.(...) [8] 정확히 말하자면 주교들은 공식적으로 아이를 낳게 하는 성행위가 금지되어 있었으니 봉지를 계승할 자식이 없었다. [9] 유명한 사례를 꼽자면 후대의 교황이 나폴레옹을 파문시켰다가 신변에 위협을 받기도 했다. 결국은 파문이 효과가 없었고 나폴레옹도 교황을 가두는 선에서 그쳐 나폴레옹이 몰락할 때까지 건재했지만 말이다. [10] 이는 교황청이 막강한 군사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파문을 내려도 해당 국가의 국력이 강하면 효과가 있을 리가 없다. [11] 이 사람 문서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 사람은 하인리히 4세의 아버지인 하인리히 3세에게 가문을 말살당하고 홀로 살아남아 황권을 혐오하게 되었고, 임명권 분쟁에서 교황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로 활약했다. 따라서 카노사의 굴욕 사건은 마틸다의 개인적인 복수이기도 했고, 그런 그가 하인리히 4세를 변호했다는 것은 그녀로서는 하기 힘든 용서를 한 것이었다. 하인리히 4세 옆에서 같이 추위를 견디고 있던 어린 황자를 보며 동정심이 생겼다는 야사가 있다. [12] 이때 하인리히 4세는 그레고리오 7세 앞에 십자가 모양으로 누워 복종의 의미를 표현했다 [13]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 후계자 시절에 로마인들의 왕부터 되라는 의미에서 독일 왕에 먼저 봉해진 다음에 교황에게 대관식을 받고 황제에 오르게 된다 [14] "나는 정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했다. 그래서 이렇게 추방당해 죽게 되었다. (Ho amato la giustizia e ho odiato l'iniquità. perciò muoio in esilio.)" [15] 주교직을 고위 귀족 가문이 조세 회피 수단으로 악용하며 돌려 먹으면서, 교황과 세속 군주의 주교 서임권 분쟁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 되어버린다. 심지어 이 완벽한 탈세 수단은 교황권을 보태줄 세속 세력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상태에 들어서게 만들었다. [16] 이런 이유로 가톨릭은 프리메이슨이 그냥 망한 지금까지도 프리메이슨 및 유사 단체 가입을 자동 파문 사유로 정해두고 있다. [17] 그의 형제가 교황 스테파노 9세 # [18] 당연히 하인리히 4세의 이탈리아 국왕으로서의 칭호에서 따온 제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