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인(백야극광)

제 이야기를 듣고 싶으십니까? 좋습니다... 그렇게까지 원하신다면 어쩔 수 없군요.
그렇다고 해도 시작은 정말 평범합니다. 뻔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죠. 저는 백야성 다운타운에서 태어났습니다. 주변의 다른 아이들에 비하면 집안 사정은 좋은 편이었지만, 제 부모님께선 그런 생활에 만족하지 않으셨습니다. 두 분은 서로에게 성실하지 않았고, 자주 다투곤 하셨죠. 그렇지만 두 분이 다투실 때마다 도마 위에 오르는 주제는 대부분 저였습니다. 두 분은 언제나 제가 이 집안의 유일한 연결고리이고, 제게 많은 기대를 걸고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두 분이 다투실 때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겸사겸사 꽃에 물을 주는 일이 고작이었습니다.
저는 껍데기뿐인 가정에서 무기력하게 15년간 생활했습니다. 그러다 아버지께서 뜻밖의 사고를 당하시는 바람에 예상보다 일찍 일을 시작하게 되었죠... 그보단 그 집을 떠났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하겠군요.
결국 전 그런 싱거운 이유로 군에 입대하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저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일] 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훌륭한 기사가 되고자 정말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렇지만 점차 상황이 이상해지기 시작하더군요. 그 당시 제 상관은 저를 상당히 좋게 봐주셨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제게 [좋은 업무] 를 할당해 주셨죠. 그런데 그 업무라는 건 귀족 여성분들과 관련된 일들뿐이었던 겁니다. 다과회의 경비 업무나 외출 시의 경호 업무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자신의 저택에 와서 일해 달라는 요청도 있었습니다... 전부 다 제가 원하지 않는 일들이었죠. 저는 그때까지 제 상관을 바른 분이라 여겼습니다만, 그분께선 제게 귀족들의 그런 회의를 그냥 받아들이라고 솔직히 말씀해 주시더군요.
저는 그제야 집에서도, 군대에서도 어떤 상황들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거절하는 게 전부라는 것도요. 제가 [고마운 줄도 모르는 짓] 을 몇 번 반복하자, 저는 순식간에 외근 부서로 이동돼 상단의 호위 업무를 맡게 됐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망신스러운 일이라고 여길지 몰라도, 제겐 바라 마지않던 일이었죠.

무미건조하고 출세와 거리가 먼 업무입니다만, 그만큼 단순하고 직관적인 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제겐 그 정도면 충분했죠.
그 무렵 저는 고작 18살이었지만 인생의 모든 가능성을 포기해 버렸던 겁니다. 참 우습지 않습니까? 15년 동안 집에서 숨이 탁 막히는 생활만 해 오던, 우물 안 개구리인 제겐 당연한 일이었지만요. 렉커를 만나기 전까지, 저는 쭉 그랬습니다.
렉커와 만나게 된 건 규모가 꽤 큰 호위 임무를 맡게 됐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상단 쪽에서 일손이 부족했던 모양인지 백야성에서도 용병을 몇 명 고용했었죠. 그리고 용병들의 싸움닭 같은 존재와 호위대의 별종은 자연스럽게 같이 한 조로 묶이게 되었습니다. 저희 둘과 같이 일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렉커는 협동심도 부족하고 생각 없이 일단 저지르는 스타일이었습니다. 저는 보통 잘 맞지 않는 동료를 만나면, 그냥 저 혼자 임무를 완수해 버리는 편이었습니다만, 렉커가 계속... 저를 도발하더군요. 제가 자기를 무시해서 무뚝뚝하게 대한다고 느낀 모양이었습니다. 그 오해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 저는 하는 수 없이 렉커를 진지하게 대하고, 함께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 임무는 결국 엉망진창으로 마무리됐고, 렉커는 직업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그 일은 제가 다시 한번 제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됐습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결국엔 성격이 완전히 다른 렉커를 만나 함께 일까지 했으니, 앞으로 제 삶에 일어날 수많은 일들도 실은 노력에 따라 바뀔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저는 심판관이 되겠다는 마음을 먹게 됐습니다.
물론, 일개 평민이 심판관이 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 역시도 한 귀족분의 도움이 있었기에 제 뜻을 이룰 수 있었던 거니까요. 예전의 저였다면 그렇게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원하던 결과를 이루는 것을 거부했을 겁니다. 그렇지만 지금의 저는 기계처럼 타인을 배척하는 것보다, 넓은 시야로 사물을 보는 법을 배워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덕분에 심판관으로서 업무에 힘쓰고, 그러다 벽에 부딪혀 비주류 인물이 되었다가, 티나 양과 만나 업무 파트너가 돼고... 당신과 만날 수 있었던 거겠죠.
모든 것이 언제나 순조롭진 않았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노력하면 언젠가는 제 손으로 직접 제 마음속의 [정의] 를 실현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