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同居政府 / Cohabitation이원집정부제 하에서 대통령과 총리가 각자 다른 정당 또는 정파에서 배출되는 경우, 넓은 뜻으로는 대통령제 국가에서 대통령과 부통령이 각자 다른 정당 또는 정파에서 배출되는 경우도 포함한다.
여야 두 당이 주로 좌파와 우파로 나눠질 때가 많다보니 '좌우 동거정부'라고도 하며, 대표적인 이원집정부제 국가가 프랑스이기에 프랑스어를 그대로 음차하여 '코아비타시옹'이라고도 한다.
한국의 여소야대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은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의 시기가 다르기 때문에 발생한다. 아무래도 대통령 임기 중후반에 벌어지는 선거는 야당이 유리하기 마련이다.[1][2]
이원집정부제 하에서 대통령과 총리가 동거정부를 구성하게 되면 장단점이 있겠지만, 대통령 입장에서는 그다지 좋을 것이 없다. 총리가 다른 당인 소위 여소야대의 정국이 된다는 의미이므로 대통령의 실권에 제약이 붙기 때문이다. 프랑스나 핀란드 같은 민주주의 선진국의 경우, 조금씩 삐걱대도 그럭저럭 굴러가지만, 그렇지 못한 국가의 경우, 대통령과 총리 간의 대립 사태로 큰 갈등이 발생하기도 한다. 기타 자세한 내용은 이원집정부제 항목도 참조해보면 좋다.
한국의 여소야대와 같이 대통령제에서 대통령의 소속 정당과 의회의 다수당이 다른 경우는 동거정부라고 하지 않고 ' 분점정부'(divided government)라고 한다.
2. 국가별 양상
2.1. 프랑스
프랑스의 제1기 동거정부. 당시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왼쪽)과 자크 시라크 총리(오른쪽). |
프랑스의 제2기 동거정부. 당시 에두아르 발라뒤르 총리(왼쪽)과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오른쪽). |
프랑스의 제3기 동거정부. 당시 자크 시라크 대통령(왼쪽)과 리오넬 조스팽 총리(오른쪽). |
- 프랑스에서 동거정부가 나타난 시기.
1986년 총선 이후 ~ 1988년 총선 이전 | |
대통령 | 총리 |
프랑수아 미테랑 |
자크 시라크 |
1993년 총선 이후 ~ 1995년 대선 이전 | |
대통령 | 총리 |
프랑수아 미테랑 |
에두아르 발라뒤르 |
1997년 총선 이후 ~ 2002년 총선 이전 | |
대통령 | 총리 |
자크 시라크 |
리오넬 조스팽 |
프랑스의 동거정부는 대통령과 총리 중에서 총리가 사실상의 정치적 실권을 가지는 것에 가깝다. 대통령과 총리의 권한에 대해서 프랑스 헌법의 명확한 규정은 없지만, 동거정부 자체가 국민의회 선거에서 집권 여당이 패배하고 야당이 다수당이 된 상황으로, 대의민주주의의 원리에 따라 다수당 소속 총리에게 사실상의 실권을 넘긴다는 상징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프랑스의 동거정부는 대통령이 외교, 국방에 대한 실권을 갖고, 나머지 권력은 총리가 다 가진다는 식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최초이자 두 차례의 동거정부를 겪었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시절의 선례 때문으로, 이에 대한 법적 규정이 있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의 동거정부는 1986년에 집권 여당이었던 사회당과 좌파 연합이 국민의회(하원) 과반에 실패하고 우파가 국민의회를 장악하면서 처음 발생하였다.[3] 미테랑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사회당 총리를 선출해서 국정 운영을 하고자 했으나, 국민의회가 내각불신임을 할 수 있었기에 결코 쉽지 않은 문제였다.[4]
결국 이런 현실적인 문제로 미테랑은 우파 인사인 자크 시라크를 총리로 임명하고자 했는데, 시라크는 아예 내각 운영권을 내놓으라며 미테랑을 압박했다. 이때, 미테랑은 흔쾌히 내치 권한을 주겠다며 양보했지만, 대통령으로서 가장 중요한 권한인 국방과 외교 분야(외치)만큼은 자기 소관이라며[5] 선을 긋고 마무리 지었다.
이후 1988년 대선에서 미테랑이 재선에 성공하면서, 국민의회를 해산하고 조기 총선을 실시해서 다시 모든 권력을 되찾았다.[6] 하지만 1993년 총선에서 기록적인 대패를 겪고 완전하 레임덕 상태에 빠져 버렸고,[7] 우파 인사인 에두아르 발라뒤르를 총리로 임명하며 동거정부가 다시 한 번 구성되었다.
그리고 미테랑의 뒤를 이은 시라크 대통령은 임기 초반, 지지율이 급속하게 떨어지자 의회 해산을 통해서 국민의회를 다시 구성한 후, 2002년까지 안정적으로 정부를 운영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것이 도리어 악수가 되어 1997년 총선에서 좌파가 국민의회의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고, 이번에는 반대로 사회당의 리오넬 조스팽이 총리가 되며 시라크가 무려 5년 동안이나 식물 대통령이 되어 버렸다.
이 때문에 대통령 임기와 국회의원 임기가 달라서 동거정부가 출현할 가능성이 높다는 비판이 사방에서 제기되자, 각자 쓴 맛을 본 좌파와 우파는 2000년에 7년이던 대통령 임기를 5년으로 축소해서 국회의원 임기와 비슷하게 맞추는 데에 합의를 보았다. 이러면 대세에 따라서 대선과 총선 모두 한 정파가 동시에 승리할 가능성이 높고, 대통령과 총리도 같은 정당에서 배출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실제로 2002년부터는 대선과 총선이 두 달 간격으로 연달아 치러지면서 대세론에 따라서 대선에서 승리한 집권 여당이 총선에서도 승리하며 동거정부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2022년 대선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약 58%의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지만, 대선 직후에 치러진 총선에서 여당이 577석 중 247석 밖에 건지지 못해 여소야대가 되었다. 그러나 야당 쪽은 범좌파 신민중생태사회연합( 뉘프)와 극우 국민연합, 중도우파 공화당이 세력을 나누고 있고, 서로 간의 입장 차이가 너무 커서 동거정부가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국민의회가 구성되자마자 뉘프에서 마크롱의 정당인 르네상스에서 구성한 엘리자베트 보른 총리 내각에 불신임안을 발의했지만 국민연합과 공화당이 반대하여 부결됐다.
2024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참패한 마크롱이 국면 전환을 위해 27년 만에 의회 해산을 명령하면서 동거정부의 재출현 가능성이 제기됐다. 1차 투표 결과, 극우 정당 국민연합이 단독 과반을 노려 볼 정도로 높은 지지를 받아 총리가 국민연합 소속이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하지만 결선 투표에서 국민연합이 범좌파 연합 신인민전선과 여당 연합 앙상블에 밀려 과반은커녕 원내 제3당에 그치면서 국민연합과 르네상스 간 동거정부 탄생은 저지되었다.
이후, 원내 제1당이 된 신인민전선과 여당 간의 동거정부 이야기가 나왔으나, 마크롱이 장고 끝에 공화당 소속의 미셸 바르니에를 총리로 임명하면서 사실상 네 번째 동거정부로 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현지 언론에서는 바르니에 내각을 동거정부로 보기는 힘들다는 입장이 대부분인데, 바르니에가 마크롱에 대해 비판적이기는 했지만 공화당은 신인민전선이나 국민연합처럼 완전히 대립관계까지는 아니고 마크롱이 내치의 권한을 아예 넘긴 것도 아니며, 무엇보다 의회 과반 세력이 총리를 가져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공화당의 지지를 받을 수 있고 국민연합도 수긍할 수 있는 정도의 인사를 한 것이다.[8]
2.2. 루마니아
프랑스와 같은 이원집정부제 국가인 루마니아는 2010년대부터 거의 모든 정부가 동거정부로, 동거정부 체제가 장기화되다 못해 아예 일반화된 국가가 되어 버렸다.2.3. 폴란드
現 폴란드의 동거정부.(2023년 ~ ) 왼쪽부터 現 안제이 두다 대통령과 도날드 투스크 총리. |
역시나 이원집정부제 국가인 폴란드의 경우, 폴란드 제3공화국 수립 이후 법과 정의의 단독 집권 시기(2015 ~ 2023)를 제외하고는 모조리 동거정부였다. 2024년 현재도 대통령은 법과 정의 소속의 안제이 두다, 총리는 시민 연단 소속의 도날트 투스크로 동거정부이다.
3. 대한민국에서
대한민국의 동거정부.(1956년 ~ 1960년) 왼쪽부터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장면 부통령. |
한국에서도 한 번 동거정부가 구성된 적이 있다. 1956년 5월 15일에 열린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의 이승만이 대통령에, 민주당의 장면이 부통령에 선출된 것이다. 당시 선거 제도는 러닝메이트 제도를 채택하지 않고 정·부통령을 각각 따로 선출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는 이런 선거 결과에 격분한 이승만 정부와 자유당에 의해 3.15 부정선거가 발생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사실 대통령은 이승만의 당선이 확실했다. 자유당과 경쟁하던 정당들의 경우, 진보당은 진보당 사건으로 조봉암이 사형당하며 당이 해산되었고, 민주당은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이 선거 기간 도중 사망하여 후보 자리가 공석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민주당의 부통령 후보 장면이었는데, 당시 헌법으로는 대통령 유고시 부통령이 직위를 승계하는 조항이 존재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80세가 넘는 고령인지라 자유당 입장에서는 부통령을 확실하게 당선시켜야 했다. 하지만 이미 1956년 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의 이기붕이 민주당의 장면에게 패배했다 보니 기어코 부정선거를 거하게 벌이고 만 것이다.
제2공화국 시기의 국가원수와 정부수반.(1960년 ~ 1961년) 왼쪽부터 당시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국무총리. |
의원내각제였던 제2공화국 시기에도 사실상의 동거정부가 이루어졌다. 1960년 7월 29일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이 압승을 거두며 명목상으로는 대통령과 국무총리 모두 민주당 소속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이미 이전의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대통령에 민주당 구파의 윤보선이 당선되었다. 뒤이어 총리로 역시 민주당 구파의 김도연이 지명을 받았으나, 민주당 신파의 반대표로 인준이 거부되었다. 마지 못해 윤보선은 민주당 신파의 장면을 총리 후보자로 지명하고 2차 투표에서 장면이 총리로 선출된다.
구파와 신파는 엄연히 모두 민주당 소속이었지만, 이들은 정치적 기반도, 출신 성분도 완전히 달랐다.[9] 예를 들어 장면의 경우는 흥사단 계열의 가톨릭 교육자 출신이었지만, 윤보선은 구한말 유력가 해평 윤씨 집안 출신의 귀족적 엘리트였다. 당시 대통령은 상징적 국가원수이자 무소속이어야 했지만, 윤보선은 그런 상태로 있을 생각이 없었기에 장면 내각은 구파와 신파 간의 다툼으로 각료가 끊임없이 바뀌었다.
국민의 정부 시기의 DJP연합.(1998년 ~ 2001년) 왼쪽부터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와 김대중 대통령. |
국민의 정부 시기의 DJP연합도 일종의 동거정부라고 바라보는 시각이 있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결성한 DJP연합의 주요 내용이 행정부의 2인자인 국무총리직을 당시 자유민주연합의 총재 김종필이 맡으며, 이외의 경제 부처 장관직 역시 자유민주연합에게 넘기는 것이었다.
당시 DJP연합을 연립정부나 공동정부라는 표현으로도 부르지만, 어찌됐든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서로 다른 당 소속인 체제로 3년 정도 지속되었기 때문에 동거정부로 볼 여지가 충분하다.
2017년 5월,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 전임 박근혜 정부의 각료들이 그대로 유임되자[10], 일부 언론에서는 동거정부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러나 유시민은 이런 표현에 대해 "이는 문재인 정부 조각 때까지 인수인계 차원에서 전임 정부의 장관들이 남아있는 것이지, 동거정부의 개념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4. 관련 문서
[1]
미국에서도
중간선거는 여당의 무덤이고, 한국에서도 대통령 집권 3년차 이후에 벌어지는
지방선거나
총선은 대부분 여당이 패배하였다. 예외가
제21대 국회의원 선거로
문재인 대통령 집권 4년차임에도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압승을 거뒀다.
[2]
이 때문에 한국에서도 2007년
노무현 대통령이 '
원포인트 개헌'을 제안하기도 했다.
[3]
샤를 드골의 대통령 재임기부터
1970년대 우파 집권 시기까지는
프랑스 공산당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지방선거에서는 좌파가 승리했지만, 정작 총선에서는 우파가 다수를 차지했기 때문에 동거정부가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좌파 연합의
프랑수아 미테랑이 집권하고 나서부터는
1986년 ~
1988년,
1993 ~
1995년 두 차례에 걸쳐 동거정부가 형성되었다.
[4]
보통 대통령제 국가에서는 내각불신임안이 없다. 혹여 대통령이 있는 국가라도, 총리가 실권자인 경우에나 내각불신임안이 존재한다. 대표적인 예가
독일이다.
[5]
국방부와 외교부장관 임명권, 외국 대사와 국군 장성 임명권, 비상대권과 핵미사일 발사권 등.
[6]
이때도 사회당은 단독 과반에 실패했지만, 여러 좌파 정당들의 의석 수를 합해서 총리 선출에는 성공했다.
[7]
사회당은 전체 577석 중에서 53석을 건졌다. 집권 여당이 전체 의석수의 10%도 못 건졌던 것이다.
[8]
마크롱 대통령 재임기의 초대 총리인
에두아르 필리프도 공화당 소속이었으나, 얼마 안 있어 탈당했기 때문에 동거정부로 보지 않는다.
[9]
구파는 다툼 끝에
신민당을 만들고,
5.16 군사정변 이후에도 구파는
민정당을, 신파는
재건민주당을 창당하며 갈라섰다.
[10]
전임 대통령인
박근혜가 탄핵으로 임기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물러나면서 대선이
궐위에 의한 선거로 치러졌기 때문이다. 대신
국정기획자문위원회라는 이름의 인수위를 대체할 조직을 구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