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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9 23:30:15

에두아르 발라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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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제109대 총리
에두아르 발라뒤르
Édouard Balladur
파일:edouardballadur.jpg
출생 1929년 5월 2일 ([age(1929-05-02)]세)
튀르키예 이즈미르
학력 엑스마르세유 대학
파리 정치대학
국립행정학교
정당

직업 정치인
배우자 마리조제프 들라쿠르
약력 대통령비서실 사무차장 (1969 ~ 1973)
대통령 비서실장 (1973 ~ 1974)
재무부 장관 (1986 ~ 1988)
프랑스 총리 (1993 ~ 1995)
1. 개요2. 생애3. 1995년 대통령 선거
3.1. 우파의 내분3.2. 시라크의 반격3.3. 패배
4.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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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정치인으로, 1993년부터 1995년까지 총리를 지냈다. 프랑스 최초의 귀화자 출신 총리이며, 동시에 1995년 대선의 후보 중 하나였다. 2024년 기준 95세로, 현재까지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 산 총리로 기록되어 있다.

2. 생애

1929년 튀르키예 이즈미르 아르메니아 집안에서 5남매 중 하나로 태어났으며, 1930년대 중반 프랑스로 이민을 와 마르세유에 정착했다. 1957년 마리조제프 들라쿠르(Marie-Josèphe Delacour)와 결혼하였으며 슬하에 4명의 아들을 두고 있다.

1964년 당시 총리였던 조르주 퐁피두의 조언자로 등용되었으며, 5년 후 퐁피두가 대통령이 되자 대통령실 부실장이 되었다. 1973년 실장으로 승진했으나, 이듬해 퐁피두가 서거하였고 동시에 여당이었던 공화국민주연합이 대선에서 참패하면서 동시에 그 직에서 물러나야만 했다.[1] 1976년 개편된 공화국연합에 합류했으나, 약한 당세 때문에 별 힘을 쓰지 못하면서 본인도 중앙 정치에서 다소 멀리 있었으나, 1986년 총선에서 승리하면서 그의 입지는 더욱 더 강화되기 시작했다.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 사회당 소속인데, 총리로 공화국연합의 자크 시라크가 선출된 것. 이 때 시라크는 발라뒤르를 재무장관으로 지명했는데, 이 시절 국영기업들을 대거 민영화하는 조치를 취했다가 광역 어그로를 끌었다. 결국 시라크는 1988년 대선에서 패한다.

대선 패배 이후 공화국연합은 내분에 직면했고, 재선에 승리한 미테랑이 조기총선을 치르면서 사회당이 압승하는 바람에, 공화국연합은 침체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미테랑 정권의 세가 약해지기 시작했고, 1993년 시라크가 총리 후보로 다시 나서면서 대거 쇄신에 들어갔고, 덕분에 공화국연합은 총선에서 대거 압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시라크가 일전에 저질렀던 실책들이 다시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있었고, 결국 당 내부의 압력 등으로 시라크는 총리 자리를 기어이 거절한다. 대신 발라뒤르를 추천했는데 덕분에 발라뒤르는 프랑스 최초의 귀화자 출신 총리가 되었다.

3. 1995년 대통령 선거

이후 총리로서 무난히 업무를 수행하면서 금방 대권주자로서의 입지를 키우게 되었고, 당 내부에서도 발라뒤르의 출마를 요구하는 이들이 많았다. 다만 시라크는 발라뒤르에게 총리 자리를 넘겨주는 대신 대선에 출마하지 않을 것을 미리 약속했는데, 이 때문에 본인도 처음에는 출마를 고사했다. 그러나 그간 시라크가 저지른 실책들을 감안하면 행여 시라크가 당선될 경우 무슨 일이 터질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결국 발라뒤르는 출마를 선언한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1위를 기록하면서 차기 대통령으로서 확실했었고, 사회당에서도 상대적으로 약체급인 리오넬 조스팽이 나오면서, 결선에서 접전이 있어도 결국 발라뒤르가 무난하게 될 것이라고 다들 보았다. 이 때만해도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는데...

3.1. 우파의 내분

가만히 넘어갈 시라크가 아니었다.

본디 공화국연합은 드골주의를 바탕으로 한 정당이었고, 시라크 또한 드골의 후계자를 자처한 드골주의자였다. 그러나 발라뒤르는 비드골주의자였고, 실제로도 성향 또한 비드골주의계 중도우파 정당인 프랑스 민주연합에 가까웠다는 평을 들었다.

당초 시라크는 총리를 하지 않는 대신 대통령을 할 마음을 굳힌 상태였고, 미리 약속까지 했었기 때문에 발라뒤르를 크게 문제삼지 않았다. 하지만 발라뒤르가 약속을 깨고 출마를 선언하자, 시라크도 어김 없이 출마를 선언했다. 이에 따라 당초 발라뒤르를 후보로 전략공천하려던 공화국연합은 경선을 치러야만 했는데, 문제는 둘 다 경선을 원치 않았었고, 갈등이 극에 달한 상태에서 만에하나 경선을 치를 경우 분명 한 쪽은 나갈 수 없게 되는데, 문제는 패자가 인정할 리가 없었던 것.

비슷하게 민주연합 또한 1988년 대선에 출마했던 레몽 바르 등을 검토하고 있었으며 그의 재출마 가능성이 높았는데, 문제는 지지율이 꽝이었던지라 당 내에서도 바레를 재출마시키는 것에 회의적이었다. 이어 바레 또한 출마를 유보하는 등 상황이 좋지 않았다. 사실 7년 후에 출마하게 되는 프랑수아 바이루도 있었는데 당시만 해도 바이루는 매우 약체급이었으며, 바이루 또한 출마를 고심했다. 결국 마땅한 후보가 없는 상태에서 발라뒤르를 영입하려고 했으나...

발라뒤르가 잔류를 선언했다. 결국 공화국연합은 단일후보를 선출하지 못하게 되었고, 한 당에서 두 명의 후보가 나가는 상황이 발생했다.

다만 발라뒤르가 그래도 여전히 대세였고 후보를 찾지 못한 민주연합이 발라뒤르 지지를 선언하는 등, 상대적으로 지지세가 넓은 발라뒤르가 그래도 무난히 결선에 진출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3.2. 시라크의 반격

시라크가 대반격에 나섰다.

발라뒤르에게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커다란 딜레마가 있었는데, 그것은 즉슨 드골주의 정당의 비드골주의 후보라는 점이었다. 당의 주류 출신이었던 시라크는 이러한 점을 빌미로 발라뒤르를 집중적으로 공격했으며, 동시에 발라뒤르가 본인과의 약속을 깨고 출마를 강행한 것을 두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보통 강력한 네거티브 공세를 퍼붓는 후보들은 상대적으로 비호감 이미지가 생겨 대선에서 불리한 이미지를 낳기 십상이다. 멀리 갈 것 없이 1987년부터 치러지는 대한민국의 역대 대선에서 2위로 떨어진 사람들은 죄다 네거티브 전략을 취했다. 그런데 여기는 그게 아니었다. 1988년 미국 대선에 출마했던 조지 H. W. 부시처럼, 그 네거티브 공세가 먹혀들기 시작한 것!

발라뒤르는 공화국연합의 후보였음에도 불구하고, 후보를 내지 못해 그를 지지한 민주연합의 후보처럼 활동했다. 실제로 언론에서도 시라크에는 공화국연합 로고를 넣었지만, 발라뒤르는 민주연합으로 분류하는 등 그는 민주연합 후보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해당행위였다. 오히려 이러한 행위가 발라뒤르에게 일종의 철새 이미지를 남겨 버렸고, 본인의 정체성을 똑바로 밝힌 시라크에게 서서히 유리한 구도가 형성되었다.

게다가 그는 태생적 시민이 아니라 귀화자였는데, 물론 귀화한 시기가 아주 어렸을 때였기 때문에 큰 의미는 없었다고 하나, 그것도 인종적으로도 유럽계가 아니었던지라, 프랑스인들로서는 그를 차마 찍기에 뭣해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말하는데 미국 같았으면 애초에 있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2] 프랑스였으니까 허락했던 것. 당연히 장마리 르 펜 등을 비롯한 극우파들에게는 심심하면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발라뒤르는 내가 이길 것이라며 호언장담했으나...

3.3. 패배

막상 출구조사가 나오자 3위로 탈락했다. 이를 접한 발라뒤르는 예상치 못한 결과라고 생각했는지 충격에 빠졌고, 결국 3위 탈락이 확정되자 기자회견을 열고 패배를 인정했다. 이 때 본인은 예상치도 못한 일이었다면서 쩔쩔매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 앞에 있던 지지자들이 대놓고 야유를 보냈을 정도.

그런데 본인이 무슨 선생님인 듯마냥, 자신에게 야유를 보낸 지지자들에게 "조용히 하세요!"라고 경고하는 바람에, 광역 어그로를 끌었다.

4. 이후

어쨌거나 공화국연합은 시라크로 단일대오를 구축했고, 시라크는 조스팽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당연히 시라크는 발라뒤르를 총리로 유임시킬 생각은 안 했으며, 곧바로 자신의 측근인 알랭 쥐페를 지명했다. 이후 시라크가 취임하자 그는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시라크가 1997년에 조기총선을 치렀다가 사회당에 밀려 참패하는 바람에 일종의 자폭수가 되어버렸고, 일부를 중심으로 이를 계기로 추락한 시라크를 대신에 발라뒤르를 차기 주자로 내세우자는 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를 감안한 발라뒤르는 대권주자로서의 이미지를 다시 키우고자 1998년 일드프랑스의 지역의장으로 도전했으나, 이마저도 낙선하고 말았다. 게다가 1999년부로 칠순을 맞이하면서 고령, 건강 문제 등에서 자유로울 수도 없었고, 2002년 대선에는 도전하지도 않고 사실상 정계에서 은퇴했다. 다만 국회에서 일하면서 그나마 정치 활동을 하기는 했지만, 2007년 재출마하지 않기로 결심하면서 정치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2010년대에 들어서는 근황도 알 수 없다. 그나마 시라크는 2012년과 2017년 대선 때 일부 활동도 했었고, 조스팽 또한 2018년 저서 관련 강의에 나온 것으로 근황을 알리기는 했지만, 발라뒤르는 딱히 알린 것이 없다.

2020년 9월 15일,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검사에서 양성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

1993∼1995년 파키스탄과 사우디아라비아에 잠수함과 호위함을 판매하는 과정에서 뒷돈을 챙긴 혐의로 지난 2017년 기소됐다. 최종적으로 무죄가 선고되었다. #


[1] 이때는 비 드골주의 계통의 중도우파 정당인 독립공화당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이 당선되었다. 정작 공화국민주연합은 4위로 광탈했다. [2] 미국이었으면 애초에 태생적 미국 시민, 즉 태어날 때부터 미국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애초에 출마 자격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