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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2 11:05:44

데스티니 가디언즈/지식/한때의 함선강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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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I. 포로3. II. 늑대4. III. 배신자5. IV. 선지자6. V. 악몽7. VI. 전령8. VII. 서기9. VII. 의회10. IX. 어둠의 켈11. X. 전사12. XI. 기술사관13. XII. 여사제14. XIII. 와일드카드15. XIV. 흉터

1. 개요

2. I. 포로

고대의 감옥 깊은 곳에서, 에라미스는 가문이 없는 켈이었다.

외부에서 그녀는 악마의 가문의 선동가이자 황혼의 틈의 대악마, 함선강탈자였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녀에겐 가문이 없었다. 여기에서, 그녀는 혼자였다.

엘릭스니는 나약해져만 갔다. 지도자를 잃은 기갑단이 투기장에 있는 그녀에게 끊임없이 도전했지만, 에라미스는 부서진 전기 창을 제왕의 홀처럼 높이 들고 전장을 지배했다. 그들이 허락한 무기 중 가장 강했던 반쪽짜리 창을 그녀는 십분 활용했다.

에테르에 찌든 경비병들이 투기장에서 아무리 그녀의 죽음을 획책해도, 그녀는 승리했다. 그녀는 그들의 용사를 죽이고, 사체의 가면에서 에테르가 새어 나오는 모습을 지켜봤다. 적의 전투복에서 끈적한 용액이 흘러나오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녀는 멋진 전투의 내음에 애정을 품기 시작했다. 피, 땀, 에테르, 공포.

그녀는 언젠가 부러진 창과 뒤집힌 왕관이 새겨진 깃발이 흩날리는 날이 찾아오는 것을 상상했다.

무정부의 가문. 폭동의 가문. 에라미스의 가문.

무의 가문.

켈이 한 명뿐일 때는 가문도 필요 없다.

오늘, 그녀는 붕괴된 붉은 군단의 백인대장과 맞서 싸워야 했다. 이겨야 했다. 그의 견갑에는 전투의 기억이 셀 수 없이 새겨져 있었고, 그에게는 전쟁 망치가 제공되었다. 그가 수많은 관중의 시선 앞에서 망치를 높이 들어 올리며 거들먹거렸다.

에라미스는 부러진 창을 양손으로 주고받으며 가만히 기다렸다. 마침내 백인대장이 돌아서고, 또렷하게 반짝이는 두 개의 눈이 그녀에게 초점을 맞췄다.

백인대장이 망치를 휘둘렀고, 에라미스는 몸을 굴려 피했다. 그가 다시 무기를 휘둘렀지만, 그녀는 어느새 그의 뒤로 이동하여 시선을 피했다. 등에 앉은 파리를 찾는 생물처럼, 백인대장은 그녀를 쉽게 찾아내지 못했다. 그녀는 불꽃을 튀기는 전기 창의 끝부분을 적의 방어구 틈새에 박아 넣고, 그걸 지렛대 삼아 그의 어깨에 올라섰다.

백인대장은 니이르사이 야수처럼 어리석지만 격렬하게 날뛰었고, 하마터면 그녀도 어깨에서 떨어질 뻔했다. 그녀는 창을 뽑으려 했지만, 그의 거대한 손에 강타당해 잠시 정신을 잃었다. 창은 마지막 순간 뽑혔고, 그녀는 그 꼭대기를 붙잡았다. 전기 에너지가 손바닥을 물어뜯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날 끝을 적의 투구 아래 목에다 박아 넣었다.

그는 비명을 질렀다.

그가 쓰러지기도 전에, 그녀는 풀쩍 뛰어내렸다. 관중은 결코 그녀에게 환호성을 보내는 법이 없었다. 그들은 그저 조용히 수군거리기만 했다.

그 어떤 감옥도 에라미스켈을 붙잡아 둘 수는 없다고, 그들은 말했다. 에라미스켈은 악마보다 더욱 지독한 악마라고 말했다.

에라미스켈은 패배할 줄을 모른다고 했다.

3. II. 늑대

이웃 감방에는 늑대가 있었다.

그녀도 처음에는 그를 무시했다. 그는 너무 탐욕스러웠다. 가끔씩 그를 보면 시체 새처럼 옛 켈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요란한 울음 소리로 시선를 끌고 티격태격 다투던 치욕스러운 드렉들이 떠올랐다.

엘릭스니가 잃은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건 위엄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늑대는 그녀의 호기심을 끄는 데 성공했다. 그는 자기 이름이 프락시스라고 하며, 좋은 생각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 어렸고, 자기의 모든 생각이 최초이자 최고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단 한 번도 켈에게 직접 보고해 본 적이 없을 거라고 짐작했다.

그는 기계에 관해 이야기하는 걸 좋아했다. 기계를 만들고 자기 뜻에 따르게 조작하는 걸 좋아했다. 그는 거대한 기계를 다시 붙잡아 전깃줄로 구속하고 그 힘을 빼앗겠다는 미친 생각을 늘어놓았다. 가울에 관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에라미스는 그가 먼저 이야기하게 한 후 질문했다. 모든 질문은 날카로웠다. 모든 대화가 시험이었다. 그가 단 한 번만 탈락해도 그녀는 흥미를 버릴 생각이었다.

"거대한 기계가 엘릭스니를 위대한 존재로 만들었다."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그것이 떠나며 모든 것이 달라졌지. 우리는 그것이 처음 나타났을 때보다 더 약해졌다. 그런데 왜 다시 그것에 접촉하려 하는 거냐?"

"그 힘을 되찾기 위해서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그들 사이를 가로막은 벽 너머에서 희미하게 들렸다. 하지만 목소리에 담긴 오만함만은 명확하게 느껴졌다.

"약한 기반 위에 어떻게 힘을 쌓는단 말이냐?" 그녀가 물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바늘이었다. 각각이 그를 찔러 속내를 드러내게 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거대한 기계가 엘릭스니를 강하게 한 것이냐? 아니면 우리 안의 힘을 끌어낸 것이냐?" 그녀가 물었다.

이번에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뒤로 젖혀 감방의 검은 천장을 바라봤다. "의존은 가장 큰 약점이다. 그걸 잊지 마라. 넌 어린 아이처럼 장난감 구슬을 갖고 놀고 있을 뿐이다."

그가 너무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에라미스는 괜히 시간 낭비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때, 그가 말했다. "저는 새로운 구슬을 만들겠습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웃었다.

4. III. 배신자

탈옥의 날, 에라미스는 복부의 상처를 치료하고 있었다.

치명상은 아니었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투기장 경기에서는 승리하긴 했지만, 오만한 대장은 마지막 순간에 검을 뻗어 그녀의 옆구리를 찔렸다. 검은 악마 로브를 꿰뚫고 리이스의 물꽃을 닮은 핏자국을 남겼다. 아스리스는 물꽃을 좋아했다.

바릭스가 그녀의 감방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졸고 있었다.

"에라미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부상의 고통을 무릅쓰고 벌떡 일어섰다. 너무 빨리 일어섰는지 현기증이 느껴졌지만, 그녀는 즉시 감방문 쪽으로 다가섰다.

"배신자." 그녀는 인사하듯 말했다.

바릭스는 몸을 움츠렸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시선을 떨구었다. 두 사람 사이를 문이 가로막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의 공포를 감지할 수 있었다. 그 공포가 그녀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곧 변화가 시작될 거야." 그는 엘릭스니어로 조용히 말한 후 어깨 너머를 돌아봤다. 그의 눈이 앞뒤로 바삐 오갔다. 두려움에 가득 차서 의심하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서툰 수호자의 공용어로 바꿔 말했다.

"바릭스가 일으킬 변화다. 바릭스가 이끌 변화다. 하지만 바릭스도 지도자가 필요하다…"

에라미스는 웃었다. "나보고 네 포로인 켈이 되라는 건가?"

"아니." 바릭스는 몸을 움찔했다. "바릭스가 바라는 건—"

"네 바람 같은 건 상관없다, '충직한 바릭스'." 그녀는 말했다. 엘릭스니도 감옥의 철창 그림자 안에서는 달라졌다. 쓰러지고, 작아지기도 했다. 하지만 에라미스는 성장했다. 바릭스에게, 지금 이렇게 강철을 사이에 두고 있어도 바릭스 쪽이 더 작다는 것을 알려줘야 했다. 그는 여전히 반달인 척하는 드렉이었다. "이 세상에 정의가 남아 있다면, 언젠가 네 남은 팔 두 개를 잘라내 버리고 널 죽게 내버려 둘 거다."

바릭스의 눈에서 무언가 굳어져 갔다. 긴장된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채웠다. 한참이 지나고, 그가 에테르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바릭스가 도우려 하지 않았다고는 말하지 마라."

그는 떠났고, 에라미스는 다시 감방 바닥에 앉았다.

그날 오후, 경보가 울렸다. 감시관은 바릭스의 음성이 담긴 메시지를 투영했다. 그녀의 감방문이 예고 없이 열리고, 광기에 찬 엘릭스니와 기갑단이 자유를 향한 타는 목마름으로 감옥 안을 질주했다.

5. IV. 선지자

자유를 찾은 처음 몇 달 동안, 에라미스는 버림받은 자 미스라악스를 저주했다.

그는 켈이 되려 하는 자, 붙잡힌 배신자, 거짓 여왕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는 네팔 드렉으로서, 엘릭스니의 적들 사이에서 거짓 미소를 짓고 있었다.

게다가 가장 끔찍하게 수치스러운 건, 그가 에라미스를 꺾은 적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SIVA 무기를 획득하는 데 실패했다. 수호자들에게 수치를 안기는 데 실패했다. 악마의 가문의 불길을 다시 피워올리는 데 실패했다. 모든 실패가 그녀를 따라다녔다.

지금 그녀는 훔친 범선 함교에 똑바로 앉아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래전 지나온 먼 곳을,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라미스의 의회에서 가장 어린 아트락스가 함교 건너편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트락스는 둘 사이의 간격을 가로질러 다가왔다.

"켈이시여." 그녀가 어린아이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에라미스는 필요한 것보다 조금 더 오래 침묵했다. 그렇게 한참 뜸을 들이고 입을 열었다. "너는 너무 어려서 예전의 가문을 기억하지는 못하겠지. 이전의 악마들이 어땠었는지를."

아트락스는 경의를 표하듯 고개를 깊이 숙였다.

"이번의 실패로 네가 상처 입을 필요는 없다." 에라미스는 씁쓸한 마음을 곱씹었다.

아트락스는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길이 에라미스의 얼굴을 떠돌며 무언가를 찾았다. "저는 너무 어려서 기억할 수 없습니다." 그녀도 동의했다. "하지만 제 눈은 청명합니다. 앞으로 악마들의 모습을 명확히 볼 수 있습니다."

에라미스는 입을 열고 아트락스에게 네 주제를 알라고 말하려다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무언가 봉인이 풀렸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똑바로 섰다. 그리고 두 번째 팔들을 뻗었다.

"아니." 그녀는 말했다. 리이스의 소나기가 지나간 것처럼 머릿속이 깨끗해졌다. "악마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녀는 함교 밖으로 나섰다. 걸음걸음 뚜렷한 목적이 느껴지고, 뱃속에서 다시 불길이 타올랐다. "악마들은 죽었다."

무정부의 가문. 폐허의 가문.

에라미스의 가문.

"우리는 새로운 존재가 되어야 한다."

6. V. 악몽

악마의 가문과의 낡은 유대를 끊자, 에라미스에게 어둠에 감싸인 꿈들이 찾아왔다. 그중 하나에서, 그녀는 황혼의 틈을 다시 체험했다.

그녀는 앞으로 도약하여 수호자 병사의 배에 검을 찔러 넣었다. 고함을 지르던 적은 그대로 고꾸라졌다. 또 한 명의 수호자가 에라미스에게 달려들었고, 그녀는 가까스로 검을 뽑아낼 수 있었다. 등 뒤에서 충격 소총이 발사되는 소리가 들렸고… 재빨리 오른쪽으로 몸을 기울이자 그녀의 곁을 스쳐 날아간 총탄은 앞쪽에서 접근하던 수호자에게 그대로 적중했다.

뒤를 돌아 보니 크리디스가 서비터의 보호를 받으며 공허의 보라색 빛으로 아른거리고 있었다. 크리디스는 고개를 살짝 기울여 에라미스에게 인사를 건네고, 다시 돌아서서 다른 수호자 무리를 향해 소총을 발사했다.

에라미스는 검을 빼내 앞쪽으로 내밀었다. 이제 도시에 가까이 접근하고 있었다. 수호자가 사방에서 밀려들었다.

이제 정말 가까웠다.

빠르고 묵직한 발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왔다. 흉포하고 피에 굶주린 파일랙스가 덩치 큰 수호자를 공격하며 에라미스에게 소리쳤다. 에라미스는 허리를 숙이며 미끄러져 옆으로 피했다. 파일랙스가 수호자의 머리를 붙잡고, 에라미스는 그 야수의 옆구리를 검으로 베었다. 그의 균형이 무너졌고, 다시 에라미스는 엉덩이를 걷어차 수호자를 파일랙스 쪽으로 쓰러뜨렸다.

요즘 파일랙스는 거의 항상 맨손으로 싸웠다. 그녀가 그 손으로 상대의 목을 부러뜨렸다.

에라미스는 다시 앞으로 나섰다.

이제 정말 가까웠다…

거친 웃음소리가 오른쪽에서 터져 나오고, 우레와도 같은 소각 대포의 폭음이 뒤를 따랐다. 윙윙거리는 기계를 이끌고 눈에 잘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빠르게 움직이는 타닉스가 사방에 흙과 육신과 피의 폭발을 일으켰다. 그는 계속 웃었다.

정말 가까웠다.

하지만 그때… 그녀 앞에서 눈 부신 황금빛 섬광이 폭발했다. 총성이 한 발씩 울려 퍼지고, 주위의 엘릭스니가 차례대로 불타올라 잿더미가 되었다. 희생자가 있던 자리에는 눈부신 빛의 웅덩이만 남았다. 그 총을 들고 있는 수호자는 마치 작은 태양 같았다.

또 한 발. 크리디스의 서비터. 또 한 발. 크리디스 자신. 에라미스는 패배를 기억했지만, 이건 기억하지 못했다. 파일랙스가 증발하여 휘날리는 잿가루만 남는 것을 본 기억은 없었다. 그녀의 가슴을 맞힌 사격도, 사지가 폭발하며 타오르던 불길도, 그녀 자신의 비명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 숨을 몰아쉬며 깨어났다.

7. VI. 전령

그 꿈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모두 뒤틀린 옛 기억이었다. 고대의 감옥 수호자들과 싸우다가 그들의 빛 앞에 쓰러지던 기억. 아스리스는 그녀의 수면실 벽을 두드리며 거대한 기계를 찾았다.

그녀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꿈속의 무언가가 지구의 달로 가라고 했고, 그녀는 그 신호를 따랐다.

달에서, 그녀는 사체의 악취를 풍기며 파리 떼처럼 달려드는 군체와 맞서 싸웠다. 진동하는 적의 악취는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감옥에 쌓여 있던 사체 더미보다 지독하고, 황혼의 틈 전장보다 더 끔찍했다. 그들은 죽음을 먹고 들이쉬었고, 그녀는 자신에게 와 닿는 그들의 숨결조차 거부했다. 그래서 높다랗게 자란 수풀을 베듯 적을 베어 넘겼다.

기사가 카타콤 깊은 곳까지 그녀를 추적했다. 그녀가 듣지 못하는 거리에 머무르며, 그녀의 걸음과 보조를 맞췄다. 그녀는 적이 먼저 공격해 오게 했고, 그렇게 공격이 시작되자 적의 외골격 방어구를 검으로 쪼개 버렸다. 기사가 외마디 비명과 함께 죽음을 맞는 소리를 들으며 전투의 희열을 느끼자 마음이 푸근해졌다. 불안한 꿈들을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그녀는 군체의 피를 뒤집어쓰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우주선에 다가갔을 때, 낯익은 광경에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얼어붙었다.

그녀는 이 함대를 기억했다.

함대가 마치 검은 화살처럼 하늘에 떠 있는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거대한 기계가 존재하던 하늘과, 그것이 사라진 후 남은 텅 빈 공간을 기억했다.

그 모든 것이 의존의 위험성을 가르쳐 주었다. 너무 늦게 깨달은 교훈이었다.

이번에는 검은 화살이 그녀에게 말을 했다. 엘릭스니어도 아니었고, 투박한 지구의 언어나 독특한 운율의 리프 언어도 아니었다. 뭔가 다른 것, 속삭임이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또렷하고 왠지 몰라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제 기다리지 마라, 그것이 말했다.

아무도 널 찾아오지 않는다.

네가 너 자신의 구원이 되어야 한다.

그녀는 네 개의 손 모두에서 무언가 윙윙거리는 듯한 찌릿한 감각을 느꼈다. 부러진 전기 창이 떠올랐다. 그녀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우주선의 매끈한 표면을 바라봤다. 여기에는 힘이 있었다. 그녀가 움켜쥘 수 있는 힘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백일몽이 번개처럼 그녀를 강타했다. 그녀는 이동했다. 달의 황량한 회색 모래가 멀어져 가고, 그녀는 휘도는 얼음과 눈으로 뒤덮인 하얀 평원에 서 있었다. 온통 새하얀 빛이 눈이 부시도록 사방을 채워, 그녀는 호흡도 잊었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달로 돌아왔다. 속삭이던 소리도 어느새 잦아들었다.

다음에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있었다.

8. VII. 서기

에라미스와 바릭스는 반쯤 건설된 도시의 그림자 안에 서 있었다. 그녀의 부하들이 행성계에 산재해 있는 엘릭스니의 은신처에서 이런저런 재료를 긁어모아 황금기 시설의 잔해에 덧붙였고, 그렇게 낡은 것으로부터 새로운 것을 만들어 냈다. 유로파의 얼어붙은 툰드라 속, 인류의 실패가 남긴 뼈대에 엘릭스니의 육신이 덧붙여졌다.

그녀는 위를 올려다보는 바릭스의 얼굴을 바라봤다. 어딘가 낯익은 구석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 보았던 경외감이었다.

"새로운 리이스가 될 거야." 그녀는 고개를 들어 앞쪽의 비계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백성을 위한 새로운 집. 이제 달아날 필요 없다. 외딴 변방에서 살아갈 필요도 없고."

바릭스는 마침내 시선을 돌려 에라미스의 눈을 바라봤다. "악마들은 어떻게 하고?" 그가 엘릭스니어로 말하자 그녀는 놀랐다.

"낡은 이름일 뿐." 그녀는 멸시하는 투로 대꾸했다. "낡은 이름과 낡은 방식은 과거에 묻어 두어라."

그녀가 기억하던 대로, 바릭스는 경외감에 사로잡혀 있다는 이유로 실질적인 의문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그녀를 평가하는 듯했다. "왜 여기를 고른 거지? 왜 이 얼어붙은 위성을 선택한 건가?"

"꿈에서 보았다."

그의 태도가 회의적으로 바뀌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물론 그를 탓할 수는 없었다. 탈옥 이후로 그는 행성계 구석진 곳에 숨어 심판의 날을 기다리고만 있었다. 그는 백성들에게 자유를 선사했지만, 그 후 자신의 주위에 고립의 감방을 세웠다. 그는 자기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너머를 보지 못했다.

"그런데 왜 나를 부른 거지?" 그렇게 묻는 목소리는 어딘가 딱딱했다. "참 많은 일이 있었지만, 우리는 아군이라 할 수는 없을 텐데, 에라미스."

"낡은 방식일 뿐." 그녀는 다시 말했다. "엘릭스니가 생존하려면 분열에 대한 모든 기억을 버려야 한다. 사소한 논쟁도, 가문의 정치도… 나는 모두 깨끗이 지워 버리고 싶다."

그녀는 다시 비계를 올려다봤다. "여기는 새 세계가 될 거야, 바릭스.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이야기가 될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존재로 알려지고 또 기억될 거다."

바릭스도 그녀의 시선을 따랐다. 그의 목소리도 조금 누그러졌다."왜 나지?"

에라미스는 돌아서서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바릭스는 여전히 그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구부정한 어깨와 살짝 옆으로 돌린 얼굴에서 느껴졌다.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아픔을 느끼는 듯한 표정이었다.

"새로운 세계에는," 그녀가 말했다. "서기가 필요하다."

9. VII. 의회

"옛 친구여."

파일랙스는 피투성이 미소를 지으며 에라미스의 손을 잡아 그녀를 가슴께로 잡아끌었다. 크리디스가 파일랙스 뒤에 당당히 서 있었다. 에라미스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였다. 파일랙스는 쿡쿡 웃었다. "내가 그랬지. 그 어떤 감옥이라도 이 분을 붙잡아 둘 수는 없다고."

에라미스는 웃었다. 익숙하고 편안한 웃음이었다.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았다. 악마의 가문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가장 어두운 곳에서 며칠 동안 임무를 수행하던 때. 오래전 고향의 가장 음습한 구역, 발사 기지에서 두 사람과 함께 지냈던 그때. 그들은 잠식해 오는 가문의 수많은 구성원들을 짓밟았다. 인간의 거주지를 폐허로 바꿔 놓았다. 그들 자신의 켈에게 도전하고 꺾어 직접 켈의 책무를 차지하는 날을 꿈꿨다.

하지만 크리디스는 에라미스가 아닌 그 뒤를 바라봤다. 파일랙스도 이내 그렇게 하더니,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는 앞으로 달려들어 에라미스를 지나 바릭스의 목덜미를 붙잡고 들어 올렸다.

"배신자 드렉." 파일랙스는 거친 목소리로 말하며 침을 뱉었다. "이 비굴한 벌레가—"

바릭스는 덫에 걸린 짐승처럼 발버둥 쳤다. "파일랙스." 그는 헐떡이며 말했다.

프락시스와 아트락스는 옆으로 비켜서 옛 가문의 베테랑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소동을 지켜봤고, 프락시스는 어딘가 기뻐하는 표정이었다. 그들은 관여하지 않았다.

파일랙스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놓아 줘라." 에라미스가 말했다.

파일랙스는 에라미스를 바라본 후 바릭스를 떨어뜨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에라미스는 그녀가 불만을 품고 있음을 알았다. 크리디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머릿속에 의혹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물론 그자는 부인할 수 없는 죄를 지었다." 에라미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는 바릭스를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그가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파일랙스로부터 멀어지려고 버둥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심판의 가문에서 남은 자는 그뿐이다."

"서기는 딱히 총애하지 않으시잖습니까." 크리디스가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에라미스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렇지. 하지만 리프 엘릭스니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는 서기라면 어떨까?"

파일랙스는 그제야 이해한 듯 흥 소리를 냈지만, 그래도 마음에 드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녀는 크리디스의 곁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크리디스는 기쁜 듯 말했다. "현명하시군요."

그들이 더 묻기 전에, 에라미스는 대화의 주제를 바꿨다. "정치적인 문제로 너희를 불렀다." 그녀는 두 번째 팔의 손으로 그들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라. 우리가 만들어낸 것을 보여주마."

10. IX. 어둠의 켈

흑요석 우주선이 유로파 상공에 나타났을 때, 에라미스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바릭스와 파일랙스, 크리디스, 프락시스, 아트락스까지, 의회를 곁에 둔 채로 그녀는 숨죽이고 출현을 맞이했다.

돌아온 낯선 속삭임이 이번에는 이렇게 말했다…

선택받기를 기다리지 마라. 직접 선택해라.

구원을 선택해라.

에라미스는 우주선에 올라 힘을 선택했다.

그녀가 그 차가운 고대의 힘을 손에 쥐는 그 순간, 구원의 가문이 탄생했다.

11. X. 전사

나는 한때 악마의 가문 전사였으며, 리이스 집안의 자손이었던 파일랙스다. 흩어져있는 엘릭스니에게 고한다. 잘 들어라. 다시 반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악마의 가문에 죽음을! 리이스 집안을 잿더미로! 나는 쓸모없는 것들을 모두 벗어 던지고, 여기 리이스의 부활에, 에라미스와 구원의 가문에 내 목숨을 바치겠다!

나는 수많은 전투를 치렀지만 에라미스켈의 칼의 의지를 뛰어넘는 전사를 만나 보지는 못했다. 우리는 함께 모든 손에 무기를 들고 지구 도시의 장벽을 점령했다! 나란히 선 우리는 이 행성계 전역에서 적의 생명을 빼앗았다. 그 어떤 범선도 그녀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 어떤 죽음도 그녀를 붙잡지 못한다! 추악한 리프 태생에게 구속되어 있을 때조차도 그녀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점점 더 강해지기만 했다.

첼시스, 스콜라스, 악시스. 모두 부활 시켜 드렉으로 바꾸는 것을 지켜보아라. 그녀의 새로운 권력은 그들이 휘두른 그 어떤 힘보다도 뛰어나다. 우리 동족이 알았던 모든 힘을 넘어선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깃발 아래 모이는 모든 이들에게 그 힘을 줄 것이다! 지금, 부관인 나도 그녀의 힘을 나누어 쓰고 있다. 나란히 선 우리의 육신은 똑같이 얼음처럼 차가운 힘으로 맥동한다.

그 힘이 하늘에서 거대한 기계를 끌어내려 우리의 새로운 도시를 강철 거죽으로 강화해 줄 것이다! 그 힘이 이 행성계에서 추악한 자들을 말살하고 우리의 자손들에게 전투의 전리품을 나누어 줄 것이다!

그 힘이 일천 번의 생애까지 우리를 통치해 줄 것이다.

다들 내 말을 들어라. 나는 어둠의 전사 파일랙스다! 리이스의 부활에 생명을! 어둠의 켈에게 승리를! 구원의 가문에 영광을!

12. XI. 기술사관

나는 리이스의 부활에 있는 기술사관 프락시스다. 우리의 인원은 날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엘릭스니가 우리 켈의 초대를 받아들이고 오랫동안 기다려 온 동족의 발전에 참여하는 일을 주저하고 있는 것 같구나.

따라서, 나도 해야 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해야만 할 것 같다… 아니, 솔직히 이건 사실이 아니군. 다들 어느 정도는 겁쟁이처럼 굴거나,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거나, 멍청한 짓거리를 할 거라고 예상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도 처음에만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 우리의 과업에 증거가 부족한 시점에만 말이야.

하지만 다른 모두가 실패한 곳에서 에라미스켈만이 승리를 거둔 이 시점에는… 절반만 들어찬 우리의 수도에 텅 빈 공간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정말이지 믿을 수가 없다. 빛의 가문의 나약한 자들이 뿌린 의혹의 씨앗을 너희들이 수군거리고 있는 이유를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래. 이토록 멀리 떨어진 이 달에서도 나는 너희 교신을 엿들을 수 있다, 미스라악스. 다른 자들은 너를 버림받은 자라 부르겠지만, 나는 멍청한 자라 부르겠다. 아직까지도 달처럼 커다란 그 폐기물을 고집스럽게 붙들고 있으니 말이지. 우리가 아이들에게 가르쳤던 교훈을 잊은 건가? 불필요한 것을 잔뜩 실은 범선은 하늘을 날 수 없다.

그의 본보기에 따라 우리 적들의 평화라는 사탕발림을 믿으려 하는 자들이 있다면… 뭐, 눈앞에 생생하게 놓인 것들도 모두 무시하는데 이 과학자의 말 한 마디가 무슨 소용이 있겠나? 그냥 정말로 가슴 속 깊이 생각해 보라는 말만 하고 싶다. 소위 너희 '아군'이라 하는 자들이 자기들의 충심에 대한 증거로 무엇을 주었나? 너희와 모든 것을 똑같이 공유하겠다고 했을까? 그들에게서 정확히 어떤 도움을 받은 것이냐?

"아직 없었다.", "잘 모르겠다."라고 답한다면, 참으로 대단한 인내심이라 칭찬해 주고 싶구나. 나나 나의 켈, 우리 구원의 가문의 모든 이들에게 시간이란 너무 길고 수많은 실패의 기억으로 가득 차 있어서 그토록 조잡한 실험에 시간을 투자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엘릭스니가 다시 부상하려면 우선 우리의 사고방식부터 바꿔야 한다. 우리와 함께 진보의 길로 나아가든가…

아니면 도태되어 다른 잔재들과 함께 사라져라.

13. XII. 여사제

엘릭스니! 여사제 크리디스가 심연 너머의 너희들에게 외친다! 바로 지금, 한때 함선강탈자였던 이가 우리 백성들의 예언을 실현하고 있다. 곧 우리는 하나의 깃발 아래 하나의 켈로 단합하여 신조차 없이 우리만의 번영을 이룰 것이다.

회오리를 버텨낸 것이 누구인가? 폐허와 고철 더미에서 범선과 무기를 만들어낸 것이 누구인가? 여러 세대에 걸쳐 미약한 에테르로 생존하고, 광활한 공간을 방황하며 끝없는 전투를 치른 것이 누구인가? 살아남은 것이 누구인가?!

우리다! 그 거대한 기계나 그 형상을 따라 우리가 만들어 낸 우상이 아니라, 엘릭스니가 살아남았다!

그렇다면 어째서 우리는 아직도 우리를 비추지 않는 빛을 그리워하고 있는 건가? 어째서 우리가 만들어 낸 서비터에게 무릎을 꿇고 있는 건가?

두렵기 때문이다. 수많은 고통을 인내하고, 그토록 먼 거리를 걸어온 지금까지도, 우리는 이 이상의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현재의 형체를 벗어나 진화해야 한다는 믿음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회오리가 그토록 빨리 우리를 신적 대상으로부터 단절하지만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 또한 그렇게 믿었었다. 우리의 의식을 통한 집단의 잠재력이 사망하였음을 얼마나 애통해했던가. 프라임 서비터의 원조를 받으며, 나는 가슴 깊은 곳이 녹아내리는 절망을 맛보았다. 눈물이 흐르는 눈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고, 그곳에서 텅 빈 구원을 마주했던 날을 여전히 꿈꿨다.

나는 눈이 멀었었다.

하지만 에라미스가 내 눈의 빛을 제거해 주었고, 이제야 나도 앞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나 또한 너희들에게 간청한다, 리이스의 자손들이여. 여기로 와서 직접 청명을 맛보아라! 구원의 가문과 그 켈의 위대함을 목도하라. 그리고 기뻐하라. 우리의 서비터를 시궁창으로 끌어내린 그녀가 거대한 기계도 같은 곳으로 이끌려 한다!

지금 빛은 우리에게 아무 도움도 주지 않는다.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어둠 속을 걸어왔다. 이제는 받아들일 때가 되었다!

14. XIII. 와일드카드

나는 와일드카드 아트락스다. 나의 켈이 엘릭스니의 젊은이들과 소통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래, 나처럼 방랑하지 않는 삶을 알지 못했던 이들 말이다. 리이스에 대한 기억이 없는 이들. 빛나는 초록색 하늘 아래에서 반짝이던 영광스러운 도시의 모습은 우리 장로들 사이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들은 우리가 진정한 평화를 느껴 본 적이 없다며 애석해하지만, 그 또한 거대한 기계의 그림자 아래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래도 기쁘다! 회오리가 일어나 예전의 나를 묶어 두고 있던 굴레를 끊어 준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른다! 사람들은 그날 파괴가 찾아왔다고 말하지만, 혹시 그것은 구원이 아니었을까? 그들은 우리가 심우주의 어둠 속에서 태어난 것이 불운이라 하지만, 우리는 자유롭게 태어났다! 그들은 우리에게 진정으로 앞을 볼 빛이 없다고 하지만, 우리가 처음 눈을 떴을 때 광활한 우주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야를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왜 향수로 눈먼 자들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가야 할까? 우리가 왜 그들의 죽어 버린 꿈을 짊어져야 할까? 그들은 미래에 등을 돌렸다! 그냥 내버려 두어라! 그들을 버리고 오래전 시작된 정화를 마무리하는 것이 더 쉽다.

그러고 나면 리이스의 부활에서 우리와 함께하자.

15. XIV. 흉터

하! 그래, 겨울의 켈이 흉터의 타닉스에게 도움을 청하는군. 참으로 정중하기도 하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너는 날 이기적인 쓰레기라 부르며 깃발이 없는 내 방어구에 침을 뱉었다. 그때 네 팔을 모조리 뽑아 버렸어야 했는데. 물론 덤으로 다리도 다 잘라 버렸어야 하고.

하지만 네가 결국은 내게 도움을 청할 줄 알고 있었다. 어차피 나는 미천한 용병 아니던가? 이제 네게 유리한 상황이니, 나도 자존심을 꺾고 잇속을 따르겠다. 미광체로 받을 대가만이 아니다. 피와 전투의 대가도 포함된다. 어떤 켈도, 어떤 가문도 내 갈증을 채워 주진 못했다. 어떤 일거리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고대의 감옥에서 탈옥하는 정도라면 괜찮을 것 같다.

그런데 아크소르를 위해서라고? 그 무능한 집정관을 위해 훨씬 더 위대한 전사들을 무시하라는 건가? 그자가 거부자 피키스보다 더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나? 팔라스의 파멸 피르시스보다도? 칼자르나 드렉타스보다도?

함선강탈자가 아닌 아크소르를 선택하겠다고?! 최종장에서 돌격을 이끌었던 에라미스를 포기하고? 추악한 빛의 운반자들에게 몸을 던져, 팔이 여덟 개라도 되는 것처럼 빠른 속도로 움직이던 그녀를? 너희 미천한 겨울의 종자들이 그녀의 발걸음을 뒤쫓아가려면, 그녀가 남겨 놓은 시체의 해일을 헤치고 나아가는 것만도 벅찰 거다.

그런데도 내가 가문과의 서약을 거부하는 이유를 물으려는 건가. 너희는 행성계를 지배할 수 있었음에도 이런 제멋대로인 관습에 얽매여만 있다. 아크소르는 겨울의 것이지만, 에라미스는 그렇지 않다.

평상시 가격의 두 배를 받겠다. 그 수수료가 날 억제해 줄 것이다. 가장 흉포한 엘릭스니 투사들을 버리고 아크소르를 풀어줘야 하는 내 마음을 달래 줄 거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