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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라우치 마사타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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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마쓰카타 마사요시 이토 히로부미 오쿠마 시게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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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온지 긴모치 가쓰라 다로 야마모토 곤노효에 오쿠마 시게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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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모토 곤노효에 기요우라 게이고 가토 다카아키 와카쓰키 레이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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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에 후미마로 도조 히데키 고이소 구니아키 스즈키 간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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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 다케오 후쿠다 다케오 오히라 마사요시 스즈키 젠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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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시타 노보루 우노 소스케 가이후 도시키 미야자와 기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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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부치 게이조 모리 요시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베 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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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세가와 요시미치 이토 히로부미 소네 아라스케 데라우치 마사타케
조선총독 · 군정사령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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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라우치 마사타케 하세가와 요시미치 사이토 마코토 우가키 가즈시게 야마나시 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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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토 마코토 우가키 가즈시게 미나미 지로 고이소 구니아키 아베 노부유키
한국통감 · 군정사령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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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부·대장경 (1869~1885)
초대
마츠다이라 슌가쿠
2대
다테 무네나리
-
오키 다카토
3대
오쿠보 도시미치
4대
오쿠마 시게노부
5대
사노 쓰네타미
6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전전 대장대신 (1885~1947)
초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초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2대
와타나베 구니타케
3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4대
와타나베 구니타케
5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6대
이노우에 가오루
7대
마츠다 마사히사
8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9대
와타나베 구니타케
-
사이온지 긴모치
10대
소네 아라스케
11대
사카타니 요시로
12대
마츠다 마사히사
13대
가쓰라 다로
14대
야마모토 타츠오
15대
와카쓰키 레이지로
16대
다카하시 고레키요
17대
와카쓰키 레이지로
18대
다케토미 도키토시
19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20대
쇼다 카즈에
21대
다카하시 고레키요
22대
이치키 오토히코
23대
이노우에 준노스케
24대
쇼다 카즈에
25대
하마구치 오사치
26대
하야미 세이지
27대
가타오카 나오하루
28대
다카하시 고레키요
29대
미츠치 추조
30대
이노우에 준노스케
31대
다카하시 고레키요
31대
다카하시 고레키요
32대
후지이 사다노부
33대
다카하시 고레키요
34대
마치다 추지
35대
바바 에이이치
36대
유우키 토요타로
37대
가야 오키노리
38대
이케다 시케아키
39대
이시와타 소타로
40대
아오키 카즈오
41대
사쿠라우치 유키오
42대
가와다 이사오
43대
오구라 마사츠네
44대
가야 오키노리
45대
이시와타 소타로
46대
쓰시마 준이치
47대
히로세 토요사쿠
48대
쓰시마 준이치
49대
시부사와 케이조
50대
이시바시 단잔
전후 대장대신 (1947~2001)
-
가타야마 데쓰
51대
야노 쇼타로
52대
구루스 다케오
53대
기타무라 도쿠타로
-
요시다 시게루
54대
이즈미야마 산로쿠
-
오야 신조
55대
이케다 하야토
56대
무카이 다다하루
57대
오가사와라 산쿠로
58-60대
이치마다 히사토
61·62대
이케다 하야토
63대
이치마다 히사토
64대
사토 에이사쿠
65·66대
미즈타 미키오
67-69대
다나카 가쿠에이
70대
후쿠다 다케오
71·72대
미즈타 미키오
73·74대
후쿠다 다케오
75대
미즈타 미키오
76대
우에키 코시로
77대
아이치 기이치
-
다나카 가쿠에이
78대
후쿠다 다케오
79·80대
오히라 마사요시
79·80대
오히라 마사요시
81대
보 히데오
82대
무라야마 다쓰오
83대
가네코 잇페이
84대
다케시타 노보루
85대
와타나베 미치오
86·87대
다케시타 노보루
88·89대
미야자와 기이치
90대
다케시타 노보루
91·92대
무라야마 다쓰오
93·94대
하시모토 류타로
95대
가이후 도시키
96대
하타 쓰토무
97대
하야시 요시로
98·99대
후지이 히로히사
임시대리
하타 쓰토무
98·99대
후지이 히로히사
100대
다케무라 마사요시
101대
구보 와타루
102대
미쓰즈카 히로시
103대
하시모토 류타로
104대
마쓰나가 히카루
105-107대
미야자와 기이치
105-107대
미야자와 기이치
재무대신 (2001~)
초대
미야자와 기이치
2대
시오카와 마사주로
3-5대
다니가키 사다카즈
6대
오미 고지
7·8대
누카가 후쿠시로
9대
이부키 분메이
10대
나카가와 쇼이치
11대
요사노 가오루
12대
후지이 히로히사
13대
간 나오토
14대
노다 요시히코
15대
아즈미 준
16대
조지마 고리키
17-20대
아소 다로
21·22대
스즈키 슌이치
23·24대
가토 가쓰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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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무경 (1869년~1879년) · 외무사무총재 (1873년)
초대
사와 노부요시
2대
이와쿠라 도모미
3대
소에지마 다네오미
4대
데라시마 무네노리
5대
이노우에 가오루
전전 외무대신 (1885년~194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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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이노우에 가오루
6대
이토 히로부미
7대
오쿠마 시게노부
8대
아오키 슈조
9대
에노모토 다케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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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무쓰 무네미쓰
11대
사이온지 긴모치
12대
오쿠마 시게노부
13대
니시 토쿠지로
14대
오쿠마 시게노부
15대
아오키 슈조
16대
가토 다카아키
17대
소네 아라스케
18대
코무라 주타로
19대
가토 다카아키
20대
사이온지 긴모치
21대
하야시 타다스
22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23대
코무라 주타로
24대
우치다 고사이
25대
가쓰라 다로
26대
가토 다카아키
27대
마키노 노부아키
28대
가토 다카아키
29대
오쿠마 시게노부
30대
이시이 키쿠지로
31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32대
모토노 이치로
33대
고토 신페이
34대
우치다 고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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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대
우치다 고사이
35대
야마모토 곤노효에
36대
이주인 히코키치
37대
마츠이 케이시로
38대
시데하라 기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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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대
다나카 기이치
40대
시데하라 기주로
41대
이누카이 쓰요시
42대
요시자와 겐키치
43대
사이토 마코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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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대
우치다 고사이
45대
히로타 고키
46대
아리타 하치로
47대
하야시 센주로
48대
사토 나오타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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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대
히로타 고키
50대
우가키 가즈시게
51대
고노에 후미마로
52대
아리타 하치로
53대
아베 노부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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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대
노무라 기치사부로
55대
아리타 하치로
56대
마츠오카 요스케
57대
토요다 테이지로
58대
도고 시게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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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대
도조 히데키
60대
타니 마사유키
61대
시게미쓰 마모루
62대
스즈키 간타로
63대
도고 시게노리
전후 외무대신 (1945년~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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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대
시게미쓰 마모루
65대
요시다 시게루
66대
가타야마 데쓰
67·68대
아시다 히토시
69·70·71대
요시다 시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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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73·74대
오카자키 카츠오
75·76·77대
시게미쓰 마모루
78대
이시바시 단잔
79·80대
기시 노부스케
81·82대
후지야마 아이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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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84대
고사카 젠타로
85·86대
오히라 마사요시
87·88대
시이나 에쓰사부로
89·90대
미키 다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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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대
사토 에이사쿠
92·93대
아이치 기이치
94대
후쿠다 다케오
95·96대
오히라 마사요시
97대
키무라 토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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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대
미야자와 기이치
99대
고사카 젠타로
100대
하토야마 이이치로
101·102대
소노다 스나오
103대
오키타 사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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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대
이토 마사요시
105대
소노다 스나오
106대
사쿠라우치 요시오
107·108대
아베 신타로
109대
쿠라나리 타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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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대
우노 소스케
111대
미쓰즈카 히로시
112대
나카야마 타로
113·114대
와타나베 미치오
115대
무토 카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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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대
하타 쓰토무
117대
가키자와 고지
118대
고노 요헤이
119·120대
이케다 유키히코
121대
오부치 게이조
{{{#!wiki style="margin: -16px -11px" }}}
122대
고무라 마사히코
123·124·125대
고노 요헤이
126대
다나카 마키코
127대
고이즈미 준이치로
128·129대
카와구치 요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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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131대
마치무라 노부타카
132·133대
아소 다로
134대
마치무라 노부타카
135대
고무라 마사히코
136대
나카소네 히로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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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138대
오카다 가쓰야
139대
마에하라 세이지
140대
에다노 유키오
141대
마쓰모토 다케아키
142대
겐바 고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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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144대
기시다 후미오
145·146대
고노 다로
147-149대
모테기 도시미쓰
150대
기시다 후미오
151대
하야시 요시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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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대
가미카와 요코
153·154대
이와야 다케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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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대원수
大元帥
[[메이지 덴노|
파일:일본 황실.svg 1871년
메이지 천황]]
[[다이쇼 덴노|
파일:일본 황실.svg 1912년
다이쇼 천황]]
[[쇼와 덴노|
파일:일본 황실.svg 1926년
쇼와 천황]]
육군원수
陸軍元帥
1872년
사이고 다카모리
파일:일본 제국 육군기.svg
원수육군대장
元帥陸軍大將
1898년
고마쓰노미야 아키히토 친왕
1898년
야마가타 아리토모
1898년
오야마 이와오
1915년
후시미노미야 사다나루 친왕
1915년
하세가와 요시미치
1916년
데라우치 마사타케
1919년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친왕
1929년
구니노미야 구니요시 왕
1932년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
1943년
데라우치 히사이치
1943년
스기야마 하지메
파일:해상자위대기.svg
원수해군대장
元帥海軍大將
1898년
사이고 주도
1913년
도고 헤이하치로
1922년
히가시후시미노미야 요리히토 친왕
1923년
가토 도모사부로
1932년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
1943년
야마모토 이소로쿠
1943년
나가노 오사미
*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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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육군경 (1873년~1885년)
1·2대
야마가타 아리토모
3대
사이고 주도
4대
오야마 이와오
}}}{{{#!wiki style="margin: -6px -1px -10px" <rowcolor=#fff> 육군대신 (1885년~1945년)
1·3대
오야마 이와오
2·4대
다카시마 도모노스케
1·3대
오야마 이와오
2·4대
다카시마 도모노스케
5대
가쓰라 다로
5대
가쓰라 다로
6대
고다마 겐타로
7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7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8대
이시모토 신로쿠
9대
우에하라 유사쿠
10대
기고시 야스쓰나
11대
구스노세 유키히코
12대
오카 이치노스케
13대
오시마 겐이치
14·16대
다나카 기이치
15대
야마나시 한조
15대
야마나시 한조
14·16대
다나카 기이치
17·19대
우가키 가즈시게
18대
시라카와 요시노리
17·19대
우가키 가즈시게
20대
미나미 지로
21대
아라키 사다오
22대
하야시 센주로
23대
가와시마 요시유키
24대
데라우치 히사이치
25대
나카무라 고타로
26·30대
스기야마 하지메
27대
이타가키 세이시로
28대
하타 슌로쿠
29대
도조 히데키
폐지
26·30대
스기야마 하지메
31대
아나미 고레치카
33대
시모무라 사다무
}}}}}}}}}

초대 조선총독
일본 제국 제18대 내각총리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
[ruby(寺, ruby=てら)][ruby(內, ruby=うち)] [ruby(正, ruby=まさ)][ruby(毅, ruby=たけ)][구자체] | 寺内正武[신자체] | Terauchi Masatake
파일:Masatake_Terauchi.jpg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출생 1852년 2월 24일
스오국 요시키군 히라카와촌
(現 야마구치현 야마구치시)
사망 1919년 11월 3일 (향년 67세)[3]
도쿄부 도쿄시 (現 도쿄도)
재임기간 제3대 한국통감
1910년 5월 30일 ~ 1910년 10월 1일
초대 조선총독
1910년 10월 1일 ~ 1916년 10월 14일
제18대 내각총리대신
1916년 10월 9일 ~ 1918년 9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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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아호 오보(桜圃)
로안(魯庵)
배우자 데라우치 다니 (전처)
데라우치 다키 (후처)
학력 육군도야마학교
작위 백작
정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약력 제10대 일본육군사관학교
대본영 운수통신사령관
제1·3대 육군교육총감
제4대 육군참모본부 참모차장
제15-17대 육군대신
제3대 한국통감
초대 조선총독
제19대 대장대신
제18대 내각총리대신
군사 경력
복무 일본 제국 육군
1871년 ~ 1910년
최종 계급 원수
참전 보신전쟁
세이난 전쟁
청일전쟁
러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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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군문에 들다2.2. 초대 조선 총독2.3. 내각총리대신 시절
3. 기타4. 대중매체에서5. 관련 문서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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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제국 정치인. 제3대 한국 통감, 초대 조선 총독, 제18대 내각총리대신.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드는 것에 큰 역할을 하였는데, 조선에 억압적인 헌병 경찰 통치를 펼쳐 악명이 높았으며 총리 재임 기간 중에도 시베리아 출병을 단행하는 등 강경파였다.

2. 생애

2.1. 군문에 들다

1852년 일본 야마구치현[4] 하급 사무라이 가문의 3남으로 태어났으며, 초명(初名)은 우타다 마사다케(宇多田正毅)[5]였으나 외가에 양자(養子)로 입적하면서 자신의 씨(氏)도 어머니의 혼인 전 씨인 데라우치(寺內)로 바꿨다.

1865년 초슈번 제대에 들어갔으며 메이지 유신 직후 보신전쟁이 발발하자 종군했다. 1871년 일본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으며 1877년 사이고가 세이난 전쟁를 일으키자 참전하였으나 타바루자카 전투에서 오른손에 총탄이 명중하여 오른손을 쓸 수 없게 되었다. 세이난 전쟁 이후에는 전방의 야전부대보다는 군정과 군교육의 길을 걸었다. 1882년부터 1886년까지 프랑스에 군사유학을 다녀왔으며 덕분에 이미지와는 다르게 프랑스어가 유창해서 훗날 야마가타의 외교사절을 맡기도 했다. 돌아온 후 초슈벌의 지지를 받아 승진가도를 거쳤다. 1887년 일본육군사관학교장을 지냈으며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병참 책임자가 되었다. 이후 1898년, 교육총감, 육군대학 교장, 참모본부 차장을 거쳐 1900년 의화단 운동이 벌어지자 일본측 대표로 연합국 회의에 출석하여 의화단 진압에 참여했다.

1902년 제1차 가쓰라 다로 내각에서 육군대신 겸 교육총감에 임명되어 오랫동안 재임했으며 1904년 러일전쟁에 참전했다. 1906년 육군대장으로 승진했으며 러일전쟁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자작 작위를 받았다. 육군대신으로 재직하며 초슈벌의 핵심적인 인물로 성장하였다. 이후 만주 침탈을 위한 공공기관인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 위원을 맡았다. 1908년 제2차 가쓰라 내각이 들어서자, 데라우치는 육군대신과 잠깐 외무대신이 되었다.[6] 데라우치는 여러 전쟁으로 다져진 인물이었고, 정치적인 야심은 많은 사람이 아니어서, 1910년 5월, 한국통감의 지위를 겸임하게 되었다.

2.2. 초대 조선 총독

1910년 7월 2대 한국 통감이었던 소네 아라스케[7]가 물러나면서[8], 메이지 덴노의 임명으로 한양으로 입성하여 3대 한국 통감에 부임하였다. 통감 임기 시작일은 5월 30일이었으나 한일합병 조약문을 소지한 상태로 7월 23일에야 왔다. 사실상 한일합병 조약을 하러 부임한 셈.

한일병합 착수를 위해 동년 8월 16일 매국노 이완용과 농상공 대신[9] 조중응 등 친일파 대신을 통감 관저로 비밀리에 불러들여 병합조약을 밀의(密議)하고 22일 이완용을 내세워 순종 앞에서 형식상의 어전회의를 거치게 한 뒤 비밀리에 총독 관저에서 이완용과 양자간 첫 한일병합에 관한 조인식을 가졌다. 이레 뒤 황제의 도장을 강탈한 끝에 병합조약을 29일 공식 발표하였다.
데라우치 마사타케 포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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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감(統監) 자작(子爵)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의 유고(諭告)는 다음과 같다.

예성 문무 천황 폐하(叡聖文武天皇陛下)의 대명(大命)을 받들어 본관(本官)이 이번에 조선 통치의 임무를 인수함에 즈음하여 정무(政務)를 시행하는 강령을 제시하여 조선의 상하 민중에게 유고한다.

무릇 강역(疆域)이 상접하고 기쁨과 근심에 서로 의지하며 민정(民情) 또한 형제의 우의가 있어 서로 하나로 합쳐서 일체를 이룸은 자연의 이치요 반드시 이르는 형세이다. 이러므로 대일본국 천황 폐하는 조선의 안녕을 확실하게 보장하고 동양의 평화를 영원히 유지하는 것을 간절하게 생각하여 전 한국 원수(元首)의 희망에 응하여 그 통치권의 양여를 수락한 바이다. 지금부터 전 한국의 황제 폐하 창덕궁(昌德宮) 이왕 전하(李王殿下)라 칭하며 황태자(皇太子)는 왕세자(王世子)가 되고 후사(後嗣)가 길이 서로 전하여 계승하면서 만세 무궁할 것이다. 태황제 폐하(太皇帝陛下)는 덕수궁(德壽宮) 이태왕 전하(李太王殿下)라 칭하여 이에 황족의 예우를 내리고 그 급료가 풍후(豐厚)함은 황위에 있을 때와 차이가 없을 것이다. 조선 민중은 모두 제국의 신민이 되어 천황 폐하가 어루만져 기르는 교화를 입고 길이 깊고 두터운 인덕(仁德)의 혜택을 받을 것이다. 매우 충순하게 새 정치를 보좌한 현량(賢良)은 그 공로에 준하여 영예로운 작위를 수여하고, 또 은금(恩金)을 내리며 또 그 재능에 따라서 제국 관리나 혹은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의 반열에 세우고 혹은 중앙 또는 지방 관청의 직원에 등용케 하였다.

또 양반 유생 중에 기로(耆老)로서 능히 서민의 사표(師表)가 되는 자에게는 노인을 공경하는 은전을 베풀고, 효자와 절부(節婦) 중에 향당(鄕黨)의 모범이 되는 자에게는 포상(褒賞)을 내려서 그 덕행을 표창하게 하였다. 지난번 지방 관직에 있으면서 국세를 포흠(逋欠)낸 행위가 있는 자는 그 책임을 해제하여 특히 그 미감금(未勘金)의 완납을 일체 면제하였다. 또 종전의 법률을 위반한 자로서 그 범죄 성질이 특히 이해함직한 자에 대하여는 일률적으로 대사면(大赦免)의 특전을 베풀었다. 예컨대 지금 지방 민중은 적폐(積幣)의 남은 재앙을 받아들임으로써 실업하여 재산이 기울기도 하고, 우심(尤甚)한 경우에 있어서는 유리(流離)하여 기아(饑餓)에 허덕이는 자도 있으니, 민력(民力)의 휴양(休養)을 도모함을 급선무로 인정하여 융희(隆熙) 2년도 이전의 지세(地稅) 중에 아직 미납에 속한 것은 이를 면제하고, 융희 3년 이전의 대부(貸付)에 속한 사창곡(社倉穀)은 그 환납을 특별히 면제케 한다. 또 올 가을에 징수할 지세(地稅)는 특히 그 5분의 1을 경감하며 다시 나라의 탕금(帑金) 약 1,700만 원(圓)을 지출하여 이를 13도(道) 320여 부(府)와 군(郡)에 분배케 하여 사민(士民)의 생업, 교육의 보조와 아울러 흉년의 구제로 충용(充用)하게 한다. 이는 모두 고치어 시작하고 일신하는 때를 당하여 은혜로 위무하고 사랑으로 부양하는 뜻을 밝히게 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국정의 이익과 은택을 받은 자는 그 분수에 상응하여 나라의 비용을 부담하는 것이 천하의 통칙(通則)이요. 고금동서(古今東西)가 모두 그러하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기필코 그간의 구휼의 본뜻을 능히 체득하여 혹 은혜를 아무렇지 않게 여기거나 봉공(奉公)의 마음을 잃지 말게 하는 것이 옳다.

무릇 정치의 요체는 생명과 재산의 안전을 도모함보다 급선무가 없다. 대개 식산(殖産)의 법과 흥업(興業)의 길은 이다음에 진작케 할 수 있다. 종래에 불순한 무리와 완악한 무리가 원근에 출몰하여 혹 인명을 죽이고 혹 재화를 약탈하며 혹 나라를 어지럽힐 계책을 기도하며 혹 소요를 일으키는 자가 있으니, 이 때문에 제국 군대는 각도(各道)의 요처에 주둔하여 유사시의 변란에 대비하고, 헌병 경관(憲兵警官)은 서울과 지방에 널리 미쳐 오로지 치안에 종사하며, 또 각지에 법정을 열어 공평무사한 심판을 내리기에 힘씀은 본래 간흉을 징벌하고 사곡(邪曲)을 제거하기 위함이요, 결국은 국내 전반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고 각 사람으로 하여금 그 울타리에 안주하여 그 생업을 영위하며 그 재산을 다스리게 하는 데에서 벗어나지 않게 함이다.

지금 조선의 지세(地勢)를 두루 관찰하건대, 남쪽 땅은 비옥하여 농상(農桑)에 적합하며 북쪽 땅은 대체로 광물이 풍부하고, 내륙의 하천과 외부의 바다는 또한 어개(魚介)가 많아 이익과 혜택을 남기는 수확물이 적지 않으니, 그 개발 방법이 타당하면 산업의 진작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런데 산업의 발달은 오로지 운수기관의 완성을 기다려야 하니, 이는 사업을 일으키는 계제가 된다. 이번에 통로(通路)를 13도 각지에 열며 철도를 경성(京城) 원산(元山) 및 삼남(三南) 지방에 신설하여 점차 전국토에 미치게 함에 이와 같이하여 큰 성공을 장래에 기하고 모두 개착부설(開鑿敷設)의 공역(工役)으로써 중민(衆民)에게 생업을 부여하면 그 궁핍을 구제하는 일조(一助)가 됨은 의심할 것이 없는 바이다.

조선 고래(古來)의 유폐(流弊)는 좋아함과 싫어함이 서로 거스르고 이익만을 위해 서로 싸우는데 있으니, 이 때문에 한 당이 득세하면 다른 정파를 홀연히 해치고, 한 정파가 세력을 거두면 다른 당을 번번이 넘어뜨리고자 하여 서로 필적하고 배척하는 것이 그 끝을 알 수 없다가 마침내 파산하고 망한 집안이 적지 않다. 이는 큰 해만 있고 작은 이익은 없으니 이후 당을 세우고 단체를 만들어 헛되이 경거망동을 일삼음과 같은 일이 없게 함이 옳다. 다만 정령(政令)이 충분히 아래에 미치지 않고 민의(民意)가 번번이 위에 도달하지 않아 위에서 억압하고 아래에서 원망하는 폐단을 빚는 것은 고금에 그 사례가 적지 않으니, 이 때문에 중추원(中樞院)의 규모를 확장하여 노성(老成)한 현량(賢良)을 망라해서 의관(議官)의 반열에 올리고 중요한 정무의 자문에 응하게 할 것이다. 또 각 도 및 각 부, 각 군에는 참여관(參與官) 또는 참사(參事)의 직을 설치하여 능사준재(能士俊材)를 등용하여 여기에 충원하고 언의(言議)를 구하며 헌책(獻策)을 들음으로써 정령과 민정(民情)이 서로 어긋남이 없게 하도록 기하라.

인생의 우환은 질병의 혹독함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 종래 조선의 의술(醫術)은 어린아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병고(病苦)를 구제하기에 부족하여 타고난 수명만을 온전히 하는 것이 가장 통탄스런 바이다. 지난번 경성(京城)에 중앙의원(中央醫院)을 개원하였고 또 전주(全州) 청주(淸州) 및 함흥(咸興)에 자혜의원(慈惠醫院)을 설립한 이래로 백성이 그 은혜를 입은 자가 극히 많으나, 아직 전국에 보급되지 못한 것이 유감이므로 명령을 내려 다시 각 도에 자혜의원을 증설케 하며 명의(名醫)를 두고 양약(良藥)을 구비하여 기사회생(起死回生)의 인술(仁術)을 널리 베풀게 하는 것이다. 돌아보건대, 인문(人文)의 발달은 후진 교육에 기다리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교육의 요체는 지덕(智德)을 연마하여 수신제가(修身齊家)에 바탕을 두는 것이지만, 제생(諸生)이 번번이 힘쓰기를 싫어하고 안일을 추구하며 헛되이 공리(空理)를 담론(談論) 하고 방만(放漫)에만 흘러 끝내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백성이 되는 자가 왕왕 있으니, 지금부터 마땅히 그 폐단을 바로잡아 허세를 버리고 내실을 추구하며 나태하고 고루한 습성을 한꺼번에 씻어버리고 함양(涵養)하고 근검하는 아름다운 풍속에 노력하는 것이 옳다.

신앙과 종교의 자유는 여러 문명국가들이 모두 인정하는 바이다. 각자 숭배하는 교지(敎旨)에 의지하여 안심입명(安心立命)의 터전을 구함은 비록 그 하는 바이나 종파가 다름으로 하여 함부로 분쟁을 일삼으며 또 신앙 종교에 이름을 올려 정치를 묻고 의논하며 모반을 기도함은 곧 선량한 풍속을 더럽혀서 안녕을 방해하는 자로 인정하여 마땅히 법에 따라 처단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제교(儒佛諸敎)와 기독교를 불문하고 그 본 취지는 필경 인심세태(人心世態)를 개선함에 있으므로 진실로 정무를 시행하는 목적과 배치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가히 이를 도울 것을 의심하지 않으니, 이 때문에 각종 종교를 대함에 친소(親疎)한 생각을 조금도 갖지 않음은 물론 그 포교 전도에 대하여 적당한 보호와 편의를 부여함이 인색하지 않을 것이다.

본관이 이번에 성지(聖旨)를 받들어 이 땅에 부임한 것은 한결같이 치하(治下)의 생민의 안녕과 행복을 증진코자 하려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이 없다. 이에 정성스럽게 따르기에 적합한 바를 유시하는 까닭이다. 함부로 망상을 다하여 정무를 시행하는 것을 방해하는 자가 있으면 결단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충성스런 몸가짐으로 삼가 법을 지키는 어진 선비와 순한 백성에 있어서는 반드시 황화(皇化)의 혜택을 입어 그 자손 또한 영구히 은혜를 입을 것이니, 그대들은 삼가 새로운 정치의 큰 계책을 받들어 진정 어긋남이 없게 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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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경술국치)을 하면서 메이지 덴노에게 총독직을 임명받아 일본 육군대신을 겸직하여 초대 조선총독으로 격상 부임하여 조선을 지배하였다. 10월 1일에야 총독으로 취임하였는데, 총독 취임 하루 전날 이재명 의사를 사형시켰다.

총독이 되기 직전부터 자신의 통치를 반기지 않거나 반항하는 한국인들을 억압하러 부임 초기부터 무단통치 헌병의 경찰직무 통치를 실시하였다. '조선 주차 헌병 조례'(1910년 9월 12일자)'를 발표하여 육군 헌병을 증원하고 경찰 업무를 맡도록 조치했다. 육군 헌병에서 장교 30명, 하사관 600명, 상등졸 3천여 명을 충원받아 각 지역에 헌병대 분견소를 세우고 조선을 총칼로 억눌렀다.

총독이 된 그는 조선 일본의 속령 지역으로 지정하면서 '집회 취체령'을 공포하여 모든 사회 단체를 해산[10]시켰으며, 조선의 애국가 등을 불온 선동 금지곡으로 지정하였고 교육상에서 조선인들을 황국신민화하고자, 친일(親日) 성향 학교를 세웠다.

토지사업에서도 그는 조선 농민들의 농토(農土)의 상당수를 총독부 사유지로 지정하여 침탈하였고 동양척식주식회사 친일파, 매국노들에게 이를 매각하여 넘기기도 하였다. 이 탓에 조선의 지주와 농민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은 물론 빚더미까지 안았고, 농토를 강제로 빼앗겨서 농사도 못 짓는 수난을 겪어야만 했다.[11] 또한 조선 회사령을 실시하여 '산업보호'를 명목으로 회사들을 등록제가 아닌 허가제로 운영하였다.[12]

또한 식민 통치의 효율화를 위해 부군면 통폐합을 했다. 1911년, 데라우치는 조선의 남은 지식인들을 제거하기 위해 105인 사건을 일으켰다. 1911년 조선병합의 공로를 인정받아 백작위를 수여받았다.

2.3. 내각총리대신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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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 대신 취임 후

1916년, 야마가타 아리토모에게 찍힌 2차 오쿠마 시게노부 내각이 뇌물 사건으로 총사퇴하면서 원로들은 데라우치를 새로운 내각총리대신으로 낙점하였다. 이에 데라우치는 6년간의 조선 총독직에서 사임하고 10월, 일본 도쿄도로 건너가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으로 취임하여 거국일치 내각을 수립했다. 조선 총독 → 총리로 승진한 첫 사례. 여기에 원수 칭호를 받고 대장대신 외무대신까지 겸임했으니 말 그대로 권력의 정점에 올랐다. 이때 일본사회는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분위기가 발흥하면서 정당정치와 보통선거제를 강하게 요구하고 있었으나 데라우치는 연립내각 조각을 철저히 거부하고 미즈노 렌타로, 고다마 히데오 등 총독 시절의 인맥을 중심으로 거국일치 내각을 조각하였다. 하지만 데라우치도 막무가내만은 아니라서 하라 다카시 입헌정우회를 중용하여 정우회가 데라우치 내각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국외 정책에서는 전임 오쿠마가 하던 제1차 세계 대전을 이어받은 전시 내각으로서 독일과 전쟁을 이었고, 총리 재직 중에도 조선과 대만, 특히 조선의 식민지화에 박차를 가했다. 하세가와야 그의 부하였을 뿐이니. 중국에서 황제병에 빠져 있던 위안스카이가 사망하고 안휘군벌의 수장 돤치루이가 국무총리에 취임하여 대권을 잡자 그에게 니시하라 차관을 제공하여 중국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였으며 중국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계기로 38식 소총을 비롯하여 많은 무기와 참전차관을 제공하였다. 다만 그 대가로 중국의 의화단 사건 배상금 지불을 5년 유예하고 중국군이 톈진 독일, 오스트리아 조계지로 진주하는 것을 허용하는 한편 중국의 관세 인상을 인정했다. 이후 호법전쟁에도 개입하여 북양정부가 남방의 혁명세력을 진압하는 것을 돕는 등 중국에 대한 이권을 확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17년 블라디미르 레닌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러시아 적백내전의 혼란에 빠지자, 육군참모총장 우에하라 유사쿠, 참모차장 다나카 기이치, 외무대신 모토노 이치아키 등이 적극적으로 출병 개입을 주장했다. 그러나 하라 다카시, 마키노 노부아키,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모두 신중론을 주장하였고, 이에 데라우치도 사태를 관망하다가 1918년 들어서 우드로 윌슨 대통령으로부터 체코 군단의 구출을 이유로 공동출병 제의를 받은 후에야 병력을 파견하였다. 이것이 바로 시베리아 출병이다. 하지만 병력 7천 명만 파견하기로 한 것을 1만 2천 명으로, 다시 4만 명으로, 또 다시 7만 명으로 늘려버려서 중의원이 발칵 뒤집혔다. 나중에 후임인 하라가 이어받아 원만하게 매듭지었다.

1916년부터 이런 군인스러운 막장 체제를 2년 동안 줄곧 유지한 바람에 1918년에 이르러서는 전쟁으로 인플레가 나타나 경제 개판이었으며, 식량 분배에 차질이 나자 결국 그 유명한 쌀 소동으로 이어졌다. 데라우치 입장에선 좀 재수가 없었다. 당시 데라우치의 건강 상태는 심각하게 악화되었는데, 4월에 이미 야마가타 아리토모에게 사임을 요청했으나 반려되었다. 결국 엉망인 몸을 이끌어 계엄령을 선포하고 병력 10만 명을 동원하여 강경하게 진압하는 한편, 정부 소유의 백미와 외국에서 급히 구해온 을 시중에 저렴하게 풀고, 황실과 대기업으로부터 기부를 받아 빈민구제 활동을 하는 등 강온양면책으로 민심을 달래보려 했다. 하지만 야마가타조차도 "정당내각이 아니면 사태 수습이 안 된다."고 판단할 정도로 일본 사회의 혼란이 심각해서 결국 1918년 9월 29일에 데라우치가 사임하게 되면서 데라우치 내각은 붕괴되고 말았다.

데라우치 내각이 붕괴되면서 다수당 대표인 하라를 중심으로 한 실질적인 일본의 첫 정당내각인 입헌정우회 내각이 조직된다. 이 같은 정권 교체는 제1차 세계 대전의 결과로 형성된 전제군주정에 대한 민주주의 체제의 우위가 세계적 대세가 된 시대상 속에 과거 메이지 유신을 주도했던 번벌 세력의 정치적 후퇴와 함께 정당 세력이 부상하여 다이쇼 데모크라시로 이어지는 분기점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데라우치는 1년 뒤인 1919년에 사망했는데, 향년 67세였다.[13]

죽은 뒤 고향 야마구치현의 야마구치시에 묻혔다. 초라했던 그의 말년을 보여주듯 한 면에는 도로, 한 면에는 마을이 접한 작은 언덕에 그의 묘소가 있다. 그래도 네임드급 정치인이었기에 커다란 비석과 여러 석등으로 화려하게는 꾸민 편.

3. 기타

4. 대중매체에서

5. 관련 문서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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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효 등이 고종의 퇴위에 협조한 대신들을 암살하려다 처벌된 사건은 이완용이 고종 퇴위를 반대하던 대신들을 제거하기 위해 조작된 사건이라는 주장도 있음 }}}}}}}}}


[구자체] 일본 위키백과에 따르면 まさたけ가 아니라 まさたか라고 읽히는 경우도 있다고는 한다 [신자체] [3] 묘하게도 고종과 생몰년이 같다. [4] 야마구치현 가고시마현은 전통적인 보수 성향 지역으로 유명하다. 여기서 말하는 보수는 지금 현재의 기준으로 보수 우익 성향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당시 기준으로 보면 의미가 달라지는데, 에도 막부를 타도하고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것이 사츠마 번(가고시마)와 조슈 번(야마구치). 당시로서는 지금과 반대의 의미를 가졌다는 뜻.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육군 조슈 번 출신이 독점하고, 일본 해군은 사츠마번 출신들이 독차지했다. 데라우치도 조슈번 출신의 육군 파벌이다. (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 참조) 사실 처음에는 일본 육군 초대 원수를 사쓰마번의 정신적 지주인 사이고 다카모리가 차지하는 등 육군에서 사쓰마 출신의 지분이 상당히 높았으나, 세이난 전쟁 이후로 세이난 전쟁에서 정부군을 총지휘한 조슈번 출신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육군을 장악하고 사쓰마 출신들이 세이난 전쟁 전후로 육군을 떠나면서 조슈 출신이 육군을 주도하게 된다. [5] 일본의 유명 가수 우타다 히카루가 마사타케의 형의 증손녀다. 우타다 (氏)는 조슈 번 하급 무사 가문으로 현재 일본에 100명 정도만 있는 희귀한 성이다. [6] 하야시 다다스의 후임자가 없어 1개월 정도 역임하였다. [7] 초대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보좌한 부통감. (1849년 ~ 1910년) [8] 물러난 지 4달 만인 9월 13일에 죽어서 지병 사임설도 있고 경질이 죽음을 불렀다는 설도 있다. [9] 지금의 농림축산식품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10] 친일 단체인 일진회도 싸잡아 해산시켰다.(…) [11] 식민지 근대화론 학자들에 따르면 조선총독부가 사유화한 토지는 전체 토지의 2.6%에 불과했고 그나마도 조선의 소작농들에게 값싸게 매각하거나 불하했다고 하는데, 사실은 3%인 일본인 지주가 전체 농지의 50% 가량을 소유하는 전형적인 식민지식 착취형 지주제로 완성되었으며, 조선인들에게 도로 매각하거나 불하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12] 헌데 이것은 한참 뒤 등록제로 바뀌는데, 일본 내지의 회사들이 "조선 회사령 때문에 조선 진출이 힘들다."는 까닭이었다고. [13] 여담으로 이 해에 바로 3.1 운동이 일어났다. [14] 이 때의 어차가 한국 최초의 어차는 아니다. 이미 몇 년 전 고종의 칭경 예식을 위해 시범 용도로 왕실에 들여온 포드 A형 차량이 최초였는데, 생긴 게 지금과 많이 다르기도 하고 초기의 자동차인지라 진동이나 소음이 심해 고종도 당시엔 한두 번만 타고 그만두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프랑스영사관에서 쓰던 르노 자동차를 왕실에서 들여 운행하기도 했다. [15] 현행 재규어의 고급 브랜드로 다임러 AG와는 이름만 같을 뿐 연관은 없다. 2000년대 동그란 눈의 재규어 XJ 때만 해도 8기통 모델 중 다임러라는 최고급 에디션이 있었다. 당시엔 벤츠 S600 급은 되는 최고급 차량이었다고. [16] 현행 크라이슬러에게 인수된 브랜드. 지프 그랜드 체로키의 고급 스페셜 버전 중 하나도 이름이 오버랜드다. [17] 포드나 쉐보레 등은 현재는 그냥 그저 그런 대중형 수입차이지만, 이 당시 자동차가 귀할 시절에는 이마저도 조선 국민들에겐 그림의 떡이자 고급품이었다. [18] 비슷한 이유로 합병 직후 조선 전국의 문화재 현황을 조사해 사진을 찍고 구조를 조사해 <조선고적도보>를 편찬하였다. 이 <조선고적도보>의 흑백 유리건판 문화재 사진들은 지금까지 남은 가장 오래된 문화재 사진자료인 것이 많아서 필수 참고자료다. [19] 이후 다나카 기이치 내각에서 체신대신을 역임한다. [20] 상술한 유물 반출 금지 조치의 일환이었다. 조선도 일본 땅이니 자국 유물을 개인이 함부로 다뤄서는 안 된다는 논리. [21] 데라우치 마사타케, 가토 다카아키, 사토 에이사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