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에 지은
덕수궁에는 서양식 건물인 양관(洋館)이 여러 채 도입되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대한제국의 근대화를 상징하고 황제국으로서의 위용을 보여주기 위해 지은 서양식 궁전이 석조전이다. 동양의 전통 궁궐에서는 정전, 편전, 침전의 기능이 각각 구분되어 있던 것에 비해, 석조전은 서양의 주거 양식을 도입하여 그러한 기능을 하나의 궁전 내부로 통합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석조(石造)'는 '
돌[石]로 만들었으므로[造]' 붙은 이름으로, 전통적인 궁궐이 목조에 기초한 것에 대비되는 이름이다. 사실 석조전은 정식으로 부여된 전각의 명칭이 아니다. '
경복궁 근정전'과 같이 전각의 이름을 지을 때는 철학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석조전은 정전이나 침전의 일부가 아니며 위에 언급했듯 그 자체로 하나의 황궁이기 때문에 굳이 전각의 이름을 부여할 필요가 없었다.
건축 당시에는 '석조궁전(石造宮殿)', '석궁(石宮)', '석조전당(石造殿堂)' 등 다양하게 불렸으며, '석조전(石造殿)'은 나중에 이러한 통칭을 정리해 붙인 것이다.
링크. 그동안
나무를 주요 건축 자재로 썼던
한국인들에게
서양처럼
건물 전체를 돌로 지었다는 것이 아마 굉장한
문화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래서 '석조'는 한국이 서양식 건물을 짓는 사회가 된, 즉, 근대 사회로 접어들게 되었음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링크. 단, 2009년부터 진행한 복원 공사 도중 붉은색 벽돌을 쌓은 뒤 석재로 외관을 포장하여 건축했음을 확인했다. 즉, 이름처럼 완전히 돌로만 지은 건물은 아니라는 것이다. 대식당에 가면 불투명 유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공사 진행은 크게 세 단계로 나뉘었다. 1897년(
건양 2년) ~ 1901년(
광무 5년)에 설계 및 기초공사를, 고종의 즉위 40주년이 되는 1903년(광무 7년) ~ 1906년(광무 10년)에 구조공사, 마지막으로 1907년(광무 11년) ~ 1909년(
융희 3년)에 내부공사를 했다.
1903년부터
러일전쟁의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대한제국을 먹이로 둔 러시아와 일본 간의 전쟁이었다. 고종은 자신의 즉위 40주년을 명분삼아 세계 각국을 초청하여 대한제국의 근대화를 보여주기 위한 일환으로 경운궁 내에 석조전을 건축하였다.
<colbgcolor=#e8cb2d> 하딩이 제작한 모형. 중앙 계단 등을 빼고는 현재와 유사하다.
설계는
영국인 건축기사 존 레지날드 하딩(J. R. Harding)이 맡았다. 하딩은 석조 건물이 낯선
한국인들에게 공사에 앞서
나무로 1/10 정도 크기의
모형을 만들어 보여주었다. 1900년 5월 26일자
미국
잡지 《아메리칸 아키텍처 앤드 빌딩 뉴스(American Architecture and Building News)》에서 저 모형을 실었다.
기초공사는 1900년(
광무 4년)부터 시작했다.
한국인 건축기사 심의석[8]이 참여한 가운데,
일본인 오가와 요키치(小川 陽吉) 기사를 초빙하여 1901년에 마무리했다. 자재는
창의문 근처 돌산에서 나는
화강암을 활용했다.
1902년(
광무 6년)에서 1903년(광무 7년)에는
공사를 멈췄다. 오다 쇼고(小田 省吾)가 지은 《덕수궁사》에는 그 이유로 정변(政變)을 꼽았는데,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밝히지 않았다.[9] 이후 1903년에 공사를 다시 시작했다. 이 때
건축 주도권이 브라운에서
일본인 재정고문 메가타 타네타로(目賀田 種大郞)[10]에게 넘어갔고 공사도
일본 오쿠라도보쿠구미(大倉土木組)[B]에서 맡았다. 이시이 슈헤이(石井周平)를
감독으로 하고 두 일본인 기사를 두고 공사를 진행했으며 1905년(광무 9년)부터는
영국인 헨리 윌리엄 데이비슨(Henry William Davidson)이 합류하여 함께 작업했다.
내부 공사는 2년이 걸렸다. 설계는
영국인 로벨(Lovell)이 맡았다. 배관 및
난방 시설 설치는
영국의 크리털 회사(Critall & Co.)에서 담당했고, 내부
장식과
가구 등은 역시 같은 영국의 메이플 회사(Messers Maple & Co.)에서 맡았다.
그래서 처음 계획처럼
황궁으로 쓰지 못했다. 이태왕으로 강등당한
고종은 석조전이 불편하다며 거주하지 않았다. 단지 귀빈 접대 및 만찬을 행하는 정도로 사용했다.
<colbgcolor=#e8cb2d> 1918년 석조전 로비에 모인 황실 가족. 왼쪽부터 의민태자(영친왕), 순종, 고종, 순정효황후, 덕혜옹주
<colbgcolor=#e8cb2d> 1918년 촬영한 사진. 가운데 모자 벗은 사람이 고종, 왼쪽이 의민태자(영친왕), 오른쪽이 순종, 순종 옆이 의친왕
침실로 사용한 것은 이왕세자로 전락한
영친왕이었다.
일본에 볼모로 끌려간 그는 간간이 조선에 올 때마다 여기서 지냈다. 1922년에는 아내
이방자와
돌도 채 안된
아기였던 장남
이진과 함께 와서 머물렀는데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날 이진이 갑자기
구토를 하고
열이 오른 끝에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12]
<colbgcolor=#e8cb2d> 이왕가미술관으로 쓰이던 석조전
1919년
고종이
승하한 후 1933년에
일제가
덕수궁을
공원화하여 일반인에게 개방하면서 '이왕가미술관(李王家美術館)'으로 사용했다.[13] 그러면서 건물 내부와 앞 뜰도 많이 바꾸었다.
미술관이 된 뒤
일본
근대 미술품만 전시했는데 그 이유가 가관이다. 처음에는 조선 작품도 같이 전시하려 했으나 일본 미술가들이 "조선인의 작품을 한 공간에 같이 전시할 수 없다"며
반발했기 때문이었다.
<colbgcolor=#e8cb2d> 새 이왕가미술관 건물. 이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1936년에는 서남쪽에 새로운 이왕가미술관을 지어 1938년에 완공한 뒤 개관했다. 석조전은 근대일본미술진열관이라 했고 신관은 조선고대미술진열관이라 하여 조선 미술품을
전시했다. 이것이 이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으로, 흔히 석조전 서관으로 부른다.
<colbgcolor=#e8cb2d>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당시 중화전에서 바라 본 석조전. 가운데에 태극기가 있고 왼쪽에 성조기, 오른쪽에 소련 국기가 걸려있다.
8.15 광복 직후인 1945년 12월에는
임시정부 대환영 기념 잔치가 열렸고
# 1946년 3월에는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지을 그 유명한
미소공동위원회를 개최하면서
# 민간에 비공개되었다. 1947년 10월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이후,
덕수궁을 일반에 다시 개방했으나 석조전은 여전히 출입금지 구역이었다.
#
<colbgcolor=#e8cb2d> 석조전에서 회의하는 UN한국위원단
이후에도
UN한국위원단에서 여러 번 회의장으로 사용했으며
#
#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새
외무부 청사 후보로 오르기도 했다.
#
1950년에 일어난
6.25 전쟁으로
건물 대부분이 파괴를 입어 1954년 5월에
보수했다.
# 1955년부터 1972년까지는
국립 박물관으로, 1973년부터 1986년까지는
국립현대미술관으로, 그리고 1987년부터 2004년까지는 궁중유물전시관으로 사용했다.
문화재청에서 2004년 2월 6일 '덕수궁 석조전 동관'이란 이름으로
등록문화재 제80호로 지정했다. 그러나 덕수궁을 이미 사적 제124호로 관리하고 있어서 영역이 겹친다는 이유로 2008년 6월 23일 자로 지정 해제했다.
2005년 궁중유물전시관을
국립고궁박물관으로 개편한 뒤
경복궁으로 옮기면서 석조전은 비었다.[14] 이에 근대미술관으로 활용할 지 아니면 원래
황궁으로
복원할 지를 놓고
전문가들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결국 복원하기로 하여 2009년부터
공사를 개시했다.
<colbgcolor=#e8cb2d> 석조전 내부 복원 완료 내용을 다룬 2014년 10월 7일 자 YTN 뉴스
2014년 10월 7일에 복원 공사를 끝냈고 같은 해 10월 13일 '대한제국역사관(大韓帝國歷史館)'으로 개관하여 오늘에 이른다.
외부와 지층은 덕수궁 입장료만 내면 얼마든지 관람이 가능하다. 단 1, 2층의 내부를 관람하려면
덕수궁 홈페이지에서
예약한 뒤에 해설자의 인솔 하에 단체로 들어가 보는 것만 가능하다. 현장 예약은 65세 이상
어르신 및
외국인만 해당한다. 자세한 내용은
덕수궁 홈페이지에 접속하거나 02-751-0753 번호(석조전 안내데스크)로 문의하면 된다.
가운데에
지층만한 높이의
계단이 있고 양 옆에는 큰 좌대를 놓았다. 계단은 맨 밑에 반쯤 땅에 묻힌 단까지 합쳐 총 18단이다. 계단 위에는
현관이 있으며 좌, 우로
방과
베란다를 둔 모습이다.
<colbgcolor=#e8cb2d> 이오니아 양식인 기둥머리
<colbgcolor=#e8cb2d> 동측 현관과 현관의 열주
정면 현관과 현관의 열주
모든 기둥머리는 양 끝이 아래로 회오리 치는
이오니아
양식(Ionic order)이다. 건물 정면과 좌, 우면 가운데 앞에 시원하게 뻗은
기둥을 세우고 위에 지붕을 받친 모습으로
현관을 구성했다. 이런 현관을 포티코(portico)라고 한다. 포티코는 기둥 숫자에 따라 더 자세하게 나뉘는데, 정면 현관처럼 기둥이 6개인 경우를 헥사스타일(Hexastyle), 측면 현관처럼 4개인 건 트리스타일(tristyle)이라 한다. 석조전 포티코에 세운
기둥은 줄지어섰다(列)하여 열주(列柱)라고 하는데, 열주는 둥글지만 좌, 우 회랑의 기둥은 네모나게 각진 모습이라 차이가 있다.
#
<colbgcolor=#e8cb2d> 현관 1층의 기둥
현관 1층의 가장자리 바깥 기둥은 둥글다. 기둥의 3/4는 바깥으로 나와있지만 1/4는 벽 속에 있다. 가장자리 안쪽 기둥은 반대로 1/4가 나와있고 3/4가 벽 속에 있다.
출입문은 중앙
현관에 하나, 그리고 동, 서에 각각 1개씩 총 3개가 있다.
문 위엔 삼각형 모양 박공을 조각해 두었다.
<colbgcolor=#e8cb2d> 1층 베란다 창문과 창의 윗부분
2층 베란다 창문과 창의 윗부분
1층 베란다
창문은 위, 아래로 긴 모습이다. 창틀은 십(十)자로 만들었고 위에 삼각형 모양 박공을 단 뒤, 그 아래 양쪽에 돌 받침대를 놓았다. 창틀 상부는 아치형으로 만들고, 하부엔 두 직선 틀을 가운데 두고 양 옆에 작은 원형 틀을 각각 5개씩 둔 뒤 그 위에 대각선과 직선으로 무늬를 넣어 마치
부채처럼 보이게 했다. 2층 베란다 창문은 1층과 거의 같다. 그러나 창틀 위에 박공이 없고 단지 가로로 긴 석재 부재를 달았으며, 창문 윗부분이 깔끔한 사각형으로 되어있는 것이 다르다.
<colbgcolor=#e8cb2d> 기둥머리 위부터 순서대로 처마도리, 프리즈, 코니스 순이다.
기둥머리 위로 처마도리(architrove), 프리즈(frieze), 코니스(cornice)를 얹었다. 코니스와 프리즈가 만나는 부분에 있는 네모난 부분은 마치
치아처럼 생겨서 덴틸스(dentils)라고 부른다.
<colbgcolor=#e8cb2d> 페디먼트
코니스 위, 지붕 부분은 가운데
현관과 나머지 부분이 다르다. 중앙 현관 코니스 위에는 삼각형 모양 박공인 페디먼트(pediment)를 두었다. 본래 그리스 건축 양식의 페디먼트는
아르테미스 신전 항목 복원도에서 볼 수 있듯 건물 전체의
지붕으로 설치하는 게 대부분이었지만 신고전주의 양식에 와서는 건물 폭에 다 맞추지 않고 건물 중간 부분에만 돌출시키는 부분 장식 형태로 변했는데, 석조전 역시 건물 폭이 워낙 넓기 때문에 중앙 현관을 돌출 시킨 뒤 그 위에만 설치하였다.
# 페디먼트에는
대한제국 황실
문장인
오얏꽃과 그 주변을 두르고 있는 오얏꽃 잎을 장식했다.
현관부를 제외한 나머지 코니스 위에는 중간 부위가
호리병처럼 생긴
난간을 두르고 일정한 간격으로 좌대를 세운 뒤 그 위에 세로로
무늬를 낸
항아리 모양
장식을 올렸다. 이런 장식을 피니얼(finial)이라고 한다.
<colbgcolor=#e8cb2d> 기반부에서 보이는 러스티케이션 양식
기반층과
건물 뒷면
돌 표면을 굵고 거칠게 처리하여 재질감을 뚜렷하게 나타내었다. 이런 방식을 러스티케이션(Rustication)이라 한다.
#
<colbgcolor=#e8cb2d> 베란다. 왼쪽은 1층, 오른쪽은 2층이다.
뒷면을 제외하고는 동, 서, 남쪽으로
베란다가 있다.
유럽에서는 찾아보기 힘드나
아시아권에 지어진
서양식
건축에서는 흔히 볼 수 있다.
동남아시아에
식민지를 갖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가 덥고 습한
날씨에 적응하기 위해서
바람이 잘 통하는 베란다를 건축 양식에 접목시킨 것이었다. 사실
한국 날씨는 동남아시아와 다르나 하딩이 아시아권에서 널리 쓰이던 양식대로 설계한 것이다.
#다만 한국도 여름 한정으론 필요하다
일제강점기였던 1925년 5월에
도둑이 들어
비단 10여필을 훔쳐갔다.
고종의 유물이었다고 하며 당시 돈으로 500원 어치[16]였다고 한다.
# 약 한 달 후 창덕궁경찰서[17]에서 범인을 잡았는데 알고보니 모 남작의 사위 윤형구로,
모르핀[18]에 중독되어 범행을 저지른 것이었다.
# 이후에도 공범자들을 색출하여 잡았는데 수괴는 중국인 왕림탄이며 궁전의 용품을 훔쳐서 비싸게 팔려던 목적이었다고 한다.
#
국내에
신고전주의
양식을 부분적으로 채택한 비슷한 건물들이 몇 채 있다. 석조전을
모티브로 한 건물들도 있지만,
백악관 등 다른 건물들을
오마주하여 지은 것도 있다. 공교롭게 대부분
학교 건물들인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경희대학교 본관과
한양대학교 구본관[20]을 비롯하여
경북대학교/대구캠퍼스 본관
#과
계명대학교 본관 및
광주동신고등학교 본관을 들 수 있다. 다만 현대적인 건축물의 전면에 신고전주의 양식에서 가장 유명한 고대 그리스•로마 신전의 파사드만을 가져와 붙이는 형태가 많아서 대체로 건물의 모든 부분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며, 비례나 비율 또한 어색한 경우가 많다.
2020년 3월
SK텔레콤이 덕수궁관리소와 함께 덕수궁을 3차원 입체 표현한
어플 'AR(증강현실) 덕수궁'을 시범운영한다고 24일 밝혔다. 그 중 석조전과
덕수궁 대한문,
중화전과
석어당 등 네 곳을, AR로 재현한
판다 ·
고양이 ·
웰시코기 등과 인증샷을 찍을 수 있게 만든 AR 포토존으로 지정했다. 자세한 내용은
기사 참조.
2015년부터 매년 3월부터 11월까지 마지막 주 수요일
문화가 있는 날마다 중앙홀에서 음악회가 열린다. 시간은 오후 7시부터 8시까지이다. 무료이지만 반드시
예약을 해야 한다. 자세한 것은
덕수궁 홈페이지나 02-751-0740로 전화하면 된다.
《
조선중앙일보》 1933년 12월 15일자 기사에 따르면 당시
영국총영사관에서 이왕직[23]에 '석조전 2층에서 자신들의 공사관이 내려다보인다'며 항의했다고 한다. 그 무렵
일제가
덕수궁을 공원으로 개방하여 일반인들이 자연스레 석조전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석조전 뒤편과 영국총영사관은 바로 마주보는 위치였기 때문에 일반인들에게 자신들의 외교공관이 노출되는 것에 불만을 가진 것이다. 그래서였는지는 몰라도
주한영국대사관(구 영국총영사관)과 덕수궁 사이에는 나무가 대량으로 심어져있어 덕수궁에서 영국대사관을 바로보기 힘들다.
#
영화 〈
덕혜옹주〉
포스터
배경이었다. 극에서는 딱 한 번만 나온다. 바로
위에 나온 사진을 찍는 모습을 재현한 장면이다.
포스터는 석조전에서 찍었지만
영화에 나온
장면은 남양주종합촬영소에 재현한 세트장에서 촬영했다. 제작진들이 여러 해에 걸쳐
고증한 끝에 실제와 상당히 비슷하게 재현하여 고증작업에 도움을 준
문화재청
학예사들마저 놀랐다는 후문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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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8cb2d> 〈차이나는 클라스〉 34회 예고편
<colbgcolor=#e8cb2d> 〈차이나는 클라스〉 152회에 나온 석조전
JTBC에서 방송한 〈
차이나는 클라스〉 34회(강연자:
유홍준)[25]와 152회(강연자: 임석재[26])[27]에 등장했다. 차이가 있다면 34회에서는 역사적 관점에서, 152회에서는 건축적 관점에서 다루었다는 것.
*
}}} ||
<colbgcolor=#e8cb2d> 석조전 입구에서 촬영한 〈기쁜 우리 젊은 날〉의 한 장면
영화 〈
기쁜 우리 젊은 날〉에서
안성기가
황신혜보고 나와달라고 해서 둘이 만난 장소로 나왔다. 1980년대의 석조전과 주변부의 모습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