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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이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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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돈덕전 | ┗ | ━ | 생양문 | ━ | ━ | ━ | ━ | ━ | ━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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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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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조당 명례궁터 |
석어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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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명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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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전 서관 |
정원 | 중화전 | 덕홍전 | 함녕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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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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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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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교 | 대한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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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 창덕궁 · 창경궁 · 덕수궁 · 경희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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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적 제124호 덕수궁 | ||
<colbgcolor=#e3ba62> 덕수궁 조원문 德壽宮 朝元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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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 정동 5-1) | |
건축시기 | 1902년 추정 (창건) / 1919년 이후 (철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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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3ba62> 문화재청에서 3D로 재현한 덕수궁 조원문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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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덕수궁의 중문이었다. 정문인 대한문을 지나 금천교를 건너 정전 중화전의 정문인 중화문으로 가는 길에 있었다. 현재는 없다.2. 역사
원래 경운궁(덕수궁의 원래 이름)은 임진왜란 이후 기존의 궁궐[1]이 모두 불타 왕이 머물 곳이 없어 월산대군[2]의 사저 및 주변의 사들인 집들을 이용한 임시 행궁이었다. 더군다나 인조 이후에는 선조가 머물고 인조가 즉위한 즉조당 및 그 부속 전각을 제외한 모든 건물들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어 사실상 궁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그러다 1890년대 후반 고종이 이 곳으로 이어[3]하면서 본격적인 궁궐의 모습을 갖추었다.지금과 달리 처음 고종이 머물 때의 경운궁 정문은 인화문(仁化門)이었고 중문은 돈례문(敦禮門)이었다. 인화문부터 당시 정전으로 쓰던 즉조당은 한 축으로 이어져있었고 그 사이에 돈례문이 있었다. 그러나 즉조당은 원래 정전으로 지은 게 아니고, 선조 시절부터 사용하던 전각, 즉 원래 궁궐 건물로 지은 게 아닌 일반 종친 집의 별당으로 지은 것이라서 규모가 굉장히 작았다. 그래서 황궁에 걸맞은 새로운 정전을 짓기로 했으니 이것이 바로 중화전이다.
하지만 기존 경운궁 부지는 너무 좁아서 정전을 지을 마땅한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남쪽 담장을 확장했다. 이 때 인화문을 철거했고 정문을 동문인 대안문으로 바꾸었다. 금천교도 대안문 앞으로 옮기고 돈례문도 헐은 뒤, 그 자리에 중화전의 조정 마당을 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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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3ba62> 1904년 경운궁 대화재 당시 살아남은 조원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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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3ba62> 광명문과 조원문. 빨간 테두리 안이 조원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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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3ba62> 현재 조원문 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