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의 조선 후기에 지어진 행궁인 명례궁에 대한 내용은 무풍 명례궁 문서 참고하십시오.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5 |
|
|||||||||||||||||||
|
|
|
||||||||||||||||||
|
|
|
||||||||||||||||||
|
|
|
|
양이재 |
|
|||||||||||||||
|
|
|
||||||||||||||||||
┏ | ━ | ┓ | ||||||||||||||||||
┃ | 돈덕전 | ┗ | ━ | 생양문 | ━ | ━ | ━ | ━ | ━ | ━ | ━ | ━ | ┓ | |||||||
|
┃ |
|
|
|
정관헌 |
|
|
|
||||||||||||
|
|
|
┃ | 석조전 | 준명당 |
즉조당 명례궁터 |
석어당 |
|
|
┃ | ||||||||||
중명전 |
|
석조전 서관 |
정원 | 중화전 | 덕홍전 | 함녕전 |
|
|
|
|
|
┃ | ||||||||
|
ㅣ |
|
광명문 |
|
|
|
||||||||||||||
|
|
|
중화문 |
|
|
금천교 | 대한문 | |||||||||||||
┗ | ━ |
|
━ | ━ | ㅡ |
|
━ | ━ | ━ | ━ | ━ | ━ | ┛ | |||||||
경복궁 · 창덕궁 · 창경궁 · 덕수궁 · 경희궁 |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word-break:keep-all"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한성부 | ||||
경모궁 | 계동궁 | 남별궁 | 누동궁 | 도정궁 | |
명례궁 | 사동궁 | 선희궁 | 수진궁 | 순화궁 | |
안동별궁 | 어의궁 | 연희궁 | 영수궁 | 영희전 | |
용동궁 | 운현궁 | 이현궁 | 인경궁 | 인덕궁 | |
자수궁 | 죽동궁 | 창성궁 | 창의궁 | 칠궁 | |
태화궁 | |||||
경기도 | |||||
강화행궁 | 개성행궁 | 경덕궁 | 남한산성 행궁 | 낙생행궁 | |
낙천이궁 | 노량행궁 | 목청전 | 수원행궁 | 수창궁 | |
시흥행궁 | 안산행궁 | 안양행궁 | 양주행궁 | 용흥궁 | |
월미행궁 | 이천행궁 | 이태조 행궁 | 진위행궁 | 파주행궁 | |
풍덕행궁 | 풍양궁 | 포천이궁 | 화성행궁 | ||
충청도 | |||||
노은리 행궁 | 목천행궁 | 보은행궁 | 신도안 대궐 | 온양행궁 | |
전의행궁 | 직산행궁 | 초정행궁 | 천안행궁 | ||
전라도 | |||||
격포행궁 | 경기전 | 무풍 명례궁 | 전주행궁 | ||
경상도 | |||||
집경전 | |||||
평안도 | |||||
영변행궁 | 영숭전 | 영유행궁 | 의주행궁 | 평양행궁 | |
풍경궁 | |||||
황해도 | |||||
배천행궁 | 평산행궁 | 해주행궁 | |||
강원도 | |||||
고성행궁 | 분수령 행궁 | 상원사 행궁 | 춘천이궁 | ||
함경도 | |||||
영흥본궁 | 함흥본궁 | ||||
행정구역은 조선시대 당시 기준 | }}}}}}}}} |
|
<colbgcolor=#e3ba62> 《신축진찬의궤》에 나타난 월산대군의 저택시절의 명례궁 모습. 오른쪽 빨강색 원 안의 건물이 명례궁의 정전이었던 즉조당이다.[1] |
[clearfix]
1. 개요
明禮宮조선 중기의 행궁이자 월산대군의 저택. 임진왜란 이후 왕실 소용의 내탕을 마련하고 관리했던 곳이었다.
현재 덕수궁 영역의 일부에 있었다. 조선시대 당시 행정 구역은 한성부(漢城府) 남서(南署) 명례방(明禮坊)이었다.
2. 변천
명례궁이 있었던 자리는 원래 1469년( 예종 1년) 남이의 역모사건에 연루되었던 조영달(趙穎達)의 집 터였다. 조영달의 집을 몰수했다가 1470년( 성종 1년) 세종의 막내 왕자였던 영응대군의 부인 송씨(宋氏)에게 하사했다. 1년 뒤 송씨가 이 집을 다시 왕실에 바치자 연경궁으로 이름짓고 왕실의 별궁으로 삼았다.[2]1472년(성종 3년)에는 의경세자의 사우인 의묘를 연경궁 후원에 세우기로 했다. 제사를 맡은 의경세자의 장남인 월산대군은 이곳을 하사 받았고, 이후 왕자의 저택이면서 사묘가 있는 제사궁이 되었다. 이후 1475년 의묘의 위판(位版)을 경복궁 내 연은전(延恩殿)에 옮겨 모시면서 연경궁은 월산대군의 저택으로만 기능했다.
1486년(성종 17)에는 잠시 옹주의 저택으로 하사되었다가, 1593년(선조 26) 10월 임진왜란으로 한양 내 모든 궁궐이 소실되자 이곳을 행궁으로 사용했다. 정릉동 행궁으로 불리던 이곳은 1611년(광해군 3) 10월에 경운궁이라는 궁호를 받게 되면서 정식 궁궐로 승격되었다. # 그러나 광해군의 창덕궁 이어 이후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고, 인조반정 이후에는 행궁 대부분의 건물과 토지를 원래 소유자에게 돌려주어 더 이상 행궁의 역할과 기능을 하지 않았다.
이곳에 왕실 소용의 내탕을 마련하고 관리하는 명례궁이 설치된 것은 임진왜란 직후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중 극심한 재정난 속에서 선조가 23명의 왕자와 옹주에게 어전(漁箭)·염분(鹽盆)·시지(柴地) 등을 임시로 변통해 나누어 주었고, 뒤에 이 선례에 따라 궁방전(宮房田)을 나누어 주었기 때문이다.
명례궁에 관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인조의 즉위기였던 1623년 1월 11일의 기사이다. 이후 고종 연간까지 꾸준히 자전(慈殿, 인조 연간), 중전(中殿, 현종 연간), 대비전(大妃殿, 숙종 연간),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 숙종 연간), 양자전(兩慈殿, 숙종 연간), 동궁(東宮, 영·정조 연간)들의 내탕 마련과 궁가에서 발생한 문제들에 관여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1897년( 광무 원년) 고종이 대한제국의 법궁으로 사용할 경운궁을 확대 영건하면서 기능이 축소되었다. 하지만 이후로도 명례궁의 건물들은 잘 남아있었다. 그러나 덕수궁 대화재로 모조리 사라져 남아있지 않다. 그리고 1907년( 융희 원년) 통감부의 황실 재산 정리 과정에서 명례궁 제도가 완전히 폐지되어 현재 명례궁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현재는 조선 초기와 중기의 명례궁을 연구한 자료를 통해서 명례궁을 찾아볼 수 있다.